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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5) 휘하에 십만의 대병(大兵) 말없는 26년 전 구지(舊址), 소련서 활약하는 김광서(金光瑞)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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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5) 휘하에 십만의 대병(大兵) 말없는 26년 전 구지(舊址), 소련서 활약하는 김광서(金光瑞) 장군

admin | 수, 2019/10/30- 00:45

[자료소개]

편집자 주–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자유신문』 1945년 10월 11일자 기사 「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5)-김광서 장군편」이다. 자유신문사는 해방 직후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워온 망명지사들 가족을 방문하여 망명지사의 근황을 알아보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김광서 장군 편에서는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연고자들을 인터뷰했다. 이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망명지사들에 대한 관심과 성원이 대단히 컸음을 알 수 있다.


 

해외에 망명한 혁명지사 중 로서아로 망명하여 이래 26년 동안 그곳에 있다는 김광서(일명 金擎天) 씨의 가족을 방문코저 더듬더듬 알 만한 길을 통해 처음 얻은 소식은 이러하였다. 사직골 막바지 전 부기동 아래 무덕문 뒤로 찾으면 아직도 전에 그가 살던 구지(舊址)가 있으리라는 대단 명료치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기자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단서이었다. 무덕문 옛터라는 곳은 전에 일본인중학이던 경성중학 뒤 그리고 일인 관리들의 사택이 있는 동리이었다. 그러나 이러타 할 구지를 찾을 수 없어 그 동리에서 나아서 자라서 지금 70이 넘었다는 사직골 막바지의 고로(古老)를 찾으니 자기가 잘 아노라 하면서 들려준 이 얘기에서큰 광명을 발견하였다. 고로의 이야기는 이러하다.

저기 세집들이 많이 들어앉은 터가 바로 그 김대장댁 터이요. 지금 번지로 사직정 161번지(166번지의 오기-편집자)지요. 기미년 만세를 불렀던 바로 전 해(1918년) 가을에 김대장이 일본서 우리 동리에 나와 사시게 되었지요. 그때는 집 한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연못가로 큰사랑, 작은 사랑이 이었는데 날마다같이 굉장히 손님들이 많이 오시더군요. 그때 식구는 김대장 내외분하고 나이 든 누이 한 분과 애기 둘 이렇게 단출합디다. 김대장은 아침저녁 용산군대에 나갈 적에 말을 타고 나가고 들어가는 □□ 우리와는 가까웁게 지내지 않았지만 드나드는 이 말로 보면 대단히 후한 이라고 합디다. 저 세집들이 □□ 수년 전까지도 돌기둥에 ‘김광서’라는 백자기 타원형 문패가 역력히 남아있더니 인제는 그도 저도 없어졌군요.
벌써 그 양반이 아라사로 가신 지도 스물여섯 해나 되니까 짧은 세월도 아니기는 하지요.

하며 노인은 1919년 3월 1일 만세소동이 있은 지 그 후 얼마 후에 과연 김대장의 자취가 사라지고 졸지에 헌병대와 경찰과 형사들이 그 집을 둘러싸서 이 동리 사람들까지 자유로 드나들지 못하였던 당시의 삼엄한 경계상황을 말하여 바깥과의 일체 연락이 끊긴 후 김대장의 가족들이 얼마나 갖은 위협과 곤란 중에 지내왔는가를 지금도 □□□□□□하는 태도로 한숨지었었다. 이같이 노인의 말을 통해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김경천 씨가 만세 후 로서아에 망명하였을 당시에 한 동리 사람으로 듣고 본 사실담에 한 토막이었다.

◇ ◇

기자는 다행히도 또 새로운 광명을 잡게 되었으니 위에서 들은 사직골 노인의 이야기가 김경천 씨에 대한 서화(序話)이라면 이것은 그 본실이며 후일담이다. 이 얘기를 들려준 분은 최근 소련으로부터 입국한 홍복린(洪福麟) 씨이다.

내가 김경천 선생을 처음 뵈옵기는 지금부터 25년 전 소련 연해주 따뷔이라는 조그만 어촌이었습니다. 20 당년의 나는 혈기에 날뛰는 한 젊은이였습니다. 말로는 큰 뜻을 품고 고국산천을 떠나 이곳에 나왔으나 아무런 계획도 아무런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사실 쓰라린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때 나를 건져주시며 나를 용기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김경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은 내가 연해주에 들어가던 바로 전 해 가을에 그곳에 오셨던 것입니다. 선생은 일본의 현역 기병대위로 혁명에 뜻을 품고 3.1운동 당시에 국내운동에 참가하다가 일본 관헌의 마수에서 벗어나 연해주로 망명하신 것이었습니다. 로서아에 입국하신 후 처음에는 그가 일본 군인이었던 관계로 조사 밀정이라는 혐의로 로서아 관헌의 박해를 당하여 적지 않은 고생을 하시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조선의 혁명가임을 확실히 알게 되자 그네들은 특별한 대우를 하게 되어 당시 10여 만이나 넘는 연해주의 조선인 통솔자로 임명하고 따뷔 어항의 어업조합장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래 선생은 재주 조선인의 사도며 지도자로 활동하시는 한편 그분이 □□□ 뜻하였던 장차 조국의 완전 독립을 위하여 싸우고 또 조국이 완전 해방된 후 조국을 지킬 국군 육성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중략) 선생이 이미 59세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렇게까지 모발이 흴 때는 아닙니다마는 이역 고투 20여 년에 선생의 모발은 은발같이 하얗게 되시었습니다. 선생의 위업 조국 국군의 선봉이 될 중견군은 지금 크게 자라고 있습니다. 현역 예비역 후비역을 통합하면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조국 군인은 10만이나 됩니다. 이번 독소전쟁에 하리보우 싸움에서 위훈을 세워 조선 군인의 성가를 세계에 떨친 것도 선생 휘하의 조선 군인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네들은 반드시 조국을 위해서 큰일을 할 것입니다.
로서아와는 지금까지 너무 □□하고 너무 비밀을 엄수해온 □□이었던 관계로 그간에 정보를 알 길이 없고 따라서 김선생의 소식도 망명 혁명지사 중에서 알려졌던 사실이지요.

홍복린 씨의 얼굴은 흥분으로 홍조를 띄우고 그의 말은 열화를 품은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김경천 씨와 다만 한 분의 육친인 손아래 누이 한 분이 현재 서울에 거주한다고 한다. 기자는 그분을 소개하기를 원하였더니 ‘너무 만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만 두셔도 좋지요’ 하였다. 기자는 김선생의 한 분 누님이 가까운 장래에 그리우시던 오빠를 만나시고 길이 행복하시라고 혁명지사 유가족에 대한 경의와 축복을 표하기로 하였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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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잊으면 잃고, 잃으면 잊혀질 역사와 진실

 

김지형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를 만나러 가는 길, 휴대전화를 분실했습니다. 다행히 습득하신 분과 연락이 닿아 휴대전화를 되찾았고, 효창공원앞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12시 55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치는 언덕길을 얼마나 지났을까요. 집결지인 백범기념관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인파, 행사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땀에 젖은 옷깃은 축축했고, 늦은 것에 대한 무안함과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스스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감사하게도 민문연 선생님들께서 땀에 젖은 지각생을 친절히 안내해주셨고, 기쁘게도 행사에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건네주신 생수로 목을 축여 더위를 씻어낼 수 있었고, 진중함에 위트까지 더해진 해설에 금방 몰입되어 탐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탐방의 시작은 백범 김구 선생님의 묘역 앞이었습니다. 백범 선생님의 삶과 같이 위엄과 담대함이 느껴질 만큼 커다란 묘역이었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는, 민중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바라셨던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왕릉처럼 거대한 무덤 속에 잠들어 계신 선생님이지만, 그분은 지금도 자신의 호(號)처럼 평범하게, 민중과 동등한 눈높이에서 함께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나마 들었습니다.
백범 선생님께 묵념을 드리고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그리고 안중근 의사께서 잠들어 계신 묘역 앞에 섰습니다. 그분들께서 민족을 위해 손에 쥐었던 총과 폭탄의 중압감은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오히려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울 수 있음을 영광으로 생각하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숙연함만이 느껴졌습니다. 독립을 위해 온몸으로 희생하신 그분들 앞에 이외에 어떤 감정은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유해가 발견되지 못한 안중근 의사는 허묘 안에서 넋으로만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분은 민족에 긍지와 독립 열망의 불씨를 쥐어 주셨지만, 후손인 우리는 그분의 유해 한조각도 찾아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었습니다. 탐방 중 가장 부끄럽고, 마음이 아팠던 순간이었습니다.
다음은 임정요인 묘역 앞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이동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차리석, 군무차장 조성환…….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성함만 얼핏 들어본 것이 전부인 세 분이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너무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진정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한 게 맞는 것인가?” 솟구치는 부끄러움에 잠시 더위를 잊을 만큼 온몸에 한기까지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와 죄송한 마음입니다. 묵념을 올리며 앞으로 세 임정요인의 행보를 기억에 새기고, 감사함을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습니다.
탐방의 마무리는 대망의 식민지역사박물관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상해임시정부 정문의 모습을 본따 지어올린 계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와 탐방객 모두는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고, 내부에는 민족의 아픔과 치욕이 기록된 일제강점기 사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조들의 목을 겨눴을 일제의 총과 칼부터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기록물까지……. 모든 것들이 슬프지만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민족수난의 증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인연, 소중한 공간, 하물며 소중한 물건 하나만 잃어버려도 적지 않은 아픔을 느낍니다. 아픔의 크기만큼 그것이 소중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비할 바는 아니나, 행사장으로 가는 길 휴대전화 하나만 잃었을 뿐인데 큰 당혹감을 느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물며 국가를 잃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 어떤 감정일까요. 형언하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일 것이며, 저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이번 행사를 통해 잊어도, 잃어도 안 될 역사와 진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간담회 자리에서 부친의 강제동원 역사를 말씀하신 어르신을 뵈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어르신의 또렷하고 강인한 시선, 단단하고 꼿꼿한 어깨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아픈 역사를 생생히 목도하고 기억하기 위해 눈빛에 총기를 잃지 않으시고,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견디기 위해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고 살아오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이 실린 시선과 어깨를 통해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시대의 증인으로서 현장에 함께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끝으로 저를 박물관 회원으로 연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저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고 뜻깊은 현장을 의미 있는 영상으로 남겨주고 촬영과 더불어 원활한 현장 진행을 위해 달려주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하기 쉽게 해설을 진행해주었고, 이 모든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준 민문연 모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뜻깊은 자리에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수, 2021/07/28-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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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 마당]

광저우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슬픈 노래 그리고 마침 비가 오는지라 높게 이는 연못물이 아득하고 구슬퍼서 물결을 가르고 또한 헤집는 듯하였다. 우산을 펴고 희생자 분향탑을 지나 뒤쪽으로 막 층계를 내려간 순간 보이는 크나큰 호수 그리고 갑자기 들려오는 음악소리, “저 음악은 1년 365일을 끊이지 않고 울립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끊임이 없습니다.” 안내해주는 분의 설명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음악소리는 공원에서 시시때때 틀어놓고 듣는 그런 소리는 아니었다. 해금을 닮은 깽깽이 소리가 구슬프게 하늘을 맴돌고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어지자 다시금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지면서 구곡을 끊어내는 듯 한꺼번에 울어내는 소리가 허공에 사무쳤다.
오늘 아침에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을 간다고 하였을 때 그곳은 그저 과거의 지나간 한때였으며 혁명의 와중에 흔히 있는 싸움과 희생 그리고 후세의 승리자들에 의해 선별되어진 유적들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와서 음악을 듣는 순간 달라졌다.
공원은 월수구(越秀區) 안에 있다. 여느 공원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찬양한 기념비와 조각들이 즐비하다. 그러나 이곳은 광저우 코뮨의 3일 천하로 끝난 아쉬움, 사람이 많이 죽은 아픔으로 충만하다. 공원의 한가운데에는 당시 코뮨 때에 희생된 5천여 명이 넘는 시신이 모셔진 커다란 봉분이 있다. 그 봉분에는 150여 구의 조선인 시신도 있다고 한다. 1920년대의 광저우는 혁명의 중심지였다. 약 800명에 달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만주나 러시아, 일본 등에서 왔으며, 그들은 이웃나라 혁명의 성공이 조국독립의 선결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들에게 1927년 국민당의 쿠데타로 공산당이 궤멸되고 또한 반군벌 반봉건세력이 무너질 때 조국의 독립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중국인민은 그들 나름대로 지방군벌이 득세하는 나라에 대한 걱정, 한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국민당의 배신으로 멀어져간 조국독립에의 꿈이 광저우 봉기의 시발점이었다.
그즈음 나는 김산의 광동에서의 흔적을 탐사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있었다. 1927년의 김산 역시 이곳 기의(起義)에 참가를 하였었다. 그들은 장개석 군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광저우 군벌 진형명(陳炯明)이 잠시 외지로 나간 틈을 타 봉기를 일으켜 광저우를 점령하지만 그들의 목숨은 장개석 군대와 진형명 군대가 돌아오면서 끝을 맞이하게 된다. 치열한 전투 끝에 그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참고로 그는 이곳에서 흔적없이 사라져 간 150여 명의 조선인 동포들을 ‘물에 녹은 소금’이라고 비유하고 안타까워하였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피해 층계를 내려와 찾은 곳은 팔각정자였다. 왠지 빗소리에 멀리서 들리는 듯 하던 음악소리가 연못을 지나갈 때는 더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왼쪽) 조우원용과 천티엔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오른쪽) 혈제헌원 정자

연못가의 녹음으로 가려진 곳이 음악소리의 발원지였다. 소리는 울부짖듯 한꺼번에 내딛다가, 흐느낄 듯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질 듯 하고 다시 봄날의 햇빛처럼 찬란하게 흐르는 곡조의 유장함이 더해지고 종국에는 모든 악기들이 한꺼번에 어우러져 내는 소리로 마감되었다.
조우원용(周文雍)과 천티엔쥰(陳鐵軍)의 죽은 시신은 그렇게 양쪽의 연못에 버려지고 묻혔다. 1927년 11월, 남창(南昌) 봉기에 이어 광저우에서 봉기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나중에 봉기의 주모자들을 체포할 때 이들도 잡힌 것이다. 봉기가 실패한 결과는 5천여 명의 목숨이 조선에서 온젊은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했다. 조우원용 23세 그리고 천티엔쥰 24세, 그들은 처형되기 직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이 둘의 이승에서 맺어지지 못한 사랑을 기념한 정자(血祭軒轅亭)는 1957년에 세워졌다. 연못은 당시의 처형장이었으니 이곳에서 죽어간 것이다. 끝간 데 없이 허공에 울려퍼지는 음악소리는 사실은 그때 죽은 사람들과 조우원용 그리고 천티엔쥰의 진혼곡이었음을 알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정자 곁에 세워진 그 두 사람의 동상. 약간은 머리를 숙인 듯, 조우원용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천티엔쥰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호수의 중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보이는 커다란 정자는 봉기에 참여한 150여 명의 조선인 희생자들을 기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94년 전, 나라가 망하고 설움의 길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젊음들이 해왔던 선택이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이번에는 공간을 달리하여 한국이었다. 군사정권 아래 대학가는 뒤숭숭하였다. 그러다가 5월의 어느 날, 남쪽으로부터 흉흉한 소식이 들려왔다. 누군가 끌려가고 실종되었으며 또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같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노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윤상원은 한때 은행직원이었다. 영어도 유창했던 그는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주화항쟁의 마지막 날 쳐들어오는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윤상원에게는 몇 년 전 연탄가스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같이 야학을 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비록 생전에 연인 사이는 아니었지만, 친지들은 이불운한 처녀 총각의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하였다. 이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바로 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윤상원과 박기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혁명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다는 구실로 피와 땀을 요구하였다. 절망과도 같은 삶을 개선해 보고자 죽음 앞으로 나섰던 사람들을 우리는 ‘선각자’라고 부르고 잊지 못한다. 선각자라는 미명 아래 얼마나 많은 소중한 인명들이 이름 석자 남기지 못하고 꽃처럼 사라져 갔는가. 여기에서 ‘물속의 소금’ 그리고 ‘봄날의 눈’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 심지어 그들은 이념과 대립의 희생양이 되어 지금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한편 혈제헌원정의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그리고 광주의 윤상원과 박기순은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우리에게 남겨져 있고, 남겨져 있는 한 우리는 그들을 기억한다. 지금의 우리 모두는 이름을 남기건 남기지 못했건 모두 그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 누군가 이곳 정자를 낀 연못을 돌 때 들리는 노랫가락이 진혼가임을 안다면 한줌의 꽃이라도 그들을 위해 뿌려주지 않겠는가, 조우원용과 천티엔쥰, 윤상원과 박기순 그리고 남의 나라 혁명에 가담하고 이름없이 스러져 간 조선의 젊은 혼들에게.

토, 2021/08/28-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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