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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동급’ 허형식 장군은 서훈을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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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동급’ 허형식 장군은 서훈을 받을 수 있을까

익명 (미확인) | 월, 2019/04/08- 14:48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항일 파르티잔 허형식 서훈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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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일,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허형식 서훈추진위원회 장기태 위원장은 대구지방보훈청에 허형식 장군에 대한 포상을 신청했다. ⓒ 신문식

지난 2일에 마침내,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아래 민문연, 지회장 전병택)가 창립 이후 추진해 온 ‘허형식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이 신청됐다. 이날 오전 11시 50분 민문연 구미지회의 장기태 허형식 장군 서훈 추진위원장과 신문식 회원(구미시의원)은 대구지방보훈청에 구미시 임은동 출신 허형식(1909~1942)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했다.

모바일 단체 대화방으로 낭보를 접하면서 나는 지난해 10월 21일, 110년 만에 이루어진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5~1908) 선생의 추모제를 떠올렸다. 13도 의병 연합부대(십삼도창의군)를 이끈 왕산이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한 것은 1909년 10월 21일이었다.

이날 추모제에서 절규에 가까운 통한의 추모사로 좌중을 숙연하게 만든 이가 장기태 위원장이었다. 곧이어 창립한 구미지회에서 우선 사업으로 허형식 장군 서훈을 추진할 때 그가 이를 맡아 책임지기로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관련 글 : 왕산 허위, 110년 만에 시민 추모를 흠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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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21일, 왕산 선생 순국 110돌을 맞아 치러진 추모제에서 장기태 위원장은 절규에 가까운 통한의 추모사로 장내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 전병택

그리고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전 만났더니 그는 두툼한 서류뭉치를 내밀며 준비가 거의 끝났다고 말했다. 수고했다고 공치사를 하다 말고 나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말이 서훈 신청이지 그게 만만찮은 일이라는 걸 모르는 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독립운동가 공적조사서, 평생 이력서, 제적등본, 족보 등을 비롯하여 관련 기사, 논문, 단행본, 중국어 자료 등 모두 8종 115쪽에 이르는 증빙자료를 모았다.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런 가외의 일에다 시간과 비용을 들이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은 누구인가

허형식은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독립운동가다. 당숙인 왕산이 순국(1908)한 다음 해 임은동에서 태어난 허형식은 1915년 봄, 임은 허씨 일가의 집단 망명으로 만주로 간 이래 망국민이 겪어내야 하는 온갖 시련을 겪으며 항일전사로 성장했다. (관련 기사 : 허형식과 박정희, 극단으로 갈린 둘의 선택)

중국인 지주와 마적, 친일 밀정들 사이에서 민족주의와 반일 반제의 사상을 갖게 된 허형식은 1920년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이었던 최용건(해방 후 북한 부주석 역임)의 지도를 받았다. 1930년 5월 만주 하얼빈 일본영사관 습격을 주도했던 그는 심양 감옥에서 평생 동지 김책(북한 부수상 역임)을 만났다.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면서 군사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허형식은 북만주 일대의 일본군 거점과 일본 농장 설비 등을 공격해 이름을 떨쳤다. 1936년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할 때도 그는 북만주 서북 방면의 유격투쟁을 이끌었다. 허형식은 1939년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의 군장(軍長) 겸 총참모장에 올랐다.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 지도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수행한, 중국인과 한국인 등이 참여한 민족통일전선의 성격을 지닌 군사조직이었다. 전성기인 1938년께 3만 명이 넘었던 항일연군은 일제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였고,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쳐 일본을 괴롭히곤 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일제가 76만 명으로 늘린 관동군으로 토벌 작전에 나서면서 항일연군에게 시련과 위기가 닥쳐오자 중국공산당은 항일연군 지도부와 잔여 병력을 소련 영내로 이동시켰다.

1942년 소련 극동군이 동북항일연군의 잔류대원을 동북항일연군 교도려(教導旅)로 편성하면서 간부들을 소련군으로 편제했는데 이때 북만주의 허형식도 이 부대에 일방 편제되었다.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의 핵심이 되는 최용건(부참모장), 김책(정치위원) 등이 지휘관이었는데 허형식은 김일성과 같이 ‘영장(營長)’이었으니 소련은 그를 김일성과 동급의 지휘관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허형식은 끝내 소련 국경을 넘지 않고 소부대 활동으로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동북 유격전구(遊擊戰區)와 인민을 지켰다. 전술, 전략적 판단 이전에 그는 양심상 동북의 전구와 인민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1942년 8월 3일 이른 새벽, 경안현 청봉령 소릉하 계곡에서 허형식 군장은 만주군 토벌대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은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뒤늦게 현장에 온 부하들은 그의 다리뼈 하나밖에 수습하지 못했다.

토벌군은 그의 머리를 베어 경안경찰서 입구에 매달았다. 백마를 타고 항일 파르티잔을 지휘하던 헌헌장부, 때로 본명보다 이희산(李熙山)이나 이삼룡(李三龍)으로도 불리었던 이 혁명가는 토벌대와 교전할 때 썼던 권총 한 자루를 남기고 풍운의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지도하의 반일 유격대를 기반으로 창설된 동북항일연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은 오래 잊히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북항일연군에는 김일성, 김책, 최현, 최용건 등이 참여했고, 이들이 해방 후 북한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의 일방적 지원을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 김일성과 동급의 동북항일연군 지휘관

허형식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구미 출신의 작가 박도가 실록 소설 <허형식 장군>(눈빛, 2016)을 펴내면서다. 작가는 허형식을 ‘만주 제일의 항일 파르티잔’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수석 연구위원의 평가도 비슷하다.

“당대의 여러 가지 모순을 척결하고, 억압과 폭력, 차별이 없는 사회, 불평등과 탐욕, 약자에 대한 수탈 없는 사회,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풍요로운 사회,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맹렬히 투쟁하다가 끝내 33세의 나이로 만주국 토벌대의 총탄에 장렬히 산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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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형식은 구미 출신의 박도 작가가 쓴 실록소설 <허형식 장군>을 통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 눈빛

왕산 추모제에서 추모사를 할 때부터 장기태 위원장은 허형식에 매료되어 있었던 듯하다. 그는 추모제 이후 <허형식 장군>을 읽고 그가 서훈을 받지 못한 것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서훈을 신청할 직계후손이 없었다는 것과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재평가가 없었던 게 이유였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민문연 구미지회가 창립되자 자청해 서훈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전화와 메신저로 장기태 위원장과 관련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가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이 문제를 팠다는 사실을 알았다. 준비를 어떻게 했냐니까 처음에는 인터넷 자료와 허 장군과 관련된 논문, 소설 등 자료수집을 한 달쯤 했고, 그 뒤에는 논문을 쓴 학자들과 소설을 쓴 작가를 찾아가 만났다고 했다. 그 후 최종적으로 공훈 조서와 허 장군 평생 이력서를 준비하였다고.

그 과정에서 그는 왕산 허위 일가 후손들을 통해 허 장군의 친조카 허창수(74) 씨를 직접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허창수씨는 2010년 건국포장을 받은 허필(許苾)의 손자로, 부친은 허규식, 허형식 장군은 큰아버지가 된다.

허형식 친조카, 조부의 서훈도 모르고 살다

“그런데 허창수씨 댁에 갔는데 대문에 ‘독립유공자 문패’가 달려 있지 않더라고요. 이분은 조부가 서훈을 받은 사실도 모르고 있대요. 다음날 국가보훈처에 확인해 보니 후손을 못 찾아 훈장도 보관하고 있다네요. 그래서 유공자 후손 찾기 부서에 후손 가족관계증명서류(제적등본, 주민등록등본)를 보냈습니다. 조만간에 할아버지 훈장이 손자에게 전달될 거 같습니다.”

– 큰일 하셨네요. 그런데 어떻게 국내 생존해 있는 후손도 못 찾지요, 참… 힘들지는 않았어요?
“아니요. 오히려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수십 년 동안 허형식 장군에 대한 자료를 모아오신 박도 작가님. 자문 역할에다 고향 후배가 본인이 할 일을 한다며 기뻐하시는 모습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논문자료를 주신 장세윤 동북아재단 수석 연구위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민문연 구미지회 회원님들도 힘이 되어 주셨고요.”

– 어때요? 서훈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것 같아요?
“희망적입니다. 이분은 항일투쟁 끝에 전사해 순국하였으니 당연히 국가에서 포상하리라 봅니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것도 더는 장애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서훈 받으신 분도 많으니까요.”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은 2000년대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 최근 논란이 된 약산 김원봉 선생 같은 경우는 보수 세력의 반발이 극심하다. 약산의 서훈은 진작 이루어져야 했지만, 그가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부분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거기 견주면 해방 전에 일제와 전투 중에 전사한 허형식은 그런 걸림돌과 무관하다. 지난해 민문연 구미지회 창립 때 강연을 해주신 독립기념관 이준식 관장이 허형식 서훈에 다른 장애는 없는 거 같다고 말한 까닭도 거기 있다.

– 구미시민과 구미시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구미에도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이 많습니다. 이분들의 선양사업과 후손에 대한 예우에 구미시가 조금 더 노력을 기울였으면 합니다. 일부 기념사업회 등 정작 해야 할 선양사업은 하지 않고 겉치레 행사에만 그치고 있는 건 아닌지, 누구를 위한 행사인지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미시민들께서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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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4월 2일, 왕산기념관에서 베풀어진 왕산 위패 봉안과 사당 낙성 고유제에서 제관들과 함께 허경성 선생이 양복 차림으로 서 있다. ⓒ 구미시

지난 2일, 왕산기념관 옆 사당에서 왕산 허위 선생 위패 봉안과 사당인 경인사(敬仁祠)의 낙성 고유제가 열렸다. 구미시와 왕산기념사업회 주관의 이 행사에 왕산 선생의 친손자인 허경성(1928~ ) 선생도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행사 뒷이야기를 전해들은 민문연 회원들은 분개해 마지않았다.

아흔이 넘은 노령의 허 선생은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 행사에 참여했는데 행사 내내 서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관의 무신경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 않는가 생각했는데 시청 누리집에 오른 행사 사진을 보고는 뜨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치단체와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행사지만 유족 대표를 불러놓고 그에겐 의관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행사 내내 제대로 의관을 갖추어 입은 시장을 비롯해 지체 높은 제관들 사이에 허리 굽은 허 선생이 맨발로 서 있는 모습은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그에게 조부의 영전에 헌작(獻爵)할 순서는 돌아왔을까.

행사가 끝나고 관계자들은 모두 내려가 버리고 홀로 남은 허 선생을 모신 건 장기태 위원장과 신문식 시의원이었다. 두 사람은 선생을 대구 산격동 자택까지 승용차로 모셔다 드렸다. 이들이 대구지방보훈청에 허형식 장군에 대한 서훈 신청을 한 것은 그다음 순서였다.

<2019-04-05>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김일성과 동급’ 허형식 장군은 서훈을 받을 수 있을까

※관련기사 

☞연합뉴스: ‘백마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매일일보: 구미 출신 허형식 장군, 독립유공자 서훈 추진 

☞경북일보: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허형식 장군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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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5■방송 : 경남CBS<시사포커스 경남> (창원 FM 106.9MHz, 진주 94.1MHz)
■제작 : 손성경 PD, 주소원 작가실습생
■ 진행 : 김효영 기자 (경남CBS 보도국장)
■ 대담 : 김민철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김효영 : 영화 ‘군함도’를 계기로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우리 국민들의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됐죠. 그러나 여전히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부정되고,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도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길 좀 해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김민철 박사 연결되어있습니다. 박사님,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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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철 박사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김민철 : 네, 안녕하세요?

◇ 김효영 : 다시한번 정리하죠. 강제동원과 강제노동이 이뤄졌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 김민철 : 법적으로나 학술적으로 1939년부터 1945년 사이로 보고있습니다.

◇ 김효영 : 39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 김민철 : 네. 1938년에 일본이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바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이듬해부터 실질적으로 그런 내용들이 적용되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1939년부터 강제동원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 김효영 : 정확한 인원은 파악이 되고 있습니까?

◆ 김민철 :  정확한 인원은 지금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당시 일본 정부나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자료를 가지고 최소 인원은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김효영 : 얼마입니까?

◆ 김민철 : 우선 몇 가지 유형에 따라 좀 달라지는데요. 군인 군속의 경우, 군 병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한 42만 명 정도 되고 그 다음에 국외 시베리아나 일본 등 노동력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한 75만 명 내지 80만 명 정도 되는데요.

최소 인원이라 하면 이 통계상에는 1945년 4월 이후 통계는 다 빠져있거든요. 조사가 안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게 최소 인원입니다.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정확하게 몇 만인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동원했던 주체인 일본 정부나 기업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설들이 나오는데 최소한 당시에 39년에서 45년 사이에 120만 명의 조선의 젊은 사람들이, 남녀 청장년들이 강제로 동원되었고요. 그리고 국내 동원된 게 있습니다. 이것은 1개월, 3개월 도내, 도외 동원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주로 북쪽 지방이 많죠. 전쟁을 하기 위해서 북쪽에 여러가지 군수공업들이나 도로를 만든다든지 하는데 그렇게 동원된 경우가 이게 총 연인원해서 550만 명이니까요.

쉽게 말씀드리면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됐다고 이해하시는 게 훨씬 쉽게 이해가 되실 겁니다.

◇ 김효영 : 집집마다 한 명씩 동원됐다?

◆ 김민철 : 네,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좀 넘으니까 가구당 한 명씩 동원됐다고 생각하면 빠르죠.

◇ 김효영 : 그렇군요. 그런데 일본 정부가 이 강제동원을 인정을 하는 듯하기도 하고, 아닌 듯하기도 하고 태도가 자꾸 변하고 있죠?

◆ 김민철 :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습니다. 왜 그런 착각을 할 수 있냐면, 2년 전에 아베 정부가 메이지의 산업혁명 유산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했습니다.
◇ 김효영 : 유네스코 등재.

◆ 김민철 : 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하려고 했죠. 그 소식을 듣고 한국과 일본의 피해자와 민간단체에서 이것은 도저히 들어줘서는 안 되겠다. 왜냐면 소위 군함도 같은 주요 시설들 중에는 유네스코에서 지향하고 있는 인권이나 보편적인 가치 이런 것과는 정배치되는 강제노동이나 연합군 포로 노동도 있고,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들도 강제로 연행해서 노동을 시켰거든요. 국제법상에서도 어긋나는 그런 강제노동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이른바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는 거죠.

그런 피해자들의 증언이나 자료들을 가지고 국제사회에 호소를 했죠. 그걸 그대로 등재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2년 전 총회에서 당시 일본대사가 공식적으로 국제사회에서 회원국을 상대로 강제노동이 있었고 유네스코의 권고대로 거기에 그런 역사를 기록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언을 했습니다.

◇ 김효영 : 그 발언을 번역해보면요. ‘수많은 조선인 등이 자신의 의사에 반하여 연행되어 가혹한 상태로 노동을 강요당했다’ 이렇게 돼있습니다.

◆ 김민철 : 그게 이른바 ILO(International Labour Organization, 국제노동기구)에서 규정하고 있는 강제노동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일본 관광장관이 그걸 바로 부정하고 나왔죠. 형태상으로는 강제노동일 수는 있으나, 그 것까지는 부정하지는 못 하니까. 법적으로 국제노동기구에서 말하는 강제노동은 아니다. 왜냐면 1910년 강제병합이 일본으로서는 지금까지 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합법이기 때문에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도 합법이고, 전쟁 상황이기 때문에 강제노동의 예외 조항에 해당된다. 강제노동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을 했고요.

또 하나 그 이유는 한국에서 2012년 5월 24일 한국 대법원이 징용 당했던 분들의 피해 호소를 강제동원당해서 강제노동했기 때문에 피해 배상하라고 한국 법원에 호소를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일본 기업이 배상 책임이 있다고 중요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 김효영 : 미쓰비시하고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했던 소송.

◆ 김민철 : 네, 그걸 병합해서 했는데요. 하급심에서는 일본 기업의 입장을 들어줬는데 대법원이 그걸 파기환송했죠.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인데. 고등법원으로 돌린 다음에 금액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놓고 최종 확정을 해야 되는데 그것을 지금 아직 못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원고로 계셨던 분들이 지금은 다 돌아가셨죠.
◇ 김효영 : 아이고, 그 몇 년 사이에 또 다 돌아가셨군요.

◆ 김민철 : 나이가 최소한 팔십, 구십 넘었으니까.

◇ 김효영 : 그 때 박근혜 정부 때 아닙니까? 우리 외교부가 또 이상한 일을 하지 않았나요?

◆ 김민철 : 네, 나중에 확인이 됐는데 외교부에서는 대법원에 공문을 보내서 사실상 ‘하지 마라, 한일관계에 굉장히 심각한 해를 끼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냈죠. 이것은 한국 외교부가 정말 우리나라 외교부인지 하는 그런 비판을 면하기가 힘들죠.

◇ 김효영 : 적어도 지난 정부에서 처럼 외교부까 해서는 안 되겠죠.

◆ 김민철 : 그렇죠. 엄연하게 그것은 안 되는 일이죠. 그렇지만 한국 정부의 경우에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지난번 대통령의 8·15담화나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우리가 조금 암시할 수 있듯이 해결하려는 그런 의지는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입니다.
◇ 김효영 : 이제 남은 것은 처벌 또는 배상, 그리고 제대로 역사에 남기는 기록 이런 작업들이 앞으로 남은 과제이지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까요?

◆ 김민철 : 우선, 많은 부분 진상 규명이 됐습니다만 여전히 절반 이상은 피해가 밝혀지지 않았거든요? 추가적인 진상 규명 작업들이 우선 있어야 됩니다. 그게 국가 차원이든 시민사회 차원이든. 그 다음에 중요한 거는 몇 분 안 되지만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추가적인 배상 조치나 그런 것들이 되어야 하고요. 그리고 그런 것들은 교육의 자료로 계속 남겨져야 되고 기록할 의무가 다음세대에게 있기 때문에 잘 보존하고 교육의 자료로 정리하는 작업들이 필요하죠.

◇ 김효영 : 일본의 사죄, 아베 정권에서는 힘들겠죠?

◆ 김민철 : 거의 뭐 불가능하다고 보입니다. 국제사회에서 다들 입을 모아서 비판하고 있는 권고하고 있는 위안부 문제조차도 털끝만큼 할 생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겁니다.

◇ 김효영 : 마지막으로요. 우리가 일제 강제징용을 기억해야 되는 이유 말씀해주시고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 김민철 : 우선 많은 선배세대들이 식민지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동원되어서 고통당했습니다. 그런 아픈 역사들을 기록하고 기억해야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과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그런 측면도 있고요. 또 하나는 개인의 소중한 권리들이 침해당했습니다. 침해당한 권리들을 우리가 기억할 때 비로소 현재의 권리들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하는 예방조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 김효영 :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 김민철 :  네, 고맙습니다.

◇ 김효영 : 지금까지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위원 김민철 박사 만나봤습니다.

<2017-11-08> 노컷뉴스

☞기사원문: “대법원 판결 늦어져 일본배상 청구인들 모두 사망”

수, 2017/11/08-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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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식민지 역사를 돌아보고, 새로운 대구의 역사를 모색하는 학술세미나가 경북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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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 학술세미나 [사진=경북대 인문학술원]

경북대 인문학술원(원장 허정애)과 대구경북학회(회장 김영철), 대구경북연구원(원장 이주석)은 오는 24일 오후 2시 경북대 대학원동 학술회의실에서 ‘식민의 역사와 도시의 재현, 그리고 대구’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황보영조 경북대 인문대학장 사회로 진행되는 이번 세미나는 김일수 경운대 벽강교양대학 교수, 김경남 경북대 사학과 교수, 이정희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 이정찬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사무국장 등이 발표자로 나서 식민지 시대 대구의 도시 재편 문제와 식민지 역사의 재구성, 그리고 도시 콘텐츠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발표·토론할 예정이다.

이어 박승희 대구경북학회 부회장 사회로 권상구 시간과공간연구소 이사, 김석수 경북대 인문학술원 부원장, 이재필 대구경북연구원 대구경북학센터장, 조명근 영남대 역사학과 교수, 홍성덕 전주대 역사문화콘텐츠학과 교수가 토론을 진행한다.

허정애 경북대 인문학술원장은 “대구의 식민지 연구는 대구의 미래를 위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이번 학술세미나가 식민지 도시에 대한 성찰과 반성, 나아가 새로운 대구를 위한 토대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2017-11-21> 뉴스민

☞기사원문: 경북대 인문학술원,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관련기사

☞KNS뉴스통신: 경북대,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대학저널: 경북대,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베리타스알파: 경북대 인문학술원 학술세미나 24일

☞에듀동아: 경북대 인문학술원,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국제뉴스: 경북대 인문학술원, ‘식민의 역사와 대구’ 학술세미나 개최

수, 2017/11/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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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주장에 오류가 있거나 사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며 반론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주장은 공익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의 설립 근거인 민법, 공익법인법 그리고 우리 연구소의 헌법과 같은(법률적 효력이 있는) 정관에 따라서 해석되고 판단되어야 합니다.

아마도… 현실에 따라서…. 편의상….. 관례상….  어쩔수 없이…… 등의 모호한 주장에 기초한 반론은 사절합니다.

지난번 총회에서와 같이 멀쩡한 회원을 회원이 아니라며 발언을 방해했던 몰상식한 일부 회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러한 몰상식한 주장이 제기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현재 우리 연구소는 정관이 두 개입니다.
지난 총회 전에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정관(이하 신고용 정관)이 하나이고
총회에서 의결되었으나 등록관청에 신고 및 허가를 얻지 않은 정관(이하 운영정관)이 또 하나입니다.

두 개의 정관 가운데 어떤 것이 법률적 효력을 갖을까요?

정관은 총회의 의결을 거쳐 제.개정되어야 하고 등록관청의 허가를 얻어야 합니다.
만약, 총회 의결을 거치지 않거나 등록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허가를 얻지 않으면 법률적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2016년 전남동부지부 사건(?)에서 민사소송이 제기되었고, 이때 연구소에서는 <신고용 정관>(소을제1호증)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고용 정관>을 법률적 요건을 갖춘 정관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저는 연구소 홈페이지를 봤습니다.
연구소 소개에 “정관”이라는 메뉴가 있었고, 여기에는 2017년 12월에 개정된 정관이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12월 정관개정?????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연구소 총회는 매년 2월 또는 3월에 총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 정관이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의 등록 관청인 서울시 교육청에 신고되고 허가가 되었는지…
신고가 되었다면 언제 신고가 되었는지, 허가를 얻었다면 어떻게 허가가 이루어졌는지… 등은 서울시교육청에 따로 문의토록 하겠습니다.)

위 사실을 근거로 볼때 2016년에 법원에 제출한 <신고용 정관>이 법률적으로 유효한 유일한 정관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이제 부터 <신고용 정관>을 근거로 현재 운영위원회와 지부의 문제를 밝히겠습니다.

본론으로 들어와서
<신고용 정관>은 제1장 총칙, 제2장 회원, 제3장 임원, 제4장 총회, 제5장 이사회, 제6장 재산 및 회계, 제7장 보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정관에 운영위원회와 지부를 정하는 조항은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 운용중인 운영위원회와 지부는 설치 근거가 없고, 지역의 회원 일부가 지부장을 사칭하고 그 지부장들이 운영위원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연구소의 운영에 관여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회와 집행부는 이러한 지부와 운영위원회를 공식기구로 인정하고, 우리 연구소의 주요 의제를 보고하고 의결을 구했습니다.
심지어 지난 총회에서는 이민우 회원이 운영위원장이라는 이름으로 운영정관(정관으로서 효력이 없는) 개정안을 보고하고, 총회 의장은 이를 안건으로 상정하여 표결에 부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며칠후에는 전국 운영위원회를 개최하고 그 비용을 우리 연구소에서 부담할 예정입니다.

현재 운영위원회와 지부는 설치 근거가 없고 그저 일부 회원의 모임일 뿐입니다.
만약, 일부 회원들이 지부장, 운영위원을 자임하고 운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연구소  운영에 관여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사회와 집행부에 요구합니다.
운영위원회의 부존재를 공식화하고 예정된 운영위원회를  취소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  모든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토론회를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화, 2018/06/19-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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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성역화 의미와 방향

보훈처, 묘역 짓누른 효창운동장은 철거
추가 묘역 확장·이장은 않기로

“민관 합의 거쳐 신중하게” 주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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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16일 오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의 모습. 사진 아래 가운데가 백범 김구 묘역이며 오른쪽 위쪽으로 거대한 효창운동장이 보인다. 김봉규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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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가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한 것은 늦게나마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앞두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분명히 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한겨레>가 입수한 국가보훈처의 ‘효창공원 성역화 사업 추진방안 등 검토(안)’ 보고서를 보면, 보훈처는 독립운동기념공원 추진 배경으로 “(2019년) 3·1운동 및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선양 및 국민 통합을 위해 독립운동가 묘소가 위치한 효창공원 성역화를 각계각층에서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한겨레>에서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기획보도로 지속적으로 관련 사안을 보도하고 있고, 독립단체에서도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 보고서는 지난달 작성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도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꾸준히 독립운동가의 역사성 복원을 주장해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5일 제73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낼 것”이라며 “묻혀진 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가의 완전한 발굴이야말로 또 하나의 광복의 완성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효창공원 성역화 의지를 보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월 펴낸 책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우리는 임시정부를 기념하는 기념관 하나 없다. 적어도 효창공원에 독립열사들을 모시는 성역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썼다. 그는 당대표 시절인 2015년 2월9일에도 효창공원의 김구 선생 묘소를 참배한 뒤 “후손으로서 제대로 도리를 다하자면 효창공원 일대를 우리 민족공원·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고, 중국에서 모셔오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다시 봉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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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안 삼의사 묘역. 사진에서 제일 크게 보이는 묘역이 안중근 의사의 가묘(빈묘)다. 김봉규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독립운동기념공원 조성 사업의 큰 방향은 정해졌다. 현재 용산구가 근린(동네)공원으로 관리하는 효창공원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고, 이승만 정권이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을 훼손하기 위해 만든 효창운동장을 철거하는 일이다. 다만 정부는 현재 효창공원에 조성된 묘역 외에 독립운동가 묘역을 추가로 조성하지는 않을 방침이다. 이성춘 보훈처 보훈선양국장은 “효창운동장 독립공원화 사업의 핵심은 효창운동장 철거”라며 “효창공원 인근 주민들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추가로 독립운동가 묘역을 새로 마련하거나 이장할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항일독립운동가단체들과 독립운동가 유가족들은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23개 독립운동가단체가 속한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는 “효창원에 묻힌 독립운동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민주주의 이념 등 ‘대한민국의 헌법적 가치’를 세운 인물들로 그분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가 늦게라도 이뤄지게 돼 다행”이라고 밝혔다. 이 연합회에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월진회, 신흥무관학교기념사업회 등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단체들이 다수 가입해 있다. 임시정부에서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74)씨는 “일생의 소원이 이뤄지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에서는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서 관련 사업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교훈 삼아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과거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톱다운 방식의 정부 주도 사업이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의견을 모아 추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며 “정부가 용역을 발주하기 전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주민 대표, 축구협회, 노인회, 역사단체, 유족 등 모든 관련자들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기구를 만들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김경욱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17>  한겨레
☞기사원문: 효창공원에 ‘독립운동공원’ 조성…“대한민국 정통성 세우는 일”

※관련기사

☞한겨레: [한겨레 창간 30돌] 효창공원을 독립공원으로

금, 2018/08/17-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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