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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는 유엔의 깃발을 내리고 스스로 해체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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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사는 유엔의 깃발을 내리고 스스로 해체하여야 한다

admin | 토, 2019/10/12- 00:32

현재 남한과 일본에 산재되어 있는 유엔사라는 이름의 조직은 국제적 근거가 없는 임의적인 가설집단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소련이 참석하지 않는 상태에서 유엔안보리는 한국전쟁에서 남측을 지원하는 결의를 하였고 16개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미국에게 이를 지휘하는 통합사령부의 통솔권을 부여하였다. 되풀이하면 유엔군의 파견이 아니라, 16개국의 군을 지휘하는 통합사령부를 권고하였다. 이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이루어지면서 이는 자연스레 해소가 되어야 할 조직인 셈이었다.

그러나 미국 측은 1954년 제네바에서 제기된 정전의 후속조치인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거부한 채, 이후 정당한 국제적 근거와 조약도 없이 유엔사를 지속시켜 왔고, 급기야 DMZ 통제의 책임 주체임을 내세워 최근 남북간 평화와 화해를 향한 노력에 장애를 조성해 왔다.

실제 1975년 유엔 총회는 유엔사의 해체를 공식으로 결의하였고, 이에 대해 1976년 초 미국 행정부는 그의 이행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미군부의 반대로 시행을 보류하고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여 남측 군대에 대한 작전과 통솔권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회피하여 왔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1992-3년 당시 유엔의 갈리 사무총장 역시 ‘유엔사는 유엔과 아무 관련이 없는 조직’임을 여러 번 확인하였고, 2018년 9월에도 유엔안보리에서 유엔 사무차장이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미국 측은 오히려 유엔사를 강화하여 동아시아 내 다국적의 지휘부로 격상시키려는 시도를 노골화하고 있으며, 북측에 대한 점령계획에 의거하여 대한민국 군대와 더불어 일본자위대를 공동으로 참여시키는 연합작전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탄할 일이다! 미국에 의한 임의적 가설 군사조직인 유엔사가 동아시아 다국적의 지휘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군대가 그 통제하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대한민국이 한미연합사로부터 전시작전 지휘권을 되돌려 받는 것이 실제로 의미가 없는 무용지물이 될 위험에 처해 진다는 뜻이다.

때마침 다른백년도 참여하는 ‘유엔사 해체운동’이 발족되어 국내외적으로 46개 이상의 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첫 작업의 일환으로 ‘유엔사의 지위에 대한 질의와 유엔 깃발 사용금지를 요청하는 서한’을 모두가 연명하여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사무총장 진 마이어 변호사의 이름으로 유엔사무국에 접수하였다. 서신의 내용을 아래에 소개한다.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헤스 귀하

뉴욕시, 국제연합 본부

유엔사”의 한국과 일본에서의 유엔기사용에 대한 유엔사무총장의 입장

 

친애하는 사무총장님,

나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가 인정한 비정부기구인 본인의 조직과 이 서한을 지지하는 다른 시민사회단체들(이들 단체들의 목록은 3쪽에 있습니다)을 대신하여 이 서한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엔총회가 유엔의 이름을 옹호하기 위해 유엔초창기에 결의를 채택하였고, 유엔사무총장이 유엔기법을 채택하고 그 존엄성을 옹호하도록 유엔총회에 의해 승인된 바 있기에, 위 주제에 대한 총장님의 의견을 구하는 바입니다.

1. 미군은 1950년 7월 미국이 일방적으로 창설한 소위 “유엔군사령부”라는 이름으로 한국과 일본의 특정 군사기지에서 아직까지도 유엔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50년 7월 7일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결의 84에 기반하여 유엔기의 사용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엔기사용에는 몇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안보리는 안보리결의 84호에 의해 권고된 유엔이 아닌 다국적통합사령부에 유엔기의 사용을 승인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실수를 범했습니다. 아마도 당시 몇몇 안보리회원국들은 안보리에 그런 권한이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유엔헌장과 유엔법에 대한 최고의 국제법학자였던 한스 켈센 교수에 의하면 그러한 견해는 “유엔헌장이나 총회결의167(II)호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더군다나 안보리결의84호는 “북한군에 대한 작전 중” 유엔기사용을 “통합군사령부”에 승인했지만 미군은 한국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면서 전쟁 초부터 “유엔군사령부”란 이름으로 유엔기를 사용했습니다.

2. 유엔기법은 1947년 12월 19일 처음 공표되었고 그 8항에 “유엔기는 이 유엔기법에 따라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은 군사작전에서의 깃발사용을 승인하는 조항이 아예 없었습니다. 1950년 7월 28일 트리그브 리 유엔사무총장은 “군사작전중 유엔깃발사용은 유엔관할기구가 구체적으로 이를 승인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된 6항의 새로운 문장을 깃발법에 추가하였습니다. 켈센 교수는 이 새 조항에 대해 안보리결의 84에 대한 “사후정당화”라고 비판했습니다.

3. 1972년 9월 15일 28개회원국이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이 국가들은 제27차 유엔총회에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적 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한 우호적인 여건의 조성”이란 결의문 초안을 사무총장에게 제출하였고 이 결의문 제 2항에 의하면 총회는 “한국에서의…유엔깃발사용권의 폐기를 고려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후 미국은 안보리에 보낸 서한에서 “유엔기사용의 자제를 포함하여 ‘유엔군사령부’의 노출을 줄이는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약 석달 후 미국은 안보리에 보낸 다른 서한에서 “1975년 8월 25일부터 유엔기”는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실행과 직접 관련된 시설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모든 군사시설에서 더 이상 게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통지했습니다. 미국은 이 조치를 한국에서의 유엔기사용중지를 요구해온 회원국들의 의사에 반하여 일방적으로 취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사무총장의 권한과 의사를 무시한 조치였습니다.

4. 1993년 12월 24일, 비무장지대의 남·북간 경계선을 넘은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Boutros Boutros Ghali) 유엔사무총장은 자신은 판문점에 유엔기를 게양할 수 있는 권한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총장이전에 국제법학자이기도 한 그의 소견은 사실이며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1994년 6월 사무총장은 더 나아가 안보리결의 84호가 “안보리의 산하기구로 통합사령부를 설립하지 않았다.”고 명확히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통합사령부”는 유엔안보리의 통제하에 있지 않으며 따라서 “유엔사령부”로 부를 수 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총장님께 다음 4가지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안보리결의 84호가 유엔기구가 아닌 “통합사령부”에 북한군에 대한 작전과정에서 유엔기사용을 승인한 것은 유엔헌장과 유엔기법을 위반한 것 아닙니까?

2) 미국이 자기주도로 소위 “유엔사”를 창설한 다음 “유엔사”라는 이름으로 유엔기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안보리결의 84호의 위반 아닙니까?

3) 1953년 7월 27일 한국에서 실질적인 전투가 중단되었고 안보리결의 84호의 주요 목표가 달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도 “유엔사령부”라는 이름으로 유엔기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미국은 안보리결의 84호를 위반한 것 아닙니까?

4) 만약, 미국이 유엔헌장, 유엔기법, 그리고 안보리 결의 84호를 위반했다면, 한국과 일본에서의 유엔기의 남용을 중단시키기 위해서 사무총장님은 앞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 총장님의 관심과 친절한 답변이 최대한 빨리 이루어진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총장님께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사무총장 진 마이어


9월 30일자 최종 서신에는 23개 국내단체 23개 국제단체 총 46개 단체가 연명했습니다.

아시아-태평양법률가협회(Confederation of Lawyers of Asia and the Pacific-COLAP)

평화통일시민연대(Citizen’s Solidarity for Peace & Unification)

평화어머니회(Peace Mothers of Korea)

장준하부활시민연대(Citizen’s Coalition for Resurrection of Chang Jun Ha, the Patriot of Korea)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유라시아평화의길(Eurasia Peace Way)

한국청년연대(Korea Youth Solidarity)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미군문제연구위원회(Lawyers for a Democratic Society Research Committee on USFK Affairs)

다른백년(The Tomorrow)

전국농민회총연맹(National Federation of Peasant Society)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 Korean Women Peasant Association

전국여성연대(National Women’s Solidarity)

코리아국제평화포럼(Korea International Peace Forum)

AOK(Action One Korea)

민주노동자전국회의(Democratic Workers’ National Conference)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National Democratic Movement Families Association)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National Unification National Unity South Korea Headquarters)

진보대학생네트워크(Progressive College Student Network)

통일광장(Unification Square)

양심수후원회(Support Committee for Prisoners of Conscience for Justice, Peace and Human Rights)

한국진보연대(Korea Progressive Solidarity)

전국빈민연합(National Poverty Alliance)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Democratization Practice Family Movement Council)

한국대학생 진보연합(Progress Union of Korea univ. Students)

6.15 Committee of Section Europe.

Australian Anti-Bases Campaign Coalition.

Citizens Opposing Active Sonar Treats, USA.

The Columban Mission Society.

Des Moines Catholic Workers, USA.

Environmentalists against War, USA.

Global Network against Weapons & Nuclear power in Space.

Int’l Network of Engineers & Scientists for Global Responsibility.

National Association of Korean Americans, NAKA.

The Olympia Washington Fellowship of Reconciliation, USA.

Peace Philosophy center, BC, Canada.

Peace Women Partners Int’l.

Popai Liem Education Foundation, USA.

Swedish Peace Council.

Trident Ploughshares, XR peace, UK.

Policy Research for Development Alternatives, Bangladesh.

WorldBeyondWar, USA.

Peace Action, Maine, USA.

Peace Workers, USA.

Veterans for Peace, Korea-peace Campaign, USA.

Presbyterian Peace Network for Korea, USA.

SOAS Univ of London, Social Justice of Korean Students Union.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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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조직, 국회사무처

국회 지원부서는 폐쇄적이다. 언터처블이다. 행정부의 감사감찰, 수사기능이 여기에 미치지 않는다. 국회입법고시 출신들이 강한 결속력으로 승진이나 혜택을 독점하고 비리는 서로 감춰준다. 국회의 주인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회사무처 직원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 11월 국회운영위원회 회의에서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남양주시갑)이 한 발언이다.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극심한 불신은 국회가 그 만큼 힘 있는 기관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웅변한다. 국회가 반대하면 그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다는 일종의 ‘패배감’도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찬찬히 그 실상과 근원을 들여다보면, 국회 시스템의 기본을 장악한 세력은 “4년 계약직인 국회의원”이라기보다 오히려 붙박이 공무원인 국회 입법관료 집단일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국회의원은 빙산의 ‘일각(一角)’이고, 그 빙산의 ‘근저(根底)’는 입법 관료들이다. 이들 입법관료들의 힘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강하다. 사실상 입법권을 좌지우지하는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비롯하여 국회 예산과 운영에서도 실질적 지배자는 바로 입법관료라 해도 결코 지나친 과장이 아니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하게, 문자 그대로 국회의 사무 및 관리(administer)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 의회 시스템에서 행정 사무관리 업무를 보조, 지원하는 기관이 비대해짐으로써 결과적으로 행정부를 연상하도록 하는 제2의 관료체제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 국회 사무처의 경우, 바로 이러한 행정관리 업무를 중심으로 관료적 질서를 구축하면서 사실상 제3의 세력 집단으로 성장해 있다. 이는 입법관료가 대표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국회사무처가 단지 국회의원을 보조하는 입법지원 기구일 뿐이라는 점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비선실세, 법원행정처와 국회사무처

법원의 행정을 지원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설치된 법원행정처가 실제로는 법원의 최고 권력을 장악한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국회사무처와 같이 본래 행정과 사무의 보조 업무를 담당하는 부서의 권한이 점점 확대되어 전도본말의 행태가 나타나기 쉽다. 법원행정처와 국회사무처를 연속 취재해 보도했던 모 방송국 PD는 필자와의 통화에서 “취재과정에서 드러난 국회사무처의 여러 행태는 법원행정처와 완전히 동일했다.”고 밝혔다. 정보공개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전진한 씨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적폐가 어디냐는 온라인매체 ‘오마이뉴스’의 기자에게 질문에 서슴없이 국회사무처라고 단언한 바 있다.

국회 예산 운영도 사실 문제다. 상식적으로 말해서, 어느 기업이든 국가 기관이든 ‘돈줄’을 쥔 자가 가장 힘이 센 사람이고 사실상 주인인 셈이다. 정부에서 기재부가 힘이 센 것은 바로 돈의 힘이 아닌가?

그런데 국회의원도 국회 사무처로부터 월급을 비롯하여 각종 운영 경비를 받는다. 커다란 문제로 부상되었던 ‘특활비’도 사무처로부터 받고 각종 활동에 대한 각종 명목의 비용 역시 사무처로부터 수령한다. 또 ‘우수’라는 평가와 지출 모두 사실상 사무처의 ‘권한’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거꾸로 국회의원들이 사무처에 잘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 국회의원에 대한 불신이 너무 깊고 큰 것이어서 국회의원에게 돈까지 맡기는 것은 절대로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국회사무처가 검토보고 권한과 함께 이렇게 예산과 관련 운영을 ‘독점’하기 때문에 그 권한 역시 크게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주객전도의 적나라한 현장이다.

이들 국회 사무처를 비롯한 이들 국회 기관들이 사실상 유일하게 감사를 받는 곳은 국회 운영위원회 회의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대개 “자기 식구”라는 차원에서 매우 온정적인 분위기로 처리된다. 그러니 사실상 그 어디에도 국회기관들을 감독, 감사하는 곳이 없다. 이른바 무풍지대이자, ‘온실 속 화초’다. 하지만 감시와 견제가 없는 곳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은 만고의 철칙이다.

그러는 가운데 그간 국회에서는 2천 억 원 예산 규모를 넘는 의원회관을 비롯하여 의정관, 국회 한옥, 어린이집 등등…… 그 아름답던 숲과 아름드리나무들을 베어내고 파괴하면서 건물들은 계속하여 새로이 지어졌다. 지금도 국회 한 켠에서는 신축 건물들이 또 지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다지 투명하지 못한 이 과정에 상당한 예산이 낭비되고 있다. 특히 2천 억대 규모로 진행되었던 의원회관 공사에서는 국회 고위층 비리설이 파다하게 퍼지기도 하는 등 국회에서 새 건물이 올라갈 때마다 어느 누구를 위한 사업이라는 풍문이 돌곤 한다. 그 명칭부터 이미 국적 불명인 ‘국회 스마트워크센터’는 총 646억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시작부터 낙찰가가 입찰 예정가격을 초과해 말썽을 빚기도 했다.

이러한 ‘전근대적이고’ ‘비정상적인’ 행태는 이제 그만 둘 때가 되었다.

 

국회사무처, 문자 그대로 사무와 보조에 그쳐야 할 조직

그러나 선진국 의회에서는 이와 전혀 반대다.

예를 들어, 독일 의회 사무처의 역할은 회의 준비 혹은 회의장 정리 등 그야말로 보조적인 차원의 업무를 수행하고 직원 역시 대부분 실무자 수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무처가 그 명칭과 실질이 부합하는, 명실상부한 ‘사무처’이다.

독일 연방의회조직도 처국과

덧붙이자면, 프랑스나 독일 그리고 영국 등 국가의 의회에서는 의장과 양당 대표들로 구성되는 “이사회”(영국의 경우에는 하원위원회가 이에 해당하고, 독일의 경우는 최고평의회가 이와 유사하다)가 국회 내 조직의 인사와 예산을 총 관리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산의 경우에는 ‘이사회’의 ‘재무회의’가 매주 1회 개최되어 재무회의의 승인 없이는 의회의 모든 지출이 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시스템이 정상이다. 이렇게 ‘돈줄’을 장악함으로써 의원들은 의회의 진정한 ‘주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국회사무처란 마땅히 명실상부하게, 국회의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게 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타이완 입법원에는 별도의 사무처가 없고 대신 입법원 산하에 비서처, 의사처, 공보처, 총무처, 자문처를 비롯하여 법제국, 예산중심(中心), 국회도서관 그리고 의정박물관을 두고 있다.

미국 의회의 사무처 역시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의회의 행정조직은 예외 없이 이러한 형태의 조직으로 구성된다. 의원을 행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치된 의회 사무처가 오히려 의원 본연의 업무를 침해하는 월권의 가능성은 근본적으로 차단되어야 한다. 미국 의회의 경우, 1946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고 입법지원 조직을 획기적으로 강화시켰다. 우리도 이를 모델로 하여 국회의원들로 구성되는 가칭 ‘입법부강화 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입법부 재조직법」을 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서 현 국회 행정조직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진정한 입법지원 조직으로서의 국회 공무원 조직을 정립시켜야 한다.

특히 국회 전문위원은 이제 본래의 취지대로 ‘전문가’로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 국회도 처음에는 ‘국회 전문위원’은 의원들을 지원, 보좌하기 위하여 각 분야의 유능한 전문가를 상임위원회에서 의원들이 직접 선발했었다. 하지만 이는 유신 정권에 의하여 결국 전문가가 아니라 관료들이 독점하도록 ‘변형’되었다.

이러한 왜곡은 이제 바로잡혀야 한다. 그리하여 국회의원이 진정으로 국회의 주인이 되고 명실상부한 ‘전문가’들의 입법지원 활동에 토대하여 진실로 국회다운 국회, 일하는 국회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화, 2020/05/0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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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번 글을 시작으로 2주에 1번씩 함께살기의 복지국가 5.0 기획칼럼을 게재합니다. 필진은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시재생, 도시계획, 주거환경, 현실정치, 공론장, 지방분권, 주거/문화정책, 노인복지, 사회사상, 복지국가이론, 사회보장정책, 건강정책, 영유아 돌봄, 청년정책, 세대갈등, 고용정책, 기후변화, 환경/에너지 정책, 행정개혁, 성평등 등 여러분야에 대해 심층적이고 실천적인 방안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2010년대 초반 무상급식을 중심으로 복지국가는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복지국가의 강화를 주창하는 것은 식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일부는 진보진영이 때가 되면 떠들어대는 지겨운 레퍼토리로 치부하기까지 한다. 현재 뜨겁게 달아 오르고 있는 기본소득제 논의도 복지국가의 한계에 대한 지적을 발판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쟁은 깊이 있는 분석과 사유에 기반하기 보다는 한 철의 유행으로 다뤄버리는 현실이기에 씁쓸하다. 정말로 복지국가는 무용해졌을까? 현대의 복지국가를 만들어낸 유럽에서도 복지국가가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을까? 더 나아가, 우리나라는 무용론이 적용될 만큼 복지국가였던 적은 있었던가?

 

통치패러다임으로서의 복지국가

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였던 적이 없다. 복지국가는 단순히 제도나 정책의 묶음이 아니라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통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의 논리와 가치들을 중심으로 나라를 조직∙운영했던 적이 없다. 단지 부수적인 것으로 아니면 어려움이 있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사회구성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그때그때 이용될 뿐이었다.

패러다임은 패턴, 예시, 표본 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παράδειγμα)에서 유래한다. 현대에 와서는,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 공동체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믿음, 가치, 문제해결 방법 등의 총체’라는 의미로 사용된 후[1], 패러다임은 세계관, 사회관, 인간관, 믿음체계, 가치체계 등 보다 근원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이들에 기반해 형성되는 문제의식, 문제해결의 방식과 도구, 제도와 정책 등의 요소들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즉 하나의 영역이나 분야에 이러한 요소들이 지배적인 모습을 보일 때 패러다임이라 부르고 있다. 한 나라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것에도 이러한 패러다임이 형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치패러다임이라 부를 수 있다.

통치패러다임은 한 나라를 통치하는 기준들에 대한 종합적인 틀이기에, 당연히 전 방위에 걸쳐 대부분의 영역에서 적용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복지국가가 ‘복지’와 ‘국가’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용어이기에,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국가’라고 여기기 십상이다. 하지만 통치패러다임의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이해는 매우 단편적이며 표면적인 잘못된 이해이다. 복지국가는 통치패러다임에 의거해 복지국가의 사회정책, 경제정책, 문화정책 등을 자율적이면서 체계적인 논리와 기준들에 따라 수립하고 수행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기존의 다른 유형의 국가, 예를 들어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구성원이 하는 것을 그대로 놔두는, 특히 경제활동에 개입하지도 않고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도 하지 않는 ‘야경국가 패러다임’을 교체하면서 대두되었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국민의 경제활동에도 개입하고 취약계층을 지원도 하며, 더 나아가 국민의 일상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개입을 하는 국가이다. 즉 복지국가는 국가의 한 유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재정 전 영역에서 동일한 기준과 방식으로 국가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틀, 즉 통치패러다임을 구축한 국가이다. 이러한 통치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는 아직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의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인정하는 국가가 아니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은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에 기반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사회보장의 상대적 자율성이다. 사회보장은 인간은 생존유지, 인간적인 삶 그리고 자율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를 본래적으로 갖고 있으며 이 욕구를 사회적 연대의 방식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 자체로 활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다. 다른 어떤 외부의 원인들로 인해 사회보장의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 자체에서 필요성이 도출되는 것이다.

이 존재이유가 침해되는 순간 인간의 삶은 불충분하게 되어 고통이 발생한다. 사회적 위험이란 바로 앞서 말한 근원적인 욕구들이 충족되지 않아서 고통이 발생한 상황을 말한다. 아파서, 마음 놓고 기거할 공간이 없어서,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어서, 역량 함양을 위한 교육이 너무 비싸거나 교육기관이 없어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고통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명확하다. 고통의 해소를 추구하게 된다. 이를 위해 사람들은 혼자 힘으로 노력하는 방법도 있고,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쳐 공동으로 해소하는 방법도 있다. 바로 후자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이다. 공통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사회적 위험에 공동으로 대응하여 위험을 해소하는 것이다. 사회보장이란 바로 이 공동의 대응방식을 포함한다.

하지만 단순히 제도와 실천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와 그것이 충족되지 않은 사회적 위험에 자신들도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다는 잠재적 보편성에 기반한다. 즉 제도와 실천 이전에 인간이 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나는 욕구와 그것의 미충족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대한 특정의 대응방식 등은 모두가 제도 이전에 인간을 구속하는 것들이다. 오히려 심층적인 요인들이 작동해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제도와 실천이 만들어진다. 사회보장이란 이처럼 보다 심층적인 요소들과 더불어 현실에서 관찰 가능한 제도와 실천들 모두를 아우른다.

다만 인간이 사회보장을 실현함에 있어서 외부 환경이 이를 도와주거나 방해한다. 예를 들어, 경제체계는 이 외부환경에 속하면서 사회보장의 실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세기의 극단적 자본주의 경제체계는 사회적 위험을 발생시키고 이 사회적 위험에 대한 사회연대적 대응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외부요인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사회보장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다. 내적으로 그 존재의 이유와 발생의 원인을 갖고 있기에 독립적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외부환경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자율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사회보장의 실현을 제1의 목표로 삼는 국가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개인이나 1차 집단이 주로 담당했던 역할을 이제는 국가가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 그리고 그 충족의 방식이 사회적 연대의 방식인데, 이러한 욕구 충족과 충족의 방식에 대해 국가가 전면적으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득보장,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등을 관할하는 최종심급이 국가가 된 것이며, 경제 영역에까지 사회보장의 논리를 적용시키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국가가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이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국가의 용인이 있어야 가능하게 되었다.

 

적응의 원리와 복지국가의 업그레이드

복지국가는 내∙외적 환경변화에의 적응(adaptation)을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로 삼고 있으며, 이 원리에 의거해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에 태동한 이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사회보장의 실현은 결국에는 주어진 현실의 환경 속에서 이루는 것으로, 상대적 자율성의 성격에 따라 외부의 요인들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적응은 바로 이 영향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적응의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근원적 욕구의 사회연대적 충족’이라는 목적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당하다는 점이 재천명된다. 그리고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선택한 기존의 방법과 도구들, 즉 제도, 관행, 실천 등이 목적 실현에 적절한 것인가를 심도 있게 고민한다. 그리고 보다 나은 다른 방법과 도구들이 없는지를 살펴본다. 그 결과 일부는 폐기하고 일부는 새롭게 선택된다. 이렇게 재구성된 방법과 도구들이 누수 없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가, 즉 최대의 결과물들을 낳고 있는지를 재검토한다. 이 과정을 통해, 관료주의가 개선되고 제도의 최종 성과물과 애초에 상정한 목표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는 효율성을 갖추게 된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19세기 말의 1.0 버전부터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 경향의 확대에 적응한 4.0 버전까지 단계적으로 변화해 왔다. 19세기 전반기 내내 계속되었던 노동자들의 요구로 노동보호와 관련된 입법들이 19세기 후반부터 이뤄졌고, 1880년대부터 사회보험체계가 도입되기 시작했다. 취약계층에 대한 자선적 의미의 보호가 19세기 말부터는 국가의 의무이고 국민의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위생, 전연병, 공중보건 등도 국가의 몫으로 떨어졌다. 이렇게 복지국가 1.0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탄생했다.

태동기의 흐름은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사이에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경험하며 복지국가 2.0이 만들어졌다. 독점자본주의 폐해의 확대 및 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내∙외적 환경변화의 대표적 요소들이다. 이에 적응하기 위해,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은 복지국가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렸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적용대상자의 범위 또한 넓혔다. 스웨덴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집권하여 가족정책과 주거정책 등에서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시장에서도 노사협의의 관행을 만들어냈다. 프랑스는 1930년대 인민전선이 집권을 함으로써 사회보장 제도들이 확대되었으며 미국에서조차 뉴딜정책과 사회보장법이 도입∙집행되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소위 ‘영광의 30년’을 보낸 복지국가 3.0이 형성됐다. 전쟁의 경험이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에 대한 사회보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사전에 준비된 내용들은 입법의 과정을 거쳐 제도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의 복지국가는 분야를 가릴 것 없이 대부분의 영역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성격도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게 복지국가 3.0은 1970년대에 이르러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명실상부하게 통치패러다임으로 인정되고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환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새로운 생산모델인 ‘다품종 소량생산’이 널리 퍼지고 경제 자유화 및 금융 자유화가 일어나 자원의 국제적 이동이 커지게 되었으며 해외직접투자도 점차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위험의 내용도 달라졌다. 불안정고용의 증가, 장기실업의 등장 및 대규모화, 근로빈곤의 발생, 한부모 가구의 증가,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각종 차별의 사회문제화, 도시환경의 낙후(도시재생 및 구역개발의 필요성 대두) 등, 소위 ‘신사회적 위험’이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들은 결국 각 나라가 구축한 복지국가 3.0의 문제해결능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복지국가는 앞 서 2번의 적응능력을 보여주었듯 이번에도 적응에 들어갔다. 인적 역량의 강화를 강조하는 사회적 투자, 소득보장에 있어서의 최저소득보장체계의 강화, 중산층을 위한 복지의 상대적 축소 및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강화, 사회서비스의 민간제공주체로의 확대(즉 복지혼합), 사회보장의 지방분권 강화 등이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적응은 결국 복지국가 4.0 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버전은 다시 새로운 환경변화에 직면하여 또 다른 적응의 압력에 노출되었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압력을 가중∙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서의 복지국가의 위상

1980년대의 이후 ‘복지국가의 위기’가 널리 회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축적된 사회보장에 관한 자료들은 복지국가의 ‘후퇴’보다는 ‘안정적 지속’을 보여준다. 일련의 변화는 있었지만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는 않았다. 당시의 변화들은 GDP 대비 공적 사회지출이 대략 5% 정도 축소하는 결과를 나았다. 즉 복지국가의 합리화가 5%의 축소에 한정해 이뤄진 것이다. 특히 경제체계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정성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2] 현재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실효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되고 있다. 복지국가의 수준이 높을수록 팬데믹에 대한 대응 또한 잘 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즉 2020년의 경제성장률은 그 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요소들이 국내외의 환경변화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 능력을 갖췄는지를 판단하는 종합지표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복지국가가 가장 잘 발달되었다는 북유럽 국가들 증 덴마크가 0.7% 증가하고, 핀란드와 스웨덴은 0.89% 하락했다. 이러한 수치는 다른 선진국들의 보인 2~5% 대의 하락과 비교한다면 매우 도드라진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도 이와 유사하다. 북유럽 국가들이 0~3%대의 하락을 보인 반면, 다른 선진국들은 3~9%대의 하락율을 보였다. 결국 복지국가패러다임이 보다 공고히 자리잡은 나라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았다.

국제통화기금(IMF)는 각 국가가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실시한 예산사업, 재난지원금 등의 현금 지원, 세액감면 등과 같은 직접적인 지원을 ‘추가지출 및 기존 세액감면(Additional spending or foregone revenues)’ 항목으로 집계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3] 이 자료 또한 복지국가패러다임 구축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북유럽 나라들의 직접지원은 GDP 대비 1~4%인 반면, 미국, 영국 등의 영미형 국가들은 14~16%,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대륙형 복지국가들은 7~11%였다.

결국, 북구형 복지국가들은 팬데믹이라는 응급상황에서 다른 유형의 국가들보다 국가의 지원이 매우 낮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률은 더 좋았다. 이는 복지국가패러다임에 의거한 제도들이 촘촘히 구축되어 있어서 내∙외적 위기에 보다 더 용이하게 대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복지국가는 평상 시에도 국민의 높은 삶의 질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위기 시에도 별도의 추가비용 없이 국민의 일상적 삶을 보호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러한 증명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국가의 통치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보여준다.

 

복지국가 5.0의 전면화 가능성 상승

서구 유럽에서의 코로나19 팬데믹은 복지국가의 위기대응 능력에 대한 인정을 넘어 새로운 업그레이드에 대한 여러 징후들을 낳고 있다. 복지국가의 후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나라인 영국에서조차 ‘복지국가의 복귀’가 언론상에 등장하고 있다.[4] 코로나19 팬데믹 과정에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특히 중산층에게까지 여러 지원을 했고 이로 인해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올라가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과거 황금기의 복지국가가 새롭게 재구축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복지국가 5.0 버전의 출발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복지국가 5.0의 등장은 1980년대 이후 형성된 복지국가 4.0이 해소하지 못하는 문제들이 축적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 기후변화에 대한 적극적 대응, 여성의 경제참여 확대, 성평등의 제도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기술 및 정보에 대한 사회화, 지방 자치 및 분권의 공고화, 이민자의 사회통합 강화 등이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보장의 원리와 원칙이 경제영역에서 보다 더 확대되어야 한다. 그 동안 미뤄두었던 생산수단의 사회화, 기술 및 지식의 사회화, 생산과정에서의 경제적 민주주의 강화, 협동조합을 포함한 사회적 경제조직의 역할 증대, 더 나아가 사적 재산권에 대한 제한, 금융의 사회화, 화폐민주주의의 강화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으로 복지국가 5.0을 만들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한국사회에 내재된 여러 문제들을 표면화 시켰다. 사회보장의 기존 제도, 관행, 실천의 한계와 결함을 드러냈고, 지방자치단체의 역량 부족을 부각시켰다. 무엇보다도 IMF가 집계하는 직접지원이 GDP 대비 3.4%라는 점은 사회구성원에 대한 소득보장이 부실함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북유럽 나라들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어 위기상황에도 직접지원이 덜 필요한 반면, 우리나라는 그러한 기반이 없음에도 직접지원은 그들과 유사했다. 결국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의 불가피한 소득결핍의 문제를 사회적 연대 방식이 아닌 개인과 가족의 자구방식, 특히 가계부채에 맡겼다. 이는 우리나라의 통치패러다임은 야경국가패러다임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위기는 기회이다’라는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미 유럽연합과 개별 회원국에서 나타나듯이, 이번 위기를 기회로 삼아 기존의 것을 넘어서는 발상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3개의 상이한 압력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 복지국가 3.0을 완료하지 못했기에 이를 보완해야 한다. 복지국가 4.0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아직 맛보기 수준이다. 거기에다 다가오는 복지국가 5.0이 해소해야 할 것으로 상정되는 문제들은 아직 문제제기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우리나라가 당면한 복지국가의 구축은 매우 방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통치패러다임의 새로운 구성을 위한 공론의 장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서구복지선진국이 1945~1975년 사이 복지국가패러다임을 통치패러다임의 지배적 위치에 최종적으로 올려 놓은 그 작업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서구유럽의 경우 복지국가패러다임이 지배적 통치패러다임이 되기까지 거의 1세기가 걸렸다. 우리나라는 복지국가가 논의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간 길들을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저력을 보여왔다. 복지국가패러다임의 구축도 그러한 저력이 펼쳐져야 할 장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우리나라의 저력을 다시금 확인해야 할 때이다.

 

[1] .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2nd Editi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0.

[2] . Paul Pierson, The Welfare State Over the Very Long Run, Zes-Working Paper No. 02/2011, 2011.

[3] . IMF, Fiscal Monitor Database of Country Fiscal measures in Response to the COVID-19 Pandemic, 2021/02/03 참고.

[4] . The Economist, “Covid-19 has transformed the welfare state. Which changes will endure? The pandemic may mark a new chapter in the nature of social safety-nets”, 『Briefing』, 2021/03/06.

 

이권능

정책연구소 함께살기 소장. 정치학도로 시작해 프랑스 파리제1대학과 그로노블정치대학(IEP de Grenoble)에서 사회정책을 전공한 후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연구실장으로 활동했음. 현재는 복지국가를 마을에서부터 만들기 위한 운동을 진행 중. 사회사상, 복지국가와 복지정치, 사회보장, 건강 및 요양, 복지도시 등을 사회성(the social)과 이론-실천의 통합 관점에 기반해 연구 중

목, 2021/08/12-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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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국 광저우시 변두리의 한 마을에 거주하는 ‘문화교류 활동가’이다. 5년전 중국에 건너 올 때는 하자센터에서 배운 마을생태주의, 여성주의, 스스로 공부한 탈서구중심주의에 기반한 동아시아 교육공동체를 만들어 보자는 ‘야심’이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당연히 만만치 않아, 모두 ‘장기과제’로 돌려버리고, 지금은 한가하게 중국책이나 인터넷글들을 읽으며 소일하고 있다. 일년전 대학에서 교원으로 일하는 중국인 아내와 결혼도 했고, 주변엔 모두 중국인 친구들뿐이다. 코비드 때문에 국경넘어 왕래를 못하니 오로지 인터넷을 통해 ‘외부세계’를 만난다. 아주 오래전엔 십년 넘게 다국적 기업에서 일하며,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생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의 소속감에 기대 ‘명예백인’노릇도 하고, 반대로 회사안의 백인중심주의에 분노하며 이에 대항하는 범아시아주의를 상상하기도 했다. 중국대신 태국으로 갈까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현지인들과 ‘깊은 문화적 이해’에 기반한 ‘평등한 관계’를 맺을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그래도 중국에 건너올 때 우리의 앞선 시민의식을 “널리 알려 교화하자”는 숨은 의도도 있었으니, 여전히 “아시아의 유일한 근대국가 한국민”이라는 우월감은 포기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도모하던 자잘한 프로젝트들이 하나둘 실패하면서 서서히 키워오던 감각이 있다. 작년 봄, 코비드 락다운은 그 감각을 온전히 의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층을 나눠 살며 함께 너른 마당을 가진 주택을 공유하는 중국인 중산층 가족과 석달간 집과 마을에 갇혀 있었다. 가족과 국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느꼈고, 그들의 관점을 내재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다케우치 요시미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중국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중국을 내안으로 품어 되감는 것도 소통이 전제가 돼야 한다.

때문에, 나는 작년부터 한국내에 고조되기 시작한 반중정서를 특히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역으로, 중국에는 딱히 반한이라 할만한 대중적 정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긴장했다. 일반적인 중국인들은 한국내의 반중정서를 알지 못한다. 언론이 콕집어서 보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중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고, 아마도 자기편을 하나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중국 정부가 역풍을 우려해 언론을 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주류언론은 조선구마사 논란에 대해서 완전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한국에 대한 보도가, 이를테면 N번방사건 같은 대개 부정적인 뉴스 일변도인 것도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됐다. 즉, 어느 정도 실상을 파악하고 있는 중국 언론인들의 한국에 대한 불만이 간접적으로 표현된 것으로 나는 추측했다. 이 와중에 잠시 중국 언론의 입질에도 오른 김치, 한복 논쟁은 오히려 해프닝에 가까왔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한중 ‘배틀’이 벌어진 것은 사실이고, 나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이 전투에 참전하는 중국인들이 어떤 주장을 하는지 궁금해져서 직접 검색을 해보았다. 감정섞인 선동이나 일부 사실의 과장과 왜곡 등을 걷어내고 보면, 그 요체는 “한국인들이 많은 중국전통문화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를 포함한 주위 친구들에게 확인해 본 결과, 이런 생각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중국인들에게 막연하게나마 오랜 기간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절이고, 공자가 실은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식의 상고사와 관련한 ‘족보논쟁’들도 있었다.

와중에 조선구마사 사건에 반응하는 한국주류 미디어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 그동안 코비드 중국책임론에 휘말리지 않고 중국에 대한 감정적 비난을 자제해오던 개혁과 중도 성향의 일부 매체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특히 문제라 생각했다. 이런 화법은 한국인들이 중국의 애국주의 네티즌을 비판하던 논리의 거울이미지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국 자본의 부당한 내용 간섭도 아닌데, 중국 브랜드 음식이 PPL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됐다는 몇몇 드라마의 사례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한 중국의 네티즌이 한국 식품회사가 냉동만두를 코리안푸드라며 해외에 수출하는 것을 중국문화 강탈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어이없다고 느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매체보도와 페이스북 여론을 살피며 무슨무슨 공정이라는 일련의 신조어들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한국인들의 큰 불만이 동북공정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알았다. 조금 더 근본적으로는 중국인들이 민관합심하여 한국의 역사를 중국내 소수민족 역사로 치부하거나, 나중에는 한국을 예전의 속국처럼 부리려 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음도 깨달았다.

이런 한국인들의 두려움과 불만은 한한령이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고 있기때문에 지난 5년간 더 많이 누적되어 왔다. 시진핑 집권 이후 강화된 중국의 내부 독재와 외부에 대한 강경노선은 중국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전문가들에게조차 비판과 우려의 대상이다. 중국 정부의 “조종을 받는 샤오펀홍 현상”은 한국 사회과학계의 분석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발 팬데믹 상황이 1년 넘게 지속되고 있고 최근 몇년간 미국이 앞장서고 서구사회가 거드는 형태로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홍콩, 신장 등의 문제도 새로운 미움의 이유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국인들이 막연히 품게된 반중 감정이 왜 과도하다고 생각하는지 하나씩 설명해보려한다.

한국인은 중국인이 세상 모든 문화가 중국에서 비롯했다는 ‘만물중국기원설’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자가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농담같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딱 댓구를 이루는 ‘한국의 중국전통문화강탈설’처럼 과장돼 있다. 신장지역 주식인 낭이 피자도우와 비슷하다는 생각은 할지 몰라도, 정색하고 그런 주장을 할 중국인은 많지 않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김치에 대한 도발은 아마 가장 한국인을 자극하는 소재일 것이다. 중국내 소수민족인 조선족의 존재 때문에, ‘챠오시엔파오차이’라는 표현을 할 수는 있어도, 영어명 차이니즈 캐비지인 배추가 중국에서 건너갔으니, 중국 음식이라 생떼쓰는 중국인은 거의 없다. 그들도 중국에서 김치를 맛보려면, 한식당을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안다. 중국에는 지역마다 사천식 파오차이같은 다양한 절임음식, 발효음식이 있기 때문에, 그리 김치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오해에서 비롯한 불만 때문에 몽니를 부리는 일부 네티즌들이 있을뿐이다. 한국인들 대부분이 거의 신경쓰지 않는 강릉단오절과 남방 중국인들의 국민명절중 하나인 단오절은 기원만 같을뿐 별 관계가 없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대다수 중국인들을 흥분하게 하는 쟁점과 대다수 한국인들을 화나게 하는 이슈는 같은 것이 아니다. 중국인의 것은 중국인에게 한국인의 것은 한국인에게 돌리면 될 일이다.

동북공정의 실상은 필요 이상으로 과장돼 있다. 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참고하려고 아내도 예전에 한부를 사 둔 중국의 저명한 역사지리학자 탄치샹의 <중국역사지리집>(1981)은 현재 국제표준으로 인정되는 지도집이다. 이에 따르면, 한4군 멸망 후, 한반도 북부는 ‘중국 역대왕조의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만주지역에 대해 우리 사학계와 이견이 있다지만, 공개된 학술적 논쟁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탄치샹의 직계 제자이고 중국 교육부 사회과학위원회 위원인 거졘슝 푸단대학 교수도 그의 대표작 <통일과 분열>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조선(반도)과 월남의 문화와 제도는 중국 내륙이나 변경의 소수민족보다 훨씬 더 중국에 가까왔다. 하지만, 두 나라는 독립왕조 성립후, 중국의 일부였던 적이 없다.” 역시 푸단대학의 저명한 중국문화사 전문가 거자오광 교수는 <이 중국에 거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현대중국의 영토기준으로, 역사상의 중국을 설정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관할하던 지방정권이 아니다. 토번(티벳)도 당나라의 일부가 아니었다.”

혹시해서, 20년 넘게 진행중인 한중일 청소년 역사캠프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했다가 친구가 된, 상하이 민항중학교 역사교사 판선생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봤다. “동북공정에 대해서 좀 물어보려고요.” “그게 뭐죠, 동북지역 개발 프로젝트인가요 ? 역사선생인 제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죠” 헛웃음을 속으로 삼키며 다시 확인했다. “그러니까, 중국 학교에서 고구려를 중국의 역대 지방정권이라고 가르치는 경우는 없다는 거죠 ?” “당연히 아니죠. 중국 역사에서 가르칠 내용만 해도 너무 많아서 바빠 죽을 지경이예요” 그는 인터넷으로 동북공정을 검색해 본 후, 한마디 덧붙였다. “아마 동북공정이란 이름을 들어 본 중국인은 10만명도 안될 거예요.” 빠링80허우인 둥베이 출신의 ‘절친’ 아무에게 물어봤을 때도, 황당하다는 표정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런 걸 대체 누가 신경쓴데요?”

한한령때문에 대중국 문화콘텐츠 수출이 차질을 빚은 것은 사실이다. 아마 한류의 영향을 받는 화장품 같은 소비재 수출도 타격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국 수출총액은 꾸준한 편이고, 한국이 G8에 들어가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국내에 알려진 것과 달리, 중국내 샤이한류팬들은 꾸준히 인터넷의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류를 소비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좋아할만한 소재의 드라마가 한국에서 시즌을 시작하면, 2주가 채 지나지 않아, 중국의 일류매체에 앞다퉈 공들인 평이 실린다. 한국 매체들이 평을 내기도 전이다. 최근엔 ‘자산어보’와 ‘무브투헤븐’에 대한 평이 눈길을 끌었다. 예전과 같은 압도적 한류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한한령보다는 지난 5년간 중국의 자체 콘텐츠 생산능력이 크게 향상됐기 때문이다. 중국 콘텐츠 소비자 시장은 일본, 홍콩, 타이완, 영미, 심지어 타이에서 만들어진 콘텐츠까지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전 세계 콘텐츠의 춘추전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력이 풍부해 어떤 나라의 문화를 대상으로 하든 언어능력을 갖춘 ‘덕후’들이 신속하게 자막을 제공한다. 콘텐츠 구매여력이 높은 대도시의 밀레니얼 세대 힙스터들은 일본문화를 선호한다. 중산층이 늘면서 오래된 선진국의 삶을 동경하고, 경쟁에 지친 마음을 달래는데 ‘소확행’ 원조 국가인 일본콘텐츠가 제격이다. 물론 Z세대는 한류를 더 선호한다는 의견도 있으니 두고 볼일이다.

현재 중국산 문화콘텐츠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핵심인력들인 빠링허우 세대는 망가와 아니메를 보고 자랐다. 72년 중일 수교후, 홍콩과 타이완을 통해, 일본 대중문화가 일찌감치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만화적 감수성을 의미하는 소위 ‘2차원(평면)’문화가 있다. 중국판 유튜브라 할 수 있는 삐리삐리에 지난 10년간 온갖 하위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업로드하던 이들이, 이제 산업을 이끌고 있다. 이미 5억명의 독자를 확보하는 규모로 성장한 웹소설 시장이 드라마와 영화의 풍부한 자양분이 되고 있으며, 무협물 등의 전통적 강점을 살려 해외에도 진출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큰 인기를 끈 무협판타지드라마 샨허링의 원작은 BL웹소설이다. ‘과환세계’라는 전문잡지 40년 역사를 가진 SF는 휴고상을 수상한 ‘삼체’의 소설가 류츠신이 있다. 2019년 개봉한 중국 최초의 본격 SF영화 ‘유랑지구’가ᅠ역시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고 있다. 미중간의 우주개발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AI를 비롯한 각종 첨단 IT 기술이 새로운 생활문화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컬SF문화가 성숙해 나간다. 2020년 중국에서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드라마, ‘침묵의 진상’과 ‘은밀한 구석’의 원작자 즈진쳔은 중국의 히가시노 게이고로 불리는 추리소설 작가이다. 중국 콘텐츠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대한 검열로 한쪽 발목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인터넷모바일 문화와 궁합이 잘맞는 장르물들이 매우 발달돼 있고, 검열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현실풍자나 이상적 세계에 대한 희망을 표현할 수 있는 가상역사극, 역사판타지물 혹은 촨유에穿越라 불리는 역사타임슬립물들이 인기가 있다. 한국드라마 ‘철인왕후’의 원작이 이런 장르의 중국 웹소설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얼마전부터 한국드라마 중국시장외 판권의 구매를 재개한 중국의 3대OTT 아이여우텅愛優騰은 모두 인터내셔널 버젼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중국 콘텐츠들이 동남아 시장을 개척하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아직도ᅠ중국이 유일하게 한국 콘텐츠 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부문은 예능일 것이다. 광고주의 심한 압력때문에 창작대신 손쉽게 베끼는 관행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는 소위 중국판 예능2.0으로 불리는 창작물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있다. 올해 초에 인기를 끈 ‘희극신생활’같은 프로그램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복-한푸 논쟁을 불러왔던 중국 청년들의 자국 전통문화 사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자. 이들의 전통문화 애착은 샤오펀홍들의 맹목적인 선호도 있지만, 그보다는 경제적 생활수준의 향상에 의한 다양한 문화소비 혹은 학습열로 보는 것이 옳다. 지금 중국 청년들에게 타임슬립을 해서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어보면 송宋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송대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해 매우 부유했고, 그 결과 한족 문화가 최전성기를 누렸던 시기이다. 하지만 문약하여, 요, 서하같은 북방 민족국가들과 대등한 국가간 협정을 맺으며 중화-오랑캐라는 유아독존적 천하관을 최초로 탈피하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10여년전까지만 해도 팽창주의에 기대 한당漢唐 시기를 그리워하던 분위기속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상황이라고 송대 전문가 베이징대 자오둥메이 교수는 설명한다. 삐리삐리의 콰녠완후이는 12월31일밤 사용자들이 자발적으로 콘텐츠를 만들어 공유하며 인터넷상에서 일체감을 느끼는 버라이어티쇼이다. 국풍이라 불리는 전통문화관련 콘텐츠도 인기가 많지만, 한쪽에선 코스프레차림의 사용자가 일본어로 아니메 주제가를 부르기도 하고, 해리포터나 왕좌의 게임부터 톰과 제리에 이르는 서구의 인기 콘텐츠를 가공해서(이 과정은 畜生이라고 부른다) 다양한 ‘껑'(밈의 중국어 표현)으로 즐기기도 하는 혼종적 문화를 선보인다. 중국 청년들의 전통문화 사랑을 단순하게 애국주의로 등치시킬 수 없는 증거이다. 중국 청년들의 이런 자국 문화 사랑을 보면서, 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악마의 열기라든가, 최근 K-방역이나 BTS 등을 자랑스러워 하는 한국 청년들을 떠올린다. 2017년 발표된 런민대학 류하이롱 교수의 “국가가 아이돌이 될 때: 신매체와 팬덤 민족주의의 탄생”이라는 논문이 있다. 그에 따르면 샤오펀홍이 자발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공동체적 행태와 문화는 그들이 관용, 개방, 강대, 독립과 같이 긍정적 가치를 투사해서 환상으로 빚은 국가라는 아이돌을 숭배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아이돌을 BTS로 치환시켜보면, 아미의 그것과도 닮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 실제로 샤오펀홍이 한국 네티즌들과 다투며 이런 인터넷 공동체 문화를 배웠다는 분석 기사도 봤다. 자기애적ᅠ국뽕과 적으로 간주되는 타자에 대한 공격성은 문제가 되지만, 크게 보면 오랜 기간 가져왔던 서구와 선진국 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치유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다.

콰녠완후이의 톰과제리 畜生: 고전 애니메이션 ‘톰과 제리’ 화면에 중국 전통악기인 나발 등을 배경음악으로 연주한다. <출처: https://liii.ink/O8tdVHTclF5M_f>그렇다고 세대를 초월하여 중화주의로도 표현되는 이들의 공격성에 면죄부가 주어질 수는 없다. 나는 15년전쯤, 베이징에서 만난 한 중국인에게 겪은 매우 불쾌한 경험이 있다. 그는 미국에 거주하는 유학생출신 이민자였는데, 다국적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에 출장을 와있던 차에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더니, 초면인 나에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국 사람들은 왜 한자를 버리는 등 ‘취한화去漢化'(중국 문화 배척)를 하는 거죠 ?” 당시, 한글전용론과 한자병기론이 오랜 기간 사회적 논쟁이 돼오기도 했었고, 나는 한자병기론쪽에 살짝 기울어 있던 터였지만, 우리 민족과 국가의 언어 사용에 대해서, 간섭하려는 그의 무례한 문화패권주의에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최근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중국인들에게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즉, 왜 한한령限韓令따위를 만들어 세계가 인정하는 우월한 한류 콘텐츠를 받아들이지 않냐고 중국인들을 원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계가 항상 한류 콘텐츠를 카피한다고 심하게 조롱한다. 따지고 보면, 근년들어 급증한 중국인들의 과도한 전통문화 ‘저작권 집착’은 한국인들의 모욕적인 언사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현대의 대중문화 선진국”인 한국과 “전통문명 강국”인 중국이 자존심 싸움을 벌이는 셈이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동전의 양면인데, 한중양국은 오랜 기간 이웃으로 지낸 탓에 마음속 깊은 곳에 서로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감정들이 차곡이 쌓여있다. 한중일 삼국간에 교차되는 이런 복잡한 감정은 깊이를 알 수없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예절범절은 치명적인 잘못을 범한 것이 아니라면 서로의 아픈 곳은 될수록 돌려서 지적하는 습관을 유지해왔다.

서구사회의 인정을 갈구하며, 명예백인의 관점으로 자신과 이웃을 돌아보는 관행은 일본이나 한국만의 전매특허도 아니다. 중국인들 자신이 여전히 스스로를 그렇게 검열하고 규정한다. 신발도 태우고, 외국인이 중국여자를 약탈해간다는 인터넷상의 쇼비니즘적 애국주의 선동이 난무하지만 미국인이나 백인들이 중국에서 정말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반대로, 미국에서 특히 약자인 아시아 여성과 노인들에 대한 물리적 가해가 빈번해진다. 일년전 친한 중국 청년이 내가 중국인 아내와 사귄다는 것을 알게 돼 덕담을 건네면서, 한편으로 노골적 적개심을 드러낸 것은,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흑인과 라틴아메리칸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실제 미국에서 아시안을 폭행하는 것은 흑인과 라티노가 많다고 한다. 중국의 대학교수들이 점수를 따기 위한 두가지 기준은 연구결과가 링따오 (당 지도자)의 칭찬을 받거나, SCI에 등재된 저널에 실려 서구학계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정신분열적으로 들리는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가 사는 세계의  물리적, 담론적 권력이 여전히 하나의 촘촘하고 완고한 위계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신장문제가 처음 불거진 것은, 2009년 광둥에서 일하던 위구르족 청년이 한족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유언비어때문에, 한족 남성노동자들이 위구르족 노동자들을 집단구타하면서 촉발됐다. 오늘날 중국에서 주류 한족이 비한화된 소수민족들을 구조적 혹은 비구조적으로 차별하는 모습은 미국내의 인종차별과 평행세계처럼 보인다. 상대방의 차별은 눈에 들어오지만, 나의 부조리는 애써 들추고 싶지 않다. 일대일로상에 놓인 저개발국가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한족 중국인들에게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다. 내가 사는 광저우는 당나라 시기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십만명 넘게 거주하던 천년역사의 무역항이지만,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온 보따리장사들이 워낙 많아 ‘초콜릿도시’라 불린다. 지독하게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호칭이 시사하듯, 매년 불법체류 단속활동속에 사상자가 발생하고 인권침해가 벌어진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 같아 나는 차마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못하겠다.

“가족의 구성원리가 국가로 확장되고, 국가의 통치가 가족의 윤리로 내면화된 유교적 가국家國시스템이 중국에선 이천년간 단절없이 이어져왔다”. 신천하주의로 유명한 화둥사범대학교의 중국역사문화연구자 쉬지린 교수의 설명이다. 많은 보통 중국인들은 국가의 사회에 대한 과도한 간섭을 아버지의 자녀에 대한 염려와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내가 보건데, 국가의 인권침해나 언론과 학문의 자유훼손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수성이 부족한 것은 공산주의 보다는 이러한 전통관념때문이다. ”중국역사에서도 왕위를 찬탈하거나 왕조가 교체되는 일이 빈번했지만, 상징적 아버지를 살해하는 시부弒父 설화는 나타의 이야기처럼 극히 예외적으로만 존재한다. 각색된 현대판 애니메이션 ‘나타지마동강세’에는 이 이야기조차 아버지의 사랑에 감화돼 자신을 희생하는 유교적 서사로 완전히 뒤집혀서 표현된다.” 주위의 독립예술가들과 젊은 라깡연구자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것을 단순히 ‘전근대‘라는 한마디로 딱지붙이는 순간, 이들의 내적합리성을 이해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민주공화국 대통령 문재인을 “유교적 군자의 윤리를 현현한 현군”으로 간주하며 칭송하거나, 으뜸가는 그의 지지자이자 ”인류의 모든 문명은 남성이 여성을 매료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킹왕짱마초‘ 김어준이 ’리버럴‘ 민주당의 매일 아침대변인 노릇을 하는 모습은 어떤가? 임명직 공무원인 검찰의 수장 윤석열이 선거대신 유사과거제라 할 수 있는 고시를 통해 무소불위의 상징권력을 획득한 덕에 자의적 법실천을 남용해도 여론에 힘입어 유력한 대권주자가 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설명할 방법도 함께 사라진다.

중국 애니메이션 나타지마동강세: 고대설화를 편집하여 만든, 명나라때의 6대기서중 하나인 봉신연의에 나타哪吒의 이야기가 있다. 나타는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나중에 자신을 배신한 아버지에게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고 시도한다. <출처: http://kr.people.com.cn/n3/2019/0730/c310297-9601643-7.html>

중국의 문제는 실재하지만, 서구의 문제제기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우리의 독립된 관점과 관찰을 통해 묻고 따져야 현실의 울퉁불퉁한 디테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의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이 언론자유침해라는 미국 의회의 주장은 얼마나 진실에 가깝나? 이것은 주권국가에 대한 내정간섭인가 아닌가 ?

끝으로 중국과 한국의 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비대칭의 문제가 있다. 그들과 우리의 의식속 가장 오래되고 깊은 곳의 중화주의가 발현할 때마다 아픔이 되살아난다. 한국 현대사 연구자인 후지이 다케시는 얼마전 그의 페이스북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성폭력) 피해와 가해는 비대칭적이다. 피해는 개개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겪게 되지만, 가해는 대부분이 자리와 위치의 효과이다. 그래서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간생략)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주체성의 결여이지만…” 이를 한중관계에 적용해 보자면, 중국이 중화주의의 가해자로서 특별히 구체적 잘못을 범하지 않아도 한국은 항상 피해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중국이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자리와 위치’를 마음쓸 정도의 ‘문명국’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나는 잘모르겠다. 인류의 역사속에 그게 가능했다면, 서구인들이 지금처럼 비서구인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중국의 지성에게 완전히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는다. 새로운 세대의 중국 공공지식인으로 불리는 옥스포드의 인류학자 샹뱌오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은 특별한 자랑거리가 아닌 그저 운명일뿐이다.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고, 철저히 씹어 삼켜야 한다.“

이 그림은 중국과 한국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출처: https://theycantalk.com/image/641238503847559168>

같은 이치로 우리도 스스로 주체성을 강화해 피해의식을 탈피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강대국 중국의 위협을 거론하지만 한국인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감히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기술이든 제도이든 문화든 중국이 양뿐 아니라 질까지 수월성을 확보해 한국을 추월하는 미래상인 것 같다. 근대이전처럼 중국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국격의 재역전 상황을 상상하기도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나는 왜 우리가 굳이 비교의 대상이 되기 힘들 정도로 큰 스케일을 가진 이웃 나라와 무의미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주제넘은 의견이지만, “우리가 과연 누구인지” ”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제대로 묻고 따지는 우리 자신의 생각습관을 기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유사역사학과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한다. 고대 만주벌판과 북중국의 유령을 찾아헤매며 우리가 폐위된 적장자임을 호소하는 것은 인문학적 상상력의 세계로 국한할 때나 아름답다. 이를 현실역사로 끌어들여, 물리적 영토 욕심으로 발전시키면, 중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뿐이다. 중국과학원 고인류연구소가 한국인 연구자도 참여하고 있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와 협력하여 2020년 네이쳐 커뮤니케이션과 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 결과는 2020년 중국내 10대 과학기술업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만주의 홍산문화유적 유골에서 추출한 DNA를 현대 북중국 한족, 일본민족, 한민족과 비교한 유전자 비교 검사 결과를 보면, 누가 더 멀고 가깝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무의미한 논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중화민족, 그중에서도 한족은 중국 인류학의 비조 페이샤오퉁이 제시했듯 다원일체성으로 표현되는 매우 복잡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민족의 너다섯배 이상 깊고 넓은 족보를 정리하기 위해 스스로 이미 머리가 터지는데 우리가 성급히 논쟁에 끼어드는 것은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바심하지 말고, 지금 우리의 삶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먼저 따져봐야 한다.

고백할 것이 하나 있다. 내 아내는 한국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빠링허우 세대이고, 조경디자이너인 자신의 일이 ‘생활미학’과 관련이 있다보니 일본문화에 훨씬 더 호감이 많다. 그가 나와 결혼한 이유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과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어로만 대화를 나누는 것이 미안해서인지 그는 짬날 때마다 한국어 단어를 외우려고 노력한다. 나는 일에 쫓겨 늘 바쁜 그가 한국어 공부에도 매달리는 것이 안쓰러워 나중에 같이 한국에 갈 기회가 있을 때,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나는 한중의 시민들이 이웃 나라에 대해 추상적이고 막연한 감정을 갖는 것이 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어떤 계기로 상대방의 구체적인 무언가에 관심을 갖게 되든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할 기회를 갖게 됐을 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놓고 기다리는 것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라면 차라리 서로 무관심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 이글의 요약판이 시사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시사인의 동의하에 축약되지 않은 원문을 다른백년에도 전재합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778

목, 2021/07/1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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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명으로의 전환을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인간을 ‘재발명’하는 일이다. 만물의 영장이자 자연의 정복자로 군림해온 인간이 지구생태계의 모든 존재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뿌리깊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의 위치를 다시 규정해야 한다. 문화사학자이자 환경사상가인 토마스 베리는 이를 인간의 ‘재발명’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종의 차원에서, 비판적 숙고를 통해, 공동체의 생명체계를 고려하여,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이야기와 꿈을 공유하는 경험을 수단으로” 실천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Thomas Berry, The Great Work, New York: Bell Tower, 1999, p.159)

인문학은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의 키케로는 “인간다움”을 뜻하는 라틴어 “후마니타스”로부터 인문학(humanities)을 구상했다. 이는 세계 만물의 공통된 본질인 아르케를 탐구한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거리를 두고 인간에 집중한 결과였다. 이 때부터 인문학은 과학과 거리를 두었으며 르네상스 이후에는 인간중심주의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탐구는 우주와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해와 분리될 수 없다. 인문학의 목표인 “인간다움”이 갖는 의미는 인간과 다른 존재의 연관 속에서 상대적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좁은 정의를 벗어나 상호 연결된 존재로서의 진정한 인간다움을 탐구해야 한다. 근대화 이후 시민계급이 갖춰야 할 교양으로 자리매김된 인문학(liberal arts)이 점차 분과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인간을 중심에 둔 통섭의 학문으로 변신하는 이유다.

환경인문학(environmental humanities)은 전지구적 생태위기에 대한 인문학의 응답으로, 2000년대 이후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 문화·생물 인류학, 문화지리학, 정치생태학,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연구, 젠더연구, 종교학 등 다양한 인문학과들 사이의 연결을 추구하는 지적 프레임워크로서 등장했다.

환경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점차 고조되는 생태위기와 생태적 인식의 중요성 때문이다.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위기라는 두 가지 문제는 과학기술이나 정책 영역의 한계를 넘어섰다. 1992년 UN 리우정상회의 이후 한 세대가 지났지만 기술, 경제학, 정책에 의존한 해결책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우며 이 부분에서 인문학은 환경문제에 개입하고 대중의 의식을 바꿔놓을 수 있다.

 

환경인문학의 정의

19세기 후반 생물학의 하위분야로 출발한 생태학이 학제적 영역으로서의 환경연구로 확장된 것은 1960년대부터이지만 대부분 자연과학의 관련 전공, 혹은 자연과학과 산업, 정책, 제도를 다루는 사회과학과의 결합이 초점이었고, 인문학은 그런 학제적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 물론 인문학의 여러 분과학문들은 1970년대 이후 각자 이론적 프레임과의 연관성에 따라 생태적 관점을 점차 도입했다. 환경철학이 1970년대에 나왔고, 환경사는 1980년대부터 역사학의 하위분야로서 자리잡았다. 생태비평 역시 1990년대 초반 제도화됐으며, 학제적 성격이 강한 인류학이나 지리학은 더 쉽게 생태적 사고와 결합했다. 이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나 환경적 사고를 소재로 끌어들여 분과학문의 틀 안에서 연구하는 방식이었다.

환경철학과 환경사, 생태비평의 발전은 이전까지 생태학적 사고를 지배했던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했다. 자연, 야생, 생태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원초적 자연”을 전제로 한 “보호” “보존” “복원” 등의 개념에 의문이 제기됐고, 환경 담론을 분석하는 것이 인문학계 환경연구의 핵심이 됐다. 자연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자연과의 연속선상에서 인간을 파악함으로써 독립적·자율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근대적 인간관을 극복, 보완하기에 이르렀다. 18세기 계몽주의적 사고가 이성적·합리적 인간성을 중심으로 지식체계를 재편한 것처럼, 제2의 계몽주의에 비견되는 생태적 사고는 인간과 자연이 연결된 생명관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재구성할 필요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인문학 상호간, 인문학과 자연과학 간의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태적 인문학”을 처음 제안한 호주의 철학자 발 플럼우드는 두 가지 이론적 과제로 (1)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 (2)비인간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재위치 짓는 것을 들었다. (Val Plumwood, Environmental Culture: The Ecological Crisis of Reason, Routledge, 2002) 즉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켜 정신성을 가진 우월한 지위에 올려놓고 의미, 가치, 윤리가 없는 물리적 자연세계 안에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조종할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문화 이분법을 극복하자는 뜻이다. 이는 생태위기를 가져온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인간을 비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하며, 하나의 연결된 세계로서 지구시스템의 동력과 변화를 고려하면서 인간적 삶의 방식과 사회구조를 재편해야 한다는 필연성으로 이어진다.

 

이론적 과제

(1)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

인문학에서 환경철학, 환경사, 생태비평의 역할은 인간을 환경 안에 재위치 짓는 것이었다. 심층생태학(Deep Ecology)은 생태계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자연을 인간적 측면에서 평가하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원 또는 물질로 파악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들었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아야 하고, 인간은 최소한의 생존적 필요를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부함과 다양성이라는 근본적 가치를 해칠 권리가 없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과도한 간섭을 줄이기 위해 경제, 기술, 이데올로기를 고려한 정책 변화가 필요하며 생태적 세계관으로 전환하기 위해 선불교, 노장사상, 기독교 영성주의가 고려돼야 한다. 노르웨이 철학자 안 네스와 미국의 환경운동가 조지 세션스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8개의 강령을 발표했다.

환경사의 개척자인 미국 사학자 도널드 워스터는 『Nature’s Economy: A History of Ecological Ideas』(1977, 한국어 번역서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 문순홍∙강헌 옮김, 아카넷, 2002)에서 18세기 이후 서구생태사상에 나타난 자연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라는 두 가지 흐름을 “목가주의적 입장”과 “제국주의적 입장”으로 명명하고 양자의 긴장관계를 부각시켰다. 목가주의적 입장은 자연의 내적 가치와 인간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인정한다. 고대 및 중세의 이교도적 물활론에 기원을 둔 이 관점은 다른 유기체와의 평화로운 상호공존을 복원하기 위해 검소한 생활을 지지하며 18세기 낭만주의에서 부활했다. 기독교 전통에서 기원한 제국주의적 입장은 인간에 의한 자원의 조작성을 강조하며 이성의 엄밀한 사용을 통해 인간의 자연지배를 확립했다. 생태학의 역사는 이런 두 가지 흐름의 경합과 갈등으로 구성됐으며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다양한 시대적, 문화사적 연관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하는 역동적 과정이다.

생태비평의 경우, 생태적 관점을 문학연구의 중요한 도구로 수용하면서 주제 수준에서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생태문제를 다룬 새로운 정전을 발굴했고, 전통적 고전 텍스트를 생태적으로 재해석했으며,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사람뿐 아니라 생태를 어떻게 착취했는지 분석했다. 문학텍스트에서 식물, 동물, 사물, 풍경, 날씨 등 비인간 작용자의 역할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런 과정에서 순수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판타지, SF, 에세이, 여행기, 극영화, 애니메이션, 민속지까지 텍스트의 범위가 확대됐다.

생태비평은 문학사 전체를 생태적 관점에서 재구성했으며,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교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특히 장소성의 회복은 생태비평의 중요한 기여로 평가 받는다. 근대 이전의 설화나 서사문학, 비극 혹은 지방색문학에서 물리적 환경은 결코 장식적 배경이 아니었다. 자연환경과 대지는 나날의 삶을 방향 지으며 인간의 내밀한 정서와 상상력을 빚어내는 근원적 힘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인물의 행동과 사건이 펼쳐지는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자연환경은 생태비평의 발전과 함께 문학적 상상력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복권됐다.

 

(2)비인간을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영역 안에 재위치 짓는 것

최신 과학적 연구성과를 수용한 포스트휴머니즘은 비인간 존재가 어떻게 인간의 역사에 간섭하는지 드러낸다. 포스트휴머니즘은 같은 용어로 묶이기 어려운 다양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으나 공통적으로 다른 종, 기계, 물건, 시스템과의 관련 속에서 자유적 인간 주체를 탈중심화하는 운동이다. 포스트휴머니즘 이론의 지형은 다채롭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브루노 라투어)은 물질적·기호적 방식으로 서로에게 관여하는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비생물 행위자로 구성된 이질적 사회네트워크에 강조점이 있다. 시스템 이론(니콜라스 루먼)은 개인이 사회의 부분이라는 관념을 벗어나 양자를 서로의 환경에서 작용하는 시스템으로 바라본다. 신유물론(스테이시 알라이모)은 생태적 네트워크에서 인간 주체의 구성과 물질적 흐름, 즉 인간의 마음과 육체를 “트랜스코포리얼 벡터”로 정의한다. 신물활론(제인 베냇)은 환경주의자의 방식과는 다르게 물질의 살아있는 행위성을 탐구한다. 사물이론(빌 브라운)은 사물의 외양이 인간과의 관계 및 중요성에 따라 구성됨을 밝히는 반면, 물체지향존재론(그래험 허먼)은 상호관계성에서 물체를 해방시켜 그 자체의 견지에서 탐구하면서 물체가 궁극적으로 인간지식으로부터 분리돼 있다고 주장한다. 동물연구(자크 데리다, 조르지오 아감벤, 다나 해러웨이)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정치적 함의로부터 찾는다. 복수종 민속지(안나 칭)는 인간에게만 한정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살아있는 주체들과 인간의 얽힘의 효과에 관심을 가지며, 윤리적 민속지 혹은 민속적 윤리학(도미니크 레스텔)은 의미와 관심, 영향을 공유하는 혼성 인간-동물 공동체를 탐험하기 위해 사회과학과 동물과학의 방법론을 활용한다.

이런 학문들은 서로 공통의 기반이 없거나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라벨 아래 분류되는 넓은 범위의 이론들은 인간 존재와 의도를 포함해 네트워크의 한 행위자로서 우리를 다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인간이 동물, 식물, 자연 등 비인간주체와 독립해 존재하며 자율적으로 사고한다는 계몽주의의 자유적 인간주체의 중심성은 급격히 해체된다.

 

인류세와 인문학

크뢰첸과 스톨머가 제안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개념(Crutzen and Stoermer, The “Anthropocene”, Global Change Newsletter 41, 2000, p.17-18)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지구의 물리적 변화를 일으킬 만큼 중대하다는 인식을 급속히 확산시킴으로써 많은 논쟁과 함께 학문간 융합의 가능성을 낳았다. 인류세는 1만년 전 시작된 홀로세(현세)에서 인류가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시기를 분리하자는 주장이다. 크뢰첸 등은 산업혁명이 시작된 18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제안한 반면, 루디먼은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 이후 대기 중 온실가스가 증가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 (William Ruddiman, The Anthropocene, Annual Review of Earth and Planetary Sciences, Vol 41: 45-68, 2013) 핵실험 성공 이후 방사성 물질의 확산, 플라스틱의 발명,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공해 등을 근거로 1950년대 이후를 기점으로 삼기도 한다.

인류세 논쟁은 인류세라는 규정이 적절한 지에 대한 지질학계의 대립에서 시작됐지만, 인류세가 또 다른 형태의 인간중심주의라는 반론을 거쳐 인간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인간의 중심적 역할과 이를 위한 사고와 가치의 재정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은 결과적으로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는데 장점을 가진 인문학이 환경담론에 개입하고 현실의 변화를 견인하는 가능성을 높였다.

환경담론으로서 인류세는 자원환경의 복원과 유지에 인간의 개입을 제한했던 기존 사고와 달리, 자연과학,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적 관점을 통해 자연-인간의 상호성을 바탕으로 인간문명이 환경문제에 긍정적으로 개입할 수 있고, 일반대중이 참여하는 공동체 문화가 필요하다는 함의를 내포한다. 인류세는 지구를 상호의존적인 하나의 복잡한 사회-생태적 시스템으로 본다. 즉,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사회의 경제, 인구, 생태, 정치, 상징적·문화적 측면의 분석을 모두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 지구의 모든 사람과 사회를 포함하기 때문에 분과를 넘는 다리놓기와 지식생산의 개방된 시스템에 대한 접근의 기회를 제공한다.

다리 개념으로서 인류세의 가능성은 단순히 다양한 학문을 통합하는 게 아니라 학문 내부, 혹은 학문 사이의 담론적 분할을 전경화한다는 점이다. 인류세는 사회와 정책결정자에게 과학적·기술적 지식을 제공하는 자연중심주의 내러티브, 인류의 행위가 지구의 종말을 가져온다는 반성과 전망이 담긴 재난적 내러티브, 기술발전과 성장을 촉진하는 동시에 불평등과 환경재난을 야기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는 생태마르크시즘 내러티브, 문화와 자연의 이분법이 해소되는 포스트모더니즘 내러티브, 지구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이란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임파워먼트(역량강화 혹은 권한부여)와 실천의 내러티브 등을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내러티브는 인식론의 모순을 드러내며 인류세를 경합적 개념으로 만든다. 예컨대 인류세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글로벌 변화에 대한 인간의 기여를 가리키며 여기서 인간은 ‘범죄자’로 여겨지는 단일한 글로벌 세력으로 재현된다. 그러나 인간행위자가 글로벌 규모의 변화를 일으키는 하나의 차별화되지 않은 세력으로 축소돼서 지역간의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차이가 사라진다면 사회적 변화가 인류세를 가져온 근본적인 동력이라는 점이 상실되고 만다. 인류세라는 개념은 또한 자연을 인간에 의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변형되는 것으로 재상상함으로써 환경주의 정치경제의 핵심인 지속가능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지속가능성이란 자연의 일정한 용량과 회복가능성을 전제로 하는데 비해, 인류세가 제시하는 대기와 지질의 변화는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세의 핵심은 통합된 지구시스템을 이해하고, 이를 위한 글로벌 사회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지구화의 결과로 등장한 통합된 인간사회 역시 지구시스템의 일부로 인식함으로써 인간의 역할을 부정에서 긍정의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지구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을 긍정하는 것은 과학적, 사회적, 경제적, 윤리적 측면을 가지며 더 지속가능하고 평등한 선택을 향한 정책 결정과 상호작용하며 돕는다.

인류세 담론의 분석에서 보듯이 환경인문학은 단순히 과학과 기술의 변화를 이해하는 개선된 방식을 제시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런 변화의 인간적 원인, 인간과 환경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기술적 생활세계가 변화함에 따라 인간은 이런 자연과 문화의 구성물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재발명해 왔다. 자연과 문화가 결합된 이런 영역은 언어, 관념, 태도, 예술, 장소감각 등에 들어있다. 에너지 전환, 재활용 등 환경정책과 관련된 결정에서 역사, 철학, 문학, 예술에서 나온 인간적 지식을 제공받을 수 없다면 단순히 경제적 손익계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런 결정이 현명하게 이뤄지기 위해 환경인문학의 역할이 필요하다.

 

환경과 인문학의 대화

환경과 인문학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준다. 인문학이 환경연구에 기여하는 바는 환경담론의 분석이다. 저널 “레질리언스”는 환경인문학의 존재 이유로 “환경문제를 진단하는 과학논문은 여전히 일관성 있는 지속가능성의 비전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인문학과 인문사회학에 중심적인 내러티브 기술, 비판적 사고, 역사성, 문화, 미학과 윤리학은 과학자들의 노력에 중요한 보완적 연구를 제공한다. 인문학의 생태적 가치가 지금보다 더 분명했던 적은 없다. 환경인문학은 우리의 생태적 미래에 대한 대화에서 중심에 서야 한다”(http://www.resiliencejournal.org/about/overview)고 밝혔다. 인문학은 여러 분야의 연구자료에 바탕이 된 전제를 분석함으로써 일관성 있고 조화로운 시각으로 이를 해석하고 활용하도록 돕는다. 현재 생태위기의 복합성과 지구시스템과학이 생산한 난해하고 엄청난 정보량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정리될 필요가 있다.

반대로 환경연구는 인문학에게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묻도록 자극한다. 인문학은 비인간세계를 배제하거나 배경으로 삼는 방식으로 “인간”에 초점을 두었으나 환경연구의 성과와 그것이 인문학의 분과학문에 끼친 영향력은 더 이상 이런 전제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자립적이고 이성적이고 결정하는 주체라는 환원주의적 설명을 거부하면서 인간을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생태계의 참여자로 위치 짓고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지 연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인간성을 일컬어 “두터운 인간성(thicker notion of humanity)”(Deborah Bird Rose, etc., Thinking through the Environment, Unsettling the Humanities, Environmental Humanities, Vol.1, 2012, p. 1-5)이라 한다. 환경 안에 재위치된 주체는 인간을 자연 바깥에 놓음으로써 인간은 의미, 가치, 윤리가 없는 넓은 “자연” 세계 안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조종하고 결정할 자유가 있다고 여겨온 근대적 주체의 자연관을 넘어선다.

이처럼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화의 양분법이 붕괴하면서 기존 지식과 사고의 체계가 불안정해진다. 즉 인문학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과감하게 재구성돼야 한다. 일례로 환경사가들의 연구 결과는 전통적인 인간의 역사를 더 넓은 지구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이야기는 지질학, 진화생물학, 기후과학이 제공하는 시간에 대한 깊은 고려 위에 다시 씌어야 하는 과제와 만났다. 기존 학문의 재구성과 다양한 종류의 신생 학문은 머레이 북친이 지적했던 대로 계몽주의가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낸 기본사상이 된 것처럼 오늘날 생태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를 만들기 위한 종합사상이 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입증한다.

한편 인문학 연구경향의 변화는 인문학 교육의 목적과 방법을 변화시킨다. 인간의 정의가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오늘날 인문학은 전지구적 위기에 대응하는 이론을 개발하고 현재의 도전을 받아들일 학생을 키우는 임무가 있다. 미국대학교육협회는 교육의 가치로서 “윤리적 판단, 통합성, 간문화적 기술, 계속적인 학습능력”(Hart Research Associate, It Takes More than a Major: Employer Priorities for College Learning and Student Success, Liberal Education, vol. 99 no.2, spring 2013, p. 22-29)을 들었는데, 이는 환경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한다. 생태위기와 경제위기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과학기술과 윤리가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환경인문학의 이론과 실천은 중요한 교육적 수단이 된다. 미래세대가 자신들 앞에 놓인 세계를 보고 그 복잡함을 받아들이며 “지구의 청지기”로서 행동하도록 능력과 용기를 줄 수 있다.

 

한윤정

한국생태문명 프로젝트 디렉터

화, 2020/03/0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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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미국의 적극적인 제안과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유엔총회, 안전보장 이사회, 유엔사무국, 경제사회 이사회 등 4개의 공식기구와 국제 원자력 기구, 식량농업기구, 유네스코, 세계은행, 세계보건기구 등 산하의 여러 전문기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2019년 현재 193개 회원국과 37,000 여명의 직원을 두고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주요 공여국인 미국의 상습적인 분담금 납입지연과 불이행 등으로 2019년 현재 수억 불이상의 채무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래의 글은 유엔에 가하는 미국의 횡포와 압력의 실상을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유엔은 자금조달에 있어서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마치 변덕스러운 회원들로 채워진 클럽처럼 유엔은 모든 회비가 제 때 들어올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졌다. 일부 회원국들은 회비 지급을 미루고 있고 결제는 종종 실종된다. 미국의 경우, 현재 유엔 운영 예산의 약 22%를 담당하는데, 회계연도에 따라 10월 이후에야 회비지급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더 큰 문제의 일면에 불과하다. 회비지급 보류는 유엔헌장 17조를 위반하는 사항으로 예산상 행위만큼이나 정치적이기도 하다. 이 조항의 중요성은 유엔의 운영비용을 “총회가 배정한대로 회원국이 부담한다”고 규정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UN 외교정책과 조직의 개혁 문제는 부과된 회비를 줄이거나 보류하는 주요 사안들로 언급되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렇게 “부과된 회비”가 행정 비용, 평화유지 활동 및 다양한 프로그램에 쓰이는 비용을 부담하는 공식 정규 예산으로 편성되기 때문이다 .”

미국의 경우, 종전에는 기구 운영 비용의 약 40%를 부담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따라서 UN 조직에 어떤 압력이 가해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중반, 이스라엘이 “불법적으로 추방, 유보, 자격 부인 또는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경우 “미국이 연간 분담금의 지급을 유보하면서 매달 8.34%” 축소하겠다고 위협한 바 있었다.

재정 지원 문제는 돈주머니를 걱정하는 미 의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중요한 쟁점이었다. 수년간 위원회의 붙박이 역할을 한 제시 헬름스(Jesse Helms) 미 상원 외교위원장이 미국이 유엔 회비를 전액 지불할지, 정시에 지불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불렸다. 그와 함께 조 바이든(Joe Biden) 상원의원은 UN에 전액을 지불 하기 위한 전제로 다양한 “기준들”을 준수하도록 압박하는 협상을 1997년 타결했다. 여기에는 불가피한 UN 직원의 감축, 감찰관과 사무총장 간의 적절한 보고 절차, 타 기관에 대한 자금지원 금지 항목이 포함됐다. 2000년 1월, 헬름스 의원은 수 십 년간 의심해왔던 조직인 이른바 그림자 정부에 대해 충고하고, 참견하며, 잘난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UN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연설에서 독특한 인상을 준 한 미국 의원을 경험하는데, 그는 당시 UN 주재 미국대사였던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이었다. 유엔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내비치면서, 그의 목적은 이 기구에 대한 미국의 기여를 “빚쟁이”가 한 것으로 간주하는 비평가들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엔의 최대 공여자인 미국 국민의 대표로서, 우리는 투자에 대한 대가로 구체적 개혁을 요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다.”라고 공언했다.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의 등장으로 미국의 자금과 유엔 운영비 사이의 훈훈한 협상의 새 장이 열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트럼프 행정부는 유엔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미국의 인도주의적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사회복지 사업, 의료 및 교육 부문을 위태롭게 하는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는 이 조치의 타당성을 확신했다.

“이 기구는 부패했고 비효율적이며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18년 예산안에는 유엔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미국 자금의 절반을 삭감하는 조치도 포함됐는데, 이는 특히 기후변화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 연방의회는 유엔평화유지활동 기부금 상한제 시행 안건에 동의했다.) 이와 같이 자금지원을 중단하여 유엔 기관들을 위협하고 압박을 가하는 사례는 여전히 미국의 관행으로 남아있다.

현재 회원국들이 유엔에 지불해야 하는 13억 달러 상당 중 미국이 체납한 금액은 10억 달러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 불량한 수치의 누적은 미국이 다른 회원국들에 불만을 토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미국뿐만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6월, 안토니오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사무총장은 5차 위원회의 예산 감독관들에게 급여와 물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명성과 운영 능력에 있어서 파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통보했다. “모든 회원국들이 분담비를 모두 제 때 지급하도록 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금을 적소에 사용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유엔은 5월 말까지 4억9200만 달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이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파국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하느냐가 앞으로 수 년간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상황은 예상대로 악화됐다. 지난 10월 첫 주 월요일에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10월말 현금 보유고가 고갈될 가능성을 언급했다. 유엔 사무국 소속 37,000명의 직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회원국들이 2019년 유엔 정기 예산 운영에 필요한 금액의 70%만 지불했다. 이는 9월말 2억3000만 달러의 현금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달 말까지 예비 유동자산 보유고가 고갈될 위험에 처했다.”

재정긴축 조치가 내려졌다. 컨퍼런스와 회의가 연기되고 있으며, 필수적이지 않다고 판단된 출장도 취소됐다. 유엔 대변인 스테판 두자릭(Stéphane Dujarric)은 회원국들에 압력을 가하며, 193개국 중 129개 회원국만이 “전 세계적으로 운영 중단을 초래할 수 있는 채무 불이행을 방지하기 위해 연간 분담금을 전액 지불했다”고 밝혔다. 유엔의 의미와 영향은 회원국들에 달려있으므로, 재원을 마련하지 못하게 되면 세계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을 확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글로벌 리서치, 2019.10.11.

비노이 캄프마크(Binoy Kampmark)

케임브리지 셀윈 대학의 영연방 학자. 현재 멜버른 RMIT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글로벌리서치 및 아시아-태평양 리서치의 기고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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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심 심 위스곳(Sim Sim Wissgott), UN 분석가.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10월 중 유엔의 재정이 고갈되고 있으며, 11월 직원들의 급여를 지급하려면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평화와 안보를 증진하고 개발을 돕기 위해 설립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가 어떻게 현금 부족에 시달리게 된 것일까? 유엔의 재정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그리고 왜 허리끈을 조이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누가 유엔에 돈을 지불하는가? 193개 회원국은 모두 각 국가의 규모와 경제력에 따라 산출된 유엔의 전반적인 운용을 위한 연간 분담금을 지급하기로 되어 있다. 2019년 총 분담금은 28억5000만 달러로, 미국의 분담금(약 6억7420만 달러)이 가장 많이 책정됐으며 바누아투, 미크로네시아, 소말리아, 벨리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과 같이 국가의 규모가 작거나 빈곤한 경우 각각 최소 2만7883달러 만을 부담했다.

유엔의 재정 규칙 및 규정에 따르면, 이 자금은 해당 국가들이 그 해의 분담금을 통보 받은 후 “30일 이내 전액 지불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매해 지급 기한은 1월 31일이었다. 하지만 기한을 준수하는 회원국은 단 몇 십 개 국가들뿐이다. 2019년 10월 8일 현재, 유엔은 여전히 분담금의 약 30%에 해당하는 63개국의 기금 지급을 기다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국가들의 전년도 미지급 연회비마저도 연체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과 이번 주,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우리는 급여를 충당할 현금이 부족한 채로 11월을 맞이할 위험에 처했다”고 경고하며 국가들에 회비 지급을 촉구했다. 유엔이 10년 만에 가장 큰 적자를 기록하며 “우리의 업무와 개혁이 위기에 처했다”고 덧붙였다.

그 돈은 어디에 쓰이는가?

유엔의 정기 예산은 뉴욕의 유엔 본부뿐만 아니라 비엔나, 나이로비,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통신과 정치, 인도주의 및 경제 업무 등을 운용하는 데 쓰인다. 르완다, 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평화유지 활동 및 국제 재판소는 별도의 예산으로 처리된다.

그러나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현재의 적자 상황을 “유엔이 직면한 최악의 재정 위기”로 표현했으며, 이는 공석을 채우지 않고, 필수적인 출장인 경우만 허용하고, 회의를 취소하거나 연기하는 등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화유지 활동을 위해 따로 떼어 놓은 돈에서 자금을 빌려야 할 수도 있다. 유엔은 전 세계 4개 주요 센터와 아프가니스탄, 말리, 아이티의 현장 사무소에 3만7500명이 넘는 직원을 두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 유니세프, 유엔난민고등판무관과 같은 유엔 기관들은 자체 예산을 가지고 있다.

스테판 두자릭(Stephane Dujarric) 대변인에 따르면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올해 초 이미 상당한 수준의 비용절감 조치를 시작했으며, 그렇지 않았다면 유엔은 현재 약 6억 달러의 적자로 인해 전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주요 연례 행사인 지난 달 총회를 개최할 수 없었을 것이다. 9월 말, 유엔의 적자는 2억3000만 달러였다.

브라질, 한국, 멕시코,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들은 분담 지급을 미루고 있다. 특히 유엔 총 예산의 3분의 1을 지급하는 상위 6개 회원국 중에는 미국만이 2019년 분담금을 전액 지불하지 않았다. .

뿐만 아니라 각종 보도에 따르면 미국은 금년 분 4억 달러에 육박하는 체납금을 포함하여 지급해야 할 총 납입액은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은 유엔에 상당한 자금 지원을 해온 것에 오랫동안 불평해왔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다자주의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자 하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는 지난 해 유엔총회에서 “세계주의의 이념을 거부하고 애국주의 원칙을 채택했다”고 말했다. 지난 달 그는 세계 정상들에 “모든 파트너들이 공정한 몫의 방위비 및 기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미 유네스코(UNESCO)의 반 이스라엘 성향 및 근본적 개혁의 필요성과 함께 “증가하는 체납금”을 언급하며, 유엔 산하 교육문화기구인 유네스코를 탈퇴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지원해야 했던 “과도한 분담”에 대해 불평하며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유엔 프로그램인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와 낙태 관련 유엔인구기금(UNFPA)에 대한 지원을 삭감했다. 구테흐스 사무총장의 발언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첫 주 수요일 트위터에 “그러니까 미국만이 아니라 모든 회원국들이 지불하도록 하라!”는 글을 올렸다.

수, 2019/10/23-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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