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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갑질과 을들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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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갑질과 을들의 반란

익명 (미확인) | 화, 2019/03/12- 15:45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아무런 합의문 없이 끝났다. 지난 싱가포르 합의 이후, 교착국면을 이어가던 북미관계가 이번 회담으로 무언가 돌파구를 찾고,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새 역사의 중요한 전기가 될 것이라던 낙관적 전망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또 한번 밀고 당기기의 오랜 긴장이 지속될 것인지 아니면 극적인 합의점을 찾고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젖힐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국가간 협상에서 합의와 결렬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때론 협상이 합의에 이르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결렬이 되면서 두 국가의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강대국과 약소국의 입장에서 협상 결렬이 미치는 충격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에 임하는 자세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강대국의 입장에서 약소국과의 협상은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여타의 대외적인 관계의 단지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약소국의 입장에서 강대국과의 협상은 때론 자신의 모든 국가적 역량을 다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이자 동시에 그 결과의 충격은 전 국가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때론 강대국과 약소국의 협상에서 모든 힘을 다한 약소국이 강대국에 비해 더 많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강대국과 약소국이 모두 협상에 성실히 임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협상의 원칙을 기켰을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만일 강대국이 자신의 힘을 믿고 비-합리적이며, 약소국의 뒷통수를 치는 협상을 해 왔을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을 두고 여러 분석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비판하는가 하면, 북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기도 하고, 애초부터 미국은 판을 뒤집으려고 했었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미국 국내정치의 영향까지 다양한 각도에서의 분석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분석과 평가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근거들이 나오고 있다.

미국의 무리한 요구에서 원인을 찾는 입장은 북미간 불신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북이 주장하는 단계적이고 동시적인 접근을 거부하는 미국의 논리가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고, 북의 비핵화 진정성을 문제삼는 측에서는 북이 처음부터 비핵화에 관심이 없고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한다.

여기에 정상회담 기간 중에 미국 사회를 달구었던 코헨의 의회 청문회 등의 미 국내정치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입지의 약화 때문에 합의문에 서명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중 북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을 문제삼는, 어쩌면 북에 대한 근본주의적 시각을 제외하면 결국 결렬의 요인은 미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협상의 문제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미국의 무리한 요구 혹은 자신들의 내부적인 요인 때문에 협상을 결렬시킨 것이다.

흔히 협상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모두를 실망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즉, 협상은 서로가 마주 앉아 무언가를 주고받는 것이며, 따라서 이득과 양보의 함수인 것이다. 그런데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일방적인 요구만을 앞세우는 즉,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많은 것을 일방적으로 얻기만을 요구한다면 이는 공정한 협상이라 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상대방보다 힘의 우위에 있는 점을 이용하여 비-합리적이고,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말과 행위를 ‘갑질’이라고 한다. 사회에 갑질이 넘친다면 그 사회는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로 구분되는 말 그대로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 될 것이며, 그 사회의 법과 질서는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제2차 북미정상회담은 어쩌면 전형적인 강대국의 ‘갑질’이라 할 것이다. 이를 ‘제국의 갑질’이라 이름붙일까 한다. 사실, 강대국 미국의 갑질은 새삼스럽지 않다. 1994년 모두의 기대를 모았던 ‘제네바 합의’의 일방적인 파기부터 시작하여, 2002년 소위 특사 방북을 통한 ‘고농축우라늄 문제’를 제기하면서 제2차 ‘북핵위기’를 촉발시켰고, 2005년에는 ‘9.19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BDA’ 사태를 일으켜 협상을 뒤로 돌리고자 했던 것까지…..

역사적으로 제국의 갑질은 한반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남북의 관계 개선을 막아왔고, 우리에게 더 많은 인내를 강요해왔다. 그렇다면, 갑질에 대처하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의 갑질에 대해 ‘을들의 반란’이라는 말이 있듯이, 갑질에 대처하는 유일한 길은 ‘연대와 협력’일 뿐이다. 남북의 연대와 협력, 지금 당장 미국의 갑질에 불편해하는 주변 국가들과의 협력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북미간 문제해결을 위한 중재자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당사자이자 한반도 미래의 설계자여야 하고, 남북의 연대와 협력의 힘을 통해 문제 해결의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 제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 이후에도 북미가 서로에게 결렬의 책임을 묻기는 하지만 협상의 파국을 선언하지는 않고 있고, 여전히 협상의 기대감을 밝히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이미 신년사 분석에서도 밝혔듯이, 우리 정부가 또 다시 무거운 짐을 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제국의 갑질’에 부응하는 것이거나 그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으로의 갑질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과감한 ‘을들의 반란’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핵심은 이미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듯이 바로 ‘남북의 연대와 협력’일 것이다.

 

통일뉴스, 2019년 3월 11일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가 공동게재에 동의하여 실린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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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오늘날 지식경제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포용적 전위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이러한 국한성의 극복은 가속적인 성장을 재점화하고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 속에서 극심한 불평등의 원인을 교정하는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그 초기형태들에서는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생산방식은 생산성의 최전선에 도달하고 이를 유지할 최상의 전망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경제 각 분야의 프린지들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국한되는 상태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의 기술적 성취들이 이미 가능하게 만들었던 생산성의 단계, 그러나 우리의 경제적, 사회적 안배들이 보통의 노동자들에게 접근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던 바로 그 단계를 대다수 노동자와 기업들에게 부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역사적으로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서 모방과 변화를 고취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진 생산방식이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기술적이고 기업적인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용인하는 것은 그러한 생산방식의 방향과 영감의 가장 큰 잠재적인 원천을 나머지 경제에서 빼앗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열차의 기관실과 나머지 차량들을 분리하는 것과 같다. 지식경제에서 일어나는 바와 같이 선진관행이 어떤 특정 분야와 본질적인 관계가 없고 비록 늘 프린지에 국한되지만 실제로 많은 부문들에서 발판을 확보해왔다면 이와 같은 실패의 결과는 우리를 더욱 더 경악하게 하고 맥 빠지게 한다.

지식경제의 국한성이 경제침체를 유도하는 가장 의미심장하지만 거의 알아채기 어려운 방식 중 하나는 이러한 전위주의가 번창하는 생산체계와 노동력의 분야들에서조차 이러한 국한성이 전위 부문 자체에 대해 미치는 결과이다. 만일 어떤 생산방식이 폭넓고 다양한 여건들에 적응하는 경우에만 그 잠재력을 발전시키고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생산방식의 고립적 형태는 그러한 생산방식의 수행자나 수혜자에 의해서도 오해될 공산이 크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처음 출현하였던 첨단기술 산업과 분야를 특징지었던 특성들과 같은 가장 피상적인 혹은 우연한 특징들로 쉽게 오인될 것이다. 이전의 대량생산과는 달리 이러한 생산방식은 관행자체에 표준적인 형식과 널리 인정된 중요성을 부여해주는 공인된 이론이나 교리를 확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생산방식은 당대를 풍미하지만 동시에 모호한 것으로 머물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결과도 역시 중요하다. 지식경제의 고립성과 그 일자리들의 상대적 빈곤성은 경제의 위계적 파편화를 심화시킨다. 부의 증가부분은 노동력의 감소부분에 의해 생산된다. 내가 초고립성으로 명명한 것은 이러한 경향을 악화시킨다. 대량생산 산업과 연관된 일자리 구조와 이에 상응하는 서비스업에서의 일자리 구조는 두 부분으로 해체된다.

더 큰 부분은 국내시장에서 수행되는 서비스업과 가장 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가장 낮은 세금을 부과하는 국가들에서 수행되는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에서 저임금 일자리들로 이루어진다. 그러한 일자리들은 낮은 노동수익과 낮은 세수를 지불하는 경우에만 생존할 수 있는, 쇠락하는 대량생산의 잔여물에서 일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또는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생산과정의 일부를 규칙화하고 사업의 상품화된 부분을 흔히 매우 먼 나라에 있는 종속기업들에게 할당하는 방법을 터득함에 따라 이러한 거대기업들의 보조수단으로 역할해온 표준화된 제조업의 변형 안에서 그러한 일자리들은 입지를 창출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노동시장의 두 번째 큰 부분은 특권적인 일자리들, 즉 진정하고 배타적인 지식경제의 후미진 곳에서 구축된 비교적 소수의 일자리들이다. 대량생산이 지속적으로 쇠락하며 잔여물이나 보조적 지위로 위축되는 결과,이른바 “일자리 구조에서 중간의 공동화” 현상이 나타난다.

누진세와 재분배적 사회급부권은 시장경제의 기성제도들에 의해 생성된 불평등이 극단적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 명료하게 확정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문턱을 넘어가면 구조적 현실은 시정조치로 감당하기 어렵다. 예산의 증수(增收)측면(누진세)이나 지출측면(재분배적 사회적 권리와 이전)에서 시정적 재분배는 생산의 전위들과 후위들 간의 격차에 의해 야기되는 엄청난 불평등을 보상할만큼 규모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시정적 재분배는 그러한 지점에 도달하기 한참 전에 기존의 경제적 제도들이나 유인책들과 충돌을 야기하고 과거의 경제성장에서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널리 간주될 수 있는 희생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확장하는 것과 누진세가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다. 기성제도의 논리를 부인하면서 인간화하는 역할에서 누진세가 시장에서 결정된 결과를 뒤집고 경제를 해체하는 쪽으로 아주 멀리 나가는 경우에만 누진세는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수 있다. 누진세가 그렇게까지 나가는 것은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누진세는 거기에 이르기 한참 전에 중단된다.

더 유망한 경로는 일차적으로 더 작은 불평등 나아가 지분, 도구, 능력, 기회의 더 확산된 분배를 창출하는 다른 시장경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질서의 재구축이 요구하는 국가, 생산의 물리적 기반시설 뿐만 아니라 사람과 그들의 역량에 투자하고 비용이 가장 많이 들어가는 가장 급진적인 기술혁신을 후원하고 이를 위해 신규 또는 기존 사기업의 장래에 대한 지분을 매개로 그들과 협력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국가에게 금융을 조달하기 위해서 높은 세수가 필요할 것이다.

유사한 추론이 시정적 재분배의 이면인 사회적 권리와 이전지출에도 적용된다. 이러한 조치들은 생산 체제의 전위 부분들과 후위 부분들 간의 차이에 착근한 극명한 불평등을 보상하기에는 항상 불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조치들의 더 설득력 있고 효과적인 사용법은 성질이 다르다. 이러한 조치들은 개혁된 경제의 행위자가 될 만큼 대담하고 역량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는 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사민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 즉 역설적으로 역진적이고 간접적인 소비세로 조달되는 사람과 그 역량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다른 형태로 지속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적 사민주의의 가장 큰 한계들(시장과 민주주의의 제도적 안배들을 쇄신하는 것을 포기한 점, 경제의 공급측면에 대한 진보적 접근을 결여한 점, 경제적 편익의 일차적인 배분을 규정하는 안배들에 대한 변화보다는 시정적 재분배에 집착한 점, 경제적 정치적 생활에서 공유된 역량 강화의 이상을 전반적으로 개혁되지 않은 경제체제를 인간화하려는 시도에 굴복시킨 점)을 극복하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우리의 목표가 경제성장의 논리와 기회, 능력, 이익의 원대한 평등과 포용을 향한 운동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이를 수행하는 최선의 방법은 사후적인 교정책, 즉 새로운 상상과 쇄신을 이미 포기한 경제질서의 불평등결과를 완화시키려는 기획이 아니다. 최선의 방법은 기성의 경제질서를 다시 상상하고 쇄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짜놓은 상상적인 대안으로 기성의 경제체제를 환상적으로 전면적으로 교체하는 대신에 부분별로, 단계별로 수행되는 누적적인 구조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한 기획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의 현재적 국한성이 야기하는 불평등-심화적인 결과에 대처하는 것보다는 더 중요한 과업은 없다.

아래 세 가지 명제들을 통해 나는 불평등과 관련하여 오늘날 가장 부유한 경제체제들의 비교할 만한 재정적 경험을 요약하고 해명해 보겠다. 이러한 원칙들은 비교적 단순하고 솔직하며 다양하고 광범위한 여건 아래서 이루어진, 장기적이고 밀도 있는 경험에 의해 지지되지만, 오늘날 북대서양 국가들의 통치 엘리트들의 가장 두드러진 기획인 사민주의와 사회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의 담론과는 대체로 이질적이다.

첫 번째 명제는 경제적, 교육적 기회와 능력에 대한 접근을 조직하고 결과적으로 이익의 1차적인 분배를 형성하는 제도적 안배들에 영향을 미치는 시책들이 불평등의 미래에 대해 가장 중요하다는 명제이다. 제도적 안배를 바꾸는 시책들은 누진세와 재분배적 권리와 이전지출에 의한 사후적 재분배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월하다. 오늘날 경제적 안배들 속에 불평등의 정착에 관한 논쟁의 주요 거점은 가장 선진적인 지식집약적인 생산방식의 미래를 둘러싼 투쟁, 즉 그러한 생산방식이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의 영역으로서 고립적 전위들에 국한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경제 전체에 징표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다.

지금까지 가장 예찬받는 경제사회적 조직형태는 북구 사민주의였다. 만약 세계가 투표를 할 수 있다면, 세계는 스웨덴과 같은 나라가 되자는 제안에 투표할 것이다. 그 경우 스웨덴은 현실적 스웨덴이 아니라 상상적 스웨덴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보상적 재분배를 통한 시장질서의 인간화와 상상적 스웨덴을 연결하지만, 사회경제적 권리를 통한 이와 같은 인간화에 앞서서 유산계급들과 국가권력의 이익들을 둘러싼 수십 년간의 계급적, 이념적 전투가 펼쳐졌다는 점은 망각한다. 이 갈등은 국가의 왕조적 부호통치와 사민주의 인본주의자들의 규제적 재분배적 공약들 사이의 타협안으로 마감되었다. 세계는 선행하는 서사에는 주의하지 않고 결말만 듣고 싶어 한다. 나아가 세계는 간신히 조정된 시장경제와 민주정치의 기성 조직형태의 한계 안에서 유럽식 사회보호와 미국식 경제적 유연성을 조화시키는 것을 결정적인 야망으로 삼은 의제[제3의 길]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다.

이러한 [사민주의] 프로그램은 고립적인 지식경제, 구제불능의 대량생산 제조업, 전통적이고 퇴행적인 중소기업 사이의 생산체제의 분업에 착근한 불평등에 대해 적절한 해법을 제공할 수 없다. 인종적, 문화적 이질성이 결여된 사회적 시멘트를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 의해 조직된 이전지출의 허약성이 폭로된 이래로 이러한 프로그램은 사회적 응집의 충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프로그램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위기를 구조변화의 가능조건으로 삼지 않는 민주적인 정치생활을 창조할 수 없다.

불평등과 관련하여 현대 금융경험에서 추론할 수 있는 두 번째 명제는 세금과 사회지출이 중요하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중단기적으로 과세 및 지출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세의 누진적 성격이 아니다. 관건은 총세입 규모와 이러한 재정수입의 지출방향에 있다.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진보적 재분배로 상실한 부분을 우리는 지출 측면에서 배로 만회할 수도 있다.

많은 현대사회에서 특히 정률종합부가가치세와 같은 역진적 간접소비세는 높은 세수(稅收)를 달성하는 최상의 방법이고, 이러한 세수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권리들을 재정적으로 밑받침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그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진적인 간접소비세가 전통적인 진보적 담론에서 호감을 얻기에는 너무 역설적이다. 부가가치세는 정의상 상대가격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립적인 세금이다. 부가가치세의 중립성을 침해하는 예외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한에서 부가가치세는 정부를 대신하여 모든 투입과 산출 간의 일정한 전환가치율을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부가가치세는 경제적 혼선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많은 세수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세수의 많은 부분은 예산의 증수 측면에서 평등지향적인 재분배로 포기한 부분을 보상하는 정도를 넘어서 재분배적 사회투자로 나아갈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 자칭 진보파들은 매우 자주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월하다는 점을 놓친다. 진보파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조세와 이전지출의 영역에서조차 대체로 변혁적 결과보다는 진보적 경건성을 우선시한다.

세 번째 명제는 우리가 재분배적 결과들과 조세 수단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조세체계를 설계한다면 우리는 장기적으로 구조변화에 보조적인 재분배적 결과(첫 번째 명제)와 역진세에 의존하더라도 높은 세수의 유지(두 번째 명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누진세의 기본적이고 적절한 대상은 각 개인이 사회의 자원들을 꺼내서 자신에게 소비한 소득과 부로 인해 발생한 생활수준의 서열이다. 이러한 과녁을 맞추는 데에 가장 적합한 조세 수단은 개인적인 소비에 대한 세금이다.

케인스의 제자 니컬러스 칼도어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해서 때로는 칼도어세로 불리는 이러한 세금은 각 개인의 총소득(자본수익을 포함)과 자기 자신에게 지출하는 것 간의 차이에 대해 가파른 누진율로 부과될 수 있다. 전통적인 소득세가 안고 있는 난점 이외에 누진소비세의 시행에서 특별한 기술적인 난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쨌든 누진소비세는 개인소득세에 비해 두 가지 장점을 갖는다. 소득세는 두루뭉수리하고 혼성적인수단이라면 누진소비세는 생활수준의 불평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다. 게다가 누진소비세는 정치적 의지와 권력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만큼 높은 최고 한계세율을 허용한다. 누진소비세의 상한선은 100퍼센트로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적 지출의 일정 수준 아래에서 개인은 세금을 납부하기 보다는 환급받을 수도 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개인은 누진율에 따라 세금을 납부한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호화생활을 넘어서면 그는 자신에게 쓰는 1달러당 몇 달러씩을 국가에 납부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진보파들이 과세의 재분배적 이용에 대한 헌신에서 명철함과 진정성을 갖고 있다면, 이러한 누진소비세는 선호할 만한 조세이다. 진보파들은 첫째로 보상적 재분배보다 구조변화가 우선적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다음으로 보상적 재분배와 관련하여 세수의 총계규모와 세금의 지출방향이 조세체계의 누진적 성격보다 우선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불평등의 재조정에 관한 세 번째 사고단계에서 이러한 누진적 소비세를 선호할 수도 있다.

누진세의 이차적인 대상은 부의 축적과 사망에 의한 부의 세습이나 생전 증여로 획득한 경제력의 행사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 목표가 덜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세를 통해 달성할 전망이 적기 때문에 이차적이다. 부에 대한 세금이 자산의 현재 분배상태에서 중요한 변화를 희망할 수 있기도 전에 이러한 세금은 대규모가 되어야만 하고 그리하여 주요한 경제적 와해를 초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누진세가 갖는 최상의 가치는 현실적인 또는 예상된 상속에 대한 과세를 통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의 분배에 영향을 미치는 데에 있다. 생활수준의 서열보다 경제력의 행사와 관련해서 보자면 기회와 역량에 대한 접근을 확장시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경제적 안배들의 제도적 혁신은 누진세와 사회지출을 통해 우리가 사후적으로 성취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낫다. 그러한 혁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에 대한 접근수단을 확대하는 것이다.

세금과 사회지출을 통한 진보적 재분배는 구조변화의 대체물로 자주 이용되어 왔다. 구조변화는 필경 하나의 불가분적인 경제체제를 다른 불가분적인 체제로 대체하는 것으로 표상되어 왔다. 이러한 대체는 (대위기라는 비상상황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정치와 정책에서 써먹을 수 없다.

만약 이러한 대체의 기회가 열려 있다면 대체는 심히 위험한 것으로 우려할 수 있다.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구조변화의 개념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변화들은 우리를 국한된 지식경제에서 벗어나 포용적 지식경제로 이끌게 할 부분적이고 점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적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급진적인 혁신이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한 탐구는 이 책 나머지 부분의 주요한 논제를 이루고 있다.

고립적인 전위 부분들에만 존재하는 지식경제의 국한성은 경제성장을 저해하고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이와 같은 침체와 불평등의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전위 부문들과 나머지 부문들 간에 발생하는 격차의 원인들을 틀림없이 겨냥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에게 초래한 기회의 상실은 경제적 침체의 비용과 경제적 불이익의 불공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경제 전반으로 확산시키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더 작고 더 빈곤하고 더욱 불평등한 존재가 된다.

가장 심층적인 수준에서 지식경제의 핵심은 상상력과 협력 사이에서 지식경제가 추구하고 수립해야만 하는 연결(우리의 협력적 관행들을 생산활동에서 함께 상상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있다. 협력을 상상력의 형태로 전환하는 것은 기존의 선진적인 생산방식 형태에서는 간신히 알아챌 뿐이다.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전파할 수 없다면 그러한 관행을 심화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지식경제는 격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이미 참여자들에게 일련의 물질적 혜택뿐만 아니라 도덕적 혜택, 즉 창조적 충동에 더 넓은 여지를 제공하는 과업에 대한 경험의 참맛을 쏟아 부어준다. 지식경제는 따분한 생산 현실 속에 공식이나 모듈 같은 기계로서의 정신보다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이 우월하다는 점에 대한 기반을 닦음으로써 우리를 더 큰 존재로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확립되어온 국한된 전위주의가 함축하는 모욕들 중 가장 부유하고 교육을 가장 잘 받은 사회에서조차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험의 기회를 부인하는 것이 가장 심각한 모욕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포용적 전위주의의 요구사항들, 즉 공인된 지식체계에 대한 접근에서는 변증법적이고 사회적 환경에서는 협력적인 교육의 중시, 더 높은 신뢰와 더 큰 재량을 허용하고 요구하는 생산기풍의 쇄신, 나아가 시장질서의 제도적 구조와 법적 체제의 쇄신 등을 탐구한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보급하고 이러한 보급을 통해서 생산방식을 심화하려는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은 또한 우리의 경험을 범위, 능력, 맹렬성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식이고 그러한 높은 수준에서 우리가 만들고 살아가는 사회 세계의 불운한 꼭두각시 노릇을 중단하고 대신에 이 세상의 판도를 바꿀 힘을 우리는 얻게 된다. 고립적인 전위주의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들고 분열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왜소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립적 전위주의에 반란을 일으킬 이유가 존재한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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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7/1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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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베르토 M.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가 출간되었습니다.

‘시대의 예언자’ 혹은 ‘미래를 향한 메시아’로 불리는 웅거는 브라질 태생으로 하버드 법대를 다니며 비판법학 운동을 주도하면서 약관 29세에 종신교수직을 획득하고 이후 수많은 화제의 저술을 남기면서 국내에도 ‘주체의 각성’ ‘민주주의를 넘어’ ‘정치 3부작’ ‘진보의 대안’ 등이 번역 소개된 미국을 대표하는 현시대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는 현재의 산업체계를 ICT첨단기술이 주도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칭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를 ‘지식경제의 시대’라고 명명합니다. 실제로 ICT 첨단기술이 산업과 생활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켰지만, 200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산업생산성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고 일부 집단이 소위 e-Flatform이라는 이름으로 독과점을 강화하고 경제운용의 성과를 독차지하면서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화되고, 계약직과 비선형적 고용의 불안정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웅거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첨단기술을 소수의 그룹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狹域(프린지)의 폐쇄적 전위주의와 거대기업들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이해와 지위를 강화하는 유사적 전위주의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지식경제의 소명은 가장 선진화된 기술과 생산관행을 생활과 산업전반으로 확산하고 보편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는 이를 포용적 전위주의라고 부르면서 이를 실현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다음의 세가지 기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 인지적 교육적 요건 – 사회적 도덕적 요건 – 법적 제도적 요건.

이어서 웅거는 기존의 경제학인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고전경제학, 마샬과 빈-학파에 의해 주도된 한계(효용)학파와 미시경제, 그리고 이단이라는 표현으로 케인즈의 이론, 이후의 신자유주의와 이에 타협한 사민주의의 타락과 제3의 길 등을 모두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이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웅거의 “지식경제의 도래”는 아마도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못지않게 매우 난해하고 추상적인 저술입니다만, 기존의 논리와 관행에 갇혀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도전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백년의 지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구매를 요청합니다. 책의 내용은 매주 한차례씩 20여 주에 걸쳐서 다른백년의 홈에 게재됩니다. 두손모아,

다른백년 이사장  이래경


우리는 고립적인 지식경제를 내가 유사전위주의(quasi-vangaurdism)라고 부르는 것과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경영 또는 생산 공학의 수준에서 내가 서술했던 지식경제의 피상적인 특성들이나 지식경제가 발전되거나 전파됨에 따라 지식경제가 드러내는 더욱 심층적인 특성들이든지 간에 새로운 가장 선진적인 생산방식을 숙달하거나 발전시키지 않으면서 새로이 부상하는 전위 부문, 특히 정보통신 공학과 매우 자주 연결되는 기술을 이용하는 광범위한 기업들의 모습이 바로 유사전위주의이다.

유사전위주의의 가장 흔한 형태는 복잡한 정보(예컨대 월마트와 같은 거대소매기업이 취급해야만 하는 정보)를 관리하기 위한 디지털기술의 채택이었다. 그러한 기업들은 정보를 더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재고의 “적시” 보충과 같은 효율성을 제고하고 자본을 절약하는 관행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기업의 대규모성은 기업에게 필요한 기술적 장비의 고정비용을 처리하는 데 결정적인 이점을 주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장비사용은 결국 기업이 자신의 시장지위를 공고히 하면서 더 크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중 어느 것도 그러한 거대기업들을 지식경제의 대표자로 전환시키지 못했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집약적인 선진적인 생산방식이 지식경제보다 더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진정한 지식경제는 여전히 좁은 서클 안에 갇혀 있다. 이윤을 쌓고 시장지배력을 축적하기 위한 인센티브는 이러한 협애성을 강화한다. 지식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글로벌 대기업들은 생산과정에서 규칙화되거나 심지어 상품화될 수 있는 부분을 떼어낼 방법을 찾아낸다. 그들은 본사에서 멀리 떨어진 세계 각지에서 전통적인 대량생산 방법을 사용하면서 주로 미숙련 노동자들로 구성된 기업들에게 이러한 규칙화된 부분들을 할당한다. 어떤 선진기업들은 심지어 “팹리스”기업으로서 큰 생산단위들(공장들)의 소유권과 아울러 그러한 단위들이 전통적으로 요구하는 안정적 노동력에 대한 고용부담을 가능한 최대로 떨쳐버린다.

진정한 전위주의는 대량생산의 사회적 복잡성에서 벗어난 자본과 지식의 엘리트로서 기업가, 관리자, 기술자의 작은 내부 집단에 한정된다. 상이한 규칙 아래서 다른 국가의 다른 기업과의 하도급계약 또는 더 일반적으로 분산된 계약 네트워크는 종종 본국의 노동력을 지식경제의 업무로 통합하는 것을 대체한다. 그 수익의 알짜배기는 고립된 지식경제의 정점에서 활약하는 기업의 주주들에게 시세차익으로 돌아간다. 또한 그 알짜배기는 스톡옵션과 같은 임금에 준하는 혜택의 형태로 최고로 숙련된
노동자와 경영자 엘리트에게도 돌아간다.

유사전위주의에 의한 선진관행의 허위적 확산에 상응하는 현상이 진정한 전위주의의 초고립성(hyperinsularity)이다. 선진기업은 자신이 판매해야만 할지도 모르는 온갖 물적 재화를 제조하는 회사들과 사무적인 계약관계로 후퇴한다. 예컨대, 캘리포니아에 있는 몇 천 명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산계획 중 규칙화된 부분들을 중국에 있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실행하도록 조정한다.

초고립적 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진정한 형태이지만 축소된 형태이다. 유사전위주의는 지식경제의 허위적인 긴 그림자일 뿐이다. 유사전위주의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공존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동시에 점증하는 경제적 침체와 경제적 불평등을 내포하는 두 가지 동향을 야기한다. 첫 번째 동향은 글로벌 과점기업들이 획득한 결정적인 지위다. 두 번째 동향은 개발도상국들뿐만 아니라 가장 부유한 나라들에서도 노동력을 점증적으로 불안정고용에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두 가지 동향은 초고립적인 전위주의의 점진적 후퇴국면에서 수행되는 노동과 초고립적 전위주의를 통제하는 기업적 기술적 엘리트들의 노동을 제외하고는 국민소득의 몫을 둘러싼 경쟁에서 노동보다 자본의 이익을 증가시킨다.

유사전위주의(월마트와 같은 기업들)와 초고립적 전위주의(알파벳과 퀄컴과 같은 기업들)는 모두 엄청난 규모성과 불완전경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두 가지 사례에서 거대기업은 가장 선진적인 설비에 대한 고정된 투자비용을 영리적으로 감당하는 능력에서 더 작은 경쟁업체보다 이점을 누린다. 게다가 지식경제의 전위 부문의 진정한 구현체인 초고립적 선진기업들은 효과적인 경쟁을 피하는 데에 세 가지 추가적인 이점을 갖는다. 그러한 이점들은 지식경제를 차이 나게 해주는 것(물리적인 기반시설에 의해 지원되고 물리적 장치에 의해 접근되기는 하지만 무형적인 아이디어, 능력, 네트워크의 작업에서의 우위성) 의 제한적이지만 구체적인 표현이다.

확장과 과점의 첫 번째 이점은 초고립적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과 같은 사업체들이 갖는 플랫폼효과에 있다. 이러한 기업들은 다수의 상품과 서비스를 서로 연관시키면서 제품을 플랫폼이나 생태계의 일부로서만 판매하게 된다. 플랫폼이 클수록 그리고 사용자의 수가 많을수록, 플랫폼이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옵션들이 더 다양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고객에 대한 매력은 더 강력하게 된다.

두 번째 이점은 진정한 지식경제의 거대기업들이 기술적 인재를 유인하는 데 유리하다는 점이다. 막대한 유동자본을 보유한 거대한 사업을 위한 활동에서 발생하는 물질적 편익에다 기술적 진화의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기업을 위해 활동한다는 매력이 추가된다. 그러한 기업들은 성공하려면 실험실을 닮아야 한다. 젊은 기술자나 기술적인 기업가,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선진적인 작업과 접촉을 유지하는 팀의 일원이 되고싶어 한다.

세 번째 이점은 바로 다음의 소비자를 위한 재생산의 한계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제품과 서비스를 채용한다는 점인데, 이러한 이점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선 따분하고 천박해 보일지도 모른다. 즉각적이고 무비용에 가까운 조작은 소비자를 플랫폼으로 초대하고 플랫폼의 많은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접근기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자는 거대기업에게 추가비용을 부과시키지 않는 어떤 것에 대해 대가를 지불할 수도 있고 사용자 모집단의 크기를 증가시킴으로써 향후 다른 사용자에게 플랫폼을 그만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할수도 있다. 겉보기에 사소한 특성들은 원래 의도한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특성은 지식 및 이러한 지식을 통해 가능하게 된 사용자 커뮤니티들이 물질적인 제품과 프로세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생산방식에서 비롯된다. 그러한 모든 프로세스와 제품들은 성질상 보편적인 비용, 소모, 퇴화의 대상이다. 이 모든 현상은 한계수확 체감의 제약이 계속적으로 군림하는 세계에 속하는 사항이다.

 

저자 : 로베르토 M. 웅거 (ROBERTO M. UNGER)

역자 : 이재승


지식경제, 체제 전반으로 확산하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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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2021/06/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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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국민연금의 위탁운용사 의결권 위임을 반대한다

2019년 제8차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국민연금의 위탁운용사 의결권 위임이 의결되었다. 우선 국민연금이 위탁운용사에 위탁하여 직접 보유분이 없는 510개 사에 대하여, 위탁운용사에 의결권을 위임하겠다는 내용이다.

국민연금이 공적 감시하에서 엄정히 시행해야 할 의결권 행사가 불투명하고,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사적 영역으로 넘겨졌다. 대부분의 자산운용사들은 재벌과 재계의 영향에서 독립적으로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지난 2015년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사건에서도 당시 운용사의 95%가 찬성의견을 낸 바 있다.

자산운용업계는 지배구조상 대부분 재벌계열사이며, 거래계약관계상 재벌과 재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을 위탁운용사에 넘긴다는 이번 기금운용위원회의 결정은 매우 부적절하다. 특히 국민연금 직접보유분이 없는 510개 회사들은 주로 중견, 중소기업으로 지배구조와 회사 운영상 여러 문제점에 노출되기 쉽다는 점에서 우려가 더 크다. 그간 국민연금은 지침과 원칙에 의해 의결권을 시행해왔기에 사안에 따라 최대주주의 견제세력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이제 자본에 예속된 위탁운용사로 의결권이 위임되면 위탁 운용되는 국민연금 지분이 최대주주의 우호세력으로 오용될 우려가 큰 것이다.

제8차 기금운용위원회에서는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은 기 결정한 바 있는 중점관리사안, 예상치 못한 우려사안에 대하여 더 세부적으로 논의하겠다며 경영계의 의사를 반영하여 뒤로 미룬 반면, 경영계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위임은 과감히 의결하였다. 양극화가 심해져 다수 서민의 일상과 노후가 파괴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국민이 피땀흘려 납부한 국민연금을 잘못된 최대주주의 결정에 우호세력으로 동원할지도 모를 위탁운용사로의 의결권 위임은 자본에 대한 일방적 지지선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위탁운용사로의 의결권 위임은 철회되어야 한다. 그 철회 전까지는 의결권을 위임받은 위탁운용사의 의결권 행사가 적절한지 기금본부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며, 모니터링 가운데 수탁자 책임에 위배되는 사안에 대하여는 즉각 의결권을 회수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우리의 노후자금이 공적 신뢰 속에서 운용될 수 있도록 보완해야 할 것이다.

2019년 12월 2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www.pensionforal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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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19/12/02-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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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9일 임기종료를 앞둔 20대 국회의 국민연금 개혁 성과는 국민연금 제도개혁의 시급성과 필요성에 비해 매우 미흡한 모습이다. 2018년 4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이 있었고, 2019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국민연금 개혁과 노후소득보장 특별위원회에서 노동시민사회 다수가 국민연금 제도 개선에 대한 뜻을 모아낸 바 있다. 이견이 없어 다수안, 소수안이 아닌 권고문으로 의견이 모아진 지급보장 명문화 등 국민신뢰제고 방안과 보험료 지원, 크레딧 확대 등 사각지대 해소 방안은 당연히 입법화가 되리라 기대하였으나, 납부재개자에 대한 보험료 지원에 대한 법안 단 한 건만 처리되었을 뿐이다. 국민연금 개혁과 관련하여 발의된 다수의 법안은 이제 20대 국회의 임기가 종료되면 자동 폐기될 예정이다.   

 

국민연금 제도개혁은 현재의 국민과 미래의 국민의 삶 모두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정책과제이다. 특히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긴급한 국민연금 제도개혁의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국민연금 가입과 보험료 부과는 경제활동과 노동시장에 기반하고 있는데, 코로나 19는 그 기반에 직접적 타격을 가했다. 지난달 통계청에서 발표한 3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작년 3월 대비 취업자가 19만 5천명이 줄고, 비경제활동인구는 51만 6천명이 늘었으며 일시휴직자는 126만명 폭증하여 역대 최고치인 160만 7천명을 기록했다. 일시휴직자가 한 달 안에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면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같은 고용절벽의 터널로 진입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영세 자엉업자, 임시일용직, 특고노동자 등 노동시장 취약계층이 받을 충격이 더욱 크다. 코로나 19로 인해 경제활동 및 노동시장에 직결되어 있는 국민연금 등 4대 보험의 사각지대 문제는 더욱 심화될 위험성이 크다. 

 

코로나 19로 인한 위기에 대한 대응의 필요성을 국민 다수가 공감하고 있다. 정부는 대응책으로 4대보험 감면 및 유예 대책을 시행하였고,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였다. 실업안전망 강화를 위해 전국민 고용보험으로 제도개혁도 추진 중이다. 국민연금 제도개혁 역시 궤를 같이 해야 한다. 

 

무책임한 보수정권의 지난 시간동안 국민연금 제도개혁은 소위 폭탄돌리기로 뒤로 미뤄지며 제도개혁의 필요성이 누적되어 왔다. 코로나 19로 인한 고용위기는 국민연금 제도개혁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높이고 있다. 노동취약 계층은 사각지대 해소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현재의 빈곤이 노후빈곤으로 이어지고, 노후소득격차는 더욱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제도개혁의 시급성은 분초를 다투는데, 만일 20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면 이후 21대 국회에서 처리되기까지 원 구성과 법안 발의로 수개월이 또 소요되며 지연될 것이다. 

 

20대 국회는 남은 시간동안 더 이상 국민연금 개혁을 폭탄돌리기로 뒤로 미루지 말고 개정안을 처리, 의결해야 한다. 그동안 필요성이 누적된 노후소득보장에 대한 법안의 처리가 필요하다. 특히 현재의 위기로 처리의 필요성과 시급성이 커진 국민연금 사각지대 해소 방안과 제도의 신뢰성을 높일 지급보장 명문화 등 국민신뢰제고 방안은 이미 이견이 없이 2019년 8월 경사노위 연금특위에서 권고문으로 담아낸 내용으로, 20대 국회의 신속한 처리가 필요하다.  

 

국민연금법 개정안 의결은 단순히 국민연금 제도의 개혁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안전망 강화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연금행동과 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 국민연금지부는 5월 19일부터 29일,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20대 국회의 국민연금법 개정안 처리를 마지막까지 촉구하고자 한다.   

 

2020년 5월 18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www.pensionforal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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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020/05/18-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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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요청] 제4회 신진연구자 지원사업
개최

일시, 장소 : 12. 10. (목) 15:30,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오프라인 참여신청: https://forms.gle/YPUyNHREHBj5GMdK7
생중계 –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채널: https://bit.ly/pensionforall

취지와 목적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은 연금 공공성에 대한 전문연구인력 형성에 기여하고 신진연구자들의 연금정책 관련 연구활동을 지원하고자 2017년부터 공적연금 학술제를 개최해왔습니다. 올해도 제4회 신진연구자 지원사업으로 를 개최하여 노후소득보장 및 공적연금 분야에 뜻있는 연구자를 지원하고자 합니다.
이번 신진연구자 공적연금 학술제에서는 프랑스, 러시아 등 해외 연금개혁 사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질 예정입니다. 이번 학술제가 공적연금 연구를 풍성하게 하는 장으로 자리매김 하기를 기대하며 귀 언론사의 취재와 보도를 요청합니다.

개요
행사제목: 2020년 신진연구자 공적연금 학술제
일시 및 장소: 2020년 12월 10일 목요일. 오후 3시 30분, 참여연대 2층 아름드리홀
프로그램
좌장: 이찬진 공동집행위원장
발제1. 2018년 러시아 연금개혁 정책네트워크 구조변화 실증분석 : 사회연결망 분석기법 적용, 이정민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전공 박사수료
발제2. 프랑스 마크롱 정부의 연금개혁안이 공적 연금 체계에 미칠 영향에 관한 논의 및 시사점, 온명근 파리13대학 경제학 박사수료
토론자
정해식(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공적연금연구센터 센터장)
한신실(국민연금연구원 부연구위원)
김윤영(경기연구원 연구위원)
윤세영(국민연금지부 정책위원)
주최 :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비판과 대안을 위한 사회복지학회, 한국산업노동학회, 사회공공연구원
후원 : 민주노총 국민연금지부
오프라인 참여신청 : https://forms.gle/YPUyNHREHBj5GMdK7
온라인 생중계 :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유튜브 채널(https://bit.ly/pensionfo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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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20/12/0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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