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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 특권을 누린 사람들 – 조선귀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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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팔아 특권을 누린 사람들 – 조선귀족열전

admin | 목, 2020/02/20- 23:30

[소장자료 톺아보기 12]

나라를 팔아 특권을 누린 사람들 – <조선귀족열전>

 

<조선귀족열전>, 1910.12.13.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열전에 실린 백작 이완용

조선귀족 일본관광단朝鮮貴族の內地觀光團, <倂合記念朝鮮寫眞帖>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점한 직후인 1910년 11월 3일, 도쿄를 방문하여 기념사진을 찍은 조선귀족 부부관광단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는 일본의 화족(華族) 제도를 모방해 조선에도 귀족제도를 실시했다. 화족이 옛 번주(藩主)와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설정되었듯이 조선귀족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한 사람을 기준으로 설정했다. 일본이 강제로 맺은 ‘합병조약’을 보면 ‘이왕가의 종친에 대해 상당한 명예와 예우를 하고(제4조), 훈공이 있는 한국인으로 특히 표창할 만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해 작위를 수여하고 은금을 하사한다(제5조).’고 명시했다. 이 두 조항과 함께 일본 황실령 제14호로 22개조의 「조선귀족령」을 공포하여 식민지 지배층을 포섭하기 위한 조선귀족을 선정하였다.
작위 범위는 「조선귀족령」 제2조, “이왕의 현존하는 혈족으로서 일본국 황족의 예우를 받지 아니한 자, 가문(門地) 또는 공로 있는 조선인에게 조선귀족을 수여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병합과정에 협력하거나 순응한 이왕가의 종친과 ‘보호정치시대부터 합병 전까지’ 정1품, 종1품 이상에 속하는 고위관료 총 76명에게 귀족 작위가 주어졌다. 특히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한 자에게는 훈1등, 훈2등의 서훈을 추가했다. 그러나 작위 수여는 항구적인 친일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본에 충성하지 않거나 정책에 순응하지 않은 행위를 했을 때는 ‘반납’ 또는 ‘예우정지’, ‘세습불허’ 등을 규정도 포함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귀족령」에 의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던 조선귀족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조선귀족열전>이다. 1910년 12월 13일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귀족열전>은 총 263쪽에 걸쳐 조선왕실과 조선귀족의 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목차는 ‘이왕가의 영광’과 「조선귀족령」 22개조,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이조선보(李朝璿譜)’,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본의 왕공족으로 격하된 ‘창덕궁 이왕전하’ 순종을 비롯한 이왕가 5인과 함께 후작 6인, 백작 3인, 자작 22인, 남작 45인 등 총 81명의 조선귀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들의 경력과 인물평, 사진을 실었다.
특히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인물평을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완용의 경우, “한일합방의 대세가 바뀔 수 없는 것을 간파하고 정국의 추세에 순응, 합방조약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 8월 22일 데라우치 총독과 함께 조인하였다.”고 하며 “난관에 처해 있으면서도 책임을 완수한, 실로 식견이 탁월(卓絶)한 정치가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정부가 발표한 76명(왕공족 제외)의 귀족명단을 살펴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대한정책에 순응한 자, 특히 강점에 기여한 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을사늑약의 성공적인 체결을 주도한 이지용을 비롯한 을사오적, 정미조약에 앞장섰던 송병준, 정미칠적, 병합조약 체결로 ‘합방’을 완수한 이완용(李完用) 등 경술국적이 모두 조선귀족이 되었다. 특히 각 조약의 책임자인 이지용과 이완용은 등급이 높은 백작을 수여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에 큰 훈공이 있고 재상에 있던 자라 하더라도 일본의 정책에 순응하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을 옹호하는 자는 제외되었다.
일제는 귀족이라는 명예와 함께 막대한 부도 제공했다. 작위의 고하, 병합의 공로, 대한제국 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거액의 은사공채를 지급했는데 작위와 은사금은 당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속자에게 세습되었기에 매국적인 조선귀족들은 대를 이어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나라를 팔아 얻은 부로 권세를 누리는 자들을 조선민중은 그냥 두지 않았다. 이들을 직접 암살하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졌다. 나인영, 오기호 등이 을사오적 암살을 실행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고, 이근택은 기산도·이근철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으며, 이완용은 이재명의 칼을 맞고 오른쪽 폐를 관통당하기도 했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민중의 분노는 뜨거웠다. 그러나 작위를 받고 거액의 은사공채로 부를 축적한 조선귀족들은 대대손손 호의호식하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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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1 ]

전쟁포로가 된 식민지 조선인의 恨 – 시베리아 한恨의 노래

 

일본과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시베리아 억류기간중 미불임금 반환과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인 故 이규철

 

시베리아 한의 노래 육필 원고

 

일제강점기 징병·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만주·사할린·쿠릴열도 등지에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 일대를 중심으로 집단 수용소 생활을 하며 수년간 가혹한 강제노동에 복역한 조선인들이 있다. 이들을 시베리아 억류자라고 한다.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자는 무려 1만여 명에 달했지만 현재 한국 내 생존자는 10여 명뿐이다. 1991년 한국 거주 생존자들이 ‘시베리아삭풍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피해보상운동을 전개했다. 2010년 일본국회는 ‘전후 강제억류자 특별조치법안’을 제정 했으나 한국인 피해자들에게는 국적조항을 들어 보상에서 제외하였다. 끌고 갈 때는 일본인, 보상할 때는 한국인의 논리를 적용한 것이다.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 함대의 기지인 진주만에 폭탄이 쏟아졌다. 일본군이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을 단행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만주를 침략한 이후 일본은 엄청난 양의 병력과 물자를 투입하였지만 전쟁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특히 10여 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일본의 젊은이들이 수없이 죽어가자 일본의 눈은 조선의 젊은이들로 향했다.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것이다. 태평양전쟁은 조선에도 ‘징병제’를 실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태평양전쟁 중 강제 징집되어 일본 관동군에 편입, 전쟁에 참가한 고 이규철의 육필 회고이다.
<시베리아 恨의 노래>로 원고제목을 붙인 이규철은 징집과정부터 부대배치, 자폭특공대 훈련, 시베리아 포로생활, 귀국과정 등을 총 237쪽에 걸쳐 수기로 작성하였다

<시베리아 恨의 노래> 표지

 

이규철은 1925년 1월 21일 경남 울산군 하상면에서 태어났다. 1941년 울산공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만주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5년 8월 징집되어 일본 관동군에 편입되었다. 주요임무는 폭발물을 안고 소련 전차로 육탄 돌격하는 자폭특수대 역할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했다. 이때 중국 동북부 만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관동군은 대다수가 무차별 징집된 퇴역군인이나 초년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제 징집된 만주와 조선 청년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소련군 탱크로 폭탄을 들고 돌격하는 훈련을 받았다. 바로 이들 중 한 명이 이규철이었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남하에 속수무책으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60여 만 명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 중 1만여 명이 조선의 젊은 청년들이었다. 이규철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블라코베시첸스크에서 포로수송 화물차로 세레칸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8년 말까지 시베리아의 혹한 속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9년 2월 천신만고 끝에 귀국했으나 조국은 분단되었고, 부친은 이미 고인이 되어 고향에는 모친과 형 둘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일찍 건빵으로 배를 채우고 전차격파 자폭대 훈련이 시작되었다. 길이 2m가량의 장대 끝에 원반 크기의 폭탄을 장치하고 그것을 들고 숲속에서 숨어 있다가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슬라이딩하는 식으로 전차 캐터필러 밑에 이것을 밀어넣어 전차를 폭파하는 일본 사무라이 전술이었다. 그 다음은 작은 귤만한 급조 폭뢰爆雷를 안고 전차를 파괴하는 훈련이다. 즉 급조폭뢰의 안전핀과 군복 가슴 단추를 짧은 끈으로 연결시켜 이것을 양손으로 껴안고 1인용 참호 속에 숨어 있다가 접근하는 적의 전차에 뛰어들어 전차 캐터필러 밑으로 이것을 밀어넣는 것이다. 그 순간 안전핀이 빠지는 동시에 급조폭뢰가 폭발한다. 자기 한 몸을 희생하고 전차를 파괴하는 자폭특공대 임무를 한국인 초년병에게만 강요하였는데 불평불만이 통할 리가 없다.
8월 염천하의 고된 훈련으로 속옷은 땀으로 젖어 내의는 피부에 찰싹 붙어 걷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내 몸을, 내 목숨을 바치고 이런 싸움을 해야 하는가. 적함 굴뚝에 돌진한 신풍(가미카제) 특공대와 같은 무모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
– 시베리아 억류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시베리아 한의 노래’ 육필 원고 중에서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20/01/21- 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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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8]

 

해방이 아닌 침략 구호, ‘대동아공영권’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7월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군사충돌을 유발한 뒤, 중국본토를 침략했다.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하며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작전’을 펼쳤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은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장제스 국민정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새로운 자원공급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빼앗기 위해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침공했다. 이에 앞서 일본내각에서는 국책요강으로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전쟁확대의 명분이자 전쟁동원체제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단결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팔굉일우(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정신을 바탕으로 각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할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침략전쟁의 지속을 위한 인력충원과 물자 보충도 절실해져 갔다. 각종 전쟁물자를 양산하고 군사시설 등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대의 경우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을 대신해 각종 군사 업무를 볼 민간인(군속)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력 수급문제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의 징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아래 조선 민중들은 오로지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위해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고 쥐꼬리만큼 떼어주는 배급품을 가지고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19/10/29-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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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39

국치國恥 식민지조선 방방곡곡에 펄럭이는 일장기

• 강동민 자료팀장

조선군사령부 정문에 걸려 있는 일장기, <사단대항연습사진첩>, 1931

제19사단사령부 정문, <조선사진화보>, 1916

1880년 일본공사관이 개설되자 공사관 수비를 위해 한국에 첫발을 들여놓은 일본군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했다. 1910 년 강제병합 후 조선주차군으로 재편한 후 독립운동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으며 1918년 한반도에 상주하는 병력을 배치하여 제19, 20사단을 통할 하는 조선군사령부가 만들어졌다.

 

기원 2600년 기념일에 겸이포에서 열린 축하행사에 동원되어 일장기를 흔들고 있는 수많은 조선인들, <광영록>, 1941

조선총독부에서 진행된 기원 2600년 기념식에 걸린 일장기, <광영록>, 1941

 

 

일장기가 새겨진 국기함
전라남도 함평남공립소학교에서 교내에 봉안전 (奉安殿)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제 작한 것이다.

 

장기를 내건 삼척수비대 앞에서 양반유생에 대한 은사금 수여식이 이뤄 지고 있는 광경, <애뉴얼리포트>, 1911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직후,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회유책의 하나로 친일귀족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은사금을 광범위하게 살포하였다.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역사사진> 33호, 1915

경술국치의 상징처럼 사용되는 ‘근정전 일장기’ 사진은 1915년 물산공진회 당시 촬영된 것이다.

 

유난히도 뜨거웠던 2021년 8월, 도쿄 상공에 태극기가 펄럭였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2020 도쿄올림픽에서 선전한 우리 선수들이 구슬땀을 흘린 보상이었다. 100여 년 전 일본의 힘에 짓눌려 굴욕적인 강제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의 하늘에 나부끼는 일장기를 떠올리면 믿기 어려운 광경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순종의 칙유를 통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온갖 시련에도 꿋꿋하게 버텨낸 우리 민족이 마침내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35년간의 뼈아픈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일장기’다. 이 나라에 가장 먼저 온갖 살육을 저지른 일본군사령부를 시작으로, 조선의 궁궐, 행정기관인 관공서,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는 학교, ‘천황의 신민’이 된 가정 등 주변 어디에서든 일장기가 펄럭이게 되었다.
온갖 행사에 동원되어 수많은 일장기를 흔드는 조선 민중들의 모습과 집집마다 일장기를 내걸고 ‘천황’에 예를 올리는 장면은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식민지기 동안 계속된 치욕적인 이 광경은 1945년 8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나라를 뺏긴 지 111년이 되는 해이자 해방을 맞은 지 76년, 기나긴 시간이 주어졌건만 반성과 화해의 길은 아직도 멀어 보인다.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모진 상흔은 계속 남아 있다. 일본정부는 피해 당사자가 빠진 잘못된 ‘위안부’ 합의와 일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배상 거부, 유네스코 산업유산 등재 시설물에서 ‘강제동원은 없었다’고 주장하며 관련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 등 우리와의 관계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망명 독립지사와 동포들이 끼니를 거르면서 가슴에 새기고자 했던 치욕의 망국일인 ‘8월 29일’을 모든 달력에 ‘국치일’로 새겨야 한다. 그리고 조기(弔旗)를 게양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하자, 피눈물을 흘리던 1910년의 8월을,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1945년의 8월을, 가슴 벅찬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2021년 8월을.

금, 2021/08/27-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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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개혁은 파고(波高)가 높다

김해규 평택인문연구소장

아버지는 어부였다. 소년시절부터 중선中船을 타고 먼 바다를 항해했다. 과거 어업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일기예보가 정확하지 않고 통신시설이 미비했던 시절 자칫 폭풍우라도 만나면 난파당하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소형어선을 구입해 선주가 된 뒤로는 나도 가끔 어선을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1톤 미만의 소형어선은 3~4m의 파고 앞에선 강물 위에 뜬 가랑잎과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내 가슴은 천당과 지
옥을 오갔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배를 운전했다. 큰 파고를 넘는 것은 정면승부로는 안 된다. 옆으로 항해하면 뒤집힌다. 정면과 옆면 사이의 빈틈을 정교하게 가로지를 줄 알아야 무사히 항구에 당도할 수 있다.
‘역사는 피를 먹고 진보한다’고 말한다. 개혁의 피, 혁명의 피가 역사를 진보시킨다는 말이다. 혁명은 한 번 성공했다 할지라도 곧 반혁명의 파고가 덮치며 위기를 맞곤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앙시앵레짐 다시 말해서 구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 자본주의 발달로 상공시민계급인 ‘부르주아지’가 성장해서 나라의 중추를 이뤘지만, 권력과 특권은 여전히 구체제의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가 갖고 있었다. 부의
편중도 극심했으며 민중들은 개돼지만도 못한 생활을 했다. 민중들은 불만이 컸지만, 혁명의 주체가 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은 지식과 경제력을 갖춘 부르주아지가 시 작했다. 하지만 부르주아지들은 자신들의 불만해소, 다시 말해서 귀족과 성직자가 독점한 권력과 특권을 나눠 갖고 신분제 타파와 입헌군주정을 수립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혁명을 전개하면서 각성한 민중과 급진파의 생각은 달랐다. 무엇이 진실이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깨닫기 시작한 민중들은 부르주아지의 목적과 한계도 파악했다. 프랑스혁명의 유럽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침략한 대프랑스동맹연합군을 저지했던 민중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쏟아냈다. 그 과정에서 과거 진보주의자였던 부르주아지들은 보수파로 규정되었고 부르주아지 정권의 급진파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코뱅당의 과감한 정책은 일시적으로 민중들을 환호하게 했지만 몇 년간 계속된 대립과 혼란은 피로감을 주었다. 더욱 선명한 의식과 행동이 요구되면서 혁명세력도 분열됐다. 권력은 잃었지만, 경제력과 사회적 영향력에서 앞선 부르주아지들의 획책도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잘 안다.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급진파가 몰락한 상태에서 정권을 잡은 부르주아
지들은 갈피를 못 잡았고 대프랑스동맹군을 격파하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한 나폴레옹이정권을 잡았다. 나폴레옹 몰락 뒤에는 절대왕정이 부활했다. 혁명과 반혁명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비록 시간은 걸렸지만, 역사는 진보했고 정의는 승리했다는 것을.
촛불혁명은 문재인 정권을 낳았다. 우리 국민들은 문재인 정권이 국가와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냉전적 사고에서 탈피해 평화통일의 교두보를 마련해달라는 주문도 했다. 지난 총선에서는 민주당에 몰표를 주면서까지 염원을 표현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우리는 정말 다사다난을 경험했다. 역사적 과제에 집중하기에는 코로나19가 너무 강했고 정치·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오랫동안 국민의 염원이었던 검찰개혁은 좌초된 듯 보이며 언론개혁은 칼집에서 칼을 빼내지도 못했다. 검찰과 언론, 보수정치권이 일치단결해 구체제의 특권을 지켜내려는 분투도 지켜봤다. 개혁 뒤의 반개혁을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우리에게는 촛불혁명을 달성했던 강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좀 더 정의롭고 평등하며 살맛나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열망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해 소처럼 느리더라도 꾸준히, 반개혁의 파고 사이로 정교하게 개혁이 추진되기를 소망한다. 개혁은 파고가 높다. <평택시사신문> 2021.1.13

화, 2021/03/0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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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초대의 날’ 첫 행사

김무성 회원사업 부팀장

연구소는 3월 19일 금요일 저녁 7시에 연구소 30주년을 맞아 기획한 ‘후원회원 초대의 날’ 행사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25년 이상 연구소를 후원해온 후원회원 중에서 수도권에 거주하는 후원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30주년 기념식 때 방영한 회원극장의 주인공인 유동성 회원을 비롯해 김기흥 회원, 김석규 전 부 위원장, 김성종 전 이사, 김희준 회원과 동반인, 민삼홍 전 이사, 신창헌 전 이사 부부, 신희철 회원, 이수익 강남서초지부장, 이용훈 회원, 장필수 서울동부지부 자문위원, 최수전 감사, 황평우 전 부위원장 등 총 15명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연구소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자리를 띄워두고 칸막이를 설치하여 방역지침을 철저히 지켰다. 

1부 행사에서는 25년 이상 후원을 지속해온 회원들인 만큼 그간의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며 쌓은 추억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다. 2부 행사는 ‘나의 삶과 민주화 운동’이란 주제로 함세웅 이사장과 회원들 간의 토크콘서트였다. 한평생 민주화 운동에 몸 바쳐 온 함세웅 이사장의 진솔한 얘기는 회원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어 크나큰 감명을 주었다. 연구소는 이번 행사를 포함해 올해 총 7회에 걸쳐 후원회원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아울러 30년 동안 꾸준하고 독보적인 연구와 실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 바로 함께 하고 있는 후원회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다가가는 회원친화적인 사업을 준비할 계획이다.

목, 2021/03/2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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