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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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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장을 열면서

admin | 월, 2019/11/04- 20:15

편집자의 글:

올해도 예외 없이 기후변화에 따른 온갖 재난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다. 모두를 열거할 수 없는 엄청난 재난현상들이 해가 갈수록 정도를 더하고 있고, 연전(年前)부터 국제회의마다 기후변화를 넘어서 생태위기와 인류세의 멸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사회는 이러한 시대의 변화에 무감하고 무책임으로 일관해 오고 있다. 에너지 과소비의 산업구조, 일인당 폐비닐 배출 세계 1위 국가, 탄소배출량을 감소하기는커녕 화석연료발전소 건설을 금융 지원하는 악당국가, 겨울과 봄철이면 찾아오는 미세먼지의 공습 등이 오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다.

근본적인 성찰과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대개 평범한 시민들은 일상에 빠져있는 가운데 무능한 정부는 성장률과 GDP수치만 타령하고, 무지하고 시대역행적인 의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셈법에만 빠져 있다.

<다른백년>은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를 연구해온 한윤정 박사와 함께 한국사회의 현실을 돌아보고 깨어있는 시민 여러분들의 연대를 통하여 미래세대를 위한 실천적 좌표를 제시하고자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라는 주제의 글들을 매주 연재하기로 하였다.


[1]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기후변화는 잘못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전환의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것의 가장 뚜렷한 증상은 만연한 위기와 불안이다.

가장 큰 위기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이다. 이미 지난 세기부터 나온 진부한 이야기, 아직 극단적 상황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이야기로 여기기에는 심각한 상황들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다. 매년 최고기온을 경신하고 대형산불이 나고 경작지가 줄고 수많은 종이 사라진다. 플라스틱이 바다를 뒤덮고 가축전염병이 국경을 넘어 창궐한다. 이른바 인간이 지구의 대기와 지질을 바꿔놓은 ‘인류세’로 접어들었다.

이렇듯 병들어가는 지구 위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힘들고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극소수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중산층부터 빈곤층까지 모두 시스템의 노예가 돼서 어디로 향하는지 확실하지 않은, 모호한 미래를 향해 달린다. 불평등은 점점 심화한다. 불안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대상은 때로는 기후변화와 환경파괴로, 때로는 인공지능이라는 신기술로, 때로는 무역전쟁과 마이너스 경제로, 나아가서는 계층 갈등과 정치적 혼란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대책 마련에 부심한다. 기후변화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기후붕괴에 대응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을 상상해 거기에 맞게 아이들을 교육시키고, 저성장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시대에 맞춰 청년이나 노인 수당을 신설하거나 복지제도를 개편한다. 모든 이해관계가 모이고 조정되는 정치에 관한 한 대안 마련이 더욱 쉽지 않지만, 분권이나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위기는 기회라는 점에서 현재는 대안과 혁신을 모색함으로써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데 우리의 고정관념은 과감한 혁신이나 도전을 어렵게 한다. 고정관념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고의 프레임, 지식의 패러다임,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존재론과 우주론, 즉 철학과 과학이다(과학이라고 하면 실험과 수치에 입각한 실증과학을 가리키기 때문에 실재를 질문하는 자연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현재가 어떤 토대 위에 형성됐는지 그 사고의 뿌리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진정한 변화는 불가능하다.

 

화석연료가 우리 문명의 기반이다

현재 우리 문명은 어떤 생각의 토대 위에 세워졌을까.

경제주의: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소비하는 것,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은 모든 가치에서 가장 우위를 차지한다. 우리는 돈 없이 절대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그 규모와 운영원리가 공공의 통제범위 바깥에 있는 글로벌경제, 특히 금융경제의 시스템 속에서 현상을 유지하지 않는다면 재앙이 닥치며, 이는 모든 사람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믿는다. 경제주의적 사고방식은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미국 민주당이 월 스트리트와 결탁한 것처럼 한국 민주당도 재벌을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긴다. 생산과 소비인구를 늘리려는 출산장려 정책은 물론, 소득주도성장처럼 진보적으로 보이는 정책의 배경에도 지독한 경제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개인주의: 돈이 절대적인 이유는 남이 나를 돕거나 책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심지어 가족관계에서도 금도가 됐다. 성인이 된 개인은 재정적으로, 정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 전통사회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난 개인의 자유를 다시 반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개인이란 관계의 구성물이다. 사람은 가족, 친구, 이웃, 타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삶의 의미와 행복은 관계와 인정감에서 나온다. 아무리 복지사회를 위한 재원과 제도를 마련하더라도, 공동체에 대한 관념과 믿음이 없다면 이는 시혜와 수혜의 일방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분과주의: 오늘날 대학의 전공분야는 놀랍도록 세분화돼 있다. 직업의 세계도 그렇다. 지식인, 전문가는 한 분야를 좁고 깊게 아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문분야만 탐구하는 데도 시간과 능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는 아예 귀를 닫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은 가치와 당위를 말하는 거대담론에 대해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는 냉소적 반응을 보인다. 학벌주의, 능력주의와 합쳐진 분과주의는 여러 분야를 연결하는 폭넓은 사고를 가로막는다. 학문간 융합은 시장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며, 인간을 연구하는 인문학조차 문화콘텐츠나 테크놀로지를 위한 실용성을 갖추는 수단으로서 스스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실증주의: 실증주의는 이른바 객관적, 과학적 사고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지 않는다. 세속화한 세계에서 종교는 초월적 세계와의 교감이라기보다는 오랜 관습과 제도의 관성으로 남아있다. 때로 자연에서 에너지와 영감을 얻지만, 그것은 지구 자원을 개발과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현대 경제시스템에서 더욱 유능하게 일하기 위한 휴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무관심은 희망과 가치에 무감각하게 만든다. “절실하게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경험을 사람 사이의 에너지나 우주와의 교감으로부터 설명하기보다 심리학과 뇌과학이 발견한 인간 내면의 사건으로 환원시킨다.

서구에서는 이삼백 년, 한국에서는 백 년 이상 사회를 지탱해온 이런 사고들이 합쳐져 현재의 생태위기, 인간의 위기를 초래했다. 경제주의는 화석연료에 기반한 서구 산업문명을 세계화하는 원동력이 됐고, 그 결과는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 나타났다. 파국적 결과가 눈에 보이는데도 에너지 전환은 여전히 경제적 이익과 연관돼 논의되고, 탈성장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된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물론, 자연과의 교감조차 어려운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며, 넓은 시야를 비전문성의 증거로 간주한다. 사회의 엘리트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며, 경제적 수요에 부응하는 교육이 이를 부추긴다는 것은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다소 위악적으로 서술한 우리 문명의 토대는 그러나 조금씩 바뀌고 있다. 인간의 유전자는 자신의 근시안적 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만큼 이기적이지 않다. 이타성이 최고 수준의 이기적 선택임을 밝혀주는 생물학적, 역사적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지식이든 재산이든,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은 과거의 유산과 동시대인들에게 빚진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산업문명을 탄생시킨 사유화(인클로저)에 저항하는 공유화(커먼즈)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청년세대는 대학이 가진 권위와 대학 자체의 경제주의에 저항하면서 비제도권에서 폭넓은 지식을 탐구하는가 하면, 유목민적이고 생태적인 삶을 꿈꾸며 실천한다.

그럼에도 이런 경향은 아직 비주류에 머물고 있다. 주류의 사고와 행동은 여전히 과거의 철학적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그만큼 전면적 변화는 요원하다. 대안을 추구하는 사람들마저 현재 궤도에 결박된 삶과 이를 거부하는 앎 사이에서 자기분열을 겪으며 조금씩 열정을 소진해간다. 문명의 전환은 명백한 시대적 과제이지만, 그것을 분명한 언어와 힘찬 주장으로 제시하고 많은 이들과 공유할 때만효과적으로 이행될 수 있다. 경제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우리의 존재와 관계를 틀 짓는 개인주의와 분과주의, 실증주의를 극복하기는 훨씬 어렵다.

 

생태문명은 전환의 방향이다

생태문명은 이런 한계를 뛰어넘는 개념으로 제안됐다. 생태는 지구상 모든 존재와 생명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뜻이며, 문명은 사회시스템을 구성하는 모든 분야가 함께 변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생태문명은 기후변화나 환경파괴의 문제와 연관이 깊지만, 그것을 넘어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지구 전체의 생활양식을 아우르는 말이다. 생태문명은 생태와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전환의 방향을 가리킨다. 경쟁하고 배제하는 게 아니라 협력하고 공유함으로써 적절한 물질적 수준과 최고의 정신적 수준을 가진 문명을 만들자는 이 주장은 어쩌면 인류 역사상 가장 유토피아적인 관념인지도 모른다.

생태문명이라는 단어는 여러 문맥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했다.

지구헌장: 2000년 유엔총회에서 발표된 지구헌장은 “지구는 우리의 집이며 지상 모든 것의 집이다. 지구는 그 자체로 살아있다. 인간은 훌륭한 삶의 형태와 문화를 가진 지구의 한 부분이다”라고 선언했다. 또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지구를 보호하거나 우리 자신과 다양한 생명을 파괴하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과 지역사회, 소유와 존재, 다양성과 획일성, 단기와 장기, 사용과 육성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함으로써 산업기술문명사회를 재고찰해야 한다”고 했다. 지구헌장은 1992년에 열린 역사적인 리우 환경회의 이후, 유엔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영성적 지도자와 NGO들이 제시한 환경보존과 지속가능개발 원칙을 바탕으로 1994년 초안을 마련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네덜란드 정부의 지원으로 1995년 30개국 대표와 70개 이상의 단체가 모인 가운데 첫 번째 국제워크숍이 열렸고, 1996년 지구의회가 조직돼 5년간의 검토와 보완과정을 거쳤다. 리우 회의의 성과인 ‘아젠다21’의 점검과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형성에 깊이 관여해온 지구의회가 발표한 2002년 보고서는 지구헌장의 원리를 “생태문명의 원리”라고 명시했다.

중국정부: 중국은 1997년 제15차 당대회에서 지속가능발전을 국가발전전략으로 채택했다. 지속가능발전은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1987년 발표한 ‘우리 공동의 미래’에서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재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이라고 정의한 개념이다. 그런데 10년 뒤인 2007년 제17차 당대회에서는 지속가능발전 대신, 생태문명을 건설하자는 제안이 등장한다. 이는 지속가능발전이 제시하는 경제성장과 환경보존의 상호관계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생태문명은 2012년 공산당 당헌에 포함돼 정치기본노선이자 국가통치전략으로 격상하며, 이때 권력을 승계한 시진핑 주석은 중국식 사회주의의 목표로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생태문명 건설이 조화를 이루는 ‘오위일체론’을 제시한다. 2018년 생태문명 건설과 환경권을 담은 헌법 수정안이 통과됐고, 행정부처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기존 환경보호부를 포함한 6개 부처와 기구의 환경오염 관리 기능을 통합한 ‘생태환경부’가 탄생했다.

중국의 생태문명 정책은 세계 여러 나라의 모범이 될 만큼 혁신적이라는 찬사와 함께, 현실이 따르지 않는 이상주의이자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새로 부상하는 녹색경제에서 세계시장 제패를 노리는 ‘시진핑의 세일즈 전략’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유엔은 중국정부를 지지해왔다. 유엔환경계획은 2013년 중국의 생태문명을 지지하고 확산시키는 결의안(결정 27/8)을 채택했다. 또 2016-2030년을 목표연도로 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를 수립하면서 중국을 적극적인 동반자로 끌어들였다. 2016년 유엔환경계획이 발행한 중국생태문명 홍보책자 『Green is Gold』(“청산녹수가 금산은산”이라는 시진핑 발언을 인용한 제목)는 “중국의 생태문명 건설노력은 2030 아젠다 (17개 지속가능발전목표)의 확산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이라며 혁신, 조화, 녹색, 개방, 공유를 원칙으로 내세운 제13차 경제개발계획(2016-2020)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우리의 삶은 생태적 원리로 재조직돼야 한다

2015년은 생태문명 개념 확산에 중요한 전기가 됐다. 그 해 12월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 환경회의는 지구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에 비해 섭씨 2도 이하로 억제하고, 가능하면 섭씨 1.5도 이하가 되도록 노력하자는 결의안인 파리협약을 채택해 198개국의 서명을 받았다. 각국이 이행계획을 마련해 보고하고 유엔이 이행을 감시하기로 함에 따라 한국도 2030년 이산화탄소 배출추정치의 37%를 감축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그러나 전체 탄소배출량의 12%를 차지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4월 이 협약을 탈퇴했다. 한국의 에너지 전환 속도 역시 약속이행을 담보하기 어렵다.

파리협약이 체결되기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리우 환경회의 이후 50년(2012년)이 되도록 유사한 회의와 결의만 계속됐지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는 것이다. 나오미 클라인의 책 『이것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에 나오는 한 대학생은 2011년 유엔환경회의장에서 각국 대표들을 향해 “당신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회의만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화가 없이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도, 이를 부추기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자원착취적 경제구조를 억제할 수도 없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영적, 종교적, 철학적 각성을 촉구하는 선언이 이어졌다.

찬미받으소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6월 자신이 주제 선정부터 집필, 발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도한 첫 회칙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다. 회칙이란 보편교회에 대해 교황이 발표하는 공식 사목교서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늘의 사회윤리적 문제에 비춰 해석하고 적용원리와 방안을 제시한다. 회칙의 핵심은 통합생태론인데, 이는 생태위기가 비단 환경문제가 아니라 경제사회적 조건과 결합돼 있기 때문에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풀어가야 하며, 이를 위해 “세상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경제와 발전에 대한 다른 이해방식을 찾으라는 요청, 모든 피조물의 고유한 가치, 생태계의 인간적 의미” 등을 고려할 것을 주문했다. 통합생태론은 생태문명과 동의어이며 유엔과 지구헌장 그룹, 주요 종교지도자들, 과학계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다.

클레어몬트 컨퍼런스: 같은 2015년 6월 캘리포니아주 클레어몬트에서는 과정신학자(과정신학은 앨프리드 노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응용한 미국의 진보신학운동이다)이자 환경사상가인 존 B. 캅 주니어의 주도로 ‘대안을 잡기: 생태문명을 향하여’라는 주제의 국제 컨퍼런스가 열렸다. 생태문명이라는 주제로 열린 사상 최대의 학술행사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1500여명의 사상가, 작가, 활동가, 신학자, 철학자, 과학자들을 끌어 모았고,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 기후변화에 당면한 인류의 미래를 토론했다. 컨퍼런스 이후 주최측은 행사의 취지를 잇기 위해 비영리법인인 ‘생태문명연구소(Institute for Ecological Civilization)’를 만들었다. 이곳은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학제적인 연구를 수행하며, 지방정부 및 연구기관, NGO와 협력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삶이 어떤 방식으로 재조직돼야 하는지 규명하는데 헌신한다.

세계종교의회: 1893년 창설돼 종파를 초월해 가장 많은 종교인이 모이는 세계종교의회는 2015년 10월 유타주 솔트레이크에서 열린 행사에서 ‘기후변화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면서 생태문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새로운 생태문명이다. 이는 생명의 다양성이 확장되고 평화, 정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되는 세계이다. 우리는 지구공동체 안의 인간 가족으로서 생태문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다.” 이 선언은 지구공동체(지구상 모든 생명의 공동체)라는 상위 시스템에 속한 인간사회의 하위시스템으로 생태문명을 규정한다.

이밖에 생태문명과 유사한 개념은 적지 않다. 문화사학자이자 환경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물리학자 브라이언스 윔과 공저한 『우주이야기』(1997)에서 생태대(Ecozoic Era)라는 조어를 썼다. 지질학 용어를 차용한 생태대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생명중심주의, 지구중심주의로 옮겨간 시대이며, 이를 실현하려면 지구와 적절한 관계를 맺으려는 인간의 결정과 투신이 중요하다. ‘만인과 만물이 하늘(物物天 事事天)’이라며 공경의 대상을 한울과 사람을 넘어 만물(동식물)까지 확대한 최시형의 동학사상, 동학정신을 계승해 산업문명의 위기와 기계론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간 안의 우주생명’을 도모한‘ 한살림 선언’(1989) 역시 생태문명과 같은 맥락에 놓여있다.

 

생태문명은 진정한 글로컬 문명이다

생태문명 담론은 여전히 형성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따르면, 생태문명은 실체가 아닌 과정이다. 생태문명을 위해서는 다른 미래를 꿈꾸는 사람과 단체가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유기적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해야 한다. 문명의 토대를 바꾸기 위해 철학, 종교, 정치, 경제, 과학, 교육, 문화를 가로지르는 학제적 구상이 필요하며 이론과 실천, 담론과 정책이 만나야 한다. 견고하게 형성된 현재 상황을 개선하는 데서 시작하기보다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미래를 꿈꾸면서 이를 실현하려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 되짚어 내려오는 과감한 혁신의 과정이기도 하다.

생태문명의 시공간은 산업문명의 시공간과 현저히 달라질 것이다. 산업문명에서 미래는 무한히 진보하고 확장되는 시간이다.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생산력은 증대하며 경제는 팽창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구 용량과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생태문명에서 미래는 순환하는 시간이다.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모두 써버리는 자본주의 경제논리가 아니라 가을에 추수를 마친 뒤 이듬해 봄의 파종을 위해 씨앗을 보관하는 것처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미래, 즉 자본가와 도시노동자가 아닌 농부의 시간이 될 것이다.

생태문명의 공간은 이중적이다. 산업문명처럼 생태문명은 글로벌 문명이다. 서구 근대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미 전 세계로 퍼져나간 지금, 지구화 이전 삶의 형태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산업문명이 차등근대화와 분업을 통해 전지구적 착취구조를 형성한 것과 달리, 공동체에 기반한 에너지 자립과 지역순환경제를 추구하는 생태문명은 보다 평등한 세계를 만들 것이다. 모두가 공유하는 단 하나의 지구를 고려하며 살아가는 글로벌 문명인 동시에, 마을 단위로 각자의 삶을 꾸리고 실험하는 커뮤니티 문명이다. “범지구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에서 실천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구호는 지역의 차이를 활용하는 후기자본주의의 경영전략이 아닌, 생태문명의 구호로 전유돼야 한다.

앞으로 ‘생태문명전환 프로젝트’에 연재될 국내외 필자들의 글은 한국생태문명프로젝트가 미국 과정사상연구소와 생태문명연구소, 중국 후현대발전연구원, 한국 지구와 사람 등 국내외 여러 기관과 협력해 2017년부터 2019년까지 3년간 개최한 컨퍼런스의 성과물이다(2017년 11월 클레어몬트에서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위한 국제 컨퍼런스’, 2018년 10월 파주에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생태적 전환’, 2019년 10월 서울에서 ‘생태문명을 향한 전환: 철학부터 정책까지’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생태문명을 향한 담대한 꿈과 실천적 제안들이 한국사회의 생태적 전환을 앞당기는데 영감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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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2015년에 진행된 이 인터뷰 내용은 세가지 의미에서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신향촌건설 운동의, 흥미진진하면서도, 시대적 역설이 잘 드러나는, 초기 역사와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당시 장쩌민 주석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배석한 회의에서 원테쥔 선생이 삼농문제를 직보하여, 중국 정부의 주요 정책의제로 받아들여지게 된 장면은 상당히 극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실제 중국 정부가 이를 받아 2005년부터 실행한 ‘신농촌건설’이 여전히 하드웨어적인 인프라 투자, 즉, 도시의 생산과잉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자 ‘발전주의’에 기반한 실천인데 반해서, 그에 앞서 진행된, 신향촌건설 운동은 농민과 청년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문생태주의적인 실천이라는 것은, 당대 중국사회가 삼농문제를 받아들이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 정부의 신농촌건설은, 한국에서는 비판적으로 거론되는, 새마을운동을 상당히 참고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원톄쥔 선생은 삼농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음에도, 막상, 주류 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향촌건설운동은 20여년 가까이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이 글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량슈밍향촌건설 센터는 아직도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이 조직은 아직도, 베이징 교외의 매우 허술하고 영세한 시설속에서, 젊은 이상주의 청년 활동가들의 열정과 몇몇 선도적 민간/국제 기금의 지원으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중국 NGO와 자선단체의 주류를 이루는 관방 혹은 대기업이 지원하는 거대 단체들의 지원을 통한 안정화는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시진핑 정부의 ‘향촌진흥정책’이 보다 소프트웨어적인 관점으로 이행함에 따라서, 여건이 다소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대규모 자본이 투하되는 여러 정책 사업들에 신향촌건설 운동에 속한 풀뿌리 조직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몇몇 기층 지방정부와 협력하는 실험적인 사업들을 제외하고는 제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역으로 지나치게 주류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부 참가자는 운동진영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은 20년에 걸쳐 다양한 배경과 입장을 가진, 수많은 참여자들이 등장하면서, 참가방법도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간난고투를 피할 수 없는, 순수한 민간사회의 운동노선과 사회적 자원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영향력이 큰 주류 대중운동사이에서의 선택에 긴장과 고민을 늦출 수 없는 것은,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중국의 교육과 청년문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국 교육은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매우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동아시아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특히, 이 인터뷰가 진행된 2015년보다 훨씬 심각해진, 2020년 현재, 대졸자들의 취업난, 학벌지상주의와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학력에 의한 계급분화문제 등이 있다. 최근, 급증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우울증, 경쟁지상주의에 기반한 학교 폭력, 매우 이기적이고 원자화된, 명문대학 엘리트들의 행동 양태를 보면, 중국 일선一線도시의 청년들은 한국의 동시대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적으로 한탄하던 암울한 시대의 문턱에 이미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80년대 출생한 대졸자들은, 폭등한 집값 때문에, 졸업직후, 거주하는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했느냐 하지못했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중산층 진입여부가 갈라지게 됐다. 당연히, 90년대 이후 출생자라면, 애초에 자력으로 집을 구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짐에 따라, 결국 부모의 경제 능력이 계층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주로 삼농의 관점으로 제도권 교육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제시 됐는데, 실제로, 중국에서도 고등교육 전단계에서는 소위 ‘대안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현실은 별수 없이, 주류사회에서의 경쟁에 몰입하거나, 유학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다. 원톄쥔 선생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향촌의 자연과 전통문화가 기반이 된, ‘자연교육’ 등을 보다 보편적 해결책의 방향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번째, 원톄쥔 선생이 열망하는, 탈엘리트주의와 대중민주주의 추구,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이 신향촌건설의 사상적 노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젊은 시절, 10여년에 걸친, 그의 하방(상산하향) 경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현대 중국 사회의 격변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경험을 개인적인 비극과 고난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양분으로 삼아, 현실에 기반한 지식과 활동으로 승화한, 몇몇 당대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중요한 경험들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청년지식인들이 성장지상주의에 물든, 중국 주류 엘리트사회의 흐름을 좇지 않고, 신향촌건설 운동에 투신해, 이상을 좇아 분투하는 모습도 여기서 배운 바 적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2017년 중국공산당 19대 보고에서 향촌진흥전략을 추진함과 동시에 ‘일동양애一懂兩愛 (농업을 이해懂하고, 농민과 농촌을 사랑愛하는)’ 인재의 육성을 천명했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국가의 향촌진흥전략을 관철함에 있어서, 농민대중과 협력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일을 우리가 이미 수십년해왔기 때문이다. 향촌건설운동을 통해 길러내고 삼농문제에 이미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이 시기를 맞아서, 생태문명체제개혁의 선봉에 서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낡고 병든 현재의 교육체제안에서 이런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서구 분과학문의 교조주의와 학벌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의사과학적 형식주의가 유지하는 제도권 교육체제는 실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의 산물이고 여전히 겉만 번드르르할 뿐이다 ! 그러니, 향촌진흥의 앞날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1. 청년 자원활동가들이 열어가는 농촌지원하향운동의 시대적 배경

2001년 새로운 세기가 열리면서, 나는 (장쩌민)총서기가 주재하는 삼농문제 좌담회에 참석할 것을 통보받았다. 회의석상에서 총서기에게 직접 삼농문제를 보고했다. 그리고 중앙이 농업정책 방향을 바꿔 삼농정책을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나는 비교적 젊고 지위가 낮은 편이었기에, 더 단도직입적으로 주저없이 발언할 수 있었다. 나는 농촌의 형세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고, 삼농문제가 갈수록 악화되어 간다고 내가 기탄없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중앙의 리더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총서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책임지고 당신이 제기한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하겠소”. 나중에 중앙은 우리가 90년대부터 계속 외롭게 목소리를 높여온 삼농문제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삼농문제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기반이 된 배경이다.

<그림 1> 2004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은 매년 1호 문건에서 삼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내어 놓고 있다.

원래 중국 정부는 90년대초부터 대략 10년간, 서방의 농업정책과 사상을 참고해서 농업문제에 임해왔다. 방향이 다르니, 방침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90년대 농업정책을 비판하면서, “눈에 숫자만 들어오고, 마음속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표현해왔다. 삼농문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여전히 ‘농업’을 일순위로 놓고, ‘농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삼농의 첫자리에는 바로 농민이 와야 한다. 중국이 장기적으로 진정한 사회의 진보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농민조직화이다. 왜냐하면, 농민이야말로 중국의 원주민이고, 중국 인민의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생산, 생활과 자연생태의 결합은 매우 밀접한 것이고, 농민의 문화적 실천은 언제나 일종의 다양성의 원칙을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이야말로 삼농중 첫째자리에 놓이게 된다. 마음속에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근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농민이 지켜온 농업문명을 진흥시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와는 다른 방법이다. 과거에는 농업생산만을 중시했다.

두번째가 농촌이다. 실은 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려면, ‘농촌소멸’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반대해야 한다. 만일 농촌이라는 그릇이 없어지면,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농업경제, 생산 그리고 농민이 문화전승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림 2> 원톄쥔이 편집장으로 일했던 <<중국개혁 (농촌판)>> (2002) 잡지는 신세기 향촌건설운동의 플랫폼과 선전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룰 때, 형세가 안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농의 삼위일체적 지속가능성이 바로 농업의 지속가능성이다.

2001년부터, 중앙은 삼농문제를 주요 의제로 받아들이고 2005년 중국 공산당 16차 전당대회 이래 신농촌건설을 중요한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고, 우리는 이런 기회를 이용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향촌건설을 재개했다. 향촌의 부흥이라고 부를만하다.

“마을(촌락)주의”는 1894년 청일전쟁 패배이후 장지엔張謇이 난통南通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실험지역을 만들고 실천할 때 내놓았던 구호이고 바로 향촌건설의 기본 이념이다. 민국시절 지식인들도 이를 신조로 삼아 1920~30년대에 농촌으로 내려갔다. 이 흐름에는 거대한 국제적 배경도 있다. 영문으로 번역하면 rural reconstruction인데 향촌 혹은 농촌의 재건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나중에 국민당이 대만으로 건너가서 역시 이 개념으로 대만에서 농촌부흥을 꾀하고, 농촌부흥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만들게 된다.

우리는 2001년부터 향촌건설을 재개하면서, 향촌재건, 향촌부흥, 향촌건설 대신, 향촌문명의 부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백년 운동사를 이어받기 위해, 최종적으로 향촌건설이라고 부르게 됐다. 또 민국 시절의 운동과는 차별화를 두기 위해 신향촌건설이라고 불렀다.

<그림 3> 중국개혁 편집장 원톄쥔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상경한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2년).

당시의 대학생 청년 자원활동가들이 농촌지원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1년인데, 바로 중앙이 이미 삼농문제 개념을 받아들였던 그 시점이다. 하지만 각 지역과 부문은 아직 이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반응이 뜨거웠다. 농민문제, 농촌문제와 농업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빌어, 우리는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들과 마주하고 협력할 것을 권했다. 삼농문제를 해결하려면, 삼농에 복무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중국 사회의 인민들이 그 흐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소수의 지식인들만 현실을 비판하고, 소수의 각성된 청년들만이 이에 호응한다면, 이는 소수만이 참여하는 소수의 일에 머물뿐이다. 일단 21세기 초에 전국민이 삼농문제를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낼 때만, 규모를 갖추고 지속가능성을 가진 사회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향촌건설운동이 21세기초에 다시 시작된 배경이다.

2001년 다시 시작된 향촌건설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맥락 혹은 주요한 내용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많은 청년 자원활동가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촌의 조사, 연구, 지원 활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고, 사회적으로 ‘신하방(상산하향)운동’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과정속에서, 키워낸 인재들이 천천히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내, 자신을 단련시키고 스스로 농촌의 우수한 인재로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서구적 모델을 차용하는 대학들은 이런 식으로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

<그림 4> 제1기 중국향촌건설교육, 스태프 (오른쪽: 류라오실劉老石, 중간: 치우졘셩邱建生)들과 농민이 함께 찍은 사진 (2003년 1월, 베이징).

 

2. 청년 지식인의 농촌지원 사명

2001년 신향촌건설 운동이 재개된 이래, 20세기 초반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활동가들은 농민을 움직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는 농민들이 조직화하여 스스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지위를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만, 농민들은 사회계약의 당사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농민조직이 없으면, 의견이 분산돼, 농민 자신의 이익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한편 그 상대방인 사회의 다른 주체들도 수많은 각각의 농민과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 즉,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의미있는 사회적 계약관계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시장경제는 계약이 기초가 되고, 이것을 신용경제라고 한다. 시장경제조건하에서 신용사회를 만들게 되는데, 농민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이것의 성립이 불가능해진다.

<그림 5> 2003년 겨울방학기간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학생 농촌지원조사연구 교육과정 (앞열의 왼쪽 두번째: 류라오실 왼쪽 아홉번째: 치우졘셩, 세번째열 오른쪽 아홉번째: 원톄쥔).

그리하여, 신향촌건설의 주요목표중 하나는, 농촌에 내려가 기층 농민들의 조직화를 돕는 것이었고, 이렇게 생겨난 농민조직들이 당시에 협동조합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은 정부에서 협동조합법을 제정하기 훨씬 전에 이루어졌고, 그 목적은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계약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조직기초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류의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우리는 당연히 농민들을 움직여야 했다.

다시 문제가 생겼다. 누가 농민을 움직일 것인가 ?

1980년대이래, 우리는 지속적으로 대학생들의 농촌방문 활동을 조직해왔다.

<그림 6> 2003년 1월 류라오실이 서남지역의 농촌지원방문단의 간부로서 농촌방문활동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당시 농촌정책수립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내가 소속된 팀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특히 청년학생들을 조직해서 농촌으로 보내고, 농민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농촌의 조사연구를 진행하면서, 현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는, 청년의 열정과 능력을 활용해, 농민을 돕게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크든 작든 농촌의 발전을 촉진하게 하고 싶었다.

80년대이래, 중앙의 농촌정책중 주요한 업무중 하나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지원을 하는 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 상사는, 나중에 내 박사논문을 지도한 두룬셩杜潤生 선생이었는데, 그는 중앙재경업무 영도소조의 일원이었고, 동시에 중앙농촌정책 연구실의 주임이었다. 그는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었는데, 노년에 접어든 혁명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들의 주요한 임무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것이다. 만일 이를 성공시킨다면, 그렇게 청년학생들을 보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업적이다” 그때 두선생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80년대의 농촌정책은 상대적으로 유효했고, 농민들에게 환영 받았다. 그 당시의 1호문건을 지금의 1호문건보다 농민들이 더 좋아했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지식인 청년 학생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서, 현황과 민심을 제대로 살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상황이 바뀌었다. 서구의 모델이 농업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도입됐다. 농민의 권익과 농촌발전문제는 경시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청년학생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겠다는 중앙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21세기를 맞아, 중앙이 다시 삼농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한 이래, 다시, 청년학생들의 하향농촌지원활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어서 국무원영도하에, 이 흐름을 지지하고, 공개 서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청년들의 농촌 지원 활동을 격려했다.

이때, 다시 농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스스로의 협상지위를 제고하며, 사회계약 관계를 안정시키고,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경제사회기초가 되도록 하기 위해, 누가 다시 농민들의 조직화 문제를 도울 것인가 ? 그래서 우리는 다시 대학생들을 훈련시켜 농촌으로 보내고, 80년대 농촌정책부문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삼농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그래서 농민조직화를 위해서 반드시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림 7> 2016년 농촌지원하향, 제8회 여름 캠프.

<계속>

 

2015년 8월에 진행된 인터뷰내용으로, 2020년 동방출판사에서 출간된 <<향촌필기:신청년과 향촌의 생명대화 鄉村筆記:新青年與鄉村的生命對話>>라는 저서에 수록됐다.

 

김유익

금, 2020/11/0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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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작년 여름, 광저우의 80년대 청년문화를 그린 “커피에 설탕 좀 타기 給咖啡加點糖(1987) https://movie.douban.com/subject/2080567/?dt_dapp=1 ”라는 ‘데카당한’ 영화 한편을 관람했다. 당시, 이 영화를 소개한 중국 친구들은 관람후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동행했던 싱가폴 친구와 나는, 영화가 너무 비현실적이라면서 투덜거렸다. 막 개혁개방이 시작됐을 뿐인 당시의 중국 광저우 청년들이 이웃 도시 홍콩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예술적 탐미의식을 생활속에서 놀이문화로 즐겼다는 사실이 좀처럼 납득되지 않았다. 그 후에 중국의 80년대와 관련한 글 몇편을 읽고, 소위 ‘80년대 문화열’ 시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실은 이 ‘백열상태’는 1989년 천안문 사태로 인해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경제위주의 개혁개방이 지속됨으로써, 비교적 자유로운 문화예술인, 지식인의 공론장도 2010년대 초까지 유지됐다. 인류학자 샹뺘오 박사는 80년대 후반 고향인 져장성 원저우溫州의 고등학교에 재학하면서 남방의 지역도시까지 전파된 훈훈한 문예의 열기를 맛볼 수 있었고, 천안문 사태가 일단락된 1991년 베이징 대학 학부에 진학해서 개방의 시대 2막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 글은 8~90년대를 관통하며, 중국의 사회과학계를 재건해 나가고, 정부의 정책 방향에 끊임없이 아젠다를 세팅하는, ‘지식청년시대’ 지식인들의 공헌과 그들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가진 특징과 이러한 특징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 그들의 강점과 한계에 대해서 설명한다. 신향촌건설 운동의 지도자인 원테쥔 선생은 이 그룹에 속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중 한명으로서, 바로 글에서 묘사된 정부의 씽크탱크인 ‘중공중앙농촌연구실’ 출신의 연구관료였다. 이후에, ‘경제체제개혁연구소’산하 언론사의 대표를 거쳐, 인민대학 교수로 재직함으로써, 지식청년 출신 관료와 학자라는 양쪽 커리어를 두루 섭렵한 인물이다. 아래 사진1의 두룬셩 선생이 그의 박사과정 지도교수였고, 현재 국가 부주석인 왕치샨은 당시 그의 사수였다. 이 글이 묘사하는 지청 지식인의 모습은 원톄쥔 선생과 ‘씽크로율’ 100%에 가깝다. 그는 2016년 인민대학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다양하고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실제 학술연구는 그의 후학들인 후지청시대지식인 70허우, 80허우 연구자들이 진행하고 있다는 점도 이 글의 설명과 일치한다. 샹뺘오가 현재 협력하고 있는 칭화대학 왕후이 교수 등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과 서구이론의 도구적 사용 (아마도 오류가 있거나, 체리피킹하는 경향도 있는)이라는 공통점도, 많은 중국내외의 지식인이 지적하는 사항이다. 한국의 청년 인문학자가 이를 평한 것을 본 적도 있고 (https://begray.tistory.com/447 푸단대 역사학자 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도론평), 홍콩에서 활약하는 대륙출신의 문학평론가 쉬즈둥許子東이 “서구 학자들은 방법론에 집중하고, 중국학자들은 문제 자체에 집중한다”는 커멘트를 하기도 한다. (“ 当时有个机缘,1987 年我去香港大学做访问学者,接触了西方流行的学术界理论,我看到了中西根本性的区别。内地做文学,像在前线打仗,你要治病救人,别管用什么方法,赶紧把病人救活。但在海外,就像医学院学生旁听的实验课,老师们做演示,学生在下面看。区别就在于内地文学批评,问题最重要,但西方学术圈,他们不讲问题意识,他们讲方法

https://shop.vistopia.com.cn/article?article_id=36txI&source=article).   

‘지청시대’ 지식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일종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한국의 586세대와 포개지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자식, 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역사적 사명감과 주체성이 문자 그대로 공유된다. 그래서, 근대국가의 형성이라는 역사실천안에서 민주화와 (후일 제도권안으로 들어온 이후엔) 산업화라는 거대담론에 무한한 관심을 두는 반면, “일상생활속의 권력관계가 낳은 다중적 모순이 만드는 미약한 파열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려 들지 않는 지적 편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2~30대 청년세대, 진보좌파, 페미니즘과 척을 진다. 중산층 계급의식 때문에, 이중인격에 속물이라는 비판도 받는다. 이제 고위급 정치가군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은 신향촌건설운동이라는 사회적 실천운동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사회과학계, 지식인 사회의 역할에 대한 전망과 제언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에 이르기까지, 원톄쥔 교수를 포함하는 소위 중국의 ‘공공지식인’들이 왕성한 사회실천과 학술활동을 벌이던 시절이 있다. 이들은 중국의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이론을 개발하려고 노력했고, 이러한 이론이 ‘중국의 길’을 설명할 뿐아니라 세계체제에서 주변부나 준주변부에 속한 비서구국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기를 바랐다. 서구의 뉴레프트, 제3세계의 지식인들뿐 아니라, 오랜기간 지역의 근대성 과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한국, 일본,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좌파 지식인들이 이러한 논의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학파’를 건설하고 싶다는 그들의 야심은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시진핑 정권의 등장이래, 지식인 담론 공간이 거의 완전히 ‘체제화’하면서, 오로지 관방의 언어로 중국 주류사회에 공명하고 있다. 바꿔말하면, 이제 중국 영토를 한발짝만 벗어나도 지지 세력을 끌어모으기 쉽지 않다. 당연히, 미국을 위시한 서구학계의 담론 권력이 워낙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중국 자신의 거버넌스 진화 문제, 그리고 홍콩과 신장 등 국내 지역 문제를 ‘민주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이들 담론의 대외설득력이 떨어지게 된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이다.

위와 같은 이야기는 중국내에서 자유롭게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샹뺘오 박사는 중국 학문의 규범화가 가져온 체제화 문제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여기서 중국의 ‘체제’라는 표현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류, 비주류 구분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비민간’ 혹은 정부와 정부의 직간접 영향이 있는 조직을 포함하는 ‘제도권’에 가깝다. 이를테면, 순수한 민간자본 기반의 사립대학을 제외하고, 중국의 대학은 소위 ‘사업단위’라고 불리는 정부의 ‘지도관리’하에 있는, 공공의 영역을 다루는 조직들의 일부이고 그래서 ‘체제’안이라고 봐야 한다. 즉 ‘공공’이라고 불리는 영역조차 민간의 파이는 매우 작고, 거의 ‘체제’와 등치된다.     

샹뺘오 박사는 지청시대의 지식인과 관료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그 자신은 후지식청년시대에 속하는 인물이다. 또, 중국의 체제내 학계 출신이지만, 본인은 서구 학계인 옥스포드 대학에 소속돼 있다. 중국의 ‘중앙’, 핵심 ‘노른자’인 베이징 대학 사회학과에서도 수재로 꼽히던 인물이지만, 자신의 보다 근원적 정체성 기반은 고향인 ‘지방’ 원저우溫州의 소상공인과 몰락한 향신계급, 실증주의의 본고장 영국 학술계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역자가 그의 대담집인 ‘방법으로서의 자기’ 서평을 일간지에 기고하였다). 그가 사회학과에 소속되지 않고, 본질적으로 주변부를 지향하는 학과인 인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도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는 2014년 ‘어큐파이 센트럴’운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보면서 천안문 사태의 부정적 유산이 어떻게 홍콩사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논한 바 있다 ( “홍콩 대중운동의 민주화 요구와 정당정치”

http://platformc.kr/2019/09/%ed%99%8d%ec%bd%a9-%eb%8c%80%ec%a4%91%ec%9a%b4%eb%8f%99%ec%9d%98-%eb%af%bc%ec%a3%bc%ed%99%94-%ec%9a%94%ea%b5%ac%ec%99%80-%ec%a0%95%eb%8b%b9%ec%a0%95%ec%b9%98/) . 당시 중국 대륙의 국가 권력층과 홍콩의 시민들이 균형감있게 문제를 바라보고 행동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소망과는 반대로 2019년 홍콩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른 것 같다. 이제 중국과 외부 세계의 지식인들, 중앙과 지방, 통일적 거대담론과 파편화된 작은 세계들의 경험에 대한 분석을 이어줄, 중국의 새로운 ‘공공지식인’ 샹뺘오의 활약을 여전히 기대해 본다. 한편 한국의 ‘후586시대’ 지식인들이 중국의 후지청시대지식인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되기도 했다.  

보너스 – 중국의 80년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 듀오였던 웸이 서방의 대중청년 예술인을 대표하여 1985년 베이징과 광저우에서 공연을 갖은 것이다. 당시 북방과 남방의 거리와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생동하는 80년대 문화열의 분위기를 간접 체험해보길 바란다.

Wham ! Freedom (공식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BFwOs-jy53A


베이징대학 사회학과 계열을 예로 들자면, 2015년은 아마도 중국의 사회과학 “지식청년시대”의 종언을 고한 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5년을 전후해서 1960년 이전에 출생했으며,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상산하향(하방)경험이 있는 학자들은 모두 은퇴했다. 이들 대부분이 교직을 떠났다.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고, 학교 외에는 별다른 인생경험을 해보지 못한 70년대 출생 학자들이 학계의 주류로 나서게 됐다. 지식청년의 배경을 갖는 학자들은 1978년 (개혁개방)이후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리더쉽이었고,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렇게 ‘지식청년(이후 지청)의 시대’를 만들었다. 2015년 8월13일 나의 석사과정 지도교수였으며 중국 사회과학을 재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왕한셩王漢生 선생이 겨우 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그의 죽음이 2015년의 의미를 내게 되새겨주었다.

지청시대의 종언은 이들 학자의 학술생명이 끝났다거나, 그들의 영향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후後지식청년시대’의 학자인 우리들은, 뭉뚱그려 말하자면 가까운 시일내에 그들의 연구업적을 전면적으로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제와 관점은 미래 상당히 오랜 기간, 중국사회과학발전의 중요한 기초가 될 것이다. 지청시대의 종언이 의미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리더쉽을 발휘해오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의 학술실천 방식이 종료했음을 의미한다. 중국현대사회과학의 변천은 아마도 토마스쿤이 말한 패러다임 구축(지식이 점차로 쌓이는 과정)과 패러다임 전환이 상호교대되는 경로와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는듯 하다. 다른 세대간에 학술실천방식이 전환되는 것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지식의 습득과 축적방식의 변화이다. 만일 이런 축적방식의 전환을 파악하지 않으면, 유효한 지식의 축적방식에 대해서 논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지청시대의 학술실천은 제한된 물질적 조건하에서, 비공식적인 교류와 조직을 이용하고, 강렬한 사명감과 개척정신에 기반하며, 발산형 사고방식 (역자 주 – divergent thinker)을 택하고 있었다.  반대로 2000년 이후의 학술활동은 공식적인 기관안에서 프로젝트를 만들고, 자금을 따내고, 인정과 허가를 받으며 (이런식으로 학교순위가 매겨지고, 지도자가 칭찬을 하고, 학자 개인도 지명도를 쌓아간다) 전문연구자로서의 직업적 안정성과 커리어의 개발을 추구한다. 지청시대는 반半민간의 연구공간을 창조했지만, 국가기관과도 잘 소통했고, 새로운 의제를 설정함으로써, 공개토론을 하거나, 심지어는 여론을 형성해서 정부개혁방향을 뒤집을 수도 있었다. 이제 후지청시대에 들어와서, 연구방법은 고도로 전문화했지만, 학술은 이제 행정관리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민간과 반민간이 함께 지식을 생산하던 공간은 사라졌다. 학자와 정부간의 협력은 정부관리효율을 높이는 것이 주요목표이다. 이른바, 폐쇄적인 씽크탱크 컨설팅이다. 주어진 과제에 대해 논문을 쓰는 것이 주요한 방식이고, 정부의 논리와 정책 방향을 바꿀 정도의 영향을 주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사회과학의 지청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국가관료의 지청시대도 끝났다. 2010년 이후 대부분의 지청출신 지방정부 간부들도 은퇴했다. 그들은 대학의 학자들과 사회적 배경, 학습경험, 지식의 구조, 생활방식이 동일했다. 공무원의 지식전문화 그리고 규범화가 관료시스템에 새로운 합법성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스스로 점점 완고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을 주요한 동기로 삼는 집단으로 변해갔다. 공무원과 대학과 정부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도 2014년 이후 모두 1990년대말에 시작된 ‘사회안정제일주의維穩’ 정책에 반대했지만, 사실은 자기 밥그릇 안정도 챙겨야 했다. 이렇게 ‘사회안정제일주의’가 모두의 이익을 지키는 기반이 됐고, 연구주제든 방법이든 해바라기식唯上으로 변하게 된 이유도 그때문이다.

1980년대의 상황은 이와 매우 달랐다. 당시, 정부의 연구기관, 대학과 반半민간문화단체의 지청세대 학자들과 정부내의 중하층간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부 (모두 대부분 지식청년 배경을 갖고 있다)들이 심리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로 교류하며, 새로운 의제를 주고 받고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았다. 나는 1990년대 중기에 저쟝浙江성, 후난湖南성 등에 가서 필드조사를 했는데, 지도교수인 왕선생님 네트워크의 덕을 보면서, 이 공동체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방정부 간부들이 열심히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개혁연구소體改所, 특히 중공중앙농촌정책연구실農研室의 책임자는 최근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가 ? 힘있는 간부들은  끝도 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힘없는 간부들은 나의 조사를 통해서 새로운 문제를 드러내기 원했다. 모두 토론을 희망했다. 지금의 간부들은 소심한데다가 안온한 분위기만 좋아한다. 국가안전과 이익을 보호한다는 구호하에, 자신의 정치적 안전과 이익만을 보호하려 한다.

<사진1> 지식청년시대를 창조한 반半민간연구공간은 정부부문과도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공개토론이나 혹은 정부개혁방향을 뒤엎는 제안도 서슴지 않았다. 농연실 시절의 두룬셩杜潤生, 왕샤오창王小強, 왕치샨王歧山 (왼쪽부터 오른쪽으로)이 농촌에 가서 필드조사를 하고 있다.

당시와 오늘날의 가장 큰 시대적 차이는 사회과학계와 관료시스템안에 있던 지식청년들이 은퇴하고, 그 중 일부는 정치 상층부로 이동한 것이다. 1990년대부터 2013년까지, 엔지니어 출신이나 문화대혁명시기의 대학생 지도자들이 제도, 규범, 조화를 강조했다면, 2013년 이후의 키워드는, 돌파, 의지, 이상, 소그룹小組정치, 과단성과 박력 (大刀闊斧 역자주 – 큰칼과 도끼, 수호지에 등장하는 표현)이다. 정치 상층부가 갖는 이런 ‘지식청년 기질’과 다음 세대의 지식인 및 중하층 공무원 그룹은 잘 맞지 않는다. 만일 이들과 같은 매개계층이 없으면, 상층 정치인들이  유효하게 서로 다른 사회의 이익을 적절히 대표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는 지청시대종언의 역사적 의미가 갖는 중요한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과학 지청시대의 종언과 고급정치인 지청시대의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같은 출발점을 갖고 있는, 동일한 역사과정의 결과이다. 이중에서, 지식청년과 국가체제의 관계가 관건이 된다. 1980년대이래 지식청년 담론중에서 이들이 갖는 ‘민간’의 성격에 대해 많이들 논의한다. 문화혁명기간중에 특히 린뺘오林彪 사건후, 어떻게 지하에서 독서를 하고 독립적인 사고능력을 키우며, 문화대혁명을 비판해왔느냐는 것같은 이야기들이다. 사실 이것은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1980년대 중국사회과학의 회복과 재건기간중에, 가장 주목을 받던, 두개의 중첩된 커뮤니티가 있다. 하나는 <<미래를 향해간다走上未來>>총서와 <<20세기문고>>로 대표되는 학자들의 그룹이 있고, 두번째로는 구舊경제체제개혁연구소와 구舊중공중앙서기처농촌정책연구실이 중심이 되던 ‘씽크탱크’그룹이 있다. 당시에 중국사회과학원 대학원과 베이징대학 등의 대학원생들도 이 두 그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두 그룹으로부터 중요한 학자들과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이러한 지식청년시대 학자와 학생들이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그들이 온전히 ‘민간’의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관심을 끌었고, 우선은 그 문제들이 사회주의 진영내 발전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주의자들간의 논쟁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적 자원이었다. 소련공산당내부의 모순, 1956년 이후 유럽좌파의 사회주의에 대한 반성, 1968년 이후 사회주의 경향의 사상 (싸르트르, 알베르 까뮈), 유고슬라비아의 개혁 등이 특히 중요했다. 그들의 자아의식안에는, 상당히 강한 ‘공화국정서’가 존재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회주의 혁명의 자식이자, 인민공화국의 주인이라 여겼다. 그들이 제안하는 의제들은 중국이 다음 행보를 어떻게 취해야 할 것이냐였다. 가장 핵심은, 지식청년들의 활약이었다. 이들중의 리더쉽은 고급간부의 자녀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문혁기간중에 소위 ‘황피서(노란색 커버의 책)黃皮書’, ‘회피서(회색 커버의 책)灰皮書’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최고통치자 집단은 이들 청년들을 자기편으로 여겼다. 지방정부에서도 그들을 무관의 제왕으로 대우했다. 이런 배경하에서 그들은 “내가 아니면 누가 맡으랴”는 자신감과 권위에 기죽지 않는 당당한 기질을 갖게 됐다.

<사진2> 19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중앙선전부와 중앙편역국조직이 번역해서 ‘내부참고비판용’으로(일반인은 열람 금지) 출간한 정치, 역사, 철학, 문학작품 시리즈의 책 대부분 국제공산주의운동과 관련이 있다. 책표지는 대부분 옅은색을 띄고 있어서. 회피서, 황피서라고 불렸다.

1990년이후 (역자 – 천안문 사태가 종결되고), 국가체제와 지식청년 사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는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 목소리를 낮추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공론장을 떠났다. 다른 일부는, ‘우리편’에서 제외되어, 그중에서도 학문에 뜻이 있는 이들은 학교로 돌아가, 학술연구의 제도화에 힘썼다. 이들 사상가들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선진국의 학술연구를 동경한 이유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80년대 급진사상운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다. 90년대 지식청년학술시대의 주제는 정부와 거리를 두면서, 전문지식체계와 연구방법체계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규범화를 통해서, 체계적으로 상대적 독립성을 획득하고, 학술활동이 온건한 민주주의의 건설, 사회의 장기적 안정의 기초를 닦도록 돕는 것이었다.

현재 지식청년 세대가 고급정치가로 등장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변수는 구체적으로 누가 선택될 것이냐에 대한 질문과 답일 뿐이다. 학계의 지청시대 종언은 그래서 바탕으로 돌아가, 학술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통해서 사회의 민주화를 촉진하려는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실패했다. 형식상으로는 규범화된 학술활동은 전면적으로 체제안으로 들어왔다. 사회과학원 체계의 변화가 특히 명확하다. 이러한 변화속에서, 사회학자 잉싱應星이 지적한 것처럼, 지청세대의 학자들은 1990년후기부터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잉싱의 설명과는 달리 나는 그들이 이중인격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혁신과 기허, 개척과 탐욕, 무실과 속물성 創新與氣虛,開拓與貪焚,務實與媚俗”,역자주 – 2009년 칭화대학 사회학과 교수 잉싱이 ‘문화종횡’지에 발표한 글, 지청 학자들이 학계의 실력자가 되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경향을 비판함) 학계의 변화가 지식청년그룹의 도덕적 변신의 결과라고 보지 않는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지청학자들의 학술실천이 내재적으로 가진 모순이었다. 이 글에서는 사회학계안에서 드러난 두가지 모순에 대해서만 지적하기로 한다. 첫째, 지청세대 학자들은 원래 비규범적인 학교체제바깥에서의 학술활동에 능했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간 이후에는 학술의 규범화에 진력해야 했다. 두번째로, 지청세대 학자들은 다른 보통학자들이 얻기 힘든 풍부한 인생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경험연구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하지만,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 이론에 복무하는 소재가 되고, 다양한 경험을 초월하는 통일 사상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다양한 측면의 모순간의 상호작용이 1990년대 학술생태계의 하나의 내적인 동력이었다. 지식청년시대의 종결은 모순운동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순의 구체적인 측면은 계속 존재했지만, 반대로 그 대립면이 사라지면서 생명력을 잃게 됐고, 부정적인 측면의 유산으로 남게 됐다. 지청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자산이 오히려 우리의 족쇄가 됐다. 규범과 비규범의 모순은 이제 ‘체재화’되었다. (지금 시대의) 상대적으로 협소한 경험과 이에 따른 관점이, 실사구시 정신과 자주적 혁신의 기초를 결여한 학술활동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연구활동을 통한 파괴적 혁신을 방해하고, 체재화 앞에서 저항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순운동이 지청시대 종결의 원인은 아니다. 훨씬 더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사실 주요한 원인은 학계 내부에 있지 않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역사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실마리를 제공한다. 나는 이 실마리가 우리가 현재 직면한 주요한 곤경을 드러내기를 희망한다.

나는 1991년에 일년간 캠프에 갇혀 군사훈련을 받고, 베이징대학에 입학했다. 대략 대학 2학년에 해당하는 1993년에 왕선생님의 “유동流動농민공” 과제소그룹에 참여했다. 1990년대 베이징의 사회학자들사이에 소위 ‘왕한셩워크숍’이라는 타이틀은 왕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중국사회학에 핵심적인 공헌을 한 일군의 중년학자들이 자주 모여서 토론을 하고, 과제의 협력을 조직한 활동을 의미한다. 나는 1995년에 정식으로 왕선생님의 석사과정 지도학생이 됐고, 1998년에 졸업을 해서, 이 학자들과 더 깊은 교류를 갖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회합에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는데, 즉 이들이 구성한 아주 독특한 사회적 관계와 학술실천 방법을 접했다. 왕선생님의 학생으로서 나는 운좋게도, 그분의 매력적인 인격을 직접 지켜봤을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사람됨과 세상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평가하는 말이다) 이러한 매력이 구체적인 인생경험이 농축되어 나타난 것이라는 점을 체험할 기회를 얻었다. 이런 매력적인 사람됨이 환원되어 구체적인 역사적 실천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러한 실천과 유효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우리가 이를 계승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이 글에서 말하는 ‘지식청년’은 특정한 그룹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일련의 사회역사요소적 속성을 의미한다. 지청시대 학자들의 사람됨이나 학자됨을 적지 않은 ‘후지청세대’의 학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전체적 상황과 방식은 예전과 아주 많이 다르다. 지식청년시대 학자들의 진퇴결정이 학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변화가 이 그룹의 기복을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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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뺘오 项飙

옥스포드대학교 인류학과

 

이글은 <<문화종횡文化縱橫>> 2015년12월호에 실렸으며, 저작권은 문화종횡에 속한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KYkgtq_1fIMIbKVCwZRYZg

화, 2021/05/0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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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20년대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뒷마당’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미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 선언으로 북미 이남의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는 없었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독립과 함께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카메라를 보며 ‘한국식(?)’ 인사를 하는 쿠바의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2018. 07).

쿠바의 독립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셈이다. 1860년대 이미 세계 설탕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며 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주요 교역국이 이제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은행가들은 쿠바의 독립전쟁이 한참이던 19세기 말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탕 밭을 모조리 사들이며, 철, 니켈, 망간 등과 같은 광업 산업까지 매점, 쿠바 경제를 장악해갔다.

이로써 섬의 경제를 독점한 미국에게 이제 스페인을 아메리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기실 쿠바의 독립은 미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미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카리브해 섬의 독립은 이제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독립 직후 제정된 쿠바 헌법에는 이른바 “플랫 수정안”을 추가하며, 이제 미국은 쿠바 공화국을 내정간섭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신식민지의 시대를 열었다.

쿠바 경제를 장악한 미국 자본가들은 섬의 토착 지배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착취경제를 이식해 나갔다. 수출 단일 작물인 설탕 산업은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내의 소수 매판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며 쿠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미르의 지적처럼 신식민지 쿠바에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쿠바의 소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소위 ‘계급적 동맹’을 이룬 경우였다.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쿠바 민족주의는 고조되었으며, 단일 작물 수출경제에 기반을 두는 대형 플랜테이션 경제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계급을 양산하며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도시는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반면에 아바나는 수천의 미국인들과 부유한 쿠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요트 클럽과 같은 폐쇄적인 사교 시설들로 넘쳐났다. 당시 쿠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 수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2/3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고 그마저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 같은 다수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이 1959년 쿠바 혁명이 반제국주의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다. 계급적 요구를 담은 쿠바 혁명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쿠바 민중들을 수탈하는 토착 지배세력과 계급적 동맹을 맺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1959년 혁명은 당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던 미국의 지배와 토착 지배계급의 수탈에 응답한 쿠바인들의 저항이었고 그들의 자주적 선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은 뜨겁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소위 노동계급 중심의 이론에 익숙한 서구 중심의 마르크스적 혁명 공식에 빗대어 비판을 받아왔다. 19세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서유럽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이론이 20세기 쿠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론은 현실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구체적 현실들이 이제는 거꾸로 이론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일갈한 베네수엘라 인류학자 사노하(Sanoja)의 지적은 새겨 볼 만하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심지어 그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럽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면, 약 100년 후 쿠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조건은 유럽의 그것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였고, 피델의 주장처럼 “1959년 혁명은 역사적으로 고착된 쿠바인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소위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끝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동구권 국가들과 동맹을 이루고 있던 쿠바의 미래도 이와 함께 불투명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도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그 정점을 찍기 시작하는 19세기 이후부터 줄곧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이들에게 실천과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 ‘자유’와 ‘시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자본주의 질서는 마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체제라는 공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자유’를 부정하는 불경한 일로 매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쿠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저에 흐르는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예로,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사회가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서 가능했다거나, 국제의료활동은 쿠바 정부의 내정실패와 인권유린 문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 등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과연 쿠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체제일까. 우선 체제의 정치적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쿠바의 독특한 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합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 같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쿠바의 보건정책의 핵심은 무상의료라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지급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혜택받는 상품이 아니며, 모든 쿠바 국민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권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개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동등한 “모두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같은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현재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의료 불평등의 최소화를 추구한 전략으로써 쿠바의 보건의료는 지역사회의학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모델의 주요 목적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책임의식과 참여,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이자 기획자로 주민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보건모델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과 같은 보건 의료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으니, 이 모델이 쿠바 지역사회를 개인이 아닌 “이웃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제로 작용했을지, 혹은 그 역으로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이 같은 의료시스템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자본이었을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쿠바의 지역사회는 여전히 이웃 간의 정이 훈훈했던 과거 우리 시대의 많은 일상과 닮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보건의료정책이 높은 의료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묘책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쿠바의 지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면 어떨까 한다.

화, 2019/10/2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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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브레튼-우드 회의에서 케인즈는 Bancor라는 초국적의 화폐를 사용하는 국제관리기구(int’l clearing house)를 설립을 제안하였는데, Bancor라는 화폐개념은 연구동료인 슈마허 교수와 함께 1940-1952년간에 국제무역과 금융결제의 수단으로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가 대표로 참석한 영국의 제안은 미국의 거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Greenback”은 미국달러 지폐에 대한 별칭이다

이는 미국이 강력한 대국으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선진국가들의 경제력 절반을 차지하는 제1의 채권국가이면서 무역흑자를 가장 크게 내는 나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미국이 제안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설립과 페그PEGG(주요 통화들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평균치를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한 고정환율제도가 도입되었다.

IMF는 국제간 거래를 관리하는 기구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미국은 17%(현재까지도)이상의 지분을 지닌 대주주국가가 되었다.

국가 간의 환율은 금과 연동된 달러에 기반하면서 이는 명시적으로 미국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는 것을 의미하면서, ‘Greenback은 금과 동일하다’는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로써 모든 국가들은 미국달러(The Greenback)를 무역거래와 부채상환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상품을 선적하고 관리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국제무역과 해외투자의 효율은 제고되었고 경제성장의 촉진을 가져 왔다. 국제기축통화로서 달러를 보유한 미국은 국제적 강대국으로 지급 불이행의 염려가 없이 국제자본시장에서 원하는 만큼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정부의 채권은 국제금융자산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는데, 이는 액면가치와 이자율을 미국달러로 상환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달러는 지구에서 가장 안전환 통화로 간주되었다(현재까지도).

만약 중국이 소유하고 있는 1조 달러어치 미국채권을 매각하고자 하면, 미국이 할 일은 채권을 구매하는 나라들에게 지급할 달러를 인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이자율이 오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는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경제에 재앙이 되겠지만, 어찌하든 미국은 채무에서 해방되어 있는 국가인 셈이다. 반면에 중국은 평가절하된 Greenback을 손에 쥐게 되거나, 미국에 대한 채무부담을 효과적으로 줄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에 일본의 엔화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에 미국은 플라자합의라는 명분으로 일본 엔화를 절상시키도록 강압하여 달러로 이루어진 직접투자가치의 33%를 축소시켰다. 미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부채 역시 같은 비율로 줄어들었고, 일본은 그만큼 가난해진 셈이다.

미국은 모든 정권을 통하여 제재대상 국가들에게 기축통화라는 수단을 특권으로 악용하여 왔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대통령인 미국은 자신이 제제의 대상으로 삼은 이란과 거래를 지속하는 유럽의 기업들에게 SWIFT(국제결제창구)와 같은 달러기반의 결제 플랫홈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위협하였다. 이러한 협박은 궁지에 몰린 이슬람공화국(이란)의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유럽 국가들의 사업기회를 잠식하였다.

최근 사례로는 중국인민은행과 홍콩자치행정부에 대한 제재를 둘 수 있다. 홍콩에 대한 중국본토의 국가안전법 확대적용에 대하여 홍콩자치행정부가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사용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축통화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의 달러를 기반으로 설립된 국제기구들(IMF와 세계은행 등)과 금융제도들을 통제하고 국제간의 금융거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더욱이 채무국가들에게 워싱턴 컨센서스(1989년에 영국경제학자인 J. Williamson이 명명했다)의 채무제공조건으로 경제불황에도 재정긴축을 강요하고, 무조건적인 자유무역을 강요하며, 공공자산의 민영화를 강제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시아에서 남아메리카 그라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채무국가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빌린 채무부담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채무국가들은 경제회복을 위하여 재정적자의 운용 또는 재정지출의 확대를 금지하면서 취약한 경제는 승수적으로 더욱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재정수입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현재의 채무를 갚기 위해서 더 많은 채무를 빌려야 하는 “채무의 함정” 순환에 손쉽게 빠져들게 된다 (편집자: 이에 더하여 채무상황은 반드시 평가절상된 달러로 해야만 하는 이중의 불평등이 작동한다).

이렇게 미국이 경제와 금융의 권력과 기축통화국의 특권을 악용하는 것에 대하여 중국의 전직 인민은행장(Zhou Xiaochuan)이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 대신에 IMF의 특별인출권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Zhou은행장의 제안은 미국이 개발국가들의 독자적인 경제개발과 외교정책의 권리에 제재를 가하는 미국의 횡포를 방지하자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IMF와 세계은행의 지분을 17% 이상 소유하면서, 현재의 정책 방향을 수정하는데 필요한 특별조항인 85% 이상의 결의조건을 요구하는데, 이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인출권이 새로운 기축통화의 후보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따라서 중국과 주요 경제권은 함께 협력하여 달러와 미국의 영향아래 있는 IMF 및 세계은행과는 독립된 별도의 새로운 국제통화방식을 설정해야 한다. 새로운 통화의 가치는 협력하는 회원국가들의 가중치평균(페그방식)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회원국가들은 경제의 규모에 따라 무역과 금융의 결제를 위한 신용한도의 할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느 회원국가의 상황이 신용한도를 넘어서는 자금지원이 필요한 경우에,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부채의 함정’을 방지하는 선에서 추가적인 채무제공이 가능해야 한다.

미국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과제이다. 이로써 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정되고 자유로운 국제적 경제질서와 금융시스템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출처: Asia Times on 2020-07-10.

Ken Moak

지난 수십 년간 아시아의 여러 유수대학에서 경제이론과 국제정치에 관련하여 화제의 저명한 강연을 진행하였고, 현재 Asia Times의 편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 ‘중국경제의 굴기와 국제사회의 충격’을 출간하였다

월, 2020/08/0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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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마카오는 1997년, 1999년에 각각 중국에 반환된 이후 일국양제(한 국가 두 체제)로 정의되는 방침에 따라 통치되었다. 홍콩과 마카오 모두 중국과의 재통합 이후 특별행정구역(SARs)으로서 50년간고도의 자치권을 보장받았다.

두 도시는 중국령이 되었지만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된 행정, 입법, 사법 자치권을 통해 독자적인 국정을 관할한다. 홍콩 기본법에는 중국 정부가 외교와 국방에 대한 주권을 갖는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치권 보장이 끝나는 2047년에 과도 시한이 끝나고 나면 홍콩 도시의 미래는 중국에 귀속된다.

선거가 치루어진 이후, 중국 인민일보의 1면 논평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실렸다.

“홍콩은 중국의 홍콩이고 홍콩 사무는 중국 내정에 속한다. 홍콩 문제에 외부 세력의 간섭을 불허하는 것은 중국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브라질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밝힌 바와 같이 중국 정부는 변함없이 홍콩 문제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떠한 개입도 반대할 결의를 지녔다고 전했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지난 11월, 홍콩에서 구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범민주당이 “전체 452의석 중 347석을 차지하면서 압승을 거뒀다”고 보도하며 18개 구 중 17곳을 장악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홍콩 구의회(DC)는 홍콩 입법회와는 다르다. 홍콩 구의회는 “지역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교통, 환경, 거주 환경과 같이 생계와 관련하여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수개월 간의 ‘반체제 반향’으로 인해 2015년 선거때 47% 투표율과 비교했을 때 71%의 높은 투표율로 이어졌고, 투표 결과 또한 상당히 상이하게 나타났다고 전했다.

“범민주당이 선거에 압승하여 득의만만하자 유권자들 전반에 걸쳐 명백하게 불만스러운 모습이 나타났다.  2015년 이후 이번 선거전까지는 건제파가 지방의회를 차지하고 있었다.” 최대 친중 정당인 민주건항 협진연맹(민건령, DAB)은 기존 119석에서 줄어든 21석을 얻는데 그쳤다.

 

홍콩의 시민 불복종 운동 또는 미국의 색깔 혁명 시도?

이제 민주파는 홍콩행정장관을 선출을 담당하는 선거위원회에서 중요한 대표성을 띄게 된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식 폭력, 공공 기물 파손(반달리즘)과 혼돈 대신에 비교적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이에 중국을 와해하려는 워싱턴의 양당 강경파들의 분노를 감안했는지 여부는 향후 지켜볼 필요가 있다.

도시 거주민 대부분은 과거에 벌어졌던 폭력적인 상황에 명백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평온하고 정상적인 상황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홍콩을 와해 및 약화시키려는 (내부의 또는 외부의) 시도는 실패할 것이라면서 홍콩 도시는 중국의 특별 행정 구역임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주에 미국을 “세계 불안정의 가장 큰 근원”이라 일컬으며 “미국 정치인들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세계적으로 중국을 모함하고 있습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대대적으로 일방주의와 보호주의에 관여하면서 다자주의와 다자 무역 체계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미국이 제로섬 게임을 이어간다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중국과 미국 간의 협력과 공영만이 올바른 길입니다”이라고 덧붙였다.

패권주의적 목적을 위해 다른 국가에 대한 우세를 추구하고 상호 협력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히 미국의 운영 방식이 아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지난 지방 선거 결과를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번 구의원 선거는 현재는 철회되었으나 도시의 불안을 촉발시켰던 범죄인 인도법 개정안 이후로 홍콩특별행정자치구에서 처음 시행된 여론의 결과입니다.”

“지난 5개월 이상 동안 폭도들은 외부(미국)세력과 협력하여 지속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고 강화하여 사회 및 정치적 대립, 사회적 정서 내 균열을 일으키고 경제와 민생에 지장을 초래했습니다.”

“수개월간 이어진 사회적인 동요는 선거 과정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 있다. 일부 폭도는 선거 당일에도 애국적인 후보를 교란했습니다.”

“오늘날 홍콩의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전히 폭력 및 혼란의 종식과 질서의 회복입니다.”.

신화통신은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인민일보 역시 투표율이 높았고, 개표 작업을 완료했으며, 의원 사무실 100곳이 파손되었다는 사실을 약간 더 언급했을 뿐 선거 결과를 보도하지 않았다.

중국 영자신문 차이나데일리는 야당이 승리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동시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뻔뻔스럽게 무법적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도시 주민들은 몇 달 동안 CIA에 의한 폭력, 공공 기물 파손, 혼돈 속에서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현재의 상대적 평온함이 회복되고 지속된다면 미국이 새로이 중국 내정에 간섭하기 이전의 휴지기일 뿐일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보여준 무법천지의 배경은 바로 미국 제국주의의 사회악이다. 그들의 어두운 세력은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변화를 꺼리는 마음에 의해 홍콩 시민들이 스스로 파멸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Stephen Lendman(스티븐 렌드먼)

시카고에 거주하는 자유 연구자로서 글로벌리서치의 정기기고자이다.

월, 2019/12/30-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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