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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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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admin | 수, 2020/02/12- 01:02

 

 

대전충청지부장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인터뷰어: 심재섭 변호사 (출판소통팀 팀장)

 

대전 법원 맞은 편 건물에 자리 잡은 사무실로 찾아뵈었다. 서울의 여느 변호사 사무실과는 다른 널찍한 방에서, 청바지 차림의 변호사님께서 반가이 맞아주셨다.

 

안녕하세요. 대전충청지부는 처음 인사드립니다. 지부장님이셔서 아무래도 회원 숫자가 신경이 쓰이실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우리 지부는 사실 신규 회원이 많이 들어오는 지부는 아니에요. 그냥 꾸준히 몇 명씩은 가입하는 지부이지요. 민변으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던 분들이 이명박근혜 정부 시절을 겪으면서, 이러한 상황에서 변호사로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시고 가입하신 분들이 몇 분 계세요. 대학 때 잠깐 운동 경력이 있으신 분도 있고, 또 변호사로서 어떤 활동을 목표로 하셨던 분들도 아니셨는데요. 그렇게 나이와 경력이 좀 되시는 회원들이 가입을 했고요.

젊은 신입 회원 분들도 꾸준히 가입하고 계세요. 많이는 아니고 꾸준히요. 작년에 후배님들 몇 명과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 되는 대로 점심을 하자고 했는데, 평균 적으로 5, 6분 정도, 많으면 7, 8분 정도가 모였어요. 회무를 이야기하는 모임이 아니라, 밥 같이 먹으면서 수다 떨자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렇게 어울리고 친해지면서, 나중에 일도 같이 잘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매주 모이는 숫자가 그 정도 모임라면, 상당히 긍정적인 것이 아닌지요. 대전 충청 지부가 관할하는 지역이 원체 넓기도 하지 않습니까.

광주지부, 대구지부 같이 숫자도 많고 결속력이 강해 보이는 지부들을 생각하면, 우리 지부도 뭔가를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여러 지역에 있는 회원님께서 우리 지부에서 이렇게 열심히 활동해 주시는 것을 들여다보면 이 정도 유지하는 것도 훌륭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 이전에 우리 지부 사무처장을 하신 선배님이 83학번이세요. 선배님들 연배가 젊다고 하긴 좀 어려운 거죠. 우리 후배들이 모임에서 적극적으로 요청을 드리면 흔쾌히 참석하고 도와주시지만, 우리가 먼저 선배님께 기대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늘 보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는 별도로, 어서 우리 후배 그룹들이 일머리를 키우고 활동력을 늘려서 이 모임을 끌고 가야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 역할은 그 징검다리가 충실히 되는 거지요.

 

지부에서 후배 회원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특별히 있을까요.

지금 우리 지부에서 떠오르는 분이 두어 분 정도 계세요. 시민사회단체와 긴밀하게 소통하고 연대하는 분이요. 저희가 무언가를 알려 주었다기 보다는, 모임을 통해서 얻게 된 약간의 기회를 잘 활용한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고 이름을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로스쿨에 있을 때 우리 사무실에서 연수를 하신 분이세요. 로스쿨에 재학 중이셨을 때부터 우리 민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내 일상을 같이 해 보면서, 민변 변호사가 어떤 것인지 날 것 그대로 느껴보자고요. 법정에도 같이 들어가고, 퇴근 후 시민사회단체 회의에 갈 때도, 활동가분들과 술 한잔 하는 자리에도 함께 했지요. 그렇게 모든 일과를 함께 했습니다. 이후 우리 모임에 가입을 했고, 그간 소식을 구체적으로 듣지 못하다가, 최근에 소식을 들었더니, 우리 모임과 지역 시민사회 단체의 주축으로서 열심히 역할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그때 활동가들과 밥 한 번씩 같이 먹고, 회의에도 참석했던 그 경험을 꾸준히 스스로 확장시켜 나가신 거에요. 물론 워낙 훌륭하신 분이어서 그 기회가 없었더라도 스스로 잘 찾아서 나가셨을 것 같긴 합니다.

 

일과를 공유한다는 것이 인상 깊습니다. 저희 사무실에 누가 연수를 오셔서, 아니 친구 하나라도 제 하루를 다 본다면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 같아요.

에이, 누구라도, 저 역시 제 일과를 다 공유한다는 것은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죠. 그런데 우리 모임에 관심이 있는 후배에게, 그런 마음이라면 꾸밈없는 그대로 지역 민변 변호사를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었던 거예요. 지역 활동가들과 술을 먹든 밥을 먹든 돈은 우리가 다 내는 거고, 어느 달은 수임이 잘 될 수도 있고, 답답할 정도로 안 될 때도 있고요. 소송구조나 민변 공익 사건을 하기도 하는데 좋은 사건도 있고, 수임하기 싫은 사건도 있고 그렇지요. 민변 변호사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으니,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시라, 민변 지부의 변호사로서 살 수 있는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라는 거였어요. 제가 생각하기에 지부에서의 활동은 본부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본부라면 열심히 하면 기사화되기도 하고, 명성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민변의 활동이 그렇게 자신의 커리어가 될 수가 있을 텐데, 여기에 그런 것은 없어요. 그렇지만 활동하다 보면 나름대로 민변의 역할이 있지요.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을 로스쿨 재학 중일 때 미리 알게 되는 것은 장래 변호사가 되는 데에 있어서, 그리고 민변 활동을 결심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씀 중에 소송구조를 하신다는 점이 특히 귀에 들어옵니다. 변호사님 이런 저런 글을 보면 국선변호에 대한 말씀도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변호사님께서 지금 15년 이상 변호사 생활을 하고 계시는데, 여전히 소송구조나 국선을 하고 계시는지요.

예,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왜 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할 말이 많지만 결론적으로 변호사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사실 소송구조가 힘든 것은 사실이에요. 오죽하면 법원에서 변호사를 붙이라고 명령을 할까요. 법원이 보기에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쉽고 별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하면 소송구조를 내주지 않는 것 같아요. 당사자가 소송 진행하는 것도 거칠고, 법원이 소송지휘하기가 힘들 때 주로 소송구조를 붙여주지요. 소송 자체가 보람이 있거나 하는 경우는 솔직히 거의 없어요. 국선도 마찬가지죠. 대부분의 경우에 소위 뻔한 상황들에서 부인하는 경우, 아니면 구속을 마음먹은 경우에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선을 붙여주는 것 아니겠어요. 이런 부분이 소송구조, 국선 변호에 대해 가지는 한 가지 생각인 것은 맞아요.

그래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기고 말고를 떠나서 변호사가 꼭 옆에 있어줘야 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합니다. 별론인데, 보수도 나쁘지 않아요. 사선에 비해서 보수가 좀 넉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보수를 잘 확인하지 않고 일을 하잖아요. 그래서 체크를 안 하고 있다가 몇 달이 지나서 한꺼번에 보수가 입금되면, 또 희한한게 그런 보수는 형편이 어려울 때 들어고고 하니까,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도움이 됩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변호사에 대한 존중에 관한 거예요, 사회 각계 여러 부문에서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예전에 비해서 권위라는 것이 해체되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저 초임 때만 해도 변호사 그 자체가 가지는 권위가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소송구조 의뢰인이라든가 국선 피고인이 변호사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때 이제 내가 그만 둬야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변호사로서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버티는 겁니다. 말씀드리다보니 생각이 나네요. 2년 차에 국선을 해드렸던 분이 계신데, 공소사실 2개 중 1개를 무죄를 받았습니다. 2심에선 사선변호사를 선임하신 걸 보면 돈이 없으신 분이 아니었는데도 저를 참 힘들게 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 뒤로 1년에 2번, 추석하고 설날 명절마다 꾸준히, 지금까지 15년이 넘게 과일을 선물로 가지고 오시면서 인사를 하세요. 10년 정도 되었을 때 제가 이제 그만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여전히 계속 인사를 와주십니다. 제가 그분에게 친절하게 했다거나, 저 스스로 보람이 있었다고 평가할 것까진 아니었어요. 너무 힘들게 하셨거든요. 그래도 정말 열심히는 했습니다. 변호사가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해준다는 사실 자체로, 그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힘이 되는 경험이라고 느꼈습니다. 100명 중 99명이 나를 힘들게 하고 국선, 소송구조 변호사를 무시한다고 해도 그 한 분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후배 변호사님들에게도 소송구조와 국선변호를 권하시나요.

저는 후배들에게 소송구조와 국선변호를 하라고 권하죠. 특히 형사사건은 무작정 한다고 변호사 실력이 느는 것이 아니라, 무죄를 다투는 사건을 다뤄봐야 실력이 느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도와준다고 하는 생각 이전에,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하시라고 하지요. 실력이 확실히 늡니다. 저도 초기에는 기록을 보는데 어느 정도 절대적인 시간을 들여야 했고, 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맘이 답답하고 그랬습니다. 그게 익숙해지는 기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훈련이 안 되면 정말 힘을 발휘해서 성과를 내야 할 사건에서 위축되고 힘들어지고 하는 거니까요.

 

변호사님 SNS 보면, 개업변호사로서 생계를 열심히 꾸려나간다는 의미의 겸손한 소개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대전에서 개업변호사로서 활동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연수원 생활 대부분을 천주교 인권위원회 활동으로 보냈습니다. 2년을 열심히 생활하다가 연수원을 수료할 무렵이 되자, 뭘 해야 할지 구체적인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당시 고민이 있었죠. 당시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계셨던 다른 활동가 분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런 시민단체 내지 활동가 단체에서도 상근으로 변호사를 채용하는 것에 대한 의견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상근변호사를 채용할 여력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었습니다. 제가 연수원에서 변호사 전문 연수를 공감에서 했어요. 정말 좋은 곳이라 지원을 해볼까 했는데, 우리 동기였던 황필규 변호사님, 필규 형이 저한테 이야기를 했죠. 야, 거기 지원하면 안 돼, 나도 지원할거야 하고 말이지요. 어차피 1명 뽑는데 둘이 같이 경쟁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또 변호사 역할을 하면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법무법인 덕수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변호사 시보를 덕수에서 하기도 했고요. 시보생활을 할 때 제 방이 거기 있었습니다. 물론 창문은 없었지요. 그때 점심식사를 최병모 변호사님을 비롯해서 여러 선배님들과 같이 하곤 했죠. 이런 이야기가 있었어요. 식사할 때에 선배 변호사님들 질문에 답을 잘 하면 입사가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저의 수입도 그렇고 월급 주는 회사도 그렇고 돈이었습니다. 어차피 급여를 받으며 사회활동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 맘 편하게 내가 벌어서 내 시간 쓰고 후원도 하면서 참여하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개업을 결심하게 되었고, 개업을 할 거라면 제가 초중고를 보낸, 그리고 처갓집이 있는 대전에서 개업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개업 직후부터 민변에 가입하신 걸로 압니다. 당시 민변을 통해서 수임한 사건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요.

사실 개업하고 1, 2년 동안에는 민변을 통해서 수임하게 된 사건도 별로 없었어요. 참여정부 때라서 그런지, 국보법 사건도 별로 없었습니다. 민변을 통해서 처음 접한 사건은 가입하고 3년 정도 되었을 때로 기억합니다. 충남도청에 불이 난 사건, 그러니까 FTA반대 시위 중에 방화로 번진 사건의 형사 대응을 민변 지부 회원들이 나눠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민변 활동이라고 하면… 선배님들, 우리 간사님들하고 술을 많이 먹고,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변호사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민변 변호사로서 어떤 지향을 가져야 하나 하는 주제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작게는 수임료를 제대로 신고하고 있느냐 하는 주제도 있었어요. 이거 누락을 하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선배님께서 민변 변호사가 당연히 제대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라고 정리를 해 주셔서 그렇게 마음을 다집기도 했고요. 변호사로서 여려 기본적인 것부터 생활을 잡아 나갔지요.

 

개업 후에 수임은 잘되셨나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2005년에 개업을 했는데 3년차까지는 힘들었던 것 같아요. 힘들 때, 사건도 없고 일도 없는데 방에 있지 말로 밖에 나가라, 하는 말을 누가 했어요. 어느 날은 괴로워서 구두 신고 차 몰고 속리산을 갔어요. 차로 한시간 반 정도 걸리거든요. 혼자서 주변 산책하면서 지금은 담배를 끊었지만, 저쪽에 아름드리나무가 큰 게 있었는데, 그 아래서 담배도 한 대 피우고, 그렇게 3년 고생했어요.

수임 자체가 안 되는 고민도 있었지만, 취업을 할 걸 뭐 이런 저런 선택에 대한 후회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죠, 어쩌겠어요. 버텨야지…

 

그때도 어려웠다면, 지금 신규 개업하는 후배들이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우리 지부 후배님들과 유사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누구나 금전적인 부분에 대한 걱정을 덜 하고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잘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매번 이런 이야기가 나올 때면 부러운 존재들이 있어요. 첫째가 전관 변호사, 둘째가 영업력이 참 좋아서 개별적인 수임이 별도로 없이도 기관, 회사들로부터 지속적인 사건 제공이 되는 변호사들이지요. 가만 생각을 해보니, 제가 전관 변호사는 될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영업력을 키우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그러니까 모임이나 골프나 이런 방법들로 영업을 하겠다는 삶을 선택하지는 않았고요. 이런 사실을 인정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되지도 못할 거면서 왜 부러워하고 비교를 하느냐, 하는 결론에 이르더라고요. 우리가 부러워하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렇게 될 수 있으면 부러워하자, 그런데 이미 그 길을 걷지 않기로 어떤 의미에서 결단을 했으면 더 이상 그런 쪽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결론이요..

저 중학교 졸업할 때 즈음 1년 선배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을 권해줬어요. 당시는 안 읽고 나중에 읽었겠지요. 우리는 소유냐 존재냐 하는 이 갈림길에서 늘 고민하는 것 같아요. 소유쪽의 유혹이 굉장히 강렬하죠. 돈도 벌고 싶고 명예도 얻고 싶고, 거기에 더해서 권력도 좀 가지면 더 좋고… 이렇게 소유쪽에 매력을 많이 느끼는데, 그래도 학창시절에는 당연히 소유보다 존재에 손을 들었어요.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지내오다가 변호사 개업하고 3년 동안 힘들다고 잠시 그 생각을 잊게 된 거에요. 애도 크고 돈은 벌어야 되고 그러면서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내가 변호사로서, 특히 민변 변호사로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되새겨보면, 다시 그때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소유라는 쪽에 방점을 찍고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게 오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욕심을 부리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절대 그렇지는 않지요. 전 신이 계시다고 하면, 사람들마다 똑같은 양의 복을 주었다고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에게는 돈 복을 더 많이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녀 복을 주고, 처복을 주고, 동료 복을 주고, 이렇게요. 이 사람에게는 인간관계의 복을 주었으니 돈 복은 좀 없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가진 것을 좀 더 소중히 하면 복이 새끼를 치고 불어나는데,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자꾸 욕심내면 내가 가진 복도 달아난다고 느껴요. 결국 굳이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좇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늘 유혹적이니까, 소유라는 것이 너무 달콤한 유혹이니까 쉽지가 않죠.

 

대전 충청지부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와의 관계는 어떤가요. 시민단체와 연을 이어나간다는 것이 변호사 업무를 하는 데에 지장이 될 정도로 시간 할애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가입할 때부터 이미 선배님들을 통해서 우리 지부와 관계를 맺은 단체들이 있고, 또 이슈가 생길 때마다 알음알음으로 연을 맺고 사업을 같이 하면서 저변을 확장해 나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힘들고 바쁘고 한 것 확실해요.

제가 대전 참여연대 집행위원장까지 했다가 좀 쉬었습니다. 올해 공동의장 선거 진행 중이고 제가 출마는 했는데,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 경험상, 시민단체 활동을 열심히 할 때, 그러니까 쉬기 전까지는 정말 바빴어요. 쉴 필요가 있더라고요. 일부러 쉬었다고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네요.

시민단체 이야기를 해 보자면, 대전 참여연대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움직이는데, 전체적으로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듯한 느낌도 있었어요. 일을 하다보면 중앙에서의 이슈를 가지고 지역에서도 동조를 해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이런 것들을 개별 지역에서 다시 논의하고 우리는 어떻게 하겠다, 이렇게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중앙이 일방적으로 하달되고 지역은 단지 실행에 그치는, 그런 역할을 하게 될 때 참 속상했어요. 예를 들면 소녀상 건립에 관한 이슈가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설치를 하더라도 각 단위 별로 다양한 의견을 내어 논의를 하고 진행했으면 하는데, 이건 하기로 한 거야, 너희 단위에서 참여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라는 식으로 일률적으로 일이 처리되는 면이 있어서 회의를 느낀 적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지방 분권을 이야기 하는데, 조금 늦더라도 다양하게 의견을 교환해 볼 필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겨레 21에 어느 전문가가 기고를 하기도 했어요. 전국적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이 정말 적절한 방식이냐 하는 이야기였지요. 시민단체일수록 다른 생각이 필요한데, 중앙의 이슈를 그대로 가져오는 방식으로는…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 외에 여러 사정이 있어서 쉬었어요. 5년 정도 쉰 것 같네요.

좀 쉬면서 밖에서 보니까 보이더라고요. 나의 문제는 뭔지, 우리 단체의 문제는 뭔지, 이걸 어떻게 풀어갈지, 정말 풀어갈 수 있는 문제인지…

 

6년의 사무처장직을 수행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어땠나요.

사무처장을 맡으면서 여러 생각이 있었습니다. 원래 대전충청 원래 사무처장 임기는 3년이었는데, 3년은 너무 길다는 의견이 있어서 2년으로 단축을 하자, 그리고 필요하면 2년을 연임하도록 하자라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사실상 2년을 하고 나서는 당연히 2년을 더 하는 것으로 운용되었어요. 예전 같으면 3년이니 1년만 더 한다는 분위기였지요. 제가 2년으로 감축되고 사무처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연임까지 4년을 마치고 나니, 20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되어 있더라고요. 마땅히 그 준비를 맡아 줄 분을 구하지 못해서 2년을 더 하게 되었다. 여러 고민이 있었습니다. 나이든 연배든 제 상황이라면 후배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가교 역할을 해 줘야 되잖아요. 바로 후배들한테 직무를 이관하기도 애매한 상황에서 더 하게 되었어요.

저는 6년 생활이 나름대로 즐거웠어요. 사무차장으로서 많은 집회에서 발언을 요청하는 일들이 많았고, 다 수용할 수는 없었겠지만 법률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모임에는 많이 참석을 했습니다.


 

전에도 여쭙고 싶었는데 책장에 의학서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개업하고 초창기에 의료 소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 책들이 기본서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구입을 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열심히 했고 승소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의료소송이 들어오지는 않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공부를 해야 서면을 쓰니까, 재밌게 했습니다. 신장의학, 내과학, 당뇨병 관련 서적들을 다 사서 봤습니다. 주변에서 다들 이야기했어요,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래도 어떻게든 공부를 하면 달아나진 않으니까요.

 

말씀을 듣다 보니, 변호사님께서는 정말 직접 송무를 계속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아, 좀 지치긴 하는데… 누구나 마찬가지일 거예요. 요즘엔 판사님들이 조심하는 면이 있지만, 법관평가도 없는 옛날에는 정말 속상하게 하는 판사들이 많았어요.

떠오르는 형사사건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진실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사사건은 누구도 진실을 모르는 거잖아요. 증인이 정말 많아서 하나하나 신문을 했습니다. 검찰 증인인데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증언이 나올 때마다 재판장이 개입해서 완전히 뒤집어 놓는 겁니다. 주심판사가 다시 물어봐서 또 우리에게 유리한 답이 나오면 다시 재판장이 개입해서 뒤집고. 이게 반복되는 거예요. 너무 속이 상해서 최후 변론을 좀 강하게 준비했습니다. 출근하기 전에 아내에게 보여줬어요. 나 이렇게 읽을 거라고. 아내가 변호가 그만 하려고 하느냐고 하더라고요. (웃음) 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최후진술 준비해 간 원고를 법정에서 30분 동안 읽었어요. 방청석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선고일도 아니었는데 재판장이 바로 우리 피고인을 법정구속 시키더라고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정말 그 정도로 이상한 재판 진행도 많았죠. 어떤 사건은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해 우리가 끝까지 무죄를 다투었는데, 법관이 검찰에 입증 촉구를 1달에 1번씩 1년 동안 하더니, 하고 결국 유죄 내리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이 많았는데도요, 열심히 해서 무죄가 나온다거나 하면 이게 또 마약같아요. 그 기분에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책을 보고, 글을 쓰시고 하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느껴집니다.

책을 보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사실 소설책을 좋아합니다. 머리 식히는 데에는 소설책만한 것이 없으니까요. 작년에는 술 끊고 신앙 서적을 주로 보았습니다.

기고도, 여러 인연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습니다. 강연하면서, 혹은 소송을 진행하면서 어떤 주제에 관여하고 있으면, 신기하게 관련 기고 요청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런데 좋다고 평을 받는 글들은 연구하고 공부하고 쓴 글이 아니라, 그냥 제 삶을 돌이켜 보면서 제 시각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것들이었습니다. 최근에 술 끊었다는 내용으로 쓴 글을 우리 논설 실장님이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문현웅의 공정사회라고 타이틀이 붙어있으니까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문현웅 변호사님이 서울신문에 기고하신 글 몇 가지. 더 많은 글은 서울신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현웅의 공정사회] 바리사이의 기도

[문현웅의 공정사회] 사라진 젠더

[문현웅의 공정사회] 법정 패션


 

책을 보는 절대적인 시간은 어떻게 확보를 하시는지요.

저희 집에 텔레비전이 없습니다. 결혼하고 샀다가 몇 년 안 되어서 없앴어요. 그러니까 집에 가면 할 게 없습니다. 당연히 책을 읽게 되죠. 쉬면서.

사실 저 때문에 텔레비전을 없앴어요. 퇴근하면 지치고 힘드니까 누워서 리모콘 들고 텔리비전만 보는 거예요. 아내, 아이들과 대화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고, 어느 날 문득 이런 상황이 정말 싫더라고요. 텔레비전을 없애니까 일단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아이들과 몸으로도 놀아주게 되고, 산책도 하고. 애들 어릴 때는 뱀주사위 놀이판이 엄청 큰 게 있어서 그걸 장만하고 같이 게임을 했어요. 최근에는 가족들과 윷놀이를 많이 해요. 심변도 고민 중이라면, 과감하게 없애는 쪽으로 결단하는 걸 추천합니다.

변호사님의 청바지 패션에 대해서도 궁금합니.

아유, 청바지 원래 안 입었었죠. 또 저 대학교 때는 청바지 입는 것이 미 제국주의와 연결되어서 일부러 기피하던 세대였지요. 그런데 옷이 많지 않은 사람은 청바지가 코디하기 참 좋아요. 사실 머리 기르고 청바지 입기 시작한 때는 박근혜 당선 즈음이에요. 전 2012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정말, 심각하게 괴롭고 우울했어요. 2012년도 대선 기간을 나름 열심히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민주당 정치인의 행태를 직간접적으로 느끼건대, 이 선거에 완전히 몰입한다는 것이 아니었거든요. 당과 후보가 따로 놀았다는 표현이 맞았어요. 그렇게 지고 나니까 분노와 화가 너무 많아졌습니다. 술만 먹으면 다른 사람들 욕하고 그랬어요. 그때 술을 끊었고, 스스로 새로운 기분을 얻고 싶었습니다. 마침 한석규 배우 머리 기른 것이 보기 좋아서 나도 길러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당시 일도 하기 싫어서 사건 수임도 좀 줄였더니 정장 입을 일이 많이 없어서 청바지 차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것이 있어요. 그때 제가 청바지를 입고 다닐 때 선배 변호사님들 몇 분이 변호사가 복장이 왜이래 하면서 핀잔을 주셨는데, 지금은 다들 저처럼 편하게 입고 다니세요.

 

저도 개업하면서 복장, 권위 등 외형적인 모습에 대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있다고 봐요. 어떻게 보면 단계적으로 거치는 과정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어제 참여자치시민연대 회의에서 한 말이기도 합니다만, 우리가 당위적인 강박에서 좀 벗어나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난 변호사니까 이래야 돼, 민변이니까 이래야 돼 하는 당위를 좀 탈피하고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옷도 편하게 입고요.

민변 선배님들 중에서는 나이는 지긋하신데도, 불필요한 당위나 강박이 전혀 없으신 분들도 많이 있는데, 정말 존경스럽죠.

‘뒤로 넘긴 장발’은 문현웅 변호사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민변이 변호사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는 후배든 누구에게든 민변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전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민변이 가지는 의미를 자문하곤 합니다. 오늘 인터뷰를 오신다고 하는 생각에, 아침에 샤워하면서 민변을 다시 생각해 봤습니다. 나에게 민변이 뭔가 생각하는데 영화라는 답이 떠오르더라고요.

우리 어릴 적 굉장히 감동하고 나도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 하게 되는 영화들이 있잖아요. 저에게 민변은 그런 영화입니다. 민변의 도도한 역사와 활동을 보면서, 민변 회원들 개개인의 삶을 통해서 감동을 받고, 내 모습을 점검하고, 그런 계기가 됩니다.

아까 나온 이야기지만,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은 모든 인생을 걸쳐 떨칠 수 없는 고민인 것 같아요. 저 스스로 소유 쪽에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 고민을 가지면서 한편의 영화 같은 민변을 보면, 내가 존재 쪽에 손을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단초는 됩니다. 10번 정도 소유와 존재가 싸운다고 하면 최소한 한 번, 두 번 정도는 존재 쪽에 손을 들어줄 수 있는 그런 내가 되고 싶다고 희망하는데, 그런 결정을 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민변입니다.

오늘 아침 샤워하다 생각이 났어요.

 

열심히 치열하게 살고 계시면서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과장되지 않은 편안한 매력의 문변호사님을 뵙고 오는 기차에서 생각이 많아졌다. 가까이에 본받을 수 있는 선배이자 동료로서 문변호사님의 인터뷰가 잘 전달되기만을 바란다.

The post [회원 인터뷰] 소유라는 달콤한 유혹 앞에서 존재의 손을 들고 싶습니다. – 문현웅 변호사 인터뷰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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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이 고픈 변호사, 최정규 변호사의 이야기

신안염전노예사건, 고양동 풍등화재사건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정규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출판소통팀은 안산 원곡법률사무소를 방문하였다.

서예가 이완 선생께서 손수 써주신 ‘안산 법률사무소’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의 다른 작품이 걸려있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개방형 사무실과 독특한 회의실이 눈에 띈다. 최정규 변호사가 특유의 밝은 웃음으로 출판소통팀을 맞이해주었다.

 

 

심재섭 출판소통팀장 (심) : 인터뷰에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원곡 법률사무소엔 처음 와봤는데, 회의실이 특이하네요?

최정규 변호사 (최) : 회의실이라고 해서 만들어놨는데 회의할 일도 별로 없고 그냥 편하게 앉아서 영화도 보고 하자고 해서 꾸며놓은 거죠.

기타도… 기타도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거죠… 연주는.. (웃음) 집에 애들 책이 생기다보니까, 책을 둘 공간이 부족해서 제 책이 창고에 널브러져 있더라고요. 안 되겠다, 책을 사무실로 가져와야 겠다, 해서 모인 책들이죠. 법학책은 전혀 없죠. (웃음)

 

 

심 : 사무실은 세 분이서 같이 여신건가요?

처음에는 서치원 변호사님이랑 같이 열었어요. 안산역 건너편에 이주민들이 밀집한 원곡동에서요. 처음 1년은 둘이서 했고, 서치원 변호사님 연수원 동기분인 서창효 변호사님이 사무실에 놀러왔을 때 인연이 되어서 2년차엔 세 명이서 같이 운영을 하게 되었죠. 지금은 만으로 7년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셋이 동업하다가 작년에 고용변호사를 고용하자라고 이야기가 되어서 지금은 유승희 변호사님과 조영신 변호사님이 함께 일하게 되었어요.

 

심 : 안산에 연고가 있으셨던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제가 법무관을 마치고 2006년도에 법률구조공단 변호사가 되었는데 첫 발령지가 안산이었어요. 그때 마침 결혼도 하고, 집도 안산으로 구하면서 안산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주민을 많이 만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종교생활도, 이주민을 서포트하는 교회를 찾아보다가 원곡동에 있는 한 교회를 찾아갔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그곳에서 한글도 가르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런 인연들이 있어서 안산은 제게 제2의 고향 같은 곳이 되었어요. 그리고 3년 뒤에 서울중앙지부로 발령을 받았죠.

 

그러면서 나름대로 제가 결단을 내려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계속 공단 변호사로 있을 것이냐, 나갈 것이냐 하는 거지요. 이주민 근로자들에게 밀접하게 법률지원을 해주면서 현장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에 법률구조공단에서 다문화가정을 위한 법교육문화센터를 만들어서 다문화가정을 초청하여 강의를 했어요. 제가 사내 강사로 위촉되어 그분들 앞에서 강의를 하는데, 제가 너무 현장의 이야기를 모르는 거예요. 현장의 문제는 이것인데, 공단에서 사건을 진행하며 알고 있는 정보는 굉장히 제한적이었던거죠. ‘내가 공단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과 그분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 이 간격을 메울 수 있을까?’ 변호사로서 그런 고민이 들더라고요. 가정도 있는 입장이라 공단을 그만두고 나오기가 쉽지 않았죠. 2~3년 고민을 하다가 2012년 초에 공단을 그만두고 나왔어요.

제가 파산센터에 있을 때 인연을 맺은 서치원 변호사님이 마침 연수원을 수료하고
장래에 대한 고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당시에 이주민들에 대한 법률지원을 제대로 해보고 싶어서 원곡동에서 서치원 변호사와 함께 사무실을 열게 되었습니다.

 

 

심 : 그럼 이주민 관련 업무는 공단에 들어가셨을 때부터 접하셨던 건가요?

최 : 그렇죠. 각종 임금사건, 산재사건들을 했어요. 법률구조공단에서 하는 일들은 결코 작은 일들이 아니라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아주 부분적인 일들이었어요. 이주민 근로자들이 체불임금확인서 한 장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근로시간을 인정받는 과정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고 경찰서, 출입국 등에 가는 일도 밀착해서 지원하고 싶었어요. 그런 현장을 경험하고 싶어 나왔는데, 실제로 기회는 무궁무진했어요. 여력이 안 돼서 다 지원하지 못하는 것뿐이더라고요.

 

심 : 그럼 연수원 시절이나 법무관 시절에는 지금 하시는 활동들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은 없으셨던 건가요?

최 : 그렇죠. 인권에 대한 관심은 있었는데 이주민 근로자들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았어요. 대학교 때 수화동아리를 했고 연수원에 다닐 때 시민단체에서 하는 ‘장애우대학’이라는 곳에서 야간 강의를 한 학기 동안 들었어요. 그 시민단체가 지금은 제가 소장으로 있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였어요. 장애인에 대한 관심에 비해서 이주민에 대한 관심은 덜했죠. 만날 접점이 없으니…….

 

심 : 원곡 사무실 간판 옆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 간판이 함께 있던데요?

최 : 네, 함께 걸려있죠. 처음 사무실 시작할 때는 장애인에 관한 생각은 못했어요. 2012년 당시에 제가 아는 후배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운영하는 ‘함께걸음’이라는 잡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 후배에게 예전에 장애우 대학에서 수업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법률위원단에 들어와 달라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법률 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2013년도에 ‘신안군 염전노예사건’이 터진 거예요. 목포까지 내려가서 법류지원을 할 수 있는 변호사가 별로 없던 상황이라 저희에게까지 법률지원요청이 들어왔어요. 사무실을 개업한지 2~3년차 되던 해라 별로 안 바빴어요. (웃음)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할지 몰랐죠. 가해자들과 합의를 하려고 하는데, 피해자를 위해 조언해 줄 변호사가 없다는 거예요. 2014년에 시작했는데 그 법률지원 활동이 아직도 안 끝났어요.

 

심 : 아, 처음에는 합의로 끝내려고 하셨던 건가요?

최 : 네. 그런데 그렇게 끝낼 수가 없었어요. 그때 느꼈던 게 뭐냐면 법률지원만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거였어요. 착수금, 성공보수도 없이 열심히 해서 결국 8천만 원을 합의금으로 받았는데, 1년 후에 피해자께서 노숙자로 다시 나타나신 거예요. 그렇게 받은 돈을 누군가에게 사기를 당해서 잃으신 거예요. 그때 법률지원이 끝이 아니란 것을 느꼈죠. 마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경기지소의 소장 자리가 공석이었어요. 연구소에서 이쪽에 학대피해자들을 위한 센터를 3년 동안 센터를 운영하려고 하는데, 지역 연구소가 없어질 상황이니 소장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들어온 거예요. ‘저희 사무실 절반 쓰면 되죠’ 라고 하면서 또 아무 생각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어요. (웃음) 지금은 3년이 지났고 다른 사업을 또 맡게 되면서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가 2년 더 운영되게 되었죠.

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를 운영하면서 살아 있는 지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염전노예피해자들이 지역사회에 정착하도록 돕기 위해서 활동가분들이랑 임대차계약도 같이 하러다니고, 가구도 같이 사러 다니고 했어요. 그 전엔 차라리 염전에 있었던 시절이 그분들에겐 더 행복하진 않을까라는 고민도 있었어요. 실제로 염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었고요. 염주와 피해자들 사이에 양가감정이 있었던 거죠. 가족들에게 버린 받은 분들을 염주들이 일을 할 수 있게끔 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다해준다는 거예요. 염전 밖의 삶이 염전에서의 삶보다 더 나아야 할 텐데, 우리 사회가 염전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런 면에서 그분들에게 결국 돈은 의미가 없더라고요. 정말 그분들을 밀착지원해서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드려야 했어요, 그러한 영역으로 저희의 활동영역이 확대될 수 있었어요. 법률지원에 멈추지 말고 시민단체와 좀 더 협업을 해보자는 것이 지금 저희의 법률지원 모토가 되었어요.

 

심 : 이주노조 등 이주단체 지원 활동의 경우에도 우연히 시작하신 건가요?

최 : 네, 그것도 우연히 그렇게 되었어요. 이주노조 일을 주로 하시는 마문 감독님이 문화 활동도 같이 하고 계세요. 그 감독님을 예전부터 친분을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 감독님께서 이주노조 수석부위원장이 되셨더라고요. 작년에 ‘투투버스’ 관련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공식적으로 그때 처음 지원했어요. 작년 5월, 제주 바다 배 위에서 떠밀린 이주선원들이 있었어요. 그 피해자들을 대리해달라는 요청도 받았죠.

장애인 분야 지원만 하다 보니 이주민 분야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던 시기였어요. 마침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이 생기면서 이주분야의 일들을 더 해야겠다고 느꼈어요. 그 모임에서 열었던 강연의 초청 강연자분들과 명함을 주고받고 며칠 후에 그분들이 일하시는 단체에 찾아가서 법류지원을 해드리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이주민분야와 관련하여 다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기회가 있으면 다 해봐야겠다는 생각이었죠. 그게 제주도라도. (웃음) 앞서 말한 제주 이주선원들 피해조사를 받으려고 제주도에 네 번을 갔어요. 새벽 6시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가면 공항에서 피해자분들을 렌트카로 모시고 서귀포에 있는 경찰서까지 가요. 통역이 필요하다 보니까 조사가 저녁 7시쯤에나 끝나요. 당일에 올라가야겠다는 일념 하에 조사가 끝나면 밤 9시 반 비행기를 타고 돌아갔죠. 그런 미친 짓을 했죠. (웃음) 그래도 기회가 주어지면 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조금 과하게 활동했죠.

 

 

심 : 어떤 계기가 있으신 건가요? 보통은 연차가 있으신 분들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신데…

최 : 제가 그 일에 맞는 것 같아요.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하는 게 재미있고요. 이주민 분야나 장애인 분야의 경우에는 활동가분들과 주로 활동을 하는데, 그분들이랑 함께 활동하는 게 행복하더라고요. 활동가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굉장히 상식적인 이야기예요. 법률가들이 봤을 땐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어요. 법률이 상식에 못 따라가면 해석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게 법률가이지, 법이 이렇고 판례가 이래서 안 된다고만 하는 게 우리의 도리인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법률적인 판단이 맞느냐’, ‘네가 하는 이야기는 활동가들 이야기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우리가 배운 모든 것은 의심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배우는 법들은 이미 기득권들의 논리가 반영된 것일 수밖에 없으니까, 판례를 먼저 찾아 볼 일이 아니라 이게 상식적인지 아닌지부터 먼저 판단하고 소장을 내고, 만약 상대편이 판례가 있다고 하면 그 판례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는 걸 밝히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많이 활동하려고 하려고 해요. 그게 제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활동가들은 참신한 생각을 많이 해요. 신안염전노예 사건 당시에 저희는 임금을 정해둔 것이 없으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청구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활동가들이 노동행위로 착취를 했으면 최저임금 이상을 줘야하고, 농촌에서는 사람구하기도 힘들고 농촌 노임이 도시의 노임보다 높은데 왜 최저임금을 줘야 하느냐는 거예요. 다른 사례를 아무리 찾아봐도 다 최저임금이 기준인거예요. 검사 공소장도 최저임금이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활동가들 이야기가 맞거든요. 노동행위로 착취를 했으면 그것으로 이득을 본 것이고, 노동의 가치보다 더 많은 이득을 보기 위해서 피해자들을 이용한 건데, 적어도 평균임금은 줘야 하는 거죠. 그런데 이건 저희가 생각한 게 아니고 활동가분들이 생각한 거였죠.

처음엔 소멸시효 관련해서도 20년 동안 착취를 당했는데 소멸시효가 10년이에요. 그런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저희가 신의칙위반을 주장했는데 다 인정이 안 됐죠. 대법원 판례에서 신의칙 위반으로 소멸시효 완성 항변이 제한되는 경우는 굉장히 제한적이에요. 그래서 헌법소원을 했죠. 과거사 사건에 관한 국가배상 소멸시효가 헌법불합치가 나와서 이 논리를 적용하자고 했어요. 20년을 착취하고 임금은 10년분을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당연한 상식의 논리로 접근했던 거였죠.

우리가 배웠던 알고 있던 법률 지식과 판례에 의심을 갖고 접근하다보니 재밌었어요. 그것이 제가 활동하는 에너지인 것 같아요. 활동가들이랑 이야기하다보면 항상 뭐라도 하나씩 더 건지는 것 같아요. 그분들은 현장의 최전선에 있고, 피해자들과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상식적이잖아요. 또 그분들의 이야기가 법으로 되어야 하고요.

전 활동가분들이 편하게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변호사가 되는 게 꿈이었어요. 변호사란 어떤 자격 중 하나에 불과한데, 활동가가 훨씬 뛰어난 식견을 가질 수 있고 전 법률 안에서의 식견만 가질 수 있으니, 부단하게 그분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따라가기가 너무 버거워요. (웃음) 우리나라 판례는 제한되어 있어서 연수원, 로스쿨 나오고 나면 더 이상 공부할 게 없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활동가분들의 생각은 굉장히 진보적이라 따라잡을 수가 없을 정도예요. 그런 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요.

 

심 :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할 시간이 되시나요?

최 : 저희가 시간이 항상 부족한데……. 일반사건도 하거든요. 직원은 있지만 사무장은 없고요.

2012년부터 2017년까지는 직원도 없이 (최정규, 서치원, 서창효 변호사) 셋이서 다 했어요. 최저비용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2018년 전까지는 변호사 셋이서 전화 받는 것부터 다 했죠. 그렇게 만 6년이 넘어가면서 이건 아니다는 생각에, (웃음) 작년에 사무보조 하시는 실무관님과 고용변호사 두 분을 채용했죠. 전자소송이 생겨서 사무보조해 줄 사람이 많이 필요 없기도 했고, 구조공단에 있을 때도 변호사 두 명당 보조자 한 명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제가 직접 업무를 처리하는 게 익숙했어요. 나머지 두 분은 변호사 시작하실 때부터 직접 다하셨죠. 그 분들은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고 하신 거고요. (웃음) 처음부터 직접 다 하면서 바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심 : 그럼 저녁식사는 집에서 못 하시는 건가요?

최 : 아뇨, 전 라이프 스타일이 완전 반대예요. 전 밤 9시에 자서 새벽 3~4시에 일어나요. 아이들이 많이 어려서 같이 자거든요. 오늘도 이 인터뷰 끝나면 바로 집에 갈 거예요. 집에 가서 밥 먹고 아이들이랑 놀다가 9시쯤 자죠. 물론 저녁에 약속이 있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제 라이프스타일이에요.

심 : 그럼 사무실에 오는 시간은 언제이세요?

최 : 오늘처럼 일정이 있는 게 아니면 사무실엔 안 와요. 괜히 전기세만 더 나온다고. (웃음) 컴퓨터도 노트북을 써요. 오늘 같은 경우는 아침 9시에 미팅이 있어서 새벽 5시쯤 여의도 24시간 카페에 가서 일을 하다가 미팅에 갔어요. 의뢰인 분들이 본인이 있는 곳에 변호사가 와주기를 많이 원하시기도 해요. 특히 저는 장애인분들을 주로 상대하다보니 안산까지 오라고 하기 힘들죠. 저희는 재판도 안산에서 많이 없고 거의 전국이기도 하고요, 전국이 저희 사무실이에요. 또 요즘은 메신저도 있으니까 한국에 있을 필요도 없죠. 만나면 괜히 얼굴만 붉히지.(웃음) 그리고 오히려 사무실이 집중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저희는 사무실에 변호사방도 없어요. 처음부터 변호사 세 명이서 좀 더 소통하자는 의미에서 방을 안 만들었어요. 장단점이 있죠.

▲ 원곡 법률사무소 사무실. 회의실은 있지만 변호사 방을 따로 만들지 않고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함께 일하고 있다.

 

심 : 최근 민변 가입하신 신입회원 분들은 막연하게나마 자신이 변호사로서 원하는 바를 가지고 오시는 경우가 많고 실현할 방법은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이런 점들에 관해서 조언해주실 만한 것이 있을까요?

최 : 만약 경제적 안정을 생각한다면 고용변호사를 할 수 밖에 없어요. 공익소송을 하면서 개업변호사가 안정됐다, 이러면 이상한 거죠. (웃음) 안정은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다고 굶어죽기야 하겠어요? 의뢰인이 돈이 없다고 한다면 법원소송구조를 받을 수 있으니까 저희(세 변호사)의 처음 생각은 3~4명 정도의 의뢰인을 만난다면 사무실 운영을 최저로는 할 수 있겠다는 거였어요.

우리는 소매잖아요, 도매가 아니라. 기업을 대리하면 도매를 할 수 있어요. 저희가 지금 보험사 상대로 소송을 많이 해요. 보험 회사가 아닌 보험 소비자 대리를 하려니까 힘든 거죠. 소매를 하면서 안정을 찾기는 힘들어요. 의료소송도 의료법인이 아닌 소비자를 대리해요. 의료법인을 대리하던 곳이 환자를 진정으로 대리하긴 힘들겠죠. 보험회사를 대리하던 변호사가 보험 소비자를 대리하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죠. 이게 왜 불공정하냐면 의료법인이나 보험회사는 저가의 비용으로 그 분야의 전문 변호사를 선임해요. 그런데 소비자는 돈을 더 주면서 전문적인 변호사를 선임하기도 힘들어요. 소수자를 대리하려면 소매로 사건을 가져와야 해서 사건 찾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이게 광고를 한다고 해서 유명해질 수도 없는 거에요. 소매로 사건을 가져오면서 안정을 찾기는 힘이들죠. 그래도 안정적이니까 고용변호사 쓰는 것 아니냐고도 하는데 저희는 매달 적자가 나지 않을까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해요.

그래서 처음 목표한 것들을 실현하는 데에 경제적 안정의 고민이 문제가 된다면, 원래 그 둘이 같이 가기 어렵다고 처음부터 생각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결국 선택의 문제인 것 같기도 하고요. 하지만 공익이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어요. ‘약자’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이 있었는데, 개업변호사를 하면서 그런 고정관념을 깨게 된 것 같아요. 매우 다양한 경우가 있으니까요.

 

심 : 출판소통팀에서 하는 새해 첫 인터뷰인데요, 혹시 변호사님의 새해 소망이 있다면요?

최 : 그러게요. 뭐가 있을까요? 새해라고 해서 특별히 할 일을 정한적은 없는 것 같은데요. 아, 이제까지 제가 너무 ‘일’을 중심으로 지냈어요. 일에 있어서 제가 너무 일 중심으로 한 것 같아서, 관계중심으로 활동하지 못했죠. 최근에 친한 활동가 분이 둘째를 낳으셨다는 거예요, 근데 저는 둘째를 가지셨다는 사실도 몰랐어요. 좀 더 인간적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은데 시간이 제한되다보니 쉽지는 않아요. 올해에는 좀 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나중에 남는 건, 사람 밖에 없잖아요.


의미있는 길을 걷고자 하는 동지들과 함께 읽고 싶다며, 최정규 변호사가 평소 힘이 들 때 가끔 꺼내어 본다고 말했던 시를 마지막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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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2/21-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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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문제연구위원회 활동 소식

– 송봉준 변호사

 

1. 신입회원 환영회 및 8월 월례회

미군문제연구위원회는 8월 16일 신입회원 환영회 및 8월 월례회를 진행하였습니다. 해방촌의 한 루프탑에서 개최된 신입회원 환영회는 기록적인 폭염의 끝자락에서 회원들에게 시원한 만남의 장이었습니다. 답답한 회의실을 벗어나 탁 트인 곳에서 오랜만에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신입회원들을 환영하는 듯 시원한 바람이 불고, 맑은 하늘에 떠오른 작은 달과 서울의 야경이 어우러진 이날은 회원들 모두 더위에 지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2. 문정인 교수 강연 :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

9월 7일에는 국제정치전문가이자 통일외교안보특보인 문정인 교수를 초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과 주한미군>라는 주제로 미군위 두 번째 강연이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미군위는 지난 7월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의 조성렬 박사를 초정하여 <종전과 한미관계>라는 주제로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정책과 한반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 이후 한미동맹의 미래’에 대해서 강연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후 기대가 높아졌던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전선언과 비핵화 방식에 대한 북한과 미국의 팽팽한 힘겨루기 속에 교착상태에 빠져들게 되었고, 정부는 9월 5일 특사단을 북한에 파견하여 9월 18일부터 20일까지 3차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세에서 이번 강연은 참가자들의 활발한 질의와 이에 대한 문정인 교수의 응답으로 진행되어, 2018년 급변하고 있는 현 시기를 바라보는 안목을 한층 높일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 긴급토론회 : 유엔군 사령부, 무엇이 문제인가

8월 30일 ‘경의선 철도 연결’ 사업을 준비하기 위한 방북을 유엔사가 승인을 하지 않아 남북 철도 점검 및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미군위에서는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미군위에서는 <유엔군 사령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9월 13일 긴급토론회를 개최합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연이어 진행되고, 한반도가 새로운 평화의 시대로 가는 길에서 유엔군 사령부의 현황과 문제점을 짚어보고, 평화체제 구축과정에서 유엔군 사령부의 미래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4. SOFA 강독모임, 제10차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의견 준비

미군위에서는 SOFA 강독모임을 열고 있습니다.
정식 명칭이 ‘대한민국과 아메리카 합중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합중국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인 주한미군지위협정과 합의의사록, 양해사항 등 3개의 문서를 중심으로 위원들이 나누어 발제하고, 그 의미와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또한, 올해 진행되고 있는 제10차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 체결과 관련하여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한미 방위비분담금 특별협정(SMA, Special Measures Agreement)은 주한미군지위협정 제5조에 대한 특별협정으로 주한미군의 주둔비 일부를 지원하는 것이며, 앞으로 5년 동안의 방위비분담금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으로 미군위에서는 이에 대한 의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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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9/14-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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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연합산행 후기>

“10월의 어느 멋진 날, 짧았기에 더 아름다웠던 만남”

광주․전남지부 변호사 김수지

10월 26일 하루 종일, 광주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슬슬 다음날 있을 지부연합산행이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내일까지도 비가 오면 어떡하지, 너무 춥진 않을까, 단풍이 곱게 물들기도 전에 나뭇잎이 다 떨어져서 멀리서 찾아주신 회원분들이 볼 게 없어지는 건 아닐까, 길이 질퍽거리지는 않을까… 하지만 이 모든 염려에도, 이 한가지만은 확실했습니다. “흑산도에서 막 올라온 홍어를 안주 삼아 막걸리만큼은 맛있게 먹을 수 있겠다!”

27일 아침, 저희 광주․전남지부 회원 16명을 태운 버스는 흑산도 홍어를 싣고 강천산을 향해 달렸습니다. 강천산은 전라북도에 순창에 위치한 산으로, 평지길 트레킹이 가능한 왕초보 등산코스를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봄에는 벚꽃으로, 여름에는 계곡으로, 가을에는 애기단풍으로 유명하고, 광주에서는 약 50분 거리로 가까워, 광주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입니다.

약속 시각에 맞춰 서울에서부터 열심히 달려와주신 본부 김호철 회장님을 비롯하여 본부에서 여덟 분, 강천산을 ‘보유’하고 계시는 전주전북지부에서 세 분, 대전충청지부에서 세 분, 그리고 또 멀리 대구지부에서 열 분, 부산지부에서 다섯 분 약 50여 분이 지부연합산행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매일 출근하던 사무실과 칙칙한 법정을 벗어나, 자연에서 조우하니 더욱 반가웠습니다.

강천산은 이미 절반 이상이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로, 알록달록한 가을색을 뽐내고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비가 조금씩 내리기도 했지만, 가을날의 운치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단풍 구경을 하며 산을 오르다, 잠시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광주․전남지부 ‘홍어 운반책’들의 짐은 덜고, 흥은 돋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적당한 장소에 커다란 돗자리를 펴고 삼삼오오 둘러앉아 흑산도에서 막 올라온, 광주․전남지부 김정호 지부장님이 어렵게 공수해온 홍어를 안주 삼아, 대구지부에서 먼 길을 달려온 ‘불로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전라도 홍어의 깊은 맛과 경상도에서 온 막걸리의 청량감이 잘 어우러졌습니다. 홍어와 불로 막걸리만큼이나, 함께 한 회원들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금 더 산을 오르니, ‘장군 폭포’가 보입니다. 방금 마신 불로 막걸리의 청량함을 떠올리게 하는 장관입니다. 장군 폭포 앞에서 단체사진과 각 지부별로 사진을 촬영하고 다시 돌아 갑니다. 다시 내려가는 길에, 하늘 위에 빨간색 구름다리가 보였습니다. 가까이에서 보는 가을도 멋지지만, 멀리서 보는 강천사의 가을은 어떨까 궁금하여 구름다리에 올라보았습니다. 아직은 적당히 울긋불긋 하여, 가을을 느낄 시간이 아직 조금 더 남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게 했습니다.

가을을 충분히 느끼고 하산하여, 저희 광주․전남지부에서 어렵게 예약한 식당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맛있는 제육볶음과 더덕구이, 홍어로 식사를 하며 더덕 막걸리와 불로 막걸리를 곁들여 등산하는 동안 못 다 한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가을을 붙잡고 싶은 마음 만큼이나, 함께 하는 시간이 가는 것이 1분 1초가 너무나 아쉬울 정도로 즐겁고 흥겨운 시간이었습니다.

함께 한 광주․전남지부 정인기 변호사님의 여섯 살배기 막내 아들이 단풍나무를 보며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무는 속상하겠다.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서.”
헤어지는 것이 속상하고 아쉽고 슬프지만, 다시 새싹이 돋아나듯 우리는 또 반가운 얼굴로 다시 만나겠지요.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남은 가을을 아름답게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부연합산행을 위해 멀리까지 발걸음 해주시고, 행사 준비에 힘써주신 모든 분들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8 지부연합산행 더 많은 사진 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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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11/01-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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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변 대전·충청지부 새내기 변호사의 아등바등 201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전충청지부

변호사 이 승 현 (山君 법률사무소)

 

1. 글을 시작하며

 

가. 안녕하십니까! 저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전·충청지부’(이하 ‘민변 대전충청지부’)의 이승현 변호사입니다. 2018. 2. 5. ‘대전지방변호사회’에 처음으로 변호사로 등록을 한 신출내기 변호사입니다. 어떻게 인연이 닿아 2018. 6. 28.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입회를 신청하게 되었고, 현재는 ‘민변 대전충청지부’의 새내기 변호사로 좌충우돌·아등바등 하며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 선비사(士)를 쓰는 변호사(辯護士)는 상인(商人)이 아닌 선비가 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변호사도 인간이기에 적어도 최소한의 물질적인 욕구를 만족시켜야 생존할 수 있을 것이며, 때로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할 것이기에 돈을 벌어야만 합니다. 결국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의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항상 그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려고 평생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는 것이 변호사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그러한 생각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하면, 열심히 생업(生業)에 집중하며 살다가도 뜻을 함께할 수 있는 멋진 동지(同志)들과 공익적인 활동에 미약하게나마 힘을 보탤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왕지사 이렇게 가입한 이상 부족하나마, 앞서 선배님들께서 굳건하게 다져내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란 트랙 위에서 선배님들의 등을 열심히 쫓아가 바통터치를 할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2. ‘민변 대전·충청지부에서 아등바등

 

이제 불과 반 년 정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새내기 변호사로 민변 대전충청지부에서 보낸 시간을 몇 개 꺼내 보려고 합니다.

 

① 2018. 6. 28. 현재 ‘민변 대전충청지부’의 지부장을 맡고 계신 송동호 변호사님의 추천으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신청을 했습니다. 송동호 변호사님은 고등학교 선배님으로 익히 알고 지냈는데, 그것이 연이 되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송동호 변호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민변 같은 단체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야 해. 자기 체질에 맞아야 해. 승현이 너한테 맞을지 안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스스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한 번 해봐. 분명 나쁘지 않을 거야.”

 

② 2018. 7. 3. ‘민변 대전충청지부’에 속한 변호사들의 번개모임이 있었습니다. ‘민변 대전충청지부’에 새로 가입하게 된 신입회원인 김병필 변호사와 저를 환영하는 명목으로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많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날 지나친 환대(?)를 받아 만취하여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문현웅 변호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승현아! 일단 민변에 들어왔으면, 민변에 우선순위를 두고 생활을 해봐. (여기서 농담조로) 그럼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암것도 없이 나처럼 되는 겨. 그냥 그런 겨. 하하!”

 

③ 2018. 7. 14.부터 15.까지 변산 휴리조트에서 ‘민변 대전충청지부’ 제22차 정기총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정기총회에 참여했는데, 정기총회는 두 가지 목적이 있지 싶었습니다. 먼저 사업 및 활동을 보고하고 결산을 합니다. 다음으로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변 대전충청지부’ 소속 변호사들이 오래간만에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바다 근처 공기가 좋아서였을까요? 사람이 좋아서였을까요? 그날 왠지 모르게 술이 더 맛있어서 만취해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정기총회 전에 기분전환으로 산에 올랐습니다. 그때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한 번 올려봅니다.

 

④ 2018. 9. 17. 대전 NGO지원센터에서 ‘2018년 지부대표자회의’가 있었습니다. 본부의 사업보고와 각 지부(경남, 광주전남, 대구, 대전충청, 부산, 울산, 인천, 전주전북 – 가나다 순-)의 사업보고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본부가 중심이 되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각 지부마다 상황에 맞게 특색있는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했을 때 직접 전화를 주셨던 김호철 회장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리고 광주전남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상희 간사와 친해져 가끔 광주재판을 갈 일이 있으면 연락을 하고, 지금은 형·동생하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⑤ 2018. 10. 20. 서울에서 개최된 ‘사법적폐청산 제3차 범국민대회’에 ‘민변 대전충청지부’에서는 총 5명(남현우 변호사, 문현웅 변호사, 김우찬 변호사, 이승현 변호사, 임태영 간사)이 함께 하였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대회는 무르익어 참여한 시민들의 목소리는 하나 되어 갔고,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대회는 끝이 났습니다. 김호철 회장님께서는 멀리서 와주어 고맙다고 하시며 근처에 굉장히 맛있는 추어탕집에 데려가 주셨습니다. 목청을 울린 탓인지, 아니면 그때 그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추어탕이 너무 맛있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추어탕집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네요. 그리고는 KTX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하였고, 그 늦은 시간에 ‘민변 대전충청지부’ 지부장 송동호 변호사님께서 마중을 나오셨습니다. 출출할테니 간단하게 요기나 하고 가자 했으나, 4명이 소주 9병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승현아! 너는 신혼이니까 얼른 들어가라. 우리는 조금만 더 마시고 갈테니까. 얼른 가. 제수씨 기다린다. (혼잣말로, ‘그런데 이미 많이 늦은 거 같습니다’).”

 

 

3. 글을 마치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 가입할 때 썼던 입회원서를 찾아보았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적었더군요.

 

“사실 저는 민변이 어떠한 성격의 단체이며, 어떠한 활동을 하는 단체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자신의 생업에 집중하다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여 좋은 일을 하고 싶어하는 변호사들이 모여있는 단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에게 감히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제 깜냥이 부족하여 혹은 주어진 상황을 핑계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민변 대전충청지부’에서 아등바등한다면 조금이나마 「좋은 일」에 시간과 노력을 할애한 변호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2019년에도 ‘민변 대전충청지부’와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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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1/2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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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기고]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가

 

– 이정일 회원 (전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사무처장)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 세월호 참사 직후인 2014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이었다. 교황은 희생자 가족이 900km 거리를 메고 순례한 십자가를 로마로 가져가셨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힘은 마음속에 울리는 연민의 정에서 시작된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세월호 참사 보도를 지켜본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희생자 가족들의 모든 일상은 그 날 이후로 멈추어버렸다.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 아들, 딸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한 희생자 가족들에게는 어떠한 대책도 대책이 될 수 없었고, 위로가 될 수 없었다. 참사 당일 이후로 희생자 가족들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일손을 잡지 못하고 눈물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원봉사로, 연대로, 진상규명 특별법에 대한 서명으로 고통 속에 빠진 가족들과 함께 하려고 했었다.

변호사의 한 사람으로 제1기 특별조사위원회의 측면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2016년 6월 말에는 박근혜 정부의 제1기 특별조사위원회에 대한 강제해산의 불법성을 주장하며 릴레이 단식활동도 했다. 제1기 특별조사위원회가 강제로 활동을 종료한 이후에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위하여 시민단체 중심으로 국민조사위원회가 발족했다. 2017년 1월부터 국민조사위원회 진상조사단 단장을 맡아 세월호 참사 관련 기록을 수집하고 진상규명조사 쟁점들을 정리하였다. 1년 동안 제정을 기다려야 할 사회적참사특별법 시행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희생자 가족요청 들어주기. 국가대형 재난 사고에서 제기되는 핵심쟁점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희생자 가족요청 들어주기, 재난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개선과 재난사고에 대한 기억과 추모이다. 이 중에서 빠뜨리기 쉬운 게 희생자 가족요청 들어주기이다. 진상규명활동의 독립성에 치우치다 보면 무시하기 십상이다. 희생자 가족요청을 들어주는 과정자체가 치유의 과정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희생자 가족들의 요청은 단순명료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집으로 못 돌아오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또다시 세월호 참사와 같은 사고로 부모들이 슬퍼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재발방지 대책을 요구했다. 박근혜 정부는 기무사를 통해 희생자 가족들을 사찰했다. 진상규명활동도 방해했다. 제1기 특별조사위원회를 강제로 해산까지 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세월호 참사이후로 팽목항, 동거차도 및 광화문 광장 등 길거리에서 풍찬노숙하며 3년 이상 ‘세월호를 인양하라’, ‘진실을 인양하라’고 외쳤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언제 끝날 줄 모르고 있었던 그 어느 시기에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을 파면하는 결정을 하였다. 바로 직후에 세월호가 어둠을 뚫고 물위로 올라왔다. 1073일이 지난 시점이었고, 목포신항으로 들어오는 세월호를 지켜보던 희생자 가족들은 부두에서 목 놓아 울었다. 거대한 무덤이 부두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으며 나도 함께 울었다. 이러한 고통의 시간들을 보낸 희생자 가족들에게 특별조사기구가 앞서서 시작할 일은 바로 희생자 가족들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희생자 가족들의 힘으로 열어준 통로로 만들어진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는 희생자 가족들의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있지 않았다.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의 역할.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의 핵심 역할은 세월호 침몰원인을 밝히고, 세월호 선체보존방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더불어 해양수산부(현장수습본부)가 수행하는 미수습자 수습업무를 점검하는 역할이었다.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거치된 때로부터 11월 말까지는 미수습자 수습업무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마지막 한 사람의 미수습자라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노력은 세월호 참사원인에 대한 진상규명활동과 조화시키기 어려운 지점들이 많았다. 선체절단은 수습을 효과적으로 하는 측면이 있지만, 침몰원인 조사를 제약하는 문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의 목소리에 대해서 선체조사위원회는 현장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바로 세운 세월호의 선체의 의미.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18년 5월 10일 세월호 선체를 바로 세웠다. 그 목적은 세월호 선체 정밀조사와 미수습자의 온전한 수색작업을 위한 것이었다. 더 큰 의미는 바로 세우는 과정자체가 희생자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으로서 희생자의 요청에 답하는‘국가의 존재’이유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로 세운 세월호 선체를 통해서 진실규명에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선체보존방안과 관련하여 세월호 참사를 더 많이 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체조사위원회가 내놓은 종합보고서. 2017년 11월 말까지 미수습자 수색을 최우선 과제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개시결정이 있고 5개월 지난 시점에서 선체내부에 들어가 내부조사를 조금씩 진행할 수 있었다. 38건에 달라는 조사용역보고서에 대한 분석도 조사활동 종료(2018. 5. 6.)를 약 1개월 앞두고 거의 마무리 되었다(참고로 2018. 5. 7.부터 8. 6.까지는 종합보고서 작성 기간이었음).

선체조사위원회가 침몰원인 관련 종합보고서를 심의·의결하기 위해서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선체조사위원회 내부 조사관들과 조사관 사이의 의견 차이, 위원과 위원 사이의 의견 차이에 대한 충분한 토의가 부족했다는 점에 있었다. 침몰원인을 둘러싸고 왜 의견차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희생자가족들에게 충분히 설명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선체조사위원회가 종합보고서를 내놓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변명을 하고 싶다.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한 국회도, 제1기 특별조사위원회도 내놓지 못한 최초의 공식보고서이고, 이것이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는 방향타 역할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안전사회의 열망을 담아내는 세월호 모습을 기대하며. 우리사회는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는 달라져야 한다는 희생자 가족들의 외침이 아직도 생생하다. 돈보다 생명의 가치가 더 소중히 다루어지기를 바라는 안전사회의 열망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대학생은 한국 현대사회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세월호 참사를 기억한다는 서울대학교 교수의 말도 들었다. 대형 재난사고의 재발방지를 위해서 참사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재난연구가의 말도 들었다.

9․11 테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그라운드제로가 있다. 그라운드제로는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땅을 상징한다.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그 자리에 흘리는 눈물을 상징하는 폭포수형태의 분수대를 설치하고 그곳 아래로 잔해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방식의 추모․기념관을 지었다. 매일 수 천 명의 미국시민이 방문하여 9․11 테러를 기억하고 평화·안전을 희망한다.

중요한 시사점은 9․11 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그 자리에 또 다른 모습의 건물을 짓지 않았고, 건물신축으로 얻을 수 있는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고 9․11 테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가치를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세워진 세월호 선체는 생명을 중시하는 안전사회의 가치를 담아내는 도구로 활용되어야 한다. 세월호 선체에 생명의 가치를 콘텐츠로 담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희생자가족과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생명의 가치를 담아내는 내용이 세월호에 채워지고, 세월호가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이 꿈이 실현되는 도구로 활용될 때에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이 하늘에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약 1년 동안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에서 사무처장으로 있으면서 매우 힘든 여정을 보냈지만, 세월호를 바로세우고 침몰원인 관련 종합보고서를 내놓은데 조금이라도 기여했다는 것을 작은 위로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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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8/3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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