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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출간! (권명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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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출간! (권명아 지음)

익명 (미확인) | 목, 2019/02/14- 11:12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누가, 왜 여성과 소수자를 두려워하며 배제하는가?
어떻게 근대 공론장의 한계를 넘어 부대끼는 몸들의 공통장을 구성해 나갈 것인가?

지은이  권명아  |  정가  24,000원  |  쪽수  464쪽  |  출판일  2019년 2월 11일
판형  사륙판 (130*188)  |  도서 상태  초판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총서명  아프꼼총서 5  |  ISBN  978-89-6195-198-2 03300   |  CIP제어번호  CIP2019000620
도서분류  1. 페미니즘 2. 여성학 3. 문학 4. 문학비평 5. 사회학 6. 철학 7. 정치학

근대 공론장의 주체에게 젠더화된 타자들은 ‘벌레, 홍수, 떼거리’로, 위협적이며 제압하고 다스려야만 하는 존재로 인지되었다. ‘벌레, 홍수, 떼거리’라는 표상은 문화와 지역을 막론하고 근대 체제에서 정동의 힘이 ‘이성적 주체’와 ‘다스림의 주체’에게 인지되고 포획되는 방식이었다. 이광수나 염상섭 같은 근대 공론장 주체에게 근대 도시를 무너뜨리며 범람하는 ‘홍수’는 식민지 토목 권력의 힘을 통해서 혹은 문명개화를 통해서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미개’와 ‘야만’의 상징이었다.

미투 운동의 도래는 이러한 의식주체의 정신혁명과 대결해온 페미니즘 정치사상과 발본적 유물론의 궤적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정신혁명의 상속과 계승이 ‘혁명’의 자리를 독식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봉기한 미투 운동이야말로 지금까지 한 번도 도래하지 않은 신체의 유물론 정치, 그 발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간략한 소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는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여성, 소수자로서의 신체적 경험은 페미니즘 사상이 출발하고 나아간 가장 큰 기반이었다. 정동 이론이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동 이론은 신체에 대한 새로운 유물론이자, 신체들과 신체들의 연결과 부대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다. 그리고 신체에 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실천에 거의 유일한 지적 원천은 바로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이다. 또한 젠더 연구는 경험을 신체의 유물론의 차원에서 고찰하는 연구 방법을 축적해왔고, 정동 이론은 젠더 연구의 이러한 경험 연구 역시 이어받고 있다. 정동 연구는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긴 투쟁의 산물이다.

이 책은 정동에 대한 논의의 역사를 따라 18세기까지도 올라가지만, 주요 연구 대상은 박근혜 정권이 성립되던 시점에서 시작해서 세월호 사건, 백남기 님 살해 사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최종적 불가역적인’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 문화계와 문단 등 <○○계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부상, 시사인 절독 운동, 메갈리아 파동, 촛불집회, 탄핵, 대통령 선거, 정권 교체, ‘촛불 혁명’ 이후, 그리고 미투 운동을 경유하는 시기의 한국 사회의 여러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상세한 소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와 같은 속담이 여성차별적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런 여성차별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면 단순한 표현 이면에는 ‘여성의 불가해한 힘’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자 셋이 모이면 시국과 정치를 논하기는 하지만, 접시를 깰 수는 없다. 시국과 정치에 비해 ‘접시’는 사소한 가정사를 비유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자들은 단지 모이는 것만으로도 접시를 깰 수 있고, 울기만 해도 집안을 망하게 한다.

여성은 모이면 힘이 세지고, 그 힘은 ‘파괴적’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여성은 모이면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단히 모여서 힘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그 힘은 항상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되고, 이런 매도와 가치의 전도를 통해 여성의 힘은 평가절하되거나 뿌리 뽑혔다. 이 책은 이렇게 여성의 힘이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되어온 역사가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격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여자떼의 무한한 힘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가치 정립하기

이 책의 목적은 역사적 분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역사적 분석은 바로 여성의 연결과 연결을 통해 발생하는 힘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가치 정립하기 위한 실천적 시도이기도 하다. 여성이 모이면 힘이 세지고, 그 힘이 무언가를 파괴한다고 인류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인식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여성에게 잠재된 힘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그 가치가 매도되고 평가절하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면,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을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바로 여성의 힘을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평가하는 그 가치부여의 체계 그 자체를 전복해야만 한다. 이 책은 여성의 힘을 파괴적으로 매도해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통해 여성의 힘을 평가하고 가치부여하는 이론적인 전복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소수자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타진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페미니즘이 다시 부상한 시대라고 하지만, ‘미투운동’은 음모론, ‘꽃뱀론’으로 여전히 매도된다. 기존 권력 구조의 지배적 카리스마를 비판하는 성폭력 고발운동은 ‘진보 진영’을 파괴하려는 음험한 힘으로 모욕당한다. 여성차별적인 담론 구조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군중 검열’이나 무지몽매한 ‘메뚜기 떼’가 자행하는 ‘지식 테러’라고까지 공격받는다. 평생 ‘위안부’ 문제를 고발하고 전시성폭력을 비판해온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도 유사한 공격이 반복된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페미니즘 운동, 차별 반대 운동과 이에 대한 공격과 매도를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가 축적된 역사의 지평에서 해석한다.

여성의 잠재적 힘에 대한 공포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는 인류 역사상 반복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인간이 함께 모여서(사회적) 힘을 만드는(정치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모이면 ‘파괴적’이 된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재구성했지만,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사상 그 자체를 통해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를 합리화했다. 여성이 참정권에 제한을 받고, 여성들의 집합적 행동이 파괴적인 것으로 가치 절하되는 것은 이런 맥락과 관련이 깊다.

근대 체제에 이르러 이런 여성의 잠재적 힘에 대한 공포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로도 자리 잡는다. 여성이 근대 시민적 이성과 합리성에 미달하는 ‘감정적’ 존재라는 점에서 참정권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는 단지 이성과 감성의 대립의 산물만은 아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여성이 지닌 불가해한 힘과 지식, 열정에 대한 공포의 전형적 산물이고 이를 정당화한 것은 종교와 봉건제였다. 반면 근대 민주주의에서 이 공포는 여성의 힘을 ‘광기’(정신의학), ‘범죄’(법학, 사회학, 범죄학, 행동심리학 등)로 규정하는 근대 지식과 ‘문란’을 외치는 근대적 윤리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성찰적인 공론장 주체 vs. 파괴적인 군중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는 역사적으로 소수집단의 힘을 억압하는 패러다임으로 확산되었다. 부르주아 남성은 모여서 ‘민주주의’를 만들지만, 하층 남성은 모이면 ‘사회질서를 파괴한다’고 매도되었고, 서구의 백인 주류 집단이 모인 광경은 민주주의의 ‘장관’으로 보이지만, 비서구 비백인 집단이 모인 장면은 ‘난장판’이나 잠재적 테러집단의 떼거리로 공포를 자아내는 우려스러운 문제적 현장이 된다.

근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론장은 모여서 힘을 만드는 것이 정당화된 집단에 의해서만 구성 가능한 것이었다. 이성과 성찰의 주체는 모여서 민주주의를 만들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떼거리들은 모여서 파괴적인 ‘군중심리’를 형성할 뿐이다. 성찰적인 공론장 주체와 파괴적인 군중이라는 범주의 차별적 구성은 여성, 하층 남성, 비백인 인종 집단 등 소수 집단의 집합적 힘을 가치 절하하고 근절하는 ‘합리적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공론장’을 파괴하는 폭도나 ‘극단주의’, 잠재적 범죄자라고 공격하는 논리는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역사의 반복이다.

지은이 소개

권명아 (Kwon Myoung A)

“삶-연구-글쓰기의 인터페이스” 아프꼼의 래인커머(來人comer)이다.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젠더 어펙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문화, 문학을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90년대 페미니즘 정치를 다룬 『맞장뜨는 여자들』(2001)은 단독자로서의 여성 주체가 부상하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책이다. 단독자로서 여성 주체가 부상했던 짧은 정치적 순간은 외환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진부한 삶의 양태로 회귀했다. 『가족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00)는 이 퇴행과 반복의 한국사를 다룬 책이다. 이후 젠더 정치로 본 한국 근현대사 3부작인 『역사적 파시즘 :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2005),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2009),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2013)을 냈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 연구는 매혹, 열광 등 파시즘과 정념의 특별한 관계를 해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이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 한국 사회의 정동을 묻다』(2012)와 짝을 이루는 연구서인 이유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는 이런 필자의 연구 여정의 결과이자, 다른 삶을 향한 발명과 실패의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실험의 결과이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화)와 젠더 정치에 대한 후속작과 나란히 읽혀지면 더 좋겠다.

책 속에서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불법촬영은 ‘재미, 장난 또는 정신 차려야 할 일’ 정도로 합리화되고, 성적인 노예화가 사랑 혹은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정당화되기를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은 성폭력을 ‘다시 태어나야 할 일’ 정도로 정당화하고, 권력관계의 위력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 애정, 헌신, 보살핌, 전심전력의 수발을 노예적으로 강요한 것을 ‘존경’에 의한 행동으로 합리화했다.

― 1부 1장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의 신체 유물론, 27쪽

페미니즘에 대한 분할 통치와 적폐에서 스스로를 면죄하면서, 국가와 자본의 힘에 편승하여 자신을 확대하는 문단 문학 주체는 종말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문단 문학이 종말을 고하는 시점마다, 문학의 정치성을 새롭게 구축하고 발명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 1부 3장 해시태그의 정동이 재구축한 페미니즘 문학, 85쪽

오늘날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여자떼 공포와 공론장 부재에 대한 위기감은 단지 ‘메갈’이라는 새로운 인종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도, 그 집단의 실태 조사로 판단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최근 페미니즘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야말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역능을 문란, 퇴폐, 부적절함, 근본주의적 불순분자로 배제하면서 구축된 근대적 주체성과 공론장의 한계를 되돌아보는 ‘근본적’이고도 발본적인 이론의 재구성을 요청하는 사태이다.

― 2부 1장 여자떼 공포와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의 힘, 157쪽

이른바 혁명의 시대가 종지부를 고하고 ‘욕망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어떤 선언들은 우리가 마치 갈등과 계급투쟁을 넘어서 욕망이라는 새로운 유토피아라도 발견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욕망의 시대와 함께 도래한 것은 자유도, 유토피아도 아닌, 새로운 빈곤 사회였다.

― 2부 4장 정치경제학 너머의 빈곤, 209쪽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난 성폭력 생존자들의 해시태그 운동도 온라인 담론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면서, 이를 통해 기존의 물질적인 제도(문학 제도, 문화 제도 등)에 저항하는 오큐파이 운동의 한 사례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2년부터 계속 진행하고 있는 수요 집회 역시 점령당한 신체를 애도하는 저항적 오큐파이 운동의 세계적인 사례이다.

― 3부 2장 증강 현실적 신체를 기반으로 한 반기념 정치 구상, 294쪽

이렇게 홀로 여럿인 주체 양태는 응답을 듣지 못한, 아니 응답에 대한 간절함에 하나이자 유일한 자신조차 상실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의 삶과 폭력의 경험과 그 모든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 평생 지속된 결과 김복동이라는 한 존재는 묻는 자, 응답을 찾는 자, 자신의 죄를 묻는 자, 살피는 자, 자신을 보살피는 자, 전생의 복동, 이곳저곳의 전장으로 끌려 떠도는 복동, 아이를 꿈꾸던 복동, 전생에 아이를 잃은 복동 … 등으로 여럿으로 나뉘고 자리를 바꾼다.

― 3부 3장 홀로-여럿의 몸을 서로-여럿의 몸이 되도록 하는, 시적인 것의 자리, 301쪽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마주침에서 촉발되는 안심의 정동이란 비참에서, 불안에서 놓여남을 의미한다.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이러한 놓여남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마음을 놓는 과정, 불안에서 안심으로 이행되는 과정은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형되는 과정이며, 낭시의 표현을 빌자면 영혼이 펼쳐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 4부 1장 마음을 놓다, 352쪽

문제는 임박한 파국, 혹은 정동적 현실이 전송하는 신호들(불안과 위기, 혹은 특정의 정념들/수동들)을 통해 또다시 소유자로서의 주체라는 위치를 다시 공고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공통적인 것을 발명할 수 있는, 다른 신체들을 사유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구축된 신체에 더 이상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고 해도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 4부 5장 정동적 전환과 인문의 미래, 421쪽

저자 강연회 : “여자가 모이면, 뭐라도 바꾼다!!
― 여자떼, 여성 집단행동의 역사”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출간을 기념하는 저자 강연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 강연 주제 : 여자가 모이면, 뭐라도 바꾼다!! ― 여자떼, 여성 집단행동의 역사
◆ 강연 : 권명아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지은이,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일시 : 2019.2.25.(월) 저녁 7시30분
◆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문의 02-325-2102)
◆ 신청하기 : http://bit.ly/2BzfDYV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2)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여 년간의 변화와 낙차(落差)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슬픔, 외로움, 사랑, 위기감, 불안 등 정념의 키워드들을 통해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들을 넘나들며 조망한다. 더불어서 시대를 초월한 여성 문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변화를 통합적이며 힘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 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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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제작 등: PD 김세호, MC노, 김광진(前)국회의원,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방학진 기획실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역적’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금, 2018/02/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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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일 <주간경향> 취재팀을 만난 원용범 할아버지가 우이동 계곡에서 자신의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주 선생 가족의 학살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우이동서…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최소 8구 이상 매립 확인돼

서울지역에서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가 최초로 확인됐다. 그동안 한강 이남 지역에서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이 확인되고 집단매장지 발굴이 이뤄졌지만 서울지역 존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희생자로 유력한 일가족의 신상에 관련한 증언도 나왔다. 행정안전부 등은 조사가 마무리되고 유해 안치작업이 끝나는 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사실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에 확인된 민간인 학살 매장지는 서울 우이동 우이동신설선 북한산우이역 인근 등산로 입구다. 이 지역의 집단매장 소문은 간간이 있었다.(박스 참조) 확인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지난해 11월 16일, 하천 노후옹벽 정비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옹벽 패널을 빼니 옆 흙에 묻혀 있던 사람 뼈가 우연히 발견됐다. 공사인부들이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이창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조직발전특별위원장의 말이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시신상태 등을 검토해보니 ‘최근 사건이 아니라 한국전쟁 때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조사 나왔다.”

국방부 감식단의 육안감식 결과 수습된 유해는 최소 6명이고, 아직 현장에서 발굴·수습되지 않은 유해도 최소 2구 이상으로 판단됐다. 총 8구 이상의 존재가 최초 확인된 것이다. 유해의 주인공은 군인이 아니었다. 6세에서 60세까지 연령도 다양했고,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도 나왔다. 유류품에서도 은비녀, 틀니 등 군인과 무관한 물건들이 나왔다.

■ 비녀, 틀니… 학살 민간인 유해로 결론

<주간경향>이 단독으로 입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시신들 중 일부는 철사로 손목부위를 결박한 상태로 누워 있었고, 매장 방향과 자세가 비정형적이며, 허리부분에 고무줄을 착용한 유해가 다수 확인됐다. 고무신 착용 유해가 다수였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현장에서는 틀니나 은비녀 같은 ‘특이 유품’ 이외에 탄피와 탄두도 발견됐는데, M1·칼빈·45구경 권총 등이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아군 탄약류만 출토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번에 발견된 유해들은 종전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특이한 부분은 이 유해들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도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에 금무하던 음악교사 가족이라는 증언이다. 이 증언을 내놓은 이는 우이동 토박이로, 현재도 별장관리인으로 우이동에 거주하는 원용범씨(83)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원씨는 학살사건이 벌어질 당시의 ‘목격담’을 증언했다. “9·28 서울 수복이 된 뒤 10월 어느 날이었다. 한옥에 숨어서 먼발치에서 봤다. 지금은 경전철을 지으면서 축대를 쌓아 개울이 깊어졌는데, 당시는 얕은 개울이었고 개울 옆에 고운 모래가 쌓인 곳이었다. 군인 복장의 사람들이 트럭에서 일가족을 끌고 내려와 총으로 쐈다. 어른이 죽어 푹 꺼꾸러지니 아이들이 방방 뛰었는데 그 아이들까지 죽여버렸다.”

원씨는 학살된 가족이 한국전쟁 전 자신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 가족이라고 했다. 당초 국방부 등의 증언 청취과정에서는 교사의 성씨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1월 말 <주간경향>의 탐문과정에서는 “붉은 주(朱)인지 두루 주(周)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주씨 성을 가진 교사였으며,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해 우이분교 교사로 있던 분”이라며 “바이올린을 잘 켰으며 학교 다닐 때 ‘나의 살던 고향은’ ‘반달’ 등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것이 기억난다”며 더 구체적인 기억을 내놨다. 주 교사는 골짜기 위쪽 일본 적산가옥에 장모와 처, 그리고 6∼7살가량의 남자아이들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처형당하는 걸 먼발치에서 봐서 처음에는 주씨 가족인 줄 몰랐다. 트럭 뒤칸에 실려 가족들이 끌려왔으니 다른 데 있다가 잡혀온 것은 틀림없었다. 처형 뒤 시신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당시는 몰랐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 교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나, 일단 북이 싫어서 내려온 사람인데 자의적으로 좌익활동을 했겠는가. 설령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했더라도 어린아이들, 그리고 장모는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였던 건지….” 0203-6

■ “월남 음악교사 가족이다” 증언

이번에 발굴된 유해들은 주 교사 가족일까. 실제 <주간경향> 취재팀과 동행한 원씨가 지목한 장소는 하천과 작은 개울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번에 시신이 발굴된 장소에서 약 25m 떨어진 장소다. “원씨가 증언한 주 교사 가족과 별도로 또 다른 학살자 가족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창수 위원장의 말이다. 학살자 매몰의 일반적인 패턴은 보통 10여명의 ‘부역자’들을 한 구덩이에 묻고, 바로 인근에 또 구덩이를 파서 그렇게 매몰하는 식인데, 실제 이번 매몰지가 공사 중 우연히 발굴됐으므로 바로 인근에 또 다른 매장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날 원씨와 동네 노인들은 또 다른 학살 매몰 장소도 증언했다. 발굴 현장에서 약 100m 떨어진 장소다. “당시 계곡을 중심으로 웃골과 아랫골로 나뉘었는데, 아랫골 쪽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죽여 묻었다. 한참 지나고 번동에 살던 유가족들이 수소문해서 유해를 찾으러 왔었는데, 총 여섯 구의 시신을 파낼 때까지 가족 시신이 안 나오다가 맨밑의 일곱 번째에서 가족을 찾아 수습해 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처형당한 것이다. 끄집어낸 여섯 구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구덩이에 다시 묻었을 것이다.” 원씨는 시신 매장 장소를 정확히 지적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1950∼70년대에 공사용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축대를 쌓고 성토한 구간이었다. 앞의 유해발굴지와 다르게 이곳은 현재는 작고한 두 사람 소유의 땅이었고, 원씨네 가족은 그 자리 인근에서 소작해 감자를 키웠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굴된 시신들을 학살한 이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씨는 주씨 가족을 죽인 사람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와 탄두를 보면 통상적으로 M1은 군인이, 칼빈은 경찰이, 45구경 권총은 장교가 사용하던 것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당시 대통령령으로 만들어진 ‘비상사태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것이 소위 부역자 처벌의 근거였다. 1952년 위헌 판결을 받을 때까지 대통령령에 근거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검거와 체포·학살이 벌어졌다.” 진실화해조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김상숙 단국대 강사의 말이다. 김 전 조사관에 따르면 ‘부역자’나 ‘보도연맹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는 우익청년단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치안대가 주도했다. 그는 “당시 치안대 사무실이 보통 경찰서나 국민학교 교실, 양곡창고에 있었는데 여기에 연행해 구금·조사하다가 경찰이 인솔해 국군이 사살하는 것이 통상적인 패턴”이라며 “이번 우이동 사건의 경우 유해에 골절이 다수 발굴되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국방부 감식보고서를 보면 유골들은 대퇴골(다리뼈), 두개골, 상완골(어깨뼈)이 골절되어 있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사망 무렵 골절이 관찰”이라고 적혀 있다. 척추부위에 탄두가 박힌 유해도 식별되었다. 김 전 조사관은 “다른 부역혐의자 학살지의 경우를 보면 총알을 아끼기 위해 때려 죽이거나, 부역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해놓고 굴비처럼 묶어 앞의 사람에게 총을 쏴 줄줄이 꼬꾸라지면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해감식을 맡고 있는 박선주 전 충북대 명예교수는 “골절이 살아있을 때 맞아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사후에 위에 흙 등이 쌓이면서 압력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약품처리가 끝나면 법의학적으로 엄밀히 검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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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이동 민간인 학살자 집단매장지에서 지난 1월 5일 희생자 원혼을 기리는 복토 추모제가 약식으로 열렸다. 발견 현장에는 아직도 미수습 유골(사진)이 남아있다. / 법인권사회연구소 남인우 연구위원 제공

■ 누가 이들을 학살했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동안 서울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자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한국전 개전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경우 대부분 한강 남쪽에서 보고·발굴된다.(표 참조) 서울시의 경우 북의 기습남침으로 점령돼 그대로 북한 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 벌어진 부역자 처벌 및 처형은 다르다. 상당수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갔지만 점령기간 중 피난을 못가고 남아 어쩔 수 없이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나 연행조사를 받았고, 그들 중 얼마나 처형되었는지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화 개발로 원형보존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민간사유지에서 건물을 올리려고 땅을 파면 유골이 발굴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그냥 묻어버리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신을 발굴하고 수습하려면 땅주인과 협상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인 점도 일조한다. 발굴지 대부분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도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은 오지이거나, 개발이 안된 계곡들이었다. 여기에 농촌의 경우 보통 집성촌으로 그 지역 토박이 노인들이 생존해 증언할 사람이 있는 데 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익명의 공간인 것도 일조한다. 김 전 조사관은 “과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보접수를 받을 때도 신고된 건수도 많지 않았고 서울지역 확인은 엄두도 못냈다”며 “서대문형무소 뒤쪽 일대, 한강변이나 서울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 강나루터 등이 학살매장지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이번 우이동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우이동 매장지의 경우,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유골들과 유해는 ‘황갈색 가는 모래층’에서 출토되었고, 그 위에는 1차와 2차에 걸쳐 생활쓰레기로 성토돼 있었다. 사살된 시신을 따로 묻은 것이 아니라 위로 흙을 덮어둔 채로 방치돼, 이후 유입된 계곡산장 등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발굴된 6구와 유해개체 수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 유해감식단이 청취한 구술증언과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주 교사 가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전부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보존조치를 취한 것은 관련해 법적 권한이나 발굴예산 같은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차제에 지난 2005년 한시적 기구로 만들어 2010년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법을 개정해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을 국가가 책임을 지고 계속 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 행안위에 여러 진실화해위원회법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지만, 법이 통과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창수 특별위원장은 “이념을 놓고 말하게 되면 학살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며 “이제는 이념이 아닌 인권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는 국가가 과거의 불행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 학살당한 주 교사 가족, 신원 확인할 수 있을까

‘우이동 그린파크 계곡 학살’에 대한 증언이 없지 않다. 지난 2012년, KBS는 6·25전쟁을 다룬 특별기획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다큐 7부 ‘전쟁의 그늘(상)’편에 출연한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차승현씨는 이렇게 말한다. “국군이 진주해가지고 그 다음엔 경찰들이… 부역자라고 그랬지. 빨갱이 하던 사람들을 불러다가 때리고… 지금의 우이동 그린파크 옆에 가면 골짜기가 있어요. 거기다가 트럭으로 실어다가 죽이고… 그런 비극이 있었죠.” 차씨는 이번에 <주간경향>이 접촉한 우이동 거주자들과 함께 유력한 증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시 서울 거주’ 이외에 다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차씨는 우이동 학살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의문은 의외의 방향에서 풀렸다.

‘혹시 6년 전 증언한 차승현씨를 아느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원용범씨는 “우이동 계곡에 올라가면 ‘○○집’이라는 음식점이 나오는데 거기 주인이었다”고 말했다. 방송에 출연해 증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원씨에 따르면 차씨는 암으로 오래 투병하다가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망했다.

주 교사 가족 학살사건을 증언해줄 다른 사람은 없을까.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원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일단 원씨와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창들을 문의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현재의 153번 종점 자리에 직사각형 기와집이 있었는데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였다. 거기서 4학년 과정까지 운영되고 5학년부터는 좀 더 떨어져 있는 숭인국민학교를 다녔다. 주 교사는 분교 교사였다. 원씨는 말한다. “장인 어른은 안 계시고, 장모를 모시고 살던 것이 기억난다. 부인은 키가 자그마한데 참 예뻤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들도 귀여웠고…. 세상에, 그 아들들까지 죽일 수 있느냐. 그 어린 아이들이 뭐를 안다고.”

주 교사의 인적사항을 학교 근무 교사명단을 통해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주간경향>의 확인 요청에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은 “일단 우이초등학교 교사 근무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1954년부터인데, 그 이전 기록은 멸실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남아있는 기록에도 주씨 성을 가진 교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원씨를 만나 주 교사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원씨는 주 교사 가족이 살던 일본 적산가옥 위치를 알고 있었다. 현재 이 가옥은 헐려 터만 남아있다. 원씨의 기억에 따르면 1950년대에 집은 헐렸고, 그 뒤 절이 자리하다가 1962년께에 역시 헐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폐쇄등기부등본이나 호적 등에서 확인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앞으로 추가취재가 필요한 부분이다.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2018-02-03>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토, 2018/02/0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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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zwwxY…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4024?e=22522241

월, 2018/02/0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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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역사 바로세우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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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원주·횡성지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원주와 횡성에 지회를 창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한일과거사 청산운동의 구심 역할을 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발기인 대회를 열고 원주·횡성지회(지회장 유창구) 창립총회를 가졌다.

원주·횡성지회는 친일청산 및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시민단체와의 교류를 추진한다.유창구 지회장은 “일제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왜곡된 한국근현대사를 규명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2018-02-02>강원도민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원주· 횡성지회 창립

월, 2018/02/0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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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이트의 미즈넷, 미즈토크, 50대들의 쉼터 방에 올라온 글입니다.

너무 민망해서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이트에 비밀글로 올리고 처벌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숭모회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의사님 본인은 물론이고,

그분의 어머님까지 모욕하고 있습니다.

……………………….

 

우리 응칠이는 호로자슥이다. [1]

  • 579921| 처음과끝 (sogep****)
  • 공감 4 | 조회 199 | 2017.11.02 | 신고 주소복사 miznet.clipboard.init(“copyUrlButton”, 41, 15 );

ILO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직업의 수는 약 20,000개요,

세계적으로 볼 짝에는 약 400,000개의 직업이 있답미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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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고

나아가 생각하는 방식은 더욱더 다양한 것이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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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민주공화국 최고의 가치는 바로 自由 자유람미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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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구속 받거나 그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 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종교와 철학과 이상과 이념을 주장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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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으로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 되어야 할 가치인 거져.

<!–[if !supportEmptyParas]–> <!–[endif]–>

미 수정헌법 1조를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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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의회는 언론, 출판의 자유 또는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수 있는 권리와

고충 처리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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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조항인 것이져.

 

이와 관련된 ‘래리 플랜트’라는 영화가 있었져.

 

악명 높은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래리 플랜트.

속물이자 선동가이기도 한 래리 플랜트의 인생역정과

미 수정헌법 제1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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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에서

래리 플랜트가 이런 말을 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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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불법이지만 그것을 촬영, 뉴스위크에 실으면 퓰리쳐상을 받고

섹스는 합법이지만 그것을 촬영하면 감옥에 가야한다.

어떤 게 더 유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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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국의 삼등시민이다. 나같은 쓰레기가 보호받는다면

여러분 모두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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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변호사 아이삭 맨은

포르노는 싫어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며 소송을 맡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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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고정관념과 일반상식에 테러를 가한 영화,

이른바 표현의 자유‘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통렬한 해석이 백미져.

 

우리는

우리 응칠이를 의사요 열사라고 하는 것을 탓하진 않슴미돠.

기건 바로 니들의 생각이고 표현이고 자유니깐 말이져.

<!–[if !supportEmptyParas]–> <!–[endif]–>

반면,

응칠이가 테러리스트라 하는 것을 탓해도 안 됨미돠.

기건 그들의 생각이요, 양심이요, 자유니깐 말이져.

<!–[if !supportEmptyParas]–> 

기실 우리 응칠이가 의사요 열사라덩가

테러리스트요 호로아해라는 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저마다 다 생각과 주장이 다 다를 수 있고

그 생각과 주장이 다 옳거나 틀린 것도 아니니 말이져.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정작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종교와 사상이 다르다 해서

남들의 주장과 생각을 배척하고 방해하는 작태임미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네 종교와 사상과 자유를 인정 받으려고 한다면

당근 남의 것도 인정해야만 하는 건데 말이져.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첨님은

이런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질도 없는 것들이

나오는 대로 아가리질 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는 곰미돠.

니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과 표현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곰미돠.

 

<!–[endif]–>우리 응칠이는 아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요 열사의 얼굴이 있는가 하면

테러리스트요 호로아해의 얼굴도 가지고 있담미돠.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 신념이라며 사람에게 총질을 하였으니 테러리스트요,

나이 30에 사형을 당해 오마니 가심에 못을 박았으니 호로아해인 거지요.


<!–[endif]–>

그리고

응칠이의 오마니의 편지

구차하게 목숨 구걸 말고 기꺼이 디지라는 그런 편지

(실은 조마리아는 그런 편지를 쓰지 않았다지만)

그런 편지질을 한 에미라면 기건 바로 미틴뇬이 맞구요.

 

세상사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첨님은 바로 이 소리를 하고픈 거지요. 어험!

화, 2018/02/0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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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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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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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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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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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2018-02-05> 한겨레21

☞기사원문: 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관련기사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수, 2018/02/0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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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홍씨에 관련된 내용은 2006년 이후로 아무런 기사가 없더라구요

어떻게 된건가요? 해결됬나요?

수, 2018/02/0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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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한겨렌

비판해따…………..이육사의

아니 ?…..먹칠의  어느  사헌부의  2심

존 스타인백  분노의(재판)  이었다라고,

목탁아!

ㅈㅣ팡이야!

검산지판산지비노산지    분간이  안대는  또다시  재걔되는  한반도의  남녁이와북녀기!

기대반우려반과  눈츅제속의   정경유착경정유착팡결

그재벌영감의 손지와 그대통령의 장녀들의 축잰가?

(올린마난 정지영  상이  엄사옴. 형동친  이어니언스  보그덜랑  에스케텔레콤 하지마라)

 

목, 2018/02/08-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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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시민단체들 도쿄서 기자회견…”日정부, 유골반환 성의보여라”
고향 못간 조선인 전몰자 최소 2만2천명…日차별·韓무관심에 유골반환 ‘난항’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남쪽 오키나와(沖繩)현에는 일제 강점기 말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징병 혹은 징용을 당해 끌려왔다가 미군과 제국주의 일본군 사이의 격전이 펼쳐지던 전장에서 숨졌다.

이렇게 억울하게 타향에서 숨을 거둔 조선인들은 넋이라도 위로를 받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여전히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오키나와 뿐 아니다. 남태평양에서, 동남아시아의 어느 섬에서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은 최소 2만2천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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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을 위한 ‘징병적령자기념촬영’
(서울=연합뉴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강제동원 피해자 김갑배씨로부터 기증받은 군인동원 증빙사진. 사진 아랫부분에 ‘징병적령자기념촬영’이라는 설명과 1944년(쇼와<昭和> 19년) 5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사진 아래 적혀 있다. 2015.9.13 <<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제공 >>” [email protected]

타국에 묻힌 채 이름없는 유골로 남아있는 이들을 조국과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기 위한 노력이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차별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와 민족문제연구소,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는 8일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2차대전 당시 전몰자의 유골을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해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 작업을 해 유골을 유족에게 인도하고 있지만, 전쟁 중 자국민으로 간주했던 조선인은 그 대상에서 뺀 것이다.

이들 단체가 일본 정부에 한국인 전사자 유골을 찾도록 나서라고 계속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지만, 이후 사태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 정부가 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계속 한국인 유골을 수집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가 이처럼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유골이라도 가까이 모시려던 유족들 중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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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조선징병독본


또다른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본인 유족들의 요청사항이라며 주인을 찾지 못한 유골들을 소각 처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유골이 소각되면 DNA 대조가 불가능해져 뒤늦게라도 조선인 전몰자들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보추협은 이날 ▲ 유골 소각을 중단할 것 ▲ 유골 반환에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의 신청을 인정할 것 ▲ 유골에 대해 DNA 감정과 함께 ‘안정동위체’ 감정을 실시할 것 등 내용으로 하는 요청서를 일본 정부의 담당 부처인 후생노동성에 전달할 계획이다.

요청서의 내용 중 ‘안정동위체’ 감정은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 전사자 유골의 신원 확인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유골에는 각 나라와 지방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지질학적 특성, 즉 ‘화학적 지문’이 남아있는데, ‘방사기원동위원소’를 활용해 유골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유족의 DNA 정보 수집 없이 유골만 가지고도 한반도 출신인지 확인하는 게 가능하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씌여진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보추협은 요청서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을 확인해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고 명시하기도 했지만, 향후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에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등 유골 반환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방관하던 한국 정부는 새정부가 들어선 뒤 작년 연말 방일한 강경화 외교장관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골 봉환 문제에 대한 실무 논의를 가속화하겠다”고 말했을 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담당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매년 유골과의 대조를 위해 한국 유족들의 DNA를 검사하기 위한 비용을 부처 차원의 예산에 넣었지만, 예산 관련 부처와의 협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이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확정된 올해 예산에서도 마찬가지다.

▲ 44년 4월 일제에 강제 징집돼 멀리 동남아시아 옛 버마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 사진 아랫부분에 `최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란 글귀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email protected]

<2018-02-08>연합뉴스

☞기사원문: 억울하게 죽었는데 묻힌곳 몰라…죽어도 눈못감는 조선인 전몰자

목, 2018/02/0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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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시민활동가 우에다 게이시…”日정부 협조 답변 끌어냈는데 韓정부는 ‘침묵'”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같은 일본인이 나서서 기껏 일본 정부에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침묵만 하는 건가요?”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0) 씨는 8일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안간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본 오사카(大阪)부 사카이(堺)시 지방 공무원이기도 한 그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일본인이다.

조선인 유골반환 운동 펼치는 日 시민 우에다 게이시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 반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0) 씨. 2018.2.8 [email protected]

휴가를 쪼개 도쿄를 오가며 관할 부처인 후생노동성 관료나 정치인들과 만나 ‘로비’를 펼치던 그는 2016년 10월 조선인 전몰자 유골 반환을 향한 중요한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유골을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벌이기로 하면서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를 비롯한 일본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한국 시민단체가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끌어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에다 씨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후 한국 정부의 ‘침묵’에 대해서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 정부에 참가를 제안한 일본 정부의 답변을 모른척했고, 작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전몰자의 유족들은 고령으로 한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우에다 씨는 “한국 정부가 일단 제안을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의 침묵은 ‘제안을 하라’고 말했으니 할 일을 했다고 핑계대는 일본 정부를 도와주는 꼴”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 부산 동래구청에 접수된 일제때 만주지역 일본군으로 강제징병된 것으로 추정되는 225명의 명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한국 정부가 6.25 전쟁 당시 숨진 미국인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유골을 수습하면서 자기 나라의 사람들의 유골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도쿄에 상경해 이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민족문제연구소 등 한국 시민단체들과 함께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씌여진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우에다 씨가 조선인 전몰자 유골의 반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모 혹은 형제의 유골을 한국에 모시지 않으면 마음 편히 죽을 수 없다”는 한국인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일본이 계속 미움을 사게 된다”는 생각에 일본에 소송을 제기한 징용 피해자들을 돕던 그는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지 못한 유족들의 한(恨)을 알게 된 뒤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을 가족들의 곁으로 보내주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유골반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다”며 “제발 일단 유골을 반환해달라고 제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만약 일본 정부가 말을 바꾸더라도 내가 ‘약속을 지켜라’고 따질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8-02-08>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정부에 조선인 유골반환 요청않는 韓정부, 도저히 이해 안가”

목, 2018/02/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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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연구회, 역사문제 연구소 등 14개 학술단체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 가담한 정부기관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열고 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가담한 정부기관과 정부출연기관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8일 한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역사문제연구소 등 14개 역사 관련 학회와 연구소 회원들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구서를 제출했다. 학술단체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촛불 민심이 선정한 적폐 가운데 하나”라며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의 불법과 비리를 밝히고 책임자를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체들은 또 “감사 청구 대상인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연구재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정권의 충견(忠犬)이 되어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사회정의를 유린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아울러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특정 인물과 기관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거나 우수한 평가를 받던 연구사업을 좌초시켰다”며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에는 학자와 일반 시민 494명이 참여했다.

김유진 기자 [email protected]

<2018-02-08> 경향신문

☞기사원문: 14개 학술단체,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

※관련기사

스1: 역사단체 “국정교과서 가담 정부기관 비리의혹 감사해야”

연합뉴스: 5개 역사학회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

목, 2018/02/0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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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JC-s0…

 

금, 2018/02/0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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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강점기 때 전쟁에 강제로 동원됐던 조선인들의 유골이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 사업 대상에서 조선인은 빼놓았기 때문인데 우리 정부도 사실상 손 놓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윤설영 특파원입니다.



[기자]

태평양전쟁 말기, 남태평양 마셜군도에는 조선인 1000여명이 강제동원됐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전장에서, 혹은 보급이 끊겨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은 최소 22,000구로 추정됩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관련법을 만들며 유골발굴 사업에서 조선인을 대상자에서 제외했습니다.

심지어 신원이 확인 안되면 유골을 소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일 가능성이 있는 유골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일시민단체로 구성된 전몰자유골귀환 추진 모임이 오늘(8일) 일본 정부에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습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팀장 : 이 문제는 정치적인 협의대상이 아니라 인도적 입장에서 일본 정부 스스로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일본의 조선인 차별에도 한국정부는 일본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면제공 : 국사편찬위·미국기록관리청)

<2018-02-09> JTBC

☞기사원문: 일, 전몰자 유골 발굴서 ‘조선인 차별’…시민단체 “반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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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국인 유골 반환 한국 정부가 나서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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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日정부에 조선인 유골반환 요청않는 韓정부, 도저히 이해 안가”

금, 2018/02/0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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