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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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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admin | 목, 2020/03/26- 02:14

[기고]

항일운동 유적지 취재기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이은지 YTN 라디오 PD

 

과거 역사를 더듬어보고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지점이 한·러수교 30주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데에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소련의 많은 레거시(전통)를 부정했는데 현대까지 계속 유지되는 것 중 하나가 ‘꺼지지 않는 불꽃’ 이라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겠다, 그들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잊힌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새롭게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지켜나가고,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오성환 총영사 인터뷰에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서간도를 답사한 후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무명씨의 꿈〉(연출 : 이은지, 구성 : 홍기희)에 담았던 문장입니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이런 ‘투쟁’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필수적인 과정은 시간을 다툽니다.
기억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 양과 선명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대부라고 불렸던 ‘페치카 최’ 최재형의 손자인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이 지난 2월 14일 별세했습니다.
“이제라도 찾고, 우선 기억하는 것부터 기록해놓아야 한다”던 그의 한마디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에 저는 지난해 11월 해간도 항일독립운동 본거지라고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답사하고 온 기억들을 이곳에 기록합니다.
연해주(沿海州)는 해간도(海間島)로 불리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 거점이라고 하죠.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의 동의회, 안중근의 단지동맹, 헤이그 특사 출발지,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한인들과 해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었던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① 한글 주소가 있는 곳,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한촌을 두고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서울거리 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 한민학교와 이동휘 선생 집 추정 터

 

구글맵을 켜고 신한촌이 있었다던 산등성이를 올라가봤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춘원이 묘사했던 당시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문이 있었다던 곳은 듬성듬성한 겨울나무로 채워져 있어, 추정만 가능할 뿐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바로브스크 울리짜 7번지에 살고 있는 김치보와 서울스카야 9번지에 살고 있는 채성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신한촌 일대에 서울 거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인데, 실제 ‘서울거리 A2’ 주소판이 부착된 집 한 채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가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구글맵을 켜고 영하 10도의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 폐가들로 둘러싸인 곳, 앞으로는 철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대신 한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이 집을 알고 있나요?”
“네.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았었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한국에서 방문객이 많이들 찾아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죠.”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나와 ‘얀덱스’를 켜보니, 이런!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바로보스크 22번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바로 그 주소였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상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② 한인들의 터전 신한촌과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묵념을 하고 참배객을 기다리는 사이 30여 분간 한국인 관광객 2팀과 러시아인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한인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이곳에 거주하다가 탄압당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저희는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져서 선조들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신한촌 기념비에서 만난 러시아인 부부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됐고 이렇게 행복하게 됐는데, 부디 이 얼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봅니다. 굳이 여기를 한번와서 찾아 뵙고 싶더라구요”
–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 모녀

 

허술한 철조망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3개의 탑과 주변의 8개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설명으로는 일제강점기 3개의 임시정부와 강제이주 당한 8개 지역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념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을까? 같이 갔던 가이드는 당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고려인 자원봉사자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는데, 남편 되는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기념비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낙서를 하거나 오물을 버린 흔적이라고 합니다.

 

킹크랩을 먹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 향했습니다. 맛집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핫플레이스랍니다. 거리의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킹크랩과 독도새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과거에는 ‘개척기’로 불렸던 까리에스키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를 했다는 대동공보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우리 관광객들 중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걸었던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③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필자 이은지 PD

 

“어떤 역인지 알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가 무슨 역이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요. 이곳에서 누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

“몰라요.”

“가이드가 설명 안해주던데요.”

2019년 11월 25일 아침.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 철길에도 우리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고 하죠.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가 출발한 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각보다 조용히 역사를 들어오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역사 안은 아담했습니다. 다만 입출구가 여러 개인데다 각각 거리가 상당하고 드나들 때마다 짐 검사를 받아야 해서, 탑승할 열차와 개찰구를 잘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전속력 달리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우수리스크로 향하기 전, 오성환 총영사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와 우리 영사관이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사탐방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지를 찾아서 안내판 같은 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러시아 시정부한테 제안해왔습니다. 신한촌, 구한촌… 여러 역사 유적지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지도로 만들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단순히 킹크랩 먹고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영사관이 지도를 제작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 측에서도 사적지 지도 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일유적지 지도앱을 보면서 답사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④ 고려인 이주의 피눈물이 서린 철길, 라즈돌노예 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 우수리스크.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는데,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3시간 30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처음 정차한 곳은 라즈돌노예 역이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가끔 멈췄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그냥 천으로 덮어 기차역 플래폼에 남겼습니다. 역 객차에서 아이가 숨져 창문 밖으로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 일을 보다 깔려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야 으깨어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 김 블라지미르 회고록에서 기차역이 이토록 슬프게 보일 수 있을까. 눈 쌓인 철도가 이토록 서럽게 차가울 수 있을까.
눈발이 매섭게 날리던 날 라즈돌노예 역의 전경은 비통하다 못해 아팠습니다.

 

⑤ 강물소리에 묻힌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초입 수이푼강 근처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허비는 왜 강가에 있을까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 화장해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른다고 하니, 그 위치 선정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허비를 둘러싸고 물길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2017년 김정숙 여사 방문 시에 자갈길을 깔았으나 그해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갔고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 도로까지 물이 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겨울이 와 얼어붙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러시아에서 9년을 살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관리가 정말 안 된다. 한국인들이 관리 안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라며 우수리스크 지역 내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 문제를 지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유허비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고 묵념을 했습니다.

⑥ 작은 간판 하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개최지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됩니다. 그 전신으로 1918년 6월 열렸던 제2회 전로한족중앙총회 자리가 현재 학교 운동장으로 변해 남아있습니다. 주소는 우수리스크시 막심고리끼거리 20번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안내문 하나를 설치해 건물 입구에 달아두었다고 하니, 타 유적지에 비해 다행인 일입니다. 문이 잠겨있어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였던 학교 건물과 안내문

 

⑦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페치카 최재형의 집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태어날 당시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시 탄압 대상자였습니다.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최재형 선생의 DNA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하는 일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록해놓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재형 후손 최 발렌틴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모스크바 어느 한식당에서 최재형의 후손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그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 14일 별세했습니다. ‘조국은 최재형 선생은 잊은 적이 없다’ 라는데, 그는 사고 후 병원비 5만 유로가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은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한 벽돌집. 한쪽 창문이 깨진 상태 그대롭니다.

 

최재형의 집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라고 적혀있는 이곳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선원생활을 하며 재력을 쌓았고, 그 돈으로 한인들의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의회, 대동공보, 권업회의 중추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구요. 안중근 의사의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는 최재형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어 교육실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최재형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다른 유적지의 황량함, 황무지에 내버려둔 듯한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최재형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료마다 QR코드가 부착돼있었는데, 현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QR코드 연결은 힘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잡혀갔던 4월참변을 추도하는 기념비는 코마로바거리 1번지에 세워져있습니다. 러시아정부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올해는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잃어버린 해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간 선조들의 해간도 투쟁 이야기.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 주축이된 이범윤 부대, 그리고 성명회와 최재형과 홍범도의 권업회·권업신문,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강제이주의 역사까지, 수많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곳.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성명회)의 역사를 이제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록해놓는다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경천아일록을 보며) 김경천 장군이 일기를 썼을 당시는 하나의 민족으로 살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남북으로 나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조국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평화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30도 그런 추운 기후에서 활동하셨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먹을 것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어쩌면 그 모두가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혔거든요. 잊혔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경천 장군 손녀 일레나와 갈리나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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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2일, 서울북부지방법원에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2심 판결이 있었다. “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항소비용은 피고가 부담한다.” 주문 내용은 간결했고 연구소는 승소했다. 1심에 이어 2심까지 재판부는 연구소의 손을 들어주었다. 현재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가 2014년 8월경부터 인터넷에 널린 유포된 박정희 합성사진을 연구소가 조작했다며 4년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소를 음해해왔다.

 

이에 연구소는 2016년 3월 방모씨를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방모씨는 소송대리인으로 서석구 변호사(박근혜 변호인)를 선임했다. 그들은 재판과정에서 연구소를 종북단체라고 부르며 “방모씨의 행동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결단”이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1심에서 패소한 그들은 2심에서도 여전히 색깔론을 펼쳤지만 2심 재판부는 1심의 판결을 유지하며 방모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이로써 방모씨는 5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해야 하는데 방모씨 측이 다시 대법원에 상고하여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청량리 사무실에 침입해 출입문과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달아난 60대 김모씨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진심어린 반성의 뜻을 담은 사과문을 12월 20일 연구소로 보내왔다.

08작년 4월 새벽 1시쯤 연구소가 위치한 동대문구 사무실을 찾아온 김모씨는 연구소 현판에 붉은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출입문에 엑스(X)자 모양의 낙서를 한 후 도주했다. 스프레이 테러 장면이 고스란히 찍힌 CCTV를 토대로 수사에 들어간 동대문경찰서는 11월에 김모씨를 붙잡아 재물손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기소 의견을 달아 검찰에 송치했다.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서 열린 형사조정에 참석한 김모씨는 모든 것이 가짜뉴스로 인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며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말하면서 수차례 고개 숙여 사과했다. 연구소도 김모씨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재발방지를 약속한 만큼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래의 사과문은 김모씨가 형사조정의 결정에 따라 작성하여 연구소로 보내온 것이다.

 

사 과 문

상기 본인은 사건 당일 집회를 마치고 저녁식사 겸 회식자리에서 탄핵 반대 등 시국에 관해 토론을 나누는 중 잘못된 교육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분위기로 흘러 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문제라는 잘못된 소신과 판단으로 만취상태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찾아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는 황당한 행동을 저질렀습니다.이 문제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물심양면으로 피해를 끼친데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차후 두 번 다시 이런 사태를 재발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죄송합니다.

2017. 12. 20

• 임선화 기록정보팀장

목, 2018/01/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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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平和資料館・草の家)
– 가해와 피해의 역사를 넘어 저항의 시민연대를 기록하고 실천하는 평화운동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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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경

일본의 시코쿠(四国)섬 고치(高知)현에 있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평화와 교육, 환경문제를 함께 생각하는 박물관이다. 이 작은 박물관은 다음 세대에 전쟁의 실상과 평화의 귀중함을 올바로 전하는 것을 목표로 1989년 11월에 만들어졌다. 쿠사노이에(草の家)라는 이름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 시민들이 모이는 집을 의미하는데, 풀이 자라 언젠가는 숲이 되듯이 평화운동이 이곳을 통해 널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978년 5월 오랫동안 평화운동에 힘써온 교사 니시모리 시게오(西森茂夫)는 뉴욕에서 열린 유엔군축회의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주위 사람들을 모아 다음 해부터 고치에서 ‘전쟁과 평화를 생각하는 자료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전쟁의 역사를 제대로 전하여 평화의 귀중함을 알리자고 뜻을 모은 시민들은 고치공습이 있었던 매년 7월 4일을 전후로 시민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전쟁 당시의 실물자료-공습 당시 투하된 소이탄, 방공두건, 천인침, 피로 물든 군복, 철모 등-들을 모아 전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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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설립자 故 니시모리 시게오 씨

자유민권운동의 발상지이기도 한 고치에서 지자체가 자유민권기념관을 세울 때 니시모리를 비롯한 시민들은 일제 침략의 역사를 전시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매년 전시를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반납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료가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시민들은 ‘평화박물관’을 시민들의 힘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자체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시민들이 벌인 자발적인 모금운동이 좀처럼 진전을 보이지 않자 니시모리는 자신이 살던 집을 부수고 자신의 명예퇴직금을 종자돈으로 내놓아 4층 건물을 세웠다. 1층은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의 전시장, 2층은 도서실과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고, 3, 4층의 원룸들은 임대를 하여 쿠사노이에의 운영에 보태고 있다.

1층에 자리한 20평 남짓한 전시장은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조명시설을 갖춘 무대가 설치되어 있어 회의실과 교육장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콘서트 및 영화상영, 연극 공연 등도 열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한 쪽 벽면 위를 길게 둘러싸고 니시모리가 손 글씨로 직접 쓴 일제의 아시아 침략연표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연표는 일제의 침략을 흔히들 말하듯 ‘15년전쟁’(1931년 만주사변~1945년 패망)이라고 언급하지 않고, 1894년 청일전쟁부터 아시아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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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사노이에 전시장

전시내용을 보면 앞서 언급한 전쟁의 피해뿐만 아니라 침략전쟁 당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과 잔혹행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에 관한 내용 등 가해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쿠사노이에 회원들은 1991년부터 중국으로 평화기행을 떠났는데, 당시 고치대학에 주둔하고 있던 고치 제44보병연대가 침략전쟁 당시 이동한 경로를 따라 중국의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고치의 부대가 과거에 저지른 전쟁의 참상을 접한 회원들은 이를 기록하여 책으로 펴내고 전시에 반영하였다.

또한 ‘피해’와 ‘가해’의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저항’의 역사도 전시하고 있는 것이 쿠사노이에의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으로는 군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희생당한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槇村浩)(1912~1938)에 대한 전시를 들 수 있다. 마키무라는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조선인들의 항일 게릴라 투쟁과 3·1혁명에 대해 연대를 표현한 서사시 ‘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1932년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고치에 주둔한 부대에 ‘병사여, 적을 착각하지 마라’는 반전 전단을 뿌리기도 했다. 그 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고 전향을 거부하여 출옥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불과 26세의 나이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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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 시인 마키무라 코

마키무라는 쿠사노이에가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제6소학교를 졸업했다. 전시장에는 당시 천재 소년으로 불린 그가 쓴 시가 실린 소학교 문집과 ‘간도 빨치산의 노래’가 실린 프롤레타리아문학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쿠사노이에는 마키무라 관련 도서의 발간, 시비의 건립, 묘소의 정비 등 마키무라에 대한 추모사업을 통해 그의 저항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평화를 위한 동아시아 시민연대의 정신을 이 사업을 통해 이어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자연은 평화의 가장 좋은 모델”이라는 말처럼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자연과 공생하는 삶을 만들어 가는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평화헌법 9조의 정신을 지키고 인공수림으로 변질된 본래 숲의 모습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국헌법의 103개 조문과 같은 103종류의 재래종 나무를 심은 ‘헌법의 숲’을 가꾸고 있다.

쿠사노이에는 평화박물관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평화운동의 중심적인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03년 이라크 반전행동으로 시작된 반전평화 거리 선전활동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평화를 위한 모든 집회와 시위현장에서 쿠사노이에의 회원들을 항상 만날 수 있다. 또한 평화를 주제로 한 세미나, 강연회, 평화콘서트, 영화상영, 한글교실, 문화교류모임 등이 쿠사노이에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열리고 있다.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는 과거의 유물만을 전시하는데 머무는 ‘박물관’이 아니라, 지역에 굳건히 발 딛고 평화의 목소리를 세계로 발신하는 평화운동의 산실로 자리 잡았다. 비록 그 규모는 아주 작지만 그곳에서 전해 오는 평화의 목소리는 그 무엇보다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2. 사사노보효(笹の墓標) 전시관
–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발굴과 봉환운동을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는 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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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노보효 전시관

일본의 최북단 홋카이도(北海道) 호로카나이(幌加内)정 슈마리나이(朱掬内)의 깊은 산 속에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노동을 주제로 한 사사노보효 전시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사노보효’라는 의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곳 슈마리나이로 강제동원되어 댐 건설과 철도 건설현장에서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이 사사(笹-복조리를 만드는 데 쓰이는 얇은 대나무의 일종인 조릿대)라는 대나무 숲 밑에 묻혀 있었는데 이들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운동이 이 전시관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전시관에는 당시의 강제노동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강제노동 자료관으로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평화운동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강제동원된 약 3천 명의 조선인과 수천 명의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댐과 철도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슈마리나이는 이제는 150여명의 사람들 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1976년 가을, 신도가 줄어 문을 닫은 슈마리나이의 댐 근처의 절 ‘고겐지(光顕寺)’에서 수십 개의 위패가 발견되었다. 절의 본당에서 발견된 위패에는 돌아가신 분의 법명, 속명, 나이, 사망한 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위패의 이름을 보니 일본 사람이 아니라 조선 사람의 이름 같은 것도 여러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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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희생자의 묘표

왜 이런 오지의 절에 조선 사람의 위패가 있을까? 당시 마을의 할머니로부터 위패의 사연을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 ‘소라치민중사강좌(空知民衆史講座)’ 대표는 이 위패들의 사연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지자체 호로카나이쵸(幌加内町)의 사무소에서 당시 사망자의 매·화장인허가증을 조사해보니,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와 고겐지 근처의 우류댐(雨竜ダム)과 심메이선(深名線) 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졌다. 당시 공사 현장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고겐지(光顕寺)로 운반되어 그 절에 하룻밤 안치된 후에 근처의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묻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고겐지에 있는 위패의 주인들은 바로 절 근처의 댐 공사와 철도 공사 현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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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

지금까지 소라치 민중사 강좌가 밝혀 낸 바에 따르면, 전체 희생자는 210여명, 그 가운데 조선 사람이 40명, 일본 사람이 170여명에 이른다.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많은 강제노동의 현장에서 조선인들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반대하여 정치범으로 쫓기거나 빚에 팔려온 일본인 타코베야 노동자들이 일했다.

지자체의 사무소에 보관되어 있는 매·화장인허가증에는 희생자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사망년월일, 사망원인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본적지가 적혀 있었다.

‘한국에 있는 유족들은 아직도 희생자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락을 할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희생자의 본적지에 아직도 가족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족들에게 편지를 띄우자’

당시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자신도 강제연행을 당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홋카이도에서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1세 채만진(蔡晩鎮) 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본적지 주소로 편지를 띄웠다. 일제강점기에 강제연행을 당한 희생자가 슈마리나이에서 강제노동 끝에 돌아가셨고, 위패가 이곳에 안치되어 있으니 혹시 유족께서 이 편지를 받으시면 답장을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본적지의 주소는 알지만 유족들의 이름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편지를 받는 사람은 슈마리나이에서 돌아가신 희생자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편지는 한글로 적어야 했기에 당시 홋카이도 조선고급학교에 다니던 채만진 씨의 아들 채홍철(蔡鴻哲, 현재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를 생각하는 홋카이도포럼 공동대표)이 유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이후 몇 명의 유족들로부터 답장이 왔고, 고겐지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던 유골 가운데 유족이 확인된 일부는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매·화장인허가증에 기록된 희생자 가운데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에 매장된 사람은 87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는 유족들에게 보내진 유골도 있지만, 많은 희생자의 유골은 해방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슈마리나이 공동묘지 주변의 대나무 숲에 아직도 방치된 채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도 확실해졌다.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소라치민중사강좌의 회원들, 슈마리나이 지역주민들, 재일조선인, 홋카이도의 선주민인 아이누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손에 의해 모두 4차례의 유골발굴이 이루어졌다. 희생자들이 묻혀 있다는 아무런 표식도 없지만, 주민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슈마리나이 공동묘지의 대나무 숲에서 움푹 들어간 구덩이를 중심으로 발굴 작업을 벌인 결과 희생자들의 유골 16구가 발굴되었다. 강제노동의 끝에 억울하게 죽어가 대나무 숲 아래의 암흑 속에 묻혀있던 사람들이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실로 35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골 발굴 작업은 방대한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에 지역의 작은 시민단체의 힘만으로 매년 발굴을 지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대나무 숲에 잠들어 있는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다시 발굴을 재개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일단 발굴 작업은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골 발굴도 어려운 작업이지만 한국의 유족을 만나고 돌려주는 과정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운동의 초기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 도노히라 요시히코가 한국의 유족들을 만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 한국은 군사독재 시대였다. 도노히라 일행이 김포공항에 내려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정보기관의 요원들이 줄곧 미행을 했다. 도노히라 일행은 도쿄의 하네다(羽田)공항으로 무사히 돌아와 다시는 한국에 가지 못하겠다고 두려움에 떨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한편, 어렵사리 주소를 물어물어 찾아가 만난 희생자의 유족들은 강제동원된 채로 소식이 없던 가족의 소식을 알고 일본에서 찾아온 이들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과 슬픔을 쏟아내며 분노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식민지 시대에 일본군으로 그리고 강제연행으로 끌려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맺힌 한을 풀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일본 사람에게 자신들의 설움과 억울함을 쏟아내는 한국의 유족들을 대면하고, 소라치민중사강좌 일행은 식민지 시대가 남긴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1983년의 마지막 유골 발굴 작업으로부터 14년이 지난 1997년, 소라치민중사강좌의 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989년 도노히라 요시히코 대표와 한양대학교 정병호 교수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한국과 일본, 재일조선인, 아이누의 젊은이들의 공동작업으로 슈마리나이에서 강제연행·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 발굴이 재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97년 7월, ‘과거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를 몸으로 체험하며, 미래를 함께 열어간다’는 구호로 슈마리나이에 강제동원되어 강제노동의 끝에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한일대학생공동워크숍’(이후 2001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으로 바뀜)이 열렸다. 충북대학교 박선주 교수의 지도아래 재개된 열흘 동안의 발굴 작업으로 모두 4구의 희생자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이후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은 홋카이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유해발굴을 계속하였다.지난 2015년 해방 70년을 맞아 그동안 발굴되거나 사찰의 납골당에 있던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115구가 ‘70년만의 귀향’이라는 행사를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희생자들의 유해는 홋카이도에서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부산, 서울로 희생자들이 끌려간 길을 거슬러 돌아오는 열흘간의 긴 여정의 끝에 서울광장에서의 추모식을 거쳐 파주시에 위치한 서울시립묘지에 마련된 ‘70년만의 귀향’ 묘역에 안치되었다.

올해 20주년을 맞이한 동아시아공동워크숍의 무대가 된 사사노보효 전시관에서는 식민지 조선에서 홋카이도의 깊은 산 속까지 끌려와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이 맺어준 만남이 내일의 동아시아의 평화를 꿈꾸고 실현하는 만남으로 이어져 계속되고 있다.

월, 2017/08/2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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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률 성신여대 교수

 

지난겨울 촛불 시위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고 개탄하였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국가 정보기관인 국정원에서 정권에 비판적이라 지목된 연예인들의 합성사진까지 만들어 유포했다고 하니 정말 이러한 탄식이 나올 만도 하다.
추석 연휴 기간 중 많은 언론들이 적폐청산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사 청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흔히 보수 언론과 논객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미래를 대비하자고 강조한다. 또한 당장 안보, 경제 등 긴급한 현안들이 있는데 과거사 청산 같은 일에 몰두하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매번 지겹도록 듣는 식상한 것이긴 하지만, 과거사 청산 작업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일으키는 데 상당히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프레임이다. 이러한 주장은 과거와 미래를 극단적으로 분리시켜 보는 것으로, 역사인식 차원만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도 큰 문제를 초래한다.
많은 사람들이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위해 자신이 이미 지출한 내역을 가계부에 꼼꼼하게 기록하며 자신의 소비생활을 성찰한다. 그러나 가계부를 아무리 잘 써도 이미 지출한 돈은 단 한 푼도 회수되지 않는다. 이미 지출해 버린 것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실용주의 논리를 적용한다면 아마도 가계부보다는 미래의 지출 계획서를 작성하여 미리 불필요한 지출을 방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다가올 미래는 다양한 변수와 변화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예측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불확실한 미래를 그나마 좀 더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대비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해야 하고 확실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꼼꼼한 정리와 깊이 있는 성찰이다. 과거에 대한 충분한 정리와 성찰 없이 그냥 막연하게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시간 낭비이다. 그러하기에 동서고금을 통해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생활을 위해 지출 계획서를 미리 작성하기보다는 우선적으로 가계부를 주로 작성해왔던 것이다.
잘못된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이니 접어두고 긴급한 현안과 미래에 대비하자는 이야기는 사실상 미래를 중시하는 태도라기보다는 그냥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이 계속되기를 희망하는, 그러하기에 다양한 변화가능성이 없는 미래를 희망하는 수구 기득권 세력의 논리를 묘하게 미래 지향성이라는 단어로 치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최순실 사태를 보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잘못된 과거를 제대로 정리하여 성찰하지 못하면 불행이 반복된다는 너무나 평범하지만, 쉽게 자주 놓쳐 버리는 역사의 진리이다. 박근혜와 최태민·최순실 등 최씨 가문과의 관계는 1970년대 말 유신체제하에 전개되었던 새마음운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마음운동은 ‘충’과 ‘효’를 강조하는 일종의 관제 대중운동이었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었다는 사실보다는 유신체제기 중요한 관제 대중운동의 하나인 새마음운동의 주도자였다는 것이 정말 더 큰 문제였다. 새마음운동에 대해서는 2007년 이명박과의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정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불충분하게 다루어졌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만약 그때 이러한 문제가 충분히 드러나고 시정되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겪은 커다란 혼란과 고통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혹독하게 치렀던 것이다.
또한 과거사 청산이 쟁점이 될 때마다 나오는 소리 중에 하나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색출하고 책임을 묻는 인적 청산보다는 이러한 문제를 발생시킨 제도와 관행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인적 청산과 제도적 청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마치 이를 양자택일적인 문제로 말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잘못한 사람들을 밝혀내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은 제도와 관행을 청산하기 위해 유보하거나 부차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법적 처벌을 받거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불행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범죄자를 수사와 재판을 통해 가려내어 처벌하지 않고, 범죄 예방을 위한 제도만 개선하면 범죄를 막을 수 있을까? 아무리 형식적으로 좋은 제도를 구상하여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영할 사람들의 사고와 행태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할 리도 없다. 따라서 인적 청산이 없거나 유보되는 제도적 청산은 무의미하고, 역시 공허하다.
요점은 과거사 청산 작업을 단기적인 인적 청산에 머물지 말고 문제를 장기적이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와 관행의 개선으로 연결해 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적인 범법행위, 비리행위만을 조사하고 시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지 못했던 제도와 관행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블랙리스트나 국정교과서 문제의 경우 이를 주도한 사람들도 밝혀내야 하지만, 이 일과 관련된 조직 내부의 사람들이 그것이 부당한 것임을 알 수 있었음에도, 왜 여기에 침묵하거나 순응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규명해야 한다. 이는 결국 내부의 비판자, 고발자를 소외시키는 구조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발단은 문체부 직원들에 대한 부당한 인사 조치로부터 시작되었다. 결국 이러한 문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조직 내부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풀리는 문제이다. 또한 국정원 댓글 공작에서 나타나듯 국가기관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사회적 감시 및 통제 장치를 만드는 것도 시급해 보인다. 이러한 일들, 특히 제도 개선과 관련된 부분들은 단지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기보다는 시민사회의 능동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러한 관심과 참여를 바탕으로 적폐청산을 통해 여러 폐해들을 해결할 때 그 혜택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누리게 될 것이다.

목, 2017/10/1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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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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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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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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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흥 광주지부장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헤엄치지 말고
걸어서 가자
배 타지 말고
버스로 가자
비행기 타지 말고
기차로 가자

오늘 못 가면
내일 또 가고

 

모레도 못 가면
글피에 또 가고

올해안에 못 가면
내년에 또 가고
내년에도 못 가면
그 내년에 또 가고

서둘지 말고 가자
싸목싸목 가자

우리가 섬이냐
땅으로 가자

화, 2018/03/2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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