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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 점 부끄럼 없다”는 ‘참군인’의 부끄러운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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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한 점 부끄럼 없다”는 ‘참군인’의 부끄러운 과거

admin | 금, 2020/04/10- 14:00

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홍석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이 문구 앞에는 “우러러 하늘에, 구불어 땅에, 그리고 사람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라고 새겨졌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간 참군인’이라는 백홍석.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백홍석의 공식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백홍석은 1915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1940년 초까지 약 25년에 걸쳐 일본군 현역 장교로 복무했다.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신의주 일대 대민통제를 담당했다. 1944년 4월부터는 경성 육군병사부에서 조선인 병력동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25년간 일본군 복무 후 병력동원 업무 맡아”

▲ 1915년 6월 19일 매일신보에 실린 백홍석의 모습. 우측 하단 끝에 있는 청년이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홍석은 1890년 1월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했다. 1909년 7월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일본에 의해 폐쇄되자 두 달 뒤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3년 12월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5년 5월 27기로 졸업했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 후 오카야마 제17사단 예하부대에서 근무했다. 1919년 4월 중위로 진급한 후 1929년 12월에야 대위가 됐다.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셈이다. 백홍석은 이듬해 8월부터 10월까지 국세조사 육군조사원으로 종사해 ‘국세조사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백홍석의 소좌(소령) 진급은 중위에서 대위로의 진급보다 빨랐다. 대위 진급 후 5년 뒤인 1934년 일본군 보병 소좌로 진급한 백홍석은 이후 조선주둔일본군 20사단 77연대 소속으로 평양 등에서 근무했다.

백홍석은 1939년 4월에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에 임명돼 그해 11월까지 역임했다. 이듬해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백홍석은 관할 지역 관헌들을 통솔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따른 방공통제와 훈련을 주도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인정을 받아 백홍석의 이름 석자가 <지나사변(중일전쟁)공적서>에 올라갔다. 이를 계기로 백홍석은 고위 장교인 일본군 중좌에 진급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조선인 출신으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 못한 백홍석은 1943년 예편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확대 되자 백홍석은 1944년 4월 예비역 보병 중좌 신분으로 재소집 돼 조선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기 위해 만든 경성 육군병사부에서 과장으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백홍석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7월까지 조선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원회 역시 백홍석의 경성 육군병사부 근무기록을 언급하며 “1940년대 초 징병제가 결정되자 가장 먼저 병사부의 확대 설치가 필요하게 됐다”라면서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이 본격화되면서 병사부에는 조선인 장교들이 부임했고, 경성과 해주에 각각 백홍석과 신태영이 부임했다”라고 명시했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업무를 조선인 장교들에게 담당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동원업무의 편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조선인에게 조선인의 동원을 맡기는 일제의 교묘한 식민지배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해방 후 고위직으로 영전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백홍석 역시 여타의 일본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활동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통위부(현 국방부) 자문역에 역임된 백홍석은 1948년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백홍석이 거친 특별훈련 과정은 1주일이었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949년 7월 백홍석은 정일권 준장, 신태영 준장 등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았다. 당시 백홍석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은 고위직 장교 중에는 채병덕도 있었는데, 그는 일본 육사 27기를 나와 일본군 중좌로 해방을 맞이한 인물이다. 백홍석의 사위였다.

해방 후 장인 백홍석이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을 때 스물다섯 살 어린 사위 채병덕은 이미 최고위급 장성인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었다. 채병덕은 해방 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마친 뒤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중대장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됐다. 이후 통위부 총참모총장 등을 거쳐 1948년 12월에 육군 준장에, 두 달 뒤인 1949년 2월에 육군 소장에 올랐다. 동시에 대한민국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초반 안이한 판단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950년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 친일파 백홍석, 정부는 2009년 백홍석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지정해 발표했다. ⓒ 재향군인회 홈페이지 캡처

백홍석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으로 재직했고, 1953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병무감을 거쳐 1954년 동부지구 경비사령관, 1955년 대한민국 육군 제33예비사단(현재의 제17보병사단) 단장을 역임했다.

백홍석은 현역 군인이던 1952년 2월,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특이한 점은 제대 군인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재향군인회가 한국전쟁 중에는 백홍석과 백승훈(2대 회장) 등 현역 장성들이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종료 후인 53년 7월부터는 3대 회장인 신태영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성출신들이 재향군인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백홍석은 1960년 10월 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충원 밖에 안장됐던 백홍석은 2003년 3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중턱에 위치한 176번 무덤으로 이장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로의 이장은 이장시기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유족의 희망에 따라 원하는 시기에 이장 절차가 진행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한 공식보고서에 “일본군 중좌 출신 백홍석은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면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라고 기술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된 백홍석은 정부에서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백홍석 (1890~1960) –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는 친일파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 에 이름까지 올렸으나 조선일 출신으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는 못하고 1943년 예편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예비역 신분으로 재소집돼 조선청년들을 전선에 보내는데 앞장섰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은 1주일이었다. 사망 후 현충원 밖에 안장됐으나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으로 이장됐다.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홍석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다르게 말한다. “조선인 병력동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 점 부끄럼 없다”는 ‘참군인’의 부끄러운 과거 백홍석 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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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2017년 『항일음악 330곡집』을 발간한 이후 <항일음악회> 개최 등 항일음악 보급을 통한 독립정신 선양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YTN 라디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문을 받아 2020년 11월 ‘국치추념가’를 시작으로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를 방송 중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립군가 복원 프로젝트 : 100년의 소리>

☞ 25편 :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 24편 : 광복군 제3지대가 _ 김일진(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장군, 광복군 오광심 지사 아들)

☞ 23편 : 추도가 _ 원형재(원심창 선생 아들)

☞ 22편 : 한반도가 _ 나중화(나창헌 선생 아들)

☞ 21편 : 독립군행진곡 _ 김완태(전 육군사관학교장)

☞ 20편 : 영웅추도가 _ 김성태(오석 김혁 장군 증손자)

☞ 19편 : 선봉대가 _ 권현(권기옥 선생 후손)

☞ 18편 : 대한혼가 _ 김재홍 함경북도지사(규암 김약연 선생 증손자)

☞ 17편 : 희망가 _ 김수옥(우사 김규식 선생 손녀)

☞ 16편 : 목동가 _ 김정륙(독립운동가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아들)

☞ 15편 : 고려인 홀로아리랑 _ 안톤 강(독립운동가 유상돈 선생 증손자)

☞ 14편 : 여옥사_8호감방의노래 _ 김정애(유관순 열사 조카 며느리)

☞ 3·1절특집: 끝나지않은 노래’독립운동歌’

☞ 13편 : 기전사가 _ 정철승(독립운동가 규운 윤기섭 장손)

☞ 12편 : 최후의결전 _ 우원식 국회의원(임시정부 법무국 비서국장 김한 외손자)

☞ 11편 : 올드랭사인애국가 _ 김주(심산 김창숙 손녀)

☞ 10편 : 광복군아리랑 _ 장병화(광복군 장이호 지사 장남)

☞ 9편 : 앞으로행진곡 _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김의한, 정정화 외아들)

☞ 8편 : 독립군가(임청각이 복원되던 날)

☞ 7편 : 신흥학우단가 _ 이종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의장(우당 이회영 손자)

☞ 6편 : 새야새야파랑새야 _ 정남기(동학농민군 비서 정백현 손자)

☞ 5편 : 격검가 _ 차영조(동암 차리석 아들)

☞ 4편 : 압록강행진곡 _ 광복군 김영관 지사

☞ 3편 : 신흥무관학교교가 _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자)

☞ 2편 : 안중근옥중가 _ 함세웅 신부

☞ 1편 : 국치추념가 _ 이준식 독립기념관장(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외손)

☞[출처] YTN Radio: 독립운동歌 복원 프로젝트, 100년의 소리

토, 2021/08/14-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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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사 작곡 교가·일본신사 잔재 등…교육청 “후속 조치는 자율”

친일 인사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학교 홈페이지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인천 지역 학교에 대한 일제 잔재 조사가 지난해 본격적으로 시행됐지만 별다른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15일 인천시교육청에 따르면 지난해 4∼12월 지역 초·중·고교와 특수학교 523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모두 81건의 일제 잔재 사례가 파악됐다.

이 중 22건은 친일 작사가나 작곡가가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 사례였다.

특히 ‘섬집 아기’와 ‘봄이 오면’의 작곡가로 유명한 이흥렬이 만든 교가도 7개 학교에서 사용되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흥렬은 일제강점기 일본음악의 수립을 목적으로 창설된 대화악단 지휘자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또 다른 친일 인사인 김동진이 만든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도 6곳에 달했다. 김씨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음악 활동을 했다가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친일 인사의 동상이나 일본 신사 잔재 등 일제 관련 기념물이 교정에 남아 있는 학교는 3곳으로 파악됐다.

나머지는 서운, 송월, 백마, 작약도 등 일제강점기에 일본식으로 변형된 지명이 교명과 교가 가사에 남은 사례였다.

시교육청은 이 같은 조사 결과를 각 학교에 알렸으나 개선은 권고 사항에 그쳐 눈에 띄는 후속 조치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학교 동문회와 학교운영위원회 등 내부 협의가 필수적인 만큼 교내 일제 잔재를 없애기까지는 시일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 천황을 섬기던 신사의 돌기둥과 석등이 교정에 남아 있는 인천 중구 모 고교의 경우 별도의 시설물 철거 계획을 논의하지는 않은 상태다.

인천 연수구 모 중학교에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한 윤치호의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나쁜 역사도 역사로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철거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동창회 차원에서 재원을 마련해 학교 설립자 동상을 세운 것이라 학교 마음대로 없앨 수 없다”며 “내부 검토를 여러 차례 했지만 역사를 기억하자는 차원에서 동상을 남겨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친일 인사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쓰고 있는 학교들도 대부분 즉각적인 개선 조치에는 나서지 못했다.

친일파가 교가를 작곡한 인천 연수구 모 고교는 추후 학생, 학부모, 동문회와의 협의를 거쳐 교가 일부를 개사하는 방안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인천 동구 모 고교도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에 대해 별다른 개선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인천시교육청 관계자는 “일선 학교에 일제 잔재 조사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알리기는 했지만 후속 조치는 자율적으로 하도록 했다”며 “이후 각 학교의 개선 여부에 대해서도 추가 조사를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은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8-15> 연합뉴스

☞기사원문: 인천 학교들, 일제 잔재 남아 있어도 개선은 ‘거북이걸음’

※관련기사

☞서울신문: 친일파가 만든 교가…인천 각급 학교 일제 잔재 파악하고도 ‘개선‘ 소극적

화, 2021/08/17-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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