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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위안부 피해자 위한 평화재단 설립 21대 국회 나서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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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위안부 피해자 위한 평화재단 설립 21대 국회 나서달라”

admin | 목, 2020/04/16- 00:36

온라인 수요집회 “피해자 중심주의 근거해 문제 해결하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3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되고 있다. 2020.4.8/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정의기억연대가 1435차 온라인 수요집회를 열고 새로 뽑히는 국회의원들이 여성인권평화재단을 설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안을 속히 통과시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국회의원 총선거날인 15일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열린 수요 집회에서 정의기억연대는 “우리가 30년 동안 거리에서 외치고 많은 국민이 함께했던 간절함을 담아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법안이 통과되고 시행되는 국회가 되길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새로운 국회의원은 할머니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진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근거한 해결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며 “여기 모인 우리는 그들이 진정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하도록 똑똑히 지켜볼 것이며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더욱 큰 목소리로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인권평화재단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업과 연구를 지속하고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기관으로 20대 국회에서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한경희 사무총장은 “여성인권평화재단의 설립 근거 기반을 갖출 수 있는 뜻 있는 국회의원들을 20대 국회에서 (기대했는데) 논의조차 못했다”며 “우리가 30년동안 외치고 많은 국민들이 함께했던 간절함을 담아 법안이 통과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에 한발짝 나갈 수 있는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 총장은 이날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인 자헤랑 할머니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혜랑 할머니는 12살에 직물공장 공장장한테 끌려가 일본 군대 위안소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자헤랑 할머니는 이후 곳곳에서 증언하고 위안부 피해문제를 알리다가 지난 11일 오전 9시에 소천했다.

수요집회에는 만 18세로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청소년들의 발언문을 정의기억연대 관계자가 대신 읽으며 투표를 독려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올바른 지도자를 뽑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올바른 지도자를 뽑아야 하며 할머니들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지난 지방선거까지도 투표권을 행사한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투표 의지는 있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투표장에 가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4일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고 13일에 퇴원했으나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서울=뉴스1) 최현만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15>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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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국정교과서 지지 홍아무개 교수… 교육부 “학회 보고 결정,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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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부, 국정교과서 현장검토본 공개 교육부가 지난 2016년 공개한 국정교과서 (중학교 “역사 ①, ②”, 고등학교 “한국사”) 현장검토본. ⓒ 유성호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지난 6월 8일 ‘국정화진상조사 백서’를 공개하면서 다음처럼 말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권력의 횡포이자, 시대착오적인 역사교육 농단이었다. 국정화가 교육부를 중심으로 추진됐던 게 사실이며, 정부의 과오에 대해 국민들께 깊은 사과를 드린다.”

하지만 이 발언이 나온 지 한 달 뒤인 지난 7월, 교육부와 경기도교육청이 국정교과서의 ‘핵심 설계자’를 자처한 인사에게 국가교육과정 연구책임자를 맡긴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관한 대국민 사과를 내놓고도 관련 인사를 ‘교육과정 작업’에 투입한 것이다. 이 연구는 2022 개정 교육과정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김상곤 ‘국정화 사과’ 뒤 한 달, 교육부의 황당 행동

2일 교육부 관계자 증언과 기자가 입수한 문서 내용에 따르면,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7월 홍아무개 교수(고려대)를 연구책임자로 하는 ‘국가교육과정 전문가포럼’ 계약을 맺었다.

이 사업은 경기도교육청이 실무를 맡고 있지만, 교육부가 특별교부금 6000만 원을 지원하는 등 사실상 교육부가 계획, 주도해온 교육과정 사업이다. 홍 교수에 따르면 홍 교수를 책임자로 한 이 연구엔 한국교육과정학회 인사 등 1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학회 유효회원은 100명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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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교수가 주도하는 “국가교육과정 전문가 포럼” 안내문. ⓒ 윤근혁

지난 8월 24일, 홍 교수는 해당 연구사업 일환으로 ‘2018년 제1차 국가교육과정 전문가포럼’을 열기도 했다. 고려대에서 열린 이 포럼의 주제는 ‘학교교육과정 자율화를 위한 국가교육과정 개선 방안 모색’이었다. 이 자리엔 교육부 교육과정 담당 관리들을 포함해 230여 명이 참여했다.

눈길을 끈 건 개회사를 한 뒤 발표에 나선 홍 교수의 기조 발제 내용이었다. 주제는 ‘학교 교육과정 학생 선택권 확대 방안’. 박근혜 정부 당시 ‘교육과정 자율화와 학생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역사교과서 국정화 과정에서 주요하게 목소리를 낸 인사가 문재인 정부에서 ‘교육과정 자율화와 학생 선택권 확대’를 말한 것이다.

국정교과서 보고서를 보낸 교수에게 연구책임을?

홍 교수가 과거 교육부에 건넨 ‘정통 한국사교과서의 확보를 위한 방안과 과제'(2014. 12.) 보고서를 보면, 그는 당시 검정교과서에 대해 색깔론을 제기한 뒤 국정교과서 발간을 제안했다. 지난달 28일 만난 홍 교수는 기자에게 이 문건이 “국정교과서 핵심플랜을 제시한 것”이라고 자평했다.

홍 교수는 이 보고서에서 “현재 (역사)교과서들은 북한 역사교과서를 표절했다고 할 정도로 역사관이 많이 닮아 있다”면서 “북한식 사관을 가진 재야 사학자들에게 (검정교과서 집필을) 맡겨둔다면 공교육을 책임진 교육부는 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교과목의 적용 범위가 필수일 경우 국정(교과서)이 맞다”면서 “한국사의 경우 검정과 국사편찬위 발행 정통 한국사 공존→정통 한국사의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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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 교수가 교육부에 2014년에 보낸 이른바 “정통 한국사교과서의 확보를 위한 방안과 과제” ⓒ 제보자

또 홍 교수는 지난 2014년 8월 교육부가 연 ‘한국사 교과서 발행체제 개선 토론회’ 자리에서나, 이 보고서 등을 통해 유관순 열사가 기존 고교 검정 <한국사>교과서에서 빠졌다는 사실을 공식 지적했다. 이후 교육부는 이 사실을 TV광고로 활용하는 등 국정교과서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이 보고서에 대해 홍 교수는 “내가 먼저 교육부에 제안한 것”이라면서 “원고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 보고서 제출 전에 진행된 위 토론회에 나와 ‘교과서 발행 구분 준거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방안’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기도 했다.

기자가 입수한 ‘올바른 역사교과서 지지 확보 방안'(2016. 9.)이라는 교육부 내부 문서를 보면 역사교육정상화추진단은 ‘국정교과서 지지교수’로 전국에서 홍 교수 등 5명을 지목한 뒤 “10월, 차관 면담”이라고 적어놓기도 했다.

교육부 “학회 보고 연구 맡겨”… 홍 교수 “국정교과서 지금도 지지”

현직 고교역사 교사인 김육훈 전 역사교육연구소장(전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은 지난 1일 기자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권 당시 역사교과서 국정화 주장을 선도적으로 제기했던 사람이 교육과정 연구의 책임자이며 나아가 ‘학생선택권 신장 방안’을 연구한다는 것이 참 어처구니없다”면서 “교육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도 진행한 일인지 묻고 싶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교육부 교육과정 관련 부서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기자와 한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홍 교수를 보고 정책연구를 맡긴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학회를 보고 맡긴 것”이라면서도 “홍 교수가 교육과정학회장이란 것을 뒤늦게 알았다. 꼼꼼하게 못 살펴본 점은 불찰”이라고 해명했다. 홍 교수는 올해 1월부터 학회장을 맡아왔다.

홍 교수도 기자와 직접 만나 “교육부가 나한테 연구를 준 게 아니라 내가 학회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임자) 일을 하는 것”이라면서 “내가 국정교과서를 지금도 지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번 교육과정 포럼 참여도 일관적 애국의 측면”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홍 교수는 “진영논리에 따라 나를 배제하라는 것은 ‘왜 블랙리스트를 작동 안 시키느냐’라는 논리와 똑같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자칭 국정교과서 ‘핵심 설계자’에게 국가교육과정 연구책임 맡긴 교육부

월, 2018/09/0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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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명칭 직권변경 위해 변경안내 공고… 대체 도로명으로 ‘고려대로’ 등 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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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구청장 이승로)가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인촌로’의 도로명 변경을 추진한다.

인촌은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의 호로, 그는 일제의 징병·학병을 지지하는 글을 싣는 등 친일 행각을 벌여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이다. 지난해 4월 대법원은 김성수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결했고, 정부는 지난 2월 국무회의를 통해 그가 1962년에 받은 건국 공로훈장을 취소했다. 인촌로 명칭 변경은 그동안 시민사회에서 꾸준히 제기돼 온 문제다.

성북구는 “대법원 판결과 정부의 훈장 취소에 따른 조치이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 등의 부적합한 도로명 변경에 대한 요구를 적극 수용한 것”이라며 “정부는 훈장 취소 및 생가와 동상 등 5곳의 현충시설 해체를 진행한 바 있다, 성북구도 시민사회의 요구 등을 반영해 인촌로 변경을 본격적으로 추진, 친 일 적폐 청산에 기여하기로 했다”라고 밝혔다.

인촌로는 6호선 보문-고대병원-안암-고대앞사거리 구간(폭 25m, 길이 약 1.2km)의 도로로 종속도로 190개, 건물번호는 1527개가 해당 도로에 포함돼 있다. 2010년 정부의 도로명 및 건물번호 기준의 주소체계 시행에 따라 해당 도로에 인촌로란 이름이 붙었다.

성북구는 “명칭 직권변경을 위한 첫 단추로 9월 초 도로명 변경안내문을 공고하고 주민의견을 수렴하겠다”라며 “이후 도로명주소위원회 심의를 거쳐 주소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면동의를 받을 계획이다, 추후 도로명부여 세부기준의 검토과정이 남아 있으나 우선은 지역적 특성을 감안한 ‘고려대로’ 등이 대체 도로명으로 거론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인촌로를 사용하는 건물의 지역주민, 외국인, 사업자 등을 포함한 주소사용자의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다”며 “도로명 변경의 타당성을 알리고 시민의 적극적인 참여와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도로명 인촌로 변경추진 기획팀(T/F)도 운영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이승로 성북구청장은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으로 거처를 옮긴 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 일대에 거주하며 성북구는 항일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라며 “단순히 도로명 변경의 의미를 넘어 엄혹한 일제치하에서도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았던 독립운동 정신을 기리는 각오로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앞서 광주 서구는 친일 장교출신인 김백일의 이름에서 유래한 ‘백일로’를 ‘학생독립로’로 변경한 바 있다(관련기사 : 친일 인사 이름 딴 광주 ‘백일로’ 사라진다).

<2018-09-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 도로명’ 인촌로, 8년 만에 이름 바뀌나

화, 2018/09/04-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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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답사 동행기] 이방인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땅, 용산

용산은 오랜 시간 ‘남의 땅’이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이, 일본이 물러간 뒤에는 미군이 주둔했다. 그리고 지난 6월, ‘전 주인’이었던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비로소 용산은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주한미군사령부의 이전과 함께 용산의 역사적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도 일고 있다. 최근 국가보훈처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 자리 잡고 있는 효창공원을 독립기념공원으로 만들자는 방안을 밝혔다. 지난 8월 29일에는 숙명여대를 사이에 두고 효창공원 건너편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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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통치의 흔적이 남겨진 용산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 ⓒ 김경준

지난 1일, 식민지역사박물관은 개관 후 첫 행보로 용산에 얽힌 일제 침략의 역사를 시민들과 함께 짚어보는 ‘특별답사’를 진행했다. 답사에는 30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했다. 뜻 깊은 이번 답사에 기자도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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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기념 특별답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 ⓒ 김경준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가 된 용산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은 ‘군사기지’였다. 용산의 군사기지화는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을 준비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제는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한 뒤, 각종 군용시설물을 설치했다.

용산에는 제20사단 제39여단 보병 제78연대·기병 제28연대·야포병 제26연대·제40여단 보병 제79연대 등 일본군 4개 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1908년 10월에는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설치됐다.

▲ 용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벌이는 일본군대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상주군 편제로 바뀌면서 1918년 6월부터는 ‘조선군사령부’로 개칭됐다. 조선군 사령관은 한반도 전역에 배치된 일본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으로 조선총독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렸다. 조선군 사령관 출신으로 조선총독에 부임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2대 조선총독이었던 하세가와 요시미치,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9대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 등이 대표적이다.

지금의 용산우체국 옆으로 200미터가량 곧게 뻗은 도로의 끝에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미군기지가 조성되면서 자연스레 청사가 멸실됐다고 한다. 청사는 없어졌어도 당시의 흔적을 증명하는 콘크리트 벙커 건물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태라 단단한 출입문으로 막혀 안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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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에 있던 조선군사령부 청사의 모습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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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조선군사령부 청사가 있었던 자리엔 미군기지가 들어서 있다. 지난 6월, 주한미군사령부가 경기 평택으로 이전했지만 아직 이곳의 출입구는 굳게 닫혀있다. ⓒ 김경준

코앞에 그 흔적이 있지만, 보지도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현장해설을 맡은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실망하는 답사단원들에게 “그래도 과거에는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이 근처도 못 오게 했었다”라면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조선군사령부 건너편에는 조선총독관저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총독 관저하면 남산 왜성대 부근에 있었던 통감 관저나 조선총독부 뒤편 경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용산에도 또 다른 총독 관저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역대 조선총독 그 누구도 집무 혹은 거주공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지관리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들고, 시내와 멀리 떨어져 업무상 불편이 크다는 게 이유였다. 대신 연회를 위한 공간 혹은 일본 황족 및 서양 귀빈을 위한 숙소로 드문드문 활용됐다고 전해진다. 총독 관저는 한국전쟁 당시 반파되면서 철거됐다. 총독 관저가 있던 터 역시 미군기지 안에 있어 그 흔적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쇼핑객·여행객으로 분주한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사연

답사단이 용산역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주말을 맞아 쇼핑객과 관광객 그리고 먼 길 떠나는 열차 승객들로 북적였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공간이지만, 이곳 역시 알고 보면 한 많고 사연 많은 공간이다.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일본군 병력들이 모두 이곳에서 출정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징용·징병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들 역시 이곳에서 그리운 고국 땅, 가족과 눈물의 작별을 해야만 했다. 최소 10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용산역 광장에 모여 열차를 타고 군함도, 사할린, 쿠릴열도, 남양군도로 끌려갔다.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지난해 8월에는 용산역 광장 한 켠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답사단 일행이 노동자상을 둘러싸고 광장에 얽힌 구슬픈 사연을 듣는 동안, 지나가는 시민들도 관심 갖고 노동자상 옆의 안내 문구를 읽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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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8월에 용산역 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 노동자상”. 일제강점기 당시 용산역 광장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기 위해 집결했던 장소였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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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단원들의 모습 ⓒ 김경준

철도노동 순직자들을 위한 위령제의 진실

철도 건설과 함께 용산을 철도 행정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던 일제는 용산역을 중심으로 철도관리국, 철도병원, 철도구락부, 철도원양성소 등 철도 관련 시설을 대거 조성했다.

용산역 맞은 편에 있는 낡은 건물은 1928년에 지어진 ‘용산 철도병원’이다. 철도공사 도중 다친 노동자들을 치료할 목적으로 지어진 이 병원은 해방 후 중앙대학교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중앙대병원이 흑석동으로 이전하면서 빈 건물로 남게 됐다. 답사에 참여한 한 시민의 입에서 “만날 지나다니면서 도대체 무슨 건물일까 궁금했었는데…” 하는 읊조림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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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에 세워진 “용산철도병원”. 해방 후 중앙대에서 위탁 경영하다가 현재는 주인 없는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다. ⓒ 김경준

이순우 연구원은 “이 건물은 2008년에 등록문화재로 등재됐으니 철거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계속 빈 건물로 방치할 수는 없을 테고, 옛 서울역사 건물처럼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라고 정부 당국의 관심을 촉구했다.

용산역에서 이촌역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는 철도선형과 서빙고로 도로가 만들어낸 원뿔 모양의 지형이 나타난다. 과거 이곳엔 ‘용산철도공원’이 있었다. 일제는 1915년 철도공원 안에 철도순직자조혼비(鐵道殉職者弔魂碑)를 세우고 매년 순직한 철도노동자들을 위한 조혼제(위령제)를 지냈다.

현재 이 비석은 존재하지 않지만, 위령제의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 연구원은 “유족들 입장에서야 가족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라면서도 “위령제를 지내는 전통이 일제 때부터 시작돼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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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철도공원이 있었던 자리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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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철도공원이 있던 자리에서 “철도순직자조혼비” 사진을 소개하는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김경준

개성에 있던 비석은 왜 용산으로 왔을까

용산역 뒤편에 있는 철도회관 입구에는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비석이 있다. ‘연복사탑중창비'(演福寺塔重創碑)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공덕으로 건립된 연복사 오층불탑의 건립 내력을 담은 비석이다.

본래 이 비석의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일제에 의해 용산의 철도구락부 구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이 비석은 한동안 학계에서 소재불명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2012년 우연히 길을 가다 이 비석을 발견한 한 시민이 블로그에 포스팅하면서 그 존재가 세상에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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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산역사 뒷편 철도회관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연복사탑중창비” ⓒ 김경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던 비석이 긴 세월 동안 소재불명이었다는 사실도 우습지만,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강제로 쫓겨나 엉뚱한 곳에서 방치돼야만 했던 비석의 신세도 처량하기만 했다. 일제에 의한 우리 문화재 수난사의 한 대목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생태공원보다는 역사공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올해 광복절 경축식이 열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연병장으로 사용하던 공간이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114년 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와 비로소 온전히 우리 땅이 된 서울의 심장부, 용산”이라며 경축식을 용산에서 거행하는 까닭을 밝혔다. 그리고 미군이 떠나간 자리에 “미국 뉴욕의 센트럴 파크와 같은 자연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라고 천명했다.

미군기지 자리에 도심 속 생태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구상에 이견을 제시하고픈 생각은 없다. 그러나 용산을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기념하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메시지가 없었던 점은 못내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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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T 용산지사 뒷편에 위치한 서울교 원불교당. 일제강점기 당시 이 자리엔 용광서(龍光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침략전쟁을 수행하다 죽은 전몰장병의 유골을 안치했던 사찰이었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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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영삼거리 앞에 위치한 구 경룡관(京龍館) 터. 1921년에 세워진 경룡관은 일본인 전용극장이었다. 일제 말기에 성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해방 이후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2003년에 폐관했다. ⓒ 김경준

용산은 일제 식민통치의 상징과도 같은 지역이다. 생태공원 조성에 앞서 용산에 깃든 치욕의 역사를 기념하는 역사공원 조성이 우선돼야 한다. 아픈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고 다짐하는 뜻에서 미군이 떠나간 바로 그 자리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건 어떨까. 식민통치의 본산이나 다름 없던 용산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세운 이유가 그렇듯이 말이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붐비는 용산역 광장, 그 속에 숨은 한맺힌 사실

화, 2018/09/04-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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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의회, ‘반민족행위자 단죄 촉구결의안’ 채택… 시민단체 “경의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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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지역 51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3일 오전 대전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날 대전시의회가 만장일치로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대전시의회가 만장일치로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이 결의안을 대표발의한 의원에게 감사를 표하고, 대전시의회에도 ‘경의’를 표했다.

대전시의회(의장 김종천)는 3일 오전 제239회 정례회 제1차 본회의를 열어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이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오광영(더불어민주당·유성2) 의원이 지난 20일 동료의원 13명의 서명을 받아 제출한 것으로, 대전시의회는 결의안을 통해 “친일파와 군사쿠데타 주역 등과 같은 반민족·반헌법행위자 63명이 아직도 서울과 대전 등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며 “친일청산, 역사적폐청산을 위해 반드시 그들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전시의회는 또 반민족·반헌법행위로 인해 4.19를 불러온 장본인인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배재학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배재대 교정에 서 있는 것과 관련,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정권 유지에 이용하는가 하면 민주주의를 파괴한 독재자인 ‘이승만’을 기리는 동상이 십수 년째 서 있고, 독재자의 호를 딴 우남관 등 건물 이름도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며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채택된 결의안은 앞으로 청와대와 국회, 정부, 각 정당, 국가보훈처, 배재대학교 등에 보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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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이 지난 5월 24일 오전 11시 대전 배재대학교 이승만 동상 앞에서 동상 철거 집중홍보를 하고 있다. ⓒ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

이러한 결의안 채택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를 비롯한 대전지역 51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3일 오전 대전시의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전시의회에 ‘경의’를 표하고, 이승만 동상 철거와 친일반민족·반헌법행위자 이장을 촉구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오늘 대전시의회가 오광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반민족·반헌법행위자 단죄 및 국립현충원묘소이장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며 “그동안 이승만 동상 철거와 반민족행위자 이장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을 해온 단체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소식”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지역 대전국립현충원에는 김창룡을 비롯한 친일반민족행위자와 유학성 등 군사반란에 참여하였던 반헌법행위자들이 역대 정권의 비호 아래 대전시민들을 비웃듯이 편안한 잠을 자고 있다”며 “그곳은 독립유공자를 비롯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희생하신 분들이 영면하셔야 할 영예로운 곳인데, 어찌 국립묘지가 그런 자들의 공동묘지가 되어가고 있는지,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이들은 또 “뿐만 아니라 배재대 교정에는 독재자이자 민간인학살의 책임자인 이승만 동상이 버젓이 서 있다. 4.19혁명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끝났음에도 학교 당국 일부 관계자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며 “하루빨리 학교당국은 이승만 동상을 자진 철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 대전지역이 안고 있는 이 두 가지 과제, 즉 김창룡 등 친일반민족행위자와 반헌법행위자를 국립묘지 밖으로 이장하는 것과 배재대학교 교정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적폐를 청산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발언에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가 친일파와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오염됐다. 또 배움의 전당 배재대학교는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으로 더럽혀져 있다”며 “이제는 그러한 더러운 ‘적폐’를 깨끗하게 청산할 때이다. 더 이상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2018-09-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이승만 동상 철거하고, 국립묘지에서 친일파 이장하라”

수, 2018/09/05-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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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21-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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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의 부인 한도신 여사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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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예진·한도신 부부 가족사진
(서울=연합뉴스) 이대희 기자 = 1938년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의 평양신학교 졸업 후 찍은 가족사진. 뒷줄 왼쪽부터 장남 동명, 김예진 선생, 장녀 선명, 차녀 재명. 앞줄 왼쪽부터 3녀 광명, 4녀 순명, 한도신 여사, 차남 동수. 2016.8.14 [민족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email protected]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여성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이기에 앞서 애국지사의 아내로 불렸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을 도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부인 한도신 여사가 99년 만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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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도신 여사의 훈장 전수 받는 김순명 씨 [부산 보훈청 제공]

한도신 여사의 작은 딸 김순명(85)씨는 어머니를 대신해 지난 5일 부산 해운대구 자택에서 보훈청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김 씨는 8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공적이 재조명 돼 애국지사의 아내가 아닌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아 다행이다”며 “국가와 남편,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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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에게 추서된 훈장 바라보는 작은딸 [손형주 기자]

김 씨는 어머니 한 여사에게 추서된 훈장을 한참 동안 쳐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1895년 평남 고평에서 태어난 한도신 여사는 스무 살에 독립운동가 김예진 선생과 결혼했다.

한 여사는 1919년 2월 남편의 3·1 운동 거사를 돕기 위해 재봉틀로 대형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이후 갖은 고초를 겪었다.

1920년에는 김예진 선생이 참여한 평남도청 폭탄 투척 의거에 사용할 폭탄을 직접 운반하는 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상하이에서 조선 유학생들을 돌보며 기독교 여자절제회를 이끌었다.

1986년 92세에 세상을 떠난 한 여사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며 겪은 고초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1천200매 분량의 육필 원고는 이후 ‘꿈갓흔 옛날 피압흔 니야기’라는 회상기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처럼 한여사는 남편을 도와 항일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지만, 그동안 국가로부터 독립운동 공훈을 인정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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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한도신 여사를 가리키는 김순명 씨 가운데 여자아이가 김순명 씨이다. [손형주 기자]

남성 독립운동가를 뒤에서 도왔던 여성들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다 독립운동가 발굴 사업이 남성 위주로 진행된 때문이다.

하지만 내년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앞두고 정부가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를 시작된 이후 지난 8월 15일 광복절에 독립운동가로 추서됐다.

 

훈장을 대신 받은 딸 김씨는 “일제강점기 때 옥살이를 하던 아버지를 대신해 고무공장에 다니며 넓적해진 손으로 6남매를 키운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김 씨는 “투철한 애국심과 이웃사랑을 실천한 어머니를 잊지 않고 지금이라도 공적을 인정해 여성독립운동가로 인정해준 정부에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여성 독립운동가 재평가 작업을 펼치고 있다.

지금까지 202명의 여성독립운동가를 추가 발굴해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1949년 이후 포상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5천여 명 가운데 여성 비율은 여전히 2∼3%에 불과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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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연합뉴스

☞기사원문: “애국지사 아내를 넘어”…99년 만에 훈장 받은 여성독립운동가

월, 2018/10/0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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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5·18기록관서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한 프랑스의 사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광주에서 열린다. 8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2014년 프랑스 파리 국립기록보존소(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처음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전시회가 5·18기록관의 초청으로 오는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2018.10.08. (사진 = 5·18기록관 제공) [email protected]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한 프랑스의 사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광주에서 열린다.

2014년 프랑스 파리 국립기록보존소(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처음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전시회가 5·18기록관의 초청으로 오는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8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이 전시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가 소장한 각종 자료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의 반역 행위와 반인도적 범죄, 나치의 지배정책 등을 고발하는 초청전이다.

광주 전시는 ‘파리-5·18 광주, 끝나지 않은 과거청산’이란 서브타이틀을 달고 ‘다시 시작하는 광주의 과거청산’ 패널 등을 특별 제작, 5·18 진상 규명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선 2016년 서울 전시에 이어 두 번째로,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가 광주 전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5·18기록관과 함께 이 전시를 주관한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국립기록보존소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역사자산인 5·18을 갖고 있는 광주에서도 프랑스처럼 과거청산 작업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데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광주 전시를 강하게 주문했다”고 밝혔다.

전시 구성은 5·18을 비롯해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공공의 적 ▲경찰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강제동원 ▲가자, 전선으로! 독일군과 함께 등 8개 섹션으로 이뤄져 있다.

프랑스는 국권 수복 이후 과거사를 청산하며 12만명 이상을 법정에 세워 1500여명을 처형하고 3만8000명을 수감하는 등 나치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대거 단죄했다.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나치 부역자들을 단죄한 프랑스의 사례와 5·18 민주화운동 학살 책임자에 대한 처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전시회가 광주에서 열린다. 8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2014년 프랑스 파리 국립기록보존소(내셔널 아카이브)에서 처음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프랑스의 나치 부역자들)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전시회가 5·18기록관의 초청으로 오는 11일부터 12월30일까지 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된다. 2018.10.08. (사진 = 5·18기록관 제공) [email protected]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는 9000여 명이 약식 처형됐다. 프랑스는 73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치 부역자들을 추적하며 처벌을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도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않았다. 5·18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 또한 미흡하다.

5·18 기간에 발생한 피해자는 모두 5517명(광주시 1~6차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집계)에 이른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는 155명이며 부상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 구금 부상자 1145명, 연행 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도 처형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고, 대법원 선고형량대로 옥살이를 한 사람도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포함해 16명이 일부 죗값을 치렀을 뿐이다. 사실상 ‘5·18 총지휘자’인 전두환은 회고록에 거짓기록까지 남겨놓고 있다.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정부기관이 주체가 돼 국가의 치부를 가감없이 드러낸 이 전시는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5·18 진상조사 작업도 프랑스에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를 깊이 새기면서 진행돼야 하며, 우리의 역사 인식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11일 오전 10시30분께 5·18기록관에서 열리는 개막식에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 르네 니콜라 우즐로 부소장과 함세웅 이사장 등 다수의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email protected]

<2018-10-08> 뉴시스

☞기사원문: 과거사 청산, 프랑스와 5·18은 어떻게 다른가?…나치 부역자들 초청전

월, 2018/10/08-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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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전시해설]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 초청전 “콜라보라시옹” 광주에서 열려
-2018 파리-광주의 과거청산-

개막식 : 2018.10.11.(목) 10:30~11:30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


1.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가 2014년 해방 70년을 맞아 기획한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이 민주항쟁의 도시 광주에서 열린다.

2. 이 전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한 부역자들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는 것으로 프랑스는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반역자와 전쟁범죄자를 추적하여 단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번 초청전은 과거사에서 교훈을 찾는 프랑스의 철저하고도 지속적인 노력을 보여줄 것이다.

3. 특히 이번 초청전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완벽한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 힘을 모으고 있는 광주에서 열리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이 전시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시효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줄 것이다.

4. 10월 11일(목) 오전 10시 30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열리는 개막식에는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 르네 니콜라 우즐로 부관장과 이병훈 광주부시장,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나의갑 관장, 민족문제연구소 함세웅 이사장 등 다수의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콜라보라시옹 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La Collaboration Vichy Paris Berlin 1940∼1945

2018.10.11.(목) ~ 2018.12.15.(토)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 

개막식 : 2018.10.11.(목) 10:30~11:30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
주관·주최: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민족문제연구소
후원: 내일을여는역사재단,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위원회, ARCHIVES NATIONA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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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점령 하에서 프랑스가 해방된 지 70년을 맞아 2014년 11월 26일부터 다음 해 4월 5일까지 파리 내셔널아카이브에서 열린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이 광주에 소개된다. 이 전시는 프랑스 내셔널아카이브가 소장한 각종 자료를 중심으로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부역자들의 반역행위와 반인도적 범죄 그리고 나치의 지배정책을 다루고 있다.

전시 제목인 ‘콜라보라시옹’은 본래 예술가들 간의 협업을 의미하며, 한국에서는 연예인들의 공동 작업을 가리키는 ‘콜라보’로 사용되면서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선 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의 페탱 원수가 독·불 사이의 국가 간 협력이란 뜻으로 사용한 이래, 독일 점령기의 부역행위를 일컫는 치욕적인 의미로 고착화하였다.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벌은 그간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완벽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나치에 대한 협력 혐의로 35만 여명을 조사하였으며 12만 명 이상을 법정에 세웠고, 이 중에서 약 1,500여 명을 처형하고 3만 8천여 명을 수감했다. 해방 직후의 혼란기에 9천여 명은 약식 처형되었다.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겪고도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단하지 못한 우리와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숙정과정을 거쳤지만, 그럼에도 프랑스 내부에서는 1950년대 초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사면 이후 과거사 청산의 미흡함에 대한 비판이 단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예를 들면 비시 정부의 경찰청장 르네 부스케는 레지스탕스를 탄압하고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적극 협력했던 죄상에 비해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을 살고 난 뒤, 재계의 유력인사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프랑스 경찰이 4천여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유대인 13,152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넘긴 이른바 ‘벨디브’체포작전은, 1992년에야 재조명됐고 3년 뒤 결국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책임을 인정하고 공개사과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 국방부가 주최하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관람하여 주목을 받은 〈라 콜라보라시옹, 비시 파리 베를린 1940∼1945〉 특별전은 미완의 과거사청산을 반성하기 위한 국가적 노력의 일환이다. 이 전시는 그 자체로 오욕의 역사에 대한 고백적 성찰이며 프랑스의 과거사청산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동시에 극우세력이 발호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콜라보라시옹’이 결코 과거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인식의 소산이기도 하다.

정부기관이 주체가 되어 국가의 치부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대통령이 직접 관람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는 등, 역사를 직시하려는 프랑스의 자세는 적폐청산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절실한 과제인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와 한국의 과거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도 이 전시에서 주목해서 되새겨야 할 지점인 것이다.

특히 이번 초청전이 5.18민주화운동의 전 과정에 대한 완벽한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 힘을 모으고 있는 광주에서 열리는 의미는 더욱 크다 할 것이다. 이 전시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에 시효와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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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탱의 초상화 옆에서 전시 설명을 듣고 있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 Présidence de la République

수, 2018/10/1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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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승천기를 배경으로 일본군 군복을 입고 일본도를 쥐고 있는 박정희 사진을 “박원순이 만든 빨갱이 민족문제연구소가 조작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으로 선동질을 하고 있다.”고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보수단체 나라사랑바른학부모실천모임 대표 방자경 씨가 법정 구속됐다.

10월 12일 서울 북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이성호)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으로 징역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하고 방 씨를 법정 구속했다.

문제가 된 사진은 일본의 누리꾼이 조작한 것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설립한 단체가 아닐뿐더러 “사진이 합성된 가짜”라고 감정한 친일문제 전문연구기관이다.

▲ 박정희 사진조작설을 유포하고 있는 방ㅇ경씨의 트윗

민족문제연구소는 3년간에 걸친 재판 끝에 지난 4월 12일 대법원의 원심 확정으로 500만원의 손해배상을 받아낸데 이어 형사소송 1심에서 방 씨의 유죄를 인정받음으로써, 무차별적인 음해에 단호히 대응하여 징벌한다는 무관용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2016년 서울북부지검이 불기소처분을 내리고 2017년 서울고검이 항고를 기각했는데 서울고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어렵사리 재판이 진행됐다.”고 밝히고, “앞으로도 건전한 비판과 학술적 토론은 언제든 수용하겠지만 무분별한 허위사실 유포에는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단에 참여했던 서석구 변호사가 민사소송에 이어 형사소송에서도 방 씨의 변호를 맡아 눈길을 끌고 있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단독] 일본 누리꾼이 조작한 ‘박정희 친일사진’ 법정까지 간 사연 (2017.1.13)

☞경향신문: [단독]검찰 불기소 처분한 민족문제연구소 비방 사건···법원 “공소 제기하라” (2017.5.24)

☞민족문제연구소: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소송, 2심 승소와 스프레이 테러 형사조정
(2018.1.25)

☞민족문제연구소: [보도자료] 박정희합성사진 조작관련 명예훼손 재판에서 연구소 최종승소 (2018.4.20)

금, 2018/10/1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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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단체 관계자들이 11일 광주시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막한 프랑스의 나치부역자 단죄를 조명하는 ‘콜라보라시옹’ 전시회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12월15일까지 이어진다. /최현배 기자 [email protected]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 드골 정권은 1950~1953년 나치 협력 혐의로 모두 35만여명을 조사했고, 12만명 이상을 법정에 세웠다. 이 가운데 1500여명이 처형됐으며 3만8000여명이 수감됐다. 1945년에는 재판없이 처형된 사람도 9000여명에 달했다.

당시 페탱 총리도 나치 부역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기도 했다. 프랑스 과거사 청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광주에서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11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과 민족문제연구소가 공동 주최한 ‘콜라보라시옹(La Collaboration·협력)-프랑스의 나치부역자들 1940~1945’ 특별전 개막식이 5·18기록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

전시명 ‘콜라보라시옹’은 1940년 10월 30일 당시 프랑스 필리프 페탱 총리가 독일 히틀러 총통과 정상회담 후 라디오 연설에서 “오늘 나는 협력의 길로 들어선다”고 한 선언에서 따왔다.

오는 12월 15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Archives Nationales)가 지난 2014년 나치로부터 해방된지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것이다. 특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민주·인권·평화의 도시 광주에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 대한 첫 전시가 열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는 게 5·18민주화운동기록관측의 설명이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과거사 청산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린 것은 지난 2016년 서울 전시회가 유일하다.

이번 광주 개막 배경에는 프랑스 국립기록보존소측이 5ㆍ18에 대한 과거사 청산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광주를 특별히 선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전시장은 5ㆍ18 소개를 비롯한 ‘콜라보라시옹의 주역들’, ‘공공의 적’, ‘경찰조직의 콜라보라시옹’, ‘문화예술계와 언론계의 나치 부역’, ‘경제계의 나치 부역과 강제동원’, ‘가자, 전선으로! 독일군과 함께’ 등 크게 8개 부분으로 이뤄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5·18은 물론 친일 잔재 청산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한국과 달리 나치 부역자를 엄혹하게 단죄한 프랑스의 역사관을 살펴볼 수 있다.

1964년 프랑스는 전쟁 중 민간인에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없애 지난 1994년 유대인 처형에 관여한 폴 투비에는 종신형을, 지난 1998년에는 모피스 파퐁은 10년 금고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니콜라스 우즐로 부소장은 “지난 2014년 프랑스 정부는 해방 70주년을 맞아 기록보존소에 보관 중인 나치부역자들의 자료를 공개하며 많은 사회적 갈등을 낳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누구에게 책임 있고 누가 결정을 했는 지 등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공개를 결정했고, 실제 전시가 열렸을 땐 반발이 없었다”고 밝혔다.

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나치부역자 청산 과정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며 “전두환을 광주와 민족사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게 우리의 의무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8-10-12> 광주일보

☞기사원문: 5·18 광주, 프랑스 과거사 청산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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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역사적 진실을 알아야 한다”

전남일보: “국가가 모든 기록 공개하는 게 5·18진상규명 지름길”

금, 2018/10/12-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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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0일 신일철주금 손해배상 청구 최종 판결
“이번 판결이 외교적 분쟁 촉발 주장 적절치 않아”
“일본 정부 입장에 휘둘리지 않고 사법부 할 일만”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일제 강제동원 ‘신일철주금’ 피해자 소송 대법원 판결을 엿새 앞둔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본기업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 기자회견에서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인 김정주 할머니가 발언을 하고 있다. 주최 측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업의 강제동원 사죄배상, 사법부 재판거래 공식 사죄 및 재판부의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했다. 2018.10.24.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온유 기자 = 시민사회단체가 ‘신일철주금’ 등 일본 기업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재판에 대한 공정 판결을 촉구했다.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은 24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에 정의로운 판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번 기자회견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신일철주금에 대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판결을 앞두고 진행됐다.

강제동원 공동행동 관계자는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로 늦춰진 판결이 지난 7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이후 빠르게 진행됐다”면서 “다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인정한 대법관들이 13명 중 8명이나 있는 조건에서 국가가 다시 피해자들을 저버리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자국 기업의 패소가 확정될 경우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는 등 법적 대응에 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사건을 담당한 법무법인 해마루의 김세은 변호사는 “ICJ의 경우 양국 정부가 모두 동의해야 이뤄질 수 있어 일본 정부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서울=뉴시스】김선웅 기자 = 일제 강제동원 ‘신일철주금’ 피해자 소송 대법원 판결을 엿새 앞둔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일본기업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주최 측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일본기업의 강제동원 사죄배상, 사법부 재판거래 공식 사죄 및 재판부의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했다. 2018.10.24. [email protected]

이어 “일본 측이 이번 판결이 마치 외교적 분쟁을 촉발하는 것처럼 발표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대법원도 이것이 가지는 외교적 문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법과 양심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를 구제해야 한다”며 “대법원은 일본 정부 입장이나 외교부에 휘둘리지 않고 사법부가 해야할 일을 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박상복 한국원폭피해자협회 기호지부지부장과 이규매 미쓰비스 중공업소송 원고 유족, 김정주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 등도 참여했다.

강제동원 공동행동 관계자는 “일본 강제 동원 사건들은 외교적 분쟁이 아닌 정당한 사죄와 보상의 문제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모든 것을 바로잡길 바란다”고 말했다.

현재 대법원에는 신일본주금 외에도 미쓰비시 중공업 동원 피폭 피해자 소송, 미쓰비시 중공업 여자근로정신대 동원피해자 소송 등 3건이 계류돼있다.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은 피해자 4명이 구 일본제철에서 안정적인 일자리 등을 제공한다고 회유해 일본에 갔지만 1941년부터 1943년 간 고된 노역에 시달리고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1997년 일본 오사카 법원에 “1인당 1억원을 배상하라”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일본에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고 2003년 최고 재판소에서도 같은 판결을 받았다.

피해자들은 2005년 서울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과 2심에서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며 기각됐다. 그러나 2012년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으로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와 정면 충돌한다”며 앞선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결국 2013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원고 일부가 승소했지만 신일철주금 측이 불복하면서 2013년 대법원에 재상고돼 오는 30일 최종 선고를 앞두고 있다. 소송이 긴 시간 진행되며 피해자 4명 중 3명이 숨져 현재는 1명의 원고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양승태 사법부는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와 공모해 고의로 재판을 늦추 소송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email protected]

<2018-10-24> 뉴시스

☞기사원문: 5년 끈 日강제동원 손해배상…”대법원, 법과 양심만 따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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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최종판결 앞두고…“대법원, 법과 양심만 따라야”

☞쿠키뉴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대법원 정의롭게 판결하라” 촉구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에 정의로운 판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을 향해 강제동원피해자 김정주 할머니(후지코시 근로정신대 소송 원고)의 발언 영상.

수, 2018/10/24-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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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촛불’ 2주년에 돌아보는 역사전쟁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이사

“이것이 나라냐?”고 분노하며 시민들이 촛불을 든 지 벌써 2년이 됐다. 그간 정권교체도 이루어졌고 평화정착과 통일에 대한 전망도 그 어느 때보다 밝아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촛불민심이 요구한 ‘적폐청산’과 ‘국가재조’라는 혁명적 과제는 현실정치와 경제논리에 발목이 잡혀 동력을 잃어가고 있다.

잠시 자숙하는 시늉을 하던 수구세력은 자신감을 되찾은 듯 촛불항쟁의 정신을 외면하고 거침없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들은 분단 70년이 넘어 찾아온 민족의 명운이 걸린 절호의 기회를 한갓 정치적 득실을 따져 사사건건 제동을 건다. 숱한 개혁 입법도 제대로 논의조차 못하고 표류하고 있다. 두 차례 보수정권에서 고질화한 관료사회의 퇴행도 가벼이 여길 일이 아니다. 이제 일각에서 조직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고함을 강변하며 현 정권의 퇴진까지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는 통설이 실감나는 요즈음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지부진한 현 상황을 남의 탓만으로 돌리며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다. 더 늦기 전에 문제의 근원을 찾아 효과적인 대처를 해야 할 것이다. 현 정권은 촛불민심의 선택과 위임을 받아 출범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권위를 지니는 동시에, 그 요구에 응답하고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야 할 피할 수 없는 책무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함께 외쳤던 주장이 무엇이었던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돌이켜보면 사실 거창한 명제가 아니었다.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하야–퇴진–탄핵-구속 촉구로 이어지는 각 단계별로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었지만, 이를 관통하는 구호는 ‘기본권의 보장’에 다름 아니었다. 각계의 각양각색의 슬로건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자연스레 수렴되었다. 즉 헌법적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준수하라는 강력한 경고였다.

▲ 2015.10.24일 저녁 서울 중구 청계광장 부근에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촛불집회에서 참가자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국정교과서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많은 이들은 자유 평등 민주 평화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의 헌법정신이 서구사회로부터 이식된 개념으로 이해한다. 법제 과정이나 문언으로만 볼 때는 얼핏 그런 해석도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한국근현대사 전반을 조망해 보면 우리 민족이 꿈꾸고 실현하고자 했던 보편적 가치가 우리 스스로 수난 속에 스스로 체득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학의 평등사상과 반봉건반외세운동, 3·1항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반제국주의와 민주공화운동, 사월혁명 5·18민주항쟁 6·10시민항쟁으로 이어지는 반독재민주화운동 등 면면히 이어지는 저항정신의 요체가 바로 헌법정신으로 현현되었던 것이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자부할 만한 전통으로 긍지를 가지기에 모자람이 없다.

촛불항쟁의 저변에는 이러한 역사의식의 계승이 작동하고 있었다. 항쟁의 직접적 계기는 물론 ‘최순실게이트’였다. 그러나 이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을 뿐 그 근본 원인은 구조적인 데서 찾는 것이 마땅하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기간 가장 두드러졌던 폐해는 지배층의 무분별한 사익집단화 현상이었다. 청와대 국정원 검찰 등 권력기관에서부터 재벌 관료 정치인 언론인 학자, 심지어 사법부조차도 철저하게 결탁하여 특권을 향유하며 불법과 부정을 서슴지 않았다. 갑질이 난무하고 부패가 만연했으며, 비판세력에 대한 사찰 음해 탄압이 공권력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독재정권의 완벽한 부활이자 교활하고 세련된 파시즘의 대두였다.

다른 한편 역사와 교육에 대한 권력의 개입과 이를 전유하겠다는 망상은 왕조시대에도 지탄받았을 대표적인 폐정의 하나였다.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의식세계마저 지배하려 했다. 역사와 교육을 도구삼아 미래세대까지 세뇌하려 기도한 것이다. 이명박은 과거사위원회 폐지를 첫 번째 국정과제로 공언하고 실제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공공연하게 뉴라이트세력을 지원해 식민지미화론 이승만국부론 박정희신격화를 전파시켜나갔다. 여기에 다수의 언론과 학자들이 부역자 역할을 자임했다.

독립정신과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같은 도발은 ‘역사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민사회는 역사정의실천연대라는 연대기구를 조직하고 역사변조에 정면으로 맞서나갔다. 시민사회와 학계가 힘을 합쳐 뉴라이트의 교학사 고교한국사를 원천 봉쇄하자, 박근혜는 한 술 더 떠 아예 국정 한국사교과서 편찬이라는 강수로 맞불을 놓았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다시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를 구성해 전 국민을 상대로 전국적인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운동을 맹렬히 전개했다. 박근혜의 오만과 무지는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하고 있었다.

결과는 놀랄 정도였다. 청와대가 직접 나서 교육부와 교육청 수구언론과 극우단체를 총동원하고 전력을 기울여 역공작까지 벌였음에도, 국정 한국사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는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하였으며, 결국 폐기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박근혜가 국가기구를 동원해 총력을 기울인 역사쿠데타가 실패로 막을 내린 것이다.

시민사회와 학계 교육계는 물론 국민적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무리하게 시대착오적인 한국사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의 빗나간 효도는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그를 권좌에서 쫓겨나게 하는 한 원인이 됐을 뿐만 아니라, ‘구국의 지도자 박정희’라는 우상화의 허구를 드러내는 역설적 상황을 초래했다.

친일세력 대 항일세력, 독재세력 대 민주세력, 냉전세력 대 평화세력. 어떤 이들은 이분법적인 역사해석을 경계한다. 그러나 견고하게 뿌리박은 수구세력은 결코 자발적으로 특권을 양보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는 작업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양성과 관용을 말하기에는 현실이 너무도 엄혹한 것이다.

내년은 3·1독립운동 100주년이다. 3·1독립운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최초의 민주공화정을 수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우리 역사상 초유의 혁명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무려 백여 년 간에 걸쳐 다져온 민주공화주의가 촛불항쟁을 거치면서 이제 반석 위에 올라설 기회를 맞았다. 이를 위해서는 사익집단의 재생산 구조를 타파하고 민주시민을 양성하여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공고히 해야 한다. 그 지름길은 역사인식의 정립과 민주주의 교육, 그리고 생활 속의 실천이다. 그래서 단언컨대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018-10-29> 프레시안

☞기사원문: 아직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월, 2018/10/2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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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이종익 기자 = 최근 충남 천안에서 1950년 전후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 명이 희생된 민간인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28일 더불어민주당 이규희(왼쪽 첫번째) 의원과 준비위원회 관계자 등이 현장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8.10.29. (사진=뉴시스 독자 제공) [email protected]

【천안·아산=뉴시스】이종익 기자 = 최근 충남 천안에서 1950년 전후 6·25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200여 명이 희생된 민간인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가 발견됐다는 주장과 관련해 천안시의 발굴 동참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등으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는 지난 28일 오전 매장지로 추정되는 직산 관아 일원에서 위령제를 진행했다.

이날 위령제 앞서 준비위원회 관계자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이규희 국회의원(천안갑)과 육종영 천안시의원 등이 참가한 가운데 추정 장소에 대한 사전답사를 진행하며 유해 발굴에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길 준비위원회장은 29일 “11월 초 아산지역에서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충북대 발굴단의 현장답사 진행에 이어 천안시의회에 가칭 ‘천안시 한국전쟁기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 제정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앞서 준비위원회는 지난 23일 기자회견을 열고 “현 천안시 직산읍 인근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를 받고 체포돼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 200여 구에 달하는 매장 추정지가 발견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천안지역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중 보도연맹사건으로 신청된 사건은 없고, 부역 혐의 희생 사건으로 신청된 사건 7건이 있다.

이 중 당시 직산면사무소(직산관아)와 관련해 지서장의 지시로 “200여 명의 부역 혐의자들을 금광구덩이에 죽이고 묻고 했다는 참고인의 증언이 있다”는 것이 준비위의 설명이다.

▲ 【천안=뉴시스】이종익 기자 =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위령제 준비위원회가 23일 오전 천안시청 브리핑실에서 ‘민간인학살 천안지역 희생자 현황 전수조사와 발굴조사 시행 등’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8.10.23. [email protected]

하지만 이 같은 내용의 조례가 제정될 경우 보수와 진보 측의 찬반 의견 대립으로 난항도 우려된다.

경기 고양시의 경우 금정굴 사건과 관련해 전국에서 처음 조례안이 만들어져 2011년부터 6차례나 시의회에서 발의됐지만, 보수 단체와 정당 반발로 맞서다가 7년이 지난 올 9월 제정됐다.

육종영 시의원은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무고한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해 평화와 인권 회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조만간 관련자료를 정리해 조례안 초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천안시 관계자는 “시의회가 관련 조례를 제정한다면 조례 절차에 따라 후속조치를 이어가겠다. 하지만 현재 일부 단체에서 반대 여론이 감지되고 있어 민감한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천안과 인접한 아산지역에서는 지난 3월 한국전쟁 당시 부역 혐의로 학살당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에서 어린이 80여 구를 포함해 208명의 유해가 수습됐다.

[email protected]

<2018-10-29> 뉴시스

☞기사원문: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매장 추정지 발굴에 천안시 참여 여부에 ‘관심’

월, 2018/10/29-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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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대법원 공보관실(02-3480-1451)


대법원(재판장 대법원장 김명수, 주심 대법관 김소영)은 2018. 10. 30.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신일철주금)의 상고를 기각하여, 피고가 원고들(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시켰음(대법원 2018. 10. 30. 선고 2013다61381 전원합의체 판결).

이 사건 핵심쟁점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임. 이에 대하여 다수의견(7명)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으로서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음.

이러한 다수의견에 대해서는, ‘이미 2012. 5. 24. 선고된 환송판결에서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으므로, 그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하여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의 대법관 이기택의 별개의견1과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만,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의 대법관 김소영, 대법관 이동원, 대법관 노정희의 별개의견2가 있고,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다’라는 취지의 대법관 권순일, 대법관 조재연의 반대의견이 있으며, ‘다수의견의 입장이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타당하다’는 취지의 대법관 김재형, 대법관 김선수의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이 있음.

1. 사안의 내용

▣ 원고들은 1941년~1943년 일본의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임

▣ 2005. 1.경 한일청구권협정 관련 문서가 공개되었고 원고들은 2005. 2.경 일본 기업인 피고를 상대로 이 사건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함

▣ 제1, 2심에서는 원고들이 패소하였으나,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 판결(환송판결)은 ‘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취지로 판단하였음

▣ 환송후 제2심은 환송판결 취지에 따라 피고가 원고들에게 강제동원 피해에 따른 위자료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고, 위자료 금액을 1억 원씩으로 정하였음

▣ 피고가 이에 불복하여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음


2. 대법원의 판단

가. 사건의 주요 쟁점

▣ ① 원고1, 2에 대한 일본 법원 판결의 효력과 기판력 (상고이유 1점)
원고1, 2는 이 사건 소 제기에 앞서 일본에서 동일한 소송을 제기하였다가 일본 법원에서 패소 확정되었음
이러한 일본 법원의 판결이 외국법원 판결의 승인 제도에 따라 우리나라에도 그 효력이 미친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됨

▣ ② 피고가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부담하는지 여부 (상고이유 2점)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이 운영하던 제철소에서 강제노동을 당하였는데, 구 일본제철의 원고들에 대한 손해배상채무가 피고(신일철주금)에게 승계되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됨

▣ ③ 청구권협정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 (핵심 쟁점) (상고이유 3점)

▣ ④ 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의 항변을 할 수 있는지 (상고이유 4점)
피고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원고들은 피고의 소멸시효 주장이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다투었음

▣ 우선 대법원은 위 ①, ②, ④ 쟁점에 관해서, 환송판결 및 환송 후 제2심판결과 마찬가지로,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위 ①쟁점),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에 대하여도 행사할 수 있으며(위 ②쟁점),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위 ④쟁점)고 판단하였음

▣ 위 ③쟁점에 관해서는 아래와 같이 대법관 사이에 견해가 갈렸음
청구권협정은 전문(前文)에서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의 재산과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라고 정하였음. 제1조에서 일본이 대한민국에 3억 달러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2억 달러의 차관을 행하기로 한다고 정하였고, 이어서 제2조 1.에서 “…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 정하였음. 제2조 3.에서는 “…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고 정하였음.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에서는 “… 청구권에 관한 문제에는 한일회담에서 한국측으로부터 제출된 대일청구요강 ‘8개 항목’의 범위에 속하는 모든 청구가 포함되어 있고, 따라서 동 대일청구요강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게 됨을 확인하였다.”라고 하였음

이러한 청구권협정 등의 해석상, 1) 원고들이 주장하는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2) 포함되었다면 그에 따른 효력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즉 권리 자체가 소멸하는 것인지, 외교적 보호권만이 소멸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체법상 소멸하는 것은 아니지만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인지 등이 이 사건의 쟁점임

나. 다수의견(7명) : 원고들의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음

▣ 이 사건에서 문제되는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이하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임(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구하는 것이 아님) ☞ 이는 아래와 같은 환송 후 제2심판결의 사실인정에 기초한 것임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 불법적인 침략전쟁의 수행과정에서 기간 군수사업체인 일본의 제철소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조직적으로 인력을 동원하였고, 핵심적인 기간 군수사업체의 지위에 있던 구 일본제철은 철강통제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본 정부의 위와 같은 인력동원정책에 적극 협조하여 인력을 확충하였음
원고들은 당시 한반도와 한국민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장차 일본에서 처하게 될 노동 내용이나 환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 채 일본 정부와 구 일본제철의 위와 같은 조직적인 기망에 의하여 동원되었음
더욱이 원고들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하여 생명이나 신체에 위해를 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한 노동에 종사하였고, 구체적인 임금액도 모른 채 강제로 저금을 해야 했으며, 일본 정부의 혹독한 전시 총동원체제에서 외출이 제한되고 상시 감시를 받아 탈출이 불가능하였으며 탈출시도가 발각된 경우 혹독한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음

▣ 이러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음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음
▪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개최된 제1차 한일회담에서 이른바 ‘8개 항목’이 제시되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무관계에 관한 것이었음. 위 8개 항목 중 제5항에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의 변제청구’라는 문구가 있지만, 이 또한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음.
▪ 1965. 3. 20. 대한민국 정부가 발간한 ‘한일회담백서’에 의하면,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가 한․일간 청구권 문제의 기초가 되었다고 명시하고 있고, 나아가 “위 제4조의 대일청구권은 승전국의 배상청구권과 구별된다. 한국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조인당사국이 아니어서 제14조 규정에 의한 승전국이 향유하는 ‘손해 및 고통’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한․일간 청구권문제에는 배상청구를 포함시킬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음
▪ 청구권협정문이나 그 부속서 어디에도 일본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언급하는 내용은 전혀 없음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음
▪ 2005년 민관공동위원회의 발표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도, 정부가 수령한 무상자금 중 상당금액을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제에 사용하여야 할 책임이 ‘도의적 책임’에 불과하다는 것임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하였고,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의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움

환송 후 제2심에서 피고가 협상 과정에 관한 증거를 추가로 제출하였으나, 그 증거들에 의하더라도 결론이 달라진다고 볼 수 없음
▪ 1961. 5.경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측이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언급한 사실, 1961. 12.경 협상 과정에서 대한민국측이 ‘8개 항목에 대한 보상으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면서, 그중 3억 6,400만 달러(약 30%)를 강제동원 피해보상에 대한 것으로 산정(생존자 1인당 200달러, 사망자 1인당 1,650달러, 부상자 1인당 2,000달러 기준)’한 사실 등을 알 수 있음
▪ 그러나 위와 같은 발언 내용은 대한민국이나 일본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구체적인 교섭 과정에서 교섭 담당자가 한 말에 불과하고, 13년에 걸친 교섭 과정에서 일관되게 주장되었던 내용도 아님
▪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언급한 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지위를 점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발언에 불과한 것으로 볼 여지가 크고, 실제로 당시에는 일본측의 반발로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음
▪ 위와 같이 협상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되었음. 이처럼 요구액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3억 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이라고는 보기는 어려움

다. 별개의견1 (1명) : 이미 환송판결에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으므로,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하여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음 (다수의견과 상고기각 결론은 같으나 이유를 달리하는 것임)

▣ 환송판결의 기속력(상급법원의 판단에 하급법원이 따라야 하는 것)은 환송 후 제2심뿐만 아니라 재상고심에도 미치는 것이 원칙임

▣ 환송 후 제2심의 심리과정에서 새로운 증거 등에 의하여 환송판결의 판단의 기초가 된 사실관계에 변동이 생겼다면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 것이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렇게 볼 만한 사정이 없음

▣ 재상고심이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기속력이 미치고, ‘환송판결에 명백한 법리오해가 있어 반드시 이를 시정해야 하는 상황이거나 환송판결이 전원합의체를 거치지 아니한 채 종전 대법원판결이 취한 견해와 상반된 입장을 취한 때’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기속력이 미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함

이 사건의 경우 환송판결에 위와 같은 예외적인 사정이 없으므로, 환송판결과 같은 결론을 취할 수밖에 없음

라. 별개의견2 (3명)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함. 다만 원고들 개인의 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함. 따라서 원고들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피고를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 (다수의견과 상고기각 결론은 같으나 이유를 달리하는 것임)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

청구권협정 및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에 의하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8개 항목’ 제5항에서 규정한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이 포함됨이 분명한데, ‘기타 청구권’에는 원고들 주장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함
대한민국은 1961. 5.경 협상 과정에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그리고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다른 국민을 강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입힌 피징용자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까지도 적극적으로 요청하였음. 1961. 12.경에도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보상금을 3억 6,400만 달러로 산정하고 이를 포함하여 8개 항목에 대한 총 보상금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하였음
▪ 1961. 5.경 한일회담 당시 대한민국이 위 요구액은 국가로서 청구하는 것이고 피해자 개인에 대한 보상은 국내에서 조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일본은 구체적인 징용․징병의 인원수나 증거자료를 요구하여 협상에 난항을 겪었음
▪ 이에 일본은 증명의 곤란함 등을 이유로 유상과 무상의 경제협력의 형식을 취하여 금액을 상당한 정도로 올리고 그 대신 청구권을 포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하였고, 대한민국은 순변제 및 무상조 등 2개 명목으로 금원을 수령하되 구체적인 금액은 항목별로 구분하지 않고 총액만을 표시하는 방법을 다시 제안하였음
▪ 이후 구체적인 조정 과정을 거쳐 1965. 6. 22. 청구권협정이 체결되었는데, 제1조에서는 경제협력자금의 지원에 관하여 정하고 제2조에서는 권리관계의 해결에 관하여 정하였음


청구권협정 체결 이후 대한민국이 각종 보상입법을 통해 보상조치를 취한 것도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됨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임

▣ 위와 같이 포함은 되지만,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다만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됨으로써 일본의 국내 조치로 해당 청구권이 일본 내에서 소멸하여도 대한민국이 이를 외교적으로 보호할 수단을 상실하게 될 뿐임

‘외교적 보호권’이란‘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우 그의 국적국이 외교절차 등을 통하여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

청구권협정에는 외교적 보호권의 포기에서 나아가 ‘개인청구권’의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의 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음
 ▪ 국가와 개인이 별개의 법적 주체라는 근대법의 원리는 국제법상으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권리의 ‘포기’는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에는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 청구권협정에서는 ‘포기(waive)’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음

당시 일본은 청구권협정을 통해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된다고 보는 입장이었음이 분명함

▪ 일본은 청구권협정 직후 일본국 내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일본국 및 그 국민에 대한 권리를 소멸시키는 내용의 재산권조치법을 제정․시행하였음. 이러한 조치는 청구권협정만으로 대한민국 국민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음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음

마. 반대의견 (2명) :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됨.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하여 가지는 개인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하여 바로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되게 되었으므로, 원고들이 일본 국민인 피고를 상대로 국내에서 강제동원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소로써 행사하는 것 역시 제한됨 ⇒ 파기환송 의견

▣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별개의견2와 같음

▣ 하지만 별개의견2처럼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음.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개인청구권 자체가 소멸되거나 포기된 것은 아니지만, 그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함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된다고 보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음
청구권협정 제2조는 대한민국 국민과 일본 국민의 상대방 국가 및 그 국민에 대한 청구권까지 대상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므로, 청구권협정을 국민 개인의 청구권과는 관계없이 양 체약국이 서로에 대한 외교적 보호권만을 포기하는 내용의 조약이라고 보기 어려움. 외교적 보호권의 행사 주체는 피해자 개인이 아니라 그의 국적국이며 개인의 청구권 유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음
▪ 청구권협정 제2조 1.에서 규정한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는 문언은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체약국 사이에서는 물론 그 국민들 사이에서도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 문언의 통상적 의미에 부합함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양 체약국은 물론 그 국민도 더 이상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함

청구권협정 체결 과정이나 체결 이후의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도 소멸되거나 적어도 그 행사가 제한된다는 입장을 취하였던 것으로 보임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였고, 청구권자금의 분배는 전적으로 국내법상의 문제라는 입장을 취하였음
국제법상 전후 배상문제 등과 관련하여 국민의 재산이나 이익에 관한 사항을 국가간 조약을 통해 일괄적으로 해결하는 ‘일괄처리협정’은 청구권협정 체결 당시 일반적으로 인정되던 조약 형식임
대한민국은 청구권보상법, 2007년 및 2010년 희생자지원법 등을 제정하여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함. 실제 피해에 비해 매우 미흡하다는 사실은 청구권협정의 효력을 해석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음 


청구권협정 제2조의 문언 의미는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됨
– 청구권협정에서는 명시적인 포기(waive) 표현이 없음. 개인청구권이 실체법적으로 완전히 소멸되거나 포기되었다고 보기 어려움. 제2조 3.에서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음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함.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도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 함.

대한민국은 피해국민의 소송 제기 여부와 관계없이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도록 할 책무가 있음

바.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2명) : 다수의견의 입장이 조약 해석의 일반원칙에 비추어 타당함

▣ 청구권협정의 문맥, 청구권협정의 목적 등에 비추어 청구권협정의 문언에 나타난 통상적인 의미에 따라 해석할 경우,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권’에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까지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려움

▣ 교섭 기록과 체결 시의 여러 사정 등을 고려하여 그 의미를 밝혀야 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결론이 달라지지 않음
청구권협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위자료청구권과 그 포기에 관하여 명확하게 정하고 있지 않은데도 명시적 근거 없이 이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판단할 수는 없음


3. 판결의 의의

▣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대법원은 2012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는 취지의 환송판결을 선고하였음

▣ 이후 위 판결에 대하여 학계 등에서 그 찬반을 둘러싼 여러 논의가 있었고, 특히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포함되었다고 볼 경우 개인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인지,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되는 것인지 등에 관하여 많은 논의가 있었음

▣ 본 판결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피고의 다른 상고이유 주장도 배척함으로써, 피고가 원고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최종적으로 확정시켰음

화, 2018/10/3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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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청구권,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 안 돼”

[법률저널=안혜성 기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피고 신일철주금 주식회사의 상고를 기각, 피고가 원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 원씩의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한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원고들은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의 제철소에 강제동원된 피해자들로 일본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으나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철주금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이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고 원고들은 2005년 한국에서 다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1심과 2심 모두 “일본 판결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기타 사회질서에 비춰 허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의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22549 판결)은 “일본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어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것임이 분명하므로 우리나라에서 일본판결을 승인하여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1031-1

사건을 재심리한 서울고등법원은 다음해 7월 원고들에게 각 1억 원의 위자료 지급을 명하는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이 이를 확정함에 따라 장장 13년 8개월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로 결론지어졌다.

이번 소송의 쟁점은 ①동일한 내용의소송이 일본에서 패소 확정됐는데 한국에도 효력이 미치는지 ②피고 신일철주금이 구 일본제철의 손해배상채무를 승계하는지 ③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원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했다고 볼 수 있는지 ④피고가 소멸시효 완성을 항변할 수 있는 지로 이 중 원고들의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협정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가 핵심 쟁점이다.

먼저 대법원은 ①, ②, ④ 쟁점에 관해 “일본 법원의 판결은 그 내용이 우리나라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반하는 것으로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고,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고에 대해서도 행사할 수 있으며, 이 사건 소 제기 당시까지도 원고들이 피고를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핵심 쟁점인 ③쟁점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의 해석과 효력을 두고 대법관 사이에 견해가 엇갈렸다.

다수의견은 “원고들의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청구권으로 이러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판단에는 청구권협정의 협상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칙적으로 부인했고,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강제동원 피해자 등의 권리문제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는지 불명확하다는 점, 협상과정에서 총 12억 2,000만 달러를 요구했음에도 정작 청구권협정은 3억 달러(무상)로 타결된 정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포함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상고를 기각해야 한다는 결론은 다수의견과 같으나 그 이유를 달리하는 별개의견으로 이기택 대법관은 “이미 2012년 5월 24일 선고된 환송판결에서 대법원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으므로 그 환송판결의 기속력에 의해 재상고심인 이 사건에서도 같은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김소영,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도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는 포함되지만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므로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별개의견을 냈다.

이에 반해 권순일, 조재연 대법관은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이 아니라 청구권협정에 따라 원고들의 권리행사가 제한되는 것”이라며 일본 기업에 대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취지의 반대의견을 나타냈다.

이들 대법관은 “청구권협정이 헌법이나 국제법에 위반하여 무효라고 볼 것이 아니라면 그 내용이 좋든 싫든 그 문언과 내용에 따라 지켜야 한다”며 “청구권협정으로 인하여 개인청구권을 더 이상 행사할 수 없게 됨으로써 피해를 입은 국민에게 지금이라고 국가는 정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정에 따라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허용되지는 않지만 협정으로 인해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는 국가에 의해 보상돼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한편 이번 판결에 대해 일본 측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베 신조 총리는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단”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며 고노 다로 외무상도 “이번 판결은 한·일 청구권협정에 위배되며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쌓아온 양국 우호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제재판 등 강경 대응할 뜻을 나타냈다.

<2018-10-30> 법률저널

☞기사원문: 대법원 “日기업, 강제동원 피해자에 위자료 1억 지급해야”


협의 VS 강제집행…강제동원 피해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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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의 재판 끝에 일본 기업이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떠한 방식으로 배상받게 될까.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2시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이춘식(94)씨 등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재상고심에서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2심 승소 판결 이후 흐른 5년…강제동원 소송 원고 4명 중 1명만 남아

신일본제철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배상 소송은 지난 1997년 일본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구 일본제철에 강제동원됐던 고(故) 여운택씨와 고(故) 신천수씨는 일본 오사카 지방재판소에 임금지급과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 2003년 10월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에 고 여씨와 고 신씨는 지난 2005년 대한민국 법원에 같은 내용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구 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했던 또 다른 피해자 이씨와 고(故) 김규수씨도 소송에 합류했다. 1, 2심에서는 모두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다.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지난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했다. 서울고법은 지난 2013년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 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5년이 지난 후에야 대법원은 원심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씨를 제외한 피해자 3명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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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 vs 강제집행…“국외 재산은 집행 절차 복잡해”

긴 기다림 끝에 확정 판결이 내려졌으나 즉각적인 배상금 지급은 요원하다. 배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일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신일철주금에서 배상금 지급을 이행하지 않으면 법원으로부터 집행문을 받아 강제 집행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법령에 따라 재산조사를 걸쳐 국내에 있는 부동산과 주식, 채권 등으로 배상금을 받게 된다.

이씨 등의 소송을 지원한 시민·사회단체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공동행동)’에 따르면 신일철주금은 국내 기업인 포스코의 지분을 약 3% 보유하고 있다. 다만 정확한 재산 내역은 조사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해당 소송을 대리한 법무법인 해마루 소속 김세은 변호사는 “신일철주금과 협의를 할지 강제집행을 할지 좀 더 논의를 해봐야 한다”며 “2013년 서울고법의 판결에 근거해 가집행할 수 있었으나 5년 동안 기다렸다. 신일철주금에서 직접 이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했다.

국외에 있는 재산을 강제 집행해야 할 경우 상황은 조금 복잡해진다. 국외 재산에는 우리 법원의 판결 효력이 미치지 못한다. 일본 법원을 통해 강제 집행 판결을 별도로 받아야 가능하다. 문제는 일본 법원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우리 법원은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개인의 청구권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봤지만 일본 법원의 해석은 다르다. 일본 법원에서 강제동원 피해 배상에 대한 집행 판결을 승인할 가능성이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신일철주금은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청구권 협정과 일본 정부의 견해에 반하는 판단이 나와 매우 유감”이라며 “일본 정부의 대응 상황 등을 감안해 적절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날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매우 유감이다. 결코 수용할 수 없다”며 “국제 재판을 포함해 여러 선택지를 두고 대응을 강구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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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불참’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은?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강제동원 피해자는 어떻게 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손해배상 소멸시효 기간 내에 소송을 제기하면 배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의 쟁점은 한일 청구권 협정에 대한 해석이었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일본 기업의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개인의 청구권이 유효하다’고 밝혔다. 향후 강제동원 재판은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따를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언제부터냐는 것이다. 손해배상 소멸시효는 ‘객관적 권리행사 장애 사유가 없어진 때’부터 계산된다. 전문가들은 강제동원 손해배상의 경우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결이 확정된 이날을 기점으로 봤다. 앞서 대법원은 과거사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판결이 난후 6개월 이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과거사 사건에 대한 소멸시효가 너무 짧다”며 단기 소멸시효인 3년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은 지난 1938년부터 모집·관 알선·징용 등으로 형태를 바꿔가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국내를 비롯해 일본과 사할린, 남양군도 등으로 800만명이 끌려갔다. 이중 최소 60만명 이상은 죽거나 행방불명됐다.

이소연 기자 [email protected] / 사진=박효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8-10-31> 쿠키뉴스

☞기사원문: 협의 VS 강제집행…강제동원 피해배상은 어떻게 진행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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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인 이춘식 할아버지가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열린 지난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박수를 받는 모습. /연합뉴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3년여 만에 승소하면서 피해자 측은 강제동원 등 일제의 반(反) 인도적 행위에 관한 배상 청구권이 지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는 관련이 없게 돼 배상이 가능해졌다며 반겼다.

이날 승소한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징용 피해자뿐 아니라 다른 기업 징용 피해자나 근로정신대 등 다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도 잇따를 전망이다. 그러나 해당 일본 기업에서 실제 배상을 받아내기까지는 쉽지 않은 절차가 남아있다.

이번 소송을 대리한 변호사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대법원 선고가 나온 지난 30일 오후 민변 사무실에서 판결의 의미를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소속 법무법인 해마루 김세은 변호사는 “이번 소송은 청구권협정에 관한 쟁점이 핵심이었던 것 같다”면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까지 모두 소멸했는가, 일본 기업 상대로 일제 때 있었던 불법행위의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는가 등이 쟁점이었다”고 짚었다.

이어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는 청구권협정에서 말하는 청구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 대법원의 결론”이라면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했는가는 오랫동안 논란이었는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이 확정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함께 소송을 맡은 임재성 변호사는 “법률과 조약에 대한 법률적 해석에 대한 최고 권한은 대법원에 있다”면서 “외교부와 법원이 입장이 다르다거나 한 게 아니라 지금까지는 유권해석만 있었던 것이고, 오늘의 대법원 확정판결에 행정부와 입법부 모두 구속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판결에 힘입어 이춘식(94) 씨 등 원고(강제징용 피해자) 측은 신일철주금에 위자료 지급을 임의이행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이 한일 양국의 정치·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큰 탓에 신일철주금이 임의이행할 가능성은 크지 않은 상태다.

원고 측은 신일철주금이 한국 국내에 재산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면 강제집행 절차를 밟을 수도 있지만, 이에 관해서는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

김 변호사는 “오늘 판결을 근거로 국내 재산에는 법원을 통해 강제집행 절차로 나아갈 수 있다”면서 “신일철주금이 포스코 제철소에 3%가량 지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해당 주식에 대한 집행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강제집행 절차로 나아가느냐는 별개 문제”라면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강제집행 절차를 선택할 것인지 논의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신일철주금 주주총회에서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를 의향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면서 “다만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 할 문제도 있기에 계속 논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국제법 전문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조시헌 연구위원은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는 청구권협정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한일 간에 합의가 없다는 것이 오늘 확인된 것”이라면서 “앞으로 한일 간 협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고, 협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제 중재를 통해 분쟁 해결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위원은 “피해자들이 고령인데 국제 분쟁 해결 절차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므로, 한일 간에 과거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관해 청구권협정 외에 추가 협정을 조속히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어 “한국 정부는 그동안 강제동원 진상규명 노력이 충분치 않았던 점을 인정하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유해·유골 수색 및 봉헌 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돼 혼조차 귀국 못하는 분들도 돌아오게 해야 하고, 피해자 구제를 위한 외교적 보호 등 모든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송 당사자인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 씨는 “(원고가) 나까지 네 명인데 혼자 재판을 받으니 과히 기분이 안 좋다. 마음이 아프고 눈물도 많이 나오고 서럽다”면서 “일본도 한국이 이렇게 해줬으니 ‘시원하다, 잘했다’ 하면서 환영하고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며 취재진 앞에서 처음으로 밝게 웃었다.

원고들이 일본 법원에 소송을 낸 1997년부터 원고들을 도운 일본재판지원회의 우에다 케이시 씨는 “이번 판결로 식민지배 피해자들이 권리를 회복하고, 신일철주금은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으로서 배상책임을 다해야 한다”면서 “이를 토대로 한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디지털뉴스부

<2018-10-31> 경인일보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 측 “신일철주금 배상의사 타진할 것… 신일철주금 포스코 지분 강제집행 가능성”

수, 2018/10/3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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