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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로드를 찾아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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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로드를 찾아서(2)

admin | 목, 2020/03/26- 03:04

[후원회원 마당]

김산의 <아리랑>로드를 찾아서(2)

주동욱 서울 송파 후원회원

광주(광저우)에 도착하다

2020년 1월 10일 ‘아리랑 답사단’ 33명이 4박 5일 일정으로 중국 광주(광저우, 廣州)에 도착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이 공항에 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아리랑 로드〉 답사는 독립운동 유적지 발굴과 연구에 앞장선 광동지부 회원들이 기획했다.
중국 남방지역 역사 답사는 드문 편이다. 이번 〈아리랑 로드〉는 독립운동사 전공자도 처음 방문하는 곳이 많고, 김산(金山)의 삶에서 가장 치열했던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여서 관심을 끌었다. 버스에서는 이정찬 교수의 열정넘친 중국 근대사 강의가 날마다 이어졌다. 〈아리랑〉과 〈김산평전〉을 읽는 답사자도 눈에 띄었다.
첫날 광주공항에서 동쪽으로 험한 길과 산을 넘어 용문현(龍門縣) ‘홍군 4사(紅軍 4師) 주둔지’에 도착했다. 1927년 12월 광주봉기(광저우기의) 실패 후 약 1,200여 명의 봉기군이 화현(花縣, 현재 화두 화성소학교)에서 개편한 부대가 홍군 4사이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인 20여 명이 홍군 4사에 있었다.

 

고담진과 해풍 답사

이튿날 고담진(가오탄, 高潭鎭)의 ‘붉은 거리’를 산책하며 본격적인 답사에 나섰다. 홍군 4사부대가 잠시 머물렀던 ‘붉은 거리’는 1927년 러시아혁명 10주년을 맞이해 조성되었다. 마르크스 동상이 세워진 광장을 중심으로 마르크스거리, 레닌거리가 이어졌고 건물마다 사회주의 혁명 구호가 적혀있다.
답사단은 연화산(蓮花山) 선인동을 거쳐 해륙풍(하이루펑, 海陸豊)의 주요 도시인 산웨이(汕尾) 해풍(하이펑, 海豊)으로 향했다. 광동성 해풍현(海豊縣)과 륙풍현(陸豊縣)을 합쳐 부르는 해륙풍은 중국 최초로 농민소비에트가 세워진 곳이다.
농민혁명가 팽배(펑파이, 彭拜)가 일찍이 해풍에서 농민운동을 전개하며 농민자위군을 창설했다. 광주에서 반혁명 정변(1927.4.15)이 일어나자 팽배가 지도하는 농민자위군이 해륙풍에 혁명근거지를 마련한다. 그 뒤 남창봉기(南昌蜂起,1927.8.1)에 참가한 부대가 해풍에 도착하여 홍군 2사(紅軍 2師)로 편성되었다. 마침내 홍군 2사와 혁명군이 봉기(1927.10.30)하여 해륙풍 일대에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한다.

 


‘팽배의 도시’답게 그를 기리는 기념관과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답사단이 ‘해풍혁명투쟁사기념관’에 도착하자 기념관장이 직접 안내를 했다. 해륙풍 소비에트 역사를 비롯해 광동꼬뮌과 중국대혁명(동정・북벌)에 참여한 조선인 기록물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김산 등 조선인 혁명가 15명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홍궁 홍장(紅宮 紅場)’은 해풍소비에트 대표회의와 군중대회가 열린 곳이다. 김산을 비롯해 홍군 4사가 해풍에 도착하자(1928.1.6) 수 만 명이 홍장에 모여 ‘인민대회’와 ‘조선인동지환영대회’를 열었다. 특히 홍장에는 홍군 2사와 홍군 4사 부대의 상봉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대형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김산이 교편을 잡았던 ‘동강당교(東江党校, 현재 해성제2소학교)’를 방문했다. 학교에서 답사단을 맞아 환영회를 열고, 교장이 당시 조선인의 활약에 대해 설명했다. 김산은 동강당교 교관으로 세계혁명사, 경제학 등을 강의하며 선전공작을 지도했다. 김산을 비롯한 조선혁명가들은 해풍 소비에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언젠가 조국에 돌아가 이러한 운동을 이끌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곧이어 당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오파령(우푸링, 五坡岭)’을 찾았다. 〈아리랑〉에서 ‘오복령(五福嶺)’으로 잘못 표기된 곳으로 지금은 한적한 공원으로 바뀌었다. 1928년 5월, 홍군은 해풍을 포위한 국민당 정부군에 맞서 오파령에서 최후의 결전을 펼쳤으나 패한다. 김산은 생존자의 최후 집결지인 검유령(젠유링, 劍遊嶺)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하며 목숨을 건졌다. 광동지부에서는 연화산 일대를 검유령으로 추정하고 있다. 답사단은 ‘홍군 4사 임시사령부’가 있던 부담촌(浮潭村)에 들린 뒤 동관(東莞)으로 향했다. 동관은 제1차 중・영전쟁(아편전쟁)이 일어난 곳이다.

 

광주(광저우) 답사

중국 광주는 중국 대륙 남부를 굽이쳐 흐르는 주강(珠江) 삼각주 하류에 자리 잡은 도시다. 광주에서 답사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다. 편의상 중국근대사 서술에 따라 답사 유적지를 정리했다.

 

1) 황화강72열사능원(黃花崗七二烈士陵園) 3・29봉기(황화강사건)의 희생자 72명이 묻혀있는 곳이다. 1900년대 초부터 쑨원이 이끄는 중국혁명동맹회가 청나라에 맞서 무장봉기 했으나 거듭 실패한다. 1911년 4월 27일(음력3월 29일), 120여 명의 결사대가 다시 봉기했지만 86명이 희생되었다.
동맹회 회원 판다웨이가(潘达微)가 피로 얼룩진 시신 72명을 찾아 수습해서 황화강에 매장했다. 3・29봉기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 해 10월 10일 우창봉기(武昌蜂起), 곧 신해혁명(辛亥革命)의 도화선이 되었다.

 

 

2) 루쉰기념관(魯迅紀念館)・중국국민당1차대회의 구지
루쉰은 광주 중산대학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기념관에 루쉰의 숙소와 강의실 등을 꾸며 놓았다. 루쉰기념관에는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회의가 열린 강당이 보존되어 있다. 제1차 국공합작을 결정한 역사적 장소이다.
1924년 1월 20~30일에 중국국민당 대표회의가 열렸다. 공산당원 모택동(毛澤東)・구추백(瞿秋白) 등도 참여해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된다. 약산 김원봉(金元鳳)과 권준(權晙)은 강당 2층에서 대회를 참관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인 두 사람은 그뒤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졸업하고 북벌에 참전했다.

 

 

3)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뒤 쑨원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1924년 6월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다. 정식 명칭은 ‘중국국민당육군군관학교’이지만 광주시 황포 장주도(長州島)에 있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고 불렀다. 개교 뒤 학교장에 장개석(蔣介石), 정치부 부주임에 주은래(周恩來)가 선임
되었다.
1925년 8월경 의열단 간부진과 단원이 광주로 오고, 의열단 본부도 광주로 옮긴다. 그 뒤 김원봉을 포함한 의열단원과 많은 조선인이 황포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거나 교관으로 활동했다.

 

 

4) 중산대학 구지(中山大學 舊址)
쑨원(孫文)은 황포군관학교를 열고난 뒤 정치 간부도 양성하고자 1924년 11월 국립광동대학을 설립한다. 이듬해 쑨원이 서거하자 그의 호를 따서 1926년에 중산대학으로 개칭했다.
1926년 〈국립중산대학 학생명책〉에 따르면 50명에 가까운 조선청년들이 중산대학에서 공부했다. 김산은 1926년 중산대학 의학과에 편입하고, 유월(留粤, 광동의 별칭)한인청년동지회・조선혁명청년연맹에서 조직 활동을 한다. 시인 이육사(李陸史)도 김산과 함께 유월한인청년동지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1926년부터 북벌이 시작되었다. 국민혁명군이 우한(武漢)을 함락하고 광주에 있던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다.
그러자 장개석이 상해에서 반공쿠데타(1927.4.12)를 일으키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세운다. 중국의 정세가 급격하게 바뀌었다.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광주에서도 국민당이 대숙청을 벌였다.
1927년 12월 11일 광주에서 ‘기의(起義)’했지만 3일만에 무너지고 7,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는 “광주와 중국을 혁명의 바람 속으로! 우리 조국을 독립의 바람 속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봉기에 참여한 약 200여 명의 조선인도 포함되었다.
광주봉기를 기리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대규모 열사능원이 조성되었다. 정문에 들어서면 정면에 억센 손으로 총을 쥐고 있는 조각상이 보인다. 열사능원 공원에 있는 ‘혈제헌원정(血祭軒轅亭)’과 동상도 눈길을 끌었다. 옥중결혼식을 올리고 같은 날 처형된 저우웬용(周文雍)과 첸티웨진(陣鐵軍)를 추모하
기 위해 세웠다.
많은 한인들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誼亭)’을 찾는다. 중조혈의정 석비 앞면에 “중국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쌓은 우의여, 영원하라!(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는 글씨가 큼직하게 쓰여 있다. 아리랑 답사단의 묵념이 끝나자 열사능원에 어느덧 긴 어둠이 내렸다.

 

6) 중산기념당(中山紀念堂)

중산기념당은 중국혁명의 선구자 쑨원을 기리기 위해 축조되었다. 쑨원의 친필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글이 새겨진 커다란 편액이 정문에 걸려있다.
“추호의 사심도 없이 백성을 위한다.”는 글 뜻에서 쑨원의 드넓은 흉금을 느낄 수 있다.

 

7) 대한민국임시정부광동청사(東山栢園)

광주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건물이 남아있다. 1938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임정요인들과 가족이 호남성 장사(長沙)를 떠나 7월 22일 광주에 도착했다. 임정요인들은 광주 동산백원(東山栢園)에서 약 두 달 간 머무르며 집무를 보았다. 2017년 건물의 현존 사실이 공식 확인되었지만 입구에 아무런 표식이 없다.

8) 대신공사 옛 건물·동아대주점·대동빈관

유림대표 김창숙(金昌淑)이 1919년 광동으로 오자 환영회를 개최한 대신공사 옛 건물, 3·1 독립선언 4주년 기념식을 치른 동아대주점, 여운형(呂運亨)·신규식(申圭植)·민필호(閔弼鎬)가 묵었던 대동빈관 건물이 남아 있다.

 

답사를 마치며

 

광동성은 옛 월(越)나라 땅이었다. 변방은 변혁의 땅으로 거듭났다. 태평천국운동, 변법자강운동,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가 움텄던 중국혁명의 발상지 광동성은 곧 중국의 근현대사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1920년대 김산・이영(李瑛, 이준열사아들)・박진(朴鎭) 형제 등 수많은 엘리트 조선인이 광동으로 왔다. 이념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은 모두 ‘진리를 탐구하고’ 중국혁명의 승리와 더불어 조선의 독립을
실현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
넷째 날 답사단은 영서봉림으로 이동해 송별회를 가졌다. 약 한 세기 전 뜨거운 조국애를 갖고 숨진 열사들을 기억하며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인터내셔널가’의 노랫소리가 광동성 널리 울려 퍼졌다. 분단으로 위축된 이념에서 벗어나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보다 깊고 넓다는 것을 느낀 답사였다.
2020년 〈아리랑 로드〉 답사는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회원들의 헌신과 노고가 아니었다
면 불가능했다. 김유 지부장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끝까지 동행했고, 박호균 사무국장과 신광용・김선주 선생이 애정과 열정으로 답사를 이끌었다. 또 많은 광동지부 회원이 함께 동행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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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식민지역사박물관과 함께하는 시민역사강좌 열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하는 민간연계 시민대학에 3년 연속으로 선정되어 시민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부터 9월 14일까지 3개월 간 진행되는 시민역사강좌는 ‘프로그램Ⅰ: 내일을 여는 선언-우리시대 표상이 된 가치들과 그 역사’ 5꼭지와 ‘프로그램Ⅱ: 한일역사부정론의 궤변’ 5꼭지로 구성되며, 매주 화요일 오후 7시 식민지역사박물관 5층 강의장에서 온라인 ZOOM
화상강좌로 진행하고 있다. 수강생은 일반 시민과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등이 참여하고 있는데, 2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 분포를 보인다.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강의지만 꾸준하게 매주 30여 명이 참여하여 시민강좌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프로그램Ⅰ은 노동, 여성, 난민, 동물생명권, 지역을 주제로 한국현대사에서 변혁을 위해 외쳐진 각 분야의 선언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시대가 현재 지향하고 있는 다음 사회의 모습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8월 17일부터 진행할 프로그램Ⅱ의 기획 의도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역사부정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자행된 강제동원의 문제를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을 이열치열로 이겨내려는 참여자들의 열기는 우리 사회현상의 변화와 역사에 대한 관심과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이라는 실천적 움직임으로 승화하고 있다.

화, 2021/07/2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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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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