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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의 지정학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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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위의 지정학적 배경

admin | 금, 2019/10/04- 20:15

편집자 주:

다른백년의 기획칼럼 기고자인 이만열(미국명: 페스트라이쉬)교수는 기후행동국제회의와 유엔총회 등 계기로 모국인 미국을 방문하여 여러 인사들과 인터뷰를 나누고 있다. 아래의 내용은 전 국무장관 파웰의 수석 보좌관과 함께 홍콩의 시위사태에 대한 미국의 배후 역할 등에 나눈 이야기이다. 인터뷰 일단의 내용을 통하여 트럼프 미행정부의 동아시아에 대한 정책결정 과정과 취약점을 느껴볼 수 있다.


아래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Emanuel Pastreich)와 조지 부시 대통령시절 온건파로 알려졌던 파월 전국무장관의 수석 보좌관을 지낸 래리 윌커슨(Larry Wilkerson)의 인터뷰 내용이다.

페스트라이쉬: 비록 최근 홍콩시위가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느끼는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한 불만에서 힘을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젊은 층의 불만이라는 측면에서만 설명될 수는 없다. 미국이 홍콩의 현재 정치위기 상황에 개입 혹은 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래리 윌커슨: 물론 우리(미국)는 베네수엘라에서 그랬고,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처럼 이 사건에도 홍콩에 개입하고 있다. 나는 2002년 베네수엘라를 여행했고 거기서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당시 대통령이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를 타도하려 노력했는지를 목격했다. 이후에도 미국은 베네수엘라의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지금은 니콜라스 마두로(Nicolas Maduro)정권의 전복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베네수엘라에 실패와 더불어 고통만을 가져다 주었을 뿐이다. 미국은 제재를 통해 수십만 베네수엘라인을 처벌하고 그들 경제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에만 성공했다.

언론은 절대로 베네수엘라 사태와 홍콩을 비교하지 않지만, 우리는 홍콩의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친다고 설쳐대며 활발히 활동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우익적인) 국립기부재단과 같은 수상쩍은 기구들을 분명히 파견해 놓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1956년 헝가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젊은이들을 탄압에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싸움이 일어나고 탄압이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비에트의 탱크들이 1956년 헝가리에서 그 반란을 진압할 때 미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국립기부재단 및 그 밖의 NGO들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존재가 CIA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홍콩 시위에는 헝가리 사례와 다른 측면이 있다. 우리는 적(예건데 중국)에 대한 은밀한 작전 수행을 위해 소셜 미디어 및 생생한 뉴스보도라는 보다 고도화된 접근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어떻게 반응하고, 궁극적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 대해 매우 신중히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의 조치가 대만에 거주하는 2,300만 명의 사람들에게 확실한 신호로 받아들여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진핑 주석이 이 사태를 잘못 처리할 경우 대만이 중국 본토에서 완전히 등을 돌릴 것은 자명하다.

페스트라이쉬: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작전을 이끌 만큼 정교함을 지닌 인물이 아니다. 트럼프는 개인적으로 중국에 트럼프 카지노를 몇 군데 더 열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워싱턴에서 이 움직임을 추진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윌커슨: 최근 해임당한 존 볼턴(John Bolton)이 지금까지 모든 사항을 관장했다. 존 볼턴은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중국과 기타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일련의 작업들을 시행했고, 이 과정에서 그는 “고문여왕”으로 불리는 지나 해스펠(Gina Haspel) CIA국장의 도움을 받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소수 인물들이 모든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페스트라이쉬: 그 말은 존 볼턴이 떠나면 미국의 대외 정책에 실질적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

윌커슨: 지난주 크리스 헤이스(방송)의 쇼에서 언급했듯 볼턴이 떠났어도 바뀐 건 거의 없다. 어마어마한 전쟁광이 국가안보 보좌관직에서 떠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지위의 영향력을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이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 시절엔 단 8년 동안 무려 6명의 보좌관이 거쳐갔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자리가 대통령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리차드 닉슨(Richard Nixon)과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 사례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각각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와 외교정책 관련 권력을 나눠 가졌다.

대통령이 내린 결정을 확실히 실행할 최고의 방법은 국가안보보좌관을 갈아치우는 것이다.

트럼프는 여러모로 레이건과 다르다. 따라서 마이크 폼페이오부터 지나 하스펠(CIA 국장), 스티븐 밀러(트럼프 정치고문), 스티븐 므누신(재무장관)에 이르기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은 아마도 계속해서 그들의 안건을 밀어붙일 것이다. 트럼프에겐 그들 모두를 한 손에 쥐고 흔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존 볼턴이 떠난 것은 잘된 일이다. 유능하면서 동시에 악하기도 한 인물이라는 온갖 소문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한 그는 오직 악하기만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애런 버(전 미국 부통령)는 영리하면서 악했지만, 볼턴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 그런 악인이 요직에서 해고된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를 그 자리에 앉힌 무능한 대통령은 여전히 그대로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

페스트라이쉬: 홍콩 폭도들 대부분은 대만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심지어 대만 현 정부에 의해 부추겨지고 있다. 나는 차이잉원 총통이 최근 ‘아메리칸 리전(American Region)’과 나눈 대화 내용을 알고 놀랐는데, 차이 총통이 실제 시민들의 우려를 논리적, 체계적으로 해소하기보다는 중국 전체를 악의 세력으로 묘사하는 극단적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1980년대 이후 대만 정치에서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그 발언은 근시안적이라고 본다. 대만 총통의 이 같은 발언은 오히려 많은 중국인들이 대만을 서방 극우세력의 꼭두각시로 보도록 부추길 것이다.

윌커슨: 천수이볜(Chen Shui-Bian) 대만 전 총통은 2000년대 초반에도 가끔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차이 총통이 이런 표현에 가장 잘 반응하는 아메리칸 리전(우익 매체)에 연설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녀는 자신이 연설할 수 있는 다소 한정된 청중 명단을 영리하게 이용했다. 볼턴은 그녀가 비비 네타냐후(Bibi Netanyahu) 총리처럼 미 의회 합동연설을 하길 바랐을지 모르지만 트럼프 행정부에는 중국과 대만에 관한 한 완전히 미치지 않은 인물이 한 두 명은 남아있다.

차이 총통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발언은 중국뿐만 아니라 아메리칸 리전과 미국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된 것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그녀가 신중하고 잘 정돈된 표현으로 발언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당신 말처럼 기후변화 같은 실존적 위협에 대해 내세우며 전세계를 대상으로 발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익적인 특정 청중들에게 이 같은 발언은 완전히 헛되게 들렸을 것이다.

페스트라이쉬: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이 당면한 암울한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 시위에 동참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위 지도자라 불리는 인사들이 펜스(Pence) 부통령과 볼턴(Bolton) 전 보좌관을 만나면서 기후 변화가 홍콩에 미치는 영향, 홍콩 내 과도한 부의 집중(세계의 모든 도시 중 가장 심각한 실정), 홍콩 문제에 대한 엘리트들의 무관심에 대해 항변하지 않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슈들이 논의에서 제외된 이유는 무엇인가?

윌커슨: 이러한 현상은 아주 오래도록 이어져 온 것이다. 사람들은 선정적이고, 극적이며, 위험한 눈앞의 현안들에 관심을 보이는 대신 그들 가까이 있는 중요한 문제들은 곪게 만든다.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어떤지 봐라. 트럼프 부자 감세든 무역 관세든 모두 그의 정치적 기반을 무자비하게 응징하는 경제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로 대 웨이드(Roa vs. Wade) 판결을 뒤집고 기독교 기도를 다시 백악관으로 가져오겠다고 약속하는 한 이런 것들에 거의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홍콩 시위대는 그들이 서 있는 지구가 병들어 고군분투하다 그들이 사는 동안에 파괴될지도 모르는데, 하늘 위 별들을 향해서만 손을 뻗고 있는 것이다.

페스트라이쉬: 군사예산 법안에 대한 간단한 논리도 있다. 그 많은 돈이 중국과의 전쟁 준비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된다면 어떤 정부 관료들이라도 중국과 대립해야 한다는 제도적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윌커슨: 대만을 얘기하는 것인가 미국을 얘기하는 것인가? 둘 다인가?

페스트라이쉬: 미국의 주요 예산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국방비로, 현재 공식적으로 7천5백억 달러이며 이 국방예산으로 개발된 값비싼 시스템들은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윌커슨: 엄청난 규모의 미국 국가안보 예산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 보훈처, 국토안보부, 에너지부의 핵무기 관련, CIA포함 국방부외 정보예산, 국가정보국장 및 통계국장에 투입되는 예산은 1조3천억 달러에 달한다. 이 같은 예산으로 조장된 위협들은 여러 면에서 자기충족적 예언을 형성한다.

냉전 동안 일어난 일을 되돌아보고, 예산이 어떤 식으로 핵무기 및 재래식 무기의 경쟁을 이끌었는지 그리고 예산이 매번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야 한다. 중국 상대의 군사 및 경제 전략을 뒷받침하도록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붓는 것은 궁극적으로 전쟁에 대한 추가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페스트라이쉬: 그렇다면 어떻게 이 긴장과 갈등의 근원을 가지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든 행사를 조직하고 홍콩과 전 세계의 지방정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면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실제 이슈들, 즉 기후 변화와 경제 군사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독창적 접근 방식이 있을 지도 모른다.

윌커슨: 우리는 뭔가 긍정적인 것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이슈에 대한 논의를 촉진하기 위한 노력이 어느 정도 효과를 가져올지는 의문이다. CIA의 노력 (MI6/영국 정보부도 마찬가지)에 필적하거나 그를 능가하는 자산(돈,사람, 조직력)을 갖추고 있지 않는 한 더 현명하고 똑똑하며 보다 관련 있는 대화를 끌어낸다고 해도 그들을 뛰어넘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의욕을 꺾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단지 이런 노력들을 조직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페스트라이쉬: 그러나 홍콩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정책이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우리는 정책을 세워야 하고, 그 정책은 건설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정책이 더 효과적인 정책인가?

윌커슨: 우리는 조지 부시(George H.W. Bush) 행정부 및 냉전 종식 이후에 취했던 포지션으로 돌아가 평화적 경쟁을 위해 전략적 의도를 가진 신중한 판단을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평화와 경제의 연대적 통합이어야 한다. 우리는 국제 범죄, 기후 변화, 현재 전 세계적으로 7천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난민 문제 및 단일 국가가 다루기 어려운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일본 및 한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인도와 같은 국가들과의 관계를 확대하면서, 즉시 이용할 수 있지만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군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반드시 평화 및 평화적 경쟁이어야 한다.

페스트라이쉬: 미국 지식인 중 우리가 함께할 미래에 대한 심도 깊고 의미 있는 토론을 위해 홍콩, 이나 대만, 상해 또는 북경을 방문할 사람들이 많다. 그 학자들이 일반 시민들과 함께 공통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중국의 지식인들을 참여시키기 시작하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기후 변화, 사회경제적 문제 및 사이버공간의 미래에 대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다면 미디어를 긍정적인 메시지들로 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윌커슨: 나 역시 그런 움직임이 환영 받을 거라는 데에 동의한다. 또한 이 지혜를 이해하고 있는 훌륭한 리더들이 대통령직, 국가안보위원회, 국무부 및 재무부를 채운다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페스트라이쉬: 현 정부가 그늘진 곳에서 외교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다른 나라의 기반을 흔드는 은밀한 활동을 끝내고 문화적 연대로 젊은 층의 진정한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윌커슨: 첫째로, 현명한 새 행정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 이해하는 새로운 의원들이 있어야 한다. 또 중국을 신 냉전(new Cold War) 시대의 적국으로 규정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는 새로운 미디어가 필요하다. 물론 그리고 나서 이 대화를 진행해 나갈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시민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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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ICC 국제형사재판소는 유엔 결의와 국제사회의 요청에 따라 대규모 민족학살을 방지하고 전쟁 중에 빈번한 반인권적 비인간적 범죄행위를 추적 조사하고 처벌하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발족된 국제 기구이다. 십 수년 전부터 미국의 아프칸 침공과정에 발생한 수많은 전쟁범죄 행위 중에 몇 명의 피해자가 고발해오면서 ICC는 수 년간 이를 추적 조사하였고 명백한 증거와 문건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볼턴은 작년부터 ICC에게 조사행위를 중단하도록 온갖 협박과 경고를 보내 왔으며, 급기야 지난 주 조사단이 미국의 가해자를 면담하려 입국을 신청하는 과정에서 폼페이오는 이를 불허한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중국과 북한 등을 민주주의 원칙과 인권의 이름으로 맹비난해온 미국 자신이 바로 반인권적 비인간적 전쟁범위를 옹호하면서 “미국과 동맹(이스라엘)의 주권과 자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국가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조폭스런 범죄국가 미국에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기대하는 일은 구걸행위와 다름이 없는 것 아닐까 ?


최악의 인권 유린자들이 자행하는 전체주의적 행태의 냄새가 풍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금요일의 언론 브리핑에서 새로운 비자 발급 제한에 대해 발표했다.(사진: U.S. State Department)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금요일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과 주요 동맹국 인사의 전범행위를 조사하거나 해당 혐의로 기소하고자 하는 국제형사재판소(ICC) 인사의 비자를 철회하거나 발행을 거부한다는 내용을 밝히자 인권 보호 운동가들은 분노를 표현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뢰인을 괴롭히고 있고 문서자료 또한 충분한 전범 행위의 재판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우회하려는 전대미문의 시도입니다.” – 자밀다크와르, 미국 시민자유연맹.

금요일 아침 폼페이오가 기자들에게 확인한 이러한 움직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반인권적인 범죄들과 전쟁범죄 혐의를 밝히려는 국제형사재판소의 노력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움직임이었다.

미국 시민자유연맹 인권 프로그램의 감독자인 자밀다크와르는 해당 결정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미국 시민자유연맹은 2003년부터 2008년 까지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 구금과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들인 칼레드 엘 마스리, 슐레이만 살림, 그리고 모하메드 빈 사우드를 대변하고 있다.

다크와르는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의뢰인을 괴롭히고 있고 문서자료 또한 충분한 전범 행위의 재판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우회하려는 전대미문의 시도입니다, 최악의 인권 유린자들이나 자행하는 전체주의적 행태의 냄새가 풍기며, 이는 또한 심각한 인권 유린을 심판할 정의를 원하는 사람들, 검사들, 그리고 판사들을 겁주고 보복하려는 뻔한 노력입니다.”라고 밝혔다.

휴먼라이프 워치의 국제 재판 담당자인 리차드 디커 또한 해당 결정을 “재판소를 괴롭히려는 터무니없는 행동이며 미국의 행위에 대한 정밀한 조사를 방해하려는 공작이다.” 라고 밝혔다. 또한 그는 국제형사재판소의 회원국들에게 “공개적으로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호소했다.

국제 앰네스티 미국 지부장 다니엘 발슨은 그저 “인권 보호의 시계를 되돌리는 데에 혈안이 된 행정부가 국제형사재판소와 국제 기구에 가한 또 한 차례의 공격일 뿐이다”고 언급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비자 제한은 “가장 심각한 수준의 인권 유린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하는 강력한 도구” 이다.

하지만 국제 범죄자들을 겨누는 대신, 트럼프 행정부는 시선을 국제형사재판소로 돌렸다. 국제 형사재판소는 국제법에 의거하여 창설된 공정한 사법기구로서, 침략, 반인류적 범죄, 전쟁범죄, 학살 등을 증명하고 기소하여 국가적 책임을 확실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의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제법상 범죄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위한 정의마저 해치는 것입니다.” – 다니엘 발슨, 국제 앰네스티 미국지부.

발슨은 이번 비자 규제가 “인권 침해를 가볍게 여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문화를 보여주며, 국제 형사재판소의 조사를 방해하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정의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제법상 범죄의 희생자들과 생존자들을 위한 정의마저 해치는 것.” 이라고 밝혔다.

폼페이오의 발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국가 안보 보좌관이자 오랫동안 국제형사재판기구를 비판해 왔던 존 볼턴의 재판소 인사에 대한 제재 위협 이후에 나왔다. 볼턴은 지난 9월 이후 국제형사재판소가 미국 민간인 혹은 군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해 계속 조사하는 형사재판기구 인사에 대한 제재를 언급한 바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볼턴의 맹비난에 이어서, 폼페이오는 지난 금요일 미국이 20년 이상, 공화당 정부와 민주당 정부를 막론하고, 국제형사재판소의 회원국이 되기를 거부해 왔음을 밝히며, 그 이유로 “광대하고 무책임한 기소 권한이 미국의 자주권을 위협한다”는 점을 들었다.

폼페이오는 또한 “재판소가 종국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국인을 고소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며,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동맹국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우리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한 일에 대해 부당한 기소를 당할 공포 속에 살지 않도록 보호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다”고도 밝혔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이러한 비자 제한 조치는 국제형사재판소가 이스라엘을 포함한 우리 동맹국의 인원을 쫓지 못 하게 하는데 쓰일 수도 있으며, 해당 정책의 시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고도 전했다.

 

Jessica Corbett

Common Dreams의 전속작가

화, 2019/03/1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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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서방 언론을 통하여 알려진 보도 내용보다 실제 ‘노란조끼’ 운동의 규모는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많은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아래의 성명은 코메르시에서 벌어진 시위에 대하여 파리 시위의 중심에 있는 그룹이 홍보체제를 갖추고 조직적 양상을 띠우면서 발표한 성명의 일환이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노란 조끼’에 대한 일방적 폄하 보도와 내용이 자못 다르다는 점에 유의한다.


차도의 로터리, 주차장, 광장에서 집회 및 다양한 시위를 하고 있는 우리 ‘노란조끼’는 코메르 시에서 활동하는 ‘노란조끼’ 동지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고 다수의 시위 대표단을 단결시키는 ‘대규모 집회’을 위해 2019년 1월 26일 27일에 모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선언 동영상).

우리는 11월 17일부터 가장 작은 마을에서부터, 시골에서 가장 큰 도시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폭력적이고, 부당하고, 더 이상 참기 힘든 사회에 맞서 싸워왔다. 우리는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우리는 감당하기 힘든 높은 생활비, 불안정 및 가난에 맞서는 저항의 깃발을 든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의 가족들 및 우리의 아이들이 존엄하게 살기를 원한다. 오늘 세계는 단 26명의 초(超)억만장자들이 인류의 부를 절반이나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다.

이제 가난이 아닌 부를 나눠 갖자! 사회적 불평등을 끝내자!

우리는 지금 즉시 우리 모두를 위한 급여와 복지 혜택, 수당 및 연금의 인상 및 주거, 건강, 교육, 무상 공공 서비스에 대한 무조건적인 권리를 줄 것을 요구한다.

우리가 매일 로터리를 점령하고, 행위와 시위를 준비하고, 우리가 모든 곳에서 논의하는 것은 모두 그러한 권리를 얻기 위함이다. 우리는 ‘노란조끼’를 입고 지난 세월 우리가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위해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일어설 것이다.

정부는 어떤 대응을 취하고 있나?

정부는 우리를 진압, 경멸 및 폄하하고, 우리를 불구로 만들고, 눈을 멀게 하고, 부상을 입히고,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총기류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써 사망자와 수천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형벌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새롭게 제정된 소위 이른바 반 훌리건 법은 단지 우리가 시위를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우리는 법과 질서라는 이름의 위력 혹은 폭력단체로부터 비롯되었는지에 상관없이 시위자들에 대한 모든 폭력을 비난한다. 어떤 것도 우리의 행동을 억지로 막을 수 없다. 잘못된 것에 대한 항의는 우리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이다. 법과 질서의 위력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면책특권을 없애야 한다. 탄압받고 있는 모든 희생자들을 대한 사면을 선포하라.

국가적 논의를 운위하는 것은 지저분한 속임수이며, 이는 사실상 우리가 토론하고 결정하고자 하는 의지를 착취하는 정부 홍보 캠페인이다. 우리는 TV 혹은 마크롱이 계획한 ’보여주기식’ 원형테이블이 아닌 다중 집회로 우리의 장소인 로터리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해 전진한다.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에게 아무런 대우도 해주지 않는 것도 모자라 그는 이제 우리를 파시스트 및 외국인 혐오 폭도라고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언급과는 오히려 정반대이다.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 주의자, 동성애를 혐오하지도 않으며, 우리는 서로 협력하는 사회를 구축하기 위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함께 해 나간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는 토론의 다양성에 대한 강점을 지니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개의 집합이 그들이 원하는 바를 자세히 설명하고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 및 재정 정의, 근무 조건, 환경 및 기후 정의 그리고 차별의 종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장 논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전략적 요구와 제안 사항 가운데, 우리는 모든 형태의 빈곤해결, 제도 변화(국민 투표, 선출된 공무원의 특권 제거 등), 생태학적 전환(연료 부족, 산업 공해 등),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들에 대한 평등 및 포용 (장애인, 남성과 여성 간 평등, 노동자 계층의 이웃들, 시골, 해외 영토들에 대한 방치 종결)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우리 ‘노란조끼’는 수단과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행동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동지들에게 법률을 존중하고 이의 집행(경찰서에서의 경찰 폭력에 관한 법률 12, 13, 14 등)을 인정하는 범위에서 로터리 점유, 경제 봉쇄, 대규모 파업을 2월 5일부터 계속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 작업장, 교육기관 및 그 외 모든 곳에서 위원회의 구성을 촉구하며, 이를 통해 파업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매우 세부적인 사항들로부터 형성될 수 있다. 이제는 문제를 해결하자!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행동하자!

민주적으로, 자율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인 방식으로 우리 자신을 조직하자. 대규모 집회는 우리의 요구와 우리의 행동방식에 대해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단계이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단결하자.

“마크롱은 사임해야 한다! 시민들의 힘은 자신들을 위해, 그리고 시민들에 의해 지속될 것이다”.

이것이 코메르시에서 열린 동지들의 대규모 집회에서 제안된 요구이며 앞으로 지역에 위치한 입법기관을 통하여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것이다.

 

William Mallinson교수의 불영번역

 

수, 2019/03/0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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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해설:

2015년에 진행된 이 인터뷰 내용은 세가지 의미에서 소개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신향촌건설 운동의, 흥미진진하면서도, 시대적 역설이 잘 드러나는, 초기 역사와 일화를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당시 장쩌민 주석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배석한 회의에서 원테쥔 선생이 삼농문제를 직보하여, 중국 정부의 주요 정책의제로 받아들여지게 된 장면은 상당히 극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동시에, 실제 중국 정부가 이를 받아 2005년부터 실행한 ‘신농촌건설’이 여전히 하드웨어적인 인프라 투자, 즉, 도시의 생산과잉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자 ‘발전주의’에 기반한 실천인데 반해서, 그에 앞서 진행된, 신향촌건설 운동은 농민과 청년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문생태주의적인 실천이라는 것은, 당대 중국사회가 삼농문제를 받아들이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당시, 중국 정부의 신농촌건설은, 한국에서는 비판적으로 거론되는, 새마을운동을 상당히 참고했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결국, 원톄쥔 선생은 삼농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였음에도, 막상, 주류 사회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향촌건설운동은 20여년 가까이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으며, 이 글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량슈밍향촌건설 센터는 아직도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이 조직은 아직도, 베이징 교외의 매우 허술하고 영세한 시설속에서, 젊은 이상주의 청년 활동가들의 열정과 몇몇 선도적 민간/국제 기금의 지원으로 어렵게 운영되고 있다. 중국 NGO와 자선단체의 주류를 이루는 관방 혹은 대기업이 지원하는 거대 단체들의 지원을 통한 안정화는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시진핑 정부의 ‘향촌진흥정책’이 보다 소프트웨어적인 관점으로 이행함에 따라서, 여건이 다소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대규모 자본이 투하되는 여러 정책 사업들에 신향촌건설 운동에 속한 풀뿌리 조직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몇몇 기층 지방정부와 협력하는 실험적인 사업들을 제외하고는 제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역으로 지나치게 주류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일부 참가자는 운동진영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은 20년에 걸쳐 다양한 배경과 입장을 가진, 수많은 참여자들이 등장하면서, 참가방법도 그만큼 폭이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간난고투를 피할 수 없는, 순수한 민간사회의 운동노선과 사회적 자원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영향력이 큰 주류 대중운동사이에서의 선택에 긴장과 고민을 늦출 수 없는 것은,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중국의 교육과 청년문제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국 교육은 한국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매우 ‘신자유주의 체제하의 동아시아적’인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특히, 이 인터뷰가 진행된 2015년보다 훨씬 심각해진, 2020년 현재, 대졸자들의 취업난, 학벌지상주의와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학력에 의한 계급분화문제 등이 있다. 최근, 급증하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우울증, 경쟁지상주의에 기반한 학교 폭력, 매우 이기적이고 원자화된, 명문대학 엘리트들의 행동 양태를 보면, 중국 일선一線도시의 청년들은 한국의 동시대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자조적으로 한탄하던 암울한 시대의 문턱에 이미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80년대 출생한 대졸자들은, 폭등한 집값 때문에, 졸업직후, 거주하는 도시에 아파트를 마련했느냐 하지못했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중산층 진입여부가 갈라지게 됐다. 당연히, 90년대 이후 출생자라면, 애초에 자력으로 집을 구매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짐에 따라, 결국 부모의 경제 능력이 계층을 나누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주로 삼농의 관점으로 제도권 교육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 제시 됐는데, 실제로, 중국에서도 고등교육 전단계에서는 소위 ‘대안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현실은 별수 없이, 주류사회에서의 경쟁에 몰입하거나, 유학을 선택하는 이들이 더 많다. 원톄쥔 선생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향촌의 자연과 전통문화가 기반이 된, ‘자연교육’ 등을 보다 보편적 해결책의 방향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세번째, 원톄쥔 선생이 열망하는, 탈엘리트주의와 대중민주주의 추구,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이 신향촌건설의 사상적 노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상적 경향은 젊은 시절, 10여년에 걸친, 그의 하방(상산하향) 경험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현대 중국 사회의 격변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경험을 개인적인 비극과 고난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자양분으로 삼아, 현실에 기반한 지식과 활동으로 승화한, 몇몇 당대 중국 지식인들의 모습은 인간의 성장에 필요한 중요한 경험들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청년지식인들이 성장지상주의에 물든, 중국 주류 엘리트사회의 흐름을 좇지 않고, 신향촌건설 운동에 투신해, 이상을 좇아 분투하는 모습도 여기서 배운 바 적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총서기는 2017년 중국공산당 19대 보고에서 향촌진흥전략을 추진함과 동시에 ‘일동양애一懂兩愛 (농업을 이해懂하고, 농민과 농촌을 사랑愛하는)’ 인재의 육성을 천명했다. 감개무량한 일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국가의 향촌진흥전략을 관철함에 있어서, 농민대중과 협력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는 일을 우리가 이미 수십년해왔기 때문이다. 향촌건설운동을 통해 길러내고 삼농문제에 이미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는 우수한 인재들이 이 시기를 맞아서, 생태문명체제개혁의 선봉에 서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낡고 병든 현재의 교육체제안에서 이런 인재들을 키워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서구 분과학문의 교조주의와 학벌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의사과학적 형식주의가 유지하는 제도권 교육체제는 실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의 산물이고 여전히 겉만 번드르르할 뿐이다 ! 그러니, 향촌진흥의 앞날은 여전히 가시밭길이다.

 

1. 청년 자원활동가들이 열어가는 농촌지원하향운동의 시대적 배경

2001년 새로운 세기가 열리면서, 나는 (장쩌민)총서기가 주재하는 삼농문제 좌담회에 참석할 것을 통보받았다. 회의석상에서 총서기에게 직접 삼농문제를 보고했다. 그리고 중앙이 농업정책 방향을 바꿔 삼농정책을 중시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나는 비교적 젊고 지위가 낮은 편이었기에, 더 단도직입적으로 주저없이 발언할 수 있었다. 나는 농촌의 형세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고, 삼농문제가 갈수록 악화되어 간다고 내가 기탄없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중앙의 리더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당시 총서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직접 책임지고 당신이 제기한 문제를 정치국에서 토론하겠소”. 나중에 중앙은 우리가 90년대부터 계속 외롭게 목소리를 높여온 삼농문제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이 삼농문제가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정책기반이 된 배경이다.

<그림 1> 2004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과 국무원은 매년 1호 문건에서 삼농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내어 놓고 있다.

원래 중국 정부는 90년대초부터 대략 10년간, 서방의 농업정책과 사상을 참고해서 농업문제에 임해왔다. 방향이 다르니, 방침도 다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90년대 농업정책을 비판하면서, “눈에 숫자만 들어오고, 마음속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라고 표현해왔다. 삼농문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긴 했지만, 여전히 ‘농업’을 일순위로 놓고, ‘농민’은 돌아보지 않았다.

삼농의 첫자리에는 바로 농민이 와야 한다. 중국이 장기적으로 진정한 사회의 진보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농민조직화이다. 왜냐하면, 농민이야말로 중국의 원주민이고, 중국 인민의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농민의 생산, 생활과 자연생태의 결합은 매우 밀접한 것이고, 농민의 문화적 실천은 언제나 일종의 다양성의 원칙을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이야말로 삼농중 첫째자리에 놓이게 된다. 마음속에 사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이 근본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농민이 지켜온 농업문명을 진흥시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와는 다른 방법이다. 과거에는 농업생산만을 중시했다.

두번째가 농촌이다. 실은 농촌의 지속가능성을 이야기하려면, ‘농촌소멸’과 같은 극단적인 주장을 반대해야 한다. 만일 농촌이라는 그릇이 없어지면, 우리가 오늘날 이야기하는 농업경제, 생산 그리고 농민이 문화전승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림 2> 원톄쥔이 편집장으로 일했던 <<중국개혁 (농촌판)>> (2002) 잡지는 신세기 향촌건설운동의 플랫폼과 선전기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이 세가지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룰 때, 형세가 안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농의 삼위일체적 지속가능성이 바로 농업의 지속가능성이다.

2001년부터, 중앙은 삼농문제를 주요 의제로 받아들이고 2005년 중국 공산당 16차 전당대회 이래 신농촌건설을 중요한 국가전략으로 삼았다. 이것은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고, 우리는 이런 기회를 이용해,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향촌건설을 재개했다. 향촌의 부흥이라고 부를만하다.

“마을(촌락)주의”는 1894년 청일전쟁 패배이후 장지엔張謇이 난통南通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실험지역을 만들고 실천할 때 내놓았던 구호이고 바로 향촌건설의 기본 이념이다. 민국시절 지식인들도 이를 신조로 삼아 1920~30년대에 농촌으로 내려갔다. 이 흐름에는 거대한 국제적 배경도 있다. 영문으로 번역하면 rural reconstruction인데 향촌 혹은 농촌의 재건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나중에 국민당이 대만으로 건너가서 역시 이 개념으로 대만에서 농촌부흥을 꾀하고, 농촌부흥위원회라는 국가 기구를 만들게 된다.

우리는 2001년부터 향촌건설을 재개하면서, 향촌재건, 향촌부흥, 향촌건설 대신, 향촌문명의 부흥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백년 운동사를 이어받기 위해, 최종적으로 향촌건설이라고 부르게 됐다. 또 민국 시절의 운동과는 차별화를 두기 위해 신향촌건설이라고 불렀다.

<그림 3> 중국개혁 편집장 원톄쥔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중앙정부에 호소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상경한 농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02년).

당시의 대학생 청년 자원활동가들이 농촌지원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1년인데, 바로 중앙이 이미 삼농문제 개념을 받아들였던 그 시점이다. 하지만 각 지역과 부문은 아직 이를 소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반응이 뜨거웠다. 농민문제, 농촌문제와 농업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빌어, 우리는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농민들과 마주하고 협력할 것을 권했다. 삼농문제를 해결하려면, 삼농에 복무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중국 사회의 인민들이 그 흐름을 받아들이게 된다. 만약, 소수의 지식인들만 현실을 비판하고, 소수의 각성된 청년들만이 이에 호응한다면, 이는 소수만이 참여하는 소수의 일에 머물뿐이다. 일단 21세기 초에 전국민이 삼농문제를 인정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낼 때만, 규모를 갖추고 지속가능성을 가진 사회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것이 향촌건설운동이 21세기초에 다시 시작된 배경이다.

2001년 다시 시작된 향촌건설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맥락 혹은 주요한 내용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이미 많은 청년 자원활동가들을 농촌으로 보내, 농촌의 조사, 연구, 지원 활동에 참여하게 한 것이고, 사회적으로 ‘신하방(상산하향)운동’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 과정속에서, 키워낸 인재들이 천천히 젊은이들을 농촌으로 보내, 자신을 단련시키고 스스로 농촌의 우수한 인재로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서구적 모델을 차용하는 대학들은 이런 식으로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다.

<그림 4> 제1기 중국향촌건설교육, 스태프 (오른쪽: 류라오실劉老石, 중간: 치우졘셩邱建生)들과 농민이 함께 찍은 사진 (2003년 1월, 베이징).

 

2. 청년 지식인의 농촌지원 사명

2001년 신향촌건설 운동이 재개된 이래, 20세기 초반의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활동가들은 농민을 움직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는 농민들이 조직화하여 스스로 협상을 할 수 있는 지위를 갖추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서만, 농민들은 사회계약의 당사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농민조직이 없으면, 의견이 분산돼, 농민 자신의 이익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한편 그 상대방인 사회의 다른 주체들도 수많은 각각의 농민과 계약을 맺을 수는 없다. 즉, 효율이 너무 떨어져서, 의미있는 사회적 계약관계를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시장경제는 계약이 기초가 되고, 이것을 신용경제라고 한다. 시장경제조건하에서 신용사회를 만들게 되는데, 농민이 조직화되지 않으면 이것의 성립이 불가능해진다.

<그림 5> 2003년 겨울방학기간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학생 농촌지원조사연구 교육과정 (앞열의 왼쪽 두번째: 류라오실 왼쪽 아홉번째: 치우졘셩, 세번째열 오른쪽 아홉번째: 원톄쥔).

그리하여, 신향촌건설의 주요목표중 하나는, 농촌에 내려가 기층 농민들의 조직화를 돕는 것이었고, 이렇게 생겨난 농민조직들이 당시에 협동조합을 만들어 냈다. 이 과정은 정부에서 협동조합법을 제정하기 훨씬 전에 이루어졌고, 그 목적은 시장경제가 요구하는 계약관계를 성립시키는 기본적인 조직기초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런 주류의 관점에서 시작했지만, 우리는 당연히 농민들을 움직여야 했다.

다시 문제가 생겼다. 누가 농민을 움직일 것인가 ?

1980년대이래, 우리는 지속적으로 대학생들의 농촌방문 활동을 조직해왔다.

<그림 6> 2003년 1월 류라오실이 서남지역의 농촌지원방문단의 간부로서 농촌방문활동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나는 당시 농촌정책수립분야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내가 소속된 팀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고무하는 것이었다. 특히 청년학생들을 조직해서 농촌으로 보내고, 농민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농촌의 조사연구를 진행하면서, 현황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또 한가지는, 청년의 열정과 능력을 활용해, 농민을 돕게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통해 크든 작든 농촌의 발전을 촉진하게 하고 싶었다.

80년대이래, 중앙의 농촌정책중 주요한 업무중 하나가 수많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내려가 지원을 하는 활동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당시 내 상사는, 나중에 내 박사논문을 지도한 두룬셩杜潤生 선생이었는데, 그는 중앙재경업무 영도소조의 일원이었고, 동시에 중앙농촌정책 연구실의 주임이었다. 그는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었는데, 노년에 접어든 혁명의 선배로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들의 주요한 임무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보내는 것이다. 만일 이를 성공시킨다면, 그렇게 청년학생들을 보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업적이다” 그때 두선생의 마음속에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80년대의 농촌정책은 상대적으로 유효했고, 농민들에게 환영 받았다. 그 당시의 1호문건을 지금의 1호문건보다 농민들이 더 좋아했던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지식인 청년 학생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서, 현황과 민심을 제대로 살필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90년대에 들어와서 상황이 바뀌었다. 서구의 모델이 농업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도입됐다. 농민의 권익과 농촌발전문제는 경시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청년학생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내겠다는 중앙의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21세기를 맞아, 중앙이 다시 삼농문제를 강조하기 시작한 이래, 다시, 청년학생들의 하향농촌지원활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이어서 국무원영도하에, 이 흐름을 지지하고, 공개 서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청년들의 농촌 지원 활동을 격려했다.

이때, 다시 농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서, 스스로의 협상지위를 제고하며, 사회계약 관계를 안정시키고,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경제사회기초가 되도록 하기 위해, 누가 다시 농민들의 조직화 문제를 도울 것인가 ? 그래서 우리는 다시 대학생들을 훈련시켜 농촌으로 보내고, 80년대 농촌정책부문의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지식인,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가서 삼농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독려했다. 그래서 농민조직화를 위해서 반드시 청년학생들이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림 7> 2016년 농촌지원하향, 제8회 여름 캠프.

<계속>

 

2015년 8월에 진행된 인터뷰내용으로, 2020년 동방출판사에서 출간된 <<향촌필기:신청년과 향촌의 생명대화 鄉村筆記:新青年與鄉村的生命對話>>라는 저서에 수록됐다.

 

김유익

금, 2020/11/06-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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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브레튼-우드 회의에서 케인즈는 Bancor라는 초국적의 화폐를 사용하는 국제관리기구(int’l clearing house)를 설립을 제안하였는데, Bancor라는 화폐개념은 연구동료인 슈마허 교수와 함께 1940-1952년간에 국제무역과 금융결제의 수단으로 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케인즈가 대표로 참석한 영국의 제안은 미국의 거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Greenback”은 미국달러 지폐에 대한 별칭이다

이는 미국이 강력한 대국으로 가장 많은 금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선진국가들의 경제력 절반을 차지하는 제1의 채권국가이면서 무역흑자를 가장 크게 내는 나라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미국이 제안하는 국제통화기금(IMF) 설립과 페그PEGG(주요 통화들에 가중치를 부여하여 평균치를 결정하는) 방식을 도입한 고정환율제도가 도입되었다.

IMF는 국제간 거래를 관리하는 기구의 역할을 맡게 되었고, 미국은 17%(현재까지도)이상의 지분을 지닌 대주주국가가 되었다.

국가 간의 환율은 금과 연동된 달러에 기반하면서 이는 명시적으로 미국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는 것을 의미하면서, ‘Greenback은 금과 동일하다’는 국제적 지위를 확보했다.

이로써 모든 국가들은 미국달러(The Greenback)를 무역거래와 부채상환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고, 이후 상품을 선적하고 관리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해결하면서 국제무역과 해외투자의 효율은 제고되었고 경제성장의 촉진을 가져 왔다. 국제기축통화로서 달러를 보유한 미국은 국제적 강대국으로 지급 불이행의 염려가 없이 국제자본시장에서 원하는 만큼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정부의 채권은 국제금융자산 시장에서 가장 선호하는 상품이 되었는데, 이는 액면가치와 이자율을 미국달러로 상환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달러는 지구에서 가장 안전환 통화로 간주되었다(현재까지도).

만약 중국이 소유하고 있는 1조 달러어치 미국채권을 매각하고자 하면, 미국이 할 일은 채권을 구매하는 나라들에게 지급할 달러를 인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의 후유증으로 미국의 달러가치가 떨어지고 이자율이 오르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며, 이는 국제 금융시장과 세계경제에 재앙이 되겠지만, 어찌하든 미국은 채무에서 해방되어 있는 국가인 셈이다. 반면에 중국은 평가절하된 Greenback을 손에 쥐게 되거나, 미국에 대한 채무부담을 효과적으로 줄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이 1980년대에 일본의 엔화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에 미국은 플라자합의라는 명분으로 일본 엔화를 절상시키도록 강압하여 달러로 이루어진 직접투자가치의 33%를 축소시켰다. 미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부채 역시 같은 비율로 줄어들었고, 일본은 그만큼 가난해진 셈이다.

미국은 모든 정권을 통하여 제재대상 국가들에게 기축통화라는 수단을 특권으로 악용하여 왔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대통령인 미국은 자신이 제제의 대상으로 삼은 이란과 거래를 지속하는 유럽의 기업들에게 SWIFT(국제결제창구)와 같은 달러기반의 결제 플랫홈을 통하여 성공적으로 위협하였다. 이러한 협박은 궁지에 몰린 이슬람공화국(이란)의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고 유럽 국가들의 사업기회를 잠식하였다.

최근 사례로는 중국인민은행과 홍콩자치행정부에 대한 제재를 둘 수 있다. 홍콩에 대한 중국본토의 국가안전법 확대적용에 대하여 홍콩자치행정부가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사용하는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기축통화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의 달러를 기반으로 설립된 국제기구들(IMF와 세계은행 등)과 금융제도들을 통제하고 국제간의 금융거래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더욱이 채무국가들에게 워싱턴 컨센서스(1989년에 영국경제학자인 J. Williamson이 명명했다)의 채무제공조건으로 경제불황에도 재정긴축을 강요하고, 무조건적인 자유무역을 강요하며, 공공자산의 민영화를 강제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시아에서 남아메리카 그라고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채무국가들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빌린 채무부담이 오히려 증가하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채무국가들은 경제회복을 위하여 재정적자의 운용 또는 재정지출의 확대를 금지하면서 취약한 경제는 승수적으로 더욱 어려움에 빠져들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재정수입이 줄어들고 이에 따라 현재의 채무를 갚기 위해서 더 많은 채무를 빌려야 하는 “채무의 함정” 순환에 손쉽게 빠져들게 된다 (편집자: 이에 더하여 채무상황은 반드시 평가절상된 달러로 해야만 하는 이중의 불평등이 작동한다).

이렇게 미국이 경제와 금융의 권력과 기축통화국의 특권을 악용하는 것에 대하여 중국의 전직 인민은행장(Zhou Xiaochuan)이 국제 기축통화로서 달러 대신에 IMF의 특별인출권을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Zhou은행장의 제안은 미국이 개발국가들의 독자적인 경제개발과 외교정책의 권리에 제재를 가하는 미국의 횡포를 방지하자는 점에서 합리적이다.

그러나 미국이 여전히 IMF와 세계은행의 지분을 17% 이상 소유하면서, 현재의 정책 방향을 수정하는데 필요한 특별조항인 85% 이상의 결의조건을 요구하는데, 이를 저지할 수 있기 때문에, 특별인출권이 새로운 기축통화의 후보가 될 수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따라서 중국과 주요 경제권은 함께 협력하여 달러와 미국의 영향아래 있는 IMF 및 세계은행과는 독립된 별도의 새로운 국제통화방식을 설정해야 한다. 새로운 통화의 가치는 협력하는 회원국가들의 가중치평균(페그방식)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회원국가들은 경제의 규모에 따라 무역과 금융의 결제를 위한 신용한도의 할당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느 회원국가의 상황이 신용한도를 넘어서는 자금지원이 필요한 경우에,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부채의 함정’을 방지하는 선에서 추가적인 채무제공이 가능해야 한다.

미국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과제이다. 이로써 미국의 간섭과 방해를 받지 않는 안정되고 자유로운 국제적 경제질서와 금융시스템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출처: Asia Times on 2020-07-10.

Ken Moak

지난 수십 년간 아시아의 여러 유수대학에서 경제이론과 국제정치에 관련하여 화제의 저명한 강연을 진행하였고, 현재 Asia Times의 편집진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 ‘중국경제의 굴기와 국제사회의 충격’을 출간하였다

월, 2020/08/0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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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20년대 이후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독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뒷마당’으로 전락할 처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이미 미국은 1823년 먼로 독트린 선언으로 북미 이남의 아메리카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20세기 이후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라틴아메리카는 없었다. 쿠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신식민지가 되는 과정이 독립과 함께 신속하게 진행되었으며, 조금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카메라를 보며 ‘한국식(?)’ 인사를 하는 쿠바의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2018. 07).

쿠바의 독립은 1898년에 이르러서야 가능했으니 스페인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셈이다. 1860년대 이미 세계 설탕 공급량의 3분의 1을 생산하며 미국과의 교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주요 교역국이 이제는 스페인이 아닌 미국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의 은행가들은 쿠바의 독립전쟁이 한참이던 19세기 말 전쟁의 혼란을 틈타 설탕 밭을 모조리 사들이며, 철, 니켈, 망간 등과 같은 광업 산업까지 매점, 쿠바 경제를 장악해갔다.

이로써 섬의 경제를 독점한 미국에게 이제 스페인을 아메리카에서 몰아내는 일은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기실 쿠바의 독립은 미국이 스페인을 상대로 치른 미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완성되었으니, 카리브해 섬의 독립은 이제 미국의 ‘승인’을 필요로 했다. 독립 직후 제정된 쿠바 헌법에는 이른바 “플랫 수정안”을 추가하며, 이제 미국은 쿠바 공화국을 내정간섭 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고, 신식민지의 시대를 열었다.

쿠바 경제를 장악한 미국 자본가들은 섬의 토착 지배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새로운 방식의 착취경제를 이식해 나갔다. 수출 단일 작물인 설탕 산업은 미국의 독점자본과 국내의 소수 매판 자본가들과 대토지 소유자들, 그리고 군부독재 정권과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하며 쿠바 민중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것이다. 사미르의 지적처럼 신식민지 쿠바에서 미국 자본의 이익을 보장함과 동시에 쿠바의 소수 기득권 체제를 유지하는 소위 ‘계급적 동맹’을 이룬 경우였다.

미국의 반식민지 상태에서 쿠바 민족주의는 고조되었으며, 단일 작물 수출경제에 기반을 두는 대형 플랜테이션 경제는 다수의 빈곤한 노동계급을 양산하며 농촌사회를 붕괴시키고, 도시는 급격하게 슬럼화되었다. 반면에 아바나는 수천의 미국인들과 부유한 쿠바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요트 클럽과 같은 폐쇄적인 사교 시설들로 넘쳐났다. 당시 쿠바 전체 인구의 3% 미만이 수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아이들의 2/3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였고 그마저도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이 같은 다수의 빈곤과 극단적인 불평등이 1959년 쿠바 혁명이 반제국주의적인 민족해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 직접적인 배경이다. 계급적 요구를 담은 쿠바 혁명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운동은 쿠바 민중들을 수탈하는 토착 지배세력과 계급적 동맹을 맺은 미국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며,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1959년 혁명은 당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하던 미국의 지배와 토착 지배계급의 수탈에 응답한 쿠바인들의 저항이었고 그들의 자주적 선택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쿠바 사회주의에 대한 갑론을박은 뜨겁다.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났던 사회주의 운동은 소위 노동계급 중심의 이론에 익숙한 서구 중심의 마르크스적 혁명 공식에 빗대어 비판을 받아왔다. 19세기 자본주의가 태동하는 서유럽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 이론이 20세기 쿠바와 같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이론은 현실을 지배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론과 현실을 가능하게 했던 구체적 현실들이 이제는 거꾸로 이론의 ‘노예’가 되고 있다고 일갈한 베네수엘라 인류학자 사노하(Sanoja)의 지적은 새겨 볼 만하다. 특정한 사상이나 철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거나 심지어 그 현실을 왜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이는 19세기 이후 유럽 자본주의 발전으로 나타난 노동자계급의 비참한 현실이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의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면, 약 100년 후 쿠바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사회정치적 조건은 유럽의 그것과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쿠바 사회주의 혁명이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제국주의적인 세계 자본주의 질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바 혁명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동시에 민족주의적이었다. 민족과 계급의 이해관계는 일치하였고, 피델의 주장처럼 “1959년 혁명은 역사적으로 고착된 쿠바인들에 대한 착취와 횡포의 역사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소위 21세기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0세기 말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끝으로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사회주의가 더는 설 자리가 없는 듯했다. 동구권 국가들과 동맹을 이루고 있던 쿠바의 미래도 이와 함께 불투명해 보였음은 물론이다.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도 역사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시대였다.

사회주의 사상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그 정점을 찍기 시작하는 19세기 이후부터 줄곧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많은 이들에게 실천과 행동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반면, ‘자유’와 ‘시장’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자본주의 질서는 마치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체제라는 공식을 만드는 일에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들은 ‘자유’를 부정하는 불경한 일로 매도되었으며, 동시에 사회주의는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 체제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각인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쿠바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인식의 기저에 흐르는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 예로, 쿠바 보건의료시스템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쿠바 사회가 억압적인 사회주의 체제라서 가능했다거나, 국제의료활동은 쿠바 정부의 내정실패와 인권유린 문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비판 등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다. 과연 쿠바 사회주의는 전체주의적 독재정치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는 체제일까. 우선 체제의 정치적 성격을 논하기에 앞서, 쿠바의 독특한 보건의료시스템을 통해 그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동체적 가치와 합의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은 유의미할 것 같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쿠바의 보건정책의 핵심은 무상의료라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취약한 계층에게 제공되는 선별적 복지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은 보편적 권리이며 국가는 이를 보장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쿠바의 의료서비스는 지급 능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혜택받는 상품이 아니며, 모든 쿠바 국민은 이를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권리”로서 받아들인다. 즉 개인만의 권리가 아니라 동등한 “모두의 권리”로 인식하고 있다.

일견 당연해 보이는 이 같은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현재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권리와 의료 불평등의 최소화를 추구한 전략으로써 쿠바의 보건의료는 지역사회의학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모델의 주요 목적은 지역사회 공동체의 건강 문제에 대해 지역주민들의 책임의식과 참여, 수동적인 수혜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이자 기획자로 주민들의 역량을 높이는 데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보건모델은 개인과 지역사회의 유기적인 협력 관계가 형성될 때 비로소 가능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과 같은 보건 의료시스템이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이었으니, 이 모델이 쿠바 지역사회를 개인이 아닌 “이웃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제로 작용했을지, 혹은 그 역으로 쿠바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이 같은 의료시스템을 안착시킬 수 있었던 사회적 자본이었을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조금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쿠바의 지역사회는 여전히 이웃 간의 정이 훈훈했던 과거 우리 시대의 많은 일상과 닮았다는 점이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보건의료정책이 높은 의료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묘책의 ‘비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대목이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쿠바의 지역사회에서 보건의료의 일상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면 어떨까 한다.

화, 2019/10/29-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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