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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코로나-19를 창궐시킨 주범은 신천지와 수구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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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코로나-19를 창궐시킨 주범은 신천지와 수구 집단

admin | 화, 2020/03/03- 20:01

편집자 주 :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이후 지난 2-3년의 행보는 실망의 연속이었다. 비판받아 마땅하고 현실적으로 나은 대안이 존재한다면 정권에 대한 심판론이 정당해 보인다. 그러나 최근 본인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하여 한국사회에 대한 자해를 서슴지 않는 낡은 ‘미래통합당’ 등 수구 집단과 곡학아세가 생존전략이 되어버린 비굴한 수구언론들의 적반하장적 행태는 ‘최소한으로 지켜야할 선을 넘고 있다.

한가지, 코로나-19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처과정은 세계의 모든 국가에 모범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정하고 넘어가자. 이에 대해서는 세계 주요 언론들이 같은 목소리로 격찬하고 있다. 지금은 난국의 시점으로 모두가 정부를 중심으로 마음과 힘을 합쳐 극복해 나가야 할 때이다.

아래의 글은 워싱턴에 있는 법률사무소 소속의 한국계 미국인 변호사가 최근 한국 내 코로나 사태의 과정을 제 3자적 시각에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기술한 칼럼을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정치평론지인 포린 폴리시가 게재한 것을 번역한 것이다. 칼럼 필자인 박 변호사는 동아시아 정치경제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2월 27일, 대한민국 보건소 직원이 신천지 교회 대구지부 인근 주택가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 방지의 일환으로 소독제를 분사하고 있다. <출처: APF/게티이미지>

당초에는 매우 효율적인 관료 제도와 최첨단 기술을 갖춘 한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의 통제가 가능한 것으로 보여 졌다. 하지만 2월 18일을 기점으로 2월27일 목요일 현재 한국 내 코로나-19 확진자가 1,700명 이상으로 급증했다(3월2일 현재는 4212명). 일부 종교와 정치 집단이 벌리는 시대착오적인 골칫거리에 의해 전염성 바이러스의 통제선이 무너져 버렸다.

2015년 당시 한국에서 38인의 생명을 앗아가며 지옥과도 같았던 메르스 (MERS) 사태라는 선행 사례는 한국이 코로나19 준비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박근혜 (Park Geun-hye) 대통령이 이끄는 보수 정권의 무능한 대응으로 인해 한국은 중동을 제외한 국가 중 가장 많은 확진자가 발생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메르스 여파로 인해 대중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고, 결국 다른 사유와 함께 박 전 대통령의 탄핵 및 하야에 이르렀고, 한국 정부가 향후 바이러스 사태 대비를 철저하게 예방적 역할을 했다.

한국은 이미 2019년 11월부터 코로나바이러스의 새로운 출현에 대비하고 있었다. 질병관리본부 (KCDC)는 이후 어떤 바이러스가 국내에 퍼질지 모르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코로나바이러스를 검사해서 사스 또는 메르스와 같이 알려진 코로나바이러스의 유형을 소거한 후 변종 코로나바이러스를 분리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했다.

한국은 코로나-19 발병 초기 4주 동안 진행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동시에 코로나-19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첨단 기술 자원을 결집했다. 정부는 중국에서 입국한 관광객들의 모든 동선을 추적했다. 예를 들어 신용 카드 사용 내역, CCTV 영상을 확인했고, 그들의 건강 상태를 매일 확인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앱을 다운로드하도록 했다. 정부는 감염자의 행적에 대해 영화관에서 감염자가 어떤 좌석에 앉았는지까지 아주 상세하게 목록을 공개했다.

또한 대화형 웹사이트가 개발되어 해당 정보 또한 (이름 비공개 처리) 공개되어 대중들이 모든 코로나19 확진자들의 동선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대전에 거주하는 어떤 운이 없는 환자가 음란한 속옷 매장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대전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의 스마트폰으로 알려진 것과 같이 확실히 사생활 침해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일련의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정보 공개는 국민들이 안정을 찾고, 필요 이상의 공포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월 17일, 한국 내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30명이었고,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확진자 10명은 완치 후 퇴원했고, 퇴원 환자 중 몇몇은 코로나-19가 “일부가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한 질병은 아닙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코로나-19를 이겨냈다고 승리를 발표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31번 확진자 사례로 인하여 모든 과정이 급하게 중단되었다. 2월 18일에 확진 판정을 받은 31번 환자는 한국 내 많은 종교 중 하나이자 사이비 기독교 광신도 집단인 신천지 신도임이 밝혀졌다. 1984년 창설된 신천지 (공식 명칭: 신천지 예수교증거 장막성전)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 이만희 (Lee Man-hee) 교주는 자신이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 세상에 등장한 두 번째 예수라고 주장하고 있다. 광신적 추종집단 신천지 신도는 약 24만 명으로 추정되며 한국 뿐 아니라 29개 국가에 지부를 설립했다고 내세운다.

신천지의 사이비 교리는 공중 보건을 악화시킨다. 신천지에서는 병은 죄악이라고 가르치고, 신도들에게 함께 밀집해 앉아 침이 튈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일제히 아멘을 반복해 외치며 예배에 참석하여 병을 이겨내라고 권고했다. 신천지가 자신들끼리만 활동을 한다면 문제가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 신천지에서 활동했던 신현욱 (Shin Hyeon-uk) 목사에 따르면 신천지는 자신의 교파를 드러내지 않은 채 잠재적인 개종자에게 접근하는 ‘기만적인 개종의 전도’가 옳다고 믿는다고 한다.

신천지는 신도들에게 각자 행적을 숨기도록 지시하고 누군가가 신천지를 믿냐고 물었을 때 대응할 수 있도록 모범 답안을 제공한다. 때론 심지어 가족들도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신천지 신도인지 모른다. 그래서 결국 신천지 신도 서로가 쉽게 질병을 전파한 뒤 지역 사회로 나아가 질병을 전파하게 되는 것이다.

신천지 교인들이 애초에 코로나-19에 어떻게 감염됐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KCDC는 시간에 따른 31번 환자의 증상을 고려해 볼 때, 31번 환자는 신천지 내 첫 번째 감염자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한국 당국은 2월 초에 있었던 신천지 교주 친형의 장례식에 주목해 왔다. 신천지는 우한을 포함하여 중국 내에 19개 교회를 소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 교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했을 수도 있다.

이후 감염된 신천지 신도들은 폐쇄 공간을 함께 사용하고, 격리를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신천지 신도임을 숨김으로써 코로나-19를 전파했다. 31번 환자는 고열 증상이 나타났음에도 매번 천 명이 넘는 신도가 함께 한 신천지 예배에 두 번이나 참석했을 뿐 아니라 결혼식과 다단계 관련 세미나도 다녀갔다. 그녀는 경미한 교통사고 이후 병원을 방문했지만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라는 의사들의 계속된 권유를 무시했다. 또, 고열로 병원을 방문하여 스스로 신천지 교인임을 밝힌 여성이 검사를 받던 중 격리될 지도 모른다는 고지를 받고 달아난 사례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간을 기증한 어떤 여성은 이식 수술 이후 열이 떨어지지 않자 뒤늦게 자신이 신천지 신도임을 인정하기도 했다 (두 사례로 인해 병원이 임시 폐쇄되어 코로나-19에 대한 공중 보건 대응이 더욱 난항을 겪었다). 그리고 감염병 통제를 담당하는 대구시 공무원 중 한 명이코로나-19 확진을 받은 이후에야 자신이 신천지 신도임을 밝힌 황당한 사례가 있었다.

한국에서는 31번 환자 확진 이후 8일 만에 코로나-19 확진자가 30명에서 977명으로 급증했다. 대부분 새로운 확진자들은 신천지 교인이거나 그들과 접촉한 사람들이다. 특히 이만희 친형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청도 대남병원에서 비극적인 사례가 많았다. 대남병원에서만 확진자 144명이 발생했는데 대부분 장기 입원 중이던 정신질환 환자들이었다. 이러한 환자들은 병원을 벗어난 적이 없고 해외를 나간 적은 더욱 없었기 때문에 일찍이 코로나-19 검사를 받지 않았고 적절하게 격리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많은 정신질환 환자들 사이에서 코로나-19가 진전되었고, 현재까지 코로나-19로 인한 12명 사망자 중 7명이 이들 중에서 나왔다(2월27일 현재).

바이러스 확산에 일조한 이데올로기에는 광신도 종교집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및 하야 이후 아직 세력을 되찾는 중인 극우 세력은 몇 달 동안 매주 서울 한복판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심지어 대기업이 직원들에게 재택근무를 권고하고 사람들이 회의를 취소하는 시국임에도 대개 고위험군 고령층으로 구성된 극우 세력은 서울 정부의 충고를 반대로 무시하면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전광훈 (Jeon Gwang-hun) 극우 세력 대표이자 목사는 집회를 중단하라는 박원순 (Park Won-soon) 서울 시장의 애원을 일축하며 야외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타당하지 않은 주장을 내세웠다. 집회 참석자들은 “신이 바이러스를 몰아내기 위해 바람을 만들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국회의원이나 언론의 편집 위치에 있는 한국의 부유층 수구주의자들도 질병퇴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의 수구주의자들은 코로나-19 발병 이후로 정부에게 중국에 대한 완전한 여행 금지 조치를 취할 것을 반복해서 요구했다. 황교안 (Hwang Gyo-ahn) 미래통합당 대표는 2월 24일 “다시 한번 중국발 입국을 금지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이것이 거의 유일한 대책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주장했다.

이날 우파 성향 신문 중앙일보는 ‘중국에서 오는 외국인 입국, 전면 금지하라’는 제목으로 1면에 사설을 싣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중앙일보는 사설 바로 아래에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돌려보낸 이스라엘 정부가 보여준 ‘코리아 포비아-한국 공포증을 비난하는 커다란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이율배반적 아이러니가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빨갱이’라는 딱지와 ‘타민족’이라는 차별 모두 냉소적인 공격이다. 수구집단은 진보 성향의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주요 공격 포인트 중 하나로 문 대통령이 중국의 공산당 정부에 지나치게 유연하게 대응했다는 점을 잡았다. 한국의 수구 성향 정치인들은 이러한 포인트를 중국에서 유래한 바이러스 코로나-19 발병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찾고자 했다. ‘문 대통령이 중국발 입국을 금지하기에는 중국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격은 4월에 치를 한국 총선을 고려할 때 편리한 목표 대상인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계 이민자들에 대해 외국인 혐오증을 촉발시키기도 한다.

한국의 수구 성향 정치인들과 언론은 대중에게 중국과 코로나-19의 연관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바이러스 질환의 공식 명칭 대신에 ‘우한 폐렴’이나 ‘우한 코로나’라고 계속해서 지칭한다. 미래통합당이 코로나-19 대책 특별위원회 구성을 늦춘 것은 ‘우한’이라는 단어가 없는 위원회 명칭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미래통합당은 2월 26이 위원회 구성에 동의했다).

신천지와 민족적으로 중국지역 간에 어떠한 교차점이 없을 뿐 아니라 입국금지의 거부에 대해 전문가들이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치적 쟁점을 계속하고 있다. 심재철 (Shim Jae-cheol)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는 이러한 배경을 홍보하듯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와 문재인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판하며 대규모 모임을 가진 뒤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장이 코로나-19 확진자로 판명된 후 격리되었다 (한국교원단체 총연합회장은 신천지 신도와 접촉한 그의 아내를 통해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굳건하게 코로나-19에 잘 대처하고 있다.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한국은 질병을 진단하고 결과를 정확하게 보고할 수 있는 투명성을 지닌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이다. 다른 국가에 비해 확진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감염자 범위뿐 아니라 첨단 검사기술의 영향일 수도 있다. 현재까지 KCDC는 코로나19 검사를 4만 건 이상 실시했으며 하루에만 검사 7,500건 이상을 시행하며 2월 말까지 하루에 검사 10,000건 이상을 진행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대조적으로 미국은 500명 미만의 검사를 진행해왔다).

중국에서 시행된 엄격한 격리 방안과는 달리 대구시는 시민들이 적절히 예방 조치를 따를 것을 신뢰하면서 여전히 사업을 운영 중이다. 최근 여론 조사에서는 코로나-19 발병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대해 64%가 호의적인 여론을 보임으로써 코로나-19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응 노력은 전반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고 있다. 문 대통령은 2월 25일 대구를 방문하여 ‘이번 주 내에 확진자 증가세에 뚜렷한 변곡점’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한국의 대응은 첨단 기술의 민주주의가 사회의 취약점을 압박하는 세계적인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네이슨 박(Nathan Park)

워싱턴 DC에 기반을 둔 코브레 & 킴 법률회사 소속 변호사이자 동아시아 정치 및 경제 전문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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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난 9월 18-19 양일 간에 경기도와 경기연구원이 주관한 2019 DMZ 포럼이 고양시 킨텍스에서 개최되었다. 뒤늦게 초대되어 포럼의 말미에 종합적인 견해를 발표한 스테판 코스텔로는 그간 정기적으로 다른백년을 통해 한반도 상황에 대하여 정기적인 기고와 수시로 강연을 담당하여 왔다. 그는 DJ가 미국에 체류시 개인비서를 자임하면서, 미주 평화재단 전 사무총장 겸 부이사장을 역임하였고 EastAsia Product를 설립하여 DJ의 햇볕정책을 미국조야에 소개하여 왔다. 아래로 DMZ포럼에서 행한 그의 발표내용을 번역 소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을 9월 24일 뉴욕에서 만났다. 김정은은 미국과의 협상을 위해 다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어있음을 암시하였다. 새로운 계기가 준비되고 있는 반면에 작년 9월19일  남북정상회담에서 맺은 위대한 선언이 여전히 위기에 처해 있다.

 

Where does Korea stand now?

한국은 어떤 상황에 있는가?

지난 30년 간의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외교사야말로 이 질문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답일 것이다. 대통령과 행정부가 그 어떤 정책이익집단보다 국익을 확고하게 결정하는 만큼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강제력과 군사력∙경제력보다는 잘 만들어진 협정이 북한의 비핵화와 발전에 있어 진전을 가져올 것이므로 외교적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물론, 숙련된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대한민국과 미국 간의 동맹이라는 핵심적 이해관계는 거의 완벽하게 들어 맞는다. 그러나 여러 리더들과 정치집단들은 사안을 달리 보고 있다. 특히, 서울과 워싱턴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핵심 이해관계에 대해 오랫동안 혼란스러워 하였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으며, 때로는 관여와 협상보다는 냉정한 비평화노선을 선호하였다.

지난30년간,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 전략적 이해관계는 DJ 초기 집권의 중대한 3년이란 기간 동안 최대 수준의 연계를 이루었다. 되풀이 하면, 1998년2월 김대중이 한국대통령으로 취임한 때부터 2001년 1월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직을 그만두기까지의 기간 동안, 어느 때보다 남한과 북한간, 미국과 북한간, 그리고 남한과 미국간의 관계에 많은 진전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98년10월 김대중과 오부치의 회담으로 한일관계가 정점에 다다른 것 역시 놀랍지 않다. 분명히 북한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경수로형 원자로를 건설 중이었다. 그리고 북한을 미사일 기술통제 체제하에 포함시키기 위한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Now, South Korea is a middle power

이제, 대한민국은 중간국가이다

세부사항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오늘날 대한민국은 중간국가로서 가져야 할 자질의 필수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분명한 것은 자질과 역량은 행동과 리더십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두가지 면에서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동포이며, 북한과 한반도라는 지리적 조건을 공유하고 있다. 때문에, 대한민국은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이해관계와 북한문제를 둘러싼 책임이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대한민국이 지닌 잠재력과 유연성은 미국과 중국, 북한, 일본 또는 UN의 리더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중요하고 두드러지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오늘날 주요한 진전을 이뤄내는 데 가장 중요하고, 가장 적절하며, 가장 유용한 자질을 틀림없이 가지고 있다.

 

The US role on Korea is now at a standstill

한반도 문제에  있어 미국의 역할은 정지상태에 있다

이러한 상황은 트럼프 정부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하기보다는, 지난 20년간의 한국에 대해 실패한 비생산적인 불성실전략으로 인한 것이다. 미국의 불완전한 선거제도와 외교구조, 정책입안과 정책수행 제도로 인해 현재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태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스스로 내부적 합의를 보거나, 북한과 합의점을 찾아 대한민국의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는 기대 할 수 없다. 오늘날 몇몇 저명한 학자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나, 도달한 합의가 대한민국의 이익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맹으로서 당연히 미국의 이익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다.

 

What could be done?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늘날 대한민국은 역사와 행운이 부여한 역할을 수행하여야 한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이러한 논리적이고(logical), 자연적이며(natural), 전략적인(strategic)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언급한 역할을 수행한다 해서 미국 및 동맹국가들과 대립을 초래하지 않을 것이다. 역으로 주어진 역할을 해낸다는 것은 동맹을 최선으로, 지속적으로 존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변 동맹국들은 한반도의 긴요한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의 충고와 전략과 리더십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는 당사자로서 대한민국에게 가장 중요하고 생존적이며 핵심문제이기 때문이다. 동맹인 미국에게는 그리 절절한(number-one, existential, core) 이슈에 해당되지 않을 수 있다. 대한민국이 성공적인 협상을 추진하기 위해 반드시 활용하여야 할 UN에게도 역시 핵심적인 이슈에 해당되지 않는다. 동북 아시아의 이웃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다.

 

Professionals in DC and Seoul know the outlines of the deal possible

미국과 대한민국의 전문가들은 가능한 협상안의 윤곽을 알고 있다

우리는 이를 “하노이&플러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대한민국 측이 빠른 시일 내 확실하고 믿을만한UN 제재완화가 북한에 있어 핵심적인 제의가 될 것이라는, 대담하지만 명백한 아이디어를 포용할 수 있다면, 김정은 측에서는 마땅히 보여야 할 상호행동을 취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한 행위는 영변, 즉 모든 핵분열성 물질생산의 중지, 그리고 감찰을 포함한다. 이에 문정인이 말하는 바와 같이 “플러스알파”가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각각 당사자에 있어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도에서 섬세하지만 작은 조항 몇몇이 추가되는 것이다.

상기한 근거에서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트럼프 대통령을 김정은과 제3차회담을 갖도록 끌어 들인다면, 언급한 조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시도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에 제시할 기초협상안에 대해 김정은의 동의를 먼저 얻어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협상안을 공개하여, 말 그대로 이를 못박고, 트럼프와 기타 이해관계자, 그리고UN등 과 해당 협상안을 발전시키기 위해 중간국가로서 대한민국이 가지는 상당한 힘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헌신과 대담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대한민국의 현재 입장을 바꾸지 않는 것이며, 미국의 입장도 거의 바꾸지 않는 것이기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시도가 주는 잠재적 이점은 명백하다. 반면에 예상되는 불리한 점들은 (네오콘들이 만들어 내는) 거짓말들이며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들이다.

북한에 대해 기본적이고 적절한 유인책을 제공하지 않는 한, 제재완화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로 인해 합의에 이르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인도주의적 원조를 압박을 가하기 위한 무기로 오용하는 것부터, 미국 연구자들과 관광객들의 여행금지, 그리고 유조선 압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조치들은 정상적인 외교를 방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더구나 트럼프 대통령이 그러한 “디테일”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왜 그가 디테일을 알아야만 하는가?

이러한 점에서, 백악관에서 존 볼턴이 떠난 것은 앞으로 다가올 대한민국과 미국의 회담, 그리고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북한과 미국의 회담착수에 따라 몇 가지 가능성을 열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기대를 해서는 안될 것이다. 볼턴이 고용된 배경, 그리고 정상적 외교와 협상을 반대하는 미국정부 내 많은 세력을 생각해보라.

한반도 게임의 (미국 내) 참가자들은 운동화 끈이 풀려있고, 헬멧이 벗겨져 있으며, 주의력이 결핍된 상황이다. 대한민국만이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게임을 할 준비가 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자, 게임을 시작해 보자.

목, 2019/09/2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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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비극”을 넘어

기후변화는 “공유지의 비극”으로 볼 수 있으며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사회적, 생태적 시스템 붕괴에 대한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대응책을 제공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기후변화는 집단행동에서 비롯된 대표적 문제이며 현재의 정치제도는 사회적, 생태적 문제가 복합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개럿 하딘은 1968년에 쓴 유명한 논문「공유지의 비극」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들은 국가나 시장이 개입하지 않으면 공유지를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세이가 발표된 이후 50년 동안, 우리는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규제와 민영화가 어떻게 전세계 공유자원을 관리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 그것을 망쳐왔는지 지켜봤다.

신자유주의의 공공재 민영화는 공유지의 비극을 자연자원의 영역(공기, 물, 토양 등)으로부터 사회보장의 영역(보건, 교육 등)으로, 마침내 사회적 교류와 내적 삶의 영역(기업 소유의 디지털 기술, 소셜미디어, 광고의 확산을 통해)으로까지 확장시켰다. 기후변화는 공유자원의 민영화와 잘못된 운영의 결과이지, 하딘이 주장한 대로 민영화와 규제를 더 진전시키기 위한 구실은 될 수 없다. 하딘은 공유에 기반을 둔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비판 받아왔다. 공유지에 대한 그의 이해는 정치, 경제 제도에 널리 수용돼 왔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는 대신, 개인을 강요당하지 않는 한 협력할 능력이 없는 자율적, 이성적, 이기적 존재로 바라보는 신고전주의적 관점의 이데올로기에 경도됐다.

엘리노어 오스트롬의 선구적인 작업은 하딘과는 대조적으로 공유자원이 협력을 장려하고 무임승차자들이 자원을 취하지 못하게 막도록 구상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저서 『공유자원의 관리』(1990)는 공유자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8가지 핵심 원칙을 제시했다. (역자주: 이 원칙은 다음과 같다. ①명확한 경계 ②규칙의 부합성 ③집합적 선택장치 ④감시활동 ⑤점층적 제재 ⑥분쟁해결장치 ⑦규칙제정권리 ⑧최소한의 자치권 보장) 수십 년 간 오스트롬은 어떻게 공유자원이 자율 조직되고 자율 규제되는지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대규모 연구작업을 수행했다.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커서 200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많은 주류 경제학자들에게는 놀랍게도, 오스트롬은 사람들이 시장 또는 국가의 개입이 아닌 효율적 의사소통, 신뢰, 호혜성을 바탕으로 공유자원을 자율 관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의 업적 덕분에 공유자원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더욱 잘 이해되고 확립되었다.

 

자본주의 대안으로서의 커먼즈

지난 수십 년 동안 공유자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심오한 연구가 확산됐으며 이는 중요한 고려대상이다. 오스트롬은 제도경제학과 게임이론의 방법론을 채택했는데 이는 그의 작업이 주류학계에 호소력을 갖게 한 동시에 연구의 범위와 관련성에 제한을 가했다. 오스트롬이 채택한 방법론은 자기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개인을 전제했다. 개인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편견은 예컨대 마르크시즘 연구가 탐색했던 것과 같은 구조적, 정치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공유자원의 사유화, 즉 인클로저 운동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시기적으로 일치했다. 역사적으로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독특한 특성에 기인한 게 아니라 산업자본주의의 글로벌화 때문이다.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질학자들은 인류가 지질을 변화시키는 지구물리학적 세력으로 출현한 시기를 1800년 전후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는 기후위기의 바탕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요구되는 정도의 시스템 위기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제이슨 무어는 인류세보다는 자본세(Capitalocene)라는 용어를 선호하는데, 이 말은 모든 인간이 기후변화에 똑 같은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직접적인 책임은 인간과 자원을 착취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있다.

다행히 자본주의 시스템의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복수우주(Pluriverse)의 공유지」(2015)라는 에세이에서 아투로 에스코바르는 공유화(commoning)의 실천이 글로벌 산업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세계 안에 여러 개의 세계들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커먼즈(역자주: 영어로는 모두 commons로 표기됐으나 이 글에서는 맥락에 따라 공유지, 공유자원, 커먼즈로 번역했다. 커먼즈는 현대 사회운동으로 물질적, 비물질적 공유자원은 물론 참여자들의 주체성 변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운동은 글로벌 시장 혹은 국민국가에 의한 가치의 포획과 맞서는 시스템적 대안을 위한 존재론적 복수성-Pluriverse-을 구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현재 공유화 실천의 정치적 잠재력을 간과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적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핵심적인 참조점으로 여전히 자본주의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J. K. 깁슨-그래함은 이런 경향을 “자본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그와 동료들이 개발한 다양한 경제연구 프로그램은 자본주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 커먼즈에 기반한 경제의 수백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이런 일련의 경험적 연구는 커먼즈 운동으로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수렴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 국가, 그리고 커먼즈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다. 인류역사 전반에 걸쳐 공유화의 실천은 생산의 기본 방식이었고, 얼마나 많은 무급노동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의해 수행됐는지를 고려할 때 사회적 재생산의 기본 방식 역시 대부분의 경우 공유화를 통해 이뤄졌다. 오늘날 현대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공유지에 대한 전통적 지식과 새로운 도시, 디지털 커먼즈를 결합한다. 철학자 안드레아 베버는 심지어 공유화가 사실상 자연의 재생산에서도 기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로서의 실재」(2015)라는 논문에서 그는 “커먼즈는 실존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고 생태적인 관계의 존재론을 묘사한다. 공유화는 지구상의 생명체의 공존을 서로 연결되고 창조적인 과정, 생물권과 문화권의 활력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활력 역시 언제나 공유화에 의존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된 적이 없다.

가까운 미래에는 이것이 단순히 계속될 수 없다. 세계 경제성장은 꾸준히 감소하며 우리는 경기침체의 시기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비어있는 세계에서나 제대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착취논리는 더 이상 가득 찬 세계에서는 지속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시장과 국가 시스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하며 시스템의 일부는 향후 수십 년에 걸쳐 붕괴될 수도 있다. 공통의 자원을 공유하는 일은 불안정성, 갈등, 점증하는 자원부족으로 압박을 받는 점점 더워지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조건을 제공하는데 필수적이다.

최근 공유 기반 경제학의 폭발적 증가는 이런 시스템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 공유에 기반한 시스템은 자원 처리량을 최대 80 %까지 줄이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있다(Rizos, X., & Piques, C. (2017). Peer to peer and the commons: A path towards transition. A matter, energy and thermodynamic perspective. Amsterdam, Netherlands: P2P Foundation). 미셀 보웬스와 호세 라모스는 공유 기반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분야의 실험이 포스트 자본주의 단계로의 전환을 위한 맹아 형태를 구성한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친다(Bauwens, M., & Ramos, J. (2018). Re-imagining the left through an ecology of the commons: Towards a post-capitalist commons transition. Global Discourse. doi: 10.1080/23269995.2018.1461442). 공유화는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넘어선 제3의 공급부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력적인 시장과 국가 시스템은 공유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지원할 수 있다.

서울시는 이런 좋은 사례를 실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2년부터 공유도시 정책을 시행했으며 불과 3년만에 서울시민은 연간 120억원, 서울시는 1조1800억원을 절감했다. 이 정책으로 1,280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9,800톤까지 줄었다. 여러 국제기구들이 이 정책의 성공을 인정하고 있지만, 서울시는 대중의 인식과 의지를 높이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시인한다.

 

커먼즈를 위한 사고방식

패러다임 변화가 진정한 것이 되려면 사회적, 문화적 변화가 필요하다. 도넬라 메도스는 대규모 사회적 전환을 촉진하는 가장 전략적인 레버리지 포인트는 사고방식(mindset)의 차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데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현재 상황이 시사하는 것처럼 만약 커먼즈 운동이 시스템 위기의 제한된 조건에서의 자원이용에 대한 광범위한 대응이 되려면, 사람들의 사고방식, 사회적 규범, 행동양식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필요하다.

관계적 세계관과 존재론은 인류세에 인간의 역할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류세의 생명의 복잡성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질문할 뿐만 아니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비인간 행위자들의 권위와 역할을 존중하는 윤리학의 개발을 요구한다. 내가 내부주체성(intra-subjectivity)이라고 부르는 윤리학을 따르는 공유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면, 단순한 P2P 경제학을 넘어 공유화를 확장함으로써 보살핌을 모든 존재로 확장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자연이 우리로부터 분리된 요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상호작용 안에서 공동 생산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관계가 외적으로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의존적이며 내적 인식 차원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상호의존성 개념과 구별된다. 내부주체성은 어떻게 모든 존재가 서로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연결돼 있는지 설명한다. 우리가 스스로의 고통과 더 깊이 연결될수록 우리는 그것이 타자의 고통과 어떻게 구성적 관계를 갖는지 더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확장으로서 타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더 많이 행동하게 된다.

내부주체성의 윤리학은 우리가 어떻게 자연-문화를 공동 생산하는지, 자연과 문화가 연결돼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어떻게 더 긍정적으로 사회-생태적 시스템 위기를 완화시키는지 보다 잘 이해하도록 해준다. 인류세에 각자 능력이 많이 다른 인간과 비인간 존재 모두에게로 확장되는 보살핌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주체성과 행위자라는 개념을 날카롭게 만든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의 삶이 문제인지, 우리가 어떻게 인간적 품위를 갖추고 지킬 수 있을지, 보다 생생하고 우호적인 세계를 향한 전환의 집단적 조건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지 등 복잡한 질문들의 해답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공유화는 우리의 비분리성, 상호의존성, 공존성에 대한 이해를 통해 물질적으로, 관계적으로 서로에게 연결되는 방식이다. 협동조합과 풀뿌리 조직을 결합한 잘 조직된 커먼즈는 투명성, 평등, 존중을 실천함으로써 다양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신뢰를 만들고 책임을 실천하는 것은 성공적인 자기조직과 운영을 위한 필수 요소이다. 우분투의 서술처럼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역자주: 우분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사람들간의 관계와 헌신에 중점을 둔 윤리사상이며, 그 자체로 “네가 있어서 내가 있다”는 뜻이다.) 초기불교의 보살사상에 응용한다면, 세속적이고 영적인 운명의 결합으로서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에서 생겨난다. 포용성의 확장은 다른 사람을 주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한다. 그리고 의식은 물질적 인프라와 욕망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에 물질의 전환과 의식의 전환은 함께 이뤄진다.

거의 인식되지 않지만 공유화는 물질적, 사회영성적 교환-스스로 조직하고 서로를 책임지는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교환-이라는 형식으로서 이중의 원자가를 갖는다. 합리적인 자기이익을 정책화하고 규제함으로써 공동자원을 관리하는 정책입안자들과 달리, 공유참여자들은 커먼즈를 땅과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애착이라는 감각으로 운영한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서부해안의 어부들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의무로부터 나온 “신사협약”을 따른다. 유사하게 오픈 소스 디지털 커먼즈 운동은 자발적인 교환이 교육과 리소스에 대한 공공의 접근을 어떻게 가능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오픈스트리트맵의 데이터와 정보를 공유하는 자원봉사자들의 글로벌 커뮤니티는 의료시설, 관공서, 공공시설에 대한 리소스와 정보를 필요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 이들은 합리적 자기이익으로부터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타자에 대한 헌신의 감각에 따라 서로의 요구를 보살피는 것이다.

 

커먼즈의 생태계

개럿 하딘,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는 엘리노어 오스트롬도 현재 패러다임 안에서 공유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공유를 대상물로 여기는 그들의 이해방식은 암묵적으로 실체의 존재론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서 커먼즈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주어진 공식적인 규범과 규칙의 존재로 인해 협력하는 합리적, 자율적 개인들에 의해 구상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개인, 시장, 국가에 대한 자유주의 이론을 경유한 커먼즈의 발전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생활을 운영하기 위해 부과된 일련의 과정과 체제로 커먼즈를 축소시키기 때문이다.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만약 커먼즈 운동이 글로벌 사회운동이 된다면 어떻게 커먼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람들의 가치와 세계관을 재형성할 것인가. 공유화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공리적 차원에 대한 최근의 연구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관계적 패러다임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로버트 울라노비치는 『세 번째 창』(2009)이라는 저서에서 근대성으로의 중요한 전환을 이룬 세 가지 세계관을 제시했다. 첫째는 기계론의 세계관으로 데카르트, 흄, 칸트, 베이컨, 특히 뉴턴과 같은 사상가들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는 진화론의 세계관이며 카르노와 다윈에 의해 형성됐다. 두 번째 세계관은 첫 번째 세계관보다 진보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관계의 원동력으로서 협력의 중요성, 진화에서의 창발이론, 자연-문화의 동시생산과 같은 최근의 발견을 깎아 내린다. 세 번째 세계관인 관계적 혹은 생태적 세계관이야말로 커먼즈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가장 관련이 깊다. 아직 초기단계인 이 세계관은 생태적 혹은 과정적 형이상학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시스템을 상향과 하향의 과정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는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관계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볼 때 커먼즈는 탄생 이전에 미리 존재 지어진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실천에 의해 생성된다. 공유화에 대한 이런 합리적 관점은 차이들의 조화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간다. 또한 “커먼즈의 생태계”를 상상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커먼즈 공동체들을 가로지르는 역동적 연대와 협력을 실현한다(Bauwens & Lamos, 2018). 이런 관점은 공유참여자들(commoners)이 서로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제공한다고 바라보며, 자유와 자기결정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 힘, 자원들로 이뤄진 공동체들과의 보다 풍부하고 정교하게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삶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로 유쾌하게 어울려 사는 공동체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창발적 과정으로서 나타난다.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은 자기결정과 공동체의 연대 사이의 조화롭고 끝없이 복잡한 대조를 통해 실현된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 커먼즈 운동의 가장 고무적인 측면은 그것이 생태적 방식의 사고, 존재, 행동을 선취하면서 관계적 세계관 안에서 공동체가 번영하기 위한 이미 검증된 수단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커먼즈 운동은 21세기의 시스템 위기에 대한 광범위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집단적으로 커먼즈를 삶의 방식으로서 탐색해야 하며, 더 큰 문화적 전환의 한 부분으로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적 삶의 모습으로 상상해보는 일이 요구된다.

 

잭 월시

독일 포츠담 고등지속가능성연구원(IASS) 연구원

월, 2020/0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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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컨퍼런스에 참여하게 되어 영광이고, 도움을 주신 서울시보건환경연구원과 환경재단,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 등에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기후 변화와 관련한 분야에서 일을 하게 된 건 한국에서 오신 분의 리더십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입니다. 반 총장은 2014년에 유엔 기후회의를 개최하여 기후위기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를 도모하고자 했는데, 당시 저는 뉴욕에 있는 유니언 신학교를 갓 졸업했습니다. 그 후 공공 계획 관련 일을 하고 있던 중에 반 총장의 도전을 듣게 되었고, 저는 “지구를 위한 종교”라는 컨퍼런스를 여는 것을 제 새로운 미션으로 삼았습니다.

이 컨퍼런스에는 전 세계에서200개 이상의 종교 단체들과 그 지도자들이 모여 현재의 기후위기를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재구성하고, 신앙심에 기반한 기후위기 대응 활동을 촉진하고자 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영감을 얻은 저는 지구윤리센터(Center for Earth Ethics)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이 단체를 이끌고 있습니다. 저와 저희 팀의 목표는 지구를 비롯한 모든 것들의 장기적인 건강과 안녕을 목표로 하는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문화와 정책들을 찾아낸 뒤 그것들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국내총생산이나 주식시장에서의 시가총액 등 사회가 가치 측정을 위해 사용하는 주요 기준들은 우리가 급박한 기후 위기를 맞이하게 된 데 책임이 있습니다. 그 기준들은 매우 단기지향적이며, 오염이나 자원 고갈, 불평등을 비롯해 문화나 공동체, 건강과 같은 웰빙의 비금전적 요소들에 대한 투자의 가치를 담아내지 못합니다.

오늘 저는 제가 참여하고자 하는 변화에 대해, 그리고 왜 제가 그것을 윤리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지 말하고자 합니다. 윤리는 옮음과 그름의 판단을 수반합니다. 또 한 개인으로서, 집단의 일원으로서 우리 각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가치들과 우리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윤리적 관심”의 범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또 정책 결정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지구 윤리에서의 윤리적 관심사의 범위는 매우 넓은데, 이는 우리가 전 지구적인 건강과 안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스웨덴의 한 교회에서 만난 제 친구의 이야기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국제 정책이 만들어지는 어느 공간이든 세 개의 빈 의자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세 개는 각각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미래 세대들, 그리고 지구에 있는 모든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 – 즉, 현재 만들어지는 정책들에 가장 큰 영향을 받으면서도 가장 적은 영향력을 가진 존재들 – 을 위한 지정석들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잘 생각해보시면, 이 세 집단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정책의 수립 과정과 결과를 더 공정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더 강하고 지속 가능한 공동체 시스템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합니다.

저희 지구윤리연구소에서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전통과 지혜들을 끌어 모음으로써 세계의 어느 종교든 생명의 유기체성과 근본적 상호 연결성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생각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어느 곳이든 불의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곳에서의 정의에 대한 위협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틱낫한 스님의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것들과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환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재한다”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합니다. 이러한 통합적 전체성은 과학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데, 윤리와 과학이 만나는 간학문적 연구는 지구 윤리의 아주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입니다.

다시 세 개의 의자 이야기로 돌아가면, 첫 번째 의자의 경우 현재 국제 인권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엔 세계 인권 선언에서는 인권의 핵심적 가치들을 제시하며 천부적 존엄성과 함께 모든 인간이 가진 평등하고 양도될 수 없는 권리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 가치들은 자유와 평화, 정의의 기초가 되는 것들이죠. 따라서 지구 윤리도 이 프레임 안에서 작동하며, 단지 깨끗한 물과 공기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기후변화의 피해가 이러한 재난 상황을 유발하는 데 가장 적은 영향력을 끼친 (즉, 지금까지 가장 적은 양의 탄소를 배출한) 지구상의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가장 크게 돌아간다는 것도 알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의자의 경우는 우리로 하여금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윤리적 사고를 하도록 합니다. 이산화탄소와 메탄이 배출될 경우 이 가스들이 대기중에 머무르다가 실질적 영향을 끼칠 때까지의 시차가 있으며, 이는 우리가 자원을 자연적으로 보충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고갈시키고 있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 자원들과 토지는 대기중의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이고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는 “자연 탄소 포집기”의 역할을 하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윤리학자 스티븐 가드너는 “우리는 단순한 공유지의 비극이 아닌, ‘현재의 미래에 대한 독재’의 상황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더욱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지난 수년간 강력한 청소년 기후위기 대응 운동의 부상을 지켜보았습니다. 이 운동은 미래 세대의 목소리를 현재로 가져옴과 동시에,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칠 현재 세대의 행동들을 중단하라는 도덕적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 여겼던 초대형 태풍, 가뭄, 폭염, 산불, 해수면 상승 등은 이미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생명 시스템의 균형을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기 전에 생태적 전환의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세 번째 의자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1948년, 그러니까 유엔 세계 인권 선언이 발표되던 해의 지구의 인구는 24억 명이었지만, 2020년 현재는 78억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70여 년의 시간동안 인간은 다른 종들의 서식지를 대규모로 파괴했고, 그 결과 유엔은 현재 백만여 종 가량이 멸종 위기 상태에 놓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태적 손실은 인간에게 새로운 바이러스와 질병의 등장, 식량 시스템의 위협 등 수많은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받을 영향들은 반드시 생명 체계의 상호 연관성 속에서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한편,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가 천부적 가치와 권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은 지구 윤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윤리학은 옳음과 그름의 판단이 사회적 규범과 법 질서 하의 판단과 맞지 않을 때 가장 강해졌습니다. 미국에서의 노예제 폐지와 여성 참정권 운동 등 과거의 중요한 운동들과 사회 변화의 시기도 모두 이런 때였습니다. 저는 오늘날이 바로 그런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생태계를 파괴해온 수많은 논리들과 유인들은 모두 완전히 합법적이었으며 사회적 규범과도 합치되었습니다. 이 때 데이터와 과학 기술은 이러한 생태적 위기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발생한 기후변화와 대기오염의 절반 정도가 지난 20년간 발생했는데, 이 시기는 바로 우리가 기후변화의 인과관계를 가장 잘 이해하고 친환경 재생 에너지라는, 가장 확실하고 실행 가능한 대체제를 가지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따라서 현재 상태의 변화를 위해서는 우리들의 도덕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구조적 악마”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윤리학자 신디아 몰라베이다는 “구조적 악마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그 자체가 쉽사리 ‘선’ (善) 혹은 좋은 것으로 둔갑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선은 경제 성장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난에서 구제해준다는 명목 아래 생산과 소비의 무한 성장을 위한 생태계 착취 및 화석연료의 지속적 사용을 꾸준히 지지하고 정당화시켜온 가치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자가당착에 부딪히게 됩니다. 유엔의 한 빈곤 및 인권 문제 전문가는 작년에 발표된 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는 지난 50여 년 간의 공중 보건 개선과 빈곤 감소를 위한 진보적 노력을 모두 수포로 만들 수 있으며, 오히려 수백만 명 이상을 추가로 빈곤의 늪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지속가능하지 않은 성장이 어떠한 견제도 없이 이어진다면, 기후위기는 궁극적으로 지구라는 행성 안의 생명체 서식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컨퍼런스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세 개의 의자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 논리들에 대한 비판적, 도덕적 사고를 멈추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은 부유하고 깊으며 창의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입니다. 한국인들의 생태적 경험들은 한국을 생태 전환 시대의 리더로 만들어줄 것이며, 저도 여러분들과 함께 배우고 일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같은 인류로서, 지구에 사는 생명체로서 희망 넘치는 공존의 미래를 향해 나아갑시다.

 

카렌나 고어

지구윤리센터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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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21/01/15-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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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근대 세계사는 새로운 단계인 후기근대(late modern age)에 접어들었다. 세계인이 이를 점차 실감하고 있는데, 촛불 이후 남북 코리아는 더욱 그러하다. 새로운 시간의 실감 속에서 최원식 교수가 《프레시안》 창간 17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글 「남북연합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공동체」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강조하고 코리아 남북연합이 그 촉진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후기근대의 세계 상황이 두 코리아의 공존체제·평화체제를 가능하게 하고 있으니 이를 위한 내적 준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온 평자로서는 동의하고 환영한다.

이제 촛불혁명과 판문점, 싱가포르 선언으로 그 가능성은 바로 코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촛불 직전인 2016년 5월 《프레시안》과 ‘다른백년’이 주관했던 4회 강연에서부터 평자는 공존체제, 평화체제보다 ‘양국체제’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공존체제나 평화체제는 ‘그냥 맞는 말’로 들릴 수 있다. ‘좋아.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공존과 평화를 이뤄낼 실제적 방법, 핵심고리가 중요한데, 이것이 ‘코리아 남북 양국의 주권국가(sovereign state)로서의 상호 인정’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양국체제가 돼야 공존과 평화가 가능하다. 양국체제란 양국 공존체제, 양국 평화체제의 줄임말이다. 공존과 평화를 실현할 양국체제가 남북연합의 바탕이 될 것도 자명하다.

발제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우선 발제문은 ‘國際(inter-national)’보다 ‘民際(inter-civic)’를 중시하기에 통상 쓰는 ‘(남북)국가연합’이 아니라 국가를 빼고 ‘남북연합’이라 하는 듯하다. 국제(International)에 민간관계가 빠지는 게 아니니 민제라는 말이 굳이 따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국제와 민제가 따로는 아니겠다. 발제문이 언급한 한중일 관계만 하더라도 국제가 안 풀리면 민제도 어려워진다. 극적 사례는 1992년 한중 수교였다. 국제를 트니 민제가 크게 열렸다. 남북관계는 국제(이 경우는 inter-national이 아니고 inter-state가 된다)가 막혀 민제는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있다 할 형국이니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남북연합 논의에서도 국가(state) 대 국가(state)로서 남북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발제문은 그와 전혀 다르게 본다. 아래 문단은 관련 주장이 집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의외로 ‘양국론’에 대한 ‘경계 긋기’로 시작한다.

최근 세를 얻고 있는 양국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그을 필요가 없지 않다. 양국체제론자들의 논의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한 탓에 단정하긴 어렵지만 남북은 일국도 아니지만 양국도 아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바, 분단체제를 상정하지 않은 양국론과는 애초에 무관하다. 그렇다고 그냥 일국론도 물론 아니다. 정말로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不一不二]. 요컨대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을 설령 통일의 최종형태로 삼는다고 해도 그 연합이 두 나라의 단순 병치가 되기는 애시당초 그른 것이매 남북연합론은 주변 4강의 의심을 풀고 내부의 대국주의를 절약할 요체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남북연합론은 일국적 통일론과 양국적 반통일론을 가로지르는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다.

국가 대 국가의 문제를 시종 비켜가고 있다. 일국도 아니고 양국도 아니라 한다. 과연 그런가? 현실은 일 민족, 이 국가(one nation two states)이다. 둘이되 하나요, 하나이되 둘[一而二, 二而一]이다. 엄연한 사실이 그러함에도, 즉 이 두 개의 국가가 국제적으로는 모두가 널리 공인된 국가이면서, 막상 양국은 아직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문제요, 비정상 아닌가? 그러나 「발제문」은 거꾸로 본다. 이런 상태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여기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다. ‘불일불이(不一不二)’라 한다. 불일불이란 불가(佛家)의 진리관[中論]을 표현하는 높고 찬란한 언어다. 진리적 불일불이가 ‘분단체제’라는 개념에도 적용되고 있다. “분단으로 두 쪽이 난듯이 보여도 남과 북은 분단체제의 드러남으로 연계된바 …… ”라고 하였다. 분단체제를 이렇듯 고도로 긍정적인 개념으로 보기 때문에, 발제자의 ‘남북연합’이 “분단체제를 상정한 남북연합론”이라 하였다. 그동안 ‘분단체제’란 말은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이를 이렇듯 고도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용법이 일반인에게는 매우 낯설다. 분단체제는 남북이 적대하는 체제이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국가로서 인정하지 못해왔던 체제 아닌가?

거듭 말하여, 현실은 일 민족 이 국가 상태다. 체제 보장은 북미 간에만 아니라 남북 간에도 이뤄져야 한다. 그것이 양국체제다. 과연 무엇이 분단과 분단체제를 영구화시켜왔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둘임을 부정했기 때문에, 둘을 부정한 채로 결코 하나이자고 했기 때문 아닌가? 둘이 서로 인정하는 것이 이 함정을 벗어나는 제1보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것만이 바른 길이다. 『노자(老子)』 22장에서 “곡즉전 왕즉직(曲則全 枉則直)”이라 했던 게 양국체제의 취지와 닿아 있다.

양국체제 없이 남북연합이 제대로 될까? 국(state) 간의 際가 안 열렸는데 民 간의 際가 활짝 열릴까? 그렇듯 국제가 닫힌 채로 가능한 남북연합이란 어떤 것일까?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안정돼야 비로소 그 두 국가(state) 간의 남북연합이든 국가연합이든,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비로소 현실화되는 것 아닌가? 촛불혁명, 그리고 판문점 선언과 싱가포르 선언으로 이제 양국체제는 목전의 현실문제가 되었다. 판문점, 싱가포르 회담 한참 이전부터 줄곧 강조해온 것처럼 종전과 북미 수교는 양국체제의 입구요 일부다.

양국체제란 1973년 <동서독기본조약> 이후의 동서독 관계로 보면 이해하기 쉽다. <동서독기본조약>에서 양독(兩獨)은 서로를 국가로서 분명히 인정했고, 기본조약 이후 미국은 동독과 수교했다. 그 두 고리가 풀리면서 양독 관계는 안정됐다. 반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는 이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유엔 동시가입으로 코리아 양국체제의 외적 모양새는 일단 시작되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불완전하고 불균형했다. 그랬기에 그 경로는 금방 닫혔다. 반면 동서독의 양국체제는 안정적으로 지속됐다. 정권이 바뀌어도 존속했다.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시 남북이 처해 있던 여러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낮은 수준에서 합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그것이 마치 아주 높은 수준의 결과였던 것처럼 생각한다면 문제가 된다.

「발제문」의 ‘불일불이’ 구절을 읽으면서 연상을 금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의 유명한 “(남북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구절이다. 이 표현은 매우 외교적인 것인데, 이를 액면가보다 낮추어 읽는 것이 아니라(외교문서를 읽는 기본이다), 오히려 액면가보다 훨씬 높게 읽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남북은 국가 대 국가로 서로를 (아직 외적 조건과 내적 능력이 부족하여)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뜻이 높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이유는 남북은 애당초 두 국가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관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식이다. 그렇게 읽으면 이 구절은 마치 ‘우리가 지금 하나는 아니지만 결코 둘일 수 없다(불일불이)’라는 높은 이상에 남북 대표가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결코 두 국가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불일불이의 상태에서 곧바로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통일로 직행하자’라는 뜨거운 마음을 이심전심으로 표현한 것이 된다. 실제로 그런 오독들이 꽤 있었다.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연합이든 연방이든, 어떻게 가능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여태껏 듣지 못했다.

끝으로 ‘말이 아닌 말’을 일부러 만들어낼 필요는 없겠다. 위 인용문에서 “양국적 반통일론”이 그렇다. 앞서 설명한 대로 양국체제 없이는 공존체제도, 평화체제도, 남북연합도 담보되지 않는다. 양국체제 자체가 통일은 아니지만, 어떠한 경로보다 통일 촉진적이다. 양국체제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바람직한 통일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반통일’일까? 또 이 말과 짝을 걸어놓은 “일국적 통일론”이란 뭘까? 진보진영에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안다. 북(DPRK) 역시 이 입장을 폐기한 지 오래됐다. 그럼 뭘까? 발제자의 뜻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런 게 있다면 우스꽝스런 무엇일 듯하다. ‘말이 아닌 말’을 만든 것으로 부족하여 실체 없는 허깨비와 짝을 붙여놓은 꼴이다. 왜 이래야 했을까? 양측에 ‘극단’을 세워놓고 중간에 끼어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은 때로 쓸 만하다. 단, 그 양쪽 입장이 단단하고 분명해야 한다. 그럴수록 자신의 입장이 힘을 받는다. 그렇지 않고 ‘말이 아닌 말’과 ‘대립 아닌 대립’을 세워놓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식이라면 별다른 의미나 성과가 없을 듯하다. 또 그렇듯 가로지르는 게 ‘중형국가적 분단해소론’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국가’는 어떤 국가이고(일 국가? 이 국가?), 여기서 ‘분단 해소’는 어떤 해소인지(분단체제의 해소? 분단의 해소?)도 궁금하다. 어쨌거나 지금 필요한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 사이의 ‘경계 긋기’가 아니라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공통점을 모으는 일이 아니겠나 생각해본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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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2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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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2017년부터 준비되어 2018년 큰 물꼬를 텄고, 최근 하노이 북미회담에서 일시적 교착국면에 빠진 남북미 간 평화체제 정착은 어떻게 수순을 풀어야 할까? 남북관계든 북미관계든 핵심은 ‘신뢰의 확증’에 있다. 남북과 북미관계가 대화 지속 – 신뢰 축적의 트랙을 이어가면 남북·북미관계 서로를 선(善) 방향으로 추동한다. 그러나 지금 하노이 회담 이후 보듯, 북미관계에서 지체가 생길 수 있다. 그럴 때 남북관계의 주동성, 추동력이 더욱 부각될 수 있다. 남북관계의 게임의 차원을 바꾸는 것이, 북미관계의 게임의 차원을 바꾸는 일보다 우리의 주동력이 발휘될 수 있다. ‘양국체제론’은 남북관계가 동북아 주변관계에 최대의 주동성, 추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으로 구상되었다.

남북관계의 고리를 획기적으로 풀어나가는 방법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신뢰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면 된다. 신뢰에는 ‘피상적 신뢰’가 있고, ‘심층적 신뢰’가 있다. 심층적 신뢰란 가장 기본적인,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남북 간에 그렇듯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신뢰가 무엇이겠는가. 남북이 서로의 존재를, 존립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명환 교수의 글에도 이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미국과 일본이 북한과 정식 국교를 맺고 적대정책을 철회하더라도 남한의 존재가 위협이라는 현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고 북한 사회가 개혁·개방에 노출될수록 북의 체제 운영자들은 정치적 위협을 심각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 북한 당국이 자신의 주민이 친족방문을 위해 남을 왕래하는 일을 허용하는 일은 상당 기간 기대하기 어렵다”는 부분이다. 김명환 교수는 이런 사정 때문에 양국체제는 어렵고, ‘남북연합만이 올바른 길’이라 하였지만, 김 교수가 언급한 내용이 필자에게는 오히려 김 교수의 주장을 반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교수는 북미 수교, 북일 수교는 가능하더라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교, 즉 ‘한조(韓朝) 수교’는 오히려 불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 글쎄 그럴까.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라는 토픽이 미국과 일본의 정책 캐비넷에 올라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베까지도 이 판에 끼어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북미 수교, 북일 수교는 오히려 한조 수교가 물꼬를 터줌으로써 빠르게 뒤따라올 가능성이 더욱 크다. 왜냐하면 ‘근본적 신뢰의 확증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의 안보조건에서 미국과 일본 쪽에 자신의 존립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먼저 확보하려고 할 가능성은 낮다. 반면 한국과는 그 가능성이 더 높다. 촛불 이후의 국면에서는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앞서 김명환 교수가 말한 “남한의 존재가 위협이라는 현실”은 이제 북에게도 더 이상 그렇게 자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스스로가 북(DPRK)의 존립에 위협이 되지 않으려는 방향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물론 30년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단번에 일소한 촛불혁명의 힘, 그리고 그 힘에 의해 들어선 촛불정부의 역할 때문이다. 아니, 30년이 아니라, 코리아전쟁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의 민의가 이만큼 남북의 공존과 평화를 소망하는 방향으로 모아져본 적이 없다. 남의 한국도, 북의 조선도 이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 조선 간에 그러한 ‘근본적 신뢰’를 확증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백낙청 선생, 그리고 백 선생을 항상 충실하게 조술(祖述)하는 김명환 교수도, 그 방법이란 ‘남북연합’이라고, ‘남북연합밖에 없다’고, 되풀이해왔다. 그런데 지금 이 마당에 그 ‘남북연합’의 방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분명히 한 것이 없다. 필자가 본 단 하나의 예외라면 백 선생이 2018년 《창작과비평》 181호에 “미국이 어느 시점에 변심하여 북을 다시 침공하거나 적대정책으로 되돌아갈 태세가 되었을 경우, 이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이 가담한 국가연합에 대한 침공 내지 적대가 될 수밖에 없도록 제도화해 놓는 일”이라 한 것인데, 이 정도로 높은 수준의 ‘국가연합’이란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가 읽어도 당연히 그렇게 읽히는 말이다.(이렇게 읽은 것이 ‘오독’이고 ‘비약’이라는 김명환 교수의 반론에는 아쉽게도 무엇이, 왜, 어떻게 ‘오독’이고 ‘비약’이라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다만 ‘기성 사회과학 교과서에 맞춰 재단한 탓’이라 하고 만다.)

현재 이 순간의 남북관계에서 생각해보자. 백 선생과 ‘분단체제론’에서는 현재 이 순간 역시 당연히 ‘남북연합’, ‘국가연합’ 상태다. 남북연합은 분단체제를 상정·전제하는 것이라 하니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재의 남북관계 또는 남북연합 관계에서 백 선생이 말한 바와 같이 “미국이 어느 시점에 변심하여 북을 다시 침공하거나 적대정책으로 되돌아갈 태세가 되었을 경우, 이것이 곧바로 대한민국이 가담한 국가연합에 대한 침공 내지 적대”가 된다고 어느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너무나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렇다면 백 선생이 그리는, 그렇듯 높은 수준의 ‘국가연합’까지 한참을 올라가야 할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높이 올라가기 위한 첫 계단, 첫 단추가 무엇이냐다. 나는 지금껏 여기에 대한 답을 들어본 바 없다.

그 답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가 지난 글들에서 여러 차례 설명해놓았다. 기존의 남북 간의 고통을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 느껴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문제다. 남과 북이 서로의 존립을 보장하는 신뢰의 확증이 무엇이겠는가? 그 첫 단추가 무엇이 될까? 상대방을 적으로, 붕괴와 소멸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확증 장치다. 지금 남과 북의 상태에서 무엇이 그런 확증 장치가 될까? 남은 북을, 북은 남을, 영토와 주권을 가진 정당한 국가 대 국가로서 서로 인정하고 이를 만천하에 공표하고 상호 대표부를 교환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과 조선 두 나라의 수교, 즉 ‘한조(韓朝) 수교’다. 이렇게 될 때 ‘분단체제’라는 과거의 룰은 폐기되고 ‘양국체제’라는 새로운 차원의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 이 ‘한조 수교’의 역사적 파급력은 1972년 ‘동서독 수교’에 못지않을 것이다. 동서독 수교 이후 상호 교류와 협력이 크게 증가했던 것은, 상호 간의 ‘근본적 신뢰’의 문제를 일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두 국가가 상호의 존립을 위협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지켜질 것임을 서로가 믿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세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역시 그러한 근본적 신뢰를 확증해가는 과정이었다. 그 결실이 머지않은 미래에 맺어지기를 바란다. 한국이 북미 대화를 잘 중재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일이 있다. 남북이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남북의 모든 논의와 합의가 어떤 쪽을 향해가고 있는지 방향감각이 무엇보다 우선 분명해야 한다. 그것은 ‘남북 간의 근본적 신뢰의 확증’이며 ‘남과 북이 서로를 정당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는 일이다. 북미 수교가 한조 수교에 선행하기보다, 한조 수교가 북미 수교를 성사시키는 경로가 더 현실적이다. 소위 ‘대북제제’ 문제도 ‘한조 수교’라는 역사적 임팩트에 틀 자체가 변용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김명환 교수는 여전히 북은 ‘남한의 존재의 위협’을 벗어날 수 없고, 남 역시 마찬가지로 ‘북한의 존재의 위협’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 할까?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자. 물론 ‘한조 수교’가 이뤄지자마자 남북이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상태가 당장 100퍼센트 깨끗하게 해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사에 그런 일은 없다. 그러나 ‘한조 수교’가 이뤄지면 역사적 첫 단추가 채워진다. 게임과 트랙이 달라지는 것이다. 코리아의 지난 70년 적대 상태를 생각해보면, 당장 100퍼센트는 언감생심이고, 우선 절반만 해소된다고 하여도 획기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이런 것이 바로 ‘질적 변화’다. ‘위협’은 강박이어서 붙들려 있을수록 커진다. 기존의 ‘분단체제론’에는 그러한 ‘위협’을 넘어서고 극복할 담대한 전망이 부족했다.

그렇듯 질적 변화를 이루어내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그 후의 과정 역시, 그만큼, 또는 그보다 더욱 중요할 것이다. 상호 신뢰를 확인하고 쌓아가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배려들이 교환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매우 많다. 동서독 간 성공적 교류의 선례도 있다. 나는 ‘분단체제론’이 이러한 양국체제의 전망을 아주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원래 분단체제론은 분단체제를 비판하고 극복하자는 이론이었다. 분단체제론이 양국체제의 전망을 수용한다는 것은 그러한 원래의 이론적 취지와 포부에도 부합한다.

 

독일 양국체제의 경험을 다시 생각한다

끝으로 앞서 몇 차례 언급한 만큼, 동서독 사례의 의미에 대해 첨언해보려 한다. 1970년대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동서독 수교(=<동서독기본조약>)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 때가 되었다. 1990년대 초반 백낙청 선생이 분단체제론을 처음 입론하고 있을 때, 백 선생은 당시 이뤄졌던 독일의 흡수통일 사례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고, 그래서 독일과 한반도의 분단 원인과 통일 전망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당시 백 선생이 그러한 태도를 취했던 데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동구권이 붕괴하고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통일 되었던 당시에는 ‘북한 조기붕괴론’을 펴는 사람들 중에 독일식 통일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북한’은 어차피 곧 붕괴될 것이니까 한국은 서독처럼 흡수통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물론 허황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독일의 사례를 무조건 백안시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1970년대 동서독 수교와 독일 양국체제이지, 1990년의 흡수통일이 아니다. 1972년 동서독 수교와 1990년 흡수통일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벌어진 전혀 다른 사건이다.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제는 1990년대 초반에 독일 흡수통일의 스펙터클에 눈이 팔려 1970년대의 독일 양국체제 경험의 역사적 중요성을 놓치고 있지 않았는지 다시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백낙청 선생과 김명환 교수도 다시 주목해주기 바라는 대목이다. 1989~1991년 당시 남북의 ‘당국자’들은 오히려 지극히 현실적인 시각에서 양국체제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북이 유엔에 동시가입할 수 있었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도출해낼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볼 때도 대단한 용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정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 남북 수교까지 이루었다면 코리아 양국체제는 이미 그때 성립할 수 있었다. 왜 이 길이 막혔던가? 누가 막았었나? 남쪽의 노태우 대통령도, 북쪽의 김일성 주석도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더 속도를 내서 이 방향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길을 막았던 것은, 이 책 1부 1장에서 상세히 분석해둔 바와 같이, 북미 수교를 거부하고 북의 조기붕괴를 도모했던 미국과 한국의 냉전대결 세력들이었다.

1970년대의 동서독 수교 – 독일 양국체제와 1990년대 흡수통일이 전혀 성격이 다른 사건이라는 것은, 흡수통일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반추해볼 시각을 1970년대 양국체제의 경험이 제공해주고 있다는 데서도 볼 수 있다. 독일 흡수통일의 최대 문제는 동독을 내부 식민지로, 동독인을 열등국민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통일독일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동구권 – 소련 붕괴라는 충격 속에서 통일과정이 눈사태와 같은 파국적 양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1972년 <동서독기본조약> 체결 이후 1989년 소련·동구권 붕괴 이전까지 독일의 양국체제는 동서독의 차이를 장기적이고 점진적으로 줄여나간다는 분명한 공동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독일 양국체제의 경험이 우리에게 여전히 귀중한 타산지석이 되는 이유다.

더구나 과거 독일 양국체제를 둘러싼 국제적 상황에 비해 오늘날 코리아 양국체제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훨씬 더 안정적이다. 1970~1980년대 미소 간의 적대와 대립은 오늘날 미중, 미러, 또는 중일 간의 갈등에 비해 훨씬 날카롭고 높았다. 냉전 이후 세계는 진영 간 이념 적대가 사라지고 국가 간 지역 간 상호 의존이 깊어졌다. 필자는 이러한 새로운 세계상황을 ‘후기근대’로 정의하면서, 이 새로운 역사 단계의 세계사적 의미에 대해 여러 차례 분석하고 음미해본 바 있다. 후기근대에는 과거 소련·동구권 붕괴와 같은 진영 붕괴가 발생하지 않는다. 과거와 같은 수준의 진영 자체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중국 혹은 미국이 머지않아 과거 소련과 같이 극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이 세계의 그 많은 ‘전문가’ 중에서 단 한 사람도 없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코리아 양국체제가, 성공적으로 정립되기만 한다면, 과거 독일의 양국체제보다 훨씬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예상해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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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06/25-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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