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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아닌 침략구호, ‘대동아공영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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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아닌 침략구호, ‘대동아공영권’

admin | 화, 2019/10/29- 23:09

[소장자료 톺아보기8]

 

해방이 아닌 침략 구호, ‘대동아공영권’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941년 일본에서 제작한 <대동아공영권지도大東亞共榮圈地圖>이다. 일본의 산업조합중앙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가정의 빛(家の光)????이 창간한 지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부록으로 발행한 지도다.
지도는 일본과 일본의 점령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과 항공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또한 일본의 적이 본토를 폭격하는 가상도를 최상단에 배치하고 아래로 일제가 꿈꾸었던 대동아의 인구, 면적, 일본인 진출 수 등 각종 통계표를 작성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은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대에 본격적으로 대두한 ‘정한론(征韓論)’을 기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정한론자들이 주장한 직접적이고 전격적인 군사점령 대신 ‘함포외교(Gunship Diplomacy)’라는 우회 침략의 방식을 취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1875)과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조선을 강제로 개항시키고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통해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등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을 유혈 진압하면서 마침내 한반도를 강점하기에 이르렀다(1910).
일본의 야욕은 이에 멈추지 않고 한반도를 전초기지로 삼아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본격화했다. 쇼와(昭和)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군부는 ‘황군(皇軍)’을 자처하며 군국주의로 나아갔고, 한반도 지배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만주와 몽고를 일본의 생명선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로 만주침략을 강행한 것이다. 여기에 대공황에 따른 정치·경제적 위기를 타개해야 할 현실적 필요성이 결합하면서 군부의 모험주의가 득세하게 되었다. 개전 두 달 만인 11월에 벌써 동북 3성 전역을 장악하였으며, 다음해인 1932년 3월에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은 점령지역 철수를 권고한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파시즘 체제로 전환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확대해 나갔다.
1937년 7월 일본은 베이징 교외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군사충돌을 유발한 뒤, 중국본토를 침략했다. 순식간에 베이징, 톈진을 함락한 일본군은 이어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고 수십만의 인명을 살육하며 가는 곳마다 태우고, 빼앗고, 죽이는 이른바 ‘삼광(三光)작전’을 펼쳤다(난징대학살).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함에 따라 일본은 전쟁물자 동원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장제스 국민정부에 군수물자를 지원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경제 제재를 강화해 나갔다. 이에 일본은 새로운 자원공급처가 절실하게 되었다. 결국 유럽 각국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을 빼앗기 위해 인도차이나(프랑스령) 침공했다. 이에 앞서 일본내각에서는 국책요강으로 ‘대동아신질서 건설’을 결정하고 이를 전쟁확대의 명분이자 전쟁동원체제 강화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아시아 민족의 해방을 위해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 전체가 단결해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하고 서양세력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은 그들의 전쟁을 ‘아시아를 해방’시키고 ‘팔굉일우(세계를 ‘천황’ 아래에 하나의 집으로 만든다)’ 정신을 바탕으로 각 민족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을 실현
할 ‘성전(聖戰)’으로 미화하면서 총동원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렇게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침략전쟁의 지속을 위한 인력충원과 물자 보충도 절실해져 갔다. 각종 전쟁물자를 양산하고 군사시설 등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군대의 경우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를 수행하는 현역 군인을 대신해 각종 군사 업무를 볼 민간인(군속)도 필요했다. 이러한 인력 수급문제는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젊은 여성의 징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전시체제 아래 조선 민중들은 오로지 일제의 대외 침략전쟁을 위해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고 쥐꼬리만큼 떼어주는 배급품을 가지고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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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10]

한 뼘의 땅도 남김없이 철저히 파악하라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자료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공시 제9호, 54.2×38.8, 1915.8.10

고사告辭, 38.8×26.4, 1916.10

 

일제가 식민지 경영의 재정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벌인 첫 과제인 토지조사사업은 강제병합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12월 통감부 설치 이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위해 한국의 토지제도와 토지소유관습 등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시작했다. 1910년 1월 그 결과물인 <한국토지조사계획서>를 대한제국 탁지부에 제출했다. 이 계획서는 토지조사국 설립과 토지조사 계획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토대로 1910년 3월 14일 「토지조사국관제」(한국칙령 23호)가 공포되고 토지조사국이 설치되었다. 명의만 대한제국 기구였지 실제는 일제가 주도한 기구였다.
토지조사국에는 총재, 부총재, 부장, 서기관, 사무관, 기사, 주사, 기수 등을 두었으며 총재는 탁지부대신이 맡았다. 또 대구·평양·전주·함흥 4곳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1910년 8월 「토지조사법」을 제정하였다. 사업 실행을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될 무렵 강제병합이 일어나면서 토지조사사업은 자연스럽게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임시토지조사국은 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30일 공포된 「조선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관제」(칙령 361호, 10월 1일 시행)에 따라 설치되었다. 이후 임시토지조사국은 1918년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토지의 조사·측량 등 토지조사사업과 관련한 일체의 사무를 총괄했다.(임시토지조사국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일제식민통치기구사전-통감부·조선총독부 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지조사사업의 핵심은 토지소유권과 경계를 조사하여 등기제도를 위한 장부를 제작하고 땅값을 조사하여 토지세를 부과하며 지형을 조사하여 전국 지형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각 지역별로 토지조사가 완료되면 이를 확인할 수 있게 공시한다. 연구소가 소장하고 있는 공시문은 토지조사 완료를 마친 경상북도 지역의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은 경상북도 내 상주군, 선산군, 군위군, 청송군, 칠곡군, 울릉도 등 총 6개 지역의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지역 내 토지소유자와 그 경계의 사정査定을 완료했다고 1915년 8월 10일자로 공시한다(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공시 제9호). 이와 함께 임시조사국에서 작성한 토지조사부와 지적도를 각 군청 소재지에서 열람하게 하여 토지 소유자가 확인하고 공시 기간 만료 후 60일 내로 이의신청을 받도록 하였다.
토지소유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절차가 복잡하고 경상북도의 예와 같이 확인작업을 거쳐 짧은 기간에 이의신청을 해야 했다. 상당한 땅이 신고 누락이나 방법의 미숙지로 인하여 조선 내 최대 지주는 조선총독부가 되었으며 재정 수입 또한 크게 늘어났다. 조선총독부는 토지 일부를 일본인 지주들에게 헐값에 불하하거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넘기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측량작업을 완료한 직원에게 직무와 성적에 따라 퇴직상금, 재직상금, 사업종료특별상금 등 다양한 형태의 정부 하사금을 수여하였는데 심지어 이러한 개인포상금 사용에 대한 통제를 실시한다. 포상금을 받은 직원들에게 정부의 “은혜로운 상금”을 쓸데없는 물품을 구입하거나 유흥비로 탕진하거나 혹은 고향에 돌아가서 마을에 자랑하기 위해 치장하는데 낭비하지 말고 저축하라는 공지도 내린다(고사告辭, 1916년 10월).
토지조사사업은 1918년 말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토지조사국은 1918년 11월 4일 임시토지조사국관제가 폐지(칙령 375호)되면서 해산되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금, 2019/12/2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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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 26]

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전시체제기 금속류 공출

강동민 자료팀장

 

애국부인회의 금속류 공출 장면, 사진주보 <싸우는 조선(戰ふ朝鮮)>, 1945

 

 

금속류 공출식 사진, 국민총력 개정면 연맹, 15.2×10.6‘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 ‘결전 아래 금속류 공출을 앞장서서 실행하자’는 표어가 창에 붙어 있다.

 

‘보전 김교장의 수범’, 매일신보 1943년 4월 2일자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우기 위한 ‘금속
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했다는 기사

 

놋그릇 공출,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2, 동아일보사, 1978

 

공출유기 대용 그릇, 지름 14.6×높이 8.3 일본은 온갖 놋그릇을 빼앗아가고 일부는 대용품으로 사기그릇을 주었다. 공출로 나라에 보답하자라는 뜻의 ‘공출보국(供出報國)’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故 송병준 백(伯)의 동상 헌납’, 매일신보 1943년 8월 8일자 ‘한일병합’의 훈공이 컸던 백작 송병준의 동상 2개를 송병준의 손자 노다(野田太郞)가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유기금속과 함께 헌납하였는데 수많은 일반인이 이를 보고 유기그릇을 헌납하였다는 기사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될수록 식민지조선은 더욱 황폐해갔다. 강제병합 후 식민지조선의 ‘땅’과 함께 ‘쌀’의 수탈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중일전쟁 이후에는 한반도 곳곳의 지하자원과 해양자원 그리고 삼림까지 통제해 전쟁자원으로 동원했다. 흔히 ‘공출’이라고 하면 전쟁에 사용할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곡물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전쟁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행위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쌀 이외의 전시수탈이 더욱 강화되었다. 무기생산을 위해 전쟁 직전인 1941년 9월 <금속류회수령>을 공포하여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갔다.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다.
특히 구리는 해군함정 중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재료로 막대한 수량이 필요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놋그릇을 식기로 사용하고 청동화로를 난방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그냥 두고 보고있을 침략자들이 아니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들의 각 가정에 엄청나게 사용되는 놋그릇과 청동화로 같은 구리제품 공출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최말단 조직인 애국반 등에 의해 금속류의 공출이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던 설철(屑鐵:쇠 부스러기)마저 단절되자 무기생산에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전국에서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긁어모았다. 구리로 제작한 동상(銅像)이나 쇠 난간, 철제 가로등을 비롯해 가마솥까지 공출됐다.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밥그릇은 물론 숟가락 젓가락마저 빼앗겨야 했던 식민지조선의 민중은 이제 일제가 나누어주는 소량의 배급품으로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다.

수, 2021/06/02-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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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22]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에 걸려 있는 77번 벽화 「일한합방」의 내용을 담은 그림엽서이다. 이 그림은 츠지 히사시(辻永)가 그렸으며, 조선총독부가 헌납하는 형태로 1927년에 제작 완성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도쿄부 양정관 국사회화관에 걸려 있는 70번 벽화 「한국병합」의 내용을 담은 그림도판이다. 이 그림은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가 그렸으며, 1942년에 제작 완성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경술국치와 관련한 전시도록에 곧잘 등장하는 것으로 ‘경성 남대문’의 모습을 그려놓은 한장의 그림엽서가 있다. 여기에는 석축(石築)에 담쟁이덩굴이 제법 달라붙어 있는 남대문의 전경과 그 뒤로 흘러내리는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천황의 은덕이 가져다 준 평화를 기뻐하고 있는 양 거리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엽서의 위쪽에는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 벽화(明治神宮 外苑 聖德記念繪畫館壁畫)”라는 표시가 있고, 아래쪽에는 다시 “[77] 일한합방(日韓合邦), 츠지 히사시 필(辻永 筆), 조선각도 봉납(朝鮮各道 奉納),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경성 남대문”이라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만 본다면 필시 1910년 8월 29일의 상황인 듯이 오해하기 십상이나 그 시절에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야 맞고, 실제로 이 그림의 초안이 그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 확인된다.
성덕기념회화관(1919.3.5일 착공, 1926.10.22일 준공)은 1912년 명치천황의 장례가 치러진 일본 도쿄 아오야마연병장(靑山練兵場) 장장전(葬場殿)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미술관으로, 죽은 천황과 황후의 유덕(遺德)을 연대순으로 묘사한 그림 80점(일본화 40점, 서양화 40점)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그림의 제작은 당시의 화족(華族), 국가기관, 지방공공단체, 민간기업 등이 봉납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 가운데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1882~1946)가 그린 ‘66번 서양화’ 「일영동맹(日英同盟, 1932년 완성)」은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츠지 히사시(辻永, 1884~1974)가 그린 ‘77번 서양화’ 「일한합방(日韓合邦, 1927년 완성)」은 조선총독부가 각각 헌납한 것이었다.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대벽화(大壁畫)를 그리다, 총독부(總督府)로부터의 위촉(委囑)으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 어젯밤 입성(入城)」 제하의 기사에는 이 그림의 제작과정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그가 사방 9척(尺)에 달하는 벽화의 화재(畵材)를 찾기 위해 평양, 인천, 기타 지방에 돌아다녔으며, 파성관(巴城館, 본정 2정목 93번지)에 터를 잡고 이곳에 화실(畵室)을 꾸민 다음 약 1개월가량 머물며 타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 1877~1943)의 도움을 받아 하도(下圖, 밑그림)를 완성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채록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 그림의 초안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는지 ????조선신문???? 1925년 5월 20일자에 수록된 「남대문(南大門) 앞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벽화(壁畫)를 찾아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의 분투, 쉽지 않습니다 …… 라고」 제하의 기사는 작품의 제작 상황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명치신궁의 대벽화의 화제(畵題)를 구하기 위해 체경중(滯京中)인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은 파성관(巴城館, 하죠칸)에 투숙하고 이에 10일 정도는 매일 오전 5시경부터 본사(本社, 조선신문사) 앞의 그린에 캔버스를 세우고 파레트를 한 팔에 열심히 브러쉬를 잡고 있었는데, 벌써 19일의 아침에는 캔버스의 한 면에 남대문을 전경(前景)으로 하여 짙푸른 남산(南山)이 등장하고 있었다. 츠지 히사시 화백은 브러쉬를 놓고 말한다. 
“벽화는 바야흐로 남대문 이것으로 결정하고, 10일 남짓 매일 오전 5시부터 스케치를 나와 있습니다만 이 원화(原畵)의 50배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단 완성되었지만 그 위에 부분 부분의 스케치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깐 한숨 돌리고 20일부터 4일간 정도는 미나미 군(南君)과 함께 평양에 다녀옵니다. 평소는 늦잠꾸러기라서 5시부터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소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나미 군’은 나중에 도쿄미술학교의 교수를 지내는 미나미 쿤조(南薰造, 1883~1950)를 가리킨다. 미나미는 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선전) 심사원(제2부 서양화 및 조각)으로 초빙되어 경성에 체류하던 상태였으며, 때마침 츠지도 경성에 머무는 김에 선전의 심사원으로 함께 위촉되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조선총독부의 위촉을 받아 ‘일한병합’의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츠지 히사시가 경성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의 보도 내용이다.

 

츠지 히사시가 한 달 가량을 체류하면서 ‘일한병합’의 벽화 원도를 구상할 때에 자신의 화실로 사용했던 ‘파성관(巴城館) 호텔’의 광고문안이다.

 

그런데 명치천황의 위업으로 치장된 ‘한국병합’ 관련 벽화그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도쿄부 양정관(東京府 養正館)에 설치된 국사회화(國史繪畵)에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벽화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3년 12월 23일에 황태자(皇太子, 나중의 아키히토 천황)가 탄생하자 이를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부에서는 “국사(國史)를 통해 웅대한 조국정신(肇國精神)을 체득하고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연성시키고자” 청소년수양도장의 창건을 기획하였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1937년 12월에 준공된 ‘도쿄부 양정관’이었다. 이곳의 본관에는 회화진열실이 마련되어 일본사에서 77개의 화제(畵題)를 선정하여 이를 일본화 45점과 서양화 32점으로 제작한 벽화가 상설 전시되었다.
이 가운데 70번째 그림이 바로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 1873~1942)가 그린 「한국병합(韓國倂合)」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전경과 저 너머로 백악산과 북한산 자락에 그려져 있고, 시가지에 그득한 기와집들마다 일장기가 나부끼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갓 쓴 조선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과 함께 조선인 소녀와 일본인 소년이 나란히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일장기를 잡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1942년 12월에 벽화가 완성되자 ????도쿄부 양정관 국사벽화집(東京府 養正館 國史壁畵集)????에도 수록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더구나 1943년 5월 29일에는 자신의 탄생 기념공간으로 만들어진 이곳 양정관에 일본 황태자가 직접 들러 벽화를 하나씩 세세히 관람하고 간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듣자 하니 양정관에 걸려 있는 벽화 그림들은 1955년에 이르러 이세신궁 징고관(伊勢神宮徵古館)으로 이관되어 이곳에서 관리 진열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래저래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서는 영광스런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장이 되어 반영구적으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될 모양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 2020/12/30-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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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6]

식민통치를 자화자찬하다 – 조선총독부 <施政25年史>

 

이제 우리 반도는 교육·문화·산업·경제·교통·토목·치안·위생 등 제반 시설을 모두 정비하여 완전히 지난날의 모습을 새롭게 변화시켰다. 불과 2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토록 눈부신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일대 사실이다.

<시정25년사> 표지
남면북양정책의 성공적인 성과물로 면양 교직포를 사용하였다. 부산시립 시민도서관 소장본(국립중앙도서관 원문이미지)은 면양교직포를 사용하지 않은 양장본인 것으로 보아 2종류의 표지를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지 통치 25년을 기념하기 위해 발행한 <시정25년사> 서문의 일부다. ‘낡은 문명의 보잘 것 없던 조선’은 ‘선진 문명국 일본’의 통치를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본서는 가로 19cm, 세로 26.5cm 크기에 매수가 무려 1,200쪽이 넘는 방대한 양이다. 표지는 조선산 면화와 양모로 방직된 면양교직포(綿羊交織布)를 사용하여 덧씌웠다.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값싼 조선인 노동력을 이용하여 일본에 필요한 면화를 충당할 목적으로 한반도의 남쪽은 목화 재배, 북쪽은 면양 사육을 강요하였다(南棉北羊정책). 이 과정에서 일본의 면방직 자본이 조선에 들어와 전국 각지에 직물공장을 세우고 조선인을 착취하였다. 이러한 식민정책의 결과로 완성된 면양교직포를 책 표지로 사용한 <시정25년사>는 조선발전의 찬란한 결과물로 둔갑되었다.
책장을 넘기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이마이다 키요노리(今井田淸德)의 서문이 쓰여 있다. 첫 머리에 “한국병합 당시의 조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늘날의 조선을 보고 그 진보의 발자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며 식민통치 ‘치적’을 들먹이기 위해 시동을 건다.
정무총감의 서문 다음에 목차가 구성되어 있고, 신·구 조선총독부 건물사진,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역대 통감과 총독(6명), 역대 정무총감(7명), 현재 총감과 정무총감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머리말(序說)을 통해 강제병합 전까지의 한일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역대 통감과 조선총독
1대통감 이토부터 2대총독 하세가와까지 제복차림이었으나 3대총독 사이토부터 양복 차림으로 변화한 것을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로 정책을 전환하면서 대외적인 이미지에도 변화를 주었다.
그러나 식민지배의 본질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조선총독 역시 군 출신자로 문관이 임용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조선과 일본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중에 조선의 사정이 대내외적으로 동요가 있어 그 피해를 항상 일본이 받아왔다고 주장한다. 청·일, 러·일전쟁도 조선의 영토 보전과 자국의 보호를 위해 국운을 걸고 감행했다는 것이다. 한일의정서를 맺음으로서 양국 동맹의 관계가 변화하여 한국의 내정이 일본인의 손에 의해 혁신되었으며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으로 한국의 폐정(弊政)을 이토 통감이 부임하여 개선시켜 나갔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일본의 성의를 이해하지 못한 ‘배일(排日) 무리’가 많은 단체를 만들어 불만을 나타내고 이토 의장이 하얼빈에서 암살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암살 위협에 놓여 있는 등 형세가 어지럽게 돌아가자 병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병합을 이룬 후 25년에 걸쳐 반도의 통치에 전력을 다해 시련을 잘 극복하여 세계 여러 나라가 인정하는 통치 업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시정25년사>의 주 내용은 바로 이런 취지를 바탕으로 조선 통치의 특징과 변천 과정을 상세히 수록하였다. 제1기 데라우치는 초대 총독으로 모든 시설들의 새롭게 만드는 단계로 제도를 만들고 조직을 새롭게 구성한 시기였고, 제2기 하세가와는 데라우치의 제도를 계승하고 정비하였으며, 제3기 사이토 시대에 산업, 교육, 지방자치 등의 발전을 이룩한 시기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이출입누계비교표
조선총독부는 ‘병합’ 직후인 1910년부터 1932년까지 해마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무역액을 보여주며 식
민통치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제4기 야마나시는 앞선 정책들을 충실히 실행하여 그 성과를 거두었으며, 제5기 사이토는 지방자치제도의 완성으로 통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비로소 제6기 우가키 시대에는 조선의 통치가 빛을 발해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하여, 13쪽부터 986쪽까지 약 1,000쪽에 걸쳐 각 총독의 통
치를 모두 찬양일색으로 정리하였다.
다음으로 55쪽에 걸친 연표는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조인>을 시작으로 <1935년 8월 29일 시정25주년 기념사업으로 종합박물관 설치 발표, 30일 제령 제12호 식산계령을 공포>까지 구성하였다. 이후 조선총독, 정무총감, 식산국장, 법무국장, 경무국장 등 총독 부 본부 관료와 각 지방 법원장, 도지사, 학교장 등의 인사(人事)를 기입하였으며, 부표(附表)에서 조선총독부와 소속관서 직제와 인구, 기상, 지방재정, 농축광산물, 금융, 철도, 도로, 통신, 교육 등 통계자료를 삽입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치적은 35쪽에 걸친 통계를 통해 알린다. 색상도표로 구성하여 식민통치 기간 중 조선의 ‘비약적 발전상’을 그래프로 보여준다.

 

 

발전하는 조선의 모습
정비된 도시와 발전하는 개항장, 쭉 뻗은 도로,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를 과거의 모습과 나란히 배치하여 조선의 ‘발전상’을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90쪽에 걸쳐 약 500점의 사진자료가 <시정25년사>의 압권이다. 경회루의 모습을 시작으로 조선신궁, 조선총독부, 각 지방 도청사와 같은 주요 시설물은 물론 도로망 확충, 농업생산력, 축산과 과수, 면업, 산림녹화, 금융 발전을 보여주는 사진, 교육, 예술, 보건, 생활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발전은 일본제국의 통치로 이룩되었다는 사실을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시정25년사>는 식민통치의 주요 치적을 자랑하고 이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만든 식민통치 미화 홍보물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5년 후인 1940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따른 전시동원정책을 미화하기 위해 <시정30년사>를 편찬했다.
• 강동민 자료팀장

화, 2020/06/2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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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18]

‘한국병합’을 기념한 침략의 주범들
– 「한국병합기념화보」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오사카신보大阪新報>가 제7666호 부록으로 제작한 「한국병합기념화보」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한 달 후인 1910년 9월 28일에 발행된 화보로 일본 내각의 주요 인물과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일본의 최고 권력자 메이지‘천황’ 무쓰히토의 사진을 중앙 상단에 배치하였는데 ‘메이지明治’의 이름을 생략하였다.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성스러운 천황의 이름’이라 표기하지 않고 비워 둔 것이다. 바로 밑에 고종과 순종의 사진을 나란히 게재했다. 태황제인 고종을 ‘이태왕’으로, 순종 황제는 ‘이왕’으로 표기했다. 이는 일본이 병합과 동시에 한국의 황제·황족을 왕족·공족으로 전락시키고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이어온 조선왕조를 패망시켰음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표기한 것이다.
메이지 사진 양측에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주요 인물들과 병합의 공로가 있는 조선의 인물을 배치하였다. 우측에는 강화도조약을 체결해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필두로 ‘소야만국小野蠻國’이라며 조선을 멸시한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정한론의 중심인물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명성황후를 살해하고도 무죄를 확신한 극악무도한 범죄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의병 대탄압을 지휘하고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한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郎 등 32명의 인물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좌측에는 을사늑약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이익선 보호’라며 조선 침략을 주창한 일본 군부 세력의 거물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강제병합을 자랑하고 무단통치를 감행한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금융지배를 확립하고 ‘한국병합기념장’ 수여받은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와 ‘일본의 보호정치는 한국의 이권’이라고 주장한 친일 미국 외교관 스티븐스가 유일하게 외국인으로 실려 있다.
이들 사진 밑에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조선왕실 종친들, 개화파 김옥균과 박영효, 을사늑약과 병합조약을 주도한 이완용, 이지용 등 주요 관리들의 사진을 게재했다. 이렇게 하여 강제병합과 관련된 일본의 주요 인물 57명, 유일한 외국인 스티븐스, 조선인 주요인물 17명 등 총 75명의 강제병합 주역들이 화보 상단을 채우고 있다. 화보의 하단에는 조선 13도를 그린 지도를 싣고 있는데 금, 은, 동, 철 등 조선의 지하자원 분포와 담배, 면화, 목화 등 재배 식물과 철도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의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와 함께 ‘일한연표’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내용이 기가 막히다. 한일관계를 ‘숭신천황 65년 7월, 임나국任那國의 소나카시치蘇那曷叱知가 조공을 받치면서 시작되었다.
’고 하면서 ‘신공황후가 여러 제국에 명하여 배를 타고 삼한 정벌’을 감행한 결과로 기술하고 있다. 주
로 일본이 한반도를 정벌하거나 조공을 바쳐온 관계로 설정하고 있는데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의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고 강화도 개항의 시초인 운요호 사건, 청일·러일전쟁으로 맺은 각종 조약의 과정들을 기술하였다. 연표의 마지막은 ‘명치 43년 8월 29일 한국병합을 달성하여 관보 호외에 발표’한 것으로 끝맺고 있는데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의 침략과정을 서술하는데 연표의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에 1909년 12월 말 통계조사에 따른 ‘조선국세일람’으로 조선의 면적, 인구, 재정 현황, 중요 생산액 등의 정보를 실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를 발행한 <오사카신보>는 오사카에서 발행된 3대 신문 중 하나로 1900년 9월 15일에 결성된 입헌정우회의 기관지이다. 입헌정우회는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총재를 맡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당으로 한때 3·1운동 탄압을 총지휘한 하라 타카시原敬가 사장이었다.
「한국병합기념화보」에도 등장하는 하라 타카시는 3·1운동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이번 사건을 국내외에 극히 가벼운 문제로 알리되 실제로는 엄중한 처치를 취하고 재발방지를 기하라’는 훈령을 내린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이었다.
2020년 8월 29일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지 110년이 되는 날이다. 일제강점기 징용문제, 일본군 성노예문제 등 아베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인식은 「한국병합기념화보」에 실려 있는 침략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파렴치한 저들의 행보를 끝까지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해방 후 75년이 지나도 지속되고 있는 저들의 가해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1910년 8월 29일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 강동민 자료팀장

수, 2020/08/26-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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