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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톱]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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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톱]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admin | 목, 2020/03/05- 00:00

[김언경 칼럼]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 도쿄 2심 재판 결과에 부쳐

* 이 글은 위안부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명예훼손 소송을 지지하는 활동을 해 온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의 칼럼입니다.

지난해 10월, 저는 한겨레 전 부사장이신 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에 대해 처음 들었습니다. 임 선생은 그가 일본에서 재판을 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그를 지지하기 위해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을 만들었는데 그들이 일본에 가니 “한국의 대표적 언론단체인 민언련 사무처장이 함께 가면 좋겠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의 무역보복으로 불매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3박4일이나 일본을 다녀온다는 것이 부담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권유로 저는 우에무라 기자의 자서전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푸른역사)를 읽었고, 결국 함께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2월, 삿포로 재판소 판결을 지켜보기 위해서 저는 또 다시 우생모와 함께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그의 도쿄 재판소의 2심에서 또 다시 패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직 판결문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전해 받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매우 큽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더욱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제가 느낀 우에무라 기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보도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누구이며, 어떤 재판인가?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62)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재직 중이던 1991년 8월 11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보도했습니다(우에무라 다카시 “27년 전으로 돌아가도 다시 위안부 문제 보도하겠다” 뉴스톱 인터뷰 기사 참고). 그의 보도 사흘 뒤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기자회견을 열어서 우리에게도 많이 보도가 되었지만, 우에무라 기자의 보도는 한국보다 앞서 보도한 특종이었습니다. 그의 기사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간 주요한 외교문제로 만드는데 주요한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4년 1월, 느닷없이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일본 우익들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도쿄기독교대학의 니시오카 스토무 전 교수가 <주간문춘>에,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사쿠라이 요시코가 <주간신초> 등을 통해 우에무라가 날조기자라고 비판한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의 1991년 보도가 날조라는 주장의 배경은 단순합니다. 우에무라 기자가 쓴 당시 기사의 첫 구절에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부분이 나오는 것을 트집 잡으며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별하지 않고 썼다는 것이죠.

하지만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문제를 폭로하셨던 1990년대 당시에는 모두들 위안부와 정신대라는 표현이 혼용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에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의 전신)도 단체명에 ’정신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보면 이는 분명합니다. 우에무라 기자도 당연히 “당시 정신대라는 표현은 당시 일본과 한국 언론에서 모두 일반적으로 썼던 표현”이라고 설명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밖에도 우익들은 우에무라 기자의 부인이 한국인이라는 점 등을 빌미로 그가 사적인 의도를 가지고 기사를 날조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보도로 인해서 우에무라 기자는 우익들의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해당 보도들이 나올 당시, 우에무라는 아사이신문에 사표를 내고, 한 대학 강사로 부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당 학교에 날조기자를 고용하지 말라는 항의가 이어져 그의 임용은 취소되었습니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점을 보도했지만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우익들은 ‘일본의 매국노’라며 그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고, 심지어 고등학생인 딸에게 살해 협박까지 했습니다.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 그러나 두 재판소 모두 2심까지 패소

이렇게 일본 우익으로 인한 공격에 시달리던 우에무라 기자는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명예훼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재판은 니시오카 스토무와 <슈칸분춘>(週刊文春)을 대상으로 도쿄 재판소에서, 사쿠라이 요시코와 <슈칸신초>(週刊新潮) 등을 대상으로 삿포로 재판소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삿포로재판소 1,2심 모두 우에무라 기자가 패소했고, 도쿄재판소도 1심 패소 이후 오늘(3월 3일) 2심 결과가 나왔는데,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두 재판소 모두 우에무라의 사회적 평가가 떨어진 것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익들이 ‘우에무라는 날조기자다’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으며, 공공의 이해에 관한 사안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은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한 ‘상당한 이유’ 그 무엇도 전혀 ‘상당한 근거’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변호인 측은 두 항소심 재판 모두에 대해서 “최고재판소(일본의 대법원)는 명예훼손 재판의 경우 진실 상당성을 엄격하게 해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등재판소가 추론으로서 상당한 합리성이 있다고 판결했다”고 평하면서 이는 판례에 어긋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재판 이후 우에무라 씨와 변호인 측은 즉각 상고하겠다고 밝혔기에, 이제 두 사안은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다투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일까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삿포로 재판을 방청하는 과정에서 저는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삿포로 재판은 사쿠라이 요시코와 그의 글을 출판해 준 3개의 출판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쿠라이 요시코는 영화 <주전장>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대표적인 일본의 우익인사입니다. 그는 45년생이고 여성으로 베트남에서 출생하여 하와이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의 도쿄 지국에서 근무한 후 1980년부터 1996년까지 니혼 TV의 저녁 뉴스 프로그램인 ‘오늘의 사건’에서 메인 캐스터로 일했습니다. 일본에서 여성 캐스터의 선구자적 존재이기에 그를 ‘저널리스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쓴 글을 번역한 것들이 제법 있던데요. 일본 ‘슈칸다이아몬드’ 2018년 3월 17일호에 실린 사쿠라이 요시코의 칼럼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진행 중, 문대통령과 보수파 간의 대립에 주목>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마디로 근거도 없는 허위조작정보이며, ‘프로 막말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문재인이 구상하는 것은 헌법의 전면적인 개정입니다. 한국을 전혀 다른 나라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헌법 전문에는 한국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의 국가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그냥 ‘민주주의적’이라고 바꿉니다. 그렇게 하면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부호가 맞기 때문입니다.”

“(문재인의 헌법 개정 내용 중 하나는) ‘국민의 권리’를 ‘인간의 권리’로 수정하는 것인데 이것은 북한 김일성의 ‘인간중심’ 주체사상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재인은 적어도 이념에 있어서는 한국을 북한풍의 국가로 개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방제를 거쳐 통일국가로 향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주의화 및 북한화가 척척 진행중이라고 판단해도 될 것입니다.”

“경계 대상은 북한의 김정은만이 아니라 한국의 문재인이기도 합니다.”

우에무라 다카시를 생각하는 모임(우생모) 회원들이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재판에 참석한 모습

졌지만 이기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의 재판과정

삿포로 재판소의 2심에서 패소한 날,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자신을 도와주고 지지하는 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함께 해주는 이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 모습을 보니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어 그는 “역사적으로는 이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이 재판은 일본의 전쟁범죄와 부끄러운 역사를 파헤친 언론인과 그 역사를 부인하고 다시금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가려는 일본의 보수 우익 아베 정권과의 ‘역사적’ 싸움입니다.

그리고 삿포로 재판을 응원하기 위해 두 번 일본을 방문하면서 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는 많은 일본의 시민이 있으며, 한국의 우생모 등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작년 민언련은 일본의 무역보복 이후, 일본과 한국의 보수언론들의 하는 거짓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토크쇼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강연을 한 민족문제연구소 김승은 책임연구자는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고 규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시민사회의 노력이 매우 진정성 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때만 해도 저는 실감을 하지 못했죠. 하지만 두 차례 일본 방문을 통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양심을 지키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 시민이 존재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의 변호인단은 어마어마했습니다. 우에무라 기자 말로는 삿포로와 도쿄에 계시는 약 270명에 달하는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삿포로에서 활동하는 900여명의 변호사들 중 107명이 우에무라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실제 내가 재판을 방청한 두 번의 재판 모두 상대방 변호인 측은 4명 정도의 변호인이 앉아있는 데 비해서, 우에무라 측 변호인은 그야말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계속 들어왔습니다. 변호인석의 모든 자리가 꽉 차서 간이의자를 가지고 오고, 그 와중에 더 자리를 좁혀서 앉아야 할 정도로 변호인의 수는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구성과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 변호인부터 젊은 여성 변호인까지 정말 다양했고, 재판정에 들어서는 그들의 표정은 매우 따뜻하고 활기찼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재판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실질적으로 그와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재판이 끝나면 시민을 대상으로 재판결과와 의미, 앞으로의 계획 등을 매우 상세히 알려주는 기자회견을 했고, 다시 시민사회를 대상으로 보고회를 했습니다. 많은 변호인들이 이런 과정이 끝난 뒤 우에무라 기자와 함께 한국음식을 먹는 회식 자리까지 함께 했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모여서 우에무라 기자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변호인단의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일본의 시민들의 우에무라 기자에 대한 응원과 지지도 결연했습니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재판과정에 대한 보고회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지난 10월 그 자리에 우리가 ‘우에무라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며 인사했을 때, 여러 명의 일본인들은 눈물을 훔치는 것을 봤습니다. 감사와 환영과 연대의 표정은 지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홋카이도 주민이면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해결하는 홋카이도 모임>이라는 시민단체 활동을 하신다는 나나오 히사코(七尾寿子, ‘우에무라재판을 지원하는 시민들의 모임’ 사무국장)라는 일본 여성은 ‘우생모’가 모이는 자리마다 오셔서 시종일관 손을 잡고 우에무라 기자를 지지하기 위해 방문한 것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뜻을 전했습니다. 올 2월 삿포로 판결 이후 열린 보고회에서는 ‘경남지역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의 이경희 공동위원장(‘일본군위안부할머니와 함께하는 마창진 시민모임’ 대표)의 발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성금을 걷어주기도 했습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우익들에게 ‘매국노’로 낙인찍혀있는 상태입니다. 우경화된 일본 사회 내에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의 많은 시민들과 정의로운 변호사들은 그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비난하며 그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재판은 이런 한일 양국의 깨어있는 시민을 늘려나가고, 그들의 참여로 결국은 역사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싸움의 과정에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왜 이렇게 지극히 정상적인 기사 하나로 인해 한 인간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조차 받기 힘든 일본의 현실이 얼마나 엄혹한지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는 2019년 제 7회 리영희상을 수상했다.

한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한 우에무라 기자

마지막으로 우에무라 기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가 거듭 강조한 것은 한일 교류였습니다. 그는 현재 일본의 <슈칸 긴요비>(週刊 金曜日)의 편집장입니다. <슈칸 긴요비>는 일본의 진보적 주간지인데, 경영난에 처한 잡지사가 우에무라 기자를 편집장으로 초빙했다고 합니다. 현재 <슈칸 긴요비>는 우리의 〈시사IN〉과 기사 교류를 맺고 있습니다. 한편 우에무라 씨는 한국가톨릭대학의 초빙교수로 한국에서 강연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개학이 연기되었지만, 학기 중에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강의를 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힘겨운 재판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그는 한일 예비 언론인의 교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예비 언론인’은 우리의 ‘언론사 지망 취업준비생’과는 조금 다릅니다. 일본은 사실상 언론사에 취업이 확정된 상태의 예비 언론인들이 학업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한일 교류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에무라 기자는 2017년부터 ‘언론인 한일 학생 포럼’을 만들어서 한일 양국의 문제해결에 진정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론인의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반일감정이 매우 큰 편입니다. 그래서 처음 우에무라 기자의 이런 간곡한 호소를 들었을 때는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심 공판 당시 재판 과정을 미디어에 담고 후원하는 한국과 일본의 학생들을 보면서 저의 마음은 바뀌었습니다. 친일과 반일, 친한 반한이 아니라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양국 시민이 함께 노력하는 과정은 분명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일본 최고재판소의 최종 판결을 남겨둔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를 위해서 한일 양국의 많은 시민들이 이 재판에 관심을 갖기를 바라며, 그를 응원합니다.

*참고자료


공소인성명

오늘, 도쿄고등재판소에서 니시오카 츠토무 씨 등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니시무라 도쿄소송의 공소심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1심에 이어 우리는 패소했습니다.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시오카 씨는 2014년 2월 6일호《주간문춘》의 기사에서 제가 쓴 전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기사 A를 “날조”로 규정하는 등, 저에 대한 “날조”공격을 되풀이해왔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격렬한 “우에무라 날조 배싱(bashing)”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내정되어있던 대학의 교수직을 잃었고,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까지 받았습니다.

저는 2015년 1월 니시오카 씨 등을 고소했습니다. 저의 명예, 가족의 안전, 근무처 학생들의 안전, 그리고 전 “위안부”인 김 씨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오늘 고등재판소 판결에서는 니시오카 씨가 제 기사를 “날조”라고 주장하는 세 가지 점 중 두 가지에 대해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나, 믿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면서 니시오카 씨를 면책했습니다. 니시오카 씨는 저에 대한 직접취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니시오카 씨는 제 기사를 날조기사로 단정할 때에도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습니다. 그것이 1심에서 밝혀졌습니다.

이《주간문춘》의 기사를 보십시오. “이 때 자기 이름을 대고 나온 여성은 부모에게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고 소장에 썼고,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그렇게 답하고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소장에서도 한국 언론의 취재에도 김학순 씨는 그렇게 답하지 않았습니다. “날조” 비판의 전제 자체가 잘못되어있는 것입니다.

또, 니시오카 씨는 저의 기사 B에 대해, 저서『알기 쉬운 위안부문제』에서 김학순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던 것을 적지 않았으므로 “악질적이고도 중대한 날조”라고 규정했습니다. 우리는 이 언설을 무너뜨릴 새로운 증거를 발견하여 고법에 제출했습니다.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준비하고 있던 김 씨가 처음 변호단의 청취조사에 응한 1991년 11월 25일의 녹음테이프입니다. 여기서 김 씨는 “기생”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테이프에 근거해 기사 B를 썼습니다.

그러나 고법판결은 이 새 증거를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니시오카 씨의 결정적인 오류도 간과하고 있습니다. 결론을 내려놓은 판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에무라 날조 배싱”의 장본인은 니시오카 씨입니다. 그의 언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배싱에 가담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던 대학에 협박전화를 한 남성이 체포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제 딸을 트위터로 비방ㆍ중상한 회사원은 그 책임을 추궁 받아 배상금 지불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판결에서 그 장본인이 면죄를 받은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에무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일은 기자 여러분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부당판결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이대로라면 가짜뉴스가 거리낌 없이 유포되는 심각한 시대가 옵니다. 즉각 상고하고, 최고재판소에서의 역전판결을 기대하겠습니다.

이상


공소심 판결에 대한 변호인단 성명

전 아사히신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씨가 전 “위안부” 김학순 씨의 증언에 관한 91년의 신문기사를 둘러싸고 주식회사 문예춘추와 니시오카 츠토무 씨를 고소한 소송의 공소심에서 도쿄 고등재판소는 오늘, 우에무라 다카시 씨의 공소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렸다. 우에무라 씨 등의 논문이나《주간문춘》의 기사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은 인정하면서 진실성ㆍ진실상당성의 항변을 인정한 도쿄지방재판소 판결을 거의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추인한 지극히 부당한 판결이다.

니시오카 씨 등은 무에무라 기사에 대해 “기생이었던 김학순 씨의 경력을 쓰지 않았으니 날조다”라는 취지를 주장해왔다. 우에무라 씨는 공소심에서 91년 12월 기사의 근거가 된 김학순 씨의 증언테이프를 증거로 제출했다. 증언테이프 안에는 기생에 대한 증언이 없었다. 증언자가 증언하지 않은 내용을 기사로 쓰지 않은 것이 “날조”가 될 리 없다. 그러나 공소심은 해당 증언 테이프가 김학순 씨의 증언 전체를 기록한 것이라 인정하기 힘들다는 둥 믿기 어렵다는 트집을 잡으면서 그 증거력을 부정했다. 이런 주장은 상대방에게도 통하지 않아, 테이프의 성립과정을 입증하기 위해 신청된 본인 신문도 각하되었다. 고등재판소의 판결은 변호인단으로부터 반론의 기회를 빼앗은 기습적인 인정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판결은 8월의 우에무라 기사 중에 “여자정신대의 이름으로”라는 기사가 “강제연행을 의미한다”는 전제에서 우에무라 씨가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1심의 인정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8월에 기사에는 확실하게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써놓지 않았는가. 우에무라 씨에게 강제연행을 꾸며내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한다면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 따위를 썼을 리가 없다. 이 판결의 인정은 상식을 까마득히 벗어나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이 판결은 결론을 미리 내려놓은 너무도 조잡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한편, 고등재판소 판결은 ① 우에무라 씨가 김 씨가 기생으로 팔려갔다는 경력을 알고 있었으면서 일부러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는 사실, ② 우에무라 씨가 장모의 재판에 유리하도록 의도적으로 사실과 다른 기사를 썼다는 사실에 대해 공히 진실임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공소심의 큰 성과로써 우에무라 씨의 명예를 일부나마 회복한 것이다.

변호인단은 이번 심리 과정에서 우에무라 씨의 기사가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입증하고, 그의 명예를 회복함과 동시에, 전 “위안부”의 존엄회복 운동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고 믿는다. 이러한 1심, 2심의 성과를 토대로 최고재판소에서 끝까지 싸워낼 것이다.

이상

2020년 3월 3일

<2020-03-04> 뉴스톱 

☞기사원문:
‘위안부 최초 보도’ 우에무라 다카시 기자, 패소했지만 지지 않았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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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1/06/24- 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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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대표적 친일파 문학인
김해시의회서 청산 근거 마련
관련 위원회 구성 등 나서기로

지역 현충시설인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 뒤편에 설치된 친일파 문학인 모윤숙 시인의 시비(詩碑)를 철거할 근거가 되는 관련 조례안이 김해시의회를 통과했다.

김해시의회는 정례회 마지막날인 지난 24일 제237회 정례회 제2차 본회의에서 ‘김해시 일제잔재 청산 등에 관한 조례 제정조례안’을 통과시켰다.

이 조례안은 현재 김해시 내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조사·연구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 일제와 관련된 제국주의 상징물 등의 공공사용을 제한·조정하는 게 골자다. 이광희 시의원이 대표발의한 이 조례안에는 송유인 시의장, 하성자 시의원을 포함해 11명의 시의원이 발의자로 이름을 함께 올렸다.

조례안에는 일제 잔재 청산 사업에 관한 사항,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선양·추모·기념하는 행사나 사업 등에 참여하거나 예산을 지원하는 행위 제한, 일제상징물을 노출하는 행위 제한에 관한 사항,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설치·구성·운영에 관한 사항 등이 포함됐다.

조례안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29가지 항목으로 규정했다. 을사늑약(을사조약), 경술국치(한일합병조약) 등 일제의 국권침탈행위에 협력한 자,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거나 이를 계승한 자,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동원과 관리에 협력한 자, 침략전쟁 수행을 돕기 위해 다액의 금품을 헌납한 자, 그 밖에 뚜렷한 반민족행위의 증거가 확인되는 자 등이다.

또 ‘일제 잔재’는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 김해시 내에 남아있는 유·무형의 흔적 등으로 규정했다.

조례안에 따라 김해시장은 일제잔재 청산에 관한 사업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5년 마다 일제잔재 청산 추진계획을 수립·시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김해시 일제잔재청산위원회를 설치·운영할 수 있다.

이번에 논란이 된 시비에는 모윤숙의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모윤숙은 대표적 친일파 문학인으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2002년 8월 ‘친일문학인 42인’ 명단에 포함됐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했다.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모 시인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이런 배경 탓에 다른 장소도 아닌 애국심을 함양·고취해야 하는 현충시설에 친일행적 시인의 작품이 새겨진 시비를 존치시키는 게 맞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모 시인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시는 육군본부 1층 명예의 전당에도 새겨져 있었다가 2005년 당시 열린우리당 임종인 국회의원의 지적에 2006년 결국 철거됐다.

이광희 시의원은 “이번에 일제 잔재 청산 조례안이 통과된 만큼 모윤숙 시인의 시비 뿐만 아니라 김해지역에 남아있는 일제 잔재를 발굴하는 연구·조사 등을 종합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해뉴스 이현동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9> 김해뉴스

☞기사원문: 현충시설 모윤숙 시비 철거될까 일제잔재청산 조례 시의회 통과

수, 2021/06/30-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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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이상룡 선생 증손 이항증 이사

왼쪽부터 석주의 고손이자 종손인 이창수씨, 석주 증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이용득 민주당 상임고문이다. 강성만 선임기자

‘남아가 제 일신 아끼는 게 어디 있으랴/ 고향이 좋다고 머물러 슬퍼하지 말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석주 이상룡 선생.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꼭 110년 전인 1911년 독립투쟁을 위해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면서 지은 시 ‘거국음’의 마지막 부분이다. 석주는 망명 첫해에 우당 이회영 형제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열어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 재목을 길러냈고 1919년에는 서간도 무장 항일운동단체가 결성한 군정부인 서로군정서 독판도 지냈다. 임시정부 국무령(1925~26)을 지내고 6년 뒤 생을 마칠 때 그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고 유언했다.

석주 생가이자 경북 안동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지난해 말 마당을 가로지르던 열차 운행이 멈추면서 복원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안동시는 280억 원을 들여 2025년까지 일제가 기찻길을 놓아 훼손된 99칸 임청각의 원형을 살리고 임청각 사람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도 세울 예정이다.

지난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석주 증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석주 고손이자 종손인 이창수씨, 임청각 후손 이용득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임청각은 ‘독립유공자 11명을 배출한 구국의 성지’다. 석주의 부인(김우락)과 아들(준형), 손자(병화)를 비롯해 임청각 사람 11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고 석주의 처가와 사돈집까지 하면 40여 명이다. 이 이사의 조부 이준형 선생은 부친의 유고 정리를 끝낸 1942년 생일날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고 부친 이병화 선생은 일본 경찰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52년에 세상을 떴다. 이 이사의 큰 형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숨졌고, 둘째 형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셋째와 넷째 형은 철도와 의료 사고로 숨졌다. 다섯째 아들인 그가 증조부 기념사업을 이끄는 이유다. 종손 창수씨는 넷째 형의 큰아들이다.

이 이사는 4년 뒤 임청각에 기념관(역사문화공유관)이 생긴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100년 뒤에도 사람들이 임청각을 찾게 하려면 독립운동 정신과 유물을 보여주는 공간이 중요한 데 이번에 안동시와 문화재청이 절반씩 예산을 대 기념관을 짓기로 해 다행입니다.” 기념관에 전시할 대표 유물을 묻자 그는 “증조부가 김규식 선생한테 선물 받아 들고 다니던 용지팡이와 독립운동 문건을 쓸 때 늘 사용했던 벼루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규식 선생이 석주에게 선물한 용지팡이. 이창수씨 제공
석주 이상룡 선생이 독립운동할 때 문서 등 기록 작성에 사용한 벼루. 이창수씨 제공

5년 전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의 임청각 방문을 주선한 이 고문은 이번에도 기념관 예산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단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 때 제가 임청각 이야기를 하자 상당한 관심을 보이더군요. 문 대통령이 취임 뒤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과 석주 선생을 언급한 게 복원에 큰 힘이 됐죠.”(이용득)

현 정부 들어 대통령까지 나서 임청각 정신을 기렸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서훈 조정이다. 석주는 1962년에 3등급 서훈인 독립장을 받았다. “4년 전에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를 챙겨 서울보훈청에 보냈지만 지금껏 공식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서훈 때 심사를 맡은 교수 두 명이 나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어요. 친일역사학자가 독립운동 서훈 심사를 하다니 창피한 일이죠. 그때 심사위원회도 꾸리지 않고 정부에서 몇 사람이 신문 기사를 보고 결정했어요.” 현 상훈법은 일단 정해진 서훈은 바꿀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국인 장제스도 1등급인데요. 헌법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해놓고 임정 수반을 지낸 분이 3등급이라니, 말이 됩니까. 보훈 당국에서 여운형 선생과 유관순 열사는 2등급과 3등급에서 사후 공적에 대해 추가 서훈하는 방식으로 1등급을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임청각에 하루에도 몇백명씩 찾아오는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주는 석주 선생께 1등급을 추가 서훈해 나라 위한 희생은 나라에서 끝까지 책임진다는 산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이용득)

1990년 이상룡 선생 유해 봉환 때 허은 선생과 맞손녀(이춘신)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창수씨 제공

석주의 손자며느리이자 이 이사의 모친 허은(1909~97) 선생은 3년 전에 서훈(애족장)을 받았다. “어머니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가 서훈에 영향을 미쳤죠. 어머니가 책에 독립군 밥 해먹이고 군복 만들고 해진 옷을 기워주는 등 의식주 이야기를 자세히 밝혔거든요. 사실 여자의 이런 노동이 없었다면 한 달도 독립운동을 못 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내가 뼈 빠지게 노력했지만 아무도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하셨죠. 증조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선생도 80년대 후반에 영구 귀국한 뒤 ‘독립운동의 반은 시어머니 몫인데 시아버지만 훌륭하다고 말한다’고 나무라셨죠. 중국은 남녀차별이 없는데 한국은 차별한다고요.”

작년말 임청각 훼손 철로 철거로
2025년 완공 예정 복원사업 탄력
석주 정신 보여주는 기념관도 건립
“임정 수반 지냈는데 3등급 서훈
여운형·유관순처럼 등급 조정을
독립운동의 반 여성 몫 인정해야”

허은 선생 회고록에는 이 이사가 어릴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어요. 중학교를 나온 뒤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려고 여동생과 같이 보육원에 갔어요. 낮에는 보육원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대구 영신고 야간부를 다녔죠.” 그는 안동중을 다닐 때 내지 못한 한 학기 등록금을 졸업(57년) 50년 뒤 뒤늦게 납부한 일도 했다. 증조부가 99칸 임청각 주인이었는데, 남은 재산이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냐고 하자 그의 답은 이렇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가장이 없으면 (주변에서) 그 재산을 가만히 놔두지 않아요.”

이 이사 등 석주 후손이 힘겹게 끌어온 임청각 소유권 소송은 아직도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단다. “증조부가 망명 2년 뒤 만주 생활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조부를 귀국시켜 임청각을 팔려고 했지만 매매가 잘 안 됐어요. 그때 당시 3천원 정도로 추정되는 임청각을 매매 형태(첫 계약서는 2천원, 두 번째 계약서는 1천원)를 취해 문중 돈 500원을 받았고 그 후 문중대표 4명 이름으로 명의신탁했어요. 이 문제 때문에 소송을 해 임청각 건물 소유권은 해결했지만 아직도 택지와 주변 임야는 문중 소유로 돼 있어요.” 그는 해방 후 임청각 후손이 겪은 경제적 곤궁을 친일 청산의 실패와 연결지었다. “집에 도둑이 들면 신고해야 하는데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어디 신고할 곳이 없었어요.” 이런 말도 했다. “친일 대가로 받은 돈으로 산 땅만큼은 해방 직후 국가가 회수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하고 싶어도 쉽지 않아요.”

“증조부는 솔선수범의 지도자
가족과 제자에게 더 엄격했죠”

기득권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증조부의 뜻을 언제쯤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냐고 하자 그는 “90년대 초 <석주유고>를 읽고서”라고 답했다. 석주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석주유고>는 1973년에 처음 출간됐다. “유고를 보면서 ‘이 어른 참 무서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과 제자 등 측근에게 더 엄격하셨더군요. ‘이래서 (증조부가) 지도자를 했구나’ 생각했죠.” 그는 1994년에 20대 후반부터 다니던 은행에서 명퇴하고 퇴직금으로 증조부와 조부, 부친의 유고 문집을 새로 출간하기도 했다. 종손 이창수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아버지께서 제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고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늘 말씀하셨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할머니(허은)가 독립운동 이야기 뿐 아니라 친일파 이야기도 하면서 이겨내라고 하셨죠. 올바른 정신으로 열심히 살면서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고요.”

증조부의 행적 중 가장 본받을 점이 뭔지 묻자 이 이사는 “솔선수범”이라고 답했다. “100년 전 안동을 떠날 때 선발대가 일제 경찰에 붙들리는 바람에 일행 중 일부가 주저하자 증조부는 ‘나라를 찾겠다면서 그것도 겁내면 되겠냐’고 꾸짖었다고 해요. 1928년 손주(병화)가 독립운동단체인 재중한인청년동맹 간부로 뽑히자 ‘독자라 조부와 부친을 돌봐야 한다’고 고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증조부가 ‘나라 찾겠다는 사람이 집 걱정해서 되겠냐’고 나무랐다고 해요. 공사가 엄격한 분이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1-06-29> 한겨레

☞기사원문: “석주 증조부 독립정신 알리는 공간으로 임청각 거듭나야죠”

수, 2021/06/30-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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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 링크] [보도자료]

[취재요청] 2020총선, 친일청산운동으로 선거법 재판 피고인들의 입장발표 기자회견
수신 : 각 언론사 담당 기자
발신 : 아베규탄시민행동 친일청산 총선대응팀
일시 : 2021년 6월 29일(화) 오후 1시 30분
장소 : 서울중앙지방법원 정문 앞 (교대역 법원 삼거리)
담당 : 이하나 010-6584-2121 (겨레하나 정책국장) 


“친일청산은 무죄다”
2020총선, 친일청산 캠페인한 시민들 선거법 재판받아
친일청산운동, 무죄 주장하는 기자회견 진행
– 양홍석 변호사,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 등 참석해 발언

2020 총선 당시 ‘친일정치인 불매운동’ ‘친일청산 4대입법’ 캠페인을 진행하던 시민들 중 5명이 서울시 동작구에서 선거법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리고 6월 29일 재판이 시작됩니다.

당시 캠페인은 친일정치인을 특정하거나 거명하지 않았으며, 전국에서 ‘친일청산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고, 이를 후보자들에게 공개질의하여, 정책을 검증하기 위한 정책 캠페인, 시민캠페인이었습니다.

친일청산 4대 입법은 ▲친일극우망언 피해자 모욕 처벌법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친일반민족행위자 훈장 서훈 취소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이장 입니다. 총선을 앞두고 친일청산 4대 입법에 대해 각 후보자들의 의견을 묻고, 이를 기준으로 후보자들을 검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특히 피고인들이 고발, 기소된 서울시 동작구는 국립묘지 현충원이 있는 곳입니다. 이에 시민들은, 총선을 앞두고 동작구에 출마한 정치인이라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국립묘지에 묻혀서는 안된다는 국민들의 요구에, 명백히 의견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시민들은 사전에 선관위에 질의를 하였고 그 내용에 따라 친일청산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진행한 캠페인 중 유독 동작구에서만 5명의 시민이 기소되었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친일정치인을 뽑지 않을 권리가 있고, 그에 대한 정보를 알 권리, 후보자에게 입장을 물을 권리가 있습니다. 선거라는 이유로 ‘친일청산 운동’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친일정치인들을 걸러낼 기회 조차 가로막는 것입니다. 공정함을 보장하기 위한 선거법이 오히려 특정 정치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국회에 친일정치인을 들여보낼수는 없다”는 간절함으로 진행했던 친일청산운동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이에 ▲피고인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의 입장 ▲친일청산운동의 정당성 ▲현행 공직선거법의 문제점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진행합니다. 기자회견 개요는 아래 첨부하였습니다. 기자여러분들의 많은 취재와 보도를 요청드립니다. (끝)


기자회견

“친일청산은 무죄다”
2020총선 공직선거법 재판 피고인들의 입장발표 기자회견

일시 : 6월 29일(화) 오후 1시 30분
장소 :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삼거리)

사회 : 이하나(겨레하나 정책국장, 아베규탄시민행동 친일청산총선대응팀장)
내용 :
1. 친일청산운동이 죄가 될 수 없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2. 현행 공직선거법에 대하여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 소장)
3. 무죄를 주장하는 피고인들의 입장 (양홍석 변호사, 법무법인 이공)
4. 시민들의 의견개진 정당성, 공직선거법의 문제점 (박석운 아베규탄시민행동 공동대표)

※관련기사

☞뉴시스: ‘국회에 친일정치인을 들여보낼 수 없다’

☞연합뉴스: 선거운동 기간 ‘친일청산’ 캠페인 정당성 말하는 김영환

화, 2021/06/2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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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법 위반’ 법정 선 ‘아베규탄시민행동’ 활동가들
나경원 사무실 인근서 ‘친일 정치인 청산’ 활동 벌여
검찰 “나경원 낙선 운동” vs 변호인 “선거운동도 아냐”

지난해 4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 ‘친일 정치인 불매 운동’과 ‘친일청사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다 서울 동작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에 출석하는 피고인들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연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총선을 앞두고 나경원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후보자로 출마한 지역구에서 “친일 국회의원을 청산하자”는 피켓 시위와 서명 운동을 벌인 것은 낙선 운동에 해당할까?

29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허선아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아베규탄시민행동 활동가들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첫 공판에서 이 질문에 대해 검찰과 피고인의 변호인은 서로 다른 대답을 내놓으며 법정 공방을 펼쳤다.

이 사건 피고인은 모두 5명으로 아베규탄시민행동을 구성하는 시민단체 중 하나인 겨레하나 소속이다. 이들은 지난해 4월 15일 21대 총선을 앞둔 3월 17일~27일 나경원 전 의원 선거사무실 앞 노상을 비롯해 서울 동작구 이수역 출구, 흑석시장 앞 노상 등에서 여러 차례 친일 청산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활동가들은 해당 장소 주변을 지나는 시민들에게 친일 정치인을 국회에서 청산하자는 취지의 서명 운동을 벌였다. 임시로 설치한 책상에는 ‘친일망언 처벌’ ‘친일파 재산환수’ ‘친일파 훈장 박탈’ ‘친일파 국립묘지 안장’ ‘친일파 없는 국회’ 등이 적힌 현수막이 붙었고 ‘사사건건 아베편’ 등이 적힌 피켓을 이따금 들기도 했다.

검찰은 이 행위가 당시 동작을 예비후보자로 출마한 나경원 전 의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확산하기 위한 낙선운동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공직선거법은 선거일 180일 전부터 특정 후보 혹은 정당의 당선 혹은 낙선을 목적으로 하는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다.

검찰은 구체적으로 공소장에 “나경원 예비후보자가 2004년 일본 자위대 행사에 참가한 경력 등으로 친일 논란을 빚은 것을 빌미로 이용하여”, “나 후보에 대해 부정적 여론을 형성 및 확대하고 낙선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문구로 적시했다.

지난해 4월 국회의원 선거 당시 ‘친일 정치인 불매 운동’과 ‘친일청사 4대 입법’ 캠페인을 진행하다 서울 동작구에서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돼 재판에 출석하는 피고인들이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연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면 피고인 측은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친일청산을 위해 총선 기간 전에도 진행한 캠페인이었고 특정 정당 혹은 후보자의 이름도 적거나 부른 적이 없어 특정 후보자의 당선에 영향을 주기 위한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 피고인들을 대리하는 양홍석 변호사는 이와 함께 “선거관리위원회나 경찰의 현장 계도에 따라 가능한 범위에서 캠페인 활동해왔고 이 사건 이전에도 캠페인 활동했기 때문에 고의성이 없고 위법하지 않다”고 검찰 주장을 맞받아쳤다.

같은 행위에 대한 검사와 변호인의 첨예하게 다른 시각은 이후 진행된 증인신문 과정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이날 재판 증인으로는 당시 수사기관에 제출한 고발장을 쓴 동작구 선거관리위원회 소속 공무원과 이 사건을 수사한 동작경찰서 경찰관이 나왔다. 모두 검찰 측이 신청한 증인들이다.

검사는 이들이 당시 피고인들의 활동이 위법 소지가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따라 수사한 점을 확인하는 질문을 던졌고 변호인은 유독 피고인들에 대한 수사가 집중적으로 이뤄진 이유를 부각했다. 증인신문 도중 경찰의 일부 수사 서류가 증거능력이 있는지를 두고 양측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판부는 다음 공판에서는 변호인 측의 신청에 따라 이 사건에 관련된 선관위 소속 직원 3명에 대한 증인신문을 진행하기로 했다. 2차 공판기일은 법원 여름 휴정기 이후인 오는 9월 7일로 예정됐다.

[email protected]

<2021-06-29> 노컷뉴스

☞기사원문: 동작구서 벌인 ‘친일청산’ 캠페인…나경원 낙선 운동일까?

※관련기사

☞뉴시스: ‘국회에 친일정치인을 들여보낼 수 없다’

☞연합뉴스: 선거운동 기간 ‘친일청산’ 캠페인 정당성 말하는 김영환

수, 2021/06/30-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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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시민체육공원 친일파 모윤숙·박시춘 작품 비석 발견
창원 산호공원 수십년째 친일파 이원수 노래비 놓여있어
전문가 “조례 통과로 법적 근거 있어 전수 조사 시급”

이형탁 기자

경남지역 친일 잔재가 최근 잇따라 발견되면서 기존 친일 기념사업을 포함한 청산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달 두번째 친일 잔재 청산 조례안이 도회의를 통과한 만큼 지자체가 시급히 전수조사에 착수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해시민체육공원에서 친일파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의 작품 비석이 최근 발견됐다. 이들은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낸 4천여 명의 친일파가 담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돼있는 인물들이다.

◇친일파 모윤숙 시인(1909~1990)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함경남도 원산 출신 모윤숙 시인은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시를 써냈다. 모 시인은 1941년 <삼천리>에 시 ‘지원병에게’를 발표했다.

“눈은 하늘을 쏘고 그 가슴은 탄환을 물리쳐 / 대동양의 큰 이상 두 팔 안에 꽉 품고 / 달리어 큰 숨 뿜는 정의의 용사 / 그대들은 이 땅의 광명입니다 // 대화혼(大和魂) 억센 앞날 영겁으로 빛내일 / 그대들 이 나라의 앞잡이 길손 / 피와 살 아낌없이 내어바칠 / 반도의 남아 희망의 화관(花冠)입니다”

그녀는 또 가미카제로 출격해 희생한 조선인 소년비행병 출신 하사관인 히로오카 겡야를 찬양하기도 했다. 모 시인은 1943년 12월 <신시대>에 발표한 시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항공병에게’를 발표했다.

이형탁 기자

“고운 피 고운 뼈에 / 한번 새겨진 나라의 언약 / 아름다운 이김에 빛나리니 / 적의 숨을 끊을 때까지 / 사막이나 열대나 / 솟아솟아 날아가라. // 사나운 국경에도 / 험준한 산협에도 / 네가 날아 가는 곳엔 / 꽃은 웃으리 잎은 춤추리라.”

모 시인은 그밖에도 ‘신년송-금녀의 노래(1945)’ ‘호산나·소남도(1942)’ ‘해군의 얼굴(1943)’ 등 다수의 친일시와 산문을 남겼다. 대부분 일제의 침략 전쟁에 조선인들의 참여를 독려하거나 침략전쟁을 아시아 민족 해방전쟁으로 미화하는 내용이다.

그녀는 이같은 친일 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하고 친일파들의 일반적 행보대로 반공주의자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반공 시를 여러 편 써냈고 그녀의 흔적이 김해 이곳에 있다. 시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그녀가 쓴 것으로 알려진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친일파 박시춘 작곡가(1913~1996)

모윤숙 시비 옆에는 대표적 친일파 작곡가 박시춘의 노래비가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경상남도 밀양 출신 박시춘이 작곡한 군국가요는 13곡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 중 1942~1943년 ‘결사대의 아내’ ‘아세아의 합창’ ‘지원병의 집’, ‘조선해협’ ‘혈서지원’ 등이다. 특히 조선해협은 1943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지원병을 선전하기 위해 제작한 영화 ‘조선해협’의 주제가다. 또 ‘혈서지원’은 조선징병제 실시 축하 기념으로 만들어져 기념음반에 수록됐다.

모윤숙 시인처럼 해방 뒤에는 국군 관련 작품 활동을 벌였다. 김해에 있는 박시춘 노래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가 새겨져 있다.

그는 ‘신라의 달밤’, ‘굳세어라 금순아’ 등으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다 1996년 숨졌다. 그의 고향 밀양에서는 지난 2019년 그를 기리기 위한 박물관 건립을 두고 지자체와 시민단체 등이 찬반 갈등을 벌이다 결국 건립이 취소됐다.

이형탁 기자

◇친일파 이원수 아동문학가·수필가(1911~1981)

도내에는 수많은 친일파 흔적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는 이원수 아동문학가다. 창원시 산호공원에는 그가 1920년대 동시로 쓴 ‘고향의 봄’ 노래비가 1960년대 세워져 이곳 공원 중심에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원수 문학가는 양산 출신으로 유년기를 창원에서 보낸 친일인명사전에 공식 등재된 대표적 친일파다. 그는 일제시대 1935년 2월 ‘함안독서회사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경찰에 체포돼 10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지만 1937년을 기점으로 체제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2년 <반도의 빛>에 ‘낙하산-방공비행대회에서’라는 제목의 동시를 발표했다.

“푸른 하늘 나는 비행기에서 / 뛰어나와 떨어지는 사람을 보고 / ‘앗차’ 하고 놀라면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 훨-훨, 하얀 낙하산, / 오오, 하늘공중으로 사람이 가네 / 새들아 보아라 / 해도 보아라 / 우리나라 용감한 낙하산 병정, / 푸른 하늘 날아서 살풋 내리는 / 낙하산 병정은 용감도 하다, / 낙하산 병정은 참말 좋구나”

일제가 항공일 행사나 비행기 헌납운동과 같은 행사를 기획하면서 항공열을 확산시키려 했던 배경이 있다. 조선 아동을 포함한 조선인 전체를 황국신민으로 인식시켜 전쟁을 독려할 의도가 있었는데 이원수 아동문학가가 여기에 적극 동참했다는 평가다.

친일인명사전. 왼쪽부터 모윤숙 시인, 박시춘 작곡가, 이원수 아동문학가. 이형탁 기자

◇ 전문가 “기념사업 문제 조례 통과로 근거 마련…전수조사 시급해”

전문가들은 이같은 시비나 노래비 등 친일인물 기념사업은 지자체나 지역 단체가 역사적 검증없이 대중성 있는 인물 위주로 선정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

김도훈 박사(전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는 ‘친일기념사업과 지역권력’이라는 발표문에서 “지역사회의 친일행위자 기념사업은 친일 행위를 둘러싼 미래지향적 논의보다는 친일 인물 기념을 통해 기득을 유지하려는 세력, 인물 선정에 정당한 기준없이 지역 내 유명인물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지역관료의 비민주적 행정결정과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했다.

이처럼 친일기념 사업이 지자체의 일방적 행정 등으로 진행되다보니 잔재 청산은 물론 법적 근거가 없어 전수 조사 자체도 어려웠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수개월 끌던 경남도의 친일 잔재 청산 조례안에 이어 지난달 경남도교육청의 친일 잔재 청산 조례안이 통과됐다.

전문가는 조례 등 법적 근거가 마련됐으므로 지자체가 공식적으로 친일 잔재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서고 그 결과를 토대로 기념사업을 철회하거나 단죄비 등을 설치하는 방식 등으로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친일 인사 기념 사업은 경남뿐 아니라 전국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해방 뒤 청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경남은 민간 차원에서 친일 흔적 조사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지자체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뤄진 적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방 실장은 그러면서 “경남도와 경남교육청이 제안한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한 조례가 둘 다 통과됐는데 경기도나 전남, 광주처럼 하루빨리 지자체에서 공식적인 전수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단죄비를 설치하거나 철거하는 방식 등으로 친일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mail protected]

<2021-06-30> 노컷뉴스

☞기사원문: 경남 친일 잔재 잇따라 발견…전수 조사는 언제쯤

※관련기사

☞경남도민일보: 김해 친일청산 진정성은?

☞김해뉴스: 김해 현충시설 모윤숙 시비 철거될까…일제잔재청산 조례 시의회 통과

목, 2021/07/0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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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이념의 대립과 전쟁의 광기 속에서 수 천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해 묻힌 곳, 대전 산내 골령골.
71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가 외면해왔던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마주하려 한다.
학살 사건의 전말을 유족의 증언을 중심으로 추적하고 이념과 대립에서 나아가 평화와 연대의 길을 모색한다.

주요 내용 -2부 [감춰진 이름들]
1) 산내 사건의 개요
– 진화위 보고서에 드러난 1950~1953년 산내 사건개요
2) 제주 4.3에서 여순항쟁까지
–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이 끌려간 이야기, 71년이 지나고 최근 무죄 판결이 난 망자들
3) 산내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 인터뷰
– 부모님, 형제자매를 영문도 모르고 여읜 피해자 가족들
–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지 않아 고통스러웠던 나날들
4) 사건은 왜? 벌어졌는가?
– 6.25 전쟁 당시 상황
– 전쟁 속에서 비극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
– 진화위 미공개 보고서 속에 드러난 가해주체와 가해세력들
5) 제2차 진실화해위원회 출범과 한국사회의 과제
– 진실과 화해를 위하여.

<2021-06-22> KBS 대전

☞기사원문: 2회 KBS대전 UHD 6.25 특별기획 골령골, 묻혀버린 진실

목, 2021/07/01-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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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문인협회가 단죄비 사유지로 이전…민족문제연구소 반발
“돌려주지 않으면 더 크게 세울 것” vs “시비와 함께 철거한 것”

‘친일 시인’ 김해강 단죄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전주=연합뉴스) 정경재 기자 = 광복회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오른 시인 김해강의 ‘단죄비’가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1일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에 따르면 이날 오전 전주 덕진공원에 세워진 단죄비가 어딘가로 옮겨졌다.

단죄비가 있던 자리에는 비석 대신 무언가로 파헤친 흔적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단죄비는 김해강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알리기 위해 지난해 8월 그를 기리는 시비(詩碑) 바로 옆에 세워졌다.

건립 비용은 민족문제연구소 회비에 전주시 지원을 보태 충당했다.

김해강은 ‘전북 도민의 노래’, ‘전주 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오랫동안 지역에서 존경받는 문인으로 평가돼 왔으나, 일본 자살특공대를 칭송한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등의 시를 비롯한 친일 작품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단죄비에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죽음이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던 김해강이여!’, ‘그대의 글은 생명의 외경(畏敬)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죽음을 부추긴 사악한 선동문이었다!’ 등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친일 시인’ 김해강 단죄비 제막식 [연합뉴스 자료사진]

민족문제연구소 자체 조사 결과, 단죄비를 옮긴 이는 전주시 문인협회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 문인협회는 덕진공원에서 김해강의 시비를 철거하면서 옆에 있던 단죄비까지 도내 한 사유지로 이전했다고 민족문제연구소는 전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단죄비를 세운 것은 우리인데, 문인협회에서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비석을 가져갔다”면서 “이런 황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문인협회에 전화했더니 처음부터 단죄비를 이전하기 위해 시비를 철거했다고 한다”며 “(단죄비를) 돌려주지 않으면 그 자리에 두 배로 더 크게 세우겠다”고 덧붙였다.

시 문인협회는 단죄비를 가져간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별다른 문제가 없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유대준 시 문인협회장은 이날 취재진과 통화에서 “이전부터 시비를 철거해 달라고 했는데 그 작업이 미뤄지니까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단죄비를 세웠다”며 “시비를 철거했으니 단죄비도 옮기는 게 이치에 맞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이어 “단죄비는 파손하지 않고 사유지에 잘 놔뒀다”며 “시비나 단죄비 모두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그곳에 두겠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

<2021-07-01> 연합뉴스

☞기사원문: 하루 아침에 사라진 김해강 ‘친일 단죄비’…’누가 이런 짓을?’

금, 2021/07/02-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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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지역의 죽산 조봉암 생거지 및 활동지역 현장답사’ 해설을 맡은 조봉암 평전의 저자 이원규 작가가 강화뉴스 회의실에서 죽산의 일대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3일 죽산 조봉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강화군을 찾아 죽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를 개최했다.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2021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2차 행사’로 마련된 이 날 답사는 조봉암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이원규 작가의 해설과 안내로 진행됐다.

답사단은 강화뉴스 회의실에 모여 이 작가로부터 죽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죽산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와 근무지였던 강화읍사무소, 젊은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화 중앙교회, 죽산 추모비가 서 있는 갑곶돈대, 선원면 생가터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죽산은 1899년 강화도 선원면 금월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장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선원사지 정면의 금월리 대문촌 오른편 작은 촌락인 ‘가지마을’이 가장 유력하게 꼽힌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가문 족보인 ‘창녕조씨 찬성공파보’가 직계 조상들의 묘소 대부분을 금월리로 기록하고 있는 점과 관련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금월리 대문촌과 가지마을 주변이 확실하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2001년 6월 죽산 추모사업회가 강화읍사무소 앞을 생가터로 오인하고 건립한 ‘생가터 기념비’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잘못된 위치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 죽산의 생가터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전경.

1911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뒤 1913년 생계를 위해 강화군청 사환 임시고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대열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그해 9월 말까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출옥 이후 다음 해인 1920년 1월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5월 말 일어난 대동단 사건으로 또다시 평양경찰서에 연행됐다가 석방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주오대학(中央大学) 전문부 정경학과 1학년에 다니던 중 박열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 계열 단체인 ‘흑도회’에 참가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로 넘어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수업하던 중 폐결핵으로 중퇴하고 다시 귀국해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뒤 이번에는 상하이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게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 7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인천에 정착한 그는 미곡상업계 인사들이 마련해준 비강업 조합에 몸담았으나 일제 말기인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재차 구금됐다.

▲ 조봉암 활동지역 현장답사에 참여한 답사단 일행이 강화읍사무소 앞에 건립된 죽산 생가터 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죽산의 생가가 선원면 금월리 일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여전히 잘못된 위치에 서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여운형 선생이 손수 필동 헌병대 감방문을 열어줘 세상에 다시 나온 죽산은 건준 인천지부, 인천 민전 등을 조직했으나, 민전 회장을 사임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하는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인천을구에서 제헌으로 당선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무소속 구락부 대표로 활동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혁명 없이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했다’고 평가받은 ‘농지개혁법’을 주도했다.

1952년에는 제2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으로 활약하다 8월 5일 실시된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70만 표를 획득하면서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했으며 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한 뒤 58년 1월 서울시경의 함정에 걸려들어 간첩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5년 형, 2심에서 사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59년 7월 31일 재심이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 인천감리서를 탈출한 김구 선생이 3개월간 머물던 강화읍 대명헌에서 최성숙 해설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김구 선생은 해방 이후 이곳을 다시 찾아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의 가족과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서거 53년만인 2011년 2월 11일 대법원의 무죄 선고를 끌어냈으나, 2012년 국가보훈처가 독립 유공 서훈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린 뒤 지금까지도 죽산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원규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걸출한 정치인인 죽산의 가장 큰 업적은 농지개혁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국가부흥의 발판을 마련 한 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착취당하는 일 없이 모든 국민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평등과 정의’의 진보 정신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는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 날개를 이뤄 선의의 경쟁을 하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내는 것이 죽산이 남긴 숙제”라며 “무엇보다 먼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죽산의 국가 유공 수훈부터 관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글·사진=정찬흥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2021-07-03> 인천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 진행

일, 2021/07/0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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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미 점령군 합작해 지배체제 유지” 발언에
윤 “대한민국 정통성 부정…대통령 입장 표명도 없어”
역사학계 “윤 전 총장 ‘극우·독재정권 역사관’ 드러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3일 오후 국민의힘 대외협력위원장인 권영세 의원과의 회동을 위해 중구의 한 식당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친일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언을 두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을 잘못된 이념을 추종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고 공개 비판했다. 이 지사의 실제 발언을 교묘하게 비틀어 이념논쟁·색깔론에 불을 붙인 것으로 “윤 전 총장이 극우·독재정권의 역사관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온다.

윤 전 총장은 4일 페이스북에 “셀프 역사 왜곡,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려 “광복회장의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는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세력의 차기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도 이어받았다”며 “이에 대해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어떤 입장 표명도 없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어 “그들은 대한민국이 수치스럽고 더러운 탄생의 비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의 단편만을 부각해 맥락을 무시하는 세력은 국민들의 성취에 기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잘못된 이념을 추종하는 국가로 탈바꿈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지사의 발언을 김원웅 광복회장 말과 연결하고, 이들을 비판하지 않는 문재인 대통령까지 끌어들여 ‘좌파세력 재집권 음모’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윤 전 총장의 이런 주장은 사실 왜곡일 뿐 아니라, 철 지난 색깔론을 덧칠하는 극우세력의 전형적 행태와 유사하다. 앞서 이 지사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난 1일 경북 안동의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해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 정부 수립 단계와는 좀 달라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 그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았나.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지사는 이어 “이육사 시인 같은 경우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사하지 않았느냐”며 “그 점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충분한 역사적 평가나 예우나 보상을 했는지 의문이고, 그런 면에서 보면 나라를 다시 세운다는 생각으로 새로 출발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고 덧붙였다. 이 지사 발언은 이육사 시인 등 ‘독립운동가 공적 인정’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지난 3일 <조선일보>는 이 발언을 소개한 뒤 “이 지사 발언은 대한민국이 친일세력이 주도해 건국됐고 미군이 점령군이라는 인식을 보여준 것”이라며 “이 ‘친일·미점령군이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이 합작해 지배체제를 유지했다’는 이 지사 발언을 대한민국은 “친일세력과 미 점령군의 합작품”이라는 식으로 규정한 것이다.

윤 전 총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 지사 발언을 “‘대한민국은 친일세력들과 미 점령군의 합작품으로 탄생했다.’ 온 국민의 귀를 의심하게 하는 주장”이라고 비판하며 <조선일보> 주장을 반복했다. 왜곡된 표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윤 전 총장은 “국정을 장악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다음 정권까지 노리고 있는 당신들은 지금 무엇을 지향하고 누구를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까? 6·25 전쟁 당시 죽고 다친 수많은 국군장병과 국민들은 친일파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싸웠습니까?”라고 되물으며 극단적 주장을 이어갔다. 그는 이 지사와 문재인 정부를 “권위주의 정권을 청산하고 민주화를 달성한 국민들과 뒤섞여 ‘더 열심히 싸운 민주투사’로 둔갑했다”고 비난하며 “이념에 취해 국민의식을 갈라치고 고통을 주는 것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윤 전 총장의 공격에 이 지사는 이날 “해방 뒤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이승만 대통령도 썼던 표현”이라며 적극 반박했다. 이 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에 ‘윤석열 전 총장님의 구태색깔공세 안타깝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38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과 이남에 진주한 미군 모두 점령군이 맞다. 미군의 포고령에도 점령군임이 명시돼 있다”며 ”점령군으로 진주했던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철수했다가 6·25전쟁 당시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지금까지 주둔하고 있다”고 적었다. “같은 미군이라도 시기에 따라 점령군과 주둔군으로서 법적 지위가 다르고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은 법학개론만 배워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지사는 이어 “일제에 부역하던 세력이 청산은커녕 새로 출발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민특위도 이들에 의해 강제해산되지 않았냐”고 적었다.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이 지사는 “그 일부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남아 사회통합을 방해하고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훼손하는 것이 현실이고, 총장께서 입당하실 국민의힘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지사는 “해방직후 미군과 한국전 후 미군을 동일시한 것은 명백한 오류”라며 “총장님의 저에 대한 첫 정치발언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제 발언을 왜곡조작한 구태색깔공세라는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며 글을 맺었다.

역사학계도 윤 전 총장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하는 정쟁’으로 평가했다.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전 한국학중앙연구원장)는 “1945년 9월 미국이 들어와서 진주할 때 공식 용어가 점령군이다. 이 지사 발언이 논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잘못된 발언은 없다”며 “(윤 전 총장 등이) 점령군이라는 용어를 어딜 침략해서 강제 점령한다는 뉘앙스를 붙여 공격하는데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지적”이라고 짚었다. 근현대사를 전공한 한 역사학자도 “맥아더 장군의 포고문 1호에도 점령이란 표현이 네번이나 나온다”며 “(정부 수립 이후에도) 경찰과 군에 일제시대부터 직책 맡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 지사가) 친일이 청산되지 못했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분단과 독재체제,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사관을 정통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지사의 발언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라며 “윤 전 총장의 페북 글은 얼마나 현대사를 단정적이고 편파적으로 보는지 알 수 있고 극우 이승만과 전두환의 독재 역사관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배지현 서영지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4> 한겨레

☞기사원문: 윤석열, 이재명 ‘미 점령군·친일파’ 발언에 철 지난 색깔론 대응

※관련기사

☞민중의소리: [이완배 협동의 경제학] 윤석열 씨, 위안부 문제를 ‘그랜드 바겐’ 한다고요?

월, 2021/07/05-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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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윤숙 시인·박시춘 작곡가 김해시민체육공원서 최근 발견
이번 해법에 따라 친일 해결 진정성 여부 판가름 전망
허성곤 김해시장 “신중히 검토해 해결하겠다”

▲ 이형탁 기자

경남 김해시에서 일제 잔재가 최근 잇따라 발견되면서 지자체의 청산 의지가 시험대에 올랐다.

김해시가 일제 잔재 청산과 관련한 여러 사업을 발표한 만큼 이번에 내놓을 해법에 따라 친일 문제 해결에 대한 진정성 여부가 판가름날 전망이다.

5일 김해시 등에 따르면 김해시민체육공원에서 친일파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의 작품 비석이 최근 발견됐다.

모윤숙 시인과 박시춘 작곡가는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낸 4천여 명의 친일파가 담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이들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돼있다.

이들 작품 비석은 지난 2003년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김해시지회에서 김해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를 건립하면서 함께 세워졌다.

경남 밀양 출신 박시춘 노래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작곡한 ‘전우야 잘 자라’가 새겨져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박시춘 작곡가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군국가요를 13곡 정도 작곡한 것으로 확인된 명실상부한 친일파다.

▲ 허성곤 김해시장. 허성곤 페이스북 캡처

옆에 세워진 함경남도 원산 출신 모윤석 시비에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쓴 것으로 알려진 반공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가 새겨져 있다. 그녀는 1940년대 일제 침략 전쟁을 찬양하는 시 ‘지원병에게’, ‘어린 날개-히로오카(廣岡) 소년항공병에게’ 등의 작품을 써내며 친일을 하다 해방 이후 이같은 반공시를 써내며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문제는 김해시에서 이런 친일 잔재 문제에 대해 적극적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작품 비석도 2003년부터 현재까지 18년간 이어져왔는데도 이제껏 별다른 조치는 없었다. 시 자체적으로 일제 잔재에 대한 전수조사도 이뤄진 바 없다.

시는 다만 지난 3월 일본식 지명을 정비하고 공적 장부에 남은 일본식 이름을 없애는 ‘일제 잔재 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다며 공표한 것에 비춰보면 일정 정도 청산 의지는 있어 보인다. 김해시의회에서도 지난달 24일 전수 조사 등을 위해 일제 잔재 청산 조례안을 통과시켰다는 점도 시와 의회가 함께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분석된다.

친일 잔재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에 따라 성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거제에서는 지난 2019년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시민단체가 단죄비를 세웠는데, 거제시는 단죄비와 동상 모두 철거하지 않으면서 일제 청산 문제에 대한 철학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김백일은 항일독립군 토벌에 참여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있는 친일파인데 교육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거제시가 동상과 단죄비를 모두 그대로 두고 있다는 평가다. 꼭 청산으로 친일 잔재를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옆에 단죄비를 세워 대비함으로써 교육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김영진 경남도의원은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거제에서 김백일 단죄비를 동상 옆에 나란히 설치하면서 좋은 교육 효과를 냈다”며 “김해시도 그 비석 옆에 설치하면 비슷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시는 일단 이 문제와 관련해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입장이다. 허성곤 김해시장은 최근 김해시청 기자간담회에서 “청산에 대한 찬반 의견이 있으니 양쪽의 견해를 다 들어보고 신중히 검토해 결정할 것”라고 말했다.

<2021-07-05> 노컷뉴스

☞기사원문: 친일 잔재 잇따라 발견된 김해시…청산 의지 시험대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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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경남 친일 잔재 잇따라 발견…전수 조사는 언제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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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뉴스: 김해 현충시설 모윤숙 시비 철거될까…일제잔재청산 조례 시의회 통과

화, 2021/07/06-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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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 [사진=김혜진 기자]
관람객들이 작성한 방명록 [사진=김혜진 기자]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서울에는 다양하고 독특한 명소, 그리고 장인(匠人)들이 있다. 일요서울은 드넓은 도심 이면에 숨겨진 곳곳의 공간들과 오랜 세월 역사를 간직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 다녀온 곳은 국내 최초 일제강점기 전문 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민주주의를 빼앗으려는 자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겠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역사, 인권을 유린당한 역사, 친일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음을 새깁니다.”

서울 용산구 숙명여자대학교 부근 길목에 세워진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한데 담긴 곳이다. 박물관 방문객들은 방명록에 이 같은 문구를 적어 놨다. 강제동원, 위안부, 독도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한일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우리의 역사를 정확하게 배워 이성적으로 대응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는 모습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반민특위 터 묘석 [사진=김혜진 기자]

박물관 입구에 다다르자 ‘반민특위 터’ 묘석이 보였다. 반민특위는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파들의 민족 반역 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제헌 국회에 설치됐던 특별 기구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의 좌절이라는 민족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1999년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 표석을 설치했다. 서울시 중구 국민은행 본점 자리인 옛 반민특위 터에 세워졌지만 건물 신축 공사로 인해 2018년 10월 이곳 박물관으로 옮겨 보관 중이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친일인명사전 관련 섹션 [사진=김혜진 기자]
식민지역사박물관 내부 [사진=김혜진 기자]

지난 2018년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와 독립운동계, 학계가 중심이 돼 건립한 이 박물관에서는 ‘기억과 성찰’을 주제로 식민지의 상흔과 항일 투쟁의 역사 등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 역사박물관’이라는 호칭답게 상설전시관에는 1876년 조선 침략의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에 걸친 식민지배, 강제동원의 실상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들의 민낯, 항일 투쟁의 역사 등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또 분단과 식민잔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청산 운동의 과정까지 담겨 있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야스쿠니 신사 회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동학 의병 관련 문서 등 생생한 사료들도 꼼꼼하게 나열돼 있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내 체험 공간 [사진=김혜진 기자]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주제로 한 기획전 [사진=김혜진 기자]

기획전시실에는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조선·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당시 독재정권 하에서 식민지배에 눈 감는 부역 언론의 역할을 해 왔다는 게 골자다. 당시 조선·동아일보에서 보도됐던 신문 지면이 전시돼 있다.

최우현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 주임연구원은 “박물관이 생긴 첫해에 일본에 홍보가 많이 돼 일제 역사에 뜻이 있는 일본인 방문객이 많았다”며 “코로나19로 인해 외국인 방문객이 줄었고 국내 방문객들에게는 박물관이 잘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관람객 장한님 씨는 “사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박물관이 만들어진다는 걸 알고 꼭 와 보고 싶었다”며 “박물관이 크진 않지만 일제강점기 역사들이 잘 구성돼 있는 듯 하다. 현재 한국어 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는데 전시실에 1920년대 조선어 교육을 했던 책들이 소개돼 있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김혜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2> 일요서울

☞기사원문: [서울 명(소)장(인)을 찾아서-31] 일제강점기 역사 서린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수, 2021/07/07-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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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우 작가는 인도 델리를 여행하다 그곳에서 한국광복군이 영국군과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인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있었다. 그곳의 사람과 터를 찍었다.

멕시코에서 고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보냈던 김익주 선생의 후손 다빗 킴 씨. ⓒ김동우 제공

대부분 사람들은 ‘국외 독립운동’이란 말에서 만주 벌판을 연상한다.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대첩이나 김원봉의 의열단이 떠오를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예컨대 인도나 멕시코 같은 곳에 우리 독립운동의 발자취가 남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김동우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기자 출신인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2017년 사진 작업을 위해 장기 여행을 계획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립운동을 주제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인도 델리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레드포트(Red Fort)에 방문하게 된 그는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견한 한국광복군이 이곳에서 영국군과 함께 훈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구한말 한반도와 아무 연관도 없다고 여겼던 장소에서 들은, 뜻밖의 이야기였다.

김 작가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 독립운동의 흔적이 흩어져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었다.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는” 독립운동사가 미국·멕시코·쿠바 등지에 있었다. 아프리카와 남미 외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다고 할 정도였다.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현지에 정착하게 된 이주자들은 후손을 남겼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사람과 터를 찍었다. 5월18일부터 8월18일까지 서울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에서 열리는 〈기억,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에 전시된 사진들이 그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의 직접적 계기는 ‘쿠바 한인 이주 100주년’이다. 1921년 3월 한인 300여 명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이 출발한 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멕시코다. 김동우 작가는 그래서 “쿠바 이민을 이야기하려면 멕시코 이민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1905년 4월 제물포에서 영국 상선을 타고 멕시코로 간 1033명이 북중미 이민의 시초 격이다. 이역만리로 향한 이들 전부가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기근을 피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이 강했다. 1905년 〈황성신문〉에는 이런 이민 광고가 실렸다. “묵서가(墨西哥·멕시코)는 미합중국과 이웃한 문명 부강국이니 수토가 아주 좋고 기후도 따뜻하며 (…) 부자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적어 노동자를 구하기가 극히 어려우므로 한국인도 그곳에 가면 반드시 큰 이득을 볼 것이다.” 이민자 대부분은 에네켄(Henequen·용설란의 일종, 일명 애니깽) 농장으로 분산배치돼 노예와 같은 노동조건으로 혹사당했다. 멕시코 이민자 일부가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기 위해 향한 곳이 쿠바이다.

‘경제적 이유로 건너간 이민자’와 ‘국외 독립운동가’가 늘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둘 다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혹독한 농장 생활을 견딘 이들이 차츰 돈을 모아 독립운동에 쓴 것이다. 독립군 훈련을 위해 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고, 번 돈 대부분을 독립자금으로 부치는 이도 있었다.

2017년부터 2년간 세계를 돌며 해외 독립운동가의 흔적을 찾아 촬영한 김동우 작가. ⓒ시사IN 조남진

아흔 넘은 안창호 선생의 아들 랄프 안

이민자들의 후손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김동우 작가는 과거에 나온 언론 인터뷰나 학술자료를 바탕으로 현지 한인회 선교사 등과 접촉했다. 오래된 자료가 대부분이라 허탕 치기 일쑤였다. 국가보훈처에도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를 건네는 데에 난색을 표했다. 소재지를 찾아도 문제였다. 한국을 기억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는 후손들은 한국과 유대감이 옅었다. “이민 3세대 이후로는 외양이 변한다. 한식을 먹고 한인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보니 점점 현지인과 동화된다. ‘우리 조상이 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먼 곳에서 왔다고 하니 취재에 반갑게 응하기는 하는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약하다.” 후손들을 촬영한 뒤 김 작가는 인물만 반투명 처리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이들의 존재가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의미를 담았다.

김 작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막내아들 랄프 안(안필영)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안창호의 ‘아들’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아흔을 넘긴 랄프 안 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김 작가를 만난 랄프 안 씨는 코리아타운에서 갈비탕을 사주었다고 한다. ‘아버지(안창호)가 독립운동에 앞장서 가족들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는 게 김동우 작가가 전한 랄프 안 씨의 말이다. 의병장 민긍호의 직계자손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만났다. 이들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국과 옛 소련이 수교를 맺은 이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먼 친척들이 자손으로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연금을 수령했다. 직계자손들은 훈장만이라도 받기 위해 한국 정부에 훈장 재교부를 신청했지만, 어렵게 재교부된 훈장은 전달식도 없이 비닐봉지에 담긴 채 전달됐다. 김동우 작가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집집마다 울먹이며 이런 사정을 호소했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 사진은 눈길을 끄는 반면, 이번 전시의 풍경 사진은 상대적으로 맥이 빠진다. 거리나 건물을 찍은 사진은 주의 깊게 들여다보더라도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앙상하게 골격만 남은 구조물, 나무와 풀뿐인 벌판도 마찬가지다. 관람객이 느끼는 헛헛함은 김동우 작가 스스로 느낀 것이며, 작업 과정에서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조상들이 토론하고 서성였던 자리, 건물이 있었던 곳에 막상 가보면 멸실된 게 많았다. 나무로 된 집이 다 헐려서 옥수수밭만 남았다면 옥수수밭을 찍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군사학교가 있던 곳에는 시장이 생겼고, 독립운동가들이 사형당한 곳은 소문에 의지해 추정만 할 따름이다. 그래서 김 작가는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니며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이었다”라고 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이지만 적극적으로 보존하지 않은 탓이기도 하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의 새벽. 100년 전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김동우 제공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100년 전과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썩고 헐리는 인공물과 달리 자연 풍광은 그대로였다. 김 작가는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새벽 5시에 맞춰 셔터를 눌렀다. 한인 이민자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보았을 광경이다. 쿠바 이민자들이 도착한 마나티 항구의 저녁노을, 연해주 한인들이 강제로 이주된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의 초원도 찍었다. 조상들이 본 광경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다.

김동우 작가는 당분간 국외 독립운동과 관련된 사진 작업에 집중할 예정이다. ‘쿠바 이주 100주년’이라는 전시 주제에 맞지 않아 내놓지 못한 사진도 많다고 했다. 특히 중국 지역 독립운동이 그렇다. 김 작가는 ‘아무도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동우 작가는 이 일이 “우연처럼 시작된 운명” 같다고 했다. 그는 씁쓸한 독립운동의 후일담을, 거의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작업을 당분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원 기자

<2021-06-18> 시사인 호수 717

☞기사원문: 미국·멕시코·쿠바에서 독립운동의 흔적을 찍다

수, 2021/07/07-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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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민단체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과 미군이 격전을 벌인 오키나와(沖繩)현 본섬 남부 지역에서 새 미군 기지 매립지에 쓸 토사를 채취하는 것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전몰자 유족 모임’은 오늘(7일) 일본 방위성과 후생노동성을 찾아 “헤노코(邊野古) 연안 매립 공사에 쓸 토사를 희생자 유해가 묻힌 곳에서 채취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서명 용지를 전달했습니다.

서명에는 일본 전역에서 1만 1천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의 피가 스며든 토사를 미군 기지를 만드는 매립에 사용하는 것은 유골이라도 돌아와 달라는 유족의 염원을 배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이던 1945년 일본군이 본토를 지키기 위해 오키나와 본섬 남부 등에서 미군을 상대로 벌인 싸움입니다.

당시 일본군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오키나와 주민과 미군 병사 등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모토 후키코(沖本富貴子) 오키나와대 지역연구소 특별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에는 조선인도 3천461명이 군인이나 군속으로 동원돼 701명이 사망했습니다.

이는 노무 동원된 이들이나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이들을 제외한 숫자입니다.

기록으로 파악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동원되거나 사망한 조선인은 더 많을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은 희생된 주변 지역에 묻힌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동안 희생자 유해 수습이 미흡해 이토만(絲滿)을 비롯한 격전지에서 발굴이 계속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 본섬 남부의 미군 후텐마(普天間) 비행장을 이전할 곳인 중부 헤노코 연안의 매립에 쓸 토사 일부를 당시 격전지였던 이토만 등에서 채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계획대로라면 유골이 섞인 토사가 매립용으로 투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입니다.

지난 3월부터 오키나와 현청 앞에 단식 투쟁 등 항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시민단체 ‘가마후야’(ガマフヤ-)의 구시켄 다카마쓰(具志堅隆松·67) 대표는 최근 온라인 기자회견에서 “그간 수습된 희생자 7백여 명의 유골을 가족에게 돌려주기 위한 후생노동성 주도의 DNA 감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의 유족들도 DNA 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달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가마후야’는 한국 단체인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02-2139-0462)와 민족문제연구소(☎ 02-969-0226)를 통해 오키나와 유골 발굴 및 DNA 감정에 참여할 한국인 유족의 신청을 받고 있습니다.

황현택 기자 [email protected]

<2021-07-07> KBS NEWS

☞기사원문: “조선인 등 묻힌 토사 채취 반대”…日시민단체, 1만여 명 서명 제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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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희생자 유골 섞인 흙으로 오키나와 미군기지 건설, 반인도적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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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조선인 유골 공사장에 묻히나…日NGO “한미 유족과 반대운동”

목, 2021/07/08-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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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조사단 조사 결과… “충실한 이행 촉구” 결정문 홈페이지에 게재

▲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강제노역이 행해졌던 군함도. ⓒ 위키백과

유네스코가 일본이 ‘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와 관련한 후속조치를 이행하고 있지 않은 데 대해 ‘강한 유감’을 표했다.

일본은 지난 2015년 세계유산 등재 당시 후속조치로 한국인 노동자의 강제노역 등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네스코는 오는 16일부터 온라인으로 열릴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한국 시간으로 12일 오후 세계유산센터 홈페이지에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 점검 결정문을 게재했다.

이 결정문은 지난 6월초 세계유산센터와 세계기념물유적협의회의 추천을 받아 호주, 벨기에, 독일 등의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을 도쿄로 파견, 일본 정부가 만든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를 직접 방문한 뒤 만든 보고서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이례적 강한 문구… 일본의 약속 불이행 국제사회가 확인”

유네스코는 결정문에서 ▲ 그간 일본의 세계유산위원회 결정 내용과 일본의 약속 미이행을 공식적으로 확인하고 아주 강하게 유감을 표명하는 한편 ▲ 충실한 이행을 촉구했다.

결정문을 자세히 보면, 제5항에서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아직 충실히 이행하지 않은데 대해 강하게 유감 표명(strongly regrets)’이라고 돼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기자들에게 “국제 기구의 결정문 안에 ‘strongly regrets’란 표현이 들어간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이라며 “그동안 일본이 충실히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국제 사회가 명시적으로 확인했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결정문은 또 이어진 제6항에서 ‘당사국이 관련 결정을 이행함에 있어 아래 사항들을 포함하는 공동조사단 보고서의 결론을 충분히 참고할 것을 요청(requests)한다’고 돼있어 일본측이 5개 사안을 충분히 고려해서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5개 사안은 ▲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 마련 ▲ 한국인 등의 강제동원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 ▲ 희생자 기리기 위한 조치 ▲ 국제 모범사례 고려 ▲ 관련 당사자간 대화 지속 등이 포함돼 있다.

당국자는 이 가운데 “특히 두 번째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서 가혹한 조건하에 강제노역했다는 사실과 세 번째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 표현은 2015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될 당시 일본 대표가 발언한 내용”이라며 “이 내용이 결정문 각주로는 들어간 적이 있어도 본문에 들어간 것은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정문의 내용 자체가 과거와는 달리 공동조사단의 객관적인 심사 결과를 인용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국제모범 사례에 대해서는 “독일의 탄광, 제철소 등 2차대전 때 강제노역 시설에는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설명하고 피해자를 기리는 기념비 등이 설치돼있다”며 “일본측에서도 유사한 조치를 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작년 2월 도쿄의 정보센터가 객관적으로 잘 건립될 수 있도록 개관 전 일본측에 공동조사단을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일본측의 거부로 이뤄지지 못하는 등 이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양국간 대화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세계유산의 본질적인 특수성이 완전히 훼손됐을 경우에 한해 지정이 취소될 수 있으나 유네스코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며 “이번에 강한 결정문이 나온만큼 일본측이 결정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노동 희생자 추모는커녕 사실 부정하는 자료만 전시

세계유산위원회는 지난 2015년 7월 군함도 등 일본의 23개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는데, 당시 위원회는 각 시설에 전체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을 마련하라고 일본에 권고한 바 있다.

이에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일본 대표는 ▲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동원되고 가혹한 조건 하에서 강제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겠다 ▲ 인포메이션 센터와 같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해석전략에 포함시키겠다 등 2가지 조치를 약속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은 당시 약속했던 조치를 전혀 이행하지 않았고, 급기야 일본의 근대산업 유산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해 6월 도쿄에 문을 연 도쿄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강제노역을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증언 또는 자료들이 전시됐다.

이에 외교부 2차관이 즉각 주한 일본대사를 초치해 강력한 유감을 표시하고, 장관 명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발송해서 약속이 이행될 수 있도록 조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다.

김경년(sadragon)

<2021-07-12>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유네스코, 일본에 “군함도 강제노동 부정 강한 유감”

※관련기사

☞뉴시스: 유네스코 “日, 군함도 강제노역 알려야…불이행 강한 유감”(종합)

☞한겨레: 유네스코, 일 군함도 등에 강제동원 기록 미이행 “강하게 유감”

화, 2021/07/13-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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