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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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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태문명으로의 전환: 살아있는 지구를 위한 시스템

admin | 월, 2019/11/25- 19:58

현재 인류는 자멸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지구헌장(Earth Charter)을 여는 글은 현재 우리가 직면한 도전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지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서 있다. 지금은 인류가 스스로의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데이비드 코튼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출처: 한겨레>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지구와 호혜적 균형을 이루면서 평화, 아름다움, 창조력, 물질적 만족, 그리고 영적 풍요라는 오랫동안 부정돼온 인간의 꿈을 이루는 것은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이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를 그 꿈에서 멀어지게 했던 현재의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의 깊고도 신속한 변화가 필요하다.

다섯 가지의 주요한 세계적 경향은 우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뿐 아니라 인간의 자기멸종, 나아가 생명을 유지시키는 지구 용량의 잠재적 파괴라는 위협으로 이어진다.

첫 번째 경향은 지구의 지속력을 넘어선 소비 증가이다. 이는 잠재적으로 기후변화, 비옥한 토양의 유실, 깨끗한 담수 공급의 감소, 숲의 소멸, 어업 붕괴 등의 치명적 결과를 가져온다. 글로벌 생태발자국 네트워크는 우리 인간이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1.7배를 소비한다는 계산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성과의 결정적 척도로 쓰이는 국내총생산(GDP)을 계속 늘리고 있다. 사람과 지구에 대한 파괴적인 결과는 무시한다.

두 번째 경향은 극단적인 불평등의 증가이다. 우리는 소수 사람들이 필요 이상의 과도한 소비를 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절망의 삶으로 빠트리는 세계적인 부의 격차를 인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6명의 금융자산이 인류의 절반에 달하는 38억 명의 가난한 사람들의 자산을 합친 것보다 많다.

세 번째 경향은 생명파괴 기술에 대한 의존의 증가이다. 우리의 핵, 탄소에너지, 유전자 변형, 인공지능 기술은 지구에 점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의 종류와 잠재적인 영향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네 번째 경향은 정부와 공공정책에 대한 기업 통제의 증가이다. 우리는 이미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금융자산을 늘려주는 데 헌신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다국적 기업의 독점이 점점 집중되도록 방치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매수하고 나머지 구성원들에 비해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더욱 증가시키는 정책을 촉진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다섯 번째 경향은 점점 증가하는 제도적 정당성의 상실이다.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기관들이 점점 절망의 삶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 속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선동을 목격한다.

내 나라인 미국은 이 다섯 가지 치명적인 경향을 주도하는 세력이자 이런 경향을 직접 경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는 절망 속에서 새로운 지도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 앞의 도전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한국이 블룸버그 혁신지수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나라로 선정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잘못된 서사를 선택했다

우리 인간의 미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현재가 왜 이렇게 심각하게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는 엄청나게 나쁜 문화, 제도, 그리고 사회인프라를 선택해 왔다. 이제 전지구화된 하나의 종(種)으로서 우리는 돈을 명백한 공통의 가치로 선택하고 행복의 척도로 사용한다. 관계를 맺는 주된 방식으로 권력과 자원을 가지려는 경쟁을 선택한다. 규범이 되는 기관으로서 사적인 목적과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을 선택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요 거주지로 사람보다는 차를 위해 설계된 도시를 선택한다.

우리는 서사의 창조물인데, 결함 있는 서사를 선택해왔다.

초기 인류는 상징적인 사고와 의사소통 능력을 발달시켜 점차 다른 종들과 스스로를 구별했다.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현실에 대한 이해를 소통하고 공유하기 위해 점점 더 정교한 서사를 창조했다. 공유된 신념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조직화하는 능력의 기초가 되었다.

드문 경우를 빼면 우리는 태어난 집단의 서사를 진정한 현실로 단순히 받아들였다. 이것은 강력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서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가상적으로는 제한 없는 규모의 일관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서사를 만드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배타적 목적을 위해 서사를 쉽게 조작하도록 만들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오만, 자기파괴 능력, 그리고 서사적 조작에 대한 취약성, 이 모든 것은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지난 5000년동안 인간과 지구를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의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작해온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 과거에 그 지배자들이 왕들과 황제들이었다면, 현재 그들은 기업의 CEO들과 월 스트리트 금융가들이다.

현재 우리 인간의 불행은 거침 없이 미화된 서사이자 실제로는 이데올로기인,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사기에 넘어간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돈이 부이며, 돈을 버는 사람이 부를 창조하고, 개인이 얻은 이윤의 합을 넘어선 공동체의 이익은 없다고 믿도록 한다. 그리고 이윤을 추구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우리 모두를 더 나은 미래로 이끌어 줄 것으로 기대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을 통제함으로써 많은 이들을 착취해 소수가 이익을 취하는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것의 가치와 논리는 신중하게 고른 “밈”(meme: 비유전적 문화요소로 문화의 전달방식임)을 통해 전세계 대중의 의식에 침투했는데,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구인 “경제 성장” “개인의 자유” “자유시장” “자유무역” “투자자” “다국적 기업” “작은 정부” 등이다. 각각의 문구는 인류와 지구의 복지보다 사적인 금융이익을 우선시하는데 도움이 되는 암호들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은 GDP를 증가시키는 것과 관계 없는 자조적 돌봄이나 헌신보다는 시장에서의 거래를 중요하게 여긴다. “개인의 자유”는 단정적으로 개인이 우월하다고 보고 공동체를 폄하한다. “자유시장”은 (규칙에 기초한 윤리적 시장과는 반대로) 기업이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공공의 규칙, 감독, 공공선에 대한 배려를 벗어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무역”은 (공정하고 균등한 무역과는 반대로) 단기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게 시장, 노동, 자원 및 돈에 대한 무제한적 접근과 궁극적 통제권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한 사회적, 환경적 결과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우리의 정치제도는 보호가 필요한 공동체에 봉사할 의무를 가진 정부로부터 주주들의 금융배당을 최대화하는 것 외에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단언하는 다국적 기업에게로 권력을 쉽게 넘기도록 설계돼 있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서 근본적인 요건은 돈이 숫자에 불과하고 돈을 벌기 위해 생명을 파괴하는 것은 자살만큼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동양문화가 오랫동안 인식해 왔고 지배적인 서구문화가 오랫동안 무시해 왔으며 심지어 부인해온 근본적인 진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인간은 살아있는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체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오직 공동체 안에서만 살아남고 번성한다.

 

우리 몸처럼 지구는 유기체이다

생태문명은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의 적절한 이름으로 보인다.

생태라는 말은 생명이 존재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을 만들기 위해 공동체 안에서 자기 조직하는 유기체의 능력에 초점을 둔다. 문명이란 말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진정으로 겸허한 관계를 맺는데 요구되는 문화적, 제도적 전환의 깊이를 상기시킨다..

수십 조의 살아있는 세포로 구성된 공동체인 당신의 몸을 생각해보라. 이 세포들은 끊임없이 각자의 요구와 자신들이 의존한 몸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춘다. 그들은 각 세포의 연쇄적인 죽음과 재생, 기온의 변화, 영양분·물·정보 그리고 에너지의 다양한 투입을 포함한 변화의 조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의식의 보금자리이자 에너지의 운반체인 당신의 몸을 창조하고 유지한다.

지구도 진정 엄청난 규모로 이와 똑같은 일을 한다. 지구 안의 무수한 단세포와 다세포 유기체들은 토양, 대수층, 숲, 해양생태, 하천, 강을 재생시키기 위해 에너지, 영양소, 물과 정보를 교환한다. 또 잉여의 탄소, 독소 및 기타 폐기물을 격리시키고 태양 에너지를 잡아두고 공기를 정화하며 날씨와 기온을 안정시킨다.

우리는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의 제도에 상응하는 등가물 없이도 지구에서 어떻게 이 모든 것이 작동하는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지구 간의 교환을 안내하는 수단으로서 돈, 시장, 기업과 정부라는 인간적 제도에 계속 의존할 가능성이 크지만, 이 제도들은 단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구조화된 대로 우리가 선택한 제도들은 의사 결정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우리 중 가장 부유하고 유력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고 착취하도록 우리의 생존수단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를 이루려면, 이러한 제도들은 모든 사람의 물질적 충족과 정신적 풍요를 확보하기 위한 탈중심화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재구성되어야 한다. 또한 살아있는 지구가 온전한 건강과 활력을 갖도록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 퍼즐 조각이 하나 더 있다. 우리 인간은 공동체에서 살도록 진화했다.

최초의 인간이 지구에 발을 디딘 이래 대략 99%의 시간 동안, 우리의 조상은 사냥과 채집을 하는 종족으로서 다른 인간, 자연과 직접 연결된 상태로 살았다. 부족 구성원들은 함께 견과류, 씨앗, 과일, 그리고 야채 등을 찾으러 다녔다. 그들은 함께 사냥감을 쫓고 놀이를 즐겼다. 그들은 함께 공동부엌에서 함께 쓰는 불로 식사를 준비했다. 그들이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맺는 관계는 직접적이고 평생 유지됐으며 상대방이나 자신이 사는 지역의 실물과 동물에 대한 친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언제나 함께 생활하는 여러 세대로 구성된 가족 구성원으로부터의 지속적인 지지와 관여, 인내하는 관계를 경험했다. 청소년들 역시 부모들과 거의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그리고 자연과는 절대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활동적인 야외생활을 영위했다.

이런 경험은 어린이들의 직접적인 행복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행복,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에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방식과는 얼마나 다른가! 세계적 추세에 대한 통계에 따르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1인 가구에서 혼자 살고 있다. 1960년대 이래로 1인 가구의 비율은 호주, 캐나다, 미국,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에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그럼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현재 미국 아이들의 31%는 한부모 가정에서 살고 있다. 종종 한부모는 한 개 이상의 저임금 일자리에서 가까스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투쟁하는 엄마들로 긴 통근시간에 시달리며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하고 동료나 이웃들과 어울릴 기회도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아이는 대부분의 깨어있는 시간 동안 부모나 다른 친척들과 접촉하지 못 하고, 자연과의 접촉도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이처럼 고립된 상태와 공동체의 지원 부족은 정신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자살이 25% 증가했으며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 인구의 50%가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서 정신질환을 경험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난 세기에 걸쳐 우리가 진보라고 자축했던 것들은 돈의 개입, 자동차, 기업, 그리고 인간 상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는 정부 등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렇게 아둔하게 망쳐놓은 직접적 관계들을 복원해야 하는 당위에 직면했다.

 

생태문명은 공동체의, 책임 있는 삶이다

우리가 목표로 삼는 미래는 대부분 사람들이 대도시나 소도시 혹은 마을에 살면서 다른 사람, 그리고 자연과의 본질적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요소를 충족시키며, 우리가 지구에 가하는 총체적인 물질적 부하를 최소화하는 특징을 갖는다. 자동차에 대한 의존이 증가하고 각 가구를 고립시키며 생태적 통합성을 망치는 교외로의 무질서한 확산은 생태문명 안에는 설 자리가 없다. 또한 대도시에서 자동차의 자리가 없어져야 한다.

생태문명의 자동차 없는 도시에서는 다세대의 여러 가정으로 이뤄진 주거단지가 시설, 도구, 자원 및 노동을 공유하는 활력 있는 생태공동체로서 작동하며,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현재도 일부는 그런 것처럼 부족공동체로서 서로를 돌보고 서로의 아이들을 보살피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편리하고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사회인프라를 설계해야 한다. 사람들이 필요한 서비스, 쇼핑, 교육, 영적 활동, 직장, 그리고 거주지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서 즐길 수 있는 여가생활 등의 수요가 충족돼야 한다. 사람들이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섞이고 어울리는 매력적인 장소가 많은 것이 이런 도시들의 특징이 될 것이다.

호감 가고 개성적인 이웃들이 초고속 부상열차나 지하철로 연결될 것이다. 또 모든 사람이 초고속 인터넷으로 소통할 것이다.

교외로부터 철수하면서 도시와 농촌 지역의 경계는 도농간 연계와 공유를 용이하게 하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질 것이다. 도시와 농촌의 지방정부가 음식, 물, 에너지, 물질적 필요 등 양 지역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다. 또한 공기, 물, 비옥한 토양의 자연적 재생을 가능하도록 하고, 인공비료와 살충제의 사용을 배제하며, 쓰레기를 재활용, 분해 및 재사용할 것이다. (역자주: 필자는 미국의 산업화와 경제적 번영의 결과물로, 중산층이 교외에 큰 저택을 짓고 각자 자동차를 이용해 도시로 출퇴근하는 생활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한국의 아파트처럼 도시의 밀집한 주거단지가 에너지와 자원의 이용이나 관계 회복에 효과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서는 오히려 “생태적인 삶” “귀농귀촌”이라는 이름으로, 공동화된 농촌지역에 대형 주택을 짓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

기본적으로 관계의 자본화와 붕괴를 나타내는 지표인 GDP의 성장이 아니라 진정한 건강과 복지의 지표로 우리의 진보를 측정할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 건강하게 살며 삶을 즐기고 있는가? 아이들이 적절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고 있는가? 자연은 풍요로운가? 이런 것을 측정하는 지표들이 발전한다면, GDP가 증가하는지 줄어드는지에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보자면, 우리는 다국적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세계에 걸쳐 돈, 인력, 재화가 이동하는 대신, 사람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더불어 살면서 건강과 행복을 최대로 누릴 수 있는 자립적인 생태권역경제를 선호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계급분리를 최소화하고 평등을 최대화하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도시가 주변 농촌 지역 및 농민들과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실천하려면 법률, 기술, 사회기반시설의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사유재산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민주주의에 필수적이라고 믿는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조금씩 재산을 가져야 한다. 가급적이면 자신의 집과 생계수단에 대한 소유권이 있어야 한다.

지역 참여적 소유의 필요성은 부의 재분배, 금융투기 해소, 독점기업 해체, 그리고 모든 사업체가 사업을 수행하는 공동체에 종속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의 필요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는 소규모 지역공동체 사업을 통해 가장 잘 성취된다. 아담 스미스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장은 개인 농부나 장인이 개인 소비자들과 직접 거래하는 곳이다. 현대사회에서는 큰 규모의 사업이 필요하지만, 소유권은 지역적이고 안정적이며 평등해야 한다. 집중화되거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의 소유권은 지역 협동조합원, 소비자, 지역사회 소유권을 위해 없애야 한다.

협력의 정신과 윤리에 따라 각 생태권역은 권역 안의 노동과 자원을 이용해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생태권역에서는 아이디어와 기술, 문화를 자유롭게 공유하며, 스스로 생산할 수 없는 것은 이웃들과의 공정하고 균등한 교역으로 얻을 것이다. 은행, 금융, 그리고 소유권을 지역적으로 유지할 것이다.

인류는 결정적 선택의 순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현재 궤도대로 살면서 소수 사람들이 일시적 과소비를 즐기도록 도와주는 황금만능주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할 수도 있다. 아니면 생태문명의 비전을 수용해서 모든 인간이 번영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문화, 제도, 사회인프라의 전환을 이루자는 공동의 목적에 동참할 수도 있다.

모든 이들을 위한 평화, 아름다움, 창조성, 물질적 충족, 영적인 풍요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가족, 공동체, 국가 모두가 같은 지구생명체의 구성원이라는 공통의 정체성을 갖고 함께 헌신해야 할 시간이 왔다.

 

데이비드 코튼

리빙이코노미즈포럼 대표, 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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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코리아 양국체제

코리아 양국체제1란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두 나라가 주권국가로서 서로 인정하여 공식 수교하고 평화롭게 공존, 교류, 협력하는 일 민족 이 국가2의 평화체제, 공존체제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지난 70여 년 남북 간에 쌓이고 쌓인 적대와 불신을 완화하고 해소함으로써 평화적 통일로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

지난 70여 년 남북은 수없이 많은 ‘통일방안’을 경쟁적으로 제안해 왔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통일은 멀어졌다는 역설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까지 한국과 조선은 서로를 국가 대 국가로서 인정한 바 없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통일을 말해봐야 통일이 이뤄질 리 없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드시 통일하자고 하니까 전쟁까지 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통일을 하자고 할수록 통일이 멀어지는 역설이 여태껏 발생해왔다고 하는 것이다.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가 양측이 상대를 진심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인정하는 데 있음은 굳이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은 자명한 사실이다. 국가로서 성립되어 있는 양자 간의 관계에서 그렇듯 진정에서 우러난 실제적인 인정이란 서로를 정당한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남북 서로가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각자의 내부에서 상대를 부정하고 적대했던 심리와 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야 편지 한 통 오가는 데서 시작해서, 전화가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그리고 마음이 오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음 간의 긴장이 먼저 풀려야, 정치적 긴장도 풀리고, 군사적 긴장도 따라 풀릴 것이다. 이 길이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제1보’이고 그러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이 코리아 양국체제다.

그러나 지난 70여 년 동안 그 ‘제1보’는 한 번도 제대로 떼어지지 못했다.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면서 내달리고 도약하기를 꿈꾸는 온갖 화려한 통일안들이 난무했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여태껏 미뤄져온 그 첫걸음을 제대로 분명하게 내딛자는 제안이다. 통일에 이르는 첫걸음이 될 양국체제가 정착되고 안정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 첫 과정을 제대로 이수(履修)하는 데만 많은 노력과 인내와 창의력이 요구된다. 이 가장 기본적인 과정을 분명한 목표로 인식하고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해 실제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 과정을 애매모호하게 남겨둔 채 2단계, 3단계로 건너뛰자는 통일안들은 말만 화려할 뿐 실효가 없다. 오히려 갈등과 불신만 키워왔다.

양국체제란 단순히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두 국가 간에 ‘국가로서의 상호 인정’이 공식적으로 이뤄지고 그러한 상호 인정 관계가 안정적으로 정착되어야 비로소 양국체제라 할 수 있다. 2018년 현재 세계 157개국이 남북 두 국가를 동시에 인정하고 수교하고 있으니 한반도에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한반도에 양국체제가 성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막상 남북 두 국가는 서로를 국가로서 정식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을 치르고 극단적으로 적대했던 두 국가가 엄혹했던 냉전 기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상황 탓으로 넘겨본다 하더라도, 소련·동구권이 붕괴하여 미소 냉전이 해소되고 1991년부터는 남북 두 나라가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음에도 그 후로도 거의 30년을 서로 국가 대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지내왔다는 것은 분명 비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이 크게 변하여 이러한 비정상이 더는 지속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같은 해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연이어 열리면서 한국전쟁(Korean war)의 종전과 북미 수교가 남, 북, 미 3국의 공식 어젠다에 올랐다.3 정전 상태를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할 당사자가 될 남북 두 국가가 이제 서로를 정상적인 국가로서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여기에 더하여 이후 북미·북일 수교가 이뤄지는 날이 올 것인데, 그때에도 남북만은 끝내 상대를 국가로서 인정하지 않은 채 준 전쟁 상태로 남아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이제 양국체제가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도 놀라운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대중적 힘이 대한민국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힘은 물론 2016년 겨울 이후 형성된 촛불혁명의 민의다. 촛불혁명은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배경에는 정권의 모든 실정(失政), 무능, 독단에 대한 항의와 비판을 ‘종북’으로 싸잡아 억누르고 ‘블랙리스트’로 묶어 배제했던 박근혜 ‘신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환멸과 거부가 있었다. 결국 북을 이용해 독재를 강화하는 낡은 공식을 재탕·삼탕하려다 국민적 대저항에 부딪쳤던 것이다. ‘보수가 안보는 잘할 거’라는 근거 없는 공식도 완전히 깨졌다. 이명박, 박근혜 소위 ‘보수정부’ 시절 내내 안보 위기·전쟁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만 갔다.

높아가는 안보 위기, 전쟁 위기에 대한 국민적 불안과 불만이 매우 심각한 상태였음은 2018년의 판문점, 싱가포르 회담에 대한 여론의 압도적 지지에서 여실히 드러났다.4 2019년 2월 하노이에서의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상황은 교착되는 듯했으나, 같은 해 7월 1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다시 만나 70년 적대를 종식시킬 대장정의 새 장을 열었고, 여론은 여기에 대해 흔들림 없는 지지를 보냈다. 이 지지는 촛불민의의 연장이자, 촛불민의를 믿고 과감한 대북 화해, 북미 화해를 성공적으로 주도했던 새 정부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제 남북미 간의 평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의지와 역량이 새 정부가 ‘촛불정부’임을 입증하는 핵심 증표가 되었다. 이로써 양국체제로의 현실 변화는 남북미 간의 해빙 기류와 이를 지지하는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통해 안팎의 든든한 근거를 갖추었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어느덧 이미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제 코리아 양국체제는 학술적 발상이나 탐구의 수준을 넘어서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 되었기 때문에, 양국체제에 대해 보다 체계적인 인식을 정립하여 임박한 변화에 준비된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기 때문에 양국체제에 대한 이해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상식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간단해 보이나 실은 간단하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양국체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흥미로운 현실의 블랙박스를 먼저 풀어야 한다. 오랜 세월, 상식이 현실로 되지 못하게 가로막아온 모종의 강고하고 거대한 장애가 우리 자신의 안팎에 존재해왔던 것이다. 따라서 양국체제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 정립을 위해서는 먼저 이 거대한 장애를 분석하는 데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작업은 현실에서의 시도와 실패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다. 양국체제로의 첫 전환 시도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첫 시도는 너무나 짧은 시간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시도가 어떻게 가능했고 왜 실패했는지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양국체제에 대한 체계적 인식은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양국체제 발상이 억압되어온 까닭

먼저 양국체제에 대한 기본적인 상(像)을 그리기 위해, 한중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현재 한국과 중국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국은 2003년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제1교역국이 되었고, 2017년에는 중국에 체류하는 한국인과 한국에서 체류하는 중국인이 각각 100만 명을 넘어섰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진 후 벌어진 놀라운 변화다. 편지 한 통 자유로이 오가는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이러한 큰 변화가 이뤄진 것은 한중 두 나라가 국가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정식으로 수교했기 때문이다. 먼저 정식 외교관계가 이뤄지면 여러 변화가 물꼬를 터서 연이어 진행되게 마련이다. 한중 수교와 교류는 한중 양국에 큰 혜택을 주었다.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수교 이전의 냉전시대 한중 관계는 사실상 전무했다. 당시엔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지도 못하고 ‘중공’이라 불러야 했다. ‘적성공산국가’를 마치 정상적인 나라인 것처럼 부를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류는커녕 교류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적대와 금기의식이 지배했다. 러시아(구소련)와의 관계, 베트남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실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주지하듯 이러한 변화는 미소 냉전체제의 붕괴로 인해 가능했다. 더는 이념과 체제의 차이가 교류와 협력을 가로막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수많은 일반인들이 서로 만나 협력하고 사업하는 데 이념의 차이를 물고 늘어질 이유가 없었다. 한중, 한러, 한베 수교국 정부 사이의 공무(公務)를 수행하는 데서도 서로의 이념이나 체제를 문제 삼아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간단히 말하면, 코리아 양국체제란 한국과 조선 두 나라 사이에도 한중, 한러, 한베 사이와 같은 정상적인 교류와 협력이 이뤄지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한국과 조선은 같은 민족의 두 국가이지 서로 민족이 다른 외국이 아니다. 같은 민족의 두 국가 간의 관계는 일반 외국과의 관계보다 긴밀하고 특수할 수밖에 없다. 양국체제란 일종의 ‘한 민족 두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 특수성이 지금까지는 불행하게도 삼엄한 휴전선을 경계로 대치하면서 어떤 정상적 교류도 불가능한 상태에 머무르도록 지극히 부정적으로 작용해왔다. 일반적인 대외 관계와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철저히 가로막힌 상태였다. 그러나 과거 냉전시대 ‘적성국’이었던 중국, 러시아, 베트남과의 관계가 정상화되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일반인 사이에서도 ‘왜 북과는 같은 민족인데도 그럴 수 없느냐’는 자연스러운 질문들이 생겨났다. 그래서인지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일반인 대상으로 양국체제를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고 그 필요성을 인정한다. 기본적인 소개만 하고 나면 오히려 필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남북 간의 양국체제는 여태껏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발상조차 분명한 형태로 제기되지 못했던 것일까?5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양국체제를 설명하다 보면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자주 접하게 된다. 뒤집어 보면, 비록 막연하게나마 그런 방향과 방식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생각을 분명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또는 그런 식의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다는 뜻이다. 정신분석의 용어로 말하면, 그러한 생각과 발상은 무엇인가에 의해 ‘억압’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렇듯 양국체제적 생각과 발상을 억압해왔던 것일까?

먼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각 개인의 외부로부터 오는 억압이다. 이는 주로 그동안 북을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했던 국가와 국가기관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다(남북이라는 말을 바꾸어도 상황은 정확히 같다). 일례로 우리는 오랫동안 ‘북한사람’을 우연이라도 만나게 되면 공포를 느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살아왔다.6 국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해외에서도 그러했다. 북을 불법화하고 있는 국가 당국이 언제든 그런 ‘접촉’을 ‘간첩사건’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이러한 억압은 독재의 수단으로 오랜 세월 애용되어왔다. 어떤 정당한 비판도 ‘종북’이라 몰고, 어떤 비인도적 탄압도 ‘종북 척결’로 정당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양국체제적인 발상을 떠올리기도, 꺼내놓기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 절에서 말했듯 촛불혁명을 전후하여 국내외의 상황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이러한 외적 억압은 점차 약화되고 있고, 앞으로 더욱 약화되어갈 것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런 외부 억압은 억압을 당하는 각자의 의식 속 내면화를 수반하기도 한다. 스스로 ‘종북’ 딱지에 걸리지 않도록 자기검열을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내 귀의 도청장치’가 생긴다.7 이런 자기검열을 통해 북에 대한 경계와 공포, 적대감이 내면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외적 억압에 의해 내면화된 의식 역시 결국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외적 억압 요인이 약화·소멸됨에 따라서 같이 또는 다소의 시차를 두고 약화·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비롯된 억압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이 억압은 원인이 내적인 것이기 때문에 앞서 살펴본 외적 억압이 사라져도 존속할 수 있다. 그러한 억압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면 그것은 우리 내면의 ‘분단의식’임을 알 수 있다. 남북뿐 아니라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코리안들에게 ‘분단’이란 그저 단순한 한마디의 말, 언어가 아니다. 범상치 않은 단어다. 반드시 ‘비원(悲願)’이나 ‘한(恨)’과 같이 강렬한 정서적 에너지가 고도로 응축되어 있는 표현을 수반한다. ‘분단’이란 모든 코리안에게 깊은 고통과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수반하는 상처의 표현이다. 일제에 억눌리면서 맺혔던 한이 풀리나 했던 순간 야밤의 봉변처럼 닥쳐왔던 것이 민족분단, 조국분단이었다. 일본을 몰아낸 미국과 소련의 힘, 그리고 그들 사이의 냉전이 분단을 가져왔다. 민족의 심장에 꽂힌 가시가 반드시 뽑혀야 하듯, 이 ‘분단’은 반드시 거부되고, 부정돼야만 한다. 따라서 ‘분단의식’이란 강렬한 ‘분단부정의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분단’에는 또 항상 ‘극복’이란 말이 따라 붙는다. 그 결과 ‘분단의 비원’과 ‘분단의 극복’은 항상 짝을 이루는 말이 된다. 이러한 분단은 나뉘어 있되 결코 둘이 아님을, 아니 결코 둘일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은 나뉘어 있지만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함을 정언적(定言的)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이드)을 ‘억압’하는 것은 초자아(슈퍼에고)이고, 이 초자아의 명령은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과 닮아 있다. 정언명령을 닮은 이 ‘분단(부정)의식’이 ‘한 민족이 이룬 두 개의 국가’, ‘두 개의 코리아’라는 생각, 양국체제의 발상을 억압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금압, 터부는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한중, 한러, 한베 수교 이후 현실이 크게 변했음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한반도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식”이 되었음에도 그렇듯 상식적인 양국체제적 발상을 제기한다는 것이 왠지 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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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1/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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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는 1997년, 1999년에 각각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정의되는 방침에 따라 통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 모두 중국과의 재통합 이후 특별행정구역(SARs)으로서 50년간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두 도시는 중국령이 되었지만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된 행정, 입법, 사법 자치권을 통해 독자적인 국정을 관할한다. 홍콩 기본법에는 중국 정부가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치권 보장이 끝나는 2047년에 과도 시한이 끝나고 나면 홍콩 도시의 미래는 중국에 귀속된다.

선거가 치루어진 이후, 중국 인민일보의 1면 논평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고 홍콩 사무는 중국 내정에 속한다. 홍콩 문제에 외부 세력의 간섭을 불허하는 것은 중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브라질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정부는 변함없이 홍콩 문제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개입도 반대할 결의를 지녔다고 전했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지난 11월, 홍콩에서 구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범민주당이 “전체 452의석 중 347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뒀다”고 보도하며 18개 구 중 17곳을 장악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홍콩 구의회(DC)는 홍콩 입법회와는 다르다. 홍콩 구의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교통, 환경, 거주 환경과 같이 생계와 관련하여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수개월 간의 ‘반체제 반향’으로 인해 2015년 선거때 47%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71%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고, 투표 결과 또한 상당히 상이하게 나타났다고 전했다.

“범민주당이 선거에 압승하여 득의만만하자 유권자들 전반에 걸쳐 명백하게 불만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2015년 이후 이번 선거전까지는 건제파가 지방의회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친중 정당인 민주건항 협진연맹(민건령, DAB)은 기존 119석에서 줄어든 21석을 얻는데 그쳤다.

 

홍콩의 시민 불복종 운동 또는 미국의 색깔 혁명 시도?

이제 민주파는 홍콩행정장관을 선출을 담당하는 선거위원회에서 중요한 대표성을 띄게 된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식 폭력, 공공 기물 파손(반달리즘)과 혼돈 대신에 비교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에 중국을 와해하려는 워싱턴의 양당 강경파들의 분노를 감안했는지 여부는 향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도시 거주민 대부분은 과거에 벌어졌던 폭력적인 상황에 명백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홍콩을 와해 및 약화시키려는 (내부의 또는 외부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면서 홍콩 도시는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주에 미국을 “세계 불안정의 가장 큰 근원”이라 일컬으며 “미국 정치인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세계적으로 중국을 모함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대대적으로 일방주의와 보호주의에 관여하면서 다자주의와 다자 무역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로섬 게임을 이어간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중국과 미국 간의 협력과 공영만이 올바른 길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패권주의적 목적을 위해 다른 국가에 대한 우세를 추구하고 상호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미국의 운영 방식이 아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지방 선거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번 구의원 선거는 현재는 철회되었으나 도시의 불안을 촉발시켰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이후로 홍콩특별행정자치구에서 처음 시행된 여론의 결과입니다.”

“지난 5개월 이상 동안 폭도들은 외부(미국)세력과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강화하여 사회 및 정치적 대립, 사회적 정서 내 균열을 일으키고 경제와 민생에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수개월간 이어진 사회적인 동요는 선거 과정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다. 일부 폭도는 선거 당일에도 애국적인 후보를 교란했습니다.”

“오늘날 홍콩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전히 폭력 및 혼란의 종식과 질서의 회복입니다.”.

신화통신은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인민일보 역시 투표율이 높았고, 개표 작업을 완료했으며, 의원 사무실 100곳이 파손되었다는 사실을 약간 더 언급했을 뿐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영자신문 차이나데일리는 야당이 승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뻔뻔스럽게 무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도시 주민들은 몇 달 동안 CIA에 의한 폭력, 공공 기물 파손, 혼돈 속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현재의 상대적 평온함이 회복되고 지속된다면 미국이 새로이 중국 내정에 간섭하기 이전의 휴지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보여준 무법천지의 배경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사회악이다. 그들의 어두운 세력은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변화를 꺼리는 마음에 의해 홍콩 시민들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Stephen Lendman(스티븐 렌드먼)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유 연구자로서 글로벌리서치의 정기기고자이다.

월, 2019/12/3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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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복지국가는 국민의 행복증진을 목적으로 하며, 복지국가의 성숙도가 높을수록 국민의 행복 수준 또한 높다고 여겨진다. 유엔의 「세계행복보고서 2021」에 따르면, 핀란드(1위), 아이슬란드(2위), 덴마크(3위), 스웨덴(6위), 노르웨이(8위) 등 복지국가의 모습을 가장 잘 갖추었다는 나라들이 행복순위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다.[1] 이러한 주장은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쉽다. 하지만 여기에는 복지국가의 정착에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는 중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복지국가 5.0을 디자인하기에 앞서 복지국가와 행복 사이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부정적/긍정적 감정과 행복

우리나라 표준국어대사전은 행복을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어의 happiness는 ‘기쁨이나 만족감을 느끼는 상태’를 의미한다. 불어의 bonheur는 “인간이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얻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충족시키고 다양한 열망을 완전히 달성하며 개성들의 조화로운 발전에 있어서 균형을 찾았을 때, 인간이 정신차원에서 일반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사전적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행복이란 “원하는 바을 얻었을 때 도달하게 되는 긍정적인 감정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감정들 중에 기본감정(primary emotion)이란 범주가 있다. 연구자마다 다소 다르지만, 기본감정은 대략 6~8개의 감정들로 구성된다. 플루치크(Plutchik)의 8감정(기쁨, 슬픔, 두려움, 분노, 기대, 놀람, 신뢰, 증오)이, 희로애락애오욕(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 욕심)이라는 칠정(七情)이 대표적이다.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수백 가지의 감정은 바로 기본감정에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기쁨이란 기본감정에서 감정의 정도가 낮으면 평안 높으면 황홀이 된다. 그리고 2개의 기본감정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감정이 만들어진다. 기쁨과 신뢰 사이에서 사랑이, 두려움과 놀라움 사이에서 경외라는 감정이 나온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연구들은 행복이란 감정을 기본감정으로 여기지 않고, 둘 이상의 기본감정을 포함하는 집합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위 사전적 규정에 따르면 행복은 최소한 기쁨(joy), 만족(satisfaction), 즐거움(amusement)이라는 3가지의 기본감정을 아우르는 분류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기뻐도 행복한 것이고 만족해도 행복한 것이며 즐거워도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욕망이나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생기는 기쁨, 만족, 즐거움만을 행복으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다면, 슬픔∙두려움∙고통 등이 없을 때 갖게 되는 감정은 행복이라 부를 수 없을까?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도 행복이라 여긴다. 따라서, 행복을 규정할 때 슬픔∙두려움∙고통 등의 부정적 감정과 함께 동시에 기쁨∙만족∙즐거움 등의 긍정적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조합으로 구성해보면, 1) 슬픔∙두려움∙고통이 있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없는 상태, 2) 슬픔∙두려움∙고통이 없고, 기쁨∙만족∙즐거움도 없는 상태, 3) 슬픔∙두려움∙고통이 없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상태 등 총 3가지가 나온다 (그림1 참고).

그림. 동일 사안에서의 행복과 불행의 감정 범위

 

행복의 2가지 유형: ‘0의 행복’, ‘+의 행복’

동시에 긍정-부정의 감정을 스펙트럼으로 보는 것 또한 행복의 의미 구성에 중요하다. 현재의 나의 감정은 최대의 부정상태에서 최대의 긍정상태까지 연속되는 스펙트럼 중 어딘가에 위치한다. 그런데 문제는 긍정-부정의 스펙트럼의 중간에 0의 영역이 있다는 점이다. 즉 긍정도 아니고 부정도 아닌 상태가 있다. 원래 건강했던 사람의 다리골절을 예로 들어보자. 어느 날 자동차 사고로 다리가 부러졌다면 부정(-)의 상태가 되고, 수술과 통증치료를 잘 마치게 되면 고통이 없는 (0)의 상태가 되며, 물리치료, 운동치료 등의 재활을 잘 해서 다시 운동도 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면 원래의 긍정의 상태인 (+)상태가 된다.

이제 2가지의 기준을 동시에 적용하여 종합적으로 행복을 규정해 보자. 우선, 하나의 사안과 관련해 아픔∙걱정∙고통 등이 있다면, 동시에 기쁨∙만족∙즐거움이 있을 수는 없다. 다리골절은 고통이지 기쁨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슬픔∙걱정∙고통 등이 있다면 기쁨∙만족∙즐거움이 없는 상태가 되는데, 이는 정신적으로 부정적인 (-)상태이며, 소위 말하는 불행이라 할 수 있다. 불행을 나타내는 불어의 malheur라는 용어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함을 어둡게 하고 그것을 정신적인 비참함과 절망에 빠뜨리는 고통의 상태”라고 사전적으로 규정되는데, 바로 이런 상태이다.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해당 슬픔, 걱정, 고통을 없애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를 없앤다고 해서 곧바로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긍정적인 정신상태가 되지는 않는다. 단지 부정적인 정신상태로부터 해방되었을 뿐이다. 이 상태가 바로 슬픔∙걱정∙고통도 없고 기쁨∙만족∙즐거움도 없는 (0)의 상태이다. 나는 이런 상태를 ‘0의 행복’이라 부른다. 이 유형의 행복은 주로 편안함, 안정감, 평화로움 등의 감정이 지배적이다.

(0)의 상태에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더 해야 한다. 앞의 예를 다시 들자면, 고통이 없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재활과정을 거쳐 능동적인 활동이 가능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운동이나 여가생활 등의 신체적 활동을 해야 비로소 건강이 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슬픔∙걱정∙고통은 없고 기쁨∙만족∙즐거움이 있는 상태를 ‘+의 행복’이라 부른다. 요컨대, 당장의 슬픔, 걱정, 고통 등을 없애거나 사전에 이런 부정적 감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함으로써 이르게 되는 슬픔, 걱정, 고통이 없는 상태가 ‘0의 행복’이고, 여기에 더 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 기쁨∙만족∙즐거움을 얻는 상태가 ‘+의 행복’이다.

 

현재의 복지국가의 목표는 주로 ‘0의 행복’의 실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0의 행복’과 ‘+의 행복’을 구분하는 것은 복지국가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함이다. 복지국가의 정책들 중에 상당 부분은 ‘0의 행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안되었다. 복지국가의 핵심적인 정책인 사회보장정책은 눈앞에 나타난 질병, 실업, 육아, 요양, 장애, 주거, 소득부족 등의 사회적 위험, 즉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 결핍됨으로써 발생하는 고통을 벗어나거나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들이다. 건강보험은 아팠을 때, 국민연금은 노후시기의 소득 부족을 대비하기 위해, 고용보험은 실업에 따른 소득 결핍을 위한 것들이다. 소득보장 관련 정책들은 소득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거나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복지국가는 ‘+의 행복’을 직접적으로 제공하기보다는 주로 그것의 토대를 마련해준다. 우선, 사회구성원의 역량(capability)를 키우는 데 초점을 둔다. 유럽 복지국가들은 19세기부터 ‘교육국가’라고 부를 정로도 공교육의 제공을 제일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유럽 복지선진국은 대학교까지 공교육체제를 갖추고 있어 진입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며 학비걱정 없이 역량을 쌓을 수 있다. 또한, 직업고등학교도 잘 발달되어 있으며 이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높다. 최근에는 직업재교육체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으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에 대학교 및 대학원 진학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사회구성원은 ‘+의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제도와 관행 그리고 암묵적 규칙 등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고 노력과정이 더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는 장치들을 깔아주는 것이 ‘+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의 두 번째 방점이다. 요컨대,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원하는 ‘+의 행복’에 필요한 조건들을 제도적으로 구축하는데 힘을 쏟는다.

 

‘+의 행복’을 위한 복지국가의 노력들

노동을 통한 사회참여는 일상의 1/3~1/4를 차지하므로 ‘+행복’의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이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할 수 있고 그런 직업이 차별 없이 공정한 평가를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자신의 직업선택이 잘못 되었을 때, 취업서비스, 직업재교육, 실업시기의 소득보장 등을 통해 자신에게 맞는 직업으로 옮겨갈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 구축에 있어 매우 앞서 있다. 그 결과 국민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다. 특히 복지국가 4.0에서 가장 앞선 북유럽 국가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높으며 스웨덴의 경우에는 2019년 기준으로 73.4%에 이른다.[2]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여유시간의 보장은 ‘+의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주요 조건이다. ‘+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한다. 직장에서 일을 하는 시간이 길수록 다른 곳에서의 행복을 느끼기 위한 활동을 할 여지는 줄어든다. 물론 근래 유럽에서 나타나는 노동시간단축은 일자리를 나누기 위한 목적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축된 노동시간을 자신의 역량 개발이나 여행이나 가족과의 시간을 보내는 등에 사용함으로써 ‘+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은 지방자치제도의 완성도를 높여 국가의 주요 사무들이 주민들의 ‘+의 행복’을 실현하는데 공헌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지방정부가 사회서비스에 대한 규제, 관리, 재정 모두에 대해 책임과 자율권을 가지고 있다. 시민사회 출신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지방정부의 주요 요직에 자리잡음으로써, 그들이 주민들과 맺은 네트워크가 주민들의 직간접적인 참여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반은 주민들이 자신들의 ‘0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을 직접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지역주민의 일원으로서 지역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위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구조는 사회서비스의 영역을 넘어 다른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 복지선진국이 보여주는 정책상의 특징 중 하나는 동행서비스를 적극적으로 도입∙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행서비스는 사회구성원이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에 부족한 요소들을 보조하는 인원이 동행하면서 채워주는 것이다. 장애인의 경우 직업교육이나 직업생활을 할 때 동행인인 함께 생활하면서 활동에 도움을 제공한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일환으로 각각의 구직자에게 동행인을 붙여주어 취업계획작성부터 시작해 취업이 될 때까지 현장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준다. 이러한 동행서비스는 각 개인이 삶의 주체가 되어 일상에서 중요한 일들을 스스로 기획하고 결정하며 그것을 추구∙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의 행복’의 실현을 가능하도록 한다.

 

 

복지국가 5.0은 ‘0의 행복’ 보장을 유지하면서 ‘+의 행복’ 보장을 강화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구축된 복지국가 4.0은 ‘0의 행복’과 ‘+의 행복’ 사이에 심각한 불균형의 문제를 안고 있다. 위에서 기술한 ‘+의 행복’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 4.0은 ‘0의 행복’의 보장에 치우쳐 있다. 이런 불균형은 복지국가 4.0이 주로 보장하는 행복과 국민이 실제로 요구하는 행복 사이에 미스매치가 낳고 있으며, 이는 결국 복지국가 5.0으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압력 중 하나로 작동하고 있다.

유럽의 복지선진국은 ‘0의 행복’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와 프로그램을 이미 촘촘하게 갖추고 있다. 국민의 대다수는 이미 형성된 슬픔, 걱정, 고통에 대한 방지책으로 인해 편안함과 안정감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즉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구축된 제도와 프로그램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주는 효능감이 낮아지고 있다. 따라서 ‘0의 행복’의 강화를 위한 요구는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다. 다만 ‘0의 행복’을 지원하는 제도들을 축소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할 뿐이다.

반면, 시간이 지날수록 국민들의 ‘+의 행복’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져가고 있는데 이를 충족시킴에 있어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당장의 실업률의 문제로 인해, 정부는 취업 자체에 초점을 맞추느라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려는 줄어들고 있다. 비록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즐거움을 주는 일을 제공하고자 노력은 하지만 충분치가 않은 상황이며, 특히 새롭게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청년층의 불만은 커져가고 있다. 경제활동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참여 요구는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단순히 취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생산을 주도적으로 관장하려 하지만 그를 위한 토대가 별달리 구축되어 있지 않다. 현재 도입된 노동이사제는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운영권 내지는 결정권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나마 조합원의 주체성을 보장하는 협동조합이 활성화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복지국가 5.0으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위해,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은 ‘+의 행복’의 증진을 위한 정책들을 새롭게 도입하고 강화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0이 행복’에 대한 인식 없이 ‘+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자리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 또는 임금이 높은 일자리를 원한다. 타인과의 비교 속에서 항상 보다 높은 자리 또는 높은 위상을 가지려 한다. 주거의 안정성보다는 자기의 집을 사려는 데 보다 더 큰 열의를 쏟아 붓는다. 적당한 소득보다는 자기가 벌어들일 수 있는 최고의 소득수준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맥락에서 ‘0의 행복’에 초점을 맞춘 복지국가는 국민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게 된다. 결국, 행복에 대한 우리나라 국민의 이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을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으로 위치 지우는 데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 행복’은 ‘0의 행복’을 보장하는 제도들을 조건으로 달성 가능한 것인데, 우리나라는 토대가 없는 사상누각을 꿈꾸고 있다.

 

[1] Helliwell, John F., Richard Layard, Jeffrey Sachs, and Jan-Emmanuel De Neve, eds., World Happiness Report 2021, New York: Sustainable Development Solutions Network, 2021, p.18.

[2]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2KAA301_OECD&conn_path=I3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9/0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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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요 위협국가(중국과 이란)들이 새로운 실크로드라는 명분으로 점차 가까워지면서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21세기형 경제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의 배후세력(deep state)들은 이를 못마땅히 바라보고 있다.

이란 외무부의 대변인 Mousavi는 이란과 중국간의 포괄적 (전략)파트너십을 진행하는 공개적인 로드맵에 대해서 비난을 일삼은 각종의 거짓말(루머)에 대해서 입장을 분명히 밝혔고, 곧바로 이란 외무부의 공식 입장을 대통령 비서실장인 Mahmoud Vezi가 다음과 같이 재확인되었다.

“이란이 주변국가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파괴하려는 공공연한 거짓선전이 시작되었다”. 그는 추가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추가하였다.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단위에서 관계를 확대하고자 하는 이번의 로드맵에 곧 서명이 이루어질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이란은 더욱 많은 국가들과 관계를 넓혀갈 것이다.”

대략적으로 상기의 발언들은 이미 잘 알려진 이란과 중국의 포괄적 파트너십에 대한 항간의 기사들을 확인한 것이지만, 이것을 군사적 동맹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예단하는 염려에 미리 일침을 가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과 중국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2016년 시진핑 주석이 테헤란을 방문한 당시에 공식적으로 체결된 것으로 20개 사항에 달하는 많은 지침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중 다음의 두 가지가 특별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7항은 유라시아를 통합하는 새로운 실크로드에 대한 파트너십의 범위를 규정하고 있다.

“이란 측은 중국이 주도하는 실크로드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양실크로드를 환영한다. 이러한 방향의 프로젝트를 함께 진흥하는 것과 산업 및 광업의 역량을 강화하는 투자의 건에 대한 양해각서와 관련 문건들에 서명함과 동시에 이와 관련된 역량과 혜택 그리고 기회를 기대하면서, 양국은 수송과 철도, 항만과 에너지, 상업과 서비스 분야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하여 상호 간의 협력과 투자를 확대해 나간다.

제10항은 AIIB에 이란이 회원국으로 참여하는 것에 관련된 내용이다.

“중국은 이란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발기회원국가로 참여하는 것에 감사(평가)한다. 양국은 이를 통하여 아시아의 진보와 번영을 향한 다양한 분야에 협력을 강화하고 함께 노력할 것이다.”

상기의 양해각서가 담고 있는 뜻은 무엇일까?

상기의 양자간 포괄적 파트너십의 핵심은, 이미 지난 해까지 잘 알려진 대로, 중국이 이란의 에너지와 사회간접시설에 향후 25년간 4000억불의 투자계획이다. 이중에는 중국의 첨예한 국가이익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란에서 중국으로) 석유와 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과정에 위험이 잠재된 말레카 해협을 통과하지 않고, 시장평균가격에서 18% 인하된 가격으로, 달러가 아닌 중국 위안화 또는 여러 통화(basket)를 혼용하여 지급하는 조건을 담고 있다.

북경당국은 주로 AIIB를 통하여 2280억불을 이란의 사회간접시설에 투자할 것이며, 대부분의 투자가 2025년까지 이루어질 것이다. 이중에는 에너지산업의 혁신에 긴급히 필요한 생산시설의 건설과 Tehran과 Mashhad를 연결하는 전철화 사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Tehran-Qom-Isfahan을 고속철도로 연결하며 이를 추후 Tabriz까지 연장할 계획인데, Tabriz는 석유와 가스 및 석유화학공업의 거점지역이자 Tabriz-Ankara 간의 가스공급 라인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이는 유라시아의 핵심통로인 셈이다. 이란을 관통하는 고속철도는 중국신장의 Urumqi에서 출발하여 4개의 칸국들 (Kazakhstan, Kyrgyzstan, Uzbekistan and Turkmenistan)을 통과하며, 곧 이어서 서아시아 지역인 이라크와 터키를 유럽으로 연결한다. 이는 역사적인 과거의 실크로드를 현대적 기술로 재현하는 것이며, 동쪽과 서쪽의 심장을 연결하던 당시의 무역용어인 ‘페르시아’를 상기시킨다.

이란과 중국 및 러시아 간의 공해(空海)군사적 협력에 관한 사항은 상기의 요인들이 밝힌 것처럼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 Moosavi 대변인은 트위터를 통해서 이란이 중국에게 섬을 양도한다거나 군인들이 이란에 상주한다는 것에 합의한 바는 없다고 확인하면서 이에 대한 소문은 거짓이라고 밝혔다.

동시에 이란 내에 중국인민해방군의 주둔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하였다는 소문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재차 확인하였다.

지난 주말, 외무부 장관인 Zarif는 이란과 중국은 ‘신의와 확신’으로 협상을 진행하여 왔으며, 합의의 내용에는 아무런 비밀사항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란과 중국 및 러시아는 유라시아 통합의 주요한 삼국거점으로 유라시아 안보에 대한 군사적 협력에 대하여 다음 달부터 시작할 것이며 이의 결정에 따른 긴밀한 상호협력은 11월까지 이루어지도록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지정학/지경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열쇠는 미국의 무자비한 대이란 제재이며 더구나 이를 무기로 삼아 이란과 중국 간의 협상에 대한 광범한 개입여부이다. 이미 미국이 개입한 여러 내용들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들이다.

이란과 중국 간의 전략적 파트너십은 아직 중국이 추구하는 예외주의라는 명목으로 취소가 가능한 도상그림 수준이며,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다양한 범위에서 서로 윈-윈을 추구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희망을 결집시킨 기획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국정부의 요인이자 외교부장인 Wang Yi가 키진저 박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미중 싱크탱크 모임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 것은 매우 암시적이다.

“최근 몇 년간 형성된 흐름 중에 한가지 잘못된 견해는 중국굴기의 경로가 서구의 체제와 경로에 대한 타격과 위협이라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고 우리는 이에 동의할 수도 없다. 침략과 협박은 중국 5천년 역사의 유전인자(gene)에는 없다. 중국은 타국의 방식을 따라 하지도 않지만 역으로 중국의 방식을 타국에게 강요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게 우리가 하는 것을 모방하라고 결코 요구하지 않는다. 2500년 전(공자의 시대)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모든 존재들은 서로에게 상처주지 않고도 화합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으며, 서로가 간섭하지 않고 양립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을 추구해 갈 수 있다’는 점을 가르쳐 왔다.”

 

관련기사 <한겨레 : 7월 13일자 보도 – 중국과 이란, 포괄적 동반자 협정 준비 중 >

Pepe Escobar is a frequent contributor to Global Research.

중국과 이란이 기간산업에 대한 막대한 자금 투자를 대가로 값싸게 원유를 공급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포괄적 협력에 관한 협정을 곧 체결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핵 개발을 이유로 이란을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는 미국의 반발이 거셀 것으로 보여, 미-중 갈등이 더욱 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12일 <뉴욕 타임스>의 보도를 종합하면, 중국은 향후 25년 동안 이란의 금융, 통신, 항만, 철도를 비롯한 각 분야에 걸쳐 4천억달러(480조원) 규모의 투자를 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중국 쪽은 대폭 할인된 값에 안정적으로 이란 원유를 공급받게 된다. 신문은 “이런 내용을 담은 18쪽 분량의 ‘중국-이란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 초안이 이미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며 “조만간 이란 의회에 제출돼 비준 절차를 거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협정문 초안에 언급된 약 100건에 이르는 중국-이란 합작사업 대부분이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구상에 포함된 것”이라며 공항·고속철도·지하철 등 교통분야 투자와 함께 이란 서북부 마쿠, 걸프 연안 아바단 지역과 케슘 등지에 자유무역지대가 건설되고, 이란의 5세대(5G) 이동통신 사업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도 중국이 맡기로 했다고 전했다.

대테러전과 마약거래·인신매매 등 다국적 범죄에 대한 대처를 명분으로 군사·안보 분야 협력도 대폭 강화된다. 또 양국군 합동군사훈련과 무기류 공동 연구·개발, 정보 공유 등도 추진된다. 일부에선 중국이 투자시설 보호를 명분으로 전략적 요충인 이란에 자국군을 주둔시킬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강대국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원칙으로 삼아온 이란이 중국과 전략적으로 손을 잡은 것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압박과 봉쇄로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탓으로 보인다. 특히 이란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원유산업은 미국의 제재로 수출길이 막힌데다, 시설 낙후로 개·보수가 절실한 상황이다. 실제 이란의 유전과 정유시설을 포함한 원유산업 기반시설 현대화에만 최대 1500억 달러가 필요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중국 쪽도 이란과 협력을 강화해 ‘중국-파키스탄-이란’으로 이어지는 3각 체제를 형성해 미국-인도의 영향력에 맞설 수 있다. 이란이 시아파 종주국이란 점에서 ‘이란-이라크-시리아’로 이어지는 ‘시아파 벨트’를 통해 중동 일대에서 미국과 맞서는 구도를 이룰 수도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기존 중동의 전략균형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신문은 전문가의 말을 따 “이란과 중국의 이번 협정은 단순히 상호 이익을 확대하기 위한 게 아니라, 미국과 맞서는 데도 필요할 일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협정이 체결되면 11월 대선을 앞둔 트럼프 행정부로선 두고만 볼 수 없는 상황이라, 미-중 갈등의 추가 악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 국무부 쪽은 <뉴욕 타임스>에 “중국 업체가 이란과 제재 가능한 거래를 지속하도록 허용·지원함으로써 중국 정부는 스스로 주장해온 안정과 평화 촉진이란 국가적 목표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며 “세계 최대 테러지원국인 이란을 지원하는 중국 업체에 지속적으로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Asia Times via Global Research on 2020-07-12.

Pepe Escobar

브라질 출신 언론인으로 아시아 타임즈와 Sputnik에 기고하며 러시아의 RT 그리고 이란의 국영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고 있다

수, 2020/07/2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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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의 칼럼은 NYT에 실린 내용으로 기고자는 현재의 위기에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구제지원을 선별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른백년은 이런 관점에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다만 생산적인 논쟁을 위하여 게재를 결정했다.

우리는 지난 IMF 시기와는 달리하여 은행과 거대 기업에 지원을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대신, 수요자인 시민들과 중소기업자들에게 필요한 만큼 무제한적으로 직접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거래은행은 해당산업의 지원과 존폐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정부는 이번 위기를 미래의 일상적 혁신을 위해 대규모 산업구조조정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요에 따라 경제에 미치는 파장이 큰 기업과 은행의 파산에 대응하면서, 정부가 선택적으로 이들을 공기업으로 전환하되 경제가 정상화된 이후, 시장에 재매각을 검토해야 한다.


미국의 경제는 수직으로 추락하고 있으며, 수천만 명이 실직을 당하고, 셀 수 없이 많은 기업들이 부도의 위기를 맞고 있다. 연방의회는 위기의 확산을 차단하려고 이미 3조 달러의 지원을 승인하였고, 추가의 금액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반면에 신속하고 무제한적으로 이루어진 결정에 대하여 다른 정치적인 견해들이 분노와 함께 돌출하기 시작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인들과 언론매체 그리고 일반시민 사이에 잠재적인 불황을 방지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수혜자들이 과연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여부를 밝히는 것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히 좌파적 정치인들은 거대기업들이 연방정부의 지원혜택을 받거나 연방준비제도가 공급하는 초저금리의 신용공여를 받는다는 것에 분노를 표시하고 있다. 반면에 우파에 속하는 측은 연방행정부가 주정부나 지방정부를 지원하거나, 실업자들을 돕기 위해 고용보험을 확대하는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여론매체들은 스테이크하우스 체인이나 사설학원같이 자격미달인 조직들에게 지원금이 투입되는 것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수조 달러에 달하는 연방지원금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는 조직이 누구인지 결정하는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여기엔 자금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오는 제로-섬 게임의 위험이 존재한다. 이는 위기가 종결되기 이전에 곤궁에 빠진 개인과 기업 그리고 공조직에 대한 연방정부의 대응수단을 제한하고 지원을 중단시킬 잠재성을 지닌다.

“보수적인 견해를 지닌 친구들은 주정부나 지방도시는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현재 해밀톤 전략연구소의 파트너를 일하고 있는 Tony Fratto는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적인 인사들은 민간기업들에게 도움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자유주의자들은 누구에게도 지원을 제공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이들 각자의 견해는 나름대로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고통의 결과물들이라고 덧붙였다.

2008년 세계적 규모의 금융위기와 후유증을 겪은 지금은 물론 보다 합리적인 주장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이 매우 긴급한 사항이다.

지난 위기 과정에, 보수주의자들은 감당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택구매자금을 담보조건으로 융자해준 사실을 비난한다. 당시의 은행들은 거대한 ‘모랄-해저드’라는 문제를 동반하면서 금융조직들이 부동산 저당의 거품에 자금을 공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결과에 대해 전액의 구제지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진행중인 Covid-19에 대하여 같은 내용으로 비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당시 주택버블과 금융위기를 야기했던 금융회사들이 구제지원을 받은 것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이번의 사태는 경우가 다르다”고 자유 루스벨트 재단의 연구원인 Mike Konczal은 주장한다.

금융위기 상황과 확실하게 다른 것은 기업들이 코로나를 야기시킨 장본인들이 아니라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론분야와 금융분야에 종사하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이 이를 묵살하고 있는데 이들은 과거에 구제를 받았던 기업들이, 지난 수 년간 바이-백을 통하여 주주들에게 배당을 높이는 행동을 보여 왔다며, 이제 다시 정부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는데 분노를 터트린다.

이런 비판에 앞장서온 Oaktree Capital의 Howard Marks는 최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비도덕인 행위를 한 기업을 정부가 보호해 준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면, 이는 분명히 ‘모랄-해저드’에 해당한다. 이들 조직과 관련 투자자들은 고통에서 보호를 받겠지만 이는 아주 나쁜 사례를 남기는 것이다.”

수많은 기업들, 특히 부채가 많아 충격에 취약한 조직들이 우선적으로 파산의 위기에 몰리겠지만, 동시에 현재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이런 충격에는 어떤 기업조직도 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연방준비제도가 기업채권에 자금을 투입하지 않으면, 많은 기업조직들이 자신의 실책 때문이 아니라 단지 순간의 자금을 융통하지 못해서 파산에 이를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파산은 부실기업을 주주로부터 분리시켜 신용제공자에게 되돌려주는 효율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같은 충격에 대해 정부가 온전히 방관으로 일관하면 파산이 밀물처럼 몰려오고, 결과적으로 일하는 미국시민들과 경제전반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경제가 좋은 호시절에도 파산의 정리과정에서 신용제공자(채권은행)와 노동조합 또는 노동계약자들 간에 협상을 통하여 퇴직보상이 없는 정리해고를 자주 허용하기도 한다. 여러 산업분야를 관통하며 수 천개의 기업들이 상법 제11조의 파산신청에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이로 인해 파산법정의 업무에 과부하가 걸릴 것이고, 구조조정의 기간 동안 조업을 지속하도록 하는 부채정리의 과정이 지연될 것이다. 따라서 많은 우량기업들이 살아남기 보다는 청산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연이은 파산사태는 부채에 시달려온 투자자들이 헐값에 가치있는 자산을 사들일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 될 것이며, 산업이 소수의 거대기업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잘못된 경제관계를 회복하려면 오랜 기간이 소요될 것이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경제상황에서는 파산이 창조적인 파괴의 선순환으로 작동하지만, 지금은 파괴가 거대한 조업중단과 폐업을 야기할 것이다”라고 경제혁신그룹의 책임자로 일하는 John Lettieri는 이야기한다.

비슷한 논리가 연방정부 구제지원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적용되고 있다.

상원의 주류인 공화당 총무인 Mitch McConnell은 지난 4월의 한 인터뷰에서 현금유동성이 부족한 주정부들을 파산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나중에 그런 입장에서 후퇴하기는 했지만, 그와 공화당 동료들은 민주당 소속의 주정부들이, 한편에서는 대규모 공공실업연금의 의무를 시행하면서, 연방정부의 구제지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많은 주정부들이, 위기 이전에는 건전한 재무상황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세수가 격감하면서 향후 수년간 재정지출을 심각하게 축소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민간분야가 회복된다 하더라도 경제가 정상화되는 것이 지연될 수 있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대상에 대한 논란의 와중에도, 고용을 유지하는 조건에서 중소기업들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지불보호정책을 서명하는 주정부들의 노력이 진행되어 왔다.

우선적으로 3,500억불의 자금지원 프로그램을 승인하는 연방의회의 결정여부에 있으며, 문제는 상기 금액으로는 중소기업들의 임금지불을 충당하는데 역부족이라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인 자금의 집행으로는 부족하여, 논쟁의 대상이 되는 대규모의 스테이크 체인사업체들뿐만 아니라, 벤처지원 기업들을 포함하여 지원할 가치가 있는 조직들도 희생당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에,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수 만개의 기업들 중에 섞여 일부 불량기업이 구제지원 자금을 받는 것에 분노한다는 사실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며, 사람들이 누가 자격이 있고 누가 없다는 식으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를 잘못 접근하는 것이라고 Lettieri는 말한다.

팬데믹에는 도덕적 기준이 없다. 경제를 회복시키는 조치가 공정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에 의존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이라고 분노하는 것은 상황을 개선시키지 않는다.

 

2020-05-04.

Neil Irwin

뉴욕타임즈 경제칼럼 기고가

수, 2020/05/20-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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