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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불로소득 방치하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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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불로소득 방치하면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다

admin | 목, 2019/10/10- 23:57

조국 대전이 모든 걸 흡수하는 와중에 정말 중요한 뉴스가 나왔다.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보도가 그것이다. 미디어의 보도에 따르면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유승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이 ‘2017년 귀속 양도소득과 금융소득’ 자료를 국세청에서 받았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부동산 양도차익으로 인한 소득이 한 해 84조8천억원, 주식 양도차익이 17조4천억원, 배당 및 이자소득 등 금융소득은 33조4천억원이었다고 한다([단독] 불로소득 ‘136조’ 돈이 돈을 불렸다).

<출처: 한겨레>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부동산 양도차익 등 불로소득 규모는 135조6천억원인데 이는 2016년(112조 7천억원)보다 20% 증가한 액수다. 불로소득의 규모도 천문학적이지만 이 불로소득이 극소수에게 집중된다는 사실이 더욱 심각하다. 배당소득의 경우 2017년 전체 배당소득이 19조6천억원에 달했는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9,313명이 8조9387억원(전체의 45.7%)을, 상위 10%가 18조3740억원(전체의 93.9%)을 각각 차지했다. 이자소득도 상황은 비슷하다. 2017년 전체 이자소득은 13조8천억원인데, 상위 0.1%에 해당하는 5만2435명이 2조5331억원을(전체의 18.3%), 상위 10%에 해당하는 524만3532명이 12조5654억원(전체의 90.8%)을 각각 차지했다. 부동산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신고액수를 기준으로 줄 세웠을 때 상위 10%에 해당하는 부동산 거래로 인한 양도소득이 전체 소득 84조7947억원의 절반이 넘는 53조7913억원(63.4%)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고 하니 말이다.

배당소득, 이자소득, 부동산양도소득 등의 불로소득 편중도와 근로소득을 비교해 보면 불로소득의 양극화가 얼마나 극심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근로소득의 경우 상위 0.1% 초고소득층(1만8005명)이 전체 근로소득(633조6천억원)의 2.3%를 차지하는데, 이는 자산소득의 불평등도에 견주면 귀여울 정도다.

 

부동산불로소득 환수가 가장 선행되어야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적이다. 불로소득이 창궐하고 시장참여자들이 불로소득을 추구문하면 자산양극화와 소득양극화가 심화되고, 자원배분이 왜곡되며, 기업가 정신과 근로의욕이 소멸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저해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불로소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과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침해하는 암종이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는 만사를 제쳐두고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서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불로소득의 공적 환수에 나설 때 무엇보다 먼저 손을 대야 하는 부문은 단연 부동산 불로소득이다. 부동산 불로소득은 배당, 이자 등의 불로소득과 비교불가일만큼 규모가 크며(국세청 자료는 양도차익만 집계한 것이지만, 임대소득과 귀속임대소득까지 포함하면 GDP의 30%수준이다) 불로소득 중에서도 가장 악성의 불로소득이기 때문이다. 흔히 불로소득을 다 같은 불로소득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불로소득도 악성의 정도가 다르다.

불로소득의 악성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을 1.기여 및 폐단의 정도, 2.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의 공평성, 3. 무책손실의 정도 이렇게 세 가지로 제시해보겠다. 주식과 부동산을 비교해 보자. 주식은 기업에 자금을 직접 제공하는 기여가 있으며, 비교적 금액이 크지 않아 주식투자로 인해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공평하고, 주식투자를 하지 않으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없다. 반면 부동산은 사회경제적으로 폐단만 있으며, 금액이 너무 커 불로소득을 얻을 기회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아도 가격이 오르면 엄청난 손실을 본다.

모든 일에는 선후와 완급과 경중이 있다. 문재인 정부는 노력소득은 보장하고 불로소득을 환수해야 한다. 불로소득의 환수 순위는 부동산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조국 대전에서 승리하고 검찰개혁에 성공하더라도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에 지금처럼 미온적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앞날은 어두울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미래도 암담할 것이다. 부동산 불로소득 환수의 성공여부에 대한민국의 앞날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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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지난 미 대선 경선 당시 버니 샌더스 지지 운동을 통해 급성장한 미국민주사회주의자(DSA : Democratic Socialist of America)의 회원수가 4만명에 근접하면서 무서운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뉴욕 민주당 하원의원 경선에서는 약관 20 대의 젊은 여성 오카시오-코르테스가 차기 원내총무를 예약한 10선의 중진 의원을 물리쳤다. 한국에서도 정치공학에만 빠져있는 기성 정당에 철퇴를 가하는 새로운 젊은 진보그룹이 형성되기를 기대하면서 미국 내 진보포탈에 실린 내용을 소개한다.


지난 5월, 세 명의 젊은 여성 정치인들이 펜실베이니아 주의회 예비선거에서 탄탄한 정치적 입지를 가진 남성 정치인들을 당당히 꺾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emocratic Socialists of America, DSA)의 공개적 지지를 받고 있다. 이들 중 30세의 썸머 리(Summer Lee)와 32세의 사라 이나모라토(Sara Innamorato)는 펜실베이니아 정치의 상징과도 같은 코스타 가문의 먼 친척인 돔 코스타(Dom Costa)와 폴 코스타(Paul Costa)의 자리를 차지했다.

올해 37세의 엘리자베스 피들러(Elizabeth Fiedler)는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3개월 만에 출마를 선언했고, 필라델피아의 선거사무소에 탁아시설을 설치해 다른 부모들도 유세 전 아이를 맏길 수 있도록 했다. 유권자들과 이야기 하면서는 자신도 아이들 건강보험을 위해 메디케이드(Medicaid)와 아동건강보험프로그램(CHIP)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보험 소멸 후 2주간 느낀 불안함을 고백했다.

썸머 리는 로스쿨을 졸업한 이후로 계속 그녀를 짓눌러 온 20만 달러 이상의 학자금 때문에 본능적으로 “모두를 위한 양질의 무상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선거인 대부분이 백인인 지역에서 흑인 여성인 그녀는 전체 투표의 68% 득표했다).

이나모라토는 부친의 오피오이드 중독으로 어떻게 그녀와 어머니가 중산층 밖으로 밀려났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에게 “우리 선거구가 겪은 그 고난을 내가 다 겪어왔다”고 말했다.

이들의 선거는 현재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풀뿌리 시민사회 부흥 운동의 일환이었다. 나는 이것이 이 칠흑 같은 암흑기에 낙관론을 위한 단 하나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뉴욕의 뉴스 속에 파묻혀 나는 종종 절망감에 시달리곤 한다. 의심스러운 저의와 부패한 성격으로 설명되는 권위주의적 대통령은 두 번째 연방대법원의 판결과 함께 미국을 수세대에 걸쳐 바꿔버릴 태세다. 연방정부는 절대 처벌받지 않는 부패의 장이 되었다. 내 아이들 또래의 어린 애들은 이민자라는 이유로 부모와 떨어졌다.

그러나 미 전역의 모든 사람들, 특히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재건하기 위해, 정치적 힘을 발휘할 방법을 찾기 위해 거의 초자연적 힘을 내 노력하고 있다. 반 트럼프의 중추가 되는 중년의 비주류들에게 흔히 이러한 노력은 곧 민주당 지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을 썩은 정치와 경제 시스템의 절정으로 보는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노력은 곧 당을 민주적 사회주의의 수단으로 재건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와 이나모라토 그리고 피들러의 승리는 마치 폭풍 전야처럼 느껴진다. 지난 화요일에는 비슷한 양상이 뉴욕이라는 좀 더 큰 무대에서 재현되었다. 28세의 민주적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가 19년간 자리를 지킨 민주당의 조셉 크로울리(Joseph Crowley)를 이긴 것이다. 크로울리는 퀸즈 카운티 민주당 의장이자 낸시 펠로시(Nancy Pelosi)의 뒤를 이어 차기 하원 민주당 원내총무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해당 선거가 열리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크로울리는 자체 여론조사에서 오카시오-코르테즈를 36%p 앞서 있었다. 선거는 결과적으로 오카시오-코르테즈가 15%p 앞서며 끝이 났다.

NEW YORK, NY - JUNE 26: Posters for progressive challenger Alexandria Ocasio-Cortez outside her victory party in the Bronx after Ocasio-Cortez upset incumbent Democratic Representative Joseph Crowly on June 26, 2018 in New York City.  Ocasio-Cortez upset Rep. Joseph Crowley in New York’s 14th Congressional District, which includes parts of the Bronx and Queens. (Photo by Scott Heins/Getty Images)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의 포스터. 그녀는 6월 26일 뉴욕 시에서 민주당 현직 하원의원 조셉 크로올리를 물리쳤다. (사진 Scott Heins/Getty Images)

 

오카시오-코르테즈는 펜실베이니아 여성들과 같은 방법으로 승리했다. 수많은 자원봉사자를 동원했고, 봉사자 1인당 한 명의 유권자와 연결했다.

“전국적 관심이 전혀 없었던 시절부터 몇 달을 계속 지하철역 등에서 유권자들에게 이야기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난 5월 오카시오-코르테즈를 지지한 뉴욕주 검찰총장 후보인 제피르 티치아웃(Zephyr Teachout)의 말이다.

해당 선거구의 압도적인 민주당 구성비율을 봤을 때, 오카시오-코르테즈의 본 선거 승리는 거의 확실하다. 리와 피들러, 이나모라토 역시 이렇다 할만한 공화당 경쟁자가 없어 의원 선출이 확실시된다.

트럼프는 트위터로 오는 11월 훨씬 더 많은 공화당 의원을 탄생시켜 자신의 통치를 한층 강화할 붉은 물결에 대한 환상을 펼쳤다. 그러나 진짜 붉은 물결은 민주적 사회주의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는 것이 될지도 모르겠다.

미국민주사회주의자들(DSA)을 이끄는 마리아 스바트(Maria Svart)는 모두를 위한 메디케어(Medicare for All), 미국이민세관단속국(United States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의 폐지, 연방정부의 일자리 보장 등을 포함하는 코르테즈의 공약을 언급하며 “이런 문제를 가지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오카시오 코르테즈가 속한 DSA는 미국 내 가장 큰 사회주의 단체이다. 2016년 대선 당시,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인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자 그 회원 수가 7,000명에서 37,000명 이상으로 증가하며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다. DSA는 선거 때에는 민주당과 일하지만, 정당이라기보다는 외부에서 부정에 맞서 싸우는 운동단체에 가깝다.

오카시오-코르테즈의 공약에 반영된 DSA의 많은 목표가 민주당 진보 진영의 목표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다. 다만 DSA는 기꺼이 진보주의자들과 함께 일하지만, 그 회원들은 전체적으로 민주적 사회주의 중 “사회주의” 부분에 진지한 태도를 보인다. DSA의 설립헌장은 “자원과 생산에 대한 민중적 통제, 경제계획, 공평한 분배, 페미니즘, 인종평등, 억압 없는 관계 등 인도적 사회”를 명시하고 있다.

생산 수단의 민중적 통제에 대한 논의는 나이가 많은 민주당원, 심지어는 일부 매우 진보적인 당원들에게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는 젊은 당원들과 훨씬 잘 어울리는 주제로 최근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18세~34세의 민주당원 중 61%가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경기침체와 치솟는 학자금, 불안한 의료보험, 일자리의 불확실성 증가 등으로 극심한 물질적 불안정을 겪었다. 이들에게 공산주의의 광범위한 실패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자본주의의 실패는 곳곳에 널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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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나선 민주사회주의자(사진: 위키백과)

DSA가 지지하는 후보들이 승리했다고 DSA가 그 공을 독차지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포퓰리스트 계열의 브랜드 뉴 콩그레스(Brand New Congress)와 저항단체 인디비저블(Indivisible)의 지역 지부 등 많은 단체가 오카시오 코르테즈를 위해 힘을 합쳤다. 또한, 피들러와 리, 이마모라토의 승리를 DSA가 도왔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 뒤에 DSA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민주당원 사이에서 이데올로기 전에 대해 말은 많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유연한 듯 보인다. 최근 나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이마모라토를 위해 자원봉사를 했고, 민주당의 재활을 돕는 젊은 여성을 지원할 수 있어 감격스러웠다는 한 온건파 저항 운동가를 만났다.

배리 루시(Barry Rush)는 올해 63세로 은퇴 후 삶을 보내고 있는데, 과거 민주당과 공화당을 고루 찍었지만, 트럼프에 놀란 후 이제 Progress PA라는 자유주의 단체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민주당원을 찍는 것이다. 그는 민주당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이야기하며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저는 계속 스머프 버튼을 누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민주당에 젊은이들이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나모라토의 승리 축하 파티에 “젊은 사람들이 500명이나 있었다”라며 거기 모인 밀레니얼 세대들을 보고 힘이 났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손주들을 위한 희망을 얻었다.

한편 DSA의 젊은 회원들은 분석을 통해 트럼프의 재앙을 이해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들은 왜 우리 사회가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사회를 재건할 것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진보주의자들보다도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일들에 놀라지 않는다.

나는 피츠버그 동부 끝의 한 작은 커피숍에서 피츠버그 DSA의 공동의장인 29세의 아리엘 코헨(Arielle Cohen)과 두 명의 다른 지부 지도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코헨은 “트럼프의 재앙은 모두가 개별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트럼프와 싸워야만 할 것 같고, 행정부와 싸워야만 할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라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사실 이 상황이 아주 오래 지속되고 있다고 말하죠. 트럼프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냥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란 거죠.”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서 묘한 위안감이 느껴진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을 현재의 재앙을 피하고자 고군분투하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에 그들이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620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DSA 피츠버그 지부의 코헨과 그 동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들이 지역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쏟아붓는 노력을 알고 놀랐다. 공립학교가 문을 닫는 날이면 DSA의 사회주의-페미니즘 위원회가 온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는 행사를 진행한다. 다른 일부 지부들처럼 피츠버그 DSA도 회원들이 자동차 브레이크 등을 무상으로 교체해주는 자동차 클리닉을 연다든지, 경찰의 불필요한 개입을 피하도록 사람들을 도우면서 지역사회로 조용히 스며들고 있다. 메리라는 이 지역 정비공이 회원들이 자동차에 숙련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DSA 지부들은 꾸준히 회의와 사교모임을 개최해 미국인의 삶 속에 유행처럼 번지는 개인의 고립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스바트는 “모든 것들이 매우 개인화되었고, 이것이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있다”라며 “사람들은 매우, 매우 외롭습니다. 자살률이 천문학적으로 증가했죠.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드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정치와 공동체 생활의 융합은 기독교 우파가 지지자들에게 제공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사회적 자본은 어떤 선거자금으로도 살 수 없다.

오카시오-코르테즈의 승리 이후, 펠로시는 사회주의가 민주당의 당론이라는 공화당의 공격을 반박했다. 수세대 간 “사회주의자”는 불명예로 치부되었고, 민주당원 모두를 향한 공격이었으므로 방어적 태세를 취한 펠로시를 비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오카시오-코르테즈 같은 지원자가 많을 것이고, 민주당은 이들을 환영해야 한다. 민주당을 가까이할 수 있는 단체로 재건하기 위한 작업에 이들의 젊음과 열정,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민주당 지도부가 원하든 아니든 그 젊은이들은 오고 있다.

다른 주들과 달리 펜실베이니아에서 주의회 의원은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아주 힘든 일이다. 썸머 리가 승리한 지 한 달 후 그녀를 만났는데, 리는 주 수도인 해리스버그에 입성해 배워야 할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신과 동료들이 민주당을 다시 만들 준비가 되었음을 자신했다.

리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우리가 하는 일로 뭔가를 보여준다면, 우리가 민주당을 재건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기득권에 맞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거운동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선거운동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실제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이길 수 있습니다. 펜실베이니아를 넘어 모든 곳에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강조했다.

 

미셸 골드버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더 네이션(The Nation)의 선임작가로도 활동했다.

 

목, 2018/07/05-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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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UN에서 폼페이오 국무장관, 헤일리 UN대사 그리고 강경화 외교장관 간의 회담이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트럼프와 김정은의 싱가포르 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상당히 많이 알게 됐다.

 

싱가포르 회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나

그동안 가장 큰 궁금증 중 하나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마주 앉아 어떤 이야기를 나눴냐는 것이었다. 또 다른 궁금증은 트럼프가 싱가포르 회담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싱가포르 회담의 공식 문서는 미국과 북한 양측이 서로 원하는 것을 균형감있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희망적이었다. 이런 균형감은 지난 십 년간 북미관계에서 매우 드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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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싱가포르 회담 이후 트럼프 행정부에서 흘러나오는 공식 발언은 지속적으로 북한을 패자로 취급하고 있다. 조셉 윤 전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갈루치 전 미 북핵대사는 CVID는 위험하고, 희망사항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발언에는 이전의 균형감이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의회와 백악관 보좌진들이 트럼프에게 압력을 행사해 싱가포르 회담의 이행을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트럼프는 북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폼페이오를 도와 싱가포르 회담을 준비했던 노련한 실무진은 2선으로 쫓겨났다. 트럼프에게 유용한 조언을 할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북한과의 약속을 어떻게 이행할지, DMZ으로 상징되는 전쟁상황을 어떻게 종결지을 것인지에 대해 미국은 한마디도 내놓지 않고 있다. 제재 완화와 같이 김정은에게 절실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렇다할 가이드라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 반면 폼페이오의 공식 발언을 보면, 여전히 제재를 강화하고, 외교적으로 북한을 고립시키려고 하고 있다.

지난 20년동안 미국의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없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트럼프도 협상장에게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미국의 주류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까지 폼페이오의 발언을 보면,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폼페이오는 트럼프에게 북미협상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고, 조금씩 진전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서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솔직하게 직언하지 못한 것이지도 모른다.

 

한국의 모호한 역할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재의 교착상황을 좌우의 관점, 또는 보수-진보의 틀로 파악한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더 근본적으로 시대변화를 정확히 아느냐, 모르느냐의 관점으로 파악돼야 한다. 혹은 정직하고 신뢰할 만한 전략적 외교를 하느냐, 아니면 공허하고 무능력한 외교를 하느냐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 고립탈출, 경제개발과 관련된 이슈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와 관련된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2009년, 오바마 행정부는 이전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을 답습함으로써 부시 행정부처럼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로부터 16년 후에 힐러리 민주당 대선 후보 역시 대통령이 되면 기존의 대북정책을 고수하겠다고 했다. 이럴 경우 한반도에서 미국의 역할, 중간자로서 남한의 역할은 모호해진다.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1990년대의 강력한 대북협상 전략은 확실히 북핵 개발을 억제했고, 북한 인권문제를 공론화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이에 비해 서울과 워싱턴의 강경보수파들은 오히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자극했고, 기존의 효과적인 정책을 무력화시켰다. 강경보수파의 무능에서 벗어나는데 한국은 10년, 미국은 16년이 걸렸다.

트럼프는 어쩌면 부시, 오바마, 힐러리라면 상상도 못할 협상에 성공할지도 모른다.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최상의 외교는 클린턴 행정부 시절, 미·북한 핵동결 협약(the Agreed Framwork)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이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공화당의 눈치를 봐야 하고, 그의 참모들은 북한을 상대했던 경험이 없다. 그래서 그저 윽박지르고, 협박하는게 전부다.

지난주 폼페이오와 헤일리의 기자회견은 트럼프 행정부가 과거의 실용적 외교 경험을 살릴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폼페이오의 무능은 미국의 국익을 손상시키고, 동맹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이란 협상에서도 볼 수 있다. 설사 트럼프가 북한과의 협상에서 변화를 추구하더라도, 그의 참모진, 그리고 의회가 반대할 것이다.

 

한국은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한국은 지금, 과거의 길을 답습하느냐, 아니면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으면서 한반도 문제의 주도적 관리자가 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미국의 많은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국이 후자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

지난 7월23일, 코리아타임(Korea Times)의 기고에서 스펜서 김은 이렇게 적었다. “포괄적인 평화협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관련자가 원하는 디테일을 담아야 하고,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한국, 미국, 북한) 3개국 중 누군가가 펜을 집어들고 사업계획을 짜야 한다. 이를 통해 한반도의 항구적 안보 구조가 세워진다면, 이 사업의 관련자들이 얻는 배당금은 매우 오랫동안 두둑할 것이다”

2000년 6월, 김대중과 김정일의 평양회담은 코리아 비즈니스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줬고, 관련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보여줬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이 (이번 협상을 통해) 일본인 납치인 문제에 대한 일본의 요구, 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저 역시 당신을 도울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당신을 돕지 못합니다”

현재 김정은은 핵개발 대신 경제개발을 선택했다. 미국이 여전히 제재와 압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이는 미국에게도 별 도움이 안 된다. 한국전쟁으로 한국이 위험에 처했을 때, 미국은 한국을 도왔다. 그로부터 65년 후, 미군 유해 송환이 이뤄졌다. 외교적 의미에서 지금은 입장이 바뀌었다. 이제 한국이 미국을 도울 차례다. 미국은 한국이 동맹국으로서의 역할을 통해 두 나라의 공동 이익을 지켜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막연한 기대와 희망의 시간은 끝났다. 지금 서울에는 풍부한 인적 자원이 있다. 강경화 외무장관은 미국과 UN 전문가이다. 해리 해리슨 주한 미국대사와 빈센트 브룩 주한미군 사령관은 미국에서도 인정받는 전문가들이다. 이런 인적 자원을 갖고 문재인 정부가 할 일은 명확하다. 로드맵을 만들고, 주변의 지지를 확보하라. 그리고 협상을 주도하고 결실을 맺어라. 앞으로 남은 시간은 3년 8개월 뿐이다. 2018-07-31.

일, 2018/08/0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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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타나고 있는 주요한 사회경제적 수치들, 일자리 창출능력 미진, 신생아 출산율 저하, 악화조짐을 보이는 양극화의 지표 등은 한국사회 시스템이 지속 가능하지 못함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혁명적인 개혁 조치가 없으면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세계은행, OECD 그리고 IMF 등 국제협력기구들 조차 한국경제의 추이를 염려하면서 여성의 사회참여율을 높이고 소득주도성장 정책 등을 통하여 노동소득분배율을 획기적으로 높여 내수 기반을 강화하라는 조언을 수 년째 반복하고 있다.

이는 자타 공인하는 소득주도성장 이론의 대가인 홍장표 교수가 경제수석으로 임명된 배경이기도 하다. 최저임금제 도입 등 소득주도성장의 효과는 적정한 정책과 결합하여 최소한 2-3년의 잠복기 이후에야 누운 S 자형태로 서서히 나타날 것이며 그 때까지는 상당한 고통과 후유증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정책적 준비는 뒤로 하고 일년도 넘기지 못한 채 경제수석을 관례처럼 수구적 행정관료로 교체하고, 미진하여 부족하지만 시민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한 재정개혁위원회 제안조차 기획재정부 책임관리들이 일방적으로 깔아 뭉개고, 기대를 모아 공정거래 위원장으로 취임한 인사는 자신의 무력과 무능함을 지적하는 시민사회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는 오만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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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이재용과 현대차의 정의선 등 후계자를 자처하는 인사들이 자신들이 다점주주로 있는 회사들을 급조하여 그룹 내 계열 기업으로 편입하면서 자본수익율을 지난 20여 년간 평균 50-60% 수준으로 유지하는 등 현대 산업사에 다시 없는 초유의 기록을 보유하자, 국제사회로부터 공개적인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파렴치한 내부거래와 정경유착, 사법적 과잉보호 그리고 공정거래위 무능과 야합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투성이인 이들은 여전히 한국 산업계의 중심인물로 되어 있다. 국민경제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굴지 재벌의 총수가 별세하자 경영능력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40세 아들이 별다른 저항과 견제도 없이 회장직을 이어받고, 온갖 추한 행실로 사회 비난의 표적인 된 대한항공의 총수일가가 여전히 뻔뻔하게 경영일선을 책임지고 있는 2018년 7월 현재, 적폐 중 적폐인 재벌들 지배구조의 개선을 위하여 문재인 정부와 공정거래위는 지난 일년간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되묻고 싶다( ‘대한항공을 국민의 기업으로’ 참조).

현안의 문제는 깊은 역사적인 뿌리를 갖는다. 그런데 이에 대응하는 문재인 정부는 지난 시절 관료들의 간교함과 재벌들의 이해에 갇혀 절대적 개혁의 기회를 놓친 채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 정부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처럼 땜질하듯 대증적인 처방으로 정치공학적 접근을 할수록 더욱 심각한 수렁에 빠져 들 것이다. 기왕의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치밀하게 강화하고 서민생활을 최우선적으로 지원하며 내수시장의 규모를 확장하는 데 가능한 정책적 역량을 집중하여야 한다. 여건이 어려울수록 길게 보면서 핵심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다른백년’은 긴 호흡으로 제3섹터 경제론을 한국사회의 미래적 대안의 하나로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이해를 돕기 위해 자동차의 원동력(prime-over)으로 비유를 들어보자. 현재 일반적인 자동차는 내연기관에 화석연료를 태우면서 발생하는 폭발력을 회전 에너지로 활용하고 제어하는 것으로 동력 시스템을 구성하고 있다. 지난 백여 년간 자동차를 구동시켜온 내연기관은 인류의 지혜가 집중된 기계공업의 정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동차가 생활 필수품이 되면서 편익성과 이동성은 크게 향상된 반면, 교통체증과 온갖 매연으로 대기오염과 기후변화 그리고 화석에너지의 고갈이라는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일부 미래학자들은 산업화 이후 인류의 최대 실수가 내연기관의 발명이라고 지적하면서 인류 멸망의 주요인은 내연기관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대응하여 테슬라 등 혁신기업들이 출현하면서 전기구동형 자동차를 시장에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전기 자동차는 배기매연이 없어서 대기오염이 없고, 내연기관에 비해 정비해야 할 요소가 적으며, 전기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하기에 급속히 시장에 보급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값싼 전기료는 화석에너지에 비해 세금이 낮다는 불공정한 조건에서 형성된 것이고 정비가 용이한 대신 차량가의 3-40% 를 차지하는 배터리 성능 문제로 5년이 지나면 교체를 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새로이 발전소를 세워야 하는 문제가 있다. 또한 전기 충전 시설을 새롭게 보급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에 봉착한다. 결국 전기차는 일시적이며 착시적인 해결책이다.

이에 대한 현실적 절충으로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함께 내장한 하이브리드 차량을 출시하기도 했다. 하이브리드 차량은 대용량의 배터리와 별도의 충전시설 없이 차량의 효율을 상당한 수준으로 높여 연료 소모를 줄이는 등 두 가지 방식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취하는 동시에 약점들은 보완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최근에는 수소에너지를 이용한 연료전지(Fuel Cell)동력이 개발되었다. 연료전지는 압축장입된 수소와 공기중의 산소를 촉매로 반응시켜 전기와 물을 만들면서 자동차를 구동시킨다. 수소를 포집하고 압축시키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화석에너지 또는 발전의 오염 요인에 비하면 매우 청정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현재의 기술과 시장수요로는 가격이 매우 높은 편이며 역시 수소를 충전시킬 인프라를 대거 도입해야 상용이 가능한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일반시민들이 손쉽게 선택할 만큼 인프라를 갖추고 보급이 일반화되면 연료전지의 가격도 저렴해진다는 가정에서 공기오염 등 기후변화의 요인이 없고 화석에너지에 의존하지 않는 미래형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면 개별적인 자가용 수요를 줄여가며 공유적 이동 수단을 개발하고 쓸데없는 사회적인 이동의 필요를 억제하고 연료전지의 적용을 유도하여 매연 등 오염의 원인을 줄이면서 기후변화를 막고 지속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 가야 한다.

 

국가, 시장, 그리고 시민사회

순수한 제1섹터인 국가중심의 계획경제는 소련의 붕괴로 실패작임이 판명되었다. 반면에 내연기관에 비유할 수 있는 제2섹타인 자본중심의 시장경제는 지난 2-300여 년간 상품과 서비스의 공급량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면서 인류의 물질 생활을 급격히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다.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이라고 부른 자본의 탐욕이 이제 정부의 규제라는 굴레를 벗어나 인간의 모든 영역을 대체하고 지배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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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섹터만의 경제운용은 과거 공황과 전쟁을 되풀이하는 재난의 역사를 만들어 왔고 무제한적 자원의 낭비와 환경 파괴를 가져오고 있으며, 현재도 극소수 독점으로 인한 지구적 규모의 빈곤과 양극화를 양산하고 있다. 시장기제의 적정한 분배기능과 효율의 제고라는 긍정적 역할은 자동차의 뛰어난 이동성에 비견할 수 있으나, 이와 결합된 자본의 탐욕은 내연기관의 매연처럼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결국은 인류 멸망의 주 원인이 되리라고 전망하게 된다.

가공할 공황과 광범한 빈곤을 경험하면서 서구사회는 제2섹터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대략 두 가지의 정책적 대안을 취했다. 케인즈 이론에 따라 정부개입을 통해 유효수요를 확대시키는 방식과 시장경제 성과의 일부를 복지정책에 투입하여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게 하는 사회안전망의 도입이 그것이다. 대륙형 사회적 시장경제는 두 가지 방식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자동차의 내연기관과 전기모터를 결합시킨 하이브리드 방식을 연상하게 한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리되 문제점을 보완하여 자본제적 시장경제의 지속기간을 연장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러나 내연기관과 전기모터 결합방식이 근본적으로 화석에너지가 야기하는 환경적 오염을 해결하지 못하고 장기적인 지속 조건을 형성할 수 없듯이,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도 슈뢰더의 2010 아젠다와 하르츠 방식의 노동개혁도 프랑스의 인간적인 시장경제론도 전일적으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 빈곤과 양극화를 양산하는 기본적인 방향을 전환시키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고 개인과 공동체라는 인간사회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대안으로 인정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다만 또 하나의 하이브리드 경제로 평가할 수 있는 중국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또는 인민집중적 국가자본주의는 아직 실험적 순항을 지속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높은 경제성장률은 초기 산업화의 진입 과정에서 흔한 일이지만 최근 국제기구가 발표한 중국의 빈곤율 1-2%의 수준은 소강(小康)사회로 진입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비핵화와 개방을 선언한 북한사회도 기본 방향으로 중국의 경험을 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연료전지로 비유할 수 있는 제3섹터의 경제 영역은 시장기제와 자본의 탐욕이 일방적으로 작동되지 않으며 정부의 개입 역시 가능한 제한되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참여 공간의 총합이다. 일반적으로 협동 조합과 마을 향토기업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으며 사회적 기업은 제2섹터와 중첩되는 지점이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작동할 수 있는 영역으로 작동의 기본 원리는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기본으로 참여를 통한 협업, 자발적 혁신과 기여를 통한 성과의 배분, 지속 가능한 조건에서 공유와 순환의 기제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성패 여부는 기존의 주류적 흐름인 제2섹터 시장기제의 흡인력을 버티어 낼 수 있는 자발적 다수의 조직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데 달려있다.

스페인의 몬드라곤, 이탈리아의 볼로냐 지역의 협동경제, 뱅쿠버와 오사카의 주민조합 등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유럽에서는 경제의 10% 수준을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아직 도입 수준에 머물면서 2012년 도입된 협동조합기본법 등에 힘입어 활성화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상기의 세가지 영역은 일방적으로 서로 무시되거나 제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대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핵심은 상호결합에 대한 방식의 문제이다.

기존방식의 맹점은 시장경제를 선두에 세우고 종속(직렬)적인 방식으로 정부가 조정적으로 개입하면서 사회적 경제영역을 장식품처럼 포장해 온 점에 있다.

지난 200여 년간 인류에게 풍요를 선사한 자본제적 시장경제는 이제 긍정적 역할의 정점을 지나 지구적 규모의 빈곤과 실업과 환경재난 등 엄청난 폐해를 발생시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흐름이 도처에 강력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다 !

 

정보사회의 도래

자본 수익률의 저하를 상쇄하기 위하여 부가가치를 추구하는 혁신의 과정에서 과학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지식기반이 점차적으로 자본을 압도하면서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지식기반 경제는 사적 소유의 자본과는 달리 역사라는 누적적 요소와 공존하는 사회라는 공간적 확장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협력과 참여라는 규범적 행위를 요구한다.

이에 더하여 금융자본의 초과이익 실현을 위하여 전 지구적 운용에 필요한 디지털 통신기술이 발전되면서 스스로 보편화되어 SNS 등으로 전세계인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내고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빅데이타 기술이 하나로 뭉쳐지는 초연결사회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여기서 기존의 인류사에 없는 엄청난 질적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기존 경제학에서는 상품과 서비스의 성격은 제로 섬(zero Sum)과 한계효용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제공된 상품과 서비스를 소유하면 다른 사람이 소유할 수 없고, 상품과 서비스의 효용은 한계적으로 작동하면서 양이 증가하면 비례적으로 시장가치가 떨어진다.

그런데 새로이 형성되는 지식과 정보의 사회는 나누어 함께 하면 더욱 힘이 세어지고,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현상이 발생하고, 독점과 사적 소유보다는 협력적 경쟁과 공유를 통해야 비로소 더욱 강력해지는 흐름과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과 노동이라는 양적 요소를 투입하는 것보다는 기술과 정보와 네트워크라는 요소들이 시스템적으로 규범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되어가고 있다. 다만 시스템적 네트워크와 기술의 독점이 강화되면 가공할 만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사회의 대부분 현안 문제는 이러한 미래적 지향의 흐름에 부적응하고 거부하며 역류하면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협력적 경쟁과 공유적 순환과 규범적 네트워크의 결합을 통한 혁신을 추구하기 보다는, 극심한 양극화와 소수로의 집중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독과점을 방어하고 주어진 기득권과 특혜에 안주하며 행정관료들과 사법체계는 이들에 기생하고 공공적 기제보다는 방어적 면책과 구차한 변명에 급급한 것이 한국사회의 현재 모습이 아닌가?

 

참여와 협력, 혁신과 순환의 제3섹터 경제

다가올 미래의 경제는 지난 200여년 시장을 지배해온 자본의 역할과 기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자본에 종속되어 수탈당하여 왔던 근육질 또는 반복적 관리 노동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 언급하였듯이 다양한 참여와 협력과 혁신과 순환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산업기술적 기반을 더욱 확장시키고 가속시키면서, 변혁적 관점을 지닌 정치적 대표체제를 형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시민적 합의를 통하여 나날이 눈부시게 누적되어 발전하는 제4차 산업혁명적 시스템을 여하히 합리적으로 운용하여 성과를 골고루 공유하는 데 달려 있다.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면 생산이 문제가 아니라 적절하게 소비해 줄 수 있는 수요가 핵심적 주제로 떠오르게 된다. 성장이 아니라 배분과 순환이 더욱 중요하게 부상한다.

이제 우리가 마주한 수많은 현안적 문제 해결의 핵심은 제2섹터인 시장을 중심으로 제1섹터인 공공영역과 제3섹터 부문을 종속(직렬)적으로 연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제각기 역할로 분리시키고 하이브리드 방식처럼 상호보완적이며 병렬적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한걸음 더 나가면, 정부의 역할은 축적된 과학기술과 지식에 기반하여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시장경제의 성과를 이제 막 새로이 시작되는 제3섹터의 영역으로 적정하게 옮겨 나르는 양수(pumping)의 몫을 담당해야 한다. 한마디로 무한한 일자리의 보고인 제3섹터 영역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다. 실제가격 기준으로 1-2 % 수준의 재산세를 누진적으로 강력히 추진하고, 일정액 이상의 상속증여세를 80-90%로 인상하며, 그래도 부족하면 부가가치세율을 올려서 필요한 인프라 구축의 재정을 해결해야 한다.

공공적 역할로서 양수의 내용은 1)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사회 안전망의 구축에서 시작하여, 2) 혁신적 협력기제가 작동할 수 있는 다양한 법과 제도를 도입하고 교육과 연구활동에 충분한 재원을 투입하면서 3) 중장기적으로는 기본소득, 기본재산(청년지분 할당) 그리고 복지청구권 등을 복합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되풀이하여 언급하지만 제2섹터인 시장경제와 제3섹터인 자율적 시민영역을 종속적으로 연계하여서는 안된다. 올곧게 인류의 미래를 향해서 새로이 배양하고 육성되어야 할 제3섹터는 이익만을 위한 경쟁과 효율 중심의 시장경제의 논리가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간 연대 위에서 자기실현이라는 인간의 열린 가능성을 위한 규범적 논리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제3섹터의 영역을 운영하는 공적 강제의 방식에 대하여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오스트롬 교수는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서’ 라는 저서를 통해 공동체 사회가 합의된 규칙을 만들고 평가와 감독의 체계를 형성하여 성과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면서도 기여도에 따른 보상제를 도입하고 규칙을 어긴 경우에는 성찰과 반성을 계기를 부여하되 시정이 되지 못할 경우 적정한 제재를 가하는 동시에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고 규칙 위반이 자주 발생하고 문제점이 빈번히 야기되면 다시 합의라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규칙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참여와 협력과 혁신이 작동하는 시스템 형성이 키워드인 셈이다.

대부분 인간은 시장경제에서 규정하는 것처럼 탐욕과 이기심의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가변적 실천적 존재이며, 이러한 가능성을 유도하고 실현해 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합의된 정치적 체제와 제도적 지향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재인 정부가 추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회경제 정책은 높은 정치적 지지와 명분을 기반으로 공공적 역할을 넘어서서 제3섹터가 확장될 수 있는 제도를 법적으로 제정하고 실천적으로 강력하게 금융 등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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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살고 있는 곳은 가난한 소시민 중심으로 만 여명이 수 백동의 아파트 주거형태로 군집하여 있는데, 해당 구청이 주도하여 아파트 사이로 흐르는 개울을 활용하여 십 수년간 ‘발바닥’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을 조성하여 왔다. 개인이 투자하여 개발하려면 수백억도 부족할 만한 수천 평의 대지 위에 갖가지 수목으로 천변에는 계절마다 온갖 꽃과 각양의 잎새와 들풀이 자랑하고 있다. 겨울은 겨울대로 눈과 어름으로 즐거움을 제공하면서 만여 명의 시민이 함께 즐기는 공원은 놀랄 만큼 자율적 질서와 청결을 유지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한 시간 가량 공원산책을 즐기고 있는 필자는 스스로에게 “이 정원은 온전히 내 것임과 동시에 수 만의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유하고 있다”고 속삭인다. 개방된 소유, 함께하는 공유로 필자인 나는 한국의 최고 부자들보다 더 부유함과 넉넉함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협력과 공유를 기본으로 하는 제3섹터 경제 영역의 놀라운 성과이자 기본적 성격이다.

시장경제의 순기능인 자원의 적정한 배분 역할과 효율적으로 성과를 제고하는 능력을 향상시키되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가설에 기초한 자본의 탐욕을 억제하고, 케인지안 경제론과 북유럽 복지정책의 실천적 경험을 기초하여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정의를 실천하면서, 이제부터는 자기실현을 향한 개인과 공동체간 참여와 협력과 공유의 새로운 시스템적 가능성을 실험하고 개척하는 제3섹터 영역으로 이동 전진하는 것이 온갖 문제로 신음하는 현존 인류의 미래적 과제이자, 양극화 및 빈곤과 청년실업 및 저출산 이라는 절체절명의 현안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사회의 유일한 출구이다.

이제 제3섹터 경제의 시대를 활짝 열어야 한다. 일자리와 행복과 희망을 만드는 작업이다.

화, 2018/07/1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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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미국과 서방의 주요 여론들은 헬싱키에서 있었던 미러 정상회담(통역만을 동반한 순수한 개인적 만남)에 대하여 비난과 경멸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심지어 공화당 주요인사들조차 트럼프에게 배신과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 내 진보포탈인 Moon of Alabama는 매우 독특한 시각으로 이를 재구성하고 있다. 키신저의 조언을 받은 트럼프가 미국 주도의 단극 체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을 상인적 감각으로 느끼면서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우며 미중러 간의 파워게임을 grand-theory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의 이러한 접근이 우리가 기대하는 북미간 평화협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7월 1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회담 이후 미국 내의 반응이 꽤나 재미있다. 언론은 이성을 잃어갔다. 마치 진주만 공습과 통킹만 사건 그리고 9.11테러가 모두 같은 날 일어난 것 같았다.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런데 누구와의 전쟁인가?

이러한 패닉의 이면에는 대(大)전략을 보는 상반된 시각이 숨어있다.

45분간 진행된 기자회견 (영상) 전문을 읽다가 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트럼프는 예전에 했던 말만 했다. 두 대통령이 진짜 무엇에 대해 이야기했고, 무엇에 동의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나중에 푸틴은 이번 회담이 예상보다 가치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비공개로 나눈 이야기이니 누설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부터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기타 여러 분쟁지역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두고 보면 이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진보주의’ 진영은 이번 회담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최근 뮬러 특검의 기소 결정은 회담을 방해하기 딱 좋은 시기에 이뤄졌다. 헬싱키에서 두 정상이 만나기 전 뉴욕타임즈는 트럼프와 푸틴을 애인 사이로 묘사한 짧은 코메디 영화 한 편을 리트윗했다. 동성애혐오적 요소가 있는 이 영상을 3주나 지나 한번 더 공개한 것이다. 이런 쓰레기를 게재하다니 그레이 레이디[1]의 수치가 아닐 수 없지만,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는 성공했다. 회담 후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반(反) 트럼프 인사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존 브레넌(John O. Brennan)은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남겼다. (@JohnBrennan – 15:52 UTC – 16 Jul 2018)

도널드 트럼프가 헬싱키 기자회견에서 보여준 연기는 이제 “중대범죄와 경범죄[2]”의 기준을 넘어섰다. 반역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는 멍청한 소리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푸틴 손바닥 위에 있다. 공화당 애국자들이여, 어디에 있는가???

존 매캐인(John McCain) 상원의원은 신랄한 성명을 발표했다.

… “지금까지 미국의 그 어떤 대통령도 독재자 앞에서 이토록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에 대한 진실을 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대변해 미국을 미국 답게, 국내외의 자유에 전념하는 자유로운 시민들의 공화국 답게 만드는 가치를 지켜내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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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일보

이 어리석은 자들은 트럼프의 대전략에 숨은 현실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트럼프는 핼퍼드 매킨더(Halford John Mackinder)의 심장부 이론을 알고 있고, 러시아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임을 알고 있다. 유라시아가 정치적으로 결속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 미국은 과거 영국이 그랬듯 해군력으로 결코 이들을 이길 수 없다. 트럼프의 반대자들은 카터(Carter)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을 역임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가 거대한 체스판(The Grant Chessboard)에서 언급한 중-러 동맹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체 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가 트럼프에게 크림반도를 포기하도록 조언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난 2015년 트럼프 본인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큰 그림과 러시아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주장 있다.

“…  푸틴은 오바마 대통령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아주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러시아가 중국으로 손을 뻗는 순간, 미국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왔습니다. 미국이 현재 진행 중인 석유 거래로 둘이 손을 잡았습니다. 우리가 둘이 손을 잡게 했다는 겁니다. 미국에게는 끔찍한 일입니다. 무능한 리더십 때문에 이들이 친구가 되었어요. 저는 푸틴하고 아주 사이 좋게 지낼 생각입니다. 아시겠죠? 우리에게 그럴 힘이 있다면 말이죠. 그리고 제재는 필요 없다고 봅니다. 러시아하고 아주 지낼 겁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많은 국가들과 잘 지내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 오늘보다 부유해질 겁니다.

세계에는 크게 세 곳의 지리적 권력 중심지가 있다. 흔히 ‘서구’라 불리는 영미/대서양권,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인 러시아로 볼 수 있는 매킨더의 심장부, 그리고 역사적으로 아시아를 다스려온 중국이 그들이다.

키신저와 닉슨(Nixon)의 가장 큰 정치적 성공은 중국과 소련을 떼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이 미국의 동맹이 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과 소련의 동맹은 끝낼 수 있었고, 미국은 동급최강,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당시 키신저도 이미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예견했다.

1972년 2월 14일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예정된 닉슨의 방중과 관련한 협의를 하기 위해 만났다. 닉슨의 역사적 중국 방문을 위해 이미 비밀리에 중국에 다녀온 키신저는 러시아인들과 비교해 중국인은 “그저 위험하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는 더욱 위험하다.”고 표현했다.

키신저는 나아가 “20 , 후임 대통령이 닉슨만큼 현명하다면 결국 중국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 쪽으로 기울 ”이라고 관측했다. 그는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의 반목에서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에 미국은 “이 세력 균형 게임에 매우 침착하게 임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중국이 러시아를 바로잡고 규율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방향이 뒤바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입장이 바뀌기까지 키신저가 예측한 20년이 아니라 45년이 걸렸다.

냉전 이후 미국은 20세기의 이념경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었다. ‘일방주의’를 마음껏 행사하며 러시아를 적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약속과 달리 나토(NATO)를 러시아 국경까지 확장했다. 이 세상 최고의 독보적인 권력이 되고자 했다. 동시에 중국을 세계무역기구로 인도해 폭발적 경제 성장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렇게 균형을 잃은 정책은 결국 큰 피해로 돌아왔다. 미국은 산업 능력을 중국에 빼앗기는 와중에 러시아를 중국의 품으로 몰아넣었다. 세계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매우 비싼 것이었다. 이는 2006년 미국 경제의 추락으로 이어졌고, 미국인들은 패권의 이점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트럼프는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찾는 동시에 중국의 점증하는 힘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이 상황을 역전시키고자 했다.

트럼프의 생각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브레진스키는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안보보좌관으로서 계속해서 중국에 닉슨/키신저 정책을 썼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대만을 무시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이 바로 그의 작품이다. 그는 여전히 미국이 러시아에 대항하여 중국과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켜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다. 중국과 가까이 지내면서 러시아도 혼자 남지 않으려면 이를 따르도록 하는게 미국에게는 훨씬 이롭다. 이런 구도일 때 미국은 전세계에 총체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준다.”

그런데 중국이 무슨 이유로 이런 계획에 참여한단 말인가? 어떻게 러시아를 ‘강제’할 수 있나? 그 길을 가기 위해 미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 (러시아를 바라보는 브레진스키의 시각은 항시 음울했다. 그의 가족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서부지역인 갈리시아(Galicia)에 살던 하부 귀족 출신이다. 소련이 유럽대륙 중앙까지 세력을 확장하자, 그의 가족은 폴란드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러시아는 언제나 적일 것이다.)

키신저의 견해가 좀더 현실적이다. 그는 미국이 혼자서 세상을 지배할 수 없고, 반드시 좀 더 균형잡힌 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극화된 세계 질서가 부각되는 지금 러시아를 미국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 균형을 위한 필수 요소로 보아야 한다.

키신저는 다시 한번 러시아와 중국의 분열을 위해 애쓰고 있다. 다만 이번에 부상해야 할 쪽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다. 미국은 러시아와 친구가 되어야한다.

트럼프는 키신저의 견해를 따른다. 러시아와 중국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한다. 그의 (옳은) 판단에 따르면 미국에게 장기적으로 (경제적으로) 더 위험한 쪽은 중국이다. 때문에 트럼프는 당선 직후부터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Peter Lee 목소리로 들어보자). 그렇기 때문에 북한을 중국의 손아귀에서 낚아채려는 것이고, 푸틴과는 사이 좋게 지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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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와 도널드 트럼프(사진: 한국일보)

그렇다고 러시아가 중국과의 유익한 동맹을 깨도록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행동, 특히 중앙 아시아에서의 행보가 러시아에게 장기적인 위험요소인 것이 사실이다. 중국의 인구와 경제력은 러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동안 한번도 러시아와 관계에서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시 신뢰를 얻기까지 수십년이 걸릴 것이다. 반면 중국은 약속을 지킨다. 그들은 ‘심장부’ 정복에는 관심이 없다.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군사력이 우월한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트럼프가 달성할 수 있는 최고의 결과는 러시아를 중립으로 만드는 동시에, 중국에 관세 및 제재를 부과하고 대만과 일본 등 반중 의도를 가진 다른 국가들을 가까이 하면서 중국의 경제력 상승에 맞서는 것일 듯싶다.

미국은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를 망쳐버렸다. 러시아와 우방이 되는 대신 그들이 중국의 손을 잡게 만들었다. 패권 세계화와 일방적인 전쟁이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 증명되었다. 미국인들은 그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미국은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트럼프는 이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세계는 결국 앵글로 아메리카, 러시아, 중국이라는 세 개의 권력중심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노쇠하고 분열된 유럽은 저물어갈 것이다.) 이 권력중심지들이 서로를 향해 전쟁을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주변부에서 다툼이 있을 것이며, 그 중심에 한국, 이란, 우크라이나가 있을 것이다. 중앙아시아와 남아메리카, 아프리카에서의 이해관계도 한 몫 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이 큰 그림을 이해하고 있다. 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기 위해 중국에는 맞서면서, 더 이상의 중-러 연합은 막아야한다. 이 그림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건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냉전시대 브레진스키가 러시아를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이 다시 권력을 잡게 해준 경제적 세계화만이 우리가 따라야 할 참된 길이라 여전히 믿고 있다. 미국 유권자 90%가 겪은 피해를 인지하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트럼프의 생각이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이번 기자회견에 대한 터무니없는 반응들을 보면 트럼프에 반대하는 힘이 여전히 강하다. 그들은 사사건건 트럼프를 방해할 것이다. 이 시점의 큰 위험은 이런 자들의 세계관이 다시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1] 뉴욕타임즈의 별명

[2] 미연방 헌법 제2조 4절에 대통령이나 부통령을 탄핵하는 이유로서 반역죄, 수뢰죄와 나란히 열거되는 죄

토, 2018/07/2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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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이범은 불광동 사람이다.

원래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지만(1957년생) 7살 때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이 동네에서 나왔고, 평생 이 동네에서 일하다가 이 동네에서 죽었다. 놀기도 이 지역에서 많이 놀았다. 주말이면 지인들과 불광역에 모여 북한산에 올랐고, 불광사 길로 내려와 길목에 있는 연신내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죽어서도 이 동네에 묻혔다. 그의 유골은 지금 은평구 진관동에 있는 구파발성당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그는 말하자면 민주화운동권이었다.

1976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외과를 입학한 이후에 1979년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하여 징역을 살았고,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시대에 1980년, 1985년, 2번 징역을 살았다. 그밖에도 여러차례 경찰에 붙들려 갔고, 구류도 살았다.

또 그는 출판인이었다.

1982년 결혼하고 생계수단으로 번역실을 시작했고, 출판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85년부터는 백산서당이라는 출판사를 인수하여 탄탄한 사회과학 출판사로 키웠다. 죽을 때까지 이 출판사에서 수백권의 책을 냈다. 그리고 본인이 여러 권의 책을 직접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이범은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다. 1990년 민중당이 창당될 때 정책실 차장으로 참여했고, 민중당 해체 후에는 1996년부터 나라정책연구회라는 정치단체에서 사무국장, 상근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범은 한편으로 시민운동가이기도 했다. 2001년 서영훈 한국적십자사 총재를 모시고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창립을 도왔고, 이어 서영훈 총재가 대표로 있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의 운영위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그리고 2003년부터 몸살림운동본부를 만들고 초대 연구소장, 연신내수련원장등을 하면서 몸살림운동을 전파했다.

이범은 자신의 시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좀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쉬지 않고 실천을 모색했다. 그는 58세의 젊은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불꽃같은 열정’과 ‘사심 없는 직선적인 삶’은 지금도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 있다.

 

학창생활과 학생운동

1973년 이범은 경기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한다. 시험으로 경기고를 들어간 마지막 세대였으니 당시로서는 꽤 수재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식들 교육을 서울 가서 시켜야 한다’고 상경했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부터는 재미없는 학교 공부와는 담을 쌓고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실존주의에도 빠지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정동교회에서 함석헌 선생께서 하시던 『장자』 강의도 들었다. 한때는 쇼비니즘적인 민족주의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때는 낮이고 밤이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잘 이해도 못하는 철학과 역사, 문학서적을 탐독하는 게 제일 큰 낙이었다.’(이범의 저서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국회의원 노회찬, 대안학교 이우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정광필, 언론인 고성국 등이 이범의 경기고 동기동창이었다. 경기고 동창 최만섭은 이범이 ‘머리를 박박 깎고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도서관에서 두꺼운 사상전집을 읽고 있는 진지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한다. 머리가 빨리 트였던 이 경기고 동창들은 함께 몰려다니며 박정희정권을 비판하는 연설회나 강연을 들으러 다녔고, ‘문제의 뿌리를 천착하기 위해’ 철학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1976년도에 이범은 고려대 정외과에 합격한다. 그러나 입학 후 무슨 사정에선가 1년을 휴학하고 1977년에 1학년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1년 후배 77학번들과 가깝게 어울려 지냈다. 이범은 고등학교 때 가입한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대학 입학 후에도 열심히 했는데, 그 안에 ‘도산연구회’라는 이념서클을 조직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2학년이 되는 1978년 6월 이범은 서클에서 광화문에 유신반대 데모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광화문에 나갔다가 현장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같이 도산연구회를 했던 정경대의 송광의와 친구 이승환 등이 이때 구속되었다. 다행히 이범은 단순가담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때의 경험이 이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이후 이범은 본격적으로 반독재 반정부활동에 뛰어든다.

 

지하신문 「소리들」과 두번의 감옥생활

78년 가을에는 고대 내에서도 선배 고광진, 천영초, 정경연 등의 시위가 있었다.

박정희정권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우던 이범은 그해 가을 광화문시위 때 유치장에서 만났던 백병규, 정태헌, 장동현 등과 함께 지하신문 「소리들」을 발간할 계획을 세운다. 77학번 백병규와는 1학년 말에 함께 그룹스터디도 했고, 2학년 초에 하숙도 함께 한 적이 있어 서로 의기상통하는 관계였다. 이범은 1년 선배인 김상복과 전체 기획을 의논하고, 구체적인 신문 제작과 배포 작업을 백병규 등 77학번 3명과 함께 했다.

제작은 원지를 철필로 긁어 가리방으로 인쇄하는 전통적인 방법을 썼다. 이렇게 해서 수백부를 인쇄하고, 배포는 고대신문 우편함을 열고 우편물을 수거하여 주소를 확인한 다음 그 주소로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다. 그밖에도 서울 시내와 학교 이곳저곳에 몇 부씩 뿌렸다.

지하신문이 학교와 정보기관에 들어가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 악명 높은 성북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의심가는 학생들을 한명씩 불러 취조하여 주모자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범은 사태가 험악하게 흘러가자 팀원들과 의논하여 지하신문 발간은 1호로 마감하고 등사기 등 관련물품은 모두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1979년 2월 지하신문 제작팀 한 사람이 시국재판에 참석했다가 정보과 형사 눈에 띄었다. 형사들에게 집을 털렸고, 집에서 유인물이 발견되었다. 결국 이범과 김상복, 백병규, 정태헌 등 5명이 모두 검거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징역 3년을 선고 받고 서울구치소에서 복역하다가 10.26으로 박정희가 죽고 그해 11월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직후 이범은 11월 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한번 감옥에 갈 위기에 처한다. 8.15 특사로 먼저 감옥에서 나왔던 백병규, 정태헌 등과 함께 YWCA회관에 갔다가 현장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붙들려 육군본부 보안사분실로 잡혀 간 것이다. 다행히 구속까지는 가지 않고 즉심에 회부되어 구류 29일을 받았다.

80년 서울의 봄 때는 복학생대책위원회에 참여하여 이승환, 백병규 등과 함께 활동했고, 한편으로 새로 구성된 학생회에서 신계륜 학생회장과 함께 학생회 실무직책을 맡아 활동했다.

5.17 계엄확대조치로 계엄군이 학교에 진주하고 일제검거령이 떨어지자 이범도 일단 피신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이범은 광주로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학살현장을 확인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학생회 활동과정에서 맡아 가지고 있던 돈을 광주시민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광주로 내려가는 차 속에서 검문에 걸려 연행되었고, 결국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게 된다.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7개월만인 그해 12월 석방되었다.

 

김철미를 만나 결혼하다

78년 이후 구속과 감옥생활을 거듭하던 중에 이범은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난다. 80년 포고령 위반으로 감옥 살이하던 중에 한 아름다운 여대생이 면회를 왔다. 이대 4학년에 다니던 김철미였다. 김철미 역시 이대에서 횃불회라는 서클에서 활동하고, 학생회에서 간부도 맡은 경력이 있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김철미는 78년부터 향린교회에 다녔는데 80년 무렵부터 이범도 이 교회에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만난 적은 없었던 걸로 김철미는 기억한다.

80년 이범이 구속되자 교회에서 옥바라지 할 사람을 찾았고, 김철미가 자원해서 책을 넣어주면서 옥바라지에 나섰다. 김철미는 이범의 친구 송광의에게 부탁해서 이범 어머니를 소개받고 가족과 함께 면회도 다녔다. 80년 12월 이범이 석방되어 나오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범 집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김철미를 며느리 될 사람으로 인정했다.

두 사람은 82년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한다. 두 사람이 신혼여행 가 있는 동안 그의 고등학교 절친인 노회찬과 최만섭이 홍제동 옥탑방 신혼방을 정성스럽게 도배해 주었다.

 

출판인 이범, 그리고 시련

이범의 출판인 경력은 1984년 고대 1년 선배 서원기 사장의 강권으로 백산서당 편집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 이전에도 생계수단으로 다산출판사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고, 금강기획이라는 번역실을 차려 번역에 종사한 적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출판일에 뛰어든 것은 이 때부터였다. 1년 후 1985년 서원기가 민청련 집행국장으로 가면서 이범이 아예 백산서당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시작한다.

이범은 출판사 운영을 통한 지식계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적극적인 한 분야라고 생각하고 전력을 다한다. 아내 김철미도 번역에서부터 편집, 교정 등 모든 일을 옆에서 도왔다. 그의 오랜 친구 이명식, 이승환, 고성국 등이 편집위원으로 책의 기획을 도왔다. 이승환은 『경제사 입문』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여 백산서당 살림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재화라는 필명으로 『한국근현대 민족해방운동사』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기도 했다.

백산서당은 이후 수백종의 책을 내면서 사회과학출판사 중에서도 손꼽히는 출판사로 자리잡았다. 『전공투』, 『청년이 서야 조국이 산다』, 『공산당선언』, 『철학의 기초이론』 등 수만권씩 팔리는 히트작도 여러권 냈다.

그러나 출판인으로서 시련이 찾아왔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동안 사회과학 출판계가 활기를 띠었다. 독재시기의 족쇄가 어느 정도 풀려 국가보안법의 법망 속에서도 공산권 저작들의 출판이 봇물을 이루었다. 이때 백산서당에서 북한의 공식출판물인 ‘주체사상 총서’를 입수하고 몇 개 출판사와 합동으로 출판하기로 약속했다. 총 10권 중 백산서당이 선두타자로 1-4권을 내기로 했다. 원전을 가져다 타이핑해서 1-4권을 1만여부씩 찍었다. 그러나 당국의 대처는 예상외로 신속하고 강력했다. 책은 모두 압수당했고, 사장 이범에 대한 구속령이 떨어졌다. 이 일로 이범은 몸을 피해 가까스로 구속은 피했으나 장기 수배상태로 들어갔다. 결국 1990년 공식적 대표로 되어 있는 김철미가 대신 구속되는 조건으로 수배에서 해제되었다. 이 일로 김철미는 7개월이나 감옥을 살았고, 이범은 이 일을 두고두고 미안해했다.

 

재야운동, 민중당, 공동선시민운동

출판사를 경영하는 바쁜 와중에서도 이범은 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1983년 9월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민청련이 창립되자 이범은 고려대 70년대 중반 학번을 대표하여 민청련의 기별대표조직에 참여했다. 그리고 고대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들어간 노동운동조직들과도 연계를 가지고 지원했다.

1985년 이범은 이른바 ‘다산·보임사건’에 연루되어 김상복, 고성국 등과 함께 구속된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는 전두환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용공조작사건의 하나이지만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산보임사건의 구속자들은 노동현장과 연결된 일종의 정치조직, 정당까지 내다보는 한 정파조직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당국의 발표는 완전 조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었다. 특히 그들의 발표처럼 간첩 활동을 한 친북조직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이범은 1심에서 7년, 2심에서 3년을 선고 받았고, 2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이범은 재야운동 뿐 아니라 정당정치 활동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총선을 앞두고1990년 이우재, 장기표, 이재오 등을 중심으로 민중당이 창당되었을 때 이범은 수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창당에 참여하여 정책실 차장을 맡았다. 그러나 막상 참여한 후에는 당 활동에 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 지도부와 당 노선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언쟁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주변에 그만두겠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범은 1992년 대선에서 백기완 대통령후보 선거활동까지 돕고 민중당을 떠났다.

1993년 민중당이 해체하자 이범은 민중당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른바 ‘민중당 우파’들과 함께 나라정책연구회를 만들고 사회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범은 이 연구회에서 발간한 월간 ‘21세기 나라의 길’ 책임편집위원으로 활동했고, 1996년부터는 나라정책연구회 사무국장,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고 독일이 통일되는 세계사적 대격변을 겪고 나서 진보운동 진영에서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범 역시 이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재정립하려는 나름의 치열한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정책연구회 활동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흥사단 운동의 대선배이면서 공동선운동을 이끌었던 서영훈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백산서당에서 『자유시민 서영훈의 세상읽기』, 『벽오동 심은 뜻은』 등 2권의 서영훈 선생 책을 출간했다. 이범은 서영훈의 생명질서사상에 감명을 받고 서영훈 선생의 공동선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1년에는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했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

이런 이범의 사상적 실천적 모색은 2003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다. 『한국은 그 한국이 아니다』(백산서당, 2003)가 바로 그것이다. 2002년 서울월드컵 열기가 한창 뜨거울 때 그는 한 선배의 소개로 전남 곡성의 한 암자에 들어가 20여일간을 머물면서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이 책에서 고등학교 시절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사상적 편력을 회고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생각하고 토론했던 주제들을 화두로 삼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제시했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서양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동도서기(東道西器)도 아니고 동도동기(東道東器)로 하자는 것이다 바로 탈구입아(脫歐入亞)가 우리 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버리고 서양을 목표로 해서 서양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세태를 비판하면서 한국의 깊은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긍지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한동안 맑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범 자신의 사상적 편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기도 했다. 그는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은 모두 뒤집어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상이 정확하게 맺힐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우리가 약소민족, 변방의 위치에서 벗어나 세계 문명을 창조하고 지구촌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평화의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 – 배워서 나눠주는 운동

2003년 어느 날 이범은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 병원을 찾았다. 특히 등과 허리가 아파 의자에 앉아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군데 병원을 옮겨 다니며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물리치료를 잘 한다는 김철을 소개했다. 김철은 이범의 굳어 있는 근육들을 풀어주고, 몸을 펴는 몇 가지 운동을 권했다. 김철 말대로 몸을 펴는 운동을 꾸준히 하자 못견디게 아픈 통증이 신기하게 씻은 듯 사라지고 건강이 돌아왔다. 이범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듯한 경험이었다.

이범은 이런 체험을 혼자만 누릴 수 없고 이것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범은 김철을 모셔와 출판사가 있는 홍제동 2층에서 운동지도를 받았다. 그러다가 김철과 의논하여 아예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에 수련원을 내기로 했다. 사무실을 얻는 데는 정병문, 전종덕, 박성규, 송종환 등 골목산악회 선후배들이 십시일반 일조를 했다. 이범은 김철을 도와 수련원 안에서 수련생들을 지도하는 한편 몸살림 수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전파하는 데 진력했다. 2005년에 『몸의 혁명』, 2006년에 『김철의 몸살림이야기 상,하』 등 3권의 책을 김철의 이름으로 출간했다. 그리고 2006년쯤에는 연신내에 수련장을 마련하고 초대 수련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몸살림운동을 전국적으로 전파하기 위해 저술활동과 더불어 활동사범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09년 이범은 그동안의 경험과 연구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다. 『몸 펴면 살고 굽으면 죽는다』(백산서당, 2009)가 바로 그것이다.

이범은 한동안 이 몸살림운동에 전력을 투구했다. 선후배 지인들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소문을 듣고 이범의 수련원을 찾아왔다. 이범은 자신을 찾아온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성심껏 몸을 풀어주고, 그들에 맞는 운동을 찾아 권유하고, 경과를 체크해줬다. 때로 몸을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직접 집으로 방문하여 치료도 해주었다. 몸 치료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범은 암이나, 중풍환자들까지도 치료해 효과를 확인했고, 구완와사나 크론병 같은 희귀병에도 자신의 치료법을 적용해 효과를 보았다.

이범의 혼신을 다한 노력으로 몸살림운동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몸살림도장이 전국적으로 설립되었고, 미국, 영국에까지 전파되었다. 이범은 이 운동의 전도사가 되어 몸을 돌보지 않고 전국을 누비며 강연을 다녔다. 이렇게 몸살림운동이 확산되면서 향후 운영방침을 놓고 김철과 의견차이가 생겼다. 이범은 이 운동을 국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동호회 중심의 비영리 운동단체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처음에 이범을 도왔던 지인들조차도 이범에게 이 운동이 지속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영리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지 않느냐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이범의 생각은 확고 했다. 그는 자신의 방침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몸살림운동의 진로를 둘러싼 김철과의 의견 차이는 결국 조직 내의 갈등요소가 되었다. 결국 이범은 숙고를 거듭한 결과 2008년 자신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비영리단체로서 몸살림운동 동호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2011년 사단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사)몸살림운동협회로 조직을 정비했다. 그리고 기존 ‘몸살림운동’과 상표권 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2013년 ‘몸펴기생활운동’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2008년 동호회 창립취지문을 보면 당시 이범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몸펴기생활운동은 사람들이 허리를 바로 세우고 당당하게 가슴을 펴면 건강해진다는 간단한 원리에서 출발한다. 자세만 바르면 적어도 큰 병에는 걸리지 않고 살 수 있게 된다. 설사 큰 병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몸만 펴면 쉽게 나을 수 있다. (중략) 몸펴기생활운동은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을 배워 이웃에 살고 있는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몸살림운동에서 몸펴기생활운동으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은 생각만큼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승을 버린 패륜아라는 등 이범에 대한 갖은 악선전과 비방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이범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제동을 걸었다. 술수를 모르는 고지식한 이범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결국 조직적으로 분리해 나와 ‘몸펴기생활운동’이라는 동호회 운동을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범의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술도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이 마셨다. 그런 와중에서도 자신을 찾아오는 몸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몇 시간씩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도움주기를 했다. 이런 무리한 생활은 이범의 건강을 급격히 무너뜨렸다.

 

골목산악회

1990년대 초 이범이 사는 불광동 지역에 민주화운동권 선후배들로 골목산악회라는 산행모임이 조직되었다. 서울대 73학번 정병문, 전종덕, 오세구 3명이 시작했는데, 얼마 후 이범과 우리교육 박성규 사장(서울대 72학번)이 합류했고, 거기에서 알음알음으로 이영창(서울대72), 이명식(고대 76), 나상억 교수(서울대 78)등이 합류해 1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 아침 7시면 불광사 앞에서 만나 북한산을 등반하고 12시쯤 내려와 불광사 골목길 골목식당에서 뒷풀이를 했다. 이범이 산악회 총무를 맡았는데, 산행날 새벽 6시면 회원들의 집에는 이범이 회원들을 깨우는 전화벨소리가 어김없이 울렸다.

토요일이 휴일이 되면서 골목산악회 모임날짜도 토요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이는 시간도 오후 2시로 변경했고, 5시쯤 하산해서 뒷풀이를 했다. 시간을 바꾼 것은 뒷풀이가 너무 길어져 술 마시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목산악회는 한때 회원이 40-50명, 산행에 모이는 사람이 15-2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2003-4년 쯤부터는 민청련산악회가 여기에 합류해서 한 달에 한 번씩은 함께 산행했다. 골목산악회는 여전히 매주 어김없이 모였다.

2005년 4월경 남북관계가 호전되어 금강산 세존봉 산행이 가능해지면서 골목산악회 뒷풀이에서 우리도 금강산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금강산지역 남북협력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이병호(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가 주선하고 민청련동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와 총무 한영수가 금강산 등반대 조직에 나섰다. 처음에는 가볍게 버스 한 대에 30-40명 정도 갈 예정으로 시작했으나 이 소문이 퍼져 너도나도 신청하는 바람에 결국 신록이 푸르른 2005년 5월, 138명이나 되는 대군이 버스 4대에 나눠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범과 그 아들 재승군도 여기에 동승했다.

이 산행에서 필자는 평생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우리 등반대는 전날 금강산호텔 숙소에서 자고 아침 일찍 금강산 등산에 나섰다. 잔뜩 흐리고 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가운데 산행을 시작했는데 점차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면서 우리 눈앞에 금강산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4시간 만에 세존봉 정상에 오른 우리는 끼리끼리 삼삼오오 흩어져 준비해간 점심식사를 했다.

나도 아내와 함께 도시락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5월의 빛나는 신록이 갑자기 군청색 푸르죽죽한 색깔로 변했다. 옆에서 아내가 놀래서 준비해간 우황청심환을 먹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쩔줄 모르고 있는데, 구세주가 나타났다. 등반대 중에서 젊은 20대 청년 둘이 다가와서 내 손을 잡아 옆의 너른 바위로 옮겨 눕게 했다. 그리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신록의 색깔이 서서히 원래의 색깔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위기를 넘기고 무사히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아마도 전날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산행하면서 가벼운 뇌졸중이 왔던 게 아닌가 생각되었다. 뜻밖에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큰 신세를 졌는데, 이들이 알고보니 이범의 몸살림 연신내수련원에서 수련하는 이범의 둘째아들 재승군과 또 한명의 또래 청년이었다. 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정말 큰일날 뻔했다. 이범의 몸살림이 내 생명을 구했던 것이다.

골목산악회와 민청련산악회의 합동산행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계속되고 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이범과 함께 오랫동안 골목산악회를 같이 하며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규 사장은 이범을 ‘순수한 사람’, ‘원칙을 정하면 타협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범의 최초 감옥 동기였던 백병규는 그를 ‘대륙풍이 있는 사람’이고, 소박하고 품이 넓은데다 세상과 사람의 근원을 천착하는 사람으로 평한다. 친구 이승환은 그를 바둑으로 치면 포석이 강한 ‘선이 굵은’ 친구였고, 지적인 탐구가 왕성하고 죽을 때까지 사상적 실천적 탐구를 계속했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그의 아내 김철미는 이범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잔머리가 없고, 2번 3번이 없고, 항상 직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속정이 깊고 항상 가족과 아내를 걱정했던 사람, 눈물이 많아 영화를 보면서도 잘 우는 사람으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다

이범에게는 그 이전부터 신병으로 부정맥이 있었다. 그런데 몸펴기생활운동이 독립하던 2013년 무렵부터는 그 증상이 심해졌다. 자다가 깜짝깜짝 놀랬고, 과묵한 그가 아내 김철미에게 자주 고통을 호소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몸살림운동을 하면서부터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을 해오던 터라 이범은 자가치료와 운동을 할뿐 병원은 아예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 몸에 대한 연구와 치료를 하면서부터 서양의학에 대한 불신이 깊어져 아내와 가족들이 아무리 권해도 병원 신세를 지려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성모병원 의사로 있는 친구를 찾는 정도였다.

그러다 2013년 말 어느 날 이범은 심장발작을 일으켜 갑자기 쓰러졌다. 2014년 3월 경 병세가 심해져 가족과 친구들이 나서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며칠 안가 이범은 병원을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한사코 집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게 낫다고 고집을 부렸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고 심부전으로까지 발전하자 8월에 가족들이 모두 나서 통사정해 양길승 원장이 있는 녹색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이미 병세는 이미 회복이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이범은 원래 비종교였으나 그 무렵 새로 교황에 취임하여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좋아했다. 그래서 친구 최헌걸이 보내온 교황 화보집에서 교황 브로마이드를 떼어 병상 머리에 붙이게 했다.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때때로 간성혼수 상태에 빠지는 상황이 되자 이범은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세례받기를 청했다. 친구 이승환에게 부탁하여 수원교구 홍창진 신부를 모셔와 약식세례를 받았다. 친구 송광의가 대부를 섰다. 그리고 2-3일 후 2014년 10월 27일 오전 11시 10분 이범은 아내 김철미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골은 화장하여 구파발성당 요셉관에 안치하고, 그 중 일부를 지인들이 그가 자주 다니던 산행길 옆 바위, 산사, 바다 등에 뿌렸다. 자연 속에서 편안히 안식하라는 바램이었다.

수, 2019/10/09-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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