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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재정의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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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과학’의 관계를 재정의하기

admin | 월, 2020/01/06- 22:43

왜 자연과 과학의 재정의가 필요한가

나는 자연과 과학이 이해되는 방식의 혁명적인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이런 설명은 역사 혹은 철학 수업이 아니다. 이것은 정책결정, 정책의 프레임 구축, 지구의 미래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 마련에 필요한 설명이다. 현대적 가정의 바깥에서 “자연”과 “과학”을 생각하는 방식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문명적 변화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통제 아래 놓인 지구와 생태계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또 “과학”은 이런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인류는 자동차에서부터 화력발전소, 핵무기에 이르는 많은 기술을 통해 지구의 미래에 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다. 이런 기술은 폭발적인 과학지식을 통해 발명되고 실용화됐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를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연과 과학을 다르게 이용할 때만 새롭고 진정한 생태문명을 향해 진전하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이것은 “큰 그림”의 문제이지만 추상적이지도,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다. 정부, 교육, 산업, NGO 등이 정책과 우선순위를 바꾸려면, 현재를 넘어 우리가 생태문명이라고 부르는 목표를 향한 장기적 안목이 필요하다. 정책변화를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급속도로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현대(지난 50년 정도) 이전까지 아주 명백하게 보였던 근본적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생태문명연구소는 전 세계에 있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조직들과 협력한다. 이들은 이미 기후위기와 그것이 지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재해석을 내릴 때만, 인류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다. 그 첫 번째 단계는 사실상 생태계 전체가 인간의 통제에 들어간 후현대에 자연과 과학이 어떻게 이해되는지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 이전의 자연과 과학

오늘날 자연세계에 가해진 피해의 많은 부분은 자연이 “몰가치하다”, 즉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현대 이전의 어떤 시대에도 자연이 이런 방식으로 몰가치하다고 여겨진 적은 없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도 그랬고 동양도 마찬가지다. 만약 자연이 몰가치하다면, 과학도 몰가치하다.

서양철학의 탄생을 생각해보자.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자연을 이해한다는 것은 데이터와 패턴뿐만 아니라 자연의 기본원리(archē)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리스의 과학은 실증적이기보다 철학적이었다. 심지어 서양역사상 최초의 실증주의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물리학이나 생물학을 배우는 목적은 인간이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수단이었다. 이 초기 과학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 신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대신 위대한 유교사상가들처럼 가치의 패턴이 이미 자연 속에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지배의 대상이나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600년경 현대가 시작되기 직전, 만물의 가치에 대한 믿음은 서양철학에서 정점에 달했다. 유럽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데는 각각의 이유가 있고 모든 것이 신성한 질서에 따라 적절하게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다. 전체로서의 자연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신의 선함을 드러냈으며, 모든 생명은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여겼다. 신이 창조한 모든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과학은 일종의 자연신학, 즉 신의 과학이었다. 자연신학에서 신은 부분적으로 세계를 통해 이해됐으며, 세계는 신을 통해 온전히 이해됐다.

 

과학과 현대 세계

오늘날 환경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시기인 이른바 현대를 끝내고 있다. 현대의 기원은 약 400년전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인간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존재(res cogitans)라고 가르쳤다. 동물은 “단지 기계”이며 자연은 인간의 문명과 사고의 확장을 위한 배경에 그쳤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과학이 그저 인간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인간의 지구 지배를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것도 놀랍지 않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감안할 때 데카르트가 선택한 과학이 어떤 종류인지 상상할 수 있다. 바로 물리학이다. 동시대에 토마스 홉스가 주장한 것처럼 만물이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면,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운동의 방정식이다. 실제로 토마스 홉스가 이런 말을 한 뒤 40년이 지나기 전에 뉴턴이 운동의 방정식을 제시했다.

이제 이 글의 핵심적 생각에 이르렀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자연에 대한 연구, 즉 우리가 선호하는 과학의 종류를 결정한다. 즉, 자연이 과학을 결정한다. 만약 자연이 생명체를 포함한다면, 자연은 생명과학을 이용해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자연이 실재하는 독립적이고 자유롭고 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자연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 인류학, 역사, 문학, 그리고 예술을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서구에서 근대가 탄생할 때 선구적인 과학자들은 이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들에게 자연은 기본적으로 원자, 나중에는 부원자적 입자가 된 물질이었다. 유럽과 미국이 전 세계로 수출한 세계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생각을 퍼트리기 쉬웠던 이유가 있다. 자연을 단지 객체로 바꿔놓는 게 인간에게 강력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관이 배와 비행기, 총과 핵폭탄,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만들어냈다. 전세계 지도자들은 이런 세계관이 생산한 기술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과 상충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문제는 이런 기술들이 이윤의 극대화를 주장하는 주주들과 “공동선”을 위해 조금도 헌신하지 않는 다국적 기업들을 양산한다는 점이다.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지속적인 성장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를 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의 권력을 잃으니까!) 국내총생산(GDP)을 기반으로 성공을 측정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통제에 저항하는 국가들은 가난에 허덕이다가 국민들의 반란에 직면한다. 사람들은 작은 거라도 원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권력을 유지하려면 설사 기후변화를 일으킬지라도 국민들이 원하는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서 교훈은 분명하다. 자연은 과학을 결정하고, 과학은 기술을 결정하며, 기술은 정치와 경제적 전지구화의 형식을 결정한다.

그런데 과학과 자연 사이에 형성된 역학의 나머지 절반이 있다. 자연이 과학을 결정하는 게 맞지만, 과학도 자연을 결정한다. 즉, 우리가 자연을 연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과 가정들은 결국 우리가 연구하는 자연을 정의하게 된다. 아브라함 매슬로우가 썼던 오래된 표현인 “당신이 가진 유일한 도구가 망치라면, 모든 것을 못처럼 다루고 싶어질 것이다.”라는 말을 떠올려보라.

과학에 반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과학도로서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생존에 결 정적임을 강조하고 싶다. 점점 더 정교한 도구를 사용하는 실험가들은 세계에 대한 풍부한 데이터를 얻고, 과학자들은 이 데이터를 이용해 경험적 일반화를 도출하고 자연의 기본법칙을 공식화한다. 이런 지식 없이는 기후파괴의 실제 규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비하는 방법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400년 동안 과학은 현대적 세계관의 시종으로 이용됐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과학과 가치 사이에 더 견고한 장벽을 쌓기 위해 투쟁해왔다. 과학자들은 “문화적 전통과 미신에 구속되면 과학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오래된 미신을 없애고 그것을 (과학이라는) 새로운 미신으로 대체하기 위해 현대적 지식을 수용해야 한다.

가장 최악은 현대적 세계관이 과학은 몰가치적이어야 한다, 즉 모든 가치를 넘어 존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점이다. 이런 잘못된 주장은 지난 400년 동안 파괴적인 결과를 낳았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우위가 전통적 가치를 현대성의 세계관과 가치로 대체하는 비용을 치렀다는 명백한 사실마저 부인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이고 입증 가능한 지식만이 가치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량화되고 통제되고 사용될 때만 정확하게 이해된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고 우리의 필요에 맞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물질 이상인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생기, 의식, 예술과 종교, 선악-은 물질/에너지가 진화과정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복잡한 방식일 뿐이다 등의 주장이 우위를 얻었다. 어느 신경학자가 내게 말했듯, “전선과 화학물질, 그게 우리의 전부이다.”

어떤 실수는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자연을 인간이 제약 없이 사용하는 자원의 집합으로 만든 게 그런 경우다. 결과적으로 깨끗한 공기, 파란 하늘, 마실 수 있는 물, 건강한 토양이 손상됐다. 기업농이 전통적인 농장을 대체했고, 교통체증은 세계의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 자전거와 보행자들을 대체했으며, 알고 통제하려는 욕구가 연결하고 보살피고 보호하려는 바람을 대체했다. 대학과 기업은 가치중립적인 곳이므로 학생과 노동자들은 가치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게 됐다. 현대성은 식민권력의 확장과 함께 지구 전체에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를 전파했다.

 

몰가치의 과학과 몰가치의 자연을 넘어

과학이 승리를 선언한 이후 수세기 동안 상황은 급격하게 변했다. 독립성에 기초한 실증과학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과학, 기술, 산업이 “몰가치적”이라는 생각은 지구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종을 위험에 빠트렸다. 자연에 대한 현대적 관점은 대양의 산성화, 토양이 죽은 농경지, 사막의 확장, 지하수면의 감소, 급속한 지구온난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현대과학이 지식과 가치를 분리하고,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몰아내고, 지혜의 단련을 끝없는 소비의 즐거움으로 대체하도록 허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고 지구 생태계가 붕괴지경에 이르렀음을 발견했다.

좋은 소식은 대안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성이 붕괴하면서 후현대가 등장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이 새로운 대안은 사람들이 땅, 공동체, 그들의 거처를 구성하는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상호 연결돼 살아갔던 근대 이전시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성이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붕괴하면서 우리는 전근대의 선조들과 원주민들의 가치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물론 전근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이것은 일종의 낭만주의이다-지구와 더불어 사는 새롭고 지속 가능한 방식을 창조하는데 과거의 중요한 요소들을 혼합할 수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첫째, 과학은 자연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연구로 해석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인간사회도 수많은 생태계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양한 생태계의 상호연관성을 연구하는 새로운 생태과학이 이를 대체해야 한다. 둘째, 근대성을 벗어나 지속가능성으로 이동하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만큼 과거의 잔재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탄생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생태적 사고와 문명적 변화가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하여

“생태문명”은 네 층위의 조화가 이뤄진 후현대적 비전인데, 이는 사회, 과학, 전통적 가치, 생태적 사고를 규정하는 방식들 사이의 조화를 가리킨다. 이는 강력한 비전이다.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첫째, “문명”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조직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뜻한다. 문명은 개별적인 법, 정치, 기술 이상이다. 문명이란 한 집단의 전체 생활방식, 지구화 시대에는 인간이라는 종 전체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우리는 집단이 공유한 가치와 열망을 가리켜 영어로 “에토스”란 단어를 사용한다. 한 집단의 에토스를 보존하는 것은 오래된 풍습과 가장 깊은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단순히 개별적 정책들, 즉 정부가 원자력의 사용을 승인할지 말지, 누가 자동차를 소유할지, 혹은 사회가 어떻게 농업을 조직할지에 대한 것이 아니다. 생태문명이란 용어는 환경이란 용어를 확장시켜 한 집단의 모든 생활방식을 포함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생태농업은 기업농이 해온 고도의 석유의존 관행을 줄이고, 보다 전통적이며 지속 가능한 방식의 농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생태경제학은 단순한 GDP를 넘어 경제적 성공을 측정하는 중요한 요소로서 인간의 복지와 화합을 강조하는 것을 뜻한다. 사회의 다른 분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새로운 네 층위의 비전에서 두 번째는 과학이다. 현대과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가끔 과학과 기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자고 주장한다. 많은 이들이 복잡한 문제를 가진 현대 세계로부터 등을 돌리고 원시적 농업이나 토착민의 생활방식, 즉 삶이 보다 단순하고 과학이나 기술이 없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생태문명 건설이라는 목표는 과거로의 퇴행을 허용하지 않는다. 생태문명은 과학이 여전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계를 계승하므로 전근대가 아니라 후현대라는 목표를 갖는다. 과학으로부터 도망치기보다 과학을 통합시킨다. 생태문명은 탈과학(post-scientific)이 아니라 현대가 가진 해로운 가정들에서 벗어나 자연과 과학을 보다 유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과거의 과학은 사회와 지구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이었으나 지금의 과학은 주인이 되어 인간과 문화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런 추세를 역전시키려면, 공동선을 위한 과학에 재정지원을 하는 등 사회와 지도자들의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후현대의 우선순위에 봉사하는 과학의 인도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기술이 개발될 수 있다.

네 층위의 비전 중 세 번째는 전통문화의 가치이다. 이것은 서구인들이 종교라고 지칭하는 믿음과 실천의 집합인데 종교라는 말은 동양보다는 서구의 문화적 맥락에 좀더 편안하게 맞는다. 만약 우리가 종교라는 용어를 쓴다면, 후현대 종교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역자주: 불교나 힌두교는 서구인들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체계화하기 이전까지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체계화, 권력화된 서구의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인해 수많은 분쟁과 갈등의 원인이 됐다.)

후현대 종교는 현대 종교와 완전히 다르다. 각 문명이 가진 오랜 지혜를 돌아보며 우리가 사는 후현대 세계에 각자의 전통을 적용한다. 자신의 종교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대신, 상대방의 문화적 전통이 가진 지혜를 배우려고 한다. 후현대인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실천할 수 있다. 믿음과 실천이 사회에 유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객관적이거나 보편적일 필요는 없다.

누구나 “생태문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종교적 헌신 없이도 환경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위해 깊이 헌신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동물의 합일은 여전히 전통적인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표현이 될 수 있다. 두 가지 예를 생각해 보자. 유교는 상반된 힘과 이해들, 즉 남성과 여성, 통치자와 백성,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 지구와 조화롭게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라는 요구는 아마 우리 시대의 가장 높은 가치일 것이다. 도교는 차이간의 균형을 강조하는 또 다른 모델을 제공한다. 균형이란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사회의 각 부분들, 혹은 과학과 가치 사이의 균형을 의미할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을 힘으로 억누를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 군사강국과 약소국가, 북반구와 남반구가 그런 사례들이다.

생태문명의 네 층위의 비전 가운데 마지막은 생태적 사고, 즉 환경 전체를 고려하는 과학, 철학, 정책이다. 생태학은 모든 존재의 상호의존성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건강한 생태계는 그 생태계의 모든 유기체들 사이의 적절한 균형에 달려있다고 가르친다. 환경이 균형에서 벗어나면 생태과학이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행동지침을 제공한다. 정책이 확고한 생태적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그 정책은 모든 구성 요소들 사이의 균형이 깨지더라도 바로 회복되도록 사회를 구조화할 것이다.

 

간단한 예: 과학 정책

한국과 미국 같은 국가의 정부는 과학정책을 구상하고, (미국의 경우) 국립과학재단(NSF), 국립보건원(NIH) 같은 과학단체들에 기금을 할당한다. 이런 정부출연기관들은 지원기준을 정하고, 이들의 기금 지원은 해당 국가의 과학연구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금 지원결정을 내릴 때 그들은 과학을 어떻게 정의할까? 주요한 기금은 대개 매우 전문화된 프로젝트에 투입되는데, 그 이유는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의 개입도 차단되는데, 그 이유는 “인류의 장기적 이익”과 같은 목표는 5년 이내의 지원으로는 정확히 측정되거나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구체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어떤 “가치”가 기금 수혜자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아이러니하다. 우선 정치적 가치인데 과학계에서는 기금을 받기 위한 전투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다. 다음은 기금 지원기관의 특수한 가치인데, 이 기관들은 현재 과학적 패러다임 안에서의 정확성과 일관성이 유지되는지, 그리고 3년 내지 5년의 수혜기간 내에 확실한 결론을 낼 수 있는지 증명하기를 요구한다.

이런 가치들이 지원기준이 되면 결국 우리와 자연세계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이론과 기술을 지원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기술과 사회를 조직하는 급진적으로 새로운 방식을 연구하고 증진시키는 과학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장기 연구를 지원하는 일이 어렵기는 해도 NGO나 민간기부자들을 통해 약간의 지원이 가능하다. 시민들이 지속 가능한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지원을 요구한다면, 정부도 정책 변화로 응답할 것이다.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

우리는 자연과 과학의 개념이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았다. 지구는 위기에 처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자연을 인간의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이런 자원을 어떻게 측정하고 효과적으로 이용할지 결정하는 수단이 됐다.

나는 건강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지구를 보호하려면 여러 과학분야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태문명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말만 하면 안 된다. 이런 종류의 사회질서가 어떤 것인지, 물리적∙생물학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지,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엄격한 자연과학은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확신하는 후현대적 맥락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의 깊은 상호연관성을 인정하면서 생태과학과의 대화 속에서 후현대적 자연관을 세워나갈 때 모든 것이 변화한다.

전근대 시대에 인간은 자연과 가치를 통합할 수 있었다. 현대과학은 인간과 생태의 심오한 가치를 저버린 대가로 성공했으나 불균형의 과학이 됐다. 후현대 과학의 임무는 높은 수준의 현대과학을 과학분야 상호간의 관계, 지구와의 온전한 관계라는 가치 아래 서로 만나게 하는 것이다. 생태연구는 지구의 미래를 담보하려면 어떤 종류의 균형이 필요한지 밝혔다. 사고방식 혹은 세계관으로서의 생태학은 사람들을 각자의 환경과 보다 가깝게 통합시키는 수단으로서 각 지역의 문화적 전통을 되살리기를 권한다. 과거의 지혜와 미래의 생태학이 함께 현재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모더니즘의 힘은 여전히 우세하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쉽게 통제권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많은 정부들은 계속해서 지구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많은 소비자들은 사회의 이익보다 자신의 안락과 욕구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현명한 장기적 해결책보다 쉬운 단기적 대응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미래는 위태롭다. 우리가 계속 상위의 가치를 부정한다면 개인들은 계속 자신에게 가장 이익을 주는 생활방식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가치를 오직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정의하는 것은 지구의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대규모 멸종을 낳으며 지구상 생명의 정교한 균형을 손상시킨다. 새로운 생태문명은 자연 본연의 가치라는 기반 위에서, 그리고 그 가치가 지구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지침으로 기능할 때만 이뤄질 것이다.

 

필립 클레이튼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교수, 생태문명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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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코리아 양국체제

코리아 양국체제1란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두 나라가 주권국가로서 서로 인정하여 공식 수교하고 평화롭게 공존, 교류, 협력하는 일 민족 이 국가2의 평화체제, 공존체제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지난 70여 년 남북 간에 쌓이고 쌓인 적대와 불신을 완화하고 해소함으로써 평화적 통일로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지난 70여 년 남북은 수없이 많은 ‘통일방안’을 경쟁적으로 제안해 왔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통일은 멀어졌다는 역설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은 서로를 국가 대 국가로서 인정한 바 없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통일을 말해봐야 통일이 이뤄질 리 없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통일하자고 하니까 전쟁까지 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통일을 하자고 할수록 통일이 멀어지는 역설이 여태껏 발생해왔다고 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가 양측이 상대를 진심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인정하는 데 있음은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가로서 성립되어 있는 양자 간의 관계에서 그렇듯 진정에서 우러난 실제적인 인정이란 서로를 정당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남북 서로가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각자의 내부에서 상대를 부정하고 적대했던 심리와 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야 편지 한 통 오가는 데서 시작해서, 전화가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그리고 마음이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 간의 긴장이 먼저 풀려야, 정치적 긴장도 풀리고, 군사적 긴장도 따라 풀릴 것이다. 이 길이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이고 그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이 코리아 양국체제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그 ‘제1보’는 한 번도 제대로 떼어지지 못했다.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면서 내달리고 도약하기를 꿈꾸는 온갖 화려한 통일안들이 난무했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여태껏 미뤄져온 그 첫걸음을 제대로 분명하게 내딛자는 제안이다. 통일에 이르는 첫걸음이 될 양국체제가 정착되고 안정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첫 과정을 제대로 이수(履修)하는 데만 많은 노력과 인내와 창의력이 요구된다. 이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분명한 목표로 인식하고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과정을 애매모호하게 남겨둔 채 2단계, 3단계로 건너뛰자는 통일안들은 말만 화려할 뿐 실효가 없다. 오히려 갈등과 불신만 키워왔다.

양국체제란 단순히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두 국가 간에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공식적으로 이뤄지고 그러한 상호 인정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야 비로소 양국체제라 할 수 있다. 2018년 현재 세계 157개국이 남북 두 국가를 동시에 인정하고 수교하고 있으니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한반도에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막상 남북 두 국가는 서로를 국가로서 정식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고 극단적으로 적대했던 두 국가가 엄혹했던 냉전 기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상황 탓으로 넘겨본다 하더라도, 소련·동구권이 붕괴하여 미소 냉전이 해소되고 1991년부터는 남북 두 나라가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음에도 그 후로도 거의 30년을 서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이 크게 변하여 이러한 비정상이 더는 지속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리면서 한국전쟁(Korean war)의 종전과 북미 수교가 남, 북, 미 3국의 공식 어젠다에 올랐다.3 정전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사자가 될 남북 두 국가가 이제 서로를 정상적인 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후 북미·북일 수교가 이뤄지는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도 남북만은 끝내 상대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은 채 준 전쟁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제 양국체제가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대중적 힘이 대한민국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힘은 물론 2016년 겨울 이후 형성된 촛불혁명의 민의다. 촛불혁명은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정권의 모든 실정(失政), 무능, 독단에 대한 항의와 비판을 ‘종북’으로 싸잡아 억누르고 ‘블랙리스트’로 묶어 배제했던 박근혜 ‘신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거부가 있었다. 결국 북을 이용해 독재를 강화하는 낡은 공식을 재탕·삼탕하려다 국민적 대저항에 부딪쳤던 것이다. ‘보수가 안보는 잘할 거’라는 근거 없는 공식도 완전히 깨졌다. 이명박, 박근혜 소위 ‘보수정부’ 시절 내내 안보 위기·전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만 갔다.

높아가는 안보 위기, 전쟁 위기에 대한 국민적 불안과 불만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음은 2018년의 판문점, 싱가포르 회담에 대한 여론의 압도적 지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4 2019년 2월 하노이에서의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상황은 교착되는 듯했으나, 같은 해 7월 1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다시 만나 70년 적대를 종식시킬 대장정의 새 장을 열었고, 여론은 여기에 대해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이 지지는 촛불민의의 연장이자, 촛불민의를 믿고 과감한 대북 화해, 북미 화해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던 새 정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제 남북미 간의 평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의지와 역량이 새 정부가 ‘촛불정부’임을 입증하는 핵심 증표가 되었다. 이로써 양국체제로의 현실 변화는 남북미 간의 해빙 기류와 이를 지지하는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안팎의 든든한 근거를 갖추었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어느덧 이미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제 코리아 양국체제는 학술적 발상이나 탐구의 수준을 넘어서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양국체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인식을 정립하여 임박한 변화에 준비된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에 양국체제에 대한 이해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상식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간단해 보이나 실은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양국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흥미로운 현실의 블랙박스를 먼저 풀어야 한다. 오랜 세월, 상식이 현실로 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모종의 강고하고 거대한 장애가 우리 자신의 안팎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양국체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 정립을 위해서는 먼저 이 거대한 장애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작업은 현실에서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다. 양국체제로의 첫 전환 시도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첫 시도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시도가 어떻게 가능했고 왜 실패했는지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국체제에 대한 체계적 인식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양국체제 발상이 억압되어온 까닭

먼저 양국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상(像)을 그리기 위해, 한중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현재 한국과 중국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국은 2003년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제1교역국이 되었고, 2017년에는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인과 한국에서 체류하는 중국인이 각각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진 후 벌어진 놀라운 변화다. 편지 한 통 자유로이 오가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이러한 큰 변화가 이뤄진 것은 한중 두 나라가 국가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정식으로 수교했기 때문이다. 먼저 정식 외교관계가 이뤄지면 여러 변화가 물꼬를 터서 연이어 진행되게 마련이다. 한중 수교와 교류는 한중 양국에 큰 혜택을 주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수교 이전의 냉전시대 한중 관계는 사실상 전무했다. 당시엔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중공’이라 불러야 했다. ‘적성공산국가’를 마치 정상적인 나라인 것처럼 부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류는커녕 교류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적대와 금기의식이 지배했다. 러시아(구소련)와의 관계, 베트남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실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주지하듯 이러한 변화는 미소 냉전체제의 붕괴로 인해 가능했다. 더는 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교류와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일반인들이 서로 만나 협력하고 사업하는 데 이념의 차이를 물고 늘어질 이유가 없었다. 한중, 한러, 한베 수교국 정부 사이의 공무(公務)를 수행하는 데서도 서로의 이념이나 체제를 문제 삼아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코리아 양국체제란 한국과 조선 두 나라 사이에도 한중, 한러, 한베 사이와 같은 정상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뤄지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한국과 조선은 같은 민족의 두 국가이지 서로 민족이 다른 외국이 아니다. 같은 민족의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일반 외국과의 관계보다 긴밀하고 특수할 수밖에 없다. 양국체제란 일종의 ‘한 민족 두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 특수성이 지금까지는 불행하게도 삼엄한 휴전선을 경계로 대치하면서 어떤 정상적 교류도 불가능한 상태에 머무르도록 지극히 부정적으로 작용해왔다. 일반적인 대외 관계와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철저히 가로막힌 상태였다. 그러나 과거 냉전시대 ‘적성국’이었던 중국, 러시아, 베트남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일반인 사이에서도 ‘왜 북과는 같은 민족인데도 그럴 수 없느냐’는 자연스러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일반인 대상으로 양국체제를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기본적인 소개만 하고 나면 오히려 필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남북 간의 양국체제는 여태껏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발상조차 분명한 형태로 제기되지 못했던 것일까?5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양국체제를 설명하다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자주 접하게 된다. 뒤집어 보면, 비록 막연하게나마 그런 방향과 방식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또는 그런 식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의 용어로 말하면, 그러한 생각과 발상은 무엇인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렇듯 양국체제적 생각과 발상을 억압해왔던 것일까?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외부로부터 오는 억압이다. 이는 주로 그동안 북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했던 국가와 국가기관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다(남북이라는 말을 바꾸어도 상황은 정확히 같다). 일례로 우리는 오랫동안 ‘북한사람’을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면 공포를 느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6 국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해외에서도 그러했다. 북을 불법화하고 있는 국가 당국이 언제든 그런 ‘접촉’을 ‘간첩사건’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이러한 억압은 독재의 수단으로 오랜 세월 애용되어왔다. 어떤 정당한 비판도 ‘종북’이라 몰고, 어떤 비인도적 탄압도 ‘종북 척결’로 정당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양국체제적인 발상을 떠올리기도, 꺼내놓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 절에서 말했듯 촛불혁명을 전후하여 국내외의 상황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외적 억압은 점차 약화되고 있고, 앞으로 더욱 약화되어갈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런 외부 억압은 억압을 당하는 각자의 의식 속 내면화를 수반하기도 한다. 스스로 ‘종북’ 딱지에 걸리지 않도록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내 귀의 도청장치’가 생긴다.7 이런 자기검열을 통해 북에 대한 경계와 공포, 적대감이 내면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외적 억압에 의해 내면화된 의식 역시 결국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외적 억압 요인이 약화·소멸됨에 따라서 같이 또는 다소의 시차를 두고 약화·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비롯된 억압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이 억압은 원인이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외적 억압이 사라져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한 억압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분단의식’임을 알 수 있다. 남북뿐 아니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코리안들에게 ‘분단’이란 그저 단순한 한마디의 말, 언어가 아니다. 범상치 않은 단어다. 반드시 ‘비원(悲願)’이나 ‘한(恨)’과 같이 강렬한 정서적 에너지가 고도로 응축되어 있는 표현을 수반한다. ‘분단’이란 모든 코리안에게 깊은 고통과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수반하는 상처의 표현이다. 일제에 억눌리면서 맺혔던 한이 풀리나 했던 순간 야밤의 봉변처럼 닥쳐왔던 것이 민족분단, 조국분단이었다. 일본을 몰아낸 미국과 소련의 힘, 그리고 그들 사이의 냉전이 분단을 가져왔다. 민족의 심장에 꽂힌 가시가 반드시 뽑혀야 하듯, 이 ‘분단’은 반드시 거부되고, 부정돼야만 한다. 따라서 ‘분단의식’이란 강렬한 ‘분단부정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에는 또 항상 ‘극복’이란 말이 따라 붙는다. 그 결과 ‘분단의 비원’과 ‘분단의 극복’은 항상 짝을 이루는 말이 된다. 이러한 분단은 나뉘어 있되 결코 둘이 아님을, 아니 결코 둘일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은 나뉘어 있지만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정언적(定言的)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이드)을 ‘억압’하는 것은 초자아(슈퍼에고)이고, 이 초자아의 명령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과 닮아 있다. 정언명령을 닮은 이 ‘분단(부정)의식’이 ‘한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코리아’라는 생각, 양국체제의 발상을 억압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금압, 터부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한중, 한러, 한베 수교 이후 현실이 크게 변했음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음에도 그렇듯 상식적인 양국체제적 발상을 제기한다는 것이 왠지 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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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1/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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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제40조는 국회의원의 상임위원 임기를 2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당초 제헌의회 때 상임위원 임기는 의원의 임기와 같이 4년이었다. 그랬던 것이 1953년 1월 22일 국회법 개정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국회 무력화 과정에서 1년으로 단축되었다가 다시 1963년 11월 26일 박정희의 제3공화국에서 2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제3공화국 당시 본회의 중심 체제를 상임위 중심 체제로 전환한 것은 의회기능 강화의 목적이 아니라 독회제도 폐지 등 행정부 안의 신속한 국회 통과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특히 이 상임위 중심 체제는 말이 상임위 중심이었지 의원의 정책전문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상임위 중심체제에서는 극히 기형적인 “임기 중 상임위원 개선(改選) 제도”였을 뿐이다. 이 점에서 “임기 중 상임위원 개선제도”는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의회 무력화의 도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재 국회의장 임기도 2년이다. 국회의장 임기도 제헌의회 때는 4년이었다. 그러나 1951년 3월 15일 당초 임기 4년이던 국회의장 임기를 “국회 운영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1년 임기제로 개정하고자 했다. 이 개정안은 심지어 “토의시간만 허비하는 전원위원회 제도 폐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결국 반발에 부딪혀 의장 임기는 2년 임기로 수정되었다.

 

국회의원의 업무 전문성은 어떻게 높아질 수 있는가?

우리 국회에서 의원들의 업무 전문성에 있어서의 취약성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고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그 취약성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제도적으로 관행적으로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의원의 업무 전문성이란 임기 동안 혹은 선수(選數)를 쌓으면서 “동일한 상임위원회를 유지”함으로써 업무 전문성을 축적하는 것이다. 미국 의회의 경우 의원의 업무 전문성은 상임위를 중심으로 업무 전문성이 축적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집권당 내 위원회를 중심으로 전문성이 축적된다. 미 의회에서 상임위원회는 의회와 행정부 간의 정책결정의 중심무대로서 따라서 자연스럽게 상임위를 중심으로 한 정책형성은 의회 활동의 중심으로 되었다. “한 상임위 내에서의 선임 순위가 위원장이나 간사로 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는 미 의회의 불문율, 즉 ‘선임우선제’는 위원회 내의 승진에 대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자동적이고 공평한 원칙이었다.

한편 일본은 자민당 일당독재가 고착화되는 과정에서 법안과 예산 심의가 의회 위원회가 아니라 자민당 내 정책결정기구인 정무조사회로 되었고, 이 정무조사회의 각 부회(部會)가 의회 위원회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동일 위원회와 부회를 유지하면서 관청과의 인적 네트워크 및 영향력을 확보하면서 이른바 ‘족(族)의원’의 위치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관련분야의 정책전문가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의원들이 2년마다 상임위를 변동할 뿐 아니라 상임위 배정 뒤 임기 2년 중에도 수시로 상임위를 변동하고 있다. 실제 역대 국회의원 임기 중 상임위 변동률은 50%를 상회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상임위원장을 1년씩 ‘쪼개기’로 맡는 것이 관행화되고 있다. 또한 현역의원이 재선될 경우 전임기의 상임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비율도 40%를 넘지 못한다. 미국 재선의원의 90%가 전임기의 상임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전혀 딴판이다. 더구나 우리 국회는 1963년에 김종필에 의해 도입된 당정협의체제는 행정부 주도 하의 정부여당 협의기구로 오늘날까지 존속하면서 의회와 상임위 위상을 크게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동되어왔다.

임기 중 상임위의 빈번한 변동과 재선 시 상임위 변동은 의원의 업무 전문성 축적에 결정적 저해 요인이다. 상임위 변동으로 소관 업무 및 관련 행정부처 역시 변경되고, 의원은 물론 보좌진도 새로 업무를 파악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민들도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원과의 통로를 어렵사리 뚫어 놓아봤자 그 다음 만나면 이미 소속 상임위가 바뀌는 바람에 다시 다른 의원을 알아봐야 하는 고충을 겪어야 한다.

의원들의 업무 전문성은 의회 발전의 중요한 토대이다. 우리 국회의 정상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한 의원이 동일 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함으로써 업무 전문성을 축적해야 한다. 상임위원 임기는 의원 임기와 일치되어야 하며, 또한 재선 시에 전임기와 동일한 상임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국회는 너무 오래 이승만-박정희 체제의 관행에 머물러 있다. 이제 권위주의 정권이 국회 무력화를 위해 만들어놓은 국회 상임위 2년 체제를 벗어나야 한다.

 

적대적 공존’, 그 나눠먹기의 시작

본래 우리 국회도 상임위원장은 다수당이 독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국가 의회든 의회의 일반적 형태이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탄생된 이른바 ‘87 체제’의 여소야대 4당 체제 정국에서 상임위원장을 의석 비율에 따라 배분하게 되었다. 긍정적 측면에서 평가하자면, 이는 의회 상임위 활동에서 독점을 해소하고 공존과 균형 그리고 타협의 공간을 제공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여야 나눠먹기의 전형적 형태라 할 수 있다.

당시 여소야대 4당 체제에서는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 조항도 신설되어 각 당이 정책연구위원을 ‘나눠 갖게’ 되었다. 그리고 줄곧 여당의 몫이었던 국회도서관장 자리도 제1야당의 몫으로 가져가기로 되었고, 이 관행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이 과정은 당시 제1야당으로 올라선 평민당의 의도가 관철되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물론 이는 DJ의 구상과 ‘철학’이 반영된 셈이었다. 이러한 DJ식 정치는 “상인적 현실감각”에 대한 강조에서 드러나듯, 독점된 권력을 분배하고 균점하는 계기로 작동되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나눠먹기’, ‘기득권의 공존’ 혹은 개량주의라는 단점 역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우리 국회의 고질적 폐단이기도 한 여야 간 ‘적대적 공존’의 토대로 기능해온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 살펴본다면,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우리 국회의 중요한 폐단인 “나눠먹기” 혹은 “적대적 공존”이 관행적으로 구축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수, 2020/07/01-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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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는 1997년, 1999년에 각각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정의되는 방침에 따라 통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 모두 중국과의 재통합 이후 특별행정구역(SARs)으로서 50년간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두 도시는 중국령이 되었지만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된 행정, 입법, 사법 자치권을 통해 독자적인 국정을 관할한다. 홍콩 기본법에는 중국 정부가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치권 보장이 끝나는 2047년에 과도 시한이 끝나고 나면 홍콩 도시의 미래는 중국에 귀속된다.

선거가 치루어진 이후, 중국 인민일보의 1면 논평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고 홍콩 사무는 중국 내정에 속한다. 홍콩 문제에 외부 세력의 간섭을 불허하는 것은 중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브라질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정부는 변함없이 홍콩 문제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개입도 반대할 결의를 지녔다고 전했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지난 11월, 홍콩에서 구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범민주당이 “전체 452의석 중 347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뒀다”고 보도하며 18개 구 중 17곳을 장악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홍콩 구의회(DC)는 홍콩 입법회와는 다르다. 홍콩 구의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교통, 환경, 거주 환경과 같이 생계와 관련하여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수개월 간의 ‘반체제 반향’으로 인해 2015년 선거때 47%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71%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고, 투표 결과 또한 상당히 상이하게 나타났다고 전했다.

“범민주당이 선거에 압승하여 득의만만하자 유권자들 전반에 걸쳐 명백하게 불만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2015년 이후 이번 선거전까지는 건제파가 지방의회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친중 정당인 민주건항 협진연맹(민건령, DAB)은 기존 119석에서 줄어든 21석을 얻는데 그쳤다.

 

홍콩의 시민 불복종 운동 또는 미국의 색깔 혁명 시도?

이제 민주파는 홍콩행정장관을 선출을 담당하는 선거위원회에서 중요한 대표성을 띄게 된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식 폭력, 공공 기물 파손(반달리즘)과 혼돈 대신에 비교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에 중국을 와해하려는 워싱턴의 양당 강경파들의 분노를 감안했는지 여부는 향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도시 거주민 대부분은 과거에 벌어졌던 폭력적인 상황에 명백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홍콩을 와해 및 약화시키려는 (내부의 또는 외부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면서 홍콩 도시는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주에 미국을 “세계 불안정의 가장 큰 근원”이라 일컬으며 “미국 정치인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세계적으로 중국을 모함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대대적으로 일방주의와 보호주의에 관여하면서 다자주의와 다자 무역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로섬 게임을 이어간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중국과 미국 간의 협력과 공영만이 올바른 길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패권주의적 목적을 위해 다른 국가에 대한 우세를 추구하고 상호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미국의 운영 방식이 아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지방 선거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번 구의원 선거는 현재는 철회되었으나 도시의 불안을 촉발시켰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이후로 홍콩특별행정자치구에서 처음 시행된 여론의 결과입니다.”

“지난 5개월 이상 동안 폭도들은 외부(미국)세력과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강화하여 사회 및 정치적 대립, 사회적 정서 내 균열을 일으키고 경제와 민생에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수개월간 이어진 사회적인 동요는 선거 과정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다. 일부 폭도는 선거 당일에도 애국적인 후보를 교란했습니다.”

“오늘날 홍콩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전히 폭력 및 혼란의 종식과 질서의 회복입니다.”.

신화통신은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인민일보 역시 투표율이 높았고, 개표 작업을 완료했으며, 의원 사무실 100곳이 파손되었다는 사실을 약간 더 언급했을 뿐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영자신문 차이나데일리는 야당이 승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뻔뻔스럽게 무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도시 주민들은 몇 달 동안 CIA에 의한 폭력, 공공 기물 파손, 혼돈 속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현재의 상대적 평온함이 회복되고 지속된다면 미국이 새로이 중국 내정에 간섭하기 이전의 휴지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보여준 무법천지의 배경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사회악이다. 그들의 어두운 세력은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변화를 꺼리는 마음에 의해 홍콩 시민들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Stephen Lendman(스티븐 렌드먼)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유 연구자로서 글로벌리서치의 정기기고자이다.

월, 2019/12/3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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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NYT에 실린 내용으로 기고자는 현재의 위기에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구제지원을 선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다만 생산적인 논쟁을 위하여 게재를 결정했다.

우리는 지난 IMF 시기와는 달리하여 은행과 거대 기업에 지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대신, 수요자인 시민들과 중소기업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무제한적으로 직접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거래은행은 해당산업의 지원과 존폐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정부는 이번 위기를 미래의 일상적 혁신을 위해 대규모 산업구조조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큰 기업과 은행의 파산에 대응하면서, 정부가 선택적으로 이들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되 경제가 정상화된 이후, 시장에 재매각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수천만 명이 실직을 당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연방의회는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려고 이미 3조 달러의 지원을 승인하였고, 추가의 금액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에 신속하고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대하여 다른 정치적인 견해들이 분노와 함께 돌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인들과 언론매체 그리고 일반시민 사이에 잠재적인 불황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수혜자들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여부를 밝히는 것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좌파적 정치인들은 거대기업들이 연방정부의 지원혜택을 받거나 연방준비제도가 공급하는 초저금리의 신용공여를 받는다는 것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우파에 속하는 측은 연방행정부가 주정부나 지방정부를 지원하거나,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여론매체들은 스테이크하우스 체인이나 사설학원같이 자격미달인 조직들에게 지원금이 투입되는 것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수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지원금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엔 자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제로-섬 게임의 위험이 존재한다. 이는 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곤궁에 빠진 개인과 기업 그리고 공조직에 대한 연방정부의 대응수단을 제한하고 지원을 중단시킬 잠재성을 지닌다.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친구들은 주정부나 지방도시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현재 해밀톤 전략연구소의 파트너를 일하고 있는 Tony Fratto는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적인 인사들은 민간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에게도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들 각자의 견해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고통의 결과물들이라고 덧붙였다.

2008년 세계적 규모의 금융위기와 후유증을 겪은 지금은 물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긴급한 사항이다.

지난 위기 과정에, 보수주의자들은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구매자금을 담보조건으로 융자해준 사실을 비난한다. 당시의 은행들은 거대한 ‘모랄-해저드’라는 문제를 동반하면서 금융조직들이 부동산 저당의 거품에 자금을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결과에 대해 전액의 구제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Covid-19에 대하여 같은 내용으로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주택버블과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금융회사들이 구제지원을 받은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번의 사태는 경우가 다르다”고 자유 루스벨트 재단의 연구원인 Mike Konczal은 주장한다.

금융위기 상황과 확실하게 다른 것은 기업들이 코로나를 야기시킨 장본인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분야와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이 이를 묵살하고 있는데 이들은 과거에 구제를 받았던 기업들이, 지난 수 년간 바이-백을 통하여 주주들에게 배당을 높이는 행동을 보여 왔다며, 이제 다시 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터트린다.

이런 비판에 앞장서온 Oaktree Capital의 Howard Marks는 최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비도덕인 행위를 한 기업을 정부가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면, 이는 분명히 ‘모랄-해저드’에 해당한다. 이들 조직과 관련 투자자들은 고통에서 보호를 받겠지만 이는 아주 나쁜 사례를 남기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들, 특히 부채가 많아 충격에 취약한 조직들이 우선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몰리겠지만, 동시에 현재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충격에는 어떤 기업조직도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연방준비제도가 기업채권에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많은 기업조직들이 자신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순간의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서 파산에 이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파산은 부실기업을 주주로부터 분리시켜 신용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효율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같은 충격에 대해 정부가 온전히 방관으로 일관하면 파산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결과적으로 일하는 미국시민들과 경제전반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경제가 좋은 호시절에도 파산의 정리과정에서 신용제공자(채권은행)와 노동조합 또는 노동계약자들 간에 협상을 통하여 퇴직보상이 없는 정리해고를 자주 허용하기도 한다. 여러 산업분야를 관통하며 수 천개의 기업들이 상법 제11조의 파산신청에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이로 인해 파산법정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고, 구조조정의 기간 동안 조업을 지속하도록 하는 부채정리의 과정이 지연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우량기업들이 살아남기 보다는 청산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연이은 파산사태는 부채에 시달려온 투자자들이 헐값에 가치있는 자산을 사들일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며, 산업이 소수의 거대기업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잘못된 경제관계를 회복하려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경제상황에서는 파산이 창조적인 파괴의 선순환으로 작동하지만, 지금은 파괴가 거대한 조업중단과 폐업을 야기할 것이다”라고 경제혁신그룹의 책임자로 일하는 John Lettieri는 이야기한다.

비슷한 논리가 연방정부 구제지원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다.

상원의 주류인 공화당 총무인 Mitch McConnell은 지난 4월의 한 인터뷰에서 현금유동성이 부족한 주정부들을 파산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중에 그런 입장에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와 공화당 동료들은 민주당 소속의 주정부들이, 한편에서는 대규모 공공실업연금의 의무를 시행하면서, 연방정부의 구제지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많은 주정부들이, 위기 이전에는 건전한 재무상황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세수가 격감하면서 향후 수년간 재정지출을 심각하게 축소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민간분야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경제가 정상화되는 것이 지연될 수 있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대상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도, 고용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중소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지불보호정책을 서명하는 주정부들의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우선적으로 3,500억불의 자금지원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연방의회의 결정여부에 있으며, 문제는 상기 금액으로는 중소기업들의 임금지불을 충당하는데 역부족이라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자금의 집행으로는 부족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규모의 스테이크 체인사업체들뿐만 아니라, 벤처지원 기업들을 포함하여 지원할 가치가 있는 조직들도 희생당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 만개의 기업들 중에 섞여 일부 불량기업이 구제지원 자금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며, 사람들이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없다는 식으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접근하는 것이라고 Lettieri는 말한다.

팬데믹에는 도덕적 기준이 없다. 경제를 회복시키는 조치가 공정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이라고 분노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2020-05-04.

Neil Irwin

뉴욕타임즈 경제칼럼 기고가

수, 2020/05/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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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미국의 적극적인 제안과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유엔총회, 안전보장 이사회, 유엔사무국, 경제사회 이사회 등 4개의 공식기구와 국제 원자력 기구, 식량농업기구, 유네스코,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 등 산하의 여러 전문기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2019년 현재 193개 회원국과 37,000 여명의 직원을 두고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요 공여국인 미국의 상습적인 분담금 납입지연과 불이행 등으로 2019년 현재 수억 불이상의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의 글은 유엔에 가하는 미국의 횡포와 압력의 실상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유엔은 자금조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치 변덕스러운 회원들로 채워진 클럽처럼 유엔은 모든 회비가 제 때 들어올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일부 회원국들은 회비 지급을 미루고 있고 결제는 종종 실종된다. 미국의 경우, 현재 유엔 운영 예산의 약 22%를 담당하는데, 회계연도에 따라 10월 이후에야 회비지급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더 큰 문제의 일면에 불과하다. 회비지급 보류는 유엔헌장 17조를 위반하는 사항으로 예산상 행위만큼이나 정치적이기도 하다. 이 조항의 중요성은 유엔의 운영비용을 “총회가 배정한대로 회원국이 부담한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UN 외교정책과 조직의 개혁 문제는 부과된 회비를 줄이거나 보류하는 주요 사안들로 언급되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렇게 “부과된 회비”가 행정 비용, 평화유지 활동 및 다양한 프로그램에 쓰이는 비용을 부담하는 공식 정규 예산으로 편성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경우, 종전에는 기구 운영 비용의 약 40%를 부담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따라서 UN 조직에 어떤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추방, 유보, 자격 부인 또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경우 “미국이 연간 분담금의 지급을 유보하면서 매달 8.34%” 축소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었다.

재정 지원 문제는 돈주머니를 걱정하는 미 의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수년간 위원회의 붙박이 역할을 한 제시 헬름스(Jesse Helms)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미국이 유엔 회비를 전액 지불할지, 정시에 지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불렸다. 그와 함께 조 바이든(Joe Biden) 상원의원은 UN에 전액을 지불 하기 위한 전제로 다양한 “기준들”을 준수하도록 압박하는 협상을 1997년 타결했다. 여기에는 불가피한 UN 직원의 감축, 감찰관과 사무총장 간의 적절한 보고 절차, 타 기관에 대한 자금지원 금지 항목이 포함됐다. 2000년 1월, 헬름스 의원은 수 십 년간 의심해왔던 조직인 이른바 그림자 정부에 대해 충고하고, 참견하며, 잘난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UN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연설에서 독특한 인상을 준 한 미국 의원을 경험하는데, 그는 당시 UN 주재 미국대사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이었다. 유엔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면서, 그의 목적은 이 기구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빚쟁이”가 한 것으로 간주하는 비평가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엔의 최대 공여자인 미국 국민의 대표로서, 우리는 투자에 대한 대가로 구체적 개혁을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라고 공언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등장으로 미국의 자금과 유엔 운영비 사이의 훈훈한 협상의 새 장이 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사회복지 사업, 의료 및 교육 부문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는 이 조치의 타당성을 확신했다.

“이 기구는 부패했고 비효율적이며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18년 예산안에는 유엔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미국 자금의 절반을 삭감하는 조치도 포함됐는데, 이는 특히 기후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연방의회는 유엔평화유지활동 기부금 상한제 시행 안건에 동의했다.) 이와 같이 자금지원을 중단하여 유엔 기관들을 위협하고 압박을 가하는 사례는 여전히 미국의 관행으로 남아있다.

현재 회원국들이 유엔에 지불해야 하는 13억 달러 상당 중 미국이 체납한 금액은 10억 달러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불량한 수치의 누적은 미국이 다른 회원국들에 불만을 토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6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사무총장은 5차 위원회의 예산 감독관들에게 급여와 물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명성과 운영 능력에 있어서 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모든 회원국들이 분담비를 모두 제 때 지급하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금을 적소에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유엔은 5월 말까지 4억9200만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파국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하느냐가 앞으로 수 년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상황은 예상대로 악화됐다. 지난 10월 첫 주 월요일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10월말 현금 보유고가 고갈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유엔 사무국 소속 37,000명의 직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원국들이 2019년 유엔 정기 예산 운영에 필요한 금액의 70%만 지불했다. 이는 9월말 2억3000만 달러의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달 말까지 예비 유동자산 보유고가 고갈될 위험에 처했다.”

재정긴축 조치가 내려졌다. 컨퍼런스와 회의가 연기되고 있으며,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출장도 취소됐다. 유엔 대변인 스테판 두자릭(Stéphane Dujarric)은 회원국들에 압력을 가하며, 193개국 중 129개 회원국만이 “전 세계적으로 운영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채무 불이행을 방지하기 위해 연간 분담금을 전액 지불했다”고 밝혔다. 유엔의 의미와 영향은 회원국들에 달려있으므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세계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확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리서치, 2019.10.11.

비노이 캄프마크(Binoy Kampmark)

케임브리지 셀윈 대학의 영연방 학자. 현재 멜버른 RMIT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글로벌리서치 및 아시아-태평양 리서치의 기고자로 활동 중이다.

 

More info.

추가 정보

심 심 위스곳(Sim Sim Wissgott), UN 분석가.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10월 중 유엔의 재정이 고갈되고 있으며, 11월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려면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고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가 어떻게 현금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일까? 유엔의 재정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그리고 왜 허리끈을 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누가 유엔에 돈을 지불하는가? 193개 회원국은 모두 각 국가의 규모와 경제력에 따라 산출된 유엔의 전반적인 운용을 위한 연간 분담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다. 2019년 총 분담금은 28억5000만 달러로, 미국의 분담금(약 6억7420만 달러)이 가장 많이 책정됐으며 바누아투, 미크로네시아, 소말리아, 벨리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과 같이 국가의 규모가 작거나 빈곤한 경우 각각 최소 2만7883달러 만을 부담했다.

유엔의 재정 규칙 및 규정에 따르면, 이 자금은 해당 국가들이 그 해의 분담금을 통보 받은 후 “30일 이내 전액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매해 지급 기한은 1월 31일이었다. 하지만 기한을 준수하는 회원국은 단 몇 십 개 국가들뿐이다. 2019년 10월 8일 현재, 유엔은 여전히 분담금의 약 30%에 해당하는 63개국의 기금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의 전년도 미지급 연회비마저도 연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이번 주,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우리는 급여를 충당할 현금이 부족한 채로 11월을 맞이할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며 국가들에 회비 지급을 촉구했다. 유엔이 10년 만에 가장 큰 적자를 기록하며 “우리의 업무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고 덧붙였다.

그 돈은 어디에 쓰이는가?

유엔의 정기 예산은 뉴욕의 유엔 본부뿐만 아니라 비엔나, 나이로비,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통신과 정치, 인도주의 및 경제 업무 등을 운용하는 데 쓰인다. 르완다, 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평화유지 활동 및 국제 재판소는 별도의 예산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현재의 적자 상황을 “유엔이 직면한 최악의 재정 위기”로 표현했으며, 이는 공석을 채우지 않고, 필수적인 출장인 경우만 허용하고, 회의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은 돈에서 자금을 빌려야 할 수도 있다. 유엔은 전 세계 4개 주요 센터와 아프가니스탄, 말리, 아이티의 현장 사무소에 3만7500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유니세프, 유엔난민고등판무관과 같은 유엔 기관들은 자체 예산을 가지고 있다.

스테판 두자릭(Stephane Dujarric) 대변인에 따르면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올해 초 이미 상당한 수준의 비용절감 조치를 시작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유엔은 현재 약 6억 달러의 적자로 인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주요 연례 행사인 지난 달 총회를 개최할 수 없었을 것이다. 9월 말, 유엔의 적자는 2억3000만 달러였다.

브라질, 한국,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은 분담 지급을 미루고 있다. 특히 유엔 총 예산의 3분의 1을 지급하는 상위 6개 회원국 중에는 미국만이 2019년 분담금을 전액 지불하지 않았다. .

뿐만 아니라 각종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금년 분 4억 달러에 육박하는 체납금을 포함하여 지급해야 할 총 납입액은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유엔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해온 것에 오랫동안 불평해왔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자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지난 해 유엔총회에서 “세계주의의 이념을 거부하고 애국주의 원칙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지난 달 그는 세계 정상들에 “모든 파트너들이 공정한 몫의 방위비 및 기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유네스코(UNESCO)의 반 이스라엘 성향 및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과 함께 “증가하는 체납금”을 언급하며, 유엔 산하 교육문화기구인 유네스코를 탈퇴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해야 했던 “과도한 분담”에 대해 불평하며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유엔 프로그램인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와 낙태 관련 유엔인구기금(UNFPA)에 대한 지원을 삭감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첫 주 수요일 트위터에 “그러니까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하라!”는 글을 올렸다.

수, 2019/10/2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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