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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불로소득 방치하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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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불로소득 방치하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admin | 목, 2019/10/10- 23:57

조국 대전이 모든 걸 흡수하는 와중에 정말 중요한 뉴스가 나왔다.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미디어의 보도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유승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2017년 귀속 양도소득과 금융소득’ 자료를 국세청에서 받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부동산 양도차익으로 인한 소득이 한 해 84조8천억원, 주식 양도차익이 17조4천억원, 배당 및 이자소득 등 금융소득은 33조4천억원이었다고 한다([단독] 불로소득 ‘136조’ 돈이 돈을 불렸다).

<출처: 한겨레>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 규모는 135조6천억원인데 이는 2016년(112조 7천억원)보다 20% 증가한 액수다. 불로소득의 규모도 천문학적이지만 이 불로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다. 배당소득의 경우 2017년 전체 배당소득이 19조6천억원에 달했는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9,313명이 8조9387억원(전체의 45.7%)을, 상위 10%가 18조3740억원(전체의 93.9%)을 각각 차지했다. 이자소득도 상황은 비슷하다. 2017년 전체 이자소득은 13조8천억원인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5만2435명이 2조5331억원을(전체의 18.3%), 상위 10%에 해당하는 524만3532명이 12조5654억원(전체의 90.8%)을 각각 차지했다. 부동산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신고액수를 기준으로 줄 세웠을 때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동산 거래로 인한 양도소득이 전체 소득 84조7947억원의 절반이 넘는 53조7913억원(63.4%)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말이다.

배당소득, 이자소득, 부동산양도소득 등의 불로소득 편중도와 근로소득을 비교해 보면 불로소득의 양극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근로소득의 경우 상위 0.1% 초고소득층(1만8005명)이 전체 근로소득(633조6천억원)의 2.3%를 차지하는데, 이는 자산소득의 불평등도에 견주면 귀여울 정도다.

 

부동산불로소득 환수가 가장 선행되어야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적이다. 불로소득이 창궐하고 시장참여자들이 불로소득을 추구문하면 자산양극화와 소득양극화가 심화되고, 자원배분이 왜곡되며, 기업가 정신과 근로의욕이 소멸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암종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만사를 제쳐두고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설 때 무엇보다 먼저 손을 대야 하는 부문은 단연 부동산 불로소득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배당, 이자 등의 불로소득과 비교불가일만큼 규모가 크며(국세청 자료는 양도차익만 집계한 것이지만, 임대소득과 귀속임대소득까지 포함하면 GDP의 30%수준이다) 불로소득 중에서도 가장 악성의 불로소득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로소득을 다 같은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불로소득도 악성의 정도가 다르다.

불로소득의 악성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을 1.기여 및 폐단의 정도, 2.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의 공평성, 3. 무책손실의 정도 이렇게 세 가지로 제시해보겠다. 주식과 부동산을 비교해 보자. 주식은 기업에 자금을 직접 제공하는 기여가 있으며, 비교적 금액이 크지 않아 주식투자로 인해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공평하고, 주식투자를 하지 않으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없다. 반면 부동산은 사회경제적으로 폐단만 있으며, 금액이 너무 커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아도 가격이 오르면 엄청난 손실을 본다.

모든 일에는 선후와 완급과 경중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력소득은 보장하고 불로소득을 환수해야 한다. 불로소득의 환수 순위는 부동산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조국 대전에서 승리하고 검찰개혁에 성공하더라도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에 지금처럼 미온적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앞날은 어두울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도 암담할 것이다.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의 성공여부에 대한민국의 앞날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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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초 미국의 실질 인플레이션이 연방준비은행의 목표치인 2%를 넘어서면서 작년에 격발되었던 인플레이션 논쟁이 다시 대대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듯 격렬해진 여러 논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플레이션이 진짜 일어날까요? 2) 정말로 인플레가 나쁜 것인가요? 3) 새로운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다시 다가올까요? 4) 정부의 재정투입이 원인이었습니까?  치열하지만 동시에 오해의 소지를 지닌 논쟁의 대상은 연방준비은행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지난해 8월 연방준비은행은 인플레가 2 % 목표를 초과하더라도 양적완화(QE)와 저금리를 통한 자산구매를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Larry Summers와 같이 인플레이션을 두려워하는 그룹은, 연준이 실수한 것이든 이해하지 못하든, 인플레를 억제할 수 없었던 1970년대의 시나리오(불경기속에 물가가 치솟았던 스태그-인플레)가 되풀이될 것으로 경고하고 나섰습니다.

1979년 “볼커-쇼크 Volcker-Shock”로 금리를 눈에 띄는 수준으로 끌어 올렸을 때 – 당시 연방기금 금리가 18 %를 기록했습니다 – 비로소 물가가 하락했습니다. 인플레이션을 두둔하는 그룹은 연방준비은행의 연성-인플레 정책을 지지합니다. 물론 Volcker-Shock가 반복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로 인해 1980년대 초부터 미국의 탈공업화가 시작되고 깊은 불황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인플레 논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계급과 관련된 것입니다.

인플레가 높게 형성되거나 초-인플레(>10%)가 발생하면 이의 혜택을 받는 사람은 없지만, 경미한 인플레이션은 일반적으로 탄탄한 경제활동과 고용의 증가를 수반합니다. 인플레이션을 거부하는 정책은 자산의 부가가치를 잃지 않도록 보장하면서 실업률을 높이고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논쟁의 핵심은 그것이 연방준비은행의 정책과 연동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를 결정하는 것은 인플레나 실업의 수준이 아니라 바로 금융산업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연준의 역할은 애당초 인플레이션을 낮추도록 의무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977년 전후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연방준비제도의 규칙개정으로 현재처럼 “이중의무- 인플레와 실업율”를 동시에 통제하도록 부여했습니다. 즉, 낮은 인플레이션과 낮은 실업율, 사실상 자본과 노동의 이익 간에 균형을 맞추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연준은 이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연방준비은행은 높은 실업률을 무시하면서 “인플레이션 제로”를 위한 십자군을 자처하여 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앨런 그린스펀(1987-2006년 19년간 연준 의장을 지냄)의 악명높은 조치로 이로 인하여 미국노동자들은 엄청난 외상을 입었는데, 그의 영악한 공식조치에 따라 고용률이 높았을 때에도 임금을 제대로 올릴 수 없었습니다.

상기의 이중의무라는 규칙개정이 성취한 유일한 결과는 위선을 넘어서 이론적 궤변(그리스펀 수수께끼)을 양산한 것입니다. 가장 악명높은 사례는 아마도 실업률을 적당히 유지해야만 인플레이션의 가속화를 방지할 수 있다는 궤변입니다 – non-accelerating inflation rate of unemployment (NATRU).

그러한 궤변의 은밀한 비호아래, 연방준비은행은 미국의 방대한 민간금융기관 네트워크와 거대 자산가 개인의 이익을 돌보는 임무를 자신의 실제업무로 시행했습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연준이 견지한 금융규제의 완화정책으로 인해 상반된 이해관계가 형성되면서, 금융활동이 폭발적으로 확장되어 금융이 실물경제의 하인에서 약탈적인 주인으로 변하는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1979년에는 고금리로 인하여, 국내제조업과 노동자 및 부채를 진 제3세계 국가에 대한 부담과는 상관없이, 달러의 국내 및 국제적 가치가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금융부문은 달러가치와는 정반대로 초저금리와 과다한 유동성이라는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태인 금융우위시대의 첫 번째 주요 위기인 1987년 주식시장 붕괴 이후, 연방준비은행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은 악명높은 “그린스펀-지원 Greenspan-Put”을 제안하여, 주식투자의 손실을 복구하기 위해 금융분야에 필요한 만큼 자금을 투입했습니다. 이후로 현재까지 미국 금융부문은 면책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돈이 실물경제에서 빠져나가 자산의 거품을 체계적으로 생성하고 이의 결과로 불가피하게 위기의 사태가 터지게 되면 경제적으로 커다란 손실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연방준비은행이 금융부문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자금을 투입하면서, 미국의 경제는 점차 낮은 성장궤도로 빠져 들었습니다.

“모랄-헤저드, 도덕적 위험”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방준비은행의 금융분야에 대한 구제행위는 더욱 비대해졌습니다. 2000년 닷컴 거품이 터진 후에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저금리가 몇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디플레이션의 위험”에 대한 대응이라는 주장으로 이를 정당화하는 동안, 주택과 신용의 거품을 사상 최대규모로 부풀려 왔습니다.

미국의 금융부문은 생리적으로 낮은 이자율과 양적 완화를 필요로 합니다. 거래마진이 줄어들면 이를 보상하기 위하여 투기적 이익의 레버리지가 높은 거래에 대한 저렴하고 풍부한 신용에 더욱 많이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이자율이 높으면 이러한 금융업계의 구조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이 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것이 아닌 저금리와 양적 완화의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구조적 요인으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는 높은 이자율을 채택해야 하는 정책의 변화가 조만간 다가올 것이며, 이에 따라 응당의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CGTN(중국국제방송) on 2021-06-01.

Radhika Desai

캐나다 소재 Manitoba대학의 정치학 교수

월, 2021/07/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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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와 생활쓰레기가 가져올 기후재앙의 징후에 대하여 다른백년은 이번주 연속하여 <북극해저의 메탄분출>, <기후변동에 따른 식물종의 멸절>, <폐플라스틱/비닐이 가져오는 재앙>, <식생활이 기후위기를 가져온다> 등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산업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라는 아카데미 강좌를 3일간(12/1, 12/2, 12/3) 연속하여 오후 3시부터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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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팀은 Laptev해를 조사하면서 기후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새로운 원인이 형성되고 있다고 염려한다.

과학자들이 북극바다의 해저에 얼음으로 매장되어 있던 메탄가스 누적층 (엄청난 탄소를 대기로 노출시킬 잠재요소로 알려져 있다)이 시베리아 동부해변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분출하기 시작하는 증거를 확인했다고 영국 가디안 지가 보도했다.

러시아 주변에 있는 Laptev해의 350미터 해저 깊이에서 엄청난 잠재적 온실가스층이 발견되면서, 과학조사팀들은 기후의 위기를 촉발할 새로운 요인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가속될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북극의 경사진 퇴적층에는 얼음으로 동결된 메탄 등 하이드레이트Hydrates로 알려진 엄청난 양의 가스이 매장되어 있다. 메탄은 이산화탄소보다 80배나 강력한 온난화 효과를 지니고 있으며, 미국의 지질조사국은 북극의 하이드레이트가 기후의 급격한 위기를 초래할 4가지 위협 요인 중의 하나로 지목하여 왔다.

러시아의 탐사선박에 탐승하여 조사를 수행한 국제연구팀은 대부분의 분출가스가 아직까지는 바닷물에 의해 다시 용융되고 있지만, 수면까지 도달하는 가스의 양이 예상한 것보다 4-8배 가량 많은 것으로 측정되었고, 일부는 대기 중으로 방출되고 있다고 한다.

“현재로써는 지구온난화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지만, 문제는 이제 막 섭동과 분출과정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베리아 동부에 위치한 경사퇴적층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분출과정이 진행될 것이다”라고 조사팀에 참여한 스웨덴 연구자가 인공위성을 통한 무선으로 알려왔다.

과학자들은 얼음상태의 메탄을 포함하여 여러 종의 가스가 해저층에 하이드레이트 형태로 갇혀 있는데 그 양이 1,400기가 톤의 탄소에 해당한다고 추정하면서, 이들이 지구온난화의 잠재적 위협이라고 말한다. 만약에 다량의 가스가 대기에 노출되면, 기후위기를 급격히 초래할 수 있는데, 이는 메탄이 20년 동안 이산화탄소보다 온실효과로 80배 정도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염려때문에, 미국 지질탐사국은 북극 하이레이트의 불안한 상태가 기후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올 가장 심각한 4가지 위협의 하나로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은 ‘격자총 가설, clathrate-gun-hypohesis’로 회자되고 있는데, 지구가 갑자기 열탕으로 바뀌는 ‘급속한 온난화-운명의 날’ 시나리오의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러한 공포스런 염려는 과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설들이 존재한다: 과연 몇 도에서 하이드레이트가 섭동을 시작할 것이지, 섭동이 시작되면 얼마나 빨리 진행될 것인지, 분출된 가스들이 바닷물에 의해서 대부분 용융될 것인지 아니면 얼마나 해수면을 통과하여 대기로 노출될 것인지? 이러한 의문사항들이 Laptev해를 포함하여 북극지역의 해저기반과 경사층의 상태를 집중조사하고 있는 주제들이다.

다년간 국제팀으로 해저기반을 조사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상기의 탐사내용이 아직은 예비정보 임을 강조하고 있다. 메탄 분출의 규모는 이들이 연구소로 귀환하여 데이터를 분석하고 확인하여 해당전문지에 공개할 때까지는 공식화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음상태 층의 메탄이 동요한다는 것은 새롭게 티핑-포인트tipp-point에 도달하여 지구온난화를 가속시킬 가능성을 염려하게 한다. 북극은 바다 해저 속에 매장되어 있는 얼음메탄층의 취약성을 알리는 논쟁의 신호탄(ground-zero) 지역이다.

이미 북극지방의 온도는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보다 두 배나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 언제 어떻게 이들이 대기로 분출될 것인가 라는 불안정성에 대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이 진행 중에 있다.

러시아 탐사선에 승선한 60 여 명의 연구팀은 우선 600킬로에 걸친 해안 주변의 경사층에서 얼마나 메탄의 분출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탐측하고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150 킬로의 길이와 10킬로의 폭을 형성한 경사층에 대하여 6개 지점을 탐사한 결과, 연구팀은 퇴적층에서 가스의 분출구름이 형성된 것을 목격하였다. 특히 Laptev해의 300미터의 해저 경사면에서 리터당 1,600 nanomoles에 해당하는 메탄농축의 상태를 발견하였는데 이는 바다와 대기가 정상적인 균형을 이루는 조건에서 예측되는 양의 400배에 달한다.

승선한 연구팀의 책임자인 러시아 과학자는 “이번 배출의 발견은 이제껏 관측된 것과 비교하여 매우 예외적으로 거대한 양이며, 경사면에서 하이드레이트가 스스로 활성화되어 분출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없었던 일로 심각한 사항이다. 전혀 새로운 사태이다. 기후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이를 공식적으로 확인하기까지는 아직 많은 것을 더 조사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불안정성이 촉발된 가장 큰 이유는 대서양의 따뜻한 해류가 북극의 동쪽으로 흘러 들어간 탓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가 조장한 기후의 변화가 ‘북극해의 대서양화’를 초래한 것이다.

최근에 발견한 메탄방출 가능성의 또 다른 요인은 Semiletov지역으로 이 곳은 수십 년간 지속적으로 탐사되어 왔으며, 북극해의 해저기반 중에 가스분출이 가장 넓게 목격되어 온 지역이다. 2년 차 조사를 진행하면서, 조사팀은 Laptev해와 시베리아 동부해저에서 분화구처럼 생긴 마마자국을 발견하였으며, 이곳에서 메탄이 가스총처럼 분출하면서 정상적인 상태보다 수벡 배의 수준에 달하는 메탄이 해수면에 도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번 가을 시베리아 툰트라 내륙지역에서 발견된 분화구와 싱크-홀과 유사한 현상이다.

올해 들어 시베리아의 평균기온은 평년보다 5도 이상 높게 나타났으며, 이는 인간들에 의해 조장된 이산화탄소와 메탄 평균 배기량의 600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외적 변화이다. 지난 겨울 빙하가 비정상적으로 일찍 녹아 내렸다. 올 겨울에도 바닷물의 결빙이 벌써 시작되어야 함에도 예전의 기록에도 없이 지체되고 있다.

 

출처 : The Guadian(영국 가디언지) on 2020-10-27.

월, 2020/11/16-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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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와 생활쓰레기가 가져올 기후재앙의 징후에 대하여 다른백년은 이번주 연속하여 <북극해저의 메탄분출>, <기후변동에 따른 식물종의 멸절>, <폐플라스틱/비닐이 가져오는 재앙>, <식생활이 기후위기를 가져온다> 등의 칼럼을 소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산업문명을 넘어 생태문명으로>라는 아카데미 강좌를 3일간(12/1, 12/2, 12/3) 연속하여 오후 3시부터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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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말 영국 Kew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왕립식물연구원에서 발표한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자연파괴에 따라 지구에 분포되어 있는 식물종의 40%가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금년의 보고서에서 나타난 통계에서 보듯이, 식량안전과 기후위기와 같은 근본적인 세계현안에 대응하는데 매우 유용한 식물종과 진균류들에 대하여 인류사회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 Alexandre Antonelii, 왕립식물연구원 원장.

전세계 43개국에서 210 명의 전문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작성된 ‘세계의 식물과 진균류 실태’의 제4차년 보고서를 책임지고 수행한 영국왕립식물원 원장 Alexandre Antonelii 은 연구보고서가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에게 지속가능한 경로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최고 수준의 협동적 노력의 성과라고 자평한다.

그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냉장고를 열어보고, 처방된 약품에 의존하며, 생활공간을 청소하고, 옷가지를 정리한다. 이렇듯 지난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배고픔을 해결하고, 질병을 치료하며, 주거공간을 건설하면서, 삶을 보다 편리하게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래적인 지역의 관습은 무시되면서, 원초적이자 토착적인 지식에 기초한 식물종의 유효한 특성들에 대한 인류의 초기발견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잃어가고 있다. 결과적으로 인류는 생태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식물종과 진균류 등 생물 다양성이 제공하는 귀중한 잠재력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상기 보고서는 생물다양성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국제사회를 비판하는 유엔의 연구활동지원으로 이루어졌으며, 십 수년 전에 출범한 ‘Nature’s Flagship publication을 위한 국제생태 기금WWF’의 최신판에 수록되었다.

국제생태기금WWF의 주요한 활동은 자연 – 인류의 삶을 지원하는 시스템이 위협적인 속도로 파괴되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며, 최근 특별히 1970년과 2016년 사이에 지구에서 포유류와 조류 양서류와 파충류 그리고 물고기 등 평균 68%가 사라졌음을 밝혀냈다.

“2010년에 국제 지도자들이 합의한 ‘생물다양성보호’의 목표가 달성되지 못하였다. 설정한 목표를 실현하기에 이제 10년도 채 남지 않았다.” – 그린피스, 2020-09-30.

보고서 12장에서, 연구자들은 생물종들이 사라지는 위험성과 이를 보호해야 할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한다. 이들은 식물종과 진균류들이 식량과 에너지 보건의료 등에 활용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기술하면서, 생물자원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자연의 생태시스템은 인류에게 매우 소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기후를 조절하면서 홍수를 방지하고 맑은 식수를 제공한다. 생태 시스템의 군락지를 형성하면서, 식물과 진균류들은 현재 기후위기 등 환경의 도전에 직면한 인류가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돕는 거대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식물화 과정을 파괴하거나 소진시키고 일부 생물종의 씨를 말리며 동시에 기후패턴이 변해가는 동안, 생물의 다양성이 사리지고 자연이 인류에게 제공하는 혜택도 함께 축소되어 간다.”

연구자들은 식물종과 진균류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왕립식물연구원의 보존과학 책임자이며 ‘멸종부문’에 대해 저술한 Eimear Nic Lughadha는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한 점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우리는 모든 생물종의 보존에 대한 개략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은 수많은 생물종이 여전히 연구의 대상이자 동시에 멸종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데 매우 유용하다. 2019년 한해만 1942종의 식물과 1886종의 진균류가 새로이 발견되어 작명되었으며, 현재의 지구상 생명다양성에 대한 지구적 위협, 기후변화와 벌목 그리고 경작의 변화 등으로 인해 해마다 변해가는 생물종에 대한 목록을 남겨야 한다.”

보고서에 의하면, 보존대상으로 연구되었던 약용 진균류의 6종의 하나인 Fomitopsis officinalis은 나무속에 살아가는 기생-진균류인데 이미 멸종의 위기에 처해졌다고 한다. 약용 식물로 알려진 25,791종류 가운데 5,411종이 연구 중에 있는데, 13%에 해당하는 723종이 벌써 위기에 처해 있다.

왕립연구원의 부원장이자 ‘사업화 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Monique Simmonds교수는 가디안 지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코로나바이러스 또는 향후 발생할 수 있는 팬데믹을 치료하기 위해서 인류는 자연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견지에서 다음 세대의 치료제는 식물종과 진균류에서 나올 것임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보고서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적시한다.

“식량으로 사용될 수 있는 7,039종의 식물류 중에서, 겨우 15종의 식물들이 인류가 필요한 식량에너지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40억 인구는 단지 쌀과 밀 그리고 옥수수에 의존하고 있다. 소수 종류의 곡물에만 인류의 식량문제를 의존하게 되면 때로는 영양실조에 걸릴 수도 있고 기후변화에 취약점을 노출하게 된다.”

‘식량부문’을 기술한 공동저자이자, 알리안스 그룹의 국제생물다양성과 열대농업연구센터의 수석연구원 출신인, Stefano Padulosi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수천 종의 식물류가 식용으로 개발되지 않은 채 잊혀져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가 신음하면서 식량의 수급이 어려워지고 영양의 안전이 위협받으며 경제가 혼란을 겪을 때, 수백 수천 만 명의 인류에게 생명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보고를 식량으로 생산하도록 개발하고 연계하여 기후변화에 유연한 대응과 회복력을 유지하는 것이 현재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다.”

보고서를 총괄한 Antonelli 원장은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금년의 보고서에서 나타난 통계가 보여 주듯이, 식량안전과 기후위기와 같이 근본적인 세계현안에 대응하는데 매우 유용한 식물종과 진균류들에 대하여 인류사회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우리는 너무나 적은 종류의 식물종에게 너무나 오랫동안 의존하여 왔다.”

“생물다양성이 급속히 자취를 감추게 되면, 다양성이 제공하는 무진장한 자연의 보고에 인류가 접근할 기회를 놓치게 되며, 우리 세대의 거대한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지구라는 행성이 형성된 이래 가장 중대한 시점에 서 있는 지금, 우리의 보고서가 정부와 민간기업체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에게 인류가 직면해 있는 기후위기, 생물다양성 그리고 식량안전의 3종 위협에 대응하는 ‘해결책은 자연이 기반’nature-based-solution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길 희망한다.”

 

출처: CommonDreams.org on 2020-09-30

Jessica Corbett

CommonDreams 환경전문기자

수, 2020/11/18-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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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장 임기, 지금보다 훨씬길어야 한다

감사원장의 임기는 독일은 12년이고 미국의 경우 15년이다.

기관장의 임기 문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으나 사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기관장의 임기가 장기적으로 보장되어 있을 때 해당 조직은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발전될 수 있으며 조직의 효능성도 증대된다. 임기가 제대로 보장되어 있지 않고 짧을 경우, 위로는 기관장이 임명자의 눈치를 보게 될 수밖에 없고, 아래로는 사실상 관료집단의 포위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기관장이 자기 사람으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고작 한두 명인 경우가 태반이다. 국회사무처만 해도 사무총장이 ‘규정상’ 자기 사람으로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은 달랑 비서실장 한 명뿐이다. 정부의 장관도 대동소이하고, 지자체 단체장 역시 오십보백보다. 창해일속(滄海一粟), 그야말로 넓은 바다에 한 톨 좁쌀이다. 정부의 각종 규제법들도 사실 행정부의 담당 계장, 과장, 국장, 차관보 등 몇 사람이 만든다. 그것이 사실상 끝이다. 대체로 장차관은 너무 바빠서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볼 시간도 없다.

그러니 아무리 개혁을 해보려고 한들 이미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국회의원들이 소속하는 상임위도 이제 조금 알만하다 싶으면 바뀐다. 2년마다 소속 상임위가 바뀌기 때문이다. 국회법 제40조는 국회 상임위원 임기를 2년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초 제헌의회 때 의원임기와 같았던 상임위원 임기는 이승만 정권의 국회 무력화 과정에서 1년으로 단축되었다가 박정희의 제3공화국에서 2년으로 연장되었다. 그러나 당시 본회의 중심 체제를 상임위 중심 체제로 전환한 것은 의회기능 강화의 목적이 아니라 독회제도 폐지 등 행정부 안의 신속한 국회 통과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상임위 중심체제는 말이 상임위 중심이었지 의원의 정책전문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상임위 중심체제에서는 극히 기형적인 “임기 중 상임위원 개선(改選) 제도”였을 뿐이다. 이 점에서 “임기 중 상임위원 개선제도”는 권위주의 정권에 의한 의회 무력화의 도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박찬표, “한미일 3국 의회의 전문성 축적구조에 대한 비교연구”, 「한국정치학회보」제30권 제4호, 1997.).

 

2년 임기제, 나눠먹기의 망국병

그런가하면 국회의장 임기도 2년이다. 이 역시 4년 임기를 나눠 두 사람이 ‘나눠먹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2년 임기란 처음 6개월만 이른바 ‘영(令)’이 서는 것이다. 1년만 지나면 곧바로 레임덕이 시작된다. 이렇게 하여 그야말로 되는 일이 없다. 그냥 수박 겉핥기, 하는 척 시늉뿐이다. 장관 임기는 더 심하다. 2년은 고사하고 1년 남짓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과정에서 결국 관료들이 만사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결국 기관장은 조직을 전혀 장악할 수 없게 되고, 장기적으로 조직 발전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된다.

미국 의회도서관장의 평균 임기는 20년에 가깝다. 심지어 제8대 관장이었던 허버트 푸트남(Herbert Putnam)은 관장으로 무려 40년을 재직하였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랬다면 틀림없이 독재라고 비난하면서 난리법석이 날 일이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은 이렇게 임기가 긴 관장들의 장기적 철학과 계획 아래 체계적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다. 미국이나 독일의 감사원장 임기는 각각 15년, 12년이고, 프랑스는 아예 종신직이다. 또 미국 대법관 임기 역시 종신직이다. 미국에서 헌법 해석에 있어 권위 있는 전거로 활용되고 있는 『Federalist Paper』는 대법관 종신제의 장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정의를 실현하는 법원은 헌법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타협하지 않고 그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 그런데 일시적으로 재직하는 법관에게는 이와 같은 성격을 기대하기 어렵다. 법관의 일시적인 임명은 법관의 독립이라는 중요한 요소에 치명적인 사항이다. 만약 법관임명권이 행정부나 입법부에 위임될 경우에는 임명권을 갖고 있는 부에 부적절한 순종의 위험이 있으며, 두 부 모두에게 임명권이 주어진다면 한 부가 불만에 빠질 위험이 있고, 만약 시민이나 시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에게 직접 임명권을 부여한다면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려는 경향이 만연할 것이다”(Federalist Paper, 495).

한편 독일의 연방장관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부처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정책을 결정한다. 연방 수상을 비롯하여 누구도 연방장관에게 명령하거나 징계할 권한이 없다. 독일에서 정책집행은 대부분의 경우 연방수상이 아닌 각 부처 장관의 책임 하에서 추진된다. 연방장관은 의회, 즉 국민에게만 정치적 책임을 지며, 한번 임명되면 특별한 정치적 과오가 있지 않는 한, 대부분 연방수상과 임기를 같이 한다. 수많은 장관의 이름이 끝없이 명멸하는 우리와 전혀 상이한 풍경이다.

우리나라에서 기관장 임기가 이렇게 짧은 것은 바로 “관료가 주인 되는 나라”의 주요한 토대로 작동되고 있다. 동양의 역사에서 제왕(帝王)이 유능한 신하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운용했던 중요한 수단은 바로 임기를 짧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황제와 아전이 천하를 ‘공치(共治)’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는데, 현재도 대통령과 관료들의 ‘공치’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대통령은 단임하고 계속 바뀌니 결국 관료가 지배하는 사회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부패 방지를 명분으로 하여 2년 주기로 순환 근무한다. 이로부터 전문성과 책임성은 사라진다. 그러니 위든, 아래든 도무지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진다. 이렇게 하여 책임 정치는 완전히 실종되었고, 책임 행정 역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결국 상층의 ‘나눠먹기’와 공무원의 ‘순환근무’에 의한 이러한 ‘2년 주기론’은 이제 가히 망국병이라 할 수 있다.

적임자를 기용하고 그 임기를 최대한 길게 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孔子)에게 노나라 애공(哀公)이 “어떻게 하면 백성이 따르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사람을 기용하여 나쁜 사람을 다스리면 곧 백성들이 따를 것입니다. 반대로 나쁜 사람을 기용하여 좋은 사람을 다스리면 곧 백성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는 나쁜 사람을 기용하여 좋은 사람을 억압하고 쫓아낸다.

 

아전 독재와 문서 정치

중국의 전통 정치에는 관(官) -관리와 리(吏) -아전의 구분이 있었다.

원래 중국의 관리 제도에는 이 양자가 구분되지 않았으나 한족을 차별한 몽골의 원나라 시대에 정부 고위직은 모두 몽골인이 담당할 때 중국인을 서리(胥吏)로 뽑아 보좌하도록 한 뒤로 명나라 시대부터 관리와 아전의 구분은 보편화되었다.

잘 알다시피 아전 혹은 서리는 관리로 승진할 수 없었다. 이들은 정부 기구의 가장 하위의 계급으로서 사실 관부(官府)의 정식 관원으로도 인정받지 못했지만 동시에 반드시 관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했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가 낮아 일반적으로 멸시를 받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 아전들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이들은 인명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었고, 세금을 더 걷을 수도 덜 걷을 수도 있었으며, 어떤 공사든지 중단시킬 수도 있었고 아니면 더 크게 짓도록 할 수도 있었다. 반면 과거를 급제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관리들은 오직 상층 관리들을 다스리기 위한 직위였고, 모든 사무는 이들 아전에게 넘겼다.

이러한 현상은 지방정부에서 특히 극심했다. 아전들은 지방의 실제 정황에 매우 정통했고 관아의 하부 행정 역시 오직 아전들만이 이해하고 처리해낼 수 있었으므로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들은 이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독서인’들은 도무지 이들과 비교될 수 없었다. 시(詩)나 부(賦)와 같은 ‘탁상공론’만으로 시험을 보는 과거제도를 합격한 ‘독서인’들은 대부분 실무적인 행정능력을 갖출 수 없었고, 그러므로 현지 아전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관약이강(官弱吏强)’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각 아문의 각종 조문들도 모두 아전들이 제정하였다. 조례의 제정은 대부분 이들의 의지가 조정(朝廷)의 의지로 전화되었고, 지방 관리의 임명은 대개 이부(吏部) 서리가 결정하였다. 특히 이들은 오랜 기간 특정한 한 곳의 지방에 근무하기 때문에 지방 토착세력과 반근착절, 결탁하여 당우(黨羽)를 조장했다. 오늘날까지 이러한 현상은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지만, 사실상 실제적인 일체의 사무에 있어 이들 아전들이 전문가였고, 따라서 그 처리는 전적으로 이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명말청초의 대학자인 황종희(黃宗羲)는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천하에 아전(吏)의 법만 있고 조정의 법은 없다”고 풍자하였다. 그리하여 사실상 ‘아전 독재’였다.

그러나 승진도 할 수 없는 이들 하급관리들은 사회적으로 온갖 천대를 받았다. 그리고 이들 스스로도 등급이 낮고 천하다고 자인하면서 체면을 차리지 않고 갖은 부패와 악폐를 저질렀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 이래 황권(皇權)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정책은 우선 중앙에서 각종 방법으로 재상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다음으로 지방에서는 각종 방식으로 지방장관을 권한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방법은 지방장관의 임기를 엄격하게 제한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근본적으로 지방 정무에 숙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아전들의 경우, 본래 사회적 지위가 낮고 또 독서인(讀書人)들처럼 대의명분이나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여 영원히 황제와 어깨를 겨누면서 세력화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황제는 기꺼이 이들 아전들과 천하를 함께 통치하였다.

흔히 과거 중국에서는 법이 없고 중국인들은 법을 몰랐다고 쉽게 평가하지만, 사실 중국 정치의 전통적인 잘못은 이렇듯 너무 법을 잘 알아서 발생하였고, 무슨 일이든 법조문의 ‘규정’만에 따라 처리하고 조문조문 글자마다 아래위로 따졌기 때문에 대체로 일의 처리는 늦었다.

중국의 저명한 역사가인 첸무(錢穆: 1895~1990)는 이러한 아전 정치의 측면은 일종의 ‘문서 정치’라고 지칭하면서, “이는 중국의 전통적인 정치가 문(文)을 숭상한 폐단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한나라 시대 정치가 잘 된 것은 문이 적었던 데 있었다.”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현재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일하는 국회’의 구상 중에는 “법안 체계·자구 심사는 국회사무처 또는 입법조사처 내 전문검토기구가 맡는다.”는 내용이 있다.

이제까지 우리 국회는 이런 식으로 의원들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판단 하에, 혹은 “높으신 내가 그런 귀찮은 일까지 해야 하나!”라는 권위주의와 ‘귀차니즘’으로 많은 일을 공무원, 관료에게 ‘떠맡기는’ 행태가 관행화되어왔다. ‘국회 공무원에 의한 전문위원 검토보고제’도 바로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권한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면, 결국 그 사람에게 거꾸로 ‘지배당하는’법이다. 만약 여당의 그 구상대로 진행하게 되면 반드시 법안 체계·자구 심사라는 업무를 내세운 또 하나의 무소불위의 ‘강력한 관료집단’이 형성되고 군림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관료가 주인 되는 관료주의의 사회, “일하기 싫어하는” 정치권은 그것을 강화시킨다. 우리 는 여전히 “아전의 나라”에 살고 있는가!

수, 2020/07/29-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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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백년의 급진’이란 저서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삼농三農문제 최고 전문가 원톄쥔溫鐵軍 (전)인민대학교 교수가 중국 인터넷 신문 포털 ‘오늘의 헤드라인今日頭條’에서 2월중순부터 매주 1회 세차례에 걸쳐 “팬데믹 영향하의 글로벌라이제션 위기”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강연을 행했다. 매 강연은 수백만명의 시민, 청년 대학생, 지식인들이 시청하는 등, 뜨거운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강연자의 동의하에 이를 녹취 번역해 ‘월간 공공정책 6월호’에 게재된 것을 ‘공공정책’지의 허락으로 ‘다른백년’에도 옮겨싣는다. 


중국은 전세계 산업가치사슬의 가장 많은 부분을 품고 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팬데믹이 중국의 산업생산을 멈추게 하면, 전세계 산업이 모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것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위기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금융위기는 언제라도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금융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일어난 이후에, 금융자본은 더 이상 실물경제에 동조해서 움직이지 않게 됐다. 스스로 독립된 자본 역량을 가지게 된 것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전체 경제는 전체적으로 하락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미국의 주식시장은 10년내내 성장을 이어왔다. 이번 팬데믹 국면 초기에, 미국의 주식시장은 순식간에 엄청난 자본이 증발했고, 주가는 2008년 수준으로 하락했었다. 중국의 상황을 보자면, 과거 산업자본은 생산요소가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산업을 발전시켜왔다. 그래서, 물류와 교통이 막히게 되면, 반드시 원재료 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인플레이션 발생 요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무차별적으로 찍어낸 화폐가 투자처를 찾지 못해, 객관적으로 어느정도 디플레이션 압력에 놓이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전세계 모두 수요 격감이 일어나, 물건 가격이 상승할 수가 없다. 이렇게 지금은 디플레이션에서 다시 인플레이션으로 들어가게 되는 시점이다.  실물경제가 생산원가상승압력에 시달리는 이 시점에, 이제 오늘의 제3강을 통해, 다시 한번 여러분의 시야를 넓혀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지금으로부터 100년전인 1920년대로 돌아가서 당시 경제 상황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신중국이 수립됐을 당시, 악성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 했는데, 사실 그 원인은 1920년대부터 누적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민국경제를 논하게 되면 1920~30년대의 황금시대를 이야기하곤 한다. 마침 ‘북벌’의 연전연승으로 각지의 군벌을 제압하기 시작했고, 국민당군이 장강 연안에 이르렀을 때, 즉 1921년 장개석 정부는 공산당 탄압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정치, 군사 제도가 전국적으로 통일됐지만, 실제로는 각 지역이 여전히 따로 놀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청조말기부터 꿈꿔왔던 공업화, 도시화에 신속하게 돌입하게 된다. 그래서 그 시점을 ‘황금시대’라 부르는 것은, 객관적인 과정이자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평균GDP 성장률이 무려 9%에 가까왔다. 중국 경제가 최근 20년 특히, 21세기 첫 10년간, 9.6%의 GDP 성장률을 기록한 것과 비교해 봐도, 얼마나 급속한 성장의 시기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한편으로는 자본이 집중됐다. 주로 도시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고, 자본이 집중된다는 의미는 동시에 리스크가 집중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자본운동의 객관적 법칙의 결과이다. 그럼 언제부터 위기가 실재화 됐는가? 민국시절에 중국은 이미 세계경제에 편입됐고, 실제로, 이 위기는 두 차례의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1840년, 1860년 1, 2차 아편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의 연해뿐아니라 내륙의 대부분의 주요도시와 항구, 수운이 개방됐다. 서방 열강은 이미 중국을 손바닥위에 올려 놓은 상황이었다. 청말에서 민국 초기까지,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애국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러나, 갈수록 이들의 비판적 목소리는 사그라들게 된다. 당시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와서 분석해 보면, 아편전쟁의 발발 원인은 다음과 같다. 당시 중국은 세계 최고의 무역수지 흑자국가였다. 그런데 이미 서방열강은 식민지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러한 식민주의는 중상주의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국에 대한 무역적자가 심화되던 서방 열강, 그 중에서도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판매해서 무역적자를 줄이려 했다. 그럼 아편전쟁은 왜 두번이나 발발했는가 ? 1차 아편전쟁을 통해서, 중국의 상류계급이 아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소비량이 부족했고, 2차 아편전쟁을 통해, 내륙 도시까지 수운을 통해 아편을 받아들이고, 평민들도 아편을 상용하게 됐다. 군대에서도 일반 병졸들까지 아편을 즐기고, 특히, 서남, 서북 지방에 아편 벨트가 형성되면서, 고이윤을 얻을 수 있는 아편재배가 성행하고, 경작지가 부족하게 된 식량 자급에 문제가 생긴다. 바로 이 지역에서 사회가 불안정해지고 각종 민란이 벌어진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아편 무역이 성행하면서 무역적자가 누적되고 1860~1870년대부터 정부의 재정적자가 심화됐다. 청나라는 여러번 개혁을 시도했지만, 재정적자의 누적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파산하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은  따지고 보면, 이미 적재량을 초과한 낙타의 등에 볏짚 한오라기를 얹어 쓰러뜨린 격이다.

아편을 즐기는 상류층

평민들의 아편소비

민국시기에 들어서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민국공업화는 서구에서 수입한 물품이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가운데 시장을 형성했다. 무슨 제품이든 양포洋布(직물), 양화洋火(성냥),양면洋面(밀가루) 이런 식으로, ‘양洋’이 접두사로 붙는 물건들의 소비가 급증했는데, 중국의 자체 생산능력이 부족했던 탓에 대량의 수입품이 시장을 점령했다. 도시의 일반 소비품목은 모두 서구의 수입품이 차지했고, 자연스럽게 자체생산과 민족공업의 발전이 요구됐다. 중국내에서 생산된 제품은 운수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가격 경쟁력을 가지게 됐다. 이렇게 1920~30년대 민족공업은 밀가루, 연료, 방직물, 식품산업 등의 생필품을 만드는 경공업으로부터 시작해서, 굴기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문제가 시작됐을까 ? 공업화는 항상 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한 자본의 심화(capital deepening)를 요구한다. 자본심화는 자본축적이 필요한데, 이 자본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 당시의 상당수 상공업경영자들은 원래 농촌의 지주들이었다. 지주겸 상공업경영인들인데, 사실은 ‘부재지주’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지주는 원래 농촌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으며, 마을과 다양한 사회적, 인간적 관계로 얽혀 있었다. 자연재해로 수확량이 줄면 지대도 줄여주고, 소작인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도움을 주기도 하고, 기근이 들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는, 마을 의창義倉을 만들어 관리하기도 했다.  즉, 풍년이 들면 지주와 마을 엘리트들이 잉여 식량을 의창에 비축해서 흉년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이런 유무상자와 상호부조 기제에 의해, 마을내에서 계급간에 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

지주들의 의창 – 항저우杭州 부의창富義倉, 수리하기전의 모습

부의창, 수리후의 모습

지주들이 도시로 이주해서 기업가가 되고부터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도시에서 자신의 재화를 이용해서 소비하고 거래를 하게 됐다. 그들이 가진 점포, 기업, 가공방법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기름을 만드는 곳, 직물을 직조하고, 염색을 하는 곳, 식품을 가공하는 곳, 모든 생산장소가 洋+물품을 생산하는 도시의 공장이 됐다. 그래서 이러한 소비와 기업운용을 위해 현금이 필요하게 됐다. 이전에는 농가에서 가을 수확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지대를 거뒀다. 실제 수확물을 가지고, 지주와 소작인이 분배를 정했다. 지주가 제공한 생산수단도 따로 셈했다. 말과 소 같은 가축, 농기구, 종자 등등. 땅만 빌렸다면, 당연히 지주의 몫은 상대적으로 적어졌다. 또, 현물로 지대를 냈기 때문에, 지주는 이렇게 모인 현물 즉 식량을 도시로 유통시키는 역할을 했다.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일방적 수탈자가 아니었다.  또, 마을의 생산 현물이 지주에게 집중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농촌에서의 거래(수매)원가가 낮아져, 이를 다시 도시로 유통시키는 비용도 낮아졌다. 그래서 도시에 자본이 축적되고, 이에 따른 공업화가 용이해졌다. 하지만, 지주들이 도시산업의 경영자가 되면서 사정이 급변했다. 그들은 기업운용을 위해서 현금이 필요하게 됐고, 한해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지대를 거둬야 했다. 농민들의 지대 선납부를 돕는 농촌 고리대금업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금융이 들어오게 되면, 착취의 구조가 형성된다. 당초의 지대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농민 생산자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또 농촌에서 도시에서 만든 공상품을 이용하게 되면서, 상공업자본이 농촌으로 진입하게 된다. 농촌에 금융자본과 상공업자본이 내려오면서, 농업 생산물뿐 아니라, 역시 수공업으로 생필품을 만들어 자급하고 팔던 소농의 가계 경제는 파산하고 향촌사회가 쇠락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과거 농촌에 거주하는 지주와 농민이 함께 운용하던 현물경제가, 부재지주와 농민, 금융업자가 사이에 낀 화폐경제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1920년대 30년대에 농민혁명이 시작된다. 마오쩌뚱이 고향인 후난성에서 농민운동을 했던 것도 같은 이유때문이다. 실은 농민들도 농사를 포기하고 도시로 가서 장사를 해서 더 많은 이윤을 얻으려는 이들이 나타났다.

광저우 농민강습소 유적

그래서 도시화와 공업화가 가속되는 동시에, 사회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국민당 정부는 이러한 혼란을 없애기 위해 각지에 군대를 동원해야 했고, 재정을 군대의 유지에 쏟아부어야 했다. 초기에 각 지역 군벌 배후에는 해외의 제국주의 세력이 존재했다. 그래서, 대일통의 달성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 여타 제국주의 세력이 몰락함과 동시에 미국이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아 장개석 정부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은 비교적 안정된 체계를 갖추게 된다. 1920~30년대의 민국황금시대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여하튼 민국의 도시화, 공업화와 경제의 고속성장 와중에 소농경제와 농촌은 쇠락의 길을 걸으며 내부적 사회문제를 안게 된다. 외부에서 온 위기는 , 서구의  경제위기, 대공황과 관련이 있다. 서방사회는 생산과잉에 의한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외부로 비용전가를 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은본위 화폐제도는 명나라에서 시작해서 민국 초기까지 이어졌는데, 중국은 은의 주요 생산국이 아니었다. 따라서 주요 5개 은생산국과 ‘백은협정’을 맺고 있었다. 이렇게 중국내의 은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서구에 경제 위기가 발생한 이후, 미국의 은생산 지역들이 가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미국에서 새로운 ‘백은법안’을 통과시켰다. 국제 시세가 상승했는데, 당시 중국은 화폐 제조를 위해 은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은의 가격을 함부로 변동시킬 수 없었다. 인플레이션 가능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해외의 은 가격이 높아지자, 중국내에서 은을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국은 해외 은가격 변동 영향을 받게 됐다.

청나라의 은표

그렇게 해서 중국은 1935년 화폐개혁을 통해, 은을 포기하고, 법정화폐로써 지폐를 발행하게 된다. 공업화와 글로벌시장 진입 후에, 중국은 국외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은 중국보다 먼저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상태였고, 중국에 비해서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는데,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지역내 군세 확장에 나섰다. 1931년에 중국 둥베이 지역을 침략했고, 1935년에 화베이 지역을 침탈했다. 1933년 대공황이 이 모든 출발점이었으니, 실은 제2차세계대전의 발발은 일본의 중국 침략에서 시작됐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서구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누락돼 있을 뿐이다.

1937년 결국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국 침략에 나서게 되는데, 다시 정리하자면, 중국은 스스로 공업화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 경제위기가 초래한 은의 유출에 의한 경제적 위기를 겪었고, 한편으로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맞게 됐다. 내부적으로는 농민혁명에 직면했는데,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민국을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게 됐다. 중일전쟁 발발직전까지는 그래도, 민국 경제가 일정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인플레이션도 극심하지 않았는데, 전면적인 전쟁상태로 돌입하면서, 경제가 타격을 입고, 인플레이션이 격화됐다. 정부는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낼 수 밖에 없었는데, 군수품을 해외에서 구매해야 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시 전쟁에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실은 중일 양측에 많은 군수물자를 공급해서 재미를 봤다. 심지어는 당시 일본군의 군사장비 절반 가량이 미국 제품이었다고도 한다. 유명한 일화로, 교육운동가인 타오싱즐陶行知이 당시 미국 유학중이었는데, 동포를 살해하는데 쓰이는 불의한 전쟁에 군수물자를 대는 미국의 위선을 참다 못해 도중에 귀국했다고 한다.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

미국은 당시 생산과잉 문제를 군비 생산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으므로, 도덕적 논쟁을 떠나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전쟁 규모가 커질수록, 경제 회복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중국도 군비를 수입해야 했는데, 1차 대전 패전국이었던 독일에 눈을 돌려, 국민당 군대는 대량의 독일엔지니어를 초빙하고, 그들의 군수 설비를 수입했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재정적자를 불러온다. 실물 금은이 있어야 수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 매우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는데,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그래서 1937년 전쟁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불러왔다. 그러나 1941년에 시작된 태평양전쟁의 영향으로, 서방은 중국에 전략물자를 원조하기 시작하고, 약간의 안정을 되찾기도 한다.

하지만, 1946년 국공내전이 본격화하면서, 민국정부의 재정적자는 더 심각해진다. 결국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수레 한가득 지폐를 싣고와야, 겨우 밀가루 한포대를 살 수 있었다. 당시 신장新疆지역에서 발행한 지폐중에는 액면가 60억위안짜리가 있을 정도였다. 민국정부는 1948년에 군안권軍安券이라는 화폐를 새롭게 발행하는데, 60억위안은 1만군안권으로 바꿀 수 있었다. 악성 인플레이션이 심화되면, 아예 경제운용이 불가능해진다. 가장 큰 문제는 어떤 실물경제도 하이퍼인플레이션하에서 생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매크로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산업과 실물경제 참여자들 모두 견뎌내지 못하게 된다. 당시 민국 정부는, 할 수 없이, 미국의 전문가를 초청하고, 민국 정부의 미국유학파 관료들이 함께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설계하게 된다. 당시 미국정부로부터 4800만달러의 차관을 들여왔는데, 1944년 브레튼우즈협약에 의해서 미달러와 금을 고정비율로 태환하게 됐으므로, 역시 이에 맞춰 군안권을 발행했다. 중국내 모든 미국 달러와 금의 민간시장거래를 불법화하고 국가가 관리하게 했다. 이렇게 몰수한 자산을 기초로 안정화를 꾀함으로써, 악성 인플레이션을 막으려했다. 이런 설계는 논리적이지만, 실제로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개월이 지나면서 실패를 인정해야 했고, 인플레이션은 고삐풀린 야생마처럼 변했다. 이렇게 민국정부가 붕괴된다. 재정이 무너지고, 금융이 무너지고, 군대에 급여를 지급할 수 없으니, 군대가 와해됐다.

신장에서 발행된 60억위안의 지폐

그래서 1949년 신중국 수립후 중국 정부는 민국정부가 겪은 실패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신정권은 농촌과 농민의 혁명 지지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농민혁명은 사실 현대화와 상반된 노선을 걷게 돼있다. 공산당은 우선 농민에게 토지를 배분했다. 역대 중국의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균전면부均田免賦정책을 실시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1946년 이래 국공내전중 국민당과 공산당 양측의 가장 큰 차이는, 지주계급이 핵심이 된, 국민당이 조세를 감면하거나 하다못해 부채에 대한 이자조차 줄여주지 못한 것에 반해, 공산당은 1946년 농민혁명의 시작부터 토지혁명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혁명이 성공하면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하면서 혁명전쟁에 참여할 것을 호소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대의를 내세운 혁명은 모두 성공했다.

농민혁명이라는 조건하에서, 마오쩌뚱이 이야기한 농촌이 도시를 포위한다는 전략이 성공했다. 왜냐면 농민이 공산당편에 섰을 때, 현대적인 재정과 금융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이하이淮海전투에서 천이陳毅 원수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화이하이전투의 승리는 농민이 손수레로 일궈낸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최전방에서 전투를 벌이는 군인뿐 아니라, 후방의 보급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당시, 전선에 있는 한명의 군인을 후방의 38명 농민이 떠받치고 있는 셈이었다고 한다. 토지혁명이 대의가 되며, 참전하는 군인에게 월급으로 지급해야 하는 화폐가 필요없어진다. 손으로 쓴 영수증 한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되돌려 주겠다는 농민들에 대한 약속 한마디로 그만이다. 그러니, 재정적자가 생길 염려가 없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에게 지불된 급여는 모두 현물이었다. 간부들에겐 좁쌀이 지급됐다. 옌안延安시절 즉, 북방에서 해방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좁쌀이 가장 편리하게 계량 가능한 곡물이었다. 식량이 화폐를 대체하던 시절이다. 해방구에서 좁쌀이 화폐기준이 됐다. 신중국 건국후에도 상당기간 좁쌀화폐단위를 사용했는데, 마오쩌뚱은 국가주석으로서 연봉이 3만6천근의 좁쌀이었다. 주석의 거처인 중난하이中南海에 수레에 좁쌀을 싣고 가져다 주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화폐가치 기준인 등가개념으로 좁쌀을 사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농민혁명, 토지혁명이 가져온 중국 특색의 경제현상이자 승리의 비결이었다. 민국정부는 현대 재정과 금융 제도를 도입했으나 군대에 급여를 지급하지 못해서 망했다. 그런데, 도시화, 공업화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 농민혁명 군대는 이런 식량기반의 실물화폐 경제를 이용해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좁쌀식량을 보병들에게 배급하고 있다

정권을 수립한 후에 마오쩌뚱은 중요한 글을 하나 발표하는데 그 제목은 ‘신민주주의론新民主主義論’이다. 1947년 중국 공산당 제7차전당 대회에서 발표됐다.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후, 둥베이東北지역이 매우 중요해졌다. 왜냐하면 둥베이로 진입해 일본 관동군이 남긴 군장비를 인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경이 인접한 소련 공산당의 동의가 필요했다. 중국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소련 공산당의 표준이론에 중국 공산 혁명의 담론을 맞춰야 했다. 당시 소련의 이념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혁파하고, 단계적 혁명론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들의 분석에 의하면 중국은 당시 봉건 농민국가였고, 공산혁명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당과 협력해서 자산계급 혁명을 이룬 후, 공업화 생산양식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자산계급의 혁명이 자본주의를 낳게 되면, 자연스럽게 노동자계급의 혁명이 가능할 터였다. 그래서 마오쩌뚱은 중국 공산당 정권 시스템을 소련의 입맞에 맞추기 위해서, 우선 민족자본주의를 형성하는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건국후 중국이 신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이야기하자, 많은 혁명의 전우들이 마오쩌뚱에게 반문했다. 피땀흘려 일군 혁명의 성과를 어째서 다시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전제로 삼는가 ? 쑨원의 자본주의와 공산당의 자본주의가 대체 무엇이 다른가 ? 마오쩌뚱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체제안에 산다. 민국 시절 자본주의의 영도자가 국민당 간부였다면, 신중국 수립후에는 공산당 지도자가 자본주의 체제 건설을 이끈다. 중국의 5성홍기에서 가장 큰 별은 공산당인데, 그 주위의 네개의 작은 별 중 하나가 민족자본가를 상징한다. 나머지 셋은 노동자, 농민과 소자본가 계급이다. 이것이 신중국 건국 당시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구조였다.

마오쩌뚱과 주더朱德가 제7차 전당대회 주석의 좌석에서 숙의하고 있다

공산당 혁명군은 승리 이후에, 민국정부가 만든 대도시를 접수해야 했다. 둥베이東北에서 화베이華北의 톈진天津, 베이징北京을 거쳐, 화둥華東지역의 상하이上海, 난징南京에 이르기까지. 신정부는 민국의 도시 시스템도 그대로 이어받아야 했다. 정부, 경찰, 의료, 학교 등등. 하다 못해 거리 청소를 위해서도 노동자에게 월급을 주어야 했고, 그러자면 재정이 필요했다. 농촌에서와 달리 도시에서는 화폐가 필요했다. 뿐만아니라, 당시 아직 남부는 해방이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여전히 군비도 지출해야 했다. 그래서 재정적자가 70~80%에 이르게 됐고, 이것은 민국 정부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또 그때부터 전국적으로 통일된 인민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대규모로 화폐를 찍어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천윈陳雲은 재정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계속 경기부양책을 사용할 밖에 없었다. 이렇게 화폐를 찍어내어 재정적자를 메꿔나가는 방법은 결국, 인플레이션을 부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실물경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가 이 국난에서 신중국을 구원했는가?

그것은 다시 농민들이었다. 우선 혁명을 통해서 토지를 분배했다. 소생산자인 농민은 자기 몫의 토지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면, 반드시 의식주를 절약하고, 저축한 재화로 토지를 구매하려든다. 생산수단인 토지는 일단 손에 넣으면, 남에게 약탈당할 염려가 없다. 하지만, 걔중엔 생산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다. 장애인이라든가, 병이 든 사람들이라든가, 이들은 필연적으로 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에, 토지를 팔 수 밖에 없다. 신민주주의는 토지매매의 자유를 허하는 대신에, 오히려 토지의 임대를 금했다. 왜냐하면, 토지의 임대는 일종의 봉건지주와 소작농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소련에서 들여온 이념을 중국도 받아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앞서 설명한 과정을 통해서 발행된 인민폐를 가장 많이 흡수한 계층이 누구일까 ? 그것이 바로 농민들이었다. 당시 농민의 인구 점유율은 88%였고, 이들은 또 벌어들인 돈을 아껴서 저축했다. 이렇게 저축한 돈으로 다시 땅을 사서 늘리고 싶기 때문이었다. 1950년대 5억의 중국 인구중 4억이 농민이었고, 이들이,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발행된 화폐를 은행에 저축하면서 화폐가 흡수되고, 매크로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농민이 생산한 것은 당시 가장 값어치가 있는 생활필수품인 식량과 면화와 같은 농산품이었다. 당시 실물경제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견뎌낼 수 없었다. 경영자들은 기업의 운용과 확장이 아니라, 고금리와 이윤이 가능한 투기에 참여함으로써만 인플레이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하이의 양백일흑兩白一黑 혹은 삼백三白의 투기 전쟁은 이렇게 발발한 것이다. 당시 화폐기준이 됐던 실물, 즉 양백兩白, 쌀과 면포 (밀가루를 더해서 삼백三白으로 일컫기도 하는),  그리고 일흑一黑 – 석탄은 도시생활의 필수품이었고, 민족자본가들은 이를 비축해 투기 수단으로 삼았다. 공산당 정부는 이들을 설득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공산당은 전국의 양백일흑 자원을 상하이로 집중시켜, 가격을 안정시킴으로써, 결국 자본가들을 굴복시켰다. 이렇게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갔는데, 농민이 제공한 물자가 없었다면, 민생은 커녕, 신정권의 안정도 실현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당시 시장은 어떻게 운용됐나? 국영기업이 직접 관리했다. 신정권은 폭력혁명을 통해서 쟁취한 것이고, 여기서 사실 다른 설득과 협상의 논리는 필요 없었다. 새로운 자산의 형성도 무력을 동원했다. 제국주의 자본이 중국 대륙에 남긴 자산, 민국정부의 자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소련 등의 해외원조가 들어왔다. 모든 것을 국유화하고, 국가의 관리하에 신속하게 국가자본을 형성했다. 국가의 자본은 군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대는 농촌에서 생산된 모든 물품을 도시로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을 보장한다. 그리고 재정과 금융, 도시 노동자의 급여는 공급제 방식으로 지불되고, 실물이 기준이 됐다. 당시 농산품은 물품과 서비스의 가치를 정하는 화폐기능뿐 아니라, 재화의 저장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즉, 매크로 경제의 조절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이렇게 서구 근대국가의 현대적 화폐 경제 시스템과는 다른 신중국 건국후의 자주 경제를 실현했고, 중앙의 관리와 조절을 통해, 일체의 투기행위를 근절했다.

삼반오반三反五反 정치운동

양백일흑兩白一黑을 포함해서 세번에 걸쳐, 도시의 투기세력과 정부의 대결이 있었으나, 정부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리고 몇달 후에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디플레이션과 함께 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주체인 민족자본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1950년 하반기에서 1951년초에 걸쳐서, 민족자본 운영이 지속되기 힘들다는 것이 증명됐다. 당시 정부는 정부조달과 구매를 통해서 이들의 생존을 보장해보려고 했으나 쉽지 않았다. 농촌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있었고, 공산품이 농촌으로도 공급되기 시작했다. 국가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고, 객관적 조건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부패 현상이 나타났고, 이를 퇴치하기 위한 3반5반三反五反  (3반 – 반부패, 반낭비, 반관료주의, 5반 – 뇌물, 탈세, 국가재산횡령, 생산재료 속임수 및 빼돌리기, 국가경제정보 부정이용) 정치운동도 벌어졌다.

동시에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대규모 수요가 발생했고, 이를 충족시킨 것은 국유기업들이었다. 소련은 북조선을 지원하려고 중국을 원조해서 대규모 군사장비의 생산라인을 가동시키게 했다. 이때 중국에 군비중공업 역량이 만들어지는데, 당연히 이는 사기업이 아니라 국영기업의 몫이 된다. 소련정부가 중국정부에 원조 형태로 제공한 자본은 상환이 급하지 않은, 일종의 장기부채였다. 1950년 10월에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소련이 중국 정부를 지원하는 156개의 대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고, 중국내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600여개의 프로젝트가 생겨났다. 이로써 중국은 자본주의 소유제에서 사회주의 공유제로 전환하는 ‘과도시기 총노선過渡時期 總路線’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중국은 1949년 건국이래 파란만장한 위기를 극복해 나가며 국가와 경제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불행중 다행으로, 농민혁명이 정권을 만들었고, 폭력혁명을 통해서, 앙시엥레짐이 만들어 놓은 자본체계를 타파했다. 국유기업은 당시의 악성 인플레이션을 순조롭게 잠재웠다. 1952년, 1953년에 시작된 농촌협동조합식생산(호조합작互助合作), 사회주의 과도시기 총로선 그리고 공상업사기업개조 등이 이어지며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제도의 변천은 하늘에서 뚝떨어지거나, 머리속 이념이 만든 이론에 따라 설계된 것이 아니라, 매번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불가불 취해진 조치들이다. ‘경로의존’ 방식으로 구상되고 실천된 제도와 정책들인 것이다.

 

향촌건설원 웹사이트

https://mp.weixin.qq.com/s/ek1WxGHs3DgauluNk6JDPw

목, 2020/08/0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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