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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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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admin | 금, 2019/09/20-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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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눈물로 씁니다.
증조할아버지 김경천 장군님께

 

할아버지, 증손녀 올가예요. 겨우 한 줄 썼는데, 눈물부터 나와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시베리아 코틀러스 강제수용소. 평생을 대한의 독립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위해 애쓰신 할아버지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 추운 곳에 가둬놓고 언 땅을 파게 했을까요. 2012년 KBS 역사스페셜 다큐를 만들 때, 제가 그곳에 갔어요. 문서에는 거기 병원 근처에 할아버지 무덤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아니었어요.
솔제니친도 갇혀 있었다는 그 수용소에는 무덤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대요. 강제노역과 영양실조로 쓰러진 수용자들이 눈을 감으면, 포크레인 같은 기계로 땅을 파서 시신을 던져 넣고 흙으로 덮어버렸대요.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깊이 묻지도 않아서 조금만 땅을 헤쳐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드러났대요. 그래서 옛날부터 그 동네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뼈를 가지고 놀았다고 그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이리나라는 할머니가 증언해 주셨어요.
할아버지의 조국에 갔어요. 국립현충원이란 곳에도 갔어요. 독립운동하신 분들을 모신 국가묘지래요. 거기에도 할아버지는 안 계셨어요. 제가 직원분들에게 애원했어요. 제발 우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서 이곳에 모셔달라고요. 그냥 안 된다는 거예요.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빈말이라도 노력해보겠다고 답해줬으면 덜 야속했을 텐데….
그 수용소에는 일본인들도 많이 갇혔대요. 자기 조상이 거기 묻혀있다고, 후손들이 유전자 검사라도 해서 유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대요. 일본 정부는 알았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유해를 가려내 자기 나라로 가져갔대요. 서울 가기 전에 뉴스에서 봤어요. 벌써 몇 년 전에 폴란드도 그렇게 했고, 그리스도 그렇게 했어요.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그렇게 못해요? 저더러 할아버지 유해를 찾아오던가, 할아버지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얘기해 달래요. 이건 나라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할아버지가 되찾으려 한 나라잖아요.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의 외손녀예요. 할머니는 3·1운동 몇 년 전 서울 사직동 할아버지 댁에서 태어나셨어요. 돌아가시던 순간까지도 울면서 집에 너무 가고 싶어 하셨어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셨어요. 서울 집이며 동네 풍경을 그려주시면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어릴 적에 엄마가 해주신 한국 음식을 먹고 싶다고, 아빠 손을 잡고 구경 다닌 곳을 가보고 싶다고, 흐느끼셨어요.
스탈린 때는 이런 말이 있었대요.“벽에도 귀가 있다.” 얼마나 무서웠던지, 어른들이 잘 때 헝겊으로 입을 막고 잤대요. 잠꼬대라도 하다가 스탈린을 원망하는 얘기가 새나가면 아이들까지 죽을 수가 있으니까요. 제가 어느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오랫동안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왜 이곳으로 끌려오셨는지,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말도 못 꺼내고 살았어요. 솔직히 지금도 좀 무서워요.
저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엄마 아빠는 종일 일하러 나가시고. 우리 고려인들 많이 힘들었어요. 뼈에 사무치셨던지, 아니면 어린것이 못 알아들을 거라고 여기셨던지, 저를 다독이면서 혼잣말을 하셨어요. 그 얘기들이 너무 낯설고 신기했어요. 할머니는 어디 다른 나라에서 오셨나?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닌가? “스카스카”를 해주시는 줄 알았어요.
“스카스카”는 동화라는 뜻의 소련말이에요. 저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게 저는 김경천 할아버지를 알
게 됐어요. 할머니 덕분에요.
할아버지는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전쟁을 이끌었어요. 그 모진 세월, “백마를 타고 일제 침략자들을 무찌르던 김경천 장군”의 전설이 동포들의 가슴을 얼마나 뛰게 했을까요. 2005년 할아버지의 일기가 발견됐어요. 그게 바로 할아버지가 피눈물로 쓰신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었어요. 거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동서양에 전쟁이 전개되면 우리는 중국의 동북 3성과 시베리아에 자연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1백만의 우리 민족으로 세계에 대해서는 정의와 인도로, 일본에 대해서는 능히 혈전을 벌여 열강의 호의를 얻을 것이며, 독립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즉 나는 이번에 꼭 독립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직접 독립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가능하다.

 

할아버지가 망명하기 직전인 1919년 3월 1일에 쓴 일기였어요. 그 시절에 그렇게 멀리 내다보셨다니! 할아버지 머릿속에는 진정한 자주독립의 경로가 들어있었던 거예요. 강대국에 휘둘리는 약소국의 설움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이 독립전쟁으로 뭉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고,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도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래서 신흥무관학교로 독립군을 키우러 가셨어요. 무모한 짓이라고 손을 젓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이렇게 호통을 치셨어요.

 

저 죄수복을 입은 청년이 무슨 죄가 있는가? 일본아, 네 죄에는 무슨 옷을 입겠느냐. 저 청년들은 내가 사랑하는 민족 중에 최고로 용감한 사람이다. 모두 20세가 되나 못 되나 하다. 저들은 동포라는 것을 알았다. 민족이란 것을 안 사람이다. 인종이 생긴 그 동시에 만물보다 더 먼저이며 최고로 아름다운 자유라 하는 것이 있음을 아는 자들이다.
호의호식하는 자칭 유지, 신사들아, 모두 어느 구석에 가서 숨었느냐. 외국유학도 쓸데없고 나이도 소용없다.…… 우리나라 신사나 청년이 두 눈이 멀거니 앉아 밥이나 먹고 있음은 죄인이다. 조국의 부름을 모르는가! 아아,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적이지만, 그대들은 모르는 체하는 적이다.

 

할아버지의 조국에 공부하러 왔어요. 경복궁에 처음 가봤어요. 어떤 분이 근처에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거기가 이회영 선생님 기념관이었어요. 할아버지가 교관을 했던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분이요. 두리번거리고 있었더니, 기념관 분들이 저에게 누구냐고 말을 걸었어요. 김경천? 후손들이 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저는 할아버지 찾는 게 아닌 줄로만 알고 나왔어요. 그때까지 저는 이회영 선생님을 몰랐으니까요.
할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1년쯤 지나, 이회영 선생님 손자인 이종찬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게 소망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할아버지 유해를 찾고 싶다고, 할아버지 집터에 표지석을 놓고 싶다고, 백마 탄 할아버지 동상을 조국에 세워드리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할머니에게 증조할머니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유정화(柳貞和) 증조할머니. 할머니도 할아버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대요. 할아버지 댁에 재산이 많았는데, 그걸로 독립운동하는 분들 돕고. 옥살이까지 하셨대요. 할아버지가 망명한 뒤, 일본육사 후배들이 만든 <전의(全誼)>라는 회보에 할머니 이야기가 실려 있대요. 어느 분이 알려주셨어요.

 

김 부인은 수년 이래 부채와 생활난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작년 겨울 소유하고 있던 가옥을 매각해 부채를 정리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김 부인은 지 부인의 비참한 상황을 동정해 가옥 매각 때 일금 100원을 지 부인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그 의기 장하다고 할 만하다. <전의(全誼)> 1923년 6월 24일자

 

이 글에서 “김 부인”이 증조할머니이고, “지 부인”은 할아버지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이자 신흥무관학교에서 함께 교관을 지낸 지청천 장군 부인이에요. 신흥무관학교에서는, 할아버지와 지청천 장군 그리고 동천(東天)이란 별호를 쓴 신팔균(申八均) 선생님 세 분을 가리켜 “ 삼천(三天)”이라고 불렀대요. 신 선생님은 고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申櫶) 어른의 손자로,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나오셨대요. 할아버지들이 독립군 동지니까, 할머니들도 독립운동 동지였던 거예요.
할아버지의 맏딸, 김지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늘 말씀하셨어요. 아주 먼 곳에 우리 고향이 있단다. 그곳은 참 좋은 곳이란다. 우리는 지금 갈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참아야 한단다. 우리가 여기서 고생을 해야 고향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잘살 수 있단다. 그게 무슨 뜻인지, 어릴 적에는 몰랐어요. 그러나 지금은 알아요. 할머니의 혼잣말은 할아버지가 맏딸에게 들려주던 말씀이었다는 것을.
할아버지께 고백할 게 있어요. 어쩌면 할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드릴 것만 같아 두려워요. 저는 할아버지 조국에 와서 깜짝 놀랐어요. 어떤 나라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할아버지의 조국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동료들을 한동안 잊고 살았대요.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고 계셨어요? 그래서 일기에 이렇게 쓰셨나요? “아, 춥고 외로운 이 고독한 군대의 장졸들을 누가 위로할까. 이 장졸들의 심정을 훗날 누가 동포들에게 알려줄까.”
자기 뿌리가 뭔지 잊으면 어떡해요. 여기는 자본주의라서 그런지, 출세한 사람들이 다 돈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이익만 바라보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럼 나라 망하잖아요. 할아버지는 날마다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가족도 잊어버리고 독립만 생각했던 분이에요. 그 정신을 정말 회복했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그 일을 도울 수 있을까요.
많은 분들께서 노력하고 계세요. 대통령 직속으로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100인 위원회도 생겼어요. 저도 100명 중 1명으로 참여하게 됐고요. 정말 고맙고, 기뻤어요. 그런데, 저는 회의에 가면 울음부터 나와요. 어떤 분들은 저더러 왜 그리 서럽게 우느냐고 물어요.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요. 우리 고려인들이 100년 가까이 어떻게 살았는데…. 귀 막고 입 막고….
할아버지는 연해주에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끌려가셨어요. 몇 년 만에 풀려나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당한 가족 곁으로 돌아오셨지만, 두 달 만에 또 잡혀가셨어요. 모스크바감옥에 갇혔다가 시베리아수용소에서 끝내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돌아가셨어요. 저는 할아버지의 조국에 와서 결혼을 했어요. 얼마 전에 딸도 낳았어요.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태어난 할아버지의 첫 번째 후손입니다. 할아버지께 알려드리고 싶어요. 할아버지의 핏줄이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왔다고요.
증손녀 김올가 올림(<100년 편지> 334호, 20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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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전 친일파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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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운동과 신소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인직은 일본육군성 한국어 통역으로 임명되어 제1군 사령부에 배속되며, 1905년에 그 공적을 인정받아 80원의 사금(賜金)을 받습니다. 일본 유학 시절 이미 일본제국주의에 호의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그였기에 가능했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가 러일전쟁의 성격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한 전쟁,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국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국 강점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결정적 계기부터 기여했다는 것은 그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호의가 곧바로 직접적인 매국행위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과 1905년 을사늑약 등을 계기로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문학에 있어서도 계몽주의 문학이 전개됩니다. 한국의 계몽주의 문학은 갑오개혁 이후의 창가나 신소설 등을 말하는데 이인직이 쓴 <혈의누>가 신소설로는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계몽주의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계몽운동이 일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차이점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서구의 계몽주의는 17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되어 18세기를 풍미합니다. 계몽주의의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단어인 ‘enlightenment, Aufklärung, lumières’에 볼 수 있듯이 서구의 계몽주의는 빛(light)과 관련된 말로 표현됩니다. 그 빛의 연원은 성경에서 출발합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빛이 있으라(Let there be light)”가 그것입니다. 즉 빛은 그것이 생김을 통해 무질서한 혼돈의 카오스(chaos)가 질서정연한 코스모스(cosmos)로 변화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계몽주의에서 이 빛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이성(reason)’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이해할 수 있고,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성을 통해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펼치는 철학운동이었습니다.
계몽주의의 핵심적 가치들은 이성, 기계론적 과학, 보편주의, 진보, 개인주의, 관용, 자유주의, 사유재산, 세속주의 등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근대주의의 총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민족주의’까지 연관됩니다, 좀 복잡한 문제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부터 시작하여 계몽주의,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들을 설명해야겠지만 이 정도에서 갈음하겠습니다. 결과론적으로 계몽주의는 교회와 절대왕권으로부터의 ‘자유주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세계 3대 시민혁명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라는 번역은 ‘enlightenment’라는 단어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뭔가 부족한 번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물론 서구의 계몽사상가는 ‘계몽’을 위해 더 많은 독자에게 다가설 수단을 개발했으며 소설, 연극, 풍자시, 심지어 포르노그래피까지 동원하여 기성 세계와 가치관을 비웃고 공격했습니다만 핵심이 ‘계몽’ 그 자체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그에 반해 한국의 계몽주의는 서구의 근대화를 쫓아가기 위한 계몽이었습니다. 근대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으로서 근대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중국적 세계질서가 깨지고 서구의 근대적 국제질서가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화이(華夷)사상에 입각해서 야만, 오랑캐로 상징되던 서양이 아니라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의 반영이었습니다. 개화, 자강 등의 단어가 이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특히 1904년 이후의 계몽주의·계몽운동은 일제 침략에 대한 구국운동의 성격을 가집니다. 이는 그 자체로 혼란입니다. 또한 역사적 배경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서구사상 즉, 18세기 계몽주의의 뒤를 이은 19세기 ‘사회진화론’까지 동시에 혼재되는 양상이 이 혼란을 증명합니다. 서구에서 2세기에 걸친 사상적 흐름이 10여 년 정도의 기간에 왜곡된 형태로 압축되어 전개된 것은 제국주의라는 외부 충격에 의해 억지로 근대로 진입하고자 하는 시도가 얼마나 큰 혼란을 초래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인직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 1906년 2월 국민신보 주필을 거쳐 1906년 6월 만세보 주필을 역임하면서 1906년 7월부터 <혈(血)의누(淚)>를 만세보에 연재합니다.이후 <귀(鬼)의성(聲)>(1906.10)을이어서 연재한 다음 1908년 유일서관에서 <치악산(雉岳山)>과 <은세계(銀世界)>를 출간합니다.

 

양반을 보면 대포로 놓아서 무찔러 죽여 씨를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 거죽으로 따르고 (귀의 성)

우리나라 일은 깊은 잠 어지러운 꿈과 같아 불러도 아니 깨이고 몽둥이로 때려도 아니 깨이는 터이라. 어느 때든지 하늘이 뒤집히도록 천변이 나고 벼락불이 뚝뚝 떨어지기 전에는 저 꿈 깨기가 어려우리라 싶은 것도 옥남의 생각이라(은세계)

 

이인직의 신소설은 평가가 엇갈리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위의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반봉건사상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회주의 문학운동가 임화조차 경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낡은 사회기구의 부패상이나 몰락과정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계층적인 제 모순과 사회적인 제 갈등이 투쟁의 높이에까지 고조되어 표현되고 있다. 즉 봉건적인 학정 하에 신음하는 인민의 참을 수 없는 상태와 더불어 그들의 반항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행위가 부패한 구기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취급되고 있다. 이 점은 범백의 신소설 중 <은세계>를 가지고 최고봉을 삼지 아니할 수 없다.(임화, 「개설 신문학사」, <조선일보> 1940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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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글에서도 이인직이 일관되게 봉건의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고 표현했듯이 “이인직에게 글쓰기는 봉건체제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한기형, <한국근대소설사의 시각>,1999)이라는지적은일면타당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글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로 일관된 것은 부정하기 힘듭니다. <혈의누>와 <귀의성>의경우제목에서부터 일본의 영향을 드러냅니다. <혈의누>와 <귀의성>는우리말로‘피눈물’과‘귀신소리’인데한문혹은 한국어는 이렇게 복합명사를 간단히 붙여 쓴 명사의 나열로 표기하여 앞의 명사가 뒤에 오는 명사의 재료 또는 구성요소임을 나타내는 게 일반적입니다. ‘피의 눈물’과 같은 방식으로 ‘~의(の)’를 체언의 뒤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 복합명사를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血의淚>와 <鬼의聲>은일반적으로 <血淚>와 <鬼聲>이라고 간단히 표현합니다. 이런 식으로 관형격 조사를 붙이는 방식은 石の橋(돌다리), 竹の子(죽순) 등처럼 일본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합명사의 표현방식 중 하나입니다. 이인직이 10년간 일본생활을 했던 습관이든 아니면 의도적이었든 최초의 신소설이 일본어투의 제목을 달고 계몽주의를 표방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이인직의 신소설은 대부분 한국의 후진성에 대비한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 작품입니다. 물론 이인직뿐만 아니라 신소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문명개화’ 사상 전파의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계몽이 누구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인가 입니다.

 

구씨의 목적은 공부를 힘써 하여 귀국한 뒤에 우리나라를 독일국같이 연방도를 삼되, 일본과 만주를 한데 합하여 문명한 강국을 만들고자 하는 비사맥 같은 마음이요.(혈의누)

 

만일 우리나라가 칠십년 전에 개혁이 되어서 해삼위(海蔘威)에 아라사 사람이 저러한 근거지를 잡기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착수하였을 것이요, 만일 오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다면 해삼위는 아라사 사람에게 양도하였으나, 청국 만주는 우리나라 세력 범위 안에 들었을 것이오.
만일 사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육해군의 확장이 아직 일본만 못하나, 또한 당당한 문명국이 되었을 것이오. 만일 삼십년 전에 개혁이 되었으면 삼십년 동안에 중등 강국은 되었을지라. 남으로 일본과 동맹국이 되고 북으로 아라사 세력이 뻗어 나오는 것을 틀어막고 서로 청국의 내버리는 유리(遺利)를 취하여 장차 대륙에 전진의 길을 열어서 불과 기년에 또한 일등 강국을 기약하였을 것이오.(은세계)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기초한 「삼진연방(三陣聯邦)」을 비롯해 이인직은 소설을 비롯해 여타의 저작을 통해 일관되게 일본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이인직의 계몽운동은 일본의 관점에서 바라본, 즉 일본의 세계관에 입각한 계몽사상이라고. 그가 가진 이런 사상과 관점은 그의 논설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나며 경술국치에 구체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 3부에 계속

김덕영 선임연구원

화, 2018/01/0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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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68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256점 보내와
7월 4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68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주요 자료는 박OO이 1950~60년대에 문교부, 전라남도지사 등에서 받은 발령·호봉 통지서, 위촉장, 이력서 등이다.

 

7월 26일, 고 임종국 선생의 누이동생인 임경화 여사가 작품 1점을 기증했다.

임종국 선생의 어머니가 태몽으로 ‘눈이 하얗게 내리는 밤에 설중매가 나온 장면’을 꾸었는데 임경화 여사가 이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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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月孤山處土家 湖光寒浸玉橫斜
밝은 달은 외로운 산속 처사 집을 비추는데
호수 물빛은 차갑게 매화나무 가지를 적시네

 

이치노헤 쇼코 씨 연구소 방문 후 자료 기증

지난 7월 16일 이치노헤 쇼코 씨가 연구소를 방문하여 <조선 침략 참회기>(2013)과 「명치27년8월5일경성개선그림 我兵京城凱旋之圖」 총 2점을 기증했다. 지난 2016년에 <1907년 경회루에서 찍은 일본과 대한제국 관료들> 사진1점을 기증한 후 2번째 자료기증이며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발전을 바란다”며 역사관 기금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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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8/09/0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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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 교육홍보실장

11월 9일(목) 워싱턴을 향해

지난 11월 9일 임헌영 소장님을 모시고 인천공항 오전 10시 15분발 워싱턴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미국의 워싱턴, 뉴욕, LA에 민족문제연구소 지부를 결성하기 위해 8박 9일의 긴 출장에 오른 것입니다.
워싱턴까지는 무려 13시간 40분. 비행시간이 긴만큼 기대는 높아졌습니다. 워싱턴 덜레스 국제공항(IAD)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여전히 9일 아침 9시 50분입니다(이후 일자 시간은 현지 기준).
주희영 회원과 박현숙 님(윤흥로 박사님 부인)이 공항에 마중 나와 주셨습니다. 인사 후 바로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는 워싱턴 교외인 알링톤(Arlington)의 가정집입니다. 이번 워싱턴 지부 결성에 핵심 역할을 해주신 윤흥로 민주평통 워싱턴지회장님 댁입니다. 이미 한국에서 뵈었던 터인데다가 유머도 있으신 분이라 내 집 같이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짐을 풀고 잠시 쉰 후 ‘설악가든’이라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점심식사를 겸해서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한국일보 워싱턴지국, 기쁜소리방송 등 현지 한인 언론과 합동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중앙일보 워싱턴지국 기자들은 한국 본사와 달리 진보적인 분들입니다. 출국하기 전 제가 보낸 원고도 그대로 실어주었습니다. 다만 양면 통광고로 이승만·박정희 유료광고가 같이 실린 건 유감이지만 말입니다. 소장님이 쓰신 원고도 한국일보 워싱턴판에 실렸고요. 이 글들이 실리자마자 워싱턴에 도착해 또 한 차례 심층인터뷰를 진행한 겁니다. 시작이 좋습니다.
윤흥로,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곧 조직될 워싱턴지부 핵심 회원들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은 주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소개, 친일인명사전, 식민지역사박물관, 워싱턴지부 결성의 의미와 앞으로의 활동계획 등이었습니다. 소장님이 주로 인터뷰를 하시고 그 외 현지 회원분들과 저도 거들었습니다.
점심 후 숙소로 돌아와 몇 시간 정도 숙면했습니다. 시차적응도 안 된데다가 14시간 가까이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숙소에서 환영을 겸한 만찬을 했습니다.

윤흥로 부부, 노병원, 김조명, 박희구, 정석구, 주희영, 김미현 등 70대부터 30대까지 어우러진 즐거운 자리였습니다. 노병원 선생께서 갑자기 “박선생은 민족주의를 무어라고 생각합니까?” 라고 물어보시기에, 저는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 담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정도로만 대답했습니다. 조심스럽기도 해서요.
식사에 와인을 곁들인 멋진 만찬이었지만, 모두 차를 갖고 오신 터라(밤 10시30분경 끝냈습니다) 전 헨리 16세가 먹었다는 술부터 시작해 다양한 와인을 빨리 많이 마셨습니다

10월 10일(금) 워싱턴 2일차, 민주평통 특강

이날 오전은 주희영, 김미현 두 분의 안내로 워싱턴의 몇 군데를 들러보았습니다. 먼저 아메리카홀로코스트 뮤지엄에 갔습니다. 미국 유대인들이 출연한 민간기구로 무료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와 시설에는 놀랐지만 진품이나 원본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홀로코스트는 기억해달라면서 정작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현실을 생각하자니, 다소 불편했습니다. 또 나치 희생자에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집시, 동성애자 등이 있었는데 왜 자신들에게 가해진 것만 보라는 건지… 문득 수구집회 때의 이스라엘 국기가 생각나 감정이 롤러코스트를 타는 듯했습니다.
이어 국회의사당도서관에 들렀습니다.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전시회를 비롯해 각종 이벤트가 열려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의 기증자료를 기반으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담에는 맞은편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겉으로만 보았습니다. 미국 대통령도 이 건물 정문 계단 위 월대에서 취임 선서식을 합니다. 그 악명 높은 가쓰라-태프트밀약이 이뤄진 방도 이 건물에 있다고 주희영 회원이 일러줍니다.
점심은 워싱턴 DC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식당인 Old Ebbit Grill에서 박진영(American University 교수. 동아시아사상사 강의) 교수님, 주희영, 김미현 씨와 함께 먹었습니다. 박교수님은 워싱턴의 초대 지부장이 되실 분입니다. 식사하면서 우리 연구소와 지부의 향후 사업방향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박교수님과 헤어졌습니다.
저녁 6시 30분. 한미과학협력센터(Koran-US Science Cooperation Center)에서 워싱턴 민주평통 초청 특강 ‘분단을 넘어 통일의 길로’라는 주제로 제가 두 시간 정도 강연과 질의응답을 했습니다. 제가 정부유관단체에서 통일을 주제로, 그것도 워싱턴이라는 제국의 수도 부근에서 강의하다니!!!
당연히 임헌영 소장님이 하셔야 할 강연을 외람되게도 제가 하게 되어 송구했습니다. 민주평통 사무국의 일부 잔존 인사들이 제가 좌빨이라는 이유로 반대함에도 관철시키고 마땅히 소장님이 하셔야 함에도 일부러 제게 기회를 주신 윤흥로 회장님의 깊은 뜻에 감사드립니다.
강의 내용과 평가는 어땠냐구요? 직접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베리 굿!”이었다고 합니다. 초청측 인사나 우리 연구소 위상에 누가 되지 않아 천만다행입니다.
밤 9시쯤 고려촌이란 식당에서 심훈 선생의 손주 사위, 이재수님 등도 합석해 순두부에 막걸리를 함께 마시고 밤 11시경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10월 11일(토) 워싱턴 3일차, 지부 창립대회 개최

이날은 소장님께서 강행군 하신 날입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워싱턴지역의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점심시간을 포함해 6시간 가까이 강의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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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에 저는 고약하게도 주희영, 김미현 회원과 링컨기념홀, 백악관 앞 등을 ‘관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식 초밥집에서 윤흥로 정석구 두 분도 함께 어울려 점심을 먹었습니다. 웬만하면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로 푸짐하게 각종 초밥을 맛보게 해주신 윤흥로 회장님 덕에 모두들 잘 먹었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어제와 같은 곳인 한미과학협력센터에서 우리가 온 목적인 강연회와 워싱턴지부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제 강의 주제는 ‘우리 시대 역사적폐를 말한다’였는데, 썩 잘하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지부는 순조롭게 결성되었습니다. 지부 이사장에는 윤흥로, 지부장은 박진영 교수, 사무총장 주희영, 간사 정석구 김미현 등 기본꼴을 갖추었습니다. 미국의 심장부인 워싱턴-소장님은 ‘세계의 수도’라고-에 최초의 미주 지부가 결성되는 감격의 순간입니다. 이렇게 워싱턴의 마지막 밤은 깊어갔습니다.

10월 12일(일) 뉴욕 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개최

워싱턴 Reagan National 공항에서 10시에 출발해 뉴욕 JFK 공항에 11시 좀 넘어 도착했습니다. 박매헌-클래어 부부회원이 공항까지 마중 나오셨습니다. 뉴욕 촛불집회를 이끈 젊은 부부입니다. 박매헌 회원의 미국식 이름은 Kevin인데 스스로 윤봉길 의사의 호를 따서 활동할 정도로 민족의식과 민주주의 신념이 투철한 분입니다. 곧장 숙소이자 모임장소인 이춘범님 댁으로 갔습니다. 70대의 이춘범 선생님은 한국에서 코리아 헤럴드 기자로 3년간 일하시다가 뉴욕으로 오셨답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뒤에서 뉴욕 한인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셨고, 박매헌 부부 등의 촛불집회에도 많은 응원을 해주신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관련 자료 특히 한국전쟁과 관련해 많은 자료들을 소장하고 계십니다. 소장님이나 저도 전혀 몰랐던 분입니다. 이춘범 선생님의 말씀에 소장님과 저는 감격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일체의 단체 직을 맡지 않았지만, 죽기 전에 민족문제연구소 뉴욕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게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터넷으로 늘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을 보고 응원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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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지부 창립준비위원회 결성 후

저녁 5시부터 사모님이 손수 마련한 음식들로 저녁을 나누면서 뉴욕지부 창립준비모임을 위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80대부터 40대 뉴욕 촛불집회세대까지 30명 이상 모였습니다. 소장님과 저는 연구소 소개, 해외지부 설치 의미 등을 설명한 후 참석자분들과 질의응답식으로 진행해 뉴욕지부 창설을 결의했습니다. 지부 이사장님으로 이춘범 선생님을 만장일치로 추대했습니다. 내년 3월경 창립총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뉴욕지부는 정치의식이 뛰어난 원로부터 작년 뉴욕 촛불집회를 주도한 젊은 세대가 어우러져 아주 좋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운동가도 한국인 아내인 이선아 회원을 따라 참석해, 미제국주의를 규탄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발언을 해서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에서 19세 소녀가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절 만나러 와 또 감격했습니다.

10월 13일(월) LA 첫날, 지부 결성 준비회의를 하다

이춘범 선생님의 차로 JFK공항으로 가 11시 15분발 비행기로 마지막 행선지인 LA로 향했습니다. 6시간 넘게 걸려 JFK공항에 도착했는데도 시차 때문에 LA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 반쯤 되었습니다.
마중 나온 정찬열 선생님(문인)의 차를 타고 곧장 ‘명동교자’라는 식당으로 직행했습니다. 기내에서 점심을 사먹지 않아서 배가 많이 고팠습니다. 칼국수와 만두국 등을 시켜먹었는데, 칼국수가 기가 막히게 맛있었습니다. 1인분이 한국에서는 2인분 정도입니다.
식사 후 소장님과 함께 숙소인 JJ Hotel로 들어갔는데, 이 호텔 2층에서 박정희출생백년기념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숙소에 짐을 풀고 로비로 내려오다가,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조갑제 씨와 마주쳤습니다. 소장님이 아는 체 하자(실은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 조갑제 씨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굽신굽신하면서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는 겁니다. 이겁니다!!! 가짜는 진짜를 만나면 쥐가 고양이를 만나듯이 됩니다.
저녁 6시 우리는 중국식당인 용식당에서 LA지역 유력 단체 관계자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지부 결성건을 논의했습니다. 70대의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 1세대 어른부터 40대 성공회 신부님, 세월호, 일본군 ‘위안부’ 관련 운동단체, 촛불집회 핵심관련자들이 함께 참가했습니다.
마치 LA시민단체 연석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조갑제 김평우 같은 수구 인사들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학술대회를 열었고, 우리가 지부창립총회 준비회의를 하는 동안 건넌방에서 이들도 뒤풀이 모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두 개의 LA가 미래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시작한 셈입니다.

11월 14일 LA 2일차, LA지부 창립

오전과 오후는 소장님을 모시고 LA 민족학교와 지역 문인들을 만나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LA원불교 교당에서 민문연 LA지부 창립대회 겸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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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식에서 정찬열 선생님이 지부장, 김창옥님(국선도 사범)이 사무국장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드디어 미국 속의 작은 한국 LA에 연구소 지부가 출범한 것입니다. 이어 신은미 님의 축가와 저의 특강이 이어졌습니다. 박근혜정권 때 북한 방문기를 순회토크쇼로 진행하다가 추방되었던 바로 그분입니다. 부군과 함께 2시간 반이나 차를 몰고 참석했습니다.
신은미 님이 피아노를 치면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니 그만 저까지 울컥해졌습니다. ‘우리시대 역사적폐: 분단적폐’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하는데 목이 메어 잠시 민망했습니다. 처음에 사람이 많지 않아 걱정했는데 강연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당이 꽉 찼습니다. 강연 반응은 매우 좋았습니다. 소장님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비로소 저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강연마저 신통치 않으면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겠습니까.

11월 15일(수) LA 3일차, 소장님의 문학 강연

소장님의 인맥은 넓고 다채롭습니다. 이날 점심은 미주한국문인협회장 이윤흥, 미주시인협회장 조옥동, 재미수필문학가협회장 김화진, 미주소설가협회장 곽셜리, 미주가톨릭문협회장 정찬열, 미주시학회장 정미셸 등과 함께 했습니다. 점심 후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저녁 6시부터 9시까지 소장님은 현지 문인들을 대상으로 ‘사랑과 행복, 구원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습니다.
저는 따로 연구소 이상윤 회원이 긴급 연결해준 외삼촌이란 분과 횟집에서 편안하게 술 한 잔 했습니다. LA에 다시 들르면 술친구 삼아 만나자고 하십니다. 신은미 씨 부부도 뒤늦게 합류해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워싱턴 뉴욕 LA에 가면 우리를 맞아줄 동지들이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11월 16일(목) 서울을 향해

미국시간 11월 16일 톰브레들리공항에서 오전 11시발 비행기를 타고 13시간 정도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8박 9일의 출장으로 워싱턴, 뉴욕, LA 등 미주 3대 지부를 결성하는 역사의 현장을 함께하여 그 보람은 이루 말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현지 회원들의 노력도 컸지만 소장님이 오랫동안 공을 들이신 결과이기도 합니다.
7박 8일 동안 칠십이 훨씬 넘으신 고령이심에도. “박실장, 이런 출장, 신나지 않아?” 하시며 놀라운 체력과 열정을 보여주신 임헌영 소장님. 새삼 존경합니다. 그리고 워싱턴 뉴욕 LA지부 창립에 헌신하신 현지 동지들과 기꺼이 회원이 되어주신 동포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출장을 매끄럽게 준비해준 연구소 사무총장님 이하 상근 동지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화, 2018/01/0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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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문인들의 이름을 딴 기념문학상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연구소는 작년 11월 29일 서울 대학로 함춘회관에서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와 공동으로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주제로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가 열리기까지 작가회의 회원이자 시인인 권위상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전 서울서부지부장)의 노고가 컸다. 이 토론회 이후 작가회의도 올해 3월 25일 내부 토론회를 열어 이 문제를 집중 논의했으며 5월에는 미당문학상 수상 경력이 있는 김혜순 시인이 5·18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수상의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 김 시인이 스스로 수상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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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현실문제에 직접 참여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는 송경동 시인이 7월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미당문학상 후보에 자신을 포함시키려는 중앙일보사의 연락을 받고 “적절치 않은 상”이라며 거절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서 “미당의 시적 역할이 있을 수 있겠지만, 친일 부역과 5·18 광주학살과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쓰고 그 군부정권에 부역했던 이를 도리어 기리는 상 자체가 부적절하고 그 말미에라도 내 이름을 넣을 수는 없다”고 썼다. “그건 어쭙잖은 삶이었더라도 내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부정이고, 나와 함께 더불어 살아 왔고 살아가는 벗들을 부정하는 일이며, 식민지 독재로 점철된 긴 한국의 역사, 그 시기 동안 민주주의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 수없이 죽어 가고 끌려가고 짓밟힌 무수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내 시를 존중해 주는 눈과 마음이 있었다면 도대체 나와 미당이 어디에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라며 “ 조금은 외롭고 외지더라도 내가 걸어보고 싶은 다른 길이 있다고 믿어 본다”며 미당문학상 거부 뜻을 분명히 했다.
연구소는 작년 8월 한국문인협회(이사장 문효치)가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려 하자 집회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상 제정을 철회시킨 바 있다.
∷ 방학진 기획실장

월, 2017/08/07-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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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가 강북구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는 근현대사기념관이 여름방학을 맞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사 강좌를 열었다.
최근 ‘암살’, ‘밀정’ 그리고 ‘군함도’와 같이 우리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영
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한 장면들이 무엇일까하는 궁금증을 가질 법하다. 이런 궁금증을 해소하고 청소년이 영화를 통해 근현대사에 관심을 가질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영화로 배우는 일제강점기’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개설하였다.
이번 강좌는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살려 연구소 상근자들이 직접 강사로 나섰다. 조한성 선임연구원, 이준식 근현대사기념관장, 김승은 자료실장, 노기 카오리 선임연구원이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강좌를 진행되었으며, ‘밀정’, ‘암살’, ‘안녕, 사요나라’, ‘군함도’를 차례로 다루었다.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사요나라’를 다루는 강좌에서는 강제동원 피해 유족인 이희자 여사(태평앙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대표)와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해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를 직접 느끼고, 역사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
수강신청은 7월 10일부터 24일까지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강좌 별로 20명을 선착순 접수하였다. 무료로 진행되는 강좌이며 출석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점과 여름휴가가 변수로 떠올랐으나, 기념관 인근에 위치한 신일중학교 교사의 권유로 평소 역사에 흥미를 가진 3학년 학생 6명이 전 강좌를 참여하였고, 1강 20명, 2강 24명, 3강 25명, 마지막 강좌는 수강생의 학부형까지동석한 까닭에 29명으로 수강 정원을 훌쩍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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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좌를 마친 청소년들은 ‘전체 역사를 기억하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강사의 질문에 각자의 다짐과 응원을 담은 메시지를 작성해 희망나무를 꾸몄다. 제일 인상 깊은 강좌로 제3강 ‘안녕, 사요나라’를 꼽으며 일본의 강제 징용 피해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모든 강좌를 빠짐없이 들은 청소년 17명에게는 수료증을 발급했다.
현재 근현대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 저항과 협력의 다른 선택을 한 사람들을 주제로 개관1주년 기념 기획전 ‘한 시대 다른 삶’을 준비 중이다. 또한 기념관 인근 묘역에 잠든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와 독립민주시민학교 강좌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니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최인담 학예사

월, 2017/08/0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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