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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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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익명 (미확인) | 수, 2019/04/10- 11:53

단야를 읽고

‘김천교육너머’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김천 출신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던 ‘김단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없다고 하자,
“우리가 공부해보고 김천에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걸 알리는 작업을 했으면 해요.”
그리고는 그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소개했다.
경북역사교사모임에서 경북의 항일운동가를 찾아 김천을 답사한 적이 있다고 해서 물어보니
“김천엔 흔적이 너무 없어서 별로 못 가보았다.”면서
“‘단야’라는 소설이 있으니 읽어보세요.”
김찬수 사드저지대경대책위 대표가 귀뜸해 주었다.

시립도서관 도서 자료를 검색하니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소설책 ‘단야’도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서 그런가? 할 수 없이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한국사회주의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길사)외에는 없었다. 중고장터를 뒤졌다. 정동주 지음 전 7권으로 된 대하소설. 발간연도는 1992년이었다. 출판 당시 평을 찾아보니 나쁘지 않은데 절판된 모양이다.
‘단야’는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단야’(본명 김태연)를 모델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선택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그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하나같이 자신의 이해관계, ‘이기심’을 따라 움직인다.
문수리, 후에는 대양읍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것은 거대한 정치 흐름 속에서의 삶이다. 그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져 갔고, 헌병보조원이 되는 등 일본에 적극 가담하여 동포를 괴롭히는 데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반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사람들은 지배계급인 양반의 수탈에서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는 과정에서 일상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의식하든 못하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러 치밀한 계획아래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의 특징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오.”
조선을 침략하기 몇십 년 전부터 첩자들을 보낸다. 조선의 말을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고을의 가장 신임 받는 명망가를 조사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천대받는 출신 중 똑똑한 아이들을 조사한다.
그 결과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분상의 차별이고, 조선인들은 성급하고 말로 싸우지 문서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것은 공동체 파괴라는 분석을 내린다.

대양읍에 온 일본인은 먼저 돈밖에 모르는 최건이라는 인물을 이용한다. 그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제재소를 차려서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서 운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 고을의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을 시켜서 화투를 보급한다. 처음엔 다 잃어주며 농민들을 화투판에 끌어들여 드디어는 그들의 집과 땅을 넘겨받는다.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사는 집을 짓고 유곽을 만들어 최건에게 관리하게 한다. 그러다 최건이 기억에만 의존해 관리하는 걸 약점으로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게 하고 제재소에는 손을 떼게 한다.
그리고 가장 유지였던 이들을 이런 저런 친분과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야금야금 그들의 이름으로 소작인들에게 장리빚을 주게 하고, 땅을 사게 하고,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당연히 마을 유지들은 자식이 일본에서 공부하면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 심리로, 신분이 천한 김형구는 돈은 많으나 아직도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식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그 유혹에 응한다. 일본이 이렇게 유지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볼모로 데려가는 것이다. 점점 요구 조건을 세게 해서 들어주지 않을 때 걸핏하면 아이들을 들먹임으로써 점차 자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천민 출신으로서 뛰어난 아이들도 유학대상이다. 그들의 울분과 분노로 조선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망하게 한다는 치밀한 프로젝트였다. 이 과제에 일본에서 들어온 경찰과 깡패들, 또 군대, 헌병들은 당연히 힘으로 조력하였다.
김형구의 아들 단야는 그런 천민,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의 혈통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신분의 차는 없어졌다고 하나 그는 어릴 때부터 그 백정의 출신이라 해서 받는 냉대를 느끼고 자랐다.
이복형 시영은 유부녀인 순개와 바람이 났으나 순개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외면하고, 부모가 없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집가야 하는 양반집 딸 명채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 차이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명채는 어쩔 수 없이 시영의 아내로 살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편과 시댁을 멸시하고 은연중 남편을 냉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영이 일본인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가서 숨어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이, 명채는 가끔 시영의 소식을 몰래 전해 주던 시영의 친구 정수와 사랑을 나누다가 들키자 아이를 두고 쫓겨난다.

단야 역시 어린 시절 정수 아버지 강재상의 사랑방에서 만난 채호와 게걸 목사가 세운 교회학교에서 배우면서 양반 딸인 지호와 사랑이 싹트지만, 그 만남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강재상은 지호와 단야가 어울리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 어머니는 싫어한다. 어머니의 강요로 혼례식을 치른 첫날 지호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신랑을 노하게 하고 파혼을 한다. 그리고 단야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으나 둘은 같이 살면 살수록 신분이라는 벽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절망한 지호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 버린다. 그리고 단야와 조선으로 돌아와 오랜 고민 끝에 헤어지기로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야는 일본에서 독립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듯 살아야 하는 천민의 처지에서 인간답게 살다 죽을 수 있는 해갈과 해방의 샘물’을 갈구하게 된다. 그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준 스승이 조선 총독부에서 제의한 문화제도 연구를 하러 조선으로 들어가면서 단야에게도 같이 하자 제의했을 때, 그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일본의 사회주의 역시 일본에 오면 일본 제국주의화한다는 것을.
단야, 지호의 두 오빠, 최석두 모두 아버지가 처음부터 또는 피치 못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고, 그 아버지들의 욕망 때문에 일본에 유학 왔지만, 부모들과 달리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최건의 아들 최석두.
단야는 러시아로 간다. 러시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넘어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도에서 힘들게 살다가 시베리아로 가면 먹고 살만한 것을 알고 겨울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촘촘히 초소를 세우고 총을 쏘아댄다. 총탄을 피해가며 강을 건너가면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날이 밝아서야 확인하게 된다. 일단 강을 넘어가면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 수 있다. 당시 시베리아 땅을 개간하는데 조선은 귀한 자원이었고, 그러한 러시아에 많은 조선인들이 귀화한다. 제정러시아 때는 짜르 왕정을 위해 러일전쟁에 가담하고 혁명이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백군위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백군위 쪽을 일본군이 지원하고 볼세비키 혁명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조선인들은 갈등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적군에 가담하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더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또는 일본의 수탈을 피해 시베리아로 향했다. 개중에는 조선에서 지배계층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기서도 지배계층이 되길 원해서 갈등이 있기도 했다.

단야는 독립에서 나아가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 해방은 신분우월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참회와 그 실천이 한 켠에 서고, 차별 받아온 사람들의 몸에 밴 굴종의식과 자기 비하를 태워내고서 평등관을 받아들이는 실천이 다른 한 편에 서서 이룩해내는 것일 때에라야만 조선인 모두를 위한 해방이 될 것이야.”
라고 그는 조선의 해방, 사랑과 평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레닌에게서 발견하고 그에게 고려연방제, 또는 고려연방국을 제의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나라가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희망은 농민과 노동자로 하여금 러시아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맨 처음 설파한 사람도 레닌이오.”
“레닌은 참고할 만하다고 믿어.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노선을 따르면서 우리의 독자성을 살려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오.”
러시아는, 특히 시베리아는 아직 적군이 백군과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도 못했고, 또 연합국이 철수했지만 일본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어서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일본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힘이 강력해서 적군은 그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레닌은 일본과 협상을 도모하던 차였다. 일본 또한 많은 친일 조선인들을 보내어 이로 인해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은 갈래갈래 찢어졌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대양읍에도 그 물결이 밀려왔다.
일본은 수리조합을 세워 고리대금업을 하고, 빼앗은 조선인 땅을 다시 밀고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소작을 시켰다. 그리고 신작로를 만드는데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신작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일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와 관계 되는 곳(사실은 지주 이름의 일본 땅)은 돌면서 마을을 두 동강 내기도 하면서 진행되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작로를 만드는데 모든 동민들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응하지 않자 할당량을 정해 일찍 마치면 보내준다고 회유도 하고 그래도 응하지 않는 자는 매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말다툼이 일어나서 일본인 감독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이고 파묻기도 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숫자상으로 적으니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원 군대가 오자 무력 진압은 심해져,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그렇게 진압되고 나자 사람들은 낮에는 아무 말없이 일하다가 밤에는 산으로 가서 나무마다 태극기를 달았다. 아침 햇살에 태극기가 나무마다 나부끼는 대목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날 무렵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밝혀진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들의 민족자결주의지 식민지 민족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다녀온 단야는 우울해졌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삼일운동의 실패가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친구들이 식민지 상황에 체념하고 목숨을 잘 보전하자는 자세 때문이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일본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어 조선인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모조리 강간하는 처참한 살육이 있었다. 레닌은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인들이 경거망동하여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조선인 대표를 만났다.
1921년 한국공산당이 창립되고, 이동휘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공산당은 그것이 곧 완전하고 성숙한 유일한 조선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기를 갈망했다.
1922년 백위군 잔여 세력은 지리멸렬해지고 최후 거점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적색 깃발이 올려졌다. 일본군은 사할린을 제외한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쫓겨나고 친일하던 조선인들도 국내로 철수했다.
하지만 단야는 실종되었고, 최석두는 죽었다. 레닌도 죽고 조선인들을 과히 탐탁지 않아 하던 스탈린이 권력을 잡아 시베리아 조선인에겐 강제이주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조선공산당’이 세워졌다.

긴 호흡의 이야기 요소요소마다 작가는 다양한 사료를 인용했다. 그 중 가장 애절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이나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매국대신들을 처벌하라는 간곡한 상소문이었다. 일본군의 겁박에 굴하지 말고 그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최익현의 글에 넘치는 기개는 꼰대로만 알고 있었던 그 최익현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문이나 레닌의 연설문등을 읽으며 문득 왜 우린 이런 사료들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을 읽으면 이 사람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말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헌병제도를 도입하여 모든 군인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칼을 차게 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일본 천황의 충실한 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황의 명령을 받을 정도의 지식이면 족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찰도 마찬가지였다.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했고, 일본식 절이 동네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인들의 의식을 일본화해서 근본적으로 조선을 없애겠다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고 단야는 생각했고, 그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교육 목표는 뭘까? 서울대를 비롯한 스카이대 진학인가?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학자가 될 듯이 밤 12시가 넘도록 공부를 한다. 예전엔 대학만 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대학에 가서도 취직 공부로 날을 보낸다. 그런데 왜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나아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린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모르는 걸까?
동국대 철학과 강유원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을 제목과 저자만 알지 읽지 않는다. 다 안다고 착각을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일본을 욕하는 이 글을 일본인들은 한 해 5천 부씩 사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후배들도 교육법을 달달 외면서 교사 임용고시 공부는 하지만 실제 관련 책을 읽지는 않는다. 읽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이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희망으로 말한 것은 무엇일까? 예배당에 도망가 있다가 총탄과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박근우와 김순지의 사랑, 김시영과 순개 사이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던 선봉 스님, 그리고 최석두가 총 맞아 죽는 순간 품에 지니고 있었던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에서 희망을 찾은 걸까?

“개인적 저주나 원한은 그 대상물이 사라지면 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잃게 된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과 목표가 단순히 시간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에 걸쳐서 내재한 때에는 그렇지 않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투쟁은 곧 인간 자체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싸움이며 이는 곧 행복이라는 차원으로 치닫는 숭고한 과제인 것이다.”
는 말에 감동을 받고,
“저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해방에 머물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인간 자체의 해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는 염원 속에 작가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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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반대측 피케팅 속에 기증식만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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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시민들이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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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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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과 시민들이 동상 설치를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기증식이 13일 열렸다.

박정희기념재단과 박정희동상건립추진모임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기념·도서관에서 기증식을 열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등 반대 진영의 피케팅 때문에 행사 자체는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박정희동상설치저지 마포비상행동’ 등 시민단체들은 전날 오후부터 불침번까지 세우며 동상 설립을 규탄하는 집회를 이어갔다. 행사를 앞두고 양측의 신경전이 격화되고 크고 작은 몸싸움이 이어지자 경찰이 기념관 계단을 경계로 둘을 분리했다.

성우 김영민씨의 사회로 진행된 기증식에는 자유한국당 백승주·이철우 의원,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조우석 KBS 이사, 김영원 조각가, 박근 전 유엔 대사 등이 참석했다.

박정희 탄생 100주년 기념일(1917년 11월 14일)을 하루 앞두고 동상 제막식까지 하려고 했던 주최 측은 반대 피케팅에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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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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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에서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에 전달된 소형 박정희 동상의 모습.ⓒ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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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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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이동복 동상건립추진모임 대표는 “우리나라가 절체절명의 위험한 지경으로 가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도 꺾이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일할 12척의 함선(이순신의 ‘상유십이척’ 인용)을 생각하는 자리다. 이 소란스러움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건네줄 수 없다”고 말했고, 좌승희 박정희기념재단 이사장도 “진영 논리에 따라 반대하고 소란을 피우는 것은 선진시민의 자세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한 좌 이사장은 “(서울시로부터) 영구임대를 받고 있지만, 대통령기념관 자리로 임대했으면 기념관 주인공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것 아니냐?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대통령 기념관에 동상 없는 곳이 없다. 박정희만이 아니라 이승만, 김대중, 노무현까지 대통령기념관에는 주인공의 동상이 있어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마포 지역구의 노웅래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생각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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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갑 지역구인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동상 설치에 관련한 입장을 전달을 위해 방문 했으나 보수단체 회원들이 저지하고 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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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포 갑 지역구인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동상 설치에 관련한 입장을 전달을 위해 방문 했으나 보수단체 회원들이 저지하고 있다.ⓒ 이희훈

“마포는 유신시절 야당 당사가 있었던, 민주화운동의 심장부 같은 곳이다. 경찰이 진입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떨어져죽는 일까지 있었다. 이런 곳에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화를 위축시킨 장본인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을 누가 용납하겠나? 반면에 산업화에 대한 공은 비교적 많이 인정받고 있으니 그런 지역에 동상을 세우면 되는 것 아닌가? 동상에도 자기 자리가 있는 법인데, 이런 분란 일으키는 것 자체가 박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날 기증 증서를 전달받은 박정희기념재단은 서울시에 동상 설치 승인을 요청할 방침인데, 서울시는 ‘공공미술 설치 및 관리 조례’에 따라 19일경 신설되는 공공미술위원회에 심의를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시의회의 압도적 다수(106명 중 71명)를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이 동상 건립에 부정적인 만큼 동상 설치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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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을 사이에 두고 각각 찬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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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는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대한애국당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찰을 사이에 두고 각각 찬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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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끝난 직후 보수단체 회원이 동상 설치 반대 천막을 훼손 하려다 경찰에게 저지 당하고 있다. ⓒ 이희훈

<2017-11-1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박정희 탄생 100돌’ 앞두고 동상 세우려 했지만…

※관련기사

☞뉴시스: [종합]’박정희 동상’ 기증식 몸싸움까지…”원조적폐” vs “종북좌빨”

노컷뉴스: 박정희 동상’ 기증식 개최…”동상설치는 상식” vs “원조적폐 반대”

스포츠경향: 박정희 동상 놓고 충돌 “빨갱이 물러가라” vs “친일파 동상 반대”

아시아경제: “우리 먹여살린 분” vs “원조 적폐”…박정희 동상 갈등 최고조

파이낸셜뉴스: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친일행적 알림팻말 같이 세워야” 동상 둘러싸고 논란

신문고뉴스: ‘박정희 동상’ 설치하려던 기념재단 ‘혹’ 붙는다

한국경제TV: 박정희 동상, 진짜 목표는 광화문?

머니투데이: “박정희 동상, 세종대왕상과 나란히 세워지길 바랐다”

월, 2017/11/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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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조상이 친일인명사전에 있는 남정철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SNS상에 상당히 많습니다. 더불어 친일경찰 노덕술의 아들이 노재봉 전 국무총리라거나 이완용의 증손자가 이건희 회장이라는 글들도 있구요. 사실 관계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문의드립니다.

수, 2017/11/15-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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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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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

수, 2017/11/1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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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I_0314ACI_0325 ACI_0349ACI_0357ACI_0373ACI_0399ACI_0403ACI_0414ACI_0431ACI_0525ACI_0546ACI_0562ACI_0543

수, 2017/11/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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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17/11/15-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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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아닌, 누구나 새기고 나눠야 하는 위안부 이야기

우리 청춘들이 뜨겁게 노래한다.

서울시청소년국악단 <귀향 끝나지 않을 노래>

2017.12.5.() 세종M씨어터

서울시청소년국악단이 들려주는 우리의 아픈 역사

 음악으로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보듬을 수 있는 감동의 무대

 

75천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국민의 영화 <귀향> 이 무대에서 재탄생됩니다.

잔혹하고 불편한 기억이지만

우리들이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되는 역사입니다.

오늘을 통해 힘으로 굴복되어지는 피해자가 없고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

예매는 아래 링크를 눌러주세요.

goo.gl/f2gf9f

– 2016년 개봉한 영화 <귀향>(감독 조정래)이 무대로 탄생한다

작곡 황호준, 영상감독 조정래와의 작업으로 한층 더 깊은 메시지를 던질 무대 <귀향>

외면해서는 안 되는 우리의 아픈 역사, 청소년국악단의 음악으로 새로이 기록 한다

영화 <귀향>의 주연배우 강하나, 박지희양이 직접 들려주는 나레이션과 아리랑 노래의 감동의 무대

공 연 명

서울시청소년국악단 제49회 정기연주회 귀향끝나지 않을 노래

일시장소

2017. 12. 5() 오후 730/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티켓가격

R40,000 S30,000

관람연령

7세 이상 관람 가능 (미취학 아동 관람불가)

제작진

총연출 및 예술감독: 유경화 단장 / 연주: 서울시청소년국악단

영상연출: 조정래 감독, 위촉작곡 황호준

협연 JC curve, 씻김 바라지 박성훈, 무녀 박미옥

나레이션/노래:강하나, 박지희(영화귀향주연배우)

예매문의

세종문화회관 02-399-1000 www.sejongpac.or.kr

인터파크티켓 1544-1555 ticket.interpark.com

공연문의

서울시청소년국악단 02-399-1181~3

목, 2017/11/1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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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훈 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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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독재와 억압, 불의와 부정의 토대인 친일을 청산하자. 그리하여 이 땅에 70년 넘게 채워진 질곡의 사슬을 풀고 민주와 정의, 화합과 평등이 넘치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을 만들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의 친미독재, 박정희와 전두환의 무자비한 군사독재, 그리고 이들의 반민족, 반민주 독재권력을 이어받고자 했던 이명박과 박근혜의 국민분열, 친일반역, 국정농단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 이후 친일세력들의 비열한 통치와 압제 속에서 살았다. 이러한 체제가 반복되어 온 것은 일제 식민지 지배세력들의 인적, 제도적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와 친일, 그 뿌리 깊은 잔재는 오늘날 정치, 사회, 학문, 자본, 언론, 예술 등 모든 곳곳, 요소요소에 악의 고리로 남아있다.
1919년 3·1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은 모두 ‘친일세력의 근원을 타도하기 위한 민중들의 항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그 최후의 정점에 이승만을 몰아낸 민주혁명의 힘이 박근혜를 권력에서 끌어내린 촛불혁명으로 타올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보다 일제에 빌붙어 수족행위를 하고 나팔수 노릇을 한 친일파가 더욱 악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친일파들은 민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재산을 탈취하고, 항일투사들을 잡아들이고 살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학도병, 강제징병,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의 선동대가 되는 온갖 악행을 도맡아 저질렀다.
1948년,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특위가 만들어졌다. 반민특위는 구체적인 죄목으로 친일파들에 대한 단죄에 나섰다. 한일합방에 적극 협력하거나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항에 조인하거나 모의한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 박해하거나 지휘한 자,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 습작(襲爵)한 자, 중추원 간부, 칙임관 이상 관리, 밀정, 독립운동 방해단체 간부, 군경찰 간부, 군수공업 경영자, 관리 중 악질적 죄질이 현저한 자, 도(道)나 부(府)의 자문기관 또는 의결기관 의원 중 현저한 반민족 행위자, 종교 사회 문화 경제 등 각 부문에서 반민족적 행위자,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에 위해(危害)를 가한 자, 고등관 3등급 이상, 훈 5등급 이상 관공리, 헌병, 경찰, 헌병보, 고등경찰 등이 처벌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방해로 인하여 반민특위는 해산되고 친일파는 단 한 명도 단죄되지 않았다.
이렇게 버젓이 살아남은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더욱 승승장구하였다.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치하에서도 그들은 기득권을 계속 유지했다. 나라의 권력은 오로지 친일파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후광을 입은 그들의 후손들도 역시 정치, 경제, 사회, 학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현재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문단을 예로 들어보자. ????친일인명사전????(2009)에 오른 친일문인은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억,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용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등 무려 40인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미당 서정주는 가장 대표적인 친일, 친독재 문인이다. 서정주야말로 친일에서부터 친독재까지 철저한 권력의 시녀였고, 죽을 때까지 단 한 마디의 반성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문단의 거대한 권력이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은’ 그는 대학강단에서, 문단에서, 관계에서, 수없이 많은 제자들을 키우고 또 그 제자들은 그를 스승으로 우러러 받들었다. 시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자였던 서정주는 죽어서도 그 권력을 문단의 후학들에게 그대로 넘겼다.
반민족적, 반문학적 친일의 과오가 명백한 그를 기리는 미당문학상이 만들어지고, 바로 그 문학상이 대한민국 최고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현상이 그것을 증거한다. 이런 기이함은 미당 서정주를 ‘국민시인’, ‘민족시인’으로 칭송한다. 심지어는 올해 여름에 발간한 미당전집 편집위원 중의 한 사람은 미당을 ‘민중시인’이라고까지 말했다. 북한의 3대 세습 정권에서도 있을 수 없는 망언이었다.
미당은 1942년 7월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 개명한 이름으로 평론 ‘시의 이야기’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친일문학 작품을 썼다. 이미 여러 경로로 밝혀진 바와 같이 친일어용문학지인 ????국민시가????와 ????국민문학????의 편집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들을 양산했다. 이를 통해 태평양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미화하고 징병의 신성화와 정당화는 물론 학병지원을 권유했으며 일제의 군국주의 파시즘에 적극 동조했다.

미당이 남긴 작품들이 정말 문학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작품인지 그 평가는 차치하고, 그는 민족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그를 문학상 등으로 기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가 지어낸 천여 편의 시들도 ‘겨레의 말’이 아니라 일종의 기가 막힌 언어도단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류의 도덕적 보편성과 정의를 따르고자 하는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미당은,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그러한 가장 기본적인 가치관마저 결여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인간 본연의 품성이 그릇된 자였다. 그릇됨을 덮고 가치관마저 전도시키는 그의 문학은 우리 모두를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원숭이가 손목이 잘려도 바나나를 놓지 않듯, 권력도 움켜쥔 힘을 쉽사리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반성과 성찰을 바라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사회권력과 관료권력, 종교권력과 문화권력 등이 그러하듯이 문학권력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은 물러났어도 추종하는 세력들에게 승계되고 이어가고 있다. 지배권력은 다른 피지배세력이 그들의 권력을 쟁취하기 전까지 유구한 것이다.
미당이 생전에 지닌 문단권력은 현재 그의 추종세력들에게 전이되었다. 추종자들에게는 미당의 매국적인 친일문학 행위도, 군부독재를 찬양한 행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미당문학상으로 미화하고 있다. 미당 서정주, 그의 행적을 문인이 아니고 정치인에 대입시켜보면 참으로 소름끼치는 존재다. 그럼에도 미당을 추종하고 옹호하는 무리들이 미당을 기리는 것은 미당이 건재해야만 자신들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미당문학상에 대한 비판 또는 폐지의 주장은 고사하고 그 상을 심사하고 수상하는 사람들이 우선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사고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그들에게도 있을 터이다.
동서고금의 예술을 살펴보면, 정치권력과 결합한 예술은 차후에 거의 모든 평가가 허구였음이 드러난다. 대다수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가 아니라 후대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정치와 사회, 문화예술 등은 일제치하에서 해방된 지 반세기를 넘겨 한 세기를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친일세력들의 영향력과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가 일제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독립은 했으나 아직도 정신적 독립은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결과다.
완전한 독립, 그리고 온전한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제, 친일을 청산하자. 친일파와 그들의 후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 누군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불의의 역사를 모른 체 하면 대대손손 청사에 물려줄 정의의 역사는 사라진다.

편집자주 시인 정세훈은 1955년 충남 홍성 출생으로 1989년 ????노동해방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작품에는 시집 〈그 옛날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죽어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과 장편동화집 〈세상 밖으로 나온 꼬마송사리 큰눈이〉 등이 있고 현재 리얼리스트100 상임위원, 한국작가회의 이사, 한국민예총 이사장 권한대행을 맡고 있다.

목, 2017/11/16-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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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선임연구원

삼가 생각건대, 하늘이 한 번 맑아지고 땅이 한 번 편안해지매 통서(統緖)를 전하는 데에서 보록(寶籙)을 넓어지게 하였고, 별이 다시 빛나고 바다가 다시 넘실대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데에서 영전(令典)을 송축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업이 한이 없게 되었고, 척의(尺依)는 점차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공손히 생각건대 천황 폐하께서는, 상제(上帝)께 밝게 받아서 후인들을 열어주셨습니다. 뇌사(雷肆:書筵)에서 글을 읽는 소리가 들림에 용안(龍顔)에는 기쁜 빛이 돌고 진저(震邸)에서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하는 칭송이 퍼짐에 따라 인지(麟趾) 역시 어질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태평을 누릴 아름다움에 응하였기에, 바야흐로 황태자를 미리 세우는 예를 행하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자질은 공자의 학문을 세우는 데 부끄러우나, 정성은 요(堯)임금이 되기를 축원하는 데 간절합니다. 사해에서 구가(謳歌)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들 우리 임금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고, 만리 밖까지 덕스러운 교화가 퍼짐에 모두들 성인의 백성이 되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습니다.
대정 5년(1916년-필자) 11월 3일에 조선총독부 경학원(經學院) 사성(司成) 신(臣) 이인직(李人稙)은 지어서 올립니다.

14<경학원잡지>제12호에당시경학원사성이었던이인직이일본태자(뒤에 쇼와천황)를 세우는 예식의 헌송문(立太子禮獻頌文)으로 쓴 글의 일부입니다.
대단하지요. 이인직이 신소설의 개척자지만 그 글의 문학성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경’(?)에 빠지게 만드는 이 문장은 그가 가장 ‘빛나는’ 글을 쓸 때가 언제인지를 알려줍니다. 그의 지향과 정체성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글을 쓸 때입니다.

 

숨겨진 행적
최초의 신소설<혈의누(血의淚)>로잘 알려진국초(菊初)이인직(李人稙)은1862년에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산(韓山) 이씨 양경공파(良景公派) 25세손으로 이윤기(李胤耆)와 전주 이씨의 차남으로 5살 때 1866년 생부 윤기가, 18살 때인 1897년엔 생모 전주 이씨가 각각 사망합니다. 그리고 9살 때 3대조 면채(冕采)의 손자인 은기(殷耆)의 양자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외 이인직에 대한 기록은 38살인 1900년까지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900년 관비유학이라는 공식적인 기록이 나타나기까지 이전 행적은 찾기 힘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행적은 38살부터 55살까지 16년간의 기록입니다.
다만 간접적으로 이인직이 을미사변과 관련해서 일본으로 망명을 갔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 전문 외교관 출신으로 통감부와 총독부의 초대 외사국장을 역임한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록(<明治外交秘話>,東京千倉書房,1936)에서이인직을조중응(趙重應)과함께일본으로 망명했으며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서 과외생(課外生)으로 자신의 강의를 들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조중응은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으로 일제하 자작, 중추원 고문을 지낸 대표적 친일파입니다. 1895년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을미사변 후 법부 형사국장으로 명성황후의 폐비 조치를 강행하는 등 사후처리를 담당했습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망명했고 1906년에 사면되어 귀국합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정부는 아관파천으로 망명한 한국인들을 을미망명자(乙未亡命者)로 분류했으며 그 인원은 31명인데, 그 명단 중 이인직의 이름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마쓰의 지위나 명망을 생각하면 그의 회고를 허위나 거짓으로 보기에 힘듭니다. 더불어 김기장(金基璋)의 증언까지 고려하면 이인직이 조중응과 일본 망명 생활을 함께 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김기장의 경우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동경전문학교(현 와세다 대학)를 졸업하고 주일 공사관 참서관, 경리원 감독을 역임했던 자로 조중응의 일본 망명 시기에 일본 유학을 했는데, 그는 “조중응과 이인직은 일본에 재류할 때부터 거의 주종과 같은 관계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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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웅

 

아마 이인직은 조중응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심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인직이 일본으로 함께 망명한 것은 을미사변이나 김홍집 내각 하에서 특별한 역할을 해서 피신했다기보다 정황상 함께 동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특별한 기록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고서는 망명자가 귀국하여 관비 유학생 자격을 얻은 다음 1900년에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게 가능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동경정치학교와 이인직

국비 유학생으로 이인직은 1900년 9월 동경정치학교(東京政治學校)에 정식 입학합니다. 최소한 이인직의 자필이력서에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동경정치학교가 이인직의 사상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게 통설입니다. 그런데 근래 연구 성과는 이마저도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동경정치학교(이하 정치학교)는 마쓰모토 쿤페이(松本君平)가 1898년 10월 ‘고등문관, 의회의원, 외교신문기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입니다. 3년제이며 17세 이상의 남자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학교의 가장 큰 특징은 전문교육을 통해 전문적 지식을 가진 정치가나 신문기자 등의 양성을 목적으로 했습니다.
고마쓰는 위 회고록에서 이인직과 조중응이 과외생으로 자신이 그 학교에서 강의했던 열국정치제도(列國政治制度)를 강습(講習)한 제자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인직이 관비 유학생 시절인 1900~1903년 사이 고마쓰는 정치학교에서 강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관비 유학생 이전 일본 체류 시기에 일종의 청강생으로 수업을 들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고마쓰의 기록 외에 다른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의문을 갖게 하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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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쓰 미도리의 <명치외교비화>

우선 정치학교는 제대로 운영된 적이 별로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경부통계서>에 의하면 학교규모는개교 당시 1898년 강사 40명, 학생 97명, 1901년 강사 10명, 학생 120명, 1902년 강사 10명, 학생 13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강사 수가 급격히 줄었을 뿐만 아니라 1899년과 1900년 2년간의 공백이 있습니다. 이 2년간의 공백은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의 회고를 종합해 보면 사실상 휴교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정치학교는 1903년 9월 경영부진으로 폐교됩니다.
실제 정치학교에 재학했던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의 회고를 통해 본 정치학교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정치학교는 사루가쿠초 변에 있는 중학교의 낡은 교실을 빌려 개교했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보니 학교라기보다는 고작 강습회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중략) 2, 3개월 채 되지 않아 점차 출석률이 나빠졌다. 학생의 출석이 아니라 선생님의 출석이었다.(중략) 나도 포기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山川均, <日本人の自伝>,平凡社,1982)

 

그러면 1900년 9월 정치학교에 입학해서 1903년 7월 졸업했다는 이인직의 이력은 의문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과 졸업 자체가 사실인지도 불투명해집니다. 이인직의 행적은 이토록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은 매우 명확합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활자로 조합된 그의 글이 그것을 충분히 증명해 줍니다.

봉건주의에 대한 혐오

이인직은 1901년 한국공사관의 추천으로 일본 <미야꼬신문(都新聞)>에견습으로들어갑니다. 그는 미야꼬신문에 1901년부터 1904년까지 8개의 논설문을 게재했는데 그의 사상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납니다.

 

팔베개를 하고서 사십성상(四十星霜) 동안 참으로 잘 잤다. 곁에서 잠꼬대를 하는 자는 우리 이천만 동포다. (「入社說」, <都新聞>,1901.11.29.)

 

이인직은 당시의 조선을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어찌 깨어났지만 아직 이천만 동포는 잠에서 깨지 못하고 잠꼬대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서 동포를 깨우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인직에게 있어 조선이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하고 꾸고 있는 꿈은 ‘봉건적 유습’입니다. 이후에 발표된 「몽중방어(夢中放語)」(<都新聞>,1901.12.18.)에서도당대주요국의상황을꿈으로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깊은 잠을 자고 있는 한국과 중국을 제외하고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 확대를 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일본이 깨어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 이인직이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있던 점은 후술하고, 그는 일관되게 봉건 문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이인직은 조선을 미개화 상태, 봉건적 유습이 지배하는 야만의 상태로 파악했기 때문에 일단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봉건적인 유습을 혁파해야만 했고, 그것이 이른바 ‘계몽주의’로 이어집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인직은 마치 봉건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는 진보적인 개화자강 운동가로 보입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비롯해 구한말 진보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 중 꽤 많은 숫자가 친일파가 됩니다. 오히려 그들이 타파하고자 했던 봉건 유생이 ‘의병’을 결성하여 일제에 항거합니다.
‘보수’와 ‘진보’가 이렇듯 순식간에 바뀌어버립니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목, 2017/11/16-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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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교육부는 역사교과서국정화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고석규)를 출범시키고 박근혜정권의 국정화 추진과정의 전모를 밝히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사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김상곤 교육부 장관은 고 임종국 선생의 정신을 거론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보면서 한 인물을 생각합니다. 전 재산을 들여 평생 동안 친일연구를 한 임종국 선생님이 바로 그분입니다. 친일연구 과정에서 본인 아버지의 이름도 친일인물로 기록하였던 분입니다. 사실에 기초한 기준 이외 혈연, 지연 등 다른 것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며, 저 역시 이와 같은 마음으로 위원회가 세운 기준을 존중하고 일관성 있는 조사를 추진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이렇듯 오늘날 임종국 선생이 시대의 귀감으로 인정받기까지는 단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의 역할이 컸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에 대한 요구는 연구소 출범 당시부터 조금씩 논의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착수한 계기는 2003년 8월 22일 〈KBS 1TV 인물현대사〉 ‘임종국 편_배반의 역사를 고발하다’(연출 김정중)가 방송된 직후부터다. 방송 이후 선생의 대표 저작인 ????친일문학론???? 판매가 급증하는 등 반응이 뜨거웠다. 그러나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발간 준비에도 힘이 부쳐 기념사업은 언감생심이었다. 기념사업을 위해서는 연구소 재정 외에 외부의 안정적인 재원 마련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차에 당시 연구소 조문기 이사장이 광복군 장이호 선생의 아들이며 연구소 이사를 맡고 있던 장병화 가락전자 대표에게 이 같은 사정을 설명하고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장병화 이사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 자리에서 회장직을 수락했다. 이후부터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설립은 급물살을 타게 된다.
2005년 2월 3일 준비 모임에 이어 3월 29일 서울 정동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강의실에서 정식으로 출범식을 가졌다. 기념사업회는 별도의 사무국은 두지 않고 연구소가 업무를 맡기로 했다. 출범 당시부터 지금까지 기념사업회에 힘을 보태고 있는 주요 인사로는 김지철 현 충남교육감,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이용길 천안민주단체협의회 초대 의장 등이 있다. 기념사업회는 출범 당시 크게 5가지 사업 계획을 마련했는데 임종국상 제정, 추모 조형물 건립, 문화훈장 추서, 평전 발간 및 학술사업, 장학사업이 그것이다.
이들 사업 중에서 출범 첫해인 10월 15일 문화훈장 추서가 가장 먼저 이뤄졌다. 추서 신청에는 당시 작가회의 이사장이었던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동참해 주었다. 그러나 임종국 선생에게 추서된 문화훈장은 총 5등급 중 금관, 은관에 이어 3등급은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김삼웅 전 관장은 2000년 서정주에서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된 사실을 상기하면서 추서 거부를 언급하기도 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지만 그럴수록 기념사업 활동에 더욱 분발하자고 다짐했다. 임종국상 역시 기념사업회 출범 첫해인 2005년 11월 11일 제1회 시상식을 시작으로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전력코자 2008년과 2009년 두 해를 거른 것을 제외하고는 올해까지 11회에 이르고 있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임종국상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다.
임종국 선생의 19주기를 맞는 2008년 11월 18일에는 정지아 작가가 ????임종국 – 친일의 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여우고개)를 펴냈고, 기념사업회와는 별도로 정운현 씨가 2006년 ????임종국 평전????을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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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1월 12일 임종국 선생의 기일에는 천안공원묘원에서 선생의 추모식이 열렸다. 1990년대 말까지는 천안민주단체협의회를 중심으로 이용길, 김지철, 전재진(현 우키시마호 폭침진상규명위원장), 김영수(현 천안시의원), 장기수(전 천안시의원)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과 전농 회원님들이 수고해 주었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현재까지는 연구소 충남지부, 천안지회, 아산지회 회원들이 추모식을 주관하고 있다. 찬바람이 부는 높은 산에서 진행되는 추모식을 위해 손을 비벼가며 정성스럽게 제사상을 준비하는 회원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임종국 선생과 기념사업회의 존재를 널리 알린 데는 역시 방송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앞서의 인물현대사 외에 2012년 〈EBS 지식채널e : 임종국 편〉과 2013년 뉴스타파에서 방영한 〈친일연구의 선구자 임종국〉 3부작이 그것이다.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 출범 이후 가장 많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한 사업은 바로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이다. 임종국 선생 조형물 건립은 오래 전부터 시도되었지만 천안시(당시 시장 성무용)의 비협조로 진척을 이루지 못하다가 작년 초 천안지회(지회장 전훈진)가 발의하고 7월 9일 임종국선생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용길)가 발족해 본격 착수하여 몇 차례의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1월 13일 천안신부공원에 조형물이 건립되었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3,626명이 참여해 1억 2천만원이란 거금의 모금으로 이뤄낸 쾌거였다.
앞으로도 연구소는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선생의 정신을 더욱 널리 계승, 발전시켜나갈 것을 다짐한다.

• 방학진 기획실장

목, 2017/11/1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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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 지도위원, 소장자료 75점 기증

10월 16일, 강만길 지도위원(고려대 명예교수)이 북한 방문증명서, 리영희·이우성 선생 등과 주고받은 서신, 2004년 평양 남북학술토론회 관련 자료 등 소장자료 75점을 기증했다. 특히 이번 기증자료에는 강만길 지도위원이 1984년 ‘통일문제에 관한 교과서 분석사업’과 관련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을 당시의 사정을 알려주는 보고서, 탄원서, 공동성명 등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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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섭 지도위원 제59차 자료기증, 도서와 문서류 총 50점 보내와
9월 19일 심정섭 지도위원 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이 59번째 자료를 기증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각종 보험증서와 통장, 해방 직후 학교 관련 문서 등이 주를 이룬다. 또한 ????새농민????(1970),????국민독본????(1964),????지방행정????(1964)등박정희 정권기에발행된도서류도 기증했다.
귀중한 자료를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 자료실 안미정

목, 2017/11/16-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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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기념관은 10월 20일(금)부터 21(토)까지 1박 2일 청소년 역사캠프 ‘순례길의 독립운동가를 찾아서’를 개최했다. 이번 캠프는 근현대사기념관 상설전시를 역동적인 체험을 통해 새롭게 접근하고, 강북구의 애국선열 묘역에 잠든 독립운동가를 만나며 선열의 생애와 활동을 되새겨 청소년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는데 도움을 주고자 마련했다. 캠프는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오후 1시까지 진행되었고, 사전에 홈페이지와 전화로 선착순 모집한 13~16세 청소년 33명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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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근현대사기념관에 모인 청소년들은 식사 후 특별히 야간 개장한 기념관에서 첫번째로 독립운동가가 남긴 명언과 제헌헌법의 내용과 관련해 빈 칸에 들어갈 단어를 찾아 문장을 완성하는 퀴즈를 풀
고 전시물을 본 후 사발통문에서 사라진 격문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두 번째로 비밀리에 독립운동가, 민중, 일본 순사로 각각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코너별로 태극기 타투, 의병 책갈피 만들기, 독립민주기념비에서 기념사진 촬영 등의 체험활동을 포함한 독립운동 런닝맨을 시행했다. 마지막으로 4·19혁명 당시 상황을 재연한 그림자 연극을 함께 만들었다.
이튿날, 청소년들은 순국선열 애국지사 묘역을 답사하며 시대별 태극기를 그려보았다. 또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일가족과 함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중국으로 떠난 이시영 선생의 가족사를 스톱모션으로 표현하고, 독립운동가가 되어 자신만의 어록을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캠프에 참가한 한 청소년은 “새로운 친구들과 친해져서 함께해서 좋았고, 학업 스트레스를 잠깐 내려놓고 놀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역사에 관한 지식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밝혔다. 주어진 시간이 짧아 더 많은 프로그램을 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근현대사기념관은 이번 캠프를 계기로 청소년 프로그램 다양화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 최인담 학예사

목, 2017/11/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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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8월 21일부터 10월 30일까지(매주 월요일, 총 9강) 한겨레신문 청암홀에서 ‘김미화와 함께하는 스타트업 적폐청산’이라는 제목으로 연속강좌를 진행했다. 이번 강좌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적폐와 과거청산의 과제를 김미화가 묻고 전문가들이 대답하는 토크쇼 형식으로 기획되었다.

09이번 강좌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포럼 진실과 정의를 비롯하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한겨레21, 한겨레TV가 힘을 모아 마련했다.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진행된 강좌는 검찰과 국정원, 경찰, 군, 재벌, 교육, 언론, 친일파와 대일과거사,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과 인권침해를 주제로 한 전문가 대담에 이어 전체 강좌를 총괄하는 종합 대담으로 마무리되었다. 박주민, 표창원, 김종대 의원을 비롯하여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장, 장혜옥 전 전교조 위원장, 최승호 뉴스타파 PD, 김동춘 교수 등 각각의 주제에 대해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이 강사진으로 나섰으며, 박한용 교육홍보실장도 친일파와 대일과거사를 주제로 한 강좌를 통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번 강좌에는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남녀노소를 아울러 60여 명의 참가자들이 열띤 열기 속에 참여하였다. 모든 강좌의 동영상은 연구소 홈페이지와 한겨레TV 홈페이지를 통해 순차적으로 게재되며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목, 2017/11/1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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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는 촛불혁명 1년을 맞아 10월 27일부터 ‘촛불 1년, 다시 부르는 항일의 노래’ 전국순회 항일음악 토크콘서트를 진행 중이다. 이 행사는 개관을 5개월 앞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기금 마련과 항일음악을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10월 27일 고양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3일 창원, 11월 9일 대전, 11월 17일 광주로 이어지는 이 공연에는 이재명 시장, 노회찬, 박주민 의원과 김광진 전 의원이 이야기 손님으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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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역적’으로 호흡을 맞춘 박한용 교육홍보실장과 MC노(노기환)의 사회로 진행된 콘서트는 ????항일음악 330곡집????을 정리한 고 노동은 교수의 아들 노관우 씨(국립전통예술고 강사)의 항일음악 시연과 이야기 손님의 토크가 어우러져 잊혀진 항일음악을 알리고, 항일음악의 현재적 의미와 2017년 청산해야 할 한국사회 적폐문제를 이야기하는 토크쇼 형식의 공연이다.
10월 27일 고양에서 열린 공연에서는 노관우 씨를 비롯한 연주단이 〈광복군 아리랑〉 〈신흥무관학교 교가〉 등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로 만들어진 항일음악과 이상준 작곡 〈깊이생각〉과 한유한 작곡〈압록강행진곡〉 등 창작 항일음악을 들려주며 관객들의 감동을 이끌어냈다. 이어서 친일 음악가의 노래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 홍난파 작곡)과 〈희망의 나라로〉(현제명 작곡)를 영상으로 보여주었고 최근까지 국가 경축일에 친일음악가의 노래인 〈희망의 나라로〉나 〈선구자〉 같은 노래가 연주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이날 이야기 손님으로 나온 이재명 시장은 ‘우리 시대 적폐 청산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사회자가 촛불혁명 이후 1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촛불을 든 우리 전사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갔고, 또 문재인 민주정부가 수립돼서 정권 교체를 이뤘다. 아마 인류 역사상 이렇게 깔끔하게 무혈의, 아무런 피해도 없는 혁명적 결과를 만들어낸 건 아마 처음 아닐까 싶다”면서 “저는 우리 촛불혁명의 결과 정권교체를 했지만 이건 하나의 수단이고, 초입이고… 다음 단계 공정한 국가. 미래 희망이 있는 나라 만드는 게 마지막 과제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11월 3일 창원 공연의 이야기 손님인 노회찬 의원은 ‘우리 시대 적폐 청산의 과제’에 대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적폐가 민중의 삶에 대한 것이라며 “대한민국은 헌법 앞에 과연 모든 국민이 평등한가”라고 자문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법정이나 검찰·경찰 앞에서 차별을 강요받고, 비참한 현실을 요구받는 게 제대로 개선되지 않았다. 적폐 청산에 있어 과거 발생한 특정 권력의 일만 아니라 사회적 일상에서 차별받는 것도 바로잡아 가는 게 중요하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또한 노회찬 의원은 식민지역사박물관에 대해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옆에 있는 ‘유슈칸’이란 역사박물관에 가본 적이 있다. 세계지도를 그려놓고 2차 대전 당시 독립된 나라들을 그려놨는데, 인도 등 아시아 나라들이 서양 지배를 받다가 일본 덕분에 독립됐다고 해놨다”라며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세우려는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연 말미에 이재명 시장과 노회찬 의원은 각각 민족문제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운동’을 응원하는 영상 메시지를 남기고 역사관 건립 기금 후원에 범국민적 동참을 호소했다.
앞으로 11월 9일(목) 오후 7시에는 대전기독교연합봉사회관 연봉홀에서 박주민 의원과 함께, 17일(금) 오후 7시 광주가톨릭평생교육원 대건문화관에서 김광진 전 의원과 함께 토크콘서트를 연다.

• 방은희 교육팀장

목, 2017/11/16-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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