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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내일을 여는 역사』 2019년 가을 통권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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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내일을 여는 역사』 2019년 가을 통권76호

admin | 화, 2019/10/01- 04:43

▲ 저자: 내일을여는역사재단·민족문제연구소ㅣ출판사: 민연ㅣ값 15,000원ㅣ335pageㅣ발행일: 2019.09.01.ㅣISSN 1228-8802ㅣ977122888020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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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2019년 가을호(통권76호)

차례

여는 글
금단을 넘은 저항, 금단을 넘는 시선 / 조형열

통일에세이
남북한의 학술 교류·협력과 역사학의 모색 / 신주백
한반도 평화만들기 과제와 방향 / 권영길
북한 백두대간 기행 / 로저 세퍼드

쟁점으로 보는 역사
코민테른과 한국 민족해방운동 연구 / 김영진
신간회, 어떻게 볼 것인가 / 윤효정

지금 우리는?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은 양립가능한가? / 류동민
우리는 지금 촛불 시대에 살고 있는가? –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에 대하여 / 정현진
머나먼 한반도 군축, 국방비 동결로 물꼬 터야 / 정욱식

인물로 보는 역사
[식민지 지식인의 엇갈린 선택]
같은 시·공간, 다른 선택 – 채동선과 홍난파 / 노동은

[독립운동가열전]
정칠성 ー 여성노동자를 대변한 근우회의 리더 / 박순섭

[반독재민주화열전]
남김없이 타버린 불꽃 이야기 – 시인 김남주 연대기 / 김형수

[코민테른인명사전]
이탈리아어판 『코민테른인명사전』에 실린 한국인들 (1) – 강상주, 박진순, 박애 / 임경석

사실 체크
○ 우리 역사에서 협동조합운동은 무엇이었나? / 김소남
○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 수리조합사업의 실체 / 박수현

사료의 재발견
『동전 오기영 전집』 : 하나 된 조국을 향한 어느 자유주의자의 외침 / 장규식
『대명률』의 편찬과 수용 그리고 적용 / 한상권

북한의 이해
북한 미술, 조선화의 매력은 어디서 오는가? / 문범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의 기원과 제정 과정 / 강응천

예인열전
동방산수의 화종(畵宗) 겸재 정선 – 정선, 실경산수화의 동국제일명가 2 연구사 / 최열

예술과 현실의 소통
BTS, (케이) 팝의 역사를 다시 쓴다 / 이정엽
3·1운동 100주년에 ‘북간도’로 향한 이유 –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역사’ / 반태경

서평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보는 새로운 문제의 제기 – 정요근 외,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19 / 정재훈

책소개

한국의 20세기는 식민과 분단으로 인해 전쟁과 생존의 위협이 상존하는 시기였습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전쟁의 압살과 청일전쟁, 20세기 전반기의 러일전쟁,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 남북 두 분단정부의 수립, 6·25전쟁 등 우리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로 인해 민족사회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서도 권력을 독점한 지배자에 의해 비민주적 통치가 진행되었고, 이성적 사고에 기초한 시민이 되기보다 절대적 순종을 덕목으로 하는 신민이 되기를 요구 받았습니다. 물론 20세기에는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따른 거대한 전쟁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사실 한국도 이러한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단 세계적 냉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한국은 냉전의 후광을 등에 업고 오히려 치열한 열전 상태로 돌입했다는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21세기가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불안과 희망이 교차했던 그때를 떠올려봅니다. IMF의 여파와 세기말 증후군이 겹치면서 회색빛 미래를 점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20세기 전반에 비해 후반기에 우리 사회가 성취한 역사적 성과를 떠올리며 21세기는 평화와 번영의 새 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희망이 컸습니다. 특히 1987년 6월항쟁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던 군사정부의 그늘과 지역주의가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동요하기 시작하고 2000년 6·15공동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이 역사적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분단체제 극복을 향한 여정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우리의 현실을 살펴봅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핵전쟁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는 큰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남북의 평화는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과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는 북미 정상의 협상은 평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갈증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제적 조건이 그나마 좋아졌다고 하더라도, 대신 지금 이 시간에도 미국과 이란의 전쟁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며 시리아 난민을 비롯한 지구촌 시민의 삶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2016년에는 촛불시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굳센 한 걸음을 내딛었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전지구를 휩쓸고 간 자리에 남긴 노동유연화, 위험의 외주화와 같은 생채기는 쉽게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절반의 절반도 경과하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가 어떠한 시대가 될 것이라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20년의 역사를 볼 때 20세기가 직면했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21세기 인류와 우리 민족사회가 계속해서 지고 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과제에 접근하기 위한 역사학의 선택 가운데 하나가 20세기 식민·분단·전쟁 등 온갖 폭력에 맞섰던 저항을 조명하고, 민주·평화·평등의 시선이 확산되도록 노력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금단(禁斷)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구역 또는 범위 안에 들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또한 금기(禁忌)는 ‘마음에 꺼려서 싫어하거나 금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두 단어는 서로 비슷하지만 전자가 주로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애써 기피하려는 의식의 측면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배와 분단체제가 철저하게 막아선 금단의 영역을 넘은 저항을 발굴함으로써 오랜 세월 내면화된 금기로부터 자유로운 시선을 갖는 것, 이 또한 『내일을 여는 역사』가 상상하는 내일을 여는 방법입니다.

『내일을 여는 역사』편집위원회는 2019년 가을호(통권 76호)에 ‘여는 글’을 포함해 모두 23편의 원고를 수록했습니다. 특히 이번 호에는 민족해방운동과 사회주의운동, 북한에 대한 내면적 이해, 남북의 민간 교류를 세밀하게, 그렇지만 맛깔스런 필치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여러 편의 글을 실었습니다. 역사적 저항과 분단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오늘날의 시민행동을 연속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통일에세이’에는 다양한 분야의 남북 교류사업의 성과와 과제를 담았습니다. 신주백은 2000년대 이후 학술 교류를 역사학 분야에 초점을 맞춰 정리하면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와 정치적 배려 그리고 경제적 지원이 맞물릴 때 교류 협력이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웁니다. 권영길은 평화철도 연결운동이 현실적인 평화 만들기 실천의 길이고 이를 통해 남북경제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두대간 사진전을 열기도 했던 뉴질랜드 사람 사진가 로저 세퍼드는 2011~2012년, 2017~2018년의 종주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남북한의 사람들, 문화, 그리고 산도 똑같았다면서 분단이 바꾸지 못한 것들을 말합니다.

‘쟁점으로 보는 역사’에서는 민족해방운동과 관련해서 중요한 주제인 코민테른과 신간회를 다뤘습니다. 김영진은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코민테른이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에 관여했던 역사적 사실과 연구경향 등을 설명하면서, 국제주의를 표방한 코민테른의 ‘권위’가 각 지역별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폭넓게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윤효정은 신간회에 대한 이해가 반공주의적 관점에서 민족통일전선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조망한 뒤, 신간회 평가를 해소 문제에 국한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긍정·부정을 넘기 위해 중앙 및 지회가 대중과 접촉하면서 벌인 활동 등에 주목할 것을 요청합니다.

‘지금 우리는?’에서는 오늘날 현재적 논점으로 자리 잡고 있는, 오해와 편견도 섞여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던 세 가지 문제에 집중했습니다. 류동민은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의 상관성을 정리했습니다. 양자의 양립 불가능성이 정치담론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두 가지 입론의 역사적 연원을 체계적으로 제시했습니다. 정현진은 전교조가 박근혜 정부 사법부를 통해 법외노조가 된 부당성과 합법화의 당위성을 주장합니다. 정욱식은 분단체제 해체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국방비 동결을 추진해야 하며, 2019년 현재 한국의 군사력이 세계 7위, 일본이 6위, 북한은 18위로 평가되었다는 구체적인 사실도 제시합니다.

‘인물로 보는 역사’는 억압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고투한 인물 군상의 모습을 주로 다뤘습니다. 먼저 음악가 채동선과 홍난파의 삶을 비교한 고(故) 노동은의 유고를 실었습니다. 민족음악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홍난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채동선의 삶에 주목해주시길 바랍니다. 박순섭은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힘쓴 여성 사회주의자 정칠성의 일대기를 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주의자가 그렇듯이 그녀도 월북한 이후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김형수의 김남주 연대기는 시대의 변화와 시인의 삶을 연결하면서, 또 그가 썼던 시를 통해 그의 내면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혁명을 고민한 김남주를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한편 임경석은 이번 호부터 앞으로 네 차례에 걸쳐 ‘코민테른 인명사전’을 연재합니다. 이탈리아에서 기획된 인명사전에 수록한 14명의 인물 정보를 순차적으로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을 위해 집필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건조한 문체이지만, 강상주, 박진순, 박애 등 한인 사회주의자에 대해 기존 연구보다 한층 보강된 내용을 만날 수 있습니다. 1996년 출간된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을 뛰어넘는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한 종합적 정리가 언젠가 다시 한 번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톺아보기 위한 ‘사실체크’에서는 한국의 협동조합운동과 일제하 수리조합사업을 분석했습니다. 한국의 민간협동조합운동 100주년을 맞아 김소남은 이 운동에 사회운동과 적극적 연계, 좌우 양편을 넘는 통합적 활동, 세계 협동조합운동의 지원, 생명사상의 수용 등의 특징이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아래로부터 연대를 만들어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박수현은 수리조합사업이 일제 통치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한 일방적 관제사업이었기 때문에, 중소지주와 자작농층을 중심으로 적극적·조직적 저항이 속출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반일종족주의』출간으로 재점화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지속적 비판이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료의 재발견’에서는 『동전 오기영 전집』과 『대명률』을 다뤘습니다. 『동전 오기영 전집』은 일제하·해방직후 지식인이자 언론인으로서 삶을 영위한 오기영의 생각을 담은 책 모음입니다. 장규식은 오기영을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계승해 고전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 자유주의를 제창한 인물로 조명하면서 통일독립을 열망한 그의 활동을 높게 평가합니다. 『대명률』은 조선왕조 형법 체계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 서적입니다. 한상권은 14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대명률』이 조선에 수용·적용된 과정을 상세히 해설했습니다.

‘북한의 이해’에 실린 두 편의 글은 북한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강응천은 북한의 국호가 조선민주주의공화국도 아닌, 조선인민공화국도 아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인민민주주의를 향한 후진국 사회주의의 기호이자, 민주기지론이 반영되었다는 해석이 흥미롭습니다. 문범강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 출발한 북한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미술이 독자적인 조선화로 발전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조선화 화단의 상황을 소개합니다. 외부의 시선과 달리 활발한 논쟁과 화가의 독자적 작품세계가 실재함을 말합니다. 컬러로 수록한 작품을 직접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최열이 연재하는 ‘예인열전’은 지난 호에 이어 겸재 정선의 작품세계를, 선행연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들여다보았습니다. ‘예술과 현실의 소통’에서는 문화평론가 이정엽이 케이팝(K-pop)의 흐름 가운데 방탄소년단(BTS)의 위치와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또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를 만든 반태경 피디는 명동촌으로 대표되는 북간도 기독교인들의 삶을 영화화한 동기와 역사 속 기독교 신앙인이 펼친 사회적 실천의 가치를 담담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서평’에서는 정재훈이 최근의 화제작 『고려에서 조선으로』를 다뤘습니다. 변화보다는 지속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 위 책이 왕조교체의 원인과 성리학 수용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명하지 못했다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역사를 큰 줄기에서 보는 시도들이 더욱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20년이 지난 21세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지며 글을 시작했는데, 『내일을 여는 역사』도 바로 21세기의 첫 해인 2000년 3월에 첫 호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이제 성년을 맞은『내일을 여는 역사』 역시 21세기와 함께 호흡해왔다고 할 것입니다. 연구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술지도 아닌, 폭넓은 대중과 수시로 접촉할 수 있는 시사주간지도 아닌, 어떻게 보면 ‘주변’ 또는 ‘경계’에 서서 지난 세월을 걸어왔습니다. 주변과 경계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현실에서 많은 어려움을 낳지만, 세상의 ‘중심’에서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시선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금기를 넘는 시선이 이 지면을 통해 넘쳐날 수 있도록 더 정진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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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여전히 찬밥 ②] 친일의 그림자 어른거리는 국군의 날, 이대로 괜찮은가

오늘(2020년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 창군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국방부는 2018년 업무보고에 국군의 기원이 광복군임을 명시했다. 그러나 2020년 지금도 대한민국 국군의 날은 6.25전쟁 중 38선을 넘은 10월 1일에 기념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광복군 창군 80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이 문제를 살펴봤다. [편집자말]

 

▲ 1942년 한국광복군 환송기념사진. 첫번째 줄 김구를 중심으로 이시영, 차리석, 박찬익, 조완구 지사가 자리해 있다. 맨 뒷줄에 조성환, 조소앙, 지청천, 이범석, 양우조 지사가 서 있다. ⓒ 국사편찬위원회

“국군의 날인 10월 1일은 육군 3사단이 1950년 한국전쟁 중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진격한 첫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날이 대한민국 국군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국광복군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의 외손자 이준식 독립기념관 관장이 11일 서울시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설80주년 초청강연’ 후 <오마이뉴스>에 한 말이다.

10월 1일이 한국전쟁 중 38선을 돌파한 날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국가기록원은 “1956년 9월 ‘국군의 날에 관한 규정’에 의해 육·해·공군 기념일을 통합하여,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였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날이 국군의 날로 기념되기까지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심지어 친일의 그림자도 스친다.

이승만이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기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1956년 9월 21일 “육해공군 기념일에 관한 건은 폐지한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대통령이 이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육해공군은 각각의 기념일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육군은 1946년 1월 15일 미군정 아래서 남조선국방경비대 1연대가 창설된 날을 기념했고, 해군은 1945년 11월 11일 조선해안경비대의 근간이 된 해방병단의 창설일을 탄생일로 잡았다. 반면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육군에서 분리된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그런데 육군이 1955년 기존 날짜 1월 15일에서 10월 2일로 육군의 날을 바꿨다. 그 이유가 10월 2일이 유엔군이 ‘작전명령 제2호’로 38선 돌파를 공식 승인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0월 2일 육군의 날은 이듬해 바로 사라진다.

육군 3사단이 38선 위로 진격한 날짜가 10월 1일이라는 게 새롭게 확인되자 이승만 정부는 “국군의 날은 단기 4289년(1956년) 10월 1일부터 시행한다”면서 “(1955년에 제정한) 육해공군 기념일에 관한 건은 폐지한다”라고 밝혔다. 이 때부터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해 오고 있다.

1950년 10월 당시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했다고 알려진 육군 3사단은 2009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이종찬이 당시 사단장을 역임한 부대다. 당시 3사단을 이끌고 38선 동부해안을 돌파한 것으로 알려진 1군단 단장은 역시 국가공인 친일파로 지정된 김백일이 맡고 있었다.

분단과 전쟁 상태의 영속화… “정전에서 종전으로 나아가는 국군의 날 필요”

▲ 2019년 10월 1일 국군의 날을 맞아 대구 공군기지(제11전투비행단)에서 열린 “제71주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각군 장병들이 의장행사를 선보이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다른 나라들은 어떤 날을 국군의 날로 지정하고 있을까? 미국은 1949년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국민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들에게 감사하는 통합된 기념일이 필요하다’라는 취지 아래 5월 셋째 주 토요일을 국군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1949년 중화인민국화국 건국 후 만들어진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일인 8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10월 1일 군국의 날을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강성현(역사 사회학자)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16일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령으로 국군의 날을 선정한 것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함”이라면서 “국군의 정통성을 따지기 보다 분단과 전쟁상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38선을 돌파한 날을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이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새롭게 부각하고, 정전에서 종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는 이 시점에 새로운 국군의 날을 기념일로 고민해 볼 수 있다”면서 “헌법정신에 입각하고 국군 창설의 맥을 따져 광복군 창설일로 국군의 날을 변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방부는 15일 ‘국군의 날을 변경 논의가 진행 중이냐’라는 <오마이뉴스>의 질문에 “국군의 날을 변경하는 문제는 현역 장병과 예비역, 사회 각계각층의 폭넓은 의견수렴 과정을 통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2018년 업무보고에 광복군이 기원이라고 명시했지만) 이와 관련 국방부 차원의 진전된 논의는 없다”라고 답했다.

<2020-09-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50년 10월 1일 38선 돌파한 1군단장·3사단장은 국가공인 친일파

금, 2020/09/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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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기념 특강]
독립전쟁과 ‘이름없는 별들’
– 강사: 이준식 독립기념관장

주관: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후원: 서울특별시 / 민족문제연구소

금, 2020/09/18- 0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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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보러가기]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월, 2020/09/21-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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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보러가기] 

강사: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3강. 3강. ‘혁명의 기록, 4월의 노래’,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월, 2020/09/21-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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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년 대회열고 호소문 발표…”다시 화해 평화 통일의 길 열자”
이종걸 민화협 의장 “국보법 철폐, 한미워킹그룹 해체”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9·19 공동선언 2주년 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은 이종걸 민화협 의장. (유튜브 갈무리)© 뉴스1

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맞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남북 합의를 이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6·15 남측위와 민화협은 서울시 마포구 청년문화공간에서 공동으로 ‘9월 평양공동선언 2주년 민족통일대회’를 개최하고 “현 남북관계의 위기는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남북공동선언의 합의들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데로부터 시작됐다”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들은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정신으로 다시 화해와 평화 통일의 길을 열자’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통해 “남북관계를 가로막고 있는 한미워킹그룹을 해체하고 민족자주 민족자결의 입장에 확고히 서서 남북합의를 이행해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면서 “평양공동선언과 군사합의에 따라 군사적 적대행동을 모두 중단하고 공고한 평화체제 실현으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남북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의 현대화 추진, 대북전단 살포 문제 해결 등을 촉구했다.

이날 이종걸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은 대회사에서 “남북간의 대화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의 철폐와 함께 한미워킹그룹 해체와 한미군사훈련의 축소나 중단을 촉구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남북대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대화의 파트너인 북측의 입장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면서 “북측이 반대하고 부정적인 것을 진행하면서 어떻게 대화를 진행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한 과감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면서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남북)대화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창복 6·15 남측위 상임대표의장은 대회사를 통해 “동맹에 조금이라도 균열은 있을 수 없다는 냉전세력의 몽니를 넘어 보다 자주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정책은 찾기 힘든 상황”이라면서 “어떠한 동맹의 이익보다 민족의 이익이 우선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말했다.

그는”왜곡되고 종속된 ‘동맹’을 넘어 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정부는 ‘동맹대화’ 신설 시도를 중단하고 한미워킹그룹을 지체 없이 해체하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반도종전평화캠페인’은 9·19 평양공동선언 2주년을 맞아 이날 오후부터 서울·경기·인천·강원·충북·충남·전북·광주·부산·울산·경남·제주 등 전국 12개 시·도 19곳에서 전국 동시다발 1인 시위를 진행했다. 이들은 ‘전쟁 없는 한반도, 항구적인 평화지대’를 구호로 “남북·북미 합의 이행하라”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종전평화캠페인은 615남측위·민화협·한국YMCA전국연맹·시민평화포럼·자유언론실천재단·여성평화외교포럼·민족문제연구소·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등 전국 시민사회·종교단체 353개가 참여하고 있는 단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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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9> 뉴스1

☞기사원문: 6·15남측위·민화협, 9·19 2주년 “민족적 입장서 남북합의 이행”

월, 2020/09/21-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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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2020/09/22-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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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 일정으로 1학살지 유해 발굴 집중

▲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은 22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한국전쟁기 제 9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를 개최하고 있다. ⓒ 심규상

“아버지, 어머니… 70년의 어둠 거두어 내고 이제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유해발굴이 시작됐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민간인학살유해발굴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은 22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한국전쟁기 제9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를 열었다.

이곳 골령골은 전국 민간인희생자를 추모하는 국가단위 위령시설이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 조성 예정지다. 정부는 평화역사공원에 전국 민간인 희생자 추모공간, 전시공간, 교육공간, 편의공간, 공원야외시설 등을 갖출 예정이다. 평화역사공원 조성을 위해 예정지 내에서 본격적인 유해발굴에 나선 것이다. [관련기사: 대전 골령골 민간인집단희생지 역사공원 설계 국제공모 http://omn.kr/1oyvb]

전미경 유족회장 “늦었지만 정부 차원 유해발굴 재개 다행”

▲ 22일 오전 10시 30분 대전 골령골(동구 낭월동 13번지)에서 한국전쟁기 제 9차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을 알리는 개토제에서 전미경 대전유족회장, 황인호대전동구청장, 서영균 제주 4.3희생자유족회대전위원장 등이 시삽을 하고 있다. ⓒ 심규상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은 이날 추도사에서 “늦었지만 정부차원의 유해발굴과 국가단위 위령시설이 추진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며 “방치된 희생자들의 유해가 하루속히 발굴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황인호 대전동구청장은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가 수 천명의 목숨을 오히려 빼앗았다”며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의 유해발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코로나19 극복 앞에 좌우이념이 필요하지 않듯 평화와 인권을 지키는 일에 이념이 다를 수 없다”며 “유해발굴과 평화역사공원조성, 동구청 주최의 평화학술대회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황인호 동구청장 ” 평화와 인권 지키는 일에 이념 다를 수 없다”

대전지역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전산내사건대책회의 소속 임재근 대전통일교육협의회 사무국장은 “이번 유해발굴은 정부가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정부는 묻혀 있는 진실을 규명될 때까지 완주해 달라”고 주문했다. 대전산내사건대책회의는 전 대전산내학살유해발굴공대위를 확대 개편한 조직으로 오는 28일 대표자회의를 겸한 결성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은 “땅속에 묻힌 진실을 파헤쳐 유해를 편안하게 모시고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유해발굴은 약 40일 간의 일정으로 제1학살지에서 집중적으로 실시할 예정이다.

대전 골령골은 한국전쟁 전후 대전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이 최소 3000명에서 최대 7000명이 학살당한 후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매장추정지 7군데 중 2개의 매장지에서 34명의 유해를 발굴했으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제1학살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2015년 공동조사단이 제1학살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여 20명의 유해를 발굴했고, 이후 2017년 11월 시굴조사를 통해 유해 매장을 확인한 바 있다.

▲ 22일 개토제에서 전미경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장, 황인호 대전동구청장, 임재근 대전통일교육협의회 사무국장박선주 공동조사단 단장(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 심규상

박선주 단장 “유해 모시고 진실 밝히겠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종료된 지 10년만인 지난 5월 과거사기본법이 통과돼 올 12월이면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을 앞두고 있다”며 “전국 산천에 묻혀 있는 희생자들의 유해발굴이 하루속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9차 유해발굴에는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인권재단사람, 인류진화연구소, 장준하기념사업회,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평화디딤돌, 포럼진실과정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전국유족회, 대전산내사건대책회의 등이 참여하고 있다.

▲ 황인호 대전동구청장이 개토제 직후 드러난 유해를 가르키며 발굴단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 심규상

유해발굴공동조사단 활동 경과

– 2014년 2월 공동조사단 출범, 제1차 공동조사,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제1학살지 (진주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39명, 유품 90여 점)

– 2015년 2월 제2차 공동조사, 대전시 동구 낭월동 (골령골, 대전형무소사건, 유해 최소 20명, 유품 30여 점)

– 2016년 2월 제3차 공동조사, 충남 홍성군 광천읍 담산리 (홍성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21명, 유품 30여 점)

– 2017년 2월 제4차 공동조사, 경남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제2학살지 (진주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38명, 유품 30여 점)

– 2018년 2월 제5차 공동조사, 충남 아산시 배방읍 설화산 일대 (아산부역혐의사건, 유해 최소 208명, 유품 550여 점)

-2019년 3월 제6차 공동조사,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청원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40명, 유품 130여 점)

-2019년 5월 제7차 공동조사, 충남 아산시 염치읍 일대 (아산부역혐의사건, 유해 최소 6명, 유품 10여 점)

-2020년 5월 제8차 공동조사,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 충북 보은군 내북면 아곡리 (청원국민보도연맹사건, 유해 최소 2명, 유품 4점)

-2020년 9월 제9차 공동조사, 대전시 동구 낭월동 13번지

<2020-09-2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전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유해 본격 발굴한다

수, 2020/09/23-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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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방민호(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4강.잘 돼 갑니다 – 우상의 시대, 강사: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3강. ‘혁명의 기록, 4월의 노래’,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토, 2020/10/03-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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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권성우(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2020년 독립민주시민학교 시민강좌 사월혁명 60주년 기념 특강(9.5~20)
문학과 예술로 보는 4·19 “잔인한 사월 위대한 혁명”

※관련영상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5강.피의 행진 – 대열 속에서(소설), 강사: 방민호(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4강.잘 돼 갑니다 – 우상의 시대, 강사: 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3강. ‘혁명의 기록, 4월의 노래’, 강사: 이준희(성공회대학교 외래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2강. 4·19혁명과 한국문학, 강사: 유성호(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사월혁명60주년기념특강] 1강. 문학에서 본 4·19혁명, 강사: 임헌영(문학평론가)

토, 2020/10/0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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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110년,…아직도 끝나지 않은…친일의 역사
日, 한일병합 토대 육군무관학교 폐교 계획…마지막 생도들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 편입
A급 전범 홍사익 등 대부분 친일의 길 걸어, 잊지 말아야 할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
나라잃은 가슴 아픈 날, 국민들 무관심 여전…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 관련된 줄소송 대기
중국은 매년 국치일 9월18일 경적 울려 상기, 역사박물관 등 통해 아픈과거 기억하려 노력

1910년 9월2일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

​​​​​​​■기억과 기념투쟁

2017년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적으로 펴냈던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기구 사전을 출간하였다. 발간사에서 “기념해서는 안될 인물들을 기념하는 사회는 분명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기억투쟁은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라고 하면서 이 사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정리했다. 이 사전에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수록됐다. 그 가운데 중추원 항목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바로 이완용을 비롯한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등 을사오적과 박영효, 송병준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다. 일제가 한국인을 보다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 키워 낸 친일파는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한일병합조약문

■대한제국의 몰락과 친일파 육성책, 군인들

1894년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잔학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기 한반도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탈하고 훼손했다. 1910년 8월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위법체결로 대한제국은 마침내 그해 8월29일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른바 ‘경술국치’로 불린 치욕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경술국치는 생소한 역사적인 사건이자 용어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비롯한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1907년 8월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여기저기서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전개됐다. 참령 박승환의 자결도 이 때 일어났다. 일제는 1909년 9월 대한제국 군부의 숨통을 끊고 한일병합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육군무관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그 선행작업으로 마지막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1909년 8월 2일 학교장 이희두가 “황제폐하가 군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폐교한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칙령을 봉독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종말이었다.

생도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 45명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에게 일본으로 갈 것을 명했으며, 이들 가운데 김영섭만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검사에 불참했다. 총 44명의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지식과 신체검사를 비롯해 적성검사를 차례로 받고 두 명을 제외한 42명이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게 됐다. 1909년 9월3일 생도들은 일본 육군유년학교 생도들과 같은 정복을 입고 대한제국 소속임을 표시하는 오얏꽃 모표와 분홍색 금장을 달고 현해탄을 오가는 배에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올랐다.

일본으로 가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의 성적순 제 1등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진 염상섭의 큰 형이었던 염창섭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생도는 따로 있었다. 홍사익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도 입학이 어렵다던 일본 육군사학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제 패망 시 일본군 중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조국을 외면했던 댓가로 그는 1946년에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지만 일본 육사시절 그가 보여줬던 실력은 일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09년 9월7일부터 대한제국 생도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극일(克日)’한다는 자세로 한국학생반으로 편성돼 훈련받았다. 1910년 9월1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합병한 것이었다. 이른바 경술국치이다. 한일병합 제1조 ‘대한제국황제는 일본국천황에게 모든 권한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양도한다’라고 돼 있듯이 이제 무관학교 생도들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모표를 달수 없었으며, 한인학생반도 없어졌다.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던 지청천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던 김경천,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중장 홍사익,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던 이응준은 요코하마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두 명만이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다. 아니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중국 9·18역사박물관 모습

■중국이 기억하는 그들의 국치일

오늘날 중국 대륙의 국치일은 9월18일이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한 날이다. 중국은 이때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전쟁기로 부른다. 선양시(沈陽市)에 세워진 918역사박물관에는 중국의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쓴 ‘물망국치(勿忘國恥)’가 선명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항일전쟁시기 3천500만명의 중국인이 다치거나 죽었다. 비단 사람만 희생됐을까. 그들의 문화, 영토, 풍속 등도 상당 부분 훼손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날을 국치일로 정한 것이다. 해마다 심양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 대도시에서는 9월18일 오전 9시18분에 경적을 울려 이날이 국치일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에는 국치일이 모두 일본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용서는 하지만 절대 잊지는 말자고 강조한다. 왕징웨이(汪精衛)를 비롯한 한간(漢奸)에 대한 역사적 단죄, 만주국 황제였던 부의를 중생(重生)했던 무순전범관리소를 운영했던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친일’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써 우리의 현실은 중국과 다르다고 자위해 보지만 과연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경술국치’, 나이 든 세대에게는 익숙한 용어이다. 하지만 용어일 뿐이지 실생활에서 전혀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청소년들에게는 잊혀진 세월이자 먼 옛이야기다. 기성세대는 한일관계를 의식해서 또는 과거이기 때문에 라고 얼버무리며 국치일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애써 봉합한다. 가슴 쓰린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게 우리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전달될 리가 없다.

중국 9·18역사박물관 모습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만주는 한국독립운동의 안전판이자 한편으로는 일제와 결탁한 세력들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쩌면 일제의 감시와 탄압보다 밀정이나 친일파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 고난의 삶을 어떻게 편안한 우리가 복원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은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것도 온전히. 안중근, 윤봉길 의사가 그러하듯, 나를 버리고 온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바로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산이자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편안한 길은 어떠한가. 나를 버리기는 커녕, 세상의 악과 결탁해 나와 같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친일의 길을 그래서 정의나 공의와는 동떨어진 삶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변명이든간에.

2007년 민간단체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그 뒤 정부차원에서 친일단체 및 인명을 정리하는 작업이 마무리됐다.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과 관련된 줄소송이 판사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정리되지 않는 역사의 갈무리 작업은 그만큼 지난하다. 2020년 7월 11일 ‘대한민국 국군 영웅’ 백선엽 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대 만주국 조선인 특설부대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그가 해방과 한국전쟁 속에서 한국군의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한국군의 민낯 같다. 독립군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달을 꾀했다. 뿐만 아니라 ‘청빈한 삶’을 살았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실은 한 개인의 삶이 어떠하게 조명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역린을 한번은 헤집어서 그 상처의 환부를 도려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역사의 책무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20-09-27> 경기일보

☞기사원문: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청산되지 못한 아픈 과거 친일파 (1)

※관련기사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2.무의식 속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1.애매하다·망년회·땡땡이무늬… 당신도 쓰고 있나요? 

토, 2020/10/0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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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1000여 명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다룬 <35년> 완간한 박시백 화백

▲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친일파들의 부역의 역사를 만화로 그린 <35년> 저자 박시백 작가가 28일 오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책을 집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 <35년>을 지난 광복절에 완간한 쉰여섯의 화백은 ‘만약 그때로 돌아가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질문에 “아마도 나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런데 금방 죽었을 것이다. 나는 달리기도 잘 못하고 (독립군처럼) 총 쏘라고 하면 총도 제대로 못 쐈을 거다. 금세 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라고 밝힌 이유에 대해서 만큼은 “살벌했던 전두환 시대에 처음 이 길에 들어섰을 때도 이미 투옥과 고문,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시작했던 것”이라면서 “늘 광주항쟁에 대해 생각했고, 학살자가 대통령으로 있는 것을 청년으로서 가만히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 움직이는 이유가 됐다”라고 밝혔다.

1984년 고려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대학시절 전두환 독재에 맞서 학생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우연적인 일”로 만화를 그리게 됐다. 그것이 지금은 본인의 업이 돼 살고 있다. 박시백 화백의 이야기다.

그는 서른일곱이라는 나이에 시사만화를 그리던 한겨레신문을 그만뒀다. “호흡이 긴 걸 하고 싶었다”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회사를 그만둔 그는 실록 국역CD를 구입해 공부했다. 2003년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권 ‘개국’을 세상에 선보였다. 이후로 10년 스무 번째 이야기 ‘망국’이 탄생하기까지 조선왕조에 천착해 살았다. 그사이 그의 책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350만 부라는 실로 압도적인 판매량을 기록했다.

자연스레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주목됐다. 그는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컷에서 “역사 앞에 이름 없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가 있다”라고 밝힌 대로 단호하게 일제강점기 35년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2018년 1월 <35년>이라 명명된 책이 세상에 나왔다. 지난 광복절에는 ‘밤이 길더니… 먼동이 튼다’라는 부제로 <35년>의 마지막 편인 7권이 완간됐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8일 <35년> 속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명멸했던 서대문형무소 앞에서 박시백 화백을 만나 인터뷰했다. 이날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8살 나이로 사망한 유관순 지사의 순국 100주년이기도 했다.

책 판매가 저조한 이유? “어려운 이야기를 했다”

▲ 독립운동가들의 투쟁과 친일파들의 부역의 역사를 만화로 그린 <35년> 저자 박시백 작가. ⓒ 유성호

사실 <35년>은 350만 권 이상 판매량을 보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비하면 다소 뜨뜻미지근한 상태다. 분명 베스트셀러에 위치해 있지만 ‘선풍적인 인기몰이’와는 차이가 난다. 이 부분에 대해 다수의 독자들은 “조선왕조실록에 비해 <35년>이 어렵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박 화백 스스로도 에필로그에 “너무 많은 사람과 사건, 이야기를 담으려 한 게 아닌가 한다”면서 “그런 만큼 독자들로서는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을 테고 넘기고 나서도 기억나지 않는 내용이 많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그럴 것이 총 7권 2140쪽에 이르는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만 1000여 명에 이른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반드시 다뤄줘야 하지만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과 사건들이 <35년> 곳곳에 배치됐다.

박 화백은 “사회주의를 다룬다는 것이 대중서로서의 거리감을 만들어 냈지만 결코 무시하고 갈 수 없었다”면서 “사회주의는 당시 상황에서 볼 때 일제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자 무기였다. 김규식 선생을 비롯해 임정 주요 인물들도 사회주의에 큰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 당시 현실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으니 청년들 사이에 (사회주의 국가) 러시아에 대한 기대도 컸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책에는 볼셰비키와 화요파, 조선공산당을 비롯해 그 안에서 활약한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박헌영, 김단야 등 우리가 놓쳤던 수많은 사회주의계열 단체와 독립운동가들이 나온다. 그중에는 동북항일연군 김일성도 있다.

박 화백은 “김일성의 독립운동에 대해 가짜설도 있었고 여러 주장이 있다”면서 “하지만 실제 전투참여와 활약상 등을 고려해 다뤘다. 전체 독립운동과 해방 이후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더 크게 묘사해도 됐지만 백범과 약산에 비해서는 훨씬 적게 표현했다”라고 언급했다.

이를 위해 박 화백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인명사전>을 기본 텍스트로 삼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사편찬위원회 등의 연구 자료와 100여 권 가량 되는 단행본을 참고해 공부하며 스토리를 짰다. 다양한 의견을 확인하기 위해 위키피디아도 꼼꼼히 확인했다. 동시에 9명의 현직 역사 교사가 편집에 참여하여 역사적 사실관계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바로잡았다.

▲ 박시백 작가는 “35년의 일제강점기 속에 존재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됐다는 평을 들었으면 좋겠다”면서 “그게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고 말했다. ⓒ 유성호

3.1운동 대신 ‘3.1혁명’으로 기록하다

박 화백은 <35년>의 두 번째 이야기를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명명했다. 박 화백이 3.1혁명이라 지칭한 것은 1919년 고종의 장례에 맞춰 3월 1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일컫는다. 우리 정부는 3.1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박 화백은 “3.1운동은 비폭력 만세운동이라고 인식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비폭력부터 폭력까지 그야말로 민족적 에너지가 다양하게 방출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면서 “내용적인 측면만 따져도 혁명이라 충분히 불릴만하지만 민중들이 근대인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실제로 이후 왕정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거의 사라졌다”라고 평가했다.

박 화백의 말대로 1919년 3.1혁명의 흐름이 이어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제국에서 민국으로 바뀐 것이데, 같은 날 공포된 임시정부의 헌장에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라는 내용과 함께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문구가 명시됐다.

한편 <35년>을 이어가며 박 화백을 가장 어렵게 만들었던 부분은 친일파에 대한 서술이다.

박 화백은 “친일파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전하고자 했다”면서 “하지만 친일파들은 비슷한 조직에서 비슷하게 행동하고 비슷한 연설을 했다. 독자들 입장에서 그 차이를 느껴야 책을 넘길 때 힘이 나는데 이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도 박 화백은 일제 만주군 출신이자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대한민국 5대, 6대, 7대, 8대, 9대 대통령을 역임한 박정희에 대해서는 “책에서 좀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면서 “일제강점기를 비롯해 이후 시대에 박 대통령이 끼친 족적이 워낙 크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7권 말미에는 만주군 중위였던 박 대통령이 일제가 망한 뒤 광복군 3지대를 거쳐 이듬해 5월 군복을 염색해 부산항에 도착했다고 그려졌다.

또 박 화백은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하는 작태에 대해서도 “이승만 정권 당시 반민특위가 무너지면서 그때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아니겠냐”면서 “내가 만화를 그리는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

“이미 땅 팔아서 건물 올리고, 회사 일으킨 후손들에게 어떻게 재산상의 책임을 물을 것이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의 친일청산은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친일파를, 이들이 민족반역자였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후손들에게도 계속 알려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친일파 후손들이 자기 조상을 대놓고 자랑하는 일은 없지 않겠나.”

박 화백은 이날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35년의 일제강점기 속에 존재했던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에 대해 이 책을 통해 더 많이 알게 됐다는 평을 들었으면 좋겠다”면서 “그게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언급했다.

다음 작품에 대해서 만큼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면서 “고려사와 현대사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만 언급했다. 돌아보면 <35년>의 마지막 컷에는 해방 후 혼란을 겪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담겼다. 그 안에는 1946년 신탁통치 절대반대, 백범의 죽음, 제주4.3과 여순항쟁, 그리고 한국전쟁이 그려졌다. 박 화백의 작품이 언젠가는 이를 그려낼 것이라고 예측되는 부분이다.

<2020-10-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가 제일 다루기 어려웠다… 이렇게라도 기억하는 게 청산”

토, 2020/10/03-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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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007년에 한국의 백두대간 지역을 시작으로,
2011년, 2012년에 북한지역 백두대간을 종주한
최초의 외국인 로져 셰퍼드(Roger Shepherd)!!!

통일 염원이 담긴, 그의 “남북한 백두대간”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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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20/10/0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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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부터 예술가ㆍ법조인ㆍ공무원까지… 낯 뜨거운 ‘친일 행적’
마지막 무관생도이자 日 육사 동기 홍사익과 안종인
나라 배반하고 호의호식한 고위공무원의 전형 김종한
작곡가 홍난파·예술가 윤효중·조선총독부 판사 이명섭
총후봉공 위한 정신운동 앞장 선 사학계 거두 이병도
독립군 맹장 지청천·이종혁과 달리 친일의 길 앞장
해방 후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 낳아
후손들 밝은 미래 위해 역사의 뼈아픈 반성·성찰 있어야

■ 군인은 국가의 정체
대한민국 대통령을 비롯해 고위공직자들 가운데 본인 또는 아들의 ‘군복무’ 문제로 곤혹을 치룬 사례를 언론을 통해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그만큼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군과 관련된 문제는 가장 민감한 문제이자 중요한 사안이다. 군인은 그 국가의 정체(正體)이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대한제국을 침략하면서 친일적 군인을 만들어 내는 데 심열을 기울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이면서 일본이 한국적(韓國籍)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 경기도 안성 출신의 홍사익이다. 그는 1969년 일본이 펴낸 일본 육군사관학교라는 책의 연표에도 영친왕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왕족과 함께 실려 있다. 그것은 오로지 그의 실력이었다.

몇 해전 소설가 이원규 작가가 저술한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는 책을 보면서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하는 필자는 부끄러움을 크게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원규 작가의 자료 접근과 소설가로서의 풍부한 상상력이 결합된 [마지막 무관생도들]은 소설이 아닌 지청천, 이응준, 홍사익에 대한 평전이었다. 그러면 왜 홍사익은 지청천처럼 일본군을 탈출해서 독립군에 투신하지 못했을까. 개인의 영달과 조국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결합된 천재 소년의 비극적 인생, 그것이 홍사익의 자화상이었다.

홍사익은 1889년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소현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때쯤 사서(四書)를 통째로 외워버려 인근 동리에서는 천재소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16세 때 대한제국 유년학교에 입학했으며 1907년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동기로는 한국독립군의 맹장이자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있었다. 홍사익은 지청천과 무척 친하게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속에 처해졌으며 마침내 홍사익을 비롯한 42명은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홍사익은 강제병합 소식도 듣고 선배 김경천과 동기 지청천, 이응준이 모여 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1914년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동기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던 지청천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그 때 부상을 당했다. 그리고 지청천은 선배 김광서(김경천)과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한 후 청산리 전투와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한국독립군의 상징으로 성장했다. 홍사익은 지청전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원체 탁월한 천재였던 홍사익은 일본군에서도 고속승진이 확실한 일본 육군대학을 나오게 된다. 일본 육군대학은 출세의 보증수표이자 별을 달 수 있는 고속도로이다. 동기들 가운데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없다.

1941년 홍사익은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중국 화북지방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그 때 한국독립군 가운데 윤세주를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이 태항산 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친구 지청천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홍사익은 다시 필리핀에 전속됐다. 거기에서 해방을 맞이하고 연합군에게 체포돼 1946년 9월26일 밤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경기도 수원 출신으로 홍사익과 함께 대한제국마지막 생도이자 일본 육사를 나온 안종인(안병범)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한국전쟁(6ㆍ25)에서 북한군과 대치하다가 자결했던 안병범이 바로 안종인이다. 그는 홍사익과 동기로서 1914년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그해 12월 큐슈의 구마모토 부대에서 근무했다. 1918년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했다. 이때 함께 출정했던 충무공의 후예였던 일본 육사27기 이종혁은 독립군 탄압에 대한 죄책감으로 1920년대 탈출해 독립군이 됐지만 안종인은 해방 때까지 일본 대좌로서 훈장과 함께 특별하사금까지 받았다.

■ 예술가는 민족혼을 머금는다
위기의 시대, 국난의 시대의 예술가들이 존경받는 것은 민족혼을 예술로 승화시켰다는 데 있다. 남북이 만나서 가끔 함께 부르는 [고향의 봄]을 작곡한 홍난파는 그 곡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친일음악가로 낙인찍혀 있다.

경기도 장단에서 태어난 윤효중은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극성이었던 1940년대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 미화하는 조선미술전람회, 결전(決戰)미술전 등에 출품해 각종 상을 휩쓸었다. 1943년 열린 조선미술전람외에 천인침(千人針)을 응모해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군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며 후방에서 끊임없이 바느질하는 한복 차림의 여인 전신상을 새긴 작품이다. 1944년에는 결전미술전에 [아버지 영령에 맹세한다]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전쟁에 나간 아버지의 뼛가루 상자를 앞으로 메고 있는 소년의 비애와 결연함을 아우르고 있으며 일본의 승리를 염원하는 내용이다. 1945년 1월에는 태평양전쟁에 출전한 가미카제를 기념하는 초상조각 작업을 시작했다. 조각가인 그는 일제의 전쟁에 동원된 민중들의 모습을 미화시키는 작품세계에 몰두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 법으로 친일을 변호하다
이명섭은 경기도 가평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했다. 1912년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으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14년 1월 조선총독부 판사로 임용돼 평양지방법원 영변지청 판사에 입명됐다. 그는 1919년 3ㆍ1운동 관련 사건을 잘 처리하였다고 상여금을 받았다. 1920년대와 그가 변호사로 개업하는 1937년까지 한국독립운동과 관련된 크고 작은 재판을 맡아 조선총독부로부터 훈장 서보장, 대례기념장을 받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금 김한필 사건, 흥업단 군자금 사건 등이 그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됐다. 해방 후 그는 미군정청 경성공소원 수석판사에 임명됐다.

■ 역사는 민족의 혼이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텔레비전에서는 역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는 미래를 밝혀줄 과거의 이야기이자 현재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의 거두 이병도는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를 졸업했으며 1915년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 문과를 수료했고 사학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냈으며 1925년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에 임명됐다.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그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今西)와 함께 조선사 제1편 신라통일 이전 등의 편찬을 담당했다. 이후 청구학회 위원,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해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했던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됐다. 그리고 해방을 맞이했다. 그는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역사학계의 권력으로 행세했다.

■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친일파의 흔적들
조선 헌종 때인 1844년 태어나서 1930년대까지 호의호식했던 수원 출신 김종한은 천수를 누리면서 조국을 배반한 고위공무원의 전형이었다. 그가 남긴 오염된 유산은 나 자신을 위해서는 공동체의 안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시그널이었다. 해방 이후 청산하지 못한 해방공간의 현재성이 오늘날 친일파 개념 규정에 어려움을 낳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자신들을 희생할 때 친일파들은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한국근현대사를 오염시켜 왔다. 역사의 뼈아픈 반성과 성찰이 보다 나은 미래를 밝혀 줄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후이다.

일본으로 간 대한제국 무관생도(성적순 2등 홍사익, 8등 안종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20-09-27> 경기일보

☞기사원문:[생활 속, 일재 잔재를 청산하자] 경기도 출신 친일의 군상(群像)

※관련기사 

경기일보: 청산되지 못한 아픈 과거 친일파 (1)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2.무의식 속 자주 사용하는 일본어

경기일보: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1.애매하다·망년회·땡땡이무늬… 당신도 쓰고 있나요? 

화, 2020/10/0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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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형중 신부 재조명 작업을 추진 중인 함세웅 신부는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며 “윤 신부님의 신앙과 가치관을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성찰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준헌 기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인 함세웅 신부(78)가 해방 전후 한국 언론·출판계 선구자인 윤형중(마태오) 신부(1903~1979)의 삶과 사상·활동상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와 가톨릭교회사를 보다 온전히 복원하는 일로 가톨릭계 안팎에서 주목받는다.

윤 신부는 1930년 사제서품 이후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독재정권 아래에서의 민주화운동 등 격동의 근현대사를 천주교 사제로서, 한 지식인으로서 치열하게 살아낸 선각자다. ‘가톨릭계의 지성’이자 대표적 논객으로 불린 그는 가톨릭교회와 더불어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윤 신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종교·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한글보급운동·한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가톨릭 청년’ 창간(1933)을 주도했고, 한국 최고의 정기간행물로 지금도 발간 중인 ‘경향잡지’를 이끌었다. 또 1946년 경향신문 창간 주역으로 사장 등을 역임했다. 이승만 자유당 정부 시절 글을 통해 정부의 실정과 부조리를 비판한 그는 1970년대엔 유신독재에 항거하며 결성된 ‘민주회복국민회의’(1974) 상임대표위원을 맡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나섰다. 신학적 연구를 기반으로 한 ‘가톨릭 대변자’이자 호교론자로 잡지 ‘사상계’를 통해 함석헌 등 당대 지성들과 치열한 논쟁도 펼쳤다. 새남터·절두산성지 기초작업, 순교자 유물확보 등 순교자 현양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윤 신부, 1930년 사제서품 후
일제 아래서도 한글 보급
독재엔 항거·민주화운동

신앙·삶·가치관에 담긴 뜻
이 시대 언론·종교 성찰 필요

유품·기리는 글 모아 추모집
10월 중순 ‘서예전’ 준비 중

함세웅 신부를 지난달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재조명 작업의 의미와 활동, 한국 언론·종교의 바람직한 역할 등을 듣기 위해서다.

– 윤형중 신부 재조명 작업에 관심이 모이고 있다.

“최근 그분의 유품과 각계 분들의 기리는 글, 저의 서예작품을 엮은 문집 <암흑속의 횃불-참스승 윤형중 신부 추모집>을 펴냈다. 코로나19로 유동적이긴 한데 10월2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예전도 연다. 추모집에는 윤공희 대주교,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총원장 양기희 수녀,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영식 신부를 비롯해 서울대 양승규 명예교수 등의 글이 실렸다.”

윤공희 대주교는 추모집에서 윤 신부를 “한국천주교회의 대표적 사제로서 출판과 언론, 지성인 강좌와 신앙교육, 순교자 현양에 몸 바친 선구자”라며 “인권과 평등·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세상 한복판 현장에 뛰어든, 한국천주교회와 우리 사회의 빛과 소금”이라고 밝혔다.

– 윤 신부 재조명 작업이 갖는 의미는.

“윤 신부는 사제이자 지성인으로 가톨릭과 사회적 언론·출판 활동, 선구적인 순교자 현양, 불의에 맞선 민주화운동 등 교회사적·민족사적으로 큰 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을 가능케 한 그의 신앙과 철학, 가치관을 되새기고 우리 스스로를 성찰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관계의 기초인 신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켜내는 신의를 순교자들에게서 찾았다. 사실 신앙선조들이 박해받은 것은 만민평등사상, 즉 하느님 아래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믿음, 신의, 가치관 때문이다. 순교자들이 지켰던 이 평등의 마음, 불변의 가치 수호를 위한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가치는 사회적 불의에 맞서고, 독재정권 아래에서 교회가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힘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원조 격이다.”

– 특별히 기억에 남은 윤 신부와의 인연은.

“민주회복국민회의 결성 당시 각계 분들을 모셨는데, 1956~1957년 ‘사상계’를 통한 뜨거운 지면논쟁으로 유명한 윤 신부와 함석헌 두 분도 처음 만났다. 두 노인의 만남은 옛 친구, 소년들의 상봉과 같았다. 힘을 모아 독재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하며 소년들같이 순수한 웃음을 나누던 모습이 생생하다. 두 어른의 일치와 연대에서 진실과 용기, 참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아름다움을 확인했다.”

– 이 시대 언론의 역할은.

“언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란 강론을 한 적이 있다. 성경이 하느님 말씀으로 창조의 힘이 있다면 언론은 인간의 언어로 창조의 힘을 드러내야 한다. 요즘 안타깝고 비애감마저 느낄 때가 많다. 공명정대나 진실이 아니라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속이는 일을 하는 경우까지 본다. ‘기레기’란 말까지 나온다. 언론이 출발점, 뿌리를 찾았으면 한다. 기자들 스스로 왜, 어떤 기자가 되려 했는지 순수한 초심을 되새겼으면 한다.”

– 세계적 탈종교화 속에 한국 종교도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 했는데, 아편은 독이기도, 또 약이기도 하다. 종교의 근본도 언론의 소명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사랑과 평화·용서를 통한 통합기능, 개혁과 고발·회개로 불의를 내리치는 채찍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자본주의의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데 급급하다. 돔 헬더 카마라 브라질 대주교는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면 성자라고 하는데,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꾸고자하면 공산주의자로 손가락질한다’는 뜻의 말을 했다. 지도자들부터 가식을 벗고 낮은 데로 내려가야 한다.”

함세웅 신부가 윤형중 신부 추모 서예전에 내놓을 작품 ‘世(세)-골고타 사형터 세 개의 십자가’(71×34㎝). 발문은 함 신부의 서예 스승인 이동천 박사가 썼다. 함세웅 신부 제공

– 서예전 준비는 잘되고 있나.

“열심히 써오고 있다. 50여점을 내건다. 성경과 명구, 부모님 말씀, 제가 하고 싶은 말 등 내용은 다양하다. 윤 신부님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전교(선교)에 도움되느냐’고 했다. 전시회를 망설이다가 그분의 신앙과 삶·가치관을 더 널리 알리는 데 도움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기도 하다.”

함 신부는 원로 사제로서 기도하는 삶을 살면서 민족문제연구소·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 고문 등으로 ‘정중동’ 활동을 하고 있다.


1946년 경향신문 창간 주역·사장 역임…주필 정지용·편집국장 염상섭 당대 문인들 이끌어

최근 함세웅 신부 등을 중심으로 삶과 사상, 활동상의 재조명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윤형중 신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공

한국 근현대사에서 선각자 면모를 드러낸 윤형중(마태오) 신부(1903~1979)는 1946년 10월6일 창간호를 낸 ‘경향신문’ 창간의 주역이기도 하다.

해방 직후 가톨릭계에서는 일제가 강제 폐간시킨 가톨릭 매체 ‘경향잡지’ 등의 복간을 검토하면서 종합일간지 창간을 논의했다. 정론지 창간이라는 대의에 당시 양기섭·이완성 신부와 윤 신부 등이 적극 나섰다. 결정권자인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주교는 신중했다. 이에 양 신부는 “수단(사제복)을 벗어버리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밝혔고, 윤 신부는 노 주교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마침내 경향신문은 노기남 주교가 초대 회장을, 양 신부가 사장을, 윤 신부가 부사장을 맡으며 출범했다. 초대 주필은 시인 정지용, 편집국장은 소설가 염상섭으로 당대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는 당시 언론·출판의 선구자인 윤 신부와의 인연이 작용했다.

해방 후 정치사회적 혼돈 속에 경향신문은 불편부당한 정론지를 표방했다. 창간 당시 3만부이던 발행부수는 1년 뒤엔 6만부를 넘어섰다. 윤 신부는 창간 이듬해 신문 운영을 둘러싼 노 주교와의 갈등으로 양 신부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사장대리를 맡았다. 윤 신부는 이승만 자유당 정부를 비판하는 논설을 둘러싸고 노 주교와 마찰을 빚었고 결국 이듬해에 물러났다.

이승만 정부는 결국 경향신문을 탄압했다. 인기 칼럼으로 지금도 게재되고 있는 ‘여적’ 내용을 문제 삼아 편집국장 등의 연행을 거쳐 1959년 4월30일 결국 폐간시켰다. 해방 이후 최대 언론 탄압 사건이다. 이듬해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사퇴 성명이 나오면서 법원의 복간 결정이 내려졌다.

윤 신부와 경향신문의 인연은 그가 3대 사장으로 취임(1961년 3월)하며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 가톨릭계의 재정난 등으로 1962년 1월 윤 신부는 사임하고, 가톨릭과 경향신문은 이듬해 5월 완전 분리된다.

최근 발간된 윤 신부 추모문집 <암흑 속의 횃불>에서 김석종 경향신문 사장은 기고문을 통해 “윤 신부가 씨를 뿌린 경향신문은 국내 첫 사원주주회사이자 ‘독립언론’으로서 불편부당 정론지의 길을 가고 있다”고 밝혔다.

도재기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20-10-05> 경향신문

☞기사원문: [창간기획]함세웅 신부 “근현대사 속 선각자 윤형중…불의에 맞선 그의 신앙 되새겨야”

화, 2020/10/06-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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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작가가 그린 춘향 영정이 봉안된 지 60년 만에 철거됐습니다. 이달 초순까지만 해도 철거를 미루기로 하면서 남원시 안팎은 소란스러웠는데요. 광한루원 곳곳에 철거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현수막이 내걸렸고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가 잇따랐습니다. 철거냐 아니냐를 두고 오락가락하던 남원시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당연한 시대적 과업의 첫걸음을 내딛으면서도 끝까지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 천재 어진화사에서 친일 부역자로..’이당 김은호’

반세기 넘게 광한루원 춘향 사당에 봉안돼 있던 춘향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지난 1961년 그린 작품입니다. 원본은 남원 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복사본을 춘향 사당에 걸어두었는데요.

이당 김은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로 잘 알려졌습니다. 조선 말부터 근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면서 잠시 독립운동을 했던 적도 있지만, 이내 변절했습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옹호하고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한 그림을 그려 총독부에 헌납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는데요. 지난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가운데 미술분야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도 포함됐습니다.

■ 남원시, 8월 철거 돌연 연기..의회 때문?

춘향 영정교체를 주도하고 있는 남원정신연구원 강경식 대표는 지난 7월까지만 해도 남원시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을 철거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고 증언하는데요. 하지만 철거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급기야 철거 시점을 시민 여론조사를 거친 뒤로 미루겠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남원시가 의회에 업무보고를 했더니 더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결정하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더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미 지난 2005년, 이들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 철거를 주도했지만, 남원시가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흐지부지된 뼈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인데요.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 요구로 지난 9월 7일, 남원시, 남원시의회 3자가 모인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남원시의회는 남원시의회의 어떤 의원도 현재 춘향 영정 철거 반대하지 않았다며,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의견을 집행부에 전달했을 뿐이라고 장황한 해명만 늘어놓았습니다. 남원시의회 반대로 친일화가 춘향 영정 철거가 무산된 것처럼 비쳤다며 남원시장에 대한 불쾌감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일부 남원시의원들과 춘향문화선양회 인사는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남원 시민 전체의 의견도 아니라며, 여론 조사 이후로 철거를 연기하자는 뜻을 고수했습니다.

남원시는 춘향 영정을 철거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낸 적이 없다며 의원님 눈치 보기에 급급했습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간담회는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하고 마무리됐는데요. 간담회를 지켜보면서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이렇게 한 걸음 떼기가 어려운 일이었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007작전하듯 철거..그들은 왜 숨기려 했나?

춘향제 개막일이던 지난 9월 10일 오후 늦게, 남원시는 친일 청산을 위해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을 9월 안에 철거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춘향 영정을 새로 봉안하도록 하겠다는 한 장짜리 보도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보내왔는데요.

9월도 막바지에 이르는데 철거 소식이 들리지 않아 남원시에 문의해봤습니다. 담당자는 아직 철거일을 잡지 못했다는 답만 반복했습니다. 취재를 가려고 하니 철거일이 정해지면 알려달라는 요청에 “저희는 (춘향 영정이) 철거되는 모습이 보도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답을 하던 담당 직원.

뭘 숨기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유를 물으니 동문서답만 이어졌습니다.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을 내리는 모습을 반드시 보도해야겠다는 의지는 더 강해졌는데요. 물어물어 확인해보니 철거일은 바로 이튿날이었습니다. 철거 시간도 미정, 알려주겠다던 직원은 철거 20분 전에 통보…. 우여곡절 끝에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 영정이 철거되는 순간을 영상에 담긴 했지만 지금도 언론을 대하는 공직자답지 못한 남원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60년 동안 친일 잔재 방치…뉘우침 없어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 철거엔 고작 10분 남짓 걸렸습니다. 숱한 논란을 생각하면 허무할 정도였는데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동참한다면서도 독립을 위해 순국한 선열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시간도, 후손된 입장에서 친일부역행위자의 잔재를 서둘러 지워내지 못한 통렬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광복 75주년인 올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친일 흔적을 지우는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춘향 영정을 교체하는 작업도 그 하나였을 텐데요. 봉안된 지 햇수로는 60년, 지역 내에서 철거 논의가 시작된 지 15년 만에야 친일 화가의 춘향 영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림 한 폭 내리는 일이 왜 그리 더디고 힘들기만 했을까요? 제때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는 아직도 세월의 무관심과 친일파 후손들의 방해, 관광자원으로 쓰려는 지자체의 꼼수 속에 부끄러운 낯을 당당하게 들고 숨 쉬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는 친일 잔재 청산에 좌고우면하는 지자체는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이수진 기자 [email protected]

<2020-10-05> KBS NEWS 

☞기사원문: [취재후] 친일작가 춘향 영정 60년 만에 철거…마지막까지 ‘쉬쉬’

화, 2020/10/06-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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