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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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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admin | 목, 2020/03/26- 02:40

[식민지 비망록 56]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원화성 팔달문 쪽에서 성벽 옆의 계단길을 삼백미터 남짓 따라 올라가면 서남 암문 앞쪽에 이르러 숲속의 작은 빈터에 자리한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1969년 3월 1일 ‘삼일독립기념탑’이란 명칭으로 중포산(中布山)에 조성되었던 것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1969년 4월 12일 창립)에 의해 그해 10월 15일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전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기념탑 바로 옆에는 이것과 함께 옮겨온 약간은 이색적인 또 다른 기념비 하나가 남아 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앞뒷면에 한글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새겨넣은 것이 눈에 띈다. 한쪽 옆에는 ‘수원읍민 수원군내 학생 일동’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기 4281년 8월 15일 건립(유근홍 씀, 이상훈 만듬)’이란 글씨가 있다.

 

수원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이다. 원래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있었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제막 관련 기사이다. 일제 때 조성된 ‘순직경찰관초혼비’를 헐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이 비석이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내력이 궁금하여 신문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동아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수원에서 대한독립기념비 제막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 말미암아 쓰러진 수많은 선열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 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 독립기념비의 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閔) 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끊임없는 지성으로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 오던 바 연공사일 80일 만에 52만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쁨은 더 한층 크련만 지하에 잠든 투사들의 영령 좋아 이 비(碑) 위에 감돌아 춤출 것이다. 이 뜻 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오 11시부터 이(李) 대통령 대리인 신(申性模) 안(安浩相) 신(申翼熙)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구(具滋玉) 경기도지사와 당지 유지 다수 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민(閔泰鼎) 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 내무장관으로부터 뜻 깊은 독립기념비 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쁨이란 바로 여기 세운 기념비와 같이 있는 것이다.(하략)

 

이 기사를 통해 이 비석은 표면상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듬해인 1949년 1월 16일에 제막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궁금증은 <조선중앙일보>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독립기념비, 내무장관 참석 제막식> 제하의 기사를 통해 풀어낼 수 있다.

 

16일 아침 9시 30분 경무대를 나선 내무장관 신성모(申性模) 씨 수행을 따라 경원(京原)간 40리(哩, 마일) 연도의 싸늘한 공기를 헤치고 기자는 이곳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언덕 위에 뜻 깊이 선 대한민국독립기념비(大韓民國獨立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하였다.……
이 기념비는 지난 10월 22일에 착공하여 준공까지 연공사일(延工事日) 80일간 그리고 52만 원의 공사비로 민(閔) 수원군수와 유지를 비롯한 26만 명의 군민과 더불어 어린 3만 명 학도들의 열렬한 지성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비는 3.1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虐殺)하고 맞아죽은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과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 해방과 함께 분쇄(粉碎)하여 버린 그 자리에 지금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우리가 꿈속에도 그리워 마지않던 독립비는 당당히 그 자리를 힘차게 나타낸 것이다.(하략)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의 정체가 “3.1 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하고 맞아죽은 일본인 순사들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1889~1919)는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으로 1919년 3월 28일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현지에 파견되었다가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권총을 발사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에게 쫓겨 돌에 맞아 처단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 1895~1919)는 수원경찰서 화수리경찰관주재소의 순사이며,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주재소로 몰려든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총격을 가하며 도망을 가다 그를 추격한 군중에 의해 역시 처결되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 (1937)에 수록된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관련 항목이다. 여기에는 “소요사건 때 폭동진압 중 투석(投石)에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적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1937년에 발행된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殉職警察 消防職員 招魂享祀錄)>을 보면,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경성일보> 1919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서 노구치 순사부장과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의 사망에 관한 보도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추모비를 걷어내고 이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리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숨진 만세시위대 희생자들을 기리는 뜻도 함께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듣자하니 독립기념비의 기단석은 추모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니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일제치하를 벗어난 극복의 의미를 일부나마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은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비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자료가 알려진 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일본어 신문 몇 종류를 뒤져보니, <경성일보(京城日報)>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순직경관 기념비, 27일 성대한 제막식을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간신히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경성일보>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순직경찰관초혼비’의 제막 당시 모습이다. 이 비석의 사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하 내용 생략)

 

여기에서 말하는 ‘화홍문의 고대’는 앞서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제막장소였던 ‘방화수류정 언덕’과 동일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특히 이 기사에는 그동안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비석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통해 비석의 전면에는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순직경찰 소방직원 초혼향사록>(1937)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순직한 경찰관은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이외에는 전무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이 초혼비는 결국 전적으로 3.1만세사건 당시에 숨진 두 일본인 경찰관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해마다 4월이 되면 이들을 위한 초혼제가 거행된 흔적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조선신문(朝鮮新聞)> 1935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착된다.

 

[수원] 일찍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폭민(暴民) 때문에 순직(殉職)했던 노구치(野口), 가와바다(川端) 양 경찰관에 대한 제17회 초혼제는 수원경찰서 및 경우회(警友會) 주최 아래 4월 27일 오후 1시부터 양씨 기념비전에서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우천(雨天) 탓에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집행, 제주(祭主) 후지타 서장(藤田署長), 경우회장(警友會長), 곤도 토라노스케(近藤虎之助), 내빈(來賓) 오카와우치 군수(大河內郡守)의 제사(祭詞)와 옥관봉전(玉串奉典) 등이 있은 후에 후지타 서장으로부터 경우회 및 내빈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개연(開宴)이 있었는데 당일의 인원은 이백여 명으로 종래 그 예를 보면 성의(盛儀)를 이뤘다.

 

<매일신보> 1929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제9회 순직경찰관초혼제의 광경이다. 여기에는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죽은 일본순사들의 제단으로 사용되는 모습과 야마나시 조선총독이 제단에 옥관(玉串, 타마구시)을 바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례도 살펴보니까 3.1운동 과정에서 죽은 일본군 헌병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위한 기념비가 건립된 흔적이 눈에 띈다. 우선 강원도 이천군에서는 이천헌병분견소(伊川憲兵分遣所)의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죽은 고세진(高世鎭)을 위한 비석이 건립되어 1921년 10월 15일에 제막된 일이 있었으며, 평안남도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에 중상을 당하여 결국 숨진 성천헌병분대장 헌병대위 마사이케 카쿠조(政池覺造)의 기념비가 특히 사이토 조선총독의 휘호를 받아 1925년 10월 10일에 제막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경우, 그들에 대한 초혼제가 수원지역에서만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초혼비가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초혼제’에도 당연히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초혼제는 초기에는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거행되었고, 1926년 7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어김없이 초혼제가 개최된 바 있었다. 1935년부터는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여 함께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도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이들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는 고약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처럼 죽은 ‘왜놈 순사들’을 극진히 모시는 초혼제는 해마다 거행되면서도 정작 그들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가 벌어졌다는 얘기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동아일보> 1923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수원사건(水原事件)에서 김상옥사건(金相玉事件)까지, 허다참극(許多慘劇)의 와중(渦中)에 순직했다는 경관이 46명, 그 중에는 조선사람도 열아홉」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초혼제를 지켜보는 그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늦은 봄비가 개일 듯 말 듯한 작일 왜성대(倭城臺)에서는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최로 소위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초혼의 제물을 받는 그들 중에는 전염병(傳染病)의 예방에 종사하다가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있으며, 저희들끼리 격검(擊劍)연습을 하다가 맞아 죽은 자도 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강도(强盜)나 절도(竊盜) 범인을 잡으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그리고 또한 가지는 무수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들을 죽이다가 다시 독립단들의 들쳐오는 총칼에 맞아 죽은 자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단의 손에 죽어 버린 자는 전체 일백 한 사람 중에서 마흔 여섯 사람이나 되며 다시 그 중에서 열아홉 사람은 조선의 아비를 모시고 조선의 아들을 거느린 조선사람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는 독립단과 또는 독립에 관한 사건으로 싸우다가 죽은 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3월 1일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 소리가 일어난 지 스물일곱째 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피가 끓게 한 수원의 참사(水原慘事) 당시에 약한 주먹에서 날리는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하여 금년 1월 17일 새벽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육혈포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 전촌(田村)으로 끝을 마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백 한 명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 남은 혼(魂)을 불러주는 자의 정성에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구별이 없이 또는 전염병을 예방하다가 죽었든지 독립단을 죽이다가 죽었든지의 구별이 없이 오직 사람으로의 최후의 목숨을 버린 그를 위하여 설워하는 줄을 아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람으로의 죽음’을 위하여 가석히 여기는 동시에 그 일이 명의 경관들이 죽어 넘어진 벌판에 다시 기백 천 ‘사람’의 죽음이 깔렸음을 과연 기억할는지, 일백 한명의 죽음은 초혼의 제물을 받치는 자나 있거니와 궂은비에 추추히 우는 기백 천의 영혼은 부칠 곳이 어디인가?

 

이 기사의 원문에는 원래 기사작성자의 표시가 없으나 해방 이후에 나온 소오 설의식(小梧薛義植, 1900~1954)의 <금단의 자유>(새한민보사, 1949), 150~151쪽에 이 기사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청년기자 시절의 그가 이 글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순직경찰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는 수백, 수천의 불쌍한 죽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하겠다.
해방 이후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초혼비가 헐리고 바로 그 자리에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들어선 것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 외면받고 있던 수백, 수천의 영혼에 대한 추모와 위령의 뜻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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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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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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