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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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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야를 읽고

익명 (미확인) | 수, 2019/04/10- 11:53

단야를 읽고

‘김천교육너머’ 사무국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 김천 출신으로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었던 ‘김단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없다고 하자,
“우리가 공부해보고 김천에 이런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걸 알리는 작업을 했으면 해요.”
그리고는 그에 대한 참고 자료들을 소개했다.
경북역사교사모임에서 경북의 항일운동가를 찾아 김천을 답사한 적이 있다고 해서 물어보니
“김천엔 흔적이 너무 없어서 별로 못 가보았다.”면서
“‘단야’라는 소설이 있으니 읽어보세요.”
김찬수 사드저지대경대책위 대표가 귀뜸해 주었다.

시립도서관 도서 자료를 검색하니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소설책 ‘단야’도 없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라서 그런가? 할 수 없이 인터넷 서점을 뒤졌다. ‘한국사회주의 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길사)외에는 없었다. 중고장터를 뒤졌다. 정동주 지음 전 7권으로 된 대하소설. 발간연도는 1992년이었다. 출판 당시 평을 찾아보니 나쁘지 않은데 절판된 모양이다.
‘단야’는 김천의 독립운동가 ‘김단야’(본명 김태연)를 모델로 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선택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은 그가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러시아인이든 하나같이 자신의 이해관계, ‘이기심’을 따라 움직인다.
문수리, 후에는 대양읍에서 자신의 이익과 욕망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것은 거대한 정치 흐름 속에서의 삶이다. 그 흐름 속에서 인물들의 활동 범위도 넓어져 갔고, 헌병보조원이 되는 등 일본에 적극 가담하여 동포를 괴롭히는 데 앞잡이가 되기도 하고, 일본인과 친일파를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반일 행동을 하기도 한다.
조선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사람들은 지배계급인 양반의 수탈에서 일본에게 나라를 뺏기는 과정에서 일상의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의식하든 못하든 그 속에서 각자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구한말부터 일본인들은 조선을 지배하러 치밀한 계획아래 들어오고 있었다.
“일본의 특징은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오.”
조선을 침략하기 몇십 년 전부터 첩자들을 보낸다. 조선의 말을 배우고, 조선 사람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고을의 가장 신임 받는 명망가를 조사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천대받는 출신 중 똑똑한 아이들을 조사한다.
그 결과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신분상의 차별이고, 조선인들은 성급하고 말로 싸우지 문서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리고 가장 공을 들여야 할 것은 공동체 파괴라는 분석을 내린다.

대양읍에 온 일본인은 먼저 돈밖에 모르는 최건이라는 인물을 이용한다. 그의 이름으로 땅을 사고 제재소를 차려서 일본인 기술자를 불러서 운영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그 고을의 노름을 좋아하는 사람을 시켜서 화투를 보급한다. 처음엔 다 잃어주며 농민들을 화투판에 끌어들여 드디어는 그들의 집과 땅을 넘겨받는다. 일본인들이 많아지자 그들이 사는 집을 짓고 유곽을 만들어 최건에게 관리하게 한다. 그러다 최건이 기억에만 의존해 관리하는 걸 약점으로 문서를 만들어 도장을 찍게 하고 제재소에는 손을 떼게 한다.
그리고 가장 유지였던 이들을 이런 저런 친분과 약점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야금야금 그들의 이름으로 소작인들에게 장리빚을 주게 하고, 땅을 사게 하고, 그래서 다시 그들에게서 그 땅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일본으로 유학 보낸다. 당연히 마을 유지들은 자식이 일본에서 공부하면 자신의 지위가 더 높아지리라는 기대 심리로, 신분이 천한 김형구는 돈은 많으나 아직도 차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자식만은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그 유혹에 응한다. 일본이 이렇게 유지들의 자녀들을 유학 보내는 것은 일종의 볼모로 데려가는 것이다. 점점 요구 조건을 세게 해서 들어주지 않을 때 걸핏하면 아이들을 들먹임으로써 점차 자신들이 쳐놓은 그물망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

한편 천민 출신으로서 뛰어난 아이들도 유학대상이다. 그들의 울분과 분노로 조선을 뒤집으려 하는 것이다. 조선은 조선인의 손으로 망하게 한다는 치밀한 프로젝트였다. 이 과제에 일본에서 들어온 경찰과 깡패들, 또 군대, 헌병들은 당연히 힘으로 조력하였다.
김형구의 아들 단야는 그런 천민,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백정의 혈통이었다. 할아버지 대부터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신분의 차는 없어졌다고 하나 그는 어릴 때부터 그 백정의 출신이라 해서 받는 냉대를 느끼고 자랐다.
이복형 시영은 유부녀인 순개와 바람이 났으나 순개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외면하고, 부모가 없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시집가야 하는 양반집 딸 명채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가로놓인 신분 차이를 뛰어넘지를 못한다. 명채는 어쩔 수 없이 시영의 아내로 살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편과 시댁을 멸시하고 은연중 남편을 냉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영이 일본인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도망가서 숨어 살며 독립운동을 하는 사이, 명채는 가끔 시영의 소식을 몰래 전해 주던 시영의 친구 정수와 사랑을 나누다가 들키자 아이를 두고 쫓겨난다.

단야 역시 어린 시절 정수 아버지 강재상의 사랑방에서 만난 채호와 게걸 목사가 세운 교회학교에서 배우면서 양반 딸인 지호와 사랑이 싹트지만, 그 만남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강재상은 지호와 단야가 어울리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 어머니는 싫어한다. 어머니의 강요로 혼례식을 치른 첫날 지호는 엽기적인 행각으로 신랑을 노하게 하고 파혼을 한다. 그리고 단야를 찾아 일본으로 떠났으나 둘은 같이 살면 살수록 신분이라는 벽을 깨뜨릴 수가 없었다. 절망한 지호는 아이를 낳자마자 죽여 버린다. 그리고 단야와 조선으로 돌아와 오랜 고민 끝에 헤어지기로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단야는 일본에서 독립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듯 살아야 하는 천민의 처지에서 인간답게 살다 죽을 수 있는 해갈과 해방의 샘물’을 갈구하게 된다. 그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준 스승이 조선 총독부에서 제의한 문화제도 연구를 하러 조선으로 들어가면서 단야에게도 같이 하자 제의했을 때, 그는 스승에게 실망하고 단호히 거부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일본의 사회주의 역시 일본에 오면 일본 제국주의화한다는 것을.
단야, 지호의 두 오빠, 최석두 모두 아버지가 처음부터 또는 피치 못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고, 그 아버지들의 욕망 때문에 일본에 유학 왔지만, 부모들과 달리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은 최건의 아들 최석두.
단야는 러시아로 간다. 러시아에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넘어온 조선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주로 함경도에서 힘들게 살다가 시베리아로 가면 먹고 살만한 것을 알고 겨울밤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간 사람들이다. 조선에서는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촘촘히 초소를 세우고 총을 쏘아댄다. 총탄을 피해가며 강을 건너가면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 날이 밝아서야 확인하게 된다. 일단 강을 넘어가면 시베리아에 정착해 살 수 있다. 당시 시베리아 땅을 개간하는데 조선은 귀한 자원이었고, 그러한 러시아에 많은 조선인들이 귀화한다. 제정러시아 때는 짜르 왕정을 위해 러일전쟁에 가담하고 혁명이 일어나서는 자연스럽게 백군위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백군위 쪽을 일본군이 지원하고 볼세비키 혁명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조선인들은 갈등하게 된다. 결국 그들은 적군에 가담하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자 더 많은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하러 또는 일본의 수탈을 피해 시베리아로 향했다. 개중에는 조선에서 지배계층이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여기서도 지배계층이 되길 원해서 갈등이 있기도 했다.

단야는 독립에서 나아가 해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 해방은 신분우월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참회와 그 실천이 한 켠에 서고, 차별 받아온 사람들의 몸에 밴 굴종의식과 자기 비하를 태워내고서 평등관을 받아들이는 실천이 다른 한 편에 서서 이룩해내는 것일 때에라야만 조선인 모두를 위한 해방이 될 것이야.”
라고 그는 조선의 해방, 사랑과 평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희망을 레닌에게서 발견하고 그에게 고려연방제, 또는 고려연방국을 제의한다.
“농민과 노동자의 나라가 러시아이며, 러시아의 희망은 농민과 노동자로 하여금 러시아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데 있음을 맨 처음 설파한 사람도 레닌이오.”
“레닌은 참고할 만하다고 믿어.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노선을 따르면서 우리의 독자성을 살려갈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오.”
러시아는, 특히 시베리아는 아직 적군이 백군과 전쟁에서 완전히 승리하지도 못했고, 또 연합국이 철수했지만 일본이 요지부동으로 버티고 있어서 조선인들이 앞장서서 일본을 막아주기를 바라는 처지였다. 하지만 일본의 힘이 강력해서 적군은 그들과 싸울 여력이 없어 레닌은 일본과 협상을 도모하던 차였다. 일본 또한 많은 친일 조선인들을 보내어 이로 인해 시베리아의 조선인들은 갈래갈래 찢어졌다.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대양읍에도 그 물결이 밀려왔다.
일본은 수리조합을 세워 고리대금업을 하고, 빼앗은 조선인 땅을 다시 밀고 네모반듯하게 만들어 소작을 시켰다. 그리고 신작로를 만드는데 마을 사람들을 동원했다. 신작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일직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와 관계 되는 곳(사실은 지주 이름의 일본 땅)은 돌면서 마을을 두 동강 내기도 하면서 진행되니 자연히 동네 사람들의 불만은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작로를 만드는데 모든 동민들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응하지 않자 할당량을 정해 일찍 마치면 보내준다고 회유도 하고 그래도 응하지 않는 자는 매로 다스리니 사람들은 움직임이 달라졌다. 그러다가 말다툼이 일어나서 일본인 감독을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어 죽이고 파묻기도 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일본경찰은 숫자상으로 적으니 수세에 몰렸다. 그러나 일본에서 지원 군대가 오자 무력 진압은 심해져, 예배당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총을 쏘고 불을 질러 몰살시켰다.
그렇게 진압되고 나자 사람들은 낮에는 아무 말없이 일하다가 밤에는 산으로 가서 나무마다 태극기를 달았다. 아침 햇살에 태극기가 나무마다 나부끼는 대목은 무척 감동적이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날 무렵 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밝혀진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들의 민족자결주의지 식민지 민족들의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 다녀온 단야는 우울해졌다. 그를 우울하게 만든 것은 삼일운동의 실패가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 친구들이 식민지 상황에 체념하고 목숨을 잘 보전하자는 자세 때문이었다.
시베리아에서도 일본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어 조선인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모조리 강간하는 처참한 살육이 있었다. 레닌은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져가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이 사건은 조선인들이 경거망동하여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일으킨 사건이라 생각하고 화를 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여 조선인 대표를 만났다.
1921년 한국공산당이 창립되고, 이동휘가 대통령이 되었다. 한국공산당은 그것이 곧 완전하고 성숙한 유일한 조선인들의 합법적인 정부가 되기를 갈망했다.
1922년 백위군 잔여 세력은 지리멸렬해지고 최후 거점이던 블라디보스토크에 적색 깃발이 올려졌다. 일본군은 사할린을 제외한 전 시베리아 지역에서 쫓겨나고 친일하던 조선인들도 국내로 철수했다.
하지만 단야는 실종되었고, 최석두는 죽었다. 레닌도 죽고 조선인들을 과히 탐탁지 않아 하던 스탈린이 권력을 잡아 시베리아 조선인에겐 강제이주정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에는 ‘조선공산당’이 세워졌다.

긴 호흡의 이야기 요소요소마다 작가는 다양한 사료를 인용했다. 그 중 가장 애절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이나 정미칠조약을 체결한 매국대신들을 처벌하라는 간곡한 상소문이었다. 일본군의 겁박에 굴하지 말고 그들을 처벌하여 기강을 바로잡으라는 최익현의 글에 넘치는 기개는 꼰대로만 알고 있었던 그 최익현이 아니었다.
2·8독립선언문이나 레닌의 연설문등을 읽으며 문득 왜 우린 이런 사료들을 가지고 공부하지 않았을까 의문스러웠다.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을 읽으면 이 사람을 무정부주의자라고 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데 말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헌병제도를 도입하여 모든 군인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칼을 차게 했다. 그들의 교육 목표는 일본 천황의 충실한 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천황의 명령을 받을 정도의 지식이면 족했다. 그래서 너무 많이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찰도 마찬가지였다. 주지는 총독부에서 임명했고, 일본식 절이 동네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조선인들의 의식을 일본화해서 근본적으로 조선을 없애겠다는 것이 일본의 목표라고 단야는 생각했고, 그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교육 목표는 뭘까? 서울대를 비롯한 스카이대 진학인가? 한국의 학생들은 모두 학자가 될 듯이 밤 12시가 넘도록 공부를 한다. 예전엔 대학만 가면 되었지만, 지금은 대학에 가서도 취직 공부로 날을 보낸다. 그런데 왜 한국인의 의식 수준은 나아지지 않는 걸까? 왜 우린 역사에 대해 제대로 잘 모르는 걸까?
동국대 철학과 강유원 교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서해 유성룡의 ‘징비록’을 제목과 저자만 알지 읽지 않는다. 다 안다고 착각을 한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일본을 욕하는 이 글을 일본인들은 한 해 5천 부씩 사 본다고 하는데 말이다. 우리 후배들도 교육법을 달달 외면서 교사 임용고시 공부는 하지만 실제 관련 책을 읽지는 않는다. 읽었다고 착각을 한다. 그러니 합리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나저나 이 작가가 이 이야기에서 희망으로 말한 것은 무엇일까? 예배당에 도망가 있다가 총탄과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박근우와 김순지의 사랑, 김시영과 순개 사이에서 태어나 절에 맡겨졌던 선봉 스님, 그리고 최석두가 총 맞아 죽는 순간 품에 지니고 있었던 신채호의 ‘조선독립선언’에서 희망을 찾은 걸까?

“개인적 저주나 원한은 그 대상물이 사라지면 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잃게 된다. 그러나 투쟁의 대상과 목표가 단순히 시간적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한 사회 전체에 걸쳐서 내재한 때에는 그렇지 않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투쟁은 곧 인간 자체의 해방과 자유에 기여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싸움이며 이는 곧 행복이라는 차원으로 치닫는 숭고한 과제인 것이다.”
는 말에 감동을 받고,
“저는 조선이라는 한 국가의 해방에 머물지 않는, 조선인이라는 인간 자체의 해방을 원하고 있습니다.”
는 염원 속에 작가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일까?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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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국회에서는 침략신사 야스쿠니 문제를 보편적인 국제인권의 시점에서 조명하고 UN인권기구에 이 문제의 해결을 호소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열렸다. 같은 주제로 2016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행사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와 강창일 의원이 주최하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와 연구소가 주관하였으며 동북아역사재단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김민철 책임연구원의 사회로 진행된 회의에서는 이희자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한국위원회 공동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랫동안 한국과 일본의 시민연대를 통해 노력해 온 전문가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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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히데키(矢野秀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일본을 잇는 모임 사무국장은 ‘아베 정권과 메이지유신 150년 그리고 야스쿠니’라는 발표를 통해 메이지 유신 150년을 앞두고 아베 정권이 시도하고 있는 ‘메이지 영광의 부활 프로젝트’의 본질을 파헤치고, 이것의 극복을 통해 동아시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시민들의 과제에 대해 발표하였다.
남상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 근현대연구실장은 ‘한국의 시점에서 본 메이지 150년과 야스쿠니신사 문제’라는 제목으로 메이지 시대가 한국사회에 갖는 의미, 야스쿠니신사가 기억하는 메이지에 대한 분석을 시도했고 야스쿠니신사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한 시민들의 연대를 호소하였다.
야스쿠니 소송 담당 변호인으로 한국 원고들과 함께 오랫동안 야스쿠니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싸워 온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아사노 후미오(浅野文生) 변호사는 야스쿠니 소송의 국내외적 의의와 소송의 현황과 쟁점 그리고 전망에 대해 발표하였다.

마지막으로 백가윤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는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오랫동안 UN인권기구의 국제회의에 참여하며 얻은 경험을 소개하면서 야스쿠니 문제를 UN인권기구에 제기하기 위한 구체적인 제언을 발표하였다.
종합토론에서는 조시현 연구위원의 소송 전략에 대한 제안과 향후 이 문제의 구체화를 위한 실천적인 방법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번 회의에는 야스쿠니에 가족이 합사되어 있는 한국 유족을 비롯하여 연구자, 변호사, 활동가 등 50여 명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는 침략신사 야스쿠니 문제의 본질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소중한 자리였다.

• 김영환 대외협력팀장

목, 2017/11/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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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단이 이나라에 더 해로운가요??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목, 2017/11/1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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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 30

<매일신보> 1937년 6월 22일자의 지면에는 임사일(林士一)이라는 사람이 기고한 연재물 「창의문 밖의 기억」 첫 회가 수록되어 있다. 이 기사는 그 다음달 7월 2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분할 연재되었는데, 창의문 밖을 벗어나 부암동 중턱의 무계동천과 윤웅렬 별장에서 시작하여 석파정을 거치고 골짜기 아래의 부침바위, 세검정, 연융대, 홍지문, 보도각 백불(白佛) 일대를 죽 탐방하는 행로가 그려져 있다.
이 글을 따라 읽다 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듯 아닌 듯 이 일대의 옛 모습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 연재물에는 여기저기 채석장에 관한 언급이 유달리 많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1937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4회’ 연재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묘사되어 있다.

실상 인왕산 주변을 살펴보면 예전에 채석장으로 사용한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홍제동 쪽에 자리한 문화촌현대아파트 104동의 후면에도 바로 이러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쌈지마당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남은 작은 공터가 보이고, 그 동편에 절개지 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광경에서 이곳이 한때 채석장이던 공간임을 실감하게 된다.

 

20서울 홍제동 문화촌현대아파트 104동의 후면에 자리한 쌈지마당놀이터 전경

21

옛 홍제동 채석장의 한쪽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관음보살입상의 모습

가만히 살펴보니 한쪽 바위면에는 가히 이곳의 명물이라고 할 만한 ‘마애관음보살입상’ 한 구가 새겨진 모습도 눈에 띈다. 기껏해야 반세기 남짓 그 안쪽 시기에 만들어졌을 이 보살상이 정확하게 어느 때 누구에 의해 조성된 것인지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듣기로는 1972년 이후 1994년까지 문화촌현대아파트 101동 자리에 사현사(沙峴寺)라는 사찰이 옮겨와 있던 기간에 이 절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가 이를 조성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곳 홍제동 채석장은 어떤 내력을 지닌 곳이었을까? 이 장소에 관해서는 조선총독부 관보(官報)의 부록으로 간행되던 <통보(通報)> 제118호(1942년 6월 18일자)에 탐방기 하나가 남아 있다. 여기에는 「현지보고(2) 착암공양성소」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이 글을 쓴 목적에 대해 “본란은 고도국방건설을 목표로 조선 내에 약동하는 각종 시설을 있는 그대로 평이 간명하게 소개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기획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홍제정(弘濟町)의 정류소에서 버스를 내려, 오른쪽으로 꺾어 야채밭을 반천(半粁, 500미터) 남짓 나아가면 눈앞에 황색 빛을 띤 밝은 건물이 나타난다. 경성부 홍제정 산(山) 1번지, 이런 복잡한 지번인 ‘조선총독부 착암공양성소(鑿岩工養成所)’. 산금반도(産金半島), 지하자원 적극 개발의 요청에 응하여 소화 13년(1938년) 8월 1일에 개설된 광산전사(鑛山戰士)의 연성도장(鍊成道場)이다.
4월, 8월, 12월, 1년을 3기로 나눠 1기에 약 4개월, 이미 530여 명의 졸업자를 배출한 이 양성소에는 지금 제12기생, 이번 4월 입소한 50여 명의 젊은 산남(山男, 산사나이)들이 착암부(鑿岩夫)로서 홀로서는 어봉공(御奉公)의 날을 마음에 그려가면서, 인왕산 뒤편 암벽에 묵묵히 수행의 투혼을 끓어오르게 하고 있다.(중략)
매일 아침 6시 기상, 7시 아침밥,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 라디오체조를 행하고 발랄하게 현장으로 향한다. 매주 화요일에는 소장인 키노(木野) 본부(本府) 산금과장(産金課長)의 수양훈화가 행해진다. 1일 8시간의 실습을 마치고 숙사로 돌아오면 즐거운 저녁밥이다. 그리고 밤은 녹초가 되어 피곤해진 몸으로, 내일의, 또 한 번 큰 미래의 설계를 그리면서 유쾌한 잠자리로 빠져들어 간다. 그리하여 4개월, 배우고 익힌 이 팔뚝에 착암기를 힘차게 쥐고, 지하자원개발의 기운찬 광산전사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22

경성부 홍제정에 착암공양성소가 개설될 예정임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8년 5월 28일자 보도내용

 

23

<통보> 제118호(1942.6.15)에 수록된 착암공양성소 실습 광경

 

24

<매일신보> 1938년 11월 16일자에 수록된 착암공양성소 입소허가자 명단을 살펴보면, 전체 50명 가운데 일본인은 9명에 불과하고 절대다수는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홍제동 산 1번지’는 실상 인왕산의 서쪽면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번이다. 이 가운데 지금의 홍제동 채석장 터 일대에 들어선 것이 ‘착암공양성소’였던 것이다. 공기착암기와 전기착암기를 다루는 숙련공을 배출하는 실습교육장인 이곳은 일제가 1937년에 추진한 이른바 ‘산금(産金) 5개년 계획’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다.
이 당시 중일전쟁의 발발로 전시체제가 본격화하면서 광물자원의 확보가 더욱 긴요한 상황이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금(金)은 결제수단으로서 전통적인 위상과 더불어 장차 ‘동아공영권(東亞共榮圈)’ 내에서 기준화폐로 사용될 엔화(圓貨)의 통화 신용유지를 위해서라도 증산의 필요성이 우선적으로 강조되던 시절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금 생산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방안을 집중 강구하여 1936년 기준 연간 20톤 규모이던 것을 5년 사이에 연간 75톤으로 확장하는 정책을 국책(國策)으로 삼게 되었다.
1938년 5월 12일에 공포된 제령 제20호 조선중요광물증산령(朝鮮重要鑛物增産令)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금을 비롯한 주요 전시 광물자원의 생산은 대개 함량미달로 채산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놀려두고 있던 저품위 광산을 개발하거나 매광(賣鑛)을 촉진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이를 위해 조선총독이 중요광물을 목적으로 하는 광업권자에 대해 사업의 착수 또는 사업의 계속을 명령할 수 있다거나 중요광물의 증산을 꾀하기 위해 산금장려비와 시설보조비를 지급할 수 있다는 등의 내용이 이 법령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동시에 총독부 식산국(殖産局) 내에는 종래의 광산과에서 산금과(産金課)를 분리 신설하여 산금정책을 전담하게 하였고, 이때 착암공양성소도 함께 만들어 산금과장에게 이곳의 운영을 맡겼다. 착암공양성소의 설치 이유는 무엇보다도 실무적으로 원활한 금 생산을 위해서는 광산도로의 개설, 송전시설의 보강, 착암공과 광부의 알선이 뒷받침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매일신보> 1938년 7월 31일자에 수록된 개소식 관련 보도내용을 보면, 착암공양성소가 홍제동 일대에 설정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일찍이 총독부에서 그 개소를 준비중이던 착암공양성소는 키노(木野) 산금과장을 소장으로 하여 부내 홍제정 발파연구소(發破硏究所)의 일부를 빌려서 8월 1일부터 개소하기로 되었다. 강습생은 응모자 250명 중에서 50명이 전형 결정되어 이미 양성소 전용의 압기기공장(壓氣機工場) 75마력도 완성하여 이것을 요하는 착암기는 부내 각 판매점에서 다투어가며 기부신청이 있어 벌써 십 수 대가 준비되어 있다. 여길 보면 착암공양성소가 들어선 곳은 원래 발파연구소가 있던 구역이라고 되어 있다. 광산개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발파연구소는 1936년 6월에 만들어졌으며, 화약의 제조 및 취급과 관계된 이유로 애당초 총독부 식산국이 아닌 ‘경무국(警務局)’의 소관 기관으로 설정되었다.

25총독부 경무국에 의해 홍제내리가 발파연구소 후보지로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매일신보> 1936년 7월 3일자 보도내용

그후 산금장려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자 이에 발맞춰 1940년 7월에 부설기관인 ‘발파기술원양성소(發破技術員養成所)’가 정식으로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곳에서는 광산과 기타 공사장에서 종사할 발파기술원들을 체계적으로 배출하기 위해 20명 남짓 선발된 교육생을 대상으로 6개월 간에 걸쳐 화약 종류의 취급과 발파법에 관한 교육이 이뤄졌다.
이처럼 두 기관이 하나의 공간에 들어서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폭약을 터뜨리고 또한 착암기로 쉴 새 없이 뚫어대니 아무리 바위산인들 어찌 온전할 리가 있었겠는가.
지금에야 어찌 어찌 세월이 흘러 그 앞에 들어선 아파트 숲으로 인해 조금은 시야에서 가려진 형국이지만, 바로 눈앞에 펼쳐지는 이곳의 속살을 대면하게 되면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생채기들이 이토록 많았던가 하는 점을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목, 2017/11/1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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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역사와 정치에 관심 많은 후원 회원으로 몇 가지 드리고 싶은 의견이 있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1. 요즘 새로운 문재인 정부의 기조인 적폐 청산과 관련되어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죠.
국정 교과서 폐기에 적폐들이 하나 둘씩 구속되어 감옥에 가고 어렵지만 순조롭게 적폐청산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박정희 동상 건립과 관련해서 박정희 숭배자들이 일반 시민과 건립 반대자들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는데요.
플랭카드에 친일 독재자 박정희라고 쓰시는 것보다는 일왕에 혈서 쓰고 만주에 독립군 잡으러 다니던 일본군 장교 다까기 마사오의
기록과 사진(혈서 쓴 사진, 장교복), 동료 교사였던 분의 증언 등을 담고 남조선 노동당 당원(남로당) 원조 빨갱이 사진 박정희의 사진과
활동 기록, 구호를 들고 건립 반대 외치시면 어떨까요??

또한, 박근혜가 2000년대 초반 김정일과 나란히 사진 찍은 것과 국가의 허락없이 서신을 주고 받은 것들을 부각시켜 플랭카드에
보여주면, 저쪽에서 아무 소리 못할 것 같습니다.

2. 상암동에 박정희 도서관 폐관 운동을 추진해 주십사 하는 의견을 드립니다.
서울 시장인 박원순 시장님께 요청하여 폐관하는 운동을 추진하고 그 건물은 다른 목적의 문화 시설 등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건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3. 2년전부터 망치부인님의 방송을 들으면서 정치 판세를 읽곤 하는데 이 분을 초청하여 박정희에 대한 강의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동상 건립하는 곳에서 생방으로 직접하실 수 있고, 어제 망치님 방송에서 망치님이 직접 언급하셨던 내용입니다.

4. 식민지 역사 박물관 건립에 정기적으로 후원하고 싶습니다.

현재 매월 2만원을 기부(카드로 정기 자동 결제)하고 있고, 1만원을 추가(카드로 정기 자동 결제하여 이를 식민지 역사 박물관 건립에
쓰일 수 있도록 해 주셨으면 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방법을 알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게 전화나 메일 주시면 됩니다.)

5. 매국 식민 사관이 아닌 민족 정기를 이어 받을 수 있도록 자주적 독립 사관, 바른 역사관들을 세우고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
학생들이 제대로 된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바른 역사 교과서 제작 추진이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지금보다 더 많은 홍보와 노력을 기울이시고 계신 줄은 압니다만, 자라나는 학생들이 새로 배울 수 있게 하려면 아무래도 학교 교과서에 
바른 역사관이 들어가야 할 듯 하여 글을 남깁니다.

목, 2017/11/16-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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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 아산시 배방면 폐금광 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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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이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야산에 위치한 세일 폐금광(배방읍 수철리 산 181-2번지)에서 유해매장 여부를 확인하는 시굴조사를 시작했다. 사진은 지난 달 아산유족회 회원들이 폐금광을 찾아 절을 하는 모습이다.

충남 아산에서 한국전쟁 당시 부역혐의로 학살된 민간인의 유해 매장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가 시작됐다.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은 시굴조사를 통해 희생자 유해가 확인될 경우 아산시와 협의해 내년 중 본격 발굴을 할 예정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아래 공동조사단)은 지난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간 아산시 배방면 중리3구 야산에 위치한 세일 폐금광(배방읍 수철리 산 181-2번지)에서 유해매장 여부를 확인하는 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증언에 따르면 학살된 주민은 어린아이에서부터 여성 등 일부 마을 주민 대부분이 포함됐다. 임산부가 학살된 경우도 있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이곳 세일 폐금광에 유기된 희생자는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된다.

가해 책임자는 경찰이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에 의해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와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주로 경찰과 우익청년단이 잡아들이고 총살한 후, 이곳 폐금광에 시신을 유기했다.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지의 주민들이었는데 시신을 매장할 때에는 중리3구 청년들이 동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찰이 면내 10여개 마을을 돌며 ‘마을 회의’ 또는 ‘도민증 발급’을 해주겠다며 속여 주민들을 소집, 곡물창고와 창고 등에 감금한 후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가 학살했다.”(목격자 증언, 진실화해위원회)

“우리 집에서 거리가 200미터 정도도 안 되었기 때문에 총소리는 굉장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를 들으면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어두울 때인데 그날도 차에 사람을 싣고 지나가더니 총소리가 났었는데, 누군가 와서 삽을 달라고 해서 삽을 준 적이 있습니다.”(목격자 진술, 진실화해위원회)

암매장지는 이곳을 비롯해 여러 곳에 걸쳐 있다. 아산유족회에 따르면, 매장지역은 탕정면 용두1리 탕전지서 뒷산, 영치면 대동리 세지기 공동묘지, 산양리와 산양1구, 배방리 중리3구 뒷산폐금광 등이다.

앞서 정부기구인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보고서를 통해 “경찰과 대한청년단, 태극동맹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집단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반인권적 국가범죄에 해당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조사에서는 아산지역에서 당시 희생자 중 모두 77명의 신원이 확인됐다.

이번 시굴 조사는 늦은 감이 있지만 아산시(시장 복기왕)의 큰 관심과 의지로 가능했다. 아산시는 지난 2015년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사업과 유해발굴 사업을 지원할 수 있는 ‘아산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에 관한 조례’를 제정했다.

공동조사단에는 4.9통일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정의실천연대, 이내창기념사업회, 인권의학연구소·김근태기념치유센터, 인권재단사람, 장준하기념사업회, 제주4·3희생자유족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평화디딤돌, 포럼진실과정의, 한국전쟁유족회 등이 참여하고 있다.

<2017-11-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부역 혐의로 학살된 아산 주민 유해 햇볕 볼까

※현장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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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7/11/1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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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재은 기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 건립에 대해 국민 10명중 7명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은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서울시 소유의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부지에 ‘박정희 동상’ 건립을 추진하며 논란을 빚고 있다.

16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대표 이택수)가 tbs의뢰로 박 전 대통령의 동상건립에 대한 국민여론을 조사한 결과 ‘반대한다’(매우 반대 50.7%, 반대하는 편 15.8%)는 응답이 66.5%로, ‘찬성한다’(매우 찬성 16.3%, 찬성하는 편 13.8%)는 응답(30.1%)보다 2배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잘 모름’은 3.4%.

지지정당별로는 정의당 지지층(찬성 1.7% vs 반대 94.5%)과 민주당 지지층(2.5% vs 93.8%)에서는 반대 응답이 90%를 넘어 압도적으로 높았다. 국민의당 지지층(40.6% vs 59.4%)과 바른정당 지지층(41.3% vs 48.7%)에서도 반대가 대다수이거나 우세한 것으로 조사됐다.

반면 자유한국당 지지층(찬성 91.3% vs 반대 7.4%)과 무당층(52.2% vs 43.9%)에서는 찬성 응답이 압도적으로 높거나 절반을 넘었다.

이념성향별로는 진보층(찬성 4.0% vs 반대 94.2%)과 중도층(33.1% vs 62.6%)에서는 반대가 압도적으로 높거나 대다수인 반면, 보수층(68.0% vs 28.7%)은 찬성이 대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 등 영남권을 포함한 모든 지역에서 반대가 우세했는데, 광주·전라(찬성 13.2% vs 반대 81.4%), 경기·인천(21.9% vs 73.4%), 서울(26.4% vs 68.2%), 부산·경남·울산(37.5% vs 59.6%), 대전·충청·세종(42.5% vs 57.5%), 대구·경북(45.8% vs 54.2%) 순으로 반대가 높았다.

연령별로는 30대(찬성 11.1% vs 반대 86.3%)와 20대(14.7% vs 80.2%)에서는 반대 응답이 10명 중 8명 이상으로 압도적으로 높았고, 40대(21.4% vs 77.2%)와 50대(36.1% vs 60.5%)에서도 반대가 대다수로 조사됐다. 반면, 60대 이상(찬성 56.7% vs 반대 38.7%)은 찬성이 대다수로 나타났다.

이번 조사는 2017년 11월 15일(수)에 전국 19세 이상 성인 9069명에게 접촉해 최종 511명이 응답을 완료, 5.6%의 응답률을 나타냈다. 무선(10%) 전화면접 및 무선(70%)·유선(20%) 자동응답 혼용, 무선전화(80%)와 유선전화(20%) 병행 무작위생성 표집틀을 통한 임의 전화걸기 방법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4.3%p이다.

김재은기자

<2017-11-17> 이데일리

☞기사원문: [리얼미터]박정희 동상건립 66.5% `반대`..한국당지지층 찬성 91.3%

※관련기사

☞뉴스1: 박정희 前대통령 동상 건립…찬성 30.1% vs 반대 66.5%

☞국제뉴스: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건립 반대 67% vs 찬성 30%

☞아시아경제: 박정희 동상 건립…반대 67% 찬성 30%<리얼미터>

☞서울신문: 박정희 동상 건립 10명중 7명 “반대”

☞서울경제: ‘박정희 동상’ 건립, 국민 대다수가 ‘NO!’…압도적 반대

☞뷰스앤뉴스: [리얼미터]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66.5% vs “찬성” 30.1%

금, 2017/11/17-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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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팟 인터뷰]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시간에 쫓겨 못한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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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일 오전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 앞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 기증식이 열리고 있다. ⓒ 이희훈

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에 이런 혈서가 실렸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 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합격을 위해 충성 맹세했을 그때, 백강 조경한 선생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내 박 전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 입교에 성공했을 즈음, 선생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있었으며, 1944년 4월은 또한 두 사람 모두에게 중대한 시점이기도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조경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낯설었던 선생의 이름이 박정희 탄생 100주년에 귀에 꽂혔다. 14일 윤소하 의원(정의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 덕분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 당시 보훈차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백강 선생 유족의 지원 요청 “몇 차례 잘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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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강 조경한 선생 생가 안채 후면 모습 ⓒ 윤소하 의원실 제공

“1919년 3.1 운동 후 만주로 망명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으시고, 1981년에는 독립유공자협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안장돼 계십니다. 선생은 유언에서조차도 동작동 국립묘지에 친일파 일부가 묻혀 있다고 같이 묻힐 생각이 없다,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하지만 선생의 고향인 순천에 추모비만 있을 뿐, 제대로 된 추모시설 조차 없어요. 사진 한 번 봐주세요. 완전히 방치되어 있는 백강 선생 생가의 안채와 사랑채 전면과 후면의 현재 모습인데요. 임시정부 국무위원, 그리고 평생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의 기념시설조차 없고 생가마저 방치되어 있는 것은 부끄러운 겁니다. 전남 동부 보훈지청을 통해 유족들이 생가 복원 사업 계획을 제출했습니다. 자기 돈 들여서,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는 답과 함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지만,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 따라붙었다. 이 설명을 끝으로 페이스북 영상은 끝났지만, 윤 의원으로서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듯했다. 윤 의원의 질의가 나왔던 시점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앞 동상 건립을 놓고 논란이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던 때. 14일 전화통화에서 윤 의원은 “시간이 부족해 매우 아쉬웠다”라고 말했다.

윤 의원 역시 “솔직히 백강 선생을 잘 몰랐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손들이 자신들의 돈을 더해 복원하겠다며 몇 차례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과정에서 보내 온 자료들을 통해 조경한 선생이 살아오신 궤적을 살피게 됐다”고 했다. “1억 8000만 원 정도 되는 예산이 몇 차례 잘려버렸다고 하더라”는 그의 음성에는 화가 묻어 있었다.

이어 윤 의원은 “이건 예산 얼마를 확보하고 못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해방 이후 친일 잔재들이 정치·사회·경제적 기득권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반대편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애국지사들의 삶이 있다”며 “박정희 탄신 100주년이라고 동상 건립 논란이 있는 상황을 백강 선생과 대비시켜 이게 현실이라고 강조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비밀독립군”, 백강 선생 이용했던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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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백강 조경한 선생. 지난 8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독립운동가 조경한을 찍은 흑백 사진’을 공개하면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맞다. 왜냐하면, 부모를 제대로 봉양 못 하게 되고, 자녀 교육도 제대로 시킬 수 없으며, 자신도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란 선생의 말을 함께 소개하기도 했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그리고 윤 의원은 거듭 “적폐 청산은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대한민국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라고, “단순히 이번 정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졌다”는 이와 같은 윤 의원의 주장은 자유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이 과거 백강 조경한 선생을 이용해 박 전 대통령이 ‘비밀 독립군’이었다고 강변했던 것을 떠올리면 더 명확하게 와 닿는다.

2015년 10월 새누리당은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백강 조경환(조경한의 당시 새누리당 측 표기 오류) 선생께서 박 전 대통령을 독립군을 도운 군인으로 기억했다는 증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의 <세계일보> 기고글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선생을 찾아가 자신을 일본군 중좌 다카키 마사오라 소개했고, 이에 선생이 조선인 병사들을 상해 임시정부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이름으로 익히 알고 있어 반가워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이와 같은 새누리당 주장은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선생 이름은 조경환이 아닌 조경한이며, 만주에 있던 박정희가 당시 중국 남서부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로 조선인 병사를 빼돌렸다는 말은 성립 불가능하다”라고 지적했다.

또 백강 선생 외손자 심정섭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역시 “박정희와 외조부가 나눈 실제 대화는 기고문과 많이 다르다”라고 반박했다. 자신이 직접 들은 바에 따르면, 쿠데타 당위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의 친일 행적을 고백했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비밀 독립군설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과거 증언까지 줄줄이 소개됐다.

그럼에도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진 권력’은 박 전 대통령을 어떻게든 독립군으로 공식화하려고 했다. 2016년 10월 국방부는 박 전 대통령 추모식 행사를 알리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1944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광복군에서 활동했다”고 그의 약력을 기술했다. 기자들의 반박에 당시 국방부 대변인은 “사실 관계를 확인해 알아보겠다”고 답을 피했다고 한다. 윤소하 의원은 끝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기념사업에 1400억원… “적폐 청산은 긴 숨 갖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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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소하 정의당 의원이 지난 10월 1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의 답변을 지켜보고 있다. ⓒ 남소연

“적폐 청산은 단순히 정치적 공방의 문제가 아닙니다. 역사 바로 세우기예요. 전면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적폐 청산은 계속 돼야 합니다. 이런 의지를 지금 정부가 얼마나 갖고 있는지가, 백강 선생 생가 복원에 대한 정부 입장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정부, 전전 정부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폐 청산은 긴 숨을 갖고 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어요.”

2009년 포항시를 시작으로 박 전 대통령의 동상 세우기 경쟁이 불붙었다. 서울 중구는 신당동 박 전 대통령 가옥에 228억 원을 들여 ‘박정희 공원’을 조성했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만 박정희 기념사업에 국가 예산을 포함해 1400억 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친일파와 함께 묻히기 싫어 동작동 국립묘지를 거부했던 독립운동가, 백강 선생 생가 보존에 국가가 이제까지 쓴 돈은 공식적으로 ‘0원’이다.

<2017-11-16>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혈서 쓴 박정희 1400억 독립투사 생가예산은 0원

※연관기사

☞연합뉴스TV: 내년 3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친일청산’ 바람

금, 2017/11/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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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평균 7만원이던 기부금, 金 비서실장 취임 이후 월 7억원대로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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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사진=이한형 기자/노컷뉴스)

국정원의 특수활동비가 박근혜 청와대에 상납된 사실이 드러난 가운데 상납이 빈번하던 그 무렵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 재단'(이하 재단)으로도 수상한 뭉칫돈이 흘러들어간 정황이 포착돼 주목된다.

민주당 김경협 의원과 CBS노컷뉴스가 국세청 공익법인공시를 확인한 결과 재단으로 2013년 11월과 12월 두 차례 거액이 기부금이 들어갔다.

11월에 재단 계좌에 찍힌 기부금은 10억 6천 만 원. 이어 12월에도 5억 원을 누군가로부터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재단법인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으로 전환한 이후 5개월간 월 평균 7만 원 정도 밖에 안됐던 기부금이 두 달 간 월 평균 7억 원 넘게 늘어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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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의 기부금이 돌연 1만 배 넘게 폭등한 시점이 묘하게 김기춘 씨의 청와대 입성직후다.

김 씨는 재단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3개월 만에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영전한다.

김 씨가 재단 이사장으로 있을 때는 재단의 기부금이 7만 원 선이었는데, 김 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옮긴 이후 기부금이 7억 원으로 늘어난 셈이다.

이는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난 바처럼 그해 5월부터 청와대로 국정원 특수활동비가 상납되던 시기와도 겹친다.

하지만 문제의 기부금이 국정원 특활비에서 나온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김경협 의원은 재단으로 수상한 돈의 흐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2014년 문창극 당시 총리 후보자 청문회를 준비하면서 파악했다.

김 의원은 문창극 씨가 총리후보로 지명되기 직전까지 재단의 이사로 재직중이었던 만큼 재단 ‘회보’ 등을 바탕으로 문 씨의 재단 내 역할 등을 살펴보던 중 거액의 기부금이 모금된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재단 회보와 재단 홈페이지 등에는 대략적인 기부금 액수만 공개돼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기부 금액과 기부 시점이 확인된 것은 이번 국세청 자료를 통해 새로 밝혀진 부분이다.

더욱이 재단이 기부금 관련 내용을 은폐하고 있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2014년 문창극 씨 청문회를 앞둔 시점에 재단 홈페이지에는 2013년 기부금이 뭉칫돈으로 들어왔다는 내용이 게재돼 있었지만 지금은 관련 내용이 삭제돼 있다.

국세청 자료에는 2013년 15억 원의 기부금이 재단에 들어간 이후 기부금 규모가 다시 수 백 만 원 대로 줄어든 것으로 돼 있다.

다만 지난해 말까지 5차례 정도 거액의 기부금이 추가로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

5천 만원(2014년 1월), 1억 1800만원(2015년 5월), 1억 1600만원(2015년 9월), 2억 1,111만원(2015년 12월), 1억 원(2016년 12월) 등이다.

김경협 의원은 “국정원 적폐 청산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의 권력자들이 국정원 예산을 쌈짓돈으로 사용하거나 전경련에 압력을 가해 기업 돈을 보수단체에 지원한 사례 등을 봤을 때 박근혜 정권이 박정희 재단에도 금전적 지원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며 “이 부분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재단측은 기자의 통화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서울시 부지에 박정희 동상을 설립하는 문제가 사회 이슈가 된 이후 재단의 공식 반응은 나오지 않고 있다.

<2017-11-17> 노컷뉴스

 ☞기사원문: [단독] 김기춘 靑 입성하자 박정희재단에 수상한 뭉칫돈

금, 2017/11/17-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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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내년 2월 발굴 예정… 충남 아산 배방리 설화산 자락 유해매장지 찾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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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일, 67년 만에 드러난 희생자 유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추정된다. ⓒ 공동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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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자들의 두개골이 67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공동조사단

“여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산기슭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땅속 지형을 살펴보던 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은 “이곳은 폐광산 터가 아니다”고 결론 내렸다.

지난 17일. ‘아산시'(시장 복기왕)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발굴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 아래 공동조사단)은 아산시 배방면 복리 3구 야산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약식 개토제를 지낸 뒤 삽 자루를 움켜잡았다. 1951년 부역 혐의로 억울하게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에 의해 살해된 희생자 암매장 위치를 찾는 시굴조사였다.

아산유족회원들은 물론 아산시와 공동조사단 일원인 4.9통일 평화재단, 민족문제연구소 천안 아산지부 등도 힘을 모았다(관련 기사 : 부역 혐의로 학살된 아산 주민 유해 햇볕 볼까)

유해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67년 동안 지형이 바뀐 곳이 많은 데다 온전하다고 해도 증언에 의존할 수 없다. 이번 유해 매장지는 흔적이 사라진 당시 세일 폐광산 입구를 더듬어야 했다. 게다가 폐광산 입구가 산자락 여러 곳에 있었다는 증언마저 나왔다.

[11월 17일] 허탈하게 산자락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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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가 발견된 곳은 희생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바로 아래쪽이었다. 하지만 조사단은 유해를 찾기까지 꼬박 3일 간 야산 곳곳을 뒤져야했다. ⓒ 공동조사단

증언을 간추려 산 중턱에 위치한 한 곳을 선정해 조심스럽게 흙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해는 종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박 유해발굴단장은 “오랜 시간이 흘러 유해매장지를 찾는 일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공동조사단 일원들이 흙먼지를 털며 허탈하게 산자락을 내려왔다.

18일, 몇몇 마을주민들이 전날 유해발굴에 실패했다는 얘기를 듣고 내 일처럼 현장으로 달려왔다. 당시 희생자들이 끌려가는 모습과 폐광산 입구를 기억한다는 증언자의 의견에 따라 능선 부근에서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오전 9시에 조사를 시작했지만, 오후 내내까지 흔적을 찾지 못했다. 적어도 금을 캐던 폐광산의 징후들이 나와야 했지만, 이곳에서도 광산을 일구었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다시 또 하루가 갔다.

애초 공동조사단은 시굴조사 기간은 이날까지로 한정했다. 이틀 내내 실패하자 현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회의결과 조사 기간을 하루 더 연장하기로 했다.

[11월 18일] 또 다시 실패, 조사 기간, 하루 더 연장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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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선주 유해발굴단장(가운데)이 유해매장지를 찾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있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19일, 산자락 아래쪽으로 발굴 대상지를 선정하고 시굴조사를 시작했다. 한 시간 넘게 탐색을 했지만, 이 곳 또한 암매장지가 아닌 것으로 판단됐다.

오전 10시. 이번에는 희생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는 바로 아래쪽으로 위치를 재선정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30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작업자 중 한 명이 작업중단을 외쳤다. 사람의 뼈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두개골과 치아 등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삭고 부서진 유해가 햇빛을 보았다.

당시 경찰이 사용한 탄피,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흰색 단추, 신발 조각도 발견됐다. 박 유해발굴단장은 “드러난 치아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0대를 비롯해 임산부 등 가족 단위 주민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희생됐다는 증언과도 일치한다.

주변 마을에 사는 이봉의(79,중리 3구) 씨가 당시를 떠올렸다.

“당시 마을 이름은 지금의 중리3구가 아니라 ‘검배리’야. 검배방앗간에 경찰과 우익청년단원들이 아산지역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을 끌어다 가둬 놓았어. 그 날은 눈이 많이 왔어. 오후 3~4쯤 됐을까? 경찰과 우익 단체단원들이 사람들을 끌고 산으로 가기 시작했어. 펑펑 눈이 쏟아지는데 일렬로 줄을 세워서… 애기를 등에 업고 양손에 아이 손을 잡은 아낙도 있었어.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조금 있다가 산에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지. 광산 입구에 몰아넣고 죄 쏴 죽인 거야. 총소리가 저녁 7시쯤까지 났어. 100명씩 세 번을 끌고 가 전부 죽었으니까 못해도 300명은 될 거야. 후에 다른 마을에서 시신을 찾겠다고 왔는데 다 그냥 돌아갔다고 해. 광산입구를 흙으로 파묻은데다 시신이 뒤엉켜 있응께니 찾을 엄두가 안 난 거지 “

[11월 19일] 드러난 유해,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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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러난 탄피는 가해자가 누구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가해자는 경찰과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였다.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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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아산시 배방리 산기슭 폐광터에서 발겭야된 희생자 유해 ⓒ 유해발굴공동조사단

같은 지역 주민 맹봉주(78)씨는 경찰과 우익단체 회원들이 확인 사살을 위해 폐광 동굴 안으로 불까지 지폈다고 말했다.

“전해 들은 얘기인데, 혹시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불을 피웠다고 해. 짚불로 연기를 피워 질식사시키려 한 거지.”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에서 1951년 1월에 걸쳐 인민군 점령 시기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민간인 800여 명 이상이 불법으로 학살됐다. 배방면이 희생자가 가장 많았고, 신창면, 탕정면, 염치면, 선장면 주민들도 다수가 희생됐다.

이곳 세일 폐금광에 유기된 희생자는 대략 200~3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 학살은 충남경찰국장과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및 지시로 자행됐다. 또 경찰의 지시를 받은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 향토방위대)과 태극동맹 등 우익청년단체들이 동원됐다.

정석희 충남유족회장은 “저항도 못하는 어린 아이부터 일가족을 국가가 나서 이렇게 무참히 살해했는데도 정부가 유해발굴에 나서지 않고 있다”며 “이게 유가족과 민간단체가 할 일이냐”고 반문했다.

시굴조사로 유해매장을 확인한 아산시와 공동조사단은 내년 2월경 본격 유해발굴을 시작할 예정이다.

글: 심규상(djsim)편집: 최유진(youjin0213)

<2017-11-2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어린애들이 뭔 죄라고…” 300명 유해암매장지 찾았다

※관련기사

민중의소리: 충남아산, 한국전쟁기 학살된 민간인 매장지 드러나…“어린아이까지 학살”

우리들뉴스: 아산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월, 2017/11/2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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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라고 말했다.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흥구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를 놓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이에 ‘말 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고조되는 긴장에 비해 해법은 아직도 묘연하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역사를 보라는 말이 있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펴낸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는 팔십 평생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연구에 힘써온 역사학자다. 작고한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함께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의 대표적 원로 지성으로 꼽힌다. 유신정권 시절에는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4년 동안 대학 강단을 떠나기도 했다. 그는 상지대 총장(2001~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2005~2007년)을 지낸 뒤 강원도 양양으로 거처를 옮겨 지내고 있다. 지난 7월 말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던 문재인 대통령이 강 명예교수를 초청해 대담을 나누기도 했다. 팔순이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왕성한 집필 활동과 강연 등으로 역사의 진보를 설파하는 그를 양양에서 만났다.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북핵 문제가 제일 시급한데, 내가 보기에는 과거 역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핵 개발 중에도 북·미 관계가 좋을 때는 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 시설을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클린턴 정부 때 북·미 수교, 고이즈미 내각 때 북·일 수교를 놓고 협상할 때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 길은 북·미 수교와 북·일 수교 아니겠는가. 그 길만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온다.

현재 북한은 수교를 하더라도 핵 보유를 인정받겠다는 입장 아닌가?

북·미나 북·일 수교를 하게 되면 핵은 포기하라든지 하는 조건이 붙을 것이다. 지금까지 북·미가 수교를 하지 않고 해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벌이니까 결국 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하며 북한 상륙작전까지 연습하니까 북한이 핵무기로 무장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평화주의 견지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옳다고 보기 어렵다. 어쨌든 상대가 있으니까 협상에 달렸다. 세계가 평화를 지향해가고 있는 시대이므로 북·미 평화협정, 북·일 수교를 통한 평화 관계도 마땅히 이룰 수 있다.

광복 72주년에 재현된 건국절 논란을 어떻게 보는가?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 이런 문제인데, 광복절이란 우리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기념일로서 이것은 민족주의적 견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건국절 주장은 국가주의적 견해이다. 결국 건국절 논란은 어떤 역사인식을 가질 거냐 하는 문제다. 계속 분단국가주의적 틀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통일민족주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냐 하는 역사의식의 문제다.

역사적으로 1945년 광복 당시 건국 개념은 무엇이었나?

1919년 상해에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광복이 가까워질수록 좌우 합작 정부로 변모했다. 독립운동 내부에 좌익도 있고 우익도 있었는데 광복 후 이들이 합쳐야 하니까 임시정부가 사실상 좌우 합작이 된 것이다. 김구 선생이 주석이고 김규식 선생이 부주석인데 거기에는 아나키스트, 유림 등 모든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광복이 되면 두 개의 국가가 생길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백범 김구로 말하자면 우익 중의 우익인데 좌우 합작 정부의 주석이었고 분단 이후에는 평양에 가지 않았나. 그것이 우리의 올바른 역사인식이다. 그걸 갈라놓은 게 이승만 정권이고. 오늘날 건국절 운운하는 것은 이승만의 분단주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노무현 정부 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는데 남은 일제 잔재 청산 과제는?

최근 <친일인명사전>까지 나오긴 했지만 문제는 광복된 지 72년이나 됐는데 친일파 연구가 학문적으로 제대로 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로 자료가 전혀 모아지지 않다가 노무현 정부 때 비로소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를 가지고 친일 문제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제대로 반성해야 한다. 어떤 조건으로 친일을 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이를 학문적으로 소화해서 교과서에 정확하게 넣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이 화두다. 역사적으로 적폐가 누적된 근본 원인을 뭐라고 보나?

역사적으로 되돌아보면 업적을 세웠다는 걸 내세워 독재 체제를 얼버무리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이승만 정권의 제일 큰 오점이자 문제점은 친일 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민족사적으로 박정희 정권의 가장 큰 과오는 1965년 잘못 맺은 한·일 협정이다. 협정 당시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합법적으로 지배했느냐, 침략적으로 강점했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협정 당시 일본의 주장을 따르면 일제 36년이 합법적인 게 된다. 그러면 우리의 독립운동은 합법적인 지배에 저항한 잘못된 행동이 된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 합방조약을 1910년 8월29일 한·일 합방이 된 그날부터 무효라고 인식하겠다 하고 아무런 대응 없이 넘어갔다. 역사적으로 큰 과오를 남긴 이 문제가 아직까지 제대로 지적되지 않고 있다(한·일 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를 놓고 한국은 ‘처음부터 무효다’라 주장했고, 일본은 ‘1948년 대한민국 성립 때까지는 유효했다’고 해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은 한·일 병탄조약을 어떻게 보았나?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이 청일전쟁 끝에 빼앗은 타이완은 중국에 돌아갔다. 러일전쟁에서 빼앗은 북위 50° 이남의 사할린 땅도 소련에 넘어갔다. 한·일 합방조약이 합법적이라고 연합군이 인정했다면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에서 빼낼 이유가 없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한 걸 침략 행위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일본 영토에서 한반도를 벗어나게 한 것이다. 하지만 1965년 한·일 협정 때는 그게 전혀 반영이 안 됐다.

학계에서 그 문제가 전혀 제기되지 않았나?

한·일 합방 100주년이던 2010년 한·일 양국의 양심세력이 성명서를 냈다. ‘1910년에 체결된 한·일 합방조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다’라는 공동성명이었다. 하지만 민간에서 해봐야 법적 효력이 있나. 한·일 양국 정부가 하도록 촉구하는 의미였는데 이후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 이제라도 역사학계의 지적을 정부가 귀담아 듣고 일본 정부와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한·일 협정을 통한 청구권 자금이 우리 경제성장의 종잣돈이 되었다며 박정희 정권의 긍정적 업적으로 내세우는 이들도 많은데?

박정희 정권의 업적으로 경제성장을 자꾸 말하는데,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복구 과정에서 경제가 발전하기 마련이다. 일본도 그렇고 독일도 그랬다. 심지어 북한도 1970년대까지는 남한보다 경제 사정이 나았지 않나. 경제성장이라는 게 어느 한 정권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전후 복구 과정에서 으레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독재정권을 미화하는 논거로 삼는 것은 역사적으로 잘못되었다.

▲ 2005년 5월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앞줄 오른쪽)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접견실로 향하고 있다.


한·일 관계는 앞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일본과는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역사교육 문제 등이 있는데 독도 문제는 이미 해결된 거라고 본다. 우리가 우리 영토로 점유하며 증명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박근혜 정부가 잘못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당사자들이 뭘 어떻게 원하느냐를 듣고 일본과 교섭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가 일방적으로 해치웠다. 그러니까 피해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위안부 문제는 일본에 양해를 구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와 합의할 때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없었다. 당사자들이 아직 상당수 살아 있다. 그분들 의견이 들어가야 한다고. 그래야 일본도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역사교육 문제는 일본의 지성들이 해결해야 한다. 아베 정권 이전까지 일본 역사학계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내일 더 잘하기 위해 어제를 아는 것이 역사다. 그렇다고 어제를 알고 그냥 끝내서도 안 된다. 잘못된 과오는 반성해야 한다. 일본의 과거 침략주의에 대한 반성이 아직도 부족하다. 한·일 양국 역사학계가 공동으로 교류하면 역사교육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라 본다.

아베 정권 들어 일본이 우경화하면서 역사 왜곡이 심해지는데?

일본 정부가 교육을 통해 극우 사상을 넣으려 하는데 거기도 발전하는 세상이라 나는 그것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본다. 일본 보수 정권이 비교적 오래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래도 21세기인데 과거의 제국주의적 또는 냉전주의적 상황은 희석될 것이다.

역사학자가 보기에 현재 한반도 처지가 구한말과 비슷한가?

주변 4대 강국에 둘러싸여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4대 강국 시각에서 보면 한반도가 분단 상태에 있는 게 안전하다. 한반도가 중국이나 러시아 등 대륙 세력권에 들어가면 한반도는 해양 세력, 특히 일본을 찌르는 칼이 된다. 반대로 한반도가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 세력권에 포함되면 해양 세력이 대륙을 침략해 들어가는 다리가 된다. 과거 일제강점기가 대표적인 예 아닌가. 광복이 되면서 남북으로 갈렸다. 이 상태가 4대 강국에게는 안전하다. 4대 강국끼리 충돌을 방지하는, 칼도 안 되고 다리도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은 어렵다는 얘긴가?

우리는 4대 강국에 의해 민족 분단이라는 비극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4대 강국이 포함된 6자 회담으로 통일 문제나 남북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장에 한계가 있다고 본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그걸 말해준다. 내가 보기엔 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이뤄진 6·15 남북공동선언은 그런 역사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한이 어떻게 주도적으로 풀어야 하나?

통일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생각하면 분단이 어떻게 고착됐는지 살펴봐야 한다. 1차적으로 1945년 삼팔선이 생기면서 국토가 나뉘었다. 다음으로 1948년 남북한 단독 정권이 생기면서 국가가 분단되었다. 이어서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민족이 갈린 과정을 거쳤다. 이런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남북한은 베트남처럼 사이공 인민주의도 안 되고 독일처럼 흡수통일도 안 된다. 결국은 평화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 문을 연 시작을 나는 6·15 남북공동선언이라고 본다.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민족이 화해하기 시작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도 열렸다. 통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남북한 사이에 연방제냐, 1정부 2체제냐, 2정부 2체제냐 하는 게 다를 뿐 통일국가 체제 논의도 상당 부분 합의가 이뤄졌다. 결국 2정부 2체제로 가는 건 공통분모다.

박근혜 정부 때도 역사학자로서 정부 승인을 받아 방북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을 폐쇄하기 일주일 전인 2016년 2월 역사 발굴 때문에 개성에 들어갔다. 고려 왕궁터를 비롯해 여러 고려 문화 유적이 남아 있어서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삼자고 했다. 그런데 개성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많이 달라졌더라. 5층짜리 아파트가 많이 생기고 남루했던 개성 사람들 옷차림도 달라졌다. 개성공단, 해주공단, 원산공단을 지어나가면 통일이 차츰 되어갈 것이다. 통일이란 게 남북한 사람들 의식이 같아지고 생활이 동화되어가는 데서 출발한다. 차츰 남북이 동화되어가면 통일비용이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들어갈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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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세 번째)이 방북 중인 김민하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박용길 장로, 강만길 교수(왼쪽부터) 등을 접견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통일뉴스 제공

북한 사람들과 북핵 문제도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내가 북한에 갔을 때 어느 북측 인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 소련과 동유럽이 무너지기 전에 북한은 달러 한 푼 없이도 살 수 있었는데, 무너지고 나니 달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더라, 결국 상황이 그렇게 만든 거라고. 북핵을 대미 관계를 풀기 위한 마지막 카드라고 하더라. “우리를 승인하라는 것이고 인정하라”는 주장이었다.

역사란 지그재그로 발전한다고 강조했는데?

역사는 정치적으로 인간의 자유를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경제적으로는 인간 생활을 균등하게, 사회적으로는 인간을 평등하게,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자유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이게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다. 그랬다면 인류의 역사가 여기 머물러 있겠나? 훨씬 더 많이 앞으로 갔을 것이다. 역사는 중간에 가다가 반작용을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사가 반복되는 게 아니고 나선형으로 올라간다. 우리 역사도 마찬가지다. 침략과 분단 등을 겪었지만 우리는 왕조시대를 극복하고 넘어섰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이나 중국의 신해혁명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독립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해갔다. 그래서 우리 힘으로 분단도 극복하고 통일도 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자신감을 갖는 게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취임 100일을 맞은 문재인 정부에 할 말이 있다면?

내치야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발전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대북 문제가 걱정이다. 미국 트럼프 정권도 대북 강경책을 쓸 가능성이 높아서 지난 10년간 닫힌 남북 관계를 푸는 게 쉽지 않다. 북·미 관계가 나빠지면서 야당과 수구 보수 세력이 정부를 비판한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남북 관계의 문을 열어야 한다. 정부 내 대북 정책을 맡은 사람들의 의식이 중요하다. 얼마나 빨리 북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느냐보다는 방향이 맞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의식만 있다면 인내심을 갖고 북한을 설득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또 민간단체가 남북 간 교류를 더 넓혀 나가야 한다.

정희상 기자 [email protected]

<2017-9-1> 시사in

☞기사원문: 강만길, “건국절 운운은 이승만 분단주의의 연장”

월, 2017/11/2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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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스토킹은 적폐인가요 아닌가요

화, 2017/11/21-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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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방향·업체 선정까지 청와대 주도로 집행 
당시 청와대·교육부 직원 등 10여명 수사의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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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교과서 홍보물로 제작한 카드뉴스의 하나. (교육부 제공) © News1

박근혜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면서 편성한 예비비 44억원 중 절반이 넘은 25억원을 홍보비로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가 홍보 방향과 업체 선정 등을 주도하면서 제작단가 등을 부풀린 정황도 드러났다.

교육부 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21일 ‘예비비 집행내역 조사’ 결과 홍보비가 과다하게 집행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정교과서 예비비 배정부터 이례적이었다. 교육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행정예고한 2015년 10월12일 기획재정부에 예비비를 요청했고 다음달 바로 예산 배정을 통보받았다. 당시 교육부 기조실장과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 비서관에 따르면, 장·차관이 사전에 청와대를 통해 기재부와 조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비비 편성도 기형적이었다. 예비비 43억8700만원은 역사교과서 개발을 위해 긴급 편성한 예산이다. 절반이 훨씬 넘은 24억8500만원(56.6%)이 홍보비로 편성됐다. 정작 국정교과서 개발비로는 40.1%인 17억6000만원만 편성했다.

진상조사위가 홍보비를 우선 살펴본 결과 홍보 예산의 대부분은 청와대 주도로 집행됐다. 홍보비의 51.6%인 12억8000만원은 관련 규정을 위반하며 청와대가 주도해 집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교육부는 사후 행정 처리에만 협조했다. 나머지 12억원(48.4%)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을 통해 집행됐다.

당시 교육부 담당자들의 진술에 따르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실이 홍보 방향과 업체를 제안하면 이 제안대로 교육부 실무팀에서 추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홍보영상물 제작업체 선정과 지상파 3사 송출 계약 등도 사전에 청와대가 조율해 놓은 대로 진행됐다.

홍보비 집행과정에서 업무상 배임과 직권남용 의혹도 드러났다. 홍보영상 제작과 송출 계약은 당초 지상파 1개사가 제작과 송출을 맡는 것으로 계약했지만 교육부도 모르게 지상파와 A광고대행사가 계약을 맺어 A사가 홍보영상을 제작했다.

A사는 다른 지상파 방송까지 홍보영상을 송출하면서 송출료 중 10~12%를 받는 이면계약을 체결했다. 또 A사는 B사(제작총괄)와 C사(촬영)로 재하청을 주면서 제작비가 약 5000만원 추가되는 등 제작단가가 부풀려진 정황도 확인했다.

인터넷 베너 광고는 청와대 홍보수석실의 오모 비서관이 추천한 업체에 9000만원을 주고 제작했다. 카드뉴스 등은 새누리당 출신의 당시 교육부 정책보좌관이 알선한 업체를 통해 수의계약으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시중단가보다 상당히 부풀려진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이 발견됐다.

진상조사위는 업무상 배임과 직권남용 의혹에 연루된 당시 청와대 직원과 교육부 직원 등 10여명을 검찰에 수사의뢰했다.

진상조사위는 “홍보비 부당집행 과정을 보면 사전에 계획해 일부를 빼돌린 정황이 있다”며 “조사과정에서 고용노동부 등 다른 정부 부처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는 진술이 있어 확대 수사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권형진 기자 jinny@

<2017-11-21> 뉴스1

☞기사원문: 국정교과서 예비비 44억 중 25억 홍보비로 지출…청와대가 주도

※관련기사

☞이투데이: 국정교과서 예산 44억 중 25억 홍보비… 청와대 주도 불법 집행

화, 2017/11/21-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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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고객이 신뢰하는 브랜드 대상 (2년연속 1위)
*공정거래 위원회 등록, 14년간 재택알바 업계1위를 지켜온 합법회사입니다*

●모집요강 : 만 19세 이상 누구나 가능

●근무시간 : 본인이 편한 시간에 업무가능(투잡/주부/대학생/무직 가능)

●근무장소 : 인터넷이 가능한 어느곳이든 가능

●업무내용 : 간단한 홍보자료 복사+붙여넣기 (자료 전부 제공)

●급여 : 월 200이상 (실제 받고계신 회원님들 통장 인증샷)

●신청방법 : http://hello-dm.kr/marketing/go.php?aid=a160527aD00167356D

화, 2017/11/21-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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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활란 전 이화여대 총장의 동상을 둘러싼 친일 비판이 있었는데요.

내년 3월에는 서울에 일제 식민지 시기를 다룬 박물관이 문을 열 예정입니다.

‘적폐청산’을 넘어 ‘친일청산’ 움직임이 확산할지 주목됩니다.

차병섭 기자입니다.

[기자]

<현장음> “친일파를 청산하자. 친일파를 청산하자.”

이번 주 서울 마포구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동상 기증 행사장에는 박 전 대통령을 친일파라 부르는 반대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현장음> “친일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김활란의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

이화여대에 있는 김활란 초대총장의 동상 앞에는 김 전 총장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팻말이 세워졌습니다.

박 전 대통령 동상 반대집회를 주도하고, 김활란 친일팻말을 세운 학생들에게 자문을 해준 곳은 민족문제연구소였습니다.

이 단체는 내년 3월 서울 용산구의 5층건물에 일제시기 친일파의 행적을 다룬 박물관을 열 예정입니다.

<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식민지시절 일제 친일파 행적에 대해 구체적이고 지속적으로 알릴 수 있는 교육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을 위해 모금운동을 하고 있고요. 내년 3월 개관 예정입니다.”

어두운 역사도 기억해 반면교사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로, 친일 역사를 공개적으로 알리는 국내 첫 박물관이라는 게 연구소 측 설명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추진해 친일청산 논쟁에 불을 당긴 바 있습니다.

적폐청산’을 진행하는 현 정부가 일제와 친일의 잔재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박물관 개관이 새로운 논란의 불씨를 지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연합뉴스TV 차병섭입니다.

<2017-11-16> 연합뉴스TV

☞기사원문: 내년 3월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친일청산’ 바람

화, 2017/11/2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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