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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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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admin | 수, 2020/01/29- 00:10

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 기사]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흔적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2020-01-2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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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 백 장군의 현충원 안장 논란에 부쳐… ‘프랑스 국부’는 왜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했나

▲ 다부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서울로 입성하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백선엽 당시 1사단장. ⓒ 다부동 전적기념관 야외 전시 사진

최근 한국전쟁의 ‘영웅’이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기도 한 백선엽(1920~ ) 예비역 대장 관련 뉴스가 뜨겁다. 언론이 올해 100세가 된 백 대장을 불러낸 것은 그가 사망하게 되면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찬반이 극단적으로 엇갈리기 때문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와 ‘한국전쟁 영웅’ 사이

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뒤집은 ‘낙동강 다부동 전투(1950)’를 비롯하여 ‘평양전투(1950)’와 ‘중공군 춘계공세(1951) 저지’ 등 여러 차례 승전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은 백선엽에게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은 충분하다. 그가 이명박 정부 때 우리나라 최초의 ‘명예 원수’로 추대될 뻔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백 전 장군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당시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설립된 만주군 ‘간도특설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이는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인명사전>이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한 이유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국가유공자 자격으로 현충원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서울현충원에 7명, 대전현충원에 4명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기준으로는 서울현충원에 37명, 대전현충원에 28명 등 모두 65명이나 된다.

최근 여권 일부에서 국립현충원 안장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다른 데로 이장해야 한다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는 가운데, 백 전 장군도 국립묘지에 안장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무려 35년이나 식민지 압제를 받아놓고도 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 묻고 기리는 독립국이 ‘대한민국 말고’ 또 어디 있을까.

이 엄청난 모순의 근원은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왜곡되고 굴절된 우리 현대사에 있다. 해방 공간에서 ‘반민특위가 좌절되지 않았더라면’ 하는 역사적 가정을 두고두고 곱씹지 않을 수 없는 회한의 역사다. 반민특위의 좌절로 이들의 반민족행위를 국가에서 용인해 버린 결과 때문에 우리는 민족 정체성의 훼손이라는 비용을 오래도록 치르고 있다.

백선엽에 어른거리는 페탱의 그림자

백선엽을 프랑스 비시 정부의 수반 페탱 원수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전쟁 영웅 백선엽 위에, 1951년 대독 협력, 이른바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의 주역 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페탱은 1916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육군을 패퇴시킨 베르됭(Verdun)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프랑스의 국부’로 칭송받은 이다. 1916년 303일간,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의 육군 사이에 벌어져 양측 전사자가 70만 명이 넘는, ‘인류사상 가장 길고 가장 끔찍한 소모전’ 중 하나로 기록된 베르됭 전투에서 페탱은 프랑스를 구해낸 것이다.

베르됭의 구원자로 1918년 프랑스군 원수로 승진한 페탱은 1940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부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패전이 자명해진 상황에서 휴전협정을 주장한 페탱은 신임 총리가 되어 새 내각을 구성하고 독일에 정식으로 휴전협정을 요구했다. 그는 전쟁보다는 항복이 낫다고 판단했다.

▲ 휴전협정 후 히틀러와 만난 비시정부 수반 페텡 총리(왼쪽) ⓒ 위키백과

그가 맺은 휴전협정은 사실상 항복조약이었다. 협정에 따라 독일 강점기에 페탱이 이끈 비시 정부(1940.6.16~1944.8.25)는 프랑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Vichy France)임을 주장하며 나치 독일에 협력했다.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협력 정책을 수행한’ 비시 정부는 독일이 노동력 징발을 요구하자 18~50세의 모든 남성과 만 21~35세의 모든 독신 여성을 강제 징발할 수 있도록 한 ‘의무노동제’로 기꺼이 협력했다.

베르됭의 구원자, 페탱의 콜라보라시옹(Collaboration)

비시 정부는 또 ‘나치 독일의 적들을 체포·처벌·제거’하는 방식으로 독일에 협력했다. ‘적’은 레지스탕스, 공산주의자, 프리메이슨 단원, 유대인 등이었다. 비시 정부는 기존의 법 절차와 무관하게 레지스탕스를 탄압할 수 있는 사법기구로 ‘특별재판부’를 설치했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독일 군 당국이 처형할 프랑스인 인질 명단을 작성하는 일도 맡았다.

특히 1942년 여름의 협력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다. 비시의 경찰은 프랑스 주둔 독일 친위대와 협약을 맺고 대대적 유대인 검거에 나섰다. 이때 프랑스 경찰에게 붙잡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 7만6000여 명의 프랑스 거주 유대인들 가운데 살아남은 이들은 단 3%에 불과했다.

1944년 8월 25일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수도 파리가 해방되자 자유 프랑스 정부의 드골(de Gaulle) 장군은 파리에 입성했다. 드골은 임시정부의 대통령 자격으로 독일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해방된 지역에서는 나치 협력자들을 정리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의 반역자들에 대한 드골의 방침은 확고했다. 드골이 규정한 민족 반역자란, 자유 박탈을 정당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패배를 악용한 투항주의자들, 프랑스 국민을 ‘악의 길’로 이끈 비시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과 추종자들, 나치의 승리를 위해 협력한 프랑스인들이었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상을 주고 민족 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은 정치적 결정, 주로 정치 활동과 때로는 군사행동 그리고 행정조치 및 언론의 선전 활동 등의 변화무쌍한 형태로 프랑스 민족의 굴욕과 타락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의 박해마저도 미화했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나치 협력자에 대한 단호한 단죄에 나선 드골은 대다수 프랑스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드골은 나치 협력자 문제는 개개인의 과오에 그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재확립, 군국주의자들과 그 공범자들 및 그 사상의 청산, 그리고 민족 반역자 청산 문제라고 보았다.

프랑스의 정의 : 부역자는 단호하게 단죄한다

사법적 숙청으로 약 35만 명의 대독 협력 혐의자 가운데 12만 명 이상이 재판에 넘겨졌다. 그중 약 3만8000명이 유·무기징역이나 금고형을 받았다. 부역자재판소에서 모두 600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정규 법정 밖에서 약식 처형된 이가 9000명이었던 데 비해 합법적으로 처형된 사람은 약 1500명이었다. 공민권 박탈 형만 선고받은 이도 약 5만여 명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대독 협력을 벌였던 언론인과 문인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중형이 선고되었다. 문인과 언론인이 첫 번째 숙청 대상으로 오른 것은 이들이 가장 증오받는 부역자였으므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파리의 한 부역자재판소에서 재판받은 작가·언론인 32명 중 12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그중 7명이 처형될 정도였다.

숙청의 하이라이트는 비시 정부의 핵심지도자였던 국가수반 페탱과 총리 라발(Laval)에 대한 처리였다. 국가적 대독 협력의 주역이었던 라발과 레지스탕스 탄압에 앞장선 민병대 총수 다르낭(Darnand)은 총살되었다. 프랑스의 국민 영웅이었던 페탱은 법정에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던 시기에 소집된 대표들을 통하여 내게 권력을 준 것은 프랑스 국민이었소. 나는 전 생애를 프랑스를 위해 복무했으며 권력을 합법적으로 승계한 셈이오. 4년 동안 프랑스를 지켰으며 프랑스는 가장 비극적인 시기에 내게 의지한 셈입니다. 나는 결코 그것을 일부러 추구한 것이 아니오! 국민적인 열망으로 정부의 수반을 맡게 된 겁니다!

당신들은…… 그러한 시기의 어려움을 알기나 하는 겁니까? 난 매일 나치의 요구에 고민해야 했습니다. 훗날 역사는 나를 올바로 평가할 것이오!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한 것이 나치독일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치부되어 구속되거나 형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소!”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형법 75조(국가반역죄)와 87조(외국에 유리한 정보를 제공한 간첩죄) 위반으로 페탱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배심원들은 반대에 13표, 찬성에 14표를 던졌고 한 표 차로 사형이 결정되었다. 페탱의 사형을 즉시 집행할지, 유예할지는 17대 13으로 유예가 결정되었다. 드골은 사형 결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페탱은 1945년 11월 대서양 되섬의 감옥에 이송되었다. 그는 거기서 5년 8개월간 복역하다가 1951년 7월 23일, 아흔다섯 살을 일기로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페탱은 프랑스의 위인들을 안장하는 팡테옹(Panthéon)도, 유명 장군들이 묻히는 앵발리드(Invalides)도 아닌, 현지에 묻혔다.

독일의 직접 지배 대신 꼭두각시 비시 정부가 프랑스를 통치한 기간은 50개월이었다. 고작 4년 남짓한 콜라보라시옹에 대한 단죄는 35년의 식민지배에도 친일부역자 청산을 포기한 한국의 그것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한국이었다면 아흔 살이 넘은 노인에게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한 게 잔인무도하다는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다.

▲ 페텡은 대서양 연안의 되섬의 요새 감옥 독방에서 복역하다가 사망했고, 거기 묻혔다. ⓒ 위키백과

순서만 다른 ‘부역’과 ‘구국’

앞서 말했듯, 괴뢰정부 수반으로 대독 협력의 총책임자였던 페탱과 일본의 꼭두각시 정부 만주국의 초급 장교였던 백선엽의 무게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페텡은 독일에 간접적으로 협력한 데 그쳤지만, 백선엽은 스스로 만주군 장교가 되는 길을 택했고 중국의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함으로써 일제의 하수인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의 ‘부역’과 ‘구국’은 순서만 다를 뿐이다. 1차대전에서 프랑스를 구해낸 페탱은 2차대전에서 국가반역을 저질렀다. 구국의 공적으로도 단죄는 모면할 수 없었다. 2018년, 페탱을 1차대전 승전 100주년 기념식의 추모 대상에 포함했던 프랑스 정부는 논란이 일자 방침을 철회해야 했다. 적어도 프랑스는 국가반역자를 기리는 것도 용인하지 않은 것이었다.

▲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1년 4월 다부리 주민들이 세웠던 백선엽 장군 호국구민비.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옮겨져 있다. ⓒ 장호철
▲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적기념비. 최근 현충원 안장이 논란이 되자, 백 장군 가족들은 장지로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검토했으나 최근 본인의 뜻대로 대전현충원 안장을 희망한다고 밝혔다. ⓒ 장호철

백선엽이 친일부역을 끝낸 것은 일본의 패망 덕분이었다. 일본이 패전국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친일부역은 더 크고 깊어질 수도 있었다. 독립 조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복만 갈아입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구국의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이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것은 1941년이었다. 5년 후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한국군 소위로 재임관한 그는 서른 살이 되던 1950년, 별을 달고 장군이 되었다.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예편한 그는 뒷날 ‘명예 원수’로 추대될 뻔했다. 적의 군인이 되어 조국을 겨누었던 백선엽은 조국에 돌아와서도 군인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렸다.

과연 백선엽 전 대장은 ‘한국전쟁 영웅’의 이름으로, 11명에서 65명에 이르는 친일부역자들이 묻힌 국립현충원에 잠들 수 있을까? 아니면 비록 지연되긴 했지만, 과거사 청산으로 현충원에서 지워지는 친일부역자들과 함께 잊힌 이름이 될까? 분명한 것은, 친일부역자의 현충원 안장을 두고 ‘역사 바로 세우기’와 ‘부관참시’로 팽팽하게 맞선 이 해묵은 논의가 어떻게 귀결되는가는 우리 역사와 국가 정체성을 확인하는 가늠자가 되리라는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2020-06-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국 백선엽의 경우, 프랑스 페탱의 경우

화, 2020/06/02-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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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친일파, 민간인 학살범, 기회주의자의 길

▲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인 백선엽 예비역 육군 대장 ⓒ 유성호

친일 청산의 길은 아직 멀고 험하다. 올해 만 100세인 친일파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안장을 놓고 논란이 생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제국 2중대인 만주국 중위였던 백선엽이 사망할 경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래통합당에서 나오고 있다.

이번 논란이 촉발된 배경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현충원을 차지한 친일파 무덤들의 이장과 관련해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국립묘지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또한 친일파 백선엽의 거동이 최근 불편해진 상태에서, 국가보훈처 직원이 지난 13일 백선엽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면서 ‘묘역이 꽉 찬 서울현충원 대신 대전현충원에 모셔지게 되겠지만, 국립묘지법이 개정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백선엽은 1920년 11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했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0년(20세)에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일명 봉천군관학교)에 입학,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했다.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민족반역의 길이었다. 그의 나라는 만주국, 더 나아가 대일본제국이었다.

백선엽의 나라, 백선엽의 활동

1945년(25세) 8월 15일, ‘백선엽의 나라’는 패망했다. 당시 그는 중위였다. 이때까지 장교로 복무한 기간이 2년 4개월이고 나이도 많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친일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매우 진한 방법으로 친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가 복무한 부대 중 하나는 간도특설대다. 한국인 출신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쟁군에 맞서 싸우는 부대였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활동한 이 부대는 한국인을 이용해 한국인을 억압할 목적으로 등장했다. 한국인 군인들을 앞세워 만주 지역 한국인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일종의 이이제이를 위한 부대였다.

2008년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한인을 이용하여 한인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방식은 일제가 즐겨 사용했던 방식으로 간도특설대 역시 이 범주 안에 있다”며 “간도특설대는 1938년 설립 이후 약 5년간 간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를 색출하거나 항일 무장단체를 탄압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설명한다.

간도특설대는 명칭상으로는 만주 지역으로 활동이 국한됐지만, 이들의 활동은 중국 내륙으로도 광범위하게 확장됐다. 베이징 주변 지역으로까지 범위를 넓힌 이 부대는 잔인한 한국인 이미지를 현지인들에게 심어주었다. 한국인이 주축이라고 알려진 이 부대가 항일부대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던 것. 그러니 현지인들이 한민족을 어떻게 인식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간도특설대는 설립부터 대민 활동에 주력하였다. 직접 마을로 가서 선전 활동을 전개하거나 그것이 미진할 때는 그 마을을 소탕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간도특설대가 그 활동 영역을 열하성과 하북성으로 옮기면서 그들의 대민 활동은 정점에 달하였다.

특히 한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활약을 펼쳤다.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한 예는 한인들로 하여금 일제가 간도특설대를 설립한 목적에도 부합하는 행동들이었다. 가장 악랄한 방법은 한인들이 쓴다는 것을 일반인에게 인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논란의 중심, 미래통합당

항일 부대와의 전투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까지 저지른 간도특설대. 이 부대에서 백선엽은 장교였다. 현충원 안장은커녕 뒤늦게라도 책임을 단단히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를 동작동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니,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논란의 중심에 미래통합당이 있다. 이들은 백선엽을 친일파가 아닌 민족 원로로 받들려 하고 있다. 그가 사망할 경우 그를 동작동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지난 5월 28일 보훈처를 직접 찾아 압박을 가했다. 이 자리에서 주호영 원내대표는 “6·25 전쟁 영웅의 공적에 걸맞은 예우에 부족함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달라”며 “여당 눈치를 본다든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 주장 때문에 명예가 손상되지 않게 예우에 신경 써달라”고 압박했다.

하태경 의원도 같은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영웅을 현충원 안장 못 하게 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다가 산화한 모든 군인들, 현충원 자격 없다는 것과 같다”며 “지금 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호국영령을 모두 파묘하자는 주장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도 그날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백선엽 장군을 서울현충원에 모실 수 없다는 문재인 정부 국가보훈처의 넋 나간 조치는 당장 취소되어야 마땅”하다며 “서울현충원에 자리가 부족해도, 없는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모시는 게 나라다운 책무이고 예의이고 품격”이라고 주장했다.

백선엽과 민간인 학살

▲ 2019년 7월 3일 항일독립선열선양단체연합 회원들이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김진호 회장의 사퇴와 백선엽 장군의 훈장박탈 등을 주장하고 있다. ⓒ 이희훈

일제 패망 직후인 1945년 9월 평안도로 귀향한 백선엽은 그해 12월 38선을 넘은 뒤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해 친미 군인의 길을 걸었다. 1946년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그는 1948년 정부 수립 뒤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숙군 작업을 벌였다. 분단반대나 친일 청산 같은 민족주의적 흐름을 좌익이나 빨갱이로 규정하고 이를 육군에서 배제하는 작업을 지휘한 것이다.

1949년 7월 제5사단장으로 부임한 백선엽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준장으로 진급하고 이듬해 4월 소장 진급과 함께 제1군단장 취임에 성공했다. 1952년 1월에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9월에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취임했다.

1953년 1월에는 국군 최초로 대장 진급에도 성공했다. 이처럼 해방 뒤의 백선엽은 눈부신 ‘성공’의 길을 걸어나갔다.

미래통합당과 보수세력은 백선엽이 북한의 침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대한민국을 지켰다고 하려면 대한민국 국민을 지켰어야 한다. 그런데 백선엽은 오히려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했다.

백선엽은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었다. 이 부대는 민간인 학살을 저지른 범죄 집단이었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에서 민간인을 약탈하고 특히 여성들에게 야만적 범죄를 저질렀다. 빨치산 토벌을 빌미로 국민들을 겁주는 역할을 맡은 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는 육본 정보국의 지휘를 받았다. 백선엽이 정보국장일 때 이 부대의 만행이 일어났다.

이런 일은 한국전쟁 중에도 있었다. 백선엽이 이끄는 특수부대인 백야사도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 역시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이 아무나 마구 죽였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 거둔 ‘전과’에서도 드러난다. 이들은 4000명의 빨치산을 상대로 작전을 개시했다. 그런데 사살한 이들은 총 6600명이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이 몸담은 간도특설대는 항일 군대를 잡겠다며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이런 행동 패턴이 백선엽의 해방 이후 행적에서도 고스란히 되풀이됐다.

소신 없는 기회주의자

대한민국을 위해 싸우지 않은 사람이 대한민국 땅에서 전공을 많이 세웠다면, 그 전공은 대체 어떤 전공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을 전쟁 영웅으로 치켜세우며 서울현충원에 꼭 모셔달라고 당부하는 미래통합당의 역사 인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파이면서 민간인 학살 주범인 백선엽. 그를 현충원에 안장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 있다. 그는 소신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백선엽은 신속했다. 해방 다음 달 신속히 귀향한 그는 곧바로 여운형이 세운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에 가담,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 합세했다. 여기서 그는 치안대장 활동을 했다. 또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다가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에 합세했다. 그런 뒤 이승만 정권에 가담해 민족분단 및 친일 청산을 훼방하는 대열에 함께했다.

이런 인물을 서울현충원에 모시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 것을 권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전현충원에 안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가 존경받으며 편안히 누워 있을 곳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020-06-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백선엽의 민낯, 대한민국에 그가 존경받으며 누울 곳은 없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팩트체크] 국립묘지 논란 백선엽, 친일·반민족행적 반성했나? 

☞한국일보: 임태훈 소장 “백선엽, 친일 사죄 않으면 日 야스쿠니 신사로 가야” 

☞미디어오늘: 독립군 토벌하고 반성 없는 백선엽이 현충원 안장?

화, 2020/06/02-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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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가기] [효창몰]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원의 제안 및 기획으로 시작된 ‘효창독립커피’, 깨어있는 시민의 ‘착한 소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친일과거청산’을 위한 운동이 결합하여 탄생했습니다. 커피 한 잔, 독립운동가의 정신을 기억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하루가 됩니다.

화, 2020/06/0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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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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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웅 광복회장을 스튜디오에 초대해 새로워진 광복회의 모습과 사업에 대해 이야기나눴습니다. 특히 역사부정행위과 관련된 현안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광복회 활동을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수, 2020/06/0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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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패망 몇 개월 전부터 우리의 독립투쟁 단체들은 해방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미국의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체들은 머지않아 맞이할 해방과 함께 추진해야 될 거사인 신생조국 건설의 설계도를 짰다. 그것이 바로 ‘건국 강령’ 이었다. 그 독립투쟁 단체들을 대별하면 넷이었다. 김구 세력, 이승만 세력, 박헌영 세력, 김일성 세력. 그런데 이승만을 제외한 세 단체의 건국 강령에는 신기한 우연 일치가 생겼다. 각기 멀리 떨어져 의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강령의 첫번째, 두번째가 꼭 거짓말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첫째, 모든 친일파를 처단한다. 둘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런 우연 일치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두 가지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민족적 열망이었고, 전 국민적 요구였던 것이다. 그 열망과 요구에 명확한 응답을 하지 않고는 새 조국의 정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우연 일치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분단상황의 불행 속에서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당연한 순서로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그 역사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민족정기의 샘이고, 민족 미래의 등불인 반민특위는 친일경찰들이 휘두른 폭력 난동으로 처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 폭거를 방조했다. 그는 유일하게 건국 강령을 제시하지 않았고, 그의 정권은 각 분야 친일파들의 옹위와 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부터 친일파들은 맘껏 득세하며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이 땅은 비양심과 무질서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다시 곱씹어야 한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 참된 민주주의 세상을 원한다면 부정과 불의의 뿌리를 깨끗이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확실한 길은 이제라도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명기된 죄상에 따라 냉철하게 단죄해야 한다. 또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프랑스와 독일과 이스라엘의 냉엄함을 보라. 우리가 얼마나 직무유기를 해왔는지 반민족적 범죄에 공소시효란 없다.

<2020-06-06> 광복회보 

☞기사원문: [기고] 조정래,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금, 2020/06/05-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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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아들 김정륙씨, 경찰청장 사과 요구
“이승만 대통령, 1949년 5월 담판 뒤 물리력 행사 결심”
“반민특위 해체로 친일청산 좌절…민족의 비극”
“경찰, 70년 지난 이제라도 스스로 치욕의 역사 청산해야”
유족들, 6일 오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인간 띠잇기’ 행사

반민특위 본부 전경.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9년 5월 말쯤이었나. 반민특위 관사로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저녁에 내가 갈 거니까 그리 알아라’. 이승만 박사였어요.”

김정륙(85)씨는 71년 전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담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식구들을 전부 부르더니 ‘나오라고 말할 때까지는 각자 방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더군요. 잠시 후 경무대 경호팀 수십명이 집을 둘러싸더니 집 구석구석을 뒤지고 겁을 주는데….”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반민특위 해체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제헌헌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948년 10월 국회가 설치한 ‘친일 청산’ 조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재판권까지 가진 특별 헌법기구였다. 초기에는 박흥식, 이광수 등 1천여명의 친일 인사를 조사하며 성과를 올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탄압으로 1년 만인 이듬해 10월 완전히 해체됐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이 쓰던 도장.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씨의 부친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이(승만) 박사가 반민특위 활동은 살살 적당히 하고, 위원회 임기가 끝나면 내각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더군요.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하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요. 그렇게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김씨가 떠올린 담판은 이 대통령의 ‘최후통첩’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처음부터 못마땅해했다. 당시 정부 곳곳의 요직을 차지했던 친일파 청산 활동을 시시때때로 방해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을 당시 내무장관이 자신의 집에 직접 숨길 정도로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김씨는 “부친과의 담판에 실패한 이 대통령이 회유에서 무력행사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담판 일주일 뒤인 1949년 6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을 중심으로 한 경찰 수십명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했다. 당시 경찰은 모든 조사 서류를 압수했고, 30명이 넘는 특위 위원을 현장에서 때리고 끌고 가 고문까지 했다.

사실상 특위를 강제 해산한 ‘6·6 특위 습격 사건’에 앞서 반민특위를 지지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0여명이 연달아 구속되는 ‘프락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두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치명상을 입고 내부 갈등까지 생겼다. 반민법의 공소시효가 1950년 6월 20일에서 그해(1949년) 8월 31일로 줄어드는 법까지 개정되자 특위는 완전한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당시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경찰이 70여년이 흐른 지금이라도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건을 그냥 넘기면 치욕스러운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남게될 것”이라면서 “경찰청장이 직접 사과함으로써 스스로 마무리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반민특위 초기부터 탄압한 이승만, 정권 차원 테러까지 시도

이 대통령은 친일 인사 청산을 앞장서서 반대하며 특위 활동을 초기부터 억눌렀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되기도 전인 그해 9월 3일, 이 대통령은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다.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본격적으로 친일파 조사와 체포가 시작됐고 친일경찰 노덕술, 김태석 등 주요 인물의 체포도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특별조사위원회 행동이 지나쳐 국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 “경찰 기술로 지하공작과 반란 음모를 예방해야 하는데 (특위) 조사위원들은 이런 생각이 꿈에도 없다” 등 여러 차례 특위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급기야 특위 요원을 상대로 한 암살 시도까지 벌어졌다. 수도경찰청 총감이던 노덕술과 서울시경 최난수, 중부서장 박경림 등은 테러 전문가 백민태를 고용해 범행 자금을 건네고 경찰의 권총, 실탄, 수류탄까지 줬다. 자금은 반민특위 ‘체포 1호’였던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이 댔다.

하지만 ‘백색 테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민태가 평소 존경하던 인물이 테러 대상에 포함된 것을 보고 당시 국회 중진이던 조헌영·김준연 의원에게 전말을 다 털어놓은 것이다. 사건을 꾸민 자들은 1949년 2월 기소됐지만, 법원은 실제 테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련자들을 풀어줬다.

노덕술(오른쪽 등만 보임), 김연수, 이풍한 등이 법정에 끌려온 모습.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씨는 당시 반민특위 내부에 스파이까지 침투했다고 증언했다. 친일 청산에 대한 정권 차원의 탄압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위 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한 내용이 일선에 지시가 이뤄지기도 전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귀에 먼저 들어갔어요. 친일파들을 잡으러 가면 이미 다 숨어버린 경우가 허다했어요. 친일자 누구 하나 손쉽게 체포한 적이 없었어요.”

동료들을 배신하도록 한 것은 결국 권력욕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그들은 유독 장관 등 감투에 집착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지목한 A 의원은 반민특위 해산 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광복회 “올해 반드시 경찰청장 사과해야”…국회도 사과 요구 목소리 보태

독립운동가 단체인 광복회는 올해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에 대한 경찰청장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71년을 맞는 6일 오후에는 광복회 회원과 당시 특위 관계자 유족들이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 모여 ‘인간 띠 잇기’ 행사를 연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충일인 6월 6일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날이다”라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했던 잘못에 대해 경찰청장이 국민과 역사, 독립유공자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민특위 터 기념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반민특위가 제헌 국회의 특별기구였던 점을 고려하면, 국회는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할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하다.

경찰 출신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은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백주에 국가기관이 테러 수준의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일을 계기로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며 “이것은 명백한 경찰의 과오다. 경찰이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취지의 입장 발표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광복회와 독립 유공자들의 사과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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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김태헌 기자

<2020-06-06> 노컷뉴스

☞기사원문: [인터뷰]”반민특위 무너뜨린 경찰, 국민·유족 앞에 사과해야”

일, 2020/06/07- 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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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반민족행위자·국가폭력 관련자 묘 이장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김창룡 묘에서 파묘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친일파 김창룡을 국립묘지에서 찍어내라.”
“광주학살 원흉들의 묘를 현충원에서 파묘하라.”

6일 오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 친일군인 김창룡의 묘 앞에서 100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구호를 외쳤다. 삽 모형을 든 일부 시민은 욱일기를 김창룡의 묘를 덮은 뒤 묘를 파헤치는 ‘파묘 퍼포먼스’도 펼쳤다. 그러고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라고 쓰인 빨간 풍선을 묘비에 매달았다. 이 곳을 찾는 모든 시민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다.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충청5.1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시민대회에는 주최 단체 회원들 외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아산지부, 평화재향군인회 회원 등이 참석해 당초 예상보다 많은 100여 명이 참석했다.

기자회견장 뒤에는 이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30명과 국가폭력 관련자 16명, 군사반란 가담자 20명 등 66명의 명단이 내걸렸다. 이들은 이러한 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및 군사반란 가담자들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20여 년째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대로 현충원에 묻혀 있다면서 최근 무르익고 있는 ‘국립묘지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가장 먼저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이 발언에 나섰다. 박 지부장은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김창룡과 같은 친일반민족 행위자들과 반인륜적 행위자들이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과 함께 국립현충원에 누워 있는 이 황당하고 참담함에 묘 이장을 줄기차게 외쳐왔다”며 “그러나 촛불혁명으로 적폐청산이 절대적 과업이 된 이 순간까지도 우리는 분통만 터트리고 있다.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넘겨주어서는 안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라며 “21대 국회에서 관련법 제·개정을 통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현충원에서 이장시키고, 친일 역사 왜곡을 주장하는 세력들도 법으로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윤석경 광복회 대전지부장이 나섰다. 그는 “국립묘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분들이 돌아가신 후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모시는 영예로운 곳이고 민족의 성지로 모셔져야 한다”라며 “그런데 이곳 대전현충원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장군 묘역과 독립유공자 묘역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이게 말이 되는가,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가장 악질적인 밀정이 어떻게 독립운동가 옆에 누워있을 수 있느냐”고 개탄했다.

김회신 국가공무원노동조합 사회공공특별위원장도 발언에 나섰다. 그는 “민족의 얼이 서린 이곳, 이 땅의 민중들이 그 뜻을 본받고 좆아야할 혼들이 잠들어야 할 이곳 현충원에 독립지사를 잡아 죽이고, 민중을 수탈하고 억압했던 일제 앞잡이들, 민주주의를 짓밟고 민중을 학살했던 망령들이 안장되어 있다”며 “우리 아이들 얼굴을 똑바로 바라 볼 수 없을 만큼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너무 너무 늦었다. 민족의 화합, 평화와 통일, 인류공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반민족·반민중·반민주 망령들을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역사의 발목을 잡는 망령들과 그 망령에 기생하는 껍데기들을 쓸어내야 한다”며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이곳 현충원에서 몰아내는 것이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의 얼을 바르게 하는 상징적 출발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대식 대전민중의힘 상임대표도 “이곳 국립묘지에는 아직도 적폐체제의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애국자와 매국노가 국립묘지에 같이 누워있다는 것은 마치 사람과 짐승을 한 무덤에 두는 것이나 다름없는 치욕스러운 일이며, 애국자들을 모욕하는 매국적 행위”라면서 “우리는 4.15총선을 친일청산과 제2의 촛불항쟁으로 규정하고 친일파들을 심판했다. 그런 의미에서 21대 국회는 애국 국회, 친일청산 국회가 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 뒤에 걸린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 30명 명단”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기자회견장 뒤에 걸린 현수막으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국가폭력 관련자 16명 및 군사반란 가담자 20 명 명단.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들은 이날 발표한 성명을 통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군사반란 가담자 등 부적절한 안장자의 묘를 국립묘지 밖으로 당장 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현충원은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시고 희생하신 애국지사와 순국선열, 호국영령들을 모셔야 하는 곳”이라며 “그런데 일본군 헌병 오장 출신으로 이승만 정권의 비호 아래 백범 김구 선생 암살의 배후이며, 한국전쟁 전후로 1백만 민간인 학살을 주도한 김창룡이란 자가 대전 시민들도 모르게 1998년 2월 13일 새벽에 숨어들어와 안식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어디 그뿐인가, 쓰레기만도 못한 친일반민족 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군사반란 가담자 등 이곳에서 안식을 취하기엔 너무도 부적절한 자 66명이 독립유공자, 국가유공자의 탈을 쓰고 이곳에서 국가의 보호 아래 잠들어 있다”면서 “대전 시민들은 이와 같은 부적절한 자들을 이장할 수 있도록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라는 요구를 지난 2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촉구하였으나 정부와 국회는 우리의 외침을 거부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붓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또 “더구나 대전현충원을 관리하는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군을 토벌하고 인근 주민들을 학살, 고문, 강간 등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반인륜적 행동을 하였던 간도특설대 출신 백선엽이 사후에 이곳에 안장할 수 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면서 “이에 우리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등 국립묘지에 있어서는 안 될 부적절한 자들의 묘를 당장 이전하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김창룡, 소준열, 안현태 등 유족들을 향해 “진정 고인을 위한다면 하루빨리 현충원에서 그 묘를 이장하라”고 촉구하고, 정부와 국회를 향해서는 “하루속히 국립묘지법을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친일군인 김창룡의 묘 앞에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표지판을 세우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12.12쿠데타 주역이면서 5.18진압 책임자인 유학성의 묘에서 시민들이 파묘 퍼모먼스를 하고 있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민족문제연구소대전지부와 국가공원노동조합, 광복회대전지부, 대전추청5.8민주유공자회, 대전민중의힘, 대전청년회 등은 6일 오전 제65회 현충일을 맞아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국가폭력 관련자 등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행사를 모두 마치고 애국지사 묘역의 곽낙원 지사(김구 선생의 모친) 묘를 찾아 묵념을 하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기자회견을 마친 이들은 장군1묘역 가장 높은 단에 위치한 유학성(12·12쿠데타 주역, 5.18 광주민주항쟁 때 진압군 측 주요 책임자)의 묘로 이동했다. 묘지에 도착한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한 회원은 “우리 광주시민들을 죽인 자다. 이런 자가 국가유공자라는 탈을 쓰고 뻔뻔하게 현충원에 누워있다니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묘지 앞에 놓은 조화를 걷어찼다. 또한 일부 시민들은 묘지를 발로 밟기도 하고,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들은 또 한 단 아래에 있는 김창룡(친일군인이며 민간인학살의 주범, 김구 선생 암살범의 배후로 지목됨)의 묘로 이동했다. 한 시민은 “이 자한테 우리 할아버지가 죽었다. 독립운동 했다는 이유로…”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울분을 터트렸다.

시민들은 김창룡의 묘에 ‘반민족행위자 김창룡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하라’고 쓰인 현수막을 김창룡의 묘에 씌웠다. 또한 ‘욱일기’를 덮은 뒤 “김창룡의 국적이 회복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커다란 삽모형을 들고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펼치고, 묘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쓰인 빨간 풍선을 매달았다. 묘비 앞에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알리는 표지판도 세웠다.

그러고는 “친일파 김창룡을 현충원에서 찍어내자”, “역사왜곡 친일망령 현충원에서 몰아내자”, “21대 국회는 국립묘지법 개정하라”, “친일파 파묘하고 친일적폐 청산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한편, 이날 시민대회의 마지막은 애국지사 3묘역에 모셔져 있는 곽낙원(김구 선생 모친) 지사와 김인(김구 선생 장남) 선생 묘소를 참배하고 헌화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2020-06-0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가 국립묘지에 떡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일, 2020/06/07-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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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등 현충일 맞아 성명

김원웅 광복회장이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1949년 6월 6일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날로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며 경찰청장의 공개 사과를 촉구했다. 2020.6.4/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시지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광주전남지부, 진정한광복을바라는시민의모임 등은 6일 성명서를 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친일파 청산을 위해 ‘6·6반민특위 습격사건’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은 1949년 6월6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주한 친일경찰 40여명이 친일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을 습격해 반민특위 위원을 무차별 연행 및 폭행한 사건이다.

이 일로 반민특위는 급격히 와해돼 1949년 9월 해체 수순을 밟았고 친일 인물을 반민특위 위원장에 임명하고 1949년 말에 활동을 종료하게 됐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은 “반민특위 습격사건을 계기로 친일파 처단은 유야무야됐다. 14일후인 그해 6월20일부터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체포되면서 의회민주주의는 시련에 부딪혔다. 26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자나깨나 민족통일을 열망하던 백범 김구선생이 육군 장교에 의해 백주에 살해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결국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는 원인이 된 결정적인 날이 6월6일이다.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민족정기를 짓밟고 폭란을 일으킨 지 71년이 지난 지금. 이제부터라도 친일파 청산을 못한 역사의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광복회가 6일 오후 3시 6·6폭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 잇기 행사를 적극 지지하며 연대를 표명한다”고 덧붙였다.

<2020-06-06> 뉴스1

☞기사원문: “친일청산 위해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제대로 교육해야”


▲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습격 폭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사진 광복회 제공)

[시사뉴스 강민재 기자] 광복회(회장 김원웅)는 6일 오후 3시, 1949년 6월 6일 당시 친일경찰이 자행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습격 폭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반민특위 유족과 광복회원, 일반시민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서울 중부경찰서를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를 가졌다.

주요내빈 소개에 이어 식전행사로 중부경찰서 앞 가로수 리본달기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는 국민의례, 김원웅 광복회장의 대회사,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의 인사말,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등 시민단체장의 연대사, 광복회 대학생 서포터즈의 구호제창, 폐회 순으로 마무리됐다.

이날 행사에는 김원웅 광복회장과 임우철 애국지사(102세), 김정육 광복회 사무총장(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장남)을 포함한 반민특위 유족들, 송영길 국회의원, 장영달 광복회 복지증진위원장을 비롯하여 오장섭 전 건설부장관,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양조훈 제주 4·3평화재단 이사장, 송승문 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 이요상 동학실천 상임대표, 정원양 4·19민주혁명회 회장, 최형호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서울시지부장, 김연경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 박용현 한국전쟁유족회 회장, 반민특위 상기 산작약꽃 배지 재능기부자 김운성· 김서경 부부 작가 등이 참여했다.

김 회장은 “71년 전 오늘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폭란의 날’로써 가슴 아프고 슬픈 날이었다. 이 날로부터 이 나라는 ‘친일파의, 친일파에 의한,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며, “광복회는 올해부터 이 날을 ‘민족정기가 짓밟힌 날’로 정하고, 매년 이 날을 애상(哀傷)의 날로 기억하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이어 “경찰에게 총칼을 준 것은 국민을 지키라고 준 것이지만, 경찰은 민족반역자의 더러운 탐욕을 지킨 폭란의 범죄 집단이 되었다”고 분노하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되었던 잘못에 대하여, 경찰청장은 국민과 역사, 그리고 독립유공자들에게 사과하길 요구한다”고 경찰청장의 공개사과를 촉구했다.

이날 송영길 의원은 “오늘 열리는 인간띠잇기 행사로 정의가 바로서는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시작이 될 것이다.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 바쳐 싸운 선열들의 투쟁을 잊지 않고 우리 후세대에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장영달 광복회 복지증진위원장(전 국회 국방위원장)은 “독립운동가의 DNA를 물려받은 광복회가 국가정통성을 바로 세우기 위해 친일청산에 앞장서는데 대해 힘찬 박수를 보낸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은 “한국 현대정치사의 모든 부패와 부정의 뿌리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킨 데서 비롯됐다. 물론, 그 명령자는 이승만이지만 친일경찰들이 대세를 이루어 반민특위를 무장 습격한 경찰의 수치스런 과거를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며, “아직도 과연 경찰이 과거의 미망에서 깨어났는지 각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이날 모든 참석자들이 추모리본과 함께 패용한 산작약꽃 배지는 광복회가 반민특위 습격일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분노와 슬픔’의 꽃말을 지닌 6월에 깊은 산속에 피는 하얀 산작약 꽃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했다.

한편 올해 첫 번째 반민특위 습격일 상기하는 행사를 개최한 광복회는 앞으로 매년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2020-06-07> 시사뉴스

☞기사원문: 광복회, ‘6.6폭란’ 상기 인간띠잇기 행사 열어…“경찰청장은 국민과 역사 앞에 사과하라” 

※관련기사 

☞뉴시스: “친일 청산 막은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진실 알려야”

☞서울뉴스통신: 광복회, 서울 중부경찰서 에워싸는 ‘인간띠잇기 행사’ 가져

☞KBS: “6·6 폭란, 친일경찰 반민특위 습격한 날”

일, 2020/06/0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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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경석 육군 예비역 준장 “프랑스였다면 백선엽의 행동은 극형감”

▲ 박경석 육군 예비역 준장. (자료사진) ⓒ 권우성

“프랑스였다면 그는 극형감이다.”

박경석(88) 장군(육군 예비역 준장)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백선엽(101) 장군(육군 예비역 대장)의 사후 현충원 안장과 관련된 논란에 “현행법이 그러니 (현충원에 안장되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후과가 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9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라며 “일본군대 출신이라고 해서 다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순 없지 않겠나”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내가 백선엽 가족이라면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겠다”라며 “그게 백선엽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낫다. 이후 벌어질 사태를 어떻게 견디겠나”라고 덧붙였다. 민주당 일각의 국립묘지법 개정 움직임과 관련해선 “법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라며 “아무리 후사에 공적을 세웠더라도 조국을 배반한 것이 입증되면 프랑스에선 극형이다”라고 말했다.

최근 백 장군을 이순신·홍범도 장군에 비유한 원희룡 제주도지사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를 향해선 다소 거친 표현을 사용하며 비판하기도 했다.

“미친X들이다. 무식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어떻게 대한민국 독립을 막으려던 사람을 (일본과 싸운) 이순신·홍범도와 비교할 수 있나. 기가 막히다. 우파든 좌파든 명백한 진실을 봐야 한다.”

박 장군은 이른바 ‘육사생도 2기’ 출신이다. 육사생도 2기는 1950년 육사 입학 후 한 달도 안 돼 6.25전쟁이 터져, 임관도 하지 못한 채 전장에 투입된 이들을 말한다. 그들은 한동안 육사에서 정식 기수로 취급되지 못했다. 육사생도 2기 상당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박 장군도 전투 중 수류탄 파편에 맞아 몸의 왼편을 크게 다쳤다. 그때 왼쪽 귀의 고막을 잃기도 했다.

1980년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이었던 박 장군은 당시엔 ‘광주사태’로 불렸던 5.18민주화운동 직후 무공훈장 심사를 거부했다가 결국 군복을 벗었다. 전역 후 한국군사평론가협회를 만들어 회장으로 긴 시간 활동했다.

박 장군은 이명박(MB) 정부에서 추진했던 ‘백선엽 초대 명예원수 추대’를 강력히 비판해 결국 이를 무산시킨 이력도 갖고 있다. 그는 “(백 장군이) 아무리 나의 옛 상사라 하더라도 그를 국가보다 우위에 둘 순 없다”라며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래는 박 장군과 나눈 대화를 정리한 내용이다.

MB정부가 추진한 백선엽 초대 명예원수 막은 이유

▲ 박경석 육군 예비역 준장. (자료사진) ⓒ 권우성

– 최근 백선엽 장군의 사후 현충원 안장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일본어판 자서전에서도) 스스로 그런 이야기를 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6.25전쟁의 4대 영웅도 아니다. 현재 법대로라면 대전현충원에 묻히게 될 건데, 현행법이 그러니 그건 어쩔 수 없다고 본다. 다만 후과가 클 것이다. 제가 백선엽 가족이라면 현충원에 안장하지 않고, 동생 백인엽이 묻혀 있는 가족묘에 안장하겠다. 그게 백선엽 자신을 위해서도 더 낫다. 이후 벌어질 사태를 어떻게 견디겠나.”

– 백 장군이 6.25전쟁 4대 영웅이 아니란 건 어떤 의미인가.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이 이후 군과 선배들을 기린다며 6.25전쟁 4대 영웅을 선정한 바 있다. 한국에선 김홍일 소장과 김정우 대령, 미국에선 맥아더와 워커가 4대 영웅으로 선정됐다. 이미 1984~85년도의 일이다. 김 소장은 한국광복군 출신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대한민국 최초 장군으로 임관한 인물이다. 6.25전쟁 초기 흩어진 병력을 모아 한강방어선을 구축해 사흘 동안 인민군이 못 내려오도록 막았는데, 그때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참전을 결정했다. 그때의 지연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김 대령은 6.25 전쟁 때 38선 4개 사단 중 춘천에서 1개 사단을 맡고 있었다. 이때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 그들이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들었다. 인민군은 춘천에서 수원으로 이동해 국군을 포위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김 대령 때문에 이 계획이 무산됐다. 김 소장과 김 대령이 양쪽 날개에서 버텼기 때문에 물밀 듯이 밀려오던 인민군의 남하를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4대 영웅에 선정된 것이었다. 근데 나중에 이상하게 백선엽과 김동석 대령이 끼어들었다. 이들은 미국과 매우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미국 정부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정전협정 50주기 기념사업을 진행하며 6.25전쟁 4대 영웅을 선정한 바 있다. 이때 선정된 인물이 한국의 백선엽과 김동석, 미국의 맥아더와 리지웨이다. 박 장군은 훨씬 이전인 1984~85년 한국 정부에 의해 맥아더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이 6.25전쟁 4대 영웅으로 선정됐다고 주장한다 – 기자 주)

– MB정부에서 백 장군을 초대 명예원수로 추대하려고 했을 때 강하게 반발했다.

“(백 장군이) 아무리 나의 옛 상사라고 하더라도 그를 국가보다 우위에 둘 순 없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사람이 초대 명예원수가 되고 영웅으로 부각된다면 대한민국이 뭐가 되겠나. 완전히 대한민국을 죽이는 길이다. 그때 채명신, 박정인, 이대용 장군 등 대한민국의 정의감 넘치는 장군들이 백 장군의 초대 명예원수 추대를 막아줬다. 그때도 <조선일보>가 (백선엽 명예원수 추대에) 앞장을 섰다.

제가 노골적으로 비판하니까 청와대에서도 연락이 왔다. 전화를 했던 비서관이 (MB를 칭하며) ‘각하’라고 하더라. ‘장군님, 각하가 결정하시려는데 왜 반대하십니까’ 그러기에 내가 ‘야 이 XX야, 대한민국이 어떻게 생긴 나라인데 독립군 잡으러 다닌 사람을 대한민국 초대 명예원수로 세울 수 있냐’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백선엽이 초대 명예원수가 된다면 우리의 건국이념은 말소되고 만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결국 국방부에서 육군 소장인 인사복지실장과 육군 대령인 담당 과장이 집으로 찾아왔더라. 그래서 내가 이런저런 자료를 보여줬다. 결국 명예원수 추대가 무산됐다.”

– 당시 생존해 있던 채명신 장군은 어떤 반응이었다.

“나 혼자로선 힘이 부족해 채명신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울역 그릴’에서 점심을 먹고 백선엽에 대해 이야기했다. 채 장군도 (백 장군의 공적이 부풀려져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 전투를 통해 백선엽이 우리나라를 혼자 다 구한 것처럼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 않다. 낙동강 전선이 240km였고 여기에 한국군 5개 사단과 미군 3개 사단이 배치돼 있었다. 그렇게 8개 사단이 합심해서 지킨 것이다. 백선엽은 그 중 1/8의 역할을 한 것이다.”


– 2013년 세상을 떠난 채 장군은 서울현충원 사병 묘역에 안장돼 있다.

“돌아가시기 전부터 부인에게, 그리고 저에게 항상 ‘8평 장군묘 말고 월남전 전우들이 있는 1평 사병묘에 묻히고 싶다’고 말해 왔다. 꼭 채 장군이 아니더라도 다른 예비역 장군의 모습과 백선엽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최근 원희룡 제주도자시가 백 장군을 이순신 장군에 비유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그를 홍범도 장군과 비교했다.

“미친X들이다. 무식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어떻게 대한민국 독립을 막으려던 사람을 (일본과 싸운) 이순신·홍범도와 비교할 수 있나. 기가 막히다. 우파든 좌파든 명백한 진실을 봐야 한다.”


– 최근 국립묘지법 개정을 통해 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친일 인사의 묘를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파내야 한다. 법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 백선엽이 주장하는 6.25전쟁 당시 공적을 행여 다 인정하더라도, 프랑스였으면 그의 행동은 극형감이다. 아무리 후사에 공적을 세웠더라도 조국을 배반한 것이 입증되면 프랑스에선 극형이다. 일본군대 출신이라고 해서 다 친일파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 인물들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간도특설대로서 독립군을 잡으러 다닌 사람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순 없지 않겠나.”

<2020-06-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예비역 준장의 일갈 “백선엽이 이순신? 원희룡·안철수 무식”

수, 2020/06/10-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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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부산기록관서 확인 원래 이름은 대동면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10일 “인구 폭증으로 면에서 읍으로 승격을 준비 중인 구미시 산동면(山東面)의 이름을 대동면(大東面)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주 인구 2만명을 넘으면서 읍 승격을 추진하고 있는 경북 구미시 산동면 지역의 이름이 일제 잔재라는 기록이 발견돼 원래 명칭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10일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구미 대동면(大東面)을 산동면(山東面)으로 변경했다. 산동면은 원래 몽대면 혹은 대동면 등으로 불리다가 일제가 강제로 산동면으로 바꿨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측은 국가기록원 부산기록관에서 1913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에서 산동면의 원래 이름이 대동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일제가 지도 제작사업과 행정 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마을과 도로, 하천, 산, 평야, 해안, 주요 시설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바꿔 우리 고유 이름 3만4,000여개가 사라졌다고 보고 있다.

경북에서는 울진 서면과 원남면을 금강송면과 매화면으로, 청송 부동면 이전리를 주왕산면 주산지리로, 포항 장기갑을 호미곶으로, 고령 고령읍을 대가야읍으로 바꾸기도 했다.

전병택 초대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장은 “산동읍 승격을 준비하기 전에 일제에 의해 아름다운 우리의 지명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며 “산동이라는 지명 대신 대동이라는 고유 이름으로 되돌리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미 산동면은 2016년 4,438명이던 인구가 올해 2만6,000명을 넘어서면서 지방자치법 상 읍 승격 기준인 2만명을 충족했다. 구미시는 면사무소 신청사 신축지를 신당리 부근으로 결정하고 읍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김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0-06-10> 한국일보

☞기사원문: 구미 산동면 명칭은 일제 잔재… “읍 승격 전에 바꿔야”

※관련기사

☞뉴스1: 읍 승격 추진 구미시 ‘산동면’은 日 작명…”대동면으로 바꿔야”

☞경북IT뉴스: 구미 산동면 명칭은 일제 잔재…읍 승격 전에 이름 되찾아야

목, 2020/06/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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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프리버드, 10일 하루 종일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드라이브스루’ 공연

▲ 밴드 프리버드(대표 고충환)와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10일 오후 충남대학교 정문, 유성온천네거리, 서대전네거리, 정부청사네거리 통계센터 앞, 평화의소녀상 앞 등 대전지역 곳곳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드라이브스루 공연”을 진행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밴드 프리버드(대표 고충환)와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10일 오후 충남대학교 정문, 유성온천네거리, 서대전네거리, 정부청사네거리 통계센터 앞, 평화의소녀상 앞 등 대전지역 곳곳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드라이브스루 공연”을 진행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친일파, 민간인학살 책임자, 군사반란 가담자 등 국립 대전현충원에 묻혀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를 이장시키기 위한 길거리 공연이 펼쳐졌다.

밴드 프리버드(대표 고충환)는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함께 10일 오후 대전지역 곳곳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드라이브스루 공연’을 진행했다.

하드락 밴드 프리버드(Free Bird)는 세월호희생자 추모 공연과 박근혜탄핵 촛불집회 공연, 4대강 보 수문 전면 개방 촉구 전국투어 버스킹 공연 등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는 밴드로 유명하다.

이번 드라이브스루 공연은 ‘국립묘지법 개정’을 위한 여론 조성이 목적이다. 호국영령과 순국선열, 국가유공자들을 모시는 성스러운 국립 대전현충원에 묻혀서는 안 될 친일파 등이 안장되어 있어 이들을 이장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 개정이 필요하기 때문.

현재 대전현충원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30명과 국가폭력 관련자 16명, 군사반란 가담자 20명 등 66명이 안장되어 있다.

프리버드의 공연은 이날 오후 1시 유성구 충남대학교 정문에서 시작, 유성온천네거리와 서대전네거리, 정부청사네거리 통계센터 앞 등 모두 5곳에서 진행됐다.

▲ 밴드 프리버드(대표 고충환)와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10일 오후 충남대학교 정문, 유성온천네거리, 서대전네거리, 정부청사네거리 통계센터 앞, 평화의소녀상 앞 등 대전지역 곳곳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드라이브스루 공연”을 진행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 밴드 프리버드(대표 고충환)와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는 10일 오후 충남대학교 정문, 유성온천네거리, 서대전네거리, 정부청사네거리 통계센터 앞, 평화의소녀상 앞 등 대전지역 곳곳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묘 이장을 위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드라이브스루 공연”을 진행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대형트럭 위에 마련된 무대 뒤에는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묘를 국립묘지 밖으로!’라고 쓰인 플래카드가 걸렸고, 프리버드 공연자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이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약 1시간가량씩 진행된 이날 공연에서 프리버드는 ‘대한민국’, ‘아침이슬’, ‘격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타는 목마름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연주했다.

공연 트럭 앞으로 지나는 거리의 시민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음악을 듣거나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자동차에 탄 시민들도 신호대기를 위해 잠시 멈춘 틈을 타 손을 흔들어 응원하기도 했다.

한편, 게릴라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된 이번 공연의 마지막은 이날 저녁 대전시청 북문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진행되는 ‘제33주년 6·10민주항쟁 대전 기념식 및 문화제’에서의 공연으로 끝이 났다.

<2020-06-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의 묘를 현충원에서 이장하라” 길거리 순회공연

※관련기사

☞뉴스1 : “반민족자가 현충원에”..대전서 국립묘지법 개정 촉구 순회공연

목, 2020/06/11-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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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다운로드]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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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해당 도서는 제목과 같이 정치 권력을 ‘몹시 꾸짖는’ 주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질곡을 그들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일제 식민지와 6·25동란, 분단 현실과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우리 시대 문학은 무엇을 보고 어디에 펜촉을 향하고 있는가 저자는 준엄하게 묻는다.

4편_남정현 
<한반도 평화의 기상나팔>
– 1933년 충남 당진 출생
– 1959년 ‘자유문학’에 ‘경고구역’, ‘굴뚝 밑의 유산’이 당선
– 1965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분지’가 문제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큰 고초를 겪고 집행유예로 풀려남
– 1973년 단편 ‘허허선생’ 발표
–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
– 1993년 연작소설집 ‘허허선생 옷 벗을라’ 출간
– 2002년 제12회 민족예술상 수상 – 2017년 ‘편지한통-미제국주의 전상서'(말) 출간

임헌영 소장과의 개인적인 친분관계, 분지 필화 사건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작품속에 나타난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한 작가의 주제의식과 미국를 바라보는 냉철하고 날카로운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눕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토, 2020/06/1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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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다운로드] 

☞ (6.09) ‘내역사’ 시즌 5: 10화: 제국대학의 조센징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 (6.04)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4편 남정현

☞ (6.02) ‘내역사’ 시즌 5: 9화: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을 추진하겠다”

☞ (5.26) ‘내역사’ 시즌 5: 8화: 만화로 보는 민주화 운동(유승하, 마영신 작가)

☞ (5.22)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2부

☞ (5.21)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3편 이병주 1부

☞ (5.20)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3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광주항쟁의 정신은?”

☞ (5.19)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2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8) ‘내역사’ 시즌 5: 7화: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1부 “그들은 왜 시민군이 되었나?”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베트남전 당시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들_영화 “기억의 전쟁”과 만화 “붉은돌단풍”

☞ (5.12) ‘내역사’ 시즌 5: 6화: ”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나?_4월 21일 베트남 피해자 최초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하다”

☞ (5.08)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2부

☞ (5.0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2편 최인훈 1부

☞ (5.05) ‘내역사’ 시즌 5: 5화: 소설 『명시』작가 안재성이 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명시의 삶

☞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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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한겨레: 한국 엘리트의 뿌리,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초상

제국대학의 조센징-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 그들은 돌아와서 무엇을 하였나? 정종현 지음/휴머니스트·2만원

해방 이후 독립 국가를 세우는 데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중 좌우를 막론하고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장치였던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서 유학했던 조선인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상당수가 제국 일본의 관료로 복무하며 친일을 했거나, 제국의 첨단 지식과 관료 경험을 밑천으로 해방 후에도 남북한의 행정, 경제, 사법, 지식 체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 1,000여 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그들은 무엇이 되고자 떠났고, 무엇이 되어 돌아왔나?

친일 엘리트 양성소이자 조선 독립운동의 수원지,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들의 흔적을 추적한 집단 전기!

책의 저자인 정종현 교수(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를 스튜디오에 초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토, 2020/06/1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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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 조선인 강제동원 부정하는 전시 내용 포함
재일교포 증언..”가혹한 일 당했다는 말 들어본 적 없다”
당시 노동자 급여 봉투 등 전시..’정당한 노동’ 주장 강조

[앵커]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의 현장, 군함도 등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내일부터 도쿄에서 일반에 공개됩니다.

전시 내용 중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역과 차별 등을 부정하는 내용이 포함돼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연결합니다. 이경아 특파원!

전시 내용의 어떤 점이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겁니까?

[기자]

이 전시관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본 근대 산업시설과 그 역사를 소개하는 곳입니다.

지난 3월 31일 개관식만 하고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문을 닫았다가 내일부터 일반 관람이 시작됩니다.

문제가 되는 내용은 이른바 군함도로 알려진 나가사키 시 하시마 탄광에서의 가혹한 강제노역을 부정하는 증언과 자료들입니다.

전시관을 운영하는 ‘산업유산국민회의’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당시 주민 30여 명의 증언 영상 등을 전시 내용에 포함시켰습니다.

홈페이지에도 이미 이런 내용이 공개해 놓고 있는데요.

당시 주민들의 증언 영상에 등장하는 재일교포 2세 스즈키 후미오 씨는 전쟁 중 군함도에서 가혹한 일을 당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이웃에게 손가락질 받거나 험담을 들은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전시관에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한 타이완 출신 노동자의 급여 봉투 등도 공개돼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요.

강제동원이 아니라 정당한 댓가를 받고 일한 것이라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앵커]

최근 강제동원 배상 책임이 있는 일본 기업의 국내 자산 현금화 절차가 재개돼 한일 관계가 다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 속에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의 전시가 공개되면 파장이 클 것 같네요?

[기자]

그렇습니다.

이런 전시 내용은 역사 왜곡 뿐 아니라 일본이 국제사회에 한 약속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난 2015년 유네스코는 메이지 시대 산업유산 23곳에 대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결정할 당시 일본으로부터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전시 내용을 보면 이런 취지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군함도 등 당시 각지에 강제동원 된 조선인은 3만 3천여 명에 이른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무시한 채 일본의 산업화 과정만 미화하는 전시는 한일 관계에 또 다른 악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교도통신은 이번 전시 내용에 대해 “일본 정부가 과거의 사실을 숨기는 역사 수정주의를 조성한다는 비판을 부를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습니다.

전시관 측은 오늘 오후 4시 반부터 언론을 대상으로 전시 내용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도쿄에서 YTN 이경아입니다.

<2020-06-14> YTN 

☞기사원문: 또 역사 왜곡…日 ‘군함도’ 전시관, ‘강제동원’ 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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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S: “한국인 강제노동 안시켰다”… 일본 군함도 전시관 내일 오픈

일, 2020/06/14-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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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대·차별 없었다”는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95세 강제징용 피해자의 남은 소망은

▲ 군함도, 또는 지옥섬으로 불리기도 한 하시마(端島). 미쓰비시가 운영한 이 해저탄광의 일부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지만, 일본은 여기서 이루어진 강제동원과 희생을 지워버렸다. ⓒ 위키백과

조선인 강제 노동의 역사적 현장인 군함도(하시마)가 다시 뉴스에 불려 나왔다. 일본이 이 섬에 대한 ‘역사 왜곡’을 시도하자 외교부에서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하면서다. 외교부의 항의는 일본이 2015년 군함도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할 때 한국인 강제동원 역사를 제대로 알리겠다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것이었다.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동원

당시 일본은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서양의 기술이 일본 문화와 융합해 급속한 산업국가가 형성된 과정을 시계열적(視系列的)으로 보여주는 곳으로 보편적 가치가 있다”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일본이 등재 신청한 규슈(九州)와 야마구치(山口)현에 있는 중화학 산업 시설 23곳 가운데 최소 7곳은 조선인 강제 노동 피해가 발생한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면서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반대했다.

그러나 일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하시마 등 일부 산업 시설에서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강제로 노역’했던 일이 있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치를 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이러한 약속을 받아들여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재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산업유산 정보센터 정식 개관을 하루 앞둔 지난 14일, 일본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그치지 않고 ‘조선인이 섬에서 좋은 환경에서 살았다’라는 왜곡된 내용으로 전시물을 구성한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현지 언론인 <아사히신문>조차 “한반도 출신 징용공과 관련해 학대와 차별이 없었다는 섬 주민의 인터뷰가 소개돼 있어 한국이 문제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조선인 노동자 학대와 차별가 없었다’는 일본의 역사 왜곡

그러나 한국 항의로 일본이 전시 내용을 바꿀 가능성은 없다. 정보센터장은 문제 전시 내용과 관련해 “정치적 의도는 없다, 섬 주민 70여 명을 인터뷰했지만 학대 증언은 없었다”라고 말했고, 오카다 나오키 관방부 장관도 “전시 내용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의 권고를 고려해 전문가 조언을 받아 가며 적절히 판단한 것”이라며 논란을 일축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등재된 시설 가운데 조선인 강제동원, 강제노동의 현장은 미쓰비시 다카시마(高島)탄광(다카시마·하시마) 외에도 일본제철 야하타(八幡)제철소, 미쓰이 미이케(三池)탄광, 미씨비시중공업 나가사키(長崎)조선소, 가마이시(釜石)광산과 제철소 등 7곳이다.

하시마(端島)는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18km 떨어져 있는데 군함처럼 생겨 일명 ‘군칸지마(軍艦島)’라고 불렸다. 섬 전체가 탄광인 하시마는 바닷속 곳곳으로 갱도를 파내어 수백 미터씩 내려간 해저 탄광이다. 1890년, 하시마 옆에 있던 다카시마(高島) 탄광을 운영하던 미쓰비시가 이곳을 인수해 확장했다. 하시마의 석탄은 야하타제철소의 제철용 원료탄으로 사용됐다.

▲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분포. 2015년 일본은 이 가운데 23곳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외

총면적 6.3ha의 작은 섬 하시마에 무려 53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살았다. 1916년에 건립된 콘크리트 아파트에는 일본인 광부와 직원이 살았고, 쇠창살이 쳐진 허름한 건물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용됐다. 조선인 노동자들을 감시하기 위한 10m 높이 탑도 있었다.

하시마는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에게 가장 끔찍한 작업장이었다. 육지와 철저하게 고립된 이 섬에서 징용자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함께 일본인 사용자의 잔인한 폭력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높다란 제방이 섬을 둘러싸고 있어 도주를 막았지만, 조선인들의 탈출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탈출하려다 바다에 수장되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 하시마는 ‘지옥’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다.

지옥 섬, 군함도

해저 탄광의 갱 속은 섭씨 40도가 넘는 고온인 데다 막장 바닥에 물이 질퍽거렸다. 규슈(九州) 지역 탄광은 막장 높이가 아주 낮아 거의 눕다시피 해 탄을 파야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을 이런 자세로 탄을 파야 했던 노무자들 고통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하시마가 자유로운 곳이고 강제 노동이 아니었다면, 조선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할 이유가 없었다. 죽지 못해 노동에 내몰렸던 일부 생존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라고 증언했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시내 복구 작업에 투입되어 피폭되는 일까지 있었다.

1943년에서 45년 사이 조선인 500~800명 정도가 하시마 탄광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인근 나카노시마(中ノ島) 화장 관련 문서로 확인된 사망자도 5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기업도 하시마에 동원된 조선인이 몇 명인지, 몇 명이나 사망했는지에 대해선 침묵한다. 화장 관련 자료에 따르면 하시마 탄광 사망자 가운데 사고사가 절반을 넘으며, 나머지 사망원인은 질식, 외상, 압사, 익사, 변사 등이다.

▲ 하시마의 탄광시설. 1943년에서 45년 사이 조선인 500~800명 정도가 이 탄광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 위키백과

병원 뒤 건물에 배치되었다. 임금의 1/3은 강제 저금됐고, 1/3은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귀국해 보니 송금이 전혀 안 돼있었다. 식사는 외국 쌀로 지은 밥과 국뿐이었다. 밥에 주먹 정도 크기의 감자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3은 겨우 세 숟가락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

낮은 천장 아래에서 1일 3교대로 일했고, 하루에 탄차 10대 이상을 캐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후 징용자들끼리 돈을 모아 배를 얻어 타고 마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 윤춘기(1943년 전북 김제에서 하시마로 끌려감), <백만 명의 신세타령(1999)>(민족문제연구소·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과 강제 노동>에서 재인용, 아래 같음.)

1943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하시마로 강제동원되었다. 군수가 ‘왜 이런 어린아이를 데려온 것인가’라고 호되게 야단쳤지만,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서’라며 다음 날 기차로 부산까지 끌고 갔다. 하시마가 어떤 곳인지 설명도 없었고, 단지 좋은 곳으로 간다고 속이는 등 갖은 수단으로 도망을 막으며 연행했다.

최장섭 할아버지는 9층 건물 지하에 배치되었다. 하라다 부대 제2중대에 소속되어 채탄 현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도주해서 잡히면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맞고 고문을 당했다. 집단 저항을 일으킬 만한 여유도 없었고,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폭 투하 후 8월 18일경에 청소를 하러 나가사키 시내에 갔을 때, ‘인간 지옥이 여기구나’라고 생각했다.
–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개정증보판, 2016) 이상,

일본 패전 후, 미쓰비시는 하시마 탄광의 설비를 복구해 석탄 생산을 계속했으나, 1955년 이후 사양길로 접어들어 1974년에 폐쇄됐다. 무인도가 된 하시마는 2009년부터 일반에 공개되면서 근대산업 유산 등재 뒤 대표적 관광지가 됐다.

일제가 자행한 강제동원은 비단 하시마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일본의 탄광, 토목공사 현장, 공장 등에서 저임금으로 일해야 했다. 침략전쟁이 확대되자 청년뿐 아니라 여성과 미성년 아동까지 강제동원되기에 이르렀다.

그 강제 노동의 중심 기업이 미쓰비시광업, 미쓰이광산,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이다. 이들 기업이 운영한 일본 각지의 탄광과 광산에 연행된 조선인은 15만 명이 넘는다. 현지에 방치돼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도 적지 않다. 이들 유품 중 저금통장(급여) 3만 8000건도 은행에 보관된 채 유족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해방 75년이 가까워지지만, 강제동원 문제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현안이다. 한국인 피해자가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 등 전범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2018년, 한국 대법원은 일본 기업에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책임이 있다고 확정판결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물론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으로 원고의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어 일본 기업을 상대로 현금화(매각) 조처가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두 번째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어 새겨진 역사”를 부정하지 말라

아베가 자랑해 마지않는 “해외의 과학 기술과 자국의 전통기술을 융합하여 불과 50년 만에 산업화를 이룬”(메이지 산업 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2년을 맞아 발표한 한일시민단체 공동성명 ‘강제 노동 현장에 스며 있는 피해자들의 피와 땀, 눈물의 역사를 기록하라!’, 아래 같음) ‘위대한 일본’이, 지옥 섬을 비롯한 강제동원 현장에서 강요된 ‘죽음의 노동’을 딛고 서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따라서 강제 노동 실태가 빠져 버린 산업유산 정보센터 전시 내용은 산업유산에 담긴 “빛과 그림자가 교차되어 새겨진 역사”를 부정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2017년, 한일시민단체는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인류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유네스코 현장 전문을 환기하면서 일본에 요구했다.

진실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아시아인들의 ‘지적·도덕적 연대’ 위에 기리고자 한다면 “강제 노동 현장에 스며 있는 피해자들의 피와 땀, 눈물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것이다.

▲ 일본 훗카이도 샤쿠베츠(尺別)탄광 오쿠사와갱(奧澤坑) 노동자 단체 사진. ⓒ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지난 15일, 일제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징용됐던 이학래(95) 선생이 일본 중의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에 사과와 함께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1년 동안 복역했던 그는 전범으로 처벌받은 148명 한국인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다.

같은 B, C급 전범인데도 일본인에게는 보상금과 조의금을 지급한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일본 법원은 이들의 사과와 배상 요구를 기각했다. 대신 이들을 구제할 법률 제정을 권고했지만, 이번엔 국회가 움직이지 않고 있다. 65년 동안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온 그의 소망은 소박하다.

“죽은 동료를 생각하면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습니다. 명예를 꼭 회복해 주고 싶습니다.”

광복 75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강제동원 문제 앞에서 세계 경제 대국 일본은 날이 갈수록 작아져 간다. 강제동원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꼬인 한일 현안과 이로 말미암은 일본의 헛발질 경제 보복 탓에 막힌 양국 관계의 활로는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에서 비롯하리라는 걸 아베 정부는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2020-06-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다시 불려나온 군함도, 강제동원 역사 왜곡하는 일본

목, 2020/06/18-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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