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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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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admin | 월, 2019/11/25- 19:58

현재 인류는 자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구헌장(Earth Charter)을 여는 글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다. 지금은 인류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출처: 한겨레>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지구와 호혜적 균형을 이루면서 평화, 아름다움, 창조력, 물질적 만족, 그리고 영적 풍요라는 오랫동안 부정돼온 인간의 꿈을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를 그 꿈에서 멀어지게 했던 현재의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의 깊고도 신속한 변화가 필요하다.

다섯 가지의 주요한 세계적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멸종, 나아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지구 용량의 잠재적 파괴라는 위협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경향은 지구의 지속력을 넘어선 소비 증가이다. 이는 잠재적으로 기후변화, 비옥한 토양의 유실, 깨끗한 담수 공급의 감소, 숲의 소멸, 어업 붕괴 등의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는 우리 인간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1.7배를 소비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성과의 결정적 척도로 쓰이는 국내총생산(GDP)을 계속 늘리고 있다. 사람과 지구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는 무시한다.

두 번째 경향은 극단적인 불평등의 증가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과도한 소비를 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삶으로 빠트리는 세계적인 부의 격차를 인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6명의 금융자산이 인류의 절반에 달하는 38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세 번째 경향은 생명파괴 기술에 대한 의존의 증가이다. 우리의 핵, 탄소에너지, 유전자 변형, 인공지능 기술은 지구에 점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종류와 잠재적인 영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네 번째 경향은 정부와 공공정책에 대한 기업 통제의 증가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금융자산을 늘려주는 데 헌신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다국적 기업의 독점이 점점 집중되도록 방치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매수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에 비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증가시키는 정책을 촉진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다섯 번째 경향은 점점 증가하는 제도적 정당성의 상실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관들이 점점 절망의 삶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 속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선동을 목격한다.

내 나라인 미국은 이 다섯 가지 치명적인 경향을 주도하는 세력이자 이런 경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 앞의 도전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블룸버그 혁신지수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선정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잘못된 서사를 선택했다

우리 인간의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재가 왜 이렇게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엄청나게 나쁜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를 선택해 왔다. 이제 전지구화된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는 돈을 명백한 공통의 가치로 선택하고 행복의 척도로 사용한다. 관계를 맺는 주된 방식으로 권력과 자원을 가지려는 경쟁을 선택한다. 규범이 되는 기관으로서 사적인 목적과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을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요 거주지로 사람보다는 차를 위해 설계된 도시를 선택한다.

우리는 서사의 창조물인데, 결함 있는 서사를 선택해왔다.

초기 인류는 상징적인 사고와 의사소통 능력을 발달시켜 점차 다른 종들과 스스로를 구별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소통하고 공유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한 서사를 창조했다. 공유된 신념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

드문 경우를 빼면 우리는 태어난 집단의 서사를 진정한 현실로 단순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서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가상적으로는 제한 없는 규모의 일관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서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배타적 목적을 위해 서사를 쉽게 조작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오만, 자기파괴 능력, 그리고 서사적 조작에 대한 취약성,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지난 5000년동안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작해온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 과거에 그 지배자들이 왕들과 황제들이었다면, 현재 그들은 기업의 CEO들과 월 스트리트 금융가들이다.

현재 우리 인간의 불행은 거침 없이 미화된 서사이자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인,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사기에 넘어간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돈이 부이며, 돈을 버는 사람이 부를 창조하고, 개인이 얻은 이윤의 합을 넘어선 공동체의 이익은 없다고 믿도록 한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우리 모두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착취해 소수가 이익을 취하는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것의 가치와 논리는 신중하게 고른 “밈”(meme: 비유전적 문화요소로 문화의 전달방식임)을 통해 전세계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구인 “경제 성장”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 “자유무역” “투자자” “다국적 기업” “작은 정부” 등이다. 각각의 문구는 인류와 지구의 복지보다 사적인 금융이익을 우선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암호들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은 GDP를 증가시키는 것과 관계 없는 자조적 돌봄이나 헌신보다는 시장에서의 거래를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의 자유”는 단정적으로 개인이 우월하다고 보고 공동체를 폄하한다. “자유시장”은 (규칙에 기초한 윤리적 시장과는 반대로) 기업이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공공의 규칙, 감독, 공공선에 대한 배려를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무역”은 (공정하고 균등한 무역과는 반대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게 시장, 노동, 자원 및 돈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과 궁극적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환경적 결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우리의 정치제도는 보호가 필요한 공동체에 봉사할 의무를 가진 정부로부터 주주들의 금융배당을 최대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단언하는 다국적 기업에게로 권력을 쉽게 넘기도록 설계돼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서 근본적인 요건은 돈이 숫자에 불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자살만큼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동양문화가 오랫동안 인식해 왔고 지배적인 서구문화가 오랫동안 무시해 왔으며 심지어 부인해온 근본적인 진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체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남고 번성한다.

 

우리 몸처럼 지구는 유기체이다

생태문명은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의 적절한 이름으로 보인다.

생태라는 말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자기 조직하는 유기체의 능력에 초점을 둔다. 문명이란 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겸허한 관계를 맺는데 요구되는 문화적, 제도적 전환의 깊이를 상기시킨다..

수십 조의 살아있는 세포로 구성된 공동체인 당신의 몸을 생각해보라. 이 세포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요구와 자신들이 의존한 몸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그들은 각 세포의 연쇄적인 죽음과 재생, 기온의 변화, 영양분·물·정보 그리고 에너지의 다양한 투입을 포함한 변화의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의식의 보금자리이자 에너지의 운반체인 당신의 몸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지구도 진정 엄청난 규모로 이와 똑같은 일을 한다. 지구 안의 무수한 단세포와 다세포 유기체들은 토양, 대수층, 숲, 해양생태, 하천, 강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너지, 영양소, 물과 정보를 교환한다. 또 잉여의 탄소, 독소 및 기타 폐기물을 격리시키고 태양 에너지를 잡아두고 공기를 정화하며 날씨와 기온을 안정시킨다.

우리는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의 제도에 상응하는 등가물 없이도 지구에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작동하는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지구 간의 교환을 안내하는 수단으로서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적 제도에 계속 의존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제도들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구조화된 대로 우리가 선택한 제도들은 의사 결정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우리 중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도록 우리의 생존수단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를 이루려면, 이러한 제도들은 모든 사람의 물질적 충족과 정신적 풍요를 확보하기 위한 탈중심화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살아있는 지구가 온전한 건강과 활력을 갖도록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 퍼즐 조각이 하나 더 있다. 우리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도록 진화했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발을 디딘 이래 대략 99%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조상은 사냥과 채집을 하는 종족으로서 다른 인간, 자연과 직접 연결된 상태로 살았다. 부족 구성원들은 함께 견과류, 씨앗, 과일, 그리고 야채 등을 찾으러 다녔다. 그들은 함께 사냥감을 쫓고 놀이를 즐겼다. 그들은 함께 공동부엌에서 함께 쓰는 불로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이고 평생 유지됐으며 상대방이나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실물과 동물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함께 생활하는 여러 세대로 구성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지지와 관여, 인내하는 관계를 경험했다. 청소년들 역시 부모들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그리고 자연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활동적인 야외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경험은 어린이들의 직접적인 행복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행복,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과는 얼마나 다른가! 세계적 추세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1인 가구에서 혼자 살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1인 가구의 비율은 호주, 캐나다,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현재 미국 아이들의 31%는 한부모 가정에서 살고 있다. 종종 한부모는 한 개 이상의 저임금 일자리에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투쟁하는 엄마들로 긴 통근시간에 시달리며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하고 동료나 이웃들과 어울릴 기회도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대부분의 깨어있는 시간 동안 부모나 다른 친척들과 접촉하지 못 하고, 자연과의 접촉도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이처럼 고립된 상태와 공동체의 지원 부족은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자살이 25%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인구의 50%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정신질환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난 세기에 걸쳐 우리가 진보라고 자축했던 것들은 돈의 개입, 자동차, 기업, 그리고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정부 등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렇게 아둔하게 망쳐놓은 직접적 관계들을 복원해야 하는 당위에 직면했다.

 

생태문명은 공동체의, 책임 있는 삶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미래는 대부분 사람들이 대도시나 소도시 혹은 마을에 살면서 다른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본질적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소를 충족시키며, 우리가 지구에 가하는 총체적인 물질적 부하를 최소화하는 특징을 갖는다. 자동차에 대한 의존이 증가하고 각 가구를 고립시키며 생태적 통합성을 망치는 교외로의 무질서한 확산은 생태문명 안에는 설 자리가 없다. 또한 대도시에서 자동차의 자리가 없어져야 한다.

생태문명의 자동차 없는 도시에서는 다세대의 여러 가정으로 이뤄진 주거단지가 시설, 도구, 자원 및 노동을 공유하는 활력 있는 생태공동체로서 작동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현재도 일부는 그런 것처럼 부족공동체로서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사회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필요한 서비스, 쇼핑, 교육, 영적 활동, 직장, 그리고 거주지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즐길 수 있는 여가생활 등의 수요가 충족돼야 한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섞이고 어울리는 매력적인 장소가 많은 것이 이런 도시들의 특징이 될 것이다.

호감 가고 개성적인 이웃들이 초고속 부상열차나 지하철로 연결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이 초고속 인터넷으로 소통할 것이다.

교외로부터 철수하면서 도시와 농촌 지역의 경계는 도농간 연계와 공유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질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지방정부가 음식, 물, 에너지, 물질적 필요 등 양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다. 또한 공기, 물, 비옥한 토양의 자연적 재생을 가능하도록 하고, 인공비료와 살충제의 사용을 배제하며, 쓰레기를 재활용, 분해 및 재사용할 것이다. (역자주: 필자는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적 번영의 결과물로, 중산층이 교외에 큰 저택을 짓고 각자 자동차를 이용해 도시로 출퇴근하는 생활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한국의 아파트처럼 도시의 밀집한 주거단지가 에너지와 자원의 이용이나 관계 회복에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는 오히려 “생태적인 삶” “귀농귀촌”이라는 이름으로, 공동화된 농촌지역에 대형 주택을 짓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자본화와 붕괴를 나타내는 지표인 GDP의 성장이 아니라 진정한 건강과 복지의 지표로 우리의 진보를 측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건강하게 살며 삶을 즐기고 있는가? 아이들이 적절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고 있는가? 자연은 풍요로운가? 이런 것을 측정하는 지표들이 발전한다면, GDP가 증가하는지 줄어드는지에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세계에 걸쳐 돈, 인력, 재화가 이동하는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더불어 살면서 건강과 행복을 최대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태권역경제를 선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계급분리를 최소화하고 평등을 최대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도시가 주변 농촌 지역 및 농민들과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실천하려면 법률, 기술, 사회기반시설의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유재산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조금씩 재산을 가져야 한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집과 생계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있어야 한다.

지역 참여적 소유의 필요성은 부의 재분배, 금융투기 해소, 독점기업 해체, 그리고 모든 사업체가 사업을 수행하는 공동체에 종속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의 필요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는 소규모 지역공동체 사업을 통해 가장 잘 성취된다. 아담 스미스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장은 개인 농부나 장인이 개인 소비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곳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큰 규모의 사업이 필요하지만, 소유권은 지역적이고 안정적이며 평등해야 한다. 집중화되거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의 소유권은 지역 협동조합원, 소비자, 지역사회 소유권을 위해 없애야 한다.

협력의 정신과 윤리에 따라 각 생태권역은 권역 안의 노동과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생태권역에서는 아이디어와 기술, 문화를 자유롭게 공유하며,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것은 이웃들과의 공정하고 균등한 교역으로 얻을 것이다. 은행, 금융, 그리고 소유권을 지역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현재 궤도대로 살면서 소수 사람들이 일시적 과소비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생태문명의 비전을 수용해서 모든 인간이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 제도, 사회인프라의 전환을 이루자는 공동의 목적에 동참할 수도 있다.

모든 이들을 위한 평화, 아름다움, 창조성, 물질적 충족, 영적인 풍요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가족, 공동체, 국가 모두가 같은 지구생명체의 구성원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함께 헌신해야 할 시간이 왔다.

 

데이비드 코튼

리빙이코노미즈포럼 대표,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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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사람들은 국회 공무원인 국회 전문위원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또 국회의원과 전문위원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널리 알리고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항상 고심한다. 그러다가 최근 괜찮은 교재 자료를 발견했다.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언론기사가 눈에 띈 것이다.

바로 7월 12일자 <아시아경제>에 게재된 “정무위 전문위원실 단톡방·유튜브發 불량코인 유사투자자문업 단속해야”란 제목의 기사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회 정무위원회 전문위원실이 가상자산 법안 검토보고서를 통해 오픈채팅방·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유포되는 불량코인 투자자문 영업형태에 대한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현재 발의된 4개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SNS 관련 내용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며, 단체채팅방을 통한 불량코인 투자자문 행태가 만연하니 규제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제언이다. 수석전문위원 검토보고서는 법안1소위원회 법안 심의 과정에서 사실상 가이드라인이 되는 자료, 향후 법안 병합심사 과정에서 관련 규정이 추가될 것으로 보인다.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의 가상자산 관련 법안 검토보고서“4개 법안에는 관련 규제 내용이 없지만, 최근 오픈카톡, 유튜브 등 SNS를 통해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가상화폐 투자자문서비스를 제공하고 이용료를 수취하는 영업행태가 있다이에 대한 규제 방안도 필요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코인 발행업체 심사에 금융위원회 뿐만 아니라 기술 이해도가 높은 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참여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3개 법안(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이 코인 발행업체에 대해 금융위원회 신고·인가·등록을 규정한데 따른 보완 조치 성격이다. 검토보고서는 심사를 금융위원회 (혼자) 수행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코인 개발이 충실히 이뤄진 것인지 기술적인 면을 심사하려면, 산업 이해도가 높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부 등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자료: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 검토보고서

3개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 의원안)이 규정한 피해보상 규정과 관련해서는 손해배상 책임을 법에 명시해 투명성과 안전성을 제고하는 측면이 있을 것이라면서도 “‘손해 방지를 위한 주의 의무이행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고 했다. 또 김병욱 의원안이 담고 있는 역외조항(자국 영역 외에서 발생한 법률 문제에 대해 자국법을 적용하는 일)을 제시하며 해외요인으로 시세조종 등이 발생해 피해가 야기되는 경우도 있으니 효과적인 불공정행위 제재를 위해 국제적인 협력과 공조도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료: 가상자산 관련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에 대한 국회 정무위원회 이용준 수석전문위원 검토보고서

한편 가상화폐 관련 4개 법안(이용우·김병욱·양경숙·강민국 의원안)13일 전체회의에 상정돼 법안1소위원회로 회부된 뒤 이달 중 본격적인 법안심사가 진행된다. 법안 1소위 심의 과정에선 수석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 의견이 상당부분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여야 모두 당내 가상자산 태스크포스(TF)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안의 필요성에 대한 큰 틀의 합의는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국회 공무원이 지원차원을 넘어 입법을 판단하고 결정하다

본래 국회 공무원은 국회의원을 ‘지원’하는 위치에서 ‘지원’하는 업무에 종사해야 한다. 아마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국회도 당연히 그렇게 운영되고 있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용한 위의 기사에서 우리는 국회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국회는 국회 전문위원이 ‘지원’ 차원이 아니라 명백하게 국회의원의 ‘상위’에 존재하면서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있다.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국회에서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침해’하고 ‘훼손’하면서 사실상 입법의 ‘주인공’ 역할을 담당하며 입법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국회의원을 선출하면서 국회의원에게 입법권을 부여한 것이지 이들 국회 공무원에게 입법권을 부여한 적이 없다.

필자는 이렇듯 국회 공무원이 명실상부하게 입법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현재의 국회 시스템은 명백하게 위헌이라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국회의원들은 왜 이 시스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우선 이 시스템이 국회의원에게 너무 편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가만히 있어도 옆에 있는 국회 공무원, 입법관료들이 다 알아서 해주니 편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독일 의원들은 스스로 수행해야 하는 법안 검토보고를 위해 분주히 활동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우리 의원들은 그렇게 고된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한 제도인가! 우리 국회에서 초등학생을 국회의원 시켜도 아무 문제 없다는 말은 바로 이 같은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다음으로 이 전문위원 검토보고 제도가 박정희 유신정권 무렵부터 존재한 시스템이라 이미 수십 년이나 ‘관행’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국회의원들은 어느 나라든 본래 법안 검토가 국회 공무원들이 담당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미 국회 공무원의 ‘파워’가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비대화되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은 국회 공무원들이 입법을 좌지우지하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이 시스템을 바꾸라는 문제 제기와 시정 요구도 전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렇게 문제 제기도 없는 상황에서 국회의원에게 너무 편하고 귀찮은 일 할 필요도 없는 현 시스템을 바꿀 필요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듯 전문위원이 국회의원의 상위에서 입법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정보와 로비도 국회의원이 아니라 전문위원으로 몰리게 된다. 각 상임위 소관 행정부처를 비롯하여 이를테면, 법원행정처나 검찰의 각종 자료와 정보가 전문위원실로 보고되며, 각종 로비단체와 이익단체의 주장과 로비도 전문위원실로 쏠린다. 김&장 법률사무소 같은 곳도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오늘 국회 전문위원실은 국회 입법의 핵심이요 꽃이다.

국회의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법안 발의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더구나 법안발의 건수로 소속 정당의 공천 점수도 결정되고, 또 시민단체로부터 좋은 평가도 받을 수 있으니 ‘무책임한’ 날림 법안발의 건수는 엄청나게 많아진다. 그래서 우리 국회의 법안발의 건수는 세계 의회에서 당당 1위다. 겉으로 보면, ‘일하는 국회’의 모습이지만, 실제로는 그야말로 ‘소리만 요란한 깡통’, ‘빛 좋은 개살구’ 그 자체이다. 그러면서 국회는 점점 더 왜곡되어 간다.

 

국회의원이 그 직무를 방기하는 국회, 그것은 국회가 아니다

분명한 점은 우리처럼 국회 공무원이 이렇게 법안 검토를 하면서 국회의원의 윗자리에서 법안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경우는 전 세계 어느 의회에서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국회처럼 국회 공무원이 법안을 좌지우지, 결정권을 보유하고 사실상 입법권을 행사하는 것은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것이며 의회 시스템 기본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행태이다.

이것이 비정상적인 우리 국회의 본질이요, “일하지 않는” 국회의 ‘숨겨진’ 진실이다.

국회의원이 국회의원의 본업을 수행하지 않는 국회, 국회의원이 자신의 직무를 방기하는 국회, 그것은 ‘국회’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국회’일 수 없다.

 

소준섭

화, 2021/07/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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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세기의 유럽은 사민당의 역사이었다. 그러나 최근 프랑스의 사회당은 존재가 사라졌고, 스웨덴의 사민당은 1당의 위치를 유지는 하였으나 무기력한 정당으로 전락하고, 유럽진보 정치의 중심이었던 독일 사민당(SPD)조차 소수정당으로 전락하는 위기에 처해진 가운데, 아래의 기사는 10월-11월간에 벌어지는 사민당 당대표 선출의 과정을 묘사한 내용이다.

한국 내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은 유럽의 교훈, “사회적 정체성으로서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정체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플리즘 정당 등 다양한 요구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난 달 바이에른에서 열린 회의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모습

9월 중순 화요일 밤, 독일 사회민주당원 수 백 명이 1960~70년대 독일을 이끌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의 동상을 지나 베를린 당사로 몰려들었다. 1964년부터 1987년까지 당을 이끌었던 브란트의 동상은 마치 그의 동료 당원들을 보호하듯 한쪽 팔을 벌리고 있는 모양새다.

참가한 당원들은 대강당에 자리했고, 곧 이어 남녀 7쌍이 무대 위에 올랐다. “검투사가 나타났다” 필자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속삭였다. 각 쌍은 당의 차기 당대표에 출마하여 한 때 브란트가 홀로 맡았던 역할을 둘로 나눠 가지게 됐다

“우리 당을 다시 노동자의 당으로 만들고자 한다”고 한 후보가 말했다. “사회민주당은 희망의 당이 돼야 한다”고 다른 후보가 말했다. 또 다른 후보자는 사회민주당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 성향의 기독민주당으로 구성된 연합인 “대연정을 파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날 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독일어 약자로 SPD)의 일원이 되기에 좋은 시기라고 할 순 없었다. 당의 전임 지도자 안드레아 날레스(Andrea Nahles)는 취임한 지 불과 1년여 만인 지난 6월 대표직을 내려놨다. 사민당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또 다른 큰 패배를 맛본 바 있었다. 지난 2017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득표율은 20%로, 2000년대 중반 34%, 1998년 40%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수치를 보였다. 현재는 여론조사 지지율이 약 15%대로 떨어졌다. 한 때 독일 좌파의 지배적 목소리였던 사민당은 현재, 특히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녹색당에 자주 밀리는 형국이다.

잔존 지도부는 날레스 대표가 사임할 당시, 그녀의 후임은 대개 비밀리에 결정되던 것과는 달리 모든 당원들에게 공개되는 예비선거에 의해 선출될 것이며, 9월 베를린에서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포함해 전국적인 공개방송을 통해 발표함으로써 이번 금요일 최종 투표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사민당은 토요일 투표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독일 법에 따라 선출 대의원 회의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지만, 정치적으로 당원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당대표 투표는 당원과 당 기득세력 간의 싸움이 됐으며, 동시에 연정을 유지할지 여부에 대한 싸움이 되기도 했다. 많은 평당원들은 당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맺은 타협을 쇠퇴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만약 연정 “탈퇴”를 주장하는 후보 팀이 예비선거에서 승리하는 경우엔 연정이 붕괴되고, 내년 독일은 조기선거를 치르거나 소수당 정부로 전락하게 될 수도 있다.

특히 이 같은 후보자 명부의 경우, 사민당 투표는 당 역사상 유례없는 경우다. 노스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회 의원이자 연정을 탈퇴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인인 크리스티나 캄프만(Christina Kampmann, 39)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사민당 역사에서 결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 새 출발, 새 시대에 대한 열망이 엄청나다. 이번 예비선거는 누가 그런 변화를 실현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새 시대는 독일 사회민주당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서유럽 국가들에서 사회민주당의 득표율이 90년대 중반 평균 3분의 1을 훌쩍 넘어섰던 수준에서 최근 몇 년간 약 5분의 1로 줄었다. 프랑스 사회당과 같은 일부 정당들은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2017년 총선에서 프랑스 사회당의 득표율은 7.4%에 그쳤으며,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과 같은 기타 정당들은 그보단 나은 사정이지만, 여전히 종종 선거에서 패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쇠퇴에 국가별 요인이 작용하긴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근본 원인이 정치구조에 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중도좌파 유권자의 비율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지만, 사회 민주당은 점점 더 그들을 동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리히 대학의 정치학자 실야 하우저만(Silja Häusermann)은 유럽사회의 분열이 전후 시대를 지배했던 경제 및 계급적 요소에서 이주 및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로 옮겨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문화적으로 보다 진보적인 세계주의자와 문화적으로 보다 보수적인 “사회주의자”를 갈라놓는데, 이 둘은 모두 한 때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유권자들이 가졌던 이념을 공유하고 있다.

게다가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산업 노동계급의 감소, 노조 가입자 축소 및 더 많은 맞춤형 정책과 정체성을 제공하는 녹색당, 포퓰리즘 정당, 극좌 정당의 부상 등 이 모든 것들이 좌파 정치조직의 과거 빅텐트(big-tent) 모델에 도전하고 있다.

쇠퇴의 압력 속에서 유럽의 많은 사회민주당은 대표직을 두고 벌이는 싸움과 당 진로에 대한 격렬한 싸움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재정정책과 경제부양 비법을 가지고 있는 포르투갈인이나 반이민 정책을 주장하는 덴마크 사회민주당원이 제시하는 쇠약한 희망에 지나치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뒤셀도르프 대학(University of Düsseldorf)의 정치학자 토마스 포군트케(Thomas Poguntke)는 유럽의 다른 정당들이 고려하고 있는 공개 예비선거의 경우 당 기반세력이 기득세력보다 더 온건하다면 완화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마테오 렌치(Matteo Renzi)가 2013년 비당원들에게 개방된 경선에 의지하며 좌파 지도부에 맞서, 사민당 내에서 중도 노선을 힘겹게 방어했다고 지적했다.

동시에, 공개예비선거는 결과를 왜곡해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와 같은 비정통 후보자가 선출되어 기득세력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수도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좌파 후보 브누아 아몽(Benoît Hamon)이 주류 선두주자인 마뉘엘 발스(Manuel Valls)를 제치고 사회당을 장악했다. 영국에서는 평화주의 사회주의자 제레미 코빈(Jeremy Corbyn)이 2015년 3파운드에 표를 산 “기명 지지자들”에 의해 노동당 지도자로 선출됐다.

독일 후보자에는 제레미 코빈이 없다. 심지어 대연정 탈퇴를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비교적 온건하다. 그럼에도 위험성이 높은 것처럼 대연정 탈퇴에 대한 지지율도 여전히 높다. 사민당 예비선거는 새 지도자 또는 정부를 떠나는 것 같은 단기적인 움직임이 당을 비틀거리게 만드는 요인을 고칠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 쪽도 중도파 타협에서 멀어지면서 철저히 양극화로 다가가는 유럽 정치의 구조적 변동에 대해 고심하고 있지 않다.

이제 유럽 내 사회민주당의 미래는 누가 그들을 이끌 것인가 보다는 새롭고 지속적인 기반을 구축하도록 이끌 수 있은 인물이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누구의 얼굴이 포스터에 그려지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제공해야 하는 가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회민주당은 그 부분을 파악하지 못해왔다. (2019-10-26, 1차 개표결과 독일 사민당 당대표 선거에서 숄츠 재무장관이 1등을 차지했으나 과반수 미달로, 현재 숄츠와 대연정 파기를 주장하는 발터-보어얀스 간에 결선투표를 준비하고 있는 중이며 11월 30일 경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다른백년).

 

안나 사우어브레이(Anna Sauerbrey)

독일 타게스슈피겔(Der Tagesspiegel) 편집자 겸 논설위원

토, 2019/11/1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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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 6월 26일 개최된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춘계학술대회의 기획주제 세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한국 지식사회에서 ‘개인화’는 흔히 신자유주의적 고립이나 공동체적 연대윤리의 상실 및 이기주의의 확대,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위험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상 등을 단편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구 근대부터 2차대전 이후까지 다소 선형적으로 발전해온 산업사회가 그 역사적 성공 이후 깊은 변동을 겪는 과정을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울리히 벡이 사용한 ‘개인화’ 개념에 기초하여 복지체계의 변화 필요성을 촉구하고자 한다. 현대의 복지체계가 산업사회의 규범에 기초하여 제도화한 ‘유기적 연대’의 형태라면, 위험사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개인화 상황 속에서는 사회적 연대의 형태 역시 한층 개인화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현대 복지체계의 규범적 출발점

현대 복지체계는 유럽에서 발전한 자본주의 및 그것이 초래한 계급 대립 속에서 형성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봉건적 신분제로부터 개인을 해방/고립시키는 이중의 과정을 불렀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과 달리 계급은 1차적 집단관계가 아니다. 계급은 개인들 간의 사회경제적 성취의 격차로부터 2차적으로 형성된 집단적 격차의 문제로 정의되는데, 개인적 성취 격차를 집단적 격차로 구조화하는 것은 자본의 소유관계이다. 이 소유관계로부터 집단적 분배 격차가 생겨나는데, 복지국가는 소유관계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인 분배 격차를 완화함으로써 사회갈등을 약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소유관계는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적 관계―‘사생활’로 축소된―를 통해서 상속되기 때문에, 계급은 사실상 1차 집단으로서의 성격과 2차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교차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계급 갈등 속에서 과거의 신분적, 가부장적 문화를 매개로 계급결속이 형성되면서, ‘계급’(마르크스) 개념은 ‘사회계급’(베버)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계급 격차는 계급집단 간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격차, 즉 가족생활 향유에서의 격차와 집단문화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복지의 문제 역시 그와 같은 ‘사회적 삶’을 보장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복지체계가 소유관계 자체가 아니라 분배 격차를 문제 삼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이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본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 발달 또는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보고, 그 결과물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현대 복지체계에서 당연시하는 사회이론적 전제는 1)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 성장, 2) 사회경제적 불평등인 계급 격차의 완화, 3) 사회적 삶의 보편적 단위인 핵가족의 보호, 4) 핵가족 부양에서의 계급 간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이론적 전제들에 제대로 포괄되지 못하고 외부화한 문제들이 들어 있다. 각각의 문제를 이 사회이론적 전제들과 관련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문제

경제발전의 틀에서는 생산력 향상을 위한 투입 요소로 노동력과 자본만을 고려한다. 그러나 생산을 위해서는 원료나 토지, 기계 등의 형태로 자연 물질의 투입 역시 필요하다. 또 노동력의 투입을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자연 물질적 특성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의 상속 역시 자녀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몸이라는 물질적 특성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력 재생산과 자녀 출산, 양육 등에 동원되는 여성의 몸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그러한 ‘자연 물질’의 문제를 모두 외부화하여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복지체계 역시 생산관계가 초래하는 분배 정의의 문제만을 ‘사회문제’로 보고, 자연 물질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외부화했다. 이것은 자연과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회문제의 영역에서 자연 물질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평등이란 지속가능성 문제를 배제한 절반의 ‘정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생태 파괴 및 인구 돌봄 문제로 인해서 성장모델 자체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2) 사회경제적 불평등 = 자본주의 계급 격차

사회경제적 격차를 계급 격차로 보는 관점에는 위에서 보았듯이, 핵가족 생활공동체를 인간 삶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단위로 보는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이것의 배경은 19세기 이래 유럽에서 확산한 ‘기혼여성 지위(덮어씌위기, coverture)’의 제도화이다.【1】 기혼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어도 더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고 또한 더 이상 법정에서 발언할 수 없도록 혼인 제도가 변화했다. 기혼여성의 법적 권리가 남편의 법적 권리 속에 묻혀서, 남편이 가족을 대리하는 법적 대표자가 된 것을 말한다. 여성은 시민권의 출발점인 계약할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그와 함께 아동기가 발명되고, 아내와 자녀가 모두 아버지의 성을 취하는 ‘가족성(family name)’ 제도가 일반화하면서, 남성은 재산 소유에서는 내부적으로 격차를 보여도 ‘가장’으로서는 동질화하는 ‘보편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이러한 남성 가장들 사이의 계급 격차로 정의되었다. 반면 여성은 앞서 보았듯, ‘자연 물질’과 유사하게 취급되어 남성의 사생활 영역에 묻힌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정치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3) ‘정상가족’의 규범

기혼여성 지위가 법적으로 차별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남성이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살림을 도맡는 ‘정상가족’의 규범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상성은 특히 생물학과 정신의학 등에 의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면서, 근대적 성역할 규범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규정―‘자연화’(푸코)―했다. 그리하여 이제 보편적 정상가족을 향유하는 권리의 문제가 ‘사회권’의 내용으로 등장했다. 남성에게는 가족 부양의 기준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고, 남녀 간 임금격차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비정상적―임시적, 예외적, 보조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4) 계급 평등 = 가족 부양자 남성 간의 격차 완화

결국 복지는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분배 평등 또는 남녀를 불문한 가장들 간의 분배 평등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성역할 규범과 연관된 엄격한 공/사 구분으로 인해서 ‘노동’의 원형은 ‘가장 남성’의 노동으로 정의되었다. 특히 공장제 산업사회의 형태로 조직화한 제조업 육체노동이 노동의 원형이 되었고, 여성의 직업으로 분류되는 저숙련 서비스직이나 가족 내 삶을 위한 노동은 ‘노동’ 개념으로부터 주변화 또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발전하고 또 탈제조업중심의 산업변화가 진행되면서, 이와 같은 평등 개념은 현실적 토대를 잃게 되었다. 우선 복지국가 발전의 역설적 결과로서, 평등이 계급집단 간의 갈등보다 개인이 국가에 청구하는 ‘사회권’ 개념으로 변화했다(‘제도화한 개인주의’ 또는 ‘고객주의’). 탈산업화로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증가하고 기혼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 남성 노동 중심의 복지체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그리고 여성의 교육수준 향상과 경제활동 증가, 직업 세계에서의 경쟁 격화, 이동성 증가 등으로 인해서 1인 가족이 증가하며, 노동의 목적이 ‘가족 부양’에서 ‘본인 부양’ 또는 ‘가족 공동부양’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나타났다(‘노동과 가족의 개인화’).

 

2. 개인화 및 그것이 복지체계에 던지는 과제들

울리히 벡은 앞서 본 바의, 산업사회가 외부화―즉 단순한 리스크로 처리―한 ‘자연 물질’ 관련 문제 중에서 생태적 위험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정치적 공론화의 의제가 되는 과정을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2】 그리고 위험사회의 노동과 삶의 측면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상들, 즉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노동 및 가족 규범의 ‘탈정상화’를 ‘개인화’라고 표현했다. 노동 규범의 탈정상화는 정상노동모델의 약화를 의미하고, 가족 규범의 탈정상화는 탈핵가족화 또는 근대적 성역할 규범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새로운 불확실성’(생태위험)의 증가와 탈산업화로 인한 생애위험의 탈계급화뿐만 아니라,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 역시 크게 작용했다. 특히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으로 인해서 개인주의가 단순한 문화나 이념이 아니라 ‘법적 권리’로 제도화―‘제도화한 개인주의’―했기 때문에, 노동과 가족의 탈규범화는 단순한 아노미가 아니라 근대 이후 진행된 개인화가 한층 급진적 형태로 심화하는 것(‘2차 개인화’)이라고 보았다.【3】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론화의 의제 및 사회적 저항의 조직방식이나 주체들에서 변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인 것’ 자체가 기존의 공/사 구분이나 사회/자연의 구분을 넘어서 혼종화하는 경향―‘새로운 사회운동’―이 나타났고, 이 역시 개인화와 함께 진행되는 정치변화라고 설명했다. 정치적 의제나 저항의 조직방식, 주체화 등이 개인별 위험 인식에 따라 유동적 네트워킹 방식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개인화의 이러한 양상들이 복지체계에 던지는 의미는 앞서 말한 복지의 사회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1) 우선 평등 분배의 단위가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에서 모든 개인과 아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2) 제조업 육체노동자의 노동을 원형으로 삼아 발전한 계급모델과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제도에서 탈피해서 상품화한 모든 노동―불완전고용과 여성노동 포함―에 평등한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혼여성의 경제활동 증가 및 1인 가족 증가로 야기되는 일·가족 양립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4】 4) 소득 분배에 의한 생존권 외에 ‘자연 물질’과 관련된 안전권―인간 돌봄, 생명 안전, 생태적 안전권 등―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돌봄과 관련된 문제

이러한 도전 중에서 여기서는 돌봄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노동과 가족의 개인화 그리고 정치적 의제 및 주체의 개인화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돌봄 문제를 다룰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1) 우선 생존권 개념이 정상가족 단위의 생존이 아니라, 성인과 아동 개인 단위의 인권문제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경우에는 돌봄이 가족이라는 사적 공동체에서 근대적 성역할 규범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필요에 따라 수행되는 동시에 사회적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에 기초하되,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개인이 두 가지 보편적 역할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사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5】 사회서비스로 제공될 경우 돌봄노동에 대한 가치평가나 돌봄노동자의 조직력 역시 향상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2) 노동위험이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개인별 생애위험으로 변화하므로, 이에 대한 안전보장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기본소득 대 전국민 고용보험’이라는 형태로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고용보험의 보편적 확대는 적용대상자에 대한 조사와 분류가 필요하여 시간 및 행정의 비용이 예상될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사용으로 각종 서비스 단말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 증가하며, 노동과 삶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경제적 가치 생산이 이처럼 단말기와 일반인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사이보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민의 삶 속에서 수행되는 경제적 기여에 대한 보상이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6】 또한 (사회서비스 제공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에게 일정 정도 남겨질 수밖에 없는) 돌봄노동이 보편화한다고 해도, 그 역시 부불노동으로 남는다. 재정마련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과 함께, 역진성을 약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세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3) 복지제도에 의해 개인별 생존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에서, 노동과 돌봄이 통합된 형태로 연계될 수 있도록 노동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로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아프면 쉬는’ 문화와 함께 ‘아픈 가족원을 돌볼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사업장 문화가 바뀐다면,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부담 역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예방책으로 가장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이 ‘아프면 쉬는’ 문화라는 것이 여론조사의 결과였다. 또 인구 고령화와 함께 돌봄에 대한 수요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돌봄을 사적 비용으로 또는 대면적 공동체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서 바뀌어야 할 것이다.

4) 생태적 지속가능성은 세대 간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돌봄은 생태에 대한 돌봄과 유리될 수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공장가동 중지로 미세먼지가 줄어든 것, 그리고 개인별 위생수칙의 철저한 수행으로 호흡기 질병이 줄어든 것 등을 볼 때,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사회의 돌봄 비용을 전반적으로 낮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지속가능성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 및 생존권 보장을 통해서 일과 삶, 돌봄을 한층 유기적으로 통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새로운 틀은 돌봄을 사회서비스로 제공함으로써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을 제도화한 북유럽 모델을 기초로 하되, 돌봄의 보편성을 한층 강조하고 또 거기에 일상 속 노동을 소득으로 보상하는 기본소득을 더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스웨덴 모델에 대한 실망과 한국식 모델의 모색

한국에서 그간 복지국가 모델로 크게 주목받은 스웨덴이 코로나19로 집단면역 실험을 하면서 상당한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그간 스웨덴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다는 비판이 올라왔다. 또 코로나19를 계기로, 서구 복지국가에서 살거나 노동하는 외국인의 열악한 생활상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노동유연화에 대한 대처에서 북유럽 모델이 스웨덴 모델과 덴마크 모델로 갈렸던 것처럼, 코로나19에 대한 대처에서도 스웨덴과 덴마크는 상이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들에 유념할 때, 북유럽 모델을 하나의 동질적인 모델로 이해하는 대신, 각 사회에서 고유하게 발전한 복지모델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적절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 참고하는 것이 한층 발전적일 것이다.

 

【1】 캐롤 페이트먼, 2001,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충훈·유영근 옮김, 이후.

【2】 울리히 벡, 1997,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3】 울리히 벡, 2013, 『자기만의 신』, 홍찬숙 옮김, 길.

【4】 독일의 노동 4.0에서는 개인화가 복지체계에 주는 의미를 ‘시간 주권’의 문제, 즉 일·가족 양립의 문제로만 이해했다. 홍찬숙, 2018, “노동 4.0인가 제2의 노동세계인가? 노동 4.0의 산업사회 관점 및 그 한계,” 『경제와 사회』 119: 165-192 참조.

【5】 낸시 프레이저, 2017,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6】 기본소득의 노동 근거로서 필자는 울리히 벡의 ‘시민노동’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부불노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이보그적 가치 생산에서 소비자 노동이 사실상 비가시화되며, 돌봄노동 역시 사회적 생산에 필수적인 노동으로 여겨져야 한다. 반면 벡은 위험사회에서 시민의 기여가 ‘노동’에서 ‘정치참여’로 바뀐다고 보며, 그것을 기본소득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울리히 벡, 1999,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홍윤기 옮김, 생각의나무 참조.

월, 2020/07/0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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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지를 찾아가는 세상의 의사들은 모두가 존경스럽다. 현재 한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대구로 모여든 의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훈훈한 소식이다. 그들을 응원하고, 고마운 마음은 지나침이 없는 일일 게다. 새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고민해 봄 직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쿠바 의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려 한다. 쿠바에는 누구나 가족 주치의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쿠바 의료시스템의 높은 의료적 성과는 비록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하여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사실이다.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의료복지를 갖추고 있는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떻게 제3세계 쿠바의 의료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의료적 성과를 낼 수 있었는가를 궁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나의 질문은 첨단 의료시설은 고사하고 반세기가 넘는 미국의 금수 조치로 인해 만성적인 물자 부족이 일상이 되어버린 곳 쿠바에 정착된 의료시스템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된 사회적 잠재력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었다. 어쩌면 쿠바 역사의 한 축이 되어버린 사회주의 체제라는 큰 틀을 벗어 나서는 설명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물음이 계속되는 것일지도.

쿠바에는 콘술또리오(consultorio)라는 의료시설이 있다. 보통 국내에서는 진료소라고 알려져 있고, 우리가 가정의라고 일컫는 의사와 한 명의 간호사가 기본 의료팀을 이룬다.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의 가장 기본단위이자, 보건의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해당 지역주민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를 비롯하여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자 관리는 물론 고위험군 질병을 앓는 주민이나 노인과 임산부, 신생아 등과 같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까지 진료소의 의료진들은 언제나 바쁠 수밖에 없다.

지역 골목의 곳곳에 포진된 진료소에서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주민이 800여 명이 넘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1,000여 명이 훌쩍 넘고 있으니, 가정의와 간호사가 어지간히 바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렇지만 노동강도가 높기로 소문난 한국사회 출신이라서 그럴까. 내게 그들의 일상은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지니 난감할 뿐이다.

진료소의 상급기관인 폴리클리닉(Policlinic)은 진료소 수준에서 불가능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 때 가정의의 처방에 따라 방문하는 의료기관이다. 약 20~30여 개의 진료소를 총괄 지휘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공중보건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가정의를 통해서만이 폴리클리닉을 방문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언제든지 지역 근처에 있는 폴리클리닉에서 필요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가정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폴리클리닉을 찾는 이유는 수만 가지에 이를 테니 그 세세한 사정까지는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쿠바 진료소의 가정의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지만 “가족 주치의”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소위 “가족 차트”를 기록하여 가족 구성원의 기본정보를 포함 질병 유무, 건강상태, 생애주기 등을 기록하여 전반적으로 지역 구성원들의 건강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의사의 방문이 요구되는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신생아나 암 환자 등과 같은 중증 질병을 앓고 있다면 가정의나 간호사의 가정방문은 필수적이다. 이 외에도 가정의와 간호사는 정기적으로 해당 지역의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 지침도 마련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개인 주치의를 갖는다는 것은 재벌들이나 유력 정치인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일 뿐 나 같은 ‘인민’들에게는 언감생심 주치의가 가당키나 할까. 나의 건강을 수시로 물어보고 살펴봐 주는 주치의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쿠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상이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의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가 하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관심을 받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호사이니 살짝 부러운 제도임에는 분명하다.

쿠바 보건의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진료소와 폴리클리닉은 이른바 “일차의료”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이미 발병한 질병을 다루는 임상의학 못지않게 예방의학을 더욱 강조하는 시스템이다. 결국, 질병의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예방하는 것이 일차의료 활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떡하면 이 같은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가이다.

의료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건강추구와 의료행위는 단순히 근대적 의미의 의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적인 맥락이 고려된 총체적인 문화적 실천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 문화에서 진행되는 질병과 의료에는 그 문화의 사회적 역사적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에 기대어 보면, 보건의료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은 쿠바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물론 역사적 경험까지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에서는 낙후된 쿠바 의료시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쿠바 의사들의 높은 사명감이나 헌신적인 인류애를 칭송하는 일에 머무는 것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약 2년 전 20년 경력의 베테랑 간호사이자 현재는 연구자인 동료와 함께 쿠바 진료소에 근무하는 가정의와 간호사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은 당시 작성한 현장 스케치의 일부이다.

진료소 앞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저 사람인가? 이 사람인가?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이길 20여 분. 드디어 진료소 건물 아파트에서 남성 한 명이 진료소로 들어갔다. 드디어 가정의를 만나는 구나! 설렐 틈도 없이 남성은 다시 문을 잠그고 헬멧을 쓰고 뒤따라온 딸인 듯 보이는 여자아이에게까지 헬멧을 씌워 오토바이에 태우고 떠나려 한다. 깔마춤이라도 한 듯 어여쁜 노란색 오토바이와 노란색 헬멧을 쓴 모습이 영락없는 푸후(예쁜 곰돌이)를 연상케 했다. 흔히 의사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경직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있는 골목길 스쿠터 맨(?)이었다. 때마침 옆 건물에서 아이를 안고 나온 여성이 진료소로 들어간다. 달려가 들어보니 어딜 갔다가 올 테니 좀 기다리라는 눈치다. 우리는 애타는 마음에 혹시 의사 알레만이 아니냐고 다급하게 달려가서 외쳐본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처방전 용지가 없어서 근처 폴리클리닉에 간다며 곧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채 부르룽~ 스쿠터는 떠났다.

잠시 멍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가다듬고 결연하게 진료소 앞 나무 밑에 주저앉기로 했다. 가정의가 진료소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앗! 그러나, 우리는 앉기도 전에 다시 일어서야 했다. 여기는 쿠바! 진료소 앞의 우리가 궁금한 주민들이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궁금한 주민들을 맞이한다. 가장 먼저 다가와 긴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은 에밀리오(Emilio) 아저씨.

“처방전 용지를 가지러 갔다고?” “오토바이 타고 가던가?” “그럼 23번가에 있는 폴리클리닉에 갔을 거야. 가까우니까 금방 와.” “알레만? 잘 알지. 미션을 세 번이나 다녀왔어. 좋은 사람이야.”

에밀리오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뒤에서 서성이던 남성과 곧이어 등장한 여성 네나(Nena)가 말을 이어갔다. 감기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 중인데 약이 독해서 얼마나 오래 먹어야 하는지 물어보러 왔단다. 남편을 따라서 진료소에 함께 산책 나오듯 나오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 그러지 말고 아주머니 집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시지만, 가정의 알레만과의 면담을 미룰 수 없어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자 집의 주소를 알려주시며 언제든지 들르라는 당부를 하시고 자리를 떠나신다. 자신들이 사는 집을 스스럼 없이 알려주고, 문을 열어 집안으로 맞이하는 모습이 이제는 낯선 풍경이지만 우리에게도 이와 같았던 세월이 있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알레만이 돌아왔다. 진료소 문이 열렸지만 우리는 멀찍이 지켜볼 뿐 다가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디에서들 보고 있었는지 알레만이 진료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방문자들이 줄줄이 진료소에 따라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료소에 들어가는 주민들을 부럽게 지켜보며, 우리는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역으로 인터뷰를 당하고 있다. 진료소 앞을 서성이는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많을 법도 한 일이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알레만이 진료소를 나선다. 안에는 여전히 몇 명의 주민들이 남아있다. 무조건 따라 뛰었다. 알레만은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가정의도 간호사도 없는 진료소에서 주민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간간이 하하 호호 웃는 소리도 들린다. 잠시 후 알레만이 진료소로 복귀한다. 뒤따라가 사진 찍은 것에 대해 사과하자 괜찮다며. 방금 방문한 집에 암 환자가 있는데 상태가 안 좋다고 아들이 전화해서 와 달라고 했단다. 아하! 가정방문은 이렇게 수시로 이루어지기도 하는구나! (···· 중략 ····)

가정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료소는 주민들의 사랑방이 된다. 서로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고, 간호사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혈압을 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가정의 알레만은 이 구역에서 단연 가장 인기 있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여느 쿠바 사람다운 다정함은 물론 잘 웃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를 함께 지켜본 연륜 있는 동료는 저런 모습이 바로 “츤데레”의 매력이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약 4주가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알레만은 결국 우리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반갑게 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알레만은 언제나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진료소가 있는 건물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니,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모두 알레만의 이웃인 셈이다. 자신이 처음 가정의를 시작했을 때 돌보았던 신생아가 이제는 임산부가 되어 자신의 진료소를 찾는다며 으쓱한다. 알레만은 그 신생아와 함께 성장했고 삶을 공유했음이 분명하다. 쿠바 지역사회에서 가정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에 괜히 내가 흐뭇하다.

진료소에는 최첨단 의료시설은 물론 자랑할 만한 의료 기구도 별로 갖춰져 있지 않다. 간단한 소독기구, 주사, 약품 등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알레만의 진료소에는 왁자지껄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는 소리, 박장대소하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의사실과 대기실의 분리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알레만의 진료는 정해진 틀 없이 어디서나 이루어진다. 약 한 달간의 진료소 추격전(?)을 통해 이제 인도 위에서, 아파트 앞에서, 때로는 오토바이 위에서 주민들과 얘기하거나 등에 손을 얹고 위로하는 듯 보이는 모습의 가정의 알레만과 간호사 글레이비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쿠바 보건의료의 성과를 분석하는 단초는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구별되는 쿠바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단 쉼표를 찍기로 했다. 고가의 최첨단 의료장비만이 좋은 의료의 시작이라는 우리의 믿음에도 쉼표가 찍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

목, 2020/03/0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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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년에 설립된 영국은행에서 빌린 1.2백만 파운드를 갚지 않았다. 그 대신 대부자(영국은행)에게 대출금의 반대급부로 독점적인 화폐발행권을 부여하였고, 이것이 현재까지 세계의 금융시장을 움직이는 기본구조가 되었다. 현재 코로나 사태라는 위기를 맞이하여 정책당국자들은 경제를 부양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조처를 약속했고, 중앙은행들은 정부의 재정지출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화폐를 발행하라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위급 상황, 특히 전쟁 기간에는 왕왕 중앙은행들은 해당정부에게 신규의 은행권화폐를 제공하곤 하였다. 결과로 나타나는 인플레에 대한 대처는 위급상황의 종결 이후로 미루어져 왔다. 팬데믹 상황임에도, 현재 세계는 아직 전쟁에 준하는 상황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따라서 독립적으로 인플레를 책임져야 하는 중앙은행의 원칙을 완화시킬 필요까지는 없다. 그럼에도 급하게 필요하다면, 화폐재정에 대한 융통성이 정책책임자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무제한으로 통화량을 풀어 정부의 재정필요를 지원하면 초인플레(hyper-inflation)를 야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들도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지난 십 수년간 인플레의 예측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적완화의 정책은 중앙은행의 목표인 2.0% 이내에서 이루어졌다. 활성화된 경제로 흘러 들어간 돈은 그만큼 확대된 수요(아마도 위험관리형 예치)에 의해 흡수되었다.

양적완화와 통화재정 정책 간에 분명한 경계선은 없다.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로 구입한 금융자산은 일시적이며, 새로이 발행된 화폐량는 경제활동 과정에서 한 순간에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라나 이후 후임자들이 이를 지속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단속할 수단은 없다. 한편에서는 정부가 돈을 빌리는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있는 반면에, 국가채권은 민간투자자들이 사들일 때만이 신규발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의 양적완화 프로그램은 점차 영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중앙은행들은 재정위기와 현재의 현금수요 간에 통화정책을 충분히 토론해서 정상화시킬 처지가 아니다. 이들이 언제라도 충분히 토론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전에 집행된 정책수단의 규모가 너무 커서, 예컨데 일본중앙은행의 경우에는 보유하고 있는 국채가 일본국가 수입의 100%를 넘어 서고 있어서, 기존에 소유하고 있는 국채를 시장에 내놓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양적완화와 통화재정 간의 차이점은 대개 단 한가지의 예이다: ‘금융자산의 구매행위가 잠정적인가 아니면 지속적인가?’ 이 점이 중앙은행의 신용도와 메시지의 전달에 중요한 측면이다. 영국은행장인 Andrew Bailey는 언론에 기고하였듯이, 국제적인 투자자들에게 자금을 파운드로 보관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확신을 제공했던 통화정책을 거부했다.

파이낸설 타임즈의 입장은 코로나 사태를 극복하려면 화폐금융정책에 자유재량권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알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의 내용과 같다.

인플레를 잡으려는 흐름이 거꾸로 간다면, 중앙은행들은 물가의 인상과 싸우기 위해 이자율을 높이던가 양적완화를 줄여야 한다. 현재의 위기상황은 디플레를 야기할 수 있으며, 각국 중앙은행들은, 유럽중앙은행를 예외로 하고, 함께 균형을 맞추며 정해진 목표를, 이상 또는 이하 양방향에서 벗어난 인플레와 싸울 것을 약정해야 한다.

현재 침체 국면의 심각한 규모를 감안하면, ‘헬리콥터 머니’가 되었든, ‘일반 시민에게 현금으로 지불하는 방식’이든, 가장 직접적인 화폐재정의 방식으로 재량껏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정책의 집행과정은 공공재정을 책임지도록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직자들의 협조를 요구한다.

논쟁의 핵심은 화폐재정 정책을 추진해야 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양적완화는 이루어지고 있듯이, 독립적인 중앙은행의 책임있는 통제 하에서 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파이낸스 타임즈 편집부 (FT editorial board)

월, 2020/04/1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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