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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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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admin | 수, 2020/01/29- 00:10

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 기사]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흔적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2020-01-28>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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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석의 서울 푯돌 순례기
<남대문로 반민특위 본부 터>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에 위치
일제강점기 식민지 자본주의 심장부
48년 제헌의회서 제정한 헌법기관
반민특위 터, 2017년 미 금융사에 매각
지상 18층짜리 호텔, 터파기 공사 중
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운 푯돌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임시 보관
49년 6월 이승만 지시받은 경찰이 습격

친일 청산, 좌우 세력이 정치적 이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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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구 남대문로84 옛 국민은행 명동 본점 건물이 호텔 신축을 위해 철거돼 사라졌다. 이 건물 지하주차장 모퉁이에 있던 반민특위 푯돌은 용산구 청파동2가 식민지역사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자리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중구 남대문로84 KB국민은행 옛 명동 본점,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 터를 찾아 길을 떠난다. 반민특위는 1948년 9월 제헌의회에서 친일 잔재 청산을 위해 제정한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발족한 헌법기관이다. 1949년 8월 활동을 마칠 때까지 당시 명동 롯데백화점 맞은편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을 독립 청사로 썼다.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6번 출구로 나오면 한국전력 서울본부와 SK네트웍스 빌딩 바로 다음 건물이다. SK 명동 빌딩과 이비스(ibis) 앰배서더호텔을 지나면 명동 입구에 닿는다. 조선 건국 이래 광통교 아랫동네는 종각~을지로 입구~명동~숭례문을 잇는 남대문로 상의 최고 상권이었다. 길 건너편은 소공동 옛 반도호텔(롯데호텔)~옛 조선은행(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이어졌다. 남대문로는 ‘경성의 월스트리트’였다. 일제강점기 이후 ‘식민지 자본주의’의 심장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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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민특위 청사로 쓰였던 옛 상공부 특허국 건물.

반민특위 터는 철거돼 사라졌다. 사방에 둘러쳐진 가림막 안을 가만히 엿보니 텅 빈 터에 터파기(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내는 기초 공사)가 진행 중이고, 수시로 공사 굉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다. 철거 안내문과 건축 허가 표지판이 붙어 있는 가림막 앞 보도에는 ‘명동 국민은행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안내판이 서 있다.

이것이 사람들의 뇌리에 남은 장소성이다. 대지 면적 2589㎡(783평), 연면적 2만6764㎡(8096평)의 이 건물은 2017년 마스턴투자운용과 미국계 대체투자 운용사인 안젤로고든에 2400억원에 팔렸다고 한다. 지하 3층~지상 18층짜리 고급 호텔과 상점이 들어서면 남대문로의 풍경을 또 한번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반민특위 푯돌은 보이지 않는다. 공사 전 푯돌은 은행 정문을 지나 명동7가길로 꺾여 돌아가는 건물 주차장 입구 모퉁이에 엄전하게 있었다. 본래 이곳은 체포된 부역자를 가두던 유치장 자리였다. 1999년 푯돌 건립 당시 관계 기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지나다니는 대로변에 세우지 않았으면 한다”라면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정문을 피해 유치장 터로 밀려난 것이다.

푯돌은 어디로 갔을까? 굴곡진 반민특위와 푯돌의 행로가 오버랩되면서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해 말 푯돌 순례자의 두 눈으로 확인한 푯돌에는 ‘이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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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은행 명동 지점이 철거되기 전인 2018년 9월 촬영한 반민특위 푯돌.

철거 과정에서 이 은행 지하주차장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푯돌의 행방이 묘연하다.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이 빌딩 1층 화단에 세웠으나 이후 알 수 없는 이유로 두 차례 다른 자리로 전전한 끝에 얻은 안식처였다. 그러나 푯돌의 옆면과 뒷면을 모퉁이에 바짝 붙여 놓아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푯돌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팎곱사등이(가슴과 등이 병적으로 튀어나온 사람) 푯돌 신세가 처량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 확인해보니 이번에 건물을 완전히 철거하면서 오갈 데가 없어 용산구 청파동 2가 식민지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언론인 정운현의 <잃어버린 기억의 보고서-증언 반민특위>에 따르면, “반민특위 사무실은 1층과 2층 각각 100평 정도의 공간이었고, 1층에 칸막이를 만들어 제1, 2, 3조사부와 조사부장, 조사관, 서기관 자리를 만들었다. 김상덕 위원장실은 회의실로 사용했다. 2층은 검찰관들이 사용했다. 반민 피의자의 체포와 특위 요원 경호를 위해 총경부터 경사에 이르기까지 47명의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별경찰대원들은 1층 구석 칸막이방을 사용했다”는 구술이 나온다.

업무 공간이 다소 좁아서 불편했지만 입지는 최고였다. 줄줄이 잡혀 들어오는 친일 명사들을 보려고 구름 인파가 몰려들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활동을 시작했다. 특별조사위원회(위원장 김상덕 의원)와 특별재판부(부장 김병로 대법원장), 특별검찰부(부장 권승렬 법무장관) 등 거국적인 조직을 갖췄다.

‘백화점 왕’으로 군림한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일본 관동군 첩자 노릇을 한 <대한일보> 사장 이종형, 2·8독립선언서를 쓴 춘원 이광수, 3·1독립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 민족대표 33인이자 <매일신보> 사장을 지낸 최린,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배정자를 비롯해 수도경찰청(서울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 수사과장 최난수, 사찰과 차석 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 친일 경찰 간부를 체포하는 성과를 거뒀다.

총 688명을 조사해 408명에게 영장을 발부하고, 559건을 검찰에 송치했으며 221건을 기소했다. 이 중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5명은 집행유예, 7명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36년간의 식민 시기에 부역한 7천여 명에 이르는 친일파 일람표를 작성해, 심판하겠다고 요란하게 출범한 것치고는 초라한 결과였다. 나치 독일에 5년간 점령당한 프랑스가 부역자 1만 명을 사형에 처하고, 10만 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사례와 비교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반민특위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친일파 처벌은 저주와 속박의 굴레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프랑스의 드골 군대와 레지스탕스는 연합군과 함께 점령군 자격으로 파리에 입성해 나치 협력자를 처단했지만, 우리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기백명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을 뿐이다. 독자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맞지 못한 원죄가 앞을 가로막았다.

해방 이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전까지 3년간 남한을 통치한 미군정은 친일파 숙청은 군정의 업무가 아니라고 일축했다. 그들에게 해방된 약소국의 민족 감정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친일 관료와 경찰, 군인은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승진했다. 미국에게는 치안 유지와 소련과의 냉전체제 경쟁이 중요했다. 친일부역자 처단보다 공산 세력 척결이 시급했다.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9월 스탈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해 친일파 청산 문제를 통해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끌어내라”는 비밀 지령을 좌익 세력에게 내려보냈다. 미국과 소련 양 대국에게 친일파 청산은 체제 경쟁용에 불과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 친일 경찰의 백주 반민특위 테러 사건 그리고 백범 김구 암살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이어지면서 반민특위는 힘을 잃고, 해체 과정을 밟게 된다. 1949년 6월6일 아침 7시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40여 명의 경찰관이 반민특위를 습격해, 35명의 특위 인사를 붙잡아 고문한 사건은 이 대통령의 지시와 김태선 시경국장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6월9일자 회견에서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 명령했다”고 실토했다. 결국 대통령을 등에 업은 친일 경찰이 국회를 기반으로 한 특위를 무력화한 셈이다. 지독한 반미·반일주의자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정치적 의중과 맞아떨어졌다.

이 대통령은 “국내 기반이 없는 자신의 정치적 우군이 친일 세력이고, 민족의 절반을 차지하는 친일 부역자 처벌은 분열과 혼란을 초래하는 부질없는 짓”이라고 여겼다. 경찰과 군 간부 대부분이 친일 부역자였다. 경찰의 경우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 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친일 경찰 출신이었다. 1946년 11월까지 경찰 간부 비율을 보면 경위 이상 1157명 중 82%인 949명이 일제강점기 경찰 경력자였다. 하위직의 30%도 경력자였다.

군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에 복무했던 친일파들이 군의 요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무엇보다 반민법 제5조는 “친일 경력이 있는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반민법은 반민특위와 이승만의 숙명적 대결을 예고했다.

지금 우리에게 반민특위는 역사 교과서 속 교훈이 아니다. 해방 후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대의명분에도 좌우익 간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 그 기회를 놓쳤다. 반민특위의 좌절은 민족 통합의 좌절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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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에 이전된 반민특위 푯돌.

반민특위 푯돌을 잘 보관 중이라니 다행이다. 하지만 만약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족문제연구소가 아니라 서울시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물 신축 과정에서 갈 곳 없는 푯돌을 시청 창고나 서울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넣어두진 않을 터이다. 건물 옆 다른 자리에 임시로 옮겨놓았다가 다시 원위치하는 순서를 밟는 게 이치다.

그렇다면 혹시 푯돌의 건립 주체가 민간 단체이기 때문에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반민특위 푯돌이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일본인이 많이 드나드는 호텔 신축 이후 푯돌이 제자리로 돌아갈지 장담 못한다고 한다. 반민특위 푯돌이 일본인 관광객 유치와 국민 통합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 놓으려 한 권위주의 시대 관계 당국의 판단 착오가 반복되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푯돌이 반드시 돌아와 반민특위 유치장이 아닌 정문 앞에 당당히 자리잡길 바란다.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ㅣ서울전문 칼럼니스트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2019-04-18> 한겨레 

☞기사원문: 이승만 “민족 분열만 초래” 경찰 동원 강제 해산…푯돌마저 ‘수난’

목, 2019/04/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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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광동 지부 개소식

민족문제연구소 광동지부 창립식이 지난 15일(월) 오후 5시 동관 东城国际호텔 3층 회의장에서 박호균 사무국장의 사회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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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

이날 참석한 문학평론가인 민족문제연구소 임헌영 소장(좌, 사진)은 “3.1혁명과 촛불혁명”은 인간혁명의 출발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가졌다. 이어 방학진 기획실장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소개와 앞으로의 방향 그리고 근현대사에 대한 간단한 강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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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 광동 지부장

초대 지부장을 맡게 된 김유(우, 사진) 광동 지부장은 인사말에서 “묻어버린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어 언젠가는 비수를 들이댄다” 면서 역사바로세우기를 강조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는 평생을 친일문제를 연구한 문학가이며 재야 사학자 임종국(林鐘國)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1991년에 설립된 비영리 사단법인으로서 친일문제 관련 학술 행사와 전시회, 친일파 기념사업 저지, 독립운동유적지 및 독립운동가 발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등 역사정의실현에 앞장서고 있다.

운영재원은 전국과 해외의 약 1만 3천여 후원회원들의 기부금과 연구소가 발간한 서적판매 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설립 당시의 이름은 ‘반민족문제연구소’였으며, 1995년 현재의 이름인 민족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인권변호사 이돈명이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제2대 이사장은 일제강점기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이, 제3대 이사장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설립한 김병상 몬시뇰 신부가 맡았으며 현재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로인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내일의 바람직한 역사를 열어가기 위한 첫 단계로 국민성금을 바탕으로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데 이어 국치일인 작년 8월 29일에는 역시 시민들의 성금으로 <식민지역사 박물관>을 건립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모두 4389명의 친일인사들이 올라 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인구를 약 3천만명으로 봤을 때 0.01%에 불과하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민족반역과 부일협력자 중에서 비교적 역사적 책임이 무거운 인사들이 수록되었는데 대원칙은 친일행위의 자발성, 적극성, 지속반복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했다거나 하급 관료 등 생계형 친일까지 문제 삼지는 않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국내는 물론 미국의 워싱톤, 뉴욕, LA와 일본 도쿄에도 지부가 있다. 그리고 이번에 문을 연 광동지부는 중국에서는 최초이고 해외로서 5번째 지부인 것이다.

앞으로 광동지부는 강연회 및 독립운동 유적지 답사 등을 통해 우리 교민들과 함께 과거사 청산을 통한 역사바로세우기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 해나갈 예정이다.

<출처> ☞【동관东莞】민족문제연구소 광동 지부, 동관에 문 열어

목, 2019/04/1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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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 10] 종로도서관 ②

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을 선구적으로 이끈 이범승의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범승의 공적과 별개로 일제가 경성도서관 운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의도’에 대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식민 시대 일제의 도서관 정책을 고려하면, 일제가 이범승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모양새로 도서관 건립과 운영을 지원했다고 보는 게 진상에 가깝지 않을까. 이용재 교수가 이범승의 경성도서관 건립 제안에 대해 평한 부분을 살펴보자.

“조국의 왕통(王統)이 일제의 상징 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일제를 향하여 조선 땅에 ‘민중의 대학’을 설립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애국계몽사상의 실천 중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하겠다.”

도서관 건립을 통해 ‘애국계몽사상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려 한 이범승이 일부러 일제의 비위를 맞추며 도서관을 ‘쟁취’했던 걸까. 경성도서관 이전과 이후 이범승의 행보가 애국계몽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있다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범승은 그렇게 해석하기 어려운 삶을 이어간다.

이범승의 애국계몽활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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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 사직공원에 재개관한 종로도서관 재개관 당시 종로도서관은 6만 권의 장서를 소장했고 하루 600여 명의 시민이 이용했다. 비슷한 시기인 1968년 8월 1일 종로도서관 근처에 사직 파라다이스 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사직 파라다이스 수영장은 1969년 개장한 장충 수영장과 함께 인기 있는 서울의 야외 수영장이었다.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물놀이하는 선남선녀를 훔쳐보고 싶어서였을까. 한때 종로도서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좌석은 야외 수영장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였다. ⓒ 백창민

이범승은 1887년 8월 29일 만석 갑부 이기하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에서 고등학교와 교토제국대학 독법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에서 2년 동안 일했다. 이범승은 경성도서관 운영 시절인 1924년 4월부터 반일운동 배척과 일선융화를 표방하며 만든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이사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당시 조선 총독이던 사이토 마코토를 11회나 면담하기도 했다.

경성도서관을 5년 동안 운영한 후에는 1926년 9월부터 고등관 5등 사무관으로 임명되어 조선총독부 식산국 농무과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1928년 11월에는 쇼와 천왕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조선박람회 사무위원, 조선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황해도와 경상북도 산업과장을 지냈다. 1940년 9월부터는 경성에서 변호사를 개업해서 일했다. 친일 협력단체 동민회 활동과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 경력 때문에 이범승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경성도서관을 인수한 경성부는 이범승의 조카 이긍종을 분관장으로 임명한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시대 첫 분관장을 맡은 이긍종은 일본 메이지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긍종은 1926년 4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종로분관장을 맡았는데, 1929년까지는 촉탁, 1930년부터는 사서였다.

종로분관장을 그만둔 이긍종은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친일 신문인 <조선상공신문>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고 ‘조선춘추회’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도서관과 언론 분야에서 활약한 이긍종은 <친일인명사전>에 삼촌 이범승과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경성도서관을 분관으로 편입한 후 일제가 친일 성향 인물을 임명해서 도서관을 경영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부윤 이범승과 종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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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종로도서관 열람실 풍경 1967년 7월 촬영한 이 사진은 종로도서관이 탑골공원에 머물던 시절 열람실 풍경이다. 지금처럼 열람실에 “칸막이”가 있지 않았는데, “정숙”과 함께 모자를 벗으라는 ‘탈모’ 안내가 벽에 부착돼 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해방 후 이범승은 미군정 치하인 1945년 10월 25일부터 1946년 5월 9일까지 6개월 남짓 경성부윤을 맡기도 했다. 경성부윤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장이다. 이범승이 ‘서울시장’이 아닌 ‘경성부윤’인 이유는 그가 재임할 때 서울은 ‘서울시’가 아닌 ‘경성부’였기 때문이다. 그의 후임인 김형민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시 승격과 함께 ‘초대 서울시장’이 됐음을 생각할 때 이범승은 ‘마지막 경성부윤’으로 일한 셈이다.

경성부윤 시절 이범승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을 ‘종로도서관’으로 승격시켰다(종로도서관 초대 관장은 송몽룡이다). 승격한 종로도서관은 동대문도서관이 문을 여는 1971년 3월까지 남대문도서관(지금의 남산도서관)과 함께 수도 서울에 자리한 유이한 공공도서관으로 역할을 이어갔다.

도서관에 관심 많던 이범승이 경성부윤 또는 서울시장으로 오래 일했다면 해방 후 서울의 도서관 정책에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고집이 세고 자기 스타일이 강한 그는 미군정 책임자 윌슨 중령과 갈등을 빚다가 반년 만에 사임했다. 이범승은 1952년 민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됐다.

경성부윤 외에 이범승의 이채로운 경력은 1957년 성균관 유도회(儒道會) 총본부 부위원장으로 활동한 점이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에게 비판적인 심산 김창숙을 성균관대학교 총장에서 몰아내고 이듬해 친일파 출신 유도회 집행부를 구성한다. 이명세, 윤우경과 함께 이승만이 앉힌 친일파 출신 집행부 중 한 사람이 이범승이다.

종로도서관이 사직공원으로 이전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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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도서관을 부수고 지은 “파고다 아케이드” “파고다 아케이드”가 지어진 탑골공원 서문 일대에는 경성도서관, 지금의 종로도서관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파고다 아케이드를 짓는다. 사진 오른편에 보이는 파고다 아케이드는 당시에도 “불법 건축물”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21년부터 반세기 가까이 탑골공원에 있던 종로도서관은 1967년 10월 2일 서울시 도시계획사업으로 철거된다. 종로도서관 철거 및 이전 과정은 황당하기까지 한데, 이전할 건물을 먼저 짓고 도서관을 철거한 게 아니라 건물을 짓기도 전에 철거부터 먼저 했다. 심지어 철거가 확정된 종로도서관은 수개월 동안 이전 부지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 폐관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다행히 시민의 지원과 각계의 관심으로 1967년 10월부터 사직공원 근처에 신축 공사를 시작해서, 1968년 8월 20일 지금의 모습으로 개관하긴 하나 종로도서관은 종암동 서울시 자재창고에 장서와 비품을 보관한 채 10개월 동안 휴관해야만 했다.

조선인이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을 부수고 박정희 정권은 탑골공원 그 자리에 뭘 지었을까? 바로 ‘파고다 아케이드’라고 불린 상가를 만들었다. 탑골공원 구역을 따라 2층 높이 현대식 상가를 짓고 악기와 의류, 전자제품 매장을 들인 것이다.

종로도서관 철거뿐 아니라 유서 깊은 탑골공원을 상가 건물로 빙 둘러싼 것에 대해 당시에도 비판이 많았다. 3.1 운동의 시발점 역할을 하고 4.19 혁명 과정에서 이승만 동상을 쓰러뜨리는 등 민중의 함성이 울려 퍼진 이곳을 상가 건설을 통해 ‘용도 변경’했다는 의혹도 일었다.

한때 반도 조선 아케이드와 신신백화점과 함께 3대 아케이드형 상가로 꼽힌 파고다 아케이드는 결국 1983년 전두환 시대 철거된다. 하지만 종로도서관을 철거하고 상가 건물을 지은 이 사건은 박정희 시대 도서관의 처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1964년과 1974년 소공동에 있던 남대문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이 남산으로 각각 이전한 것처럼, 박정희 시대 도서관은 도심에서 산으로, 외곽으로 밀려난다. 그나마 사직공원으로 옮긴 종로도서관은 종로구 관내로 옮겨 그 이름을 유지했지만, 남대문에서 남산으로 옮긴 남대문도서관은 이름을 ‘남산도서관’으로 바꿔야 했다.

이승만 시대 그나마 도심에 있던 주요 도서관이 박정희 시대 외곽으로 밀려 난 건 뭘 의미할까. 1963년 <도서관법>이 처음으로 마련되긴 하나 박정희 시대 도서관이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근대화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도서관은 그 과실을 함께 나누지 못한 채 여전히 ‘변방’에 머물렀다.

도서관의 처지는 우리 시대라고 크게 다를까. 2015년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사직단 복원 계획에 종로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이 포함되면서 철거 및 이전이 거론되기도 했다. “‘왕조 시대 유적’ 복원을 위해 ‘공화국 시대 유적’을 파괴해야 하느냐”는 비판이 일며 문화재청이 물러서긴 했지만 말이다.

도서관 선구자의 친일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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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도서관에서 <친일인명사전> 찾아보니 지난 7일 종로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촬영한 사진. 우연인지 몰라도 종로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은 전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었다. ⓒ 백창민

오랜 역사만큼 많은 고서(古書)를 소장하고 있는 종로도서관 앞뜰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종로도서관 전신, 경성도서관을 세운 건립자의 업적을 기리며 1971년 9월 17일 세운 이범승의 흉상이다. 반세기 가까이 된 이범승 동상은 도서관인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동상이며, 울주도서관이 2017년 세운 엄대섭 동상과 함께 국내에서 단 둘 뿐인 ‘도서관인 동상’이다.

윤익선과 이범승은 우리 도서관 분야에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9년 11월 8일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모두 등재됐다.

윤익선의 행적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1940년 4월부터 ‘대동일진회’ 산하기관인 ‘동학원’ 교장으로 활동한 것이다. 대동일진회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아들 이석규가 일본 우익단체 흑룡회의 지원을 받아 만든 친일단체다. 대동일진회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기치로 내걸고 활동했다. 윤익선은 1939년부터 일진회보에 ‘황인종은 결속하자’는 글을 기고하고, 1941년 8월 삼천리사 주최 좌담회에서 황국신민으로 임전국책(臨戰國策)에 전력을 다해 협력하겠다고 결의했다.

윤익선은 해방 후인 1962년 3월 <조선독립신문> 발간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는다.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윤익선은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혔다. 친일부역 행위가 드러나면서 윤익선은 2010년 서훈이 취소되고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서 이장(移葬)했다. 2010년 윤익선의 서훈 취소 때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국회부의장과 서울시장을 역임한 윤치영도 함께 서훈이 취소됐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민특위가 적용한 것과 거의 동일한 기준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을 선정해서 사전을 발간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와해되지 않았다면 윤익선과 이범승은 오래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분받았을 것이다.

지난 7일 종로도서관을 직접 찾았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친일인명사전>(전3권) 중 윤익선과 이범승, 이긍종의 친일 행적이 수록된 제2권만 없었다. 도서관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참고도서여서 관외 대출도 불가능한 책이다. 한 직원에게 물어보니 “분실됐다”라고 했다.

종로도서관 홈페이지를 검색해 봐도 <친일인명사전>은 역시 2권만 빠져 있었다. 종로도서관이 2권이 없음을 인식하고 데이터베이스에 반영했다는 건데, 누락을 알고도 다시 책을 채우지 않은 것이다.

혹시 몰라 17일 오후에도 책을 검색해 봤지만 역시 2권만 없었다. 이유가 궁금해 이날 종로도서관 측에 해명을 요청한 결과 “확인해 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8일 “찾아보니 서가에서 발견됐다. 이제 홈페이지에서도 검색할 수 있다”라고 알려왔다. 도서검색 결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건 단지 해프닝이었을까.

이범승 동상을 ‘철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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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도서관 앞뜰에 있는 이범승 동상 이범승 동상은 1971년 당시 서울시 교육감 하점생이 세우고 동상 아래 이범승 업적에 대한 글은 종로도서관 9대 관장 이홍구가 썼다. 도서관인 동상 중 우리나라에서 처음 세워진 동상이다. 이범승 동상 아래 그의 업적을 새긴 비문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언급이 단 한 줄도 담겨 있지 않다. 반 세기 가까이 그의 동상은 “친일파”가 아닌 “도서관 선구자”로 종로도서관 입구를 지켰다. ⓒ 백창민

공공도서관 건립을 주도한 도서관 선구자가 모두 ‘친일파’로 전락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 선구자로서 업적만큼 그 친일 행각도 제대로 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도서관 분야 선구자가 아쉬운 상황이라 해도 ‘업적’만 칭송하고 친일파로서 ‘죄상’을 눈감는 건 문제 아닐까.

친일파 동상 철거와 친일파 이름을 딴 도로명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한창 일었다. 이런 맥락에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이범승 동상에 대해 반세기 동안 도서관계에서 어떤 의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도서관과 문헌정보학 분야의 역사적 무관심 때문인가, 도서관 선구자의 부끄러운 친일 행각을 덮기 위함인가. 종로도서관 이범승 동상은 ‘철거’하거나, 최소한 동상 옆에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적시’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인적 청산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틀이 놓인 우리 도서관 분야는 일제 식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한 걸까. 도서관 용어와 공간, 제도, 운영 면에서 우리는 일제 식민 시대를 얼마나 극복한 걸까. 식민 잔재라는 ‘칸막이 열람실'(일반 열람실)을 해방 후 70년이 넘도록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우리 도서관은 친일 청산의 ‘무풍지대’인가(관련기사 : “도서관의 칸막이 공부방은 식민지배 잔재”).

1985년 11월 9일 대한도서관연구회 엄대섭 회장이 마련한 ‘한일 공공도서관 관계자 간담회’에서 일본 도서관 관계자는 한국 공공도서관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대다수 도서관이 학생들에게 자리를 빌려주는 ‘대석업'(貸席業)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서구로부터 ‘번안한 도서관’을 이식했다. 우리와 비슷하게 도서관을 ‘칸막이 열람실’ 위주로 운영하던 일본은 태평양전쟁 패전 후 발 빠르게 도서관을 변화시켜 나갔다(일본 공공도서관에서 ‘칸막이 열람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해방 후 우리 역시 미국과 세계로부터 ‘도서관학'(문헌정보학)을 수입했다. 세계 도서관 변화를 직접 목도하고 그 흐름을 따라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일본이 번안해서 이식한 ‘식민지 도서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도서관은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과거의 제도와 운영을 관성적으로 답습한다면 우리 도서관은 언제까지나 ‘식민지 도서관’에 머물 것이다. 34년 전 일본 도서관 관계자가 통렬히 지적한 ‘대석업’에서 우리는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종로도서관]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9길 15-14(사직동)
– 이용시간 : 인문사회자연과학실 / 어문학실(평일 09:00 – 22:00, 주말 09:00 – 17:00), 자연과학정보실(평일 09:00 – 20:00, 주말 09:00 – 17:00), 인왕관(평일 09:00 – 18:00, 토요일 09:00 – 17:00), 자율학습실 / 노트북실(평일 07:00 – 23:00, 11월-2월 평일 08:00 – 23:00, 주말 07:00 – 22:00, 11월-2월 주말 08:00 – 22:00)
– 휴관일 : 매주 둘째, 넷째 월요일, 법정공휴일
– 이용자격 : 서울시민, 서울 소재 직장인 또는 학생. 무료
– 홈페이지 : http://jnlib.sen.go.kr/
– 전화 : 02-721-0707
– 운영기관 : 서울시교육청

<2019-04-1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종로도서관 친일파 동상, 그냥 두고보면 안 되는 이유

금, 2019/04/19-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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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4.19혁명기념일 맞아 대전단체들,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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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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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공동행동의 기자회견과 동시에 왕복 4차선 도로 대각선 맞은 편에서 맞불집회 하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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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태극기와 성조기 등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는 보수단체 회원들의 모습. ⓒ 오마이뉴스 장재완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이 배재대학교에 서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촉구하고 나섰다. 이에 반대하는 보수단체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타나 ‘맞불집회’를 열었다.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동상철거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백만 민간인 학살 책임자 이승만의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시작 전부터 긴장감이 감돌았다. 공동행동이 기자회견을 예고한 11시보다 앞선 10시 30분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미 길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맞불 집회를 시작했다.

이후 보수단체 회원들과 공동행동 회원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욕설이 오가며 충돌 위기까지 치달았으나 경찰과 다른 회원들의 만류로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은 공동행동 측을 향해 욕설을 쏟아 부었다. 이들은 “이게 나라냐, 이 XX들아”, “양심도 없는 것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은 북에 가져다 버려야 한다”는 등의 험한 말을 쏟아냈다.

이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를 든 채 이승만 동상과는 관계없는 ‘박근혜 대통령은 억울하다’, ‘사기 재판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감옥에 갇혔다’, ‘문재인은 나라를 이 모양 만들었다’, ‘김경수는 내보내 주면서 왜 박근혜 대통령은 가줘 두느냐’는 등 정치적 발언을 쏟아 냈다.

오전 11시가 되자 공동행동 주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이에 보수단체들은 스피커의 볼륨을 더 올려 구호를 외치는 등의 맞불집회를 이어갔다.

공동행동 발언자로 나선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은 “오늘은 1960년 4월 19일 대학교수들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날”이라며 “이승만은 친일 부역자들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삼아 독립운동가들과 양심적 정치지도자들을 고문하고 탄압했고, 심지어 암살하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사회는 건전한 상식과 양심, 그리고 사회정의보다는 눈치와 아부로 개인의 부귀영화만을 위한 온갖 부정과 사기가 당연시되어 왔다”면서 “배재대학교는 대체 이런 인물의 동상을 세워 놓고 학생들에게 무얼 배우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 강영미 대전참교육학부모회 대표도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난 인물의 동상을 세워 놓고 우상화하는 것은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것이며, 수차례 이승만 동상 철거를 요구해왔던 학생과 대전시민들을 우롱하는 참으로 비교육적인 처사”라면서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전국의 이승만 동상은 모조리 철거되어야 하고, 현충원에 있는 이승만 묘소도 당장 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재대학교 졸업생도 발언에 나섰다. 2008년 배재대 졸업생이라고 밝힌 김상기 배재대민주동문회 회원은 “배재대학교는 자랑할 인물이 그렇게도 없어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 놓고 그를 기념하려 하고 있느냐”며 “이는 학교를 빛내는 게 아니라 먹칠하는 짓이다. 학생들이 동상 앞을 지나가면서 침을 뱉고 있는데, 왜 철거하지 않느냐”고 분개했다.

공동행동은 기자회견문을 통해서도 “배재대학교는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대한민국 최초 사랍학교인 배재학당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며 “따라서 배재대학교는 배재인만의 자랑이 아닌 우리 대전시민 모두의 자랑”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러하기에 우리는 배재인의 수치이자 대전시민의 수치인 저 독재자 이승만의 동상을 하루빨리 치워 주길 바란다”면서 “3.1혁명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용기 있는 결단으로 대전시민에게 큰 의미있는 선물을 안겨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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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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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박해룡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장.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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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혁명기념일을 맞아 대전지역 53개 단체로 구성된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은 19일 오전 대전 서구 도마동 배재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배재대는 이승만 동상을 즉각 철거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시각 길 건너편에서는 보수단체, 이른 바 “태극기 부대”들이 맞불 집회를 열었다. 사진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내걸은 현수막. ⓒ 오마이뉴스 장재완

이러한 공동행동의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동안 보수단체 회원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애국가’와 ‘대한민국 만세’ 등을 부리며 집회를 이어갔다.

이들은 ‘배재대 우남 동상을 지키기 위한 자유시민연대’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이날 공동성명서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를 부정하고 조작하는 ‘역사청산’이 시도되고 있다. 4.3 남로당 봉기는 반정부 민주화 운동으로, 이승만의 자유공화국 건국은 건국에 반대한 김구의 ‘가상(假想)민족’ 국가로 둔갑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승만을 괴뢰로 단죄하고 묘를 파내라는 역사 날조가 공중파를 타고 있으며, 대전의 ‘이승만 동상 철거 공동행동’이란 단체가 민간 사립대 교정의 동상을 치우라고 행패를 부리고 있다”면서 “4.19 의거 59주기를 맞아 우리는, 이러한 ‘대한민국 청산론자’들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고자 한다. 자유와 번영을 구가해 온 대한민국에 청산해야 할 역사란 없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또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세력과 타협을 강요하는 미군정이나 초대국회의 내각제세력과 맞서 싸울 때 한 치도 물러설 줄 모르던 분이었고, 나라를 걱정하며 불의에 맞서 싸우다 부상당한 젊은 학생들의 용기 앞에서는 그들을 위로하며 스스로 권좌의 자리에서 내려왔다”며 “신생독립국 역사에서 그런 ‘독재자’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끝으로 “그런 그를 미국의 괴뢰로, 양민 학살자로 묘사하며 국립묘지에서 파내고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체나 집단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한다”며 “선대가 세운 기념동상을 철지난 이념의 노예들이 철거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고 덧붙였다.

<2019-04-1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학생들도 이승만 동상에 침 뱉어”… “빨갱이들은 북으로” 

※관련기사 

☞뉴스1: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여부 놓고 찬반 갈등 심화

☞디트NEWS24: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찬반 ‘맞불집회’

※뉴스영상 

☞YTN: ‘배재대 이승만 동상’ 철거 찬·반 집회 열려화

토, 2019/04/20-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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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학교 친일잔재 청산 전수조사 나선 경상남도교육청

-대부분 가이즈카 향나무…이토 히로부미가 대구에 처음 심어
-경남교육청에 심어진 향나무 뽑아내고 소나무로 교체
-교체 강제할 순 없지만 교체 적극 권장할 계획
-친일 음악가 조두남, 창원에만 7개 학교 교가 제작
-일장기 모양의 학교건물도 남아있어
-일본 식민주의 사관 넘어 향나무 뽑는 실천부터

■ 방송 : 경남CBS <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 이일만 장학관

◇김효영> 여러분이 다녔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요. 교가는 누가 만들었는지 기억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흔히 친일파로 분류하는 음악가가 만든 교가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교육기관 곳곳에 친일 잔재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종훈 경남교육감의 지시로, 경남교육청에서는 전수조사가 실시가 되고 있습니다.
친일잔재 청산을 위한 전수조사를 맡고 계신 경남교육청 중등교육과의 이일만 장학관 모셨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안녕하세요?

◇김효영> 특별히 전수조사까지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념해서 우리 교육청 차원에서 일제 잔재 청산과 우리 얼 살리기 교육사업을 전 교육기관을 대상으로 해서 한 번 실시를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판단이 돼서 2년간에 걸쳐서 실시를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조금 전에 제가 교가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교가 말고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오래된 역사를 가진 학교들에서는 가보면 교장실에 역대 교장들 사진이 걸려 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김효영> 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거기에 보면 일본인들의 사진도 그대로 걸려 있기도 하고, 사진이 없는 학교라도 명패 정도라도 이렇게 걸려 있는 그런 학교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가 1910년에 한일합방을 시키고 난 뒤 모든 학교를 군대화하는 형태로 이뤄지면서 교원들에게도 제복을 입혔고 학생들에게까지 교복을 입혀서 통치가 이뤄지다보니까 아마도 교장들의 사진에서도 제복을 입은 것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김효영> 경남교육청은 향나무를 뽑았던데, 친일 잔재란 이유로. 학교 교목도 친일잔재로 볼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교목 같은 경우는 가이즈카 향나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본이 원산지로 돼 있고, 나사 모양으로 뒤틀려서 자란다고 해서 나사백이라고도 하고, 한자로 표기하면 패총으로 표기가 됩니다.

◇김효영> 패총.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조개무덤. 일제 강점기에 학교나 관공서에 많이 심어졌고, 100여 년 전인 1909년 1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순종 황제와 함께 대구 달성공원을 찾아 기념식수로 처음 심었다고 전해지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서, 지난 3월 1일에 우리 도교육청에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가이즈카 향나무를 뽑아내고 우리 소나무로 바꿔 심었습니다.

◇김효영> 사실 그런 향나무가 관공서에 많지 않나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다고 표현을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김효영> 거의 다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렇습니다.

◇김효영> 이번 전수조사에 가이즈카 향나무도 포함이 되고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당연히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모든 학교에 특히 향나무를 교목으로 하고 있는 학교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교체를 하라마라 강제성을 둘 수는 없지만, 적극적으로 교체를 할 수 있도록 권장을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우리가 흔히 보는 향나무는 대부분 가이즈카 향나무라고 봐도 되는 겁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대부분 나무들이 보면 둥근 모양으로 돼 있는, 우리가 흔히 향나무 하면 떠오르는 그 나무들 거의 대부분이 가이즈카 향나무로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나무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에 앞서 말씀 드렸던 교가 문제입니다. 실제로 많은 학교에서 작사가나 작곡가 중에 친일 인물로 분류할만한 사람들의 작품이 많이 있습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저희들은 곳곳에 산재한 것으로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친일 작곡가, 작사가의 개념이 지금 현재의 상황에서 규정짓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저희들이 친일인명사전이라든지 그런 자료들을 통해서 파악을 했을 때, 오래된 역사들을 갖고 있는 학교들에 대해서는 특정인에 의해서 작사, 작곡된 교가들이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김효영> 장학관님께서는 상당히 조심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가 대신해서 좀 말씀을 드리자면,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표적인 친일 작곡가로 분류되는 사람이 조두남인데요.
이 조두남씨가 창원에 있는 학교 7개 학교의 교가를 작곡을 했습니다.
창원의 성호초등학교, 온천초등학교, 완월초등학교, 합포초등학교, 내서중학교, 경상고등학교, 무학여고. 이렇게 7개의 교가를 만들었고요.
그리고 창원대학교 교가도 조두남씨가 작곡을 했던 겁니다. 참고하시면 되겠고요.
창원 지역만 제가 예를 들었습니만, 창원만 그렇지는 않겠죠?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다른 지역에 대한 부분은 지금 현재 조사 중이기 때문에 5월 정도 되면 전수조사 결과가 집계가 될 것으로 저희들은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하셨던 조두남 같은 경우는 그때 당시에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고 그래서 여러 학교에서 조두남 작사, 작곡의 교가가 있지 않나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나무나 교가 말고, 또 어떤게 있을까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학교 담부터 시작해서 화단 모양 이런 것에서도 일제 잔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함안의 모 학교 같은 경우에는 운동장 바로 옆에 건물이 하나 있거든요. 그걸 위에서 쳐다보면 일장기 비슷하게 된 그런 오래된 건물이 하나 지금도 있는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김효영> 이렇게 일제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무관심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무관심’이라는 표현 자체가, 있어 왔던 것에 대한 익숙함. 그래서 문제의식을 가지기 보다는 있어왔으니까 그대로 가는 그런 형태가 지금의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그런 생각합니다.

◇김효영> 그냥 옛날부터 있어 왔으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것이 일제 잔재였는지에 대한 고민도 안 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김효영> 다른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라 역사를 배우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니까 그래로 둬서는 안된다는 결정을 하신 거군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그렇습니다. 특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면서 더욱 더 우리 도교육청에서는 우리 얼에 대한, 그리고 나라사랑 교육을 심어주고자 하는 교육감님의 뜻에 따라서 저희들이 그 부분에 대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김효영> 전수조사를 한 다음에는 외부 전문기관의 도움도 받으시는거죠?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우선 전수조사가 끝이 나고 나면, 20명 안팎의 TF팀을 꾸리려고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TF팀을 꾸려서 전수 조사된 내용을 충분히 분석을 하고 이 결과를 가지고 민족문제연구소나 다른 대학 등 전문기관에 의뢰도 하고 도움을 받아서 운영을 할 계획입니다.

◇김효영> 친일잔재 청산작업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하십니까?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이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호숫가에 조그만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서 물결이 파장이 일어서 변화가 나타나듯이, 이 일을 계기로 해서 그 동안 무심코 넘겼던 일제의 잔재라든지 어떤 흔적들, 그리고 우리가 몰랐던 습관들까지도 바꿀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일제의 잔재를 깨끗하게 없애버린다는 것 보다는,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고, 이러한 것을 어떻게 현 시점에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정표의 기회가 분명히 일제잔재 청산 정책의 기본 취지라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김효영> 알겠습니다. 적어도 알고는 있자는 겁니다. 기억하자는 것이고. 끝으로 한 말씀 하시고 오늘 인터뷰는 마치겠습니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본 사업은 지난 100년간 우리의 생활 속으로 들어와 함께 살아온 일본 식민주의 사관의 결과로서 이 100주년을 넘어 온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서 사명감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작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청도 교목이나 교가 하나 바꾸는 것을 넘어서 인류의 보편적 이상인 민주, 평화,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고 세계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김효영> 조사결과는 다음달에 나온다고요?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5월 즈음 전수조사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효영> 결과가 나오면 한 번 더 모시겠습니다.

◆이일만 경남교육청 장학관> 네, 고맙습니다.

[email protected]

<2019-04-18> 노컷뉴스 

☞기사원문: “학교 향나무, 이토 히로부미가 들여온 친일잔재”

토, 2019/04/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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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류석춘 교수의 발언은 자칭 새로운 보수세력이라고 말하는 ‘뉴라이트’ 사이에서 끊임없이 나왔던 주장입니다. 일본 내에서도 ‘극우진영’이 쏟아내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김태형 기자입니다.

[기자]

지난 2004년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TV 토론에서 “일본군 위안부는 공창 제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주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영훈/전 서울대 교수 (유튜브 ‘이승만학당’ / 지난 5월) :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행해지는 위안부 자신의 소규모 영업이었습니다.]

류석춘 교수도 2006년 한 간담회에서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표현했습니다.

2013년엔 또 다른 학자가 자신의 저서에 ‘위안부’를 “일본군의 동지”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차명진 자유한국당 당협위원장은 류 교수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양심적이고 제대로 연구한 학자”라고 지지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뉴라이트’

뉴라이트의 전신은 2004년 ‘신자유주의’를 외치며 출범한 자유주의연대입니다.

이듬해 이 단체는 ‘뉴라이트 전국연합’으로 이름을 바꾸고 학계는 물론이고 정계로까지 활동영역을 넓혔습니다.

지난 2006년 뉴라이트의 ‘창립 1주년 기념식’에는 보수진영의 유력 정치인들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뉴라이트 4주년 기념식/유튜브 ‘gabje cho’ (2009년 11월) : 더 이상 왜곡된 역사관을 갖지 않도록 하고, 건강한 사회관을 가진 인재를 키워내기 위해… ]

이들이 ‘위안부’에 대해 내놓는 주장은 일본 안에서도 ‘극우진영’이 말하고 있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과거 뉴라이트는 친일인명사전 제작은 반대했고,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찬성했습니다.

최근 류석춘 연세대 교수까지, 뉴라이트 인사들의 무리한 주장은 잊을만 하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영상디자인 : 김충현)

JTBC

☞기사원문: 뉴라이트 ‘왜곡된 위안부 인식’…일 극우진영과 ‘닮은꼴’

화, 2019/09/24-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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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정부, 오키나와 등서 전몰자 유골 수습하며 한반도 출신자는 제외
日 “韓 구체적 제안하면 협의” 약속해놓고 “제안 없었다” 말 바꿔
억울하게 목숨 잃고 묘지조차 없는 강제동원자 유골 2만2천구 추정

▲ 1944년 4월 일제에 징집돼 멀리 동남아시아 옛 버마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 사진 아랫부분에 ‘최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란 글귀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정부가 2차대전 당시 격전지에서 수습된 유골이 조선인의 것인지 감정하기 위해 협의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반년 가까이 무시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동안 유골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가 협의를 제안하면 응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일본 정부지만, 정작 한국 정부가 협의를 공식 요청하자 “협의를 제안받은 바 없다”고 발뺌하는 것이다.

26일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 한국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지난 4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본 후생노동성과 외무성에 유골 문제에 대한 실무 협의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반년이 다되도록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격전지인 오키나와(沖繩) 등에서 유골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인 일본 정부가 발굴 사업 도중 찾은 유골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의 것이 있는지 감정해보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외면하는 것이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쓰인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앞서 행정안전부는 이를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167명으로부터 DNA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태평양전쟁의 전몰자를 유족에게 인도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하고 이를 현장에서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해 해당 전몰자의 유족에게 유골을 인도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수습’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죽음으로 몰아댔지만 정작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국민이 아니라며 유골을 고향으로 되돌려주는 사업에서 제외한 것이다.

법 제정 후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가 한국인 전몰자의 유골도 찾도록 나서라고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이를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난 4월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있다.

▲ 韓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몰자 유골반환 촉구 요청서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연합뉴스가 협의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후생노동성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요시다 가즈로 과장은 “한국 측으로부터 아직 (협의하자는) 구체적인 제안을 받지 않았다”며 “유골 수습 사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일본이 모국인 일본군과 군속이며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이라는 외교 루트를 통해 ‘구체적인 제안’을 했음에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었다고 딴소리를 한 것이다.

이에 “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가”를 재차 묻자 그는 “그건 한국 측이 결정할 일”이라고 발뺌을 하기도 했다.

과거 후생노동성이 ‘한국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 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그는 “외교에 관한 일이니 우리들(후생노동성)은 답할 수 없다. 그건(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지) 외무성에 물어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제안했는데도 구체적인 제안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체적으로 제안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 오키나와에서 일제에 의해 숨진 박희태 씨 관련 일본 정부 기록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제 말기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군속으로 끌려와 숨진 박희태 씨가 행방불명자로 기록돼 있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행방불명자 명부’. 박 씨는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를 당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사망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료제공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 2017.8.15 [email protected]

이 관계자는 “작년과 재작년에도 실무자들이 만나서 유골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를 했는데, 우리는 이를 협의로 보고 논의 내용을 공식 기록에 남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치고 있는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1945년 제국주의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격전이 치러진 곳이다.

당시 20만명 이상이 숨졌는데, 이 중에는 한반도에서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군인·군속·노무자·정신대원 1만명 가량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가 전후 미군정 산하에 있었던 까닭에 유골 수습이 진행되지 못해 전몰자의 상당수는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일본 정부의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통해서는 그동안 800구 가까운 시신이 발견돼 일본인 전몰자 유족들과의 DNA 감정이 진행됐지만, 대부분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죽어 어딘가에 묻힌 채 유족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유골은 팔라우, 사이판, 필리핀 등 일본 밖에도 적지 않다.

오키나와와 남태평양 등에서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자의 유골은 2만2천구로 추정된다. (취재 보조: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강제징용 유골 발굴 계기 된 1945년 잡지 ‘라이프’ 사진
(모토부초[일본 오키나와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1945년 5월 28일자 미국 잡지 ‘라이프(Life)’에 실린 무덤 묘표 사진. 오른쪽에서 각각 2번째와 4번째 묘표 속 ‘金村萬斗’와 ‘明村長模’라는 이름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김만두 씨와 명장모 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과 함께 게재된 르포 기사의 제목은 ‘오키나와-일본인이 아니라면 오키나와는 살기 좋은 곳이다’이다. [사진 제공=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 2019.2.17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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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유골봉환 협의하자” 韓 제안에 日 반년째 ‘딴청’

목, 2019/09/26-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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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9/09/2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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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열 교수가 이영훈 <반일종족주의> 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이영훈 이사장의 낙성대경제연구소가 펴낸 책 가 논란이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구역질 나는 책”이라고 비난하자 저자 6명이 모욕죄로 고소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는 베스트셀러 대열에 오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 책에 논란은 많지만 ‘학계’에서 정식으로 비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언론도 분명하게 비평·보도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충남대 허수열 명예교수(69)는 식민지근대화론을 ‘학술적’으로 비판하는 몇 안 되는 학자다. 그러나 그는 언론 인터뷰를 꺼린다. 학회에서 논쟁은 하지만 언론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와 이 이사장은 고교(경북고)·대학(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동창이고 그 역시 식민지근대화론 창립자인 안병직 교수 제자이기 때문이다.

이영훈과 고교 대학 동기동창

-이영훈의 책 는 소설가 조정래의 에 대한 비난으로 시작된다. 뉴라이트 기관지 격인 2007년 여름호에 만경평야가 일본인에게 수탈당하는 것으로 묘사한 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이영훈의 글을 선입관을 빼고 읽어보면 틀림없이 ‘혹’한다. 그러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 거짓말이다. 나는 국가기록원에 있는 일제하 수리조합·토지 개량사업 자료 해제작업을 많이 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수리조합 설립신청서는 낙성대경제연구소도 보지 못한 자료다. 이 자료를 보면 만경강 북쪽 옥구·익산·군산은 1909년 이미 빈틈 없이 수리조합이 있고, 만경강 남쪽 동진강 호남평야도 수리조합이 설립신청서는 냈지만 허가 나지 않은 상태였다. 수리조합 설립을 신청했다는 것은 이미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의 배경을 놓고 벌인 이른바 ‘벽골제 논쟁’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영훈은 벽골제가 바닷물 유입을 막는 방조제로 그 하류 의 주인공이 살던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갯벌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리조합 신청서에 첨부된 당시 ‘동진강 수리조합 구역도’를 보면 이 지역에 마을과 수로 표시가 있다. 갯벌에 수로 표시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1872년 지도에는 전북 김제군에 5개 장시(5일장)가 있는데 그 중 2개가 벽골재 하류에 있다. 갯벌 위에 5일장이 열릴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핵심은 조선후기 산업의 핵심인 농업이 몰락했고, 이를 일본 기술과 자본이 일으켜 결국 근대화를 이룩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허 교수는 조선후기 농업 몰락을 수치로 반박했다.

“낙성대경제연구소 문건을 보면 ‘두락당 지대량의 장기 추세’ 그래프가 있다. 1685년부터 1945년까지 논 한 마지기에 지대를 얼마 받았느냐를 회귀분석을 통해 그래프로 그린 것이다. 지대가 떨어진 것을 생산량 하락으로 봤다. 그래프는 1910년 거의 바닥으로 농업이라는 산업기반이 무너진 것을 표시한다. 이 그래프에는 1685년 지대로 22말을 받았는데, 1935년에는 14말 받은 것으로 돼 있다. 1935년은 일제강점하 농업생산성이 가장 높았던 시기로, 1685년보다 토지생산성이 낮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조선 농업의 몰락 사실은 이영훈 교수의 학문적 근거이자 바탕이다. 이런 허술한 그래프가 이론적 바탕인 것이 놀랍다.

“이 그래프는 30여개 지주 장부를 근거로 회귀분석한 것인데 회귀분석에서 유의성과 사실은 별개다. 이 지주 장부도 일관성이 없고, 연도별로 드문드문 있다. 그 중 전라도 영암 남평 문씨 문중 논에 대한 지대장부만 이런 추세를 보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일정하다. 이 1개 장부가 전체 통계를 왜곡시킨 것이다. 한 개의 데이터가 매우 특이할 때 통계에서 그것을 제외해야 하는데 이영훈은 그리하지 않았다. 또 하나 문제는 조선후기로 들어와 소작제도가 변화하면서 지대를 받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걸 감안하지 않고 장부상 수치만 보다 오류가 생겼다.”

사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실증적 연구와 수학을 동원한 수량경제학을 강조한다. 조선후기 농업을 전공한 이영훈을 비롯한 낙성대경제연구진이 전국 수리조합 창고를 뒤져 장부를 발굴해 쓴 는 조선후기·일제하 농업연구의 기반이 되는 연구서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책이다. 그런데 일제하 공업·노동을 전공한 허 교수가 이 책의 기반을 흔들었다. 2005년 이라는 책으로 식민지 시대 개발을 비판한 그는 2011년 이라는 책으로 아예 식민지근대화론자의 이론적 근거인 농업부문 허구를 폭로했다.

경제학자로서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

낙성대경제연구소(김낙년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 370쪽)가 추계한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질농업생산액은 빠르게 증가한 것으로 돼 있다. 이후 1930년까지 평탄한 수준을 유지하다 다시 1940년까지 급속히 상승한다. 그리고 1942년까지 평탄하게 유지되다 끝난다. 결국 191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의 농업생산량이 급속히 성장한 것은 일본의 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허 교수는 이 통계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때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기간으로 생산량이 증가할 합리적 이유가 없고, 토지조사사업으로 경지면적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일 것이라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벌인 193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이 비슷한 것도 오류”라고 말했다. 특히 이 그래프는 1942년 일제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급격히 악화한 경제를 반영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1943년 이후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다”면서 “이것을 빼고 일제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개발이 조선인 생활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일제의 하천개수사업은 철저히 일본인과 일본군을 위한 사업”이라고 말했다. 그는 농업생산량은 해방 후 급격히 늘었고, 한국 경제는 일본에 의해 성장한 건 아니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허 교수가 이렇게 치밀하게 수치로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학자라서 가능했다. 숫자와 통계를 들이밀며 얘기하면 국사학계 학자들은 반박을 못한다. 허 교수는 “이영훈의 특징은 숫자를 들이밀며 얘기해 반박하기 어려운데, 문제는 그 숫자가 모두 엉터리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 허수열 교수가 이용훈 <반일종족주의>통계의 허상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그는 이영훈 이사장과 고등학교 동기동창에 대학도 같은 과를 다녔으니 매우 친하다.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을 하다가도 점심 때 같이 웃으며 식사하는 사이다. 허 교수도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으로 나를 ‘의식화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면서 “나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들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뭐가 달라졌을까. 이영훈 이사장은 1970년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간 서울대생이며 대학생 시절 위장취업을 한 노동운동가다. 이 이사장은 학생운동으로 제적돼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제대 후 겨우 복학했을 정도다.

사실 운동권에서 역사문제는 매우 치열한 ‘주제’였다. 특히 원시 공동사회-고대 노예제 사회-중세 봉건사회-산업혁명 이후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 공산주의로 가는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은 1930년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 이후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에게 맞추려면 조선에서 농업의 몰락과 자본주의 시작을 어디로 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경제사학자 중에 운동권·진보 성향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이사장 역시 백남운 이론에 심취하다 1980년대 17세기 조선의 노비 인구가 오히려 줄고 19세기 조선 농업이 몰락하는 것을 발견, 백남운 이론에서 탈피했다. 이 이사장의 스승인 안병직 교수 역시 진보적 학자로 일제강점기를 ‘식민지반봉건사회론’으로 설명했다. 이는 해방 후 미국 식민지로 이어져 80년대까지 운동권의 주요 이론이 됐다. 그러나 지금은 식민지근대화론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학문의 세계도 정치판과 비슷”

식민지근대화론은 1980년대 중반 ‘사회 구성체 논쟁’ 때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진보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한말·일제침략하 자본주의 근대화론’ 논쟁이 일었다. 1922년 반식민지 민족해방 투쟁을 포기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혔다. 허 교수는 “1970~80년대 고도성장의 부작용이 드러나던 시기에 중국 사회주의가 평등사회 모델로 많이 언급됐다”면서 “그러나 1991년 사회주의 환상이 무너지자 운동권이 대거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이것이 ‘뉴라이트’의 탄생이다. 그는 “극좌에서 중간까지만 갔으면 좋았는데, 극우로 간 것이 문제였다”면서 “비극은 거기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를 쓴 낙성대경제연구소는 일제 강제징용과 종군위안부의 정부 강제성이 없다고 주장한다.(연세대 류석춘 교수의 위안부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일제하 공업·자본·노동이 내 전공이다. 1930년대 주로 북한지역에서 공업화가 빠르게 이뤄지면서 노동수요가 증가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노동규제를 실시한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패배로 일본·조선 경제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강제징용이 시작된다. 조선총독부는 알선이라 하지만 실제는 강제다.”

-일본이 계속 주장하고, 우리나라 학자상당수도 종군 위안부 모집에 정부의 강제성 문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정말 없는 것인가, 학자들이 찾지 못한 것인가.

“그런 문건을 조선총독부가 남겨 두겠는가. 8월 15일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고 9월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총독부는 계속 서류를 소각했다. 더 중요한 자료는 일본 방위성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개하지 않는다.”

-스스로 경제사학계의 ‘소수파’라고 했다.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박하는 교수들이 별로 없어 보인다. 혼자 고군분투하는 것 같다.

“학문의 세계가 합리적이고 논리적 질서가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치판과 비슷하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신봉하는 교수 아래서 반대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나. 경제사학을 전공해 밥먹고 살려면 서울대 이외에는 힘들다. 충남대의 내 밑에서 경제사학을 전공해 어느 대학 교수로 갈 수 있을까. 현실이 그렇다. 다수가 그러니 그냥 침묵하고, 나와 같이 엉덩이에 뿔난 사람만 소리치는 것이다.”

허 교수는 195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70학번이다. 이영훈·김문수 전 경기지사 등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다. 대학 때 이영훈만큼 운동권은 아니었다. 조교를 거쳐 안병직 교수로부터 1985년 박사학위도 받았다. 1978년부터 충남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을 지내고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명예교수로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가만히 허 교수를 보고 있으면 ‘점잖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카메라 앞에서 기자의 뺨을 때린 친구 이 이사장과 180도 달라 보였다. 우정보다 진실이 더 중요했겠지만 그래도 친구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 기자가 임종국상 수상자이지 않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하기 전 2006년 임종국상 수상소감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그 수상소감에는 13척으로 330척과 맞선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인용돼 있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막으니 족히 천 명의 사내가 두려워한다’는 의미다. 식민지근대화론이 횡행하는 지금 그의 심경을 정확히 대변하는 것 같다.

원희복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9-09-28> 경향신문 

☞기사원문: [원희복의 인물탐구]식민지근대화론 비판·허수열 “이영훈 경제통계 모두 엉터리”

토, 2019/09/28-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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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 민연ㅣ값 15,000원ㅣ335pageㅣ발행일: 2019.09.0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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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2019년 가을호(통권76호)

차례

여는 글
금단을 넘은 저항, 금단을 넘는 시선 / 조형열

통일에세이
남북한의 학술 교류·협력과 역사학의 모색 / 신주백
한반도 평화만들기 과제와 방향 / 권영길
북한 백두대간 기행 / 로저 세퍼드

쟁점으로 보는 역사
코민테른과 한국 민족해방운동 연구 / 김영진
신간회, 어떻게 볼 것인가 / 윤효정

지금 우리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양립가능한가? / 류동민
우리는 지금 촛불 시대에 살고 있는가? –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에 대하여 / 정현진
머나먼 한반도 군축, 국방비 동결로 물꼬 터야 / 정욱식

인물로 보는 역사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같은 시·공간, 다른 선택 – 채동선과 홍난파 / 노동은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 ー 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 박순섭

[반독재민주화열전]
남김없이 타버린 불꽃 이야기 – 시인 김남주 연대기 / 김형수

[코민테른인명사전]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1) – 강상주, 박진순, 박애 / 임경석

사실 체크
○ 우리 역사에서 협동조합운동은 무엇이었나? / 김소남
○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 수리조합사업의 실체 / 박수현

사료의 재발견
『동전 오기영 전집』 : 하나 된 조국을 향한 어느 자유주의자의 외침 / 장규식
『대명률』의 편찬과 수용 그리고 적용 / 한상권

북한의 이해
북한 미술, 조선화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가? / 문범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의 기원과 제정 과정 / 강응천

예인열전
동방산수의 화종(畵宗) 겸재 정선 – 정선, 실경산수화의 동국제일명가 2 연구사 / 최열

예술과 현실의 소통
BTS, (케이) 팝의 역사를 다시 쓴다 / 이정엽
3·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서평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보는 새로운 문제의 제기 –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 정재훈

책소개

한국의 20세기는 식민과 분단으로 인해 전쟁과 생존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기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전쟁의 압살과 청일전쟁, 20세기 전반기의 러일전쟁,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남북 두 분단정부의 수립, 6·25전쟁 등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로 인해 민족사회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에 의해 비민주적 통치가 진행되었고,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시민이 되기보다 절대적 순종을 덕목으로 하는 신민이 되기를 요구 받았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따른 거대한 전쟁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사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단 세계적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은 냉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오히려 치열한 열전 상태로 돌입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그때를 떠올려봅니다. IMF의 여파와 세기말 증후군이 겹치면서 회색빛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세기 전반에 비해 후반기에 우리 사회가 성취한 역사적 성과를 떠올리며 21세기는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이 컸습니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던 군사정부의 그늘과 지역주의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하고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이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여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핵전쟁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남북의 평화는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북미 정상의 협상은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갈증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조건이 그나마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대신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이란의 전쟁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리아 난민을 비롯한 지구촌 시민의 삶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16년에는 촛불시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굳센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지구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긴 노동유연화, 위험의 외주화와 같은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절반의 절반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가 어떠한 시대가 될 것이라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역사를 볼 때 20세기가 직면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21세기 인류와 우리 민족사회가 계속해서 지고 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제에 접근하기 위한 역사학의 선택 가운데 하나가 20세기 식민·분단·전쟁 등 온갖 폭력에 맞섰던 저항을 조명하고, 민주·평화·평등의 시선이 확산되도록 노력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금단(禁斷)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구역 또는 범위 안에 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또한 금기(禁忌)는 ‘마음에 꺼려서 싫어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전자가 주로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애써 기피하려는 의식의 측면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체제가 철저하게 막아선 금단의 영역을 넘은 저항을 발굴함으로써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시선을 갖는 것, 이 또한 『내일을 여는 역사』가 상상하는 내일을 여는 방법입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편집위원회는 2019년 가을호(통권 76호)에 ‘여는 글’을 포함해 모두 23편의 원고를 수록했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북한에 대한 내면적 이해, 남북의 민간 교류를 세밀하게, 그렇지만 맛깔스런 필치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실었습니다. 역사적 저항과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오늘날의 시민행동을 연속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통일에세이’에는 다양한 분야의 남북 교류사업의 성과와 과제를 담았습니다. 신주백은 2000년대 이후 학술 교류를 역사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와 정치적 배려 그리고 경제적 지원이 맞물릴 때 교류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권영길은 평화철도 연결운동이 현실적인 평화 만들기 실천의 길이고 이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두대간 사진전을 열기도 했던 뉴질랜드 사람 사진가 로저 세퍼드는 2011~2012년, 2017~2018년의 종주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남북한의 사람들, 문화, 그리고 산도 똑같았다면서 분단이 바꾸지 못한 것들을 말합니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주제인 코민테른과 신간회를 다뤘습니다. 김영진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코민테른이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에 관여했던 역사적 사실과 연구경향 등을 설명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한 코민테른의 ‘권위’가 각 지역별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폭넓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윤효정은 신간회에 대한 이해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민족통일전선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한 뒤, 신간회 평가를 해소 문제에 국한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부정을 넘기 위해 중앙 및 지회가 대중과 접촉하면서 벌인 활동 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합니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오늘날 현재적 논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해와 편견도 섞여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 가지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류동민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상관성을 정리했습니다. 양자의 양립 불가능성이 정치담론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지 입론의 역사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정현진은 전교조가 박근혜 정부 사법부를 통해 법외노조가 된 부당성과 합법화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정욱식은 분단체제 해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국방비 동결을 추진해야 하며, 2019년 현재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7위, 일본이 6위, 북한은 18위로 평가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도 제시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고투한 인물 군상의 모습을 주로 다뤘습니다. 먼저 음악가 채동선과 홍난파의 삶을 비교한 고(故) 노동은의 유고를 실었습니다. 민족음악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홍난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동선의 삶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순섭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쓴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일대기를 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가 그렇듯이 그녀도 월북한 이후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김형수의 김남주 연대기는 시대의 변화와 시인의 삶을 연결하면서, 또 그가 썼던 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혁명을 고민한 김남주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한편 임경석은 이번 호부터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코민테른 인명사전’을 연재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기획된 인명사전에 수록한 14명의 인물 정보를 순차적으로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을 위해 집필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건조한 문체이지만, 강상주, 박진순, 박애 등 한인 사회주의자에 대해 기존 연구보다 한층 보강된 내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6년 출간된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한 종합적 정리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톺아보기 위한 ‘사실체크’에서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과 일제하 수리조합사업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의 민간협동조합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소남은 이 운동에 사회운동과 적극적 연계, 좌우 양편을 넘는 통합적 활동,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지원, 생명사상의 수용 등의 특징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연대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박수현은 수리조합사업이 일제 통치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 일방적 관제사업이었기 때문에, 중소지주와 자작농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조직적 저항이 속출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출간으로 재점화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지속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동전 오기영 전집』과 『대명률』을 다뤘습니다. 『동전 오기영 전집』은 일제하·해방직후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삶을 영위한 오기영의 생각을 담은 책 모음입니다. 장규식은 오기영을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계승해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 자유주의를 제창한 인물로 조명하면서 통일독립을 열망한 그의 활동을 높게 평가합니다. 『대명률』은 조선왕조 형법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서적입니다. 한상권은 14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대명률』이 조선에 수용·적용된 과정을 상세히 해설했습니다.

‘북한의 이해’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강응천은 북한의 국호가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닌, 조선인민공화국도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인민민주주의를 향한 후진국 사회주의의 기호이자, 민주기지론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문범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출발한 북한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이 독자적인 조선화로 발전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조선화 화단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외부의 시선과 달리 활발한 논쟁과 화가의 독자적 작품세계가 실재함을 말합니다. 컬러로 수록한 작품을 직접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열이 연재하는 ‘예인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 겸재 정선의 작품세계를,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문화평론가 이정엽이 케이팝(K-pop)의 흐름 가운데 방탄소년단(BTS)의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만든 반태경 피디는 명동촌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동기와 역사 속 기독교 신앙인이 펼친 사회적 실천의 가치를 담담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에서는 정재훈이 최근의 화제작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다뤘습니다. 변화보다는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위 책이 왕조교체의 원인과 성리학 수용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역사를 큰 줄기에서 보는 시도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20년이 지난 21세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했는데, 『내일을 여는 역사』도 바로 21세기의 첫 해인 2000년 3월에 첫 호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제 성년을 맞은『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21세기와 함께 호흡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지도 아닌, 폭넓은 대중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도 아닌, 어떻게 보면 ‘주변’ 또는 ‘경계’에 서서 지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주변과 경계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낳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금기를 넘는 시선이 이 지면을 통해 넘쳐날 수 있도록 더 정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화, 2019/10/01-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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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교수, 발표자로 조목조목 비판
“일 극우 위안부·강제동원 부정 논리
뉴라이트가 진부한 레퍼토리 답습”

주익종 “한반도 재산 85%가 적산” 주장
김창록 “일 재산은 식민지 수탈 산물
일 정부와 법원도 개인청구권 인정”

이영훈 “위안부, 성노예 아니었다” 주장
강성현 “위안부 강제동원 광범위했고
공창제는 전쟁 전 일 형법에도 불법”

▲ 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청파동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 공동주최로 ‘역사부정을 논박하다 <반일 종족주의> 긴급진단’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김민철 경희대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 김창록 경북대 교수,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사무처장. 김명진 기자[email protected]

“강제징용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 등의 극단적인 역사 왜곡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반일 종족주의>를 향해 학자·전문가들이 포문을 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위안부’연구회는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반일 종족주의> 긴급토론회를 열어 이 책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했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학술단체 차원의 대응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문제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듯, 80명 가량의 청중이 찾아와 토론장을 매웠다.

이날 발표자로 나온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한국근현대사)는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한국의 뉴라이트들이 이런 진부한 레퍼토리를 내세우는 건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피해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했다.

토론회에선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 조처의 배경이 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논박이 이뤄졌다. 앞서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반일 종족주의>에서 “(해방 직후) 일본이 남기고 간 재산은 한반도 총재산의 85%에 달했다. 애당초 한국 측이 일본에 청구할 게 별로 없었다”는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해 김창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본의 조선총독부 재산은 대한제국의 재산을 강탈한 것이니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고, 일본인의 사유재산도 식민통치의 비호 아래 이뤄진 구조적 수탈의 산물이므로 정당한 재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주 연구위원의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는데 한국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다’는 주장도 문제 삼았다. 김 교수는 “개인의 청구권은 협정에 의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일 양국 정부와 법원에 의해 확인되었다”며 “주 연구위원의 논리는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다’고 전제할 때만 정합성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아베 정부조차 단언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전제”라고 꼬집었다.

<반일 종족주의>에 나온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대한 주장은 이미 학문적으로 극복된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이 책에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합법적인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된 것이며, 위안부는 폐업의 권리와 자유를 가졌으므로 성노예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현재의 연구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식민지 공창제를 모델로 하되 더 억압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라는 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동원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고 공창제는 전쟁 전 일본 형법과 국제법으로도 불법이라는 점, ‘위안부’의 생활이 성노예와 같다는 점, 더 나아가 식민지 공창제뿐 아니라 일본 본토 공창제 역시 성노예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표자들은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정치적 의도도 지적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필자 대부분은 뉴라이트로서, 이들이 주도했던 대안·교학사·국정 역사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되었다.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의 의도는 일본 극우세력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편찬하는 모임’같이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창록 교수는 “이영훈이 조정래 소설가를 비난하기 위해 동원한 ‘광기어린 증오의 역사소설가’라는 말이 과연 누구에게 진짜 어울리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김지훈 기자 [email protected]

<2019-10-01> 한겨레

☞기사원문: ‘반일 종족주의 허구’ 벗긴다…학술단체 첫 공동대응 나섰다

※관련기사

☞연합뉴스: “청구권협정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당시 거론조차 안돼”

☞경인일보: 김창록 교수 “위안부 문제,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거론 안돼”

☞뉴시스: ‘반일종족주의’ 반박 토론…”일본이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

수, 2019/10/02-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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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 오는 4일 열려…

1919년 치열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조명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회의가 열린다.

‘도쿄에서 함흥으로: 일제 문서로 보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학술회의는 오는 4일 한국언론회관 19층 기자회견장에서 개최된다.

학술회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강북구 근현대사기념관이 주관하며, 서울시·강북구·식민지역사박물관이 후원한다.

주최 측은 “3·1운동 100주년인 올 한 해, 자유 평등 민주 평화라는 3·1정신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이를 제대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극우세력과 뉴라이트 등 한국 내 동조자들의 역사부정과 과거로의 퇴행은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 결코 용이하지 않음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며 “그만큼 이들의 궤변을 원천 봉쇄할 연구 성과의 축적과 활용도 절실해지고 있다”고 학술회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3·1운동 100주년을 정리하면서, 1919년 그때 우리 민족이 치열하게 추구했던 독립정신과 민주공화주의를 다시 한 번 조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일본에서 새로 발굴된 과 민족문제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총독부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검사 이시카와의 함경도 지역 3·1운동 관련자 기소 준비 자료 을 처음으로 집중 분석한다. 이 문서들은 1차 관변자료로 3·1운동의 발상에서 지방으로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그 전개과정과 구체적 실상은 물론 일제의 탄압상과 대응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특히 문서는 일제 검사 이시카와가 1919년 3월부터 5월 사이에 일어난 함경도 지역 3·1운동 참여자를 기소하기 위해 작성한 115개 사건, 총 950여 명의 관련자에 대한 기록으로 재판자료가 거의 멸실된 북한지역 3·1운동의 실체를 가늠할 수 있는 희귀 자료다. 발표자들은 문서를 면밀하게 분석해 3·1운동 당시 함경도 지역에서 전개된 지하조직 결성, 지하신문 발간, 관공서 방화, 관공리 퇴직권고 등 다양한 형태의 항쟁과 새롭게 밝혀진 독립운동가들의 구체적 행적 등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지난 8월 민족문제연구소와 독립기념관은, 문서철을 탈초·번역하고 내용 분석을 거친 뒤 해제를 붙여 Ⅰ,Ⅱ 두 권의 책자로 펴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기소 준비자료에 등장하는 3·1운동 관련자에 대한 심층 검증과정을 거친 뒤, 독립기념관과 함께 공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 북한 학계와도 관련 자료의 제공 등 협력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학술회의는 개회식을 시작으로, Ⅰ부와 Ⅱ부 발표 및 Ⅲ부 종합토론으로 진행된다.

개회식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의 개회사와 박겸수 강북구청장의 환영사, 그리고 한완상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의 격려사로 이뤄진다.

Ⅰ부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을 주제로, 최우석 독립기념관 연구원과 미야모토 마사아키(宮本正明)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사자료센터 연구원이 발표한다.

Ⅱ부 ‘이시카와 자료와 함경도 지역 3.1운동’을 주제로 권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이 발표한다.

Ⅲ부 종합토론은 발표자 전원과 토론자 김정인(춘천교대), 윤소영(독립기념관), 장신(한국교원대), 김승태(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허영란(울산대) 등이 참여한다.

<2019-10-01> 프레시안

☞기사원문: 일본서 새로 발굴된 2·8독립선언 서명자 ‘취조기록’ 공개한다

※관련기사 

☞뉴시스: “2·8 독립선언, 시작은 망년회”…日취조기록 첫 공개

수, 2019/10/02-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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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지난해 10월 30일 역사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해방 이후 73년 만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법적 손해배상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한 겁니다. ‘불법 식민지배’라는 맥락 속에서 피해자들의 고통과 권리, 그리고 일제의 위법성이 또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로 강제 동원되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존중받지 못한 채 온갖 노동을 강요당했던 피해자인 원고들은 정신적 손해배상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신일철주금 대법원 판결문, 2018.10.30.)

그런데 ‘반일종족주의’는 이 판결이 명백한 역사 왜곡에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판결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강제동원은 과장을 넘어 날조된 ‘신화’에 불과하다는 게 이영훈 전 교수와 이우연 박사를 비롯한 저자들의 생각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가 지난 1일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에서도 이 ‘강제동원’ 문제가 비중 있게 다뤄졌습니다. 지난번 ‘위안부’ 문제에 이어 이번에는 ‘강제동원’ 이슈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연관기사]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논박 – ① ‘위안부’는 종족주의의 아성?  

■ 이우연 “조선 청년에게 일본은 ‘로망’…수요와 공급 맞아떨어져”

▲ 이우연 박사는 지난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UN 인권이사회 정기 회의에서 강제동원 역사를 부정하는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지난 7월 2일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 제네바본부 회의실에선 믿기 힘든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일본 극우단체 국제역사논전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 발표자로 참석한 이우연 박사가 강제동원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나선 겁니다.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징병 역시 합법적이었습니다. 일본인, 한국인 구분 없이 임금은 공평하게 지급됐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임금이 더 높았습니다. 전쟁 기간 한국 노무자들은 쉽고 편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우연 박사, 2019.7.2. 스위스 제네바 UN 인권이사회)

이러한 주장은 책 반일종족주의에도 그대로 소개됐습니다. 샤머니즘에 가까운 반일종족주의에 빠져 있는 한국 사법부와 행정부가 ‘자발적 노무동원’을 강제연행과 노예노동으로 오해했다는 게 골자입니다.

특히 이우연 박사는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게 된 것은 “노동수요와 노동공급이 맞아떨어진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임금 역시 정상적으로 지급됐고, 일본인보다 임금이 낮은 경우는 민족 차별이 아니라 대부분 조선인이 탄광 작업의 경험이 없어 생산량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강제저축이나 업무 중 구타와 같은 전근대적 노무관리도 없진 않았지만, 이는 일본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습니다.

■ “일베류’ 역사 선동” 반박…일본과 국제사회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

▲ 지난 1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군 ‘위안부’ 연구회는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반일종족주의 긴급진단-역사부정을 논박한다’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민철 경희대 교수는 “해방 이후 줄기차게 일본 정부와 일본 기업을 상대로 피해 배상을 요구하며 싸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명백한 명예훼손이자 연구자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습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왜곡과 무지, 혐오 발언으로 가득 찬 역사부정론자들의 ‘일베(일간베스트·극우 성향 커뮤니티)류 역사 선동'”이라는 겁니다.

“2000년대 초 일본에서 이른바 ‘자유주의사관론자’라 자칭하는 극우 지식인들이 기존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사학'(自虐史學)에 빠졌다고 공격하면서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강제노동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무덤 속에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 역사 부정론이 한국에서 다시 나온 것이다. 다만 선수만 한국의 뉴라이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한치의 발전도 없는 진부한 레퍼토리를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면서 마치 신세계를 발견한 것인 양 의기양양한 것을 보면 무척 당혹스럽다.”(김민철 경희대 교수)

김 교수는 “강제동원과 강제노동, 민족차별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증언과 공식 자료들은 차고 넘친다”며 “반일종족주의는 이런 자료와 증언을 모두 무시하고 심지어 일본 사법부와 국제노동기구가 인정한 사실까지 부정하고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 폭력 동원·임금 차별…”인질적 약탈적 납치였다”

▲ 지난 8월 15일 광복절,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와 양금덕 할머니는 빗속을 뚫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했습니다.

일본 내무성이 조선의 민정 동향을 조사한 ‘복명서(復命書)'(1944.7.3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일제의 폭력적인 동원 방식이 잘 설명된 자료 중 하나입니다.

“조선인 노무자를 일본으로 송출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인질적 약탈적 납치 등이 조선 민정에 미치는 악영향도 악영향이지만, 송출이 곧 그들의 가계 수입의 정지를 의미하는 경우가 극히 많은 모양이다.”
– “징용과는 별도로 기타 어떤 방식에 의하든 출동은 모두 납치와 같은 상태이다. 그것은 만약 사전에 이를 알리면, 모두 도망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습, 유출(誘出), 기타 각종 방책을 강구해서 인질적 납치상태의 사례가 많은 것이다.”

일제 말기 전남 장흥의 유생이 쓴 일기에도 강제동원의 실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동원의 폭력성과 강제성은 더욱 짙어졌습니다. 

– “1943년에는 면리원들이 마을을 수색하여 공장에서 일할 만한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사람을 ‘마치 죄인 다루듯이’ 잡아가기 시작했다. (…) 도망자가 많아지자 모집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군면의 관리들이 밤중에 마을을 습격해서 노동자를 잡아갔으며, 모집된 자가 도망가면 가족 중 1명을 대신 데려가서 머릿수를 채웠다.

임금 차별 경향 역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김민철 교수는 조선인 임금은 금속광산과 철강업에서는 일본인의 60% 정도였고, 조선인 광부의 임금은 일본인 광부의 70% 전후였다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업주가 ‘강제저축’을 이유로 들어 매월 임금의 일부를 가져가서, 조선인 광부가 손에 쥘 수 있었던 실제 월급은 10엔 정도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강제저축은 퇴직 때 받을 수 있게 돼 있었지만, 조선인의 절반 이상, 지방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도망·소재불명·불량송환 등으로 정상 퇴직하지 못했으므로 이를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 “학문적 사망선고”…이제 기댈 곳은 대중뿐

▲ 이영훈 전 교수가 교장으로 있는 ‘이승만 학당’은 유튜브 채널 ‘이승만 TV’를 운영하며 대중에게 반일종족주의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이영훈 전 교수 등은 반일종족주의에서 우리 안의 견고한 ‘통념’에 대해 거듭 경고합니다. 실증적으로 취약한 한국인의 통념과 달리, 이 책은 실증을 토대로 한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또 학술적 비판은 얼마든지 수용하겠다며, 잘못으로 판명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실수를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이들이 ‘식민지근대화론’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지만, 지금까지 비판을 수용하거나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며 “이 책의 상당 부분 또한 그동안 많은 지적과 비판을 받았음에도 원래 그대로”라고 비판했습니다.

이젠 “‘자기 확신에 빠진 오만함’이란 말도 과찬일 정도로 광적인 수준”이라는 지적인데, 박 사무처장은 이들이 책을 낸 의도에 대해서도 이런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필자들은 대부분 뉴라이트로서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역사전쟁’의 핵심 인물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들이 주도한 ‘대안교과서’·’교학사 교과서’·’국정교과서’는 친일·독재 미화와 함량 미달로 폐기 처분되었다. 이 교과서들이 인정을 못 받았다는 것은 이들에게 학문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나 다름없다. 이들이 기댈 곳은 이제 학계가 아니라 대중들, 그중에서도 과거 독재 정권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층이었다. 학계에서는 더 이상 이들의 주장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수층을 결집하고, 궁극적으로 극우 보수 세력이 집권하는 것, 이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 이들의 의도일 수 있다.”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주장을 대중에게 그럴듯하게 설파해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인데, 일본 극우단체 ‘새역모'(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행보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학문의 자유’와 ‘역사 부정’ 사이에서, 이제는 진지한 대응 방안을 고민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2019-10-07> KBS 

☞기사원문: 반일종족주의에 대한 논박 – ② ‘강제동원’은 허구다?

화, 2019/10/08-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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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사·작곡자의 ‘친일행적’이 드러나면서 폐지논란이 거세게 일고 있는 광양시 ‘시민의 노래’ . │광양시 제공

전남 광양시가 ‘친일 논란’이 일고 있는 ‘시민의 노래’를 당분간 부르지 않기로 했다.

광양시는 7일 “연말로 예정된 ‘시민의 노래’ 폐지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 때까지 공식석상에서 이를 제창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지난달 16일 실·국장이 참여하는 시정조정위원회에서 이 같은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광양시는 8일 열리는 시승격 30주년 기념 광양시민의 날 행사에서 ‘시민의 노래’를 부르지 않기로 했다.

‘시민의 노래’는 1989년 시인 서정주가 노랫말을 짓고, 김동진이 작곡했다. 이 노래는 1995년 동광양시와 광양군이 통합하면서 노랫말 가운데 ‘동광양’을 ‘큰광양’으로 바꿔 불러오고 있다.

서정주는 친일 작품 11편을 남긴 것으로 조사돼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보고서 1006인 명단’에 올랐고, 작곡가 김동진도 일제 침략을 찬양하는 노래를 만든 행적이 확인되면서 2006년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든 인물이다.

광양시의 ‘시민의 노래’ 제창 일시 중단은 너무 소극적인 조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3·1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각계에서 친일 청산작업을 활발히 펴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광양시는 ‘시민의 노래’ 폐지를 위해서는 읍·면·동 의견 모으기, 시민 대상 설문조사, 시민공청회 등 다단계 절차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눈치보기 행정’이라는 비판도 부르고 있다.

광양시 관계자는 “폐지 여부는 시민 의견을 모아봐야 최종 결정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일부에서는 ‘시민의 노래’의 작품성 등을 높게 보는 평가도 있다”고 말했다.

광양시의회도 지난달 24일 ‘시민의 노래’ 존치 여부에 대한 시의원 간담회를 열었으나 광양시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정리했다.

광양시의회 ㄱ의원은 “두 인물에 대한 친일 시비가 수십년 전부터 일어왔고, 특히 올 들어 3·1운동 100주년, 일본의 경제침략 등 일련의 상황을 감안해볼 때 더욱 적극적으로 친일청산 작업에 동참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관계자는 “대표적인 문화계 친일인사들이 짓고 만든 광양시 ‘시민의 노래’는 이미 역사 속에 묻어놨어야 마땅했다”면서 “다른 지자체보다 친일 잔재 청산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2019-10-08> 경향신문

☞기사원문: ‘친일 논란’ 광양시 ‘시민의 노래’ 언제 폐지하나? 

※관련기사 

☞세계일보: 친일 논란’ 시민의 노래 제창 중지… 광양시, 공적비 정비도 

☞광주일보: 광양시, 친일 논란 시민의 노래·공적비 정비 

☞뉴스1: 친일논란 광양시민의 노래 ‘제창 중지’ 결정

화, 2019/10/08-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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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 조선 니시야마 씨 증언…”돼지우리 생활·짐승취급받으며 위험한 작업”
“자주 구타당하고 추락사하기도”…보복 두려운 일본인들, 패전후엔 술·음식 대접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조선인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작업복은 언제나 너덜너덜해 구멍이 뚫려있고 지저분했다. 인간 취급이 아니었다. 한 벌밖에 없어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을 것이다.”

일제 말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열악한 노동 실태에 대한 증언이 당시 함께 일했던 일본인에게서 나왔다.

도쿄신문은 12일 일본의 패전 직전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에서 일하다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니시야마 스스무(西山進·91) 씨의 증언을 소개했다.

▲ 도쿄신문에 게재된 인터뷰

1942년부터 이 조선소에서 일했다는 그는 “언제부터인지 갑자기 조선인 징용공이 늘어났다. 징용공들은 100명 정도 대열을 이뤄 산 건너편 1㎞ 떨어진 정도 떨어진 집단 숙소에서 고개를 넘어 걸어왔다”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징용공들은 힘없이 걸어왔다. 영양실조 탓인지 바짝 말랐었다. 기력이 없는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니시야마 씨의 기억에 따르면 조선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조선소에서 한 일은 거대한 배의 선체를 대못으로 연결하는 일이었다.

끈으로 연결된 허술한 작업대에 올라가 다른 징용공들이 건네는 못을 건네받은 뒤 못질을 했는데, 못이 빨갛게 뜨거운 상태여서 맨손으로는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가장 위험한 작업이었다. 발판이 불안정해서 추락사 한 사람도 있었다”며 “조선인 징용공이 (일본인) 상사로부터 맞는 것도 자주 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인들이 징용공들에게 음식과 술을 대거 주면서 대접을 했다는 기억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상당히 가혹한 취급을 했으니 보복을 당할 것을 우려한 것 같다”며 “패전 후 대부분의 조선인 징용공들은 한반도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니시야마 씨는 일본 패전 후 조선인 징용공들이 살던 집단 숙소에 머문 적 있었다. 그는 “당시 ‘잘도 이런 돼지우리 같은 데서 살게 했구나’라고 생각하며 놀랐다”고 말했다.

도쿄신문은 이 인터뷰의 배경을 설명하며 “전에는 널리 알려졌던 조선인 징용공의 실상이 (지금은)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며 “열악한 노동환경과 민족차별이라는 무거운 사실을 잊고 있는 게 (한일 갈등) 문제의 배경에 있는 것 같다”고 적었다.

▲ 일본 탄광 강제징용 피해자 조선인들.[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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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2>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노인의 징용피해자 증언…”바짝마른 그들은 힘없이 걸어왔다”

일, 2019/10/13-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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