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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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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admin | 금, 2019/11/29- 01:56

[임종국상 수상소감]

‘동포가 읽을 만한 역사’를 위하여

정영환 학술상 수상자

 

내가 처음으로 투옥된 것은 1930년이다. 그런데 당시 내가 알았던 조선에 대한 지식이란 실로 미미하였다. […] 그러기에 예심법정에서 조선총독정치에 대해 말해보라고 판사가 권하여도 그걸 구체적으로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나는 이건 아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무식함이 부끄러워졌다. […] 그래서 나는 1934년 출옥과 동시에 바로 조선에 관한 공부를 시작하였다.(김두용,<조선근대사회사화>, 향토서방, 1947년, 1쪽)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노동운동과 프롤레타리아 예술운동에 투신한 김두용은 해방 직후에 출간한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것은 2002년, 제가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스쳐 지나간 구절이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일본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이 ‘역
사’를 갈망하게 될 동기는 이 김두용의 경우와 여전히 대동소이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체포와 투옥이란 극단적인 경험은 누구나가 겪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인 친구나 동료들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식민지배를 변명하려는 언행에 당황하면서도 제대로 된 반론 하나 못한 경험은 이 글이 씌어져서 70년 이상이 지난 현재도 재일조선인들에게 여전히 평범한 일상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싶다.
’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한국어판 서문 첫마디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했던 것은 이런 절실함을 갖는 재일동포들이 ‘읽을 만한 책’을 쓸 것이 제 바
람이었기 때문입니다. 2003년에 대학원으로 입학하여 역사학을 전공하였을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염원입니다. 제가 그려낸 역사를 ‘동포’들이 자신의 경험으로 실감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글, 즉 일본사의 ‘공백’을 메우는 역사나 ‘재일조선인문제’의 역사가 아니라 재일조선인들의 생존을 위한 고뇌의 역사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남한에 입국한 적도 없었고 제가 염두에 둔 ‘동포’는 재일동포들이었습니다. 특히 재일조선인운동에 투신하여 각지에서 ‘일꾼’으로 사업하던 ‘동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바람이었습니다. 즉 당시 제가 상상하는 ‘동포’ 개념은 일본 열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 제 책은 임경화 선생님의 노고 덕분에 번역이 되어 한국의 ‘동포’를 독자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일파 연구와 우리 민족사의 정립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님을 기리는 상을 수여받을 영예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적(朝鮮籍)’이라서 ‘국가안보상 위협이 될 우려가 있다’ 혹은 ‘간첩활동을 할 개연성이 높다’ 등
의 이유로 입국이 불허되는 처치에 있었던 제가 이런 영광스러운 날을 맞이한다고는 상상도 못했었습니다.
‘민족사의 정립’을 위해 항상 싸우시는 분들 덕분으로 이런 만남의 공간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가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 되었는지 자신이 없습니다만 겨우 소장 연구자의 입구에 선 저의 저작에 주목해주시고 더 많은 ‘동포’와 만날 기회를 주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선생님들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저자 후기’에도 썼듯이 이 책의 기초가 되는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02년이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두 명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에 큰 감격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 중 한 권은 서경식 선생님의 <분단을 산다>(1997년)입니다.
‘<쟈이니치>를 넘어서’란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쟈이니치’론, 즉 재일조선인을 일본 국내의 민족적 소수자로만 보는 탈민족적인 담
론을 비판하면서도 구태의연하고 본질주의적인 민족관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민족관’을 위한 검토를 담은 책이었습니다.
비타협적이고 논쟁적인 글쓰기 스타일과 무엇보다도 재일조선인이란 존재를 협애한 일본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가 낳은 제3세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시각에 매혹되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책과의 만남 없이는 이번 책의 ‘조선근현대사로서의 재일조선인사’란 기본시각도 식민주의와 분단이 낳은 폭력과 이산(離散)이란 주제에 대한 관심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권은 박경식 선생님의 <해방후 재일조선인운동사>(1989년)입니다. 법학부에서 헌법을 배우고 있었던 제가 재일조선인사를 전공하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 이 책이 묘사한 재일조선인들의 운동사에 흥미가 끌렸기 때문입니다. 저는 1980년에 일본 지바현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녔습니다. 민족교육은 저에게 우리말과 역사 그리고 조국에 대한 인식을 키워주
었고 동포사회의 ‘일군’으로 사업하는 많은 분들과의 교류는 일본의 치안당국이 묘사하는 ‘운동’상과 전혀 다른 재일조선인운동의 역동성을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단 민족교육을 통해 배운 재일조선인사는 한편에서는 교과서적인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기도 하였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즐거움이 북돋는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질문에 맞서기 위한
지식으로서의 ‘역사’
. 재일조선인들이 우리말과 우리 역사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게 보면 한국
분들 눈에는 지나치게 비장하게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장할 수밖에 없는 역사에 대한
절심함이 재일조선인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박경식 선생님의 책에는 새조선 건설노선이나 참정권을 포함한 일본에서의 권리 획득을 둘러싼 여러 논쟁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어 이런 올바른 노선의 해설이 아닌 고민과 논쟁, 갈등의 역사는 신선했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동포가 읽을 만한 책’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책들을 통해 우리 역사의 밑바닥에는 재일조선인들이 자신의 기록을 남기려고 애써온 분투가 깔려있음을 알게 되고 역사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재일조선인사 연구자들은 대다수가 재야의 연구자들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야말로 온몸을 바쳐서 자료를 찾아내시어 조선인강제연행이나 간토대학살 그리고 재일조선인의 민족해방운동의 수많은 사실들을 발굴하였습니다. 박경식 선생님의 ????조선인강제연행의 기록????이 한일협정체결을 앞둔 1965년에 간행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연구는 그저 연구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일그러진 조선관을 시정한다는 실천적인 문제의식을 동반하고 있었고 또한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할 길을 역사 속에서 찾기 위한 분투의 기록이었습니다.
????해방 공간의 재일조선인사????에 수록한 제 연구 또한 박경식 선생님을 비롯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연구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가혹한 분단과 민족차별이 횡행하는 전후 일본사회 속에서 그야말로 ‘민족사 정립’을 위해 외롭게 발언과 연구를 이어오신 연구자들에게 감사의 의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 책의 원저는 2013년에 일본에서 출판되었습니다. 일본어판 출판과 한국어판의 간행은 서문과 후기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수많은 분들의 도움 없이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되었던 것도 그간 도움을 주신 분들 덕분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감사드립니다.
특히 이번 책을 우리말로 옮겨주시고 많은 ‘동포’들과 만날 기회를 주신 임경화 선생님과 제 책 출판을 위해 힘써주신 푸른역사 박혜숙 대표님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현재 ‘해방5년사’를 이어 조선전쟁(한국전쟁)기의 재일조선인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구성과로 이번 시상을 통해 저에게 주신 기대에 보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법학에서 사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진학의 길을 선택한 무모한 아들을 항상 응원해주신 어머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면서 제 수상소감을 맺겠습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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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시민사회, 국정 역사교과서 저지

문재인 정부는 출범 직후인 5월 31일 관보 게재를 통해 국정 역사교과서를 공식적으로 폐기했다. 이는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저지넷)를 중심으로 한 시민사회 학계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다. 저지넷은 485개 단체로 구성되었으며,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았다. 교육부는 새 정부 출범 직전까지도 국정교과서 연구학교를 지정하고 보조교재 배포를 시도하는 등 꼼수를 멈추지 않았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연구학교로 선정된 경산 문명고등학교마저 거센 반대에 부딪혀 결과적으로 국정 역사교과서 채택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운동, 국내외에 큰 반향

2016년 8월 29일 국치일부터 본격화한 식민지역사박물관건립운동이 2017년에 들어 국내외의 성원에 힙입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여기에는 일본과 미국의 해외동포는 물론 연구소의 취지에 공감하는 일본 시민사회도 적극 동참하였다. 특히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은 일본 각지의 시민과 단체로부터 1천만 엔 이상을 모았고, 1만여 점의 자료를 수집해 연구소에 전달하였다.

 

미국 3대 도시에 연구소 지부 결성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에 발맞추어 11월 미국의 3대 도시인 워싱턴 뉴욕 LA에 연구소 지부가 결성되었다. 미주 지부 창립식 및 준비위원회 결성식에는 임헌영 소장과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에 창립된 워싱턴지부(윤흥로 이사장, 박진영 지부장)와 LA지부(정찬열 지부장, 김창옥 사무국장), 2018년 3월 창립 예정인 뉴욕지부(이춘범 이사장)는 친일 청산운동과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에 적극 동참하고 현지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 역사교육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 출간

2012년부터 5년여의 작업 끝에 『일제식민지통치기구사전: 통감부•조선총독부 편』이 출간됐다. 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이후 오랜만에 펴낸 소중한 학술 성과다. 여기에 실린 통치기구는 통감부•조선총독부 본부와 소속관서(총 248개의 기구)로 각 항목마다 존속기간•성격•연혁•조직과 기능•참고문헌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통감부와 조선총독부 기구를 총체적으로 다룬 사전은 이번이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정책사•제도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고 나아가 식민통치의 구조와 식민지배의 본질을 해명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항일음악회 성황리에 열려

연구소와 근현대사기념관은 12월 18일 서울 강북문화예술회관에서 ‘항일음악회-다시 부르는 독립의 노래’를 개최했다. 고 노동은 교수가 집필한 ????항일음악 330곡집????에서 ‘광복군 아리랑’ ‘안중근 옥중가’ ‘압록강행진곡’ 등 11곡을 선곡하여 장사익, 노브레인, 오단해, 두레소리 합창단 등이 노래하였다. 800여 청중의 열띤 호응 속에서 잊혀졌던 항일음악을 되살리고 독립투사들의 치열했던 항일정신을 기린 뜻깊은 자리였다.
한편 연구소는 10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고양 창원 대전 광주 부천에서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 토크 콘서트를 순회 공연하였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마련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된 이 공연에 이야기 손님으로 이재명 시장, 노회찬 박주민 의원, 김광진 정청래 전 의원이 초대되어 ‘촛불혁명과 우리 시대의 적폐청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1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조재곤 박사, 사회부문 한상권 교수 수상

11월 10일 제11회 임종국상 시상식이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렸다. 학술부문에는 러일전쟁을 한국인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전쟁과 인간 그리고 ‘평화’-러일전쟁과 한국사회』를 저술한 조재곤 박사가, 사회부문에는 오랜 기간 역사정의실천연대와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의 상임대표를 맡아 교학사 한국사교과서 보급과 한국사 국정교과서 도입을 저지한 한상권 교수가 선정돼 수상의 영예를 누렸다.

 

박정희 관련 명예훼손 소송, 모두 승소

1월 25일, 연구소가 박정희혈서조작설을 유포한 강용석 변호사, 정미홍 전 KBS 아나운서, 일베회원 강모씨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각각 500만원, 300만원, 300만원을 연구소에 배상하라는 항소심의 판결을 확정했다.
12월 12일에는 문퇴본(문재인정권 퇴진촉구 애국의병혁명본부)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방모씨를 상대로 한 박정희 합성사진 조작 관련 명예훼손 소송 2심에서 서울북부지방법원은 피고의 항소를 기각하고 연구소에 500만원을 배상하도록 결정했다.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통해 3•1혁명의 의미를 재조명해

연구소는 6월 1일 근현대사기념관 개관 1주년 기념으로 덕성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지역문화연구센터와 공동으로 ‘기록으로 보는 3•1혁명’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함흥법원 검사의 기소자료와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 등 기존 연구에서 다뤄지지 않은 자료를 활용하여 3•1혁명의 새로운 양상을 도출하였고, 운동보다는 혁명으로 명명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3•1혁명의 역사상을 한층 풍부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회째 맞은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에’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8월 12일 일본 도쿄의 한국YMCA에서 열린 야스쿠니반대촛불행동 행사에 무단합사 피해자 유족들을 비롯하여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사무국을 맡은 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보추협) 관계자들이 참가했다. 이 행사는 2006년 8월부터 한국 타이완 오키나와 일본의 시민들이 침략신사 야스쿠니를 반대하고 동아시아 평화를 염원하기 위해 매년 개최해왔다.
한편 6월에는 그간 보추협의 숙원사업이었던 강제동원피해자유족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가 출간되어 유족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근현대사기념관, 다채로운 강좌로 학생•시민들의 큰 호응을 얻어

연구소가 2016년부터 위탁 운영하고 있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시의적절한 다양한 주제의 강좌를 개최하여 학생과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7월 25일~28일 진행된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 강좌에서는 최근 흥행한 영화 <밀정> <암살>과 강제동원문제를 다룬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소재로 삼아 연구소 상근자들이 강사로 나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강제동원 피해실태를 생생하게 설명했다. 이밖에도 ‘저항과 협력-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3~6월) ‘역사의 길에서 민주주의를 묻다’(6~7월)와 ‘순례길의 독립운동가’(9월) 등의 강좌를 열어 독립전신과 민주의식 고양에 앞장섰다.

목, 2018/01/25-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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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소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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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안에는 할머니가 된 소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답사단의 소녀가 그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청년백범이 주최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후원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기행’이 10회를 기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상하이를 시작으로 자싱, 하이옌, 항저우, 난징을 찾아가는 일정이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여든이 넘으신 민문연 이광찬 회원과 이윤 회원 등 17명이 다녀왔다.
이봉창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문을 두드렸던 상하이시기 마지막 임정 청사. 의열단원 오성륜・김익상・이종암 의사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를 저격한 황포마두. 김구 선생 어머니가 먹을 만한 것을 고르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다듬고 버린 채소더미를 뒤지던 골목길. 아직도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골이 흩어져 있는 송경령능원(상하이 외국인묘지였던 만국공묘의 현재 명칭). 김구 선생이 이봉창ㆍ윤봉길 의사 의거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 뱃사공 주애보와 살았던 자싱의 피신처. 시진핑 주석이 저장성 당서기 시절에 찾아왔던 하이옌의 김구선생피난처. 중국의 ‘국가급 항전시설 및 유적지’로 지정된 항저우 서호 옆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김원봉 선생이 청년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했던 난징 산골의 천녕사, 여운형・조동호・김마리아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다녔고, 민족혁명당 창당식을 거행했던 난징대학교.
중일전쟁시기 일제가 난징 시민 30만 명을 학살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남경대도살조난동포기념관(南京大屠殺遭難同胞紀念館). 난징총독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동양 최대 규모의 위안소를 만들어 놓고, 눈앞에서 벌였던 그 잔인한 짓을 지금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일본의 무모함에 말을 잃어버리게 되는 곳 리제항 위안소구지진열관. 그곳에는 끌려온 어린 소녀가 할머니가 되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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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 천녕사 앞에서 기념촬영

 

옛날 의병전쟁을 하시던 분들의 머리에는 꽃이 피었다고 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산과 들에서 몇날 며칠을 씻지도 못했던 그분들의 머리에, 바람에 날려 씨앗이 꽂히고 그것이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현실의 몸은 거칠고 고단했지만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꽃으로 기억돼야 하는 역사다. 우리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그분들 같은 삶의 길을 갈 수 있었을까? 다시는 그런 삶을 걸어야만 하는 시대가 와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려면 우리는 그분들을 잊지 않아야 하고, 그분들이 걸으셨던 길을 따라 걷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화, 2018/03/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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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조민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장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

 

북한은 지난 7월 두 차례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마침내 미국 본토 타격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 동북아 전략 구도의 게임체인지 순간이 다가왔다.
ICBM은 현대 군사 기술의 집약체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속옷도 제대로 못 만드는 북한의 ICBM 개발이 미스터리라고 하면서, 성공 요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봤다. 첫째, 지난 수십 년 간 ICBM 관련 과학자들을 꾸준히 관리했으며, 둘째 스스로 확보한 비공식 글로벌 금융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사일 개발 비용을 감당했고, 마지막으로 김정은이 미사일 개발에 정권의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연합뉴스???? 2017.7.10). 그러나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는 워싱턴포스트 분석보다 뿌리가 더 깊다.
북한은 사회주의 붕괴 이후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됐다. 이에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에 올인했다. 모든 국가자원을 다 쏟아 부었다. 북한 스스로 핵개발 의도를 미국의 핵위협 대처, 재래식 무기의 엄청난 비용 부담에 따른 코스트 측면에서 핵개발, 그리고 민족통일의 원동력 구축임을 밝히고 있다. 북한의 ‘피포위 의식’과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통일 무기로서의 핵’이라는 데에 북핵의 본질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북한 비핵화 전략은 실패했다. 왜 실패하고 말았는가? 미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우려하면서도 적극적인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동북아의 안정과 평화가 군산복합체 입장에서 달갑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었고, ‘불량국가’와의 협상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제국 미국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미국은 좀체 북한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체결의 세 이벤트가 주목된다. 그해 말 전술핵무기가 철수되었다. 독일 통일(1990.10.3)을 전후하여 한소수교(1990.9.30), 한중수교(1992.8.24)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북한과 미일과의 교차승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2년 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 용인을 전제로 북미수교를 요구했지만, 미국은 거절했다. 그러자 북한은 핵프로그램 추진으로 돌아섰다.

 

북핵, 협상 실패의 역사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몇 차례의 협상 타결이 있었다. 1994년 10월의 제네바 기본합의로 제1차 핵위기가 봉합되었다. 그러나 당시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발목잡기에 걸려 경수로 건설의 첫 삽을 뜨는데 3년 가까이 걸렸다.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다시 미국의 주목을 끌었다. 2000년 10월 12일 워싱턴의 「북미 공동코뮤니케」(US-DPRK Joint Communique)로 한반도의 새 역사의 장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공동코뮤니케는 다음해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찢겨지고 말았다.
2002년 10월 고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의혹으로 제2차 핵위기가 불거졌다. 우여곡절 끝에 다음해 8월 다자간 협상틀인 6자회담이 개최되어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거의 완벽한 합의문이 도출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북한 자금을 묶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음해(2006.10.9) 마침내 제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놀란 미국은 다시 북미 양자 협상을 서둘렀다.
2008년 6월 영변 5MW 원자로 냉각탑 폭파, 10월 테러지원국 해제 등 북핵 협상이 순항하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6자회담은 2008년 12월의 6차 회담을 끝으로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정일이 2008년 8월 스트로크(뇌졸중)를 맞았다. 갑자기 건국기념일(9월 9일) 행사가 취소되었다. 그러자 김정일 사망 관련 예측 보도가 봇물을 이루었다. 미국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김정일 사망 후 대책이 얘기됐고, 미국과 한국에서 북한붕괴론이 크게 부각되었다. 학술 세미나, 언론은 호들갑을 떨었다. 미국은 협상 판을 걷어 치웠다.
김정일은 ‘유감스럽게도’ 3년이나 더 살았다. 그 3년 동안 중국과 러시아를 수차례 방문했고, 핵미사일 소요 첨단 소재와 장비들을 구입했다. 2009년 1월 김정은을 세습 후계자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3년의 후견 기간을 통해 절대 미국을 믿어서는 안 되고, 핵미사일만이 살 길이라는 점을 확신시켜주고 떠났다. 김정일의 사망이 급변사태나 붕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북한 비핵화, 2단계 접근
미국은 본토 침공을 두 번 당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1941.12.7), 2001년의 9․11 테러가 그것이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언어폭탄으로 미국 시민의 충격은 크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사실상 전략적 무대책으로 실패했다. 그렇다고 선제타격(preemptive strike), 예방전쟁(preventive war) 카드를 함부로 휘두를 형편은 못된다.
북미 간 치킨게임이 진정 국면에 들어서는가? 북한의 협박 자제와 한미연합훈련 축소로 일단 긴장국면을 넘긴다면, 이제 본격적인 협상 모멘텀을 찾아 나서야 한다.
2단계 접근이 가능하다. 1단계는 위기 봉합과 핵·미사일 상황 악화 방지에 초점이 있다. 이는 ‘동결 vs 제재·압박 해제(완화)’의 맞교환이다. 2단계는 장기전망 구도 위에서 ‘핵폐기 vs 평화체제’ 협상틀이 예상된다. 1단계 진입이 쉽지는 않지만, 협상 이외에 다른 길이 있겠는가?

편집자주 – 이 시론은 8월 25일 접수된 글이라 이후 북핵 위기의 변동 사항이 반영되지 않았다.

월, 2017/09/25-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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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3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0점 보내와
2월 28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3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공무여행증명서, 1940년도 소작료납입고지서 등 문서류와 일제강점기 농업교과서 등 도서류다.

조영숙 회원(도쿄지회 총무) 자료 기증
2월 1일 조영숙 회원이 지난해 재일동포들의 고단한 삶이 묻어있는 자료에 이어 남편의 자료 5점을 기증했다.

이건제 회원 자료기증
2월 20일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을교주했던이건제회원이「노동자신문」(1989~1996)과 도서 16권 등 총 464점의 소장자료를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월, 2018/03/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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