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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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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익명 (미확인) | 금, 2019/03/29- 17:36

[식민지 비망록 45 ]

조선은행권 지폐를 찍어내던 총독부 인쇄소의 공간 내력
용산 전원국 터는 어떻게 인쇄국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로 변했나?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5년에 사적 제157호인 ‘圜丘壇’의 올바른 소리값이 무엇이냐를 두고 크게 논란이 불거진 적이 있었다. 이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숱한 반대의견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관보>2005년 11월 16일자를 통해 이것의 독음(讀音)을 ‘환구단’으로 한다는 최종 고시를 냈다. 고종황제의 즉위 관련 내용이 게재된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의 기사에 ‘환구단’으로 표기한 사례를 존중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이 결정은 여러 모로 그냥 따르기가 어렵다. 우선 해당 일자에 ‘환구단’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오히려 이보다 닷새 앞선 <독립신문> 1897년 10월 7일자에는 ‘원구’라고 표기한 구절이 두 차례나 나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처럼 하나의 신문 내에서도 서로 다른 표기가 혼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는 까닭에 <독립신문>의 특정일자 기록 자체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1915년에 신문관에서 펴낸 <신자전(新字典)>에는 圜의 두 가지 음가 ‘환’과 ‘원’ 가운데 圜丘는 ‘원구’로 발음하는 것으로 명기하고 있다.

 

주한영국임시총영사를 지낸 윌킨슨(W. H. Wilkinson)이 갑오개혁 당시 제도개혁의 내역을 담아 펴낸 <한국정부(The Corean Government)> (1897)라는 책에는 ‘典圜局’을 ‘전원국’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표시해놓은 내용이 분명히 남아 있다.

익히 알려진 바 대로 ‘圜’이라는 글자는 ‘환’과 ‘원’이라는 두 가지 음가를 동시에 갖는 경우에 속하므로, 어떤 경우에 ‘환’이 되거나 ‘원’이 되는지를 잘 분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요한 일이 된다. 이 점에 관해 가장 일목요연하게 인용할 수 있는 자료는 <강희자전(康熙字典)>이다. 여길 보면 이 글자의 제1소리값인 ‘원’은 ‘둥글다(圓)’ , ‘하늘(天體)’, ‘돈(法錢)’ 등의 뜻으로 새겨지는 경우이며, 제2소리값인 ‘환’은 ‘두르다(繞)’ , ‘둘레(圍)’ 등의 뜻을 지닌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자료에는 ‘圜丘’라는 용어가 ‘원’의 항목에 설명 용례로 직접 등장하는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천원지방(天圜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의 의미에 따라 ‘둥근 하늘’ 에 제사를 모시는 ‘둥근 언덕’의 제단은 ‘원’의 소릿값을 따서 ‘원구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결코 ‘환구단’이 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圜’의 음가와 관련하여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항목은 ‘典圜局’의 발음문제이다. 이 글자는 대개 ‘전환국’으로 읽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진 역사용어이기도 하다. <독립신문>의 경우에도 한결같이 ‘전환국’이라는 표기만 등장할 뿐 ‘전원국’으로 표기한 사례는 눈에 띄질 않는다. 하지만 <강희자전>에 따르면 ‘圜’은 ‘법전(法錢, 돈)’이라는 뜻도 담고 있으며, 구부원법(九府圜法, 주나라의 화폐제도)처럼 ‘원’으로 읽는 것이 옳다.
실제로 1886년 이래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통용됐던 주화들의 액면표기를 살펴보면, 화폐의 단위가 ‘圜’인 경우에는 한글 ‘원’을 함께 표기하거나 영어로 ‘WON’이나 ‘WARN’ 또는 ‘WHAN’이 새겨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취지로 보면 ‘돈(화폐)을 관장하는 기관’을 뜻하는 典圜局은 ‘전환국’이 아니라 ‘전원국’으로 새겨지는 것이 마땅하겠다. 전원국이 처음 이 땅에 등장한 때는 1883년 7월이었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883년(고종 20년) 7월 5일 기사를 보면, “임시로 주전소(鑄錢所)를 설치하는 방법으로는 허다하게 계속 공급할 수 없으므로 따로 일국(一局)을 설치하고 상시로 주조하게 하여 경용(經用, 일상경비)에 보태 쓰도록 하며, 설치절목(設置節目)은 군국아문(軍國衙門)에서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는 전교(傳敎)가 있었던 것이 계기였다. 이에 따라 여드레 후인 7월 13일에 전원국관리사무(典圜局管理事務)와 총판(摠辦), 방판(幇辦)을 임명하는 것으로 전원국이 설치되었으며, 다시 7월 17일 기사에는 “전원국이 이튿날부터 불을 붙여 화폐주조를 개시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처음에 전원국에서는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전담하였는데, 이곳에서 근대적인 주화제조가 본격화한 것은 2년이 지난 1885년 8월 이후의 일이다. 이때 선혜청 별창(宣惠廳 別倉)을 조폐기기창(造幣機器廠)으로 정하고 이곳에 벽돌로 만든 공장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886년 11월에 완공을 보았다. 근대시기의 서울전경 사진자료를 보면 서소문 바로 안쪽에 굴뚝이 높이 치솟아 있는 이색적인 풍경이 간혹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 60척(呎, 피트) 높이의 전원국 조폐창의 굴뚝이다. 이곳에는 독일에서 들여온 각종 주화제조기계를 장치하였고, 독일인 기술자 크라우스(F. Klaus) 등 3명이 고빙(雇聘)되어 몇 종류의 시주화(試鑄貨)가 생산되었다.
그 후 1887년에는 일본조폐국의 조각사(彫刻師), 기관사(機關士), 직공(職工) 등 25명이 고빙되어 주조사업을 개시하였으나 한강을 거슬러 오르내리는 운항에 의존하여 원료를 운반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시험적으로 적동화(赤銅貨) 5문(文) 짜리와 황동화(黃銅貨) 10문(文) 짜리의 두 종류를 만들어내는 데에 그쳤다. 이러한 상태에서 1892년 12월에 이르러 원료 반입이 편리한 인천 제물포(濟物浦)의 후화촌(後花村)으로 자리를 정하여 전원국을 신축하고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駐韓日本公使館記錄)> 14권에 수록된 「전원국조사보고서(典圜局調査報告書)」에는 인천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까닭을 이렇게 적고 있다.

 

경성(京城)에서 인천(仁川)으로 이접(移接)한 기인(起因)을 문(聞)한즉 해국내(該局內) 소용석탄(所用石炭) 급(及) 기타 공업용 물품건 수입(輸入)은 전수(全數)히 인항(仁港)에 도(到)하는 고(故)로 해물품(該物品)을 경성(京城)으로 전운(轉運)하려니 강(江)에 수리(水利)를 의(依)하나 엄동시(嚴冬時)에는 빙강(氷江, 결빙)되어 항운(航行)이 절지(絶止)하는 때 있고 인마(人馬)를 의(依)하여 반운(搬運)하려면 일년간(一年間) 경비(經費)는 모인(某人)이 하든 계산(計算)을 알아본즉 이만필(二萬疋)에 하(下)치 아니하며 차(此)를 인(因)하여 이접(移接)하였다 하며 (하략)

 

여기에서 보듯이 한강을 이용하는 방법은 겨울철 결빙 관계로,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은 과다한 비용이 발생하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천에 터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인천 전원국의 감독은 오사카제동회사(大阪製銅會社)의 사장이던 마스다 노부유키(增田信之)가 맡았으며, 오사카조폐국(大阪造幣局)에서 원형(圓形)의 은지(銀地, 은화의 원재료)와 오사카 제동회사에서 동지(銅地, 동전의 원재료)를 공급받아 은화, 동화, 백동화(白銅貨), 황동화 등 5종류의 주화를 압인(壓印)하여 생산하였다.
청일전쟁의 와중에는 일본의 간섭에 따라 1894년 7월 11일에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이 제정 공포되었는데, 여기에는 새 화폐를 은전(銀錢, 1냥짜리와 5냥짜리), 백동전(白銅錢, 2돈 5푼짜리), 적동전(赤銅錢, 5푼짜리), 황동전(黃銅錢, 1푼짜리)의 네 종류로 유통하도록 하고, 특히 제7조의 규정에 “신식화폐가 다량 주조되기 이전에 당분간 외국화폐를 혼용할 수 있되 다만 본국화폐와 동질(同質), 동량(同量), 동가(同價)의 것이라야 통용이 허락된다”는 구절이 삽입되어 있다. 인천 전원국에서 만들어진 주화는 완전히 일본의 것과 동일한 것이었으므로, 이 말은 곧 일본화폐가 조선 전역에 무제한으로 유통되는 것을 허가하였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용산 전원국이 폐지된 자리에 들어선 탁지부 인쇄국의 모습이다. 뒤로 이곳의 상징물인 90척(呎, 피트) 높이의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통감부, <일영박람회출품사진첩>, 1910)

<애뉴얼 리포트> (1911~1912년판)에 수록된 용산 인쇄국에 종사하고 있는 조선인 여직공들의 제책작업광경이다.

 

약간의 시간이 흘러 1898년 8월 15일에는 인천에 있던 전원국을 서울의 용산강으로 옮기는 결정이 내려지게 된다. 이 당시 이전 장소로 정해진 곳이 군자감 강감(軍資監 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구역) 터였다. 이 자리가 선택된 이유는 갑오개혁 때 각도(各道)에서 올라오는 일체의 물납(物納)이 폐지되고 대전(代錢, 금납)으로 하도록 변경됨에 따라 이곳이 비어있는 공간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용산 전원국은 1898년 10월부터 토공(土工)이 개시되었으나 여러 가지 정세의 변화로 공사가 지연되었다가 1900년 5월에 이르러서야 건물이 대략 완성되고 시운전을 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때마침 한강철교의 완성과 더불어 그해 7월 8일 경인철도의 전 구간이 개통되자 8월 22일에는 인천에 남아있던 제반 기계를 수송하는 일에 착수하였고, 9월 8일 이후 백동화를 압인하는 일이 용산에서 재개되었다. 물론 이곳에서 백동화의 남발이 이뤄졌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러일전쟁 시기에 ‘제1차 한일협약’에 따라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재정고문(財政顧問)의 용빙이 강요된 결과 1904년 10월 14일에 임명된 탁지부고문(度支部顧問) 메가타 타네타로(目賀田種太郞)에 의해 이른바 ‘화폐정리사업’의 이름으로 전원국은 철폐되고 말았다. 비록 관제(官制)는 사라졌으나, 화폐정리 탓에 회수된 엄청난 수량의 백동화를 녹이고 절단하는 작업은 1911년 3월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알려진다.
전원국이 폐지된 이후 옛 군자감 강감 터를 차지한 것은 탁지부 인쇄국(度支部 印刷局)이었다. 1904년 12월 6일 칙령 제30호 「인쇄국 관제」를 통해 설치된 이 기관의 생성과 변천과정에 대해서는 <경성부사> 제2권(1936), 1016~1018쪽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국내(局內)에 설치했던 인쇄사업에 관해서는 명치 37년(1904년) 10월 전원국의 폐지와 동시에 탁지부 인쇄국 관제가 발포되어 전원국 터는 인쇄국이 되고, 인쇄공장 300평과 제지공장 100평에서 우편절수(郵便切手, 우표), 징세인지(徵稅印紙), 기타 석판(石版)과 활판(活版)에 속한 잡인쇄(雜印刷) 사업만을 존속시키는 것으로 했다. 39년(1906년) 3월 1일 인쇄국 공장 전부가 소실되어 9월에 복구했고, 40년(1907년) 10월부터 한국은행권(韓國銀行券) 제조사업도 기도하여 그해 7월부터 제(諸) 설비공장의 축조에 착수했다. 42년(1909년) 11월 27일 증설의 대공사를 준공하고, 이듬해 11월부터 은행권의 제작업에 착수했다.
이보다 앞서 41년(1908년) 관제개정에 있어서 국(局, 인쇄국)을 특립(特立)의 한 관청으로 삼아, 탁지부대신 관리 아래에 인쇄제지사업의 직영(直營)을 하는 것으로 되었다. 또 이해부터 교과서의 인쇄를 하고, 나아가 수입인지, 수형용지(手形用紙, 어음용지), 소절수(小切手, 수표) 용지류, 국고채권(國庫債券), 각 은행주권(銀行株券), 제2회 농공채권(農工債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고급의 인쇄도 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보듯이 전원국의 기능이 인쇄국으로 전환된 것은 일찍이 이곳에서 지폐 발행을 위한 제지소가 설치된 바 있고, 이와 병행하여 우표와 수입인지 등 관공서에서 필요한 제반 인쇄물을 이곳에서 공급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 시기에는 ‘탁지부 인쇄국’이라는 간판 아래 각종 주권, 채권, 어음, 수표용지 등을 제조하였고, 경술국치 직전의 시점에는 한국은행권의 제판(製版)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또한 교과서를 비롯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현행대한법규유찬(現行大韓法規類纂)>과 같은 관찬 간행물들도 모두 이곳에서 인쇄되었다.

조선총독부 인쇄국 관제가 폐지된 다음날인 『조선총독부관보』 1912년 4월 1일자(호외)에는 발행처의 표기가 ‘조선총독관방 총무국 인쇄소’로 변경되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개시된 이후에는 이곳은 ‘총독부 인쇄국’으로 승계되었다가 1912년 3월의 총독부 관제 개정으로 인쇄국이 철폐되고 ‘총독관방(總督官房)’으로 소속이 바뀌면서 ‘인쇄소’로 전환되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행권(朝鮮銀行券) 지폐를 찍어내는 것과 <조선총독부관보>의 인쇄도 이곳에 속한 주요 업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1923년 3월 28일에 이르러 예산절감을 이유로 총독부 인쇄소의 민영화가 추진된 결과, 그 자리 그대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가 설립되어 사업 일체를 승계하였다. <매일신보> 1923년 1월15일자에 실린 「조선도서인쇄준비위원회」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이완용(李完用), 박영효(朴泳孝), 송병준(宋秉畯), 민영기(閔泳綺), 한상룡(韓相龍), 조진태(趙鎭泰), 이병학(李炳學; 李柄學), 김승환(金昇煥) 등 다수의 조선인 친일인사들도 회사 발기인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때 친일귀족 박영효는 창립 때부터 사장 자리에 올라 1935년 5월 6일까지 재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은행권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內閣印刷局)’에서 제조하는 것으로 이관 처리되었으나, 나머지 총독부 인쇄소의 소관이었던 대부분의 업무는 ‘총독부 고시’의 형태를 거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몫으로 귀착되었다. 예를 들어, 총독부관보의 인쇄 및 발매를 비롯하여 “조선총독부가 저작권을 갖는 여러 학교의 교과용 도서, 교수참고용 도서, 기타 필요한 도서의 번각(飜刻)에 대한 발행”, 그리고 “총독부가 저작하는 조선민력(朝鮮民曆; 책력)의 제조 및 판매”에 관한 권한도 이 회사가 갖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1936년 12월에 종전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터에 신축된 체신이원양성소의 전경이다. (<조선의 체신사업(소화 13년판)>, 1938)

 

<일본지리대계> 제12권 조선편(1930)에 수록된 경성시가도에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간 ‘육군탄약고(옛 총기제조소자리)’의 위치가 또렷이 표시되어 있다.

 

용산과 마포의 경계지점인 도산(桃山, 모모야마; 지금의 도원동)에서 포착한 용산 방향의 전경이다. 사진의 아래쪽에 건축 공사중인 곳이 일본군의 유곽(遊廓)으로 유명했던 모모야마(1912년에 ‘야요이쵸’로 개칭)이고, 중간에 보이는 건물이 나중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옮겨오는 일본군 탄약고이며, 오른쪽 위로 언덕 너머 굴뚝이 보이는 곳이 당시 ‘탁지부 인쇄국’ 자리이다. (조선타임스신문, <황태자전하 한국어도항 기념사진첩>, 1907)

경성비행장에 근무할 천녀(天女), 즉 에어포트 걸(스튜어디스)의 모집기사에 체신이원양성소가 시험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동아일보> 1937년 6월 29일자)

 

그 후 1935년 6월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종전의 위치에서 북쪽으로 인접한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38번지’에 건물과 시설 등을 새로 갖춰 그곳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 자리는 원래 대한제국 시기에 총기제조소(銃器製造所)가 설치된 곳이며, 이후 일본군에 접수되어 화약고(火藥庫)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이와 동시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빠져나간 곳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와서 이 구역을 넘겨받았다. 이 기관은 일찍이 총독부가 전기통신, 전신전화의 공무(工務), 항로표지업무 등 특수한 기능을 요하는 체신사업 종사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월 21일에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그해 5월 이후 경복궁 서쪽의 ‘창성동 117번지’에 있던 경찰관연습소(警察官練習所, 옛 대한적십자사 및 대한적십자병원 터) 자리를 넘겨받아 사용하던 상태였다.
오래도록 인쇄시설이 포진하고 있던 구역에 총독부 체신국이 새로운 건물을 신축한 연혁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36년 12월 20일자에 수록된 「체신이원양성소, 낙성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체신국 체신이원양성소는 금년 6월 원정(元町) 3정목 고대지에 기공하여 공사중이던 바 총부지(總敷地) 7,500여 평에 근대식 양옥이 완성되었으므로 19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정오경 동 양성소 대교실에서 미나미(南) 조선총독 대리로 오타케(大竹) 내무국장 이하 관공민 150여 명 참석으로 식을 마치고 별실 강당에서 성대한 피로연이 있은 후 오후 2시경 산회하였다.

 

<경향신문> 1950년 5월 21일자에 게재된 ‘국립체신고등학교(원효로 3가 1번지)’ 관비생 모집공고이다.

 

이로부터 이 공간은 일제의 패망 시점까지 조선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한 기반시설로서 우편, 전신, 전화, 항로를 비롯한 여러 체신기관에 종사할 요원들을 배출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연혁 때문인지 해방 이후에도 이 구역에는 체신관련 교육기관이 그대로 점유하였다. 실제로 이곳은 미군정 시기인 1946년에 ‘조선체신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립체신학교’로 다시 바뀌었으며 이내 ‘체신대학’의 명칭을 달고 운영되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체신고등학교’도 함께 설립
되었으나, 1957년 7월 10일 「체신제학교설치령(遞信諸學校設置令)」에 따라 종전의 체신학교 대학부는 ‘체신학교’로, 종전의 체신학교 고등부는 ‘체신학교 병설 체신고등학교’로 각각 위상이 재정비되었다.

옛 용산 전원국 자리이자 총독부 인쇄국 자리이자 체신이원양성소 자리였던 원효전화국 터는 2018년 4월 이후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골목길은 1900년에 개통된 용산포구 행 전차(電車)가 오가던 길이기도 하다.

 

1962년 1월 1일에는 두 학교가 폐지되고 체신공무원훈련소가 설치되었으며, 체신공무원교육원과 정보통신공무원교육원 등의 명칭변경이 있었다. 1999년 5월 12일에는 새로운 청사가 완공되면서 1936년 체신이원양성소가 이곳으로 옮겨온 지 60여 년 만에 충남 천안으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이와는 별도로 1976년 1월 16일에는 이 구역 안에 원효전화국(元曉電話局)이 신설된 바 있으며, 이 자리는 원효전신전화국과 국제전화국 시절을 거쳐 2018년 4월 이후 지하 5층 지상 5층 규모의 ‘KT 용산 IDC 신축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상태이다. 현재는 이 앞에 ‘군자감 강감터’라는 것을 알리는 문화유적표석 하나가 서 있을 뿐이다. 이곳이 1898년 이래 용산 전원국과 총독부 인쇄국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시절을 거쳐 체신이원양성소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노골적인 경제침탈이 거듭되었던 공간임을 알리는 안내판 하나 정도는 추가로 설치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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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저는 ids사기 사건의 피해자로 1년 넘게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김성훈은 이미 2심에서 15년의 중형을 받은 사기꾼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피해금을 변제하겠다

변제하겠다 하면서 시간을 끌어오다  지난 8월에는 비상장주식인 정체불명의 변제안을 제시하면서 합의서와 처벌불원서를 받아 자신의 감형에만 정신을 쏟다기 몇몇 몰지각한 피해자의 파산신청을 옳다구나 받아들여

자신의 1조에 채무를 벗어나려하고 있습니다.

민족문제를 바르게 풀어가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고문 변호사이신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김성훈 사기꾼을 돕고 수많은 피해자를 또다른 고통으로 몰아가는 일에 앞장서신다는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제발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주시고,..

정의로운 변호사가 되는 길에 오점이 생기질 않길 바랄뿐입니다.

목, 2017/12/07- 02:03
76
0

정만순 변호사님 부탁드립니다.

29명이 1만명의 생각 몫까지 생각해 파산을 신청한다는건 김성훈에게 면죄부를 주는일은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일이고, 잘못된 일인줄알면서 했다는건 더 그죄가 악질입니다.

많은 변제안으로 사람들을 현옥시켰고

서민들이 피땀흘려 번것들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었다

사측에서의 장난

목, 2017/12/07- 00:37
96
0

정만순 변호사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고문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문이라면 ‘어떤분야에 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품부한 경험을 가지고 자문에 응하여 의견을 제시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고문으로서

29명이 1만명의 의견도 수렴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산을  대신한다는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제발 다시 한번 생각 부탁 드리고 싶습니다.

온갖 비리가 다 걸쳐져 있는 ids !

이건 아마도  더이상 유사수신등 의 건으로 이런 불상사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록

법을 개정하도록 힘을 주세요

이건 아마도

 

목, 2017/12/07- 00:51
109
0

정만순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의 김성훈 사기사건으로 매일 밤잠 설치며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지내고 있는 피해자입니다.

김성훈은 사기꾼입니다. 무허가 유사수신회사를 설립해 1만 2천여명의  투자자로부터 1조원을 챙긴 나쁜 사기꾼입니다.

김성훈과 일부 파산을 신청한 사람들은 또 다른 사기로 투자자들을 힘겹게 하고 있습니다.

저의 목숨과도 같은 피 같은 돈입니다.

부디  피해자들의 고통을 혜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발 김성훈의 파산을 막아주십시오.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수, 2017/12/06- 23:32
16
0

안녕하세요

저는 IDS피해자입니다

이번에 채권자라는 20여명이 신청한 파산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저희 가족의 피같은 돈을 이렇게 사기당한것도 억울한데 다른 피해자들의 대표도 아닌 사람들이 변호사와 함께 파산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잠도 못자고 정말 자멸감이 뭔지 느끼고 있습니다

정만순 변호사님

정말 이게 옳은 일인지 생각하시고 돕고 계신지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파로 인한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시는데 앞장서서 훌륭한 일을 하시는데 어찌하여 김성훈 사기범을 돕는 일을 하시는지요

파산을 김성훈은 쌍수를 들며 환영하고 있습니다

공평..말이 공평이지 피해자들은 또 파산이후 돈을 들여 법정싸움을 해야하고

김성훈은 파산됐으니 홀가분하게 지낼텐대.. 변호사님께서 이 일을 전체에게 좋은일인지 몇명에게 좋은 일인지 판단하시여 파산을 멈춰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목, 2017/12/07-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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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피해자입니다

IDS홀딩스 김성훈은 1조원대 사기범이고 피해자가 1만2천명입니다

13년간 직장생활을 하면서 차곡차곡 모아둔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돈을 사기 당하고 하루라도 빨리 변제가 이루어 지기만을 소망하는 피해자로 현재 파산절차를 보면서 깊은 절망속에 있습니다

이 파산은 1만명의 동의를 얻은 것이 아니며 단 20여명이 신청하였고 피해자의 한 사람으로써 김성훈에게 파산은 결코 용납 할 수 없습니다.

김성훈 파산이 이루어지면 동의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이게 공평한 재산 나눔일까요

파산이 이루어지면 김성훈과 동조했던 이들이 월급이라며 받아가고

직급자들도 투자사실있으면 받아가고.. 현재 피해자별지에

누락된 피해자들은 또 법정싸움을 해야합니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생각해주십시요.

민족문제연구소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곳이라 들었습니다

죄없다며 상고중에 있는 김성훈을 돕는 파산 진행은 되지 않도록 도움 부탁 드립니다.

목, 2017/12/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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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s홀딩스로 인해 고통받는 피해자입니다.

제2의 조희팔 사건..

제가 그 사건의 피해자가 될 거라 생각도 못했었답니다.

저의 욕심이 이렇게 힘든 생활의 연속이 될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처럼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넘쳐나고 있는 상황에서 29명이 12000명을 대표하여 파산신청을 진행한다는 말에 더 놀랐습니다.

어렵게 모으고 모은 돈을 기다리면 준다하여 1년반을 넘게 기다렸는데 단 한푼의 변제도 받지 못한 상태인데

이제는 파산을 하여 면책을 받겠다니요…

제발 간혹히 부탁드립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인권, 평화, 미래를 생각하는 훌륭한 곳이고 이런 곳의 고문변호사이신 분께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목, 2017/12/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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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조희팔” IDS홀딩스 사건의 피해자의 한사람으로

하루하루 절망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변제해준다는 말만믿고 기다렸지만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하지않고

단한푼의 변제도 받지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파산을 하여 면책을 받겠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12,000명의 피해금에 대한 파산을

극히 일부인 29명의 파산신청인이 대표하여 진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29명이 만명을 대신할수는 없습니다

파산이 받아들여진다면

만명의 피해자들이 또한번의 절망적인 일을 겪는것입니다

더이상의 피해를 보지않도록 파산을 막아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목, 2017/12/0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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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순 변호사님

저는 Ids홀딩스 피해자입니다

이번 사기사건으로 저는 건강에 문제가 생길정도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있습니다. 정말 김성훈이 피해자들을 기만하며 변제한다 떠들기만 할뿐 실제 1원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김성훈은 피해자들에게 파산을 하면 돈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다며 편지글을써서 유포하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정의가 살아있나 싶을정도로 사기범이 자기 파산하니 찬성해달라하니.. 어느 사람이 이해하며 받아들일까요

 

정만순 변호사님께서 만일 제 입장이시라면 파산 좋으니 동참하세요 하실수 있으실까요? 민족문제연구를 이번에 처음알고 친일파를 바로 잡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좋은 일을 하는 곳이란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김성훈의 파산을 도와 1만가정의 결제를 파탄내는 일을 도우신다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정만순 변호사님

1만명의 목소리와 피맺힘이 들리시는지요?

김성훈에게 파산이라니.. 이걸 채권자라는 20여명의 사람들이 돕고 있으니 정말 1만명의 피해자 대표도 아닌 그들이 나서서 김성훈을 돕는 것을 볼수가 없습니다

제발 !! 올바른 길이 무엇일까 생각해주십시요. 저는 김성훈의 파산을 절대 받아들일수가 없습니다. 부디 파산을 막아주십시요

목, 2017/12/07-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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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돈을 가지고 가서

호의호식해놓고…

지금 깐빵에 있는 인간!

죄를 뉘우치고 돈을  갚을 생각은 커녕

파산으로 배째라 하는 인간!

인간으로 할 짓이 아닌 행동을 하는 인간!

그리고 많은 서민들은 눈물과 괴로움으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목, 2017/12/07-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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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Ids홀딩스 피해자 입니다.

김성훈 대표는 피해자들의 돈을 훔쳐가고 변제할 생각이 없습니다

단본인이 죄를 뉘우친다면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변제를 해야하는데

그런행동도 없이 파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김성훈의 파산를 막아주세요

 

목, 2017/12/07-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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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서정주를 비롯한 친일문인들은 누구인가?

우리가 일본의 침략에 의해 36년 간 식민통치를 받는 동안 일제를 적극 옹호하고 일본국 천황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자고 했던, 적국의 편에 서서 민족을 배반한 부역자들이다.

이들은 단지 문화예술을 통한 일본에 협조한 행위를 넘어서서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전쟁의 앞잡이 노릇을 한 ‘전범들’이었다.

중앙일보는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고, 미당문학상 운영과 수상자 선정을 즉각 중단하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 미당문학상 폐지하라! 친일문인 기념문학상은 역사의 무덤 속으로!

2017년 12월 5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 민족문제연구소 / 역사정의실천연대 / 친일문학상 폐지를 위한 학생시민연대

금, 2017/12/0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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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은평구에 거주하는 결혼7년차 평범함 주부입니다

 

결혼할때도 최대한 돈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는마음에 결혼전 쓰던 저의 대부분의 물건을

 

가져와서 신혼살림을 차렸을만큼 아끼고 아껴서 돈을 모아놓았고, 결혼후에, 저없이 혼자살게될 어머님도

곰팡이 나는 집에서 이사시켜드리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절약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IDS홀딩스에 투자한 돈은 결혼 전 밤낮을 일하며 어렵게 모은돈과 친청어머니에게 생활비의 도움을

드리고자 친정어머님집에 대출을 받아서 ids에 투자하여, 어머님께 용돈 및 대출 이자를 갚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69ids사태가 벌어지고 어머님께 드리는 용돈은 물론이거니와 그 집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의 이자까지 너무 힘겹게 매달 갚아내고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남편에게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해서 저는 건강도 많이 안좋아지고, 결국 몇 달몇 버티다

남편에게 이실직고후엔 부부사이는  많이 악화되었습니다.

 

 당시 모집책은 김성훈대표의 계좌동결만 풀리면 원금 회수를 할 수 있다하였고,

 

저는 그 말만 믿고 몇 달을 기다리다가 이렇게 시간이 지나버렸습니다

 

 모든것이 거짓임이 밝혀진 지금에도, 이들은 아직도 피해자들에게 ids가 변제를 해줄것이라며 합의서와

함께 지점장 처벌불원서를 받고 있으며 본인들도 피해자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태를 늦게 파악한 저는 원금 손실이라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결혼한지 7년이 되었지만 아이를 가질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 상황입니다..저는 그동안 돈을 아끼느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돈 때문에  밤잠을 설쳤을 때

피해자들의 돈으로 수당을 받아 호의호식한 이들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피해자들이 대형 보험사의 FC나 재무설계사, 자산운용가를 통해 IDS홀딩스에 가입하였습니다.

이들 모집책은 금융전문가들로써 IDS홀딩스가 불법 유사수신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의 이득을 위하여 원금 손실이 없는 월이자식 금융상품인양 안내하여 많은 피해자를 양산하였습니다.

이에 ids홀딩스를 신고합니다.

 

 

 

 

금, 2017/12/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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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모텔주인은 여석가구로…

적십자희비

마는세종대왕… 그라고….$$$$$…..%%%%%시민역사관 낸다고….

집현전열장

사임당두장                   $약속%

그러나

그인력노동자는  그약속이

일부 달방세입자와나 ……..그리고  ……주인으런의  횡포라고

볼수 있는 ……..그러나

백이호실의 몽문일부

 

부분파손(기물폭행)그리고수갑

그인력노동자의 저녹서 출소날이

십유길

그복직된  화면목탁에게  하소연 하는가?

니는 일마야  최소한  삼육오라는  그팀장형사!

섣딸양력에 이사도  자라는데,

이게  무슨  인심고!?(참고사진경남민언련)

 

금, 2017/12/08-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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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임을 하시려거든 그래도 말이 되는 수임을 하시지.. 여기저기 깨끗한 이름이 더럽혀 질 일을 하고 계시다는 것 본인도 아시리라 봅니다. 속히 돌이키시어 정의를 지켜주시는 변호사님으로 남아주세요

금, 2017/12/08-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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