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지역

[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admin | 수, 2020/01/29- 00:10

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 기사]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흔적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2020-01-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조정래 선생 초청…“녹지 사라지는 제주, 찾을 이유가? 감시하고 견제하라!”

올해로 등단 50년. 작가의 궤적은 컸지만 거장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단호했다.

“고층 건물이 한라산을 가리고 녹지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제주에 찾아올 이유가 있나?”
“입법, 사법, 행정이라는 권력과 재벌, 언론을 감시하고 견제해라. 그렇지 않으면 국민으로서 직무유기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50년 가까이 소설을 통해 한국사회의 치부를 여과 없이 드러내온 소설가 조정래(78) 선생이 제주도민 앞에 섰다. 독립언론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을 맞아 열린 초청 강연이 7일 오후 7시 김봉현 편집국장 사회로 제주상공회의소 5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강연은 애초 2월 8일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연기된 후 5개월 만에 다시 마련됐다. 강연회 현장은 사전 신청한 청중들로 제한했고, 제주의소리 소리TV와 페이스북 페이지로도 동시에 생중계 됐다.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2020.7.7. 소설가 조정래는 ‘제주의 미래를 말하다’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권력과 재벌, 언론을 감시하고 견제하라고 도민들에게 당부했다. ⓒ제주의소리

‘제주의 미래를 말하다’를 주제로 열린 이날 강연에서 선생은 평생의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이 알리고 싶었던 진실, 더불어 대한민국과 제주가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시민 개개인의 ‘의무’를 강조했다.

그는 “현재 한국의 1인당 GDP(국내 총생산)가 3만2000달러 수준이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온 국민이 가난에 허덕일 때만 해도 GDP는 80달러에 불과했다. 몇 배나 늘어났지만 여러분들, 그리고 국민들은 과연 그만큼 행복한가”라고 물으며 “한국의 경제 발전은 박정희 덕분이 아니라 피 흘리며 노동에 매진한 국민들 덕분이다. 이런 사실을 알리고자 소설 <한강>을 썼는데 아직도 국민 절반은 이를 모르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선생은 “3만2000달러 GDP를 자랑해도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 청소년 자살률, 이혼율, 경제 불평등은 선두권을 차지하고, 출산율은 최하위를 달린다. 전체 노동시장의 48%를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 주소”라며 “제주도는 어떤가. 제주의 생명은 자연이고, 그 자연을 대표하는 게 바다다. 백화 현상에 해초가 사라지고 전복마저 씨가 마르고 있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미래도 암담하다”고 작심한듯 진심 어린 우려들을 토해냈다.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제주를 100여번 다녀갔다는 조정래 선생은 제주가 점점 파괴되고 있지만 아직 희망이 있는 곳이라며 도민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권하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제주의소리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선생은 한국을 망가뜨린 주범으로 ‘입법, 사법, 행정, 재벌, 언론’까지 다섯 개의 권력 집단을 꼽았다. “그들의 타락이 한국을 망쳤다”고 직설했다.

그러면서 “소시민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일해야 하기에 그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고, 30년 군사 독재의 협박 정치 때문에 트라우마가 여전히 남아있다”면서 “정치하는 자들이 제일 무시하는 존재가 무엇인지 아느냐. 바로 흩어지고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다. 반대로 가장 무서워하는 건 뭉치고 저항하며 외치는 국민들”이라고 피력했다.

특히 재벌과 언론의 폐해를 힘주어 강조했다. 선생은 “대한민국의 제일 큰 기업들이 언론사의 광고를 끊으면 직원 월급을 못주는 게 한국 언론계의 현실이다. 불의를 저질러도 언론에 보도되지 않는 건 광고 때문이다. 자본주의 대한민국에서 흡사 마피아 집단 같은 행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통찰했다.

선생은 국민들이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시민단체’를 우선 꼽았다. 시민단체를 적극 후원·지원하면서 권력을 감시하자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부러워하는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시민단체들이 활발하게 권력을 감시한다. 그런 사회를 만들기 까지 400년에 달하는 시간이 걸렸다”며 “한국은 1980년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단체가 1만개까지 만들어졌지만 전부 자멸하고 소멸했다. 국민들이 지원 해주지 않아서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민족문제연구소, 경실련 등 제대로 활동하는 단체는 손에꼽을 만큼 소수에 불과하다”고 꼽았다.

선생은 “우리 모두는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 행복은 남이 만드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한국 사회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권력을 만든 당신들이 주인 행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공무원만 직무 유기가 있는게 아니다. 국민도 직무유기하면 자업자득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민단체를 지원하는 것이 좋은 대안”이라고 권했다. 조정래 선생은 참여연대 창립때부터 함께 하면서 현재 이사로 활동 중이다. 소설 <천년의 질문>을 통해 시민단체 활동을 알리는 등 꾸준히 힘을 보태고 있다.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으로 마련된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 이날 강연은 김봉현 편집국장(왼쪽)의 사회로 청중들과 함께 제주의 미래, 제주의 가치, 시민들의 정치참여 등 다양한 주제의 즉문즉답도 이어졌다. ⓒ제주의소리
조정래 선생이 청중들 질문에 귀 기울여 집중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이동건 기자

그는 평생 100번 넘게 방문하며 마지막 생의 종착지로도 생각했던 제주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보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 환경 파괴로 인한 실망감도 숨기지 않았다.

선생은 “제주의 생명은 단언컨대 자연 풍광이다. 머리에 물을 품은 한라산 풍광은 바다와 어우러져 대한민국 최고다. 내 손자는 뱃속에서부터 서귀포 앞바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과거 나는 제주에서 뼈를 묻겠다고 아내의 동의를 얻었다. 그런데 근래 들어 제주와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고층 건물이 한라산을 가리기 시작했다. 녹지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싱싱한 자리돔을 먹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주를 방문할 이유가 있느냐. 흉을 보는 게 아니다. 제주도의 문제점을 제대로 직시하고 더불어 고민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문제를 직시해서 푸는 것만이 제주에 밝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선생은 제주의 미래는 물론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암담하다”고 직설했다. 권력과 재벌, 언론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도 거듭 진단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 왜 가만히 있느냐”고 반문했다. 문제도 답도 명쾌했다.

강연 후 청중들과의 대화에서는 ▲조정래 작가의 청년시절 삶을 토대로 오늘날 청년세대들에 대한 조언 ▲세대간 세분화되는 갈등 문제 ▲가짜뉴스 문제 ▲적극적인 정치참여와 정당 활동 의견 ▲지역 언론의 역할 등에 대한 다양한 질문이 던져졌다.

선생은 청년에 대한 조언으로 “청년들의 미래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내가 살았던 시절은 청년이란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만큼 사회 전체가 가난했다. 타 국가로부터 돈을 빌리기 위해 광부, 간호사를 담보 잡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어 “오늘날 청년 문제가 대두되는 것만으로 우리사회가 발전한 것이다. 성급하게 여기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며 “과거를 알아야 현재 자리를 알고, 현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 대학을 나왔으니 빨리 취직하고 빨리 정규직 되겠다고 다급해 하기 보단 성숙한 기다림이 필요한게 인생이다. 비정규직 없애고 정규직 늘리는 일에 청년들이 반대하는 오류를 범하진 말자”고 조언했다.

20대 대학생이 던진 ‘세분화되고 있는 세대 갈등 문제’ 질문에는 “50대 이상 세대들의 희생과 투쟁에 의해 오늘 날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점은 젊은이들도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의견의 차이를 서로 대화로 토론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상대의 입장이 무엇인가 배려하고 살필 때 화합이 이뤄진다”고 당부했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의 정치 참여도 강조했다. 선생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정책 결정이 별 의미가 없다는 기회주의적 냉소주의는 위험하다. 선거 날, 투표하는데 필요한 불과 몇 시간의 인내를 기피 하면서 국가가 나에게, 자기 세대에게 무엇을 해주길 바라나. 이것은 시민으로서 직무유기”라고 일갈했다.

[제주의소리] 창간16주년 특별기획 조정래 선생 초청강연에 참석한 청중들 ⓒ제주의소리
이날 강연 청중들 중에는 조정래 선생의 소설 작품을 들고와 강연이 끝난 후 기념 사인(sign)을 받기도 했다. ⓒ제주의소리

선생은 “자기 권한을 주장하려면 투표해라. 내가 선택한 정치인들이 내가 속한 공동체에게 필요한 법을 만들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왜 우리를 배려하지 않냐’는 주장은 파렴치한 일”이라고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몇 년 전에 저에 대해서도 제가 하지 않은 발언을 한 것 처럼 인터넷에 올라온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나서서 바로 잡을까 하다가, 너무 황당무계해서 아무도 내가 한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주변 조언을 듣고 그냥 넘어갔다”면서 “남북 문제도 남북이 서로 갈등을 해소하면서 평화롭게 공생하는 방향으로 큰 기류는 잡혀 있다. 반공주의를 이용해 자기 이익을 취하는 수구보수세력과 가짜뉴스는 조금만 기다리면 자연 도태될 것”이라고 직격했다.

정당 활동을 해야하는지 고민이라는 질문에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정치다. 정당 가입 활동을 해도 좋다. 다만, 진보적인 정당에 가입하라. 보수는 나쁘다기 보다는 전진이 더디다. 진보는 문제를 개혁하고 혁신해서 나아가겠다는 성향”이라고 조언했다.

지역 언론의 역할에 대해선 “무엇보다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것에 대해선 끝없이 물고 늘어져야 한다.”며 “분명 괴롭고 어려운 길이지만 진실에 목마른 사람들이 후원자로 나설 것이다. 언론인은 가시밭길을 걷겠다는 각오를 했기에 괴로워도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저도 올해로 등단 50년을 맞았다. 그간 소설을 써왔다. 인생을 담아왔다. 인생은 거센 물살이 흘러가는 냇가에 놓인 징검다리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 고통스럽다. 자기 스스로를 말 삼아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다. 지역언론도 자기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향후 활동에 대해서는 “<태백산맥> 이후로 20년 동안 세워둔 계획 대로 집필하고 있다. 앞으로 20년 더 살면서 다양한 소설을 쓰겠다. 아무리 스마트폰 시대라지만 책도 열심히 읽어달라”는 답으로 강연을 마쳤다.

이번 [제주의소리] 창간 16주년 특별기획 조정래 선생 초청 강연은 소리TV의 VOD서비스를 통해 다시 볼 수 있다.

한형진 기자 ([email protected])

<2020-07-08> 제주의소리 

☞기사원문: “제주가 점점 파괴되고 있다, 감시 않는 것은 도민 직무유기다”

 

목, 2020/07/09- 04:56
0
0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1977년 7월 8일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안익태

대마불사(大馬不死)란 말이 있다. 재벌들이 숱한 폐해를 끼치고도 재벌개혁을 번번이 비껴가며 불사의 신화를 이어가는 것은 그들의 덩치가 이미 대마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말은 경제뿐 아니라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친일의 죄악이 지대한데도, 예술계에서 이미 큰 몫을 차지하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고도의 영예를 누리는 인물이 있다.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1906~1965년)가 대표적이다.

그가 일생의 역작으로 자부했던 작품이 있다.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가 그것이다. <환상곡 에텐라쿠>로 약칭되는 이 노래는 일왕(천황)을 찬미하는 노래였다.

<친일인명사전>은 “원래 <에텐라쿠>는 일본 천황 즉위식 때 축하 작품으로 연주된 것”이라면서 “안익태가 역작으로 자부한 <에텐라쿠>는 1938년에 발표된 이후 로마방송 오케스트라 연주회(1939.4.30.),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1940.10.19.), 독·일협회 빈 지부 주최의 빈 심포니 연주회(1942.3.12.), 함부르크 연주회(1943.4.22.) 등에서 자신의 지휘로 계속 연주되었다”고 설명한다.

일왕을 찬미하는 노래였으므로 해방 뒤에는 이 작품을 멀리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해방 뒤에 그는 이 작품을 살리고자 이른바 ‘작품 세탁’을 감행했다. 1959년에 <강천성악>이란 이름으로 개작해서 다시 내놓은 것이다. 그가 일왕 찬양가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지은 노래가 <애국가>이니, 이 노래가 정말로 한국의 <애국가>가 맞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안익태의 친일행적은 <환상곡 에텐라쿠> 작곡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일왕과 사쿠라와 후지산, 사무라이와 ‘일본해’를 찬미하는 <대관현악을 위한 일본 황기 2600년에 붙인 축전곡>의 연주를 1942년 3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휘했다. 또 일본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고자 <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를 만주국 건국 10주년인 1942년에 작곡했다. 이 노래는 <만주국 경축 음악> 혹은 <만주 환상곡>으로도 불린다.

안익태 향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관심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안익태. 1977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 동아일보

이랬던 그가 사후 12년 뒤인 1977년 7월, 한국 언론으로부터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가 그해 7월 6일 귀환하고 이틀 뒤인 7월 8일 국립묘지에 묻혔기 때문이다.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서 거행된 안장식에 관해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 ‘그리던 모국 품에 포근히’는 이렇게 보도했다.

“고 안익태 선생 유해 안장식이 8일 오전 11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소에서 미망인 로리타 여사와 안나 세시리아, 레오노루 등 두 딸과 심흥선 총무처장관, 아구아도 스페인 대사와 음악계 인사 등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박 대통령과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 등 각계에서 보낸 조화 속에, 현충사에서 가진 영결식에 이어 시작된 안장식은 비까지 내려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에 묻히는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이날 안장식 때 조화만 보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열흘 뒤인 18일, 그는 안익태 유족들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가 안익태에 얼마나 큰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다.

▲ 안익태 유족들을 접견하는 박정희. 1977년 7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다. ⓒ 경향신문

박정희가 안익태에게 마음을 베푼 이유가 있다. 1961년 5·16 쿠데타 뒤에 안익태가 자신의 국제적 명성을 앞세워 박정희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1962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세 번째 찾아온 조국, 세계적 명지휘자 안익태 씨’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세 번째로 고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심포니 지휘자이며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씨는 13일 하오 반도호텔 816호실에서 기자와 만나 ‘세계 각국은 지금 우리나라를 주시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두 번째로 고국에 돌아온 것은 3·15 선거 당시였는데 당시의 인상은 슬프고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국민들에게 희망이 보이고 활기에 꽉 차 있어 보인다’고 혁명 조국에 머무는 동안의 감상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승만 정권 때 벌어진 3·15 부정선거는 1960년 일이다. 안익태의 세 번째 귀국으로부터 조금 전의 일이었다. 두 시기의 간격이 길지 않을 뿐 아니라 두 시기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도, 안익태는 ‘당시의 인상은 슬프고 어지러웠으나, 지금은 희망이 보이고 활기에 차 있다’며 박정희 쿠데타를 찬미했다.

이뿐 아니었다. 인터뷰에서 안익태는 박정희를 ‘위대한 지도자’로 치켜세웠다. 박정희를 ‘교향악단의 위대한 지휘자’인 듯이 묘사했다.

“안씨는 국내의 음악단체 등이 통합되고 국내 질서가 호전되어 가는 것을 가리키면서 ‘한 나라는 마치 한 교향악단과 같은 것으로 지휘자 여하에 달렸는데, 위대한 지도자 박정희 장군 밑에서 국민 각자가 자기 부서를 잘 지켜나가면 나라가 잘될 것이라’고 열을 띠고 말했다.”

안익태를 인터뷰한 기자는 그가 박정희를 칭송할 때 ‘열을 띠고 말했다’고 묘사했다. 박정희에 대한 이 같은 열정은 4개월 뒤의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 때도 이어졌다.

1962년 5월 16일 전국 각지에서는 이른바 ‘혁명 1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성대하게 거행됐다. 서울에서는 3만여 명이 서울운동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행사가 진행됐다. 이 행사에도 안익태는 열정을 다해 ‘혁명 1주년’을 찬미했다.

안익태는 이날 오전과 오후 행사에서 마치 주인공처럼 활약했다. 5월 17일자 <동아일보> 기사 ‘5월 만세’는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한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막을 연 이날 식전은 먼저 안익태씨가 지휘하는 각군 군악대의 우렁찬 주악(국기에 대한 경례 및 애국가)에 이어 박 의장을 비롯한 각계 요인의 축사가 진행”됐다고 오전 풍경을 묘사한다.

▲ 1962년 5월 17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5·16 쿠데타 1주년 기념식. ⓒ 동아일보

같은 신문의 5월 18일자 기사 ‘선율에 매혹’은 “2백 5십여 명의 시향·KBS교향악단·3군 및 해병 군악대와 5백여 명의 연합합창단이 본부 스탠드에 자리 잡은 가운데, 안익태씨 지휘로 먼저 베토벤 작곡 교향곡 9번 제4악장이 연주되고 이어 지휘자 안씨 작곡인 <코리아 환상곡>이 연주되어 웅장한 코러스가 5월의 밤하늘에 울려 퍼져 3만여 명의 청중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 속에 9시 반 음악의 향연은 그 막을 내렸다”며 오후 풍경을 묘사했다.

이처럼 안익태는 음악적 명성과 재능을 활용해 일본제국주의뿐 아니라 박정희 쿠데타까지 미화했다. 1977년 7월에 박정희가 안익태 유족들에게 보여준 호의는 1962년 일에 대한 답례의 성격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 국립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친일파 안익태의 안장 실태. ⓒ 국립서울현충원.

‘친일’이 자발적었음 짐작케 하는 노래

안익태는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음악인이 아니다. 그가 친일에 상당히 자발적이었다는 점은 <코리아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의 주요 부분이 일치한다는 사실에서도 증명된다. 한국을 찬미하겠다며 만든 노래와 일본의 만주 지배를 찬미하겠다며 만든 노래의 주요 부분이 똑같았던 것이다.

음악학자 송병욱은 2007년에 <내일을 여는 역사> 제27호에 기고한 ‘다시 보는 안익태 – 애국가의 작곡가는 애국자였나’에서 “<만주국 경축 음악>과 <한국 환상곡>은 주요 합창 선율 두 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전자에서는 그 선율들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대동아공영과 신질서를 찬미하는 가사를 위해, 후자에서는 해방된 조국과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사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만약 안익태가 일본의 강압 때문에 억지로 친일을 했다면, <코리아 환상곡>에 쓰는 선율과 <만주 환상곡>에 쓰는 선율을 어떻게든 구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의식 속에서 한국과 일본제국주의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친일이 상당부분은 자율적이었으리라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 안익태의 유해를 박정희 정권은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1977년에 박 정권이 만들어놓은 이 부조리함은 2020년 지금까지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 일본제국주의와 박정희 쿠데타를 찬미했던 음악인이 국립서울현충원 내에서 ‘불사’의 존재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가 만든 노래가 <애국가>로 울려퍼지고, 그를 기리는 비석이 서울 올림픽공원 내에 세워져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 아직 친일파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들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울시 송파구의 올림픽공원에 있는 안익태 동상. ⓒ 김종성

<2020-07-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 안익태 국립묘지 안장된 날, 눈에 띈 박정희 행보

수, 2020/07/08- 23:09
0
0

0523-1

[유튜브 영상] [바로보기]

오랫동안 한반도 평화를 위해 연구하고 실천했던 정욱식 대표(평화네트워크)는 현재 한반도 위기상황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노이 노딜로 조롱받는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좌초 위기에 처해있다. 비핵화가 무엇인지 대해 남북미는 동상이몽만 있을뿐 구체적인 정의도 목표도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비핵지대를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로 삼고 시민이 나서야 한다.”

이번 방송은 정욱식 대표의 새책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를 가지고 1부 2부로 구성했습니다. 1부는 현재 위기상황의 원인은 무엇인지? 2부는 정욱식 대표가 제안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솔루션 ‘비핵지대’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겨레하나의 이하나 정책국장이 함께 나와 남북민간교류를 실천해온 시민단체는 어떻게 이 상황을 바라보는지 이야기 나눴습니다.


☞(도서) 관련기사: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은 불가능할까

정욱식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MD본색》, 《말과 칼》, 《사드의 모든 것》, 《핵과 인간》, 《비핵화의 최후》 등이 있다.

“정욱식은 한국의 대표적 평화분석가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한반도 비핵지대’라고 설파하고 있다. 기존의 타부(taboo)를 깨는 창의적이고도 상상력 넘치는 책이다” –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 연세대학교 특임명예교수)

0403-4

[팟빵-바로듣기] [다운로드] 


☞ (7.07)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1부 ”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6.30) ‘내역사’ 시즌 5: 13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대표적인 7곡을 소개합니다”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2부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1부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금, 2020/07/10- 05:52
0
0

[김종성의 히,스토리] 국민 학살한 친일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 별세 (서울=연합뉴스)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휴전회담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 장군이 육군에 기증한 군 역사 관련 기록물 중 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2020.7.11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지난 5, 6월 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의 당사자였던 백선엽 전 만주국 중위 겸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이 7월 10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육군은 육군장 영결식이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다고 예고했다. 안장식은 같은 날 11시 30분 대전현충원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백선엽은 20세 때인 1940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해방 뒤 잠시 고향에 체류한 그는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그런 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부터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1월 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59년 2월, 39세 나이로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60년에 뜻하지 않게 군복을 벗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격동 속에서 군대를 떠났고, 그해 7월 주중화민국대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됐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뒤로도 프랑스·캐나다에서 대사 직을 수행했던 그는 1969년 교통부장관이 됐고 1971년(51세) 장관직을 퇴임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는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사장을 지냈다.

군대를 떠난 나이(40세)와 공직을 떠난 나이(51세)가 좀 이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면 화려한 공직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가시’들이 감춰져 있다. 한국 사회의 핵심 독소들이 그 가시들에 잔뜩 묻어 있다.

백선엽의 인생

▲ 백선엽 장군 빈소 조문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선엽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이었다.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친일 군인 중에서도 특별한 친일 군인들만 가는 곳이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한 이 부대의 주력은 식민지 한국인들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식민지인을 이용해 식민지인을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방식을 실천하는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가 쏜 총탄에 쓰러진 항일투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서 이 부대에서 활약한 백선엽은 누구도 부인 못할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에 깊이 물들었다는 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로당 박정희’를 구해준 데서도 드러난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치는 민족주의 장병들이 일으킨 여순항쟁(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는 이들과 연관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 박정희가 1개월도 안 된 12월 10일 석방된 것은 숙군 작업을 주도하던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이 신원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정희 구명은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또 백선엽은 국민 학살,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것은 친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한 범죄다. 전쟁 상황 속의 민간인을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치부하는 일부 그릇된 군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범죄로 비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군사행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사고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민간인을 죽이는 군인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한낱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범죄자가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여 범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범죄를,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 시절에 저질렀다. 그는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이 부대는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여성들에게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일을 두고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사고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군인은 국민의 명을 받은 몸이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몸이다.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 살상했다는 것은 애당초 국민의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백선엽의 동종 범죄는 한국전쟁 때도 있었다. 그는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국민 학살을 감행했다. 백선엽의 부하들이 일반 국민과 빨치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쐈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의 상황만으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이 12일간 이들은 4천 명의 빨치산을 잡겠다는 목표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사살된 사람은 총 6600명이었다. 아무나 마구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은 6·25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육군 홈페이지의 ‘육군 소개’ 코너에 실린 다음과 같은 ‘백선엽의 전공’과 위와 같은 ‘백선엽의 국민 학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무겁겠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움.”

그가 세운 전공이 그가 범한 국민 학살보다 더 중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섣불리 치켜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전쟁영웅이라면 그가 죽인 국민들은 대체 무엇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백선엽의 일생에서 하나의 ‘패턴’처럼 자주 나타났다. 해방 이후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는 동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속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사뿐 아니라 민간인들한테도 학살을 자행했다. 2008년에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이 부대가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간도특설대의 여타 구성원들을 포함해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국가만 중요하고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백선엽의 행적은 해방공간의 남한 땅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사회발전을 저해한 이북 출신 청년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해방 뒤 북쪽에 체류하다가 월남한 그는 극우 청년단체가 아닌 군대로 가기는 했지만, 극우 청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걸었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그는 국민 살상을 자행했다.

백선엽은 왜 마흔에 군대를 떠났나

▲ 백선엽 장군 별세,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2013년 8월 경기도 파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 장군. ⓒ 연합뉴스

그런데 그는 친일과 반공의 길만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 궤적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 박사를 연상케 할 만하다. 평양에서 친일파 의사로 살던 이인국은 해방 뒤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소련파로 변신했다가 한국전쟁 중에 남하해 친미파로 둔갑했다.

만주국 중위 백선엽은 일본이 패망한 다음달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인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서 치안대장으로 활동했다. 친일파들이 빨갱이로 부르던 조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백선엽은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꺼삐딴 리 스타일의 인생행로를 아주 전형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백선엽에 대해 파고들 것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왜 나이 마흔에 군대를 떠나 주중화민국대사가 됐는가 하는 점이다. 국방장관 승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합참모본부 총장 백선엽의 전역은 1960년 5월 31일에 있었다. 4·19혁명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처리를 피하고자 하와이로 망명한 지 이틀 뒤였다.

그해 6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연참본부총장) 백선엽 대장 사표 수리’에 따르면, 백선엽은 사퇴 성명서에서 “민주혁명의 정신에 호응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군대의 민주적 개혁의 터전을 선임자로서 닦아주려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자 사퇴하게 됐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가 사퇴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유광종 <중앙일보> 기자가 정리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사퇴하기 얼마 전에 그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이 장면이 회고록에 소개돼 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더니 ‘이제 다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도 옷을 벗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히 내게 군에서 은퇴하라는 의사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하야를 지켜보면서 언뜻 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관에게 ‘알았다. 잘됐다’고 말했다.”

이종찬은 현역군인 신분을 갖고 국방부장관 직을 수행했다. 그는 1960년 5월에 전역했다. 이 대화 시점의 그는 국방장관 직만 갖고 있는 상태였다.

사퇴 성명이나 회고록만 놓고 보면, 백선엽의 전역이 이승만 퇴진에 따른 의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이 4·19 혁명 뒤에도 계속 공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퇴임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는 군부 수뇌부도 개입했다. 이 점은 1960년 5월 13일에 이종찬 국방부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했던 증언에서도 증명된다. 1960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기사 ‘군의 부정선거 개입 부인 못해’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군대가 부정선거에 전혀 가담치 않았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바로 이 부정선거 책임이 백선엽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하야 뒤에 과도정부(과정)를 이끌며 국정을 책임졌던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의 기고문을 담은 1962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허정 씨가 공개하는 과정 3개월 (5)’에 이 점이 설명돼 있다.

기고문에서 허정은 군부 수뇌부의 부정선거 가담을 규탄하는 젊은 장교들의 압력이 거셌다는 점을 설명한 뒤, 자신이 소장급 이상 장군들에게 “당신들은 자기 스스로가 잘 판단해서 좋은 구실과 계기를 만들어 자진 사퇴를 해주시오”라며 “그러면 나도 여러분의 인격과 위신에 맞도록 해외 대·공사직을 마련하여 내보내도록 노력하겠소”라고 권유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런 뒤 허정은 기고문 끝에 이런 글을 달아놓았다.

“나의 이 방법은 후에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어 자진 사퇴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또 몇몇 분들에게는 약속대로 해외 공관의 공사 또는 대사로 임명해서 현지에 보내준 일도 있다(주: 백선엽·유재흥 장군 등의 주중국·주태국 대사직이 이때부터 마련되었음).”

이 일화는 백선엽이 친일행위와 국민학살에 더해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적폐청산 작업이 군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뤄졌다면, 백선엽의 죄악은 좀더 명확히 세상에 드러났을 것이다. 전쟁영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면의 백선엽은 독 묻은 가시처럼 온갖 부조리를 묻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죄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백선엽은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품었다. 그는 자기가 선엽(善燁)이란 이름의 善처럼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위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이름에는 착할 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내 회고록을 집필한 <중앙일보> 유광종 기자가 1948년 박정희 대통령을 숙군 작업에서 살려준 동기가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묻길래, 그때에도 ‘내 이름에 착할 선이 들어 있잖아’라며 넘어간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는 데 만족한다. 가능하면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돕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남을 해치려는 자는 힘을 기울여 막으면 좋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정말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살렸으면 그만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으려 고심할까.”

자신이 선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살릴 사람은 살리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살릴 사람’이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항일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릴 사람’과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 중에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당시의 헌법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3·1운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나라에서, 3·1운동을 부정하는 친일행위에 가담하고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마구 학살한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모신다면, 국민들은 현충원이 어떤 사람들을 모시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2020-07-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월, 2020/07/13- 19:54
0
0

간도특설대, 일제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설립
악랄한 활동 탓 일반 사병까지 친일사전 등재
간도특설대 군가 중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
간도특설대 출신 창군 원로 5명 현충원 안장

[서울=뉴시스]박진희 기자 = 6·25전쟁 영웅이자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사진은 미1군 단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보고하는 백선엽. (사진=육군 제공) [email protected](*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고 백선엽 장군이 일제강점기 당시 간도특설대에 가담해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는 이유로 친일 행적 논란이 일고 있다.

보수진영에서는 백 장군이 부임한 시기에는 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간 뒤라며 실제로 백 장군이 독립군을 토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진보진영은 백 장군이 간도특설대의 독립군 토벌 이력과 부대 성격을 알고도 가담한 것은 더 큰 잘못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간도특설대는 일제강점기 간도(間島)에서 조선 독립군과 중국인이 연계한 반일-반만주국 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만주국과 일본 당국이 설립한 부대다.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일제의 이이제이 전략에 따라 설립됐다.

이 부대는 1938년 일본 관동군 간도특무기관장 오코시 노부오 육군중좌에 의해 창설됐다. 부대장은 일본인이었지만 그 외 장교들은 조선인들이 많았고 병사들 역시 전원 친일 조선인으로 구성됐다. 1기생 모집인원은 228명이었다. 지원조건은 만 18세 이상 20세 미만 간도성 내 거주 조선인 남성 중 보통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과 일본어가 통하는 자였다. 복무연한은 3년이었다.

간도특설대는 게릴라전에 특화된 부대로 육성됐다. 전투 상대인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등 항일조직이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뉴시스]박진희 기자 = 6·25전쟁 영웅이자 창군 원로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10일 오후 11시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사진은 미1군 단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보고하는 백선엽. (사진=육군 제공) [email protected](* 위 사진은 재배포, 재판매, DB 및 활용을 금지합니다)

창설 목적에 맞게 간도특설대는 항일, 항만주국 세력에 대한 토벌을 수행했다.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 주 타격대상이었다. 열하성, 하북성 등지까지 활동반경이 넓어지면서 팔로군(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과의 교전도 이뤄졌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다. 간도에 있던 많은 조선인이 체포되거나 강간, 약탈,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 식민지배에 맞선 독립운동을 대거 탄압한 탓에 간도특설대 소속 인물들의 대부분은 친일파로 인식되고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일본군 소좌 이상만 등재해놓고 있지만, 간도특설대의 경우 그 활동이 특히 악랄해 대위 이하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징병이나 학병 등 상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일제를 위해 싸우게 된 다른 부대의 조선인들과 달리 간도특설대는 사병, 장교 가릴 것 없이 이 부대에 소속됐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자발적 친일 행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1939년 12월부터 1945년에 해산될 때까지 부대가로 불렀던 노래는 간도특설대의 정신을 보여준다.

가사는 ‘시대의 자랑, 만주의 번영을 위한 징병제의 선구자, 조선의 건아들아! 선구자의 사명을 안고 우리는 나섰다. 나도 나섰다. 건군은 짧아도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대화혼(大和魂)은 우리를 고무한다. 천황의 뜻을 받든 특설부대 천황은 특설부대를 사랑한다’다.

광복이후 한국에서 반민특위 등 친일청산작업이 실패한 가운데 구 일본군과 만주군 소속 군인들이 국군 지도부로 편입됐다. 특히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게릴라전 경험을 바탕으로 제주 4·3사건 등에서 토벌부대 지휘관으로 참여했다. 백야전사령부를 창설해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하고 육군참모총장이 된 백선엽이 대표적이다.

간도특설대 복무자 중 가장 유명한 백선엽은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돼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고 회고했다.

[서울=뉴시스]홍효식 기자 = 6·25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불리는 백선엽 장군이 지난 10일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12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선엽 장군 빈소에 영정사진이 보이고 있다. 2020.07.12. [email protected]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은 “그때 나는 만주국 내에 특별히 한국인만으로 구성된 특수부대를 창설하려는 데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인 목적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단지 하급 간부 요원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한 처지라 내게 부여되는 임무를 완수하는 데만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고 되돌아봤다.

그간 국군 창군 원로 자격으로 현충원에 묻힌 간도특설대 출신은 5명이다. 이들은 모두 2009년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행위자다. 창군 원로이자 친일 반민족행위자인 백선엽이 현충원에 안장되면 6명으로 늘어난다.

[서울=뉴시스] 박민석 기자 = 한 시민이 12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국민장 시민 분향소에서 영정 앞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2020.07.12. [email protected]

신현준은 일본이 만주국을 수립하면서 세운 장교 양성 기관인 봉천군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우리 항일조직을 소탕하는 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 활동했다. 해방 후 귀국해 해병대 창설을 주도해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김석범은 봉천군관학교 출신으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조직을 탄압했다. 광복 후 국군 해군 중위로 임관해 해군통제부 참모장과 방위사령관 등을 지냈다. 제2대 해병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재향군인회 부회장과 성우회 부회장을 지냈다.

김백일은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했다. 광복 후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육군보병학교 교장,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와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이 됐다. 5·16 쿠데타 후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을 역임했다.

김홍준은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조직 토벌에 나섰고 광복 후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서 근무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2020-07-13> 뉴시스

☞기사원문: 백선엽 가담한 간도특설대, 항일무장세력·민간인 172명 살해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친일행위 백선엽, 대전현충원 안장 용납할 수 없다”

☞YTN: 민족문제연구소 “故 백선엽 현충원 안장 저지할 것”

☞한겨레: 백선엽 회고록, “‘간도특설대’는 일제의 이이제이였다”

☞미디어오늘: “백선엽부대 숙모와 품안 젖먹이 총살” 주민 생생증언 (2011.06.28)

월, 2020/07/13- 23:01
0
0

한국과 일본의 시민단체들이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왜곡했다는 지적을 받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이하 정보센터)에 대해 “강제 노동을 부정하는 전시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했습니다.

한일 시민단체들은 오늘(14일)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아베 정권이 총리관저 주도로 추진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일본 메이지(明治) 시대의 산업 근대화만을 찬미해 과거의 침략전쟁과 그 아래에서의 강제노동 역사를 배제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유네스코 헌장 정신에 어긋나고 강제징용 피해자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어 “강제노동 피해자의 존엄성을 다시 훼손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행위”라면서 “역사 청산 없이는 동아시아의 우호와 평화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성명은 특히 “일본 정부와 함께 유네스코 등록을 추진한 산업유산국민회의는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함도가 지옥도가 아니라는 선전을 주도한 단체”라면서 “이를 추진한 인물이 현재의 가토 고코(加藤康子) 산업유산정보센터 센터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산업유산국민회의 전무이사인 가토 고코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에서 농림수산상 등을 지낸 가토 무쓰키(加藤六月·1926∼2006)의 딸이며, 아베 총리 측근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후생노동상의 처형입니다.

그는 군함도 등이 세계 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을 지원했고, 2015년 7월∼2019년 7월 내각관방참여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시민단체들은 성명에서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 실태와 증언을 전시해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국제사회와 한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서 “또 강제징용 피해자 단체와 전문가 등과 대화해 산업유산정보센터를 동아시아 공동의 기억센터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습니다.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일본 정부가 2015년 7월 하시마 탄광 등 메이지 시대의 산업유산 시설 23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제 징용 등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알 수 있도록 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을 토대로 지난달 15일 도쿄 신주쿠(新宿)구 소재 총무성 제2청사 별관에 개관한 전시시설입니다.

그러나 실제 전시는 메이지 시대 산업화 성과를 자랑하는 내용 위주이고, 징용 피해자 실태 등 당시의 어두웠던 역사를 외면하거나 왜곡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성명에는 일본의 ‘강제노동 진상규명 네트워크’ 등 49개,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 등 15개 등 양국에서 모두 64개 시민단체가 참여했으며, 단체들은 성명서를 산업유산정보센터 등 관련 기관에 보냈습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게티이미지뱅크]

<2020-07-14> KBS 

☞기사원문: 한일 시민단체 “‘군함도 왜곡 전시’ 중단…‘지옥도’ 감춰선 안돼” 

※관련기사 

☞더팩트: “유네스코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군함도 강제노동 역사 부정”

목, 2020/07/16- 00:34
0
0

백인엽과 백희엽까지…백씨 집안 치부사

2018년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생일파티 도중 생각에 잠긴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 연합뉴스

‘전쟁영웅’과 ‘친일파’라는 상반된 평가 속에 백수를 넘기고 숨진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이 15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일제강점기 독립군 토벌 전문부대였던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비판에 보수세력들은 ‘전쟁영웅인 백씨가 평생 군인으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백씨 삶의 다른 면모들도 있다. 그는 서울 강남역 앞에 2천억원대의 건물을 가족 명의로 소유했던 자산가였지만, 수년에 걸쳐 가족 사이 송사가 벌어지기도 했던 게 대표적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현재 백씨 장남은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한 덕흥빌딩 소유주다. 지하 5층 지상 16층 규모의 대형 빌딩으로 대지가 853㎡(258평), 건평만 1만1381㎡(3443평)에 이른다. 빌딩 전문 부동산업체 관계자는 “삼성타운이 들어오면서 여긴 부르는 게 값인데 해당 건물은 초역세권이라 평당 5억원은 될 것”이라며 “땅값(2020년 공시지가 683억원) 말고도 건물은 시가로 최소한 2천억~3천억원 정도 될 것”이라고 했다.

등기부등본을 보면, 백씨는 장남 명의로 돼 있던 땅에 건물을 올려 1994년 12월 역시 장남 명의로 소유권보존등기를 마쳤다. 당시 장남 나이는 41살이었다. 백씨의 재산 형성 과정을 추적한 전필건 전 교육부 사학혁신위원은 “40대 초반 나이에 강남 한복판에 대형 건물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며 “명의신탁에 의한 차명소유로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차명 소유는 백씨 가족이 2007~2010년 사이 벌인 재산다툼을 통해 사실로 확인됐다. 2007년 4월 백씨 장녀, 둘째 딸, 둘째 아들 3남매는 장남을 상대로 부동산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 인용 결정을 받았다. 장남이 자신 명의의 건물의 매매, 증여, 전세권, 저당권 등의 권리 행사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3남매는 이어 ‘진정명의회복을 원인으로 한 소유권이전등기 청구’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제기했다. 등기부상 주인은 실제 주인이 아니니, 실제 주인 명의로 소유권을 이전해달라는 주장이었다. 2008년 8월 서울중앙지법이 3남매의 손을 들어주자 장남은 서울고법에 항소했고, 2010년 1월 다시 3남매가 일부 승소했다. 대법원까지 간 재산다툼 결과, 해당 건물은 장남과 백씨 부인이 절반씩 소유하게 됐다가, 2012년 백씨 부인이 지분을 350억원에 장남에게 매각하면서 지금은 온전히 장남 소유가 됐다. 재산을 장남 명의로 해놓았던 게 사달이 난 셈이다. 장남을 뺀 3남매는 미국 시민권자로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과정에서 장남과 척을 진 백선엽은 말년에 아내 노씨와 둘이서 지냈다고 한다.

서울 강남역 5번 출구 바로 앞에 있는 덕흥빌딩. 시가로 2천억원이 넘는다. 카카오맵 거리뷰 갈무리

형제끼리의 재산다툼 외에도 백씨 일가에는 유독 돈과 관련해 입길에 오른 인물들이 여럿이다. 백씨의 동생인 백인엽(1923~2013) 전 예비역 중장과 사촌누이인 증권가 큰 손 백희엽씨다. 일본 육군 항공소위 출신인 백인엽은 1956년 6군단장 등을 지낼 때 군수비리를 저지른 혐의로 5·16쿠데타 당시 부정축재자 1호로 검거돼 무기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사실 여기엔 백인엽의 비리와 함께 박정희와의 구원도 일정정도 작용했다. 6군단장 시절, 백인엽은 장병들을 완전 군장으로 연병장에 집합시킨 뒤 당시 부군단장이었던 박정희의 철모를 지휘봉으로 톡톡 치며 “빨갱이 XX”라는 등의 모욕을 준 일이 있었다. 백인엽으로부터의 수모를 참다못한 박정희가 백인엽의 군수비리를 문제제기했고, 이 일로 박정희는 이듬해인 1957년 9월 제7사단장으로 전보조치된다. 이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는 부패군인의 대명사였던 백인엽을 처단하고 싶었으나, 1948년 여순사건 뒤 숙군과정에서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백인엽의 형 백선엽을 생각해 선처했다고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자신의 책(<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적었다. 숙군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이 남로당 활동으로 위기에 처한 박정희를 구해준 일화는 유명하다.

한편,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12연대 연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한 백인엽은 구례지역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민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과정의 최고책임자였다. 2008년 진실화해위는 백인엽을 직접 조사해, 그가 구례지역 민간인학살사건의 가해책임이 있다고 진실규명한 바 있다.

선인학원 사학비리로 악명을 떨친 백선엽의 동생 백인엽의 육군 중장시절 사진(1956년). 한겨레 자료사진

죽다 살아난 백인엽은 교육자로 변신, 이후 인천지역에 선인학원이라는 학교법인을 설립한다. 형과 자신의 이름을 더해 만든 그 사학재단에서 백인엽이 벌인 비리는 상상을 초월했다. 약 5700명의 학생을 정원 외로 부정입학 또는 편입시키고, 졸업장을 팔아 61억원을 받아 챙겼다. 지금 20억원(31평)에 거래되는 서울 강남 은마아파트가 1847만5천원에 분양되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짓는다며 월남 피란민 판자촌을 철거해 원성을 샀고 확장을 이유로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외교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교직원들을 무조건 해고하고,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총 14개, 학생 수만 3만6400여명에 이르던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사학에서 벌어진 비리는 동양 최대였다. 당시 신문은 백인엽을 두고 ‘인천의 무법자’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3월, 업무상 횡령, 배임수재, 건축법과 중기관리법 위반으로 또다시 백인엽이 구속된 이유다. 이후 선인학원에 관선이사로 내려온 이는 형 백선엽이었다. 동생이 단군 이래 최대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에 형이 이사로 온 것이다. 앞서 형 백선엽이 강남대로에 건물을 올린 1994년은 선인학원 소유의 인천대 등이 논란 끝에 국공립화되던 때였다. 두 형제가 관여한 천문학적인 사학비리의 뒷감당을 국가가 나서서 하고 있는 사이, 백선엽은 강남에 대형빌딩을 세운 셈이다.

백선엽의 사촌누이인 증권가의 큰손 백희엽씨도 돈으로 한국사회를 주름 잡았던 인물이다. 1975년 중동건설붐을 타고 건설주가 폭등하면서 증권가에 이름을 날리게 된 백씨는 동아건설을 비롯, 해외 건설주를 대량매집해 거액을 벌었다. 백씨가 한창 명성을 날릴 때에는 단순히 어떤 주식에 관심이 있다는 소문만 나도 관련 주식이 폭등할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 사망한 백씨는 40년대 후반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고 박용학씨의 부인이기도 했다.

천수를 누린 백선엽씨를 마지막으로 치부(致富)의 한 획을 그은 백씨 집안 내력도 한 대가 마무리됐다. 여전히 백씨가 청빈하다고 주장하는 보수세력들은, 미군도 그를 극진히 예우한다며 전쟁영웅으로 칭송한다. 그러나 백씨가 군인이었을 때, 미국의 평가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5·16 쿠데타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은 본국에 보낸 장문의 기밀문서에서 “(백선엽은) 혜택과 진급, 적절한 사면 등의 방법을 통해 자신의 파벌적 역량을 축적했다”며 “백 장군은 다른 참모총장들보다도 더욱 부패한 것으로 유명했다”고 기술한 바 있다.

오승훈 기자 [email protected]

[백선엽 관련 영상] 백선엽 부대가 우리 가족을 죽였다

<2020-07-16> 한겨레

☞기사원문: 백선엽, 참군인 청빈한 삶?…강남역 2000억대 건물 아들명의 소유

목, 2020/07/16- 16:15
3
0

[앵커]
사천에 있는 ‘서택’저수지, 창원 정병산처럼
우리한테 익숙한 지명들이 일본식 지명인 거 알고 계셨습니까?

국토지리정보원이 해마다 일본식 지명을 찾아서 바꾸고 있는데,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지역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중요합니다.

신동식 기자입니다.

[리포트]
사천시 용현면 들판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서택저수지.

서택저수지의 앞글자 서택은 일제의 산미 증산정책으로 연안을 매립하고
쌀을 수탈해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원한 일본인 ‘서택효삼랑’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일제의 잔재인 일본인 이름 대신 이곳의 옛 지명인
‘통양’을 사용하자는 제안이 역사단체에서 제기됐습니다.

강호광 /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장
“일제가 의도했던 식민지배를 계속 간접적으로 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명칭을 바꾸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이름을 바꾼 용현면 봉대산을 지난 2018년 우리의 옛 지명인 안점산으로 바로 잡은
사천시는 조만간 지명위원회를 열어 저수지 이름도 변경할 계획입니다.

진주성 주변은 지난 1932년 일본식 지명인 본정으로 개명됐다,
해방 이후에 본성동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국토정보지리원은 진주 영천강과 창원 무학산, 정병산, 마금산 등
8개 시·군에 12곳을 일본식 지명 정비 대상에 올렸습니다.

각 지자체는 주민과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 지명 변경 여부를 결정할 계획입니다.

김종렬 / 경상남도 토지정보과 주무관
“대부분 다 추진 중이고 고성군은 2회 추경 때
사업비를 확보해서 따로 학술 용역을 8월 달에 발주할 계획입니다 ”

지명 제정과 변경은 각 시군, 경상남도, 국가지명위원회 등
3차례 보고와 심의를 거쳐 국토지리정보원 고시로 확정됩니다.

해방 75년이 지났지만, 일본식 지명을 찾아 잔재를 청산하고
지역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MBC NEWS 신동식입니다.

<2020-07-06> MBC경남 

☞기사원문: 일본식 지명 변경 추진

금, 2020/07/17- 00:12
0
0

0523-1

[유튜브 영상] [바로보기]

오랫동안 한반도 평화를 위해 연구하고 실천했던 정욱식 대표(평화네트워크)는 현재 한반도 위기상황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하노이 노딜로 조롱받는 2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좌초 위기에 처해있다. 비핵화가 무엇인지 대해 남북미는 동상이몽만 있을뿐 구체적인 정의도 목표도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비핵지대를 비핵화의 정의와 목표로 삼고 시민이 나서야 한다.”

이번 방송은 정욱식 대표의 새책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를 가지고 1부 2부로 구성했습니다. 1부는 현재 위기상황의 원인은 무엇인지? 2부는 정욱식 대표가 제안하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솔루션 ‘비핵지대’에 대해 이야기 나눴습니다.

겨레하나의 이하나 정책국장이 함께 나와 남북민간교류를 실천해온 시민단체는 어떻게 이 상황을 바라보는지 이야기 나눴습니다.


☞(도서) 관련기사: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은 불가능할까

정욱식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MD본색》, 《말과 칼》, 《사드의 모든 것》, 《핵과 인간》, 《비핵화의 최후》 등이 있다.

“정욱식은 한국의 대표적 평화분석가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이르는 최선의 길은 ‘한반도 비핵지대’라고 설파하고 있다. 기존의 타부(taboo)를 깨는 창의적이고도 상상력 넘치는 책이다” –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 연세대학교 특임명예교수)

0403-4

[팟빵-바로듣기] [다운로드] 


☞ (7.14)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2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7.07) ‘내역사’ 시즌 5: 14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좌초위기_그 원인과 해법은? 1부’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함께

☞ (6.30) ‘내역사’ 시즌 5: 13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대표적인 7곡을 소개합니다”

☞ (6.25)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2부

☞ (6.23) ‘내역사’ 시즌 5: 12화: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옹진의 민간인 학살과 동키부대”

☞ (6.19) ‘내역사’ 시즌 5: 긴급편성 최근 개관한 일본의 산업유산정보센터 ” 강제동원을 부정하고 왜곡하다”

☞ (6.1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5편 조정래 1부

☞ (6.16) ‘내역사’ 시즌 5: 11화: 조선 정판사 위조 지폐사건의 진실 “정판사 위폐”사건은 조작되었다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금, 2020/07/17- 00:16
0
0

박용규 ㅣ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고려대 사학과 박사

참으로 희한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똑같이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항거하다가 순국했는데, 을미의병 참여자(1895년의 양반 유생)는 서훈하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1894년의 평민, 전봉준 등)는 서훈을 하지 않고 있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나, 이는 사실이다.

‘독립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독립유공자법)에는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순국선열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순국선열에 해당하는 자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된다. 그런데 독립유공 심사위원들은 이 법률에 의거하여 독립유공자를 심사하지 않고 있다.

1962년에 이병도와 신석호(둘 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가 정한 독립유공 내규 즉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에 의거하여 심사하고 있음이 최근 확인됐다. 최근 독립유공 심사위원이라고 밝힌 분이 필자에게 “1895년 을미의병부터라는 내규로 심사하고 있다. 전봉준이 서훈을 받으려면 내규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필자는 황당하였다.

이병도는 자신이 지은 <신수 국사대관>(1961)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란” “폭동”으로 서술했으며, 2차 동학농민혁명의 구호가 “척왜를 부르짖었지만, 그야말로 형식적인 구호에 불과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신석호도 자신이 지은 <중학교 국사>(1960) 교과서에서 동학농민혁명을 “동학당의 난”이라고 서술했다.

그러나 지금의 역사학자는 아무도 이병도와 신석호와 같이 동학농민혁명을 인식하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58년 전에 만든 내규는 수명이 다했기에 이제는 고쳐야 한다.

독립유공자법 내용대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항거하다가 순국한 자는 서훈한다. 서훈 시기는 갑오변란(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때부터이다”로 바꾸면 된다. 왜냐하면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가 통일되어 집필된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한국사 개설서, 독립운동사 분야의 최고 학자(조동걸, 신용하, 김상기 등등)의 저서와 논문에서 갑오변란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첫번째 침략 사건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한국 근현대사학계가 인정하는 정설과 통설을 바탕으로 기술된다. 학계의 의견이 통일되어 모아진 내용이 교과서에 기술된다. 2020년 현재 8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2차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킨 전봉준을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한 총사령관으로, 최시형을 항일 구국 투쟁을 전개하도록 지시한 최고 지도자로 기술하고 있다.

모든 한국사 개설서에 2차 동학농민혁명을 반일 투쟁, 반외세 반침략 민족운동으로 서술하고 있다.

2차 동학농민혁명과 의병운동의 공통점은 적극적인 국권 수호 운동, 항일무장투쟁, 일본의 침탈에 맞선 반침략·반외세 민족운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차이점은 항일 투쟁의 주체가 농민이냐, 양반 유생이냐에서 갈렸다. 의병운동에 참여한 양반은 1962년부터 서훈이 되고, 2차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항일 농민은 지금도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불공평과 모순은 시정되어야 한다.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즉각 독립유공 서훈 내규 개정위원회를 만들어 내규를 개정해야 한다.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이후에 나온 수많은 한말 의병 연구와 동학농민혁명 연구 성과가 내규 개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애국선열의 명예를 진정으로 회복해드려야 하는 역사적 책무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있다. 필자의 주장과 의견이 다른 분은 반론을 펴기를 바란다. 반론을 환영한다.

<2020-07-16> 한겨레

☞기사원문: [기고] 독립유공 서훈 내규 고쳐야 / 박용규

토, 2020/07/18- 00:13
0
0

6·25 참전 장성 박경석 예비역 준장
“군사편찬 개입…스스로 전쟁영웅돼”
”반민족행위 따라 법대로 대우해야”

박경석 장군은 19일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나 “백선엽은 조작된 가짜 영웅이어서 용서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백선엽은 조작된 전쟁영웅입니다.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박경석(88) 예비역 준장은 단호했다. 육사생도 2기 출신으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야전을 두루 거친 노병인 그는 백선엽씨가 전쟁영웅이 아니라고 했다. 19일 오전 대전 유성 자택에서 만난 박 장군은 “백선엽은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없다. 백선엽 가족은 그의 주검을 가족묘지로 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백선엽이 일본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하며 항일독립투사를 체포하는 등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고, 여기에 더해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으로 만든 위선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1사단장이었으니 공적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장군은 국립묘지 안장 대상이죠. 그런데 그의 행적을 보면 장군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없어요.”

그는 “백 장군이 예편 뒤 자청해 30여년 동안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과 채병덕 총참모장 등 일본군 출신 군인들 중심으로 한국전쟁사를 미화했다”며 그 예로 백씨를 전쟁영웅으로 만든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를 들었다.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의 제1사단은 적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328고지~수암산~유학산~741고지의 방어선을 확보하고 다부동~대구 접근로를 방어해 대구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낙동강 전선은 월턴 워커 중장이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 등 8개 사단을 지휘해 워커 라인으로 불렸다. 백선엽의 제1사단은 8개 사단 가운데 하나였는데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했다. 일부를 전체로 과장했다는 얘기다.

박경석 장군이 대대장 시절 당시 강재구 대위 등 중대장, 소대장 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강 대위는 이 사진을 촬영한 다음날 순직했고 이 부대는 재구대대로 명명됐다.

또 개전 초기 전투 상황도 왜곡됐다고 했다. 제1사단은 개성에 주둔했는데 북한군은 개전 5시간 만에 개성을 점령하고 남하했다. 당시 백선엽은 경기도 시흥 보병학교에서 교육받다가 참모의 연락을 받고 즉시 귀대해 부대를 지휘했으나 전차 등 장비에 밀려 후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설명은 다르다. 6월24일은 육군구락부(현 육군회관) 준공 기념 파티가 열린 날로, 춘천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친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을 포함해 전방 사단장은 모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백선엽은 다음날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임진강 남쪽에서 후퇴하던 사단에 합류했다. 그도 사단장으로서 당연히 이 파티에 참석했을 것”이라며 “부대를 비운 이유로 든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 출석을 임의로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술판을 벌이고 있어 남침에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개전 과정에서 북한군의 전차를 몸으로 막고 산화한 것으로 알려진 ‘제1사단 육탄 10용사’는 뒷날 10용사 가운데 몇몇이 북한방송에 출연해 ‘조작’임이 드러나기도 했다. “이 사건 외에 제6사단의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도 조작 무용담이죠. 모두 일제 강점기에 조작된 ‘일본군 육탄 3용사’를 베끼기 해 지휘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그는 “백선엽은 후퇴를 참 잘하는 사단장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여서 ‘내가 등을 보이면 총을 쏘라’며 진두에 서서 전투를 지휘했다는 미담 역시 사실이 아닐 것이다. 백선엽은 미군 군사고문단을 극진히 대접해 맺은 인연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다는 게 정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명예원수(5성 장군) 추대를 막아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일제 앞잡이였던 백씨가 한국군 최초의 명예원수가 될 순 없다’고 앞장서 반대했다.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참전 군 원로들도 그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 결국 무산됐다.

박경석 장군은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장교로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고, 한국전쟁사를 왜곡해 스스로를 영웅화 했다고 주장했다.

진짜 한국전쟁의 영웅은 누구일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1984년 국방부와 육군본부가 선정한 4대 영웅인 김홍일 장군, 김종오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이라고 밝혔다. 김홍일 장군은 개전 초기 국군 패잔병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3일을 버텼고,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은 제6사단장으로 3일 동안 춘천을 방어하며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해 미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다.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사령관으로 전황을 뒤집는 인천상륙작전 등을 이끌었고 워커 장군은 낙동강을 사수했다. 당시 정부는 김홍일, 김종오 장군의 일대기를 펴내고 맥아더와 워커 장군의 다큐멘터리도 제작해 방송했다.

“나는 강재구 당시 대위가 참 군인 정신을 지킨 재구대대의 첫 대대장입니다. 영원한 재구대대장으로서 전사를 왜곡해 진짜를 밀어내고 영웅이 된 가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보수 세력들이 주장하는 백선엽이 간도특설대 시절 반공 투사였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800명 단위의 간도특설대는 중국 팔로군과 전투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닙니다. 전투부대가 아니라 공작부대로 봐야 합니다.” 강재구 대위는 1965년 10월4일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대원이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에 몸을 던져 부대원의 생명을 구하고 본인은 장렬히 산화한 인물이다. 순직 후 1계급 특진이 이뤄졌다.

그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친일·반민족 주의자 문제는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부가 반민족행위자를 조사했잖아요? 그 결과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나쁜 짓 했으면 사후라도 그 죗값을 물어야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여생을 왜곡된 군사를 바로 잡는데 바치겠습니다.”

송인걸 기자 [email protected], 사진 이은덕 사진가 제공

<2020-07-20> 한겨레 

☞기사원문: “백선엽은 조작된 영웅” 참전군인이 말한다 

※관련기사 

시사IN: “일제 앞잡이가 영웅 되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미디어오늘: 경향신문 고정필진 백선엽 비판 칼럼 실리지 않은 이유는

월, 2020/07/20- 19:20
1
0

월전 장우성이 그린 충무공 이순신 표준영정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73년 박정희 정부가 충무공 이순신의 표준영정을 지정할 당시 화가의 친일 전력(前歷)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기록원이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1973년 문화공보부의 문서에 따르면, 표준영정 통일 심사에서 심사위원들은 월전 장우성과 이당 김은호 화백의 이순신 초상화를 놓고 고심하다 월전의 작품을 표준영정으로 결정했다. 경쟁 대상이던 두 화가는 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적 때문에 <친일인명사전>(2009년 발간)에 친일화가로 이름이 올라 있다. 당시 문서를 보면 표준영정 지정 당시에는 이들의 친일 행적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월전 장우성의 작품은 1973년 지정된 이후 47년간 표준영정의 영광을 누려왔다. 하지만 곧 지정해제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국정감사의 지적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조만간 영정동상심의위원회를 소집해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추진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는 지난 6월 문체부에 충무공 표준영정 지정해제를 신청했다. 문체부가 김영주 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영정동상심의위원회 제3차 회의(6월 12일)’ 자료에 따르면 올해 지정해제가 이뤄진 후 내년의 연구용역을 거쳐 2022년 작가 선정과 2023년 표준영정 지정 등의 절차가 보고됐다. 표준영정 해제의 이유로는 ‘복식 오류’와 ‘국정감사에서 친일화가 지적’이 나타나 있다. 지난해 10월 문체부 국정감사에서 김영주 의원은 “충무공의 표준영정을 그린 장우성 화백은 일제를 찬양하는 그림을 다수 그렸고, 조선총독부가 주는 상까지 받은 사실까지 역사 기록에 나와 있다”면서 “항일의 상징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을 친일화가가 그렸다는 자체는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문체부가 김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는 충무공 초상화에 대한 현황이 파악돼 있다. 월전 장우성과 이당 김은호의 작품에는 ‘친일화가 작품’이라는 평가가 들어가 있다. 1973년 정부 문서에 들어가지 않았던 ‘친일’이라는 평가가 2020년 정부 문서에 포함된 것이다.

2023년 표준영정 새로 지정 계획 1973년 5월 문공부 문서를 보면 5월 17일 “사계 권위자 회의를 개최하여 현충사 봉안 영정으로 통일할 것을 합의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현충사 봉안 영정은 월전 장우성이 1953년 제작한 초상화를 말한다. 이날 회의 내용 가운데는 ‘이당본을 택하는 경우’에 대해 “월전본은 현충사에 봉안되어 성역화 이후 많은 국민에게 알려져 있으며 어느 영정보다도 기품이 있어 보이므로 이를 대체하기 어려움”이라고 적혀 있다. 월전 장우성의 초상화가 충무공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이유다. ‘월전본을 택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이당은 월전의 은사로서 월전보다 먼저 충무공 영정을 그려 봉안하였고 그동안 많이 보급되어 있어 이당 측의 강한 반발과 물의가 예상됨”이라고 적혀 있다.

월전 장우성에 앞서 스승인 이당 김은호는 1950년 이순신 초상화를 그렸다. 김은호의 작품은 당시 해남 우수영과 통영 제승당에 있었다. 장우성의 작품은 아산 현충사와 정읍 충열사에 걸려 있었다. 두 친일화가의 문화권력 다툼 때문인지 표준영정의 지정은 당시에 널리 공식화되지 않았다. 문공부 문서에는 “영정 통일에 따르는 사회적 물의를 가급적 줄이고, 새로 제작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이당 김은호의 기존 영정과 진해·광화문·부산의 동상은 존치시키고 기타 조잡한 것은 폐기, 철거함”이라고 적혀 있다. 또 이 문서에는 “영정 통일의 내용은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아니하고, 정부 및 공공단체에 1차 행정적으로 보급하며, 전 국민에게 단계적으로 확대시킴”이라고 적혀 있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1949년 반민특위가 해체됐고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됐다”며 “1973년 표준영정 통일 당시 독재 시대에는 사회적으로 친일문제를 언급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표준영정을 놓고 다퉜던 월전과 이당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나란히 친일화가로 실려 있다. 장우성은 1944년 3월 결전미술전 일본화부에 <항마(降魔)>라는 작품을 응모해 입선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장우성의 1942년작 <부동명왕(不動明王·일본 군국주의의 호국불)>을 근거로, ‘항마’라는 작품에서 악마는 ‘귀축미영’, 즉 연합군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했다. 1943년 6월 16일 <매일신보>에는 조선미술전람회 시상식 기사가 실렸다. 여기에는 “동양화의 장우성 화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銃後)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하여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답사”를 했다고 나와 있다. 장 화백의 후손들은 2009년 서울고법에 민족문제연구소를 상대로 게재금지 가처분 소송을 냈으나 기각됐다.

“표준영정 제도 폐지해야” 견해도 김은호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대표적 친일화가다. 그는 1937년 일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렸다. 귀족이나 관료 부인이 금비녀를 조선군사령부 중장에게 바치는 내용의 그림이다. 김은호는 일왕을 위해 ‘화필보국’·‘회화봉공’하고자 결성한 조선미술가협회에 일본화부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표준영정 지정 작업은 1973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문공부의 1973년 5월 2일 ‘충무공 영정 통일’ 기안 자료에 따르면 영정 통일 사업이란 타자 글자 앞에 “대통령 각하의 지시에 따른”이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다. 이 문서는 사업 추진 경위를 일자별로 요약해 타자로 쳤다. 마지막 부분에는 “1973년 4월 28일 충무공 영정 및 동상 통일 문제 연구를 대통령 각하께서 지시”했다고 손글씨로 덧붙여 놓았다.

4월 28일은 충무공 탄신일이다. 당시 충 남 아산 현충사에서는 해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탄신일 행사가 개최됐다. 당시 <조선일보> 기사에는 “박 대통령은 온양관광호텔에서 있은 리셉션에 참석, ‘현재 전국에서 제작되고 있는 충무공의 영정이 각기 다르므로 이를 통일하고 각지에서 난립되고 있는 동상 건립을 규제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윤주영 문공부 장관에게 지시했다”고 나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일제 충성 혈서’를 쓰는 등의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1973년 표준영정 통일 작업을 지시한 정치지도자부터 초상화를 그린 화가까지 모두 친일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었다. 방학진 기획실장은 “표준영정 제도 자체가 역사적 인물의 영정을 정부가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독재의 잔재”라면서 “영정 해제 이후에는 표준영정 제도 자체를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2020-07-18>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 문서발굴]‘친일파끼리 싸움’이었던 1973년 이순신 표준영정 지정

월, 2020/07/20- 19:49
0
0

일부에선 정보 삭제 요구도 나와… “삭제는 역사 왜곡하라는 것과 마찬가지” 비판

▲ 국립현충원이 누리집 “안장자 참배란”에 지난 15일 안장된 고 백선엽 육군대장에 대해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자’라는 서실을 기재하고 있다. ⓒ 심규상

현충원이 고 백선엽 육군 대장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자’라는 사실을 누리집에 수록하자 관련 정보를 삭제해 달라는 요구가 줄을 잇고 있다. 이 때문에 삭제 요구 자체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이라는 지적도 커지고 있다.

국립현충원 누리집에 수록된 ‘안장자 참배’란에는 지난 15일 안장된 고 백선엽 육군대장에 대해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자’라는 정보를 기재했다.

이는 지난 2018년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고 뒤 늦게 관련 정보를 수록한 것이다. 백선엽과 같이 간도특설대 등에 몸 담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김백일, 김석범, 김홍준, 백홍석, 신응균, 신태영, 신현준, 송석하, 이응준, 이종찬 등의 안장자 참배 정보에도 이 같은 내용이 수록돼 있다.

▲ 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신현준(위)과 김백범(아래)의 관련 정보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실이 수록돼 있다. 지난 2018년 국정감사 지적에 따른 뒤늦은 조치였다. ⓒ 심규상

이들은 독립군을 토벌한 만주국 간도특설대 또는 일본군 간부 등으로 복무했다. 그런데 대전 국립현중원 자유게시판은 지난 17일 오후 부터 ‘백선엽 장군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정보 삭제’ 요구들이 줄을 잇고 있다. 18일 오전 현재 30여건에 이른다.

이 아무개씨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큰 영웅이었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이 밖에 ‘백선엽 장군이 왜 친일파냐’,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리라’는 항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삭제 요구 자체가 사실에 대한 왜곡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광복회 대전지부 김영진 회원은 “항의를 하려면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왜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냐’고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조직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사실을 알리는 건 매우 응당한 조치”라며 “삭제요구는 역사를 왜곡하라는 것과 다름없다”고 덧붙였다.

▲ 대전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인물 중 23명이 장군묘역에 안장돼 있다. 경찰 묘역에는 3명, 장교 묘역에 2명,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1명을 포함하면 모두 29명이다. ⓒ 심규상
▲ 대전국립현충원 자유게시판에는 고 백선엽에 대한 “반민족행위자” 정보삭제를 요구하는 글이 줄을 잇고 있다. 고 백선엽의 안장자 정보에는 지난 2018년 국회의 지적에 따라 ‘대통령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자’라는 정보를 기재했다. ⓒ 심규상

대전국립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또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한 인물 중 백선엽을 포함 23명이 장군묘역에 안장돼 있다. 경찰 묘역에는 3명, 장교 묘역에 2명,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1명이 안장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또는 ‘찬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장성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과 ‘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으로서 사망한 사람’ 조항이 적용됐기 때문이다.

<2020-07-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현충원, 홈페이지에 백선엽 ‘친일반민족행위자’ 정보 수록

월, 2020/07/20- 23:05
0
0

본 신문은 지난 6월 9일 게재한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김세형 칼럼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기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은 국민성금으로 학계를 망라한 180여명의 교수 연구자들이 8년간의 지난한 작업 끝에 이뤄낸 소중한 성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공정성은 학계가 공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법부의 판결에서도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보수 진보 정권을 가리지 않고 정부기관에서도 공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는 데서 그 엄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본 칼럼에서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고 허위의 사실을 서술하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는 등 근거 없는 내용을 기재하여 친일인명사전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신뢰도를 크게 손상하였습니다.”라고 알려왔습니다.

이 보도는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것입니다.

<2020-07-20> 매일경제

☞기사원문: [반론보도] 김세형 칼럼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 관련


반론보도 전(前) 기사

 3종 카드란 일본을 WTO에 제소 재개, 강제징용 기업(일본제철) 재산 강제 매각, 지소미아 파기가 그것이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엉망진창인데 한일 간 싸움이 커지면 그 정치적 파장은 대선 때까지 연장될지도 모른다.

우연인지 각본인지 문재인 정부 들어 강제징용에 관한 대법원 판결로 폭발된 반일(反日)은 그 어떤 것도 이기는 마법의 열쇠다.

반일 프레임은 거짓도 말짱하게 숨겨주는 기게스의 반지다.

윤미향은 정대협·정의연 활동을 하면서 거액의 기부금을 받아 횡령한 게 아니냐는 비판론자를 `친일파`로 몰아 귀신같이 빠져나갔다.

심지어 윤미향을 공격한 이용수 할머니에 대해 “30년 반일 활동을 죽쑤게 만들어 아베에게 갖다 바치는 적폐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걸 보면 기함할 정도다.

이용수 할머니마저 친일이라니….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이를 꾸짖기는커녕 여당 내에서는 그녀에 대한 공격에 함구령을 내리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우리 편이므로 확고하게 실드를 쳐준 것이다.

조국은 작년 7월 일제 불매 운동이 일어나자 동학란 때 죽창가를 SNS에 올려 찬성하는 사람은 애국자, 비판자에겐 이적행위라고 국민을 갈라쳤다.

양정철은 재빨리 “내년 총선 때 반일 프레임으로 가는 게 유리하다”는 분위기를 띄웠다.

실제 4·15 총선에서 나경원은 토착왜구 프레임에 걸려 낙마했고 동작구에서 이긴 판사 출신 이수진은 “현충원에서 친일파 무덤을 파내야 한다”고 했다.

DJ 아들 김홍걸은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이 현충원에 묻혀서는 안 된다고 공명하고 나섰다.

반일=선, 친일=악이란 등식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처럼 하나의 유령이 돼 한국 사회를 배회한다.

이것은 과거의 망령인가 현재 진행형인가.

과연 무엇이 친일이고 토착왜구는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인가. 정색을 하고 한번쯤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일제 36년 식민 지배가 말끔히 정리되지 않는 한 친일 논쟁은 한국 사회에 하나의 숙명이긴 하다.

식민지 시절 일제에 빌붙어 동족을 괴롭힌 행위는 분명히 악이었다. `동족을 괴롭힌` 범위를 어디까지 봐야 하느냐를 놓고 광복 후 지금까지 3차례 정리작업이 있었다.

첫 번째가 1948년 이승만 정부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어 그해 10월 반민특위를 가동해 조사와 처벌을 한 것이다. 그냥 일본과 친하게 지내며 단순 협조한 자는 제외하고 `악랄하게 민족에 해를 끼친 자`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악질 친일파`다. 반민특위는 여기에 해당하는 698명을 골라내 조사했는데, 그 당시 제주도 남로당 무장봉기, 여순반란사건 등으로 온통 나라가 뒤숭숭하자 급하게 마무리하느라 79명만 기소했고 그나마 실형은 10명에 그쳤다.

일제 36년사에 악질 친일이 10명이라니, 이승만 정부의 반민특위는 좀 웃긴다.

그 후 재야의 임종국이란 자가 1989년 1만2000명에 달하는 친일 인명카드를 작성하고 타계했다. 이어 1990년대 초반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민간단체가 친일 청산에 나섰다. 나중에 이름을 민족문제연구소로 바꿔서 2001년 국민모금으로 친일인명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두 번째는 노무현 정부 들어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발족해 선정 작업을 거쳐 2009년 완료했다. 그 결과 반민특위 689명보다 훨씬 많은 1005명을 추려냈다.

기준은 `일정 계급 이상 관리, 헌병 경찰로서 민족 구성원을 감금·고문하는 데 앞장선 행위자`였다.

세 번째로 앞서 시작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마쳤는데 총 4389명 이름을 올린 사건이다.

노무현 정부가 선정한 것보다 4배 이상 많은 숫자다.

그런데 그 기준은 `식민통치기구 일원으로 식민지배 하수인이 된 인물`로 하면서 단순히 일본군 지원, 전시국채 모집, 일본군 전승 축하까지 몽땅 집어넣었다.

일개 시민단체가 정치권의 보수·진보 간 합의도 없이 입맛대로 정하다 보니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졸업하여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한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망라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수진은 그 무덤을 파내자는 식이다. 우리에게 반일 문학 정서의 대명사였던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까지 모조리 친일 명단에 들어가고 말았다. 군인·경찰 출신은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가고 민주당 고위층 할아버지는 을사오적에 버금가는 고위급 관료 출신이었는데도 빠졌다.

21세기 개명천지에 친일, 친미, 친중, 친북 그리고 친영, 친독, 친불이란 무엇인가.

친(親)을 국가 앞에 붙이는 것은 그 국가에 매력을 느끼고 문화 경제 사회 등에 호감을 갖는다는 뜻이다.

작년 7월 일제 상품 불매 운동 즈음 일본에 대한 호감을 가진 응답률은 12%로 사상 최저였다.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폭발로 한국이 가서 도와주고 구호품도 보냈을 적에는 41%로 오른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친일 세력이 있었을지언정 현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 상황에서 일본과 친해서 무슨 득이 얼마나 있겠는가. 문 대통령 딸이 일본으로 대학 진학을 했다고 하여 친일파라 부르는가.

여당 의원 가운데 할아버지들이 일제강점기에 고관대작을 한 족보가 많고 유시민의 부친도 뭔가 한자리 한 것으로 돼 있다. 북한 지배계층 패밀리의 일제 행적은 더 심했다고 한다.

우리 헌법 13조 3항은 친족의 행위를 이유로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고 돼 있다. 즉 연좌제는 위헌이다.

따라서 할아버지,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지배계층에 있었다 하여, 즉 넓게 봐서 친일파였다 해서 지금 아들·손자를 친일파로 분류해선 안 된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에 친일파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이 만든 휴대폰, 현대차는 일본에서 거의 팔리지 않아 대리점도 철수했고 일본 제품도 잘 안 팔린다.

한때 한일의원연맹, 한일경제회의 같은 것도 문재인 정부 들어 모조리 씨가 말랐다. 지금 독일과 프랑스가 한일처럼 살벌하게 지낸다면 그것이 프랑스의 자랑일까?

한일 간 싸움의 격화는 결국 과거의 망령을 불러내는 역사전쟁일 뿐이다.

역사의 꼬임을 풀어내서 화해하고 공동 발전을 도모하는 게 정치 리더의 몫이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과 화해하고 협력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들은 한일 과거사 청산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월드컵을 한일이 공동 주최하고 위안부들에게 일괄 3800만원을 나눠준 적이 있다. 위안부 미해결은 위헌이란 헌재 판결 때문에 박근혜 정부 때는 아베에게 “위안부 해결 없이는 정상회담도 없다”고 압박해 간신히 타결을 본 게 2015년 12월이었다.

문 대통령은 그것을 2017년 12월 돌연 파기했고 정의연은 그런 무드 조성에 앞장섰다. 할머니들의 동의를 얻지 않았다는 흠결을 지적했는데, 그렇다면 그 후 아베와 재합의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했어야 옳다.

작년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강제징용자 배상금을 한일 정부, 양국 기업인, 기타 자금을 합쳐 갈등을 해결하려 했으나 윤미향의 정의연이 반대해 청와대가 `문희상안(案)`을 폐기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은 징용공 판결이나 위안부 합의 파기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한다.

조국·윤미향 사태를 겪으면서 “이념파들이 결속을 위해 뻔한 거짓말로 버팀으로써 한국 사회가 양심과 부끄러움을 모르게 된 게 가장 뼈아픈 손실”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한일이 싸우면 중국·북한만 큰소리친다. 친북·친중은 곧 반일과 등식이 되는 이치다.

주호영 통합당 대표가 문 대통령에게 “왜 (위안부 타결 방치로) 위헌 상태로 가면서 새로운 타결 노력을 않느냐”고 묻자 즉답을 피하고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친일은 친문 네티즌의 댓글처럼 아베 정권을 돕는 행위라고 친다면 일본에 이롭게 하는 세력으로 간주할 수 있겠다.

토착왜구 세력이란 용어는 반일 진영이 과거 한국당 정치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신(新)친일` `21세기 친일`로 불러 재미를 못 보다가 `토착왜구`로 표기한 게 대히트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국 내에서 일본을 돕는 자생적 세력이 생겨났다는 뜻이다. 정말 그런 세력이 있을까.

결론을 내보자.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가 일본에 `이롭게 하고` 있는가?

한국이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찌그러든다면 일본에 이로운 행위가 될 수 있겠다.

한일 간 무한정 싸움을 도모하여 결국 한국 경제가 어렵게 되도록한다면 그는 광의의 친일파가 될 수 있다.

과거와 싸움으로써 선거에서 재미보려고 미래를 희생하는 그 세력이 지금 누구인가? 바로 그 집단이 친일파고, 토착왜구 아니겠는가.

당초 2020.6.9자 기사는 위와 같으며, 현재 기사는 일부수정 및 언론중재위원회의 조정에 따른 조치를 하단에 첨부하여 게시를 유지하고 있다.

☞기사원문: [김세형 칼럼] 한국의 친일파, 토착왜구는 누구인가?

화, 2020/07/21- 03:16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