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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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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admin | 수, 2020/01/29- 00:10

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 기사]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흔적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2020-01-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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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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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첩보 현대사』는 미 국립문서기록청에서 새롭게 발굴한 한국 관련 사진들과 각종 문서자료들로 재구성한 한국 현대사 책이다. 미 국립문서기록청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하 NARA)은 미국이 생산한 역사 관련 기록들을 모아 두는 곳, 그 자체로 ’20세기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어지간한 주요 사건 관련 기록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알았던 듯 몰랐던 것들
– 김수임과 미군정보원
– 미군정 당시 테러와 방첩대의 역할

저자가 직접 나와 미군정기 방첩대 이야기를 재밌게 들려줍니다

저자 고지훈
2012년 미국 국립문서기록청NARA 파견근무자로 일하면서 문서자료도 열심히 공부했고 사진자료들도 상당수 발굴했다.
사진자료와 문서 기록들은 당분간 계속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수집해서 공개할 것이다.
지금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헌정사 자료집 편찬을 위해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시즌5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금, 2020/04/10-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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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홍석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이 문구 앞에는 “우러러 하늘에, 구불어 땅에, 그리고 사람에 대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라고 새겨졌다.

‘한 점 부끄럼 없이 살다간 참군인’이라는 백홍석.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백홍석의 공식보고서에 이렇게 썼다.

“백홍석은 1915년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1940년 초까지 약 25년에 걸쳐 일본군 현역 장교로 복무했다.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을 역임하면서 신의주 일대 대민통제를 담당했다. 1944년 4월부터는 경성 육군병사부에서 조선인 병력동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25년간 일본군 복무 후 병력동원 업무 맡아”

▲ 1915년 6월 19일 매일신보에 실린 백홍석의 모습. 우측 하단 끝에 있는 청년이다. ⓒ 공훈전자사료관

백홍석은 1890년 1월 평안남도 덕천에서 출생했다. 1909년 7월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일본에 의해 폐쇄되자 두 달 뒤 육군사관학교를 목표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13년 12월 일본 육사에 입학해 1915년 5월 27기로 졸업했다. 일본군 소위로 임관 후 오카야마 제17사단 예하부대에서 근무했다. 1919년 4월 중위로 진급한 후 1929년 12월에야 대위가 됐다.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하는 데 10년이나 걸린 셈이다. 백홍석은 이듬해 8월부터 10월까지 국세조사 육군조사원으로 종사해 ‘국세조사기념장’을 받기도 했다.

백홍석의 소좌(소령) 진급은 중위에서 대위로의 진급보다 빨랐다. 대위 진급 후 5년 뒤인 1934년 일본군 보병 소좌로 진급한 백홍석은 이후 조선주둔일본군 20사단 77연대 소속으로 평양 등에서 근무했다.

백홍석은 1939년 4월에 신의주지구 방공사령관에 임명돼 그해 11월까지 역임했다. 이듬해 3월 평안북도 방공위원회 위원에 임명된 백홍석은 관할 지역 관헌들을 통솔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따른 방공통제와 훈련을 주도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제의 인정을 받아 백홍석의 이름 석자가 <지나사변(중일전쟁)공적서>에 올라갔다. 이를 계기로 백홍석은 고위 장교인 일본군 중좌에 진급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조선인 출신으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 못한 백홍석은 1943년 예편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확대 되자 백홍석은 1944년 4월 예비역 보병 중좌 신분으로 재소집 돼 조선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기 위해 만든 경성 육군병사부에서 과장으로 복무했다. 이곳에서 백홍석은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인 7월까지 조선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원회 역시 백홍석의 경성 육군병사부 근무기록을 언급하며 “1940년대 초 징병제가 결정되자 가장 먼저 병사부의 확대 설치가 필요하게 됐다”라면서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이 본격화되면서 병사부에는 조선인 장교들이 부임했고, 경성과 해주에 각각 백홍석과 신태영이 부임했다”라고 명시했다.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병력동원업무를 조선인 장교들에게 담당시켰다. 이것은 단순히 동원업무의 편리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조선인에게 조선인의 동원을 맡기는 일제의 교묘한 식민지배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해방 후 고위직으로 영전

▲ [현충원 안장 친일파] 백홍석 묘지 친일파 묘비에 적힌 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 친일파 백홍석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잠들어 있다. 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을 확인할 수 있다. 백홍석은 장군제1묘역 중턱 우측에 위치한 묘에 잠들었다. ⓒ 김종훈

백홍석 역시 여타의 일본군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활동한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통위부(현 국방부) 자문역에 역임된 백홍석은 1948년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당시 백홍석이 거친 특별훈련 과정은 1주일이었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1949년 7월 백홍석은 정일권 준장, 신태영 준장 등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았다. 당시 백홍석과 함께 공훈기장을 받은 고위직 장교 중에는 채병덕도 있었는데, 그는 일본 육사 27기를 나와 일본군 중좌로 해방을 맞이한 인물이다. 백홍석의 사위였다.

해방 후 장인 백홍석이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했을 때 스물다섯 살 어린 사위 채병덕은 이미 최고위급 장성인 대한민국 육군 소장이었다. 채병덕은 해방 후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를 1기로 마친 뒤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중대장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됐다. 이후 통위부 총참모총장 등을 거쳐 1948년 12월에 육군 준장에, 두 달 뒤인 1949년 2월에 육군 소장에 올랐다. 동시에 대한민국 육해공군총사령관에 임명되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초반 안이한 판단으로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1950년 하동전투에서 전사했다.

▲ 친일파 백홍석, 정부는 2009년 백홍석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지정해 발표했다. ⓒ 재향군인회 홈페이지 캡처

백홍석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서울지구 병사구사령관으로 재직했고, 1953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병무감을 거쳐 1954년 동부지구 경비사령관, 1955년 대한민국 육군 제33예비사단(현재의 제17보병사단) 단장을 역임했다.

백홍석은 현역 군인이던 1952년 2월,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특이한 점은 제대 군인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만들어진 재향군인회가 한국전쟁 중에는 백홍석과 백승훈(2대 회장) 등 현역 장성들이 회장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종료 후인 53년 7월부터는 3대 회장인 신태영을 시작으로 예비역 장성출신들이 재향군인회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백홍석은 1960년 10월 만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현충원 밖에 안장됐던 백홍석은 2003년 3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중턱에 위치한 176번 무덤으로 이장됐다. 보훈처에 따르면 국립묘지로의 이장은 이장시기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유족의 희망에 따라 원하는 시기에 이장 절차가 진행된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한 공식보고서에 “일본군 중좌 출신 백홍석은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면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라고 기술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된 백홍석은 정부에서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훈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강제로 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백홍석 (1890~1960) – ‘한 점 부끄럼이 없다’ 는 친일파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 에 이름까지 올렸으나 조선일 출신으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는 못하고 1943년 예편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예비역 신분으로 재소집돼 조선청년들을 전선에 보내는데 앞장섰다. 해방 후엔 대한민국 육군 특별부대사령관(대령급 지휘관)으로 임명된다. 예비군을 포함해 일본군으로 30여 년을 복무한 그가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신분을 바꾸기까지 걸린 시간은 1주일이었다. 사망 후 현충원 밖에 안장됐으나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으로 이장됐다. “오직 나라에의 충절 외길만을 걸어오신 참군인이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백홍석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서는 다르게 말한다. “조선인 병력동원을 담당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한 점 부끄럼 없다”는 ‘참군인’의 부끄러운 과거 백홍석 편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금, 2020/04/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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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설문조사] 민주당 84.1%, 통합당 46.6% 찬성… 황교안·나경원·홍준표는 무응답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지역구 후보자 1109명 중 절반 가량의 후보자가 현충원 내 친일파 묘의 이장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광복회가 이번 4.15총선을 맞아 전국 지역에 출마한 국회의원 후보자 1109명 모두를 대상으로 ‘친일 행위의 국립현충원 안장 불가 및 이장, 단죄비 설치를 위한 법률(국립묘지법, 상훈법) 개정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은 결과다.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7일까지 진행된 설문조사에 답한 후보자는 절반이 조금 넘는 568명(총 응답률 51.2%)으로, 이중 546명이 친일파 묘의 이장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는 9명, 모름은 13명이었다. 후보자 중 541명은 설문에 응답하지 않았다. 찬성률은 전체 후보자수 기준으로는 49.2%이지만, 응답 후보자수 기준으로는 96.1%에 달한다. 거대 양당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의 84.1%, 미래통합당 후보들은 46.6%가 찬성했다(전체 후보자수 기준).

광복회는 설문조사에서 “현행 ‘국립묘지법’은 사회를 위해 희생·공헌한 사람이 사망한 후 그를 안장하고 그 충의와 위훈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국가가 국립묘지를 설치하고, 이를 적절히 관리·운영하도록 정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 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결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중 11인(김백일·김석범·김홍준·백낙준·백홍석·송석하·신응균·신태영·신현준·이응준·이종찬)은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고 밝혔다.

이어 “현행 국립묘지법을 개정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이미 국립묘지에 안장된 경우라도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근거를 둠으로써 국립묘지의 영예성을 높일 것을 제안한다”라고 설문 취지를 설명했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에 대한 기록은 3월 30일부터 진행한 오마이뉴스 특별기획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국회의원 후보자 절반 이상 설문에 응답… 응답자들 압도적 찬성 의견

더불어민주당의 경우, 지역 출마자 253명 중 214명이 응답(84.5%), 이중 213명이 찬성한다고 답했다. 모른다는 응답은 1명이었다. 설문에 답하지 않은 후보는 39명이다.

미래통합당은 전체 후보자 236명 중 118명만 설문에 답했다. 설문에 응한 118명 중 찬성 의견을 밝힌 후보자는 110명이다.(반대 3명, 모른다 5명). 그외 118명은 설문에 답하지 않았다.

민생당과 정의당, 민중당 후보들도 ‘국민묘지법 및 상훈법’ 개정에 압도적으로 찬성했다. 이중 민중당은 58명 지역출마자 전원이 설문에 참여해 100% 찬성 의견을 내놨다. 민생당은 58명 중 37명(63.7%), 정의당은 76명 중 53명(69.7%)만 설문에 응했으나, 참여한 후보들은 민생당 1명(모름 응답)을 제외하고는 모두 찬성한다고 답했다.

우리공화당의 경우, 전체 후보자 42명 중 7명만 설문에 답해 저조한 응답률을 보였다. 설문에 참여한 우리공화당 후보들은 모두 찬성의견을 내놨다.

이밖에 무소속 38명과 원외정당인 국가혁명배당금당 21명, 노동당 3명, 친박신당 2명, 가자!평화인권당, 미래당, 충청의미래당, 공화당, 기본소득당, 한나라당에서 각각 1명씩 찬성 의견을 피력했다.

황교안, 나경원, 홍준표 후보는 무응답

현역 의원 중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여야 가리지 않고 찬성 의견을 내놨다. 민주당 설훈, 우원식, 허소, 전상헌 의원과 통합당 강민국, 이인선 의원, 민생당 박지원 의원, 무소속 김현기 의원이다.

대선급 후보들의 출마로 관심을 모은 서울 종로구의 경우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찬성 의견을 냈으나,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는 설문에 응답하지 않았다. 친일논란으로 여러 차례 구설수에 올랐던 서울동작을 나경원 통합당 후보도 설문에 답하지 않았다.

민주당에서는 응답자 중 유일하게 안산시 단원구갑 고영인 후보가 ‘모름’이라고 답했다. 통합당에선 서울 중랑구을에 출마한 윤상일 후보와 강승규(마포구갑), 이중재(인천 계양구갑) 후보 3인이 반대 의견을 냈다. 서울 구로구을에 출마한 김용태 후보와 김척(부산 사하구갑), 권명호(울산광역시 동구), 임명배(경기도 화성시을), 한기호(춘천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을) 후보 등 5인은 질문에 ‘모름’이라고 답했다.

현역 국회의원 중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이정현, 김성식, 윤상현, 권성동, 정태옥, 홍준표, 곽대훈, 정용기, 이용호, 이용주, 김성환 후보 등은 설문에 응하지 않았다.

김원웅 광복회장 “친일청산 없이 국민통합 못한다”

▲ 국가공인 친일파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등 7인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 이은영
▲ 국가공인 친일파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4인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 이은영

김원웅 광복회장은 8일 저녁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 다수가 친일청산에 찬성 의견을 피력한 것은 친일청산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한 것과 같은 의미”라면서 “모든 후보자들이 약속한 만큼 여야가 공동으로 법안을 발의해 친일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친일청산 없이 국민통합을 말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내선일체’와 다르지 않다. 친일파를 상전에 두고 어떻게 통합을 이루나. 한국사회 모순의 본질은 친일미청산과 분단 상황이다. 친일청산 없이는 국민화합과 통합이 불가능하다. 첫걸음을 뗀 것이다.”

친일청산의 첫번째 시도로 평가받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를 반민족 행위로 규정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제정한 법률이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01조에 의하여 국회에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가 구성된 뒤 같은 해 9월 법률 제3호로 제정됐다. 그러나 당시 이승만 정권과 미국의 견제 속에 국회프락치사건과 경찰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을 겪고 반민특위는 와해됐다. 친일 인사 상당수는 민관 요직에 재등용됐다.

▲ 광복회가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의원 후보자 110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친일찬양 금지법 및 상훈법, 국립묘지법 개정안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김종훈

김 회장은 “이번 설문조사를 위해 평균연령 79세에 이른 광복회 회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답변을 받기 위해 현장에도 수없이 가고 전화도 수차례 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정당에서 ‘무응답’이 매우 높게 나온 것은 답변 거부와 다르지 않다. 답변을 하지 않은 후보들을 지켜볼 것이다. 그들의 역사의식을 확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광복회는 이번 설문에서 ‘독립유공자 및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등 모욕 행위 처벌 위한 ‘친일찬양금지법’ 제정 및 관련활동 동참에 대한 찬반 의견’도 함께 조사했다. 조사결과 1109명 중 568명이 설문에 응했으며, 이중 546명이 친일찬양금지법 제정에 찬성한다고 답했다. ‘반대’는 6명, ‘모른다’는 16명에 불과했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총선 후보자 546명 “현충원 친일파 묘 이장해야”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추적’ 특별페이지

토, 2020/04/1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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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연합뉴스) 형민우 기자 = 전남 고흥군 옥하공원에 있는 친일인사 김정태(1869∼1935)의 흉상이 철거된다.

김정태 흉상 [국가보훈처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14일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고흥군청에 친일파 흉상 철거 요청 민원이 접수됐다.

민원은 국유재산 관리청인 국가보훈처로 이첩됐고, 국가보훈청은 김정태의 후손에게 흉상을 자진 철거할 것을 통보했다.

후손들이 흉상을 철거하지 않자 국가보훈처는 행정대집행을 통보했고, 후손들은 결국 이에 동의했다.

국가보훈처는 28일 오전 김정태의 흉상을 철거하기로 했다.

철거한 흉상은 후손들이 별도의 공간에 보관할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보훈처는 흉상을 받치고 있던 기둥도 모두 철거할 계획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김정태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중추원 참의와 군수 등을 지냈다.

영광군수와 광주군수, 순천군수를 역임했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흥지역 육영사업을 위해 재단법인 육영사를 설립했다.

1912년 한일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5년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email protected]

<2020-04-14> 연합뉴스 

☞기사원문: 고흥 옥하공원 ‘친일인사’ 김정태 흉상 철거된다

※관련기사

☞뉴스1: ‘친일인사’ 김정태 흉상, 고흥 옥하공원서 철거

목, 2020/04/16-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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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 “안내판, 위험해서 안돼” … 민족문제연구소 “멀리 떨어진 곳이라도 세워야”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진 을사오적 이지용(이은용)(원안). ⓒ 강호광

진주성(사적 제118호)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이지용(李址鎔, 1870~1928)이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을사오적’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지회장 강호광)는 문화재청과 진주시 진주성관리사무소에 거듭해서 안내판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문화재청은 “해당 지자체가 결정하면 된다”고, 진주성관리사무소는 “위험해서 안 된다”는 입장이다.

촉석루 아래 암벽에는 일제강점기까지 여러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러 이름 가운데 특히 문제가 되는 사람이 ‘이은용(李垠鎔)’, ‘이지용’이다.

‘이은용’과 ‘이지용’은 같은 사람이다. 이은용이 본래 이름인데, 세자 책봉된 ‘영친왕’의 이름인 ‘이은(李垠)’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 ‘이지용’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지용(이은용)은 구한말 경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대한제국시기에 그는 황해도관찰사,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서리, 내부대신 등을 지냈고, 이완용과 같이 ‘을사오적’이다.

그는 1911년 일왕으로부터 은사공채 10만원을 받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백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과 조선귀족회 이사 등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다.

촉석루 아래 암벽에 ‘이은용’과 ‘이지용’ 사이에 있는 글자는 윤명근(남해현령, 1886~1889)과 황재돈(경남도 관찰부주사, 1899~1901)이다.

이곳 암벽에 새겨져 있는 인물에 대해 그 내역을 모르는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오해한다. 이에 지역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지용(이은용)의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판을 세워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진주에는 이곳 이외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암벽이 있다. 대표적으로 남강 옆에 있는 뒤벼리 절벽이다.

이곳에는 친일파 ‘이재각’, ‘이재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재각은 일제강점기 때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냈고, 이재현은 의병 학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다.

뒤벼리 암벽에 새겨진 두 사람의 이름은 넝쿨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은 그 이름 앞에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판을 세웠다.

한때 안내판이 훼손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올해 3‧1절에 새로 만들어 세워 놓았다.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진 을사오적 이지용(이은용)(원안). ⓒ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동안 여러 차례 진주시에 ‘이지용’의 친일행적을 담은 안내판을 세울 것을 제안했다. 그러다가 민족문제연구소 강호광 지회장은 14일 현장에서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를 만나 안내판 설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진주시는 안내판 설치에 부정적이다. 진주성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낭떠러지다 보니 위험하다. 안내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다”며 “안내판을 좀 멀리 떨어져 세울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데, 안내판을 본 관광객들이 확인하기 위해 가서 보려고 하면 위험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재청 보전정책과 관계자는 “사적지를 포함한 문화재에 대한 형상변경을 할 경우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나, 안내판 설치 같은 경미한 사안은 해당 지자체에 위임되어 있다”고 했다.

그는 “문화재청에서 안내판을 세우라, 혹은 말라고 할 수 없다. 진주시는 이름이 새겨진 위치가 낭떠러지라 위험하기에 곤란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안다”며 “개인적 의견으로, 그렇다면 위험하지 않는 구역에 협의를 해서 설치할 수도 있다고 본다”고 했다.

강호광 지회장은 “안내판을 크게 세우자는 게 아니다. 작게라도 안내를 해서, 암벽에 새겨진 인물이 반민족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고, 그래야 산 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라 본다”고 했다.

그는 “진주시는 안내판을 세울 경우 위험하다고 하는데, 절벽 가까이에 세우자는 게 아니다. 남강 가운데 세울 수 없기에,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안내판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강호광 지회장은 “진주시의 주장을 들어보면 안전을 내세워 안내판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인데, 친일반민족행위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며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뒤벼리에 시민단체가 안내판을 세웠듯이 같은 방법도 생각해 볼 것”이라고 했다.

서은애 진주시의원은 “당연히 안내판을 세워야 하고, 친일반민족행위를 제대로 알리는 게 중요하다. 위험하다면 멀리 떨어진 곳에 안내판을 세워도 된다”고 했다.

▲ 진주성 촉석루 아래 암벽에 새겨진 을사오적 이지용(이은용)(원안). ⓒ 강호광

<2020-04-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촉석루 아래 암벽에 친일파 이지용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목, 2020/04/16-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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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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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책과 삶] 중국의 일본 전범 개조정책 ‘푸순의 기적’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시즌5는 기존처럼 친일파를 소환하여 그들이 식민지 시기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에 이번시즌부터 인물을 확장하여 친일파 뿐 아니라 식민지를 살아간 다양한 사람들을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좀 더 입체적으로 식민지 시기를 다룰 예정이니 많은 관심과 지속적인 청취 부탁드립니다.

수, 2020/04/15-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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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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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남북 만남, 휴전선을 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압록강과 휴전선을 넘나드는 다양한 길 위에서의 끊임없는 남북 만남, 생생한 현장감이 넘치는 문화인류학적 시각으로 보면 남북 관계가 달리 보인다. 고정된 인식과 왜곡된 시선을 뛰어넘어 남북 교류의 새 해법을 찾는다!

2000년 이후 압록강과 두만강 현지를 수십 차례 드나들며 조사 연구한 저자는 이 책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를 통해 정부 의존적이고 휴전선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저자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 도시 단둥, 그리고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서 남한, 북한, 중국, 북한화교 들의 활발한 무역과 교류 활동을 기록하여 휴전선 안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휴전선 너머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저자_강주원 박사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2012)를 받았다. 2000년부터 중국 단둥과 중·조 국경지역(두만강·압록강)을 찾아가고 있다. 그곳에 살고 있는 북한사람·북한화교·조선족·한국사람과 관계맺음을 하며 국경에 기대어 사는 이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북한과 한국 사회를 낯설게 보고 만나는 노력을 하고 한반도의 평화·공존에 대한 고민을 업으로 하는 인류학자의 길을 걸어가는 꿈을 키우고 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수, 2020/04/22-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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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지킴이 이이화

2018년 5월 서울 지하철 종각역 사거리에 세워진 전봉준 장군 동상 앞에 선 이이화 선생. 이 선생은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으로 동상 제막을 주도했다. 이준헌 기자 [email protected]

출판인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담아내는 책을 기획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나는 1976년 출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름 우리 국가사회가 당면하는 문제를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풀어내는 책을 만들어왔다. 1979년에 시작해 1989년 전 6권으로 끝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의 일단이었다. 1986년에 시작해서 1994년 한꺼번에 펴내는 전 27권의 <한국사>는 한 출판인의 민족사에 대한 나름의 헌정이었다. 170여명의 연구자가 참여하는 한길사의 <한국사>는 근·현대사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펴낸 <한국사>에 ‘관찬’이 아닌 ‘민찬한국사’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는 학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서술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나는 ‘국민독본’ 같은 한국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국사> 출간 직후부터 했다. 1980년대의 치열한 민족·민주운동이 세계화시대를 맞으면서 ‘한국사’가 더 필요할 터였다.

나는 그 무렵 대형기획 ‘한길그레이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서고금, 인류의 위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집대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지속되는 한길그레이트북스를 통해 인류 보편의 지혜와 사상을 우리 사회가 새롭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던 ‘로마인 이야기 현상’에 대응하는 ‘한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가 이를 해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나 연구자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논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 삶에 살아 있는 역사의 육성을 들려주는 저술가라야 한다. 어디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역사가’라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1994년 가을 ‘아치울의 결의’

연구자 170명 참여한 ‘한국사’
학술적이라 일반 독자에 부적합
호평 받은 ‘로마인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한국사’ 필요성 느껴

이이화(李離和·1937~2020)! 1994년 가을, 나는 아차산록의 아치울 마을로 이이화 선생을 방문해 ‘대중이 감동하면서 읽는 한국통사’를 써보자고 제의했다. 10년 정도 걸리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사회사·생활사·문화사를 총합해야 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뛰어넘는 장대하고 아름다운 한국사! 나와 이이화 선생은 두 손을 잡고 ‘아치울의 결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이화 선생과 나는 1980년대부터 호흡을 맞추어 왔다. 1987년에는 한길역사강좌의 일환으로 ‘한국사상사’를 7회에 걸쳐 강의했다. 1988년에는 ‘근대민중운동사’를 역시 7회에 걸쳐 강의했다. 이이화 선생은 ‘재야연구자’로 1970년대부터 주목할 논문을 발표해왔다.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1975),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1977) 등이 그것인데, 나는 선생의 논문집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을 1994년에 펴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는 전 5권의 <인물한국사>를 펴냈다.

역사가 이이화는 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선생은 1985년부터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에 가장 많이 참여한 현장강사이자 역사가이드였다. “역사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쉽니다.”

1986년 5월, 2박3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국토, 우리 역사의 장엄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지리산과 민족사’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구례 화엄사에서 피아골 계곡을 타고 노고단을 오르는 여정이었다.

이이화 선생은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발제했다. 지리산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긴 글이었다.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柳夢寅)이 그의 책 <어우집>(於于集)에서, 금강산은 뼈다귀가 많으면서 고기가 적고, 지리산은 고기가 많으면서 뼈다귀가 적다고 한 기행문을 소개하며 “금강산이 지자(知者)와 이지(理智)의 산이라면, 지리산은 인자(仁者)와 덕성(德性)의 산”이라고 했다.

“이번에 화엄사 골짜기와 노고단, 피아골의 깊은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나에게 자양분을 날라다 주시던 우리 어머니. 다육소골(多肉少骨), 이렇게 먹을 것이 많고, 몸을 감싸주기에 지리산은 인간과 너무나 친밀한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덕성 속에 비극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천년만년 우리 겨레와 함께 숨쉬면서 안식처가 되기는 했지만,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비극의 역사를 이 지리산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87년 5월, 3박4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다시 기획했다. 산청에서 천왕봉을 올랐다. 백무동으로 갔다. 제수(祭需)를 준비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혼령들을 위해 일행이 함께 참례하는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이화 선생에게 제문(祭文)을 부탁했다. 200자 원고지 30장이 넘었다. 일행은 깊은 산속에서 구슬프게 읽어내리는 선생의 제문에 눈물을 글썽였다.

1986년 9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우리는 ‘동해안 의병의 근거지’를 찾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구한말까지 의병 봉기의 고장이었던 영덕과 영해,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를 답사했다. 일행은 마을회관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토론했다.

1987년 3월,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호남평야를 다시 갔다.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동학농민군 총관령 김개남(金開男·1853~1895) 장군의 집터를 찾았다. 나는 가로세로 10㎝, 길이 2m의 말목 두 개를 준비했다. 흰 페인트를 칠하고 이이화 선생에게 붓으로 ‘김개남 장군 고택 입구’와 ‘김개남 장군 고택 구지’를 쓰게 했다. 역사기행 일행은 이제는 밭이 되어 있는 이곳에 두 말목을 세웠다.

1995년 <한국사 이야기>를 집필하던 이이화 선생.

■ 10년 작업 <한국사이야기>는 ‘국민독본’

역사의 육성 들려주는 저술가로
이이화 선생에 제의 10년간 작업
국민독본 ‘한국사 이야기’ 22권
방대한 연구 성과 담아 세상에

이이화 선생은 <한국사 이야기> 집필을 지금은 폐교된 전북 장수군 천천면 연화분교에서 시작했다.

분교 옆으로 금강 상류가 흘렀다. 한때 한길사는 그 폐교를 빌려서 역사기행·국토순례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선생은 이곳에 칩거하면서 2년 반 동안 고대사 집필을 끝냈다. 다시 김제 월명암으로 옮겨 고려사를 끝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살펴보아야 할 자료가 방대해서, 아치울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1998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한국사 이야기>는 드디어 2004년 봄 전 22권이 완간되었다. 참으로 놀랍고도 힘찬 저술작업이었다. 우리의 응원과 편집작업도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세기말에 시작되어 새 세기의 벽두에 간행되는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를 나는 ‘21세기 국민독본’이라고 이름붙였다. 개인의 통사작업으로는 가장 방대하고,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성과를 총체적으로 수렴하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 장대한 작업을 해낸 이이화는 분명 ‘거인’이다. 오척이 될까 말까 한 그 체구가 뿜어내는 정신의 힘. 흔히 노작들에 대해 ‘주례사’ 같은 서평을 하지만,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 대해서는 수많은 인사들이 경외와 찬사를 보냈다. 1986년 이이화 선생과 손잡고 역사문제연구소를 창립하는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사마천과 같은 철저한 역사인식과 치열한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이화 선생에게 한때 한문을 배운 바 있는 박완서 선생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쓰고 싶은 글은 안 쓴다. 실로 보배로운 이 시대의 기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 세계화시대에 더 필요한 ‘한국사 읽기’

역사를 가슴으로 느끼며 읽게 해
현실과 연결 생각하는 힘 길러줘

선생은 1991년 박완서 선생 등과 중국을 여행했다. 유람선이 신의주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강변의 북한 사람들과 지호지간이 됐을 때 그는 뱃전에 엎드려 흐느꼈다.

고향이 북한도 아닌 그의 깡마른 어깨가 북받치는 오열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산지사방으로 찢기는 분단의 고통을 그는 견딜 수 없어 했다. 역사 하는 그의 자세였을 것이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정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역사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되 오늘 우리의 현실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관이 중요합니다. 21세기로 가고 있는 이 세계화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만이 우수하고, 우리만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국수적 민족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선생은 각 편의 집필이 끝나면 젊은 연구자들에게 읽게 하고 비평과 의견을 들었다. 재야학자이지만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의 작업을 응원하고 돕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작업은 출판사로서는 하나의 사건이자 축제였다. 독자들의 역사 읽기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용어와 인명을 뽑아 풀이했고 그림과 사진과 연표를 곁들였다. ‘완간기념기획’으로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다>를 기획했다.

“저술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을 구현해내는 저자, 그런 저자를 성원하는 깨어있는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이 나라 출판문화에 우뚝 서게 될 이이화 선생의 작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일단락짓게 되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우리 출판인들은 존재한다. 10년에 걸치는 이 장구하고도 장대한 작업을 해낸 저자 이이화 선생의 그 정신과 헌신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1986년 5월 지리산 역사기행 때 이이화 선생이 매천 황현의 사당을 방문한 참가자 일행에게 황현의 역사 정신을 설명하고 있다.

■ 잘못된 역사 바로잡는 역사가

이이화! 그는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를 저술하는 역사학자였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운동의 최일선에서 헌신하는 역사가였다.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는 새로운 역사운동으로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앞장섰다.

젊은 역사연구자들과 함께 미답의 역사연구에 나서는 학술운동을 펼쳤다. 동학농민전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연구·저술작업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의 선봉장을 맡았다. 2004년 11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출범하면서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0년 9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4년 1월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해 고구려역사문화재단을 발족시키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함께했다. 2004년 1월에 전개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중들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금 시작 열하루 만에 목표액 5억원을 넘어섰다.

“나는 장엄한 역사드라마를 보았다”고 선생은 회고록 <역사를 쓰다>(2011)에서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나섰고, 2009년 8월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출간됐다.

2009년에 발족하는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0년에 결성되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지요.”

나는 예술마을 헤이리를 건설하면서 이이화 선생께 말씀드렸다. 여기 와서 ‘역사사랑방’ 같은 걸 해보시자고. 마을엔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선생은 2007년 아치울에서 헤이리로 입주했다. 그러나 선생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과제가 끊임없다보니 역사사랑방 개설은 계속 늦추어졌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선생이 남긴 역사정신은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저 역사의 현장을 앞장서서 걷던 역사가 이이화. 우렁찬 목소리로 역사와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던 이이화 선생.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2020-04-21> 경향신문 

☞기사원문: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9)“역사를 모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사 바로 세우고 ‘실천한 역사학자’

수, 2020/04/22-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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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친일청산을 웃음거리로 만든 박흥식 석방

해방 75년이 된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인 친일청산. 이를 한 편의 웃음거리로 만든 상징적 사건이 있었다. 친일청산 대상 1호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화신 재벌 박흥식이 1949년 4월 21일 풀려난 일이 그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띠는 이 사건과 더불어 친일청산은 힘을 잃고 약해졌다. 그 뒤 도리어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빨갱이’들의 음모로 매도되고 사회 퇴행의 원인인 양 치부됐다. 박흥식 석방은 친일청산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를 예고하는 한 편의 그림이었다.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친일파 재벌로 성장한 박흥식이 얼마나 많은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는지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세로 길이가 26센티미터이고 글씨가 빽빽한 이 사전에서 웬만한 친일파들은 길어봤자 반 페이지, 유명한 친일파들은 두세 페이지 정도를 차지한다. 그에 비해, 박흥식은 4페이지 하고도 6분의 1 페이지를 차지한다. 사연이 무척 많은 친일파인 것이다.

‘친일청산 대상 1호’ 박흥식의 반민족행위

▲ 화신백화점 터. 서울지하철 1호선 종각역 출구 근처에 있다. 보신각 맞은편이다. ⓒ 김종성

진남포상업학교를 중퇴한 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16세 나이로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차린 박흥식은 재벌이란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박흥식’ 하면 떠오르는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외에도 다종다양한 회사들을 거느렸다.

박흥식은 직물업·제지업·인쇄업·유통업·부동산업과 비행기 제조업까지 경영했다. 거기다가 학교도 설립해 교육사업을 병행했다. 1, 2년마다 한 번씩은 회사를 신설하거나 합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업을 벌였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제약을 받던 시절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한국인이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숨도 쉬기 힘들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제약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사업 무대를 평안도에서 서울로 옮긴 1926년(23세) 무렵의 박흥식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은 “이 시기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와의 친교를 배경으로 일본 제지회사들과 특약을 맺고 국내의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상업적 성공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서술한다. 정경유착이 사업 성공의 발판이었던 것이다.

기업인의 친일은 대개 다 기금 헌납 정도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흥식은 그렇지 않았다. 사업에서처럼 이 분야에서도 그는 왕성하고 의욕적이었다. 위에 열거한 업종들에 더해 ‘친일업’까지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마치 사업을 하듯이 친일도 열렬히 했다.

박흥식은 총독부에 기금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일본군에 비행기를 제공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까지 직접 차렸다. 또 기업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글과 말로도 친일을 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글을 실어 “대동아경제권 건설을 위해 동아경제블럭을 형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미국과 영국의 격멸을 부르짖으며 학도병에 지원할 것을 종용했다.

또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활동까지 겸했다. “촉탁보호사는 사상범들이 출옥 후 다시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皇道)정신을 자각하고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임무를 담당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의 죄상을 죄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제국주의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도 일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담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 조선총독이 주는 공로상은 기본이고, 일본 교육진흥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교육협회장한테서도 상을 받았다. 또 히로히로 일왕(천황)을 직접 만났다. 일본을 위해 웬만큼 공을 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3년 12월 17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배알 1주년 – 지성으로 봉공’에서 박흥식은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배알의 광영에 욕(浴)하였는데, 지척에서 용안을 봉배(奉拜)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라며 ‘배알 1주년’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감격을 표했다. ‘배알의 광영’을 마치 목욕하듯이 뒤집어쓴 것이 그토록 강렬한 감동이 됐던 것이다.

친일파 풀어준 재판부, 무죄 구형한 검사

▲ 반민특위 재판 풍경. ⓒ 위키백과

사업도 많이 하고 돈도 많아서 안 그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인물이 그처럼 글과 말로도 열렬히 친일을 했으니, 반민특위 체포 대상 1호로 선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격멸을 부르짖었던 그는 체포를 피하고자 미국행 여권을 준비했지만, 1949년 1월 8일 체포돼 독립운동의 상징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언론보도도 ‘첫’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박흥식 체포에 의미를 부여했다. 3일 뒤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박흥식씨 수감’은 ‘반민법 첫 발동’이라는 부제목 하에 “특위는 10일 공보 제1호로 박 체포 경위를 공식으로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직후의 전 민족적인 친일청산 요구가 조만간 충족되리란 기대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기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보수 세력이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매도하고 경찰까지 동원해 총격 테러를 가하는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체포 1호’를 오래 붙들어두기도 힘들었다. 결국 박흥식은 보석(보증석방)으로 풀려나 감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쇠약하다는 게 보석 결정의 사유였다.

1949년 4월 22일자 <경향신문>은 보석에 반발하는 반민특위 검찰관(검사)들의 집단사퇴 표명을 보도하면서 ‘반민법 운영에 이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과 친일청산의 어두운 운명을 예고하는 ‘이변’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수면 부족과 신경쇠약을 이유로 친일파를 풀어준 재판부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뇌물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있었다. 그러자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이 직접 한마디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김종인이라는 아홉 살짜리 손자를 둔 김병로 특별재판부장 겸 대법원장은 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검찰관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는 모르나 재판관에게 있어서는 그런 사실은 전혀 없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고 답했다.

그 뒤 박흥식 사건은 세상의 분노를 자아내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담당 검사인 정광호 반민특위 검찰관은 그해 9월 26일 구형 때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원래의 담당이었던 노일환 검찰관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뒤 사건을 새로 배정 받은 정광호는 유죄가 아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해 9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박흥식씨에 무죄’에 따르면 정광호가 내세운 무죄 이유는 아래와 같다.

“본인으로서는 피고에 대하여 구형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본다. 원래 반민법의 입법 정신은 일제 잔재를 숙청하는 데 있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고 따라서 기소 사실은 편중적이었으며, 공소를 기각하려 하였으나 이미 기소된 것이니만큼 부득이 구형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이상과 같은 구형을 하는 바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반민특위가 박흥식을 편파적으로 대했다고 언급한 뒤, 이미 기소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구형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심정을 고백한다면서 무죄 선고를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뒤의 재판부 선고 때도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재판부 역시 박흥식을 편들었다. 그해 9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반민 피고이던 박흥식씨’에 따르면, 박흥식이 일본을 위해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 활약은 없었으며, 신문에 쓴 글도 타의에 의한 피동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무죄 선고 이유가 제시됐다. 세상이 다 아는 박흥식의 친일을 부정할 길이 없으므로 ‘실질적 활약은 없었다’, ‘시켜서 한 일이다’ 등의 논리를 꺼냈던 것이다.

그런데 판결 이유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안 도산 선생에게 많은 원조를 했다’는 부분이다. 박흥식이 도산 안창호와 친분을 유지하며 도움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덮기 힘든 박흥식의 죄상을 안창호와의 인연으로 가리고자 했던 것이다. 박흥식의 친일 혐의를 벗겨주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에게 독립운동가의 영예까지 씌워줄 뻔했던 것이다.

박흥식이 안창호의 수감 생활과 출소 이후를 도운 것은 1938년까지다. 그런데 1937년부터 박흥식은 촉탁보호사를 겸하면서, 출옥한 항일투사들을 회유했다. 박흥식의 안창호 후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대목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 할 수 있다.

‘반민특위 체포 1호’ 박흥식의 석방은 친일청산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반민특위에 불들린 여타 친일파들도 박흥식처럼 풀려났고, 친일청산이 도리어 빨갱이들의 음모로 매도됐다. 그렇게 친일청산이 무산된 상태로 벌써 60년 넘게 세월이 흘러버렸다.

박흥식 사건은 친일이 아니라 ‘친일청산’이 청산된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이 사건은 ‘친일청산은 쉽지 않다’는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친일청산을 지지하는 쪽에는 분노를 주고, 반대하는 쪽에는 희망과 요행을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박흥식 석방이 상징하는 부조리가 청산될 가능성이 2020년 4월 15일부터 현저히 높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친일청산의 성공 가능성이 21대 총선을 계기로 한층 더 제고된 것이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로도 친일청산 및 과거사 청산을 계속해서 조롱하고 비웃고 훼방하던 보수세력 상당수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사실상 몰락했다. 저세상에 있을 박흥식과 그 동지들의 얼굴이 어두워질 만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한번 불려나와 진짜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조만간 다가오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전조(前兆)라 할 수 있다.

<2020-04-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 풀어준 이유가 수면부족과 신경쇠약?

수, 2020/04/22-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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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서울=연합뉴스)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했던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원로사목)이 25일 선종했다. 향년 88세. 2020.4.25 [천주교 인천교구 제공]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민주화·사회운동에 헌신했던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원로사목)이 25일 선종했다. 향년 88세.

가톨릭계에 따르면 1932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그는 반평생을 민주화·사회 운동 현장에 있었다.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했다 구속됐다. 1970년대 후반 동일방직사건 대책위원회 위원장, ‘목요회’ 상임대표,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으로 활동했다.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지냈다.

민문연 이사장 때인 2009년 당시 임헌영 민문연 소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을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바쳤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그는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ㅍ그를 두고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이면서도 지역 선교와 신앙 교육 등 사목활동에도 소홀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일들을 담았다.

2년여 투병을 해 온 것으로 알려진 그는 25일 오전 0시 5분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빈소는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 장례미사는 27일 오전 10시 답동 주교좌 성당에서 있을 예정이다. 장지는 인천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이다.

[email protected]

<2020-04-25> 연합뉴스

☞기사원문: ‘민주화·사회운동’ 헌신 김병상 몬시뇰 선종

※참고기사

☞한겨레: “사제로서 최선의 삶을 살도록 노력했습니다” (2018.12.17)

☞한겨레: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김병상 신부 (2008.09.09)


정의구현사제단 창립 유신독재 반대 민주화운동에 앞장
동일방직사태 굴업도핵폐기장 등 마다않고 사회정의 실천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질곡의 현대사에서 사회 정의와 민주화운동을 실천하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김병상 몬시뇰 원로사목이 25일 새벽 0시 5분 향년 88세 일기로 선종했다.

고 김병상 신부는 천주교 인천교구를 비롯한 각 교회 본당이 펼치고 있는 자선운동과 사회복지사업 등의 선교운동을 일군 분이자, 인천 민주화운동의 큰 숲이며 어른이다. 동일방직대책위와 굴업도핵폐기처리장 대책위에 등 김 신부는 시민과 노동자와 함께했다.

고 김병상 몬시뇰

김병상 신부는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몬시뇰은 천주교에서 주교품을 받지 않은 원로 신부에게 교황청이 공로를 인정해 내리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김 몬시뇰은 1932년 충남 공주 교우촌 요골공소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 몬시뇰은 어릴 때 어머니로부터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는 사제가 되기 위해 1948년 서울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와중에 폐결핵에 걸려 53년 7월 신학교를 그만뒀다. 그 뒤 병마를 극복하고 1961년 홍익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다시 1963년 33세 때 서울가톨릭신학대에 입학했다.

그는 1969년 12월 13일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 때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소신학교 때 전쟁과 피난생활을 겪고 병마와 싸우느라 늦깍이로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2006년 은퇴할 때까지 37년 동안 사제생활하며 기독교 복음과 사회선교, 사회정의 실천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있어 본당사목과 사회사목을 균형 있게 이끌어온 사제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면서 교회 밖에서 더욱 폭넓게 알려졌다. 그는 교구 총대리로 재직하던 1977년 유신체제에 맞서다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김 몬시뇰 1974년 지학순 주교가 유신독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창립되자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때부터 그는 천주교 인천교구가 실천했던 인천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됐다. 앞서 얘기한대로 1977년 유신헌법 철폐 기도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1976년~80년 인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장을 맡아 노동자를 보호했다.

김 몬시뇰은 특히 1989년~95년 정의구현사제단 공동대표를 지낼 때 같은 기간 인천에서 양심적인 지식인 40여명과 함께 창립한 ‘목요회’의 초대 회장을 맡아 인천시민운동의 초석을 마련했다.

김 몬시뇰은 목요회 회장으로 굴업도핵폐기물처리장반대 대책위원회 상임대표를 맡아 굴업도핵폐기물처리장을 백지화 했다. 당시 대책위는 인천 지역 재야단체와 학생단체, 주민단체가 대거 결합한 지역 전선 운동기구였다.

그 이후에도 김 몬시뇰은 실업극복국민운동 인천본부 상임대표와 인천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는 등 활발한 사회운동을 이어갔다. 김 몬시뇰은 2004년 학교법인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 대리를 맡아 활동하다가 2006년 11월 사목 일선에서 은퇴했다.

그는 은퇴 이후에도 2008년~13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등으로 참여하며 교회 안팎의 현장에서 기도와 사회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 뒤 2018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요양시설에서 머물다 2020년 4월 25일 새벽 선종했다.

천주교 인천교구가 주관하는 김병상 몬시뇰의 장례일정은 아래와 같다. 분향소는 인천 중구 답동 천주교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이며, 장지는 서구 하늘의문 묘원 성직자 묘역이다.

[장례일정] 
– 분향소 : 천주교 인천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 (인천시 동구 박문로 1, 032-765-6961)
 
– 홈페이지: http://www.caincheon.or.kr/
– 대중교통편: 제물포 북부역에서 송림동(동화동성당)방향으로 도보 10분, 차로 3분

– 입관예절 : 4월 26일(주일) 오후 2시 (국제성모병원 장례예식장 입관실)
– 입관 후 미사: 4월 26일(주일) 오후 3시 (교구청 보니파시오 대강당)
– 출관예절: 4월 27일(월요일) 오전 8시 30분 (국제성모병원 장례예식장 예식실)
– 장례미사: 4월 27일(월요일) 오전 10시 (답동 주교좌 성당)
– 삼우미사: 4월 29일(수요일) 오전 11시 (하늘의 문 묘역 성직자 묘역)
– 장 지: 인천 서구 하늘의문 묘원 성직자 묘역

<2020-04-25> 인천투데이

☞기사원문: 민주화운동 큰 숲 천주교 인천교구 김병상 몬시뇰 선종

토, 2020/04/2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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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일시] KBS 1TV 4월 28일 화요일 밤 10시 00분

역사저널 그날
262회 친일파 청산, 이루지 못한 꿈 – 반민특위

온 국민의 염원, 친일파 청산
해방 직후 국민들의 염원, 친일파 청산. 그 염원에 답하고자 1948년 10월 제헌헌법에 의거해 국가기구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한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반부터 강력한 추진력을 보인다. 하지만 현재까지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았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역사저널 그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검거된 거물급 친일파
온 국민의 주목 속에서 가장 먼저 검거된 친일파는? 조선 제1의 실업가 박흥식.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 화신백화점의 소유주이자, 일제에 전쟁 물자를 기부한 전형적인 식민지 기업가이다. 이후 악질 중의 악질로 꼽히는 친일 경찰 노덕술, 대중에게 영향력이 컸던 문인 이광수 등이 차례로 검거된다. 하지만 그들 중 반성을 하는 사람은 극소수. 심지어 이광수는 일제강점기에 살아있던 모든 사람이 반민족 행위를 한 것이라며 궤변을 늘어놓는데…

 

반민특위를 둘러싼 음모
반민특위는 출범 전부터 강력한 반대세력과 싸워야만 했다. 반민특위 출범 전 열린 대규모 반공 시위에서는 친일파를 척결하려는 이들은 모두 ‘공산주의자’임을 주장하며 반민특위 활동을 반대한다. 또한 반민특위 요원 암살 모의 사건이 발각되기도 하고, 친일 경찰들은 집단 사표를 제출하며 일전불사를 선언한다.
결정적으로 반민특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6.6사건이라 불리는 ‘반민특위 습격사건’. 수십 명의 무장 경찰이 반민족행위자 조사 서류를 압수하고 반민특위 요원들을 납치하는데…

반민특위 방해공작의 배후는?
관제시위, 반민특위 요원 암살 모의, 납치, 국회 프락치 사건 등 반민특위는 수많은 방해공작을 받는다. 그런데 이들을 지지하는 배후가 있었으니, 바로 이승만 전 대통령. 이승만 전 대통령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반민특위 소속의)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라고 밝힌다. 또한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을 만나 반민특위 조사 선상에 있는 핵심 인물들에 대한 조사 중단, 면죄를 강력히 요구한다. 결국 무기력해진 반민특위의 요원들은 전원 사임서를 제출한다.

이루지 못한 꿈
반민특위가 취급한 친일 혐의 688건 중 반민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단 41명. 그중 실형을 받은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난다. 그리고 1951년 반민족행위 처벌법은 폐지되고 ‘친일’을 언급하기 어려운 세상으로 바뀐다.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4월 28일 화요일 밤 10시 KBS 1TV <역사저널 그날> ‘친일파 청산, 이루지 못한 꿈-반민특위’에서 살펴본다.

<2020-04-28> KBS 

☞기사원문: 역사저널 그날 262회 친일파 청산, 이루지 못한 꿈 – 반민특위

화, 2020/04/28-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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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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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0523-1

[책소개]
문학평론가이자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해당 도서는 제목과 같이 정치 권력을 ‘몹시 꾸짖는’ 주요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각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작가들은 한국사회의 질곡을 그들의 글 속에 고스란히 녹여냈다. 일제 식민지와 6·25동란, 분단 현실과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우리 시대 문학은 무엇을 보고 어디에 펜촉을 향하고 있는가 저자는 준엄하게 묻는다.

1편 이호철
냉전 시대의 고정관념 허물기
1932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50년 6·25전쟁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울진까지 내려와 국군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고 12월에 월남해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 제면소 조수, 미군 부대 경비원 등을 하며 힘겹게 생계를 이어 갔다. 이 시절 실향민으로서 남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삶의 척박함과 치열한 생존 의식은 그의 소설의 원체험으로 자리하게 된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수, 2020/04/2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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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상임이사 조세열

4월 25일 평생을 민주화와 인권증진에 오롯이 바친 김병상 몬시뇰께서 하느님 곁으로 떠나가셨다.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했다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 ‘목요회’ 상임대표,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모임’ 상임대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등을 맡아 한국사회 곳곳의 불의에 저항하고 약자를 보듬은 진정한 목자의 삶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는 뒤늦게 인연을 맺었다.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를 기조로 삼을 것이라던 세간의 예측을 비웃듯, 철저하게 과거로 회귀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통일 분야와 과거사 관련 문제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

과거사 청산의 제일선에 서있는 민족문제연구소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오를 정비하고 반동 국면에 대응할 태세를 갖춰야만 했다. 먼저 2대 이사장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별세 이후 공석으로 있던 이사장직에 연구소의 위상에 걸맞은 어른을 모셔 구심을 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종훈 신부님께서 “인품으로나 신념으로나 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 훌륭한 분이 계신다”고 귀띔을 해주셨다. 그 분이 바로 김병상 신부님이셨다.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께서 주선한 자리에서 김병상 신부님은 “도움이 된다면 역할을 다 하겠다”고 흔쾌히 어려운 책임을 맡아 주셨다.

2008년 10월 1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그는 “연구소 출범과 함께 내걸었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매진하겠다. 이는 거대한 역사문화운동을 전개하는 단초이며 발판”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김병상 신부님은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완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후 2013년 지병으로 이사장직을 사임하실 때까지 참으로 중요한 순간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물론 전체 역사정의 실천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주셨다.

▲ 친일인명사전을 백범선생께 헌정하고 나서 기념촬영하는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

이명박 정부의 역사왜곡과 시민운동 탄압이 노골화하고 있던 시기에도, 김병상 신부님께서 꿋꿋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셨기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변함없이 가열찬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강제병합공동행동,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사업 등을 시작하고 기초를 놓은 것이 그 보기이다. 또 역사정의실천연대를 발족하여 친일·독재 미화와 교과서개악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제작하는 등 수구세력의 역사변조에 전면 대응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김병상 신부님은 종교가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 친일문제도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문제들이 친일 청산 문제와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뿌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하느님과 맘몬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이나 오늘의 사회 문제나 다 맘몬을 선택한 결과이다. 회개해 하느님을 선택하는 길, 그게 친일 청산이고 오늘의 사회 문제에서 진짜 벗어나는 길이다.”

가톨릭 교회가 일제침략기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친일인명사전』에 교단의 주요 인사들이 수록된 점을 비난하는 데 대해서도, 교회의 호교론적 변명을 비판하면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일갈하셨다.

불의와 부정에는 단호한 입장으로 일관하셨지만 실제 우리가 뵌 김병상 신부님은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몸에 배인 온화한 분이었다. 당신께서 “민주화운동과 사목에 기여한 바 없이 대접만 받아 부끄럽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며, 후진들에게도 항상 ‘앞선 자의 오만’을 경계하셨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듯이 김병상 신부님은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주셨던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소중한 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후배 성직자들에게 형으로 불릴 정도로 소탈하고 격의 없는 분이기도 하였지만, 우리 연구소 식구들에게는 한 결 같이 인자한 할아버지요 아버지처럼 대해 주셨다. 두 손을 잡아주시던 그 분의 따뜻한 눈길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회고록 『따뜻한 동행』에서도 드러나듯 신부님은 정의로우면서도 포용하는 사회를 지향하셨다. 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한 따뜻한 동행자셨다. 이제 신부님께서 남기신 뜻을 실천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생전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사회와 역사 정의 실현의 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늘에서도 지켜보시고 저희들이 불의에 맞서 나아갈 수 있도록 변함없이 이끌어 주십시오,

목, 2020/04/30-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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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8) ‘내역사’ 시즌 5: 4화: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가수 이지상과 함께

☞ (4.27) ‘내역사’ 시즌 5: 특별편성 임헌영 소장의 『한국소설,정치를 통매하다』 1편_이호철

☞ (4.21) ‘내역사’ 시즌 5: 3화: 『압록강은 휴전선 너머 흐른다』강주원 박사와 함께

☞ (4.14) ‘내역사’ 시즌 5: 2화: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푸순의 기적’ 김효순 전 한겨레 기자와 함께

☞ (4.07) ‘내역사’ 시즌 5: 1화: 『한국 첩보 현대사』”고지훈 연구원과 함께”

☞ (3.31) ‘내역사’ 시즌 5: 프롤로그: 민족문제연구소 상근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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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뉴스 

☞뉴스1: 북한에서 대동강 숭어국, 꼭 맛보고 오세요 (19.9.29)

저자 이지상은 대륙에 평화가 있다고 믿었다. 평화를 찾아가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미래에 대한 도전이고, 그것이 시베리아 안내자가 된 이유였다.

대륙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 북한 전쟁에 대한 공포, 양 체제의 반목으로 인한 대립, 분단에서 기인한 각종 불완전 요소가 상재하는 상태에서 대륙과의 소통은 궁극적 평화의 길에 이를 수 없다고 믿었다.

‘기차의 꽁무니에 걸터앉아 나도 평화가 되어 대륙의 어디든 따라가고 싶’어서 북한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내가 북한의 안내자가 된다면, 이라는 가상의 설정을 기준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처럼 나와 기차로 동행하는 도반들께 들려드리고 싶은 주제를 중심으로 골랐고 공부했다.’

수십 권에 달하는 북한 관련 책들과 기사, 방송, 북한에 다녀온 사람들과 탈북민들의 인터뷰를 섭렵했고, 북한의 생활상과 문화를 더 잘 알기 위해 북한의 노래와 소설, 시, 인문서적을 탐독했을 뿐만 아니라 수십 편의 영화를 보았다. 이런 노력과 열정, 그리움에 자신의 바람(Hope)까지 더해 저자는 북한의 구석구석, 소박한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지상
고단한 사람들의 일상에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는 가수, 시민활동가
청년문예운동의 시기를 거쳐 노래마을의 음악감독, 민족음악인 협회 연주 분과장을 지냈고 여러 드라마, 연극, 독립영화 음악을 만들었다. 1998년 1집 ‘사람이 사는 마을’, 2000년 2집 ‘내 상한 마음의 무지개’, 2002년 3집 ‘위로하다, 위로받다’, 2006년 4집 ‘기억과 상상’ 2016년 5집 ‘그리움과 연애하다’ 등의 앨범을 발표했다. 2010년 ‘이지상 사람을 노래하다’, 2014년 ‘스파시바, 시베리아’를 출간했다. 시노래 운동 ‘나팔꽃’의 동인으로, 깊이 있는 메시지를 통해 삶의 좌표를 만들어가는 음악을 지향하고 있으며 성공회대에서 ‘노래로 보는 한국 사회’를 강의하고 있다.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5

월, 2020/05/04-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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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4일 본사서 시상식

제21회 의암대상 수상자에 심철기 근현대사기념관 학예실장과 이학주 한국문화스토리텔링연구원장이 선정됐다.의암대상심사위원회는 최근 강원도청에서 심사위를 열어 학술부문에 심철기 학예실장을,공로부문에 이학주 원장을 각각 선정했다고 밝혔다.

심철기 학예실장은 국가보훈처 연구원,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조사관,연세대 연구교수,독립기념관 연구원 등으로 일하면서 류인석 선생을 비롯한 한말의병운동 연구에 업적을 남겼다.지역사회 의병운동 동향 등을 정리,연속성을 밝히고 재판기록과 당대 신문을 통해 일제의 의병탄압과 계몽운동세력의 의병 인식 등 의병운동의 다양성을 실체적으로 파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학주 원장은 강원대 강사,광주예술대학교 전임강사 등을 역임하며 ‘조선 13도의군도총재 류인석’ 등 의암 류인석 선생 관련 저술·논문·집필 학술 연구를 이어온 것 뿐 아니라 강연과 각종 전시회 등을 통해 류인석 선생을 비롯한 한말의병의 활동과 정신을 확산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다.시상식은 내달 4일 강원도민일보사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수상자에게는 상장과 상금 각 1000만원이 수여된다.

김진형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27> 강원도민일보 

☞기사원문: 제21회 의암대상 수상자에 심철기·이학주씨

월, 2020/05/04-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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