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창립회원 인터뷰] 천정배 변호사를 만나다

지역

[창립회원 인터뷰] 천정배 변호사를 만나다

익명 (미확인) | 금, 2019/04/05- 17:09

창립회원인터뷰 – 천정배 변호사를 만나다

 

본 인터뷰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설립 30주년 사업의 후속 작업으로 진행하고 있는 ‘창립회원 아카이브’ 사업을 위해 진행된 인터뷰입니다. 인터뷰 당사자의 동의를 얻고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작성합니다.

 

민변 21기 자원활동가분들(김유정, 서승연, 이단비)과 함께 국회의원회관 천정배 의원실로 방문했습니다. 변호사님(‘천’)께서 자원활동가분들 이름을 여쭈시면서 “말이 좋아 자원활동가지, 이거 열정페이..”라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주셨고, 이후 편하게 말씀을 이어가 주셨습니다.

 

 

심재섭 변호사 (민변 출판소통팀장, 이하 “심”): 민변 창립회원 선배님들께 민변 창립 당시의 이야기도 듣고, 후배들에게 해 주실 말씀도 듣고자 인터뷰를 요청 드렸습니다. 다른 여러 일정이 많으실 텐데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변호사가 되시기까지의 이야기를 먼저 여쭙습니다.

천정배 변호사 (이하 “천”) : 오래된 이야기네요. 연수원에 들어갈 때에는 판사를 할지, 검사를 할지 결정을 못했습니다. 연수원에서 실무 수습을 하는 도중에는 검사가 되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주위 동기들은 제가 판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한국의 형사사법이 운영되는 실정을, 제가 보기에는, 검사가 중요하지 판사는 좀 소극적이지 않나 하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법연수원 수료하고 78년 도에 수원에 있는 1전투비행단에서 공군법무관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각이 좀 바뀐 것 같습니다. 군복무 기간 중에 여러 일이 있었지요. 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있었고,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군검찰관 일을 했고, 이후 1212쿠테타, 80년 5.18. 전일 당시 김대중 선생의 구속 사건도 있었지요. 518도 있고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전두환 일당, 쿠테타 세력의 하수인으로서 검찰이 될 수는 없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계엄 하에서의 험한 일들은 육군에서 일어났지요. 계엄사령관도 육군참모총장이었고. 전 공군법무관이었기 때문에 좀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육군 중심의 계엄사령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공군에서 법무관 한 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을 한 일이 있었어요. 당시 육군에 있던 동기들이 하던 일들이란,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분들을 군검찰관으로서 기소하는 일, 군판사로서 사형선고하는 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인 김재규를 기소하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가게 되면, 제가 김대중 선생님을 기소, 재판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탈영을 했으면 했지, 어떻게 그런 일을 하겠어요. 김대중 선생을 단죄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저는 혹시라도 제가 가게 될 가능성이 있어서 미리 동료, 상사들에게 이야기를 해뒀습니다. 난 절대 가지 않겠다고요. 그런데 공군에서는 왜 저를 그렇게 봤는지, 저를 보내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당시 제 계급이 중위라서 육군에서 대위급을 보내라고 요청이 와서, 안 갈 수 있었습니다.

심 : 그때 가셨으면 지금의 변호사님은 안 계셨을 수도 있었을까요.

천 : 에이, 아무리 보내도 제가 안 가지요. 탈영을 했으면 했지. 제가 뭐 똘똘하게 잘 한 일은 없지만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심 : 변호사가 되는 것도 여러 길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 81년도 8월에 제대를 하고, 검사는 못하겠다 생각을 했으니 변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서울에서 할지, 고향인 목포로 갈지, 광주로 갈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고심 끝에 들어가게 되었고 4년 정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에도 송무는 거의 없었고 주로 외국 클라이언트와 일을 많이 했었습니다. 외국 변호사들과 팀이 되어서 일을 했지요. 그 안에서 영어도 그렇고 기존의 통상적인 변호사 업무와 다른 많은 것들을 배운 좋은 기회였습니다.

 

심 : 서울대 법학과, 사시합격, 대형로펌의 국제분쟁 변호사라는 이력과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의 개업은 쉽게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천 : 비즈니스 로이어가 나쁘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마음 한 편으로는 그 길로 끝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나가겠다고 생각했어요. 4년차 이후에 2년 정도 외국을 보내주는 시점이었는데, 거기를 다녀와서 그만 두는 것은 좀 미안하잖아요. 그래서 그 시점에 그냥 나왔습니다. 지금도 그것 때문에 우리 딸들에게 타박을 받습니다. 그때 다녀왔으면 영어를 좀 했을 텐데, 아빠가 안 가서 우리가 영어로 고생이라고.(웃음)

85년도에 나와서 조영래 선배, 윤종현 변호사, 박석운 현재 진보연대 대표와 모여서 사무실을 시작했습니다. 김앤장에 있을 때 조영래 선배와 가까워졌어요. 워낙에 유명한 분이라 대학 때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친해진 것은 그때였어요. 그분은 학교 다닐 때부터 운동권의 지도부였고, 연수원에 가서도 운동으로 문제가 되어서 도피생활을 길게 하셨지요. 1980년도에 비로소 다시 연수에 들어갔어요. 원래 2기로 입소한 것으로 아는데, 수료는 12기에 하셨어요. 연수원에 계실 때 김장에 일을 좀 도와주러 오셨는데, 그때 알게 되었지요. 82년에 윤종현 변호사, 박석운 대표와 같이 먼저 사무실을 차렸더라고요. ‘시민공익법률상담소’라고 이름을 붙이고, 주로 산재피해자, 노동약자 등을 도와주고 계셨습니다. 제가 김장에 있을 때, 조선배 먼저 나가서 하고 계시라, 저도 곧 나가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김장을 퇴사하고 합류하게 된 것이지요.

 

심 : 민변처럼 인권 신장에 헌신하는 변호사의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요. 변호사님께서 민변 창립회원이 된 이야기를 여쭙습니다.

천 : 민변은 88년도에 만들어 졌지만, 그 전에도 이름이 어떻든 조준희, 황인철, 이돈명, 홍성우 이런 분들을 주축으로 인권변호사의 흐름은 있었지요. 조영래 변호사님 역시 같이 활발히 활동하셨어요.

그런데 사실 저 자신은 당시 사무실을 유지하는 일을 했어요. 소위 돈 되는 일을 하고 있었지요. 돈을 잘 벌지도 못했지만요. 당시 조영래 선배가 망원동 수재사건, 권인숙 양 성고문 피해사건 변론을 할 때, 저는 사무실 안에서 사건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관여하진 못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본격적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86년도 건대 사건이 있었잖아요. 워낙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일손이 부족하니까. 그때 우리 내부에서 일 시키는 것은 박석운 후배 몫이었는데, 천 선배 거기 좀 가봐, 하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접견을 가게 되면서 소위 시국사건에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87년 대통령 선거일에 일어난 구로구 부정투표 사건을 본격적으로 맡았습니다. 구로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그때 동대문 경찰서에 접견을 가서 만난 분이 김희선 선생하고, 김병곤 선생을 만났어요. 수갑을 차고 오더라고. 지금이라면 수갑을 풀라고 이의를 했겠지만, 그때는 신참이라 그런 말도 못한 기억이 나네요. 그 사건은 제가 끝까지 열심히 한 사건이에요. 그 사건을 계기로 훌륭한 분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민변이 만들어졌지요. 당시 노장 인권변호사 그룹과, 연수원 기수로 13기 전후의 젊은 변호사들이 모여서 만든 거지요. 젊은 그룹으로는 이석태, 김형태, 조용환 이런 분들이었고, 좀 더 후배로 백승헌 같은 분이 있었지요. 전 위치가 좀 애매했던 것이, 나이로는 후배 그룹과 비슷한데, 연수원 기수는 좀 이르단 말이에요. 제 동기인 연수원 8기는 저와 서해교 변호사밖에 없었습니다. 좀 낀 세대였던 겁니다. 그 두 그룹이 주축으로 모였기 때문에 제가 뭘 할 여지가 없었어요. 저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을 걸요. 조영래 선배와 윤종현 변호사가 저도 집어넣어서 창립회원이 된 겁니다.(웃음)

정치인이 되다 보니까 민변 창립 주도라고 써주셨는데, 특별히 한 일이 별로 없네요.(웃음) 그러니까 저도 초기에는 좀 서먹서먹했어요. 후배 변호사들하고 잘 알지도 못했고요.

제가 민변 창립 즈음에 다시 김앤장에 들어간 것으로 기억해요. 개업할 때는 세금이다 뭐다 신경 쓸 것이 많았는데, 다시 큰 조직에 들어가니 편하더라고요.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보장받고 다시 들어갔어요. 송무를 담당했습니다. 동시에 민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89년도 방북사건들, 임수경 의원, 문익환 목사, 서경원 의원, 리영희 논설위원 등 사건이 폭주하게 되었고, 제가 임수경 의원 사건, 리영희 선생 사건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김장에서 한 달에 200시간 일을 한다면, 10시간이나 김장 일을 하고, 나머지는 민변 사건을 했던 겁니다. 회사에 미안하기도 해서, 다시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초기에 일을 하다보니, 민변이 좀 더 체계적으로 일을 해 나갔으면 좋겠는데 너무 산발적으로 체계가 없이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민변 일만 하는 상근 변호사를 뽑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상근 변호사를 하지는 못하고, 제 사무실을 민변이 있던 건물 바로 아래층에 내고 민변 일에 중점을 두어 했지요. 이후에 후임을 못 찾아서 민변 상근 간사는 제가 유일합니다.

이후에 당시 민변에서 제일 파이팅 넘쳤던 임종인, 이덕우 변호사와 함께 91년에 해마루 법률사무소를 만들었습니다. 초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하셨던 김창국 변호사님이 우리 셋과, 해마루라는 이름을 두고 해가 지는 석양에서 검객 3명이 모인 것 같다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이후 노무현 변호사도 모시고, 전해철 변호사님도 모시고 했지요.

 

심 : 민변 초기에 내가 이렇게 기여했다, 하는 점도 자랑을 좀 해 주셔요.

천 : 상근 간사로서 1년 정도 일을 하면서 제 업적이라면, 민변 회비를 5만원, 10만 원으로 올린 것입니다.(웃음)

또 기억을 더듬어보면, 국제 연대 활동을 하면서 일본에서 비슷하게 활동하는 변호사 집단과 교류 기회를 만들었고, 지금도 지속되는 것으로 알아요. 또 제가 상근 간사를 할 때 ICCPR(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 관련 일을 한 것이 있습니다. 80년대 말 전두환 때인가 노태우 때인가, 국제인권규약에 가입을 했어요. 그 사람들 참 재밌어요. 아직 미국도 가입을 안 한 것 같은데, 독재자들이 그런 것은 잘 가입하고 그랬습니다. 규약에 가입한 나라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요구하고, 정부가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그때 인권 NGO에서는 카운터 레포트를 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노태우 정권 때에 법무부 인권과에서 최초 레포트를 냈고, 민변이 이것을 입수해서 카운터 레포트를 냈지요. 그때 조용환 변호사가 열심히 했습니다. 이후 빈에서 열린 세계 인권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국제 무대에 민변이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해외에서 민변의 위상이 훨씬 높아졌겠지요? 세계에서 최고의 인권단체로 인식을 하지 않겠습니까.

 

심 : 96년도, 그러니까 변호사로서 15년 조금 넘게 일을 하시고 나서 정치에 입문하시게 됩니다. 정치권에 들어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요.

천 : 인생에 모든 순간이 선택이지요. 왜 고민이 없었겠어요. 처음 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의 실망도 있었고요. 지금이야 김장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길이겠지만, 당시만 해도 임용을 포기하는 것이었기에 부모님 생각해서 못 가신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바로 변호사가 되는 것만으로도 주류적인 법조 체계에 비추어 비주류, 반골 기질이 있었던 겁니다.

정치를 하게 된 것도 고민이 컸습니다. 95년에 김대중 총재가 정계에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당을 만드셨고, 젊은 전문가 그룹을 영입하셨습니다. 당시 들어갔던 분들이 정동영, 신기남, 추미애, 유선호 이렇게 기억이 나네요. 변호사 일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정치를 하겠다, 이런 계획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변호사로서 엄혹한 시기를 거쳐왔고, 군사독재를 실질적으로 청산했다고 보기 어려운 시점이었고, 김대중 총재를 잘 보필해서 한국 헌정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것이 의미가 있겠다고 판단을 했고, 지금 생각해봐도 좋은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당시 민변 선배들은 거의 반대하셨지요. 그 마키아밸리적인 세계에서 당신이 가서 굳이 상처입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심 : 정치인으로서 지금까지 일하시면서 민변에서의 활동이나 동료들의 존재가 도움이 된 면이 있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천 : 누가 뭐라 하더라도 제 정신적 고향은 민변이지요. 그 시절의 열정, 신념, 소명이 저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워낙 정치를 한 세월이 있어서 지금은 이게 팔자이려니 하고 생각을 합니다.(웃음) 실제로 정치가 중요하지요. 사회를 인체에 비유한다면 정치가 뇌수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잘 해야 하고 중요한 일인 것이 맞습니다. 정치를 한다는 것은, 정말 말로하기 힘들 정도로 괴롭긴 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고, 명절이라고 쉬는 것도 아닙니다. 저희 젊을 때만 해도 일을 위해서 다른 것들을 버릴 수 있다고 하는 시대적인 공감대가 있었으니, 일 중심이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세상에 태평양 같은 문제가 있는데, 내 바가지로 몇 바가지라도 변화시킨다, 하는 각오였던 것 같습니다. 민변에서 배운 거지요.

 

서승연 자원활동가 : 정치를 하시면서도 많은 도전을 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원동력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천 : 제가 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기만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말을 해 본다면, 제가 72년도에 대학을 들어갔고 그때가 유신이었지요. 저는 청소년기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컸고, 또 신안, 목포 출신이다 보니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이 김대중 선생님이었고, 부모님도 박정희 독재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 환경에서 대학을 갔지만, 실제로는 사법시험 준비하면서 유신헌법이나 공부했습니다. 내적인 갈등이 컸습니다.

이후 민변 활동을 하면서 노동자 변론도 많이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부채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노동자분들, 활동가분들이 극도의 탄압을 당할 때, 그 고난은 말할 수가 없지 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변호사로서 어찌 되었건 밥을 굶길 합니까, 상대적으로 수월했지요. 그런 점들이 부채의식으로 작용했고 심리적으로 압박이었습니다. 지금 내 처지, 내 조건에서 무엇이라도 역사 발전에 기여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후 민변에 있으면서 좋은 분들과 사귀고 함께 일할 수 있었고, 그게 지금까지도 도움이 됩니다. 친구를 잘 사귀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주변이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동화되든지 아니면 떨어져 나오든지 하는데 보통 동화되는 것 같더라고요. 기득권에 있으면서도 휩쓸리지 않고 훌륭하게 살아가는 분들을 보면 다 친구가 좋아서 그렇더라고요. (웃음) 저는 친구를 잘 사귀었던 것 같습니다.

 

김유정 자원활동가: 저도 변호사를 꿈꾸며 민변 자원활동가로 지원했습니다. 제게는 미래의 모습이고, 변호사에게는 한참 후배들이실 민변 변호사님들에게 해 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천 : 제가 젊어서 직접 민변 일을 할 때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왜 이렇게 하냐, 제대로 열심해 해보자, 말들을 해 왔지요. 그런데 지금 민변 후배들을 보면, 다 열심히 하고 아주 훌륭하게 잘 하고 있습니다.

작년 30주년 행사에 갔는데, 예전에 알던 동료만 알고 후배들은 거의 모르지요. 그럼에도 한국 사회 지식인 집단 중에서 이렇게 훌륭한 집단이 없어요. 흠 잡을 것이 없습니다.

 

 

이후 방송 인터뷰 일정이 있어서 민변에 대한 무한 애정을 표시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민변에 대한 사랑이 지금도 여전하시다는 것을 느꼈고, 자신의 기여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민변 초기의 체계를 잡는 데에 누구보다 헌신하셨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 이렇게 아쉬울 수 없었습니다. 518 망언에 대한 대응, 선거제도 개혁 등 산적한 현안에서도 뚝심 있게 목소리를 내고 관철해 나가는 변호사님을 응원합니다.

The post [창립회원 인터뷰] 천정배 변호사를 만나다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2018. 3. 3. ~ 3. 7. 오키나와에서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오키나와 자유법조단의 11회 평화교류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지난해 10월 태풍으로 한차례 연기된 뒤에 이루어진 만남이라 그 의미와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회원을 비롯하여 함께 해준 모든 분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며 다가올 만남을 또 기다립니다.

 


  

 

 

오키나와, 이름만으로도 설렌 그 곳 도착

 

오민애 변호사

 

 

오키나와. 인터넷 검색창에 이 네 글자를 입력하면 에메랄드빛 바다와 평화로운 섬의 풍경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막연히 좋은 관광지로만 여겨졌던 오키나와는, 민변 미군문제연구위원회와 자유법조단 오키나와지부의 10년이 넘는 교류의 역사 속에서, 저에게 너무나 새로운 곳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길고도 짧았던 시간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2016년 10월, 서울에서 광주에서, 그리고 사드 배치 문제로 매일매일 치열했던 성주에서 오키나와 변호사님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처음 참석한 교류회에서, 일본어라고는 안녕하세요, 잘먹겠습니다, 밖에 할 줄 몰랐던 제가 불편함 없이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좋았습니다. 성주 주민분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사드 가고 평화오라’고 외쳤던 그 순간이 아직 생생한 채로, 2017년 가을, 오키나와로 갈 날을 하루하루 기다려왔습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오키나와 교류회가 예정된 날짜에 태풍이 오키나와를 지나간다는 예보가 있었고, 결국 2017년 교류회 일정은 연기되고 말았습니다. 오키나와에 갈 생각에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는데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2월말, 오키나와를 떠올릴 때면 아직 느껴보지 못한 오키나와의 공기도, 변호사님들의 얼굴도 참 따뜻하고 푸근했습니다.

 

2018년 3월 3일, 그렇게 고대하던 오키나와 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이틀 먼저 오키나와에 가셨던 박진석 변호사님의 전언으로는 계속 비가 내리고 궂은 날씨였어서, 걱정도 많이 됐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정된 비행시간보다 40분정도 늦게 나하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비는 거의 그쳐가고 있었고, 감사하게도 오키나와 교류회 일정 동안 날씨도 교류회를 도와주었습니다.

 

삼삼오오, 오키나와 변호사님들의 차를 나눠 타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어떻게 대화를 할까, 머릿속에 맴돌던 고민은 기우였습니다. 짧디 짧은 영어로, 손짓으로 반가움을, 안부를 전하는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아, 그리고 하나 더, ‘파파고’의 고마움을 절실하게 느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2

 

그렇게 숙소로 향해서 짐을 풀고, 근처 음식점에서 첫 ‘친목회’의 자리를 가졌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또 함께 한 분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순간이 아직도 생생한데요. 정말 따뜻하게 저희를 진심으로 반겨주시고, 함께 할 시간을 기다려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일 년에 한번씩, 3-4일씩 만나왔다면, 어쩌면 만날 때마다 서먹서먹할 수도 있을텐데, 일주일 전에 만났던 것처럼 서로 반가워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함께여서 좋았던 첫 날

 

오키나와 분들이 많이 궁금해 하시고 언급하셨던 이야기 중 하나가 ‘촛불집회’였습니다. 아베 총리의 부인까지 연루된 사학 비리 스캔들이 연일 드러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목소리가 모이거나 정권의 문제점에 대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와 함께, 어떻게 촛불집회가 있을 수 있었고 정권교체까지 나아갈 수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셨습니다. 2017년 한국에서 만들어진 역사가 자랑스럽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면서도, 다음날 세미나에서 제가 발제를 맡은 주제이기도 해서, 마음 한 켠 궁금해하시는 내용을 잘 전할 수 있을까, 준비를 잘 한 것일까, 걱정과 불안이 엄습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을 꾹꾹 누를 수 있을만큼, 맛있는 음식과 술과 이야기들로 가득 채운 밤이었습니다.

 

3

야나기사와 변호사님이 직접 그린 시샤. 시샤는 오키나와 나하시의 전설의 동물로, 나쁜 기운을 가져가고 좋은 기운을 가져다 준다는 수호신입니다. 지난해 예정되었던 교류회 일정에서 민변 변호사들에게 주기 위해 그리셨던 그림인데(2017. 10. 27.), 일정이 조정되면서 이번에 직접 전달해주셨습니다.

 

평화와 연대, 그 소중함에 대하여

 

이튿날, 숙소 근처의 변호사회관에서 세미나가 진행됐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 세미나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의 평화 관련 이슈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고등학교에서의 수업 이후,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자리에 앉아서 발표를 듣고 메모하고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시간이 어색하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았던, 신기한 시간이었습니다.

 

오전에는 공통테마에 대한 발제와 토론, 그리고 오후에는 양국의 사례보고를 이어갔습니다. 공통테마는 ‘일본 헌법의 평화주의-군사대국으로의 책동’, 그리고 ‘촛불혁명과 우리의 주권’이었고, 토론이 열띠게 이어졌는데요. 먼저 하야시 치가코 변호사님의 발제에서 언급된 일본 자민당이 마련한 헌법개정안은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헌법을 전체주의 관점으로 재정비하고, 자위권의 발동을 가능하도록 명문 규정을 넣는가 하면, ‘긴급사태(내각총리대신은 외부로부터의 무력공격, 내란 등에 의한 사회질서의 혼란, 지진 등에 의한 대규모 자연재해 그 밖의 법률에서 정하는 긴급사태에 있어 특별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각의에 상정하여 긴급사태의 선언을 발할 수 있다)’에 관한 조항을 신설하여, 국민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공고히 하는 방식의 헌법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이 계속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방향의 헌법개정안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현재 일본의 집권 정당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지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4

 

이러한 헌법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고민지점을 던져주었습니다. ‘군대’를 헌법에 명문으로 두는 것이 군대에 대한 통제근거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두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되도록 하는 것이 맞는가. 한국에서의 전시작전권 문제, 군대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관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갈 것인가. 국민들이 일상을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를 가장 직접적으로 위협하면서도 아닌 것처럼 숨어있는 군사 문제에 대해, 언제나 국가기밀이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야한다는 논리로 감추기 급급해하는 많은 이들이 떠올랐습니다. 군대, 전쟁 문제로 대표되는 국가의 국민에 대한 통제 시도를 어떻게 국민들이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을 해야할지, 또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어서 한국에서의 ‘촛불혁명’에 관한 발제와 토론이 있었습니다.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계속되었던 촛불집회와, 그 과정에서 발현된 많은 변화들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르지만, 오키나와 분들은 ‘촛불혁명’이라 명명하고 그 시간을 궁금해했습니다. 함께 촛불집회의 모습이 담긴 짧은 영상을 보고,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 순간 이렇게 함께 지난 1년을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끝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시작이었다는 점을 공감하고, 일본에서의 정권교체를 함께 그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5

 

오후에는 양국에서 어떤 사안들이 문제되었고 어떻게 대응하여왔는지 발제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오키나와 변호사님들의 아시아 태평양 법률가 협회(COLAP)와 국제 민주 법률가 협회(IDAL) 활동에 대한 보고, 마샬제도 관련 보고와 한국의 문재인 정부 이후 남북 정세 관련 발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키나와가 제기한 암초 파쇄 행위의 금지청구 소송과 기지 내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 활동, 2차 후텐마 기지 폭음 소송, 오키나와 전투‧남양전 소송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한국의 사드 배치 관련 소송 보고가 진행되었습니다.

 

해외 미군기지는 현재 800여개 정도가 있고, 규모로 분류하면 크게 세 분류가 있는데, 그 중 한국과 오키나와는 미군의 가족들까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형태의 대규모 기지가 주둔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기지로 인하여 평화롭게 살아갈 권리를 근본적으로 침해당하고 인근 주민들의 환경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등 수많은 문제를 겪게 된다는 공통점이 있어, 서로의 상황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한편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사사모토 준 변호사님은 일본과 한국의 국내에서의 운동, 나아가 미군의 군사력을 통제할 수 있는 세계적인 운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그 연대의 힘을 잘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이 교류회 현장 또한 연대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마샬제도’에 대한 발제였습니다. 오랜시간 미군 기지 문제에 관여하고 연구해 오신 하지메 이노우에 변호사님의 설명이, 이름도 낯설기만 했던 ‘마샬제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마샬제도는 오세아니아에 있는 섬국가로,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일본의 신탁통치를 받던 곳으로 지금도 일본어가 사용되는 곳입니다. 미국은 이곳을 2086년까지 빌리는 형태로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1년에 4번씩 이곳에서 미사일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미사일 훈련 2주 전에 훈련이 있다는 사실을 통보 받는 것 외에는 달리 대응할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합니다. 마샬제도 외부장관은 핵군축조약에도 불구하고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로 국제형사재판을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마샬제도에서는, 지금도 협정과 약속이라는 이름 아래 군사훈련이 수시로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6

 

이어 심재환 변호사님이 문재인 정부 이후 남북 정세 전망에 대하여 발제를 해주셨습니다. 교류회가 진행되던 당시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마친 직후였고, 올림픽을 전후로 남북관계가 급속히 달라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대립과 견제, 갈등이 아닌 ‘평화’를 중심 가치로 두고 남북 평화통일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가야할 것이고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는,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봐야할지, 많은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드 배치 관련 법적 대응에 대하여 오현정 변호사님의 발제가 있었습니다. 정권이 교체되고 많은 적폐를 청산하고 변화하기 위한 일들이 추진되고 있지만, 사드 배치는 계속 추진되었고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이에 한국에서 사드 배치 발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헌법소원, 행정소송, 형사고발 등 관련하여 진행해온 법적 대응에 대한 보고가 있었습니다.

 

7

 

한국에서도 오키나와에서도 평화를 위협하는 행위와 이에 대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백충 변호사님 발제에 의하면, 오키나와에서는 헤노코 기지 건설을 위한 암초파쇄행위에 대한 금지소송을, 오키나와 현이 제기하여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현의 허가를 받아야 암초를 파쇄할 수 있기 때문에, 허가 없이 파쇄하면 안된다는 취지의 소송이었습니다. 이어 사이토 유스케 변호사님은 2016년 4월, 헤노코 신기지 건설에 항의하던 중 미군 헌병에 의해 체포‧구속된 메도루마의 국가배상청구 사건에 대하여 들려주셨습니다. 변호사를 불러달라는 요구도 무시하고 신체구속 상태로 두었고, 이에 대한 국가배상을 청구한 사건인데, 미군의 공무집행 중 불법행위는 일본국이 대신 책임진다는 규정에 따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후텐마 기지와 가네다 기지의 폭음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이 진행 중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우에하라 도모코 변호사님의 발제가 있었습니다. 기지 주변의 폭음으로 인한 손해배상소송은 여러 차례 진행되었고, 후텐마 기지에서는 2차, 가네다 기지에서는 3차로 소송이 진행 중이었는데, 폭음과 건강피해의 인과관계를 일부 인정하고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내용의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비행금지청구는 일본의 지배가 미치지 않는 미군의 행위의 금지를 요구할 수는 없다는 취지로 기각되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후 고등재판소에서 다툴 예정이라고 합니다. 오키나와의 마지막 사례보고는 오키나와전, 남양전 소송으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 사건에 대한 마쓰모토 게이타 변호사님의 발제였습니다. 오키나와 전은 주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진 유일한 사례로,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중부 해안에 미군이 상륙(미군55만명, 함정 1400척 이상)한 이후 격전이 벌어져 현 인구 4분의 1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메이지 헌법 하에서 발생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논리로 기각되었는데, 이는 메이지 헌법 하에서 공권력이 잘못된 행사를 하지 않는다,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은 천황이지 국민들이 아니라는 이유였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국민들에게 금전적 배상으로나마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만, 여전히 만들고 싸워나가야할 문제들이 산적해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주희 변호사님의 미군기지 내 한국여성 성매매의 위법성을 인정한 서울고등법원 판결에 대해 소개를 해주셨습니다. 법원이 국가가 성매매를 정당화하고 조장했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소멸시효 완성 주장을 배척하면서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였는데, 이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미군기지 주변에 관한 정책에 대한 판단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의미 있는 판결이라는 소개에, 참석자 모두 공감하면서 마지막 발표를 마쳤습니다.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를 확인한 시간

 

8

 

‘평화’는 너무도 당연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정작 그 중요함을 잊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삶 하나하나가 만들어낸 소중한 가치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평화를 지켜내고 또 함께 만들어갈 것인지, ‘평화’라는 이름으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여서 자랑스럽고, 또 그 ‘우리’에 함께일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각자, 또 함께 해나갈 수 있을지, 서로 마음 한 켠에 고민을 접어두고 찐한 뒷풀이가 계속되었습니다.

 


 

오키나와를 통해, 일본과 한국, 그리고 평화를 마주하다 교류회 3일차

 

이 윤 주 변호사

 

두 개의 풍경, 아름다운 풍광과 내면의 죄책감이 교차하는 곳

 

오키나와, 교류회에 참여하기 이전 이곳은 저에게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세계일주의 시작점으로 생각하는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휴양지였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몸과 마음을 모두 편하게 하는 휴식을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마음을 안고 오키나와로 향했던 것 같습니다. 도착해서 바라본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풍광은 ‘그대로’였습니다. 탁 트인 넓은 바다, 청량한 바람, 미세먼지 가득한 서울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파란 하늘, 따뜻하게 내리쬐던 햇볕. 그런데 이곳에서 어느 순간부터 마음 속 깊이 느껴지던 고통과 더 이상 이 풍경을 마음 놓고 아름답다고만 말하지 못하겠던 저의 죄책감은 어디서 시작된 것이었을까요. 풍경의 아름다움에 찬탄하며 말을 내뱉던 저의 입은 이제 머뭇거리기 시작하였고, 마음에는 죄책감의 그늘이 무겁게 내려앉았습니다.

 

후텐마 비행장, 일상을 위협하는 군국주의

 

IMG_0580

 

3일차 오키나와 교류회 평화기행의 첫 일정으로 ‘후텐마 비행장’으로 향했습니다. 후텐마 비행장은 전 세계적으로 유일한 해병대 전용 비행장이라고 합니다.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 본 군용비행장과 일반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마을 간의 거리는 말 그대로 ‘지척’이었습니다. 이 물리적 거리는 무시로 우리의 일상에 쏟아지는 군용비행기의 소음과 상공을 날아다니는 헬리콥터 등으로부터 부산물 등의 낙하로 누군가 다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상존하는, 군국주의로부터 위협받는 위태로운 일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바람이 존중받지 못하는 공간이었습니다. 착잡한 마음으로 마을로 다시 내려오자 그곳에서는 공을 차며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가득 퍼졌습니다. 이율배반적이라고 느낄 만큼 상반된 두 풍경 사이에서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관통하는 군국주의를 보았습니다.

 

동굴 진지 속, 깊은 어둠 속에서 참상과 마주함

 

IMG_0645

 

이번 교류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아무래도 동굴진지를 체험했던 일일 것입니다. 그곳에서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깊은 어둠을 만났습니다. 전쟁 시기, 이곳에 숨어들었던 사람들이 있던 공간, 동굴 곳곳에 보존되어 있던 그 시절의 잔해들을 보며 그 시간 이곳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했던 사람들의 절박함을 떠올렸습니다. 전쟁이라는 야만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숨기기 위해 선택했던 곳, 반세기라는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저는 이곳에서 버텨야 했던 사람들의 공포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생각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작은 불빛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곳에서 그 긴 시간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공포감으로 버텼던 것일까요? 발끝에 느껴지던 울퉁불퉁한 바닥과 손끝에 느껴지던 습기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둠을 여전히 저의 온 몸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평화기념공원 – “분단은 어디에나 있다

 

IMG_0704

 

오키나와 전투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였습니다. 남쪽 바다 끝 절벽 가까이에 위치한 이 평화기념공원을 둘러싼 풍경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이 바다 끝 기자절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 끝에 자결을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비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평화의 초석”이 길에 길게 세워진 공원을 걸으며 기록된 이들의 희생과 아직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희생을 생각했습니다. 총 24만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길게 서있는 초석들 중 발걸음을 유난히 붙잡았던 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분리되어 각인된 초석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의 분단이 이들의 이름조차 강제로 나누어 기록해 놓은 모습을 보며, “분단은 어디에나 있다”는 어떤 변호사님의 말귀가 와서 박혔습니다.

 

히메유리 기록관 –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는 최대의 잘못이다

 

IMG_0729

 

히메유리 여고생들의 기록을 시민들의 힘으로 남긴 기록관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기록관에서 본 그들의 앳된 얼굴에서 저의 평범했던 여고생 시절을 떠올리며 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을 가늠해보려 노력했습니다. 히메유리 여고생들의 죽음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아름다운 영웅들로 포장해내는 일본 정권의 민낯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은폐하려는 야만적 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처절한 죽음에 대한 인간적 애도는 사라지고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상찬하기에 급급한 것은 지금을 사는 자들의 정치적 야욕을 위한 것이 아닐는지요. 비극적 죽음 앞에서도 반성과 성찰은 사라진 이 행태에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죽음에도, 그곳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삶을 지탱하고 있는 생존자들에게도 결코 해서는 안 될, 무례와 야만 그 자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곳 관장님께서 우리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주셨던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는 최대의 잘못이다”라는 이 말씀을 가슴에 아로새기며 기록관을 나섰습니다.

 

이번 오키나와 교류회를 통해 “전쟁은 인간이 일으키는 최대의 잘못이다.”라는 이 한 문장을 손에 단단히 쥐고, 가슴에는 평화라는 구체적인 가치를 담고 저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통해 일본 오키나와 자유법조단께서 보여주신 극진한 환대에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내년에 이곳 한국에서 서로 좋은 소식을 가득 안고 다시 만나기를 소망합니다.

금, 2018/03/30- 17:10
233
0

성평등 개헌 논의 워크샵 후기

유원정 회원

무더운 여름의 한 가운데, 7월 20일 민변 여성위원회의 월례회에서는 ‘헌법개정안 중 여성인권, 성차별 관련 헌법조항에 관한 검토’를 주제로 하여 무더운 여름만큼이나 뜨거운 성평등 개헌 논의 워크샵이 열렸습니다.

2017년부터 민변 여성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참석한 여성위 월례회는 저에게 항상 즐겁고 열정적이며 또 편안한 시간이었습니다. 올해 초반부터 개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성평등 개헌에 대해서는 저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관심을 갖고 살펴보고 있던 주제였기 때문에 다른 날보다 특히 더 설레는 발걸음으로 민변 사무실로 향했습니다.

헌법이 제정된 것은 1948년. 마지막 개헌은 1987년으로 무려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사회, 경제, 정치 등 모든 영역에서 변화가 있었고, 또 성평등한 사회에 대한 요구도 그 어느 때보다 커졌습니다. 성평등은 개헌 논의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핵심적인 부분인 것입니다.

민변 회의실에 도착하니,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습니다. 이날 워크샵의 발제는 조숙현 변호사님과 천지선 변호사님이 맡아주셨습니다.

먼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개헌TF에서 논의한 내용을 회원님들과 함께 헌법 조문 순서대로 살펴보았는데, 논의된 내용은 과연 매우 흥미롭기도 했지만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을 많이 사용하는 헌법의 특성상, 성평등한 사회라는 지향점을 달성하기 위해서 단어 하나를 고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발제가 끝나고 난 후에는 회원들 각자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개헌TF에서 이미 논의된 내용도 생각보다 방대하고 꼼꼼했으나, 역시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이 모여 논의하니 또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시된 의견들이 흥미로우면 흥미로울수록 사실 저는 성평등 개헌이 정말 너무나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어 하나에 따라올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들을 생각하고, 그런 관념들이 우리 사회에 가져올 수 있는 영향을 고민하다보니,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것 같은 부분들도 보였습니다. 저 스스로도 의견을 말하면서, 말이 끝나고 나면 생각이 다시 바뀌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열띤 토론이 이어지며 나온 다양한 생각들은 또 다시 개헌TF에서 논의되며 다듬어질 것입니다. 날씨도 토론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워크샵이 끝나고 회원님들과 마시는 맥주 한잔이 너무 상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개헌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의 삶에 직접적으로 닿지는 않는 추상적인 단어들의 변화이지만, 그 추상적인 단어들의 변화가 우리 삶에 직접 닿는 물결이 되어 돌아올 것이기 때문에 더 설레는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푹푹 찌는 무더위도 지나가고,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와 함께 그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민변 여성위원회 활동을 시작하고서 참석한 월례회 중 개인적으로는 가장 재미있었던 월례회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언젠가 확정된 개헌안을 제 눈으로 보게 될 날이 오겠지요? 그날에도 다시 회원님들과 모여 맥주와 함께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성위원회뿐만 아니라 다른 민변 회원님들도요!

수, 2017/08/30- 20:11
211
0

그대와 나의 어느 좋은 날

2018년을 떠나보내며, 민변 송년회 준비부터 마무리까지의 동행기 나눔

조미연 변호사

 

2018 민변 송년회는 수년간 단골무대였던 서초와 교대부근 행사 장소에서 벗어나 학동역 헤리츠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작은 생소하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무리는 여느 때와 같이 정겨웠다고 자부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제7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이쯤이면 신입이라고 소개하기 겸연쩍을 만큼 민변과 함께한 추억이 벌써 한아름인 신입변호사이자 신입회원 조미연이라고 합니다.

‘그대와 나의 어느 좋은 날’의 시작과 끝에 대한 소감을 글로 남기게 되어 스스로도 참 감회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올해 합격 이후 상반기 신입환영회부터 지금까지 정말 많은 시간 민변과 동고동락하였습니다. 신입환영회 후기를 작성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송년회 소감이라니…. 이 글과 함께 한해를 정리하는 느낌이랄까요?

이번 송년회의 시작은 10월 24일 수요일 오후1시 사무처 회원팀 회의에서 비롯하였습니다. 회원과 조직에 관심이 많은 저는 격주에 한 번씩 열리는 회원팀 회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하반기 와인과 함께하는 신입회원환영회’, 최영도변호사님 유작 기념행사, 영화 1991, 봄 상영회, 정기대의원회, 회원 월례회 등 수많은 행사개최를 앞두고 이날 우리는 송년회 날짜를 12월 17일 월요일로 확정했습니다. 이후 네 차례의 회의를 더 거쳐 송년회 준비가 이루어졌고 행사 장소와 사회자 섭외부터 송년회 컨셉, 프로그램, 홍보 등 많은 이야기가 오가면서 회원팀을 비롯한 사무처사람들의 일손이 더해졌습니다.

집단지성의 힘으로 탄생한 ‘그대와 나의 어느 좋은 날’이라는 설렘주의보 타이틀, 회원팀장님의 ‘회원들에게 기왕이면 더 좋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는 열의와 기가 막힌 우연의 조합으로 탄생한 학동역 헤리츠 행사장소, 발군의 실력으로 좋은 행사 진행의 예를 보여준 신하나, 양성우 변호사님의 사회까지…. 물론 빛나는 센스로 훌륭한 행사영상을 만들어준 허진선 간사님의 노고도 빼놓을 수 없지요. 행사 준비팀의 일원이어서 그런지 부족한 점보다 좋은 점을 유독 많이 기억하는 것은 회원님들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실거라 믿습니다.

어지간하면 풍문으로 많이 퍼져있을 행사 장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왠지 빼놓으면 아쉬울 것 같습니다. 학동역 헤리츠는 언제나 민변의 일당백을 자처하는 이현아 차장님의 검색으로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습니다. 지난 송년회 음식이 아쉬웠다는 많은 평가에 음식이 맛있다는 후기를 중심으로 답사까지 가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무슨 인연일까요? 헤리츠 관계자분의 민변 행사개최에 대한 열렬한 호감이 우릴 반겼습니다. 대학시절 학생들의 학교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민변 변호사님의 도움을 기억하며 항상 민변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면서요. 이런 우연과 인연의 만남으로 우리는 작년 송년회와 동일한 비용으로 더 좋은 장소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도움을 주셨다는 변호사님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 드리고 민변의 소소한 복에 저도 덩달아 즐거웠습니다.

어느새 글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정작 송년회 당일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니…. 사실 저는 행사장 입구에서 간사님들과 입장하는 회원들을 본의 아니게? 함께 맞이하고 당일 회원공연 합창단의 일원으로 비상구에서 연습하느라 정작 본식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행사영상 상영, 가입 10주년 회원 감사패 증정, 신입회원 소개, 퀴즈 등의 순서는 알고 있지만 무대 위에 서서 조명으로 인해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하나와 한결같이를 부르고 내려와 연달아 맥주를 급히 들이켰던 기억 이전에는 007음악과 함께 등장한 사회자들의 모습과 신하나 이종훈 변호사님의 신나는 한결같이 율동만이 떠오릅니다. 미쳐 공연을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민망하지만 용기 내어 영상 링크를 올립니다. 아! 유독 눈에 띄는 초록초록 스웨터를 입었던 장범식 변호사님의 모습도 잊을 수 없겠네요. 예쁘게 봐주세요.

https://youtu.be/sVi3fcHSLrc

이렇게 10명이 넘는 변호사들의 목소리가 한데 모였던 합창공연 이후 류신환 회원팀장님의 매끄러운 사회로 구석구석에 자리하는 선배님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모 선배님께서 혹시 합창공연 자발적으로 한 게 아니라면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라는 말씀이 참 유쾌하고 인상 깊었습니다. 정연순 전 회장님을 모 탁구장에 가면 볼 수 있다는 것도 기억에 남구요.

 

이후 다양한 게임과 퀴즈가 진행되었는데 소위 테이블 합심퀴즈(오신 분들은 아실겁니다)를 통해 상품에 대한 다양한 열정 발휘 장면을 목격한 것과 넘어지면서까지 휴지를 불어 올렸던 곽예람 변호사님, 어린 시절 사진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추론하는 퀴즈에서 한때 톰 보이 어린이모델로 날렸던 최용근 변호사님,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는 누구지? 라고 갸우뚱하였으나 옆자리를 돌아보자마자 사진 속 귀여운 어린이와 같은 웃는 얼굴이 보여 놀랐던 위은진 변호사님 등 적다보니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이 웃었던 것 같습니다.

송년회를 마치고 늦은 시각까지 뒤풀이에서 함께했던 분들과의 기억을 합치면 사실 지면이 모자랄 것 같습니다. 가볍게 써내려가며 공유하고자 했던 소감이 더 길어지면 민폐겠죠?

이번 송년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그 속의 따뜻함, 즐거움이 충분히 전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참 좋았습니다. 그때의 자리를 돌아보면 웃음이 먼저 나서 내년에는 더 많은, 아직 만나 뵙지 못한 분들과 자리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물실호기(勿失好機)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의 사자성어인데요. 저는 올해 민변과 좋은 기회에 함께할 수 있어 참 기뻤습니다.
민변 회원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8년 민변 송년회 사진 보기

The post [송년회 후기] 그대와 나의 어느 좋은 날 / 조미연 변호사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금, 2018/12/28- 17:32
209
0

경남지부 소식

김형일 회원

1. 경남은 전국유일의 도지사 청정구역으로 이름 높은 곳입니다. 경남 도민들은 병원도 없애고 아이들 밥도 못주겠다고 하셨던 경남 특산 도지사님을 우리만 독점할 수 없다는 아름다운 희생정신을 가슴에 품었고, 경남지부 하귀남 회원은 굳이 도지사를 송별하겠다며 경남도청 앞에서 소금을 뿌리며 떠나는 길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가장 큰 팔각도로 소금을 뿌리는 하귀남 회원 : 영상 썸네일 기준 우측 여섯번째]ⓒ경남도민일보

2. 즐거웠던 민변 정기총회 이후, 경남지부의 핵심 사업은 조선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확보하는 일이었습니다. 2017년 노동절 경남 거제시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는 800t급 골리앗 크레인과 32t급 타워 크레인이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중심으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경남지부는 별도의 법률지원단을 구성하여 피해 노동자에 대한 법률지원을 시작했습니다.

경남02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도정운영의 모토로 삼았던 전임 도지사의 영향인지, 관할 고용노동부는 사고 발생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 노동자들에 대한 이렇다 할 대책을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연히 지급해야 할 휴업수당마저 지급받지 못한 노동자가 많고, 끔찍한 사고를 목격한 노동자들에 대한 심리치료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3. 이 와중에 2017. 8. 20. STX조선 진해 조선소에서는 폭발사고가 발생하여 4명의 노동자가 사망했습니다. 삼성 중공업 거제조선소에서 발생한 사고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안전시설 미확보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들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 사고의 핵심 원인이며, 이는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는 조선업 특유의 고용환경 때문이었습니다. 경남지부에서는 유족들을 만나 원청에 대한 손해배상에 관한 법률지원을 진행 중이며, 후속 대응에도 함께할 예정입니다.

경남03

4. 경남지부 회원들은 고용노동부 통영지원 앞에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무료 법률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정기총회에서 보셨다시피, 경남의 바다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바다 한켠에는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참 많았습니다. 경남지부의 2017년은 아마도 조선업 노동자들의 권리 보호와 함께 흘러갈 것 같습니다.

다음 번 경남지부 소식은 유쾌한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보겠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당장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열심히 싸우고 좋은 소식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수, 2017/08/30- 20:28
209
0

광주전남지부 보고

광주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최기영 회원 (광주전남지부)

 

“아빠! 광주 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지?”
“어? 어! 응. 그렇지.”
“근데,,, 히히히 멈췄어!”
“어, 시계가 멈췄더니 그걸 갖구 저러나봐. 건전지가 다됐나봐.”

 

서두른다고 하였건만 광주전남지부 창립 19주년 기념식에 늦어버렸다. 창립 기념 인사는 다 끝나버렸겠고, 강연 진행 중 일려나? 광주지방변호사회관 6층 대회의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문이 열리자 강연자의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려온다. 강연자에 미안한 마음을 미소로 전하고 나니, 박상희 간사님이 웃음으로 다가오며 회의 자료와 떡이며 과일 등이 담긴 접시를 건네준다. 몇몇 눈이 마주친 회원들과도 눈인사를 나누고 빈자리를 휘, 둘러 찾았다. 광주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님들까지 30여 명이 열띤 강연을 듣고 있었던 터라 마침한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님은 ‘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기념 강연을 하셨다. 마음 속 편견이 혐오표현으로, 구체적 차별행위를 넘어 중대한 범죄로, 마침내 집단학살로까지 진행되는 단계는 너무도 놀라웠고 이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대응에 관한 비교법적 고찰도 많은 점을 시사해주었다. 심지어는 모성까지도 맘충이라 폄하하는 등 여성 혐오표현이 확대되고, 여성을 향한 중대 범죄까지도 나타나고 있는 현실을 상기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경청하였다.

강연은 바로 임시총회로 이어졌다.
김정호 지부장님의 개회 선언 후 6대 지부장이었던 이상갑 변호사님은 인사말을 통해 정부의 감시자 · 비판자로서의 민변의 역할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강조하셨다.
우리 지부 7대 지부장이었던 임선숙 변호사님은 19주년을 맞이한 지부의 공로패 수상 소감을 밝히며, 변호사로서 남아있는 기억은 모두 민변과 함께 한 활동들이었다며 민변과 함께 바라는 바는 무엇이든 자신있게 해보라고 하셨다.
이어 상반기 주요 사업에 대한 홍현수 사무처장님의 보고가 있었고, 임시회의의 대미는 신입회원 가입 승인으로 장식되었다. 신입회원인 김문석 변호사님도 ‘광주 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로고가 새겨진 벽시계를 선물 받았다.
뒷풀이는 2차로 간소하게 마무리 되었다. 지부 창립부터 19년, 지나간 세월과 활동에 대한 자부심 충만한 이들부터 새로운 열정과 포부로 가득한 이들까지, 우리는 빙 둘러 앉아 노래도 한자리씩 불렀다.

돌아가는 길에 24시간 편의점에 들러 AA건전지를 샀다. 주말이면, 광주 민변의 시간이 계속 흐르도록 건전지를 갈아야겠다.

The post [광주전남지부] 광주민변의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 광주전남지부 창립 19주년 기념식 appeared first on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 민변.

금, 2018/09/14- 09:54
19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