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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의 재정 위기: 분담금을 빙자한 미국의 국제적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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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의 재정 위기: 분담금을 빙자한 미국의 국제적 횡포

admin | 수, 2019/10/23- 22:03

편집자 주: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미국의 적극적인 제안과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유엔총회, 안전보장 이사회, 유엔사무국, 경제사회 이사회 등 4개의 공식기구와 국제 원자력 기구, 식량농업기구, 유네스코,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 등 산하의 여러 전문기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2019년 현재 193개 회원국과 37,000 여명의 직원을 두고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요 공여국인 미국의 상습적인 분담금 납입지연과 불이행 등으로 2019년 현재 수억 불이상의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의 글은 유엔에 가하는 미국의 횡포와 압력의 실상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유엔은 자금조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치 변덕스러운 회원들로 채워진 클럽처럼 유엔은 모든 회비가 제 때 들어올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일부 회원국들은 회비 지급을 미루고 있고 결제는 종종 실종된다. 미국의 경우, 현재 유엔 운영 예산의 약 22%를 담당하는데, 회계연도에 따라 10월 이후에야 회비지급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더 큰 문제의 일면에 불과하다. 회비지급 보류는 유엔헌장 17조를 위반하는 사항으로 예산상 행위만큼이나 정치적이기도 하다. 이 조항의 중요성은 유엔의 운영비용을 “총회가 배정한대로 회원국이 부담한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UN 외교정책과 조직의 개혁 문제는 부과된 회비를 줄이거나 보류하는 주요 사안들로 언급되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렇게 “부과된 회비”가 행정 비용, 평화유지 활동 및 다양한 프로그램에 쓰이는 비용을 부담하는 공식 정규 예산으로 편성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경우, 종전에는 기구 운영 비용의 약 40%를 부담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따라서 UN 조직에 어떤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추방, 유보, 자격 부인 또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경우 “미국이 연간 분담금의 지급을 유보하면서 매달 8.34%” 축소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었다.

재정 지원 문제는 돈주머니를 걱정하는 미 의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수년간 위원회의 붙박이 역할을 한 제시 헬름스(Jesse Helms)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미국이 유엔 회비를 전액 지불할지, 정시에 지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불렸다. 그와 함께 조 바이든(Joe Biden) 상원의원은 UN에 전액을 지불 하기 위한 전제로 다양한 “기준들”을 준수하도록 압박하는 협상을 1997년 타결했다. 여기에는 불가피한 UN 직원의 감축, 감찰관과 사무총장 간의 적절한 보고 절차, 타 기관에 대한 자금지원 금지 항목이 포함됐다. 2000년 1월, 헬름스 의원은 수 십 년간 의심해왔던 조직인 이른바 그림자 정부에 대해 충고하고, 참견하며, 잘난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UN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연설에서 독특한 인상을 준 한 미국 의원을 경험하는데, 그는 당시 UN 주재 미국대사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이었다. 유엔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면서, 그의 목적은 이 기구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빚쟁이”가 한 것으로 간주하는 비평가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엔의 최대 공여자인 미국 국민의 대표로서, 우리는 투자에 대한 대가로 구체적 개혁을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라고 공언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등장으로 미국의 자금과 유엔 운영비 사이의 훈훈한 협상의 새 장이 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사회복지 사업, 의료 및 교육 부문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는 이 조치의 타당성을 확신했다.

“이 기구는 부패했고 비효율적이며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18년 예산안에는 유엔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미국 자금의 절반을 삭감하는 조치도 포함됐는데, 이는 특히 기후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연방의회는 유엔평화유지활동 기부금 상한제 시행 안건에 동의했다.) 이와 같이 자금지원을 중단하여 유엔 기관들을 위협하고 압박을 가하는 사례는 여전히 미국의 관행으로 남아있다.

현재 회원국들이 유엔에 지불해야 하는 13억 달러 상당 중 미국이 체납한 금액은 10억 달러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불량한 수치의 누적은 미국이 다른 회원국들에 불만을 토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6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사무총장은 5차 위원회의 예산 감독관들에게 급여와 물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명성과 운영 능력에 있어서 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모든 회원국들이 분담비를 모두 제 때 지급하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금을 적소에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유엔은 5월 말까지 4억9200만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파국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하느냐가 앞으로 수 년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상황은 예상대로 악화됐다. 지난 10월 첫 주 월요일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10월말 현금 보유고가 고갈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유엔 사무국 소속 37,000명의 직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원국들이 2019년 유엔 정기 예산 운영에 필요한 금액의 70%만 지불했다. 이는 9월말 2억3000만 달러의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달 말까지 예비 유동자산 보유고가 고갈될 위험에 처했다.”

재정긴축 조치가 내려졌다. 컨퍼런스와 회의가 연기되고 있으며,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출장도 취소됐다. 유엔 대변인 스테판 두자릭(Stéphane Dujarric)은 회원국들에 압력을 가하며, 193개국 중 129개 회원국만이 “전 세계적으로 운영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채무 불이행을 방지하기 위해 연간 분담금을 전액 지불했다”고 밝혔다. 유엔의 의미와 영향은 회원국들에 달려있으므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세계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확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리서치, 2019.10.11.

비노이 캄프마크(Binoy Kampmark)

케임브리지 셀윈 대학의 영연방 학자. 현재 멜버른 RMIT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글로벌리서치 및 아시아-태평양 리서치의 기고자로 활동 중이다.

 

More info.

추가 정보

심 심 위스곳(Sim Sim Wissgott), UN 분석가.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10월 중 유엔의 재정이 고갈되고 있으며, 11월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려면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고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가 어떻게 현금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일까? 유엔의 재정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그리고 왜 허리끈을 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누가 유엔에 돈을 지불하는가? 193개 회원국은 모두 각 국가의 규모와 경제력에 따라 산출된 유엔의 전반적인 운용을 위한 연간 분담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다. 2019년 총 분담금은 28억5000만 달러로, 미국의 분담금(약 6억7420만 달러)이 가장 많이 책정됐으며 바누아투, 미크로네시아, 소말리아, 벨리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과 같이 국가의 규모가 작거나 빈곤한 경우 각각 최소 2만7883달러 만을 부담했다.

유엔의 재정 규칙 및 규정에 따르면, 이 자금은 해당 국가들이 그 해의 분담금을 통보 받은 후 “30일 이내 전액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매해 지급 기한은 1월 31일이었다. 하지만 기한을 준수하는 회원국은 단 몇 십 개 국가들뿐이다. 2019년 10월 8일 현재, 유엔은 여전히 분담금의 약 30%에 해당하는 63개국의 기금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의 전년도 미지급 연회비마저도 연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이번 주,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우리는 급여를 충당할 현금이 부족한 채로 11월을 맞이할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며 국가들에 회비 지급을 촉구했다. 유엔이 10년 만에 가장 큰 적자를 기록하며 “우리의 업무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고 덧붙였다.

그 돈은 어디에 쓰이는가?

유엔의 정기 예산은 뉴욕의 유엔 본부뿐만 아니라 비엔나, 나이로비,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통신과 정치, 인도주의 및 경제 업무 등을 운용하는 데 쓰인다. 르완다, 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평화유지 활동 및 국제 재판소는 별도의 예산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현재의 적자 상황을 “유엔이 직면한 최악의 재정 위기”로 표현했으며, 이는 공석을 채우지 않고, 필수적인 출장인 경우만 허용하고, 회의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은 돈에서 자금을 빌려야 할 수도 있다. 유엔은 전 세계 4개 주요 센터와 아프가니스탄, 말리, 아이티의 현장 사무소에 3만7500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유니세프, 유엔난민고등판무관과 같은 유엔 기관들은 자체 예산을 가지고 있다.

스테판 두자릭(Stephane Dujarric) 대변인에 따르면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올해 초 이미 상당한 수준의 비용절감 조치를 시작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유엔은 현재 약 6억 달러의 적자로 인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주요 연례 행사인 지난 달 총회를 개최할 수 없었을 것이다. 9월 말, 유엔의 적자는 2억3000만 달러였다.

브라질, 한국,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은 분담 지급을 미루고 있다. 특히 유엔 총 예산의 3분의 1을 지급하는 상위 6개 회원국 중에는 미국만이 2019년 분담금을 전액 지불하지 않았다. .

뿐만 아니라 각종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금년 분 4억 달러에 육박하는 체납금을 포함하여 지급해야 할 총 납입액은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유엔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해온 것에 오랫동안 불평해왔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자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지난 해 유엔총회에서 “세계주의의 이념을 거부하고 애국주의 원칙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지난 달 그는 세계 정상들에 “모든 파트너들이 공정한 몫의 방위비 및 기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유네스코(UNESCO)의 반 이스라엘 성향 및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과 함께 “증가하는 체납금”을 언급하며, 유엔 산하 교육문화기구인 유네스코를 탈퇴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해야 했던 “과도한 분담”에 대해 불평하며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유엔 프로그램인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와 낙태 관련 유엔인구기금(UNFPA)에 대한 지원을 삭감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첫 주 수요일 트위터에 “그러니까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하라!”는 글을 올렸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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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는 더욱 통제된 사회로 이끌어가는 듯한 여러 특징들을 보인다. 정보통신 기술의 ‘민주적’ 잠재성은 명백하다. 그러나 경제적 통제의 역학(소수의 다국적 대기업이 실상 정보통신산업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이 매우 강하며 신자유주의 시장의 공격성이 위험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세계적인 위기는 새로운 불안의 요인을 하나 더 추가시킨다. 곧 안정이라는 주제가 사생활 및 시민들의 권리를 밀어낼 위험이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보통신은 다면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네트워크는 동시에 여러 가지를 의미할 수 있으며, 분명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중요한 공공 장소가 될 수도 있다”De Blasio, 2014.

 

시민들의 인터넷 참여: 참여의 미래인가?

인터넷은 시민들 대부분의 직접 참여 방식으로서 이미 오래 전부터 정보와 통신, 정치적 활동을 위한 기반이 되었다. 인터넷은 전통적인 정치적 심의 형태를 대체하지 않지만, 많은 절차를 간편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온라인 참여예산처럼 오로지 인터넷을 통해 가동하는 방법이 있고, 공공 조사 등의 다른 방법들은 직접 접촉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적어도 인터넷 공간에서 의사소통 채널들이 교차되고, 평범한 시민들과 행정가 및 선출된 정치인들 사이의 거리를 크게 좁힌다.

무엇보다 e-정부(세금 신고, 온라인 기부 요청, 디지털 행정 등)와 e-민주주의 혹은 디지털민주주의, 곧 온라인 도구의 사용을 통한 정치적 선택과 선호의 표현을 잘 구분할 필요가 있다. 컴퓨터 공공 행정(e-정부)으로는 시민들이 공공 기관의 서비스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인터넷 신청에 국한된다. 행정적 절차가 정보기술적 방식으로 전개되어 직접 사무실로 찾아가는 것이 불필요해진다. 서비스는 더 빠르고 신속해지고, 행정은 더욱 투명하고 접근하기 쉬워진다. 적어도 인터넷에 익숙한 시민들에게는 그렇다.

디지털민주주의의 경우, 시민들은 이제 단지 공공 서비스의 고객이나 수혜자가 아니라 정치 의지의 형성과 정치적 현안들에 대한 소통 및 결정 과정의 동반 파트너이다. 인터넷 참여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여 정치적 결정과 심의 과정에 시민들의 능동적 참여를 허용하는 방법을 모두 포괄한다. 시민들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조사나 검사를 위해 접촉하고, 행정가나 정치인들과 대화에 들어가고, 청원서와 법제 안에 서명하고, 마지막으로 전자 방식으로 투표할 수도 있다.

물론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직접적인 만남과 집회, 사람들과 직접 만나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도 활발해진다. 현장에서의 만남은 원칙적으로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활동과 병행할 수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하여 인터넷은 더 큰 참여를 위해 그저 확고한 추진력이 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참여 형태를 활발히 전개하기 위한 기술적 전제 조건이 되기도 한다.

오늘날 이탈리아에서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민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의 참여민주주의와 컴퓨터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있는가? 개인들 사이에서나 블로그, 소셜네트워크, 시민들이 운영하는 컴퓨터 카페와 광장 등에서 활용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과 별도로, 공식 참여나 제도적 참여 면에서 이탈리아는 다소 움직임이 둔한 편인 듯하다. 전자-디지털 방식의 결정 및 심의 방법의 활용은 참여할 시민 단체 및 참여 방식의 목적과 성격, 프로그램 관리에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이나 법적인 틀에 달렸으며, 특히 정치적 의지에 달렸다.

 

점차 더욱 다양화되는 인터넷 참여 형태

보통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방법들은 광범위한 절차에서 쌍방향식으로 구체적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다. 단순한 공식 정보전달에서 시작하여, 심사를 위한 시민 자문과 쌍방향식 토론을 거쳐, 서명과 전자투표를 통해 시민들의 직접 참여에 도달한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 부문에서 완전히 네트워크상에서 시행하는 방법과 다른 온라인과 오프라인 참여를 병행하는 방법을 구분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대개 온라인 구성 요소들(가령 모든 서류, 교육 활동, 일정 등을 모아 해당 기초자치단체 사이트에 싣는 예비 단계의 공공 서비스)을 통해 고전적인 방식을 확대하는 것을 말한다. 유럽 차원에서 직접 민주주의의 첫 번째 도구인 유럽 시민들의 발안은 전자 서명 모음부터 시작하여 주로 네트워크상에서 시행된다. 다음 네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a) 인터넷 청문회

이미 널리 파급된 방법으로 현재 공공 기관과 대의 기구들도 특정 주제를 토론하고 모든 참여자들이 자신의 제안과 입장을 낼 수 있도록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대개 공공 기관에서 임명된 에디터들의 도움을 받는 공개 포럼은 개방형open end 온라인 토론 또한 허용한다.

b) 정치인들과의 온라인 약속

인터넷상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서면 교환과 문답식의 화상 채팅을 바탕으로 하는 공개 모임을 말한다. 온라인 공개 약속은 인터넷상에서 직접 중계될 수도 있다.

c) 온라인 청원

기초자치단체에서부터 유럽연합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공공 기관들은 해당 웹포털을 통해 청원서나 요구사항들을 제출할 기회를 제공한다. 보통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 국회들은 자신들의 사이트를 만들어 청원서를 제출하게 한다. 집단 청원은 공개 토론 플랫폼이나 국제 비정부 단체들에서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AVAAZ와 change.org가 있다. 전자 청원권은 전자 서명 모음과 연결시킬 수 있는데, 정한 기간 안에 요청사항을 지지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든 해당 기초자치단체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청원서를 열어 서명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d) 전자 서명 모음과 e-투표

온라인 참여는 투표권을 지닌 시민이면 누구든 온라인으로 국민발안 법제안이나 실행적 레퍼렌덤 요청서에 서명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며, 광장이나 기초자치단체 관청을 직접 찾아가 서명할 수도 있다. 미래에는 국민발안 법제안을 추진하려는 요청 자체를 온라인으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참정권은 미래에는 전자 투표로 보완될 것이며, 이는 스위스나 에스토니아 같은 여러 나라에서 이미 도입되었다.

 

세계의 전자 투표

무엇보다 먼저 e-투표를 투표자를 식별할 수 있는 직접 전자 등록시스템과 구분해야 할 것이다. 투표자는 POS(Point of Sale의 약자. ‘판매 시점 정보 관리’를 뜻한다─역자 주) 비슷한 인터페이스를 통해 스마트카드를 받는다. 투표소의 집계 작업을 간소화 하기 위한 이 전자 투표 기기는 인도, 브라질, 미국에 널리 보급되어 있으나 대다수의 민주국가들에서는 아직 서류 신원 확인과 손으로 하는 집계가 주류를 이룬다.

더 중요한 것은 인터넷 투표, 곧 좁은 의미의 전자 투표이다. 인터넷을 통해 유권자들은 그 시스템의 웹 인터페이스에서 돌아다니며 자기 기초자치단체 선거 사무소 사이트를 연다. 투표자 신원 확인은 홈뱅킹과 비슷하게 웹사이트에서 확인 조회를 통해 하거나 전자 신분증(에스토니아의 경우 참조)으로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시스템은 모니터에 선거 용지를 보여준다. 유권자는 자신의 선택을 표시하고 화면상에서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투표자가 확인을 누르면, 작성한 투표 용지는 선거 서버에 전달된다. 투표 집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투표소나 거주 구역 차원에서 결과를 집계하여 2차적으로 중앙 차원에서 그 결과를 모으거나, 혹은 모두가 중앙으로 집중되는 디지털 집계도 있을 수 있다.

오늘날 유권자들은 표를 직접 투표함에 넣거나 우편으로 투표한다. 전자 투표는 시민들이 컴퓨터, 스마트폰, 타블렛 등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온라인으로 투표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한 목적으로 직접하는 선거나 우편으로 보내는 투표와 더불어, 유권자들은 비밀번호를 받아서 그것으로 자기 기초자치단체의 포털에 접속한다. 그 다음에 단 한차례 자신의 표를 표시하면, 그 표는 암호 처리되어 무기명으로 전자 투표함에 저장된다. 해당 기초자치단체의 선거 위원회만이 전자 투표함을 열고 표를 해독하여 집계를 실시할 수 있다.

전자 투표는 종래의 종이로 된 선거표의 대안이 아니라 추가적이고 보완적인 형태로서 몇몇 나라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투표함에 하는 투표 및 우편 투표와 더불어 쓰이고 있다. 프랑스, 에스토니아 등의 몇몇 국가에서는 e-투표가 투표 참여율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과 노르웨이는 실험 후 전자 투표 시스템에 큰 당혹감을 갖게 된 나라들이다. 노르웨이의 지방 기관들 및 지역 발전부는 2003년 온라인 투표를 위한 플랫폼 도입과 더불어 시작된 시험 기간이 끝난 2014년 6월 모든 e-투표 방식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투표의 정확성 인증을 보장하지 않는 시스템의 안정성에 대한, 의회에서의 지속적인 토론 끝에 그런 선택이 나온 것이다. 결국 시민들 편에서 전통적인 시스템을 선호하여 비밀 및 자유 투표의 원칙을 지킬 생각이었다.

독일에서는 2009년 헌법 재판소에서 디지털 투표는 선거 시행시 적절한 방법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여 모든 형식의 디지털 투표를 폐지하였다. 독일 중앙 정부는 2000~2006년 사이에 직접 전자 등록기(DRE: 직접 기록 전자 시스템Direct Recording Electronic Systems)로 실험단계를 시작하여, 시민들 사이에서 운용 소프트웨어의 기능과 그 신뢰도에 대한 큰 우려가 일었다.

프랑스와 에스토니아는 e-투표가 유효하고 신뢰할 수 있는 투표 시스템으로 수용되어 편견과 불안을 극복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들은 이미 2003년부터 새로운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대의원을 선출할 수 있었다. 유권자들의6 0% 이상이 이 시스템을 전통 시스템보다 선호했다. 뒤이어 2007년 대통령 예비 선거를 위해 750개 투표소에서 같은 방법이 시행되어, 기록적인 투표율을 기록했다. 프랑스에서는 현재 해외 거주 유권자들이 전자 투표를 이용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모든 시민들에게 인터넷을 통한 투표 기회를 보장하는 최초의 나라들 중의 하나다. 2005년 에스토니아 유권자들은 인터넷이 연결된 컴퓨터와 디지털 신분증, 컴퓨터에 연결된 스마트카드 인식기를 활용하여 지역의 정치적 책임자 선출에 각자의 선택을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후 이 방법은 전국적 선거로도 확장되었다. 현재 인터넷 플랫폼은 시민들의 신뢰를 얻어 성장했는데, 2014년에는 유권자의 30% 이상이 전통 방식 대신에 e-투표를 이용할 것을 선택했다. 이 네트워크 시스템의 편의는 의무적으로 투표소를 찾아갈 필요가 없이 집에서 편리하게 투표를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 투표는 투표 참여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에스토니아의 유권자들은 그 외에도 각자의 핸드폰으로 에스토니아 경찰에서 주는 PIN 암호가 있는 SIM 카드를 활용하여 전자 투표를 위한 신원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투표 자체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한다. 에스토니아 유권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컴퓨터, PIN 암호, 전자 신분증 확인 기기뿐이다. 이렇게 어떤 인터넷 접속 스테이션에서도 투표할 수 있지만, 사전 투표날에만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세계 최초로 정치 분야에서 완전 온라인 투표를 선포한 나라이다.

핀란드는 2008년 헬싱키의 기초자치단체 선거에서 처음으로 전자투표를 시험했는데, 232표의 집계가 누락되어 선거를 다시 치러야 했다. 2010년 1월 20일, 핀란드 정부는 전자 투표의 최신 발전 상황을 관찰해 보겠다는 뜻과, 다른 한편으로는 비전자적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16년 기초자치단체 선거에서는 새로운 전자 투표를 시험했다.

스위스의 기초자치단체 및 칸톤 차원 레퍼렌덤 투표는 근 150년 동안 굳어진 관행이었다. 1980년대부터 도입된 우편 투표를 널리 활용함으로써, 유권자들과 선거 관리자들이 원거리에서 진행하는 긴 투표 절차의 운용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금세기 초, 법적 구속력이 있는 첫 e-투표를 시험해 보는 것이 논리적인 수순이었다. 스위스는 에스토니아와 함께 전자 투표 형식DFAE(Democrazia diretta moderna 현대 직접 민주주의, 2018년)을 도입한 첫 나라들 가운데 하나다. 2004년부터 14개 칸톤에서 200여 차례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실시되어, 많은 유권자들이 전자 방식으로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몇몇 기초자치단체에서 한 첫 시험 이후, 2010년경 여러 칸톤들이 무엇보다 해외 거주 유권자들을 위해 전자 투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연방 정부는 보안상의 이유로 2015년 여름 여러 칸톤에서 e-투표 시스템의 허가를 취소했다. 2017년 2월, 이 투표 채널의 활용기회는 26개 칸톤 중 6개 칸톤에서 약 15만 명의 시민들만 이용했다. 2017년 4월 5일, 연방의회는 시험 단계를 종료하고 전자 투표의 보편적 활용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입법 작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연방과 칸톤의 의원들 및 학자들로 구성된 관련 전문가 위원회는 2018년 3월 작업을 마무리했다. 곧 스위스에서 전자 투표가 우편 투표와 투표함 투표 외에도 보통 투표의 세 번째 투표 채널이 될 것이다. 2019년 중으로 칸톤 시민 2/3가 인터넷을 통해 투표할 수 있게 될 것이다DFAE(Democrazia diretta moderna 현대 직접 민주주의, 2018년).

그러므로 연방의회는 소위 ‘투표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 곧 종이 없는 투표라는 길을 열기로 결정했다. 투표 절차는 디지털화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부분적으로나 전반적으로 유권자들에게 종이 문서(투표 용지, 확인 용지 및 관련 봉투, 투표 설명 발) 송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스위스에서는 2019년 연방 국회 선거를 위해서도 e-투표 채널들을 이용할 터인데, 무엇보다 75만 명의 해외 거주 스위스인들이 이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 중 단 1/5만이 전자 투표 의사가 있는 이들의 명부에 등록했다. 스위스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표를 확인하는 시스템 또한 가동된다. 곧 모든 시민들은 자신이 이미 투표를 했는지, 또 자신의 표가 전자 집계로 등록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유럽연합의 차원에서는 유럽 시민들의 발안ECI: European Citizens’ Initiative을 위해 물리적 종이 서명뿐만 아니라 온라인 전자 서명 또한 허용한다. 유럽연합은 이 점에서 디지털 시대가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에 개방적이다. 유럽연합의 모든 시민들은 어느 곳에서든 서명할 수 있으며, 그저 자국의 선거 투표권을 지닌 유럽연합 시민으로서 각자의 신분을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사실 유럽연합 내의 엄청난 거리 상의 문제가 캠페인을 위한 서명을 모으는 것을 어렵게 하기 때문에, 전자 서명권은 서명하는 사람도 발안 위원회도 시간과 에너지와 비용을 절약하게 해 주는 거부할 수 없는 기회이다. 서명은 단순한 방식으로 이루어져, 유럽 위원회European Commission의 해당 사이트에 자신의 신분 확인증의 정보를 넣어 등록하면 된다. 나머지 국민 청원 및 집단 청원에 그런 전자 서명 방법이 이미 스위스, 에스토니아, 미국 및 베네주엘라 등 여러 다른 나라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쓰이고 있다. 서명 모음 기한은 ECI가 공식적으로 시작되고 나서 1년 동안이다. 온라인 디지털 서명은 해당 국가의 당국에서 증명되며, 그러므로 이탈리아에 규정되어 있듯이 “서명 인증” 요청은 전혀 없다.

이탈리아에서 유권자들이 표한 선택의 투표와 집계를 위한 전자 시스템이 자리를 잡는 데 고전하고 있는데, 정확도, 투명성 및 사생활 보호 측면의 위험을 걱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1년부터 다양한 실험이 실시되어, 특히 투표소에서의 전자 투표와 전자 집계(사르데냐, 리구리아, 풀리아, 라치오)를 실험했다. 그런 첫 시도들은 내무부 덕분에 시작되었다. 약 1만 3천 개 지구에서 처음에는 시각적 인식 도구를 활용하고, 그 다음에는 좀더 오랜 컴퓨터화 시스템을 활용하여 실시했다. 최근에는 풀리아 주 멜피냐노와 살렌토라고 알려진 마르티냐노의 레체 지방 기초자치단체들에서 실시된 프로젝트 e-투표는 화면의 터치스크린을 기반으로 하는 첨단 시스템을 활용했다. 이는 2013년 멕시코에서 이미 레퍼렌덤 자문 기간 동안 활용된 기술이다. 실험은 모두 긍정적인 결과를 나타냈으며, 사람들은 혁신과 디지털화, 사회2.0를 얘기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실제적인 결과가 없다.

2015년 롬바르디아는 자문형 레퍼렌덤의 경우 전자 투표를 도입하는 주 법률을 승인했고, 2017년 10월 22일 자문형 레퍼렌덤에서 이 실험이 성공을 거두었다. 전자 투표 시스템에 대해 찬반 토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탈리아에서는 아직 지켜야 할 실제적 지침이나e- 투표 방향으로 유도해 갈 정치적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 투표의 효과

여러 조사에서 나타나듯, e-투표는 두드러질 만큼은 아니더라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참여를 증가시킨다. 스위스나 에스토니아, 미국에서처럼(지방 선거), 전자 투표는 지금까지 정치적 참여에서 기권하려 했던 사람들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모두를 위한 전자 투표의 전반적 도입이 가져오는 결과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레퍼렌덤 권리 활용을 위한 문턱을 낮추어, 구조적, 제도적 장애물들을 더욱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국민발안, 확정적 레퍼렌덤, 청원 등은 적은 비용으로 짧은 기간 안에 시행할 수 있다. 이런 시민들의 요구에 응하려면 공공 행정 관청과 특히 기초자치단체의 선거 사무소들이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여러 목록에 오른 후보들에 대한 분리 투표가 이미 우편 투표로 가능해졌듯이 더 쉬워질 것이며, 후보의 예비 선거와 정당이나 커다란 조직의 내부 투표도 더욱 용이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정당의 판도가 그 영향을 크게 받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제네바 칸톤에서 관찰한 모든 선거에서, “전자 선거”를 한 사람들의 선택은 투표함이나 우편 선거를 한 사람들의 선택과 일치했다. 그러므로 e-투표에 호의적인 이들은 모든 정당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듯하다.

전자 투표는 시민, 정치인 및 직접 활약하는 다른 주역들 사이의 구조적 불균형을 줄여주고 더욱 평등한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자 투표는 이미 대부분 정치에 관심이 없는 그 사회 계층을 참여시켜 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실제로 전형적인 e-투표 유권자의 사회-인구통계학적 전망은 전통적 유권자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

결국 인터넷은 레퍼렌덤 권리와 연결된 절차들을 간소화하고 용이하게 해 준다. 서명 모음, 발안 및 레퍼렌덤의 홍보, 온라인 투표는 기술-조직적 차원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시킨다. 전자 서명 모음의 이득은 명백하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접근은 더 쉽고 즉각적인 것이 된다. 군소 단체들과 자금력이 없는 발안자들 또한 국민발안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디어 겨루기에는 수수한 이력을 지닌 이들 또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위험도 있지만 기회도 많다.

몇몇은 해커들의 선거 사무소 공격, 수백만 유권자들의 정보 조작 및 위키누출Wikileaks 식으로 그 정보가 인터넷에 유출되는 사태 등 악몽 같은 시나리오를 염려한다. 수백만 시민들의 사생활 보호권이 침해 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사건은 시민들의 전자 투표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신뢰의 상실을 가져올 수 있고, 민주주의 절차의 전문가들과 혁신가들에게 하나의 파국이 될 것이다. 어쨌든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과 프로그램이 이미 갖추어져, 경제와 행정 등의 다른 부문에서 벌써 여러 해 동안 작동하고 있다(예를 들어 홈 뱅킹과 전자 청구서). 어떤 경우든, 전자 투표 시스템을 한 개인 기업에 맡기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투표 용지의 집계 또한 개인 업체들에게 맡길 수 없다.

이 시점에서 또 다른 반대 의견이 제기된다. 만일 레퍼렌덤이나 발안 요청을 위한 서명이 인터넷상의 다른 모든 호소를 위한 서명처럼 그렇게 쉬워진다면 엄청나게 요청이 폭등하여 직접 민주주의는 평가 절하되고 말지 않을까? 국민발안의 물결이 레퍼렌덤 도구 사용을 폭등시키게 될 것을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 어쨌든 국민발안을 마련하고, 법적 허용성이라는 여과 장치를 거치고 온갖 지지 자료를 준비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지적 수고를 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새로운 여과 장치와 제한을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로 서명 모음의 용이성을 고려하여 요청하는 서명의 최소 인원수를 높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자 서명의 최대 인원수를 제한 할 수 있다. 여러 유럽 국가에서 이미 선구적으로 시작한 이 모든 절차가 성숙되려면 아직 10~20년은 걸릴 것이다. 디지털화는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어서, 이미 다음 세대에 투표함과 투표 용지, 수작업 집계 등이 시대 착오적인 현상이 될지도 모른다고 예측할 수 있다.

 

정보 격차digital divide와 민주적 격차democratic divide 사이의 디지털민주주의

디지털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정보통신을 다루는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는 민주적 절차의 적용과 지원이다. 인터넷과 정보통신 기술은 정치적 의사소통을 혁신시켰을 뿐만 아니라 투명성과 참여와 민주주의 자체를 강화시키기도 했다. 전자민주주의는 e-정부, 곧 전자 행정과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전자민주주의는 e-투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그 너머로 나간다.

인터넷은 공적인 공간을 재정의하고 확대시킨다. 19세기의 신문이 호기심과 교육을 자극하고, 그렇게 민주주의를 지원했듯이, 인터넷은 현대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방식을 변경하고 확장시킨다. 시민들의 정치적 권리는 정치적 대리인들의 선거로 끝날 수 없으며, 그 어떤 정당에도 속하지 않고 선거를 초월하여 정치 생활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주인공들의 역할에서 온라인 미디어와 비정부 기구들의 역할이 늘어나고 있으며, 정치적 활동가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대항 권력을 만드는 주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새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그들의 재선 가능성은 그저 인터넷 캠페인뿐만이 아니라 입법 회기 동안 수행한 그들의 성과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정치인들은 시민들과 유권자들과 대화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웹사이트를 갖고 있다. 한편 change.org, AVAAZ, Campact, wemove.org 등이 이끄는 인터넷 캠페인은 선거 캠페인을 바꿀 뿐만 아니라 정치인들과 그들 유권자들 사이의 관계 자체를 바꾼다. 선거는 이전 입법 기간 동안 그들이 했던 일에 대한 일종의 레퍼렌덤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230년이 흐른 후, “대표 없이는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라는 원칙의 가르침에서 이제 우리는 명백히 “관계 없이는 대표도 없다No representation without connection ”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치에서 인터넷의 영향은 자기 생각을 쉽게 전파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매체인 라디오와 TV에서 정보와 오락을 섞어 전달하는 것과는 달리 무엇보다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고 참여의 질을 높여 준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특징들을 지닌 인터넷은 막강한 시민 정치 참여 도구가 될 수 있다.

전자 투표 시스템을 갖춘 직접 민주주의나 결정권이 없는 심의민주주의에서 인터넷은 시민들과 행정부 및 의회 사이에서 쌍방향의 정치적 의사소통을 확대시켜 시민들에게 더 큰 참여의 길을 터 주었다. 보통 전문 언론인들이 만드는 매스미디어가 제공하는 주로 수동적인 공적 공간과는 달리, 인터넷은 이론상 양방향으로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은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현안과 요청을 정치적 의제에 올려 제기할 역량을 얻고, 의사소통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자율성을 다시 획득했다. 뉴스와 논평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경계선은 매우 유동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매스미디어”의 원리(소수에서 다수로)에 인터넷은 “다수에서 다수로”와 “소수에서 소수로”라는 온라인 소통 공간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로 만들어진 공적 공간은 계속해서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여러 작은 “부분 공간subspace”, 소통이 단절된 매체들로 작게 조각나고 있다.

전자민주주의는 참여를 위해 온갖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겠지만, 이는 또한 하나의 도전을 제기하기도 한다. 인터넷 접속 가능성에서 시민들 간에 존재하는 사회적 구조적 불평등을 극복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런 불평등을 “정보 격차digital divide”라는 용어로 표현했는데, 인터넷 활용 면에서 사회 계급에 따라 격차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탈리아에서 인터넷 연결은 2016년 인구의 63%에 달하여, 3천 7백 67만 명의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에 따르면, 나이대에 따라 확실한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디지털 원주민들digital natives’은 인터넷과 함께 성장했고, ‘디지털 이주민들digital immigrants’은 새로운 미디어를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되었으며, 일부 노령층에서는 그 매체들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디지털 금욕주의자digital abstinent). 그러므로 몇몇 학자들은 민주적 격차democratic divide(국민들 중 인터넷을 사용하는 이와 사용하지 않는 이들 사이의 격차)의 발생, 혹은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 활용의 새로운 문화와 우월한 역량을 지닌 새로운 민주주의 엘리트의 출현을 염려한다. 이러한 현상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그런 매체에 대한 시민 교육이나 전반적인 구성, 나중에 특히 그런 매체를 이용하여 민주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체계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경보 격차는 점차 사라져야 할 것이 분명하지만, 전반적인 디지털 정보 역량을 보급하고, 모두가 디지털민주주의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교육 및 정보 입수 수준과 관련된 사회적 계급 간의 민주적 격차에 대해서도 선행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 민주주의의 전반적인 질은 인터넷을 통해 악화되기보다는 향상될 것이다.


편집자 주:

다른백년 출범 3주년을 기념하며 자축하는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제목으로 21세기 새로운 흐름인 직접민주주의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한국정치로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1%의 소수를 위한 정치에서 99%의 시민을 위한 정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례성을 100%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비판하고 결정하고 통제하는 민치 – 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책의 내용을 격주를 통하여 약 10개월 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접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시중의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목, 2020/07/02-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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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에 시작된 미중 간의 통상전쟁을 중단하고자, 1단계 경제 및 통상에 대한 합의가 지난 2020년 1월 15일에 체결되었다. 미국이 추가적인 관세의 인상을 보류하는 대신, 중국은 미국으로부터 수입량을 대폭 확대하는 것을 약속했다. 싸움은 일시 중단되었지만 수많은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품에 가하는 추가적인 관세를 완전히 철폐할 것이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미래에 있을 협상에 거래할 게임의 칩으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상기의 협정에서 약속하였듯이, 미국의 고관세 정책과 중국의 수입확대는 무역불균형을 줄일 뿐만 아니라, COVID-19의 충격으로 영향을 받은 중국경제의 성장속도를 낮추는 압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협상 내용에는 ‘중국제조MadeinChina-2025’의 산업정책이나 중국공기업(SOE)의 지원에 대한 제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사실 이것들이 미국의 주요한 관심이었다. 이들 사항은 추가적인 협상과정의 주요의제에서 배제되었기에,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기둥으로서 이들 주제가 향후 협상과정에서 추가적인 양보를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채결된 협상내용이 2001년 WTO 가입 당시 취해졌던 경제개혁과 유사한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여전히 희망하지만, 당시의 상황과는 확연하게 다른 점들이 존재한다.

WTO시스템은 다자간의 합의체제로 회원국들 간에 가장-선호하는-국가의 원칙(most-favored-nation principle)을 적용한다. 이와는 반대로 미중 간 통상합의 조치는 양자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제3국에 적용되지 않는다.

중국의 WTO가입은 관세 및 비관세장벽을 낮추어 자유통상을 촉진하는 것인 반면에, 양자간의 합의는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대한 수량적 확대를 위하여 관리적 통상조치를 담고 있다. 미국에 대해 유리한 조치는 가장-선호적-국가의 원칙을 위배한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통상에서 기술이라는 주제로 확산되었다. 미국은 ‘화웨이’같은 중국의 첨단기술기업의 활동을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금지하고 있고 미국의 첨단기술기업을 중국이 매수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으며, 더구나 동맹국들에게 같은 조치를 강요하고 있다.

중국의 성장속도는 이미 인구의 노령화와 농촌노동력(農工)의 고갈로 늦추어 지고 있다. 성장속도는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수입하지 못하면 더욱 낮아질 것으로 예측된다.

중국이 굴기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미국이 이를 전략적 경쟁자로 견제하면서 양국 간의 갈등은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분명하게 중국의 포용정책에서 단절(decoupling)정책으로 전환하였고, 통상과 투자 기술과 인적 교류 등 흐름을 제한하면서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즉시 효과를 나타내면서 미국과 교역대상 국가 순위가 2018년에는 1위였으나 2019년에는 3위로 내려 앉았다. 미국의 첨단산업에 대한 중국투자는 현저하게 줄어들어(금지되어) 중단상태에 이르렀다.

거대한 경제대국 간의 단절이라는 흐름은 현재 진행중인 COVID-19 팬데믹으로 더욱 격화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미국 내에서는 염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데 미국은 단순히 소비재만을 중국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요 기계제품과 의료기자재 역시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미대통령의 경제고문인 Larry Kudlow는 미국기업이 생산거점을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정부재정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 4월30일 트럼프는 COVID-19가 우한에서 시작되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는 핑계로 관세를 높이겠다고 협박했다.

미국과 중국 간의 단절은 세계경제를 양단으로 해체하여 지난 시기에 대공황을 초래한 블록화를 형성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샬 플랜을 실제적으로 설계한 Charles Kindleberger는 대공황은 미국이, 영국을 대체한 국제사회의 지도국가로서, 주요한 공공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지 못하고 금융시스템을 개방적으로 운용하지 못한 실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한세기가 지난 후, 세계는 다시 ‘Kidlerberger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  주도권의 전환시기에 국제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력의 부재로 국제질서가 붕괴되고 혼란이 다시 야기될 조짐이다.

퇴조하는 패권국가인 미국은 외교정책를 고립주의로 퇴각시키고, 합의로 구축된 국제기구들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킨다. 팬데믹이 한창인 가운데 트럼프는 WHO가 중국편을 든다고 비난을 하면서 지원금 중단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굴기하는 중국은 명목상(nominal) GDP기준으로 미국의 2/3수준으로, 미국이 떠난 국제사회의 공백을 채울만한 힘을 갖추지 못했다.

국제적 질서가 혼란한 상태에서 COVID-19가 발발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COVID-19의 위기와 ‘Kindleberger의 함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 간의 갈등을 협력으로 전환하고 특히 두 개의 거대 세력간에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출처 : East Asia Forum of ANU, 2020-05-05.

C H Kwan

노무라 증권의 자본시장연구센터 책임연구원

금, 2020/07/0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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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좌담은 줄곧 한반도 평화정책을 표방해온 문재인 정부가 지난 2년간 ‘왜 대북전단 문제에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마련됐다. 좌담에는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한 탈북민 김민경(가명) 씨, 탈북민 정착 사업을 하고 있는 양영창 선교사, 탈북아동공동체 우리집의 마석훈 대표 세 명을 초청했다. 좌담회 사회는 김화순(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위원)이다.


사회: 지난 6월 일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고,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되다 잠시 쉬고 있습니다. 북측은 지난 6월 4일 김여정 당중앙위 제1부부장 명의로 남측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이튿날 통일전선부 대변인 명의로 대남 관계를 대적(對敵) 관계로 규정한다고 언급하고 잇달아 담화 발표 및 대남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지금 잠시 진정국면에서 접어들었습니다만, 이처럼 남북한의 긴장관계가 격화된 계기에는 박상학 등 일부 탈북민들이 북한으로 보내는 대북전단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대한민국 정부는 왜 지난 2년간 대북전단문제에 대해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 주권 가지고 할 수 있는게 그렇게 없습니까?”

사회: 반갑습니다. 세 분을 좌담회에 모시고, 대북전단 살포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 주시겠습니까?

김민경: 시작하기 전에 제가 남한에 온 지 6년이 되어가지만 북한출신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묻는데요. 대한민국 주권 가지고 할 수 있는게 그렇게도 없습니까? 이명박시대에 삐라를 하라고 탈북인단체를 부추긴 것은 그럴만했다고 치고요. 그때는 북한이 붕괴하기를 기대하는 정권이었으니까. 그런데 평화로 가자는 방향으로 시대가 바뀌었는데 문재인 정부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요? “결국 평화라는건 미국이 허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남북관계는 쇼였나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결시대에는 삐라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는데 약속을 내챙개치고 삐라라니, 언론의 자유라니. 지난 2년간을 통해 우리가 깨달은 건 평화라는 건 미국이 승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잖아요. 결국 한반도 평화는 안된다는 겁니까?

사회: 뼈아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남북한관계 파국의 원인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대북전단사건부터 복기하여 원인과 책임을 찾아 이런 일이 다시 없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대북전단의 발생 원인부터 이야기해볼까요?

마석훈: 대북전단 풍선을 날리는 원인을 ‘특별함이 주는 중독현상’ 때문이라고 봅니다. 탈북자분들이 남한에 와서 세뇌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탈북자분들이 북쪽이 아니라 오히려 남쪽 사회에서 세뇌가 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왜 남한에 왔나? 그러면 흔히 자유 찾아 왔다고 하지만 정말 자유를 찾아왔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한에 와서 출세하려면 튀어야 한다는 게 일부 탈북자들의 생각입니다. 여기에 온 사람이 3만 3천입니다. 박상학 씨는 대북전단을 어제 날렸고, 앞으로도 계속 날릴 것입니다. 학생운동 할 때처럼 구속되어도 나와서 또 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아야 한다. 박상학 씨는 이미 하나의 확신범 같이 본인은 대북전단을 날려야지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북한과의 문제를 야기하는’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 되었습니다. 대북전단살포 문제는 정치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처벌도 엄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도 민주화를 위해 산다는 게 얼마나 가난하고 어려운지 겪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집단만 민주투사가 될까?”

양영창: 마선생님이 원인을 잘 짚어주셨습니다. 돈 대는 단체들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돈대는 단체로 ‘미국의 소리’가 이번에 뉴스에서 지목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많습니다. 제가 아는 단체는 미국에 있는 교포단체인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돈을 댄다고 하면서 정작 민주주의가 없습니다. 한인교포들은 미국 국민들보다 트럼프를 더 지지합니다. 최고존엄을 저격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무엇이기에 탈북민들을 분란시키는가? 아는 탈북민 친구들과 전화를 해보면 선생님 그렇게라도 하면 우리 식구들이 얻어먹을 거 아니예요? 그런다. 태극기 들고 있는 친구. 태극기는 5만원이다. 대북전단은 그것보다 더 돈을 많이 줍니다. 당일 치기도 하고 1박 2일도 하고. 이들을 조정하는 팀들이 누군지 밝혀내야 합니다. 나는 탈북민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고 그냥 한국사람으로 그냥 우리 사회 일원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석훈: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집단만 왜 정의투사, 민주투사가 되어가는지 그 현상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 말고 그런 사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미국에도 소수지만 가고, 캐나다 영국에도 몇 백 명이 있는데 정치행위에 나서는 탈북자집단은 한국 말고는 없습니다. 즉, 캐나다에 간 탈북자들 영국 등에 있는 탈북자들은 왜 생계에만 천착해서 살아갈까라는 측면을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양영창: 요즘 단체들의 창업지원을 하러 많이 돌아다니다보니 풍선 이야기가 오고 갑니다. 언론에는 자유북한운동연합이나 큰 샘과 같은 몇 개 단체 이름만 나왔습니다. 기실 방송 듣고 넘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전단살포가 자기네들의 이득과 단체들의 이득과 돈 때문에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과거 초기에 이민복 씨가 했을 때부터 (대북전단을 보내는 것을) 직접 보았는데, 대북전단살포가 그렇게까지 효과적이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북전단살포를 생각 외로 많이 합니다. 문제는 (대북전단) 돈을 대주는 팀들인데 그들이 뒤로 다 빠져 있습니다. 재정(돈)을 대주는 팀들이 누구인지 언론은 잘 모릅니다. 이러다가 대북전단살포법을 만든다고 해도 일이 잘못되다 보면 (탈북민) 몇 명만 때려잡고 말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김민경: 마선생님 말씀처럼 캐나다에 간 사람들은 그곳을 너무 좋아합니다. 거기 가니 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남북한이 싸우는 짬에 끼워지는 스트레스가 없습니다. 거기 가서 오히려 북조선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찾게 됩니다. 저도 캐나다에 가서 미국에서 자금을 받아 아시아방송을 운영하는 탈북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북한 인권을 하는 사람이 몇 있고, 방송을 하는 정도이지 여기처럼 심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남한에 ‘수요’가 있기 때문에 대북전단을 보내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봅니다. 반공주의 프레임이 가동되면서 반공주의가 생존의 열쇠인 그런 세력들. 그런 사람들이 탈북자를 돌격대를 만들어 내세웁니다. 그들은 남남갈등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해방 후 북에서 넘어온 월남자들 일부가 서북청년단을 뭇고 앞장에 서서 상대진영을 말살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듯이 말입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원에서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은 안보강사로 다 내보냈습니다. 그들은 안보강연을 통해 북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키우고 반공주의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했죠.

또한 남한의 정부와 국민들이 용인해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였다면 주류사회의 눈치를 보면서 정착하고 살아가야 할 소수집단인 탈북자들이 과연 그들이 그렇게 했을까요? 이런 행위들을 너무 당연시했던 같습니다. 북한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이 남한 사람들 속에 뿌리 깊게 있기 때문에 북한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는 생각이 오늘에 이르게 된거죠. 또한 한미동맹으로 얽혀 있는 남한내에서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과 아시아 패권전략에 따른 문화적 침투의 일환으로 미국의 자금이 국내에 상당히 유입되면서 기생하는 세력들이 생겨나기 마련이죠.

 

“막말을 해도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북한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

사회: 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수요가 있기에 풍선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서북청년단을 이용했던 그 세력이 수요처다. 보수를 지칭하는 분단세력들이 지금 대북풍선의 원인이다라는 지적을 남북한 분들 공통적으로 지적해주셨습니다.

김민경: 대북전단살포를 요구하는 세력은 돈도 많습니다. 언론들은 이런 것을 지적해야 하는데 이 같은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남한에 오니 자유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억이 막히는데 여기 말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뭔가? 오히려 분단 70년동안 자유를 말살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던 세력이 바로 그들입니다. 제가 가장 본질적으로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이야기는 개인의 자유가 아무리 중하다 한들 생명권보다 더 중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개인의 자유가 생존권을 우선할 수 있냐? 그들의 표현의 자유 운운 하면서 삐라 날리면 접경지역 주민들은 생명위협에 노출됩니다. 연평도 포격사건을 비롯해서 삐라 때문에 남북간 총성이 오고간 사례들이 많죠. 이 문제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언론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다고 말하죠. 요즘 어떤 판사도 표현의 자유를 말살한다고 했죠. 자유가 아니라 방임입니다. 삐라 내용도 정제된 언어가 아니라 일베 수준의 저열한 내용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냉전시대에나 날리던 삐라를 평화이행기에 들어선 오늘날까지 날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입니다.

사회: 저도 엊그제 제가 패러글라이더 한 분을 만나 중요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6년 전에 불법적인 전단살포 행위를 통일부가 나서서 변호했다는 군요. 특히 대북풍선을 날리는 북한접경 지역은 항공관리법이 적용되는 특수지역이어서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탈북단체들이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오히려 10년 가량 정부의 묵인과 비호를 받으며 대북 전단 살포용 풍선을 버젓이 날려왔습니다. 전단 살포용 풍선이나 드론이나 똑같이 항공안전법 제2조 제3호에 같이 규정되어 있는 “초경량비행장치”에 해당하며 각각은 “기구류”와 “무인비행장치”에 속하기에 불법입니다.​ 접경지역에서는 패러글라이드도 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북전단을 풍선으로 띄우는 것에 항공법에 저촉된다는 지적을 국회의원이 당시 청문회에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통일부 관료들이 말이 안되는 해석을 했다고 합니다. 왈, 지상통제장치가 없기 때문에 대북전단 풍선은 항공법 대상이 아니라는 해석을 내렸다고 합니다. 【1】대북전단을 날려도 된다는 거지요.

정부가 전단을 막을 수 있는 상황이었고 교통부, 국방부 등까지 관련되었는데 왜 그랬을까? 대강 짐작이 가지요. 통일부에서 법의 해석을 무리하게 하면서까지 대북 전단살포를 허용했다. 한마디로 전단풍선살포는 정부의 허용 내지는 대북상대의 일종의 심리전으로 인정받은 행위였던 겁니다. 마선생님이 ‘왜 한국에서만 그러냐.. 다른 지역에서는 그러지 않는데’라고 말하는데, 탈북민들이 전면에 나서는 이유는 국가 정부가 탈북민들을 앞에 세웠기 때문입니다. 국정원 댓글부대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하겠지요. 탈북단체들은 그 앞장에 서서 생존해왔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국가가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민경: 한마디로 분단세력이죠. 북한이 나쁘다는 것을 극대화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박상학이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고 계속 요구합니다. 대한민국의 토착세력이 문제입니다. 새터민이 아니라 헌터민들이 문제입니다. 저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북한’에 대한 인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중국이 독재하는 것을 다 알지만, 중국에다 대고 너네 왜 독재하냐고 삐라를 날리지는 않습니다. 왜냐? 우리가 중국을 함부로 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북한에는 막 해도 됩니까? 북한에 대고 온갖 표현을 해도 용납이 되는 남한사회 전체의 인식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삐라의 변질, 돈 주는 사람들은 왜 북의 최고 존엄을 겨냥하는가?”

양영창: 과거에 정부가 독려하고 돈을 주었는데 북에서 이야기가 나오니까 (탈북민을) 잡아넣겠다고 합니다. 차라리 왜 이렇게 대북전단을 하느냐에 대해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에 지방에 가서 대북전단을 하는 탈북민을 만났더니 그들이 한번 정도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봤냐? 고 합니다. 내가 너희 국회의원 하려고 그러냐? 고 물어보았더니, 그렇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에 삐라를 시작했을 때 강화에서 이민복 씨가 주로 했는데 지금같이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돈을 주는 사람들의 요구가 많이 변화한 것 같습니다. 최고존엄을 건드리면 안되는데. 이 사실은 탈북자들이 더 잘 압니다. 나는 최고존엄을 건드리라고 돈을 주는 사람들이 그렇게 요구한게 아닌가 의심합니다.

어떻게 삐라가 이렇게까지 변질이 되었는지 돈이 어떻게 들어갔고 왜 이렇게 이들이 하는지가 밝혀져야 합니다. 그런데, 언론과 이야기해보니 기자들은 문제를 ‘탈북민’전체로 돌립니다. 나는 법을 어기면 제재는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금은 탈북민사회가“대북전단 살포는 안된다.” “가족들이 피해를 본다”고 강하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때려잡는게 아니라 탈북민들과 이야기할 것은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이미 다음 세대가 대북전단 살포행위를 이어받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돈을 주는 세력이 있는 한,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사회: 양선교사님 말씀은 돈을 주는 쪽에서 최고 존엄을 건드리는 쪽으로 푸시를 했다. 이제는 공론의 장에서 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탈북민사회에 이 문제에 가지고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김민경: 대북전단 풍선날리기 문제는 남한의 정치풍토와 관련이 있습니다. 남한의 진보진영이 70년 동안 위축되었습니다.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쓰는 키워드가 있죠. 빨갱이, 종북, 북한 이 세 가지입니다. 지금도 문재인 정부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진보 진영을 공격하는데 있어 반드시 북한이 동원됩니다. 아주 강력한 무기죠. 정치꾼들이 북한 인권을 빌미로 색깔론을 부추기고 앞장에 내세우던 인물들이 있죠. 그런 사람이 국회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가장 절실한 사람들”

사회: 대북전단을 북한에 날리는 행위의 원인이 탈북민을 사주하는 분단세력에게 있다는데 여기 모인 분들 간에 이견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논의를 통해 탈북인들의 대북전단 행위에 대해 대화적인 접근을 해서 설득할지 아니면 강력한 법적 제재를 할 것인가로 의견이 나뉘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더 이야기해볼까요?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의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석훈: 저는 지금 공론의 장에서 논의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가 가시화되어 법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니까요. 한 가지 더 문화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북한 분들이 나오는 이만갑, 모란봉을 보면 탈북여성들은 미녀만 나오는가? 여성은 모두 미녀고 남자들은 김일성대학출신이고. 제가 보는 탈북민들은 보통 사람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뭔가 특별한 사람들을 발굴해내려는 문화가 존재합니다. 미국에 가보니 난민의 경우 경비를 3개월에 뱉어내도록 하는데, 한국에 온 탈북민들은 각종 공짜들이 늘어나기만 합니다. 특례입학 등 다른 방법으로 정착한다. 여명학교, 원불교 한겨레학교에 들어가는 돈, 돈을 기부하는 분들은 바로 이 삐라 만드는 사람들의 좋은 자양분입니다.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탈북민에 대한 공정하지 못한 기부행위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대북전단을 하는 사람들이 구속되면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감옥에 가면서까지 그 일을 계속할 사람은 해야지 어쩌겠어요?

김민경: 우리 북한이탈주민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서라도 대북전단행위를 이번에 근절해야 한다고 봅니다. 박상학을 비롯하여 탈북민전체가 혐오의 대상으로 되면서 10년간의 정착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대북전단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빨리 정리해야 합니다. 남북관계가 70년간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게 오늘까지 오게 된 과정을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았습니다. 국민들은 대통령의 남북화해노력을 80%까지 지지했습니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갈망이 높다는 거죠. 오늘날에 와서 평화를 깨뜨리는 것은 범죄이고. 더 이상 분단과 반공에 기생하던 풍토를 청산해야 합니다. 탈북민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로 축소되어 살아가는 사람인데 남한 사회에서 제대로 관계를 가지고 살려면 이 문제가 근절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 탈북자들이 남북관계해결의 이해당사자입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고, 우리가 남북화해의 매개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인데 일부 탈북자들의 행동으로 남북갈등을 부추기는 촉매제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대북전단 픙선을 날리는 사람들 때문에 탈북자 집단이 사회 혐오집단으로 낙인되고 정착과정에서 우리의 모든 노력이 부정당할 우려가 커지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양영창: 그렇지 않습니다. 탈북민이 소수자로 된 것은 삐라 사건만은 아닙니다. 탈북민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생각이 표출되었다고 봅니다. 이 사건만이 아니라 보수정권에서도 그렇다. 법적 제재 전에 논의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마석훈: 이런 시점에 탈북민사회를 대변할 수 있는 단체나 어른이 없다는 게 정말 안타깝습니다. 탈북민에게 신뢰를 받는 단체나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도 안타깝습니다. 이런 상황이 왔을 때 중재를 하는 존재 하나 만들어내지 못 했다는 게 부끄럽습니다.

양영창: 제가 가장 힘든 게 그것입니다. 국내에서 정착지원활동을 하고 해외에서 일을 20년 넘게 했는데 내가 무엇을 했는지 자괴감이 듭니다. 너무 힘듭니다. 내가 왜 이 사역을 했나 싶습니다. 충분히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이해하도록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북한도 지금 군사행동을 멈추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쉼표를 가지고 직접 탈북민 자신이 나서서 목소리를 내봅시다. 뒤에서 이야기할게 아니라 보수는 서로 목소리를 내서 잘잘못에 대해 이야기 하자. 우리가 남남갈등 하지 말고, 원수가 안 되었으면 좋겠다.

 

통일부가 대북사업과 탈북민 사업 양자를 함께 하는게 가능한가?”

사회: 이 좌담회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왜 지난 2년간 대북전단문제에 대해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입니다. 참석자 모두가 한마디씩 해주셨으면 합니다.

양영창: 대북전단 풍선에 반대하는 생각을 가진 단체들은 논의의 자리가 있으면 오겠다고 해요. 한 번씩은 다 와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방송에 나서 시끄러워집니다. 대북풍선을 날린 사람들이 나와서 함께 깊게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대북전단살포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그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 탈북민이 한 사람의 구성원이라고 인정한다면 법내용에 대해 알고 논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시기가 지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법이 만들어지면 포괄적으로 법내용이 만들어지면 발표하고 서로 문제제시도 하고 방향을 잡아가는게 촛불정부인 더불어민주당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왜 자꾸 왜 논의의 장을 열어야 하냐고 주장하냐면, 탈북민들은 지금 불안하고 애가 타기 때문입니다. 왜 이 방법을 쓰지 않는가? 빈대 한 마리 잡는데 초가삼간을 왜 태우냐. 정부가 그동안 잘못했다. 풍선을 하도록 했고 전단내용을 바꾼 세력이 있는 한 피해자는 탈북민이 됩니다. 나는 그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사회: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양선생님 이야기처럼 공론의 장에서 대화하는 자리가 많이 있어야 하는데. 통일부나 하나재단 모두 작년 탈북모자사망 사건 때 무력했습니다. 남북하나재단이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누가 이 단체들을 연결해서 그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석훈: 탈북민을 관리한 기관에서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게 맞긴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중요한 사건이 생기면 남북하나재단은 늘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일을 하라고 월급을 주는 건데. 대북전단은 인권운동이 아니라 상업적 운동입니다. 이미 하느니 마느니 합의할 수준은 넘어섰습니다. 관련법도 제출이 되었고 이재명지사가 경기도에서 행정권으로서 접경지역 출입금지라든가 고발할 수 있는 근거가 있으니, 이제 법을 시행하는 단계가 되었다. 합의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여당이 압승을 했습니다. 설문조사 결과도 그렇습니다. 대북전단에 대해 반대하는 국민여론이 60%를 넘어 70%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대북전단을 하니 마니 합의하거나 논의할 시점은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김민경: 과연 남북문제 해결에 있어 국회가 한 일이 뭐냐? 남북 간의 비방을 안 하기로 합의했던 4.27성명 발표 후 국회는 이를 뒷받침 하는 법안 하나 내지 않고 팔짱을 끼고 강건너 불구경 하듯 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남북관계가 파탄나기를 기다렸을지도 모르죠. 문재인정부를 공격할 구실이 생기니까요. 직무유기죠. 대북전단에는 정치세력과 기독교, 미국의 대북관련 단체들을 비롯한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자제를 권유하는 방식으로 방지할 수 없습니다. 평화를 파괴하는 범죄로 규정하고 금지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저도 사회자의 입장을 떠나 탈북민문제 연구자로서 제 생각을 한 마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과연 통일부가 대북사업과 탈북민 사업 양자를 함께 하는게 가능한가라는 가장 본원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촉망받던 김연철장관이 아무 일을 하지 못한 채 사표만 내고 떠났는가? 이와 유사한 형태로 작년 탈북모자사망 사건때도 결국 하나재단 고경빈 이사장이 사표를 내고 나가는 것으로 마무 리짓고 말았는데 조직체계의 근본적인 혁신없이 어공 윗사람 한 사람의 사표로 마무리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늘공 조직의 과감한 쇄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북전단이 왜 방치되었는지 국회가 대한민국 정부가 왜 지난 2년간 대북전단문제에 대해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까?”라는 시민들의 상식적인 의문에 답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개성공단 등 통일 각분야에서 부딪히고 있는 답답함과 장벽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경향신문. 2014. 10.23. <북한 비판 풍선은 되고 정부 비판 풍선은 안된다?.. 정부, 항공법 적용 제각각>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대북 전단 살포가 비행금지구역인 휴전선 인근에서 이뤄지게 될 경우 항공법으로 규제가 가능한지에 대해 “국토교통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한 결과 대북 전단 살포용 대형풍선은 지상에서 통제할 수 있는 장치가 없기 때문에 항공법 적용대상인 초경량 비행 장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토, 2020/07/04-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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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20년 6월 26일 개최된 한국사회복지정책학회 춘계학술대회의 기획주제 세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한국 지식사회에서 ‘개인화’는 흔히 신자유주의적 고립이나 공동체적 연대윤리의 상실 및 이기주의의 확대, 그리고 신자유주의적 위험이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되는 현상 등을 단편적으로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구 근대부터 2차대전 이후까지 다소 선형적으로 발전해온 산업사회가 그 역사적 성공 이후 깊은 변동을 겪는 과정을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울리히 벡이 사용한 ‘개인화’ 개념에 기초하여 복지체계의 변화 필요성을 촉구하고자 한다. 현대의 복지체계가 산업사회의 규범에 기초하여 제도화한 ‘유기적 연대’의 형태라면, 위험사회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개인화 상황 속에서는 사회적 연대의 형태 역시 한층 개인화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현대 복지체계의 규범적 출발점

현대 복지체계는 유럽에서 발전한 자본주의 및 그것이 초래한 계급 대립 속에서 형성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봉건적 신분제로부터 개인을 해방/고립시키는 이중의 과정을 불렀다. 따라서 봉건적 신분과 달리 계급은 1차적 집단관계가 아니다. 계급은 개인들 간의 사회경제적 성취의 격차로부터 2차적으로 형성된 집단적 격차의 문제로 정의되는데, 개인적 성취 격차를 집단적 격차로 구조화하는 것은 자본의 소유관계이다. 이 소유관계로부터 집단적 분배 격차가 생겨나는데, 복지국가는 소유관계 자체가 아니라 그 결과인 분배 격차를 완화함으로써 사회갈등을 약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소유관계는 핵가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적 관계―‘사생활’로 축소된―를 통해서 상속되기 때문에, 계급은 사실상 1차 집단으로서의 성격과 2차 집단으로서의 성격이 교차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계급 갈등 속에서 과거의 신분적, 가부장적 문화를 매개로 계급결속이 형성되면서, ‘계급’(마르크스) 개념은 ‘사회계급’(베버)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리하여 계급 격차는 계급집단 간 경제적 격차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격차, 즉 가족생활 향유에서의 격차와 집단문화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복지의 문제 역시 그와 같은 ‘사회적 삶’을 보장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복지체계가 소유관계 자체가 아니라 분배 격차를 문제 삼는 것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향상이 분배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본의 사적 소유가 생산력 발달 또는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보고, 그 결과물을 보다 평등하게 분배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현대 복지체계에서 당연시하는 사회이론적 전제는 1)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한 경제 성장, 2) 사회경제적 불평등인 계급 격차의 완화, 3) 사회적 삶의 보편적 단위인 핵가족의 보호, 4) 핵가족 부양에서의 계급 간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이론적 전제들에 제대로 포괄되지 못하고 외부화한 문제들이 들어 있다. 각각의 문제를 이 사회이론적 전제들과 관련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문제

경제발전의 틀에서는 생산력 향상을 위한 투입 요소로 노동력과 자본만을 고려한다. 그러나 생산을 위해서는 원료나 토지, 기계 등의 형태로 자연 물질의 투입 역시 필요하다. 또 노동력의 투입을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자연 물질적 특성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의 상속 역시 자녀를 통해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몸이라는 물질적 특성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노동력 재생산과 자녀 출산, 양육 등에 동원되는 여성의 몸 역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는 그러한 ‘자연 물질’의 문제를 모두 외부화하여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복지체계 역시 생산관계가 초래하는 분배 정의의 문제만을 ‘사회문제’로 보고, 자연 물질의 지속가능성이라는 문제를 외부화했다. 이것은 자연과 사회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회문제의 영역에서 자연 물질의 문제를 개념적으로 배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평등이란 지속가능성 문제를 배제한 절반의 ‘정의’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볼 때, 생태 파괴 및 인구 돌봄 문제로 인해서 성장모델 자체가 불가능해질 가능성을 내포한다.

 

2) 사회경제적 불평등 = 자본주의 계급 격차

사회경제적 격차를 계급 격차로 보는 관점에는 위에서 보았듯이, 핵가족 생활공동체를 인간 삶의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단위로 보는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이것의 배경은 19세기 이래 유럽에서 확산한 ‘기혼여성 지위(덮어씌위기, coverture)’의 제도화이다.【1】 기혼여성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어도 더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고 또한 더 이상 법정에서 발언할 수 없도록 혼인 제도가 변화했다. 기혼여성의 법적 권리가 남편의 법적 권리 속에 묻혀서, 남편이 가족을 대리하는 법적 대표자가 된 것을 말한다. 여성은 시민권의 출발점인 계약할 권리에서 배제되었다.

그와 함께 아동기가 발명되고, 아내와 자녀가 모두 아버지의 성을 취하는 ‘가족성(family name)’ 제도가 일반화하면서, 남성은 재산 소유에서는 내부적으로 격차를 보여도 ‘가장’으로서는 동질화하는 ‘보편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이러한 남성 가장들 사이의 계급 격차로 정의되었다. 반면 여성은 앞서 보았듯, ‘자연 물질’과 유사하게 취급되어 남성의 사생활 영역에 묻힌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여성은 정치경제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3) ‘정상가족’의 규범

기혼여성 지위가 법적으로 차별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남성이 가족을 부양하고 여성은 살림을 도맡는 ‘정상가족’의 규범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상성은 특히 생물학과 정신의학 등에 의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면서, 근대적 성역할 규범을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현상으로 규정―‘자연화’(푸코)―했다. 그리하여 이제 보편적 정상가족을 향유하는 권리의 문제가 ‘사회권’의 내용으로 등장했다. 남성에게는 가족 부양의 기준에 따라 임금이 지불되고, 남녀 간 임금격차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비정상적―임시적, 예외적, 보조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4) 계급 평등 = 가족 부양자 남성 간의 격차 완화

결국 복지는 모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분배 평등 또는 남녀를 불문한 가장들 간의 분배 평등이 아니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을 보장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성역할 규범과 연관된 엄격한 공/사 구분으로 인해서 ‘노동’의 원형은 ‘가장 남성’의 노동으로 정의되었다. 특히 공장제 산업사회의 형태로 조직화한 제조업 육체노동이 노동의 원형이 되었고, 여성의 직업으로 분류되는 저숙련 서비스직이나 가족 내 삶을 위한 노동은 ‘노동’ 개념으로부터 주변화 또는 배제되었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발전하고 또 탈제조업중심의 산업변화가 진행되면서, 이와 같은 평등 개념은 현실적 토대를 잃게 되었다. 우선 복지국가 발전의 역설적 결과로서, 평등이 계급집단 간의 갈등보다 개인이 국가에 청구하는 ‘사회권’ 개념으로 변화했다(‘제도화한 개인주의’ 또는 ‘고객주의’). 탈산업화로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증가하고 기혼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 남성 노동 중심의 복지체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그리고 여성의 교육수준 향상과 경제활동 증가, 직업 세계에서의 경쟁 격화, 이동성 증가 등으로 인해서 1인 가족이 증가하며, 노동의 목적이 ‘가족 부양’에서 ‘본인 부양’ 또는 ‘가족 공동부양’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나타났다(‘노동과 가족의 개인화’).

 

2. 개인화 및 그것이 복지체계에 던지는 과제들

울리히 벡은 앞서 본 바의, 산업사회가 외부화―즉 단순한 리스크로 처리―한 ‘자연 물질’ 관련 문제 중에서 생태적 위험과 관련된 ‘불확실성’이 정치적 공론화의 의제가 되는 과정을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2】 그리고 위험사회의 노동과 삶의 측면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양상들, 즉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노동 및 가족 규범의 ‘탈정상화’를 ‘개인화’라고 표현했다. 노동 규범의 탈정상화는 정상노동모델의 약화를 의미하고, 가족 규범의 탈정상화는 탈핵가족화 또는 근대적 성역할 규범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새로운 불확실성’(생태위험)의 증가와 탈산업화로 인한 생애위험의 탈계급화뿐만 아니라,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 역시 크게 작용했다. 특히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으로 인해서 개인주의가 단순한 문화나 이념이 아니라 ‘법적 권리’로 제도화―‘제도화한 개인주의’―했기 때문에, 노동과 가족의 탈규범화는 단순한 아노미가 아니라 근대 이후 진행된 개인화가 한층 급진적 형태로 심화하는 것(‘2차 개인화’)이라고 보았다.【3】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론화의 의제 및 사회적 저항의 조직방식이나 주체들에서 변화가 진행되면서, ‘정치적인 것’ 자체가 기존의 공/사 구분이나 사회/자연의 구분을 넘어서 혼종화하는 경향―‘새로운 사회운동’―이 나타났고, 이 역시 개인화와 함께 진행되는 정치변화라고 설명했다. 정치적 의제나 저항의 조직방식, 주체화 등이 개인별 위험 인식에 따라 유동적 네트워킹 방식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개인화의 이러한 양상들이 복지체계에 던지는 의미는 앞서 말한 복지의 사회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1) 우선 평등 분배의 단위가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에서 모든 개인과 아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2) 제조업 육체노동자의 노동을 원형으로 삼아 발전한 계급모델과 사회보험 중심의 복지제도에서 탈피해서 상품화한 모든 노동―불완전고용과 여성노동 포함―에 평등한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기혼여성의 경제활동 증가 및 1인 가족 증가로 야기되는 일·가족 양립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4】 4) 소득 분배에 의한 생존권 외에 ‘자연 물질’과 관련된 안전권―인간 돌봄, 생명 안전, 생태적 안전권 등―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돌봄과 관련된 문제

이러한 도전 중에서 여기서는 돌봄과 관련된 문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노동과 가족의 개인화 그리고 정치적 의제 및 주체의 개인화와 관련된 문제인 만큼, 돌봄 문제를 다룰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1) 우선 생존권 개념이 정상가족 단위의 생존이 아니라, 성인과 아동 개인 단위의 인권문제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경우에는 돌봄이 가족이라는 사적 공동체에서 근대적 성역할 규범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필요에 따라 수행되는 동시에 사회적 서비스의 형태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가 말하는 보편적 생계부양자-보편적 돌봄제공자 모델에 기초하되,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개인이 두 가지 보편적 역할을 병행할 수 있도록 사회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5】 사회서비스로 제공될 경우 돌봄노동에 대한 가치평가나 돌봄노동자의 조직력 역시 향상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2) 노동위험이 불안정 노동으로 인한 개인별 생애위험으로 변화하므로, 이에 대한 안전보장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기본소득 대 전국민 고용보험’이라는 형태로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고용보험의 보편적 확대는 적용대상자에 대한 조사와 분류가 필요하여 시간 및 행정의 비용이 예상될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 자동화와 인공지능의 사용으로 각종 서비스 단말기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일상의 삶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 증가하며, 노동과 삶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경제적 가치 생산이 이처럼 단말기와 일반인의 상호작용에 기초하여 사이보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민의 삶 속에서 수행되는 경제적 기여에 대한 보상이 포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6】 또한 (사회서비스 제공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에게 일정 정도 남겨질 수밖에 없는) 돌봄노동이 보편화한다고 해도, 그 역시 부불노동으로 남는다. 재정마련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과 함께, 역진성을 약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세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3) 복지제도에 의해 개인별 생존권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에서, 노동과 돌봄이 통합된 형태로 연계될 수 있도록 노동조직의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19 이후로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건강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아프면 쉬는’ 문화와 함께 ‘아픈 가족원을 돌볼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사업장 문화가 바뀐다면,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부담 역시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코로나19 예방책으로 가장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이 ‘아프면 쉬는’ 문화라는 것이 여론조사의 결과였다. 또 인구 고령화와 함께 돌봄에 대한 수요가 전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돌봄을 사적 비용으로 또는 대면적 공동체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서 바뀌어야 할 것이다.

4) 생태적 지속가능성은 세대 간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돌봄은 생태에 대한 돌봄과 유리될 수 없다. 코로나19로 인한 공장가동 중지로 미세먼지가 줄어든 것, 그리고 개인별 위생수칙의 철저한 수행으로 호흡기 질병이 줄어든 것 등을 볼 때, 생태적 지속가능성이 사회의 돌봄 비용을 전반적으로 낮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적 지속가능성 분야에서의 일자리 창출 및 생존권 보장을 통해서 일과 삶, 돌봄을 한층 유기적으로 통합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새로운 틀은 돌봄을 사회서비스로 제공함으로써 보편적 생계부양자 모델을 제도화한 북유럽 모델을 기초로 하되, 돌봄의 보편성을 한층 강조하고 또 거기에 일상 속 노동을 소득으로 보상하는 기본소득을 더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스웨덴 모델에 대한 실망과 한국식 모델의 모색

한국에서 그간 복지국가 모델로 크게 주목받은 스웨덴이 코로나19로 집단면역 실험을 하면서 상당한 실망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그간 스웨덴에 대한 환상이 너무 컸다는 비판이 올라왔다. 또 코로나19를 계기로, 서구 복지국가에서 살거나 노동하는 외국인의 열악한 생활상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노동유연화에 대한 대처에서 북유럽 모델이 스웨덴 모델과 덴마크 모델로 갈렸던 것처럼, 코로나19에 대한 대처에서도 스웨덴과 덴마크는 상이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런 점들에 유념할 때, 북유럽 모델을 하나의 동질적인 모델로 이해하는 대신, 각 사회에서 고유하게 발전한 복지모델의 역사를 추적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적절한 새로운 모델을 개발하는 데에 참고하는 것이 한층 발전적일 것이다.

 

【1】 캐롤 페이트먼, 2001,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이충훈·유영근 옮김, 이후.

【2】 울리히 벡, 1997, 『위험사회』, 홍성태 옮김, 새물결.

【3】 울리히 벡, 2013, 『자기만의 신』, 홍찬숙 옮김, 길.

【4】 독일의 노동 4.0에서는 개인화가 복지체계에 주는 의미를 ‘시간 주권’의 문제, 즉 일·가족 양립의 문제로만 이해했다. 홍찬숙, 2018, “노동 4.0인가 제2의 노동세계인가? 노동 4.0의 산업사회 관점 및 그 한계,” 『경제와 사회』 119: 165-192 참조.

【5】 낸시 프레이저, 2017, 『전진하는 페미니즘』, 임옥희 옮김, 돌베개.

【6】 기본소득의 노동 근거로서 필자는 울리히 벡의 ‘시민노동’이 아니라, 일상의 다양한 부불노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사이보그적 가치 생산에서 소비자 노동이 사실상 비가시화되며, 돌봄노동 역시 사회적 생산에 필수적인 노동으로 여겨져야 한다. 반면 벡은 위험사회에서 시민의 기여가 ‘노동’에서 ‘정치참여’로 바뀐다고 보며, 그것을 기본소득의 근거로 제시한다. 이에 대해서는 울리히 벡, 1999,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 홍윤기 옮김, 생각의나무 참조.

월, 2020/07/06-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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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 터지나 싶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터졌다.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의 사망 사건. 이번엔 미니애폴리스(Minneapolis)의 조지 플로이드(George Flyod) 사건이다. 체포 과정에서 백인경찰이 무릎으로 흑인 플로이드의 목을 눌려 죽인 끔찍한 사건으로 미국 전역에서 항의 시위가 격화되고 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통행금지 명령이 내려졌고, 트럼프는 군 헬기 블랙호크를 띄웠으며 과격 시위와 약탈이 계속될 경우 군을 동원해 진압하겠다고 위협을 가하고 있다.(“8 Minutes and 46 Seconds: How George Floyd Was Killed in Police Custody,” New York Times, May 31, 2020; “What Happened in the Chaotic Moments Before George Floyd Died,” New York Times, May 29, 2020).

조지 플로이드 사망 관련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 앞에 정렬한 주방위군. 워싱턴포스트는 이 정경이 미국의 이상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며 군대가 국민을 방어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눌 것인가를 묻고 있다.

잊힐 만하면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과잉·강압에 의한 사망사건으로 시위가 벌어졌지만 이번만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시위대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격화되고 있고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인다. 이번엔 백악관 앞까지 시위대가 밀고 들어갔다. 트럼프는 백악관 지하벙커로 대피하기까지 했다. 심상치 않다.

그런데 이번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를 단순하게 흑백간의 인종차별적 인권 유린 문제로만 보는 것은 사태를 잘못 짚은 것이다. 왜 그럴까? 미국의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반드시 인종문제가 있다. 마치 끓어오르는 화산의 마그마가 가장 약한 지반을 뚫고 폭발하듯 미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가 비등할 때 터져버리는 취약점이 바로 인종이다. 그래서 인종문제는 점잖은 표현으로 종합선물세트, 나쁘게 표현하면 오물통 같은 것이다. 오물이 쌓고 쌓이면 결국 흘러넘치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나는 격화된 시위를 단순히 흑백간의 차별에 분노한 시위, 즉 인종 간 문제 해결 요구로 축소시키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경계하고자 한다. 거기엔 다른 모든 문제들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종문제는 단지 그 분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나의 우려와 경계는 이번엔 기우가 될 지도 모르겠다. 시위를 전하는 언론들도, 심지어 시위에 나온 필부필부들조차도 이번 사건을 기화로 뭔가 미국에 변화가 있어야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경찰의 잔인한 폭력을 징벌하라는 데만 있지 않고, 망가진 미국 시스템을 전체를 교정할 때가 왔다라고 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에 근접해 있는 것 같아 보여서 그렇다. 과거엔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이전에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하고 단발성에 그쳐버리고 근본적인 문제제기나 비판에는 한 발도 못나가고 그저 흐지부지 끝나버리는 것에 실망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성급한 나만의 바람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미국과 미국인 자신이 자신들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확실히 알고 난 뒤에나 벌어질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과외나 학원보다 자기주도 학습이 더 중요하듯 말이다.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가 사뭇 다른 것 같다.(“The America We Need,” New York Times, April 9, 2020).

미국 언론은 지금 미국은 부싯깃 통(tinderbox)라고 이야기한다.(“American Is a Tinderbox,”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불똥만 튀면 터져버리기 직전의 일촉즉발의 상태라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미국과 미국인들을 이런 상태로 만들어 버린 것이 되었을까? 그 계기는 코로나19다.

조지 플로이드 학살사건 항의 시위에 나와 시위 도중 경찰이 쏜 고무탄환에 맞아 눈이 부은 미니애폴리스의 한 시민. 제목은 일촉즉발(부싯깃 통)의 미국이다. <출처: 뉴욕타임스/로이터스>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코마거(Herny Steele Commager, 1902~1998)는 그의 책 <미국정신>(The American Mind, 1950)에서 “인류 역사상 미국처럼 성공을 거둔 나라는 없다. 그리고 모든 미국인이 그 사실에 대해 안다”라고 썼다. 그러나 코마거가 아직도 살아서 코로나를 겪고 있는 미국을 보고 있다면 아마도 저 문장을 다시 썼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이 거둔 성공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미국인들이 그것이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뉴욕타임스 칼럼처럼 코로나 침공은 미국 역사상 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최초의 침공으로 기록될 만하다.(“The First Invasion of America,” New York Times, May 21, 2020). 그리고 그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6월 3일 현재 확진자는 180만 명, 사망자는 10만6천 명을 넘어섰다. 미비한 의료체계와 환경으로 검사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나간 자들이 그 몇 배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 걸 감안하면 완전한 참패다. 그러나 참혹함은 미국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코로나는 미국 본토에서 벌어진 첫 번째 침공으로 기록 될 만큼 위력이 대단했고 참혹한 결과를 남기고 있다. 그 후유증은 미국 사회를 어디로 인도할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다. <출처: 뉴욕타임스>

코로나로 인해 미국은 전 세계적으로 창피를 떨었다. 그런데 속된 말로 그 ‘쪽팔림’은 당하는 당사자들만 모르면(혹은 모른 체하면) 아무런 문제가 안 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이 정확한 사태 파악을 어느 순간 하게 되면 그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마치 안데르센 동화의 벌거숭이 임금님과 간신들처럼. 너나없이 벌거숭이 임금님을 칭송하던 이들이 임금이 벌거벗었다며 “올레리꼴레리” 외치는 아이의 돌직구에 정신을 차렸던 것처럼, 코로나가 지금 미국인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이렇게 되면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일상에 금이 간다. 현상학적 사회학이 알려주듯 당연시되던 것들은 그것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동안만 그 당연시가 유지될 뿐이다. 일상은 그렇게 깨진다. 당연시 되던 것들이 의문시 되면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이제껏,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미국이 다른 나라보다는 훨씬 더 해결할 능력이 있고, 그렇게 하고 있으며, 그래서 미국이 세계 제1의 국가로 당당하게 군림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떠벌여 그렇게 알고 있던 코로나라란 괴질조차 통제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허둥대는 국가 체계의 무능함과 부실함을 보면서, 그 때문에 자신들의 생명이 절대적 위협을 받게 되면서, 미국인들은 보건문제를 넘어 그 이상의 다른 모든 것들까지 도매금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아차, 꾸나! 미국이란 나라가 벌거숭이 임금님 꼴은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우리(미국인)는 실패한 국가에 살고 있다는 제목의 애틀랜틱 기사

그리고 나온 말이 “이게 나라냐!”이다.

우리가 몇 년 전 창피해하며 되뇌던 바로 그 말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외침은 무한한 자긍심을 갖고 믿었던 국가에 대한 실망, 좌절, 분노에서 오는 단말마적 비명이다. 그것은 “실패한 국가”에 대한 자괴감의 발로이다.(“We Are Living in a Failed State,” The Atlantic, April 20, 2020). 즉, 창피함에서 오는 미국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의 울림이다. 그러나 그 창피함은 어떻게 이런 나라가 세계최강일 수 있느냐는 다른 나라의 손가락질이(“The World Is Taking Pity on Us,” New York Times, May 8, 2020; “Fintan O’Toole: Donald Trump has destroyed the country he promised to make great again,” The Irish Times, April 25, 2020.) 자조감으로 변하면서 자연스레 생긴 자기모멸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그렇게 스스로 비웃다 스스로 창피해하고, 결국 자기 연민에 빠졌다.(“The United States Is A Country To Be Pitied,” Washington Post, May 14, 2020). 그리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최고의 국가 미국에 살고 있다는 생각하는 이들에게 먼저 불쌍한 처지에 놓인 우리 꼴을, 우리 자신의 몰골을 볼 줄 알아야 그 나마 이 나라를 다시 세울 일말의 희망이라도 엿보일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을 정도다.(“There’s No Hope For American Unless We Can Pity Ourselves,” Washington Post, May 15, 2020). 과거에 이런 일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어디 감히 세계 제1의 대국 자랑스런 미국의 시민을 깔보며, 어찌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단 말인가).

우리(미국인)가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일말의 어떤 희망도 없다고 전하는 워싱턴포스트

코로나 창궐에 속수무책인 나라. 의료체계가 엉망진창인 나라. 실직하면 하루아침에 중산층에서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해버리는 나라. 먹을 것을 무상으로 얻기 위해 몇 킬로미터의 줄을 서야만 하는 나라. 대부분의 국민이 팍팍한 삶으로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야하지만 부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배를 불리는 나라. 이런 것을 해결해 줄 생각일랑 눈곱만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라에 대한 불만.

한 번 터지니 한꺼번에 우르르 봇물이 터져버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모든 게 의문에 휩싸여버렸다. 그러한 고질적 문제와 병폐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나빠지는 나라. 그 정점에 있는 빈곤과 불평등과 인종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니 어떤 시도조차 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좌절.

빌어먹을 아메리칸 드림은 어디에나 있단 말인가? 그것도 혹시 허구? 그런 회의가 물 밀 듯 밀려오는 지금의 미국이다. 그 민낯이 이번 코로나사태로 수면 위로 완전히 드러나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해결될 수도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절감한 이들의 절망.

천하를 호령하던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쉽게 이야기하면, 미국이 여러 나라들 중 지존이란 표현)는 빈곤과 불행 그리고 사망의 의미로 희화화되었다.(“Under Trump, American Exceptionalism Means Poverty, Misery and Death,” The Guardian, May 10, 2020). 하다못해 과거의 영광스런 “예외주의” 딱지는 발가락의 때보다 생각 안하던 나라, 한국 같은 나라에게 붙이는 해프닝도 벌어졌다.(“What’s Behind South Korea’s COVID-19 Exceptionalism?” The Atlantic, May 6, 2020).

이렇게 자신이 거주하는 외부환경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그 다음 수순은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We’re Discovering Our Character,” The Atlantic, May 6, 2020). 세계 최강 국가의 국민에서 이제는 자신들이 무시했던 제 3세게 국가의 국민과 같은 처지에 놓였다고 생각하게 된다.(“Top Economist: US Cornoavirus Response Is Like Third World Country,” The Guardian, April 22, 2020). 그러면 차별, 불평등, 좌절과 분노, 그리고 절망은 단지 흑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전에는 흑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래서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알았던 것들이 모두 내 자신의 이야기라는 처절한 자각!

지금 미국인들은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진 미국과 미국인의 실체를 파악하는 중이라고 전하는 애틀랜틱 기사

그러니 뉴욕타임스가 현재 미국인들 사이에 팽배한 정서를 “공포(Fear), 불안(Anxiety), 분노(Anger), 절망(Desperation)”으로 짧게 규정한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것들이 길거리로 사람들을 나가게 한다. 해서 지금 미국 도처에는 흑인 사망사건의 피해자 조지 플로이드가 흘러넘친다. “내가 바로 목 눌려 숨져간 그 피해자, 조지 플로이드”라는 각성이 사람들을 인종, 지역, 연령, 직업에 상관없이 항의 시위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동변상련과 감정이입. 그것이 길거리를 수많은 조지 플로이드들로 강물처럼 흘러넘치게 한다. 플로이드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In Every City, There’s a George Floyd’: Portraits of Protest,” New York Times, June 2, 2020). 하여 백인 경찰은 단순한 대립각에 서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것은 피폐해진 나의 삶을 질식시키고 있는 기성체계와 못된 세력들로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태껏 존재했던 차이와 그로 인해 벌어졌던 문화전쟁들을 매우 하찮은 것들로 여길 정도로 코로나의 위력은 대단했다. 왜냐하면 삶과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는 플라스틱 빨대냐 종이 빨대냐, 와인이냐 싸구려 맥주냐의 차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The Coronavirus Makes Our Old Culture Wars Seem Quaint,”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이처럼 여태까지의 인종차별의 갈등 양상은 코로나 이후 큰 변화를 갖는다. 흑인 대 백인의 대립구도는 지금 “네 편 내 편”으로 갈릴 문제가 아닐 정도로 진화했다. 물론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트럼프는 이들의 정서를 집중 공략해 지지자를 결집시킨다)

어쨌든, 코로나 속에서 많은 이가 참여하는 저항이 가능할까란 칼럼(“Will the Coronavirus Crush the Resistance?,” New York Times, April 21, 2020)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과거엔 볼 수 없던 시위가 터졌고 더 대규모로 더 극력하게 더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이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지적도 나온다. 시위와 저항이 미국적인 게 아니라는 비판이다. 그러나 미국식이란 뭔가? 저항정신이야말로 자유를 지키고자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 정신이 아니었는가? 저항정신이야말로 미국적인 것 아닌가?(“The Double Standard of the American Riot,” The Atlantic, May 31, 2020). 사리에 맞지 않는 저항에 대한 이중 잣대는 무시해야 한다.

그럼에도 시위에 참여한 미국인들에게 건네고 싶은 몇 마디가 있다.

첫째,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약탈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약탈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약탈을 하는 순간 시위의 정당성과 취지는 훼손되고 더 많은 지지를 얻어 낼 수 없으며 상대 쪽에 되치기 당하는 빌미를 줄뿐이다. 또한 약탈로 인해 피해를 입는 이들의 대다수는 같은 처지에 있는 소상공인들과 대형할인마켓의 필수노동자들이다.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코로나로 수 개월간 벌이가 신통치 않았고 감염의 위험성 속에서도 먹고 살기 위해 사지에 나가 일을 해야 했다. 당장의 처지가 어려워졌기에 생긴 물욕 때문에 그들에게 약탈의 위협을 가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폭력을 규탄한다면서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편이 어려우면 오히려 구걸을 하는 게 낫다.

둘째, 하는 말 족족, 하는 짓 족족 밉상인 트럼프가 설혹 불에 기름을 붓는 짓을 한다 해도(“Episcopal bishop on President Trump: ‘Everything he has said and done is to inflame violence’,” Washington Post, June 2, 2020; “Editorial: Trump’s failure of leadership for a nation in crisis,” San Francisco Chronicle, May 31, 2020; “Intelligence Experts Say U.S. Reminds Them of a Collapsing Nation,” Washington Post, June 3, 2020), 미국의 모든 잘못을 트럼프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그야말로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물론 그의 탓도 매우 크다. 하지만 미국이 안고 있는 중증 문제가 모두 트럼프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니다. 트럼프는 그 일을 다룸에 있어 그 이전의 대통령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을 택했을 뿐이다. 그의 방식은 뻔뻔하고 조잡한 무시 전략. 그래서 일말의 동정심도 없는 것 같이 보일뿐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골수 지지자들을 결집시킨다.

트럼프 이전의 다른 지도자들은 동정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문제 해결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바마가 그 썩어 문드러진 체계를 고치려 시도했는가? 아니다. 트럼프나 다른 이들이나 모두 자신들이 선택한 정치적 행위를 할(했을) 뿐이다. 누구를 위한? 기득권을 위한 정치적 행위! 대표적인 문제인 계층 계급간의 불평등을 보라. 그것은 트럼프 이후 급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었던 미국의 중증 기저질환이다. 심각한 기저질환이 지속되었고 아무도 그것을 치유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불평등을 부채질 해왔던 기득권세력들, 내가 말하는 제국들을 위해 열심 봉사 했을 뿐이다. 미국은 그 둘의 노선 사이를 왔다 갔다 할 뿐, 아니 트럼프가 나와서 둘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것 같이 보이게 했을 뿐, 관통하는 사실은 단 하나 국민이 아닌 제국을 위한 정치였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트럼프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해결커녕 더 엉클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이 때문에, 나는 트럼프 정권하에서 미국의 예외주의가 빈곤, 불행, 사망으로 변해버렸다고 말하는 로버트 라이시의 견해엔 동의할 수 없다. 미국의 예외주의는 그가 노동부장관으로 재직했던 클린턴 때도 이미 그렇게 변질 되어 있었다).

따라서 문제는 트럼프가 아니다. 잔인무도한 폭력을 행사한 백인 경찰이 아니다. 물론 이것들도 큰 문제이지만 그것을 기정사실화하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더 큰 근본적인 문제가 똬리를 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공부가 필요하다. 내가 보건데 미국의 모든 문제의 핵심엔 원흉인 월가가 있다. 해서 이번 일의 동변상련과 감정이입 다 좋다. 그러나 비판(과 개혁)의 대상을 공략할 때는 대상의 층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흑백문제와 공권력의 만행 문제는 그 수준으로 공략하라. 그리고 일상생활에서의 곤경과 불안한 경제적 삶, 그리고 암울한 미래에 대한 문제는 그것대로 따로 공격 대상을 정해 공략하라. 이 수준에서 생성된 공포와 좌절, 절망과 분노의 유발자로는 원흉 월가가 있으니 월가와 거기에 동참해 당신들의 삶을 척박하게 만들어가는 데 일조하는 정치권에 그 화살을 겨누라. 그렇게 하지 않고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며 “백인경찰의 엄중처벌”만을 요구한다면 뒤에서 비웃을 이들은 월가와 정치가들이다.

최루액을 시위대에 뿌리는 텍사스 오스틴 경찰 사진 <뉴욕타임스/AP>

그래서 공격의 타깃은 썩어문드러진 미국의 시스템의 교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탑다운(위에서 아래로) 방식이어야 한다. 고작 20달러(약 2만 원)짜리 위조지폐 사용 혐의(위조지폐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가 사망에 이를 정도의 중범죄라면, 나라 전체를 강탈하고 전 국민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는 월가의 대형은행과 사모펀드의 사기와 강도짓은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 처벌은커녕 그들에게 두둑한 보상(구제금융)까지 주고 있는 것에 대한 끝까지 저항이 있어야 한다.(그런데 여러 가지 여건 상 과연 거기까지 갈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과연 <애틀랜틱>의 진단처럼 미국 역사상 2020년이 최악의 해가 될 것인가?(“Is This the Worst Year in Modern American History?,” The Atlantic, May 31, 2020). 귀추가 주목된다.

 

참고자료

Henry Steele Commager, The American Mind: An Interpretation of American Thought and Character Since the 1880’s (New He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1959).

“We Are Living in a Failed State,” The Atlantic, April 20, 2020.

“There’s No Hope For American Unless We Can Pity Ourselves,” Washington Post, May 15, 2020.

“The United States Is A Country To Be Pitied,” Washington Post, May 14, 2020.

“The America We Need,” New York Times, April 9, 2020.

“‘In Every City, There’s a George Floyd’: Portraits of Protest,” New York Times, June 2, 2020.

“Intelligence Experts Say U.S. Reminds Them of a Collapsing Nation,” Washington Post, June 3, 2020.

“What’s Behind South Korea’s COVID-19 Exceptionalism?” The Atlantic, May 6, 2020.

“The Double Standard of the American Riot,” The Atlantic, May 31, 2020.

“Is This the Worst Year in Modern American History?,” The Atlantic, May 31, 2020.

“Retailers, Battered by Pandemic, Now Confront Protests,” New York Times, June 1, 2020.

“We’re Discovering Our Character,” The Atlantic, May 6, 2020.

“8 Minutes and 46 Seconds: How George Floyd Was Killed in Police Custody,” New York Times, May 31, 2020.

“What Happened in the Chaotic Moments Before George Floyd Died,” New York Times, May 29, 2020.

“Will Protests Set Off a Second Viral Wave?” New York Times, May 31, 2020.

“Will the Coronavirus Crush the Resistance?,” New York Times, April 21, 2020.

“The First Invasion of America,” New York Times, May 21, 2020.

“Under Trump, American Exceptionalism Means Poverty, Misery and Death,” The Guardian, May 10, 2020.

“Top Economist: US Cornoavirus Response Is Like Third World Country,” The Guardian, April 22, 2020.

“The Coronavirus Makes Our Old Culture Wars Seem Quaint,”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American Is a Tinderbox,” New York Times, April 22, 2020.

“The World Is Taking Pity on Us,” New York Times, May 8, 2020.

“‘They just kind of destroyed the place’: Businesses closed for months now face looting aftermath,” Boston Globe, June 1, 2020.

“Editorial: Trump’s failure of leadership for a nation in crisis,” San Francisco Chronicle, May 31, 2020.

“Episcopal bishop on President Trump: ‘Everything he has said and done is to inflame violence’,” Washington Post, June 2, 2020.

 

김광기 경북대 교수의 연재 ‘인사이드 아메리카’는 <프레시안>에 동시 게재됩니다.

수, 2020/07/08-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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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북미에 이어 남미로, 이제는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빠른 속도로 확산 중이다.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크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멕시코는 물론이거니와 브라질을 포함한 대부분 국가에서 거침없이 퍼져가는 이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건 생존의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분명한 현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는 빈곤하지 않다. 살인적인 사회적 불평등이 뿌리 깊은 똬리를 틀고 있는 곳일 뿐, 결코 ‘가난’ 한 대륙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풍부한 지하자원을 가진 덕분에 일찌감치 주변 강대국의 먹이사슬에 저항할 틈도 없이 예속되어 버린 탓에, 외국자본과 소수 매판 자본가 계급이 주축이 되어 형성한 ‘신식민지’가 지금의 라틴아메리카이다.

형식적인 정치적 독립은 중요하지 않다. 자본의 힘이라면 정치 권력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저력’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지개혁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쿠데타가 일어났고, 혹독한 독재자에게 저항하여 민중 정부라도 세우면 어김없이 외세의 지원을 받는 반군이 득세하는가 하면, 선거를 통해 집권한다 한들 기득권층인 자본가 계급의 맘에 들지 않으면 ‘우매한’ 대중이 선동에 이끌러 선택한 ‘합법적’이지 않은 정권이 된다.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20세기 내내 반복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는 여전히 진해 중이다. 유럽의 식민지로 시작해 미국의 ‘신’식민지로 전락한 이 대륙의 운명은 소위 자본주의 시스템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여지없이 보여주는 곳이다. 이성과 합리가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라, 소수 독점자본의 이해를 보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를 해체하여 개인 각자도생의 길만을 열어놓았으니,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는 수많은 라틴아메리카 국민의 설 자리는 벼랑 끝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전 세계가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금 사회로 외면당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코로나19의 위험을 애써 외면하는 일일 것이다. 당장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막막한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위험을 경고하고, 지켜야 할 수칙을 이야기한 들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이를 개인의 문제나 책임으로 치부해 버리지 말자. 자신의 하루 일 노동이 나와 가족 생계의 전부가 되는 사람들에게 중산층의 경제적 여유와 안정을 갖춘 이들에게나 가능할 법한 전염병 대처나 위기 인식 등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혹독하다. 그렇다. 현재 그들에게 하루의 생계보다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멕시코, 페루,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 등 소위 라틴아메리카 대부분 국가의 비공식 경제부문은 거의 50%에 육박하고, 이는 구조적으로 국가와 사회시스템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에게 삶이란 사회적 공존의 영역이 아니라 원자화된 개인의 치열한 생존의 투쟁이다. 계층의 이동이라는 것은 존재한 적도 없다. 그렇게 차곡차곡 만들어진 라틴아메리카의 이른바 사회질서는 공고하다.

얼마 전 에콰도르 과야낄(Guayaquil)이라는 도시에서 코로나 감염 사망자들의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것이 국내에 보도되자, 많은 이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브라질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사망자를 매장하는 모습이 소개되기도 했다. 외신의 ‘선택’을 받은 극적인 장면들만 국내 포털을 통해 전달될 뿐이다. 미국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기층민중들의 운명은 별반 다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들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이 어떻게 다수의 국민 혹은 사회의 구성원들을 소외시키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이다. 현재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확산되는 코로나19는 분명 ‘계급’에 따른 ‘선별적’ 감염이 두드러질 것이다. 유명인 몇몇이 감염되고 정치인들이 감염되었다고 해서, 이 전염병의 계급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첨단 기술을 갖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고 완치될 수 가능성이 있지만, 사회보장은커녕 의료보험도 없는 다수 기층민중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코로나19의 급습은 유럽은 물론 미국과 같은 자칭 제1세계가 구축한 체제가 양산한 사회의 배제시스템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지금, 멕시코에서는 코로나19 감염으로 병원을 찾으면 고통 없이 빨리 죽을 수 있도록 주사를 놓는다는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SNS와 Facebook을 통해 번지고 있는 모양이다. 이 같은 문제의 본질은 결국 그 소문의 진위보다는 평소 멕시코 의료체계에 대한 불신과 공중보건 시스템의 부재가 낳은 불안과 공포의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당뇨나 심장병과 같은 만성 질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전체 질병의 70%에 이르지만, 현재 멕시코의 공공의료 시스템으로는 이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적다. 그렇다고 민영의료 시스템이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멕시코 전체 인구의 약 천 육백만 명이 의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치와 시장경제가 정착했다고 알려진 칠레도 별반 다르지 않다. 1973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피노쳇 군부 정권은 일찌감치 미국 시카고 대학 출신의 경제관료들을 앞세워 가장 ‘모범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그 결과 현재 역내 가장 불평등한 민영 의료시스템을 구축했고, 가장 비싼 약값을 치러야 하는 국가이다. 참고로 최상위 1%가 전체 국부의 26.5%를 소유하고, 반면 취약계층의 50%가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2.1%에 불과하다. 2019년 10월부터 시작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구조적 원인인 셈이다.

이번 코로나19로 지금까지 구축되어 온 의료체계의 붕괴, 의료 민영화, 의료의 공공성 등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비판, 그리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그러나, 병상이 부족해 환자들이 방치되고 산소 호흡기가 부족했다는 사실보다 정작 문제의 본질은 과연 바이러스라는 공동의 적으로부터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가이다. 단순히 의료시스템만의 문제로만 좁혀서 다루어질 수 있을까. 국가 예산을 들여 병상을 확보하고 호흡기를 대량 구매하는 것이 위기를 대처하는 퍼포먼스에 그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얼마 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볼리비아의 과도기 정부는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의료장비 구매 과정에서 불거진 부패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지만달라진 것은 없다.

상점과 마트에 풍부하게 진열된 손소독제나 마스크는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이들에게나 해당한다. 그리고, 여전히 라틴아메리카의 상당수 국민은 상점에 즐비하게 진열된 손 세정제를 사는 것이 부담스럽다. 반면, 쿠바에는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돈만 있다면 흔하게 살 수 있는 잘 포장된 손 소독제 따위는 없다. 이 팬더믹으로 더욱 좁혀오는 경제봉쇄를 차치하더라도, 턱없는 물자 부족은 쿠바인들의 일상이 되었다. 이를 사회주의의 ‘저주’라고 속단하지 않기 바란다. 그 이면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미국의 경제봉쇄를 버텨온 저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니까.

쿠바에서 팬더믹이 시작되고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지역사회 중심으로 시작된 공동행동이다. 쿠바의 모든 의료진과 의대생들이 각 지역으로 파견되고, 노인과 감염 취약계층을 파악하는 특별전담의료진들도 구성이 된다. 이 같은 사회적 행동의 목적은 하나다. 코로나19의 급습으로부터 함께 생존할 수 있는 권리를 동등하게 보장하려는 사회의 빠른 대처였고, 소외 계층이 없도록 하려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쿠바는 여전히 옳다. 적어도 코로나19의 급습을 받는 지금.

수, 2020/07/0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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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현재 양극단으로 나뉘어 있지만, 대부분 중국이 커다란 문제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것 같다. 트럼프는 취임하는 첫날부터 중국과 통상문제로 대립각을 세웠고, 2017년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을 ‘수정주의적 패권’이라고 호칭을 붙이며 주요한 전략적 적국으로 규정하였다.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예상되는 조 바이던은 2019년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중국이 미국의 먹거리를 빼앗아간다는 우려를 평가절하하였지만, 그 역시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에 대한 강경대응을 추구하고 있다.

공화당의 강경파 상원인 J. Hawley와 M. Gaetz 같은 인사들이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진보와 중도 진영 역시 새로운 냉전시대에 대하여 염려하면서 중국과 관계를 통제할 새로운 대화를 촉구하고 나섰다. 표현을 달리하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미중 관계의 현상태를 매우 중대하게 바라보고 있다.

불행하게도 미중 간의 경쟁에 대한 논쟁은 대상국가의 내부적인 성격을 비난하는 관행적 경향에 치우쳐 있다. 이들은 중국의 지배이념, 정치체계, 또는 개인 지도자의 특성 등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오랜 관행이 되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참여 구실로 독일의 군사주의를 격퇴하고 세계를 민주주의로 지킨다는 것을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 하였고, 이후 제2차 대전에는 파시즘을 패퇴시킨다는 명분으로 싸웠다.

냉전의 초기 당시에 유명했던 조지 캐넌의 ‘X’ 문건(타이틀: 소비에트 행동의 근원)에는 ‘모스크바는 공산당의 권위주의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내부적으로 팽창에 대한 무자비한 동기를 부여하고 외부적으로 상대국가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원만한 타협은 결코 유효하지 않으며, 소비에트가 내부적으로 무너질 때까지 봉쇄를 감행하는 것이 유일한 선택지이다”라고 적고 있다.

최근에도 미국의 지도자들은 이라크의 문제를 사담 후세인이라는 무자비하고 사악한 야망과 비이성적인 종교적 열광을 지닌 지도자 때문으로 규정하고, 그의 외교정책이 전적으로 이념적 신념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비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모든 대결의 과정 속에서, 제기되는 현안의 문제들은 국제정치 자체의 본질적인 경쟁적 성격이라는 환경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되는 상대국 지도자의 기본성격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과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전직 백악관 안보보좌관이었던 H.R. MacMaster는 중국이 위협적인 것은 지도자들이 민주적 정치제도와 자유시장경제 대신에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모델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폼페이오 역시 같은 입장이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미중 관계가 악화된 것은 10년 전 중국과 지금의 공산당 리더쉽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며, 현재 중국공산당은 서구의 이상, 서구의 민주주의 서구적 가치를 파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더 나가서, 호주의 수상인 Kervin Rudd같이 중국에 대해 복잡한(황당한) 견해를 지닌 이들은 “중국의 점증하는 위협은 시진핑 주석이 권력집중에 대한 공세적인 입장을 취한 것에 기인한다”고 판단하면서 “시진핑이 개인적 (독재)지도성향으로 중국체제에 관료제라는 전염병을 강화시키려 한다. 반면에 국제사회는 무방비상태로 이를 방관하고 상황에 익숙해져 있다”고 염려를 표한다.

이러한 견해는 중국의 지도자가 다른 성격이면 문제가 덜 심각했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같은 주장을 Timothy G. Ash도 되풀이 한다 “신냉전시대는 시진핑이 2012년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면서 반전을 거듭하며 시작되었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보다 공세적으로 변질되었다.”

다른 이들은 중국의 강화된 외교정책의 주요한 요인으로 민족주의의 대두(자연적이든, 정부가 조작을 하였든)를 언급하기도 하고, 한편에서는 일군의 국제관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것으로 카테고리에 의존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단위-차원(Unit-level), 축소주의자(reductionist), 이차(부수적)-이미지(second-image)등으로 카테고리를 분류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상기의 다양한 이론들은 대체로 해당국가의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내부의 특성에 의해서 형성된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미국의 외교정책은 때때로 자신의 민주주의 시스템과 자유라는 가치 또는 자본제적 경제질서 등에서 의존하며, 다른 국가들의 정책 역시 자신들의 내부적인 지배체제, 통치이념, 전략적인 문화 또는 지도자의 개인성향 등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국내적 특성에 기반하는 설명들은 매우 단순하고 직접적이라는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매력적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주의는 관용에 기반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반면에, 지도자들이 무엇을 하던 견제하는 기능이 없는 독재국가들의 침략자는 지배와 억압의 성향에 기반하여 공세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내부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면, 대결의 과정에 대한 자신의 책임에 대하여 눈을 감게 하고 손쉽게 상대방을 비난하도록 유도하기 십상이다. 우리는 천사의 편에 서 있으며 우리의 정치체제는 건전하고 정의로운 원칙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대방의 나쁜 정치제도 또는 악한 지도자 때문에 온갖 악한 일들이 터져 나온다는 식이다.

이러한 인식에 기반하면 해결책이 손쉽게 준비된다. “나쁜 나라 또는 사악한 지도자들을 제거하라!” 또한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것은 국제적인 도전에 직면하여 일반대중의 지지를 과시하는 속도전의 방식으로, 악한 짓을 벌리는 것이 상대방의 속성이라고 몰아붙이면 된다.

불행하게도 모든 대결의 원인을 상대방의 국내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우선 대결이 일차적으로 상대국가의 체제라는 속성에 나온 것이라면, 장기적인 해결책은 체제를 전복하기만 하면 된다. 타협과 협상, 공존공영, 상호이익을 위한 광범한 협력 등을 거론할 근거가 사라지면서 차후에 잠재적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오게 된다. 상대방 역시 우리의 본질을 위협이라고 인식하게 되면 죽을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인 셈이다.

단위-수준(unit-level)이론이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미중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광범한 구조적 요인들이다.

일단 강대국인 양국은 국제적인 기구들 속에서 전면적으로 격돌을 마주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가 상대방에게 잠재적인 위협인 까닭에 서로가 상대방을 짜증스럽게 바라보면서 상대방의 이익을 위협하며 자신이 보다 많은 것을 확보하려는 동시에 상대방의 능력을 축소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서로가 상대방이 자신의 안보와 번영 그리고 국내적 생활방식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온갖 기법과 성공의 수위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면서 서로를 견제하여 갈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상대방의 미래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의 최근 외교정책의 변덕에서 충분히 지켜보았듯이, 모든 영역에서 패권을 향해 양보없이 경쟁을 벌여나갈 것이다. 상대방에게 가하려는 서로의 전략적 목표의 불일치(비양립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지정학적 조건에서 부분적으로는 지난 세기의 사건경험을 통하여, 긴장의 상황은 더욱 확대되어 간다.

한가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의 지도자들은 가능한 이웃국가들과 안전하게 지내길 바라는 것이고, 같은 배경으로 과거에 미국이 서구의 지역에서 몬로 독트린(고립주의)을 공식화하고 강화해온 행적이다. 북경당국은 주변국가들에게 자신들의 일당 국가자본주의를 강요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주변국가들이 각자의 이해에 전념하기를 바라면서 그들에게 심각한 일체의 위협을 가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목표를 향하여, 중국은 미국이 중국 주변에서 철수하여 미국의 군사력에 대해 위협을 느끼지 않거나 일부 주변국들이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이러한 바램은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고 비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어느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상대방이 군사력을 주변의 여러 국가들과 연합하여 배치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한편 미국은 아시아에 잔류해야 할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J. Mearsheimer와 필자가 여러 번 언급하였듯이, 중국이 아시아에서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을 봉쇄하는 것이 미국의 안보를 강화하고 중국으로 하여금 국내 현안에 집중하도록 강요하면서 세계를 향해, 특히 미국의 인접 지역에, 힘을 과시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의 논리는 역으로 중국이 자유질서를 유지하고 미국이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도입하려 한다고 가정해도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하게도 제로-섬의 대립이다. 누구도 상대방을 제압하지 않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 간에 진행되는 경쟁의 근본 구도는 개별적인 지도자의 성향이나 체제의 성격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강대한 양국이 추구하는 힘의 배분과 이에 상응하는 전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경쟁의 강도에 미치는 영향과 상대방에 가하는 기량과 관련하여, 정치상황과 개별적인 지도력이 전혀 무관한 것은 절대 아니다. 지도자에 따라 수반되는 위험을 감수(또는 회피)하려 할 것이며, 현재의 미국인들은 무능한 지도력이 펼치는 고통스런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새로운 지도자가 나타나거나 국내적 상황이 급변한다고 해서 미중 관계가 가지는 본질적인 경쟁의 성격이 따라서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미국 내의 진보진영과 수구집단 모두 잘못하고 있다. 전자는 중국은 미국에 대하여 대단한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며, 적당한 타협과 능란한 외교를 결합하여 대응하면 새로운 냉전이 야기시키는 격돌의 대부분을 제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필자는 능란한 외교관의 자질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만, 이것만으로 강대국 간에 힘의 배분과정에서 발생하는 치열한 경쟁을 예방하는데 충분하다고 믿지 않는다.

트럼프가 그가 주도하는 통상전쟁에서 언급하였듯이, 참모인 강경파들은 중국과 경쟁이 승리하기 쉽고 편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더욱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미중의 경제관계에 대한 단절(decoupling)을 시도하며, 국방비를 대폭 증액하는 한편,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를 과시하면, 궁극적으로 중국의 공산당체제를 종결시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기의 행동에 따르는 명백한 위험과 비용을 차치하더라도, 이들은 중국의 취약점을 과장하고 미국이 지불할 비용을 과소평가하며, 중국과 치를 십자군 전쟁에 다른 국가들이 흔쾌히 가담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가정하고 있다. 중국의 주변국가들은 중국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미국과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인 대결의 장에 말려들기를 결단코 원하지 않는다.

또한 중국이 민주적으로 변한다 해서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는데 소극적이며 미국의 종속적 지위를 항구적으로 수용할 것이라고 믿은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현재 국제정치의 구조적 관점이 제기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첫째로, 세계가 장기적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천재적인 전략이나 돌출적인 사건으로 현재의 경쟁구도가 해결될 수는 없다. 최소한 가까운 장래는 아니다.

두 번째, 현재의 상황은 심각한 경쟁구도이며, 미국은 이를 심각하게 대처해야 한다. 아마추어 수준의 책임자들과 국가보다 개인의 이익을 앞세우는 대통령을 내세워 야심적인 경쟁 상대자와 경합할 수는 없다. 당연히 앞선 군사기술에 투자를 해야 하고,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외교관 진영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에 더하여 아시아 동맹국가들과 충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긴요한 까닭은 지역내의 많은 도움이 없이 단순히 미국 홀로 아시아에 영향력을 지탱할 수는 없다.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일은 양국이 경계(boundary)를 가지고 때로는 경합을 하고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면서도,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중첩되는 주제에 대해서는 서로 협력하고 진지하게 이해를 공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후위기와 팬데믹 예방에 관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묵살하고 혼자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고 미래의 위기를 예방할 수 없기 때문에, 워싱턴 당국은 중국이 넘어서는 안되는 레드-라인을 분명히 설정하고 중국에게 이를 이해시켜야 한다.

이 지점에서 단위-수준(unit-level)의 이론을 도입해야 한다. 양국은 경쟁을 하면서도 현재 여러 국제적인 기구들 안에서 심하게 얽혀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경쟁관계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는 각자의 국내 정치제도와 책임자(지도자)들의 역량에 달려있다.

필자는 현재 미국이 결코 밀리지는 않겠지만 일방적으로 우세하지도 않다고 판단한다.

출처: 포린포리시 on 2020-06-30.

Stephen M. Walt

하버드대학교의 석좌교수이며 국제관계학의 세계적 권위자이다

목, 2020/07/09-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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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주:

신향촌건설운동 20주년을 맞아, 원톄쥔 교수가 운동의 회고와 함께 그 이론적 배경을 정리해나가고 있다. ‘맛보기’에 해당하는 이 짧은 비디오 강연에서는, 신향촌건설운동의 큰 사고의 틀을 규정하는 중국 전통사상에 대한 간략한 언급과 함께, 자신들의 이론 다섯가지를 정리해서 설명하고 있다. 

미국과의 갈등이 초래한 직접적 압력과 이에 대한 중국정부의 각종 지정학적 대응, 코로나 사태로 인한 전세계적 혐중분위기와 함께, 최근 홍콩보안법 통과는 미국과 서방을 대체하는 대안 거대담론의 제시자로서, 중국에 대한 세계의 기대를 크게 잠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톄쥔 교수와 그의 추종자/찬동자들은 중국의 주류와 비주류, 그리고 관방/시장과 민간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고 있다는 점에서, 계속 외부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이 이론들은, 기후변화, 불평등과 같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초래한 전지구적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큰 틀에서는 생태문명 건설, 구체적으로는 로컬라이제이션과 향촌건설이라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각급 정부의 ‘향촌진흥’정책에 실제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서, 또, 그 내용들이, 중국 바깥 세계와의 충돌을 최소화하거나, 오히려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초래한 다양한 리스크를 줄이는 방향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위협론을 반박할만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원톄쥔 교수의 이론은 주로 중국 (근)현대경제사의 실전적 분석과 정책수립/실천, 민간대안운동 경험을 그 재료로 삼는 2~30년 이상의 실천과 10년간의 연구 성과에 기반하고 있다. 특히, 그의 세계체제속에서의 비용전가론이나 농촌균형발전론은 중국내에서도 여전히 비주류에 속하긴 하지만, 오랜 기간 숙성돼온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문명파생론’은 그의 전문적 연구 영역에서 다소 벗어난 최근의 고민으로, 학계의 활발한 논의대상으로 격상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그 다음 이론인  ‘제도파생론’과 함께, 이 주장들은 서구 학계의 중국문명/ 정부 비판에 대한 대응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학문적 주장으로서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외부세계와의 열린 논쟁의 과정과, 추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경제학자로서, 그의 사상적 고민, 형이상학적 논의는 그의 연구결과에서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중국 ‘생태문명’의 기반사상이나 그가 스승으로 여기는 ‘량슈밍’사상 등에 주목하는 중국 바깥의 연구자나 활동가들은 이를 궁금하게 여기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강연이, 도덕경을 직접 언급하거나, 중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이지만, 역시 정확한 학술적 표현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삼농문제는 개발도상국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중국의 삼농문제는 1990년대 급진적인 현대화 개혁이래, 중국사회의 큰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21세기에 진입하는 시점에, 공산당과 국가의 중요한 관심사가 됐다. 2001년 이래 신향촌건설운동을 진행하면서, 삼농문제의 완화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과거 20년간, “민생을 보호하고, 연대를 촉진하며, 다원화를 제창한다”라는 생태문명 이념을 받들어 오며, 지식인과 청년학생들이 선도해서, 사회 각계층이 스스로 참여하고, 기층민중과 함께, 향토문화가 결합된 실천적 사회개량 실험을 해왔다. 그 결과, 중국 곳곳에 실천 현장이 생겨났다.

 신농촌건설로부터, 향촌진흥에 이르기까지, 식품안전으로부터, 안전한 문화, 안전한 생태환경, 그리고 국가안보에 이르기까지, 20년에 걸쳐, 향촌건설참여자들의 분투는 쉼이 없었다: 향촌건설에서, 도농교류, 국제교류에 이르기까지, 사회공익에서 사회적 기업에 이르기까지, 인재육성에서, 농민과의 협력, 농민공지원, 사회적 생태농업 (커뮤니티 지원 농업 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향토문화부흥, 향촌건설연구에서 향촌종합발전에 이르기까지, 지난 이십년간, 다양한 사회적 모색이 지속돼 왔다.  


향촌건설사상이론체계

여러분들에게 우리 향촌건설의 실천과정중에 만들어진 이론 체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개인적으로는 60세부터 시작하여 이제 70세에 이를 때까지, 우리 연구진들과 함께, 각종 연구를 수행하는 가운데, 만들어진 성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이론체계는 5개 관점으로 정리할 수 있다. 동시에 이 5개 관점에 대한 연구는 어떻든, 완전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야겠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 연구 그룹의 스타일이다. 우리는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를 잘 간직하고 유지해왔다. 이것이 우리 연구의 태도에 일관되게 반영이 돼 있다.

중국전통문화는 근대 자연과학과 같이 분과가 명확하게 나뉘어 그 구조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선, 큰 틀을 만들어, 전체적인 대략의 얼개를 이해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가 지금 강조하는 생태문명 전략의 전환과도 관련이 있다. 21세기를 맞아, 갈수록 공업화,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초래된 위기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중국은 생태문명으로 전환을 시작했다. 큰 방향성의 전환이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생태자원이란 단어는 대단히 풍부한 내용을 품고 있다. 극단적으로 다양화한 자원체계이고, 그 요소들이 함께 묶여 있어서, 하나 하나 분리해 낼 수도 없다. 현재 중국의 국가지도자가 강조하는 ‘양산사상兩山思想’ (역자주: 시진핑이 녹수청산綠水青山이 금산은산金山銀山이다라고 한 표현을 이르는 말, 환경생태자원이 경제적 가치도 가진다는 의미)은, 산과 물, 전답, 숲, 호수, 풀 등의 자원이 종합적인 하나의 시스템으로 개발돼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원을 쪼개서 시장에 내놓으면 그 가치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생태자원은 구조화된 하나의 시스템으로, 원래 시장 논리로 명확하게 분절될 수 없는 자원이다. 전일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생태 시스템이다. 인류는 공업화 시대에 생태자원을 생산요소로 변화시켰다. 이를테면, 공업화와 도시화는 토지를 사용해야 하는데, 토지는 생산요소로 인식된다. 이렇게 토지를 사용하기 위해,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불을 질러 황무지로 만든다. 그 결과로 우리는 생태위기를 목도하고 있다. 아마존 열대우림이 매년 감소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전통적인 개발은 이렇게 토지를 평면자원으로만 인식한다. 그 토지안에 자라는 나무, 풀, 서식하는 동물 등은 토지 자원 관점에서는 전혀 가치가 없기 때문에, 모두 제거돼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물 다양성 자원은 사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인류 사회와 매우 고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각도에서 보자면, 우선 생태문명 전환이 요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사상의식 측면에서 개명돼야 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최근 향촌건설이 강조해온 일련의 기본이념과도 통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대상무형大象無形, 대음희성大音希聲 (도덕경 41장)을 강조해 왔다. 만일 당신이 한마리 코끼리를 묘사하고자 한다면, 특히나 체계적으로 코끼리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이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다름아니다. 다리를 만지면, 기둥이라고 할 것이고, 배를 만지면, 벽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는 대상무형은, elephant 즉 코끼리 이야기가 아니라, 커다란 객관적인 세계를 의미한다. 중국의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전략이 결합적으로 말하는 물과 숲, 전답 등을 아우르는 생태자원은 또한 구조적으로 쪼개서 분석할 수 없는, 담론상 하나의 객관적인 사물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대상무형을 강조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다원화사회구조속의 활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할 때, 무성무식無聲無息 (출전: 시경,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정체를 알 수 없음)이 더 명확히 드러난다. 지난 몇년간 외국에서 수많은 친구들이 찾아왔다. 농촌에 가서 수많은 향촌건설 현장을 돌아보고 나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현장이 생겨났는가?” 물었다. 우리 대답은, 허탈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 별거 없다. 원래 이렇게 해왔다. 무슨 본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뚜렷한 리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모두들 자기 일을 하는 거다. 판은 크게 벌리려고 노력하지만, 큰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다. 소식을 챙겨 들으려고 해도 따로 들을 수 없지만, 가보면 만날 수 있다.” 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가의 철학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은 이 사회가 원래 이런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자연의 다양성을 갖춘 생태 시스템안에서 느끼는 것과 유사한 느낌을 받게 된다. 만일, 지속적으로 생태화를 진행하다보면, 사람은 자연생태와 긴밀하게 결합돼 간다. 인류사회의 다양성은 자연생태의 다양성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런 감각으로 계속 진행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입어중도立於中道”에 처한 자신을 발견한다. 중도는 무엇인가 ? 대도중용大道中庸이다 – 누가 누구이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를 판별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의 행위는 어떻든 다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표현으로 나타날 때는,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다양성을 인정하는 존재라면, 각각의 행위에서 나름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다 합리적이다.

이런 상대적이며, 다양한 이유와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중도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처지에 도달했을 때, 이것을 “중도이립中道而立,비비가장야臂非加長也,이종치자중而從之者眾” (역자주 – 맹자와 순자를 동시에 인용하고 있다.  활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활시위를 당기지만, 발사는 하지 않는다. 또,  높은 곳에 올라 팔을 뻗으면 팔이 길지 않아도 보인다. 배우는 사람들이 쉽게 따라 올 수 있도록 여지를 둔다라는 의미 )이라고 할 수있다. 이 표현은 왜 향촌건설운동에 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래서, 향촌건설은 서구의 냉전형 이념이 만들어낸, 인문사회과학으로 포장된 시스템을 통해, 오직 하나의 정치형태만이 정답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친구들이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원선생 어째서 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소?” 나는 원래 습관이라고 답하면서 미소를 짓는다. 왜냐하면 매사에 흑백논리를 들이 댈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연구지도 사상으로 중국전통문명중에서도 비교적 변증론적 색채를 가진 것을 취한다. 또 비교적 자연주의에 가까운 노자의 사상을 채택한다. 물론 공자의 사상도 결합돼 있으며, 불가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실은 전통 사상내에서 유불도儒佛道 삼자를 분리해내기도 어렵다. 그래서 향촌건설연구는 서구의 사회과학이 채택하는 분과학문적 분류를 채택하지 않기로 한다. 특정 이념에서 출발한 연구도 지양한다.

 

회고해보는 우리의 관점

첫번째 관점은 역사적으로 중화민족의 문명전승을 염두에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만년에 달하는 문명이고, 이 문명의 전승은 인위적인 것이 아니다. 세계 문명사를 돌아보아도 문명의 연속성은 단순한 인위에 의해서 확보되지 않았다. 그래서 특정 인종이 선진적이라 할 수 없고, 그들이 다른 기타 정신요소를 더 갖추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실제는 외부의 환경차이가 있을뿐이다. 그래서 문명의 형성 조건이 다르고, 각각의 인류 문명의 차이를 낳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옳고 그름도 없고, 선진과 후진도 없다고 규정한다. 다양한 인류문명은 각기 스스로 합리성을 가지고 존재한다.   내재적으로 합리적 요소를 갖춘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의 부락 사회가 낙후된 것이라고 하고, 생존방식이 원시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런 원시적 생활방식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한 내재적 합리성을 갖고 있다. 왜 이것을 후진적이라고 단정해야 하는가? 이것은 자본주의가 인류문명의 차이를 구별하며 만든, 일종의 주관적 판단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가치관을 배제한 채 인류의 문명을 관찰하려고 한다. 중요한 관찰의 포인트는, 기후의 주기변화에 따라 파생된 적응성 변화이다. 기후주기변화는 또 기후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렇게 각각의 기후대는 직접적으로 지표의 자원에 영향을 끼친다. 인류사회는 일찍이 원시시대에 농업과 수렵문명의 시기로 접어들었고, 주로 지표의 자원에 의존해서 생존해왔다. 그래서, 기후의 주기변화와 특정 기후대에서의 지표지리자원의 변화가 인류문명의 차이를 가져왔다.

만일 우리가 세계관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면, 우리 향촌건설연구자들의 세계관은 ‘객관적인 역사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류는 주로 식민화에 의해 결정된 이념에 몰입했고, 실은 서구중심주의가 서방의 이러한 변화 과정을 선진이자 보편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서구중심주의를 포기한다면, 동방의 문명이든 서방의 문명이든, 남방 혹은 북방의 국가이든 각양의 생존 방식이 본래부터 다른 문화로 나타났을 것이고, 당연히 문화다양성의 합리적 내적요인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선 향촌건설을 통해서 사람과 자연간의 긴밀한 결합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식민화 이래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이 세계의 새로운 생태화 세계관과 가치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예전에 홍콩 링난대학의 라우킨치 LAU Kin Chi 劉健芝선생의 도움으로 국제비교연구를 했을 때, 내 강연에서 beyond cosmology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의 세계관을 뛰어 넘어야하고, 가치 판단을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당시에는 스스로도 매우 명료한  뜻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나의 중요한 관점중 하나가 됐다.

다음은 근대 인류사회에서 우리가 형성한 연구 관점을 돌아본다.

과거 개발도상국의 많은 사람들은, 우리 중국인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제도의 문제라는 ‘제도결정론’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거시적 비교를 한 후에, 역사가 내포하는 세계관을 통해서, 제도문제를 연구해서 ‘제도파생론’을 만들어 냈다.

만일 우리가 앞서 언급한 첫번째 관점을 ‘인류문명차이 파생론’이라고 명명한다면, 그 내용은 자연환경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문명의 형태가 결정되고 파생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그 다음단계는 ‘제도파생론’인데, 일정한 자원의 구속조건하에서 상이한 인류문화가 형성되고, 거기에 맞는 각각의 제도가 파생됐다는 뜻이다. 

왜냐면, 각 지역에 부여된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식민화이후 수립된 대부분의 후발국가들은 모두 그들의 자원조건을 다시 변화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런 자원환경이 제한하는 조건하에서, 제도는 요소구조의 변화에서 파생된다. 혹은 요소구조변화가 이런 제도를 형성한다. 그리고 후속제도변화의 경로의존을 결정하게 된다. 제도 변화의 경로가 앞서의 제도 구조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제도결정론이 아니라, 제도파생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두번째 관점은 사실 하나의 이론 프레임을 형성하게 된다.

세번째 관점은 개발도상국가가 현재 직면한 큰 도전과제들이 실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제도적 비용이 외부에서 전가된 것이라는 점이다. 

한걸음 더나아가 이 이론과 월러스타인, 사미르 아민 그리고 아리기의 이론과 함께 결합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세계가 사실은 핵심국가-반핵심반주변국가-주변국가의 순서대로 비용이 전가 되는 구조로 운용된다는 것이다.

왜 선진국은 선진국이 됐나? 왜 후진국과 개발도상국은 늘 수많은 재난에 직면해야 하는가? 사실은 전자의 비용이 후자에 전가됐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두번째 관점과 관계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어떤 제도변천도 모두 본래 제도의 프레임안에서 수익을 점유하고 비용은 다른 이에게 떠 넘기는 행위를 주도하는 이익집단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목적은 수익은 극대화하고 비용은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획이 성공한다면,  유도된 변천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실패한다면, 이번엔 타인에게 비용을 부담하라고 강요하고, 이를 강제적 제도변천으로 부를 수도 있다. 이런 관점으로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설명하면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은 핵심국가 (지금은 미국이 가장 노른자이다)에서 반주변부 국가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주변부 국가로 비용이 전가되는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변부 국가마저 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그 비용을 자연 환경에 전가하게 되며, 이는 생태환경의 파괴, 즉 기후변화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이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엄중한 도전이다. 이러한 글로벌라이제이션 시스템은 그러므로 파멸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다양성을 전제로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지 못한다면, 이런 결과를 직면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다름아니다.

우리의 네번째 관점은 개발도상국은 이런 정해진 틀과 운명에 빠져나갈 수 없고, 즉, 발전함정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주권을 외부에 빼앗겼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은 스스로 정권을 수립할 때,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 종주국과 협상을 통해서 국가의 주권을 쟁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정한 거래를 하게 되는데, 주로 자원주권을 내줄 수 밖에 없다. 심지어는, 핵심 경제주권을 내주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금융과 재정에 대한 것이다. 이때 얻게 되는 정치주권은 명목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는 집권을 하면서 사회에 일정한 발전의 약속을 하게 되는데, 경제자원에 기반한 자주개발 수익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 약속도 지킬 방도가 없게 된다. 그래서, 개발 도상국은 이러한 주권외부성이 정한 운명의 족쇄안에서, 자기 국가의 발전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전체 20세기는 비록 짧았고, 미완의 혁명도 이미 과거사가 됐으나, 우리는 오늘날 대다수 개발도상국들이 발전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주요한 원인이 주권외부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반식민지 혁명은 완성되지 못했고, 주권외부성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섯번째 관점은 만일 비선진국들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도시화를 추진해서 향촌을 파괴한다면, 많은 사회적 리스크를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향촌의 전통 마을 사회는 외부성 문제를 내부화해서 층격을 완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사실 간단하다. 국내의 현재 모든 학문적 이론은 대부분 미국의 담론체계를 수용한 채 따라가면서, 다른 이론을 배타시한다. 만일, 우리가 농가의 경제적 합리성을 언급한다면, 모두 시카고대학의 시어도어 슐츠의 소농경제합리성 이론을 떠올릴 것이다. 당연하다. 그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은 시대적 한계를 지닌다. 소농경제는 자본주의 요구에 맞는 시장주체로서 부합해야 했고, 이 또한, 이념의 반영이다. 슐츠 이전에는 차야노프의 생존소농 이론을 모두 이야기했다. 농가에서는 그 가족 성원을 내칠 수 없기 때문에, 가정내에서 노동을 배분하는 것이 합리적이었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도 가정내에서 배분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래서 소농경제는 가정내의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소농의 가정이 외부에서 기인한 리스크를 내부화해서 처리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을 공동체가 같은 방식으로 외부 리스크를 내부화하여 다루는 메커니즘을 논하고자 한다. 마을에 모두 모여살기 때문에, 마을의 자산 경계는 지연에 의해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마을은 함부로 마을에 소속된 농가를 추방할 수 없다. 가정이 그 가족 성원을 내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마을공동체는 반드시 공동의 업무를 공동의 노력으로 완성시켜야 한다. 외부성을 내부화해서 처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 향진기업의 발전이 그러하다. 중국 향촌마을의 집체경제의 발전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을 공동체 조직의 내부화 메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같은 이치에 따라, 전세계가 글로벌라이제이션 위기에 직면했을 때, 도시화 정도가 높은 개발도상국일수록 큰 리스크를 떠안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일부는 국가 도산에 처해서,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중국이나, 인도와 같이, 큰 농촌지역을 가진데다가, 농촌인구 비율이 높은 국가라면,  큰 위기에 직면했을 때, 상당부분, 향토사회가 위부 위기 비용을 내부화해서 떠안는 기능을 하면서 국가 전체가 위기를 넘기곤 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다시 중국의 도농2원구조 제도를 평가해보면, 충분히 그 장점을 발견할 수있고, 개발도상국에게 있어서, 과도하고 급진적이며, 빠른 도시화가 강조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향촌사회의 발전을 일정하게 유지할 때, 안정된 국가체제운영이 가능하다. 특히, 중국대륙과 같이 전면적인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국가는 오히려 향촌에 대한 국가의 투자를 강화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이 가능해진다.

이와 같은 다섯가지 관점이 우리들의 최근 10년간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문헌소스: 2019년 12월23일 Global University 그룹 원톄쥔 교수 방문 비디오 채록

https://mp.weixin.qq.com/s/3jyIticS8LempH2bAU726w

금, 2020/07/10- 0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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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최신 저작 “정치에서 도덕이 필요한가? Do Marals Matter?”을 위하여 1945년 이후 14명의 미국 대통령을 연구하는 동안에, 미국인들은 외교정책이 기본적으로 도덕적이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진정 의미하는 것에 대해 고민해본 적(대가를 치른 적)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국인들은 종종 자신들의 나라를 ‘예외적인 국가’로 여기면서, 민족적 단위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자유에 기반한 사회의 개방적 사고와 방식으로서 자신들이 미국인이라는 것을 확인해 왔다. 그런데 현재의 대통령인 트럼프는 이러한 전통에서 벗어나고 있다.

물론 미국인들의 ‘예외주의’는 건국 시기부터 모순에 직면했다. 자유에 대한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건국 헌법에 노예제도의 원죄를 삽입함으로써 남과 북이 연합하는 타협을 이루었다.

동시에 미국인들간에 외교정책에 있어 자유를 해석하는 입장이 서로 다르다. 일부에게는 미국의 ‘예외주의’는 때때로 국제법규를 무시하며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이들에게는 ‘미국의 예외주의’란 자유진영에 노력을 고양하여 세계를 보다 자유롭고 평화롭게 만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각국의 자유를 방어하는 국제적 법규와 조직을 지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트럼프는 취임연설에서 분명하게 ‘미국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우리는 세계 다른 나라들과 함께 우정과 선의를 추구할 것이지만, 이는 각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모든 국가의 권리라는 것을 확인하는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미국의 방식을 타국에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국에게 모범을 보이는 방식으로 추구해 갈 것이다.” 그는 요점을 잘 정리했다. 즉 미국은 스스로 모범을 세워서 다른 나라들에게 영향력을 증대한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의 외교정책에는 개입과 성전수행(crusading)의 전통이 있다. 윌슨 대통령은 세계에 민주주의를 안전하게 구축하기 위해 외교를 추구했다. 케네디는 세계의 다원화에 미국이 기여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베트남에 1.6만 명의 군대를 투입하여 개입을 시작했고 그의 후임자인 존슨은 이를 56.5만 명으로 늘렸다. 같은 방식으로 조지 W. 부시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국가안보전략의 명분을 내세워 이라크에 대한 침략과 점령을 정당화하였다.

냉전이 종결된 이후에도 미국은 7번의 전쟁과 군사적 개입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도 레이건은 1982년의 연설을 통해 “총포로 건설된 제국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스스로 모순된 주장했다.

상기와 같은 모순을 기피하는 것이 트럼프가 선호하는 정책의 특징이 되었다. 그는 시리아에서 군대의 개입을 제한했으며, 오는 대선 당일까지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하기를 희망한다.

미국은 두 개의 대양大洋과 상대적으로 약한 이웃들에게 둘러 쌓여 있으면서, 19세기 동안은 주로 서부개척에 집중하여 왔으며, 유럽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는 국제적 분쟁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세계제일의 대국이 되었고 힘의 균형을 깨뜨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인들은 유럽의 분쟁에 개입한 것은 잘못이었다고 믿으면서 귀에는 거슬리는 표현이지만 전통적인 고립주의로 다시 돌아섰다. 그러나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후계자인 트루먼 등은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대신 지도자들은 미국과 같은 거대한 국가는 ‘예외주의’라는 두 번째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과 미국과 같은 거대한 경제대국이 국제적 공공선을 만드는데 앞장서지 않으면 누구도 이를 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전후의 미국대통령들은 안보동맹, 다국적 기구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경제정책들을 수립했다. 70년이 지난 오늘 현재까지 미국정책의 기본이 되어온 ‘자유국제 질서’가, 중국 같은 새로운 강대국이 등장하고 민주주의 진영 내에 포플리즘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면서, 과연 타당한 것인지 회의가 생겨났다.

트럼프는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2016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고, 1945년 이후 미국이 주도해온 국제질서에 반대하고 이에 함께하는 동맹을 무시하는 입장을 취하여 대통령 직에 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국제적 이슈에 대한 시카고의 단체가 조사한 여론에 의하면, 미국인들의 2/3 이상이 대외지향적인 외교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시민들의 주류는 군사적 개입을 반대하는 것이지 동맹들과 다자적 협력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즉, 시민들의 여론은 1930대 식의 고립주의로 복귀하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핵심적인 질문은 미국인이 직면하고 있는 ‘예외주의’의 모순된 양면의 얼굴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지에 관한 것이다 – 무력개입이 없는 민주주의 확산과 국제적 기구들의 지원.

미국인들은 과연 군사적 개입과 성전을 수행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가치와 인권을 확산시키는 것과 국제적 위협이 되고 있는 기후위기, 팬데믹, 사이버-공격, 테러리즘, 그리고 경제적 불안정 등을 대처하기 위한 국제적 규칙과 기구들을 만들어 가는 것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트럼프의 미국은 2개의 전선 모두에서 실패하고 있다. COVID-19를 대처하는 싸움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핑계로 중국을 비난하고 WHO의 탈퇴를 거론하며 세계를 협박하고 있다. 중국은 이에 대해 많은 답변을 가지고 있겠지만, 특히 트럼프가 중국을 비난하는 이유를 다가오는 국내정치게임인 미국대선의 이슈로 악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은 팬데믹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향후 COVID-19를 넘어서는 새로운 전염병의 발발도 예상해야 한다. 더구나 미국과 중국은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온실가스의 40%를 배출하는 책임을 갖고 있으며, 누구도 독자적으로 국가안보의 위협을 해결할 수 없는 처지이다. 세계 양대 경제대국으로서, 미국과 중국은 경쟁과 동시에 협력의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저주스런 운명이다. 미국으로서는 예외주의라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중국을 포용하면서 국제적인 공공선을 함께 만들어 가야하고 인권 등 주요한 가치를 옹호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오는 대선을 치르기 전에 미국인들은 도덕이라는 가치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출처 : Project Syndicate, 2020.

Joseph S. Nye

하버드 대학의 석좌교수이자 소프트-파워의 개념을 도입한 저명한 학자이디. 최근 미국정치에 “정치에서 도덕이 필요한가? Do Moral Matter?’라는 저서를 출간하여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금, 2020/07/10-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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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만원씩 수령한 법사위 수석전문위원

2018년 7월 5일에 참여연대가 공개한 2011~2013년 국회 특수활동비 지출결의서 내역은 오늘날 국회가 가진 ‘전근대성’을 그대로 보여줬다. 수많은 언론들은 전직 국회의장이 얼마를 받았는지, 국회 내 상임위원장들이 얼마를 받았는지 다뤘다. 또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다른 상임위 소속 의원들과 달리 월 50만원 씩 수령했다는 사실도 비중 있게 보도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새로운 사실’이 제대로 보도되지 않은 경우다. 어떤 언론도 국회사무처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의 특수활동비 수령액이 매달 150만 원씩이었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다른 상임위 소속 의원보다 권한이 세다’고 평가받는 법사위 위원의 수령액보다 3배 더 많다는 팩트가 있는데도 말이다. 이는 법사위 위원과 수석전문위원, 양자 간의 위상 혹은 권력 차이의 반영이거나 최소한 그 역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반영일 것이다.

전에 국회 상임위원장을 역임했던 한 의원은 필자에게 “‘뭐든 희망하시는 일을 말씀하시면, 힘써드리겠다’라는 수석전문위원의 말에 ‘이 사람들이 완전 자기들이 주인이고 우리(국회의원)는 그저 왔다 갔다 하는 객(客)으로 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전문직 분야에 있는 한 지인은 자기들 협회에서 국회의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힘을 가지고 있는 전문위원에게 로비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회 전문위원 스스로 강조한 전문위원은 정책 결정의 실질적인 주체다

국회 전문위원이 갖는 이렇게 센 힘의 원천은 그들의 ‘검토보고’ 권한에 있다. 국회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면 해당 상임위원회에서 발의된 법안을 심사하게 되는데, 국회법 상 전문위원의 검토를 반드시 거치게 돼 있다. 국회법 58조에 1항에 따르면 “위원회는 안건을 심사할 때 먼저 그 취지의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 대체토론[안건 전체에 대한 문제점과 당부(當否)에 관한 일반적 토론을 말하며 제안자와의 질의·답변을 포함한다]과 축조심사 및 찬반토론을 거쳐 표결한다”라고 명기돼 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안 검토보고서의 지적 내용을 위원회 회의 과정의 발언과 통과법안의 수정 부분을 비교한 한 논문은 그 두 내용 간에 높은 인용· 일치율로 미루어 상임위 전문위원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논술하고 있다.1

한편 국회에서 일하는 입법관료 스스로 검토보고의 영향이 크다는 점을 알고 있다. 2010년 12월 상임위 입법조사관 121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조사대상의 90.8%가 법안 검토보고서가 중요한 참고자료로서 국회 상임위원회 심사과정에 영향을 끼친다고 답했다.【2

특히 한 국회 수석전문위원이 재직 당시에 쓴 논문은 아예 국회 전문위원의 역할이 지원 차원이 아니라 실질적 주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에 제출된 총 44개 조항으로 이뤄진 한 법률안에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의 전문위원이 19개의 검토 조항을 보고하였고 결국 법안은 11개 조항을 수정하였다. 그런데 이 11개 수정안 모두 전문위원이 적성한 검토보고에서 주장한 그대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기술하면서 “전문위원은 소속 위원회 입법 활동의 단순한 지원 차원을 넘어 정책 결정의 실질적인 주체로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3

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은폐되고,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은 위험할 수 있다.

2017년 8월 22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는 국회사무처가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당시 국회사무처에서는 수석전문위원 2명이 성추행과 횡령 혐의로 면직 처리되기도 했으며 국회사무처 직원 간 음주폭행 사건도 발생하여 이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들끓었다.

 

최저임금법 개정 사례에서 드러난 검토보고의 한계

그렇다면 이토록 영향력이 큰 검토보고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최근 국회에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낳은 법안이 있다면 단연 ‘최저임금법 일부법률개정안’이 손꼽힌다.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부터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법안 처리를 반대해왔다.

그런데 ‘최저임금법 일부법률개정안’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내용을 살펴보면 단지 임금의 개념에 대해 언급한 것이 전부였다. 최저임금법이 개정된 뒤 생긴 사회적 갈등과 논란을 봤을 때, 진정한 의미의 ‘검토보고’라면 마땅히 이 법안이 사회적으로 마칠 파장까지 충분히 검토했어야 할 일이다.

한국 사회에는 단순히 입법관료의 검토보고에 의해 처리되어서는 안 되는 법률과 쟁점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보다 심층적으로 토론하고 논의하기 위하여 국민의 대표자로서 국회의원이 선출되는 것이다. 또한 이들 국회의원들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정당이 존재하고 그 정당 소속의 정책위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법안 처리의 길목에 국회 입법관료는 일종의 게이트키핑(gatekeeping)의 역할을 한다. 국회사무처는 전문위원 임용자격에 관한 규칙에서 전문위원의 자격기준(국회에서 10년 이상 재직하고 2급 이상의 공무원이 돼 2년이 경과한 자로서 입법심사와 조사에 관한 지식과 경험이 있는 자 등)을 정해놨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은 선출되지 않은, 그리고 전문가집단에서 선발되지 않은 ‘행정사무’의 역할을 갖고 있는 공무원일 뿐이다.

특히 전문위원의 업무상 전문성에는 의문부호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물론 전문성이란 ‘개인이 조직에 들어오기 전 그가 사회화 과정을 겪으면서 취득하는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의미하는 통상적인 의미로서의 ‘개인적 전문성’ 외에도 ‘조직에 들어와 업무를 수행하게 됨으로써 그 업무를 통하여 획득하게 되는 전문적 지식’을 뜻하는 ‘업무상 전문성’의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 국회 전문위원의 경우, ‘개인적 전문성’의 측면만이 아니라 ‘업무상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순환 보직 근무의 관행으로 인해 깊은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실제 지금은 퇴직한 한 수석 전문위원은 불과 몇 년 사이에 각기 다른 세 곳 상임위원회의 수석전문위원을 맡았다.

 

관료들은 전문성 있다’, 왜곡된 신화

흔히 공무원들은 대단한 전문성을 지니는 존재로 이해된다. 적지 않은 언론매체들이 그러한 시각으로 기사를 쓰고 있으며, 심지어 진보 쪽에 있는 정당들의 관계자도 예를 들어, “(정치인들이) 전문성으로 무장한 공무원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 등의 논리를 계승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혹시 부분적으로나 특수한 상황에서 타당할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잘못된 ‘선입견’이다. 무엇보다 공무원들은 ‘전문성’을 기준으로 선발된 것이 아니라 단지 공무원시험을 통해 선발되었을 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대부분의 경우 2년을 단위로 여러 부서를 옮겨 다니며 순환 근무하게 된다. 결국 전문성을 축적할 기회가 근본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관료들은 전문성이 있다”는 시각은 우선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최소한 정보 접근성이 압도적으로 용이한) 공무원들의 객관 조건으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 또 절차나 수속 등의 행정업무 분야에서 공무원들이 전문성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시각이 그런대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밖의 관련 분야의 전문지식이나 분석력 등 순수한 의미의 ‘전문성’ 측면에서 관료집단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거나 혹은 대단히 미흡할 수밖에 없다.

공무원들이 높은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선입견과 시각은 우리 사회의 강고한 관료주의를 유지시켜주는 주요한 이데올로기로 작동되고 있다.

 

국민을 너무 힘들게 하는 국회

국회는 “국민에게 힘이 되는 국회”라는 꿈도 야무진 슬로건을 내세우고 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국회의원들은 입만 열면 스스로의 특권을 줄이겠다고 매일 같이 다짐하지만, 그러나 실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지칠 줄 모르는 정쟁과 내로남불, 외화내빈의 말잔치만 난무한다.

‘국민을 힘들게 하는 국회’라는 말이 훨씬 정확하고 설득력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본업을 수행하지 않고 방기하는 조직은 왜곡되고 부패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의 본업인 입법을 스스로 올곧이 수행하게 될 때, 국회는 시민의 진정한 대표로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발전하는 출발선에 다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국회 전문위원 제도의 개혁이 절실하다.

 

1】 장봉아, “국회상임위원회 공무원의 입법과정상 영향력 분석: 법안 심사 회의록과 검토보고서의 일치 여부에 대한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2004.

【2】 배용근, “국회 상임위원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의 영향요인과 발전방안”, 「의정논총」제6권 제1호, 2011

【3】 김춘엽, “논변 모형을 통해 본 법률 제정 과정에서의 전문위원 검토보고의 영향력에 관한 연구”, 「한국인사행정학보」제5권 제2호, 2006.

화, 2020/07/1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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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얼 세대: 미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미국의 항의시위가 전혀 잦아들 기미가 안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시위 현장을 중계하는 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유독 청년들의 많은 참여가 눈에 들어온다. 그들이 시위의 주축이다.(“Across the country, young activists take different approaches in the name of justice for George Floyd,” CNN, June 3, 2020; “How the New York Protest Leaders Are Taking On the Establishment: They’re young, charismatic and drawing crowds of thousands around the city,” New York Times, June 11, 2020; “Young people turned out to protest. Now, will they vote?,” APNews, June 11, 2020).

청년층이 시위에 나섰다. 이제 이들이 투표장으로도 향할지를 묻는 에이피 기사

그렇다면 왜 미국의 청년들이 특히 분노하는가?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코로나로 집구석에 박혀 있다가 좀이 쑤셔 하던 차에 조지 플로이드 사망을 핑계 삼아 그 혈기를 발산하러 밖으로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주 조금, 일말의 일리가 있을지도 모르다.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의 청년들은 재미를 보자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노에 차서 길거리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년들의 사정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게 이 시점에서 중요하다. 그것을 톺아보면 미국의 문제를 들여다보게 된다.(“What Students Are Saying About the George Floyd Protests,” New York Times, June 4, 2020; “‘Apathy is no longer a choice’: will the George Floyd protests energize young voters?” The Guardian, June 8, 2020; “Most political unrest has one big root cause: soaring inequality,” The Guardian, Jan. 24, 2020; Joseph E. Stiglitz, “Opinion: Why young people are angry about generational injustice,” MarketWatch, March 16, 2016).

청년들을 일컬어 소위 밀레니얼 세대라고 부른다. 1981년에서부터 1996년 사이에 태어난 청년들로 24세~39세에 이르는 사회의 중추세대다. 국가의 미래다. 이런 그들이 좌절하고 있다. 절망하고 있다. 그리고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왜일까?

그들에게 미래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칸드림이 사라져 버린 미국이라 그렇다. 왜 하필 우리 세대에? 그들의 입장에서 그런 말이 나올만하다. 평균적으로 대략 그들은 부모 밑에서 세상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자랐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세상에 나와 사람 몫을 하려고 들 때, 당당하게 한 사람의 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려 할 때, 세상은 그들의 생각대로가, 듣던 대로가 아니었다. 미국이 가장 부유한 나라라는데 왜 나에게 번듯한 직장을 잡을 기회는 오지 않는가? 그것이 왜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가? 왜 나는 부모가 결혼한 나이에 결혼을 하지도 못하는가? 왜 아이도 낳지 못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비정규직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하는가? 왜 나는 아무리 갚아도 끝이 없는 빚쟁이 인생을 계속해야 하며 빈털털이인가? 등등. 그러나 부모들은 말한다. 자신들은 청년시절에 비록 많이 배우지도 못했을지라도 일가를 이루고 사업을 이루고 돈을 모았는데 지금 네 꼴은 뭐냐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더 좀 열심히 노력하라고. 승부근성과 헝그리 정신이 결여된 나약한 인간이라고 혀를 쯧쯧 차댈 뿐이다.

젠장! 나도 할 만큼 노력한다. 그런데 안 되는 걸 어찌하는가? 취직을 해보려한들 안 되는 걸 어찌하는가? 기를 쓰고 돈을 모아보려 애써보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걸 어찌하란 말인가. 그러한 좌절 속에서도 미국 청년들은 왜 자신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대부분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왜 할아버지세대와 부모세대는 그렇게 가정도 일구고 그랬는데 왜 나는 그게 딴 세상의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오리무중의 궁금함 속에서 눌리고 눌려왔던 좌절과 짜증이 코로나로 집안에 갇혀있으며 증폭되다가 플로이드로 터져버렸다. 게다가 직장조차, 알바조차도 코로나로 다 날아가 버렸다. 이판사판 밑바닥인데 잃을 게 뭐가 있나. 가만히 보니 내 처지가 가장 불쌍하다. 이렇게 불공평한 세상이 어디 있나? 왜 젊음이 축복이 되지 못하고 이렇게 지리멸렬한 것이 되었나. 왜 우리 또래의 청년들만 가장 불행한 것처럼 여겨지는가? 그걸 따지러 나가야겠다. 뭔가 변화를 부르짖어야 되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분노가 삭여지질 않는다. 이게 요즘 미국 청년들이 심적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The unluckiest generation in U.S. history,” Washington Post, June 6, 2020; “’Perfect storm’: Coronavirus lockdown, joblessness fuel longstanding grievances,” NBC News, June 6, 2020; “Why rage over George Floyd’s killing is more explosive this time,” San Francisco Chronicle, June 1, 2020; “’It was never just about Floyd’: Protests reflect anger over inequality, neglect,” Buffalo News, June 8, 2020).

 

운도 지지리 없는 저성장시대에 태어난 죄

미국의 불평등 연구자들은 밀레니얼세대가 미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세대라고 진단한다.(“The Unluckiest Generation in U.S. History,” Washington Post, June 6, 2020). 그게 사실이라면 청년 세대가 좌절하고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먼저 경제성장면에서 보면, 밀레니얼세대가 노동시장에 막 진입하는 때에 미국엔 굵직굵직한 안 좋은 일들이 터졌다. 911테러,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의 코로나19 사태다. 모두 경제에 치명타를 안기는 사건들이다. 그런 사태가 한 번 터지면 경제가 위축되고 일자리는 줄어들며 그 폐해는 오래 지속된다. 그래도 힘든 시기를 견디고 극복해서 일어설만하면 또 다른 타격이 온다.(Kevin Rinz, “Did Timing Matter? Life Cycle Differences in Effects of Exposure to the Great Recession,” Working Paper, Center for Economic Studies, US Census Bureau, Sept. 8, 2019). 그 과정을 겪는 동안 밀레니얼 세대의 경력은 이탈되었고, 재정은 파탄 났으며, 그들의 사회적 삶도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또 코로나다. 그러니 코로나세대(C세대: 코로나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지만, 코로나를 겪은 청년들도 포함하는 신조어)는 이젠 아예 “어디에고 비빌 언덕이 없다”(nowhere to turn)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Generation C Has Nowhere to Turn,” Atlantic, April 13, 2020).

18세에 노동력 시장에 나온다고 가정한 뒤, 그 후 15년 동안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세대별로 측정한 결과치를 보면 미국역사상 경제성장이 가장 안 좋은 시대에 태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 몫을 하기 위해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후의 15년 동안 가장 안 좋은 경험을 했다는 것은 단지 그 사실로만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향후의 밀레니얼 세대의 전 생애 동안 경제적인 상처를 깊이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임금으로 시작한 직장은 그 만큼 이전 세대 보다 재산을 적게 모은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은 자택의 소유에서부터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하는 모든 것들의 지연이나 포기를 의미한다. “삼포세대” 같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이러니 특히 경제가 안 좋을 때 청년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는다.(“Millennials really are special, data show,” Washington Post, March 16, 2019; “Middle class Americans can no longer afford to get married due to huge debts as just 50 per cent now tie the knot,” DailyMail, March 10, 2020; “Affluent Americans Still Say ‘I Do.’ More in the Middle Class Don’t.,” Wall Street Journal, March 8, 2020). 반면 그 이전 세대인 베이비부머세대(1946년~1964년 출생: 현재 56세~74세)와 X세대(1956년~1980년 출생: 현재 40세~55세)에 이르는 선배세대는 밀레니얼 세대보다 호시절에 태어나 누릴 것을 그나마 어느 정도는 누릴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The Unluckiest Generation in U.S. History,” Washington Post, June 6, 2020).

세대별 1인당 GDP 성장상황. 각 세대의 노동시장진입 후 첫 15년 동안의 1인당 GDP성장률. 밀레니얼 세대는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출처: 워싱턴포스트>

 

아메리칸드림의 소멸: 자수성가는 옛 말

1940년생과 1980년생의 비교를 한 연구가 있다. “당신의 부모와 같은 나이 대에 당신은 부모 보다 더 많이 벌었는가?”란 질문, 즉 자수성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1940년생 미국인들은 92%가 그렇다고 답했다. 심지어 실직이나 이혼, 질병과 여타 금전적인 문제가 있었다 해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부모보다 더 많이 벌고 더 잘 살았다. 지금 80세 노인세대다. 그러나 1980년생 미국인 중에서 그렇다고 대답한 이는 50%만 차지한다. 이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루는 것은 이제는 거의 “동전던지기”(coin flip) 같다고 이야기 한다. 복불복이라는 이야기다. 즉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메리칸 드림의 소멸을 의미한다.(“America Will Struggle After Coronavirus. These Charts Show Why,” New York Times, April 10, 2020; “Parents’s Jobs Increasingly Shape How Far Kids Get in Life,” Wall Street Journal, Sept. 3, 2018; Raj Chetty, et al., “The fading American dream: Trends in absolute income mobility since 1940,” Science 28, Vol. 356, Issue 6336, pp. 398-406. Apr 2017; “If Americans are better off than a decade ago, why doesn’t it feel that way?,” The Guardian, Nov. 5, 2019; “American Dream collapsing for young adults, study says, as odds plunge that children will earn more than their parents,” Washington Post, Dec. 8, 2016).

1940년생부터 1980년생까지의 자수성가 비교. 부모 세대보다 당신 대에서 동일한 연령대에 부모보다 더 많이 재산을 일구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1940년생은 92%가, 1980년생은 절반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불평등의 끝은 세습사회

이러니까 청년들에겐 미래가 안 보일 수밖에. 아메리칸드림은 개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부모세대나 할아버지세대가 누렸던 것들을 자신들은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제로 겪어나가면서 청년들은 사회가 부조리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 분명하다. 청년들은 그 거대한 부조리의 결과가 불평등이라는 것과 자신들이 그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체계의 피해자임을 간파하게 될 공산이 크다. 그러나 국가나 나이든 사람들은 이런 구조적 부조리함을 시정할 생각일랑 없는 것으로 보이고 오히려 타박만 가할 뿐. 그런데 이 대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모든 불평등의 끝은 세습사회의 도래라는 것이다.

극심한 불평등은 청년들을 진취적이기 보단 소극적으로 만든다. 지독한 복지부동과 안전지향 성향을 띄게 한다. 왜냐하면 아차 하고 자칫 실수를 범하는 순간 그나마 현재 손에 쥔 것마저도 홀랑 날릴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보일 이런 경향의 끝에는 결국 세습사회밖에 남을 게 없다. 청년들은 안전만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매사에 다음 같은 사고를 할 공산이 크다. 노력이 뭐가 필요 있나? 실력이 뭐가 필요 있나? 부모가 고관대작이 아니고 재산 갖고 있지 않으면 난 개털인데. 이제 기댈 것은 부모의 배경과 돈밖에 없는데. 그런 잘 나고 부자인 부모를 두면 게임 끝. 별 볼일 없는 나는 인생 끝.(“When It’s This Easy at the Top, It’s Harder for Everyone Else,” New York Times, Feb. 28, 2020). 그런데 이런 자포자기와 자조는 불평등이 양산할 웬 못된 결과인 세습사회의 도래를 더욱 앞당길 뿐만 아니라 그것을 더욱 공고화한다.

최상층의 사람들에게 식은 죽 먹기처럼 쉬운 것이 나머지 사람들에겐 점점 더 어려운 것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늘 상존했다. 그러나 지금은 계단식 체계(tiered system)가 요지부동의 카스트제(caste system)로 변질되고 있다. 신분제사회와 세습사회화 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뉴욕타임스>

어쨌든, 미국이 능력사회? 웃기는 소리다. 그렇다면 어쩌다 미국이 이렇게 변해 버렸나? 클린턴의 마누라가 대통령후보로 나왔고, 그 딸을 대통령 만들려 불철주야 돈 모으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라. 한 집안에서 돌아가며 대통령이 나오고, 나와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그런 나라가 되어버렸다. 미국이 어쩌다 대통령의 딸 이방카와 사위를 백악관의 고문으로 떡하니 앉히고 나랏일에 훈수를 두는 족벌주의(nepotism) 정치를 해도 아무 말도 안 나오는 그런 세습사회가 되어버렸나. 이방카를 비롯한 남매가 차기 대권을 감히 노리며 권력 암투를 벌이는, “트럼프왕조”(Trump Dynasty)라는 말이 회자되는 그런 거지같은 나라가 되었나?(“The Heir: Ivanka was always Trump’s favorite. But Don Jr. is emerging as his natural successor.” The Atlantic, Oct. 2019; “Of COURSE the Trumps are planning to be a political dynasty,” CNN, Sept. 9, 2019; “Inside Ivanka’s Dreamworld,” The Atlantic, April, 2019; “The Dynasty Ends With King Donald: There will be no President Ivanka. No President Jared. And certainly no President Donald Jr.,” Politico, Sept. 9, 2019).

트럼프왕조의 차기 상속자에 대한 권력 암투를 보도한 <애틀랜틱> 기사의 한 장면

문제는 이것이 단지 트럼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트럼프뿐만 아니라 돈과 권력이 많다고 재세하는 자들이, 즉 내 말로 “제국”들이 죄다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제국들의 트렌드다. 자기 자식만큼은 너무나 특별하고 독특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자식들이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국들의 욕망의 발로다. 하지만 그들이 속한 나라의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굴러가도록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그것이 가능하다.(물론 제국들이 시스템을 그렇게 만들었다). 하여 이제는 가만히만 있어도 저절로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일이 그런 식으로 술술 굴러간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자식들에게 전승되고 그러면 자식들은 아무런 노력없이, 그리고 아무런 자질이 없어도 승승장구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런 귀결이다. 극심한 불평등이 활개를 치는 사회에서는 극히 당연한 결말이다. 불평등은 사람을 둘로 나눈다. 귀족과 노예로! 그리고 그 선은 절대로 넘어 갈 수 없다. 그 경계를 넘어 갈 수 없는 신분제 사회, 그게 바로 세습사회다. 부모의 것이 자식에게 그대로 대물림 되는 사회. 하여 있는 놈만 결혼하고 있는 놈만 집 사고, 있는 놈만 좋은 대학가고 있는 놈만 좋은 직장 갖고, 있는 놈만 부와 높은 소득 얻는다. 그것은 뒤집을 수 없다. 빌어먹을 무슨 놈의 나라가 이런 사회가 되었는가? 그러니 아메리칸드림은 없어진 거다. 아메리칸드림의 진수는 자수성가니까. “빽” 그런 것 없이 노력만 하면 뭔가를 성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울어진 운동장, 아니 기울어지다 못해 거의 90도의 수직 낙하된 운동장은 한 번 삐끗하면(주로 부모 잘 못 만나면)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그런 절망의 늪이 되어 버렸다. 한 번 이긴 자는 승자독식에 이어 계속해서 승자가 되는 연승의 게임. 반면, 그곳에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이들은 서서히 익어가는 끓는 물 속 개구리처럼 그렇게 익어가고 나중엔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Robert Frank and Philip Cook, The Winner-Take-All Society, 1996; Branko Milanovic, Global Inequality: A New Approach For the Age of Globalization, 2016).

이처럼 세습사회, 신분제사회는 한 번 고착되면 어지간해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하감옥과 같은 것이라 그 조짐이 보일 때 바로 척결해야 하는 게 답이다. 정녕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의 적이기에 그 싹이라도 보이면 바로 제거해야 마땅하다. 사소한 하나라도 우습게 알고 용인했다가는 큰코다치고 만다. 그러나 지금 미국 사회는 그 도를 넘겨버렸다. 무슨 짓을 자행해도 아무도 토를 다는 이 없는 서방에 위치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 그런 순응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법이고 나발이고, 오직 닥치고 돈과 권력이 최고인 세상. 그것들끼리 야합하고 서로가 서로를 뒷배를 봐주고 세세토록 해 먹는 빌어먹을 세상이 되어버렸다. 나머지는 시궁창과 같은 삶 속에서 헤어 나올 엄두도 감히 내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겉으론 그 잘나 빠진 능력주의, 개인주의와 세계 제 1의 국가 시민이라는 미명 아래 도끼자루 썩는지 모르고 돈을 숭배하며 살다 결국 저 짝이 나 버렸다. 계층의 상향이동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꽉 막혀 버린 세상. 그것이 바로 아메리칸드림이 사라진 세상이며, 청년들이 좌절하는 세상이며, 있는 자와 가진 자(제국)가 천하를 호령하며 그의 자손대대로 가진 것을 향유하게 하고 부모가 하던 짓거리를 자식 대에도 그대로 해대는 그런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그러나 미국이 그런 나라가 되든 말든 지금 무슨 상관이랴. 내 코가 석자인데. 나는 이 칼럼을 연재하면서 의식적으로 한국 이야길 꺼내는 것을 가급적 피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서다. 그러나 오늘은 좀 해야겠다.

신분제사회와 세습사회. 이게 미국만의 일일까? 우리나라는? 세습사회의 특징은 뭔가? 그것은 온갖 특권과 반칙의 난무이다. 기득권세력(제국)들끼리의 서로 봐주기. 품앗이. 작당. 상부상조. 그래서 세습사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법치의 파탄이다. 법치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한 것을 말한다. 죄 지은 자는 법대로 신분고하, 재산과 권력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죄 값을 물어야 한다. 그게 안 되면 그건 법치가 무너진 것이고 민주주의와 능력주의가 사라지고 신분에 의한 세습사회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며칠 전 이재용의 구속영장기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각설하고, 이재용은 참 좋겠다. 소위 보수도, 진보도, 그 진영을 대표한다는 정권도 죄다 자기편을 들어줘서. 이전 정권, 현 정권 가리지 않고 이재용에게 친화적이어서. 고백컨대 난 솔직히 법에 대해 1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말 무식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집행유예로 중간에 풀어주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게 풀려난 자를 수차례 대통령이 만나는 것도 이상하다. 증거가 확실히 잡힌 다른 건으로 다시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자에게 재판부가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라고 권유하는 것도 이상하고, 수사심의위라는 것도 난생 처음 들어보았고, 공장바닥에 컴퓨터를 박아 두는 증거인멸을 했는데도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것도 정말 이상하다. 더더욱 이상한 것은 왜 이재용의 부친 이건희 회장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국가 기관이 아직도 확인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 이상하다. 그것은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불법행위 여부 판단에 더 없이 중대한 사안이라고 생각되기에 그렇다. 전 정권에서 안 했다면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왜 정의와 공정의 기치를 내세운 문재인 정권에서는 하지 않는가?

삼성 앞에만 서면 왜 정권과 정치권과 사법부는 한 없이 작아지는가? 아니 왜 삼성의 이씨 일가 앞에서만 서면 그렇게 민망할 정도로 쪼그라지는가. 대한민국에 무슨 “신(新)이씨왕조”라도 있단 말인가? 이런 걸 용인하는 세습사회의 도래를 인정하겠다는 뜻인가? 만일 그렇다면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사법부에 앉아 판단을 할 자격이 없다. 입법부에 앉아 법을 제정할 자격이 없다. 다들 물러나라. 왜? 세습사회는 근본적으로 법치를 부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적인 법치의 파탄을 가져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법치의 파탄을 방치하거나 가져온 자들이 어찌 법을 제정하고, 법에 의거해 판단을 내리고, 법에 의해 정치를 한다는 말인가? 실로 역겹다.

왕조를 넘어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 제국으로 우뚝 선 기득권세력들. 감시와 제재, 그리고 저항은커녕 그들을 방치하고 그러다 못해 물심양면으로 조력하는 사이 한국의 청년들은 미국의 청년들처럼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음을 토해내고 있다. 헬조선! 올 5월 현재 청년 체감실업률은 26%로 청년 4명 중 1명은 백수다. 실제는 더 심하다. 미국과 똑 같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력직 위주의 취업시장 재편으로 한국의 밀레니얼 세대들은 피를 보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 코로나사태로 청년들은 또다시 직격탄을 맞았다. 오늘도 그들은 마스크를 끼고 알바 장소로 독서실로 향하고 있다. 누가 그들의 어깨를 활짝 펴줄 것인가? 그 관건은 세습사회의 싹수를 초장에 잘라버리는 것이다. 그러려면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부터 서릿발처럼 다시 세울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백약이 무효. 남을 것은 청년들의 분노와 신음 그리고 국가 미래의 부재다. 나아가, 그것 보다 청년들의 정신마저 썩어버릴까 더 걱정스럽다. 이들에게 법과 정의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지키라 할 것인가? 왜곡된 법과 정의 개념이야말로 그들을 진정으로 망하게 하는 것이다. 망조가 든 대한민국을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참고자료

“청년 4명 중 1명 ‘백수’,” 한국경제, 2020. 6. 10.

“3년전 이재용 ‘영장기각’ 비판하던 민주당, 이번엔 왜 ‘잠잠’할까요?” 한겨레, 2020. 6. 10.

Robert H. Frank and Philip J. Cook, The Winner-Take-All Society: Why The Few At the Top Get So Much More Than The Rest of Us(New York, NY: Penguin Books, 1996).

Branko Milanovic, Global Inequality: A New Approach For the Age of Globalization(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Kevin Rinz, “Did Timing Matter? Life Cycle Differences in Effects of Exposure to the Great Recession,” Working Paper, Center for Economic Studies, US Census Bureau, Sept. 8, 2019.

“How the New York Protest Leaders Are Taking On the Establishment: They’re young, charismatic and drawing crowds of thousands around the city,” New York Times, June 11, 2020.

“Young people turned out to protest. Now, will they vote?,” APNews, June 11, 2020.

https://apnews.com/81c19f569aec81907f7b46281b8ae906

“American Dream collapsing for young adults, study says, as odds plunge that children will earn more than their parents,” Washington Post, Dec. 8, 2016.

“‘Apathy is no longer a choice’: will the George Floyd protests energize young voters?” The Guardian, June 8, 2020.

“The Unluckiest Generation in U.S. History,” Washington Post, June 6, 2020.

“What Students Are Saying About the George Floyd Protests,” New York Times, June 4, 2020.

“Across the country, young activists take different approaches in the name of justice for George Floyd,” CNN, June 3, 2020.

“’Perfect storm’: Coronavirus lockdown, joblessness fuel longstanding grievances,” NBC News, June 6, 2020.

“Why rage over George Floyd’s killing is more explosive this time,” San Francisco Chronicle, June 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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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lennials really are special, data show,” Washington Post, March 16, 2019.

“Generation C Has Nowhere to Turn,” Atlantic, April 13, 2020.

“When It’s This Easy at the Top, It’s Harder for Everyone Else,” New York Times, Feb. 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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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Americans are better off than a decade ago, why doesn’t it feel that way?,” The Guardian, Nov. 5, 2019.

“Parents’s Jobs Increasingly Shape How Far Kids Get in Life,” Wall Street Journal, Sept. 3, 2018.

“America Will Struggle After Coronavirus. These Charts Show Why,” New York Times, April 10, 2020.

Raj Chetty, et al., “The fading American dream: Trends in absolute income mobility since 1940,” Science 28, Vol. 356, Issue 6336, pp. 398-406. Apr 2017.
DOI: 10.1126/science.aal4617

“Middle class Americans can no longer afford to get married due to huge debts as just 50 per cent now tie the knot,” DailyMail, March 10, 2020.

“Affluent Americans Still Say ‘I Do.’ More in the Middle Class Don’t.,” Wall Street Journal, March 8, 2020.

“Most political unrest has one big root cause: soaring inequality,” The Guardian, Jan. 24, 2020.

“Our social crisis is no longer just about inequality, it’s about life and death,” The Guardian, March 9, 2020.

Joseph E. Stiglitz, “Opinion: Why young people are angry about generational injustice,” MarketWatch, March 16, 2016.

“The Heir: Ivanka was always Trump’s favorite. But Don Jr. is emerging as his natural successor.” The Atlantic, Oct. 2019.

“Of COURSE the Trumps are planning to be a political dynasty,” CNN, Sept. 9, 2019

“Inside Ivanka’s Dreamworld,” The Atlantic, April, 2019.

“The Dynasty Ends With King Donald: There will be no President Ivanka. No President Jared. And certainly no President Donald Jr.,” Politico, Sept. 9, 2019.

 

김광기 경북대 교수의 연재 ‘인사이드 아메리카’는 <프레시안>에 동시 게재됩니다.

목, 2020/07/1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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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한 경제충격을 구제하기 위하여 미국연방의회는 기존의 2.9조 달러에 추가하여 지난 5월 15일 3조 달러에 달하는 예산을 재차 승인하였다. 연방준비제도 역시 미국의 200년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규모와 빠른 속도로 자금을 경제권에 쏟아 붓고 있다.

밀턴 프리드만이 1963년에 행한 언명 “인플레는 단지 통화현상이다”는 여전히 적용이 가능하지만, 이를 심하게 비판하자면 “재화가 부족한 반면에 돈이 너무 넘쳐나는 현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어찌했거나, 통화가 팽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의 물가는 목표치의 인플레 밑으로 유지되면서 이러한 경제적 통합운용이 광범하게 인정을 받아 왔다.

동시에 트럼프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수십 년 사이에 중국이 미국의 가장 큰 무역 파트너로 부상하였는데, 미국대통령이 지난 5월 14일 FOX TV와 인터뷰를 통해서 중국과 통상을 단절(decoupling)할 것이라는 협박을 공식화하였다.

트럼프가 실제로 미중 간의 단절을 추구한다면, 이는 미국경제가 하강국면에 들어서는 가운데 인플레를 자극하는 것이고, 미국의 경제와 시민들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셈이다.

인플레는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촉발될 수 있는 데, 공급사슬의 차단, 팬데믹 와중의 경제재개, 원유가격의 반등 등이 주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COVID-19이 가져오는 의료적 경제적 충격에 대응하여 미국의 정책당국자들은 ‘구제지원법’에 의거하여 상기에 언급하였듯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조직에 6조 달러에 달하는 급진적이고 단호한 지원정책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2007-9년간에 있었던 금융위기의 지원 액수를 훨씬 능가는 수준이다.

지원정책에 대한 시행을 책임지는 연방준비제도에 의해 풀려나는 엄청난 부채는 분명히 추후에 상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다한 지원책이 코로나-19에 대한 지나친 반응이었을까? 혹시나 인플레를 자극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인플레 발생의 여부는 정부의 결정에 의존한다. 긴축재정과 증세를 시행하면, 인플레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연방준비제도가 시행하는 ‘헬리콥터 모니’방식처럼 경제에 직접 돈을 푸는 방식은 인플레를 피하기 어렵다.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화폐정책은 은행차입과 통화공급량을 증가시키면서 복합적인 수요를 촉발하고 인플레를 자극하게 된다. 부채가 증가하게 되면 재정적 압박이 발생하여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금리를 인하하도록 압박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예금자와 채권보유자를 불리하게 하면서 높은 인플레의 위험성을 가져온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과다한 정부의 부채는 국제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가용자본에 대한 초과수요를 만들면서 인플레를 유도하는 신호가 된다. 세계 1,2차대전과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정부의 과다한 차입은 결국 미국에 하이퍼-인플레를 상당기간 불러 왔다.

이에 추가하여, 인플레에 대한 전망은 공급사슬의 차단과 경제활동의 재개 그리고 원유가격의 변동과 관련되어 있다.

봉쇄와 거리두기로 인하여 공급사슬은 심각하게 손상되었고, 일부 국가들의 자국주의적 통상정책으로 안착되었던 국제적 수준의 공급사슬의 흐름에 장애가 발생하였다. 세계적 규모로 경제활동이 급속히 재개되면, 그동안 억제되었던 개인과 기업들의 소비활동이 되살아 나면서 인플레 압력이 형성될 것이다. 미 연방저축공사 FDIC의 조상에 의하면, 지난 1분기에만 1조 달러의 자금이 기업과 소비자에게서 은행의 예금으로 흘러 들어 왔다.

봉쇄가 해제되고 산유국과 동맹들이 산유량을 줄이기로 합의하면서, 석유가격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6월과 7월분의 미국원유 선물거래지수는 지난 몇 주간의 가격추락을 회복하고 있다.

더구나 세계화의 흐름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 인플레를 완화시켜 왔다.

높은 인플레는 경제를 망치는 기구로 이해되면서 미국대통령들에게는 이를 재난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대 대통령에 취임한 레이건은 인플레를 비유하여 “노상에서 만난 강도처럼 폭력적이며, 무장한 괴한이 사람을 내려치는 것과 같이 치명적인 것”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수십 년간은 다행히 ‘인플레 안정기의 시대’로 불리며, IMF가 작년에 언급하였듯이 선진경제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발국가들도 인플레를 목표치 이내에서 관리했거나 혹은 적정하게 진정시켜 왔다.

그동안 하나의 공식처럼 여겨져 왔던 “필립스-곡선”1 즉 인플레와 실업률의 반비례라는 공식을 벗어나, 낮은 실업률과 높은 인플레라는 산뜻한 관계가 붕괴되어 왔다. 솔직히 말하면 상기의 공식이 충분히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다.

골드만 삭스의 주장인 ‘실업률 1.0%의 저하는 인플레의 01 -0.2 %의 인상으로 연계된다’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은 ‘필립스-곡선’의 공식과 달리 예외적으로 수평을 유지해 왔다. 2019년의 낮은 실업률이라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인플레를 야기하지 않았다. 실업률이 낮아져도, 인플레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으면서 전통적인 미세조정(fine-tune)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인플레의 동력이 정말 무엇인지 당황해 하면서, 이를 야기하는 것이 시민들의 인플레 기대심리인지 노동시장의 변동 또는 공급측면에 의한 것이지 기술발전 때문인지 아니면 국경을 넘어선 공급사슬이 국제적 충격을 굴곡시키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게 되었다.

온라인 거래가 가격을 인하하고 사람들의 일상적 거래에 필요한 많은 서비스와 방식들이 무상으로 제공되면서 기술진보가 인플레를 억제할 수도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거시정책입안자들은 수십 년간 국제적으로 전개된 세계화가 (인플레 억제의) 보다 중요한 원인이라고 믿고 있다. 세계화는 인플레를 낮추는 역할을 해왔는데 생산시설이 임금과 토지비용이 싼 곳을 찾아 입지하는 동시에 물류와 자본과 기술의 신속한 이동이 가능해지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공급이 원활해진 것이 배경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중 간의 경제 협력이 단절을 택하는 것보다 미국의 경제에 도움이 된다.

지난 4-5 월의 실업률을 보면 20.5백만 명이 실직을 당하면서 14.7%로 치솟았으며, 이제 스태그플레이션의 시대가 눈앞에 다가온 듯 하다. 현대사를 살펴보면, 높은 인플레의 시대에는 급격한 정책적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브레튼우드 체제의 포기’와 ‘세계화에서 탈세계화로 전환’ 등이 그러한 실례가 된다.

트럼프가 미중 간의 결별을 시도한다면 양자의 경제협력이 망가지고 세계화 흐름이 역류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양국간 대립과 결렬이 진행되면 물가가 뛰어오르고, 각종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이 터져 나오면서 미국인들은 경제의 침체기 동안 심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고, 트럼프 행정부는 결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1】 필립스곡선-편집자 주) 일반적으로 실업률과 화폐임금상승율(인플레)와는 반비례 곡선을 형성하는데 이러한 특성을 활용하여 재정금융정책을 통하여 실업률과 물가안정 간의 선택이 가능하다. 그러나 필립스 곡선의 특성이 작동되지 않는 딜레마 영역이 존재하며, 이러한 딜레마 영역의 탈출은 재정금융정책이 아니라 산업구조조정과 강력한 독점금지조치 및 소득정책을 통해야 가능하다.

 

출처 : CGTN on 2020-05-21.

Huang Yongfu

캠브리지 대학의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다년간 유엔에서 근무했고 미중의 통상과 기술 및 금융 관련 전문가로 활약 중

목, 2020/07/16-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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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가을 재선을 갈망하는 미국대통령 트럼프에게 그의 지난 4년 임기 중에 이룬 주요 성과가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그는 북경당국과 통상합의를 이룬 것이라고 크게 떠벌릴 것이다. 1월에 체결된 내용에 따르면, 중국은 상당한 액수의 미국제품을 수입하여 무역적자의 폭을 대폭 줄이고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트럼프 협상의 핵심사안은 중국이 미국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도입하여 미국 에너지 분야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트럼프가 떠벌리는 통상협상의 승리는 코로나 팬데믹과 충돌하면서 물거품이 되었는데, 무엇보다 극적으로 추락한 것은 에너지 분야에 관한 합의사항이다. 팬데믹으로 인하여 원유수요가 격감하고 가격이 추락하는 가운데, 중국이 약속한 에너지 수입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이 분명해 지면서, 트럼프의 퉁상전략이 어리석은 것임이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가 중국의 무역관행에 문제가 많은 것을 지적하며 대응한 것은 옳았으나, 미국행정부의 접근은 상식 밖이었으며 팬데믹 이후에는 의미가 없어졌다.

지난 협상과정을 다시 돌아보자. 양국은 지난 18개월 동안 힘든 무역전쟁을 치르면서 소위 트럼프 협상의 제1단계에 서명하였고 미국의 에너지에 대한 중국의 수입관세를 무력화시켰다. 협상의 핵심사항은 2017년을 기준으로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수입액수를 두 배로 늘려 2000억불을 수입하는 것이었고, 주로 4개 부문에 집중되었다. 그 중의 한 부문이 에너지에 관한 것으로 중국은 2020년에 190억불, 2021년에는 340억불을 추가로 수입하는 것을 약속하였는데 이는 2017년 기준으로 각각 240% 그리고 440%의 중가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1월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인 것이었지만, 이에 대해 트럼프와 참모진들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협상의 내용에 따르면, 오는 11월 대선 이후 결과에 따라 중국이 실제 구매행위를 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찌되었거나 코로나-19의 상황은 협상을 재고할 구실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트럼프의 협상은 확실하게 무효가 되었고 중국에게 약속의 이행을 강요할 방도가 없어졌다.

산술적 계산을 해보자. 협상 내용에 따르면 2020년 간에 중국은 매달 22억 달러의 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 그러나 전문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실제로는 지난 1월과 2월에 수입액이 전혀 없었고 3월 중에 겨우 320백만 불 정도 수입했다고 한다. 1/4분기의 목표량에 90%가 부족한 액수이다.

이런 형편없는 부족액수는 물론 놀랄 일이 아니다. 중국의 1/4분기 에너지 수요는 코로나-19로 인한 봉쇄조치와 경제활동의 중단으로 붕괴되었다. 동시에 세계적인 에너지 수요 격감으로 원유가격이 폭락하였고 이는 중국이 애초 약속한 목표 액수에 도달하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수입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협상의 발효시점이 2월 14일이었고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산 원유와 가스에 대한 관세를 3월 2일까지 여전히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으로 트럼프가 떠벌렸던 협상은 실제로 무효화되었고 중국은 약속을 이행할 길이 없었다.

한편, 코로나-19로 인한 봉쇄만으로 중국이 에너지 구매약속을 거의 이행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중국은 가격의 폭락을 활용하여 전력적인 비축량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지난 1/4분기 중에 사우디와 러시아 등에서 수입하는 원유량을 늘려 왔다.

더욱이 중국의 경제활동이 재개되고 가솔린 수요가 반등함에도 불구하고, 3월에 비하여 4월에 미국원유를 수입하려는 중국 유조선의 이동에 대한 예비적 데이터는 단순히 금액뿐만 아니라 절대 수량에서도 줄어들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향후 중국의 대미 에너지 수입이 증가한다 해도 합의된 목표에 이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이는 단순한 산술에 불과하다. 목표치를 채우려면 중국이 4월부터 12월까지 매달 290억불을 배럴당 30불(미국당국이 2020년에 적용한 평균기획 단가)에 수입해야 하는데 이는 매일 3백만 배럴을 수입해야 한다는 것이고 미국이 수출하는 원유의 전량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이 미국의 수출원유에 대한 마지막 한방울까지 수입해가야 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이의 공급조차 가능하지도 않은 상태이다. 미국의 세일가스 산업이 붕괴되면서 미국의 원유 수출량이 올해부터 줄어들기 시작했고 내년에는 1/3 수준으로 축소될 전망이다.

한편에서는 설령 미국이 공급량을 댄다고 하더라도 중국 역시 매일 3백만 배럴을 수입할 수 없다. 현재 가장 많이 수입하는 국가인 사우디에서 원유량을 전부 미국으로 돌린다 해도 이는 매일 1.8백만 배럴 수준에 머문다. 중국이 수입하는 모든 형태의 에너지, 즉 LNG, LPG 그리고 석탄을 다 대체한다 해도 원유 수입액의 일부만을 충당할 뿐이다. 중국이 수입하는 모든 에너지 포트폴리오portfolio를 미국으로 대체한다 하더라도 산술적으로 목표액을 다 채울 수는 없다.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전략 한계가 최근 몇 주간에 매우 분명해지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미국의 산유업체들과 종사자들을 구제하고자 돈줄을 마구 쏟아붓는 방식으로 지원하였다.

원유가격이 붕괴되면서 지난 2월부터 미국의 원유생산량은 최소 하루 1.5백만 배럴이 줄어들고 있다.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원유가격이 회복되지 않으면 원유생산업체의 40%가 파산에 이를 것이며, 22만 명이 실업자로 전락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재난상황에 직면하면서, 트럼프 행정부는 원유와 가스생산업체들을 지원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제안하면서, 생산을 중단하는 업체에게 지원금을 제공하고 연방준비제도를 통하여 대출금 한도를 높이고 전략적인 석유 비축량을 늘리며 수입원유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는 둥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결국 미행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차별적 조치는 사우디와 러시아를 한데 묵어 압박하면서 OPEC과 산유국들에게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산유량을 줄이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원유생산업계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행정부의 관리들이 중국에게 무역협상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압력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해당 업계는 원유가격의 인상과 기업에 대한 지원조치를 앞에 두고 의견이 갈라지고 있지만, 이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동의하는 것은 중국이 미국의 에너지를 많이 수입할수록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팬데믹 상황은 중국의 에너지 수입약속을 공허하게 만들었으며, 트럼프의 통상전략은 실패한 것이 되었다.

만약 중국이 미국과 약속한대로 실제로 지난 몇 개월 사이에 원유와 가스를 수입해 갔다면, 미국의 해당업체들이 그들의 저장고조차 가득 채운 상태에서 미국 원유가격을 역사상 처음으로 부負의 가격수준으로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가 중국에게 강제로 원유를 수입하도록 요구할 수 없다면, 관련업체들은 기존협상의 시효에 지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중국과 새로운 구매계약을 맺어 최소한 LNG 수출이라도 붐을 일으키도록 제안하고 있다.

원유가격의 추락이 중국이 에너지 수입목표를 이행하지 못하는 핑계를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트럼프의 통상전략의 한계로 일부 특정 분야의 구매를 약속으로 받아내는 방식인 것이다.  특정상품의 구매약속이 아니라, 무역장벽의 제거에 대한 제도적 작동, 중국의 부당한 산업정책에 대한 우려 해소, 지적 재산권과 환율 그리고 보조금 등에 대한 합의 등으로 접근했어야 한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하여 중국이 수년간 문제를 야기시켜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제품만을 많이 구매하도록 협박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결코 될 수 없다.

코로나-19 상황은 미국의 에너지 수입에 대한 중국의 약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고, 트럼프는 통상전략에서 실패했다.

 

출처 : 포린 폴리시 Foreign Policy on 2020-05-22.

Jason Bordoff

콜롬비아 대학교수로 국제공공정책과 에너지 전략분야의 전문가이며, 오바마 시절에 국가안보회의 참모들의 교육담당과 대통령 자문역을 지냈다

금, 2020/07/17-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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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2019년 7월부터 진행해온 기획칼럼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는 총 17회로 구성하여 격주에 한번씩 소개하였으며,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게재하면서 마무리합니다.

더 많은 권력을 시민에게” 제목으로 21세기 새로운 흐름인 직접민주주의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현재의 한국정치로는 미래의 희망이 없습니다. 1%의 소수를 위한 정치에서 99%의 시민을 위한 정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비례성을 100% 강화하는 연동형 비례제를 도입하고 주권자인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고 비판하고 결정하고 통제하는 민치 – 시민권력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이런 뜻에서 책의 내용을 격주를 통하여 약 10개월 간 연재하고자 합니다.  직접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시중의 대형서점이나 온라인을 통하여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많은 법규는 [유럽공동체의 본부가 있는] 브뤼셀에서 직접 만들어지거나 적어도 유럽공동체의 법규와 양립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유럽연합은 대의 기관을 갖춘 주권 국가들의 연합체이지만, 그 구조 자체가 연방국가와는 다르다. 수많은 유럽 시민들은 느낌 상 유럽 차원에서 보통 시민인 자신들의 표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반면,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소수들의 이익은 더 많이 반영되는 듯하다고 느끼고 있다. 유럽연합의 핵심 목표인 유럽연합 내의 국경없는 시장에서 경제는 초국가적인 것이 되었고 유럽연합의 집행부도 힘을 얻게 되었지만, 그들의 민주적 통제에 강한 강제력이 뒤따르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아직 국가적 울타리에 갇혀있는 듯하며, 유럽의회 내에서 초국가적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은 너무나 소극적이다. 유럽연합은 세계최고 선진국들의 연합 프로젝트이지만, 근본 가치 중 하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민주주의이다.

 

유럽연합을 민주화해야 하는 이유?

유럽연합은 매우 특별한 조직이다. 국가가 아니지만 곧바로 시행할 수 있는 법령을 승인할 수 있는데, 이 법령은 실제로 개별국가의 법규를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런 구속력있는 법률 규정권을 지닌 유럽연합은 여타 초국가적 조직들과 확실히 구분된다. 유럽연합의 기구들은 제도화된 구조와 완전히 민주적인 민주주의 절차를 갖추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곧 기구의 중심에 시민들이 직접 선출하여 좀더 정치적 합법성을 지닌 기구, 곧 유럽의회EP가 결정권을 지니고 있지 않다. 유럽연합 리스본 조약이 유럽의회의 역량을 강화시켰지만, 국가 민주주의 특유의 권력 분산이 유럽연합에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은 커다란 정치적 방향의 결정은 물론 우리 일상 생활과 관련해서도 실로 폭넓은 법적 권한을 지닌다. 지속적으로 유럽공동체 차원으로 양도되고 있는 법적 권한들을 양적으로 측정하기는 어렵다. 1998년~2004년 기간 동안 전체 법령의 83%가 브뤼셀에 양도되었다. 그러나 이런 법령들의 중요성을 잘 평가할 필요가 있다. 리스본 조약조차 법제권이 계속해서 브뤼셀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를 바로잡지 못했다. 다양한 법률 조항으로 유럽연합은 새로운 법적 권한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에 비해 시민들의 민주적 권한은 더 커지지 않았다. 대개 유럽연합에 법적 권한을 양도할 때마다 민주적인 통제력을 잃게 되는데, 유럽연합 차원에서 선출된 정치인들에 대한 시민들의 견제가 그리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종 유럽연합은 독특한 구조로, 연방국가 비슷한 특징을 지닌 국가들의 연합체로서 민주적 단일 민족 국가의 척도로 평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있다. 그에 대한 우리의 반론은, 민주주의의 척도는 그저 좁은 의미의 국가들만이 아니라 권력을 행사하는 연합의 모든 결정에 시민들이 중심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는 가치와 원칙, 방법과 제도들로 이루어지며, 개별적 전통 국가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조직에 적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럽연합 또한 민주적 권리라는 획득한 기준들에 맞춰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연합에도 여느 국가에 적용하는 것과 같은 민주주의의 척도들을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유럽연합은 다양한 정치부문에 입법 및 행정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정부 조직처럼 작동하며, 1천 4백 억 유로에 달하는 예산을 집행한다.

▪유럽의 통합과 그에 따른 유럽공동체 차원으로 법적 권한의 양도가 이탈리아 헌법에 허용되었으나 근본 원칙에 어긋나는 것일 수는 없다.

▪리스본 조약의 서문에 유럽연합 자체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유럽연합은 시민들이 그 원칙들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 줄 의무가 있다.

▪유럽의 시민들은 매우 다양한 법규와 조례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그러므로 그에 직접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종종 유럽 통합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옹호하면서, 평화보장과 안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기능적인 단일 시장과 단일 통화, 노동 및 자본의 완전한 이동 가능성, 안정된 농가 수입, 대학생들의 교환 프로그램 등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들을 열거하곤 한다. 합법성이나 민주적 투명성이 부족한 것은 시민들이 누릴 직접적 이익, 곧 유럽연합의 결과물로 보상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실상, 민주주의에서는 그저 결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바람직한 결과물인지 시민들이 명확히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또한 중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은 정치 논리를 통해, 그리고 민주적인 방법으로 각각의 구체적인 정책의 목표와 수단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독재 정권들도 대체로 민주적 정통성의 부재에 대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시민들을 위한 결과물이라는 관점에서 성과를 자랑한다. 그러므로 정치의 실제 성과가 시민들에게도 받아들여지고 승인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직접 민주주의를 하기에 유럽은 너무 크지 않은가?

230년 전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유럽 사람들 대다수를 열광시키기 시작했을 때 (이론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프로젝트로서), 대개 다음 질문을 중심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어떤 환경에서 민주주의가 더 잘 시행될 수 있을까? 루소Rousseau는 더 작은 환경일수록 민주주의가 더 잘 작동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같이 커다란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하게 많은 동료 시민들에게 유럽, 곧 4억 5천 만 인구를 지닌(영국은 제외) 단일 유럽연합은 민주적 형태로 조직되기에는 단순히 지나치게 크다.

이와 상반되는 첫 번째 역사적 증거는 미국에서 나왔다. 미국은 1776년 연방국이자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되었다. 또 다른 증거는 인도인데, 인도는 1947년부터 연방국이자 다국적 민주주의 국가로 작동하고 있다. 2017년 인도는 13억 3천 9백 만 인구를 기록했으며, 벌써 2020년에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견되고 있다. 유럽연합 3배 인구 규모의 민주주의 체제이다. 유럽 차원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기 전에, 주권자인 시민들에게 최대의 참여를 보장하려면 그 체제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할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을 들고 27개 국에서 인구 4억 5천 만에 이르며, 조만간 그 숫자가 더 늘어날 전망인 유럽연합 거주민들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통합된 유럽에는 5억 5천 만 명이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의회는 실행상의 이유로 선출 의원숫자 750명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유권자75만 명 당 한 사람의 의원으로 대표성이 매우 낮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공허한 약속이 될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레퍼렌덤 권한으로 통합하는 수 밖에 없다. 유럽연합의 규모가 그 구조 안에 직접 민주주의를 끼워 넣는 것에 장애가 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대표성의 약화로 인해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할 필요성이 더욱 크다.

2009년 새로운 리스본 유럽연합 조약은 유럽의회의 역할을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시민 발안으로 유럽 차원의 레퍼렌덤 권리를 향한 새로운 창을 열어 주었다. 반대로, 독일 연방의 전 정부 관료이자 2001-2003년 유럽 헌법 제정 협의회의 주요 주창자들 가운데 한 사람인 요슈카 피셔Joschka Fischer는 이 프로젝트에 대해 전혀 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곧 유럽연합은 직접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이었다. 유권자 규모는 물론 레퍼렌덤 절차를 작동시키는데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숫자만이 어떤 시민 정치 참여 시스템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을까?

민주적 정부 형태의 적용은 모든 차원의 정부에서 민주적 제도와 권리와 법규가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다. 어떤 특정 지역에서 민주주의의 제도화는 주로 해당 주민들의 뜻에 달려 있으며, 그 다음으로 시민들의 문화적 수준에 달려있다. 유럽 시민들은 관찰하고, 성찰하고, 토의하고, 여론을 형성할 능력이 있는가? 그들은 평화롭게 서로의 의견을 대조하고 경청할 수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과 그들 주위 공동체의 운명에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입수하고 바람직한 미디어에 접근할 기회를 갖고 있는가? 그들은 전반적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이나 프로젝트를 마련할 수 있는가? 미디어들은 독립적이고 정치, 경제적 세력들을 견제하고 있는가?

이런 요인들이 유럽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결정한다. 만일 지금 유럽연합이 충분히 민주적인 조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무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력이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유럽연합 지역의 민주적 체제들은 시군, 광역 및 국가적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 어째서 그 같은 유럽 시민들이 직접 민주주의의 도구들이 통합된 의회 체제에 기반하여 초국가적 차원에서도 강력한 민주주의를 조성할 능력이나 관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일까?

직접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규모가 작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극복되었지만 이는 장 자크 루소의 오랜 가설이었다. 유럽연합이 직접 민주주의에는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은 잘못이다. 더 커진 것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공간이며, 이 공간에서 더 많은 시민들이 살고 있을 수록, 순전히 의원들만이 직접 참여권을 지닌 대
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

 

유럽 시민 발안: 유럽연합에서 직접 참여를 향한 첫 발걸음

2012년 4월 1일부터 유럽연합은 리스본 조약으로 도입된(제11항 4절) 시민들의 새로운 참여권인 유럽 시민 발안ECI: European Citizens’ Initiative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60여 건 이상의 유럽 발안이 제기되었지만 단 4건만이 백 만 명의 서명 문턱에 도달하여 유럽의 의사 결정 절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초국가적 직접 민주주의의 첫 번째 권리 행사이다. 최소 7개 유럽연합 회원국에서 적어도 백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유럽위원회에 유럽공동체에 법적 권한을 지닌 법령 제안을 제시할 권리를 지닌다. 그러므로 유럽 시민 발안ECI은 일종의 “집단 청원”으로서, 시민들은 유럽연합 기구들에 발안을 채택하도록 촉구할 수 있다. 이는 유럽공동체의 입법을 위한 초기적 직접 참여 형식이며, 그렇더라도 유럽위원회에 어떤 행동을 취하도록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는다. 만일 유럽위원회가 시민들의 제안을 기각한다면, 그 어떤 레퍼렌덤 투표도 따르지 않으며, 최악의 경우 시민들의 모든 발안이 거기서 끝난다. 그러므로 유럽 시민 발안은 의회 측에서 기각된 후 국민투표가 따르지 않아 사라지고 마는 이탈리아 버전의 국민발안 법제안과 매우 흡사하다(이탈리아 헌법 제50조).

유럽 시민 발안은 최소 백 만 명의 시민들이 유럽위원회의 정치 의제에 영향을 주기 위한 국민 청원에 비교할 수 있지만, 레퍼렌덤 투표를 실시할 권한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완전히 무익한 도구는 아니다. 백 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유럽공동체에 법적 권한이 있는 어떤 정치적 제안을 지지한다면, 이는 어떤 로비나 비정부 기구들이 제기하는 단순한 호소와는 다른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유럽 시민 발안으로 초국가적 형태로 조직되어 일하는 시민 사회는 유럽위원회나 다른 유럽 기구들이 간과할 수 없는 강력한 제안들을 표현해낸다. 그러므로 유럽 시민 발안은 여러 조직들에 유럽공동체의 다양한 정치 부문에서 하나의 새로운 압박 루트를 제공한다.

어쨌든 유럽 시민 발안은 초국가적 직접 민주주의의 첫 도구이긴 하지만, 유럽 연합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시민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 주기에는 너무나 약한 권리이다. 결정에 영향을 주는 참여는 오직 시민들이 자신들의 유럽 국민발안과 유럽 실행 레퍼렌덤에서 투표할 자격 또한 부여받아야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유럽연합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들이 그저 강력한 로비의 압박에 놓인 브뤼셀에 집중된 테크노크라트들이나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에게만 맡겨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에게도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시민들은 자신들이 공공 영역이나 정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으로 느끼게 될 것이고, 유럽은 시민들 차원에서도 통합될 수 있을 것이다.

 

유럽 시민들에게 필요한 레퍼렌덤 권리들

지금까지는 유럽연합에 전통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도구들이 없다. 2012년 도입된 유럽 시민 발안ECI은 전통적인 레퍼렌덤 권한, 곧 국민발안과 선택적 혹은 의무적 실행 레퍼렌덤을 대신할 수 없다. 그것은 보다 민주적인 유럽을 위해, 유럽의 입법을 통제하고 시민 사회에서 나온 제안들로 대의 기구들을 자극하기 위해 양도할 수 없는 권한을 말한다. 이 시점에서, 추후의 유럽 조약문서 개정을 염두에 두고, 국가적 차원에서 필요한 레퍼렌덤 권한을 되짚어 보며 다음 세 가지 종류의 직접 참여권을 제안할 수 있을 듯하다(베네딕토, 2010).

1) 국민발안의 법제안들에 투표하기 위한 유럽 레퍼렌덤을 포함하는 국민발안 입법권 (이탈리아의 법률 용어로는 ‘유럽의 제안 레퍼렌덤’이다). 일정 최소 인원의 시민들이 오늘날 유럽위원회와 매우 제한된 형태로 유럽의회에만 국한된 권한인 유럽의 법률 입안을 제안할 권리를 지닌다. 이 권한은 세 단계로 나뉘는데, 최소 백 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제기한 국민발안의 유럽 법률 제안으로 시작하며, 이어서 의회에서 토론을 거친다. 이 제안이 기각된다면, 시민들은 서명보다 더 높은 인원으로 레퍼렌덤 투표를 요청함으로써 이를 유럽의 제안 레퍼렌덤 실행으로 가져갈 수 있다.

2) 국민의 거부권, 곧 유럽의 실행 레퍼렌덤. 어떤 새로운 유럽공동체 법령이 승인되고 나서 일정 기간 내에 유럽 시민들은 이미 유럽연합 기구들에서 승인된 법령이나 어떤 새로운 회원국의 유럽연합 가입 여부에 대해 선택적 실행 레퍼렌덤을 요청할 권리를 지닌다. 이 레퍼렌덤을 “선택적”이라고 정의하는데, 일정 최소 인원의 시민들이 그 레퍼렌덤을 요청할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3) 유럽의 의무적 실행 레퍼렌덤은 향후 헌법 조약의 개정에 대해 자동으로 규정되었다. 곧 최소 인원 시민들 편에서 특정 요청이 없이도 법으로 규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런 이유로 이를 “의무적 레퍼렌덤”이라고 한다.

“유럽의 레퍼렌덤”에서 투표권을 지닌 모든 유럽연합 시민들은 잠정적으로 유럽공동체 제도권의 어떤 반대 제안에 맞서 제기된 국민발안 제안에 관하여 결정하기 위해 투표하도록 요청받는다. 유럽연합의 독특한 제도적 구성은 소수 회원국들이 계속해서 소수파의 위치에 놓이는 것을 막기 위한 일련의 메커니즘을 지닌다. 그러므로 유럽의 레퍼렌덤 투표에 그런 연방적 요소를 넣는 것이 불가피할 것인데, 곧 “이중 과반수”를 규정해야 한다. 스위스에서 벌써 오래 전부터 이를 규정하고 있는데, 연방 레퍼렌덤 투표에서 총 투표자들 표의 과반수와 칸톤들의 절대 과반수가 둘다 필요하다(“Ständemehr”라고 한다). 이를 유럽 차원으로 가져가면 유럽의 투표에서 “연방”이라는 조건의 대의성을 보장하기 위해 총 투표자들 표의 과반수만이 아니라 대다수 회원국에서 나온 표들의 과반수 또한 요청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안에 대해 만일 투표자들의 과반수가 찬성을 표시하고 유럽연합 회원국(현재 27개 회원국 중 최소 14개국)의 대다수로부터도 승인된다면 그 제안이 수용된다는 뜻이다. “이중 과반수”는 연방이라는 의미에서 시민 숫자가 적은 회원국에 보호책을 제공한다. 유럽 레퍼렌덤 투표 또한 참여 정족수가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유럽의 시민들은 새로운 나라가 유럽연합의 회원 자격을 얻는 것에 대해서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나 제도권에서 공포하는 가부형 레퍼렌덤 투표(플레비사이트)는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자국의 정치에 쉬운 환호를 얻기 위해 이용하는 도구로 전락할 수 있으며, 진정한 국민발안의 표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발전은 현재 유럽연합의 제도적 틀에서 민주적 결함을 보완할 수 있고, 유럽의 참된 여론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으며,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촉진시킬 수 있지만, 그것이 유럽 민주주의를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유럽연합 내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도전들

직접 민주주의의 도구 도입은 나름의 어려움에 봉착하는데, 유럽연합은 완전히 독특한 나름의 스토리와 정치적 구조가 있는데, 그것은 유럽연합을 이루는 여느 단일 국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이런 종류의 초국가적 민주주의 프로젝트가 공통으로 갖는 특유의 문제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많은 시민들이 유럽연합은 지나치게 크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민주적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유럽연합은 모든 차원에서 명확한 법적 권한이 구분되어 있거나 제도권과 권력의 분명한 위계 질서를 갖춘 연방 정부가 아니다

▪유럽연합은 성숙한 의회 민주주의 조직이 아니며, 유럽의회 또한 아직은 힘이 없고 유권자들 측의 관심 부족이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럽의 레퍼렌덤 도구에 대해 확신이 없는데, 그것은 일부 회원국들 차원에서 비슷한 도구들에 대해 부정적인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의 회원국 대부분은 중앙집권국가들이며 수많은 시민들이 이미 자국에서 정치적 의사 결정을 하는 본부들과 그들 일상의 상황 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감을 비난하고 있다.

▪직접 민주주의로 역사적인 혁신을 도입하고자 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 구조의 변혁이라는 필요에 직면해야 한다.

▪모든 시민들이 벌써 “세계적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시민들”로 변화되지는 않았다. 한편으로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저 자기 모국어(게다가 지역적 방언)만 알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 정치적으로 다소 지방색이 강한 시각을 지니는 경우가 많다.

유럽 직접 민주주의는 건설 중인 과정이자 과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연합의 “민주적 후진성”에 대해, 유럽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레퍼렌덤 권한이 갑자기 제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미 몇 개 국가군에서는 종종 레퍼렌덤 권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의무적 실행 레퍼렌덤부터 시작하여 앞으로 제정되고 개정할 수 있도록 활동하면서, 유럽의회에 입법 국민발안과 국민 청원을 할 수 있게 하며, 그 다음 계속해서 선택적 실행 레퍼렌덤 권리를 위해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직접 민주주의의 유럽적 도구 도입에 처음부터 사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유럽연합 민주주의의 초국가적 규모로 인해 유럽연합은 특별한 특징을 지니며, 이는 국가적 민주주의에서 제기되는 것들에 비해 다음과 같이 독특한 요구사항을 만들어 낸다.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발안의 결정이나 절차가 일방적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의 발안들은 가능한 한 여러 나라에서 모든 사회 계층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여러 종류의 엘리트 의식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재정적 권력이나 잘 조직된 비정부 기구들의 권력이 직접 민주주의를 장악해서는 안된다. 직접 민주주의의 도구들은 그저 잘 조직되고 자금력이 있는 소수들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초국가적 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함으로써 “유럽의 공적 공간” 조성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유럽 국민발안을 다루고 실행하기 위해 기간을 정할 때, 제도권과 발안자들과 다양한 이익 집단들 사이에서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협상과 노력에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야 할 것이다.

▪유럽 직접 민주주의의 형태는 그저 유럽의 제도권에 시민들의 의견을 더욱 경청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것만이 아니라 시민들 또한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도록 설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국가적 민주주의가 당면한 위기는 이중적인 위기이다. 한편으로 회원국들의 국가 민주주의는 지나치게 간접적이며, 거의 항상 선거에만 기반을 두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들로 보완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국가적이기도 해서, 초국가적인 막강한 경제 세력들을 감당하거나 견제해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민주적 권력들은 초국가적인 방식으로, 곧 유럽연합의 유럽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오로지 대의적 요소들을 직접적 요소들과 잘 결합시킴으로써 우리는 유럽연합에 단순히 과반수로 정해진 결정을 초국가적 차원에서 통과시키는데 필요한 민주적 합법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연합은 시민들과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시장의 인간화와 문명화를 위해 요청되고, 꼭 필요한 합법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직접 민주주의는 한 구석에서 벗어나 그 잠재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며, 더 이상 플레비사이트적 요소들과 혼동되지 않을 것이다.


토, 2020/07/18-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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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쳰리췬(1939~) 선생은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석학이자, 사상가중 한명이다. 베이징 대학 중문과에서 오랜 기간 교편을 잡았고, 근현대 중국의 텍스트와 사상가들 특히 루쉰과 마오쩌뚱을 연구했다. 청년과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발언을 하고 있다. 중국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명으로 알려져있지만, 친서방적 자유주의자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중국을 연구하는 한국학자들과도 교분이 있는데, 신향촌건설운동과 원톄쥔 교수를 한국에 소개하여 원교수의 저서 ‘백년의 급진’이 한국에 출판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베이징대학 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으로 뽑히기도 한, 그는 젊은 시절, 베이징 대학 학부이후, 오랜 기간 중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한곳인, 꾸이저우貴州성의 지방도시 안슌安順에 하방돼 평범한 교사로 경력을 쌓기도 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백여년전에 시작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근대화 문제와 20세기 중국 사회 발전과 그 경험의 해석에 대한 우려와 질문을 매우 직접적으로 던지면서, 청년/지식인들의 ‘향촌건설운동’과 ‘자원활동가운동’에 대한 참여와 연구가 이들 문제에 대한 답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는, 최근 몇년간, 중국 안팎의 희망과 달리, 갈수록 축소되는 ‘비시장’ 민간영역의 ‘사회’ (중국에서는 시민사회보다는 공민사회公民社會라고 불린다)를 재건하기 위한 매우 커다란 과제이다. 또 한가지, 그 핵심이 중앙과 도시 이상으로, 향촌과 지역이 중시돼야 하는 (혹은 될 수 있는) 중국 고유의 근대화라는 맥락위에 서있기도 하다.


신향촌건설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흥기하였고, 일부 지식인들의 자각적 행동에 의해서 출발했다. 일부 농민공과 노동청년이 공동으로 일련의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이중에는 농촌활동, 생태농업의 지원, 문화공익사업, 도농협력 등이 있다. 이 민간지식계의 사회운동은 처음부터 청년 지식인들의 광범위한 참여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저명한 학자인 쳰리췬은 20세기이래 ‘중국의 여섯번째 지식인 하방운동’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제 20년이 지나고, 수만명의 대학생과 이백여개 대학의 농촌지원학생 동아리들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신향촌건설’운동. 이들 청년지식인들의 참여는 의심의 여지없이, 깊이 살펴봐야할 21세기의 문화현상이다. 어떻게 이 사회운동이 출현한 사회역사환경을 이해할 것인가?  지금 ‘제도형식화’된 대학교의 학과교육이 직면한 심각한 도전과 이 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영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중국 청년문화와 자원활동가문화에 대한 이 운동의 영향과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 운동에 참여한 청년지식인들은 어떤 정신적 경험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현재 자신이 놓인 처지와 자신들이 추구하는 삶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 농촌지원활동에 나선 청년과 향촌건설에 참가하는 청년들은 현재 어떤 도움이 필요한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상계, 문화교육계, 산업계 그리고 모든 청년과 국가의 장래에 대해서 고민하는 이들의 깊은 성찰, 토론 그리고 행동을 요구한다.

 

2019년 8월1일, 베이징시 창핑구 타이캉즐쟈 옌유엔

인터뷰이 – 멍덩잉孟登迎(중국사회과학원대학 인문학원), 판쟈언潘家恩(충칭대학 인문사회과학고등연구원), 장후이위張慧瑜(베이징대학 신문방송학원); 황즐여우黃志友(베이징아이꾸샹문화발전센터)


1. ‘향촌진흥’전략하의 향촌건설

인터뷰어: 1990년대말 이래, 청년지식인들이 향촌건설에 매진해왔습니다. ‘향촌진흥’전략이 제시된 이래, 향촌건설이 주류화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루 아침에 ‘향촌진흥’전도사로 변신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실제로 향촌의 현실을 개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쳰리췬 선생(왼쪽)과 인터뷰어들 (빠링허우 세대의 향촌건설 활동가 및 연구자)

쳰리췬: 최근 글과 강연중에서, 저는 이미 이 변화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옌양추晏陽初도 당시에 이렇게 얘기했죠. “향촌건설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너무 많아지면 운동이 변질될 수도 있다.” 오늘날의 향촌건설도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에서 향촌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비관적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날, 저는 중국의 향촌건설이 아직은 다시 10년간 체제안에서 담금질 돼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은 ‘향촌건설’을 하면서 두가지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첫째는 인내심입니다. 단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길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향촌건설은 장기전입니다. 두번째는 지혜입니다. 각종 제약 조건하에서 생존과 발전의 공간을 모색하는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또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향촌건설을 오래 진행하면서, 발전도 변화도 있었습니다. 조기의 향촌건설은 사회참여를 통해서 농촌을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점차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어요. 시민농장을 만들어서, 시민들이 텃밭을 가꾸고, 실제 농업생산에 참여하는 활동을 기획하지요. 이는 실제로 경제를 통해서 이끄는 향촌건설발전의 특징을 실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기본 생존문제가 해결된 시대에는, 젊은이들은 새로운 정신적 성장의 기회를 추구해볼만합니다. 향촌건설활동은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들의 환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의 정신적 목표의 변화는 오늘날 그리고 미래의 향촌건설이 제공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향촌건설이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인격적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줄 수 있습니다.   

실제, 우리 세대에게는, 지금의 향촌건설운동은 꽤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왜냐면, 지금 여러분이 하는 일이, 우리가 젊었을 때, 어느 정도 ‘이상’으로 생각했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젊은 시절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간의 장벽을 없애고자 했습니다. 또, 도시와 농촌의 차별과 격차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했습니다.

쳰리췬 선생(왼쪽)과 인터뷰어들 (빠링허우 세대의 향촌건설 활동가 및 연구자)

그래서 제 생각엔 향촌건설은 미래에 매우 큰 발전의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과 정치문제, 국가문제 이런 주제를 가지고 토론해도, 아마 잘 이해를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흥미가 없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향촌건설 같은 활동에는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활동을 통해서, 좋은 진로를 개발할 수도 있고, 생활에서 어떤 구체적 의미를 추구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당연히 어떤 일이든 일단 유행을 타게 되면, 새로운 위기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설사 젊은이들이 재미삼아 참가한다고 해도, 안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지고한 이상을 간직하고 자기 신념대로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요.

인터뷰어: 최근에 편집하신 <<안슌성기安順城記》〉가 곧 출간됩니다. 이 책은 지역문화 전승과 관련한 매우 의미있는 시도인듯 합니다. 지역사의 정리와 간행, 지방문화계승과 발전 그리고 향촌건설간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쳰리췬 선생이 편집한 안슌성기<安順城記>

쳰리췬: 제가 보기에, 지역문화의 계승과 발전은 향촌건설의 중요한 과제중 하나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도, 안슌성기의 발간은 제가 최근에 한 일중에 가장 성공적인 작업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큽니다. 청년지식인들과 향촌건설 참여자들이 더 많이 이 사업에 참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지방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 벌어져야 합니다.

이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민간이 역사를 지키고 만드는 전략이랄까, 이런 것들을 정리했습니다. 우선, 민간의 역사기록은 반드시 현지인과 외지인이 협력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꾸이저우貴州 안슌安順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만, 꾸이저우 지역민 그리고 현지 친구들과 협력했습니다 – 제가 외지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제가 직접 지역향토사를 정리해야 한다면, 저는 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반대로 제가 없어도 일이 진행될 수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이용해서, 자기 고향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는 일군의 인재들을 키워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책을 준비하면서, 꾸이저우에서 인연을 맺은 5~6대에 걸친 사람들을 모두 동원했습니다. 덧붙여서, 현지에서 큰 문화적 영향력을 갖춘 사람을 꼭 찾아내야 합니다. 이번에, 정부의 자금지원도 받았고, 현지 사회과학계 학술네트워크가 제공한 협조도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외에, 지역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으로 확장시켜나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안슌시에서 시민독서대회를 거행했는데, 지역의 저자들이 시민들에게 안슌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활동에 대해서, 시민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지의 자기 생활 터전에서 행해진 자기 고향에 대한 공공강연이기때문입니다. 또다른 예는 새로운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훼손, 파괴될 위험에 노출된 생태문화자산을 지키는 운동을 벌일 수 있습니다. 옛마을, 오래된 나무, 고건축물 등을 찍어서 비디오를 만듭니다. 지방정부와 주민들이 이런 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입니다. 이를 지역의 문화소개자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록이 일종의 역사전승이 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향토문화의 교재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 이런 방면에는 여전히 제한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향토교육의 통식通識교육화를 추구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의 향촌건설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오늘날의 향토는 세계적 관점하의 향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향토교육은 반드시 로컬라이제이션과 국제화가 유기적으로 통일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될 때에만, 아이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지방의 역사문화자원이 관광자원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방사를 서술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확장시켜 나가면, 단지 책한권을 출간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갖춰서 보급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거듭나게 됩니다.

 

2. 향촌건설, 사회건설과 ‘자원활동가문화’

인터뷰어: 21세기에 들어온 후 ‘자원활동가그룹’이 중국사회에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많은 보통 시민들과 지식인들이 관심을 기울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이에 관심을 표명하시고, <<자원활동가문화 총서>>를 출간하셨습니다. 이 책속에서, 옌양추晏陽初, 량슈밍梁漱溟, 타오싱즐陶行知과 루쭤푸盧作孚 이렇게 네분의 향촌건설 선구자들을 자원활동가의 예로 드셨는데요.  그중에서 루쭤푸의 향촌건설 성과는 거의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런 향촌건설 선각자들의 실천과 사상이 오늘날 청년자원봉사자들에게 어떤 정신을 심어줄 수 있을지요.

쳰리췬 선생의 자원활동가문화 총서 시리즈

쳰리췬: ‘자원활동가문화’는 제가 자원봉사 활동과 향촌건설 활동에 참여하면서 서서히 형성한 개념입니다. 이런 활동중에, 저는 계속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사상문화 자원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당시에 모두가 생각했던 것은, 홍콩과 대만 그리고 외국의 자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국대륙에서 사상자원을 발굴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 제가 ‘서부양광액션西部陽光行動’에서 강연을 한 일이 있습니다. 자원활동가 운동과 향촌건설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의의도 있는 루쉰의 사상자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옌양추 시절의 향촌건설 참여자들의 이론과 실천을 회고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중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 판단이 있었습니다: 중국은 농업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고, 그러므로 중국을 제대로 건설하려면, 농업, 농촌에서 시작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실제로는 전국적인 사상의 전파가 있었고, 여러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농업기술파’이고, 주로 현대농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옌양추는 ‘향촌건설파’ 마오쩌뚱은 ‘혁명파’였던 것이죠.  하지만 그들 모두는 향촌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실제 향촌건설파와 중국혁명은 내재적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의 근현대역사를 고찰하면, 부득불 이렇게 향촌으로부터 시작해서 중국의 큰 흐름과 사고의 틀을 바꾸려 하던 활동에 주의를 기울이게 됩니다. 근대 이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노력이 모두 이런 큰 맥락으로 귀결됩니다. 다만, 모두가 다른 각도에서 구체적인 작업들을 전개해왔습니다. 나는 이를 근현대 중화민족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느낍니다. 오늘날 나 자신을 포함해서, 향촌건설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중국 농촌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혹은 중국의 현대화와 공업화진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향촌을 떠날 수 없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서방의 공업화/도시화 경로를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자원활동가문화’에 주목하게 됩니다. 하나의 큰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만 – 전통중국사회구조는 현대화 과정에서 엄청난 층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사회를 재건해야 할까요?

전통중국사회에서 황제의 실제 통치력은 현縣밑으로 미치지 못했습니다. 매우 방대한 현급이하의 사회는 여전히 향신계층과 향촌사회가 존재했고 – 실제로는 이를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민간사회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정부의 통제는 현재와 같이 직접적으로 기층에 침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실행하는 향촌건설 실천은 전통의 민간사회를 회복하는 시도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 민간사회를 복구하는 것이, 향신계급이 농촌을 관리하던 옛 사회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보통의 농민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향촌의 엘리트와 향촌의 민중이 함께 민간사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이렇게 별도의 두가지 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자원활동가운동과 향촌건설운동에 관심이 많습니다. 첫번째 문제는, 루쉰선생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국민성개조문제와 사상계몽 요구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전통중국사회가 결여한 ‘사회조직’의 문제입니다: 중국 사회구조안에는 국가체제와, 상업시장주체가 있지만 정작 ‘사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중국 사회구조의 가장 큰 결함입니다. 그래서 자원활동가조직과 향촌건설조직이 문자 그대로 사회를 건설하는 시도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두가지 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모두 사상의 계몽과 사회조직 발전이라는 두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두가지 운동은 모두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택하면서 이 두가지 근본적인 사회문제에 대처하는 움직임입니다.

인터뷰어: 선생님은 앞서 언급한 네분의 선각자들로부터 지금 향촌건설에 참여하는 지식인과 청년들이 배워야 할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향촌건설의 선구자 4인 중 량슈밍梁漱溟

향촌건설의 선구자 4인 중 루쭤푸盧作孚

향촌건설의 선구자 4인 중 타오싱즐陶行知

향촌건설의 선구자 4인 중 옌양추晏陽初

쳰리췬: 저는 그분들이 특히 농민조직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시작할 때는 모두 교육에 방점을 뒀습니다. 계몽운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지요. 초기에 기술교육에서 시작을 해서, 농촌 교육현장을 개선했습니다.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점차로 공민교육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일종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전면적인 향촌건설을 고려하면서 농민조직화 문제에 몰두하게 됩니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현지의 농민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에 결국 농민이 스스로 향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외부인의 개입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농민조직화가 이뤄진 후에야 방법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3. “다시10년을 담금질해야한다”: 청년들의 정신적 성장

인터뷰어: 저희가 하는 일은, 향촌건설 프로젝트를 빌어, 농촌지원사업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육성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대나 건의가 있으신지요? 예전에 말씀하셨던 “섬세한 이기주의” (역자주: 베이징 대학에서 오래 교편을 잡은 쳰리췬 선생이 접하게 된 일부 학생들의 행태에 큰 충격을 받아서, 중국 사회 엘리트들의 이기주의적 성향이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의미로 교육과 사회 문제를 지적했던 표현이다.)라는 말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저희는 전면에 서서 일을 하면서, 청년 학생들에게 각종 이익이 주는 달콤한 유혹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저희가 판단하기로는, 수많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사실 대부분 선한 마음을 품고 있고, 사회주의 전통 환경이나 부모들의 가르침속에 공평이나 정의와 같은 기본적인 요구를 마음속에 품고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체제와 미디어는 개인주의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더 키우기도 합니다. 이 양자간에는 사실 부딪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문제는, 어떻게 계층 향상을 추구하고, 동시에 선함을 지향하는 젊은이들을 격려해서, 일종의 협력정신을 지니면서, 즉 비원자화한 동시에 개인화한 실천방식을 추구하게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입니다.

쳰리췬: 조심해야 될 것은, 제가 비판한 “섬세한 이기주의”가 개인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많은 사람들이 빠링허우80後는 글러먹었다고 했죠. 하지만 저는 당시에 이런 식의 비판에 항변했습니다. 대개 당대 주류는 다음 세대에 만족하지 못하죠. 하지만 다음 세대는 모두 충분히 자기 문제를 해결하곤 합니다. 결국, 그들에게 주도권이 넘어가죠. 그러니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중국 사회의 허리가 된, 여러분들 (빠링허우)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날의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보다 전면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개인주의자들이고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합니다. 개인 권익의 자각성은 저같은 구세대에 비해서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공무사大公無私, 전문리인專門利人,호불위기毫不為己(역자주: 마오쩌뚱이 중국에 와서 봉사했던 캐나다인 의사 노먼 베쑨을 추모하면서 남긴 말. 공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조하는 말.) 이런 요구는 지나친 것이겠지요. 요즘 사람들은 물질적 이익을 포함해서, 겨우 자기 자신의 권리를 보호할 수 있을뿐이지요,. 현대의 시대조건에서 긍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 문제가 뭡니까? 젊은이들뿐 아니라, 사실은 중국 인민들 모두가 비물질적인 측면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럼 사회가 어떻게 될까요? 모두가 자기 이익을 보호하는데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죠. 결국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루쉰선생의 말을 따르자면, 개인의 슬픔과 기쁨이 온 세계가 돼버리죠.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고 온통 자신의 쾌락만이 중요합니다.

최근에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은 제 근심거리입니다. 현대 중국의 청년들을 포함한 각 사회계층과 국민성 문제입니다. 당안팎을 막론하고, 위에서 아래까지, 모두 이런 국민성 문제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 현재 중국 최대의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 생존 욕구에만 충실하다는 것입니다. 이익만을 좇고 손해는 절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젊은이들이 이런 가치관을 지니게 되면, 사회가 위험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사회 시스템이 이런 논리를 부추깁니다. 내 말을 들으면 이익이 되고, 듣지 않으면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 많은 문제의 근원입니다. 국가적 민족적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들이 이렇게 표리부동합니다. 경우마다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위아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과 가장의 이야기도, 그룹안에서 자기가 하는 이야기와 선생님께 하는 이야기가 모두 다릅니다. 그 사실을 스스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 표리부동을 다루는 기교도 아주 뛰어납니다. 이것은 아주 큰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가치도 아주 중요합니다. 결국 현대 중국인들에게 정신적인 가치라면, 개인의 이익과 민족주의 그리고 애국주의 정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애국주의가 극단화하면, 역시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현대 중국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 여러분들이 참여하는 향촌건설은 바로 이런 문제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행동은 오히려 개인적인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향촌건설의 참여가 도전이 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익을 좇고 손실을 피하고, 본능적으로 생존을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당연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향촌건설의 참여자는 소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시종일관 고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늘 그렇게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고독이 여러분의 운명입니다. 이런 고독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뜻이 맞는 동지들을 찾아 연대하고 서로 도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그룹 자체는 사회의 비주류가 될 수 밖에 없지요.

인터뷰어: 끝으로 여쭤봅니다. 선생님께서는 90년대말부터 “비주류적이고, 대안적인 모색을 하는” 젊은이들, 말하자면 이상주의 청년들을 주목해오셨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희들 모두, 생각을 하게 한, “10년을 담금질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방금 “이제 다시 10년을 담금질해야 한다”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지요?

쳰리췬 선생이 향촌건설 청년들에게 책을 기증하며, “10년을 다시 담금질하라!”는 조언을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존재하고, 계속 노력하고, 계속 서로 부축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쳰리췬: “다시 10년을 담금질한다”라는 말에는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저는 최소한의 생계문제는 해결한 학생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보다 더 젊은이들에게는 지나친 요구이겠지요. 오늘날의 청년들 (특히 대학생들)은 최소한의 생계 문제는 이미 해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두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요.

첫번째는, 여러분처럼 더 적극적으로 사회적 실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학술연구를 할 수도 있고, 이 두가지를 결합할 수도 있습니다. 왜 “10년을 준비해야 한다”말하냐고요 ? 왜냐하면 장기적인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농민의 국민성을 개조하는 것에 대해서, 저는 사실 비관적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비관적이어도, 태도는 적극적으로 취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이건 장기적인 일입니다. 왜 “다시 10년을 준비해야” 하냐고요 ? 이건 여러분들 빠링허우 세대에게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10년간 자기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부터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최대한 노력해서 해야 합니다. “10년을 담금질하라”는 이야기는 최대한 노력해서, 최대의 성과를 거두라는 격려입니다.

두번째 선택지는, 사회적 실천에는 참여하지 않는 연구자들이지요. 전문적으로 학술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자와 마찬가지로, “10년을 담금질하고”, “다시 10년을 담금질 할 수“있습니다. 학계의 관점으로 보자면, 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학계는 정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저작을 거의 생산해 내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대가도 없지요. 물론 좋은 인물도 있고, 가치있는 저작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론적으로 창조적인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그 이유중의 하나는 오늘날의 학자들이 연구에 전념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8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은 연구과제를 끊임없이 바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진득하게 오래 연구해서 정말로 바깥 세상에 내놓을 만한, 설득력 있고, 독창성을 가진 이론이 나타나지 못한 것이지요.

중국학자들이 직면한 매우 현실적이면서 동시에 답을 찾기 어려운 인문학적 질문들이 있습니다. 오래된 문명을 가진 나라들은 대부분 모두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전통은 여전히 전승되고 있습니다. 현재, 공산주의  리더 국가들도 대부분 망했습니다. 중국만 여전히 존재하고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 중국의 학자로서, 이 질문에 이론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학문을 하는 중국인이라면, 그의 노력의 목표는 중국의 근현대사에 대해서 설득력있고, 창의적인 이론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구하는 향촌건설도 최종적으로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구호를 하나 준비했어요 “20세기 중국의 경험을 결산하자”. 향촌건설연구는 어떤 의미에서 이 체계를 가져와야 합니다. 이론을 만드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이 일에 몰입할 수 있다면, 20세기 중국에 대하여, 설득력 있고 논증가능한 이론을 만들어 제안할 수 있을 겁니다. 두가지 방면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역사경험의 해석을 명철히 하고, 동시에 비판적 시선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10년을 담금질 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여러분 세대에 아마도 이론을 새롭게 하고 돌파구를 마련할 사람이 나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평생 두곳의 정신적 고향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장 밑바닥의 꾸이저우貴州, 또 하나는 가장 꼭대기의 베이징 대학입니다. 중심과 변경, 상층과 기층, 엘리트와 민중, 저는 이 양극단 사이를 오갔습니다. 제 인생 경험과 학술 경험의 최대치가 바로 이곳들입니다. 양쪽 모두 한계는 있습니다. 만일 평생 농촌에서만 지내야 한다면 시야가 좁아질 수 밖에 없겠지요, 또 베이징에서 지내면서 농촌과 관계가 끊어지면 또 다른 의미로 인생 경험의 폭과 자원이 제한되겠지요 –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개혁개방후 대학에 진학하고, 농촌을 지지리 고생만 하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떠올리고 싶어하지도 않지요, 멀리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좋다고, 하지만 저는 고생이 또 다른 자원이 됐으면 합니다. 제게는 안슌이 그 근거지가 됐습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고향’ 한 곳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의미는 이런 겁니다: 거기에 당신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묶일 필요는 없습니다. 세계와 교류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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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7/21- 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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