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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의 재정 위기: 분담금을 빙자한 미국의 국제적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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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의 재정 위기: 분담금을 빙자한 미국의 국제적 횡포

admin | 수, 2019/10/23- 22:03

편집자 주: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미국의 적극적인 제안과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유엔총회, 안전보장 이사회, 유엔사무국, 경제사회 이사회 등 4개의 공식기구와 국제 원자력 기구, 식량농업기구, 유네스코,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 등 산하의 여러 전문기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2019년 현재 193개 회원국과 37,000 여명의 직원을 두고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요 공여국인 미국의 상습적인 분담금 납입지연과 불이행 등으로 2019년 현재 수억 불이상의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의 글은 유엔에 가하는 미국의 횡포와 압력의 실상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유엔은 자금조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치 변덕스러운 회원들로 채워진 클럽처럼 유엔은 모든 회비가 제 때 들어올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일부 회원국들은 회비 지급을 미루고 있고 결제는 종종 실종된다. 미국의 경우, 현재 유엔 운영 예산의 약 22%를 담당하는데, 회계연도에 따라 10월 이후에야 회비지급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더 큰 문제의 일면에 불과하다. 회비지급 보류는 유엔헌장 17조를 위반하는 사항으로 예산상 행위만큼이나 정치적이기도 하다. 이 조항의 중요성은 유엔의 운영비용을 “총회가 배정한대로 회원국이 부담한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UN 외교정책과 조직의 개혁 문제는 부과된 회비를 줄이거나 보류하는 주요 사안들로 언급되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렇게 “부과된 회비”가 행정 비용, 평화유지 활동 및 다양한 프로그램에 쓰이는 비용을 부담하는 공식 정규 예산으로 편성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경우, 종전에는 기구 운영 비용의 약 40%를 부담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따라서 UN 조직에 어떤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추방, 유보, 자격 부인 또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경우 “미국이 연간 분담금의 지급을 유보하면서 매달 8.34%” 축소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었다.

재정 지원 문제는 돈주머니를 걱정하는 미 의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수년간 위원회의 붙박이 역할을 한 제시 헬름스(Jesse Helms)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미국이 유엔 회비를 전액 지불할지, 정시에 지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불렸다. 그와 함께 조 바이든(Joe Biden) 상원의원은 UN에 전액을 지불 하기 위한 전제로 다양한 “기준들”을 준수하도록 압박하는 협상을 1997년 타결했다. 여기에는 불가피한 UN 직원의 감축, 감찰관과 사무총장 간의 적절한 보고 절차, 타 기관에 대한 자금지원 금지 항목이 포함됐다. 2000년 1월, 헬름스 의원은 수 십 년간 의심해왔던 조직인 이른바 그림자 정부에 대해 충고하고, 참견하며, 잘난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UN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연설에서 독특한 인상을 준 한 미국 의원을 경험하는데, 그는 당시 UN 주재 미국대사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이었다. 유엔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면서, 그의 목적은 이 기구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빚쟁이”가 한 것으로 간주하는 비평가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엔의 최대 공여자인 미국 국민의 대표로서, 우리는 투자에 대한 대가로 구체적 개혁을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라고 공언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등장으로 미국의 자금과 유엔 운영비 사이의 훈훈한 협상의 새 장이 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사회복지 사업, 의료 및 교육 부문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는 이 조치의 타당성을 확신했다.

“이 기구는 부패했고 비효율적이며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18년 예산안에는 유엔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미국 자금의 절반을 삭감하는 조치도 포함됐는데, 이는 특히 기후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연방의회는 유엔평화유지활동 기부금 상한제 시행 안건에 동의했다.) 이와 같이 자금지원을 중단하여 유엔 기관들을 위협하고 압박을 가하는 사례는 여전히 미국의 관행으로 남아있다.

현재 회원국들이 유엔에 지불해야 하는 13억 달러 상당 중 미국이 체납한 금액은 10억 달러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불량한 수치의 누적은 미국이 다른 회원국들에 불만을 토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6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사무총장은 5차 위원회의 예산 감독관들에게 급여와 물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명성과 운영 능력에 있어서 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모든 회원국들이 분담비를 모두 제 때 지급하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금을 적소에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유엔은 5월 말까지 4억9200만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파국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하느냐가 앞으로 수 년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상황은 예상대로 악화됐다. 지난 10월 첫 주 월요일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10월말 현금 보유고가 고갈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유엔 사무국 소속 37,000명의 직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원국들이 2019년 유엔 정기 예산 운영에 필요한 금액의 70%만 지불했다. 이는 9월말 2억3000만 달러의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달 말까지 예비 유동자산 보유고가 고갈될 위험에 처했다.”

재정긴축 조치가 내려졌다. 컨퍼런스와 회의가 연기되고 있으며,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출장도 취소됐다. 유엔 대변인 스테판 두자릭(Stéphane Dujarric)은 회원국들에 압력을 가하며, 193개국 중 129개 회원국만이 “전 세계적으로 운영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채무 불이행을 방지하기 위해 연간 분담금을 전액 지불했다”고 밝혔다. 유엔의 의미와 영향은 회원국들에 달려있으므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세계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확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리서치, 2019.10.11.

비노이 캄프마크(Binoy Kampmark)

케임브리지 셀윈 대학의 영연방 학자. 현재 멜버른 RMIT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글로벌리서치 및 아시아-태평양 리서치의 기고자로 활동 중이다.

 

More info.

추가 정보

심 심 위스곳(Sim Sim Wissgott), UN 분석가.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10월 중 유엔의 재정이 고갈되고 있으며, 11월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려면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고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가 어떻게 현금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일까? 유엔의 재정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그리고 왜 허리끈을 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누가 유엔에 돈을 지불하는가? 193개 회원국은 모두 각 국가의 규모와 경제력에 따라 산출된 유엔의 전반적인 운용을 위한 연간 분담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다. 2019년 총 분담금은 28억5000만 달러로, 미국의 분담금(약 6억7420만 달러)이 가장 많이 책정됐으며 바누아투, 미크로네시아, 소말리아, 벨리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과 같이 국가의 규모가 작거나 빈곤한 경우 각각 최소 2만7883달러 만을 부담했다.

유엔의 재정 규칙 및 규정에 따르면, 이 자금은 해당 국가들이 그 해의 분담금을 통보 받은 후 “30일 이내 전액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매해 지급 기한은 1월 31일이었다. 하지만 기한을 준수하는 회원국은 단 몇 십 개 국가들뿐이다. 2019년 10월 8일 현재, 유엔은 여전히 분담금의 약 30%에 해당하는 63개국의 기금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의 전년도 미지급 연회비마저도 연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이번 주,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우리는 급여를 충당할 현금이 부족한 채로 11월을 맞이할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며 국가들에 회비 지급을 촉구했다. 유엔이 10년 만에 가장 큰 적자를 기록하며 “우리의 업무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고 덧붙였다.

그 돈은 어디에 쓰이는가?

유엔의 정기 예산은 뉴욕의 유엔 본부뿐만 아니라 비엔나, 나이로비,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통신과 정치, 인도주의 및 경제 업무 등을 운용하는 데 쓰인다. 르완다, 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평화유지 활동 및 국제 재판소는 별도의 예산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현재의 적자 상황을 “유엔이 직면한 최악의 재정 위기”로 표현했으며, 이는 공석을 채우지 않고, 필수적인 출장인 경우만 허용하고, 회의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은 돈에서 자금을 빌려야 할 수도 있다. 유엔은 전 세계 4개 주요 센터와 아프가니스탄, 말리, 아이티의 현장 사무소에 3만7500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유니세프, 유엔난민고등판무관과 같은 유엔 기관들은 자체 예산을 가지고 있다.

스테판 두자릭(Stephane Dujarric) 대변인에 따르면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올해 초 이미 상당한 수준의 비용절감 조치를 시작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유엔은 현재 약 6억 달러의 적자로 인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주요 연례 행사인 지난 달 총회를 개최할 수 없었을 것이다. 9월 말, 유엔의 적자는 2억3000만 달러였다.

브라질, 한국,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은 분담 지급을 미루고 있다. 특히 유엔 총 예산의 3분의 1을 지급하는 상위 6개 회원국 중에는 미국만이 2019년 분담금을 전액 지불하지 않았다. .

뿐만 아니라 각종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금년 분 4억 달러에 육박하는 체납금을 포함하여 지급해야 할 총 납입액은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유엔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해온 것에 오랫동안 불평해왔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자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지난 해 유엔총회에서 “세계주의의 이념을 거부하고 애국주의 원칙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지난 달 그는 세계 정상들에 “모든 파트너들이 공정한 몫의 방위비 및 기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유네스코(UNESCO)의 반 이스라엘 성향 및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과 함께 “증가하는 체납금”을 언급하며, 유엔 산하 교육문화기구인 유네스코를 탈퇴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해야 했던 “과도한 분담”에 대해 불평하며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유엔 프로그램인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와 낙태 관련 유엔인구기금(UNFPA)에 대한 지원을 삭감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첫 주 수요일 트위터에 “그러니까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하라!”는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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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라는 시스템이 언제부터 전체주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자리를 잡았는지 정확한 그 시점은 알 수 없다. 또한, 인류 보편의 권리라는 “자유”, 그리고 “번영”이 어찌하여 자본주의가 독점하는 가치가 되었는지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적어도 라틴아메리카 국가 대부분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태생적으로 잉태할 수밖에 없는 것임에도 말이다.

풍요로운 소수와 다수의 빈곤층이 겹겹이 만들어내는 그 사회적 관계망들은 흔히 우리가 일컫는 “불평등”이라는 개념으로는 부족한 현대판 봉건사회를 구축하였으니, 이른바 ‘자유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신분질서가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라틴아메리카의 굴곡진 근현대사가 시작되었다.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는 19세기 초반 유럽으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국가 대부분은 이후 미국 자본주의가 성장하기 위한 가장 ‘모범적’인 시장이자 원자재 공급을 위한 수탈과 착취의 대륙이었다. 물론 이 같은 종속 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지역 내 매판 자본가와 지배계급들의 ‘공조’를 필요로 했음은 물론이다.

민중적 기반이 취약한 라틴아메리카 내 흔히 ‘백인’ 혈통의 기득권 세력들은 미국 지배계급과의 동맹을 이용하는 것 외에는 자국의 위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능력 따위는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현재 베네수엘라의 사태가 이를 증명하고 남음이다. 1954년 과테말라, 1973년 칠레, 그리고 1980년대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지원 등 이외에도 수많은 국가 들에서 자국의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고 친 민중적 국가개혁을 추진하던 정부들이 대부분 미국의 노골적인 방해와 군사개입으로 전복되었다.

라틴아메리카 지역 내 쿠바 사회주의가 갖는 의미는 그 체제가 여타 다른 자본주의 사회보다 우월하다거나 이상적이라는 ‘과장된’ 감성적 연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쿠바 사회는 분명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과는 구별되는 다양한 층위의 사회문화적 단면들이 존재한다. 쿠바 기층 민중들이 만들어내는 그들의 삶이고 존재 방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쿠바 지역사회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표현하는 일례를 들어볼까 한다. 쿠바인들의 평범한 일상이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자 많은 승객으로 촘촘한 콩나물시루를 연상케 하는 버스에서 일어나는 풍경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한국 사회의 분위기와 빗대어 이야기를 해보면 이렇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물론 예전과는 다소 다른 온도가 감지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문화에 익숙한 평범한 개인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할아버지에게 자리를 양보받는다면? 그리고 나는 아이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면? 버스를 타는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쿠바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와 사회적 합의가 아주 자연스럽고 응집 적으로 표현되는 일상을 포착한 순간이다.

우선 사회적 약자를 규정하는 방식이다. 임산부와 어린아이, 혹은 아이를 동반하고 있는 어른은 가장 배려해야 하는 ‘약자’이다. 그들이 약자인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기에는 여성을 향한 배려도 포함된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나이가 많은 노인이라는 점보다 남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종종 여성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선보인다.

임산부와 아이가 버스에 오른다. 쿠바의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다. 버스 안은 이미 겹겹이 밀착을 이룬 사람들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미국의 제재가 한 단계 더 높아지면서 버스의 운행횟수가 급격히 줄었기에, 상황이 호전되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라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종종 너무 많은 사람의 틈에서 임산부라는 사실이 간혹 쉽게 식별되지 않는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주위의 사람들이 임산부가 버스에 올랐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리면서 그녀는 좌석을 양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동행하거나 안고 버스에 오르는 남성 어른도 이는 마찬가지다. 임산부와 어린아이를 외면할 수 있는 승객은 없어 보인다. 과거 한국 사회에서 노인들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쏟아졌던 따가운 시선 못지않은 ‘응징’의 사회적 시선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을 테니까.

간혹 주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다면 임산부 당사자는 아주 ‘당당히’ 요구하는 모습도 흔하다. “임산부인데 자리 좀 부탁해요!”. 그러면 주위에 함께 서 있던 승객들은 함께 외쳐주기도 한다. “여기 임산부가 있어요!”. 이 같은 광경에 주위 누구도 눈살을 찌푸리지 않는다. 언제나 쿠바의 만원 버스에서 좌석을 잡고 앉는 일도 쉽지 않지만, 그 와중에 선뜻 자리를 양보하는 쿠바인들의 배려심이 흐뭇하다. 한국에서 노인들에게 좌석을 선뜻 양보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는 외국인들의 경험담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임산부에 대한 배려는 사회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은행, 상점, 병원은 물론 순서를 기다리며 줄을 서야 하는 모든 곳에서 그녀들은 배려와 양보를 받는다. 이를 싫어하거나 불편해하는 내색이 쿠바인들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는 모습들이다. 버스에 오르내리기 위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우리의 모습은 온 간데없다. 일단 버스에 오른 이상 출근이 늦어지지 않을 것이며, 무사히 등교할 수 있고, 약속 장소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쿠바의 만원 버스가 특별한 이유는 라틴아메리카 어느 나라에서도 이처럼 사람들과 ‘밀착’된 생활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외국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물론 자국민들이 공공재인 대중교통을 아무 거리낌 없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는 국가는 단연코 없다. 양극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긴장감은 주변의 인물들이 나의 이웃이 아니라 ‘잠재적’인 범죄자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버스와 같은 대중교통은 자가 교통수단이 없는 기층 민중들이 일상적인 ‘위험’을 감수하며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제로 거리에서는 출퇴근이나 등하굣길, 그리고 연인을 만나러 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일상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지표가 곧 그 사회의 문화, 가치, 상식의 잣대가 되는 지금, 그래서 경제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믿음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는 이상 ‘저개발’ 혹은 제 3세계 쿠바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잠시 고민해 볼 대목이다.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라는 그 ‘유명한’ 정치 슬로건이 마치 세상 진리인 양 비판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경제만 좋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맹신이 ‘철학의 빈곤’을 끊임없이 양산한다. 그렇게 제 1세계의 그럴듯한 하드웨어는 그 사회가 내포하는 내적 가치와 상식, 문화들이 덩달아 과대평가 받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쿠바가 못내 못마땅하여 호시탐탐 ‘붕괴’의 가능성을 노리는 북쪽의 ‘이웃’에게. 미국의 사회적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합의된 가치나 기준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약자를 대하는 사회의 배려와 양보는 아닌 것 같다는 나름의 판단이다. 최첨단 의료 장비와 시설을 갖춘 제 1세계의 대표주자 격인 미국에서는 수천만 명의 미국인들은 접근도 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이며, 잘린 두 개의 손가락 중 하나만을 선택해서 봉합해야 하는 미국의 의료 제도를 고발한 마이클 무어의 유명한 다큐멘터리 “시코”는 크게 과장되지 않은 현실임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다.

그럴듯한 미국의 경제적 위상은 한편으로 자국민 개인이 소유한 자본 능력에 따라 차별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체제를 단번에 구축해 냈다. 의료 영리병원이 미국에 이식된 결과이며, 대한민국 제주도에서 진행하려 했던 의료 영리병원 설립은 그 첫 단계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이다.

낙후된 만원 버스를 타야 하는 쿠바이지만 그럴듯한 하드웨어를 갖춘 미국보다야 더욱 그럴듯해 보이는 사회적 가치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전히 쿠바의 만원 버스가 종종 힘에 부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작은 공간에서 드러나는 쿠바의 사회적 공감대에 시선이 놓여 있는 한 나의 ‘투덜거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렇게 고된 하루가 지나고 초저녁이 되면 쿠바 사람들은 집 앞의 준비된 의자와 발코니에 나와 앞집, 옆집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가끔 청년들은 야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한적한 오후를 보내는 쿠바 지역사회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사회가 내재하고 있는 무궁한 잠재력은 그럴듯한 인프라와 최첨단 시설로부터가 아니라, 그 에 앞서 사회의 공동체가 “사람”을 우선하는 가치와 합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쿠바의 의료시설이 열악하다는 사실로부터 쿠바의 의료체계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혹자들을 향한 일갈이기도 하다.

화, 2020/02/0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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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에서 연말까지 4개월간, 남북 유엔 동시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숨 가쁘게 이루어졌다. 이렇듯 양국체제를 향해 열리는 듯했던 문은 이듬해인 1992년부터 급속히 닫히고 만다. 그리고 1993~1994년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에 빠진다. 특히 1994년 5~6월은 한반도가 6·25 전쟁 이후 전쟁 발발에 가장 가까이 갔다는 순간이었다.14 전쟁 시뮬레이션은 엄청난 인명피해와 전쟁비용을 예고했고 북미는 충돌 직전에 가까스로 돌진을 멈췄다. 그 결과가 1994년의 북미 간 제네바 합의였다. 그러나 이미 남북 간, 북미 간의 적대와 불신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높아져 있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의 정신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양국체제로 가는 문은 다시금 굳게 닫히고 말았다. 이후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의 남북 정상회담도 이 상태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대반전의 기류가 본격적으로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였다. 우선 소련·동구권 해체 이후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 대북정책의 본심이 분명히 드러났던 때가 1992년 1월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북의 노동당 국제비서 김용순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 국무부 차관 아널드 캔터를 만난 자리에서 밝혀졌다. 당시 북은 1991년 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까지 합의한 후 이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 의중을 밝힌 것이 1992년 1월 미국을 방문한 김용순의 발언이었다.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북미 수교를 하자”는 요구였다.15 김용순은 김정일의 오른팔로 알려진 인물로, 김일성 – 김정일의 의사를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동안 주장해왔던 미군 철수를 내리고 대신 북미 수교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는 북의 대남 전략이 통일에서 공존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신호였고, 이를 미국에 분명히 표명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북미 수교를 하자는 것은 앞으로 한국 역시 정식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의도의 표현으로 읽힌다. 북미 수교의 제안에는 한국과도 정식 수교관계를 맺고 공존하겠다는 뜻이 깔려 있었다. 앞서 동서독 동방정책 사례에서 미국과 동독의 수교(1974년)가 동서독이 양국체제로 가는 데 중요한 징검다리였음을 확인한 바 있는데, 남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북은 1990년의 독일이 아니라, 1972년(<동서독기본조약>), 1974년(미국 – 동독 수교)의 독일을 보면서 정책 전환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김용순의 제안을 미국은 거부했다. 미국은 한국만을 인정할 뿐, 북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소련·동구권 해체 이후 미국의 한반도, 대북정책의 본심을 처음으로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류는 92년 이전부터 물밑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이미 89년 동구권 붕괴 직후부터 북(DPRK)은 루마니아와 같이 곧 붕괴할 것이며, 한국 정부의 북방정책은 망해가는 북을 연명시키고 있을 뿐이라는 분석과 주장이 미국과 한국의 정보라인으로부터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었다.16 미국과 한국의 대북 강경세력은 애초부터 북을 인정할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위기를 조성하여 북을 붕괴시키는 시나리오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후 30년 동안 한반도에 신냉전 기조를 유지하게 했던 ‘북한붕괴론 – 흡수통일론’이 여기서 나왔다.17 그러한 의중을 보여주는 첫 신호는 1991년 2월 미국의 북 핵 개발 의혹 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미국 측의 조사에 의해 확인된 바, 당시 북의 핵 개발 준비 상태는 현실적인 위협이 전혀 되지 못하는 매우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다.18 의혹 제기의 목적은 핵위협의 실제성이 아니라 이를 빌미로 북과의 관계 정상화를 거부하고 여러 제재와 압박으로 묶어두기 위함에 있었다. 그 의도가 1년 후 김용순의 방미 때 분명히 드러났던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의중은 먼저 한국의 주류 언론사들의 과장된 보도를 타고 한국 여론에 확산되어갔다. 북핵 의혹이 제기된 1991년에는 남북 정부 당사자 간에 대화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는데, 한국 측 대표단에게도 미국 측 ‘전문가’와 ‘정보요원’들이 한국의 대북 협상대표단을 수시로 방문하여 북핵 상황에 대해 “교육하다시피 설명”했다고 한다.19 북핵 정보를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협상 대표단은 이 ‘교육’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91년까지는 남북 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북핵 의혹’이 결국 진행 중인 모든 변화를 정지시킬 거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1992년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이 결정되고, 한국에 배치된 미국 핵무기 철수가 이뤄졌으며, 북이 강제사찰을 제외한 일반 핵사찰을 수용하면서 연말에는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이뤄져 핵의혹 문제도 봉합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동은 1992년부터 걸리기 시작했다. 당시 남북 협상단의 주요 인물 중 한 사람인 임동원의 회고에 의하면 남북 대화의 주 통로였던 남북 고위급회담은 1992년 초 <남북기본합의서>의 부속합의서 작성 단계에서부터 “우리 측의 지연전술”에 들어가 결국 그해 연말에 파탄에 이른다. 지연전술의 주역은 시종 안기부 비선이었는데, 그 방법은 주로 강경한 핵사찰 요구를 내세워 최종 합의를 불발·지연시키는 것이었다.20 결국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 간 합의·채택되기는 했으나 남쪽에서는 국회 비준을 얻지 못했고, 부속합의서 작성에도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채택 후 1년도 못 되어 실행도 못하고 사문화되어버린 셈이다.

이 남북 대화 지연전술 또는 방해공작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유명한 1992년 9월의 ‘대통령 훈령 조작 사건’이었다. 당시 8차 고위급회담차 평양으로 간 한국 측 대표단은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난번 회담에서 성사되지 못한 ‘이산가족방문단 교환방문’을 이번에는 일부 양보를 하더라도 반드시 성사시키라는 당부를 받았다. 협상은 잘되어 장기수 이인모 씨를 송환해주는 조건으로 이산가족 교환방문은 합의되었다. 그러나 이 합의에 대해 청와대에 훈령을 다시 확인해보자는 의견이 제시되어 야밤에 훈령 요청 전문을 보냈는데, 새벽에 온 답신은 이상하게도 이 합의를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대표단의 서울 귀경 후 이 훈령에 의문이 제기되었고 내부 조사가 이뤄졌는데,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평양에서 보낸 대표부 훈령 요청 전문을 안기부가 서울에서 받아 청와대에 보내지 않고 자체 접수하였고, 안기부 독단으로 합의를 취소하라는 가짜 훈령을 평양의 대표단에 보냈던 것이다.21 이 놀라운 사건은 당시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가 훈령 조작을 주도했던 안기부 특보와 서울에서 조작 훈령을 보낸 안기부장 두 사람의 경질로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1992년은 노태우 정부의 임기 마지막 해였다. 12월이면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차기 권력의 의중이 안기부 비선을 통해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여당인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는 이 해 5월에 확정된 김영삼 씨였다. 김영삼 후보 진영은 남북 대화의 순조로운 지속이 대선의 야당 후보인 김대중 씨에게 유리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남북회담을 그렇듯 지연시키고 방해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김영삼 후보의 선거캠프에는 북한붕괴론 – 흡수통일론을 믿고 전파하는 세력이 집결해 있었다. 1987년의 민주화운동을 대표했던 김대중, 김영삼 두 정치인의 이러한 대립은 이미 87년 12월 대선 당시 두 김 씨의 분열에서부터 예견되었던 것이다. 대선에서 양 김씨는 승리를 당시 노태우 후보에게 헌납했고, 1990년 김영삼 씨는 3당 합당을 통해 옛 군사독재 세력과 합치고 말았다. 이로써 87 민주화 세력은 양분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절반이 신냉전·흡수통일 진영으로 합류해버린 것이다. 이후 2016년 말 촛불혁명 때까지 한국 정치를 지배했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렇게 성립되었다.

1992년 초 미국은 북의 수교 제안을 거부했고, 가을에는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그 한 해 중지했던 팀스프리트 훈련을 1993년에는 재개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여기에 더해 1993년 3월에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의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청했다. 북의 모든 군사시설을 요구하는 대로 다 보여 달라는 것이다.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고 판단한 북은 며칠 후인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해버린다.22 이제는 아예 내놓고 핵무기 개발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초강수 대응이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에 화해의 신호를 보냈지만 그 신호가 북의 NPT 탈퇴라는 초강수로 돌아오자 곧바로 강경대응으로 돌아선다. 북미, 남북 간 위협이 오가면서 적대적 갈등이 급속도로 높아졌다. 1994년 6월 북폭 일보 직전까지 상황은 흘러갔다. 적대와 불신은 북방정책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갔다. 아니, 6·25 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북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체제 존립에 위기감을 느낄수록, 북은 필사적으로 핵 개발에 몰두했다. 이후 1998~2007년 민주정부 10년도, 2003~2007년 6자회담 4년도 이 상황을 돌이킬 수 없었다.

 

첫 번째 양국체제 시도가 실패했던 원인은 무엇인가

코리아 양국체제는 여러 초대형 사건들이 중첩되면서 모종의 불가사의한 힘의 작용에 의해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첫걸음이 이렇듯 짧은 시간에 좌절되고 말았던 이유가 무엇일까? ‘코리아 양국체제의 성패’에 초점을 맞추고 그 전후 관계를 밝히는 시각에서 발견적 질문(heuristic question)은 다음과 같다. 양국체제의 첫 열림을 주도했던 힘, 행위자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 힘, 그리고 그 주도행위자는 87년 민주항쟁, 88년 서울 올림픽, 89~91년 소련·동구권 해체 등의 대형 사건들에 어떤 방식으로 대응했는가? 양국체제의 성취와 실패는 그 과정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났는가?

먼저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국체제의 첫 시도가 단기간에 실패로 마감됐던 핵심적인 이유는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양국체제로의 전환을 이끌어간 내부 주도 역량의 한계다. 그 한계의 배경에는 87년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 역량의 분열이라는 뼈아픈 변수가 있다. 이 분열은 양국체제의 출발을 불안정하게 했고, 이후 체제전환을 지속해 나갈 힘을 크게 약화시켰다. 두 번째는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 북이 느끼는 체제 위협이 커짐에 따라 발생한 북핵문제다. 이로 인해 북미, 남북 간 높아진 적대적 긴장은 양국체제의 동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결국 이 두 가지 원인이 결합되어 양국체제의 첫 시도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종결되고 말았다.

우선 코리아 양국체제의 첫 시도가 냉전대결 세력에서 파생한 노태우 정부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태생적 한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노태우 정부는 운이 좋았다. 87년 민주항쟁 이후 야권이 분열해주어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고, 취임 첫해에 열린 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과 중국 그리고 거의 모든 동구권 국가들이 참석했다. 임기 초반부터 북에 대해 대담한 화해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자신감의 배경이었다. 화해정책의 배경에는 돌이키기 어려운 87년 민주화의 대세에 순응할 필요, 30퍼센트대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된 취약한 정당성을 대북정책의 성과로 만회해보려는 내부 정치적 요인 역시 강하게 작용했다.23 노태우 정부의 대북정책은 의외의 사건들의 연속에서 자기진화한 것이었다. 원래 ‘북방정책’은 전두환 대통령 시기 기안된 것으로 애초에는 동구권 수교를 확대하여 북을 고립시키려는 냉전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올림픽 개최의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과 남북 화해를 적극적으로 표방했고 89년 초부터는 남북 간 예비회담이 시작될 수 있었다. 같은 해 9월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국회에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하였는데, 이 ‘방안’은 서독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과 1972년의 <동서독기본조약>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24 애초에 냉전적 사고에서 출발했던 ‘북방정책’이 사건의 흐름 속에서 탈냉전적인 ‘동방정책’을 조금씩 닮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다 같은 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구권 붕괴라는 엄청난 사건이 이어졌다. 한국과 소련, 중국, 동구권과의 수교라는 애초의 목적이 놀라운 속도로 달성되었다. 외교상의 우위를 이뤘다고 생각한 노태우 정부는 이제 북에 대한 화해정책을 통해서도 남이 주도하는 통일로 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면서 남북 양측 모두에서 ‘상대의 인정’이라는 필요가 생겼고, 이 필요들이 서로 확인되었기에,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라는 ‘사건’은 비로소 가능했다. 노태우 정부의 자기 동력 때문이라기보다는 큰 사건들의 흐름 속에서 남북화해정책이 자기진화를 한 셈이다.

그러나 이렇듯 행운이 겹치면서 정책의 자기진화는 이루었으나, 그렇듯 형성된 양국체제의 싹을 지키고 키워낼 힘은 노태우 정부에 없었다. 노태우 정부의 정치기반인 민정당과 정치 군부는 냉전대결 체제의 기득권을 가장 강하게 대변하는 세력이었다. 이 세력은 올림픽 성공과 동구권 붕괴라는 유리한 사건이 이어질 때는 잠시 관망하는 듯했지만, 곧 북한붕괴론과 북핵위협론을 들고 나와 남북화해정책을 흔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맞서 장기적 화해정책을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밀고 나갈 만한 세력은 노태우 정부와 여권 내에 극히 미약했다. 이런 상태에서 북미 관계 정상화를 중재하고 이끌 역량은 전혀 기대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더하여 3당 합당을 통해 합류하여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김영삼 후보 진영이 북한붕괴론과 북핵위협론 진영에 합류함으로써 화해정책을 밀고 나갈 힘은 여권 내에서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그 결과 노태우 정부의 마지막 1년은 그 이전에 이뤄진 화해정책의 성과가 모두 유실되는 시간이 되고 말았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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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2/0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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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과 국회 공무원

소위원장 〇〇〇 아니, 〇〇〇 위원님 말씀하신 그것…….

수석전문위원 〇〇〇 그것은 우리가 자료 받은 게 없잖아.

소위원장 〇〇〇 전자문서로 뽑을 수 있는 것 아니예요?

수석전문위원 〇〇〇 그것 뽑는 것밖에 없는 거지…….

소위원장 〇〇〇 그러니까 공문 보낸 것을 달라고요.

17대 국회의 어느 상임위 소위원회 회의록에서 발췌한 기록이다.

잘 알다시피 수석전문위원은 국회 공무원이고 소위원장은 국회의원이다. 그런데 위의 속기록을 보면, 수석전문위원은 약간 반말 투다. 이 속기록의 상황을 일반적 시각으로 본다면, 수석전문위원의 ‘위상’이 더 높아 보이고, 최소한 동등한 위상이다.

한편 다음의 또 다른 소위원회 회의록에서도 수석전문위원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OOO 위원 지금 수정안대로 하게 되면 기재부의 의견을 충분히 참작하는 것 아니예요? 그래서 수정안대로 하면 기재부에서…….

수석전문위원 OOO 기재부 의견은 저희가 여기 비고에 적시한 것처럼 이걸 적극적으로 다 수용한다 그런 정도의 입장은 아니고요. 교육부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한번 기재부하고 협의한 사항이 있으면 말씀을 해주시지요.

OOO 위원 저도 잠깐만 말씀…….

OOO 위원 아니, 저도 질문 다 안 끝났는데요.

수석전문위원은 회의를 주재하다시피하며 의원의 발언을 중간에 끊기도 하고, 심지어 교육부와 기재부 등 정부 부처들까지 아우르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국회 전문위원은 비단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예산과 결산에 대한 ‘검토보고’도 수행한다. 예·결산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의 이 검토보고는 법안에 대한 검토보고보다 그 위력이 보다 강하게 발휘된다. 그런 이유로 위의 사례처럼 거의 독주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관련 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행정부처 피심사기관들은 대체로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수용’하는 자세로 심사에 응한다.

 

전두환에 의해 명문화된 검토보고, ‘국회 무력화의 의도

이렇듯 국회 입법공무원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그 위상을 높게 만든 것은 바로 ‘검토보고’라는 제도 때문이다.

다른 나라 의회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이 ‘검토보고’ 제도는 도대체 어떻게 우리 국회에 출현하게 되었을까?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을 ‘검토’하는 이 제도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의 국회법 규정에는 “위원회는 회부안건을 심사함에 있어서 먼저 그 취지의 설명을 듣고”라고 하여 검토보고의 주체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 조항이 지금 국회처럼 완전히 국회공무원의 권한으로 공식화된 것은 바로 1980년 전두환 국보위(국가보위입법회의) 때였다. 전두환 군사정권은 권력을 장악한 뒤 이른바 국보위의 ‘선거법등 정치관계법 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고, 이 조직은 1981년 1월 22일에 회의를 개최하고는 국회법을 전면 개정했다. 여기에서 국회법 제56조 (위원회의 심사) 조항은 “위원회는 회부안건을 심사함에 있어서 먼저 그 취지의 설명과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듣고”라고 둔갑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제도는 명문 규정으로 전환되었다.

당시의 회의록을 보면, 국회법개정의 목표와 기본방향에 대하여 “비리와 선동과 당리당략을 일삼는 정치폐습에서 탈피하여”라고 되어 있고, 개정의 ‘주요 골자’에서는 “직업정치인의 독무대화 현상을 배제하고 전문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유능 신인의 국정참여 기회를 부여할 수 있도록”이라고 밝히고 있다.

전두환 군사정권이 이 제도를 추진한 목적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국회의 무력화와 순치(馴致)’였다. 즉, ‘구 정치질서’를 극도로 혐오한 전두환 신군부 측이 관료를 수단으로 하여 자신들의 의도대로 국회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통제하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추진한 것이었다.

 

유신에 의해 국회의원의 전문위원 선발권 뺏겨

현재 국회 전문위원은 국회 사무총장이 사실상 임명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래 국회 전문위원은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이 선발했었다. 하지만 그러한 제도는 박정희 유신 정권에 의하여 완전히 뒤바뀌었다.

1972년 12월 27일, 이른바 유신헌법으로 장기집권 체제의 근거를 만든 유신 정권은 곧이어 1973년 2월 7일, 국회법을 개정하였다. 이 개정에서 “전문위원은 당해 상임위원회의 제청으로 의장이 임명한다.”는 국회법 제42조 제2항 규정을 “전문위원은 사무총장의 제청으로 의장이 임명한다.”는 규정으로 바꿔놓았다.

이로써 상임위원회 활동에 필요한 ‘전문적인’ 인물을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이 논의하여 선임하던 제도를 여당 임명직인 국회 사무총장이 임명하도록 되었다. 이는 국회 전문위원에 대한 상임위원회 의원의 선출권을 없애고 독재 권력에 의한 입법권 장악을 제도화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전문위원으로는 거의 행정부 관료로 충원함으로써 국회에 대한 통제를 확실하게 강화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치는 뒷날 1981년 전두환의 국보위에 의한 전문위원 검토보고제 규정의 명문화와 결합되어 전문위원에 대한 국회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만들고, 관료를 매개로 하여 의원들의 입법권을 사실상 무력화했다는 점에서 우리 국회 운영을 근본적으로 왜곡시킨 결정적 장면이었다.

 

검토보고제가 있는 한, 정상적 국회를 기대하기 어렵다

세계 어느 나라 의회에도 우리 국회처럼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반드시 국회 공무원의 검토를 받아야 한다는 ‘본말전도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충실하게’ 모방하고 있는 일본 국회에서도 전혀 그렇지 않다. 일본 국회는 상임위 법률 심의에서 가장 먼저 법률안 취지에 대한 설명을 청취하게 된다. 이때 의원이 발의한 법률안은 발의자 혹은 제출자의 취지설명으로부터 시작되며, 이 과정에서 증인의 증언, 참고인의 의견 청취가 가능하고 보고서 및 기록 등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다. 그 뒤 그 의원과 1문 1답의 질의를 진행하고, 질의가 끝나면 토론에 들어가는데, 1인이라도 수정동의를 제출할 수 있다.

또 흔히 우리가 쉽게 정치 후진국이라고 과소평가하고 있는 타이완에서도 입법원의 <입법원직권행사법> 제8조(제1독회 절차)는 “입법위원이 제출한 의안은 제안자가 취지를 설명한 뒤 대체토론을 거쳐 심사 혹은 제2독으로 넘기거나 혹은 기각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단 한번이라도 눈을 감고서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한다. 도대체 왜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검토’가 필요한 것인가?

본래 입법권이라는 직책은 당연히 국회의원들의 필수 임무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바로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들이 선출한 것이며, 국회의 존재 이유다. 그것은 의사가 본인이 아니라 사무장이나 다른 사람에게 치료를 시키는 것과 같고, 판사가 다른 사람에게 재판을 맡기는 것과 같다. 이래서는 언필칭 의사라고 할 수 없고 판사라 부를 수 없으며, 그야말로 ‘가짜 병원’이고 ‘가짜 재판’이다.

이와 전적으로 동일한 논리로 자기의 일, 즉, 본업을 하지 않는 국회의원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르기 어렵고 의회라 칭하기 민망하다. 국회가 국회답지 못하고 정당이 정당답지 못하며, 이러한 조건에서는 결코 의회다운 의회, 정치다운 정치가 존재할 수 없다.

 

변이(變異)된 국회, 변종(變種)된 국회의원

실제 어느 나라 의회든 의원이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입법 활동과 그와 관련된 토론과 논의 그리고 연구, 조사 등에 대부분의 시간을 투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이 곧 의원의 ‘본업’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국회의 경우에는 전혀 이와 다르다. 입법 과정의 대부분을 공무원이 ‘대리’한다. 겉모양만 의회이고 무늬만 의원이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변이(變異)된 국회, 변종(變種)된 국회의원이다.

필자에게 한 의원은 사석에서 자신이 유럽 국가들의 의회를 방문했을 때 그곳 의원들이 모두 소형차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평소 법안과 정책 연구 조사에 몰두하지 않으면 매일같이 이어지는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의원들 간의 토론이 진행될 때 크게 망신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 의원들처럼 지역구 관리에 몰두할 시간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 의원은 그럼에도 연봉은 우리 국회가 몇 배나 많다고 실토하였다.

정의당 김종대 의원도 2018년 5월 폴란드에서 열린 나토(NATO) 의원 총회 참석했을 때 크게 놀랐다고 증언하고 있다. “300명에 달하는 미국과 유럽 의원들의 진지함과 박식함에 놀랐다. 외국의 국회의원들은 보좌관 없이 그 전문적인 내용을 실무자처럼 토론했다.”(“배지 달고 2년만 지나면 국회의원이 멍청해지는 이유”, 「오마이뉴스」 2018년 7월 4일.)

화, 2020/02/11-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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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양국체제 시도의 실패는 양국체제의 첫 문을 냉전대결 세력의 한 분파가 열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태생적 한계에서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석 수준을 한 단계 심화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그 한계를 짚어보는 데 그치지 않고, 이 ‘한계’를 뒤집어 이렇듯 진행된 실패 과정 이면(裏面)의 가능성까지를 분석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뒤집어 읽기, 심화된 분석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만일 노태우 정부가 아닌 87년 민주항쟁의 힘을 온전히 받은 민주정부가 양국체제의 첫 문을 열었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이는 물론 87년 말의 대통령 선거에서 야권 분열이 없었다면 가능했던 일이다. 이러한 가정은 단순한 역사적 흥밋거리가 아니라 양국체제로 전환하는 성패의 조건을 보다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이다.

역사적 가정의 방법론적 유효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왜 꼭 “만일 노태우 정부가 아닌 87년 민주항쟁의 힘을 온전히 받은 민주정부가 양국체제의 첫 문을 열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인가? 예를 들어 ‘서울 올림픽이 소련, 중국, 동구권 등이 참가하지 않아 실패했더라면?’ 또는 ‘소련·동구권 붕괴가 없었더라면?’ 또는 ‘1988년 미국 대선에서 H.W. 부시 후보가 아닌 경쟁 상대인 민주당의 급진파 듀카키스 후보가 당선되었다면?’이라는 식의 다른 가정이 의문으로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뒤의 가정들은 앞의 가정보다 분석대상인 양국체제의 성패의 조건을 파악하는 데 그 유효성이 크게 떨어진다. 이유는 두 가지, 가정의 직결성과 범위 때문이다. 먼저 앞의 가정은 양국체제와 직결돼 있지만, 뒤의 가정은 양국체제와 직접 연관된 문제가 아니다. 둘째, 앞의 가정은 87년 한국이라는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상황에서 비롯되어서 가정에 따른 추정(counterfactual reasoning)의 설정이 통제범위 내에서 가능하지만, 뒤의 가정들은 가정의 시간과 공간의 범위가 너무 커서 추정을 통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만일 노태우 정부가 아닌 87년 민주항쟁의 힘을 온전히 받은 민주정부가 양국체제의 첫 문을 열었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라는 가정의 추론적 분석을 시작해보자. 먼저 87년 민주항쟁 이후 대선을 앞두고 야권과 민주화 진영은 분열하지 않고 힘을 모아 대선에 임한다. 그 결과 대선은 민주진영의 압승으로 끝나고 새로 들어선 민주정부의 정통성과 지지는 전례 없이 높았을 것이다. 압도적 지지 위에 선 새 정부는 과감한 남북화해정책을 펴고, 북은 바로 호응하여 나왔을 것이다. 그 결과 최소한 서울 올림픽에 북이 참가하거나 혹은 남북 공동개최까지도 가능할 수 있었고, 태극기와 인공기는 이때부터 남과 북에 동시에 게양되었을 것이다. 그 성과 위에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88년 내에 성사되었을 수 있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기초인 두 국가 정통성의 상호 인정이 이 과정을 통해 단단하게 다져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라면 89년 9월 이후의 동구권 붕괴의 여파가 북한붕괴론의 확산이 아니라 오히려 남북 화해의 가속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때 한국 정부는 소련,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북미, 북일 수교를 적극적으로 중재하는 입장에 섰을 것이다. 애초에 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의 H.W. 부시 정부 시기(1989~1993년)에 북미 수교가 이뤄지기는 어려웠겠지만, 한국의 적극적 중재 노력은 남북 간 이미 형성된 양국체제의 기초를 흔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이 별 근거 없이 제기한 북핵 의혹과 북한붕괴론 – 흡수통일론은 강력한 민주정부 시기의 한국에서 (노태우 정부 때처럼) 냉전유지를 바라는 세력의 과장된 반응을 일으키기 어려웠으리라. 그 결과 민주정부 버전의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훨씬 단단한 상호 신뢰의 기반 위에 이뤄졌을 것이다. 끝으로 87년 민주화의 단합된 성과인 민주정부의 성과를 이어받은 민주 세력은 다음 대선에서도 승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고, 민주정부 1기의 남북화해정책은 민주정부 2기에 의해 충실히 그리고 발전적으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의 양국체제 초기 버전이 임기 말년에 급속히 약화되고 곧이어 발생한 전쟁 위기로 양국체제의 동력이 급격히 고갈되어버린 사태가 발생할 이유가 없게 된다. 민주정부 1, 2기를 통해 남북관계는 상당히 안정된 양국체제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러한 상태에서라면 한국의 민주정부와 친화적이었을 미국 클린턴 정부 시기(1993~2001년) 초기부터 북미 관계가 대화 기조로 진입하여 클린턴 재임 중 북미 수교가 성사될 기회도 생겼을 것이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는 ‘북핵문제’도 ‘1993~1994년의 전쟁 위기’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2018년 6월의 북미 간 싱가포르 회담으로 분명해진 사실이지만, ‘북핵문제’가 발생했던 근원은 냉전 해체 이후에도 미국이 줄곧 북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북은 체제 보장과 대미협상력 강화를 위해 결국 핵 개발에 올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87년 한국에 강한 정통성을 가진 민주정부가 출범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하면 이후 북이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받는 체제 위협 요인이 현저히 감소함에 따라 북이 핵 개발에 필사적으로 올인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이상의 역사적 가정에 따른 분석은 코리아 양국체제의 안정적 성립요건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밑바탕에는 남북, 북미 간 적대적 긴장의 해소가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남북 모두 고도의 적대에 기반한 ‘비상국가체제’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남북 두 ‘비상국가체제’의 극한적 대치는 바로 ‘분단체제’ 작동의 핵심 동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남북의 ‘비상국가체제’를 작동 정지시킬 만큼의 강력한 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변화는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체제의 성격과 체제를 둘러싼 환경의 성격상 그렇듯 강력한 새로운 동력은 북이 아닌 남에서 발생할 개연성이 크고, 실제 역사가 그러했다. 1960년 4·19가 첫 번째 분출이었다. 4·19는 이승만 독재체제 즉 ‘비상국가체제’를 일시 작동 정지시켰다. 그러나 4·19는 세계 냉전체제가 강고했던 상황에서의 분출이었기에 양국체제로 이어질 계기를 찾을 수 없었다. 4·19의 남북 화해 움직임은 불과 1년 만에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사정부에 의해 압살되고 말았다. 두 번째 대분출이 87년의 민주대항쟁이었다. 이 힘은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비상국가체제’의 오랜 철벽통치를 크게 흔들어놓았을 뿐 아니라, 미소 냉전의 해체라는 세계사적 대전환과 맞물리면서 분단체제가 양국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을 최초로 열어주는 동력이 되었다. 앞서 보았듯 분출한 이 힘이 분열되거나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면, 남북 간 적대는 노태우 정부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폭으로 해소되고, 북미 적대도 마찬가지로 크게 완화되어, ‘북핵문제’ 자체가 발생할 소지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양국체제는 안정 궤도로 접어들 수 있었을 것이다.

양국체제의 요점은 한국(ROK)과 조선(DPRK)이 서로를 주권국가로서 인정하는 데 있다. 상대 체제에 대한 인정은 우선 자기 체제의 정당성에 대한 자신이 있어야 가능하다. 내부의 강한 지지가 있으므로 상대에 대한 인정을 자신 있게 밀고 갈 수 있다. 87년의 힘을 온전히 실은 민주정부였다면 그것이 가능했다. 노태우 정부는 요행히 그 길을 열기는 했으나 난관을 뚫고 밀고 나갈 힘은 없었다. ‘북한붕괴론’과 ‘서울불바다론’이 오가고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겪으면서 남북, 북미 간 불신과 적대의 골은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깊어졌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이렇듯 형성된 불신과 적대로 균형을 잃은 여론 지형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이렇듯 이미 기운 여론 지형을 바꿀 수 없었다. 민주화운동의 대의를 이은 민주정부임은 분명했지만 이미 87년의 지지와 열기의 절반이 빠진 후였다. 두 정부에서 두 번의 정상회담이 있었으나 북의 핵 개발과 핵실험은 그와 무관하게 진행되었고 이미 확산된 ‘북한붕괴론’은 ‘핵위협 – 퍼주기론’과 결합하여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렸다. 결국 두 정부의 대북사업 성과를 몽땅 원점으로 되돌리고 만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등장을 막을 수 없었다. 상황은 이제 87년 이전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촛불혁명이 없었다면 반드시 다시 한번 유신체제의 등장을 맞아야 했을 것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로의 전환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가 되었다

이 글 서두에서 “코리아 양국체제란 대한민국(ROK)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PRK) 두 나라가 주권국가로서 서로 인정하여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평화롭게 공존, 교류, 협력하는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 공존체제이다. 코리아 양국체제는 지난 70여 년 남북 간에 쌓이고 쌓인 적대와 불신을 완화하고 해소함으로써 평화적 통일로 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경로다”라고 했다. 지금껏 이 언명이 현실화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결론적으로 이상의 논의를 기초로 코리아 양국체제의 의미를 종합해보기로 한다.

분단 – 전쟁 – 정전 상태의 지난 70년, 남북은 시종 적대적 대결관계를 해소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에서 양측은 줄곧 통일을 주장해왔으나 그런 상태로 통일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우선 상대를 인정할 수 있어야 했다. 진정 하나가 되자 하면 먼저 서로 인정하는 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쟁까지 하면서 적대해왔던 상대를 인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 자신이, 그리고 서로가, 안팎으로 온전하고 정당하며 안정되게 서야 한다. 이 조건이 무르익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7~2018년 촛불혁명과 북핵 완성,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이라는, 각각이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세 요소가 한 시점에 합류하면서 그 조건이 무르익었다.

한국(ROK)의 촛불혁명은 4·19와 87년 민주항쟁이 미처 이루지 못했던 나라의 민주적 정통성의 필요충분조건을 비로소 충족시켰다. 4·19 직후 장면 정부와 87년 이후 노태우 정부는 필요조건은 갖췄으나 충분조건은 갖추지 못했다. 4·19는 세계 냉전의 한가운데서 발생하였으나 냉전의 흐름에 맞서는 민주 분출이었다. 그럼에도 민족화해의 봄으로 이어지기에는 시대의 제약이 너무나 컸다. 반면 87년 민주항쟁은 89년 이후 냉전 해체와 중첩되어 있었기에 그 가능성이 실재했다. 그리하여 분단 이후 처음으로 양국체제로의 첫 문이 잠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87년 민주화 동력의 분열로 그 가능성은 충분히 현실화될 수 없었다. 이제 촛불혁명은 남북 대결과 적대의 경사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고 그 힘이 온전히 민주정부로 이어졌다. 반쪽국가가 아닌 온전한 한 국가로서 안정된 정당성과 자신감을 갖춘 것이다. 그렇기에 2017년 북미 간 전쟁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남북 화해, 북미 화해의 길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 결실이 2018년부터 맺히기 시작했다.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 미소 냉전이 해소되었지만 곤경에 빠진 조선(DPRK)을 미국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붕괴를 위한 제재와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그 결과 ‘북핵문제’가 본격화했다. 북핵 개발과 제재 압박의 벼랑 끝 줄다리기는 1990년 초부터 시작되어 2017년까지 계속됐다. 이 30년 위기와 긴장 속에 북미 간만이 아니라 남북 간의 적대와 대결의식도 고조되어왔다. 이 적대와 대결의 고조를 한국의 촛불혁명이 먼저 끊었다. 그리고 조선의 ‘핵 완성’ 선언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북핵문제의 해결은 북핵 완성을 통해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또 그 역설은 미국 정치의 국외자인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과 만나 해결의 단초를 열었다. 2018년 벽두부터 남북이 화해의 물꼬를 텄다. 핵 완성을 통한 조선의 자신감과 촛불혁명을 통한 한국의 자신감이 당당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어 한국이 북미 협상을 통한 북핵문제 협상을 성공적으로 중재함으로써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남북미 간 화해의 협주가 가능해졌다. 이제 남북미는 종전과 평화협정, 그리고 북미 수교와 한반도 비핵화를 일정에 올려두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진행은 그 자체가 양국체제를 열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를 전후하여 한국과 조선은 정식 수교관계를 맺을 것이다. 두 나라의 정식 수교란 외국과 외국과의 수교가 아닌 ‘한 민족 두 국가 사이의 특별한 수교’다. 이 특별한 수교를 통해 한국과 조선은 서로 대표부를 교환하게 된다. 서울과 평양에 상주할 조선과 한국의 대표는 어느 외국의 대사보다 높은 지위의 장관급 공직자로 선임된다. 양국의 관계는 ‘한 민족 두 국가 간의 특수한 관계’, 즉 ‘어느 외국과의 관계보다 중요하고 높은 두 나라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이를 시작으로 점차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한국과 조선의 여러 주요 도시에 양국의 공직자와 언론인, 기업인, 연구자와 학생들이 상주하게 된다. 또 많은 일반인들이 관광과 친지 방문을 위해 서로 오가게 된다. 이렇듯 한국에 상주하고 방문할 조선 사람과 조선에 상주하고 방문할 한국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도 아닌 그저 한민족(조선민족)의 사람이 아니라, 분명 한 민족이지만 동시에 한국 사람이거나 또는 조선 사람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한국 사람과 조선 사람이 한국과 조선 어느 곳에서든, 해외의 어느 곳에서든, 한 민족으로서 자연스럽게 만나 어울려 지내게 된다. 과거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오랜 시간 교류하지 못하여 생긴 차이 때문에 여러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평화와 번영의 상호 필요, 언어·문화·역사·전통의 공통 근거에 힘입어 그 어려움을 점차 극복해낼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과 조선,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 공존체제는 점차 정착될 것이다.

코리아 양국체제가 이렇듯 정착되는 시간이 예상보다 빠르거나 느릴 수는 있겠지만, 그 변화 방향과 추세가 지난 1992년 전후와 같이 역방향으로 흘러 빠른 시간에 소멸되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국제사회에서 북핵문제는 이미 오름세가 아닌 내림세의 문제가 되었다. 미국 내정에서 어떤 변화가 생기더라도 과거 조시 부시 대통령 때와 같은 초강경 반북정책이 나오기 어렵다. 조지 부시의 이라크 전쟁 실패로 미국 일극주의는 이미 종말을 고했다. 세계사의 추세가 거역할 수 없는 다극 공존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미국 민주당과 주류 언론은 현재 트럼프 대통령과 정쟁 중이기 때문에 북미 교섭의 성과까지도 깎아내리고 있지만, 90년대 이후 민주당의 대(對)한반도 정책을 볼 때 만일 민주당이 차기 집권하게 된다 하더라도 트럼프가 열어놓은 북미 관계 정상화의 길을 계승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의 북핵 협상이 지연된다 해도 이미 형성된 남북 화해 흐름이 중단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남북 양국의 체제 내적 정당성과 안정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대북 적대·대결 세력이 정부든 국회든 장악할 가능성도 당분간 없다. 촛불혁명이 소멸시킨 ‘남북 적대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급속하게 다시 형성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러한 세력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양국체제 지향으로의 노선 전환을 통해서만 이후 정치적 생존을 보장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이 세력은 양국체제 전환의 속도, 수준, 방법을 높고 적극적 전환파와 경쟁할 수도 있다. 1970년대 초 서독 사민당이 토대를 마련한 ‘동서독 양국체제’를 이후 기민당도 수용한 것과 같은 논리다.

촛불 이후 지금까지의 진행을 볼 때, 양국체제로의 전환의 흐름은 때론 빠르고 때론 느렸지만 꾸준히 지속되어왔다. 이제 코리아가 상호 주권과 영토를 인정하는 한국과 조선 양국의 평화체제·공존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추세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을 이미 잘 준비된 상태에서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머지않아 이루어질 정상 간 합의와 협정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고 되돌릴 수 없게 공고히 할 방안, 법적·제도적 전환의 구체적 방안들, 새로운 국제관계 장기전략을 수립하는 일, 다양한 차원의 남북 교류를 지금 이 시점부터 준비해가는 것 등 할 일이 아주 많다. 지금 각계각층에서 과연 이러한 준비가 얼마나 착실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때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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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2/12-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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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우리는 미국의 주택 가격 폭등에 사모펀드가 어떻게 일조를 했는지 살펴보았다. 미국의 사모펀드는 규제 당국의 비호 아래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주택 시장에서 활개를 치고 있으며 그 와중에 서민들은 갈 곳을 잃고 길거리 노숙자로 전락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주택 시장에 뛰어든 사모펀드가 임대사업자로 변신하면서 임차인이 되어 버린 일반 서민들의 눈에서 어떻게 또다시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사모펀드의 임대업에도 당국의 규제는 어김없이 빗겨나가고 있다.

‘월가가 집주인이 되었을 때’라는 제목을 단 분석 기사의 표지 장면. 매체는 연방정부의 비호 아래 기관투자자들이 투자자와 임차인에게 각각 확실한 수익과 편의를 약속하며 임대시장의 핵심으로 등극했지만, 투자자들만 행복해하고 임차인들은 비참한 지경에 이르러 반쪽만의 약속이 되어 버렸다고 요약하고 있다. <출처: The Atlantic>

이를 위해 <뉴 퍼블릭>이 소개하는 어느 임대인의 이야기를 먼저 소개한다.

#장면 1

 남(南)로스앤젤레스의 4명의 자녀를 둔 한 싱글 맘은 주택을 월세로 임대했다. 그녀는 임대한 집의 담장이 무너진 것을 보고 주인에게 전화해서 고쳐 달라고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황당했다. 담장이 임차인의 개 때문에 망가졌으니 이틀 안에 500 달러(약 60만 원)를 내라는 통지였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하니 돌아온 답은 더 황당했다. “싫음 방 빼!” 그녀가 돈을 낼 유일한 방법은 그녀가 받는 주급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것뿐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 몇 개월이 지나 봉급날이 변경되었다. 그래서 원래 내던 날짜에 당장 월세를 못 낼 것 같으니 며칠만 말미를 봐달라고 요청했다. 그 때 집주인에게서 돌아온 답은 “안 돼!”와 “못 내면 당장 방 빼!” 할 수 없이 그녀는 또 다시 얼마 되지 않는 주급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제 날짜에 맞춰줘야 했다.(“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악덕 집주인 사모펀드, 블랙스톤

그런데 그 임차인의 집주인은 인근에 살지 않는다(과거엔 보통 미국에서는 임대아파트에 관리사무소를 두거나 집주인이 근처에 살고 임차인의 불만 및 편의를 즉시 봐 주었다). 그녀의 집주인은 바로 인비테이션 홈즈(Invitation Homes). 월가의 거대 사모펀드 블랙스톤(Blackstone)의 자회사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2008년 금융위기 후 파괴됐던 주택시장이 기지개를 조금씩 펴기 시작할 무렵인 2011년부터 월가의 블랙스톤은 임대 사업에 뛰어 들었다. 그런데 이들의 개입으로 임차인들의 사정이 좀 나아졌을까? 다시 말해 임차인들의 입장에서 과거 구멍가게 수준의 집주인(mom and pop landlords)에 비해 블랙스톤이 더 나은 집주인일까?

이 질문에 블랙스톤의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자신들을 필두로 월가의 사모펀드가 주택 대량매집을 해서 임대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그만큼 주택 공급이 늘어났고 그 결과 임대료를 낮추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연코 임차인들의 입장에선 호재라며 설레발을 쳐댄다. 그 말은 맞는 말일까? 결코 아니다. 절대로 임차인들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블랙스톤은 과거의 악덕 집주인(slumlord)도 울고 갈 정도로 더 악독하고 냉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모펀드 집주인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악질적이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일까?

 

악덕 영세 임대업자도 울고 갈 블랙스톤

이것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뉴리퍼블릭>의 보도를 보자.

“임대업자 블랙스톤 악덕 집주인을 능가한다. 그들은 결정적 하자가 있는 물건들을 시장에 스스럼없이 내놓아 임대를 했고 불만을 토로하는 임차인들과의 접촉을 기피했으며 주(州)법과 지자체법을 위반했다”(“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그런데 현행법을 위반하며 임차인들을 괴롭히는 신종임대업체 사모펀드에 대한 규제는 전혀 없다.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들에 대한 자유방임만 있었을 뿐이다. 반면 거기엔 임차인의 보호를 위한 어떠한 제도적 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이것을 증명하는 여론조사가 있다.

경제정의 시민단체인 ‘공정경제를 위한 전략행동’(SAJE: Strategic Actions for a Just Economy)과 ‘도시동맹 권리’(RCA: The Right to the City Alliance)는 캘리포니아 주의 남(南)로스엔젤레스와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는 292개의 거주지에서 임차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실제로 조사에는 51개의 가구가 응했는데 응답자의 85~95%가 흑인이었고 그들 중 대부분은 이 전에 집을 소유했던 평범한 소시민들이었다.

설문조사 결과 인비테이션 홈즈는 임차인들을 계약 당사자로 정당하게 다루지 않고 함부로 대했다. 임대회사가 25,000달러(약 3천만 원) 정도 들여 손을 보고 집을 임대했다지만 너무나 많은 하자가 발견되었다. 설문 응답자의 46%가 배관 문제를 거론했으며, 39%는 바퀴벌레를 비롯한 해충을, 그리고 20%가 에어콘 및 곰팡이 또는 물이 새는 천장 때문에 속 터져 했다.(“Blackstone unit Invitation Homes sued over rental house’s condition,” Los Angeles Tiems, MAY 5, 2014.; “Billion-dollar landlords: Rental-home giant under fire for unsavory conditions,” ABC7, Nov. 18, 2017; “Renter says mold at St. Petersburg home forced him to have sinus surgery,” ABCNews, April 15, 2019.). 로스엔젤레스의 한 임차인은 곰팡이 때문에 몸까지 아파지자 인비테이션 홈즈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과거와 같이 집주인을 만나 불만을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집주인의 코빼기는커녕 말조차 건넬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비테이션 홈스 사무실은 임대주택에서 35마일(약 56킬로미터) 떨어진 아주 먼 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차가 없으면 사무실 직원을 만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Hedge Funds: The Ultimate Absentee Landlords (Fall Preview),” The American Prospect, Sep 29, 2015.). 불만 제기를 위해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그러나 월세가 밀릴 때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집요하게 전화 걸어 임차인을 괴롭히고 문에다 메모를 남기고 전자 메일을 쏟아 붓는다. 자신들이 할 의무는 철저히 외면하면서 돈은 꼬박꼬박 챙기는 악덕업자! 과거의 집주인들은 아무리 악덕 집주인이었다 하더라도 이정도로 뻔뻔한 철면피는 아니었다. 그런데 사모펀드 임대업체가 훨씬 점잖은 임차인 친화적인 집주인이라니 지나던 개가 웃을 일이다.

임대주택 시장에 뛰어든 월가의 사모펀드, 블랙스톤의 자회사 인비테이션 홈스 로고가 선명한 조지아 주의 어느 임대주택 광고 <출처: The Atlantic>

 

터진 봇물, 엑스트라 피(extra fee): “임차인님 여기 추가비용 추가요~”

그런데 과연 이것뿐일까? 전형적인 렌트비(월세임대료)도 이들 사모펀드가 임대업을 하면서 과거보다 상당히 올랐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거기에 덧붙여 과거에 집주인이 원래 관행상 내왔던(임대료에 포함되어 있던) 수도세, 조경비(건물유지비), 주차비, 쓰레기 처리비용까지 따로 더 내야 되니 어떻게 사나. 그 모든 것이 이른바 ‘엑스트라 피’(추가비용료)란 명목으로 주인이 내야 할 몫까지 임차인에게 떠넘겨진다. 물론, 이러는 데에 아무런 규제도 없다.(“Court Declares that Landlords Can’t Circumvent Rent Limits by Charging Extra for Water,” Santa Monica Daily Press, August 30, 2018.: “Rent By Another Name,” The Texas Observer, Sept. 12, 2019).

또 이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애완동물 키우면 돈 더 내야 하고, 전기료도 평상시 보다 많이 나오면 추가에 추가를 더해 왕창 뜯어 간다. 이것에 동의해야 월세 방을 임대해 준다.(“The Fido fee: Landlords increasingly charge extra rent for pets”, The Mercury News, Oct. 22, 2014.). 심지어 임대 계약 시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비용들도 임대 기간 중간에 느닷없이 집어넣어 더 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TV가 없어 볼 수도 없는 케이블 채널 시청료를 어느 날 갑자기 강제로 부가하는 것이다. 거기에 응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어떤 경우 월세 내기 전날인데도 세 안내면 내쫓겠다고 메모를 남기기도 한다.

이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AI와 같다. 사람이 아니다. 혹여 관계자를 만나면 사람하고 대면하는 게 아니고 마치 차가운 기계와 대면하는 듯이 느낄 정도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임차인의 말에는 귀를 닫고 얼굴을 돌린다. 마치 자동응답기의 기계처럼. 그렇게 월가의 신종임대업자들은 철옹성과 같은 제국이 되었다. 과거의 악덕 집주인이 최악의 경우 날강도였다면, 월가의 제국들은 과거의 악덕 집주인들마저도 두 손 두 발 들고 나가떨어질 냉혈의 로봇들이다. 아무리 날강도였다고 해도 과거의 악덕 집주인들은 적어도 그들을 향해 임차인들이 말은 할 수 있었으니까. 분통이라도 터트릴 수 있었으니까. “월세 못 내, 방 못 빼” 하며 배 째라 식으로 뻗댈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법 위에 군림하는 제국들은 임대업자란 두터운 갑옷을 입고 곤경에 처한 서민들을 도끼와 칼과 창으로 난도질을 하고 있다.

 

신종 월세(임대료) 개념 탄생시킨 사모펀드

그래서 과거의 임차인들이 냈던 월세의 개념은 저리 가고 신종 월세의 개념이 탄생했다. 그것은 바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엑스트라 피’가 덧붙여진 임대료다. 쉽게 이야기하면 예를 들어 대도시의 경우 방 하나 빌리는데 과거의 렌트비 명목의 임대료가 1,700달러(약 200만 원)라면 거기에 덧붙여 이런 저런 명목으로 뜯어가는 ‘엑스트라 피’가 1,000달러(약 120만 원)에 달해 도합 2,700달러(약 320만 원)가 된다. 그래서 온라인 오프라인 할 거 없이 표면에 제시된 임대료를 보고 방을 얻는다면 추가되는 비용 때문에 시쳇말로 대략난감(?)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지갑이 얇아지는 서민들은 임대주택과 임대아파트에서 조차 밀리는 형국이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임차인들은 이렇게 토로한다.

“추가비용 부가가 얼토당토 하다고 항의하면 신종 집주인들은 이렇게 말 할 뿐이다. ‘난 신경 안 써. 그것은(추가비용)은 필수사항이야’. 그들은 우리에게 더 뜯어가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으며 그 쪽 방면에는 가히 천부적이다…아마도 이들은 할 수 있다면 임차인들이 죽을 때까지 추가비용을 내게 할 수 있다. 저들이 정말로 원한다면 임대료(과거 개념의 임대료)가 0원이 되어도 모든 것을 추가비용으로 걷어 충당할 수 있다.”(“Rent By Another Name,” The Texas Observer, Sept. 12, 2019.).

“우린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 더 이상 여력 없다.”(“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금융위기 이후 대단위 주택압류 사태를 최대한 기회로 삼아 월가의 헤지펀드(사모펀드)가 미국에서 단독주택의 소유에 있어 어떻게 절대 강자가 되었는가를 폭로하는 기획 기사의 소개 화면. 기사는 월가의 제국이 궁극적으로 임차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집 근처에 살지 않는) 악덕 집주인이 되어버렸다고 제목을 달았다 <출처: The Prospect>

 

무소불위 사모펀드

왜 주택(임대)시장을 월가의 큰손들이 좌지우지하게 규제하지 않는가? 그리고 왜 임차인들을 보호하지 않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월가의 신종 임대업자들에게 규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먼저 알아보자. 규제는커녕 그들에게는 있는 규제조차 사문화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규제에 반하는 조항들이 신설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법과 제도는 임차인이 아닌 철저하게 임대업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예를 들면, 과거엔 월세를 제때 못 내도 집주인이 임차인을 강제로 쫓아내지도, 집에 발을 들여 놓지도 못했으나 이제 경고도 없이 바로 쫓아내고 있다.(“’Billion Dollar Landlords’ allegedly quick to threaten eviction, slow to repair,” ABC7, Nov. 17, 2017). 또한 다달이 내는 월세 외에 계약 시에 한 두 달치를 먼저 내고 나중에 돌려받는 보증금(security deposit)의 액수도 캘리포니아 주법에는 한도를 정해 놓았지만 인비테이션 홈즈 같은 회사는 이를 무시하고 제 맘대로 부가한다. 미국의 월세는 보통 1년 혹은 2년 단위로 계약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장기(혹은 정기) 계약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흔히 경제 사정이 매우 열악한 사람들)은 매달 700~800달러(약 80~90만 원)를 더 내야 월세 방을 얻는다. 이것은 주법을 위반한 것이다.

그러나 신종 임대업자들에겐 주법이나 지자체법 보다 자신들이 만든 법이 더 상위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규약(주법과 지자체법을 완전히 무시한 법)에 어긋난 짓을 하거나 불평불만을 하는 임차인들에게 언제든지 소송해서 감옥에 처넣을 것”이라고 위협을 일삼는다.(“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나아가 주나 지자체조차도 신종 임대업자들이 유리하게 법을 개정한다. 예를 들어 텍사스 주의 경우, 2017년 보일러, 히터, 에어컨, 또는 건물 시스템 등의 유지보수와 관련된 일체의 비용 부가에 한도를 없애버렸다.(https://capitol.texas.gov/tlodocs/85R/billtext/html/SB00873F.HTM). 이로써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부가하는 “추가비용의 폭발이 일어났으며, 정부가 이들 신종 임대업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명시적으로 허용한 것”이라고 텍사스 주 임차인연맹(Texa Tenant’s Union) 회장 샌디 롤린스(Sandy Rollins)는 일갈했다.(“Rent By Another Name,” The Texas Observer, Sept. 12, 2019). 이로써 과거 10년 전에는 대부분 임대료에 포함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추가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따로 임대료에 추가해서 부가되어 배 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상황이 연출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이야기인가? 선진국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과거 미국과는 완전히 달라진 세상이다.

 

통제불능의 추가비용이 불러온 비극

롤린스가 이름 붙인 “통제불능의 추가비용”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노숙자의 양산이다. 추가비용의 통제불능은 ‘거주부담능력’(housing affordability)의 위기를 불러오고 그것은 곧 노숙자 증가의 위험성과 직결된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임대료의 대폭 상승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집값과 임대료는 하늘을 찌를 듯 폭등하고 있는데 비해 서민들의 임금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줄었다. 이런 와중에 월가의 신종 임대업 제국들은 강제퇴거 조치 및 미지불 월세까지 끝까지 받아내는 탁월한 기술까지 보유하며 가혹하게 서민들의 등골을 짜내서 자신들의 배를 마구 불리고 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인비테이션 홈스의 데니스 던켈(Denise Dunckel) 대변인은 “미국 주택 시장 회복에 커다란 기여를 한 기관투자자들의 공로를 무시한 극도로 왜곡된 비판”이라며 “우리는 캘리포니아 및 연방 임대차법을 준수하고 있다”고 뻔뻔하게 응수했다.(“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우리는 여기서 (살고 싶어도) 경제적으로 살 여력이 없다”라는 푯말을 들고 시위에 참여한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샬럿(Charlotte)의 시민. 비평가들은 월가의 대형임대업자들이 대량매집으로 집값과 임대료를 폭등시켜서 서민들이 적정한 가격에 거주할 공간의 씨를 말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출처: The Charlotte Observer>

 

지역경제의 황폐화

월가의 신종임대사업이 초래한 문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월가의 대규모 임대사업은 주거안정성을 심대하게 훼손한다. 그 결과 서민들이 대거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둘째, 월가의 대규모 임대사업은 과거의 악덕 집주인이 양반이라 불릴 정도로 악질적이고 무도하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막대한 이윤창출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Company bought hundreds of houses. Now, poor are getting ‘priced out,’ critics say,” Charlotte Observer, Dec. 5, 2018).

그러나 신종 임대사업은 이것들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노정한다. 그것은 바로 임대사업으로 번 돈들이 지역사회로 편입이 안 되고 모두 월가의 부자들의 호주머니로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씬시아 스트레스맨(Cynthia Strathman) SAJE 대표는 “사모펀드의 신종 임대사업의 수익은 지역사회로 안 돌아오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부의 창출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한 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월가가 빨대를 꽂은 영원한 먹잇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역 경제는 황폐화되고 그 속의 지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진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임차인을 위한) 없소?

규제의 사각지대 하에서 양산되는 것은 노숙자다. 그렇다면 질문이 생긴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왜 규제하지 않는가? 왜 임차인들을 보호하지 않는가? 아니 그 보다 왜 월가의 제국들이 주택을 대량매집하게 허용하는가?(“A massive buy-to-rent scheme is hitting the housing market,” Business Insider, Aug. 28, 2018). 왜 그들이 임대차보호법을 어겨도 그냥 눈감아주고, 나아가 그들의 배를 무한정 불릴 수 있게 도와주는 법 개정을 하는가? 이러한 모든 규제 철폐들은 바로 월가의 제국들이 주택시장과 임대시장에서 마음껏 활개 치게 한 자유주의 정책들의 일환이다. 결국, 임차인과 서민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들 제국들에 대한 규제이다. 통제이다. 그런데 이들을 위한 조치들은 취해지지 않았다. 도대체 왜일까? 이것을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

 

<참고자료>

“The Fido fee: Landlords increasingly charge extra rent for pets”, The Mercury News, Oct. 22, 2014.

“Rent By Another Name,” The Texas Observer, Sept. 12, 2019.

“Slumlord Millionaires: Wall Street’s new scheme to profit off poor people,”, The New Repulic, July 24, 2014.

“Court Declares that Landlords Can’t Circumvent Rent Limits by Charging Extra for Water,” Santa Monica Daily Press, August 30, 2018.

“When Wall Street Is Your Landlord,” The Atlantic, Feb. 13, 2019.

“Renter says mold at St. Petersburg home forced him to have sinus surgery,” ABCNews, April 15, 2019.

“Blackstone unit Invitation Homes sued over rental house’s condition,” Los Angeles Tiems, MAY 5, 2014.

“A massive buy-to-rent scheme is hitting the housing market,” Business Insider, Aug. 28, 2018.

“Company bought hundreds of houses. Now, poor are getting ‘priced out,’ critics say,” Charlotte Observer, Dec. 5, 2018.

“This Charlotte politician is accused of helping ‘Wall Street slumlords’,” Charlotte Observer, Dec. 5, 2018.

“Billion-dollar landlords: Rental-home giant under fire for unsavory conditions,” ABC7, Nov. 18, 2017.

“Hedge Funds: The Ultimate Absentee Landlords (Fall Preview),” The American Prospect, Sep 29, 2015.

“’Billion Dollar Landlords’ allegedly quick to threaten eviction, slow to repair,” ABC7, Nov. 17, 2017.

https://capitol.texas.gov/tlodocs/85R/billtext/html/SB00873F.HTM

금, 2020/02/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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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극산 첫 LNG 수출

북극권에서 액화천연가스(LNG)가 생산되는 시대가 열렸다.

2017년 12월 8일.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 야말반도에 세운 야말 LNG 기지에서 사상 첫 북극산 LNG가 생산됐다. 2014년 4월 시작된 ‘야말 LNG 프로젝트’가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야말 프로젝트’란 러시아 시베리아 최북단 야말반도에 매장된 약 1조2500㎥의 천연가스전을 개발, 연간 1650만 톤의 LNG를 생산하는 사업이다. 야말반도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러시아 전체의 80%, 전세계의 17%에 해당한다. 이 지역의 천연가스 매장량은 9260억 세제곱미터로, 향후 30년 동안 생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야말 가스전

한국 돈으로 30조 원 가량이 투입된 대단위 국책 사업이다. 러시아 최대 민영 가스회사인 노바텍(Novatek), 프랑스 토탈(Total), 중국 석유천연가스공사 (CNPC: China National Petroleum Corporation) 등 세계 유수 기업이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 대통령도 관심을 쏟고 있다.

지분 구성은 노바텍 50.1%, 프랑스 토탈 20%, 중국의 CNPC 20%, 중국 실크로드 기금의 합작 법인 JSC Yamal LNG가 9.9%으로 돼 있다. 야말의 홈페이지에 따르면 첫 트레인은 2017년 12월 5일 가동을 시작했으며 8일 17만 큐빅미터의 LNG를 처음으로 선적했다.

야말의 연간 가스 생산량은 우리나라가 사할린-2 프로젝트에서 들여오는 연평균 LNG 도입량(150만t)의 10배가 넘는 규모다. 천연가스 추정 매장량도 1조2500억㎥ 정도로, 이는 우리나라가 60년 가까이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첫 LNG를 선적한 배

2017년 12월 8일. 야말반도 사베타 항구에서는 북극산 첫 LNG가 운반선박에 선적되는 역사적 순간을 축하하는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다. 푸틴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해 축사하고 선적 버튼을 눌렀다. 푸틴은 축사를 통해 “우리는 이제 북극 항로를 개발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했다”라고 강조했다. 필자는 영하 30도의 강추위 속에서 현장을 취재했다.

사실 야말반도를 찾은 것은 이때가 2번째였다. 2016년 5월에도 야말 프로젝트의 진척 상황을 취재했었다. 2016년엔 65%의 공정율을 보이고 있었다. 2번의 취재를 통해 북극권에서 LNG를 생산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대략적인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위성사진 /야말반도 사베타

북위 71도. 시베리아 야말-네네츠 자치구에 있는 야말반도. 일년에 7,8월 두달을 제외하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툰드라 지대.

영하 60도까지 내려가고 한여름에도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지대다. 야말 LNG 생산기지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천연가스 생산지역이다. 발 밑을 파내면 곧바로 영구동토층이 나온다. 깊이는 340 미터에 이르고 영하 4도를 유지한다. 그 위로 거대한 LNG 생산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수백미터 지하에서 뽑아올린 천연가스를 보관하는 초대형 LNG 저장 탱크는 높이 52미터, 직경 80미터에 달한다. 이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얼음 밑으로 수백개의 파일을 박았는데, 이 중엔 ‘열 안정기’도 있다. 열 안정기의 역할은 냉장고랑 같아서 영구동토층이 녹지 않도록 온도를 낮게 유지하는 것이다.

마나코프 야말 프로젝트 제1 부감독은 이런 극한의 장소에 생산기지를 세움으로써 2가지 이점이 생긴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생산기지가 가스전 바로 근처에 위치하기 때문에 운송비가 덜 든다는 것이다. 둘째는, 영하 50~60의 낮은 온도가 생산성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낮은 기온 때문에 천연가스가 더 쉽게 액화되면서 10%의 비용 절감이 되고, 더 많은 LNG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다.

 

1) 야말 프로젝트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 러시아의 LNG 수출 확대 전략

러시아 천연가스 수출의 패러다임 즉, 파이프 라인(PNG) 중심에서 LNG로 변화를 모색했다는 점이다. 러시아는 그동안 파이프라인을 통해 가스를 수출했고 LNG는 사할린-II에서만 생산했었는데, 생산라인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셈이다. 크림병합 등으로 우크라이나와 갈등 관계이면서도 유럽으로 가는 파이프 라인이 여전히 가동중이고, 독일 등 북쪽으로 가는 다른 파이프 라인들도 많다. 러시아는 이제 기존 유럽 중심의 PNG 수출과 함께 LNG 확대를 통해 경쟁력 강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늘고 있는 천연가스 수요를 노린 것이다. 에너지 조사회사인 블룸버그 뉴에너지 파이낸스(BNEF)에 따르면 2030년 세계 LNG 수요는 2016년보다 86% 증가한 4억 7900만 톤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국은 심각한 대기오염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석탄화력에서 가스 화력으로 급격히 이동중이다. 미켈슨 노바텍 사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2020년까지 아시아 LNG 시장의 증가율이 73% 정도로 예측된다”고 말했다.

사베타 공항

특히 재미난 것은 야말반도 건너편 기단반도에 또다른 LNG 생산기지인 ‘북극-2 LNG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라는 점이다. 야말 프로젝트의 성공에 힘입은 노바텍이 2022년쯤 생산을 목표로 야심차게 추진중인데, 북극-2의 최대 목표 생산량은 연간 7000만 톤에 이른다. 이는 LNG 수출량을 대폭 늘리고 있는 미국의 10년 뒤 총생산량인 6200만 톤을 능가하는 규모다.

개발에 예상되는 자금은 1100억 달러(우리돈 119조 원). 천문학적인 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노바텍은 LNG 의존도가 높은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게 적극적으로 투자 제안을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현재 19% 정도인 LNG 발전 비중을 2030년엔 37%까지 끌어올리려 하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선 누가 가장 싸게 안정적으로 공급해 주느냐가 관건인데 호주산과 미국산 LNG는 비싼 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러시아가 2040년까지 미국.아프리카 국가들과 함께 LNG 주요 수출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IEA는 보고서에서 “현재 전세계 LNG 수출의 약 60%를 카타르와 호주가 맡고 있다. 하지만 2040년까지는 미국과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LNG 수출을 약 900억 입방미터 늘릴 것으로 예상되며 러시아도 600억 입방미터를 더 수출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들 3대 공급원이 전세계 LNG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현재 23%에서 2040년까지는 40%로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북극 가스전 개발

잠재된 방대한 러시아 북극해 천연가스전 개발 촉발했다는 것. 러시아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야말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야말 LNG’는 러시아와 프랑스.중국의 다자간 협력체계이다. 프랑스가 20%, 중국 지분은 29.9%나 된다.

실제로 야말 LNG사에 초기 주요 보직에 프랑스 토탈사의 파견자와 프랑스 LNG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었다고 한다.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의 대러 제재가 시작되면서 야말 프로젝트는 좌초 위기에 몰렸으나 이들 지원자들 덕분에 살아났다.

최초 쇄빙 LNG 선박

최초의 북극산 LNG를 운반한 선박은 세계 최초의 ‘쇄빙 LNG’인데 선박의 명칭이 ‘크리스토프 드 마르제리’이다. 이름이 함축하는 의미가 크다. 이 선박의 이름은 다름아닌 2014년 모스크바에서 사고로 숨진 프랑스 토탈사 CEO의 이름을 딴 것이다. 마르제리는 생전에 서방의 대러 제재 조치가 불공정하고 비생산적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혔고, 야말 프로젝트의 성공을 이끄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또 야말 프로젝트에 쓰일 ‘쇄빙 LNG 운반선’ 15척을 우리 기업이 수주했었는데 그 중 14척에 중국 금융권이 돈을 댔고, 러시아 금융권은 단 한척만 돈을 댔다고 한다. 당시 대러 제재 때문에 서방 금융권은 개점휴업 상태였다고 한다.

 

Ⓒ 북극 항로 재발견

그 동안 비현실적이라고 여겼던 쇄빙 LNG를 이용한 북극해 자원(Gas)의 수출 현실화, 그리고 북극항로의 상업운항 가치를 재발견했다는 것이다.

북극 항로는 일년에 절반 이상 두꺼운 얼음에 덮혀 있어 통상 얼음을 깨는 쇄빙선이 앞장 서고 그 뒤를 LNG 운반선이 따라가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경제성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다. 야말 LNG를 북극해를 통해 운반하려면 쇄빙기능과 LNG 운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선박이 필요했는데 한국의 대우조선해양이 이 갈증을 해결해줬다. 대우조선해양이 만든 ‘아크(ARC)-7’급 쇄빙LNG선은 스스로 얼음을 깨면서 나가는 LNG 운반선이다. 길이 299m, 폭 50m로 우리 나라 전체가 이틀간 사용할 수 있는 17만3,600㎥의 LNG를 싣고 최대 2.1m 두께의 얼음을 깨며 항해할 수 있다.

대우조선해양이 수주한 LNG 쇄빙선 15척은 총 48억 달러(약 5조 원) 규모다. 이 LNG 쇄빙선들은 야말 반도 사베타(Sabetta)항에서 북극항로를 통해 중국 등의 아시아와 북유럽 지역으로 LNG를 운송하게 된다.

 

2) 철제 상자 같은 버스

야말 LNG 생산 기지 근처에는 사베타 항구와 사베타 공항이 있다. 모두 생산된 LNG 운반과 기지 종사자들을 위한 기반시설인 셈이다. 일년 내내 영하권을 맴도는 기후 때문에 운송수단도 독특했다.

야말의 버스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버스라는게 꼭 직사각형 철제 상자를 대형 트럭 위에 얹어 놓은 모양새다. 눈과 얼음으로 덮힌 도로를 달려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트럭의 하상이 매우 높다. 즉 높이 2미터쯤 되는 계단을 올라서 철제 상자에 타야 하는 것이다. 날씨가 추우니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장갑을 껴서 몸이 둔한데다 이렇게 높이 오르내려야 하니 버스 몇 번 타고 나면 기진맥진해질 지경이었다.

또 북극 지역은 해를 보기 힘들다. 해가 떠봐야 오전 10시반 정도에 뿌옇게 밝아지다 2시간 뒤에 곧바로 다시 어두워진다. 낮 시간이 2시간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어둠이 지속된다. 그런데 이게 거의 일년 내내 지속된다. 우울증이 안 걸리는게 이상할 정도다.

하늘을 향해 뻗는 광선그 와중에 기지 한복판에서 하늘을 향해 일직선으로 쭉 뻗어 올라가는 흰 광선이 목격됐다. 무엇인가 했더니 가스를 태우는 것이란다. LNG 생산할 때 생기는 안 좋은 가스를 빼고 태워버리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가스를 태울 때 빛과 뜨거운 공기가 생기는데 날씨가 너무 춥고 공기가 너무 맑아서 그렇게 뚜럿하게 잘 보이는 것이라고 했다.

 

(2) 북극 개발

북극 개발은 러시아 국가 발전 측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축이 되었다. 막대한 규모의 지하자원이 존재하고 세계 물류의 중심을 현재의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시킬 수 있다는 점, 지구상 마지막 남은 청정 식수원 등의 잠재력 때문이다.

러시아는 북극 지방 영토의 약 40%를 점유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은 전체 러시아 인구의 약 2%이며 GDP는 전체 GDP의 약 10% 수준이다. 러시아 전체 니켈과 코발트 생산량의 95%가 북극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가스는 80%, 구리는 60%, 중정석 및 인회석은 100%, 해산물은 15%가 북극 지역에서 개발, 생산되고 있다.

미국 지질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보면, 러시아, 노르웨이, 그린란드, 미국 및 캐나다에 매장돼 있는 천연가스의 90% 이상이 러시아 북극에 집중돼 있다고 한다. 또 세계 니켈 매장량의 약 10%, 백금류 금속 매장량의 약 19%, 아연 매장량의 3% 이상이 북극에 매장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러시아는 19세기 즈음 기온이 비교적 온화한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 등에서 북극 개발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북극 산업화는 1930년대 보르쿠타 지역의 석탄 채굴, 노릴스크 지역의 비철금속 채굴, 그리고 북극의 동서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13년 러시아 북극지역 개발 전략을 승인했다. 러시아 정부는 2025년 러시아 극지방 사회경제 개발 정책 추진을 위해 150개 프로젝트를 지정하고 앞으로 몇 년 동안 5조 루블을 투자할 계획이다. 5조 루블 중 1조 루블은 정부 예산으로 지원되며, 4조 루블은 외부 투자 등에 의해 조달될 계획이다.

 

(3) 북극 개발 각축전

지구상 마지막 남은 자원의 보고, 북극을 둘러싸고 주변 나라들의 개발경쟁이 치열하다. 그 중에서도 러시아가 쇄빙선을 앞세운 자원 개발이나 군사 기지 건설 등 북극 개발에 앞장서고 있는 모습이다.

쇄빙선

북극은 연중 얼어있는 얼음 바다인데다 얼음의 두께도 2~5미터에 달해서, 북극 개발에는 얼음을 깨고 나가는 배, 쇄빙선이 필수적인 도구이다. 러시아는 36척의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유일의 원자력 쇄빙선단도 4척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앞서 언급한 쇄빙 LNG 선박까지 도입했다.

또 캐나다, 미국과 독일이 이미 쇄빙선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중국과 일본도 경쟁적으로 쇄빙선을 건조하고 있다.

2017년 4월 러시아는 북극에 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기지도 건설했다.

북위 82도의 알렉산드라랜드 섬에서 러시아 국기처럼 하얀색과 파란색, 빨간색 칠을 한 건물들을 지었는데 만 4천 제곱미터 부지에 15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전투기도 배치할 수 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이 기지를 전격 방문해 빙하 지역에서 망치로 얼음을 깨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가 그나마 행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북극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들이 나왔다. 국제전략연구소의 히더 콘리 박사는 “푸틴에게 북극은 러시아 위신의 프로젝트이다. 북극에 러시아 국기를 게양할 수 있고 군 기지를 건설할 수 있고 자연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2014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북극 자원을 채굴할 기술이 없었지만, 몇년 만에 수평시추법 등을 자체 개발해, 북극 지하 5천 미터의 원유를 채취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러시아의 GDP, 국내총생산의 5% 정도가 북극에서 나오고 있다.

주변국들도 북극 개발 경쟁에 뛰어들고 있는데, 1982년 채택된 유엔 해양법 협약은 북극해에 대한 개별 국가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북극해와 인접한 러시아와 미국, 캐나다,노르웨이, 그린란드 등 5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만을 인정하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와 캐나다 등이 자국의 해양영토 확장을 위한 대륙붕 연장을 놓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알래스카, 러시아는 북동항로, 노르웨이.덴마크는 북서항로를 중심으로 군사 기지를 늘려가고 있는데 이는 북극해에 대한 ‘실효적 지배 모색 차원’으로 풀이된다.

1987년 ‘북극권 개방 선언’으로 세계 각국의 북극권 진출 가능성이 열렸지만, 실제로는 연안국들의 주권 행사가 강하게 펼쳐지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1996년 캐나다 주도로 러시아, 미국, 스웨덴, 덴마크 등 북극권 8개 나라가 창설한 정부간 협의체 ‘북극 이사회’가 기후 변화 문제와 석유ㆍ가스 등 자원 개발과 북극 항로 등 북극 관련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중국, 일본이 새롭게 옵저버 국가로 참가하면서, 북극 자원개발에 대한 투자와 쇄빙선 건조 등 실질적인 북극 파트너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북극 곰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북극 난개발에 대한 환경보호론자들의 우려도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북극개발은 역설적으로 지구온난화, 즉 빙하가 녹으면서 가능하게 된 일이다. 따라서 쇄빙선이 다니면서 개발이 본격화되면, 온난화가 더욱 가속화될 거란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또 북극에서의 유전개발이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유전개발 과정에서 수백톤 이상의 메탄가스가 방출되고 중금속, 산성화, 오존층 파괴 등 환경오염이 가중될 우려도 높고, 이런 이유로 북극 동식물 생태계가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화, 2020/02/1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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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돌팔매

덕수궁 돌담길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가는 1977년 10월 24일, 덕수궁 옆 서울지방법원 법정에서는 서울대·고대 유인물사건 재판의 결심이 열렸다. 서울대의 김창우(74학번)와 서익진(73학번), 고려대의 설훈(74학번), 이민구(75학번), 황인국(75학번) 등 수의를 입은 피고들이 법정에 들어오고 재판장이 들어와 앉자 곧바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장 허정훈 판사는 장영자 사건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피고들에게 강압적으로 재판을 진행한다는 악평을 듣고 있는 인물이었다. 먼저 검찰의 구형이 있었다. 고려대 중심인물 설훈이 징역 5년, 서울대의 김창우가 징역 4년 등 유인물 사건치고는 꽤 높은 형량이었다. 이어서 이돈명, 황인철 변호사 등 변호인단의 긴 변론이 있고, 마지막으로 피고들의 최후진술 시간이 주어졌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감시 속에서 숨죽이면서 비밀리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며 저항의 칼을 갈아온 이들에게는 공개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성을 성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먼저 제일 연장인 고려대 설훈이 나서서 ‘독재자 박정희는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펴다가 예상대로 재판장의 제지를 받았다. 이어서 서울대 김창우가 나섰다. 김창우는 또렷하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정희 독재의 반역사성과 민주화투쟁의 정당성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재판장이 돌연 나서서 말을 끊고 ‘네가 정당하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고 힐난하듯이 물었다. 김창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내가 30년 뒤에 박정희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잘못된 정권인지 당신 앞에서 똑똑히 증명해 주겠다. 그리고 당신이 박정희에게 부역한 사실까지 자손 대대로 이야기 해주겠다.’ 오만한 재판장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일순 재판장의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김창우가 잠깐 숨을 고르느라 말을 멈춘 사이에 “이것으로 이만 재판을 마치겠습니다.”라고 내뱉듯이 말하고 일어나서 퇴장해 버렸다. 변호인과 피고 뿐만 아니라 재판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골리앗을 겨냥한 다윗의 돌팔매처럼 시원하게 한방 먹인 통쾌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후과(後果)는 4일 뒤의 선고공판에서 바로 나타났다. 김창우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4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 받았다. 이른바 ‘들었다 놓은’ 것이다. 통상 검찰이 4년을 구형하면 징역 2년 정도 판결을 내는 것이 보통인데, 검찰의 구형 형량 그대로 선고한 것이다. 김창우의 최후진술이 영향이 있었을 걸로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성북서의 ‘횡재’ – 서울대·고려대 유인물사건

이 서울대·고려대 유인물사건은 당시 75년 긴급조치 9호 발령 이후 유신독재의 엄혹한 감시와 탄압 속에 학생운동이 각 대학별로 분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서울대와 고려대가 함께 엮인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 고리에 서익진이 있었다. 서익진은 김창우의 서클 1년 선배이면서 고려대 설훈에게는 마산고 1년 후배였다. 이 서익진이 마산고학우회장 시절 사용하던 등사기로 김창우와 설훈 두 사람의 유인물을 만들어준 것이었다.

먼저 꼬투리가 잡힌 것은 고려대 쪽이었다. 77년 4월 설훈과 이민구, 황인국이 고려대 학내에 뿌린 유인물이 악명 높은 성북서 정보과로 들어갔고, 성북서가 가능성 있는 인물을 한명씩 잡아다 악랄하게 조사하여 추적한 결과 설훈을 짚어냈고, 설훈을 잡아다가 ‘피똥을 쌀’ 정도로 고문하며 추궁해서 결국 서익진을 찾아 낸 것이다. 설훈도 서익진을 불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결정적 증거물인 등사기의 소재를 둘러댈 재간이 없었다. 서익진을 연행한 성북서 형사들은 덤으로 큰 횡재를 했다. 서익진의 자취방 빨래통에서 김창우가 서울대에서 뿌린 유인물 원본을 발견한 것이다. 서익진은 김창우의 부탁으로 자신의 등사기로 유인물을 인쇄해주고 그 원본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세탁물 속에서 수사관들에게 발각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고, 그 바람에 후배 김창우가 잡혀가 함께 법정에 서게 되었다.

김창우는 원래 그 전 해 1976년 ‘3우1승팀’(김창우, 김천우, 박찬우, 양춘승)의 일원으로 학내시위를 주동하려다가 리더 양춘승이 주동을 3인으로 줄이고 자신을 후속팀으로 남겨 놓아 학교에 남은 상태였다. 양춘승과 김천우, 박찬우 3명은 77년 3월 28일에 예정대로 시위주동을 하고 감옥으로 갔다. 김창우는 후속팀을 조직하기 위해 함께 주동할 사람들을 물색하는 한편 그 동안에 학내 유인물 작업을 하기로 했다. 그는 서클 ‘한사(한국사회연구회)’ 1년 선배이면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던 서익진이 등사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그에게 부탁하여 유인물을 만들어 교내 강의실, 화장실 등에 뿌렸다.

77년 5월 말 모든 일이 완벽하게 잘 끝났다고 안심하고 있던 김창우는 ‘뜻밖에도’ 강의실로 들이닥친 성북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연행되었다. 성북서에서 조사를 마치고 6월 11일 서울구치소로 송치되어 구속 수감되었다. 거기에서 먼저 와있던 양춘승, 박찬우, 김천우를 다시 만났다.

 

어린 시절 – 공부도 운동도 잘한 모범생

김창우는 1956년 1월 23일 제주시 삼도동에서 부친 김인희(金仁熙) 님과 모친 김규숙(金圭淑) 님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인희 님은 부산 건설국 산하 제주도 축항(築港)사무소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집안 대대로 제주도에서 살았던 제주도 사람은 아니었고, 증조부 때 뭔가 사연이 있어 육지에서 건너와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한다. 독자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일제 때 의사 일을 해서 가난한 제주도 안에서는 제법 풍족한 살림을 했고,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아버지 김인희 님은 그 중 넷째 아들이었다. 외가 쪽은 4.3사건 당시 학살 피해가 많았던 조천면에서 살았는데, 동아일보 주필을 지냈던 김명식 씨 등 저명한 언론인, 학자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어머니 김규숙 님은 제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목포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근무하다가 중매로 김인희 님과 결혼했다고 한다.

1962년 김창우는 제주북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김창우가 태어난 삼도동은 바닷가에서 가까워 어려서부터 늘 바닷가에 나가 놀았고,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다에서 종일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김창우는 공부를 곧잘해서 항상 백점을 받아와 부모님을 기쁘게 했다. 그런 중에 축구도 잘 해 학교 대표선수로 뛸 정도였다.

1966년 김창우가 5학년 때 아버지는 공부 잘하고 똑똑한 큰아들을 큰물에서 키울 욕심으로 부산으로 전근을 신청했다. 신청이 받아들여져 일가족 모두 부산으로 이사했고 김창우는 부산 초량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전학 온 김창우는 첫 시험에서 백점을 받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놀라게 했다. 제주 촌놈이라고 얕잡아 봤던 아이들의 태도가 대번에 달라졌다.

1968년에는 명문 부산중학교에 시험을 쳐 입학했고, 1,2학년 내내 거의 전교 수석을 독차지했다. 2학년 때부터는 좋아하는 축구도 다시 시작했고, 그러면서도 졸업 때까지 선두권을 놓치지 않았다. 1971년 부산고 입학시험에서도 수석은 놓쳤지만 차석으로 합격했다.

 

‘한사’에서 사회현실에 눈뜨고 감옥가기로 결심하다

1974년 김창우는 아들이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서울대 사회계열에 지원했다. 종암동에 있는 서울상대에서 시험을 치렀는데, 1박2일 시험기간 동안 부산고 선배들이 고향에서 올라온 후배 수험생들을 자기 하숙집에 데려가 재워주고 돌봐주었다. 김창우를 돌봐준 선배들이 바로 이념서클 한국사회연구회(한사) 선배인 정종호(72학번), 박석운(73학번) 등이었는데, 결국 이 선배들의 권유로 김창우는 대학 입학하자마자 한사에 가입하게 된다.

입학하고 얼마 안되어 긴급조치 4호가 발령되고 민청학련사건이 터졌다. 그 바람에 김병곤 등 한사 선배들이 다수 잡혀가고 서클활동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이종구(72학번, 성공회대 교수), 박석운(73학번, 법대) 등의 노력으로 차츰 안정을 찾아간다. 김창우는 선배들의 지도 하에 정의헌, 장기영, 김현준, 박태주 등 74학번 동기들과 함께 경제사, 경제학, 사회사상 등의 학습을 하면서 차츰 우리 민족과 사회의 현실에 대해 눈뜨게 되고, 유신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선배들 중에서도 일찍이 노동운동을 꿈꾸고 보일러공으로 일하고 있던 김승호(68학번), 민청학련 사건의 맹장 김병곤(71학번), 박석운(73학번) 등이 특히 김창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 2학년 2학기 초 학과 선택을 할 때 좀더 사회운동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경제학과를 선택했다. 아버지 뜻을 어기고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1976년 3학년이 되면서부터 한사의 회장을 맡게 된 김창우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2학기가 되자 자신 역시 선배들의 뒤를 따라 학생운동의 일선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반독재 데모를 주동하고 감방으로 가겠다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지도하는 후배들의 영향이 컸다. 후배들에게 평소 했던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감옥살이를 마친 후에는 선배 김승호처럼 노동현장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3학년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권에는 준비론적 분위기가 강했다. 현장 준비를 위해 정치투쟁은 유보되거나 자제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창우의 문제의식은 반독재투쟁에 있어서 학생운동이 75년 이후의 침체된 분위기를 깨야하고, 다음 투쟁으로 이어주는 디딤돌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학생운동은 학생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반독재투쟁을 해야 하고, 그를 통해 학생운동의 소시민적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현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위장취업할 수밖에 없는데 감옥에 가는 것이 현장 들어가는 것에 장애가 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우선은 자기 현실조건에 충실하게 역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76년 2학기 초 어느 날 그는 같은 과 동기이면서 연합서클인 향토개척단 단장을 맡고 있던 친구 양춘승에게 자신의 뜻을 내비춘다. 그 장면을 신동호는 『70년대 캠퍼스1』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교문 앞에서 그(김창우)의 ‘콜’을 받은 양춘승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그 역시 지나가는 말처럼 되받았다.

“어디 할 놈이 있을까.”

김창우의 말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내가 좀 알아볼게.”

선문답 같지만 무서운 뜻이 담긴 대화였다.

이렇게 시작한 양춘승과의 데모 모의는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77년 5월 김창우를 감옥으로 인도했다.(자세한 과정은 신동호의 『70년대 캠퍼스1』 284쪽~293쪽 「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을 보라)

서울구치소에서 양춘승을 다시 만났지만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다. 서울구치소에 수용된 시국사범이 늘어나면서 소내 정치투쟁이 가열화되었고, 이것이 사건화 되어 주동자들이 추가 기소가 되면서 교도소 측이 수용자들을 전국적으로 분산시키기 시작했다. 김창우는 한신대 김하범과 함께 장기수들을 수용하는 광주교도소 특사로 보내졌다. 광주에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장기 징역을 살고 있는 이현배, 유인태, 김효순, 이강철 등이 먼저 와 자리잡고 있었고, 김창우가 간 뒤에 송기숙 선생 등 광주 팀들과 이영희 선생, 김병곤 등이 들어왔다.

광주교도소에서 김창우는 이강철, 김병곤 등 선배들과 함께 소내투쟁에 앞장섰고, 그 결과 운동시간을 재소자들이 자율 조정할 정도로 소내 처우가 현저히 개선되었다. 그러자 자신감을 얻은 이들은 함께 수용된 장기수들과 함께 마찬가지로 대우해 달라는 차별철폐투쟁에 돌입했고, 결국 그 요구를 관철시켰다. 그러나 교도소 측의 보복을 불러와 주동자들은 다른 교도소로 이감보내졌다. 이 때 이 일로 김병곤은 공주로 이감갔다.

서울구치소에서 소내투쟁으로 추가 기소된 김창우의 추가건 재판이 광주에서 열렸다. 김창우는 이 재판을 위해 공들여 항소이유서를 썼다. 한국사회의 성격과 민주화투쟁의 목적에 대한 과학적 규명을 위해 쓴 이 항소이유서는 소내 선배들에게 회람되어 호평을 받았다. 추가건 재판은 구형 2년에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징역생활이 길어지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노동운동과 6월항쟁

김창우는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사살되고 긴급조치9호가 해제되기 직전인 1979년 12월 5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광주교도소에서 얻은 신경쇠약증세는 석방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 바람에 석방 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려던 계획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 큰 아버지 농장에서 6개월 요양하다 직장생활 하면서 건강을 추스르기로 하고 1981년 6월 비교적 근무조건이 좋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에 입사했다.

83년 초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KOTRA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현장 취업 준비를 했다. 전기학원을 다니면서 전기기사와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 취득 후 전기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전기기술을 습득한 후 반월의 한 공장 변전실 전기관리공으로 들어갔다. 학력은 공고 중퇴로 위조했다. 신분이 탄로나 해고되지 않도록 조심해서 활동했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 일이 터졌다. 86년 서노련의 영향 하에 조직된 지하 노동운동조직 안산노동자해방동맹 사건이 터져 수사기관의 일제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집에 들어가지 않고 사태를 관찰하다가 자신의 집에까지 경찰의 손이 뻗치자 87년 초 김창우는 회사를 그만두고 정의헌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서 다시 공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던 중에 김창우는 역사적인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맞게 된다. 우선 취업은 유보하고 가두투쟁에 집중했다. 김창우는 밖에서 유인물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뿌렸다. 노동자대투쟁 때는 부산의 국제상사투쟁에 집중하고 현장에 있는 일꾼들과 연계하면서 지원투쟁을 조직했다. 6.29선언 이후 열린 대통령선거 국면에서는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활동은 하지 않고 부산노동자협의회라는 노동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노동자의 권익이나 이해를 선전 선동하는데 집중했다. 88년에는 단순한 노동상담 지원 단체에 지나지 않던 부산노동자협의회를 해체하고 87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올라온 선진 노동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부산노동자연합을 조직했다. 현장활동가와 선진노동자들의 조직이면서도 현장에 조직적 기반을 가지는 조직체로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노운협 운동과 지역노동운동

지역 노동운동에 전념하고 있는 김창우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서울의 전국노동운동협의회(노운협)를 구하라. 91년 민중당이 뜨면서 피디파 중심으로 노운협 활동가들이 대거 민중당으로 이동하자 노운협이 깨질 위기에 처했고, 이 노운협 유지를 위해 지방 활동가를 차출하기로 한 것이다. 김창우는 내키지는 않았지만 조직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와 노운협 실무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2년간 노운협에서 일하면서 박창수 사건, 전국연합 건설 등 많은 일들을 치루어냈다. 밤낮 없이 몸을 돌보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김창우에게 간경화가 찾아왔다.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다시 부산에 내려왔다. 93년의 일이다.

부산에 내려온 김창우는 집에서 요양하면서 다음 활동을 모색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전기기사 자격증을 활용해서 거제도와 부산 등에서 전기공사업체에 취직했다. 생활의 방편이면서 노동현장과 연결을 놓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대규모 실업이 발생하고 비정규직과 일용노동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김창우는 이들의 역량을 묶어낼 수 있는 방법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이들을 지역 중심의 노동자조직으로 담아내기로 결심하여 가까운 노동운동가들과 협의하여 2000년 부산지역 일반노조를 창설한다. 이 지역일반노조는 지역 연대 및 투쟁 중심의 노조조직으로 대기업 기업별노조 중심의 산별연맹 또는 산별노조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로 제기된 것이었다. 이 부산 일반노조의 활동은 초기에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민주노총 건설 이후 지역의 연대와 투쟁이 급격하게 소멸되면서 지역노동운동이 거의 무력화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역노동운동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조직형태로 주목받으면서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부산의 일반노조가 활발해지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가입 조합원 수가 1000명 가까이로 늘어나고 활동이 활발해지자 노동운동 정파들이 앞다투어 조직원으로 가입하여 정파들간에 조직 장악을 위한 경쟁이 벌어졌다. 경쟁이 가열되다보니 상대방에 대한 비방, 중상, 모략이 행해지면서 조직이 혼란에 빠졌다. 이를 보다 못한 김창우가 ‘교각살우(矯角殺牛) 우려가 있으니 서로 자제하자’고 충고하고 나섰다. 그러자 정파들은 ‘편드는 거냐’며 김창우까지 공격하고 나섰다. 정파들의 소모전에 넌덜머리가 난 김창우는 2003년 재충전을 이유로 노조 활동을 당분간 중단하기로 했다.

 

인생 후반전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다

2004년 노동운동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절감한 김창우는 창원 노동대학원에 입학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여년 노동운동의 경험과정에서 가진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석사논문 ‘전노협 청산에 관한 연구’을 작성하여 제출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2007년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전노협 청산과 한국노동운동’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이 책으로 2008년 2월 16일 ‘제3회 김진균상’을 받았다.

 

이 논문은 한국노동운동이 광범한 기층 노동자들의 꿈과 희망과 투쟁에 기초하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던 운동에서, 상층을 중심으로 한 법과 제도와 정책과 교섭에 의존하는 권력지향의 합법 개량주의 운동으로 변화해버린 것에 대해, 1995년 전노협이 청산되고 민주노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김창우는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이 지역적, 전국적, 산업적 공동투쟁과 연대투쟁을 통해 중소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계급적 단결과 연대조직으로서의 산별노조를 건설하기 보다는, 대기업노조 중심의 합법적인 기업별노조에 기초한 산별연맹의 과두적 지배체제로서의 민주노총이라는 조직형태를 채택했던 것이 문제의 근본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하층 조합원들의 연대투쟁과 조직역량이 중심이 아니라 상층 간부들에 의한 정치적 교섭과 정책을 중심으로 한 권력지향의 관료적인 조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현재 상태를 타개하는 길은 현재와 같은 무늬만 산별이지 실제적으로는 기업별노조에 기초한 산별연맹의 과두적 지배체제에 불과한 민주노총체제를 해체하고, 중소 영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체 세력에 의해 공동투쟁과 연대투쟁을 통해 계급적 단결과 연대조직으로서의 진정한 산별노조 또는 전국단일노조체제를 새롭게 건설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민주노총 건설의 역사를 바로잡고 첫단추를 새로 다시 꿰어야 비로소 한국노동운동이 본궤도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석사학위를 받은 김창우는 석사논문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자신의 이론을 실증적으로 입증할 필요를 느꼈다. 즉 민주노총이 70-80년대 민주노조운동정신과 전노협의 급진적인 사회변혁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청산’한 바탕 위에서 세워짐으로써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역사적 과정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2008년 그는 성남에 있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그리고 10년의 연구 끝에 2018년 ‘민주노총의 운동노선과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 1996~1998’이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에서 김창우는 민주노총 1기 집행부가 결국 상층중심, 교섭중심으로 가게 된 근본 이유는 기업별노조에 기초한 산별연맹들의 과두적 지배체제로서의 민주노총이라는 조직노선을 채택한 근본적 한계 때문이었고, 그 결과가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을 비롯한 민주노총의 거의 모든 투쟁과 활동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보고 있다.

김창우는 지금 의왕시 인덕원역 근처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면서 연구와 집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젊은 시절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어쩌다보니 혼기를 놓쳐 독신으로 살고 있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추구하면서 살아온 지금까지의 삶에 후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금 노동운동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움도 결국 가까운 장래에 극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전노협으로 출발했던 변혁지향적인 노동운동은 사회개혁(개량)주의를 표방하는 민주노총과의 노선 투쟁에서 패배하여 현재까지는 비록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기 위한 길은 계속 추구할 것이고, 새롭게 형성되는 새로운 주체세력에 의해 조만간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보고 있다. 자신은 첫 단추를 잘못 꿰어 잘못 흘러가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작은 기여나마 하고 싶다고 그는 말한다. 어쩌면 그의 인생의 후반전은 이제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공동선, 2019년 11-12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

목, 2020/02/2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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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어느 의회든 법안 검토는 의원의 본업이다

그렇다면 세계 다른 나라 의회에서는 법안 검토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 의회의 경우, 의원에 의하여 법안이 제출되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다. 위원회에 회부된 법안은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의하여 소위원회에 넘겨지는데, 소위원회는 청문회 개최(미국 청문회의 경우, 입법을 위한 청문회가 높은 비율을 점한다)와 꼼꼼히 조문 하나하나를 심사하는 축조(逐條)심사를 수행한다. 물론 상임위원회에서의 이 모든 활동은 의원들 자신들이 직접 수행한다.

프랑스 의회 역시 본회의든 상임위원회든 발언을 포함한 모든 진행이 의원들에 의하여 직접 수행된다.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법안의 각 조문에 대한 조문 투표를 실시한 뒤 법안 전체에 대한 전체 투표를 실시한다.

독일 의회는 각 정당 내 상임위원회마다 소그룹이 운영되고 여기에 각 정당에 소속된 정책연구위원들이 결합해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서 짧게는 6주에서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상임위 의제를 사전에 토론하고 조율하기 때문에 의원 개개인의 전문성도 향상되고 각 정당의 전문성도 당연히 증대되며 이는 의회의 전문성 제고로 이어진다. 소그룹에서 채택된 사항은 대부분 그대로 정당 전체의 견해로 채택된다.

정치 후진국이라 불리는 일본 국회의 경우에서도 법안에 대한 검토는 당연히 의원의 몫이다. 일본 국회에서 법안 제출은 의원법제국의 입법보좌를 받아(다만 이는 법률상 요건이 아니고 단지 참고 요건이다) 준비되고 정당 내의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법률안이 확정된다. 정당 내 절차는 정당 내 정무조사회(政務調査會)나 정책심의회 부회(部會, 전문 분야별로 모이는 회합을 가리킨다)를 거쳐 정책심의회나 혹은 정책심의회 전체회의 등에서 결정한다. 나아가 총무회나 중앙집행위원회 등 상부기관의 의결을 거친다.

 

법안 검토는 입법 과정의 핵심이자 본령(本領)이며 기본

그러나 우리 국회의 경우, ‘의회’의 이러한 국제적인 보편적 기준과 너무나 상이하다.

우리 국회에서 상임위원회에서의 검토보고는 법률안의 심사 과정 중 전체 위원회에서 법률안의 제안 설명이 끝난 뒤 ‘반드시’ 전문위원이 낭독하도록 되어 있다.

그 결과 채택되는 소위원회의 수정안 내용도 전문위원의 검토 내용과 대개 일치하는 경우가 많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에서 지적되지 않은 문제점은 위원회 심사과정에서 대체로 거론되지도 않는 성향을 보인다. 예산안에 대한 예비심사 검토보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예ㆍ결산 검토보고는 사실 이 분야에 대한 의원들의 전문성 및 시간 부족으로 법안 검토보고 경우보다 입법관료의 주도권이 훨씬 강하다.

결국 이렇게 하여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는 위원회 심사의 대강의 범위와 차원을 ‘제시’해 주며, 논의의 초점과 방향을 ‘정립’해 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실제 심의 결과 채택되는 소위원회의 수정내용 구성에서도 매우 큰 영향력이 발휘된다.

더구나 의사 진행에 대한 세부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국회의 입법관료들이 제시하는 선례에 대한 해석에 의하여 의사 진행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는 한국 국회의 현실에서 결국 위원회 입법관료들이 위원회의 심사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커지게 되어 있다. 실제로 위원회 운영상의 시나리오가 위원회 입법관료들에 의하여 작성되고 있으며, 위원장은 이들이 준비한 각본에 따라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검토보고서를 토대로 회의를 진행하게 되므로 검토보고서는 입법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변수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법안 검토’란 입법 과정의 핵심이자 본령(本領)이며 기본이다. 사실상 입법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검토’ 과정을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하는 것은 의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국회에서는 매일같이 입법토론회와 공청회가 분주히 열리고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서 법안 통과 문제로 ‘식물국회’니 ‘동물국회’니 볼썽사나운 살풍경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본질 왜곡을 가리는 변죽일 뿐이다.

 

공무원의 법안 검토보고’, 국민이 명령한 입법권에 대한 명백한 직무유기

상임위원회란 본래 정당 간 정책대결의 장이다. 미국 의회의 경우, 상임위원회 입법지원 인력인 스태프(Staff)는 18명의 전문위원을 포함하여 위원회당 평균 75명으로서 다수당과 소수당이 소속 의원 수에 비례하여 인원을 배정받고 소수당은 최소 1/3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일 의회의 상임위원회 입법지원 조직은 주로 교섭단체 정책위원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어 그 총수는 2004년 현재 837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우리 국회처럼 입법관료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사실 우리 국회에도 위원회 공무원과 별도로 이른바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이라는 제도가 존재하고는 있다. 각 교섭단체별로 의석수에 따라 배분되는데, 급여는 국회 예산에서 지급되고 국회 사무처 소속으로 별정직 공무원의 신분이다. 2019년 현재 총 인원은 67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은 당파성과 당에 대한 충성심에 비하여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당의 정책과 관련한 전문성보다는 상당수가 기본적인 자격에 있어서 부족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실질적인 능력과 역할의 측면에서도 대단히 취약성을 노출시켜 단지 개별 정당의 운영을 지원하는 데 치우치고 있다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을 정당 관료가 형식적으로 맡으면서 당료의 임금보전책으로 활용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2003년의 경우, 32명의 교섭단체 정책위원 중 25명이 당료 출신이었고, 6명이 국회 공무원 출신이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 집권 여당의 당정책위원은 기재부, 행안부 등 행정부 현직 관료들을 ‘편법’으로 임용하는 방식으로 충원하고 있어 국회 입법과정에 행정부 관료들의 개입을 적극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국회의 입법권은 지금 심각한 왜곡 상태에 놓여 있다. 국회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는 수 없이 많지만, 의원 입법권에 대한 침해라는 이 문제야말로 국회의 본원적 문제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국민들은 자기들을 대신하여 국가 입법을 수행할 대표를 선출해 국회를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인 의원들이 입법을 방기한다? 자신들에게 부여된 본업을 수행하고 있지 않는 이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또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변질된 국회이고, 왜곡된 국회이다. ‘의회로서의 기본’이 상실되어버린, 그리하여 이미 의회라 할 수 없는 국회이다. 기본이 왜곡되어서는 모든 일이 뒤틀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회 스스로 이 문제를 개선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실제 필자가 만난 한 중진의원은 의원들이 이 문제의 개혁에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현재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법률안을 논의할 경우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법률안을 읽고 요지와 주요 쟁점 등을 설명하는데, 그런 ‘귀찮은’ 일을 의원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심리에 형성되어 굳어진 이러한 자세 자체가 이미 왜곡된 우리 국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국민이 명령한 ‘직무’에 대한 명백한 ‘유기’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제기할 때 국회 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

지식인들과 시민운동은 이 문제의 중요성과 긴급성에 대하여 인식해야 하며, 그리하여 국회 개혁운동에서 가장 선결적인 문제로 제기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입법 수행을 최고 임무로 부여받은 국회의 본질적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인들과 시민운동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다면, 이 문제는 의외로 크게 여론화될 수 있고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국회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 언론은 대개 클릭수를 노리는 자극적인 기사나 가십성 뉴스에만 주목할 뿐 언제나 기본과 근본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는 더욱 혼탁해지고 더욱 분열되며, 말초와 지엽으로만 흐르게 된다. 이제 언론도 기본과 근본에 충실해 진정한 ‘사회의 목탁’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아나운서를 비롯하여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등 좀 유명세가 있다 싶으면 모두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그리하여 이 땅에서 국회의원이란 그저 ‘출세’와 ‘성공’의 가장 큰 상징으로 전락해버린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도 타파할 수 있다.

화, 2020/02/2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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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준은 해방 이후 전쟁까지의 남과 북을 편력한다. 그 출발지는 서울이다. 20대 철학과 3학년생인 그는 홀로다. 어머니는 죽고 아버지는 월북하고 없다. 대신 아버지의 친구인 은행 지점장의 집에 기식해 산다. 명준의 또래인 아버지 친구의 아들과 딸도 부르주아적 생활을 즐기는 데카당하고 향락적인 대학생들이다. 이명준이 냉소적으로 묘사한 당시 한국 사회의 모습은 이러했다.

정치? 오늘날 한국의 정치란 미군 부대 식당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그중에서 깡통을 골라내어 양철을 만들구, 목재를 가려내서 소위 문화주택 마루를 깔구, 나머지 찌꺼기를 가지고 목축을 하자는 거나 뭐가 달라요? …… 저 브로커의 무리들, 정치 시장에서 밀수입과 암거래에 갱들과 결탁한 어두운 보스들 …… 한국의 정치가들이 정치의 광장에 나올 땐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려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착한 길가던 사람이 그걸 말릴라치면 멀리서 망을 보던 갱이 광장에서 빠지는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오면서 한칼에 그를 해치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는 도둑놈한테서 몫을 타는 것이지요. 그는 그 몫으로 정조를 사고,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칼을 품고 광장으로 나옵니다. …… 바늘 끝만 한 양심을 지키면서 탐욕과 조절을 꾀하자는 자본주의의 교활한 윤리조차도 없습니다. 한국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꿏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옵니다. 문화의 광장 말입니까? 헛소리의 꽃이 만발합니다. …… 밀실만 푸짐하고 광장은 죽었습니다.

비루하고 천박한 욕망, 거친 폭력과 기만이 범람하는 곳, 이것이 명준이 본 남한이었다. 부르주아래야 미군 부대에 기생한 천민 부르주아요, 문화요 예술이래야 그런 부르주아 자제들의 시시덕거림에 불과하다. 이곳을 명준은 “키에르케고르 선생식으로 말하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체제의 핵심에는 적대감과 폭력이 놓여 있다. 부르주아적 삶에 기식하여 살면서 그 공허감을 “삶을 참스럽게 생각하고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책을 모조리 찾아 읽”는 것으로 해소하는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인 그에게 그 적대감의 실체와 대면하는 시간이 이윽고 찾아온다. ‘S서의 형사실’에서였다. 명준이 그 적대감의 먹잇감이 되었던 이유는 ‘반일투사이자 이름 있는 코뮤니스트’였던, 이제는 월북해 없는 그의 아버지 때문이다. S서에서 명준을 담당한 첫 번째 형사는 흥미롭게도 서북 사투리를 쓰고 있다.

“좋아. 소식 자주 듣나?”
“네?”
“아, 이 새끼, 가는귀가 먹언.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네 애비 소식 말이야.”
……
“손목때기 티우디 못하간? 인나!”

명준은 겁에 질려 오뚜기처럼 벌덕 일어선다. 곧바로 얼굴에 주먹이 날아온다.

명준은 아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나자빠지다, 의자에 걸려 모로 뒹군다. 끈적끈적한 코밑에 손을 댄다. 마구 코피가 흐른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한 손을 코에 댄 꼴이 흡사 개 같다 싶어, 엉뚱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쿡 웃는다. 그러자 여태까지 무서움이 씻은 듯 가신다.

“어? 이 새끼 봐, 웃어? 오냐 네 새끼레 그런 줄 알았다. 이 빨갱이 새끼야!”

이번에는 발길이 들어왔다. 간신히 피한 발길이 어깨에 부숴지게 울린다. 명준의 알 수 없는 품으로 벨이 틀린 나으리는 발을 바꾸어가면서 매질을 거듭한다. 어깨, 허리, 엉덩이에 가해지는 육체의 모욕 속에서 명준은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는다. 아, 이거구나, 혁명가들도 이런 식으로 당하는 모양이지, 그런 다짐조차 어렴풋이 떠오른다. ……

“엄살부리지 말고 인나라우. 너 따위 빨갱이 새끼 한 마리쯤 귀신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 있어. 너 어디 맛 좀 보라우.”

해방 후 고향을 ‘빨갱이’에게 내주고 월남한 기독교 서북, 지주 서북 세력의 ‘좌익’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잘 알려져 있다. 이 형사도 그러한 사람이었으리라. S서 형사실의 두 번째 조사에서 명준은 남한 체제 폭력성의 더 깊은 뿌리를 목도한다.

그자(형사)는 명준을 젖혀놓고 동료 쪽으로 돌아앉아서 겪은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명준은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또 한 번 놀란다. 그는 자기 전성 시대라면서, 일제 때 특고 형사 시절에 좌익을 다루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특고가 마치 한국 경찰의 전신이나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말투에는 일제 시대에, 그 학교의 전신이던 학교에 다닌 선배가, 그 소위 후배들을 앞에 놓고 옛날, 운동으로 날리던 얘기에 신명이 났을 때의 도도함이 있다. 그의 옛날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까, 명준은 자기가 마치 일본 경찰의 특고 형사실에 와 있는 듯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형사의 얘기는 그토록 지난날과 지금을 뒤섞고 있다. 빨갱이 잡는 걸 가지고 볼 때 지금이나 일본 시절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완연하다. 일제는 반공이다. 우리도 반공이다, 그러므로 둘은 같다라는 삼단 논법. 그는 ‘아까 아까’(일본어로 빨갱이)를 거푸 지껄인다.

명준은 “벌레처럼, 그 누군가 커다란 발길이 그, 이명준을 비비고 뭉개어 티도 없이 지워버리”는 몽상에 빠진다. “나는 법률 밖에 있는 건가” 자문하고 “돈과 마음과 몸을 지켜준다는 ‘법률’의 밖에 있는 어떤 삶”이 자신의 것이 된 것을 느낀다.

환멸 끝에 명준은 남한을 버리고 북조선을 선택한다. 아버지를 찾아서도, 아버지의 신념을 찾아서도 아니었다. 다만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 아니, 자신과 밝은 자유를 나눌 사랑이 있는 ‘광장의 꿈’을 찾아서였다. 과연 명준은 북조선에서 그러한 광장을 찾았던 것일까.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 저녁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이 고장 됨됨이를 똑똑히 느끼기는, 넘어와서 바로 북조선 굵직한 도시를, 당이 시켜서 강연 걸음을 했을 때였다.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락 높은 말을 쓰고 있는 자신이 점점 쑥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강연 원고만 해도 그랬다. 몇 번이나 당 선전부의 뜻을 받아 고쳤다. 마지막으로 결재가 났을 때, 그 원고는, 코뮤니스트들의 늘 하는 되풀이를 이어붙인 죽은 글이었다. 명준이 말하고 싶어 한 줄거리는, 고스란히 김이 빠져버리고, 굳이 명준의 입을 빌려야 할 아무 까닭도 없는 말로 둔갑해 있었다. ……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남한의 ‘S서 형사실’에 평행하는 북조선에서 명준의 체험은 《노동신문》 편집부 당 세포모임의 ‘자아비판회’에서 이뤄진다. 이 체험은 S서 형사실에서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하지만, 그 강도는 결코 덜하다 할 수 없다. 선배 당원들은 후보당원인 명준의 기사를 문제 삼는다. 그들은 명준이 “남조선 괴뢰 정부 밑에서 썩어빠진 부르주아 철학을 공부하던 시절의 반동적인 생활 감정에서 자신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와 같은 반동적 사고 방식을 마치 정당한 것이기나 한 것처럼 반성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비판한다. 명준은 자신의 기사는 있는 사실을 썼을 뿐이라고 항변해보지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적대감과 증오다.

“인민이 쟁취한, 풍족한 물질 생산 수준에 대해서 회의적인 보도를 하는 것은, 동무 자신의 가슴과 머리 깊이 박혀 있는 소부르주아적인 인텔리 근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체 인민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며, 빛나는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는 이 역사적인 마당에, 이명준 동무는 전혀 자신의 주관적 상상에 기인하는 판단으로 트집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 명준은, 대들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을 죽였다. 그를 향하고 있는 네 개의 얼굴. 그것은 네 개의 증오였다. 잘잘못간에 한번 윗사람이 말을 냈으면, 무릎 꿇고 머리 숙이기를 윽박지르고 있는 사람들의, 짜증 끝에 성낸, 미움에 일그러진 사디스트의 얼굴이었다. 명준은 문득 제가 가져야 할 몸가짐을 알았다. 빌자, 덮어놓고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자. 그의 생각은 옳았다. 모임은 거기서 10분 만에 끝났다. 명준은 사무친 낯빛을 하고, 장황한 인용을 해가며, 허물을 씻고 당과 정부가 바라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했다. …… 슬픈 깨달음이었다. …… 가슴에서 울리는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옛날 그는 S서 뒷동산에서 퉁퉁 부어오른 입언저리를 혓바닥으로 핥으면서 이 소리를 들었다. 그의 마음의 방문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번 것은 더 큰 울림이었다. 그러나 먼 소리였다. 무디게 울리는 소리. 광장에서 동상이 넘어지는 소리 같았다.

그는 침묵하는 아버지 앞에서 절규한다.

(노동신문) 편집자는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혼자서 공화국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이 명령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곧 공화국을 위한 거요. 개인주의적인 정신을 버리시오’라구요. 아하,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 저는 월북한 이래 일반 소시민이나 노동자 농민들까지도 어떤 생활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할 뿐입니다. 그들은 굿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끌려다닙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구호를 외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민이란 그들에겐 양떼들입니다. 그들은 인민의 그러한 부분만을 써먹습니다. 인민을 타락시킨 것은 그들입니다. 그리고 북조선의 공산당원들은, 치사하고 비굴하고 게으른 개들입니다.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라? 하하하 ……

전쟁 때 인민군 복장으로 남으로 내려온 명준은 이미 북의 체제에 대한 신념을 잃은 자였다. 전쟁은 그에게 “잘못하면 ‘역사’는 자기를 남겨두고 줄달음칠 것 같은 무서움”을 주었다. 해방군으로 그리고 정치보위부의 간부로 서울로 내려왔을 때 차라리 악당이 되어보자고 위악(僞惡)한다. 과거 그를 법 밖으로 몰아냈던, ‘S서’의 지하실에 끌려온 은행장 아버지 친구의 아들이자 그의 친구인 T와 마주쳤을 때였다. 명준은 그가 당했던 폭력을 T에게 휘두른다. 자신이 휘두른 폭력에도 명준은 환멸한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 전선에서 그는 조그만 동굴을 발견한다. 전선에서 우연히 재회한 애인과 그들만의 작은 동굴에서 나누는 밀회의 시간에만 삶의 의의를 건다.

“왜 이런 전쟁을 시작했을까요?”
“고독해서 그랬겠지.”
“누가?”
“김일성 동무지.”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한참만에, 이쪽으로 돌아누우면서, 명준의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자기가 외롭다고 남을 이렇게 할 권리가 있나요?”
“권리? 권리가 있어서만 움직인다면 벌써 천당이 왔을 거야.”
“김일성 동무는 애인이 없었던가보지요?”
“있어도 신통치 않았겠지.”
“이 동무가 수상이라면 어떡하시겠어요?”
“나? 나 같으면 이따위 바보 짓은 안 해. 전쟁 따윈 안 해. 나라면 이런 내각 명령을 내겠어. 무릇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은 삶을 사랑하는 의무를 진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적이며, 자본가의 개이며,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다. 누구를 묻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한다. 이렇게 말이야.”
“하하하.”
그녀는 남자처럼 웃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잡고 있는 명준의 목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런 시인을 수상으로 가진 인민들만 봉변이군요.”
“시인? 아 그럼 그 과학적인 친구들이 앉아서 한다는 게 요꼴인가? 아니야.”

명준의 아이를 잉태한 여자는 전사하고 명준은 포로가 된다. 포로 송환 등록이 시작되었을 때 제삼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준은 “바로 자기를 위해 마련된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보기에 북은 “미친 믿음이 무서운” 사회라면 남은 “숫제 믿음조차 없는 허망한” 사회다. 그러나 남은 “타락할 수 있는 자유와, 게으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정말 그곳은 자유 마을이었다”고 야유한다.

북녘에는 이 자유가 없었다. 게으를 수 있는 자유까지도 없었다. 그건 제 멋 짓밟기다. 남한의 정치가들은 천재적이었다. 들어찬 술집마다 들어차서, 울랴고 내가 왔던가 웃으랴고 왔던가를 가슴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대중을 위하여, 더 많은 양조장 차릴 허가를 내준다. 갈보장사를 못 하게 하는 법률을 만들라는 여성 단체의 부르짖음은 그날 치 신문 기사거리를 만들어주는 게 고작이다. 그들의 정치철학은 의뭉스럽기 이를 데 없다. 그런 데로 풀리는 힘을 막으면, 물줄기가 어디로 터져 나올지를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에겐, 진심으로, 교회에 나가기를 권유하고, 외국에 보내서 좋은 가르침을 받게 하고 싶어 한다. 이런 사회. 그런 사회로 가기도 싫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남북 간의 전쟁 통에서도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을 찾지 못한 명준은 차라리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땅. 하루 종일 거리를 싸다닌데도 어깨 한번 치는 사람이 없는 거리. 내가 어떤 사람이었던지도 모를뿐더러 알려고 하는 사람도 없”는 곳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어떤 광장도, 광장의 꿈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명준의 최종선택은 아무도 없는 밤, 중립국행 선상에서 망망한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었다.

북조선이 표방한 ‘자유 조선’이란 일본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의미했다. 그러나 명준의 눈에는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이 없는, 자유 대신 ‘미친 믿음’이 지배하는 사회일 뿐이었다. 반면 남한이 표방한 ‘자유 대한’은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를 말했다. 그러나 명준이 보았던 남한은 ‘실존하는 인간이 없는 광장 아닌 광장’의 사회, 타락과 기만과 폭력이 만연한 공간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울러 물어야 할 것이다. 이명준이 냉소하고 환멸했던 ‘S서의 형사들’과 ‘자아비판회의 네 얼굴들’은 자신들 나름의 ‘자유 대한’과 ‘자유 조선’에서 어떠한 자유와 책임을 추구했을까? 과연 자유와 책임이 있기나 했을까? 그들 자신이 품었을 열정과 의지는 무엇이었을까? ‘자아비판회’의 노동당원들에게 ‘자유 조선’이란 ‘반일, 반미, 반봉건’의 조국해방의 열망이었을 것이고, S서의 그 형사들에게 ‘자유 대한’은 ‘반공·반북’의 북진통일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자유’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상대를 부정하고 소멸시킴으로써만 존립 가능하고,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서 그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민족사 앞에 그들이 자임한 ‘책임’일 것이다. 이러한 대립적·적대적 에너지가 남과 북에 거대하게 집결하고 있었다. 전쟁은 이렇듯 해방 정국 속에서 이미 배태되고 있었다. ‘자유 조선’을 위해서, ‘자유 대한’을 위해서 서로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삼았던 남과 북은 이 증오를 국지적 내전에서 전면전으로 밀고 나갔고, 전면전으로 확대된 이 전쟁은 급기야 남북의 통제권을 벗어나 국제전으로 확산되었다.

명준은 이 전쟁의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자유 대한’과 ‘자유 조선’의 에너지는 이 전쟁의 와중에 죽지 않았다. 오히려 강해졌다. 전쟁은 ‘자유 대한’과 ‘자유 조선’의 체제적 권능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절대적 힘이란 무제한적 자유이기도 하다. 그 무제한적 자유는 양편 국민대중과 인민대중 각각의 눈앞에 불구대천의 원수, 절대적 악마를 창조해냈던 위대한 마법사에게 마땅히 돌아갔던 특별한 상훈(賞勳)이었다. 무제한적 자유를 확보한 남북 두 국가체제 속에서 명준의 자유는 설 곳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명준 사후, 그가 남긴 보이지 않는 길을 헤쳐가야 했던 김낙중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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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2/2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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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철학자 아도르노는 근대 이성이 동일자라는 실체의 도구로 전락되어 합리적 이성의 주체들이 세계대전을 일으키게 되는 과정을 연구하면서 근대이성의 한계를 철저히 폭로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그는 근대이성이 동일자의 도구적 존재로 추락하게된 근본적인 이유로 해겔의 변증법을 들고 있는데 그 이유는 헤겔의 변증법이 통일성과 단일성, 전체성을 향한 목적론적인 기획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헤겔의 변증법은 타자의 지양을 통해 자신의 통일적인 고양을 멈추지 않은채 절대정신을 지향하므로 결국 단일한 절대정신을 향한 목적론적이며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낳을 수밖에 없어 결국 이는 정치적으로 전체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추앙하지않을 수없어 나치즘과 파시즘의 이론적 토대가 되지않을수 없었다고 헤겔의 변증법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비판은 이미 레비나스의 헤겔의 변증법은 물론 하이데거의 존재론 비판에서도 오롯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여 그는 통일성, 전체성의 변증법을 거부하면서 부정의 변증법을 제시 하는데 이는 끝없는 상호 부정을 통해 존재들의 비동일성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변증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내부적 또는 외부적 모순인 타자를 지양Aufheben하지 않고 대신에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 다만 대자를 통하여 자신의 모순과 한계를 깨달아 자신을 끝없이 부정하고 고양시키는 것으로 헤겔처럼 즉자와 대자를 동일적 통일체인 즉자-대자로 종합시키는 대신에 부정적인 대자를 통하여 자신을 부정하고 나아가 승화시키는 부정의 변증법이 존재의 법칙 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근대 주체철학의 오만한 실체인 주체를 대변하는 이성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존재는 공존을 위한 생성이라는 니이체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는데 이런 관점에 바탕하여 니이체의 또 다른 제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아도르노와 유사하게 재해석하면서 차이의 변증법(역사는 즉자가 대자의 지양을 통한 즉자-대자로의 고양,통일이 아니라 즉자와 대자가 끝없이 투쟁을 통하여 서로 비통일적으로 각자 발전 해간다고 보는 관점 입니다)을 새로운 변증법으로 제시하게 됩니다.

결국 헤겔의 변증법은 근대의 실체론적인 ‘인식론’에 기반한 것이라면 아도르노나 지젝의 변증법은 현대의 생성론적인 ‘존재론’을 반영한 변증법이라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차이와 부정의 변증법은 모순인 대자의 존재를 인정한채 즉자 자신의 내부적 모순을 부정하면서 고양하는 입장을 띄고있기에 푸코에게서 보듯이 자아는 타자, 소수, 다수성, 고유성, 차이성을 지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모순인 대자를 즉자의 내포와 외연속에서 확대해나가는 공존의 생성원리할 것입니다.

하여 아도르노는 그의 예술관에서 예술가는 동일자의 이데올로기에 무조건 복무하지않고 대자들의 고유성과 차이를 드러내면서 이들을 통하여 기존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극복하기위하여 동일자의 위선과 허상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부정의 변증법을 적용하는 것이 예술가의 본연의 임무라고 강조 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어용 예술가들이 차이를 지양 하고 자본과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전체적인 절대정신으로 승격시키고 권력과 자본의 음모에 복무시키기위한 음험한 방법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진정한 예술은 즉자를 대자의 지양을 통한 즉자-대자로 고양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수, 차이, 다수성 으로 이루어지는 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들의 비동일적 독립성을 지키기위해 자본과 권력에 끝없이 저항,투쟁하는 것이 부정의 변증법에 부합하는 예술이라고 다시금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술은 절대정신과 같은 언어, 이성, 사유의 산물인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실상physis 의 모방mimesis을 통하여 존재의 있는 그대로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기에 이념과 같은 실체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하는 것이 예술의 목표라고 갈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지젝은 자신은 실체를 해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지만 한편 해체에 머물지 않고 이성에 기하여 해체된 세계를 재구성하기에 후기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여 그는 이성의 법칙인 헤겔의 변증법을 재도입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바와같이 그도 아도르노와 같이 동일자, 일자, 대타자와 같은 실체를 거부하고 차이, 소수, 다수성의 대자를 인정하기에 모순을 지양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즉자와 대자의 공속성과 비동일적 독립성을 인정하여 즉자와 대자는 서로의 차이를 끝없이 확인하면서 자기모순을 수정, 보완하는 생성론에 입각한 차이의 변증법이 진리의 변증법이라고 제시합니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그는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계승하면서 상징계의 대타자인 이데올로기가 결코 실체가 아니라 허상에 불과하기에 이를 끝없이 폭로하고 해체하여야한다고 주장하기에 존재의 실상을 드러내는 실재계로넘어가는 향유enjoyment 를 시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여 끝없이 대타자인 이데올로기에 예속,매몰 되지 않고 자기만의 비동일적 고유성, 독자성이 드러나는 실재계로의 끝없는 지향을 시도해야 하는데 이에 그는 대타자 와의 끝없는 차이의 투쟁을 통해서만 실재계로의 틈입이 이루어 진다는 차이의 변증법을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지젝도 타자를 지양하며 통일자, 동일자, 전체자로의 고양을 지향하는 즉 강자가 약자를 억압, 지배하는 실체론에 입각한 헤겔의 변증법을 버리고 타자와의 공존을 인정하고 타자와의 차이를 통하여 자신의 모순을 수정, 보완하는 차이의 변증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현대의 존재론은 존재를 실체로 상정하여 강가 약자를 지배하는 실체론이 아니라 모든 존재는 사건들이 등가적으로 공속하며 공존으로 생성하는 생성론으로 전환이 되었기에 타자를 억압하고 배제하고 지양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타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외부자의 모순보다는 자아 내부의 자생적 모순이 더욱 심각한 결핍이라는 것을 깨닫고 타자와의 차이를 통하여 역지사지하는 부정과 차이의 변증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할 것입니다.

특히 근대가 세계를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으로 나누어서 바라보는 실체론적 인식론에 머물렀다면 현대는 세계를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는 실체론이 허구임이 드러나게 됨에 따라 주체와 대상으로 분리가 불가능해졌으며 나아가 모두가 등가적인 주체로서 서로 필연적으로 내재적인 생성관계를 맺는 생성론적인 존재론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즉자는 타자를 지양해야할 모순이 아닌 피할 수없는 동반자임을 인정하면서 타자를 통하여 자신의 모순을 찾아내고 이를 수정, 보완하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타자를 생성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도 필요하다할 것입니다.

한편, 오늘날 아도르노와 지젝의 부정과 차이의 변증법은 불교의 중도법과 양자역학의 중첩성이론과도 궤를 같이 한다할 것이기에 각 영역의 융합이 필요하다할 것입니다.

수, 2020/03/04-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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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이명준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즈음, 김낙중은 그의 ‘평화통일’의 편력을 시작한다. 1954년 4월. 놀라운 일치다. 바로 그 시간, 삭발을 하고 흰 한복을 걸친 24세의 수척한 한 청년이 대낮에 ‘탐루(探淚)’ 즉 ‘눈물을 찾는다’라고 쓴 등불을 들고 부산 광복동 거리를 홀로 배회하였다. “피묻은 잿더미가 아직도 성에 차지 않아 (여전히) 무력북진을 부르짖는 권력자에게 항거”하고자 했던 청년 김낙중의 일인시위였다. 휴전협정은 이뤄졌지만, 당시까지 부산은 아직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많은 피난민들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청년은 거리를 헤매며 외쳤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전선에서 피를 토하며 죄 없이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 땅의 아들들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며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없는가? 이 겨레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세계열강의 분할 정책을 반대하며, 진정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는가?

20세에 전쟁을 맞은 김낙중은 서울, 파주, 대구, 부산 등에 머물며 세상이 이쪽저쪽으로 번갈아 뒤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어느 쪽을 향해서도 총을 쏘고 싶지 않았다. 도피해 다녔다. 고교 교사의 소개로 미군 취사부에 몸을 의탁해 접시를 닦다 임시수도 부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52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국민병 징집을 피하려는 목적이 컸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이곳에서도 학생들을 동원하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게 했다. 김낙중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도피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도피할수록 정체 모를 죄의식도 커졌다. 그는 53년 어느 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자. 더 이상 주저하지 말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피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망설이지 말고 실천에 옮기자.

그리하여 ‘탐루’ 등불을 든 일인시위에 나섰던 것인데, 이 해프닝은 북부산서 형사들에게 끌려가 따귀를 맞고 훈계 방면되는 것으로 끝났다. 오늘날 ‘일인시위’는 참신한 시위방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저 ‘정신 나간 행동’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탐루’ 시위는 자유인 김낙중의 원형적 특징을 집약한다. 그는 평화통일의 염원을 인간의 눈물이라는 구도적 동기와 연결시켰다. 더 이상 개인적 도피에 그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적극적 자유의 구현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고 이를 보편적 인류애의 호소와 연결시켰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개인의 차원이었지만, 그가 품은 자유와 책임의 폭은 그만큼 넓었다. 이 해프닝 이후 그는 서울로 돌아와 대학을 다니며 “민족 전쟁과 이데올로기 싸움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에 전념한다. 그리고 아래 취지의 호소문을 두 통 작성했다.

다시는 이 땅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살 길은 ‘평화통일’뿐이다. 그리고 서로 피투성이가 된 남북의 어버이들이 이제 와서 양보와 타협으로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젊은 세대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공동의 광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공동의 광장’이라. 이명준이 꿈꾸었던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광장’과 중첩되고 있다. 작가 최인훈의 상상력은 이렇듯 살아있는 김낙중의 꿈속에서 이미 선취되고 있었다. 김낙중은 이 호소문을 판문점을 직접 찾아가 남북 당국에 동시에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54년 9월 말 금촌에 주둔한 해병대 사단 사령관실을 찾아가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판문점으로의 안내가 아니라 파주 경찰서로의 연행이었다. 이어 경기도 경찰국, 다시 치안국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봐야 김낙중에게는 경찰이 트집 잡을 아무런 ‘조직 전력’, ‘좌익 전력’이 없었다. 그는 그저 혼자 행동하는 젊은이였다. 그저 철없는 학생의 정신 나간 기행(奇行)일 뿐이라 생각한 수사관들은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호통쳤다. 이번에는 그냥 훈방하지 않았다. 청량리 정신병원에 며칠 강제 수용시켰다. 나흘째 되는 날 치안국 분실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일장 훈시와 교양 교육을 시킨 후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김낙중은 좌절 앞에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앞으로 나간다는 점에서 이명준과 다르다. 귀가한 김낙중은 자신의 평화통일안 완성에 더욱 매진했다. 그해 겨울을 온통 이 작업에 몰두한 끝에 김낙중은 30여 개 조문에 이르는 기본조약과 8개의 부속협정들로 이루어진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수립안)’을 완성했다. 1955년 2월, 우선 이 수립안과 취지서를 경무대(오늘날 청와대)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했다. 그러나 나흘 후 돌아온 건 경무대경찰서 압송과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이었다. 보름 동안의 가혹한 심문과 훈계 후에 김낙중은 또 방면된다.

그의 ‘수립안’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 남북이 서로의 통치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휴전선에 ‘초국가기구’인 ‘청년공동체’를 설립하고, 이 공동체가 점차 남북 양측의 주권을 이양받아 (15년 이내에)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청년’이란 ‘1950년 6월 25일 현재 만 20세 미만인 자와 그 이후에 출생한 자’이고, 그 공동체가 수립될 곳은 ‘비무장지대와 판문점 부근의 1,000평방킬로미터의 지역’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직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길이라 주장하고 있던 당시 이승만 정권에게 청년 김낙중의 이 ‘수립안’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위장 빨갱이’ 아니면 ‘미친놈 잠꼬대’였을 것이다. 전쟁 직후라 경찰 조직도 어수선했던 탓인지, 아니면 분단체제가 아직은 어설픈 상태였던 탓인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경찰은 김낙중을 풀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시경 사찰과장’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이놈아, 어린놈이 뭘 안다고 까불어. 공산당이 우리들하고 똑같은 사람인 줄 알아? 얼마나 무자비하고 지독한 폭력주의자들인데. 그놈들이 지금 휴전을 시켜놓고 눈이 시뻘개 가지고 새로운 전쟁 준비에 날뛰고 있는 판에 무슨 놈의 평화통일이야. …… 그것은 네가 공산주의자가 뭔지도 모르고 하는 철부지 소리야. 공산당이 들어주지도 않을 실현성 없는 공상을 가지고 들고 다니니 네가 미친놈이지 뭐야? 공연히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가서 공부나 해. 송청해서 형무소로 보낼 수도 있지만 네 나이가 아직 어리고 해서 고려해주는 거야.

그러나 김낙중의 ‘자유혼’은 여기서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결정적인 도약’을 감행한다. ‘자유혼의 도약’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과연 자신을 훈계했던 사람들 말처럼 북한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일 뿐이며, 따라서 ‘대화가 불가능’한 것일까.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그의 통일방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통일방안으로 북측을 설득하고 싶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김낙중은 1955년 6월 25일 단신으로 임진강을 헤엄쳐 건넜다. 그가 강을 건넌 곳은 자신이 자란 파주의 고향마을과 멀지 않은, 따라서 그에게는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이제 강 저쪽과 이쪽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오히려 익숙하지 않았다. 강 저쪽도 그가 자란 고향 동네의 일부였을 뿐이다. 남과 북의 현실의 경계가 오히려 낯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낙중은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도강(渡江)에 성공한다. 그저 ‘동네 마을 강 건너기’라고 생각했겠지만, 수영도 익숙하지 않은 데다 폐병으로 허약한 체력, 그리고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이 그의 생명을 위협했다.

도강 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한 농가에서 잠을 청하다 김낙중은 체포된다. 그리고 개성을 거쳐 평양의 내무서 예심처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다. 여기서 김낙중은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간첩 혐의’를 받게 된다. 아니 간첩이 되어야만 했다. 김낙중의 진심을 북은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한 새파란 젊은이가 홀로 작성한 통일방안을 가지고 북 당국과 토론하기 위해 목숨 걸고 월북했다? 그들이 보기에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예심처 취조원은 김낙중에게 오직 간첩죄를 자백하라고 강요할 뿐이었다. 다른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허망하게 처형당하거나 끝 모를 감옥살이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김낙중은 궁리 끝에 스스로 없는 ‘한미 고용 간첩’이 되어야 했다. 그가 소지하고 온 통일안은 한미 정보부에서 만들어준 것이고, 만일 이 안을 들고 간 사람을 북이 죽이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이고, 살려 보내면 당장 전쟁을 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보겠다는 게 한미 정보부의 뜻이라는 픽션을 만들어냈다. 이 픽션을 북이 믿어주기를 기대했다. 북의 공식자료가 없으니 당시 평양 내무성에서 김낙중의 이 진술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탐루』에 따르면 결국 북은 김낙중의 자백을 믿어보기로 한 것 같다. 그가 소지한 통일안에 대해 토론도 해주고 건강 회복을 위해 요양치료도 해준다. 그리고 최종선택권을 김낙중에게 준다. 남으로 돌아가도 좋고 이곳에 남아도 좋으며, 남는다면 공부하도록 돕겠다고까지 했다 한다. 김낙중은 자신이 북에 온 목적 즉 “북한의 입장을 듣고 다시 남한으로 내려가 어떻게든 우리 민족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겠다”는 뜻을 상기하여 다시 월남하는 길을 선택한다.

1956년 6월 23일 새벽 김낙중은 경의선 철길을 따라 월경, 미군 초소에 ‘귀순’하여 서울 대방동의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미군 방첩대 조사를 거쳐 한국 경찰 특수정보과에 인계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미군과 한국 경찰 역시 김낙중을 간첩으로 간주했다. 이후 재판에서 김낙중은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1957년 6월 22일 출옥한다. 임진강을 건넌 지 딱 2년 만이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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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3/0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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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지를 찾아가는 세상의 의사들은 모두가 존경스럽다. 현재 한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대구로 모여든 의사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훈훈한 소식이다. 그들을 응원하고, 고마운 마음은 지나침이 없는 일일 게다. 새삼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고민해 봄 직한 소식이었다. 그래서 쿠바 의사에 대해 잠시 이야기해보려 한다. 쿠바에는 누구나 가족 주치의가 있다는 사실로부터.

쿠바 의료시스템의 높은 의료적 성과는 비록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하여 이미 국제 사회에서는 널리 통용되는 사실이다.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은 의료복지를 갖추고 있는 캐나다와 같은 선진국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따라서, 어떻게 제3세계 쿠바의 의료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의료적 성과를 낼 수 있었는가를 궁금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나의 질문은 첨단 의료시설은 고사하고 반세기가 넘는 미국의 금수 조치로 인해 만성적인 물자 부족이 일상이 되어버린 곳 쿠바에 정착된 의료시스템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된 사회적 잠재력은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향하게 되었다. 어쩌면 쿠바 역사의 한 축이 되어버린 사회주의 체제라는 큰 틀을 벗어 나서는 설명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물음이 계속되는 것일지도.

쿠바에는 콘술또리오(consultorio)라는 의료시설이 있다. 보통 국내에서는 진료소라고 알려져 있고, 우리가 가정의라고 일컫는 의사와 한 명의 간호사가 기본 의료팀을 이룬다.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의 가장 기본단위이자, 보건의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해당 지역주민의 전반적인 건강상태를 비롯하여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 질환자 관리는 물론 고위험군 질병을 앓는 주민이나 노인과 임산부, 신생아 등과 같은 특별한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까지 진료소의 의료진들은 언제나 바쁠 수밖에 없다.

지역 골목의 곳곳에 포진된 진료소에서 공식적으로 담당하는 주민이 800여 명이 넘지 않도록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1,000여 명이 훌쩍 넘고 있으니, 가정의와 간호사가 어지간히 바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렇지만 노동강도가 높기로 소문난 한국사회 출신이라서 그럴까. 내게 그들의 일상은 심지어 평화롭게 느껴지니 난감할 뿐이다.

진료소의 상급기관인 폴리클리닉(Policlinic)은 진료소 수준에서 불가능한 정밀검사를 받아야 할 때 가정의의 처방에 따라 방문하는 의료기관이다. 약 20~30여 개의 진료소를 총괄 지휘하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공중보건이 이루어진다. 그렇다고 가정의를 통해서만이 폴리클리닉을 방문해야 한다는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민들은 언제든지 지역 근처에 있는 폴리클리닉에서 필요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가정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폴리클리닉을 찾는 이유는 수만 가지에 이를 테니 그 세세한 사정까지는 어찌 다 알 수 있으랴.

쿠바 진료소의 가정의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지만 “가족 주치의”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소위 “가족 차트”를 기록하여 가족 구성원의 기본정보를 포함 질병 유무, 건강상태, 생애주기 등을 기록하여 전반적으로 지역 구성원들의 건강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의사의 방문이 요구되는 특별한 경우, 예를 들어 신생아나 암 환자 등과 같은 중증 질병을 앓고 있다면 가정의나 간호사의 가정방문은 필수적이다. 이 외에도 가정의와 간호사는 정기적으로 해당 지역의 가정을 방문해야 하는 지침도 마련되어 있다.

한국사회에서 개인 주치의를 갖는다는 것은 재벌들이나 유력 정치인들이나 누릴 수 있는 호사일 뿐 나 같은 ‘인민’들에게는 언감생심 주치의가 가당키나 할까. 나의 건강을 수시로 물어보고 살펴봐 주는 주치의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쿠바 사람들에게는 이미 일상이지만,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되는 의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가족의 안부를 묻는가 하면 어디 불편한 곳은 없는지 관심을 받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호사이니 살짝 부러운 제도임에는 분명하다.

쿠바 보건의료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진료소와 폴리클리닉은 이른바 “일차의료”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다. 이미 발병한 질병을 다루는 임상의학 못지않게 예방의학을 더욱 강조하는 시스템이다. 결국, 질병의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하고 예방하는 것이 일차의료 활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떡하면 이 같은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는가이다.

의료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건강추구와 의료행위는 단순히 근대적 의미의 의학적 측면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문화적인 맥락이 고려된 총체적인 문화적 실천으로 파악해야 한다. 한 문화에서 진행되는 질병과 의료에는 그 문화의 사회적 역사적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주장에 기대어 보면, 보건의료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은 쿠바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물론 역사적 경험까지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편에서는 낙후된 쿠바 의료시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쿠바 의사들의 높은 사명감이나 헌신적인 인류애를 칭송하는 일에 머무는 것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인다.

약 2년 전 20년 경력의 베테랑 간호사이자 현재는 연구자인 동료와 함께 쿠바 진료소에 근무하는 가정의와 간호사의 일상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은 당시 작성한 현장 스케치의 일부이다.

진료소 앞 누군가 지나갈 때마다 저 사람인가? 이 사람인가? 초조하게 엉덩이를 들썩이길 20여 분. 드디어 진료소 건물 아파트에서 남성 한 명이 진료소로 들어갔다. 드디어 가정의를 만나는 구나! 설렐 틈도 없이 남성은 다시 문을 잠그고 헬멧을 쓰고 뒤따라온 딸인 듯 보이는 여자아이에게까지 헬멧을 씌워 오토바이에 태우고 떠나려 한다. 깔마춤이라도 한 듯 어여쁜 노란색 오토바이와 노란색 헬멧을 쓴 모습이 영락없는 푸후(예쁜 곰돌이)를 연상케 했다. 흔히 의사에게 느껴지는 위압감이나 경직된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있는 골목길 스쿠터 맨(?)이었다. 때마침 옆 건물에서 아이를 안고 나온 여성이 진료소로 들어간다. 달려가 들어보니 어딜 갔다가 올 테니 좀 기다리라는 눈치다. 우리는 애타는 마음에 혹시 의사 알레만이 아니냐고 다급하게 달려가서 외쳐본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처방전 용지가 없어서 근처 폴리클리닉에 간다며 곧 돌아온다는 말을 남긴 채 부르룽~ 스쿠터는 떠났다.

잠시 멍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을 가다듬고 결연하게 진료소 앞 나무 밑에 주저앉기로 했다. 가정의가 진료소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므로. 앗! 그러나, 우리는 앉기도 전에 다시 일어서야 했다. 여기는 쿠바! 진료소 앞의 우리가 궁금한 주민들이 다가와 말을 걸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궁금한 주민들을 맞이한다. 가장 먼저 다가와 긴 이야기를 들려주신 분은 에밀리오(Emilio) 아저씨.

“처방전 용지를 가지러 갔다고?” “오토바이 타고 가던가?” “그럼 23번가에 있는 폴리클리닉에 갔을 거야. 가까우니까 금방 와.” “알레만? 잘 알지. 미션을 세 번이나 다녀왔어. 좋은 사람이야.”

에밀리오 아저씨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뒤에서 서성이던 남성과 곧이어 등장한 여성 네나(Nena)가 말을 이어갔다. 감기로 약을 처방받아 복용 중인데 약이 독해서 얼마나 오래 먹어야 하는지 물어보러 왔단다. 남편을 따라서 진료소에 함께 산책 나오듯 나오셨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 그러지 말고 아주머니 집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하시지만, 가정의 알레만과의 면담을 미룰 수 없어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자 집의 주소를 알려주시며 언제든지 들르라는 당부를 하시고 자리를 떠나신다. 자신들이 사는 집을 스스럼 없이 알려주고, 문을 열어 집안으로 맞이하는 모습이 이제는 낯선 풍경이지만 우리에게도 이와 같았던 세월이 있었던 것 같다.

잠시 후 알레만이 돌아왔다. 진료소 문이 열렸지만 우리는 멀찍이 지켜볼 뿐 다가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어디에서들 보고 있었는지 알레만이 진료소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방문자들이 줄줄이 진료소에 따라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료소에 들어가는 주민들을 부럽게 지켜보며, 우리는 지나가는 주민들에게 역으로 인터뷰를 당하고 있다. 진료소 앞을 서성이는 우리에게 궁금한 것이 많을 법도 한 일이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알레만이 진료소를 나선다. 안에는 여전히 몇 명의 주민들이 남아있다. 무조건 따라 뛰었다. 알레만은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가정의도 간호사도 없는 진료소에서 주민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간간이 하하 호호 웃는 소리도 들린다. 잠시 후 알레만이 진료소로 복귀한다. 뒤따라가 사진 찍은 것에 대해 사과하자 괜찮다며. 방금 방문한 집에 암 환자가 있는데 상태가 안 좋다고 아들이 전화해서 와 달라고 했단다. 아하! 가정방문은 이렇게 수시로 이루어지기도 하는구나! (···· 중략 ····)

가정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진료소는 주민들의 사랑방이 된다. 서로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고, 간호사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노인들의 혈압을 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가정의 알레만은 이 구역에서 단연 가장 인기 있는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여느 쿠바 사람다운 다정함은 물론 잘 웃지도 않는데 말이다. 이를 함께 지켜본 연륜 있는 동료는 저런 모습이 바로 “츤데레”의 매력이란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약 4주가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쯤 알레만은 결국 우리를 만나면 먼저 인사를 반갑게 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알레만은 언제나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진료소가 있는 건물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니, 오며 가며 만나는 사람들,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모두 알레만의 이웃인 셈이다. 자신이 처음 가정의를 시작했을 때 돌보았던 신생아가 이제는 임산부가 되어 자신의 진료소를 찾는다며 으쓱한다. 알레만은 그 신생아와 함께 성장했고 삶을 공유했음이 분명하다. 쿠바 지역사회에서 가정의로 살아가는 사람이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에 괜히 내가 흐뭇하다.

진료소에는 최첨단 의료시설은 물론 자랑할 만한 의료 기구도 별로 갖춰져 있지 않다. 간단한 소독기구, 주사, 약품 등과 같은 기본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알레만의 진료소에는 왁자지껄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는 소리, 박장대소하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의사실과 대기실의 분리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알레만의 진료는 정해진 틀 없이 어디서나 이루어진다. 약 한 달간의 진료소 추격전(?)을 통해 이제 인도 위에서, 아파트 앞에서, 때로는 오토바이 위에서 주민들과 얘기하거나 등에 손을 얹고 위로하는 듯 보이는 모습의 가정의 알레만과 간호사 글레이비스의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일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면, 쿠바 보건의료의 성과를 분석하는 단초는 결국 자본주의 시스템과 구별되는 쿠바 지역사회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맥락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단 쉼표를 찍기로 했다. 고가의 최첨단 의료장비만이 좋은 의료의 시작이라는 우리의 믿음에도 쉼표가 찍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말이다.

목, 2020/03/05-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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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안발의 건수에서 압도적 세계 1, ‘날림공사의 전형

20대 국회 전반기, 즉 2016년 5월부터 2018년 5월까지 2년 동안 우리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 수는 무려 1만 2,968개였다.

하루에 거의 20개씩의 법안이 발의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법안발의는 자그마치 22.6배 증가하였다. 놀라운 숫자들이다.

숫자만 놓고 본다면, 우리의 국회는 참으로 세계 의회사상 입법을 본업으로 하는 의회의 모범 사례라 할 것이며, ‘일하는 국회’의 전형으로 전 세계에 자랑해야 마땅할 국회다. 모두가 본받아야 할 모범적 의회의 전형이다. 정말이지 웬만해서는 이러한 놀라운 ‘성과’를 낼 수 없다.

그러나 이렇듯 경이로운 ‘실적’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우리 국회의 법안발의 건수는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가히 압도적 차원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 의원들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5년 동안 발의한 법안은 총 1,834건이었다. 프랑스에서 대체로 1년에 정부 발의 법안은 30~50건, 의원 발의 법안 수는 200~300건 정도이다. 그리고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고작해야 10개 법안 정도만 의결된다.

한편 독일 의원들은 2005년부터 2009년 4년 간 431개의 법안을 발의했다. 독일 의회에서는 의원 개인에 의한 법안 발의가 상상 외로 적다. 대신 정부 제출이 주류를 이룬다. 왜냐하면, 연립정부를 다수 여당이 지배하므로 정부가 제출한 법안이 곧 다수 여당의 법안이기 때문이다.

또 일본 의원들은 2009년부터 2012년에 253건의 법안을 발의하였다.

모두 우리 국회에 비해 한참 아랫길이다.

 

그런데, 18대 국회 법안 발의 1위는 홍준표 의원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계속하여 폭염이 기승을 부리자 폭염에 관련된 법안만 해도 9개나 발의되었다. 이와 관련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은 최근 몇 년 간 무려 45개 법안이 발의되었다. ‘최저임금법 일부개정법률안’도 2016년부터 총 46개나 발의되었으며,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도 1, 2년 새 29개 법안이 제출되었다. 의원들에 의해 가장 많이 발의된 법안은 ‘조세특례제한법’으로서 2017년부터 2018년까지 2년 동안에 무려 292건이나 발의되었다. 이들 법안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전형적인 선심성 법안이었다.

그런데 18대 국회가 시작된 2008년 5월 30일부터 2012년 2월 16일까지 법안을 가장 많이 발의했던 의원은 바로 홍준표 의원으로서 총 215건의 법안을 대표 발의하였다.

현재 국회를 감시하고 의원들의 활동을 평가하는 시민단체들은 대부분의 경우 어느 의원이 법안을 많이 발의했느냐라는 양적 지표만을 기준으로 삼아 ‘우수의원’을 선정하고 있다. 더구나 각 정당의 공천기준에서도 법안발의 건수는 중요한 지표로 활용된다.

이렇듯 만연된 ‘건수주의’로 인하여 국회는 오늘도 법안 발의가 넘치고 또 넘친다. 이로 인해 인력과 예산의 낭비 역시 날로 극심해가고(이는 국민 혈세가 지출되는 국회 공무원 인력과 예산 확충 요구의 명분으로 작동한다), 정작 중요하고 필요한 법안이 도리어 통과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현재 제출된 법안에 대한 국회의 관행은 이른바 선입선출(先入先出), 즉, “먼저 발의된 법안을 먼저 검토한다.”는 방식인데, 따라서 아무리 국민이 원하고 긴급을 요하는 법안이라도 우선순위에 놓이지 못한다. 회기 내내 끝내 통과되지 못하고 회기만료로 자동 폐기되는 법안이 적지 않다.

심각한 입법 왜곡이다.

 

법안 통과를 위해 국회의원이 국회 공무원에 잘 보여야하는 구조

법안발의의 남발 현상은 우리 국회의 왜곡된 입법 프로세스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우리 국회의 입법 절차에서는 의원이 법안을 발의하면, 그 뒤로는 전적으로 국회 공무원이 그 법안에 대하여 ‘검토’한다.

이렇게 하여 의원은 법안에 대한 꼼꼼하고 힘든 ‘검토’ 과정을 직접 자신이 할 필요가 없다. 한마디로 고된 본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고 해방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부담감 없이 얼마든지 법안 발의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어떤 큰 일이 터지면 언론의 관심과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한두 가지 아주 간단한 내용만으로 법안을 ‘구상’해 발의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런 현실에서 자연히 법률 제정안과 전부 개정안은 극히 적고, 일부개정 법률안이 태반이다. 이를테면 ‘당해(當該)’이라는 글자를 ‘해당(該當)’으로 바꾸는 식의 매우 단순한 자구 수정에 그치는 법안 발의도 수두룩하다. 정부 법안을 ‘커닝’하거나 이미 폐기된 법안 또는 의원 발의법안을 서로 베끼는 일도 허다하다. 한 마디로 쓸모 있는 법안이 매우 드물다.

“의원실끼리 하루에도 서로 대여섯 건의 법안들을 서명해달라고 한다. 대부분 별 의미도 없는 법안들이다. 피차 다 뻔히 아는 사실이다.” 오랫동안 의원 비서직으로 일한 현역 보좌관의 말이다.

주객전도, 전도본말, 희화화된 우리 국회의 현 주소다.

더구나 이렇듯 세계 의회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이 매우 ‘특수하게’ 운용되는 우리 국회의 입법 과정에서 법안의 통과 여부는 전적으로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들의 손에 달려 있다. 실제 전문위원이 “문제가 있다”고 ‘검토’한 법안은 통과되기 어렵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상식과 전혀 달리, 국회의원들이 자신이 제출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오히려 국회 공무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경향조차 빈번하게 나타난다.

결국 ‘세계 1위 입법 발의’란 요란한 허장성세 빈 깡통이고, ‘건수주의’와 ‘결과 만능주의’ 그리고 “허구적 입법”이 빚어낸 가장 일하지 않은 우리 국회의 역설적 증거일 뿐이다.

 

기본이 흐트러지면 만사가 왜곡된다

기본이 흐트러지면, 모든 일이 뒤틀리게 되고 왜곡되는 법이다.

세계의 다른 나라 의회처럼 법안에 대한 ‘검토’를 국회의원 스스로가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예를 들어 같은 정당 소속 의원의 법안 발의는 자연스럽게 교통정리가 되어 이러한 법안발의 남발 현상을 방지할 수 있게 된다.

실제 독일 의회의 경우, 의원의 법안발의는 대부분 소속 교섭단체에 의해 수행되며, 자체 내 전문 인력의 지원을 받아 입안된다. 또한 자구 수정 등 일부 혹은 부분 개정의 법안은 지양되어 최대한 종합적으로 검토, 정비하여 제출된다.

화, 2020/03/10-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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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임진강을 건넜던 그 한 번의 선택은 김낙중에게 평생의 천형(天刑)이 되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한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온몸으로 질 각오가 서 있었다. 그러나 그 짐은 너무나 무겁고 가혹했다. 1957년의 재판에서 그의 간첩죄 혐의는 무죄가 되었으나, 그가 자진 월북하여 1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의 분단권력이 필요할 때마다 두고두고 소환하여 이용해먹는 소재가 되었다. 아니 남한만이 아니었다. 북의 분단권력 역시 그 전력을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1992년의 네 번째 간첩사건이 그러하다.

한국에서 네 차례의 김낙중 간첩사건을 살펴보면 남한 체제가 북한문제, 간첩사건을 다루는 기법이 어떻게 발전해갔는지를 알 수 있다. 1956년 첫 번째 사건은 전쟁 직후의 상황이 아직 어수선했음을 보여준다. 아직 휴전선은 느슨했고 월북, 월남자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직 젊은 학생에 불과했던 김낙중에 대한 무리한 ‘간첩 만들기’는 그다지 집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전후의 큰 혼란이 아직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김낙중의 해프닝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묻혀버린 듯하다. 그가 자진 월북하여 북에 1년간 머물렀음에도 그에 대한 간첩죄가 무죄로 선고되었던 경우를 이후 60~80년대의 살벌했던 무수한 ‘간첩 만들기’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의외라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김낙중의 (한국에서의) 두 번째 간첩사건은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2년 발생하는데 이 시기의 간첩조작 방법은 아직 조잡하고 억지스러웠다. 1973년 유신체제 초기에 발생했던 세 번째 사건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폭력성이 고도화되고 조작 방식이 집요해진다. 87년 민주화 이후 발생한 1992년의 네 번째 사건은 성격이 달랐다. 조작이나 고문 문제가 특별히 강조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성격은 그 이전의 것들과 다른 점이 있으니 다음 절에서 별도로 살펴볼 것이다.

한국의 역대 반공 정부 입장에서 간첩사건의 핵심 효용은 소위 ‘북풍 효과’다. 아무리 독재와 실정을 하더라도 반대 세력의 일부에라도 친북의 낙인만 확실히 찍어놓으면 비판 세력 전반이 크게 타격을 받고 약화된다. 북과 전쟁을 치른 민심 때문이다. 독재 비판에는 지지하다가도 그 비판 세력이 친북이라고 하면 당장 등을 돌린다. 민심을 그렇게 돌려놓는 데 간첩사건만큼 효력이 큰 건 없다. 따라서 ‘간첩조작’은 분단권력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효율적인 ‘민심조작’이기도 했고, 이렇듯 마법적 효과를 발휘하는 ‘간첩조작’은 분단권력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절대무기’였다.

김낙중이 한국에서 개인이 아닌 조직으로서의 ‘간첩단’ 사건 주모자로 조작되어 처음 구속된 것은 1962년 6월이었다. 5·16 1년 후 박정희 군사혁명정부의 수사본부가 발표한 ‘학원간첩단 사건’이었다. 수사본부의 발표문에 따르면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생이던 ‘월북 간첩’ 김낙중이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미행정협정 등에 반대하는 데모를 배후 조종했다 한다. 이 ‘사건’은 박정희 군사정부가 학생운동조직을 간첩단과 연계시킨 최초 사례에 속한다. 김낙중을 ‘간첩’으로 엮을 빌미가 되었던 것은 그가 만났던 한 학생의 월북이었다. 폐병으로 고생하던 한 고려대 학생을 김낙중이 만난 적이 있는데, 이 학생이 그가 월북 기간 북한의 결핵치료 전문병원에서 요양했던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말해준 경로대로 월북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반공’을 제1국시로 천명하며 쿠데타를 정당화했던 군사정부는 4·19 이후의 학생운동, 혁신운동에 재갈을 물릴 방안을 찾고 있었다. 이때 월북 경력을 가진 김낙중의 ‘효용’이 군사정부에 의해 다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는 1957년 대학 복학 이후 진보적 지식인들의 모임이던 ‘한국농업문제연구회’의 일원이었고 4·19 이후에는 대학원생으로 여러 혁신계 통일운동 모임에서 활동하다 5·16 이후 징집영장을 받고 입대 중이었다. 그런데 5·16 이전에 만났던 한 학생이 문제가 되었다. 그 학생은 치료 목적이었다지만 김낙중의 말을 듣고 실제로 월북했다. 김낙중 자신이 1년 동안 월북한 경험이 있었고 4·19 이후 혁신계 청년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군사정부의 ‘간첩조작’을 위한 더 없이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수사발표문은 엉터리였다. 김낙중은 1960년 8월 15일 월북하여 1961년 3월 ‘간첩 사명을 띠고’ 월남한 것으로 되고, 치료차 월북한 학생은 ‘북노당 중앙당의 새 지시와 자금을 받기 위해’ 월북 중인 것으로 되어 있었다. 김낙중을 취조한 ‘506 특무대’는 고문으로 여러 학생모임을 ‘반국가단체’로 만들었던 곳이다. 군인 신분의 김낙중에게 사형을 구형했지만, 군사법정조차 너무나 앞뒤가 맞지 않는 공소장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해줄 수 없었다. 2심에서 국가보안법은 무죄가 되고 김낙중에게는 “(학생) 월북 방조, 4·19 이후 중립화 통일 주장, 남북 교류 주장” 등을 이유로 반공법 위반 3년 6월형이 선고되었다.

김낙중이 두 번째로 ‘간첩단 조작’에 휘말린 것은 1973년 6월 발표된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이었다. 당시 유신개헌 직후의 박정희 정권은 학생 등 비판 세력의 반발을 되받아칠 묘수가 필요했다. 또 성장하기 시작하는 노동운동, 민중운동에 대해서도 확실히 낙인을 찍어둘 필요가 있었다. 김낙중과 당시 그가 주도하고 있던 활동이 이러한 ‘필요’에 너무나 잘 부합했던 것이다. 다음은 당시 한 일간지의 보도 내용이다.

서울형사지법 합의 6부는 21일 오전 10시 대법정에서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김낙중을 중심으로 한 N – H회(민족주의 – 인도주의회)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의 첫 공판을 열고 관련 피고인 11명에 대한 인정신문을 끝냈다. 피고인들은 지난 5월 24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내란선동, 내란음모혐의로 구속, 송치돼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에 의해 구속, 기소되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김낙중은 1955년 …… 월북, 평양의 밀봉아지트에서 북한중앙당 연락부 정 모 지도원으로부터 1년간 공산주의와 대남간첩교양을 받은 뒤 남파돼 노동자 및 학생들을 포섭, 선동해왔다는 것이다.

김낙중은 66년 출소 후 67년부터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은사의 요청을 받고 같은 학교 부설 노동문제연구소(노연)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노연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원하는 교육기관으로 육성하고 있었다. 학생들도 활발히 노연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일찍이 “평화통일을 위해 단독으로 시위하고 남북을 오가며 온갖 고초를 겪은” 김낙중은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자 결심”했고 “민중의 조직된 힘 없이는 그 어떤 변혁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4·19와 5·16의 경험은 섣부른 행동보다 민중 속에서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워주었고 이것이 그의 노연 교육 활동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힘을 모아 때를 기다리자는 그의 태도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더욱 가혹한 탄압의 빌미가 되었다. 유신체제 중앙정보부의 눈에 월북 전력을 가진 김낙중의 노연 활동은 언제든 이용해먹기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을 것이다.

중앙정보부는 이번 조작 사건을 통해 김낙중의 1955년 월북과 1년간의 북한 체류를 정식 ‘간첩교육 기간’으로, 그리고 김낙중을 북에서 정식 공작원 교육을 이수한 정통 간첩으로 ‘공인’했다. 그리고 노연에서 이뤄진 학생 그리고 노동자들의 교육·토론 모임들이 ‘사회주의 국가 수립을 위한 내란 선동 조직’으로 탈바꿈되었다. 이 허위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많은 고문을 했다.

유일한 증거는 온갖 고문과 구타를 이기지 못해 이루어진 허위 진술이었다.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김낙중은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결국 고문에 못 이겨 그들이 요구하는 내용의 조서에 무조건 지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또 간첩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렇게 그들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건에 연루된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김낙중은 너무나 억울했다. 검찰로 송치되었을 때 자신의 ‘자백’이 고문에 의한 허위였음을 호소했다. 이를 받아들인 담당검사가 새로 1차 조서를 썼다. 그러자 중정은 김낙중을 다시 남산으로 끌고 갔다.

“이 새끼야, 네가 검찰에 가서 딴소리했다며?”
“네가 검찰에서 조서 내용을 부인하면 사형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골병이 들어 옥사를 하거나 병신이 되어 나가는 것은 각오해야지.”
김낙중과 중앙정보주의 조사관들 사이의 대화는 길게 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대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김낙중은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고문을 또다시 당했다. …… 숱한 고문을 당한 그날 밤 김낙중은 반송장이 되어 구치소로 돌아왔다. 송장처럼 축 처진 김낙중은 사소(청소를 맡은 모범 기결수)의 등에 업혀서 구치소의 싸늘한 방에 던져졌다. …… 며칠 후 검찰은 출정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골병이 든 김낙중을 만나러 구치소로 찾아왔다. …… 김낙중은 취조를 받으러 소장실까지 나갈 때도 한동안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서 다녀야 했다. 처음 김낙중을 담당했던 L검사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새로 담당한 C검사가 중앙정보부의 조서를 재확인했고, 김낙중은 모두 “예”, “예”로만 대답했다. 다시 남산에 끌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사형을 당해 죽는 것이 편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신체제 하의 법원은 김낙중에게 ‘간첩죄’와 ‘내란선동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나마 ‘간첩죄’로는 최하 형량이었다. 그러나 억울한 옥살이 7년은 보통사람이라면 감내하기 힘든 큰 고난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시국 관련 사건으로 김낙중보다 훨씬 가혹한 처벌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1975년 4월, 옥중의 김낙중은 큰 충격과 전율에 빠졌다. 소위 ‘제2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8명의 사형집행 소식을 들은 후였다. 사형선고가 내려진 바로 그날 밤이었다. 이들 중에는 김낙중과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많았다. 인혁당 사건은 1974년 전국의 대학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터져 나오자, 전국 학생조직(민청학련)의 배후조직으로 조작되었다. 김낙중은 옥중에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인혁당 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끼리 “김낙중이 꼭 있어야 하는데!”라면서 무척 아쉬워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된다. 그들이 인혁당과 북이 직접 연결된 증거를 찾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보기에) 김낙중이 이미 (아쉽게도) 다른 사건으로 미리 구속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 사건에 김낙중을 끼워 넣어 북 – 김낙중 – 인혁당 – 민청학련이라는 그림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김낙중은 옥중에서 자문해보았다. “하나님이 나에게 억울한 7년 징역형을 받게 해서까지 나를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신 뜻은 과연 무엇일까?”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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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3/1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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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김낙중은 만기 출소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에서 벌인 시민 학살의 광기가 전국을 휘감고 있을 때였다. 출소 이후 김낙중은 상한 건강을 추스르며 홀로 조용히 저술에 전념했다. 그러나 그의 초심인 평화통일에의 열망은 그 시기에도 한시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86년 초부터 김낙중은 조심스럽게 독립운동 원로들이 만든 ‘민족통일촉진회’라는 온건한 통일운동단체의 회지(會誌)를 만드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87년 민주항쟁이 터져 나왔고 이후 통일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과 활동은 점차 활발해졌다. 김낙중은 특히 노태우 정부의 통일정책에 주목했다.

(노태우 태통령은) 1988년 7월 7일 ‘민족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북한과 재야 운동권(전대협과 민통련) 진영에서는 ‘영구분단획책’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는데도 김낙중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 통일원에서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방안을 남과 북이 서로 상대방에 대한 타도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공존을 전제로 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으로 (김낙중은) 이해했다. …… 1980년대 말, 재야 운동권은 치열하게 통일운동을 전개했지만 대체로 노태우 정부의 통일방안에 대해서는 무조건 배타적이었다. 또한 북측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세력도 많았다. 이와 반대로 보수적 통일운동 세력은 남측의 통일방안만을 고수하며 북측의 통일방안은 일말의 논의할 가치가 없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낙중은 남측의 주장과 북측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결합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시대 변화의 추세에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87년 민주화에 이어 89년부터는 미소 냉전체제가 붕괴하고 있었다. 김낙중은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오랜 시간 생각해온 자신의 통일방안을 ‘4단계 통일론’으로 정리했다. 1단계 평화공존 기초 구축 → 2단계 국가연합 → 3단계 연방국가 → 4단계 통일 민족국가의 경로였다. 이를 1989년 9월 국회 통일특별위원회에서 민족통일촉진회 정책심의회 의장 자격으로 발표했다. 시민단체에서의 활발한 통일 논의와 함께 통일원의 통일방안 자문에 여러 차례 응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강연도 하고, 언론에도 자주 모습을 비쳤으며, 각종 집회에서 연설할 기회도 많았다. 1991년 후반부터 1992년 봄까지는 민중당 공동대표로도 활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던 1992년 9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 또 한 번의 ‘김낙중 간첩사건’이 보도되었다.

안기부에 따르면 김낙중 씨는 지난 55년 6월 자신 월북, 공작원으로 포섭돼 1년간 간첩 교육을 받고 남파된 뒤 36년간 자신의 신분을 진보적 지식인으로 위장한 채 다른 남파간첩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미화 210만 달러(한화 약 16억 원)를 넘겨받아 민중당 창당을 지원하는 등 고정 간첩으로 활동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안기부는 김 씨가 지난 1990년 2월 남파간첩 최 모 씨(35)로부터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포섭해 지하망을 구축하라”는 지시와 함께 30만 달러를, 1990년 10월에는 “민중당 창당에 참여해 당권을 장악하라”는 지시와 함께 30만 달러를 각각 받았으며 지난해 10월 북한의 장관급 공작원 임 모 씨(65)로부터 추가로 150만 달러와 권총, 독약 앰플을 받는 등 세 차례에 걸쳐 활동비를 받았다고 밝혔다.

당시에는 김낙중 씨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던 만큼 사건 발표 내용은 더욱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55년의 일을 두고 ‘간첩 교육 받은 남파 고정간첩’이라 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이미 70년대에 써먹은 낡은 수법이라 하더라도, 과연 정말 김낙중 씨가 북한 공작원을 만나고 돈을 받았을까? 김낙중 씨처럼 간첩 혐의로 억울한 죄를 번번이 뒤집어썼고, 그런 만큼 북한에서 보낸 ‘공작원’을 만나는 일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 과연 그러한 일을 정말 저질렀을까? 또 한 번 모진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 아닌가?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발표 내용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시의 시기는 미묘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화해정책에 서서히 제동이 걸리고 있었다. 미국이 북에 핵사찰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해(1992년) 5월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김영삼 씨는 남북화해기조가 대선에서 라이벌인 김대중 씨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해 8월 벌어졌던 ‘대통령 훈령 조작 사건’도 그런 흐름 속에서 나왔다. 김영삼 후보 진영에서 남북화해사업의 진행을 노태우 대통령의 훈령을 조작하면서까지 방해했던 사건이다. 그렇다면 이 뜬금없는 또 한 번의 ‘김낙중 간첩사건’은 역시 남북화해기조를 흔들고 뒤집어놓기 위해 만들어낸 안기부의 조작극 아닐까? 김낙중은 또 한 번 대북 적대감 고취를 위해, 분단권력 강화를 위해 억울하게 이용된 것이 아닐까?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2005년 출판된 『탐루』의 상세한 기록에 따르면, 1990년 2월부터 4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주석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밝힌 최 모라는 30대의 인물을 여섯 차례 만났고, 199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최 모가 데려온 65세가량의 ‘임 과장’과 여러 차례 긴 시간 만났다. 이들로부터 기사에 발표된 금액의 지원금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북으로 돌아간 후 1년 동안 세 차례 ‘장문의 편지’를 “임 과장이 미리 알려준 국제사서함”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1991년 10월 다시 서울에 온 ‘임 과장’과 다음 해 3월까지 다시 여러 차례 만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김낙중은 자신의 간첩 행위 여부에 대해서는 강하게 부인했다. 다음은 《한겨레신문》 1992년 11월 13일 자에 보도된 이 사건 첫 공판에서의 그의 진술이다.

김 씨는 “대북 접촉 창구를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북과 접촉한 것은 맞지만 북쪽 사람들로부터 기밀 수집을 요청받지도 않았고, 하지도 않았다”라면서 “검찰의 공소장은 일부 내용이 맞으나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라고 진술했다. 김 씨는 이어 “처음 북쪽의 연락 대표가 찾아왔을 때 이들을 신고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며칠 밤을 새며 고민했다”라면서 “그러나 지난 1955년 평화통일안을 들고 북한을 찾아갔을 때부터 계속 평화통일론을 주장해온 나로서는 이들을 신고해 처벌받게 하고 남북관계를 긴장되게 할 수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1993년 2월 11일의 최후진술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본 피고인의 행동 자체가 아니라 본 피고인이 상대했던 사람들이 북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 예, 그렇습니다. 저는 분명히 여러분이 악마로 생각하는 북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1955년 사선을 넘어 평양에 갔었던 사람이고, 또 1990년 2월 이후 평앙에서 온 그들을 상대로 회합·통신 등의 행동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검사님이나 판사님, 그리고 우리 사회 많은 사람들과 제가 관점을 달리하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즉 저는 북한 사람들을 악마로 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들을 우리와 똑같은 동포 형제로 대했다는 사실입니다.

1993년 2월 22일,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김낙중에게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김낙중은 8·15 특사에 포함되어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지만, “현재도 여전히 ‘무기수’이며, 투표권도 없고, 해외여권도 나오지 않는 부자유한 신분의 소유자다.”

 

분단체제에서의 자유와 책임

김낙중은 자신에게 자유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 했다. 과연 그는 그 자유를 얻었던 것일까? 그의 자유는 북에서도 남에서도, 남 체제에 의해 북 체제에 의해 거듭 꺾였다. 그러나 그렇듯 거듭 좌절해도 결코 굴하지 않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한다면 과연 김낙중은 자기 방식의 자유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명준은 김낙중 식의 자유를 차라리 포기했다. 포기를 통해 이명준 식의 자유를 실현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명준과 김낙중의 두 자유는 일반화하고 권장할 만한 차원의 긍정적 의미의 자유가 되기 어렵다. 이명준의 자유는 포기의 자유일 뿐이고, 김낙중의 자유는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자유, 부딪치고 부서져도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는 패배의 자유일 뿐이다.

우리는 소설 속 이명준에게 비겁하게 죽지 말고 살아남아 현실 속에서 무엇이든 이뤄 나가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아닌 현실에서 찾을 수 있는 그와 흡사한 살아있는 플롯이 있다면 바로 김낙중이 그에 가까운 모델이었다. 캐릭터는 다르지만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광장”을 열정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같다. 이명준이 결국 포기한 반면 김낙중은 이 길을 평생 추구했다.

그의 ‘자유’ 추구 방식은 특이했다. 현실이 그어놓은 남과 북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현실의 남북에는 경계가 있지만 그의 소망(所望) 속의 남북에는 경계가 없다. 그 소망 속의 자유를 그는 평생 포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 자신 그리고 그의 가족은 혹독한 고통의 대가를 치렀다. 그 고통의 크기는 일반인은 쉽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남(南)의 체제는 자신의 정권안보를 위해 필요할 때마다 김낙중의 이상과 소망을 거꾸로 이용했다. 북(北) 역시 다를 바 없었다. 1955년 입북했을 때도, 그리고 1990년 서울의 그를 찾아 고위 공작원을 보냈을 때도 북은 자기 체제를 위해 김낙중을 이용했을 뿐이다.

김낙중 자신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스스로 “평화통일이 절실한 사람들에게는 힘이 없고,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평화통일보다 자기 지위나 정권의 유지가 더 소중하다는 현실”을 말한다.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그는 번번이 현실에 걸려 넘어진다. 20대 젊은 시절 휴전선을 넘어 입북했던 것은 젊은 이상주의와 열정 탓이었다 하자. 30대, 40대의 고난 역시 순전히 분단 독재권력의 야만과 탐욕의 소산일 뿐이었다 하자. 그러나 수많은 고난을 겪은 60대가 되어서도 남과 북 사이에 아직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경계를 수용하지 않고 또다시 그의 관념, 소망 속에서 그 경계를 지워버렸다는 사실, 그로 인해 이번에는 ‘조작’이 아닌 실제 간첩사건에 엮여 든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의 자유, 어떤 억압이 와도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시도를 그만두지 않겠다는 그의 자유는 어쨌거나 그의 뜻대로 행사하였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 야기되었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도 그는 감당할 수 있었을까? 가족과 주변의 오랜 친구와 동지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여기서 논외로 치더라도 과연 김낙중 식의 ‘자유’ 행사는 그가 원했던 남북 화해와 공존, 그리고 통일에 기여했는가? 그의 사상과 실천에 감명을 받은 이들도 많고 그의 선구적인 공동체 통일론에 영감을 받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흐름을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은 그의 의도와 반대되는 쪽, 분단체제의 구속력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쪽으로 이용되고 말았다. 특히 노태우 정부 시기 현실로 진행되던 남북 화해 흐름을 거꾸로 돌이켜 보려는 세력에게 김낙중의 행동이 역용의 빌미를 주었던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사실이다.

북 역시 ‘연방제 통일’이라는 자신의 통일정책을 충실히 대행해줄 남측의 정치 세력을 만들기 위해 김낙중이라는 한 개인을 이용했다. 그들이 그를 접촉하고 거액의 돈을 전달했을 때, 그런 방식의 ‘대남사업’이 김낙중 개인에게 얼마만큼의 위험부담을 주는 일인지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김낙중의 젊은 시절부터의 순수한 이상주의와 사람됨을 믿고, 그를 시험했다. 그리고 남북의 경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그의 관념 세계, 소망 체계는 여지없이 다시 한번 그를 시험에 들게 했다. 그의 말대로 북한 사람을 악마로 보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러나 남과 북을 서로 악마시하는 세력이 남과 북의 체제의 뇌수와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현실 역시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현실을 그의 관념·소망 속에서 지워버리고 ‘악마가 아닌 사람과 만난’ 그의 ‘순수한’ 행위는 역으로 ‘사람이 아니라 악마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는 분단체제의 정언명령을 오히려 강화시키는 데 맞춤형으로 이용되고 말았다.

이명준과 김낙중, 이 두 사람의 자유에는 불행하게도 현실의 기반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늘 분단을 부정하고 극복한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부정이요 극복일 수밖에 없었다. 둘 모두 자유의지에 따라 분단선을 넘는다. 그러나 우선 이명준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가 찾는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광장”을 찾을 수 없었다. 중립국행과 자살이 그의 자유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이명준에 대한 평결은 여기서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 『광장』과 이명준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해 조금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명준이라는 캐릭터가 한국 문학에 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 되었던 그 시대, 바로 그러한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시간적 배경을 함께 읽어야 할 것이다. 1960년이라는 해, 그리고 4·19라는 사건이었다. 『광장』이라는 소설이 분단체제에서 최초로 열렸던 4·19라고 하는 ‘자유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출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명준이라는 캐릭터 자체, 『광장』의 이미지 자체가 ‘분단체제에서 최초로 출현한 자유’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자유의 틈새는 아직 좁았고 연약했던 듯하다. 그래서 결국 이명준은 중립국행의 배 위에서 바다에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의 투신자살은 이명준이라는 캐릭터의 죽음이 아니라, 분단체제에서 피어난 아직 연약한 자유의 싹의 운명을 예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김낙중에게도 그 자신의 ‘소망 체계 안에서의 자유’가 아닌 ‘현실에서의 자유의 기반’은 너무나 취약했다. 분단체제의 강박은 남북 모두에서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강고해졌다. 그런 분단체제를 살아야 했던 그의 삶에서도 현실에서의 자유의 기반이 크게 열렸던 때가 있었다. 첫 번째는 4·19였고, 두 번째는 1987년의 민주화대투쟁이었다. 87년이 열어놓은 자유는 60년보다 크고 넓고 강했다. 87년 대선에서 야권의 어리석은 분열로 그 에너지의 태반이 초반부터 분산·유실되었음에도 민주화의 큰 흐름은 여전히 도도했다. 어부지리로 출범했던 노태우 정부 역시 이 대세를 의식하여 북방정책과 남북화해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김낙중은 이렇듯 열린 87년 이후 ‘현실의 자유’의 기반 위에서 그의 생에서 아마도 가장 빛났을 몇 해를 보냈다. 그의 평생에 걸친 ‘평화통일’의 구상이 비로소 현실 속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낙중은 노태우 정부의 남북화해정책을 88년 <7·7 선언>에서부터 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92년 <남북기본합의서> 효력 발생에 이르기까지 줄곧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당시 재야와 학생운동권의 태도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당시 재야와 학생운동권은 노태우 정부의 출범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강했다. 노태우 정부의 남북화해정책 역시 신뢰하지 않았기에 정부의 ‘불순한’ 남북 대화 ‘독점’을 운동권이 앞장서 깨뜨려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89년의 문익환 목사, 임수경 양의 실정법을 넘어서는 ‘불법 방북’은 이러한 흐름의 운동론에서 나온 필연적 산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분단의 벽 자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이러한 지향은 남북의 경계를 초월해 있는 김낙중의 소망적 자유와 상통하는 바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노태우 정부의 남북화해정책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동시에 당시 재야 학생운동권이 추진하던 남북 직접 접촉의 운동방식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이렇듯 ‘실정법을 뛰어넘는 남북 직접 접촉’의 흐름이 재야 운동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이 1990년 초 북쪽 사람이 은밀히 그를 찾아왔을 때 그의 판단과 대응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그의 오랜 고난의 경험과 거기서 쌓인 지혜가 노태우 정부의 남북화해정책을 편향 없이 사실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면, 그의 원형적 분단초월의식은 1988~1989년 남북 직통의 통일운동 열기에 의해 다시금 격발되었고, 그 격발에 의해 그의 관념 세계 속에서 현실의 남북 경계는 또다시 지워졌던 것이 아닐까? 어떤 이유에서든 그는 1990년 이래 2년간 북에서 보낸 대남사업 고위간부를 마치 남북의 현실적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유롭게 만났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시 한번 ‘간첩사건’에, 그것도 이번에는 결코 조작되었다고 항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연루되고 말았다.

끝내 꽃피우지 못했다는 점에서 87년 공간 속의 김낙중과 60년 공간 속의 이명준은 동형(同型)이다. 철옹성 같았던 분단체제에 자유의 파열구가 열리는 순간을 맞이했으나 결국 그 안에서 자유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분단체제는 여전히 강고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은 4·19와 87년에 이어 세 번째 자유의 시간을 맞이했다.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이다. 이 촛불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립과 적대의 분단체제가 공존과 평화의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는 순간까지 촛불이 지속될 때, 촛불혁명은 비로소 성공했다고 자신의 소임을 비로소 완수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준은 사랑과 생명을, 김낙중은 평화와 통일을 꿈꾸었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체제는 이들의 꿈을 가혹하게 짓밟았다. 분단체제란 분단의 대상을 ‘법 밖’으로 내모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체제다. ‘호모 사케르’란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자’를 뜻한다. 휴전선 저쪽에, 그리고 이쪽 내부에도 호모 사케르가 존재하는 체제, 아니, 호모 사케르를 만듦으로써 작동하는 체제, 따라서 호모 사케르를 만들어야만 하는 체제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의 언어로는 ‘법 밖의 예외(exception)’를 결정하는 절대적 힘을 가진 권력, ‘예외주권’이다.

남에는 북이, 북에선 남이 ‘법 밖’에 존재하는 예외의 대상, 호모 사케르다. 예외주권은 자신의 주권 영역 안에 ‘법 밖’의 결정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섰다고 결정한 자는 누구든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자’, ‘호모 사케르’로 선포한다.

따라서 이명준의 아버지가, 그리고 그를 이어 월북한 이명준이 바로 호모 사케르다. 휴전선을 넘은 김낙중 역시 호모 사케르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그는 ‘법 밖의 예외’ 취급을 받았다. 그리하여 북에서 한 번, 남에서 네 번 ‘간첩’이 되었다. 간첩은 분단체제에서의 호모 사케르를 칭하는 말이다. ‘미제 간첩’, ‘남조선 간첩’, 그리고 ‘북한 간첩’. 그래서 도합 18년을 감옥에 갇혀야 했다.

분단체제는 ‘적’을 먹고 사는 체제다. 적이 존재해야만 분단체제는 존속하고 강해진다. 그 적은 전쟁을 통해 남과 북에 각각 확고하게 정립됐다. 남과 북은 각각 서로에게 확실한 적, 악마가 되어야 남북의 분단체제는 힘과 생명을 얻는다. 남북의 분단체제는 각각 서로의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내부의 적=간첩=호모 사케르를 색출한다. 예외를 결정하는 법 밖의 법은 색출된 ‘예외분자=불순분자’들의 적성(敵性)의 정도에 따라 형량을 설정한다. 이렇게 적발한 ‘빨갱이’, ‘미제 – 남조선 간첩’들은 국민대중·인민대중의 공포와 두려움, 경각심을 한껏 끌어올린다. 이렇게 위축된 대중심리는 분단체제의 결속력, 구심력의 핵심 장력(張力)이 된다.

분단체제에서 이명준과 김낙중의 자유는 설 곳이 없었다. 오직 현실 너머 그들의 소망의 터에 그들의 자유를 풀어줄 만큼의 자유를 가질 뿐이었다. 그러한 자유조차 허용하지 않으려는 또 다른 자유가 있었다. 분단체제는 예외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을 항시화한 국가권력체제라 했다. 바로 비상국가체제(emergency state system)다. 누구를, 어느 세력을 ‘법 밖’으로 ‘결정’하여 호모 사케르로 호명할 수 있는 것 역시 자유다. 그것도 절대적 자유, 무제한적 자유다. 그 자유는 이명준과 김낙중의 꿈속까지도 검열하고 수색할 수 있는 자유다. 그렇기에 분단체제의 자유와 이명준·김낙중의 자유, 이 두 개의 자유는 결단코 병존할 수 없다. 분단체제가 존속하는 한, 이명준과 김낙중의 자유는 영원히 패배하는 자유, 패배할 자유일 수밖에 없으며, 오직 그들의 꿈, 소망 속에서만, 이명준의 말에 따르면 ‘자신만의 밀실’ 안에서만, 그것도 매우 위태롭게 숨쉴 수 있는 자유였다.

코리아의 분단체제는 이미 해방 직후 싹이 뿌려졌고 1950~1953년의 전쟁을 통해 순식간에 성체(成體)가 되었다. 이후 어언 70여 년이다. 해방 이후 38선이 그어졌을 때 그 어느 누구도 그토록 인위적인 분단선이 이토록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무엇이 이 분단체제를 이렇듯 장수하게 하였을까. 그 시작이 미소 냉전 때문이었다면 미소 냉전이 종식된 후에도 30여 년이나 분단체제가 지속된 이유가 무엇일까. 분단체제의 특이한 자기생산 메커니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분단체제의 생명은 남북 체제 안팎에 적을 생산함으로써 유지된다. 70여 년간 남북의 분단체제는 적의 존재와 생산을 항구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분단체제는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를 유지한다. 분단체제는 늘 분단극복=통일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 분단극복=통일의 분투를 통해 분단체제는 지속된다. 그러니 분단체제란 분단의 부정, 즉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괴이한 자기생산체제다.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생산이란 무엇인가. 먼저 분단체제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체제의 목적이 ‘분단의 극복’이다. 남북의 분단 권력 모두 분단을 부정하고 자기 중심의 통일, 즉 분단의 극복을 주창해왔다. 이렇듯 분단체제의 양측이 분단을 부정하고 통일을 부르짖을수록 서로에 대한 적대와 대결의 힘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진다. 이것만이 아니다. 분단체제의 기득 권력을 비판하고 맞서는 힘 역시 ‘분단극복’을 표방한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기득 권력은 ‘분단체제극복’을 부르짖는 비판 세력을 기다렸다는 듯이 체제비판 세력, 내부의 적, 예외, 호모 사케르로 호명하고 잡아들인다. 자신이 내세우는 통일이 아닌 모든 통일은 적이 주장하는 통일, 적과 내통한 통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김낙중의 반복된 사례에서 보았듯 기획하고 조작하여 거대한 간첩사건, 체제전복사건, 내란선동사건으로 생산해낸다.

분단체제란 이렇듯 강고하고 교묘한 자기생산체제다. 과연 이렇듯 교묘하고 지독한 ‘마의 순환고리’를 벗어날 길이 있는가. 4·19도, 87년 민주화대투쟁도, 결국 분단체제의 작동논리에 야금야금 말려들어가 결국 다시금 강압적인 대결체제로 회귀하지 않았던가. 김낙중의 운명이 말해주듯 그의 분단극복의 선한 의지는 번번이 차가운 감옥 안의 장기수, 무기수 신세로 끝맺음되지 않았던가. 과연 2016~2017년의 촛불혁명조차 그러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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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3/18-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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