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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 오를 것인가? 내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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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파트, 오를 것인가? 내릴 것인가?

admin | 목, 2019/11/07- 20:35

작년 9.13대책 이후 거래량이 급감하고 일부 랜드마크 단지 위주로 가격도 급락했던 서울 아파트 시장이 올 여름 완연히 기운을 차린 듯한 모양새를 보이자 향후 서울 아파트 시장의 방향성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거의 모든 미디어들과 자칭 타칭의 부동산 전문가, 대부분의 부동산 유튜버들은 지금이 바닥이라며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먼저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동산가격은 인구총량 및 생산가능인구의 변화, 도시화 정도, 산업구조의 변화 등의 요소, 각종 거시경제(금리, 환율, 경제성장률, 1인당 실질구매력, 실업률 등)지표, 수급 등의 요소에 의해 중장기적으로 규정된다. 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 공급(공급량-공급유형과 로케이션 등, 분양방식-원가공개, 후분양제, 청약제도, 실질주택보급율 등)정책, 수요(세제-취득세, 보유세 및 양도세 등)정책, 금융(주택담보대출-LTV 및 DTI- 관리)정책, 공공임대주택 건설 등 주거복지 정책, 개발이익환수장치(개발부담금, 재건축 규제 등)정책 등-도 부동산 가격에 중단기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즉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장,중,단기적으로 허다하며, 경중과 선후가 있지만 지극히 복잡하다.

위에서 열거한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가운데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에 호재는 찾기 어렵다. 인구 등의 장기요인, 성장률 등 거시 지표 등은 향후 서울 아파트 가격을 암울하게 만드는 요소이고, 서울에 신규로 공급되는 아파트 총량도 2024년까지는 충분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도 서울 아파트 가격의 하락을 강하게 유도하는 정책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가격 상승에 친화적인 정책도 아니다.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의 유일한 호재는 사상 최저 수준의 기준금리인데, 이마저도 대출 관리가 엄격하게 되고 있는 점, 기준 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다는 건 경제주체들의 체력이 그만큼 약하다는 점 등을 감안할 때 호재라고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영원히 상승하는 시장은 없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서울 아파트 가격이 올 4월 이후 8월까지 거래량 상승을 동반한 전고점 회복을 보인 끼닭은 무엇일까? 부동산가격 상승을 주구장창 주장하는 미디어, 자칭, 타칭의 부동산 전문가들, 대부분의 부동산 유튜버들의 여론조작과 그에 현혹된 시장참여자들의 가격상승기대감이 주범이 아닐까 싶다. 거의 모든 미디어, 자칭,타칭의 부동산 전문가, 대부분의 부동산 유튜버들은 서울 아파트 공급이 부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다주택자들이 투기목적으로 서울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는 한 서울 아파트 수급이 문제 될리 없다)부족하니 가격이 폭등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화폐개혁을 하면 서울 아파트 가치가 더 올라갈거라고 주장하며, 민간택지 분양가상한제를 하면 신규 아파트 가격이 더 올라갈 거라고 주장하고, 기준금리 인하가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3기 신도시 토지보상이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기승전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론인 셈이다. 견강부회와 곡학아세의 전형이다.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미 서울 아파트 시장은 대세하락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장,중, 단기 요인들이 거의 모두 가격하락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 2014년 가을부터 시작된 서울 아파트 가격 폭등세로 말미암아 강남과 마용성은 고사하고 입지가 떨어지는 지역의 신규 아파트 가격조차 평당 3천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가격 피로도가 극심하다는 점, 가격에 선행하는 지표인 거래량이 작년 8월을 정점으로 확연히 꺾였다는 점(올 8월 이후의 서울 아파트 가격 상승은 거래량이 줄면서 가격이 상승하는 장세인데, 이는 대세하락의 초입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 반대로 서울 아파트 가격이 바닥이었던 2013년 같은 경우는 거래량이 상승하면서 가격이 떨어지는 장이었는데, 이는 대세상승의 초입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등이 그 근거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영원히 상승하는 시장은 없다는 사실, 서울 아파트도 대한민국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지금은 인내심을 갖고 시장을 지켜볼 때지 시장에 뛰어들 때가 아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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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주:

북은 올해 1월 1일 신년사에 이어 1월 23일에는 신년사 관철을 위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연합회의’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 4개항의 <전체 조선민족에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했고, 그 중 4항이 “전민족적 합의에 기초한 평화적인 통일방안을 마련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나가자!”였다.

그래서 이 글은 그 화답의 의미도 있지만, 그런 북의 호소가 아니더라도 한반도에서의 통일문제는 시급한 문제이다. 비정상성의 분단 70여년이라는 그 세월과, 또 그런 상황을 극복해야 될 (역사적) 소임이 촛불정부(촛불정부임을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에게는 분명히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도 이 정부는 ‘평화’ 프레임에만 갇혀 통일의 ‘통’자도 꺼내지 못한다.

그런 만큼, 이 글은 문재인 정부가 다시 궤도지표를 재설정해내기 위한 그런 강제의 역할과 촛불민심의 통일열망을 재구축하기 위한 시론성격으로 구성되었음을 미리 밝혀두고자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는 정부, 시민사회, 해외가 함께하는 통일방안 합의에 작은 촉매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통일은 운동권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던 담론이 지금은 진보든, 보수든 누구나 다 통일을 얘기하는 상황까지 왔다. 그만큼 진화해왔음을 상징하고, 국민적 동의도 확산해왔음이다. 그렇게 통일 단어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않는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문제는 보수는 통일문제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진보는 통일담론을 보다 성숙하게 진전시키는 힘을 상실했고, 이후 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할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미래 삶과 직결된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 통일 문제는 이렇게 다른 양상으로 논쟁의 지점을 양산해내고 있다.

해서 보수에게 이런 질문을 해본다. “당신들은 왜 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궁금하다. 그들이 과연 진정으로 통일할 생각이 있는지? 통일을 다 외치고 있다고 하여 다 같은 통일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정략적이지 않다고 할 보장도 전혀 없다. 억울하다면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시라. 통일을 하자면서 북과 적대관계를 청산할 생각은 전혀 없고, 더 나아가 북의 사회주의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그것이 통일할 의사가 있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없다고 봐야 하는가? 그 질문에 당신들은 분명 대답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섣부른 낙인일지는 모르나, ‘사실상’통일을 원치 않는 그런 정치적DNA를 갖고 있으면서도 국민을 현혹하고, 집권을 위한 표가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정략적 위장을 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그 어찌 그들에게 통일을 기댄다는 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와도 같지 않겠는가. 적어도 그들의 정치적 생리와 체질을 바꾸지 않는 한 그렇다는 말이고, 그 상황에서는 그들의 통일문제는 언제나 정략적일 수밖에도 없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의 ‘통’자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분명한 이유도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들의 길을 봐서도 그러하고[전국적 범위(한반도 전역)에서 자주권을 회복하는 과정이 통일이라 했을 때 사대에 찌 들릴 대로 찌 들리고, 반북·종북·반공소동을 밥 먹듯 일으키는 그런 세력이 과연 통일을 감당해낼 충분한 역량이 있다고 볼 수 없어서 그렇다.], 통일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민족적 관점에서 이행되는 통합과, 외세에 의해 분단된 상태를 정상적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반드시 수반. 즉, 민족적 단합과 단결을 실현하는 민족적 쾌거인데, 이를 보수수구세력들이 정말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겠는가?

단연코 역량은 모자라고, 문제를 풀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이는 백번 양보하여 보수수구세력이 통일운동 본령 상 전민족인 대단합과 단결의 일 주체인 것은 분명 맞지만, 그렇다하더라도 과거의 시각에서 헤어 나오려 하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 통일운동에 있어 ‘진정성’있는 주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런 태생적 한계가 극복되지 않는 한.

바로 그 연장선상에서 그들에 의해 마련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도 진정한 통일방안이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허위’방안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통일부가 통일을 얘기하지 못한다?

불편하지만 UN 가입국 중 유일한 분단국으로는 남(대한민국)과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고, 또 남과 북에는 통일업무를 관장하는 정부부서를 두고 있기도 하다. 남은 통일부라고, 북은 통일전선부(약칭, 통전부)라 부른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망각하는 것이 하나 생겼다. 착시하는 것이 하나있다는 말인데 다름 아닌, 국가가 ‘통일’자가 들어가는 그런 부서를 두고 있으니, 그 어느 정부부처보다도 ‘통일’을 열심히 추진할 것이라고 보는 그런 시각이다.(북도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대한민국의 통일부는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결론적으로 그런 기대와 실재는 같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통일부가 전혀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다는 말인데, 일례로 촛불정부임을 자임하는 지금의 문재인 정부조차도 통일부는 ‘통일’을 얘기하지 못하고, ‘교류·협력’만 말하고 있으니 그렇지 못한 정권하에서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 않겠는가.

그 전제하에 좀 더 구체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예를 들어보자.

그 첫째에 문재인 정부의 국정슬로건에 따른 제한성부분이다. 연동은 통일부의 역할을 제한하고 있다는 말이다. 국정과제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에 갇혀있으니, 통일부가 통일의 ‘통’자를 꺼내기가 여간 버급을 수밖에 없다. 결과도 통일부는 통일부 고유의 역할인 ‘평화적 통일을 진전’시키는, 즉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범국민적인 통일방안이나 활성화 대책 뭐 그런 것을 논의하고 이행시키기보다는 개성공단 재가동,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같은 그런 교류·협력에만 시름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논의의 취지를 그렇게 왜곡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사실 보기에 따라서는 이것도 이 정부-문재인 정부 하에서는 벅찰 수도 있다.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고, (이글을 쓰고 있는)현재까지도 미국은 대북정책 통제장치인 한미워킹그룹을 두고 간섭하고 있어서 그렇다. (‘통일’을 얘기하지 못하는) 그 두 번째 이유가 그렇게 발생한다.

분명한 예도 있다. 제아무리 많이 양보하더라도 통일의 문제가 분단 그 자체는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한 것은 맞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철저하게 민족내부의 역량문제를 그 본질로 하여 풀어나가야 할 그런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이 하나하나 다 간섭한다? 뭔가 정상적이지 않다. 과연 주권국가가 맞나할 정도이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의 3월 13일에 정례브리핑을 한번 들어보자. 그날 그는 “개성공단 기업인 방북, 한미워킹그룹 논의 후 결정”이란다. 그렇게 민족내부의 문제, 그것도 경협과 관련되어 방북하는 것조차도 워킹그룹의 승인이 이뤄져야 방북할 수 있다니 다른 것(사안)들은 더 말해서 뭐하겠는가? 이것이 주권국가 대한민국을 자임하는 현주소다.

참으로 딱하지 않다고 할 수 없고, 지금의 통일부가 이 정도이니 과거의 통일부는 말해봤자 뭐 하겠는가?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대한민국의 통일부는 이렇듯 통일부라는 명칭을 달고는 있지만,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미국의 눈치는 물론이고, 국내 정부부처 중에서도 외교부와 국방부 사이에서 그 뒤치다꺼리나 하는 그런 청소역할과 독자적 존재감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식물부서에 다름 아니다.

그러다보니 과거에는 기껏 한다는 것이 종북논쟁이나 유발시키고, 통일을 하자면서도 사실상은 그 길을 가로막는 반북·반공이념의 전파에 혼신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교류·협력을 얘기하면서도 흡수통합 그 실현을 위해 북을 고립·압살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렇듯 부서의 정체성 훼손은 비일비재했다. 통일부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그렇게 통일부가 스스로 만들어왔던 것이다. (이 정부 하에서는 제발 좀 달라야 할 텐데…)

 

2.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비롯한 역대정부의 통일정책, 과연 그 진정성은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그 어떤 정부도 진정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또한 문재인 정부의 사례를 확인해보면 금방 그 진실이 드러난다. 그리 어렵지 않는 문제이고,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는 말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이미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을 했고, 올해는 김정은 위원장의 답방이 예정되어 있다. 그리고 실제 답방이 이뤄지면 제4차 남북정상회담이 된다는 것은 이미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 회담이 주권국가의 정상회담이라는 성격과, 민족관계로서의 최고위급회담(민족대회합)이라는 그런 측면에서의 성격이 병렬적으로 존재한다면 그런 회담을 북미회담의 종속회담 그런 회담으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독자적으로 남북이 풀어나가야 할 근본문제, 한반도 비핵화문제와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논의뿐만 아니라 분단의 비정상성을 통일의 정상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그런 논의도 함께 병행해야 되는 것이다.

누가 봐도 그것이 정상적이다. 하지만, 분명 쉽지만은 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우려이다. 이유는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보수수구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비핵화문제와 통일문제를 전면화하는 데는 매우 신중하고도 접근 그 자체를 꺼려하고 있어서 그렇다.

특히, 그 연상선상에서 통일문제는 ‘사실상의’ 통일정책이 전무해서도 그렇고, 굳이 있다면 평화정책만 있고, 백번양보 하더라도 남북교류협력정책만 있으니 그 어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현실적으로도 철도와 도로연결사업, 금강산 관광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에만 관심이 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합리적 포장이 신한반도(경제)체제이다.

물론 고충이 있고, 또 그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한반도 평화정착을 확고히 구축해놓고, 통일의 문제를 그 다음 정권에서 시작하려는. 하지만, 그것과 통일담론 그 자체를 아예 봉쇄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논외여서 구체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여기에는 시민사회의 책임도 참으로 크다는 말만은 분명히 남겨놓고자 한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민주주의라는 것이 그런 담론의 공론화과정을 거쳐 성숙해나가고 시민의식으로 정립된다. 그러다보니 그 통과의례에는 시끄러운 것이 정상적이다. 해서 이를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두려할 필요도 없다. 그 과정을 통해 민주주의는 발전되고 성숙해나가니까 말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명명백백하게 정부는 정부대로,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주어진 헌법적 책무방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헌법 제4조에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라고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제4장 제1절 66조 ③항에는 대통령의 의무를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라고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국의 ‘무조건적인’ 눈치 보기와, ‘과도한’ 남남갈등에 대한 우려, 보수수구세력의 공격 등에 대한 두려움 등이 맞물려 통일의 ‘통’자도 꺼내지 못한다? 말로는 정치를 국민중심(촛불민심)에 놓는다하였지만,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고, 정략적이고 외세에 의해 가름하려하다보니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상이 되어버렸다. 아니, 어찌 보면 이 정부가 그것보다 더 무서워하는 것이 민주당정부에로의 정권재창출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정치적)셈법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즉, 민주당정권을 넘어서는 그런 촛불정부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결과가 그러하다는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 정부 하에서도 제대로 된 통일정책은 부활하지 못할 것 같다. 햇빛보기가 다 글렸고, 그 상황과 비례하는 만큼-민주정부 하에서도 그러니 보수정부 하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통일정책은 헌법에만 갇혀있는 그런 ‘사문화’과정과 똑같다. 백번 양보하여 통일의 ‘통’자를 설령 꺼냈다고 하더라도 이는 철저한 정파적 이해관계 반영뿐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역사의 파편들』(주한 미대사를 지낸 그레그 지음; 창비, 2015)이라는 책의 내용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난 정부(보수, 민주정부 둘 다)는 공히 ‘보고 싶은 것만 보는’희망적 사고와 ‘우리가 보다 민주적이고, 잘 산다’는 체제 우월적 사고에 빠져 한쪽에서는(보수정권) 북한붕괴론에 빠지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민주당정권) 교류·협력을 전개해 나가면 북한이 ‘개혁·개방’으로 나올 것이라는 ‘집단사고(groupthink)의 오류’에 매몰된다.

특히, 앞서 강조하였듯이 임기 내내 북한붕괴론에 취해있는 정부 하에서 제대로 된 통일정책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얻으려 한다’라는 뜻의 연목구어(緣木求魚와 전혀 다르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가장 최근의 사례라 할 수 있는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하에서의 사례는 보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2010년(이명박 정권 때) 11월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비밀 외교 전문에 따르면 2009년 7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북한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한미 양국은 (북한 붕괴를) 기다리며 압박을 가해야 한다”고 기록되어있다. 2010년 2월에는 천영우 외교부 2차관이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 대사에게 “북한은 이미 경제적으로 붕괴하고 있고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면 2,3년 내 정치적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한 걸로 나타나 있다.

또한 박근혜 정권 하에서의 사례도, 이 또한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이명박 정권 때보다 못하지 않다. 아니, 거의 신앙적 수준이었다. 여러 증명자료들이 있겠으나 가장 단적인 예가 2013년 12월 21일 국가정보원 송년 모임에서 당시 남재준 국정원장이 “2015년에는 자유 대한민국 체제로 조국이 통일돼 있을 것”이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공교롭게도 2014년 벽두,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터뜨렸고 곧 이어 통일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3.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및 문 대통령의 통일관에 대한 비판적 접근

아시다시피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3단계 통일방안)이다. 이는 1994년 8.15기념사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89.9.11)을 계승 발전시켜 자주, 평화, 민주를 기본원칙으로 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제시되면서 공식화되었다. 이후 역대정부가 이 통일방안을 계승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문재인 정부는 그 어떤 입장 표명도 없다.

해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입장으로는 이 연장선상에 있다할 수 있을 것이고, 다만, 민주당정권을 계승해간다는 측면에서는 화해·번영의 한반도정책이 DJ정부의 3단계 통일방안(남북연합 → 연방제 → 완전통일)과 참여정부의 4단계 통일방안(평화구조 정착단계 → 교류협력 발전단계 → 국가연합 단계 → 통일단계) 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좀 더 디테일하게 본다면 참여정부를 더 많이 계승하려 할 것이라는 짐작정도는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6.15남북 공동선언 2항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를 계승하려 한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의 보수· 민주정부가 포괄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통일방안의 기본골격은 전체적으로 통일을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그런 기조 하에 정립된 것이 분명하다. 평화구조 정착단계와 화해협력단계(혹은, 남북연합단계)를 거처 궁극적으로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의 통일국가를 완성해 나간다는 그런 3단계(혹은, 4단계) 통일과정을 설정하고 있으니 이는 확실해졌다.

그리고 이를 큰 틀에서 보면(넓게 확대해서 보면) 화해협력단계(1단계)→ 남북연합단계(2단계)→1민족1국가 통일국가 완성단계(3단계), 그렇게 설정되어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먼저 화해협력단계는 남북 간의 적대와 불신을 줄이기 위해 상호협력의 장을 열어가는 단계이다. 분야별로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 하면서 남북이 각기 현존하는 두체제와 두 정부를 그대로 유지한 채 분단 상태를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2단계인 남북연합단계는 화해협력단계에서 구축된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이 더욱 활발해지고 제도화되는 단계를 일컫고, 이 단계에서 남북은 상호신뢰를 구축하면서 평화정착과 민족의 동질화를 촉진해 다가가게 설계되어 있다. 한마디로 이 단계에서는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와 정부 하에서 통일지향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통합과정을 관리해 나가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마지막 3단계인 1민족 1국가의 통일국가 완성단계는 남북연합단계에서 제정한 통일헌법에 따라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통일국회를 구성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해 1민족 1국가 1체제 1정부의 통일국가를 완성하는 그런 단계이다.

문제는 과연 이것이 과연 가능한가? 이다.

가장 절대적으로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흡수통합을 그 전제로 하니 절대 남과 북이 합의할 수 없는 그런 통일방안이어서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손 치더라도, 백번 양보하고 선의로 해석하여 민주정부의 통일방안은 좀 긍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건덕지라도 좀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분단체제에서 통일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남과 북이 유엔에 각각 가입해있다는 것에 기초해 국가연합단계를 장기간 설정하는 것을 그 기본전제로 하고 있다 했을 때 이 또한 양국체제론의 변형 그 이상 이하도 아니게 되어 그 심각성이 크다는 것이다.

또한 6.15공동선언을 내오기는 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폐기하는데 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현재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그 방안은 일명 ‘평화공존 논리’로 표장되어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고민이 깊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존재하고 있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남북은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며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 나기로 한 합의(일명, 연방연합제)가 있고, 거기다가 북은 그 합의에 대해 2014년 7월 7일 공화국 정부성명을 통해 남과 북은 “온 겨레가 지지하고 민족의 공동번영을 담보하는 합리적인 통일방안을 지향해나가야 한다”면서 “련방련합제방식의 통일방안을 구체화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까지 했으니 이 어찌 고민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거기다가 분단적폐 청산과 전 국민적인 통일방안 합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촛불정부로서의 지금의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통일정책 형태에는 기간 문재인 정부의 행보와 태도로 봤을 때는 결코 쉽지 않는 딜레마가 놓여있어 더더욱 고민은 깊고 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오직, 평화담론정책에만 그 필이 꽂혀있어 ‘통일’의 ‘통’자도 이제까지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실증의 한 예다.

2019년 신년사에서도 ‘통일’의 ‘통’자 한자도 꺼내지 않았고, 여전히 ‘평화’에만 시선이 고정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평화의 흐름이 되돌릴 수 없는 큰 물결이 될 수 있도록”했을 뿐이다. 1월 10일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경제이야기를 2/3정도 할애하다가 결국 ‘평화’얘기만 했다.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고 평화가 완전히 제도화될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겠습니다. 평화가 곧 경제입니다.”[이와 관련한 비판 글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본인의 <통일뉴스> 기고 글(2018-04-0), “2018 남북정상회담: 못다 쓴 ‘판문점선언’ 내용 채우기” 참조]

더 과거로는 문 대통령께서 2018년 1월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당장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그해 3월 21일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회 회의에서는 “남북이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 피해주지 않고 함께 번영하며 평화롭게 살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도 말했다. 전형적인 평화공존론 인식이다. (이를 백번 양보하여 해석하면 발언의 앞뒤 맥락상 문재인 대통령께서 통일을 반대한 건 분명 아니라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당장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해야 하지만 당장은 평화부터 실현하자”는 정도의 발언이 더 정상적이다고 했을 때 굳이 평화공존론, 양국체제론으로 비칠 수 있는 그런 발언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냐는 그런 측면에서는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상황이 이러함으로 통일방안 논의를 대국민적으로, 또 제4차 정상회담 때 당국자 간 논의를 진행시켜낸다 하더라도 지난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담아낸 ②항보다 좀 더 진일보된 합의문을 내와야 할 텐데, 과연 가능할까? 하는 그런 의문이 있다. 이른바 ‘연방연합(혹은, 연합연방)제로 합의하였다’로 명문화하고, 이를 대국민 설득해내어야 할 텐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그런 문제 말이다.

 

4. 나오며: 민족공동체 통일방안과 평화번영정책에 포박당해 있어서는 그 답이 없다

해서 촉구하고자 한다. 본인이 <다른 백년>, 2019-01-23일자 “2019년 北 신년사 제대로 읽기(2): 남북문제”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대한민국 정부나 정계가 통일을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하고 그저 지금은 평화유지냐 적대냐, (경제)제재냐 (경제)협력이냐 하는 그런 정도의 대립과 갈등만 생각하고 그렇게 날을 지새우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염없이 ‘보내진’ 분단 70여년의 긴 시간과 세월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제는 통일해야 된다고 울부짖는다. 그런 측면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인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든, 민주정부의 3단계(혹은, 4단계)통일방안이든 그 호소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해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통일정부수립과 주한미군과의 관계설정부분도 진지한 성찰이 꼭 필요하다. 즉, 두 관계가 양립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그런 문제가 발생 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는 과거정부가 그러하였듯이 지금의 문재인 정부도 그렇게 마냥 무시하고 대충 얼무버린다면 진지한 통일논의와 통일정책을 펼쳐나가기가 참으로 난망하다 할 수 있다.

물론 쉬운 결론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통일정부수립에 찬성하더라도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또 한미동맹 해체반대와 주한미군철수 반대를 주장하는 그런 보수적 시각을 쉽게 넘어설 수 있느냐?하는 그런 문제가 노정되어 있으니 그 어찌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통일문제의 본령이 외세와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함의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 문제에 대해 정면, 혹은 우회적인 돌파구만은 반드시 열어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유도 분명하다.

그 첫째, 분단이 외세(미국)의 개입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면 그 장본인인 외세의 장벽이 철거되어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정당하다. 둘째이유는 평화협정과 주한미군주둔이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협정은 주한미군 완전철수를 강제하게 되고, 그렇게만 된다면 주한미군 없는 통일은 상상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다만, 이 글에서는 주한미군의 성격변화를 통해 가칭)동북아평화유지군과 같은 형태로 주둔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일각의 논의와 주장은 논외로 한다.)

이렇듯 조국통일의 본령은 외세에 의한 분단과 그 분단으로 인해 발생한 체제, 제도를 (창의적으로) 통합하는 그런 창의적인 문제이다.

이는 일제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 민족적 역량결집이 필요했듯이, 분단 역시 남북해외 전 민족적인 역랑이 총결집하여 민족적 단합과 단결을 내와야 하고, 그 힘으로 전국적인 범위에서 외세를 몰아내어 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워내어야 하는 그런 문제이기에, 1948년 남북연석회의 때와 같은 그런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ver.2의 남북연석회의, 혹은 전민족적 정치대회합과 같은 그런 통전개념의 전선개념이 필요하고, 이는 문재인 정부의 과감한 통일추진정책과 시민사회의 48년 남북연석회의를 계승하겠다는 그런 운동적 의지에 의해서만 돌파 가능하다. 그 중심에 문재인 정부를 때로는 비판, 때로는 견인하는 그런 노숙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그런 한해가 꼭 되게 하자.

 

보론문재인 정부의 제대로 된 중재가가 되기 위해서는?

순항하던 북미관계가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로 그 시계가 다시 ‘마주보고 달리는 열차’와 같은 그런 제로섬 게임이 되어가고 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와 비례해 문재인정부의 역할은 극대화되길 원한다. 이른바 제대로 된 중재자(론)인데, 이에 대한 답이 의외로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평양에서 외신들과 한 기자회견(3월 15일)에서 나왔다. “남한 정부는 중재자(arbiter)가 아닌 플레이어(player)”라는 발언이 그것이다.

정리하면 그 첫째에, 어설픈 중재자 역할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른바 중재자적 관점에서 미국에도 양보를 요청하고, 북에게는 더 큰 양보를 요청해 그렇게 만들어지는 접점, 절충점에 대해 미리 경각심을 내보였다 할 수 있다.

그 둘째에, 그럼 어떻게? 민족공조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그런 플레이어가 되란 말이다. 그리고 그 뜻은 금강산 관광재개나 개성공단 재가동을 미국이 그어놓은 선, 거기서 움츠려들지 말고 그 대북제재의 선을 넘어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요청은 사실 뭐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니다. 뜻있는 법률전문가들, 정치인, 시민사회가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법률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이 선은 대북제재 선과 관계가 없는 것이니, 문재인 정부가 촛불민심을 믿고 용기를 내어 그렇게 계속하여 (동맹국인) 미국의 눈치만 계속 볼 것이 아니라, 과감히 넘으라는 것이다. 민주당 정권만이 아니라면 못 넘을 이유가 하등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 셋째에, 정권의 속성상 한미동맹 그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더라도 한미동맹 관계의 정상화 관점에서 미국을 설득하라는 말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와도 상통한다. 국익이 때로는 동맹의 이익과 상충할 때도 있고, 그럴 때는 제아무리 한미동맹이라 하더라도(엄청 불편하더라도) 국익관점에 서야 함을 안내해내어서 그렇다.

그 넷째에, 현상보다 본질에 입각해 중재해야 함을 의미한다. 즉, 한반도비핵화를 통한 평화체제 구축전략이 벽에 부딪쳤으면, 그 결과이자 본질인 평화를 통한 비핵화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말해 비핵화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지만, 과정이기도 하다면 비핵화는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수단이 되는 그런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해소와 불가침, 군축 등 적대관계 해소를 통해 평화를 불러오고, 또 교류협력을 통한 남북관계 진전이 신뢰를 쌓고, 그렇게 신뢰가 쌓이면 그 신뢰의 힘으로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해나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런 역발상, ‘평화가 비핵화를 추동한다.’ 필요할 때다. 그러면 미국을 역(逆)포위하는 그런 전략도 가능하다. 한반도평화에 동의하는 주변국, 즉 일본을 제외한 중국, 러시아와 평화협력을 강화해 미국을 설득해나가는 것 말이다.

 

통일뉴스, 2019년 3월 21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와 협의하여 일부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

화, 2019/04/0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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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2015년에 진행된 이 인터뷰 내용은 세가지 의미에서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신향촌건설 운동의, 흥미진진하면서도, 시대적 역설이 잘 드러나는, 초기 역사와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당시 장쩌민 주석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배석한 회의에서 원테쥔 선생이 삼농문제를 직보하여, 중국 정부의 주요 정책의제로 받아들여지게 된 장면은 상당히 극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실제 중국 정부가 이를 받아 2005년부터 실행한 ‘신농촌건설’이 여전히 하드웨어적인 인프라 투자, 즉, 도시의 생산과잉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자 ‘발전주의’에 기반한 실천인데 반해서, 그에 앞서 진행된, 신향촌건설 운동은 농민과 청년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문생태주의적인 실천이라는 것은, 당대 중국사회가 삼농문제를 받아들이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 정부의 신농촌건설은, 한국에서는 비판적으로 거론되는, 새마을운동을 상당히 참고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원톄쥔 선생은 삼농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음에도, 막상, 주류 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향촌건설운동은 20여년 가까이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이 글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량슈밍향촌건설 센터는 아직도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이 조직은 아직도, 베이징 교외의 매우 허술하고 영세한 시설속에서, 젊은 이상주의 청년 활동가들의 열정과 몇몇 선도적 민간/국제 기금의 지원으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중국 NGO와 자선단체의 주류를 이루는 관방 혹은 대기업이 지원하는 거대 단체들의 지원을 통한 안정화는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시진핑 정부의 ‘향촌진흥정책’이 보다 소프트웨어적인 관점으로 이행함에 따라서, 여건이 다소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대규모 자본이 투하되는 여러 정책 사업들에 신향촌건설 운동에 속한 풀뿌리 조직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몇몇 기층 지방정부와 협력하는 실험적인 사업들을 제외하고는 제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역으로 지나치게 주류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부 참가자는 운동진영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은 20년에 걸쳐 다양한 배경과 입장을 가진, 수많은 참여자들이 등장하면서, 참가방법도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간난고투를 피할 수 없는, 순수한 민간사회의 운동노선과 사회적 자원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영향력이 큰 주류 대중운동사이에서의 선택에 긴장과 고민을 늦출 수 없는 것은,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중국의 교육과 청년문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국 교육은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매우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동아시아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특히, 이 인터뷰가 진행된 2015년보다 훨씬 심각해진, 2020년 현재, 대졸자들의 취업난, 학벌지상주의와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학력에 의한 계급분화문제 등이 있다. 최근, 급증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우울증, 경쟁지상주의에 기반한 학교 폭력, 매우 이기적이고 원자화된, 명문대학 엘리트들의 행동 양태를 보면, 중국 일선一線도시의 청년들은 한국의 동시대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적으로 한탄하던 암울한 시대의 문턱에 이미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80년대 출생한 대졸자들은, 폭등한 집값 때문에, 졸업직후, 거주하는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했느냐 하지못했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중산층 진입여부가 갈라지게 됐다. 당연히, 90년대 이후 출생자라면, 애초에 자력으로 집을 구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짐에 따라, 결국 부모의 경제 능력이 계층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주로 삼농의 관점으로 제도권 교육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제시 됐는데, 실제로, 중국에서도 고등교육 전단계에서는 소위 ‘대안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현실은 별수 없이, 주류사회에서의 경쟁에 몰입하거나, 유학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다. 원톄쥔 선생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향촌의 자연과 전통문화가 기반이 된, ‘자연교육’ 등을 보다 보편적 해결책의 방향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번째, 원톄쥔 선생이 열망하는, 탈엘리트주의와 대중민주주의 추구,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이 신향촌건설의 사상적 노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젊은 시절, 10여년에 걸친, 그의 하방(상산하향) 경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현대 중국 사회의 격변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경험을 개인적인 비극과 고난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양분으로 삼아, 현실에 기반한 지식과 활동으로 승화한, 몇몇 당대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중요한 경험들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청년지식인들이 성장지상주의에 물든, 중국 주류 엘리트사회의 흐름을 좇지 않고, 신향촌건설 운동에 투신해, 이상을 좇아 분투하는 모습도 여기서 배운 바 적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2017년 중국공산당 19대 보고에서 향촌진흥전략을 추진함과 동시에 ‘일동양애一懂兩愛 (농업을 이해懂하고, 농민과 농촌을 사랑愛하는)’ 인재의 육성을 천명했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국가의 향촌진흥전략을 관철함에 있어서, 농민대중과 협력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일을 우리가 이미 수십년해왔기 때문이다. 향촌건설운동을 통해 길러내고 삼농문제에 이미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이 시기를 맞아서, 생태문명체제개혁의 선봉에 서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낡고 병든 현재의 교육체제안에서 이런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서구 분과학문의 교조주의와 학벌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의사과학적 형식주의가 유지하는 제도권 교육체제는 실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의 산물이고 여전히 겉만 번드르르할 뿐이다 ! 그러니, 향촌진흥의 앞날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1. 청년 자원활동가들이 열어가는 농촌지원하향운동의 시대적 배경

2001년 새로운 세기가 열리면서, 나는 (장쩌민)총서기가 주재하는 삼농문제 좌담회에 참석할 것을 통보받았다. 회의석상에서 총서기에게 직접 삼농문제를 보고했다. 그리고 중앙이 농업정책 방향을 바꿔 삼농정책을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나는 비교적 젊고 지위가 낮은 편이었기에, 더 단도직입적으로 주저없이 발언할 수 있었다. 나는 농촌의 형세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고, 삼농문제가 갈수록 악화되어 간다고 내가 기탄없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중앙의 리더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총서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책임지고 당신이 제기한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하겠소”. 나중에 중앙은 우리가 90년대부터 계속 외롭게 목소리를 높여온 삼농문제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삼농문제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기반이 된 배경이다.

<그림 1> 2004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은 매년 1호 문건에서 삼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내어 놓고 있다.

원래 중국 정부는 90년대초부터 대략 10년간, 서방의 농업정책과 사상을 참고해서 농업문제에 임해왔다. 방향이 다르니, 방침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90년대 농업정책을 비판하면서, “눈에 숫자만 들어오고, 마음속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표현해왔다. 삼농문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여전히 ‘농업’을 일순위로 놓고, ‘농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삼농의 첫자리에는 바로 농민이 와야 한다. 중국이 장기적으로 진정한 사회의 진보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농민조직화이다. 왜냐하면, 농민이야말로 중국의 원주민이고, 중국 인민의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생산, 생활과 자연생태의 결합은 매우 밀접한 것이고, 농민의 문화적 실천은 언제나 일종의 다양성의 원칙을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이야말로 삼농중 첫째자리에 놓이게 된다. 마음속에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근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농민이 지켜온 농업문명을 진흥시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와는 다른 방법이다. 과거에는 농업생산만을 중시했다.

두번째가 농촌이다. 실은 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려면, ‘농촌소멸’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반대해야 한다. 만일 농촌이라는 그릇이 없어지면,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농업경제, 생산 그리고 농민이 문화전승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림 2> 원톄쥔이 편집장으로 일했던 <<중국개혁 (농촌판)>> (2002) 잡지는 신세기 향촌건설운동의 플랫폼과 선전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룰 때, 형세가 안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농의 삼위일체적 지속가능성이 바로 농업의 지속가능성이다.

2001년부터, 중앙은 삼농문제를 주요 의제로 받아들이고 2005년 중국 공산당 16차 전당대회 이래 신농촌건설을 중요한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고, 우리는 이런 기회를 이용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향촌건설을 재개했다. 향촌의 부흥이라고 부를만하다.

“마을(촌락)주의”는 1894년 청일전쟁 패배이후 장지엔張謇이 난통南通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실험지역을 만들고 실천할 때 내놓았던 구호이고 바로 향촌건설의 기본 이념이다. 민국시절 지식인들도 이를 신조로 삼아 1920~30년대에 농촌으로 내려갔다. 이 흐름에는 거대한 국제적 배경도 있다. 영문으로 번역하면 rural reconstruction인데 향촌 혹은 농촌의 재건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나중에 국민당이 대만으로 건너가서 역시 이 개념으로 대만에서 농촌부흥을 꾀하고, 농촌부흥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만들게 된다.

우리는 2001년부터 향촌건설을 재개하면서, 향촌재건, 향촌부흥, 향촌건설 대신, 향촌문명의 부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백년 운동사를 이어받기 위해, 최종적으로 향촌건설이라고 부르게 됐다. 또 민국 시절의 운동과는 차별화를 두기 위해 신향촌건설이라고 불렀다.

<그림 3> 중국개혁 편집장 원톄쥔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상경한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2년).

당시의 대학생 청년 자원활동가들이 농촌지원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1년인데, 바로 중앙이 이미 삼농문제 개념을 받아들였던 그 시점이다. 하지만 각 지역과 부문은 아직 이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반응이 뜨거웠다. 농민문제, 농촌문제와 농업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빌어, 우리는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들과 마주하고 협력할 것을 권했다. 삼농문제를 해결하려면, 삼농에 복무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중국 사회의 인민들이 그 흐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소수의 지식인들만 현실을 비판하고, 소수의 각성된 청년들만이 이에 호응한다면, 이는 소수만이 참여하는 소수의 일에 머물뿐이다. 일단 21세기 초에 전국민이 삼농문제를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낼 때만, 규모를 갖추고 지속가능성을 가진 사회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향촌건설운동이 21세기초에 다시 시작된 배경이다.

2001년 다시 시작된 향촌건설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맥락 혹은 주요한 내용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많은 청년 자원활동가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촌의 조사, 연구, 지원 활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고, 사회적으로 ‘신하방(상산하향)운동’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과정속에서, 키워낸 인재들이 천천히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내, 자신을 단련시키고 스스로 농촌의 우수한 인재로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서구적 모델을 차용하는 대학들은 이런 식으로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

<그림 4> 제1기 중국향촌건설교육, 스태프 (오른쪽: 류라오실劉老石, 중간: 치우졘셩邱建生)들과 농민이 함께 찍은 사진 (2003년 1월, 베이징).

 

2. 청년 지식인의 농촌지원 사명

2001년 신향촌건설 운동이 재개된 이래, 20세기 초반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활동가들은 농민을 움직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는 농민들이 조직화하여 스스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지위를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만, 농민들은 사회계약의 당사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농민조직이 없으면, 의견이 분산돼, 농민 자신의 이익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한편 그 상대방인 사회의 다른 주체들도 수많은 각각의 농민과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 즉,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의미있는 사회적 계약관계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시장경제는 계약이 기초가 되고, 이것을 신용경제라고 한다. 시장경제조건하에서 신용사회를 만들게 되는데, 농민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이것의 성립이 불가능해진다.

<그림 5> 2003년 겨울방학기간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학생 농촌지원조사연구 교육과정 (앞열의 왼쪽 두번째: 류라오실 왼쪽 아홉번째: 치우졘셩, 세번째열 오른쪽 아홉번째: 원톄쥔).

그리하여, 신향촌건설의 주요목표중 하나는, 농촌에 내려가 기층 농민들의 조직화를 돕는 것이었고, 이렇게 생겨난 농민조직들이 당시에 협동조합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은 정부에서 협동조합법을 제정하기 훨씬 전에 이루어졌고, 그 목적은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계약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조직기초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류의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우리는 당연히 농민들을 움직여야 했다.

다시 문제가 생겼다. 누가 농민을 움직일 것인가 ?

1980년대이래, 우리는 지속적으로 대학생들의 농촌방문 활동을 조직해왔다.

<그림 6> 2003년 1월 류라오실이 서남지역의 농촌지원방문단의 간부로서 농촌방문활동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당시 농촌정책수립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내가 소속된 팀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특히 청년학생들을 조직해서 농촌으로 보내고, 농민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농촌의 조사연구를 진행하면서, 현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는, 청년의 열정과 능력을 활용해, 농민을 돕게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크든 작든 농촌의 발전을 촉진하게 하고 싶었다.

80년대이래, 중앙의 농촌정책중 주요한 업무중 하나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지원을 하는 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 상사는, 나중에 내 박사논문을 지도한 두룬셩杜潤生 선생이었는데, 그는 중앙재경업무 영도소조의 일원이었고, 동시에 중앙농촌정책 연구실의 주임이었다. 그는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었는데, 노년에 접어든 혁명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들의 주요한 임무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것이다. 만일 이를 성공시킨다면, 그렇게 청년학생들을 보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업적이다” 그때 두선생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80년대의 농촌정책은 상대적으로 유효했고, 농민들에게 환영 받았다. 그 당시의 1호문건을 지금의 1호문건보다 농민들이 더 좋아했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지식인 청년 학생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서, 현황과 민심을 제대로 살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상황이 바뀌었다. 서구의 모델이 농업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도입됐다. 농민의 권익과 농촌발전문제는 경시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청년학생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겠다는 중앙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21세기를 맞아, 중앙이 다시 삼농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한 이래, 다시, 청년학생들의 하향농촌지원활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어서 국무원영도하에, 이 흐름을 지지하고, 공개 서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청년들의 농촌 지원 활동을 격려했다.

이때, 다시 농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스스로의 협상지위를 제고하며, 사회계약 관계를 안정시키고,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경제사회기초가 되도록 하기 위해, 누가 다시 농민들의 조직화 문제를 도울 것인가 ? 그래서 우리는 다시 대학생들을 훈련시켜 농촌으로 보내고, 80년대 농촌정책부문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삼농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그래서 농민조직화를 위해서 반드시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림 7> 2016년 농촌지원하향, 제8회 여름 캠프.

<계속>

 

2015년 8월에 진행된 인터뷰내용으로, 2020년 동방출판사에서 출간된 <<향촌필기:신청년과 향촌의 생명대화 鄉村筆記:新青年與鄉村的生命對話>>라는 저서에 수록됐다.

 

김유익

금, 2020/11/0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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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이후 역대 정권 서울아파트 시세 변화분석

노무현 정부 상승률 94%, 문재인 정부 상승액 4.5억 1위

강남-비강남 9백만에서 9억원으로 격차 100배 벌어져

유주택자-무주택자 불로소득으로 인한 자산 격차 20억 발생

경실련이 1993년 이후 28년간 서울 아파트 34개단지의 아파트가격 변화를 정권별로 조사한 결과 노무현 정부, 문재인정부에서 가장 많이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실련이 강남4구내 18개 단지, 비강남 16개 단지 총8만여세대의 아파트가격 변화를 조사한 결과이며, 가격조사는 부동산뱅크 및 국민은행 부동산시세 자료를 활용했다. 정권별 증감률은 노무현정부에서 서울 평균 94%로 제일 높고, 상승액은 문재인정부에서 25평 기준 4.5억원으로 가장 많이 상승하였다.

김영삼 정부에서 아파트값은 정권초 25평 기준 1.8억원(평당 727만원)에서 정권말 2.3억원(평당 915만원)으로 5천만원(26%) 상승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정권초 2.3억원에서 정권말 4억원으로 1.7억원(73%) 상승했다. 노무현정부에서는 정권초 4억에서 정권말 7.6억으로 3.7억(94%) 상승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유일하게 정권초 7.6억에서 정권말 6.6억으로 1억(-13%) 하락했다. 박근혜정부에서는 다시 정권초 6.6억에서 8.4억으로 1.8억(27%) 상승했고, 문재인정부에서는 정권초 8.4억에서 3년만에 12.9억으로 4.5억원이 상승, 역대 최고의 상승액을 기록했다.

아파트값이 상승하면서 강남북의 격차도 벌어졌다. 93년 김영삼 정부 정권초에는 강남 아파트값은 1억85백만원이고 비강남 아파트값은 1억76백만원으로 한 채당 차액이 900만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강남권 아파트값이 급등하면서 김대중 정부 정권말 강남북 격차는 2.3억으로 증가했고, 노무현 정부말에는 5.4억으로 벌어졌다. 아파트값이 하락한 이명박 정부에서는 강남북 격차는 정권초 5.4억에서 정권말 4.1억으로 강남북 격차도 줄었다. 하지만 분양가상한제를 폐지한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정권말 6.1억으로 증가했고 문재인정부에서는 3년만에 강남북 격차가 9.2억원까지 벌어졌다. 이는 93년 900만원의 100배로 그만큼 강남북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유주택자와 무주택자의 자산격차도 벌어졌다. 28년간 아파트값은 강남권 기준 평균 1.8억에서 17.2억으로 15.4억이 증가했다. 아파트 한채만 가지고 있는 경우 땀흘려 일하지 않아도 15.4억의 불로소득을 얻은 것이다. 반면 28년간 전월세 무주택자는 전세금 마련에 따른 금융비용과 월세지출 등으로 자산증가는커녕 각각 3.2억, 4.5억원을 부담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유주택자 무주택자의 자산격차도 전세의 경우 18.6억원 월세의 경우 20억원까지 벌어졌다.

이처럼 경실련이 KB 주택가격 동향 아파트 중위가격 변화 분석에 이어 서울 아파트의 28년간 시세조사 결과에서도 문재인정부에서의 아파트값이 3년만에 50% 이상(25평 기준 4.5억) 상승, 역대 정부 최고로 상승했음을 다시 확인했다. 이는 국토부가 발표한 3년 상승률 14.2%와는 크게 차이날 뿐 아니라 정부는 아직까지도 세부내역을 비공개하고 있다. 경실련은 국토부와 한국감정원에 직접 서울아파트값 14% 상승 근거가 되는 아파트명과 적용시세 등 근거를 밝혀줄 것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현실을 반영하지도 못하는 통계를 내세우는 것도 모자라 근거조차 밝히지 못한다면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국토부가 공개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98개월)에서의 아파트값 상승률은 2.7%이고, 문재인정부(36개월) 상승률은 14.2%이다. 연평균으로 비교하면 이전 정부에 비해 문재인 정부의 아파트값이 14배 수준으로 빠르게 상승한 꼴이다. 엉터리 왜곡된 통계는 잘못된 진단과 처방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정부 통계의 세부내역 공개를 통한 검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부동산값 취임 이전 수준으로 낮추겠다”, “부동산 문제 반드시 해결한다”고 한 약속들이 실현되려면 더 이상의 땜질식 정책을 중단하고 부동산시장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이 내려져야 한다. 경실련은 부동산 문제해결을 위한 근본적 대책을 제시하며 이를 하루속히 제도화할 것을 촉구한다.

1. 공공과 민간아파트 모두 분양원가를 상세하게 인터넷에 공개하라
2. 선분양 아파트는 모두 분양가상한제를 시행하라
3. 신도시와 공공택지, 국공유지 등은 민간과 개인에게 팔지말고 토지는 공공이 보유하고 평당500만원대 건물분양 또는 건물임대로 공급하라
4. 시세의 40%대에 불과한 공시지가를 2배 올려라
5. 임대사업자 세금 특혜 모두 없애고 특혜정책 추진했던 관료들을 문책하라
6. 임대사업자 대출을 전액 회수하고 이후 대출을 모두 금지하라
7. 본인이 거주하지 않는 주택에 대한 전세대출 회수하라
8. 투기와 집값 상승 조장하는 개발 확대책 전면재검토하라

문의 :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02-3673-2146)

화, 2020/07/21-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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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20년대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뒷마당’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미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 선언으로 북미 이남의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는 없었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독립과 함께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카메라를 보며 ‘한국식(?)’ 인사를 하는 쿠바의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2018. 07).

쿠바의 독립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셈이다. 1860년대 이미 세계 설탕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며 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주요 교역국이 이제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은행가들은 쿠바의 독립전쟁이 한참이던 19세기 말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탕 밭을 모조리 사들이며, 철, 니켈, 망간 등과 같은 광업 산업까지 매점, 쿠바 경제를 장악해갔다.

이로써 섬의 경제를 독점한 미국에게 이제 스페인을 아메리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기실 쿠바의 독립은 미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미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카리브해 섬의 독립은 이제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독립 직후 제정된 쿠바 헌법에는 이른바 “플랫 수정안”을 추가하며, 이제 미국은 쿠바 공화국을 내정간섭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신식민지의 시대를 열었다.

쿠바 경제를 장악한 미국 자본가들은 섬의 토착 지배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착취경제를 이식해 나갔다. 수출 단일 작물인 설탕 산업은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내의 소수 매판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며 쿠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미르의 지적처럼 신식민지 쿠바에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쿠바의 소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소위 ‘계급적 동맹’을 이룬 경우였다.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쿠바 민족주의는 고조되었으며, 단일 작물 수출경제에 기반을 두는 대형 플랜테이션 경제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계급을 양산하며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도시는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반면에 아바나는 수천의 미국인들과 부유한 쿠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요트 클럽과 같은 폐쇄적인 사교 시설들로 넘쳐났다. 당시 쿠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 수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2/3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고 그마저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 같은 다수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이 1959년 쿠바 혁명이 반제국주의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다. 계급적 요구를 담은 쿠바 혁명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쿠바 민중들을 수탈하는 토착 지배세력과 계급적 동맹을 맺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1959년 혁명은 당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던 미국의 지배와 토착 지배계급의 수탈에 응답한 쿠바인들의 저항이었고 그들의 자주적 선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은 뜨겁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소위 노동계급 중심의 이론에 익숙한 서구 중심의 마르크스적 혁명 공식에 빗대어 비판을 받아왔다. 19세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서유럽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이론이 20세기 쿠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론은 현실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구체적 현실들이 이제는 거꾸로 이론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일갈한 베네수엘라 인류학자 사노하(Sanoja)의 지적은 새겨 볼 만하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심지어 그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럽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면, 약 100년 후 쿠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조건은 유럽의 그것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였고, 피델의 주장처럼 “1959년 혁명은 역사적으로 고착된 쿠바인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소위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끝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동구권 국가들과 동맹을 이루고 있던 쿠바의 미래도 이와 함께 불투명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도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그 정점을 찍기 시작하는 19세기 이후부터 줄곧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이들에게 실천과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 ‘자유’와 ‘시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자본주의 질서는 마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체제라는 공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자유’를 부정하는 불경한 일로 매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쿠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저에 흐르는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예로,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사회가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서 가능했다거나, 국제의료활동은 쿠바 정부의 내정실패와 인권유린 문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 등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과연 쿠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체제일까. 우선 체제의 정치적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쿠바의 독특한 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합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 같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쿠바의 보건정책의 핵심은 무상의료라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지급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혜택받는 상품이 아니며, 모든 쿠바 국민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권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개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동등한 “모두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같은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현재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의료 불평등의 최소화를 추구한 전략으로써 쿠바의 보건의료는 지역사회의학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모델의 주요 목적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책임의식과 참여,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이자 기획자로 주민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보건모델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과 같은 보건 의료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으니, 이 모델이 쿠바 지역사회를 개인이 아닌 “이웃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제로 작용했을지, 혹은 그 역으로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이 같은 의료시스템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자본이었을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쿠바의 지역사회는 여전히 이웃 간의 정이 훈훈했던 과거 우리 시대의 많은 일상과 닮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보건의료정책이 높은 의료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묘책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쿠바의 지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면 어떨까 한다.

화, 2019/10/2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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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브레튼-우드 회의에서 케인즈는 Bancor라는 초국적의 화폐를 사용하는 국제관리기구(int’l clearing house)를 설립을 제안하였는데, Bancor라는 화폐개념은 연구동료인 슈마허 교수와 함께 1940-1952년간에 국제무역과 금융결제의 수단으로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가 대표로 참석한 영국의 제안은 미국의 거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Greenback”은 미국달러 지폐에 대한 별칭이다

이는 미국이 강력한 대국으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선진국가들의 경제력 절반을 차지하는 제1의 채권국가이면서 무역흑자를 가장 크게 내는 나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미국이 제안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설립과 페그PEGG(주요 통화들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평균치를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한 고정환율제도가 도입되었다.

IMF는 국제간 거래를 관리하는 기구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미국은 17%(현재까지도)이상의 지분을 지닌 대주주국가가 되었다.

국가 간의 환율은 금과 연동된 달러에 기반하면서 이는 명시적으로 미국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는 것을 의미하면서, ‘Greenback은 금과 동일하다’는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로써 모든 국가들은 미국달러(The Greenback)를 무역거래와 부채상환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상품을 선적하고 관리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국제무역과 해외투자의 효율은 제고되었고 경제성장의 촉진을 가져 왔다. 국제기축통화로서 달러를 보유한 미국은 국제적 강대국으로 지급 불이행의 염려가 없이 국제자본시장에서 원하는 만큼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정부의 채권은 국제금융자산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는데, 이는 액면가치와 이자율을 미국달러로 상환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달러는 지구에서 가장 안전환 통화로 간주되었다(현재까지도).

만약 중국이 소유하고 있는 1조 달러어치 미국채권을 매각하고자 하면, 미국이 할 일은 채권을 구매하는 나라들에게 지급할 달러를 인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이자율이 오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는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경제에 재앙이 되겠지만, 어찌하든 미국은 채무에서 해방되어 있는 국가인 셈이다. 반면에 중국은 평가절하된 Greenback을 손에 쥐게 되거나, 미국에 대한 채무부담을 효과적으로 줄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에 일본의 엔화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에 미국은 플라자합의라는 명분으로 일본 엔화를 절상시키도록 강압하여 달러로 이루어진 직접투자가치의 33%를 축소시켰다. 미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부채 역시 같은 비율로 줄어들었고, 일본은 그만큼 가난해진 셈이다.

미국은 모든 정권을 통하여 제재대상 국가들에게 기축통화라는 수단을 특권으로 악용하여 왔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대통령인 미국은 자신이 제제의 대상으로 삼은 이란과 거래를 지속하는 유럽의 기업들에게 SWIFT(국제결제창구)와 같은 달러기반의 결제 플랫홈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위협하였다. 이러한 협박은 궁지에 몰린 이슬람공화국(이란)의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유럽 국가들의 사업기회를 잠식하였다.

최근 사례로는 중국인민은행과 홍콩자치행정부에 대한 제재를 둘 수 있다. 홍콩에 대한 중국본토의 국가안전법 확대적용에 대하여 홍콩자치행정부가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사용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축통화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의 달러를 기반으로 설립된 국제기구들(IMF와 세계은행 등)과 금융제도들을 통제하고 국제간의 금융거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더욱이 채무국가들에게 워싱턴 컨센서스(1989년에 영국경제학자인 J. Williamson이 명명했다)의 채무제공조건으로 경제불황에도 재정긴축을 강요하고, 무조건적인 자유무역을 강요하며, 공공자산의 민영화를 강제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시아에서 남아메리카 그라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채무국가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빌린 채무부담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채무국가들은 경제회복을 위하여 재정적자의 운용 또는 재정지출의 확대를 금지하면서 취약한 경제는 승수적으로 더욱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재정수입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현재의 채무를 갚기 위해서 더 많은 채무를 빌려야 하는 “채무의 함정” 순환에 손쉽게 빠져들게 된다 (편집자: 이에 더하여 채무상황은 반드시 평가절상된 달러로 해야만 하는 이중의 불평등이 작동한다).

이렇게 미국이 경제와 금융의 권력과 기축통화국의 특권을 악용하는 것에 대하여 중국의 전직 인민은행장(Zhou Xiaochuan)이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 대신에 IMF의 특별인출권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Zhou은행장의 제안은 미국이 개발국가들의 독자적인 경제개발과 외교정책의 권리에 제재를 가하는 미국의 횡포를 방지하자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IMF와 세계은행의 지분을 17% 이상 소유하면서, 현재의 정책 방향을 수정하는데 필요한 특별조항인 85% 이상의 결의조건을 요구하는데, 이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인출권이 새로운 기축통화의 후보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따라서 중국과 주요 경제권은 함께 협력하여 달러와 미국의 영향아래 있는 IMF 및 세계은행과는 독립된 별도의 새로운 국제통화방식을 설정해야 한다. 새로운 통화의 가치는 협력하는 회원국가들의 가중치평균(페그방식)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회원국가들은 경제의 규모에 따라 무역과 금융의 결제를 위한 신용한도의 할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느 회원국가의 상황이 신용한도를 넘어서는 자금지원이 필요한 경우에,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부채의 함정’을 방지하는 선에서 추가적인 채무제공이 가능해야 한다.

미국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과제이다. 이로써 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정되고 자유로운 국제적 경제질서와 금융시스템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출처: Asia Times on 2020-07-10.

Ken Moak

지난 수십 년간 아시아의 여러 유수대학에서 경제이론과 국제정치에 관련하여 화제의 저명한 강연을 진행하였고, 현재 Asia Times의 편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 ‘중국경제의 굴기와 국제사회의 충격’을 출간하였다

월, 2020/08/0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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