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 대학가의 “짱”을 꼽으라면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록 가수 밥 딜런이나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를 들 수 있다. 이들과 함께 대학가에서 비슷한 인기를 누린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있었다. 바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스파이더 맨’이다.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고, 뛰어 내린 마천루는 뉴욕 맨해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가 뛰고, 오르내리던 맨해탄에 오늘날의 스카이라인이 형성되는데 약 120여년 정도 걸렸다.
19세기 뉴욕시는 격자형 가로망을 창조하며, 상수와 하수시설, 공원을 조성하며 기반시설 정비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마스터 플랜 없이 추진하는 도시계획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자, 진보적 사상가들의 노력으로 더러운 주거조건을 방지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임차인 주택법(1901)이 제정되었다. 더 나아가 ‘1916 조닝’을 제정해서 ‘뉴욕 스타일’ 또는 ‘웨딩 케이크’ 형태라는 고유명사로 불리우는 맨해탄 초고층 건축 형태를 주형해 냈다. ‘1916조닝’은 뉴욕에서 탄생하여, 미국의 각 도시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전파되었다. 한국에도 일제식민지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등장하여 오늘날 까지 한국 도시계획 규제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인연을 갖고있다. 뉴욕시 초고층 건축의 진화를 이룬 ‘1916 조닝’은 계속 발전하여 21세기 각국의 글로벌 도시형성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20세기의 유물로 기억될 것인가?
트리뷴 빌딩 vs 화신백화점
2018년 8월 뉴욕 맨해탄의 초고층 건축 신호탄을 쏘아 올린 기원지를 답사하기 위해서 시청역 주변 답사에 나섰다. 브로드웨이가 시청공원과 만나면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그 접점에1899년 시청사를 마주보고 세워진 391피트 30층 높이의 ‘파크 로우’ 빌딩이 서 있었다. ‘파크 로우’ 빌딩은 빅토리안 양식을 추구했지만, 외장은 고전주의 양식이었다. ‘파크 로우’빌딩은 건물 중간 중간에 수평성이 강조된 장식적인 띠와 발코니가 있어 이채로웠다. 마천루가 하늘높이 치솟으려는 수직성을 저지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읽혀졌다.
시청 앞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맨해탄의 이미지는 주변에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파도치는 은빛 마천루인 포스트 모더니즘 스타일의 ‘8 스프루스 스트리트’빌딩이 보이고 100년 이상 된 ‘울 월쓰’ (Woolworth Building,1913) 빌딩이 브로드웨이를 경계로 서있는 등 초고층 현대식 건물과 오래된 건축물이 시청공원을 둘러싸면서 품위와 세련미를 동시에 풍기는 퓨전 거리풍경이었다.
뉴욕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 1세대는 1876-1900년 기간 중에 로우어 맨해탄 에서 시작했다. 1876년 완공된 둥근 지붕을 씌운 260피트 높이의 트리뷴 빌딩은 조적식 구조물로써 10층 높이의 최초의 상업용 건물이었는데, 엘리베이터를 설치한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뉴욕 초고층 건물의 진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 엘리베이터는 1937년 서울에도 수입되어 지금은 철거돼 사라진 종로 화신백화점에 승객용 승강기로 설치되었다. 서울의 고층건물과 뉴욕 맨해탄의 고층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싯점이 거의 60여년의 시차가 있지만, 오늘날 서울의 모습은 뉴욕 맨해탄과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현대적인 초고층건물이 많이 세워져 있어 선진기술 습득의 모범생임을 실감케 한다.
20세기 들어와 향상된 건설구조기술과 엘리베이터의 효율성으로 초고층 건물이 폭팔적으로 증가하면서 오늘날 맨해탄의 스카이 라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인류사에서 마천루라는 개념을 정립하고 생산하고 전파하는 역동적인 시기로 기록된다.
1916년 조닝 조례 vs 조선시가지 계획령
(왼)플랫 아이론 빌딩, (오)울 월쓰 빌딩
20세기 전환기에 맨해탄은 이미 초고층 건물의 본거지라는 명성을 얻었다. 11층 높이의 타워빌딩(1889), 20층 높이의 플랫아이론(Flatiron,1902)건물이 세워지고, 전례 없는 높이의 792 피트의 네오 고딕 양식인 ‘울월쓰 빌딩’이 세워졌다. 하지만 초고층 건물내 채광과 환기의 확보가 커다란 과제였다. 이를 보장하기위해 전면 도로 폭으로부터의 사선제한이라는 장치가 1916년 뉴욕 조닝 조례에 채택되었다. 1916년 뉴욕의 조닝 코드는 현대적인 도시계획제도의 등장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제도는 가로에 도달할 수 있는 일조량을 확보하기 위해 건축선 후퇴(셋빽)를 규정했고, 대지면적에 대한 비율로 타워를 제한해 자연스럽게 장래 세워질 건물의 형태가 결정되도록 하였다. 1916년 뉴욕 조닝은 맨해탄 초고층 건물의 형태와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낸 아버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16년 뉴욕의 조닝은 미국 도시들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도 전파되어 독일을 포함해 일본에는 1919년 도시계획법, 한국에는 일제 식민지 시기 1934년 ‘조선시가지 계획령’에 채택되어 발전해와 오늘날 한국 도시계획제도의 중요한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시가지 계획령’속에 채택된 지역제는 최저수준의 위생확보에 국한하였기 때문에 뉴욕의 1916년 조닝 만큼의 완성도를 갖추지 몼한 식민지하의 도시계획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1916년 조닝의 엄격한 제약하에서 세워진 대표적인 건축물이 아르데코 양식의 크라이슬러(1930)와 엠파이어 스테이트(1931)빌딩이다. 바야흐로, 20세기 도시문명을 선도하는 맨해탄에 초고층 건물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하였다.
뉴욕의 21세기: 허드슨 야드 vs 세운상가
세운상가
뉴욕 ‘1916 조닝’은 파리,런던,보스톤,시카고와 같은 유럽과 미국의 도시들에서 사용하던 고도한계와는 완전히 다른 독창적인 것으로, 개별 건물과 스카이라인을 3차원 형태로 만들어, 웅장한 형태의 오늘날의 맨해탄을 만들었다.
21세기 들어와 뉴욕시는 새로운 성장의 파고에 금융 혜택과 인센티브 조닝을 적용해 ‘허드슨 야드’ 같은 미개발된 맨해탄 지역이 혁신의 에너지를 흡수케 해 하룻 밤만 자고 나면 천지가 개벽하는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면서 한때 서울의 대표적인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도 뉴욕의 ‘허드슨 야드’ 모델을 적용하여 21세기형 복합 초고층 건물로 다시 솟구쳐 ‘스파이더 맨’이 타고, 오르는 감동을 시민들에게 선사하는 큰 그림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동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 게릴라전에 투신하기 전 남긴 이 문구만큼 카스트로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을 듯하다.
“혁명을 뭔가 섹시한 것으로 만든 사람”
외신들에 따르면 무상 교육ㆍ의료로 대표되는 쿠바식 사회주의를 체험한 쿠바 시민들에게는 “카스트로가 곧 쿠바이자 혁명”이었다. 아흐레 동안 진행된 추모 기간 동안 “내가 피델이다”를 외치며 작별인사를 하는 시민들이 거리를 매웠다고 한다.
반면 카스트로를 바라보는 서구 언론의 시선은 사뭇 다르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8일자 조간 1면에 “무수한 면을 가진 카스트로”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내고, 카스트로가 쿠바를 50년 넘게 통치하며 혁명가에서 독재자로 퇴색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달 27일자에 실은 국제담당 칼럼니스트인 사이먼 티스달의 칼럼을 통해 카스트로를 “게릴라 지도자, 독재자 그리고 완고한 혁명가”라고 평가했다. 티스달은 그러면서 “체 게바라와 함께 혁명을 섹시한 무엇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해석도 덧붙였다.
지난달 26일, 쿠바 하바나에서 카스트로의 사망 소식을 들은 대학생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왼쪽 사진). 그러나 같은날, 미국 마이애미주 쿠바 망명객 밀집 지역에서는 쿠바인들이 국기를 흔들며 기뻐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카스트로가 현대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의 지도자에 불과했지만 169㎞ 거리에 이웃한 세계 최강 미국의 역대 대통령 11명을 상대하며 국제정치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투옥된 게릴라… 체 게바라와 쿠바 상륙작전
카스트로는 1926년 8월 쿠바 동부 오리엔테주 비란의 스페인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5년 아바나대에 입학, 법학을 전공하며 좌파 학생운동에 몸을 담았다. 1947년 쿠바인민사회주의당에 들어가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한 그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글을 읽으며 사회주의 혁명의 꿈을 키워간다.
카스트로는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을 가진 부유한 아버지 덕분에 어린시절 카톨릭학교를 다니며 유복하게 자랐다(왼쪽).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하기 시작한 대학시절의 모습. (사진 출처: http://www.trinity.edu/)
운명의 날을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친미 군사독재정권이 세워진 1952년 그는 반독재 투쟁 선두에 선다. 이듬해 7월 26일 산티아고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면서 바티스타 정권 전복을 꾀했지만 실패하고 15년 형을 선고 받고 투옥된다. 쿠바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인 ‘7월 26일 운동’일의 유래다.
직접 변론에 나선 카스트로가 “역사가 나의 무죄를 증명할 것”이라고 밝힌 당시 법정진술은 역사를 바꾼 명 연설 중 하나로 꼽힌다. 운명적 만남도 곧장 이어진다.
정권이 안정됐다고 판단한 바티스타는 1955년 카스트로를 특별사면 한다. 카스트로는 정치적 탄압을 피해 멕시코로 망명하고, 이곳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의 젊은 의사 체 게바라를 만난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무장게릴라 투쟁은 20세기 혁명사의 동화같은 이야기다. 이같은 수많은 사진은 그들의 무장투쟁을 더욱 로맨틱한 것으로 이미지화했다.
두 사람은 이듬해 11월 상업용 요트 ‘그란마’호에 몸을 싣고 82명의 ‘카스트로 혁명군’의 일원으로 쿠바로 잠입한다. 하지만 상륙 과정에서 교전으로 대부분이 희생되고, 피델 카스트로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 생존한 10명은 내륙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시작한다.
2년 여에 걸친 무장투쟁 후 이들은 1959년 1월 1일 수도 아바나를 접수했다. 카스트로를 특별사면 했던 바티스타는 포르투갈로 탈출한다. 카스트로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완고한 혁명가… 교육 개혁과 의료 보험 국영화
카스트로는 농지개혁, 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혁명조치를 내걸었다. 1959년 5월 농장 주가 가지고 있던 농지는 농민들에게 무상 배분됐다. 카스트로의 아버지 안젤 카스트로가 평생 일군 비란의 농장도 당시 몰수 대상이 됐다.
교육 개혁과 의료보험 국유화 등의 정책을 펼치며 무상교육·무상의료 시스템도 만들어나갔다. 쿠바는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사를 해외에 파견하는 나라다. 유아사망률은 1,000명당 4.7명으로 미국보다도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 수립 직후 미국을 방문하는 등 국제관계에서도 유연하게 움직이기도 했다. 카스트로는 대중 연설을 통해 “새로운 쿠바는 문명적이고 민주적 정부체제를 갖출 것”이라고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과의 관계는 1961년 3월 미국이 쿠바 내 반란군을 지원한 ‘피그스만 침공 사건’이 발생하면서 완전히 무너졌다. 냉전 상황에서 쿠바는 소비에트연방(구 소련)과 급속히 가까워진다. 카스트로는 그 해 4월 쿠바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했고, 12월에는 자신은 마르크스ㆍ레닌 주의자라고 선언했다.
1963년,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당시 후르시쵸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마주 앉은 카스트로. 당시 카스트로는 왼쪽 손목에 두 개의 로렉스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이 중 하나는 쿠바 현지 시간을 표시했다. 자신이 항상 쿠바 현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적 제스추어였다.
1962년 핵탄두를 쿠바에 배치할 것을 소련에 요청한 ‘쿠바 미사일 위기’로 카스트로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맞서면서 전세계를 ‘3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의 위기상황을 맞기도 했다.
1960년대 쿠바 아바나는 사회주의 운동의 성지였다. 전 세계 좌파 진보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성지 순례하듯 하바나를 찾았다. 프랑스의 지식인 부부 장 폴 샤르트르와 시몬느 보브와르도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찾아 1960년 쿠바를 방문했다.
이들은 전세계 사회주의자가 고대하는 혁명을 이뤄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실험에도 성공하길 기원했다. 카스트로는 “쿠바에서 불의와 불평등은 사라질 것”이라고 공언하며 전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대부로 자리매김해 나간다. 특히 중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좌파의 맏형 노릇을 했다.
2014년 1월 쿠바에서 중남미카리브해국가연합(CELAC)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 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각국 정상들은 앞다퉈 그를 찾을 정도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이어갔다.
독재자… 항구 개방이 쇄락 신호탄
카스트로는 하지만 쿠바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하며 장기 집권에 나선다.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고, 언론ㆍ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1959년부터 1976년까지 내각책임제 하의 총리를, 1976년부터 2008년까지 국가평의회 의장을 지내며 반세기 가까이 최고 통치권을 행사했다. 권력을 동생 라울에게 이양한 뒤에도 ‘헤페 막시모(jefe maximo•최고지도자)’로 남아 있었다.
경제도 좀처럼 활력을 찾지 못했다. 1962년 시작된 미국의 금수조치로 무너진 경제는 끝내 다시 세우지 못했다. 쿠바 경제는 냉전 시기 소련의 원조에 의존했고, 이후에는 중국에 도움을 받아야 했다.
1980년 4월, 미국 마이애미주의 한 해변에서 이민수속을 기다리는 쿠바 난민들.
불만을 품은 쿠바인들은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보트에 몸을 실었다. 카스트로 정부도 항구 개방으로 맞불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1980년 전과자 등 12만5,000여명을 미국으로 방출한 ‘마리엘 보트리프트’ 사건은 쿠바 쇄락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쿠바 혁명 후 지금까지 쿠바를 떠난 사람이 1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카스트로는 건강상의 이유로 지난 2008년 은퇴한 이후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올해 4월 19일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죽음을 예견한 듯 “곧 90세가 된다. 아마 이번이 내가 이 홀에서 말하는 마지막 순간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상의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하다면,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
카스트로는 지난 4일 자신의 고향이자 혁명의 발원지인 산티아고 데 쿠바의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에서 영면했다. 19세기 쿠바 독립영웅이자 그가 평생 존경했던 호세 미르티의 무덤 앞에 묻혔다. 묘지 옆에는 1953년 7ㆍ26운동 당시 그와 함께 몬카다 병영을 습격하다 숨진 반군 병사들의 묘지가 있다.
2015년, 쿠바를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과 면담하는 카스트로. 그가 생전에 즐겨 입었던 삼선의 파란색 아디다스 점퍼가 인상적이다. (사진 출처: AP)
카스트로는 생전에“쿠바의 정체성은 단지 공산주의 이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사상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마르티는 독립 투쟁을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국민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며 소외된 약자를 챙겼다. 카스트로는 마르티의 철학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 각종 정책을 통해 실현하려 애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60년간 어긋났던 미국과 쿠바의 관계에 화해의 다리를 놓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역사는 한 인물이 그의 주변 사람들과 전 세계에 미친 엄청난 영향을 기록하고 판단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프랑스 대선의 유력 후보인 에마뉘엘 마크롱은 지난해 11월 대선 출마 공식 선언을 앞두고 혁명(R´evolution)’이라는 책을 냈다. 1977년생으로 40살이 안 된 젊은 정치인과 어울리는 제목이다.
하지만 마크롱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프랑스 대선에 도전장을 던진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온건한 성향을 보인다. 극우 성향의 마린 르펜(국민전선) 후보에 맞서 ’중도’에 닻을 내리고 대선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올해 유럽에는 네덜란드(3월), 프랑스(4월), 독일(9월)이 선거를 앞두고 있다.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마크롱 전 경제장관이 지난 2월 프랑스 중부 리용에서 유세를 하며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사진 출처: AFP)
민심을 잃은 집권 사회당을 뒤로하고 좌우를 아우르겠다며 지난해 ’앙마르슈(En Marche·전진)’을 창당한 마크롱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르펜을 결선 투표에서 꺾을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다.
르펜의 돌풍에 우려를 표하던 유럽 사회와 언론도 39살 젊은 후보의 혜성 같은 등장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로 치면 최근 ‘중도’를 내세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선전하는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비슷한 전략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좌우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중도노선은 언제나 어려운 실험이다. 극단주의로 치닫고 있는 프랑스 대선에서 마크롱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4월 프랑스 대선은 중도우파 피용(맨 왼쪽), 극우파 르펜(가운데), 중도파 마크롱의 3파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피용은 가족의 세비횡령 스캔들로 고전하고 있고, 르펜은 극우파 집권을 우려하는 여론에 의해 당선 가능성이 낮다. 현재로서는 이래저래 마크롱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다.
올랭드정부에서 경제부장관…친기업 성향
마크롱은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다. 그는 파리정치대학과 국립행정학교를 나온 전형적인 엘리트로 투자은행 로스차일드에서 일한 은행원이다.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대통령 부실장으로 발탁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였고, 2014년 36살의 나이로 경제산업부 장관이 됐다.
‘올랑드 키드’로서 그는 사회당의 금기를 건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대통령실 부실장 당시 “상위 1%에게 75%의 고세율을 부과하겠다”던 올랑드 대통령의 대선공약을 백지화하고 고용을 늘리는 기업에 400억 유로(약 49조9940억 원) 세금을 감면해주는 ‘책임 협약’을 추진했다.
진보 정당인 사회당 정부의 장관임에도 주 35시간 노동을 비판하며 노동시간 연장을 밀어붙였고, 해고 조건 완화 등 친기업 정책을 추진하며 노동계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사회당의 상징과 같은 정책이기도 하다. 이에 공개 행사에서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노조원들이 던진 달걀에 머리를 맞고, “꺼져”라는 야유를 듣기도 했다. 경제 활성화 대책으로 파리 샹젤리제 등 관광지구에 있는 상점의 일요일, 심야영업 제한을 완화하기도 했다.
2014년 9월, 엘리제궁에서 경제장관 시절의 마크롱이 생태, 지속가능성장 장관인 세골린 루야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가장 왼쪽의 올랭드 대통령은 루야얄과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 결별했었다.
그는 티셔츠를 입고 시위하는 노동자에게 “정장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해 분노를 사기도 했고, 젊은이들에게 “백만장자가 되려고 노력하라”고 권하는 등 좌충우돌 행보를 보였다.
결국 친기업 정치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사회당 내부에서 강한 반반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우클릭’에 영국 <가디언>은 “사회당 옷을 입은 우파 늑대”라고, 프랑스 <르몽드>는 “좌파에겐 짜증 나는 아이러니, 우파에겐 호기심”이라고 평가했다.
경제-보수, 사회-진보…중도전략
하지만 이러한 그의 전략은 그를 단숨에 대선후보의 지위에 올렸다. 이에 그는 독자 노선을 택했다. 마크롱은 장관 재직 중이던 지난해 4월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앙마르슈를 창당하고 8월에는 장관직을 사임한 뒤 대선 경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전진(En Marche)은 정당이라기 보다는 정치운동단체에 가깝다. 사진은 마크롱이 지난 4월, 전진 출범대회에서 연설하는 모습.
마크롱 전략은 ‘경제는 보수, 종교·평등·이민 등 사회 현안에 대해 진보’다.
유럽연합(EU)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며 르펜과 각을 세우고 있다. 르펜으로 대표되는 극단주의의 물결을 막고, 보수·진보 모두를 만족시키겠다는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로 포지셔닝 한 것이다.
실제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새로운 정치운동에 도전하겠다”고 중도에 깃발을 꽂자, 우파 쪽에서 그에게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국민전선 등 극우세력의 돌풍에 우려를 표하거나 기성 정치인들에게 염증을 느끼는 사회당, 공화당 중도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중이다.
25살 연상과 결혼
그는 정치 이력보다 25살 연상의 아내인 브리지트 트로뉴의 존재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17살이었던 마크롱은 3명의 자녀를 둔 40살의 교사 트로뉴를 처음 만난 뒤 적극적인 구애로 2007년 결혼에 이르렀다.
마크롱은 현재 7명의 의붓손자가 있기도 하다. 그는 지난해 <파리마치> 인터뷰를 가지며 부부가 해변을 걷는 사진을 공개하는 등 자신의 러브스토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25살 연상의 여선생님이었던 브리지트 트로뉴와의 로맨스는 마크롱의 주요 득표요인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위장결혼이라는 풍문도 흘러나온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IFOP’와 ‘피 뒤 시알’이 3월10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르펜의 1차 투표 지지율은 26%, 마크롱의 지지율은 25.5%를 기록했다.
우파의 유력 후보인 프랑수아 피용 전 총리(공화당)가 세비 횡령 혐의와 불법 정치자금 의혹에 휩싸이면서 추락하는 가운데 마크롱은 르펜을 막을 대안으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극우세력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르펜이 확장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크롱이 2위로 결선 투표에 오를 경우 프랑스 대통령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문제는 그의 중도전략이 계속 위력을 발휘하느냐에 달렸다. 중도 노선은 일단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쉬우나 복잡하게 꼬인 개별 사안에서 “이도 저도 아니다”, “애매모호하다”는 공격을 받으며 지지를 잃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장 마크롱은 지난 2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방문해 프랑스 식민통치가 “반인권적 범죄”라고 했다가 보수파의 집중 공격을 받고 사과했다. 피용은 “우리 역사에 대한 이런 증오와 회개는 공화국의 대선 후보로서는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도저도 아니거나…혹은 미래의 대통령?
파리정치대학의 뤼크 루방 교수는 <파이낸셜 타임스>에 “마크롱은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전략 때문에 덫에 빠질 것이다. 아무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국내에도 출간된 <극단적 중도파>에서 영국 좌파 지식인 타리크 알리는 “내가 유럽 및 북아메리카 주류 정치에 이름 붙인 ‘극단적 중도파(extreme centre)’는 바로 이렇게 체제에 봉사하면서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겁 많고 고분고분한 정치인들을 뜻한다”고 중도 노선을 비판하기도 했다.
현직 대통령인 올랭드는 낮은 인기때문에 재선을 포기했다. 그는 오랜기간 마크롱의 멘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새정치’라는 기치를 내걸고 중도 노선을 취한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시행착오를 겪고, 최근 안희정 지사가 ’선의’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연상되기도 한다.
물론 기성 정치인과 차별화된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를 가진 마크롱의 돌풍은 계속될 전망이다. 세계적 석학 자크 아탈리는 과거 마크롱을 두고 “정말 똑똑한 젊은이”라며 “언젠가 대통령이 될 재능이 확실히 있다고 믿는다.”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정치가 목숨을 요구할 수 있다고 깨달았다”고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해왔다. 실제로 그는 국민전선에서 가장 열심히, 독하게 일해온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유럽 우파 정치그룹의 리더로 성장…아버지 제명키도
르펜이 세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된 계기는 그는 2012년 대선과 2014년 5월 유럽의회 선거였다. 2012년 대선에서 17.9%의 득표로 3위를 기록하는 돌풍을 일으킨 그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국민전선을 프랑스 제1당으로 끌어올렸다.
반(反)유럽연합(EU)과 유로화 탈퇴, 반이민정책을 내세운 국민전선이 24.8%득표율로 중도좌파 집권 사회당(PS)과 중도우파 야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을 제쳤다. 당시 유럽은 이를 두고 ‘쓰나미, 허리케인, 빅뱅’등으로 표현하며 당혹함을 감추지 못했다.
2015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유럽 우파 그룹의 리더”라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명’ 명단에 올리기도 했다.
마린 르펜과 그녀의 조카딸인 마리옹 르펜(오른쪽). 국민전선을 창당한 장 마리 르펜의 손녀이기도 한 마리옹 르펜은 빼어난 미모로 국민전선의 ‘포스터걸’로 주목을 받았으며, 프랑스 역사상 가장 어린 22살 때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또한 그녀는 마린 르펜 이후 당권을 넘겨받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사진은 2015년 지방선거에서 의외의 선전을 하자 함께 기뻐하는 모습. (사진 출처: BBC)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철저히 아버지와 선긋기를 통해 지금의 성공을 이뤘다. 2011년 당 대표 취임 뒤 그는 ‘악마’ 이미지를 세탁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르펜은 르펜이고 마린은 마린이다. 나와 아버지의 역사관은 다르다” “국민전선이 프랑스인 전체에 호소하는 거대 대중정당이 되길 바란다”며 아버지의 극단주의와 거리를 뒀다.
두번 이혼하고 세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기도 한 그는 성차별주의자, 반유대주의자라고 불린 아버지의 악명을 지우면서 반이민, 반이슬람을 중심 의제로 옮겼다. 당내 인사들이 인종차별 발언을 하면 징계를 내렸고 급기야 2015년 5월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발언을 반복한 아버지를 당에서 제명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프랑스 최악의 경제 위기 속에서 세계화 반대, 보호 무역주의, 복지 확대 등 ‘좌클릭’ 정책을 연이어 내놓았고 재벌을 맹렬히 공격하며 노동계급과 실업자들의 지지를 끌어안았다. 20~40대 정치 신인들을 과감히 수혈해 ‘기성 엘리트 정치인 대 젊은 피’의 구도도 만들었다. 국민전선이 선거마다 선전하고, 그가 유럽 우파의 새로운 리더로 평가받게 된 배경이다. 여기에 연이은 유럽의 테러로 고조된 반이슬람, 반이민 정서가 르펜의 뒤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세계는 그의 유연한 행보에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르펜은 2010년 이슬람교도의 거리 기도를 두고 ‘나치의 프랑스 점령’에 비유해 재판을 받기까지 했고,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트럼프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밝혔다.
아버지보다 다소 유연할 뿐, 극우파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정체성과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의 본질은 그대로라는 시선이다.
기득권 정치에 대한 불만이 정치적 동력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과 르펜 열풍 등 소수의 극단적 주장으로 치부하던 세력의 부상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정당과 언론과 지식인들도 각각 엇갈린 분석을 내놓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부상이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모순이 곪을 대로 곪은 지금의 세계를 자양분으로 삼아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에서 인용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19세기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뚫고 나왔다. 지금의 극우주의 열풍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성을 찾을 수 없지만, 그 배경에는 세계화, 소득 불평등, 테러의 공포 등 사회경제적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는데 유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2016년 4월, 마린 르펜의 연설회에 참석한 한 지지자가 그녀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지지 피켓을 들고 있다.
주류 정치인들과 엘리트로 향하는 성난 민심을 트럼프나 르펜 등이 적극 대변하는 것이다. 르펜은 쉬운 문장으로 “정치 엘리트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이민자가 아니라 프랑스인을 위한 복지제도가 필요하다” 저학력·저소득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분노를 자극하고 있다. “똑같이 낡은 인물들, 똑같이 낡은 공약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르펜의 앞에서 프랑스 기성 정치인들은 쩔쩔매는 상황이다. 트럼프에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 역시 ‘엘리트·기득권 세력’으로 몰렸다.
문제는 르펜의 선전이 그의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똘레랑스의 프랑스를 이민자 혐오, 반이슬람주의 등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사회 역시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흑인과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여 있다. 노동자들의 분노를 엉뚱한 데로 돌리고, 세계가 힘들게 쌓아 올린 민주주의와 인권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헬조선’이라는 자조 속에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로 요동치는 한국 사회 역시 “한국의 트럼프’., ‘한국의 르펜’은 없을 것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각 정당의 대선 후보로 유력한 문재인,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심상정 5자 구도로 조사하면 지지율은 12%까지 뛰어오른다. 같은 보수 계열 후보인 유승민(5%)을 2배 이상 따돌렸다.
적어도 자유한국당 지지자를 비롯한 보수층에게 그는 진짜 좌파 세력과 대결할 마지막 ‘스트롱맨’이자 ‘희망’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성완종 게이트에서 기사회생
몇 달 전만 해도 홍 지사의 이런 행보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1억원을 받았다는 혐의에 휘말려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도지사직은 물론이고 정치생명까지 장담할 수 없는 처지로 몰렸다.
경남 도민들은 그의 독선적 도정운영과 ‘성완종 리스트’ 연루를 문제 삼아 주민소환까지 추진했다. 모든 것은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다. 주민소환은 겨우 0.31%의 유효서명이 부족해 무산된다. 2심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한다.
‘만사구비지흠동풍(萬事俱備只欠東風).’
홍 지사는 2심 승소 후 페이스북에 이런 고사를 올린다. 적벽대전을 앞둔 제갈량이 주유에게 ‘모든 조건이 갖춰졌고 가장 중요한 동풍만 남았다’고 한 말이다.
무죄 판결이 그에게 진짜 ‘동풍’으로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홍 지사는 ‘동풍’이라 믿고 불붙인 화살을 잰 활시위를 당겼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저승에 가면 성완종이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다”고 했고, 자신이 연루된 것을 친박의 음모라고도 했다. 2015년 4월 자살한 성완종의 메모에는 ‘홍준표 1억’이라는 메모가 남아 있었다. (사진출처:http://m.kukinews.com/)
그는 ‘천하대란에는 크게 통치해야 한다’는 대란대치(大亂大治)의 지혜를 발휘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절망과 무력감에 빠진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겠다”고 밝혔고, 딱 한 달하고 이틀 뒤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홍 지사는 “내가 밋밋한 대선후보에 머물렀으면 나한테 기회가 없었을지 모른다”며 성완종 게이트 연루가 일종의 기회가 됐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성완종 리스트 유죄 시 노무현 전 대통령처럼 자살을 검토하겠다” “문재인은 별 거 아니다. 토론하면 10분 안에 제압한다” 홍 지사는 본래도 좋게 말하면 거침없는 화법, ‘막말’로 유명했지만 대선 출마를 전후해서는 더 거칠 것 없다는 분위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빗대 ‘홍 트럼프’라고 불릴 정도다. 지난 24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인 김어준은 “지사님이 출연하자 욕 문자가 폭발하고 있다, 역대 최고다”라고 말했다.
홍 지사는 맞받아친다. “그거는 집에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욕을 하니까 전혀 괜찮다. 트럼프가 그렇게 비호감이라도 대통령됐다.”
몸으로 기억하는 가난
“(당 대표가 돼) 이제 중심에 섰지만 치열했던 ‘변방 정신’을 잊지 않겠다.”
2011년 홍 지사가 한나라당 당 대표에 선출됐을 때 한 말이다. 홍 지사는 늘 본인이 권력과 힘도 없고, 조직도 없고, 변방에 머물러 왔다고 말한다.
그는 ‘흙수저’였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가난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친 몸과 아픈 시간으로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서민대통령’을 표방할 수 있었던 이유다.
홍 지사는 1954년 12월 경남 창녕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당 800원을 받고 현대조선소 앞 백사장에 적재된 철근 쇳조각을 지키는 일을 했다.
어머니는 ‘달비’(부녀자의 머리카락) 장사를 했다. 어머니가 고리채를 갚지 못해 사채업자에게 길거리에서 머리채를 끌려 다니는 광경도 목격해야 했다.
1. 1977년 2월 고려대 법대 행정학과를 졸업할 당시의 모습 2. 어린 시절 누이와 함께 찍은 사진. 3. 중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4. 고대 법대 1학년 시절의 모습. (사진출처: http://m.kukinews.com/)
낙동강변 하천 부지에 살아 여름철 장마 때면 집을 떠내려 보내야하기도 했다. 양식이 없어 3일 동안 굶기도 했다고 한다. 먹고살 게 없어 가족들이 리어카 하나에 전 재산을 싣고 영남 일대를 돌아다녔다.
가난했지만 공부에 뜻을 두고 큰 도시인 대구로 올라가 영남중에 진학한다. 점심 도시락을 싸 갈 형편이 못 돼 수돗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성적이 좋았지만 당시 명문고로 꼽히던 경북고로 가지 않고 장학금을 받기 위해 영남고로 진학한다.
육군사관학교 진학도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장물인 비료를 매수했다는 누명을 쓰는 것을 보고 법대에 진학해 검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고려대 법대에 진학해서도 일주일 내내 과외를 해서 겨우 학비를 마련했다. 그런 와중에 잠시 운동권에 몸담기도 했다. 여러 차례 총학생회의 지하 유인물을 작성해주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죽도록 맞고 풀려나기도 했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 때는 선후배 돈을 모아 격려 광고를 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대학 시절에는 학교 구내 은행에서 일하던 여직원에게 반해 프로포즈를 했고,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기도 한다.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의 모습. 홍준표 지사의 아내는 당시 은행의 말단직원이었다.
사법시험에도 몇 차례 응시했지만 합격은 하지 못했다. 시험에 떨어진 어느 겨울밤 아버지가 있는 울산에 내려갔다가 바닷가 모래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 있는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의 등판을 보고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단기사병 복무까지 마친 뒤인 1982년, 스물여덟 살의 일이었다.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세
청주지검 초임 검사 시절 그는 이름을 ‘판표’(判杓)에서 ‘준표’(準杓)로 바꾼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이주영 당시 청주지법 판사가 ‘칼 도’자가 들어가는 이름은 좋지 않다고 개명을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개명이 쉽지 않았던 터라 이주영이 당시 지원장에게 ‘판관의 표상’이라는 이름 때문에 판사처럼 행동한다며 설득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침 새로 바꾼 ‘세인의 표상’이란 뜻의 이름은 이후 그가 검사로서 유명세를 탈 것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1988년에는 전두환의 외조카인 김영도가 모 기업인에게 석방을 조건으로 뇌물수수를 받은 사실을 적발해 구속 기소했다.
광주지검 강력부 시절에는 각종 협박과 로비에도 굴하지 않고 광주지역의 조직폭력배인 국제PJ파를 일망타진한다. 그는 지역정치인, 언론까지 나서 ‘조폭’을 비호할 정도로 복잡하게 연계돼 있었던 이 사건 수사에서 큰 고생을 겪는다.
그러고 나서 ‘검사 혼자 뛰어선 안 된다’며 언론이나 여론을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또 그때부터 술집과 유흥가에 조폭이 연관된 것을 알고 나서는 여성 접대원이 나오는 술집은 안 가게 됐다고 한다.
서울지검 검사 시절에는 정덕진의 ‘슬롯머신 사건’을 맡아 ‘6공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을 구속 기소해 명성을 얻었다.
검사시절, 홍준표는 슬롯머신 비리와 엮어 ‘6공의 황태자’였던 박철언 전 의원을 구속기소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검사시절의 모습(왼쪽)과 박철언 전 의원.
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인공 강우석 검사가 그를 모델로 한 것이 알려지면서 ‘모래시계 검사’라는 애칭이 붙기도 했다. 그의 칼날 앞에 당시 이건개 대전고검장, 이인섭 전 경찰청장, 엄삼탁 병무청장, 천기호 치안감 등이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법무부의 수뇌부와 선배 검사를 거침없이 수사하는 ‘소신 검사’의 표상이 됐다. 물론 당시 김영삼 정권의 6공 세력 청산 의도와 맞아떨어진 것으로 홍준표 개인의 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이 수사로 검찰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홍 지사는 정형근의 소개로 안기부 파견 검사로 잠시 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검사직을 던진다. 1996년 김영삼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해 15대 총선에서 송파갑에 출마해 당선되지만 곧 1999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한다.
2001년 다시 동대문을 재보궐선거에 출마, 당선되고 18대까지 같은 선거구에서 내리 4선을 이어간다. 17대에서는 탄핵 역풍도 뚫고 서울 동북권에서 홀로 살아남는 기염을 토한다.
보수주류와는 다른 컬러
정치인으로서 그가 내놓은 정책을 보면 보수 주류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이중국적 보유자의 병역 회피를 막는 국적법과 재외동포법 개정을 이끌었다. ‘반값 아파트’ 법안을 발의하고 종합부동산세 완화를 반대하기도 했다.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면제해주고 부유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더 내게 하는 법안을 내기도 했다.
2006년에는 당내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출마해 오세훈 후보에게 패배하고, 2007년에는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 뒤 이명박 지지로 돌아서 당 클린정치위원장으로 BBK 의혹 대응을 총괄지휘했다.
김경준의 ‘기획입국설’을 주장하며 가짜 편지를 흔들기도 했다. 당시 김경준과 이명박의 관계를 추궁하는 기자의 질문에 ‘식사했어요?’라는 엉뚱한 말로 받아치며 답변을 회피해 공분을 자아내기도 했다.
2007년 대선에서 홍준표 클린정치위원장을 맡아 BBK연루의혹을 받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온 몸으로 막아냈다. 사진은 그가 2007년 11월 한나라당사에서 각종 문건을 제시하며 기획입국설을 제기하는 모습.
이명박 정권 출범에 즈음해 원내대표를 맡기도 했지만 정권 창출 공로에 비하면 크게 중용받지는 못했다. 이명박 정권과 당 내부를 향해서도 서슴없이 ‘막말’을 내놓는 탓에 ‘좌충우돌 홍두깨’ ‘통제가 안 되는 사람’ 취급을 받기도 했다. 급기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안상수와의 당 대표 경쟁에서 밀려나기도 했다.
2011년 재수 끝에 당 대표직에 올랐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이은 서울시장 재보선 패배,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 등에 휘말려 넉달여 만에 물러나야 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투표율 25.7%가 ‘사실상 승리’라고 발언했다가 각종 패러디에만 올랐다. 급기야 19대 총선에서 패배해 정치인으로서 마지막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스스로도 트위터에 정치를 접겠다는 듯한 발언을 올렸다. “30년 공직생활을 마감합니다. 이제 자유인으로 비아냥 받지 않고 공약으로부터도 해방되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바로 다음날 ‘정계은퇴가 아니라 공직생활 마감을 뜻한 것’이라고 해명하기는 했지만.
총선 패배 후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김두관 경남지사가 대선 출마로 사임하자 홍 지사는 경남지사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범야권 단일후보인 권영길을 누르고 당선된다.
학교 무상급식 예산 지원을 중단하고 진주의료원을 폐원시키는 등 독선적 행보로 비난을 받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3년 6개월간 1조4000억원에 이르는 채무를 갚고 흑자재정으로 전환했다며 자랑스러워한다. 도청 들머리에 ‘채무 제로’를 기념하며 사과나무를 심기도 했다.
독설? 또는 막말?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가 결국은 풍차를 깨버렸다.”
슬롯머신 수사 당시 한 신문은 홍 지사를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그 즈음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돈키호테처럼 진실하고 가식 없게 살고 싶다”며 별명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모래시계>의 강우석 검사(박상원)보다는 <넘버3>의 마동팔 검사(최민식)에 가깝다고 말한다.
“한 번 물었다 하면 표범처럼 놓지 않는” 거칠고 집요한 검사, 좌고우면하지 않고 목표물만 노리는 검사다. “검사에게 왜 변호사 자격증을 줍니까. 옷 벗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현직에 있을 때 소신껏 일하라는 거죠. 검사는 엉뚱한 것으로 고민할 필요 없어요.”
대학 시절 그의 별명은 ‘무계’였다고 한다. 기발하고 황당한 생각을 많이 한다 해서 ‘황당무계’가 줄어 ‘무계’가 됐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위아래 격의 없이 잘 어울려 ‘무계’가 굳어졌다고 한다.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입담이 탁월해 좌중을 압도한다고 전한다. 코미디언 시험에도 응시하려 했다고 했을 정도다.
이런 순수하고 투박한 모습의 어딘가에는 ‘망언’에 가까운 독설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성정과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거울처럼 비추는 것 같기도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망언도 처음이 아니다. 이미 당 대표 시절 “자기 성깔에 못 이겨 그렇게 가신 분”이라고 했을 정도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을 향해서는 ‘꼴같잖은 게 패버리고 싶다’고 했고, 단식 농성 중인 도의원에게 ‘쓰레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발언은 심각하다. 추미애 의원에게 “넌 일하기 싫으면 집에 가서 애나 봐라”고 했고, 종편 방송국 경비원에게는 “니들 면상 보러 온 거 아니다. 네까짓 게”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속 시원한 사이다 발언이나 풍자는 권력과 재벌을 향해 있을 때 다윗의 ‘돌팔매’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 당 대표 시절 홍 지사는 TV인터뷰에 나가서 “대기업 하면 바로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는 질문에 ‘착취’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던지는 망언이나 폭언은 연못의 개구리에게 돌을 던지는 격이다. 홍 지사의 발언이 못내 불편한 이유다.
‘스트롱맨’은 역시 ‘스트롱맨’과 싸워야 멋있다. 스트롱맨이 약자를 괴롭히는 건, 그가 평생을 싸워 온 조폭만도 못하고 동네 양아치나 하는 짓이다.
보수의 구심점 될까
‘스트롱맨’인 그는 한편 스스로를 종종 ‘약자’로 자리매김한다. 성완종 게이트 연루에 대해서도 “권력이 없는 자의 숙명이고 ‘모래시계 검사’의 업보라고도 생각했다”고 말한다.
“청와대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아직 재판받고 있을지 모른다”고도 말한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비판이나 국민의당, 바른정당과의 연대 시사는 극우보수층으로부터도 공격받고 있다. 상, 하, 좌, 우가 모두 그의 투쟁 대상이다.
어쩌면 ‘약자’이자 ‘스트롱맨’인 그의 정체성과 가장 비슷한 것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다. 자수성가형으로, 내가 다 해 봤으니 믿고 따르라는 식의 리더십이다. 때로 내가 뱉은 이 말과 저 말이 맞지 않고 이런 태도와 저런 태도가 충돌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은 옳다는 신앙에 가까운 믿음이다.
밑바닥 생활을 거쳐 검사가 되고, 조폭들의 ‘죽인다’는 협박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늘 사표를 품에 안고 수사를 했던 시절부터 예고된 성정일 것이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2016년 6월, 채무제로를 기념해 도청 앞에 사과나무를 심었다.(첫번째, 두번째 사진). 그러나 이 사과나무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4개여월 만에 주목으로 교체됐다. (맨 오른쪽 사진). (사진출처: http://www.hani.co.kr)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도 그는 ‘리더십의 교체’를 부르짖었다. “소통과 통합이라는 위선의 가면에 숨어 눈치만 보는 리더십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반대가 두려워 결정을 미루고, 여론이 무서워 할 일도 못 하는 유약한 리더십으로는 지금의 난관을 극복할 수 없다.”
그는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이 작은 나라의 대통령도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은근슬쩍 자신이 하늘의 뜻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 숨기지도 않는다.
지금 상황은 그에게 박근혜의 위기이지 보수의 위기가 아니다. 후보가 되고 나면 20% 가까이 출렁이는 게 여론조사이며, 보수와 진보 진영의 대표 선수가 정해진 뒤에는 집결하는 보수표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런 여론조사는 나는 믿지도 않고, 믿었다면 내가 국회의원 매번 할 리도 없고 경남지사 두 번 할 리도 없습니다.”
그가 ‘채무 제로’를 기념하며 경남도청 입구에 심어졌던 사과나무는 결국 시들어 뽑혀나갔다. ‘천명’은 과연 홍준표에게로 향할지…
지난달 중순, 뉴스타파 사무실에 발신인이 적혀있지 않은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그 안에는 아리랑 TV 방석호 사장의 부적절한 해외 출장 등 개인 비리 의혹을 폭로하는 편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아리랑 TV의 내부 문서가 들어있었다. 제보가 사실인지 확인해봤다.
하루 60만 원짜리 호텔서 자고, 캐비어 전문점서 113만 원 결제
방석호 사장은 지난해 9월 24일, 미국 뉴욕으로 출장을 떠났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엔에서 기조 연설을 한다고 언론들이 대서 특필했던 바로 그 시기다. 이에 앞서 UN 채널 수십 개 가운데 하나로 아리랑 TV가 진입하게 됐는데,그 덕분에 박 대통령의 연설을 아리랑 TV로 직접 중계하게 됐다며 사장이 뉴욕 현지에 직접 날아가 중계를 챙긴 것이다.
그런데 방 사장이 회사에 제출한 법인 카드 영수증 내역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도착하자마자 뉴욕 메디슨 가에 있는 최고급 캐비어 전문점에서 113만 원을 결제하더니, 박 대통령이 연설하던 당일에는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63만 원을 결제했다. 이밖에도 이태리 음식점에서 26만 원, 같은 스테이크 전문점에서 다시 31만 원, 한식당에서는 12만 원을 법인 카드로 결제했다.
영수증 기재 동석자들, “방 사장과 함께 식사한 사실 없다”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의 경우, 출장을 갈 때 식비가 따로 지급된다. 공적 업무 이외의 개인적인 식사는 이 식비로 해결해야 한다. 방석호 사장의 경우에도 하루 160달러의 식비를 따로 지급 받았다. 따라서 법인 카드로 결제한 위의 식사들은 모두 공적인 업무와 관련돼야만 하고 그에 따른 증빙자료도 마땅히 있어야 한다.
방 사장은 9월 24일 캐비어 전문점에서는 뉴욕의 한국 문화원 직원 5명과 함께 식사를 했으며, 9월 28일 스테이크 전문점에서는 유엔 한국대표부의 오준 대사와 함께 식사를 했다고 썼다. 그리고 9월 25일 한식당에서는 유엔의 한국인 직원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썼다. 그러나 뉴스타파 확인 결과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방 사장이 영수증에 적어낸 이들은 하나 같이 방 사장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다고 확인해주었다. 특히 당시에는 대통령의 유엔 방문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에 한가하게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방 사장은 법인 카드로 대체 누구와 식사를 한 것일까?
아빠 출장 따라다니는 ‘껌딱지’ 딸?
방 사장의 딸은 아버지의 뉴욕 출장 기간인 9월 27일과 28일 인스타그램에 3장의 사진을 올렸다. 뉴욕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조지 워싱턴 다리를 지나면서는 ‘우리 가족의 추석 나들이’라는 설명을 붙였고, 오래간만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봤다며 ‘강추’하기도 했다. 뉴욕을 배경으로 방사장과 함께 찍은 사진에는 “아빠 출장 따라온 껌딱지 민폐딸”이라는 설명도 붙였다.
방 사장의 딸은 ‘기분 좋은 드라이브’를 했다고도 했는데 어떤 차를 타고 한 것일까? 참고로, 방석호 사장은 회사 돈으로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하루 70만 원 주고 빌렸다. 방 사장은 뉴욕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는 유명 아웃렛의 식당에서 사용한 영수증도 회사에 제출했다. 유엔의 한국인 직원과 함께 식사를 했다고 적어서 말이다. 그곳에서 정말로 업무 협의를 한 것일까?
아들 유학 중인 대학 근처서 백만 원 넘는 의문의 식사
방 사장은 이에 앞서 지난해 5월에도 뉴욕으로 출장을 갔다. 특이한 것은 수행원이나 실무진 한 명 없이 사장 혼자서 출장을 갔다는 것이다. 방 사장은 이 때 역시 고급 식당 순례를 빼놓지 않았다. 최고급 프랑스 식당에서 95만 원, 최고급 이태리 식당에서 84만 원, 고급 양식당에서 56만 원어치 식사를 한 뒤 모두 법인 카드로 결제했다. 혼자서 식사를 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액수다. 그런데 당시 출장 때는 누구와 어떤 목적으로 식사를 했는지, 아예 기재조차 하지 않았다.
방 사장은 이때도 최고급 호텔의 하루 60만 원 짜리 방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웬일인지, 예약 내역을 보면 성인 4명이라고 되어 있다. 예약한 방은 퀸 사이즈 침대가 두 개 있는 방이었다.
정말 이상한 것은, 방 사장이 노스 캐롤라이나의 한 식당에서 법인 카드로 식사를 했다는 것이다. 구글 지도로 찍어보니, 방 사장의 숙소에서 이 식당까지는 차로 8시간이 걸린다고 나온다. 왜 뉴욕에 출장을 간 사람이 그렇게 멀리까지 가서 식사를 한 것일까. 더군다나 결제 금액이 무려 116만 원이다.
아리랑 TV 관계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식당은 듀크 대학에서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며 듀크 대학에는 방 사장의 아들이 당시 졸업반에 재학 중이었다고 한다. 116만 원짜리 식사를 한 날은 5월 8일, 듀크대학의 졸업식은 5월 10일이었다.
회사는 존폐 위기.. 낙하산 사장은 흥청망청
뉴스타파는 이 같은 취재 내용을 근거로 아리랑 TV 쪽에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기다려도 답이 없어서 방석호 사장 개인에게도 사실 관계 확인을 위한 취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방 사장을 직접 만나러 갔다. 방 사장은 취재진에게, 자신은 대답할 의무가 없다며 의혹의 근거를 대라고 말했다. 뉴스타파는 제보 받은 문서 가운데 일부를 촬영해 아리랑 TV와 방 사장에게 보내고 다시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역시 아무런 답이 없었다.
방석호 사장은 홍익대학교 법대 교수 출신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여당 추천 KBS 이사직을 맡아 정연주 사장을 불법 해임할 때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후 낙하산으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장으로 취임해 3년 임기를 마쳤고, 박근혜 정부 들어 아리랑 TV 사장에 임명돼 다시 낙하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리랑 TV는 지난 1997년 700억 원의 기금으로 설립됐다. 기금의 이자 수익과 방송발전기금, 여기에 자체 수입을 더해 운영된다. 그러나 2003년 이후 지속적인 적자로 기금이 급격하게 고갈돼 현재 100억 원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다. 올해도 6,70억 원의 적자가 예상되며, 따라서 기금이 3,40억 원밖에 남지 않는 내년부터는 회사의 존폐를 고민해야 할 정도로 재정이 어려운 상황이다.
뉴스타파는 제보받은 문서를 토대로, 방 사장의 해외 출장비 사용 내역 뿐 아니라 다른 부적절한 경영 행태를 추가로 보도할 예정이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