정의기억연대가 1435차 온라인 수요집회를 열고 새로 뽑히는 국회의원들이 여성인권평화재단을 설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안을 속히 통과시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국회의원 총선거날인 15일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열린 수요 집회에서 정의기억연대는 “우리가 30년 동안 거리에서 외치고 많은 국민이 함께했던 간절함을 담아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법안이 통과되고 시행되는 국회가 되길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새로운 국회의원은 할머니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진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근거한 해결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며 “여기 모인 우리는 그들이 진정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하도록 똑똑히 지켜볼 것이며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더욱 큰 목소리로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인권평화재단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업과 연구를 지속하고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기관으로 20대 국회에서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한경희 사무총장은 “여성인권평화재단의 설립 근거 기반을 갖출 수 있는 뜻 있는 국회의원들을 20대 국회에서 (기대했는데) 논의조차 못했다”며 “우리가 30년동안 외치고 많은 국민들이 함께했던 간절함을 담아 법안이 통과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에 한발짝 나갈 수 있는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 총장은 이날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인 자헤랑 할머니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혜랑 할머니는 12살에 직물공장 공장장한테 끌려가 일본 군대 위안소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자헤랑 할머니는 이후 곳곳에서 증언하고 위안부 피해문제를 알리다가 지난 11일 오전 9시에 소천했다.
수요집회에는 만 18세로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청소년들의 발언문을 정의기억연대 관계자가 대신 읽으며 투표를 독려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올바른 지도자를 뽑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올바른 지도자를 뽑아야 하며 할머니들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지난 지방선거까지도 투표권을 행사한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투표 의지는 있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투표장에 가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4일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고 13일에 퇴원했으나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우표 발행을 철회한 우정사업본부의 계획에 반발해 소송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유진현)는 1일 박정희대통령생가보존회가 우정사업본부를 상대로 낸 ‘기념우표발행결정 철회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의 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경우 본안 판단 없이 끝내는 것을 말한다. 본안을 판단한 후 인용 또는 기각 결정을 내리는 것과는 다르다.
재판부는 “우표의 발행은 우정사업본부가 고유의 권한으로 결정하는 것”이라며 “제3자의 발행 신청은 우표발행 계획을 수립하는 데 있어 참고하기 위한 것일 뿐, 신청인에게는 기념우표 발행을 요구할 수 있는 법률상 권리가 없다”고 설명했다.
구미시는 2016년 4월 우정사업본부에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돌 기념우표’ 발행을 신청했다. 이에 우정사업본부는 같은 해 5월 내·외부 인사로 구성된 우표발행심의위원회를 열고 위원 9명의 만장일치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 우상화’ 논란으로 비판이 거세지자 재심의를 결정했다. 이후 재심의에서 격론을 벌이다가 표결에 부쳐 철회 8표, 발행 3표, 기권 1표로 기념우표 발행 결정을 철회했다. 보존회 측은 “정당한 이유 없이 우표 발행 결정을 철회했다”며 소송을 냈다.
19세기 조선침략 이른바 ‘정한론’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를 일본의 발전을 이끈 영웅으로만 표현됩니다.
[오우카/ 일본 시민단체] “침략전쟁을 추진하고 협력한 사람들입니다. 그럼 사람들을 도덕 교과서로 롤모델로 하는 것은 안 됩니다.”
다른 교과서들도 ‘요시다 쇼인’이나 ‘사카모토 료마’ 같은 정신적 지도자들을 다뤘는데 조선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 등이 이들의 영향을 받은 후계자들입니다.
특히 2차 대전에 대해서는 원자폭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을 언급하며 자신들을 피해자로 묘사했습니다.
반면 위안부나 난징학살 등 일본이 주변나라에 끼친 범죄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규수/히토츠바시대학 교수] “침략자의 모습은 다 상실 돼버리고 피해자 의식만이 남아 있는 그것도 역사적 왜곡의 일종이라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출판사 측은 조선 침략을 미화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일본 도덕 교과서 출판사 관계자] “‘사이고 다카모리’가 정한론을 주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맞습니다. 하지만, 교과서에서는 그런 내용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내년 검정을 앞둔 중학교 교과서 파일럿판에는 침략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을 전쟁영웅으로 묘사하는 등 군국주의적 색채가 더 강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일본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원우/동북아 역사재단 교수] “침략론자가 평화론자로 학생들에게 잘못 인식 되어질 수 있는, 아베 정권이 의도하는 헌법의 개정 그리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자는….”
교과서를 검정한 일본 문무 과학성은 학습 지도요령에 따라 각 출판사가 작성했을 뿐 정부차원에서 요구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 도덕 교과서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최종 보급된 교과서를 검토한 뒤 대응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2월 1일 <주간경향> 취재팀을 만난 원용범 할아버지가 우이동 계곡에서 자신의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주 선생 가족의 학살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우이동서…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최소 8구 이상 매립 확인돼
서울지역에서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가 최초로 확인됐다. 그동안 한강 이남 지역에서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이 확인되고 집단매장지 발굴이 이뤄졌지만 서울지역 존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희생자로 유력한 일가족의 신상에 관련한 증언도 나왔다. 행정안전부 등은 조사가 마무리되고 유해 안치작업이 끝나는 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사실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에 확인된 민간인 학살 매장지는 서울 우이동 우이동신설선 북한산우이역 인근 등산로 입구다. 이 지역의 집단매장 소문은 간간이 있었다.(박스 참조) 확인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지난해 11월 16일, 하천 노후옹벽 정비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옹벽 패널을 빼니 옆 흙에 묻혀 있던 사람 뼈가 우연히 발견됐다. 공사인부들이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이창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조직발전특별위원장의 말이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시신상태 등을 검토해보니 ‘최근 사건이 아니라 한국전쟁 때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조사 나왔다.”
국방부 감식단의 육안감식 결과 수습된 유해는 최소 6명이고, 아직 현장에서 발굴·수습되지 않은 유해도 최소 2구 이상으로 판단됐다. 총 8구 이상의 존재가 최초 확인된 것이다. 유해의 주인공은 군인이 아니었다. 6세에서 60세까지 연령도 다양했고,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도 나왔다. 유류품에서도 은비녀, 틀니 등 군인과 무관한 물건들이 나왔다.
■ 비녀, 틀니… 학살 민간인 유해로 결론
<주간경향>이 단독으로 입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시신들 중 일부는 철사로 손목부위를 결박한 상태로 누워 있었고, 매장 방향과 자세가 비정형적이며, 허리부분에 고무줄을 착용한 유해가 다수 확인됐다. 고무신 착용 유해가 다수였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현장에서는 틀니나 은비녀 같은 ‘특이 유품’ 이외에 탄피와 탄두도 발견됐는데, M1·칼빈·45구경 권총 등이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아군 탄약류만 출토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번에 발견된 유해들은 종전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특이한 부분은 이 유해들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도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에 금무하던 음악교사 가족이라는 증언이다. 이 증언을 내놓은 이는 우이동 토박이로, 현재도 별장관리인으로 우이동에 거주하는 원용범씨(83)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원씨는 학살사건이 벌어질 당시의 ‘목격담’을 증언했다. “9·28 서울 수복이 된 뒤 10월 어느 날이었다. 한옥에 숨어서 먼발치에서 봤다. 지금은 경전철을 지으면서 축대를 쌓아 개울이 깊어졌는데, 당시는 얕은 개울이었고 개울 옆에 고운 모래가 쌓인 곳이었다. 군인 복장의 사람들이 트럭에서 일가족을 끌고 내려와 총으로 쐈다. 어른이 죽어 푹 꺼꾸러지니 아이들이 방방 뛰었는데 그 아이들까지 죽여버렸다.”
원씨는 학살된 가족이 한국전쟁 전 자신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 가족이라고 했다. 당초 국방부 등의 증언 청취과정에서는 교사의 성씨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1월 말 <주간경향>의 탐문과정에서는 “붉은 주(朱)인지 두루 주(周)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주씨 성을 가진 교사였으며,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해 우이분교 교사로 있던 분”이라며 “바이올린을 잘 켰으며 학교 다닐 때 ‘나의 살던 고향은’ ‘반달’ 등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것이 기억난다”며 더 구체적인 기억을 내놨다. 주 교사는 골짜기 위쪽 일본 적산가옥에 장모와 처, 그리고 6∼7살가량의 남자아이들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처형당하는 걸 먼발치에서 봐서 처음에는 주씨 가족인 줄 몰랐다. 트럭 뒤칸에 실려 가족들이 끌려왔으니 다른 데 있다가 잡혀온 것은 틀림없었다. 처형 뒤 시신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당시는 몰랐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 교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나, 일단 북이 싫어서 내려온 사람인데 자의적으로 좌익활동을 했겠는가. 설령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했더라도 어린아이들, 그리고 장모는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였던 건지….”
■ “월남 음악교사 가족이다” 증언
이번에 발굴된 유해들은 주 교사 가족일까. 실제 <주간경향> 취재팀과 동행한 원씨가 지목한 장소는 하천과 작은 개울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번에 시신이 발굴된 장소에서 약 25m 떨어진 장소다. “원씨가 증언한 주 교사 가족과 별도로 또 다른 학살자 가족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창수 위원장의 말이다. 학살자 매몰의 일반적인 패턴은 보통 10여명의 ‘부역자’들을 한 구덩이에 묻고, 바로 인근에 또 구덩이를 파서 그렇게 매몰하는 식인데, 실제 이번 매몰지가 공사 중 우연히 발굴됐으므로 바로 인근에 또 다른 매장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날 원씨와 동네 노인들은 또 다른 학살 매몰 장소도 증언했다. 발굴 현장에서 약 100m 떨어진 장소다. “당시 계곡을 중심으로 웃골과 아랫골로 나뉘었는데, 아랫골 쪽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죽여 묻었다. 한참 지나고 번동에 살던 유가족들이 수소문해서 유해를 찾으러 왔었는데, 총 여섯 구의 시신을 파낼 때까지 가족 시신이 안 나오다가 맨밑의 일곱 번째에서 가족을 찾아 수습해 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처형당한 것이다. 끄집어낸 여섯 구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구덩이에 다시 묻었을 것이다.” 원씨는 시신 매장 장소를 정확히 지적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1950∼70년대에 공사용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축대를 쌓고 성토한 구간이었다. 앞의 유해발굴지와 다르게 이곳은 현재는 작고한 두 사람 소유의 땅이었고, 원씨네 가족은 그 자리 인근에서 소작해 감자를 키웠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굴된 시신들을 학살한 이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씨는 주씨 가족을 죽인 사람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와 탄두를 보면 통상적으로 M1은 군인이, 칼빈은 경찰이, 45구경 권총은 장교가 사용하던 것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당시 대통령령으로 만들어진 ‘비상사태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것이 소위 부역자 처벌의 근거였다. 1952년 위헌 판결을 받을 때까지 대통령령에 근거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검거와 체포·학살이 벌어졌다.” 진실화해조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김상숙 단국대 강사의 말이다. 김 전 조사관에 따르면 ‘부역자’나 ‘보도연맹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는 우익청년단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치안대가 주도했다. 그는 “당시 치안대 사무실이 보통 경찰서나 국민학교 교실, 양곡창고에 있었는데 여기에 연행해 구금·조사하다가 경찰이 인솔해 국군이 사살하는 것이 통상적인 패턴”이라며 “이번 우이동 사건의 경우 유해에 골절이 다수 발굴되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국방부 감식보고서를 보면 유골들은 대퇴골(다리뼈), 두개골, 상완골(어깨뼈)이 골절되어 있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사망 무렵 골절이 관찰”이라고 적혀 있다. 척추부위에 탄두가 박힌 유해도 식별되었다. 김 전 조사관은 “다른 부역혐의자 학살지의 경우를 보면 총알을 아끼기 위해 때려 죽이거나, 부역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해놓고 굴비처럼 묶어 앞의 사람에게 총을 쏴 줄줄이 꼬꾸라지면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해감식을 맡고 있는 박선주 전 충북대 명예교수는 “골절이 살아있을 때 맞아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사후에 위에 흙 등이 쌓이면서 압력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약품처리가 끝나면 법의학적으로 엄밀히 검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우이동 민간인 학살자 집단매장지에서 지난 1월 5일 희생자 원혼을 기리는 복토 추모제가 약식으로 열렸다. 발견 현장에는 아직도 미수습 유골(사진)이 남아있다. / 법인권사회연구소 남인우 연구위원 제공
■ 누가 이들을 학살했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동안 서울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자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한국전 개전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경우 대부분 한강 남쪽에서 보고·발굴된다.(표 참조) 서울시의 경우 북의 기습남침으로 점령돼 그대로 북한 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 벌어진 부역자 처벌 및 처형은 다르다. 상당수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갔지만 점령기간 중 피난을 못가고 남아 어쩔 수 없이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나 연행조사를 받았고, 그들 중 얼마나 처형되었는지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화 개발로 원형보존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민간사유지에서 건물을 올리려고 땅을 파면 유골이 발굴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그냥 묻어버리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신을 발굴하고 수습하려면 땅주인과 협상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인 점도 일조한다. 발굴지 대부분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도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은 오지이거나, 개발이 안된 계곡들이었다. 여기에 농촌의 경우 보통 집성촌으로 그 지역 토박이 노인들이 생존해 증언할 사람이 있는 데 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익명의 공간인 것도 일조한다. 김 전 조사관은 “과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보접수를 받을 때도 신고된 건수도 많지 않았고 서울지역 확인은 엄두도 못냈다”며 “서대문형무소 뒤쪽 일대, 한강변이나 서울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 강나루터 등이 학살매장지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이번 우이동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우이동 매장지의 경우,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유골들과 유해는 ‘황갈색 가는 모래층’에서 출토되었고, 그 위에는 1차와 2차에 걸쳐 생활쓰레기로 성토돼 있었다. 사살된 시신을 따로 묻은 것이 아니라 위로 흙을 덮어둔 채로 방치돼, 이후 유입된 계곡산장 등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발굴된 6구와 유해개체 수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 유해감식단이 청취한 구술증언과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주 교사 가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전부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보존조치를 취한 것은 관련해 법적 권한이나 발굴예산 같은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차제에 지난 2005년 한시적 기구로 만들어 2010년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법을 개정해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을 국가가 책임을 지고 계속 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 행안위에 여러 진실화해위원회법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지만, 법이 통과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창수 특별위원장은 “이념을 놓고 말하게 되면 학살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며 “이제는 이념이 아닌 인권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는 국가가 과거의 불행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 학살당한 주 교사 가족, 신원 확인할 수 있을까
‘우이동 그린파크 계곡 학살’에 대한 증언이 없지 않다. 지난 2012년, KBS는 6·25전쟁을 다룬 특별기획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다큐 7부 ‘전쟁의 그늘(상)’편에 출연한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차승현씨는 이렇게 말한다. “국군이 진주해가지고 그 다음엔 경찰들이… 부역자라고 그랬지. 빨갱이 하던 사람들을 불러다가 때리고… 지금의 우이동 그린파크 옆에 가면 골짜기가 있어요. 거기다가 트럭으로 실어다가 죽이고… 그런 비극이 있었죠.” 차씨는 이번에 <주간경향>이 접촉한 우이동 거주자들과 함께 유력한 증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시 서울 거주’ 이외에 다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차씨는 우이동 학살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의문은 의외의 방향에서 풀렸다.
‘혹시 6년 전 증언한 차승현씨를 아느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원용범씨는 “우이동 계곡에 올라가면 ‘○○집’이라는 음식점이 나오는데 거기 주인이었다”고 말했다. 방송에 출연해 증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원씨에 따르면 차씨는 암으로 오래 투병하다가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망했다.
주 교사 가족 학살사건을 증언해줄 다른 사람은 없을까.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원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일단 원씨와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창들을 문의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현재의 153번 종점 자리에 직사각형 기와집이 있었는데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였다. 거기서 4학년 과정까지 운영되고 5학년부터는 좀 더 떨어져 있는 숭인국민학교를 다녔다. 주 교사는 분교 교사였다. 원씨는 말한다. “장인 어른은 안 계시고, 장모를 모시고 살던 것이 기억난다. 부인은 키가 자그마한데 참 예뻤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들도 귀여웠고…. 세상에, 그 아들들까지 죽일 수 있느냐. 그 어린 아이들이 뭐를 안다고.”
주 교사의 인적사항을 학교 근무 교사명단을 통해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주간경향>의 확인 요청에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은 “일단 우이초등학교 교사 근무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1954년부터인데, 그 이전 기록은 멸실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남아있는 기록에도 주씨 성을 가진 교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원씨를 만나 주 교사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원씨는 주 교사 가족이 살던 일본 적산가옥 위치를 알고 있었다. 현재 이 가옥은 헐려 터만 남아있다. 원씨의 기억에 따르면 1950년대에 집은 헐렸고, 그 뒤 절이 자리하다가 1962년께에 역시 헐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폐쇄등기부등본이나 호적 등에서 확인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앞으로 추가취재가 필요한 부분이다.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한일 시민단체들 도쿄서 기자회견…”日정부, 유골반환 성의보여라”
고향 못간 조선인 전몰자 최소 2만2천명…日차별·韓무관심에 유골반환 ‘난항’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남쪽 오키나와(沖繩)현에는 일제 강점기 말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징병 혹은 징용을 당해 끌려왔다가 미군과 제국주의 일본군 사이의 격전이 펼쳐지던 전장에서 숨졌다.
이렇게 억울하게 타향에서 숨을 거둔 조선인들은 넋이라도 위로를 받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여전히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오키나와 뿐 아니다. 남태평양에서, 동남아시아의 어느 섬에서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은 최소 2만2천구로 추정된다.
▲일제 강제동원을 위한 ‘징병적령자기념촬영’
(서울=연합뉴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강제동원 피해자 김갑배씨로부터 기증받은 군인동원 증빙사진. 사진 아랫부분에 ‘징병적령자기념촬영’이라는 설명과 1944년(쇼와<昭和> 19년) 5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사진 아래 적혀 있다. 2015.9.13 <<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제공 >>” [email protected]
타국에 묻힌 채 이름없는 유골로 남아있는 이들을 조국과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기 위한 노력이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차별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와 민족문제연구소,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는 8일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2차대전 당시 전몰자의 유골을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해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 작업을 해 유골을 유족에게 인도하고 있지만, 전쟁 중 자국민으로 간주했던 조선인은 그 대상에서 뺀 것이다.
이들 단체가 일본 정부에 한국인 전사자 유골을 찾도록 나서라고 계속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지만, 이후 사태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 정부가 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계속 한국인 유골을 수집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가 이처럼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유골이라도 가까이 모시려던 유족들 중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 1943년 조선징병독본
또다른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본인 유족들의 요청사항이라며 주인을 찾지 못한 유골들을 소각 처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유골이 소각되면 DNA 대조가 불가능해져 뒤늦게라도 조선인 전몰자들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보추협은 이날 ▲ 유골 소각을 중단할 것 ▲ 유골 반환에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의 신청을 인정할 것 ▲ 유골에 대해 DNA 감정과 함께 ‘안정동위체’ 감정을 실시할 것 등 내용으로 하는 요청서를 일본 정부의 담당 부처인 후생노동성에 전달할 계획이다.
요청서의 내용 중 ‘안정동위체’ 감정은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 전사자 유골의 신원 확인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유골에는 각 나라와 지방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지질학적 특성, 즉 ‘화학적 지문’이 남아있는데, ‘방사기원동위원소’를 활용해 유골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유족의 DNA 정보 수집 없이 유골만 가지고도 한반도 출신인지 확인하는 게 가능하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씌여진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보추협은 요청서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을 확인해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고 명시하기도 했지만, 향후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에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등 유골 반환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방관하던 한국 정부는 새정부가 들어선 뒤 작년 연말 방일한 강경화 외교장관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골 봉환 문제에 대한 실무 논의를 가속화하겠다”고 말했을 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담당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매년 유골과의 대조를 위해 한국 유족들의 DNA를 검사하기 위한 비용을 부처 차원의 예산에 넣었지만, 예산 관련 부처와의 협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이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확정된 올해 예산에서도 마찬가지다.
▲ 44년 4월 일제에 강제 징집돼 멀리 동남아시아 옛 버마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 사진 아랫부분에 `최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란 글귀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같은 일본인이 나서서 기껏 일본 정부에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침묵만 하는 건가요?”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0) 씨는 8일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안간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본 오사카(大阪)부 사카이(堺)시 지방 공무원이기도 한 그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일본인이다.
▲ 조선인 유골반환 운동 펼치는 日 시민 우에다 게이시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 반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0) 씨. 2018.2.8 [email protected]
휴가를 쪼개 도쿄를 오가며 관할 부처인 후생노동성 관료나 정치인들과 만나 ‘로비’를 펼치던 그는 2016년 10월 조선인 전몰자 유골 반환을 향한 중요한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유골을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벌이기로 하면서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를 비롯한 일본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한국 시민단체가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끌어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에다 씨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후 한국 정부의 ‘침묵’에 대해서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 정부에 참가를 제안한 일본 정부의 답변을 모른척했고, 작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전몰자의 유족들은 고령으로 한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우에다 씨는 “한국 정부가 일단 제안을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의 침묵은 ‘제안을 하라’고 말했으니 할 일을 했다고 핑계대는 일본 정부를 도와주는 꼴”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 부산 동래구청에 접수된 일제때 만주지역 일본군으로 강제징병된 것으로 추정되는 225명의 명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한국 정부가 6.25 전쟁 당시 숨진 미국인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유골을 수습하면서 자기 나라의 사람들의 유골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도쿄에 상경해 이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민족문제연구소 등 한국 시민단체들과 함께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씌여진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우에다 씨가 조선인 전몰자 유골의 반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모 혹은 형제의 유골을 한국에 모시지 않으면 마음 편히 죽을 수 없다”는 한국인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일본이 계속 미움을 사게 된다”는 생각에 일본에 소송을 제기한 징용 피해자들을 돕던 그는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지 못한 유족들의 한(恨)을 알게 된 뒤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을 가족들의 곁으로 보내주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유골반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다”며 “제발 일단 유골을 반환해달라고 제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만약 일본 정부가 말을 바꾸더라도 내가 ‘약속을 지켜라’고 따질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 한국사연구회, 역사문제 연구소 등 14개 학술단체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 가담한 정부기관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열고 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가담한 정부기관과 정부출연기관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8일 한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역사문제연구소 등 14개 역사 관련 학회와 연구소 회원들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구서를 제출했다. 학술단체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촛불 민심이 선정한 적폐 가운데 하나”라며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의 불법과 비리를 밝히고 책임자를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체들은 또 “감사 청구 대상인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연구재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정권의 충견(忠犬)이 되어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사회정의를 유린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아울러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특정 인물과 기관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거나 우수한 평가를 받던 연구사업을 좌초시켰다”며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했다.
한-일 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4번째 요청서 제출
일본 정부 “한국 정부 구체적 제안 있으면” 일관
한국 관련 예산 없어…상황 진척되지 않아
▲ 8일 일본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태평양전쟁 때 희생된 한국인 유골 반환 문제에 대한 회의가 열리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 한국인 유골 반환을 검토하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어렵게 상황을 진척시켰으니 한국 정부가 나서야 합니다. 일본 시민단체도 열심히 지원하겠습니다.”
8일 일본 도쿄 참의원 의원회관 회의실에서 열린 회의에서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 곁으로’의 활동가인 우에다 게이시는 한국 정부가 태평양전쟁에 군인·군속으로 동원됐다가 희생된 한국인 유골 반환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한국의 ‘태평양전쟁 피해자 보상추진협의회’ 소속 유족들과 민족문제연구소, 일본 시민단체는 일본 정부에 한국인 유골 반환 요청서를 제출했다. 2014년 이후 네번째다. 유골로도 가족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은 최소 2만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2016년 4월 ‘전몰자 유골 수집 추진법’을 만들어 태평양전쟁 일본인 전몰자 유골 수집에 적극 나서고 있지만, 대상을 ‘우리 나라(일본) 전몰자 유골’로 한정해 한반도 출신을 배제했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인 유골도 찾으라는 요구를 계속하지만, 일본 후생노동성은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한·일 시민단체는 유골에 대해 디엔에이(DNA) 감정과 함께 안정동위체 감정을 실시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청했다. 안정동위체 감정은 방사기원동위원소를 활용해 유골 주인이 어느 지방 출신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다.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 전사자 유골 신원 확인에 사용하는 방법으로, 나라뿐 아니라 출신 지역까지 가려낼 수 있다. 일본 정부도 필리핀에서 수집한 유골 중 일본군 유골을 구별하기 위해서 안정동위체 검사 도입 연구비를 내년 예산에 500만엔을 책정한다. 하지만 후생노동성 원호국 사무과장 요시다 가즈로는 “안정동위체 감정은 아직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며 안정동위체 검사를 한국인 유골 구별에 사용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변을 하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일본 국회의원들도 “‘일본인 유골은 일본인 품에, 한국인 유골은 한국인 가족 품에’가 맞다”고 말했지만, 요시다 과장은 “한국 정부의 구체적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며 “한국 정부에서 구체적 제안은 아직 없다”고도 했다.
한국 정부는 관련 예산도 책정하지 않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은 “일본 정부에 오키나와에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이들의 유족 유전자 자료를 줄 테니 일본이 한국인 유골을 가려달라고 요청했으나, 일본은 검토하겠다고만 한다”며 “한국 정부가 처음부터 유골 발굴에 참여하는 것은 외교적 문제 등이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인 유골 반환을 위해 지난해 예산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올해도 관련 예산은 반영되지 않았다”며 “오키나와 관련 유족 유전자 검사는 (한국에서) 50명을 했는데 사업비 2천만원은 사할린 유골 반환 사업에서 절약한 예산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를 열어 인촌이 1962년 받은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지금의 대통령장)의 취소를 의결했다. 1962년 서훈을 받은지 56년만이다.
이는 대법원이 작년 4월 인촌의 친일행위를 인정한 데 따른 것으로, 당시 대법원 1부(주심 김소영 대법관)는 김재호 동아일보 사장과 재단법인 인촌기념회가 행정자치부장관을 상대로 낸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같은 대법원 판결로 친일행위가 인정되면서, 정부는 허위 공적으로 받은 서훈은 취소해야 하는 상훈법에 따라 국가보훈처 요청으로 서훈 취소 절차를 밟아 이날 서훈을 박탈하기에 이르렀다.
인촌의 서훈이 취소되면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20명의 서훈 박탈은 모두 마무리됐다.
당시 진상규명위는 인촌이 전국 일간지에 징병, 학병을 찬양하며 선전·선동하는 글을 여러 편 기고하고 징병제 실시 감사축하대회에 참석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다고 판단한 바 있다.
이에 김재호 사장과 인촌기념회 등은 2010년 “인촌의 활동에 관한 당시 신문기사를 믿을 수 없고, 일제가 조직한 단체에 이름을 올리거나 행사에 참석한 것은 강제 동원된 것일 뿐”이라며 소송을 냈으나, 1, 2심은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이뤄졌다고 볼 수는 없다”며 친일 행위가 맞다고 판단했고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했다.
▲화성시,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 발간
(화성=연합뉴스) 경기 화성시는 서훈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인터뷰해 만든 독립운동 자료집 ‘나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말하다’를 발간했다고 12일 밝혔다. 사진은 자료집. 2018.2.12 [화성시 제공=연합뉴스] [email protected]
228페이지 분량의 이 자료집은 화성시가 2013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독립운동콘텐츠발굴 사업에 의해 만든 것으로, , 시로부터 위탁받은 민족문제연구소가 2013년부터 3년간 화성지역 미서훈 독립운동가 후손 11명을 인터뷰해 4명의 이야기를 모았다.
송산 지역 3.1운동 지도자로 활약한 홍면옥 선생의 후손 고(故) 홍진후씨, 오산노농학원 적화사건으로 검거돼 옥고를 치른 변기재 선생의 후손 변주현·변순용씨, 장안·우정지역 3.1운동의 선두에서 면사무소 파괴와 가와바다 순사 처단에 앞장섰던 차경규 선생의 후손 차진모씨가 주인공이다.
이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살아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펼쳤다.
홍면옥 선생의 출옥기념 사진, 변기재 선생의 친필엽서 등 독립운동 자료 사진도 다수 발굴됐다.
화성시는 자료집을 전국 국공립대학의 도서관·박물관·연구소, 화성시 관내 도서관과 초·중·고등학교에 배포하고, 화성지역 독립운동 인물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또 서훈을 받은 독립운동가의 인터뷰 자료로 2권의 자료집을 추가로 발간할 예정이다.
채인석 화성시장은 이날 접견실에서 자료집에 참여한 후손들과 안소헌 광복회 화성시지회장,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실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열고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노고가 잊히지 않고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그분들의 공훈을 선양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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