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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다시 개벽의 신바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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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다시 개벽의 신바람이-

익명 (미확인) | 금, 2019/01/25- 11:41

1. 개벽의 바람

이병한 선생님, 두 번째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먼저 편지를 쓰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는 말을 듣고서 저도 덩달아 기뻤습니다. 뭔가 답답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아서요. 마침 엊그제 원불교대학원대학교의 김경일 총장님도 페이스북에서 비슷한 표현을 쓰셨더군요. “서구 근대문명이 들어올 때 위정척사나 개화파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동학류의 개벽에 대한 자리매김이 늘 고민이었는데 (『한국 근대의 탄생』을 읽으니) 이것을 풀어낼 단서를 찾아주신 것 같아 저도 가슴이 후련했습니다.” 아마도 전통(척사파)과 현대(개화파)라는 양분법으로 단절된 한국사상사에서 ‘근대’(개벽파)라는 연결고리를 찾으셔서 이런 표현을 쓰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뭔가 막혀있는 지금의 상황을 뚫을 수 있는 사상적 실마리는 역시 ‘개벽’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성환 사진2 유상용선생님과
유상용 선생님과~

실제로 요즘 제 주위를 보면 여기저기에서 개벽바람이 불고 있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한국 근대의 탄생』을 읽으셨다는 유상용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30년 동안 국내외에서 공동체운동을 하다가 개벽으로 돌아오신 분인데, 그 귀환의 심정을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고 계십니다: “나는 92년 이래로 정신과 물질이 고루 발달한 풍요로운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야마기시즘’을 현실사회에 실현하기 위한 실천과 활동을 지속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된 나의 ‘뿌리찾기’의 과정에서 시작된 탐구와 실천의 한 과정일 뿐이지 전부는 아니다. 뿌리찾기 과정에서 도착한 곳은 조선 정신의 용출인 개벽사상이었고, 그것을 사회화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이 원불교사상을 기반한 새로운 사회 만들기였다. … 작년 말에 나는 다시 돌아왔다, <개벽>으로 -. 한국의 상황에서, 지금 여기로, 뿌리에서 올라오는 울림으로, 나의 느낌으로…”

이렇게 ‘다시 한국’으로 귀환하신 분과 원광대학교에서 6시간 동안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30년 동안의 체험과 실천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으로부터 개벽학과 관련해서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가령 동학은 일종의 한국인의 사상적 뿌리찾기로 해석할 수 있고,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개벽적 주체의 정립이며, 한살림은 생산성 중심의 과학농업에서 철학에 기반한 인문농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한 운동이다 등등… 유상용 선생님도 며칠 뒤에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리셨더군요.

“요즘 동학‧증산‧원불교 관련 글들을 읽으며 그 때 선조들의 바람은 무엇이었는지, 시대적 과제와 자각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많이 읽고 떠올려 보았다. 특히 최제우 선생은 조선과 동양의 몰락을 감지하고, 유학이 당면한 과제를 알고, 기독교-서학의 내용이 의미있다는 것을 이해한 후에, 유학이 현상의 관찰에 머물러 초월을 몰랐고, 서학이 초월을 인간 밖에 두어 외화되었다고 판단하고서, 스스로 기도를 통한 초월적 체험을 시도하여 새로운 길을 열고, 양쪽의 모순을 극복한 ‘내안의 하느님을 모시는’ 시천주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전에도 비슷하게 생각했었지만, 조선 문명의 절실한 과제의 해결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이해하니 더욱 선생과 선조들의 마음이 가깝게 느껴진다.”

탁월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초월의 문제와 관련해서 동학의 입장에서 유학과 서학의 한계를 지적한 부분은 왜 개벽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상사적으로 정확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런 분들의 도움을 받으면 이 시대에 필요한 개벽학을 정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날 유상용 선생님의 소개로 마침 익산에 오신 이남곡 선생님도 함께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30년 전에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나온 뒤에 어느 사찰에 들어가서 「혁명에서 개벽으로」라는 글을 쓰신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벽’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냐고 여쭤봤더니 “밝음을 창출하는 에너지”라는 한마디로 명료하게 정의해 주셨습니다. 어둠과의 싸움이나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자기 안의 밝음을 신장시키려는 노력”이라는 것입니다.

순간 저는 한국의 전통적인 ‘신명사상’과 장일순 선생의 ‘보듬는 혁명론’이 떠올랐습니다. ‘신명’이 바로 ‘밝음의 에너지’이고, ‘신명난다’는 말은 “밝은 기운이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쟁이나 저항의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전환시키는 길은 밝음의 에너지로 상대를 보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남곡 선생님이 작년에 『논어: 삶에서 실천하는 고전의 지혜』의 개정판을 내셨다고 하는데, 이런 마인드로 『논어』를 독해하셨다면 저로서는 일종의 『개벽논어』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2. 창조성과 도덕성

선생님의 편지에서 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점은 “정신을 개벽하여 물질을 개벽하자!”는 역발상입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개벽은 ‘서구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최제우가 ‘중국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를 ‘다시 개벽’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종래의 성학(聖學)을 술(述)하지 않고 동학(東學)을 작(作)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한국 근대의 시작으로 보았습니다. 적어도 사상사적으로는 이렇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중심주의나 민족주의로 나가자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모든 ‘중심주의’로부터의 탈피가 정신개벽이라고 생각합니다. 뭔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지요. 천도교나 원불교 경전에서 마음/정신의 최고 상태를 ‘자유심’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마음/정신 상태가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새로운 생각, 새로운 학문, 새로운 동학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고 봅니다. 뭔가에 얽매여 있는 상태에서는 새로움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움’이 바로 이남곡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밝음’이나 한국사상에서 말하는 ‘신명’ 그리고 선생님이 말씀하신 ‘유레카’와도 상통하고요. 아울러 이렇게 정신이 개벽되면, 즉 정신이 자유로워지만 창조적인 주체가 될 수 있고, 이렇게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을 때 새로운 물질개벽의 차원이 열린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창조경제’이고, 인문디자인의 관점에서 본 정신개벽과 물질개벽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조성환 사진2 새교포럼 박맹수 강연1
세교포럼 박맹수 강연(왼)

물론 정신개벽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자각하여 구세하자”는 자각정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지난주에 창비빌딩에서 있었던 세교포럼에서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님이 “문명전환기에 다시 보는 한국근현대사상”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셨는데, 이에 대해 세교연구소 고문이신 백낙청 교수님께서 이중과제론적 입장에서 코멘트를 하셨습니다. 원불교에서 말하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슬로건의 의의는 이 시대를 물질개벽, 즉 자본주의의 시대로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정신적 대응으로써 정신개벽을 주장했다는 데에 있고, 그래서 원불교에는 근대적응(물질개벽)과 근대극복(정신개벽)이라는 이중과제가 다 들어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이 한마디에 그동안 말로만 듣던 백낙청교수님의 이중과제론의 내용이 명료하게 들어왔습니다. 아울러 원불교의 개벽론이 지니는 현대적인 의미도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물질개벽=자본주의”보다는 “물질개벽=과학혁명”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과학혁명과 자본주의가 현실적으로 맞물려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강같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의 정신개벽을 나타내는 말이 개벽파가 주장한 ‘도덕’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월 최시형이 말하는 ‘도덕문명’(『해월신사법설』「기타」)이나, 소태산 박중빈이 말하는 물질문명과 대비되는 ‘도덕문명’(『대종경』 「교의품」 32장)이 그러한 예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정신개벽이라는 말에서 도덕성과 창조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읽어내고 싶습니다. 도덕성이 원 문맥에 충실한 개념이고, 선생님이나 백낙청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자본주의라는 근대를 극복하는 정신적 태도나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 창조성은 정신개벽에 대한 현대적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신을 개벽해서 물질을 개벽하자”는 선생님의 역발상에서의 정신개벽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성환 사진2 새교포럼 박맹수 강연2

 

3. 한국학과 신동학

마지막 부분에서 “동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동학을 하자!”는 선생님의 제언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다만 제가 ‘개벽사’라는 사상사 서술에 집착하는 이유는 역사에 대한 인식이 우리의 실천을 결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실천이나 현장을 우선시하는 분들과 저 같은 연구자와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학의 틀을 바꾸고 싶습니다. 척사와 개화, 유학과 서학에 치우친 한국학에서 ‘척사-개화-개벽’이 천지인(天地人) 삼재처럼 균형이 잡힌, ‘유학-서학-동학’이 삼발이처럼 정립된, 그런 한국학을 그리고 싶습니다. 유학이 동아시아라는 전통적 배경이고, 서학이 세계라는 현대적 환경이라고 한다면, 동학은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재적 풍토입니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소외되고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현재적 풍토는 잊혀지고 무시된 감이 있습니다. 그것이 개벽이라는 근대였습니다. 이 폄하되고 경시된 한국적 근대에 대한 기억을 복원시키는 일이야말로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균형잡힌 한국학이 정립되지 않으면 실천도 방향을 상실하리라 생각합니다. 개벽의 근대를 제외한 유학 중심의 ‘전통과 현대’라는 틀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동학을 연구하는” 것도 일종의 “동학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한국 근대의 탄생』의 출간을 인연으로, 한평생 실천현장에 몸담고 계셨던 실천가들을 만나 뵙고, 아울러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자극을 받고서, 저도 비로소 실천에 대한 필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저에게도 새로운 ‘자각’이 생겨난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25년이 문헌연구-사상연구에 치중했다고 한다면, 앞으로의 25년은 실천현장에 계셨던 분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새로운 ‘학’의 정립과 실천에도 힘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4. 언어의 한계

마지막으로 맨 처음에 제기해 주신 ‘일본의 개벽’이니 ‘토착적 근대’에 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번 답장을 마치고자 합니다. 당연히 지적하신대로 일본의 개벽파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는 개벽파라고 할만한 운동은 희미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기타지마 기신 교수님도 동의하시는 바입니다. 다만 우리와 같은 개벽의 흔적이 있는지를 찾고 싶었고, 그것이 안도 쇼에키와 같은 사상가가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코 한국 개벽의 원형이나 시작이 일본에 있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동학=개벽’의 가장 큰 사상사적 의의는 중국적 성인질서로부터의 탈피인데, 이런 주장을 안도 쇼에키가 이미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안도 쇼에키는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이것이 한국과 일본의 가장 큰 차이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이 제가 ‘근대=자본주의’와 등치시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세계’의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한국’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입니다(물론 한국은 세계 안에 있지만요-.). 그래서 근대의 기준이나 내용을 규정할 때에도 저로서는 중국(유학)과의 관계가 중요해지고요. 마치 서양 근대가 중세(신학)와의 관계 속에서 나왔듯이 말입니다. 단지 관점이 달라서 표현이 달라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개벽’이라는 표현은 ‘한국의 근대’라는 표현과 유사하게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즉 modern의 번역어로서의 ‘근대’라는 말을 한국의 ‘개벽’을 설명하기 위해서 차용해서, 그 상대적 특징을 드러내기 위해서 ‘영성적 근대’니 ‘자생적 근대’라는 말을 썼듯이, 이번에는 반대로 한국의 ‘개벽’과 유사한 현상을, 즉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라는 현상을 일본사상사에서 찾아서 적용해 본 용어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근대와 한국의 근대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할 수 없듯이, 한국의 개벽과 일본의 개벽도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토착적 근대’니 ‘비서구적 근대’니 하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시기에 굳이 ‘토착’이니 ‘비서구’니 하는 용어를 쓸 필요가 있느냐는 문제제기에는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적인 용어에 불과합니다. 서구중심주의를 상대화시키기 위해서요. 가령 김치가 한국의 토착음식이라고 할 때, 김치의 재료나 요소가 한국에만 국한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해외에도 김치가 보급되고 있는 상황에서 김치가 한국만의 음식이라는 뜻도 아니고요. 다만 김치라는 음식이 나온 고장이 한국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존재론적으로는 모든 게 연결되어 있지만요. 토착적 근대니 비서구적 근대라는 말도 이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보편이니 지구화니 글로벌이라는 말에 의해서 놓칠 수 있는 한국이라는 로컬이나 지역이나 특수성이었습니다. 이것은 제 전공이 한국사상사이기 때문에 강조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오랜만에 개벽에 대해 쓰고 나니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개벽에 대해 호응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힘이 납니다. 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분들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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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란 국가의 5년을 결정짓는 중대사다. 그것은 국가의 경제성장과 발전 그리고 민주주의와 정치발전 등 전체 국가사회와 국민들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결정짓는 갈림길이었기에 언제나 중요했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선거는 그 중요한 대선 중에서도 중요하다.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선이다.

앞으로 5년이 우리의 ‘운명’과 ‘생존’을 결정한다

벌써 1년이 훨씬 넘게 코로나 감염병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과 같은 이런 상황은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계속될지 알 수도 없다. 더구나 코로나 감염병 사태의 장기화에 따라 이 땅의 자영업자들은 도탄에 빠지고 청년 일자리는 반 토막 났다. 이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심각했던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게다가 부동산 폭등은 자산 격차를 가장 극적으로 크게 확대시켰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더이상 악화될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폭발 직전에 놓여 있다.

한편, 기후위기는 흔히 다음 세대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심각성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캐나다 등 북미 대륙의 50도에 이르는 폭염, 독일과 벨기에 그리고 중국과 인도를 강타한 유례 없는 폭우와 그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를 목도하고 있다. 이제 기후위기는 우리 다음 세대가 아니라 우리들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잇달아 나오고 있다.

10년이 아니라 당장 다가올 5년이 가장 중요하다. 그 5년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결정적인 5년이다. 실로 하루하루가 금쪽같은 5년이다.

지금 이 ‘戰時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사실상 ‘전시 상황’에서 삶을 위태롭게 이어가고 있다. 평시(平時)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전시(戰時)’다. 그러나 이러한 세기말적인 상황에서 거꾸로 극단주의가 휩쓸 가능성도 상존한다. 미국에서 트럼프와 같은 망나니가 출현한 것은 결코 돌연변이가 아니다. 선거란 온갖 거짓 공약과 인기 발언, 헛된 환상과 혹세무민이 판치게 된다. 그래서 본래 선거에 의해 좋은 인물을 선출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번 대선은 평범한 대선이 아니라 그야말로 우리의 ‘운명’과 ‘생존’을 가름하는 절체절명의 중차대한 선거다. 이번 대선을 통해 반드시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해소하고 기후위기를 극복해내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반드시 정말 좋은 지도자를 선출해야 한다. 거꾸로 만약 이번 선거에서 ‘탐욕의 화신’ 이명박이나 ‘오방색 비선실세’ 박근혜와 같은 인물을 뽑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 모두의 운명은 마치 “폭풍 앞의 등불” 신세로 천 길 낭떠러지 백척간두에 서게 된다.

‘관료’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이것이 차기 정부 성패 좌우한다

다음 정부에서 수행해야 할 원칙과 과제는 실로 많을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다음 정부가 꼭 명심해야 할 두 가지 점만을 짚고자 한다.

첫째, ‘관료 통제’의 문제이다. 어느 정부든 집권 초 몇 달만 반짝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듯하다가 시간이 좀 흐르게 되면 모든 것이 관료들에 포획되어 그들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되고 만다. 기재부는 언제나 국가재정이 마치 자신들의 재산인 듯 간주하며, 검찰이나 법관이나 그 출신들은 마치 나라의 법률이 오직 자신들에게만 전속되어 있는 양 사고한다.

부동산 폭등으로 김수현이나 김현미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물론 그들의 능력과 관점에 큰 문제점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LH를 포함하는 국토부 관료(그리고 이들과 ‘이심전심’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른 부처 고위관료)들도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배후세력이다. 관료들이란 본능적으로 그리고 항상 기꺼이 오직 관행과 기득권 그리고 대자본의 편에 선다. 그리하여 이를테면, 심각한 기후위기 극복의 과제도 관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면 아무 일도 못하게 될 가능성이 불 보듯 뻔하다. 그들은 모든 일을 해태하면서 그 어떠한 진전도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탁월한 ‘원초적 본능’을 보유하고 있다.

차기 정부의 성패는 관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함으로써 ‘관료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 구조’를 바꿔낼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지도자의 의지와 능력이 가장 중요하며 동시에 ‘관료 통제’의 제도적 장치가 반드시 준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공동 운영하는 ‘명신(名臣)’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원칙은 명신(名臣)의 존재이다. 우리 모두 잠시 생각해보자. 현 정부에서 기억에 남는 장관이나 참모가 있는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좋지 않은 경우로 물러난 ‘유명한’ 참모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탁월한 능력이나 성과에 의해 이름을 날린 사람은 단 한 명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종은 훌륭한 임금이었지만, 세종과 함께 황희, 맹사성, 허조, 정인지, 김종서 등의 명신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명군으로서의 세종의 치세가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상 명군 옆에는 항상 명신이 존재했다. 유명한 당 태종이나 한 무제 역시 유능하고 뛰어난 명신과 참모들의 보좌가 있었기에 마침내 성세(盛世)를 이루고 역사에 남는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한 명의 대통령만에 의해 좋은 정치와 성과를 내기 어렵다. 이 어려운 시기, 유능하고 탁월한 인물을 발굴하고 기용하여 함께 국정을 공동 운영함으로써 반드시 좋은 성과를 이뤄내야 할 것이다.

 

소준섭

화, 2021/07/2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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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광복절 광화문 집회로 한국의 코로나19 양상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그것은 단순히 확진자 수의 급증과 확진 속도의 증가 등 의학적 또는 양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편의상 광화문 집회 이전을 코로나19 제1기, 이후를 제2기로 나누어 부르도록 하자. 이렇게 시기를 나누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코로나19가 비추는 한국사회의 모습이 광화문 집회를 전후로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제1기에도 물론 초기에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분열이 두드러졌다. 새로운 감염병을 ‘우한폐렴’으로 부르며 중국에 대한 봉쇄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신천지 신자 감염으로 확진자 수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그런 정치적 분열이 더욱 커지는 듯했다. 그러나 정부-산업-의료계의 발 빠른 협업으로 감염병 차단에 성공하면서, 특히 외국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국의 감염병 대응에 대한 찬사가 그런 정치적 분열을 중화했다.

물론 정치적 대립의 양상 속에서도 시민들은 여야 성향을 막론하고 정부의 감염병 대응에 매우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의 잦아듦이 순전히 서구 언론의 공적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서구 언론에서 포착한 지점이 바로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라는, 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의 언론들은 ‘어떻게 이런 특이한 현상이 한국에서는 가능한가?’를 분석하느라 열심이었다. 특히 처음부터 대중국 봉쇄정책을 폈던 대만, 싱가포르와 달리 봉쇄정책 없이 감염병 대응에 성공한 한국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나 정작 그들 또는 그들이 지면을 할애해준 자국 전문가나 재외 한국인 학자들의 의견 중 대세는 ‘유교 문화’나 그와 관련된 ‘집단적 순응성’, ‘독재 경험으로 인한 파시즘적 경향’ 등 봉쇄정책을 폈던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과 별 차별성이 없는 내용이었다. 한국에 우호적인 마이클 샌델이 ‘공동체 감성’이라는 그나마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순응성이나 집단주의, 독재 등이 부정적이거나 전근대성을 암시하는 표현인 만큼, 외국의 언론에서 이런 표현들은 대체로 한국 정부의 확진자 추적 및 정보 공개와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특히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법을 갖춘 유럽에서 그와 같은 원색적 비난이 돌출했는데, 거기에 재외 한국인 학자들이 가세하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관점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정부 기관의 확진자 정보 추적은 법적 기반을 갖는 것이고, 그 법은 과거 메르스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질 수 있었다. 즉 그것은 한국사회의 ‘독재 적응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염병 대응에 대한 이전 정부의 무능함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것이다.

물론 법 제정이나 집행에 있어서 개인정보 관련 사회적 논의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마땅히 지적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개인정보 인권 감수성이 서구보다 미약하게 관찰되는 경우에도, 순응성이나 집단주의 문화로의 환원은 분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화적 편견을 재생산하는 오리엔탈리즘에 가깝다. 그뿐 아니라 과거 스페인 독감 이후 ‘전염병의 위력’을 완전히 잊은 듯한 서구에서 일어난 ‘마스크’에 대한 적대감과 지리멸렬한 논쟁은, 그러한 오리엔탈리즘이 문화적 차별주의뿐만 아니라 비과학적 태도와도 결합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와 달리 공동체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샌델은 한국사회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착한 임대인 운동’이나 의료인들의 대구 자원봉사 지원과 같은 긍정적 현상들에 기초하여 한국사회의 ‘공동체 감성’에 대해 평가했다. ‘공동체’라는 개념은 서구의 주류 사회학에서는 전근대성이나 집단주의와 거의 다르지 않게 사용된다. 그리하여 전근대적인 공동체적 연대 관계와 근대적인 기능적 연대를 대립시킨다. 반면에 공동체주의에서 사용하는 ‘공동체’는 이미 기능분화가 진행된 서구 자유주의 사회를 대상으로 ‘공동체적 덕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개념이다. 반면에 과거 사회학에서도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노동계급 공동체’라는 의미에서, 근대적 의미로 ‘공동체’ 개념을 사용했다.

‘공동체’ 개념이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그것의 핵심은 ‘도덕적 가치 또는 문화의 공유’에 있다. 다원주의를 내세우는 자유주의 사회학에서는 가치 중립성을 강조하며 기능분화에 기초한 복잡한 사회에서 도덕적 가치의 공유가 특수주의를 강화하고 보편성을 훼손한다고 본다면,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이나 공동체주의에서는 이념이나 덕성의 공유―즉 공동체적 정체성―에 기초하여 평등 또는 사회정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 개념은 사회구성원이 공통의 정체성을 갖는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민족주의나 흑인문화, 고유문화 등을 강조하는 종속이론이나 다문화주의에서도 공동체 개념을 중시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만이 ‘공동체’ 개념에 반대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주의, 제3세계 민족주의, 공동체주의, 다문화주의 등은 모두 반자유주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 역시 ‘가치의 공유’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보면서 자유주의의 이율배반을 비판하는 관점이 있다.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는 ‘근대 소유계급 남성의 정체성’에 기초한 것으로서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고 이처럼 ‘동질적인 집단 정체성’을 기정사실화하는 모든 관점에 대항하여 ‘차이의 정치학’을 펼쳤다. 따라서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공동체’ 개념이 아니라, 차이를 당연시하는 ‘도시적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1】

 

한국은 공동체 사회인가?

그렇다면 한국사회는 공동체적인 사회인가? 또는 공동체적 감성에 기초하여 한국의 코로나19 대응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공동체’의 개념이 도덕적 가치의 공유라면, 위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대립이 여전히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고, 세대 간 가치변화로 소통이 어려우며, 젊은 층에서는 젠더갈등 역시 역동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제1기에서 공동체적 가치의 공유가 두드러졌다면, 그것은 ‘안전’의 가치, 특히 ‘전염병으로부터의 안전’이라는 매우 특수한 가치의 공유일 것이다. 메르스의 위험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에, 사회적 이질성이 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의 위협 앞에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결속력이 한국사회의 ‘공동체’ 속성이 아니라, 재난 앞에서의 ‘실용주의적 연대’의 성격을 갖는 것임을 보여준 사건이 바로 광복절 광화문 집회였다.

광화문 집회를 계기로, 공동체적이었다던 한국사회에서 이제는 ‘이기주의’가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사회는 다른 기능분화 사회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도 아니고 이기주의적이지만도 않다. 코로나19 제1기에서 ‘공동체적 대응’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국사회의 공동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코로나19 재난에 대한 한국사회 특유의 위험성(risk) 인식이다.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리스크를 번역한 것이다. 즉 현대 기술문명위험의 사회를 ‘재난사회’가 아닌 ‘위험(성) 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는, 재난의 가능성과 현실이 위험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통해 걸러져서 비로소 그에 대한 대응을 부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는 과거 메르스에 대한 공포와 그와 연관된 정권변화 등 일련의 사건들이 만들어놓은 ‘인식 틀’을 거쳐서 코로나19를 인식했고, 그 결과 정부와 산업체, 의료기관이 모두 합심할 수 있었다. 단지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공포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해서 가능한 정부 실패와 의료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기업 이미지 제고와 새로운 이윤의 실현 가능성 등 다양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여, ‘공동체적 연대’가 아닌 ‘기능적 연대’를 가능하게 했다. 제도 실패의 위험에 대한 자각이 한국사회의 이질성과 갈등 속에서도 기능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 요소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연대 속에서 여당의 선거 승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형성된 새로운 정치적 역학관계 속에서 작금의 ‘이기주의’가 ‘공동체 감성’을 거의 완전히 대체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 감성’이든 ‘이기주의’든 둘 다 완성된 속성으로서 존재하는 한국사회의 어떤 본질적 측면이 아니라, 코로나19 감염병과 한국사회의 정치·경제·문화적 재배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회는 전근대적 공동체도 아니고, 독재에 익숙한 순종적 사회도 아니며, 모든 사람이 사회적 덕성에 대한 개념을 공유하는 동질적 사회도 아니다. 오히려 광화문 집회를 전후로 첨예해진 갈등 상황이 우리가 더 잘 알고 있는 한국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코로나19의 위력 아래 연대와 통합이 촉진되었던 제1기의 국면이 이제 정부의 부동산 정책, 의사 증원 계획 등의 환경변화로 인해서 제2기의 ‘이기주의’ 국면으로 전환된 것이다.

 

연대의 희망: 부작용의 정치? 또는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

집단적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이익집단들은 반공동체적 집단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특수 공동체를 형성한 것인가? 이런 물음과 함께, ‘공동체’라는 개념의 중립성 또는 도구적 성격이 드러난다. 즉 ‘공동체’란 단지 특정한 도덕적 감정을 공유하는 집단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찰 수준에 따라서 공동체와 사회 또는 공동체와 이익집단을 상호배제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전환이 가능한 개념으로 사용할 수 있다. 자유주의 사회학에서 주장한 ‘기능분화’ 개념은 이 지점에서 문제가 된다. ‘기능분화’가 공동체의 특수적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는 ‘보편성’의 기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나 페미니즘에서 지적하듯이, 기능분화의 보편성 역시 또 다른 특수주의적 가치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부르주아 특수주의를 노동자계급 특수주의로 바꾸어야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면, 페미니즘은 특수주의 감정의 집단적 동일시 자체를 ‘차이 억압의 기제’로 의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동체는 억압적이거나 이기주의적으로도, 또 더 많은 평등을 위한 연대의 방식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기주의적인 집단적 목소리, 집단감정을 어떻게 ‘선한 영향력’의 테두리 안으로 제한할 수 있는가? 즉 이제 더는 기능적 연대가 불가능한 것인가?

기능적 연대란 개별 이기주의 행태가 사회 각 부문의 기능적 연동 속에서 역설적으로 사회통합의 결과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초창기에 기능주의와 행보를 같이 했던 급진 구성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후기로 가면서, ‘기능적 연대가 불가능해진 세계사회’에 대해 발언했다. 도덕적 가치의 공유가 아니라 기능 및 이해관계의 분화에 기초한 사회라는 측면에서 한국을 비롯한 현대사회는 여전히 기능적 연대 이외의 다른 형태의 연대를 추구하기 어렵다. 집단적 가치의 공유로 회귀하자고 주장할 경우 독재나 파시즘으로 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19의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집단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이기주의적 집단 행태가 불거지면서 과연 ‘연대가 가능한가?’라는 불안감이 증폭하고 있다.

루만처럼 새로운 연대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가 있는가 하면, 새로운 연대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도 있다. 울리히 벡은 산업사회가 위험요소로 계산하지 않은 생태위험이 부메랑이 되어 산업사회를 강타하면서 새로운 연대가 불가피해졌다고 보았다. 단순한 기능적 연대가 아니라, 연대의 기초가 바뀌는 ‘성찰적(또는 반사적, 재귀적)’ 성격의 연대를 주장했다. 기능적 연대의 바탕이 위에서 보았듯이 이기주의―즉 인간의 합리적 이해추구―라면, 새로운 ‘성찰적 연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산업생산의 부작용―특히 생태위험―이다. 이해관계에 갇혀서 ‘기능적 연대’의 불가능성을 키우는 인간이 아니라, 산업에 의해 파괴된 생명체들 또는 지구가 새로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부작용의 정치’를 사회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은 ‘위험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행위자들이다. 따라서 벡은 ‘실용주의적 연대’를 주장했다. 인간의 이해심을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해관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생명을 위협하는 위험 앞에서 시시각각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근대성 비판은 ‘탈근대성’이 아닌 ‘성찰적 근대성’의 방향을 취한다. 말하자면 ‘성찰적 연대’는 생명의 위협 앞에서 실용주의적으로 조율되는 기능적 연대를 의미한다.

반면에 2000년대 이후, ‘탈근대성’에서 ‘탈인본주의’로 방향을 바꾼 새로운 관점이 지적 세계에서 점차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흔히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경향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여타 생명체나 물질의 주체적 행위성을 위계적으로 서열화하지 않는다. 특히 페미니스트이자 입자물리학자인 캐런 버라드는, 인간과 물질이 양자역학적 ‘얽힘’의 관계성 속에 공존하므로 인간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이 아닌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미 ‘책임의 윤리’에 묶여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책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로부터 윤리적으로 추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존재 방식 자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주체성은 인본주의적으로 주어진 속성이 아니라 물질과의 양자역학적 얽힘으로부터 발생하는 사건―반복되는 사건―이므로, 얽힘의 관계 속에서 물질에 응답하는 능력(response-ability)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이란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응답능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코로나19 시대에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연대는 ‘이해관계의 합리성’이 인간 존재 조건의 일부에 불과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적 본성이 아니라 (타인을 포함하는) 물질과의 얽힘으로부터 발생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 즉 우발적인 존재론적 사건을 의미론적으로 규정하고 고정한 것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얽힘이 없으면 그러한 사건도 불가능하므로, 이기주의보다 책임이 더 우선적인 존재의 조건이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이기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자와의 얽힘인 것이다.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특수집단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어떤 얽힘의 결과인지를 인지해야 한다. 자신의 이익 안에 타자의 이익이 배제된 채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이해관계의 정치’가 아닌 ‘책임의 정치’로 전환하도록, 사회의 전반적 인식 역시 ‘인간 본성=이기주의’라는 도식을 버려야 한다. 또 그러한 책임의 정치가 공동체의 도덕으로부터 도출되는 윤리적 문제가 아니라 생명체로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임을 겸허하게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은 ‘책임의 정치’에서는 굳이 공동체적 동질성이라는, 언제든 억압의 기제로 전환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지 않다. 즉 그것은 ‘존재론적 정치’인 것이다.

울리히 벡의 ‘실용주의 정치’는 리스크 개념의 ‘사회적 구성주의’라는 형이상학과 이해관계의 근대적 실재론을 ‘부작용의 정치’를 매개 삼아 절충한 형태이다. 반면에 신유물론의 ‘존재론적 정치’는 이해관계와 같은 사회적 구성물을 ‘사건’으로, ‘얽힘’을 사건의 물질적 발생조건으로 설명함으로써, 책임의 물질적 실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실재론―버라드의 경우 ‘행위적’ 실재론―을 피력한다. 많은 이기주의적 특수집단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코로나19가 단순한 ‘음모’가 아니라 살아 있는 바이러스이듯이, 바이러스의 위협에 처한 사회 역시 단순한 사회적 구성물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인 것이다.

 

【1】 아이리스 매리언 영, 2017, 『차이의 정치와 정의』, 김도균·조국 옮김, 모티브룩.

 

홍찬숙

화, 2020/09/01-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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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공공의료의 다른 이름, 하얀 가운 노예들”. 얼마 전 조선일보에 버젓이 실린 기사 제목이다. 기사 내용과는 별개로 조선일보가 제목을 다는 ‘실력’은 타의 추종을 받는다. 특히 사실관계 확인에는 극도로 인색한 해외지역 사례를 마구잡이로 인용하거나,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숨기지 않는 편파적 보도와 해석들로 국제뉴스의 상당 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기도 한다.

조선일보가 유독 집중하는 라틴아메리카의 두 나라가 있다. 바로 베네수엘라와 쿠바다. 이 두 국가는 소위 ‘사회주의’ 이념 지향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이들 시각에 의하면, 두 나라의 모든 ‘불행’은 자본주의 체제를 따르지 않은 대가였고,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이다. 쿠바와 베네수엘라가 일찌감치 미국의 눈엣가시였으며, 호시탐탐 체제 전복을 노리고 있는 사실을 과연 모르는 자가 있을까.

이 두 체제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미국의 이념적 틀에 편승한 탓일까. 이들 국가를 다루는 국내 주류 언론의 대부분 시각은 시종일관 편협하고 악의적이다. 그런데 때마침 국내에서는 코로나19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번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가 수면에 떠 올랐다. 그리고 이어 의사들의 진료거부가 시작되었고, 이를 바라보는 많은 국민의 시선은 싸늘했다. 환자 생명을 담보로 의사들이 보인 작태에 많은 이들은 분노했으니까.

그래서였을까. 이번에도 조선일보는 ‘시의적절’한 기사, 즉 공공의료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나 대안을 논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덮어버리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로 응수했다. 쿠바 의사들은 이제 ‘하얀 가운 노예들’이 된 것이다. “쿠바는 이웃 국가에 폭탄이 아니라 의사들을 보낸다”라는 피델(Fidel)의 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하얀 가운의 부대”에서 차용한 표현일 게다.

과테말라로 파견된 여의사가 매춘을 강요받는다는 이야기부터, 쿠바 의사들은 반드시 해외 의무복무 기간을 가져야 한다는 터무니 없는 사실, 의사 면허증을 반납하려고 하면 수년간의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는 등, 사실이 아닌 거짓들로 채워진 기사가 보란 듯이 실렸다. 기사의 태반은 출처가 불분명했고, 사실확인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래도 국내 ‘주요’ 언론사인데 사실관계 정도는 확인하는 ‘수고’를 바란다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조선일보가 ‘하얀 가운 노예들’이라 부르는 쿠바의 “헨리리브(Henry Reeve)국제의사파견단”은, 2005년 최초 결성된 이후 재난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 수백만 명에게 긴급의료를 지원한 공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이에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 WHO 사무총장을 지낸 故이종욱 박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이종욱 박사 상(Memorial Prize)”을 2017년에 수상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는 걸까.

이탈리아는 초기 코로나19 사태로 의료체계가 마비되자 쿠바 의사들을 요청한 바 있다. 이에, 쿠바는 화답했고 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한 약 52명의 의료진을 파견했었다. 이후 약 두 달간의 임무를 끝내고 고국 쿠바로 돌아온 의료진들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전파를 탄 적이 있다. 마침 이 방송을 함께 보고 있던 쿠바 친구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들 눈에 새겨진 세 글자! ‘잘난 척’. 그랬다. 그것은 그들의 자랑스러움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무사히 귀국한 의사들을 환영하는 방송에서는 그들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와중이었다. 이때, 무뚝뚝하게 진지한 말을 곧잘 던지는 친구는 혼자 웅얼거리듯 말을 내뱉는다.

“우리는 영웅이 될 생각이 없어. 그저 의사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지”.

그렇다. 소위 ‘국뽕’ 방송이었다. 마치 올림픽에서 메달을 타거나 자국의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들을 맞이하는 세계 여느 국가들이 보여주는 흔한 방송이다. 방송사가 이른바 ‘국위선양’ 이슈를 다루는 유난스러움도 만국 공통이다. 이에 시니컬하게 반응하는 친구도 평범한 시청자의 모습일 뿐이다.

의사가 되려는 의대생들이었기에, 그들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나는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던 터였다. 미래 쿠바 맨발의 의사들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주위의 모든 의대생이 이런 교과서 같은 말을 툭툭 던지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도 다양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니까. 낮은 임금에 불만을 가진 아이들도 있고, 공부를 다른 전공보다 많이 해야 하는 너무 ‘당연한’ 현실에 구시렁거리는 아이들까지. 그럼에도 이들 모두 그들의 미래 직업을 자랑스러워한다. 의사가 되고 싶고, 그 직업을 대하는 각자의 각기 다른 이유야 내가 어찌 다 알 수 있으랴마는.

쿠바는 이번 코로바19사태로 적어도 30여 국가에 의료진을 파견했고, 그들의 안전한 귀국을 기원하는 “박수”소리가 매일 밤 9시면 동네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졌다. 해외 파견된 의사들을 기다리는 가족, 친구이자 연인들이고 이웃이기도 한 쿠바 지역 주민들의 응원과 기원이 담겼다. 이들 모두는 쿠바 의사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왜 굳이 이들을 ‘하얀 가운 노예들’로 둔갑시켜야 했을까.

돌연 쿠바 의사들의 ‘인권’이 걱정된 것은 아닐 테니, 오랜만에 다시 한국 사회의 수면으로 떠 오른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가 못내 못마땅했다고밖에는 읽히지 않는 이유다. 합리적 의견들을 수렴하여 공공의료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도조차 쿠바 공공의료에 대한 거짓 뉴스를 유포하는 것으로밖에는 응답할 만큼 궁색한 것인가! 그도 아니면, 이 시국에 선정적 뉴스 제목으로 클릭 수를 늘리려는 기자 한 개인의 ‘일탈’로 봐야 하는가! 진실이 무엇이든 분명한 것은 쿠바 의사들을 ‘매춘부’와 ‘노예’로 소개한 이들의 볼썽사나운 저널리즘은 당분간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공공의료가 못마땅할 수도 있고 쿠바의 사회시스템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거짓과 날조된 사실로 채운 기사가 아닌 진실과 확인된 사실에 근거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번 조선일보 기사가 적어도 영어판으로라도 실리지 않는 이상 쿠바 사람들이 이 기사를 읽게 될 확률은 제로다. 따라서, 당사자들의 항의를 받을 가능성도 없다. 이 기사는 오롯이 대한민국 국민만을 겨냥한 가짜뉴스인 셈이다. 우리도 ‘대충’ 그냥 넘겨버리곤 한다. 사실관계를 굳이 확인해야 할 만큼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지장을 주지는 않으므로. 그래서일까. 이렇게 고약하고 악의적인 해외 기사가 계속해서 판을 치는 이유가 말이다.

 

정이나

화, 2020/09/0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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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64조 제1항은 “국회는 법률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의사(議事)와 내부규율에 관한 규칙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은 국회의 의사와 내부규율을 ‘법률’이 아니라 ‘규칙’의 형식으로 규율해야 한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독일, 영국 등 서구 국가 의회들은 의회 내부의 조직과 의사절차를 ‘법률’이 아니라 ‘의회 규칙’이라는 형식으로 정하고 있다. 즉, 대부분 국가의 의회에서는「의회법」, 혹은 「국회법」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에 의해 새로 선출된 새로운 입법자로서 새로운 회기의 의회에 대한 ‘형성적인’ 권한을 갖고 자기 규율을 정해야 한다는 취지에 부응하여,「의회법」대신「의사규칙」을 제정하여 운용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하원의 경우, 의회가 새로 시작될 때마다 전기(前期) 의회의 ‘규칙’을 개정하기 위하여 규칙위원회가 구성된다. 다만 매 회기 의사규칙이 개정되기는 하지만, 그 변화의 폭은 일반적으로 제한적이다. 상설위원회인 규칙위원회는 다수당이 다수를 차지하며, 하원 지도부의 강력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국회법이란 형식은 한국과 일본뿐

우리나라가 「국회법」을 제정한 것은 역시 일본의 「국회법」을 그대로 ‘이식’하고 답습하여 모방했기 때문이다. 즉, 「국회법」은 일제 잔재인 셈이다. 우리의 제헌 국회가 가장 먼저 가결한 법률은 바로 「국회법」이었다.

근본적으로 얘기하자면, 입법자인 국회는 4년마다 그 의회기가 바뀌고 그 구성원이 바뀌면서 의회의 ‘불연속성’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이전의 처리되지 못한 법안들도 폐기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런데 우리 국회처럼 이전 의회기(예를 들어, 19대)의 입법자들이 해당 의회기 국회를 위해 만든 의사규칙을 국회법의 형태로 굳힘으로써 다음 의회기(예를 들어, 20대) 및 그 의원들에 자동적으로 적용되도록 강제하여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우리 국회가 항상 의사절차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논란을 거듭해온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의회제도 자체가 불안정한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보완하는 의미에 있어서 국회법의 존재가 의회 안정화라는 기능을 그나마 수행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직성 강한 국회법대신, 매 회기마다 의사규칙새로 제정해야

하지만 지금의 「국회법」은 국회의 구성과 조직에 관한 기본 원칙 외에 국회 운영의 일반 원칙까지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는 경직성이 강한 국회 구성 및 조직 문제와 정치적 수요 및 상황에 의하여 가변성이 큰 국회 운영의 일반 문제가 하나의 법질서 하에 놓이게 됨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국회법」 자체의 관리에 난점이 초래될 뿐만 아니라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야 할 국회 운영에 관한 규정이 가이드라인만 제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국회법을 버려야 국회가 산다

특히 그간 우리 국회는 독재 권력에 의해 끊임없이 왜곡되고 비정상화되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곧 지속적인 「국회법」개악을 통한 제도적 무력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소한 「의사규칙」에 비하여 경직성이 대단히 강한 이 「국회법」은 그간 우리 국회에서 변경할 수 없는 철옹성의 관행적 질서로 작동되어왔고, 한편으로는 국회 스스로 그 틀에 그대로 안주하면서 우리 국회의 왜곡과 비정상화가 지속되었다. 그 결과는 바로 오늘날의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극심한 불신으로 표출되고 있다.

만약 다른 나라 의회처럼 새로 구성된 국회가 새로운 ‘의사규칙’을 규정하는 시스템이라면 매 회기마다 이러한 독재 권력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회법」이라는 형식과 틀로써 국회 운영을 결정해온 우리 국회는 이러한 기회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전진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상적인 경로가 필요하다. 우리 국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국회법’이 아니라 세계 의회의 보편적 모델인 ‘의사규칙’ 형식이 바람직하다.

사실 ‘대의기구로서의 핵심사항 및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국회법에 국회 소속 공무원인 전문위원의 ‘전문 조항’을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커다란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또한 현재의 국회법은 제21조에 국회사무처 조항을, 제22조에 국회도서관, 제22조의 2항에 국회 예산정책처, 제22조 3항에 국회 입법조사처 조항을 두고 있다. 그런데 국회법이란 국민의 대의기구로서의 핵심사항과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사무처와 도서관 등의 국회 내 입법지원기구를 국회법에서 별도의 조항으로 두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원래는 아래 (자료1)의 1960년 국회법에 국회도서관 조항이 처음 규정되었는데, 이때의 조항 규정이 (자료2)의 형식보다 더 합리적이다.

<자료1>

第24條(國會圖書館) 議員의 調査硏究에 資하기 爲하여 따로 法律의 定하는 바에 依하여 國會에 國會圖書館을 둔다(1960년).

<자료2>

第22條(國會圖書館)

①國會의 圖書 및 立法資料에 관한 業務를 처리하기 위하여 國會圖書館을 둔다.

②國會圖書館에 圖書館長 1人과 기타 필요한 公務員을 둔다.

③圖書館長은 議長이 國會運營委員會의 同意를 얻어 任免한다.

④圖書館長은 國會立法活動을 지원하기 위하여 圖書 기타 圖書館資料의 蒐集·整理·보존 및 圖書館奉仕를 행한다.

⑤이 法에 정한 외에 國會圖書館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은 따로 法律로 정한다(1988년).

참고로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일본 국회법 제130조에 “의원의 조사연구에 자문하기 위하여 별도로 정한 법률에 의하여 국회에 국립국회도서관을 둔다.”라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국회법 제42조에 별도로 ‘전문위원과 공무원’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 역시 대의기구로서의 핵심사항과 기본 원칙을 규정하는 국회법의 취지상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국회 소속 입법지원기구인 국회도서관, 입법조사처, 예산정책처 규정을 비롯하여 전문위원 등 국회소속 공무원에 대한 규정은 국회법이 아니라 하위 규정인 시행규칙으로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소준섭

수, 2020/09/1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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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이재욱 소장입니다.

「다른백년」을 통해 여러 분들과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農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분들과 만나겠습니다.

“농(農)”은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을 아우르는 말입니다. 농업・농촌・농민을 ‘삼농’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 농지가 있습니다. 농지는 농업, 농민에 묶여 있는 개념이지만 ‘경자유전의 원칙’이 무너지면서 농의 문제를 얘기할 때 농지도 중요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네 개의 개념들을 어느 하나만 떼어서 얘기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각각의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농업・농촌・농민・농지를 묶어서 ‘農’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농의 문제는 모두 이 네 개의 문제입니다.

 

◎ 농업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율은 50%가 되지 않습니다. 곡물자급율은 23% 정도밖에 안됩니다. 신자유주의 농정을 추진하면서 우리 농업은 강제로 경쟁력에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전체 농민의 90%가 농업소득 천만원 이하입니다. 농외소득이나 자가소비분까지 다 합친 농가소득은 도시 근로자 평균 소득의 60%정도 밖에 안됩니다. 더 이상 소득보장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농민들이 농민수당이나 농민기본소득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는 이유입니다.

이촌향도(離村向都)의 이농이 본격화된 후 농업노동력이 급격히 줄어 들었고 이로 인해 기계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농업노동력이 부족해 지면서 외국인 농업노동자들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농산물은 석유와 외국인노동자들이 생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것이 농업의 문제입니다.

 

◎ 농촌

농촌은 원래 농사짓는 농민들이 사는 마을을 말합니다. 그런데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농촌이 공동화(空洞化) 되었습니다.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태어나는 아기가 없고 농촌의 학교는 폐교가 되고 60대 이상 고령자들이 대부분인 노인마을이 되었습니다. 비어가는 농촌을 별장, 펜션, 전원주택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이제 농촌은 ‘농민들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농지가 가까이 있는 마을’로 재정의 해야 할 지경입니다. 그나마 경관이 좋거나 서울 등 대도시에서 가까운 마을은 살려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외딴 벽지 마을은 아예 소멸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2028년이 되면 인구정점에 이르고 그 이후 인구절벽이 시작되어 급격히 인구가 줄어들어 소멸되는 시・군이 생길 거라고 예측합니다. 그런데 농촌의 소멸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1개 리에 30세대만 살아도 많이 산다고 합니다. 소멸되는 마을이 늘어나고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농촌은 인정없는 마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농촌문제입니다.

 

◎ 농민

젊은이들이 떠난 농촌은 이제 늙은 농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농사를 이을 자식이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으면 할아버지 농민은 은퇴를 합니다. 그리고 손자를 보고 대를 이은 자식이 짓는 농사의 보조자가 됩니다. 이렇게 은퇴를 하던 할아버지 농민들이 이제 자식도, 손자도 없는 농촌에서 70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자식들이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서 하는 승계농은 전체 농가의 10%도 되지 않습니다. 그 나마 이런 승계농의 대부분은 대규모 축산농이나 벼농사를 크게 하는 대농들의 자식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간 이동 차단이 되어 물류이동도 원활하지 못한 상황이 이어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의 수급도 어려워진다면 국내 농업의 생산력을 시급히 올려야 하는데 이제 농사지을 농민들이 없어서 농업진흥정책을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농사를 누가 지을 것인가. 비농민 출신들이 농촌으로 이주해서 농사를 지으려면 어떤 뒷받침이 필요할까? 농민들의 재생산 문제도 심각합니다. 농민의 문제입니다.

 

◎ 농지

우리나라 헌법 제 121조 1항은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되어 있습니다. 1950년대 농지개혁으로 우리나라 농지의 90%가 농민들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자작농의 시대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경제개발을 하면서 저곡가, 저농산물 정책으로 인해 생산비도 안되는 농사를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났습니다. 농촌을 떠나는 농민들의 땅은 남아있는 농민들이 사야하는데 농업소득으로는 땅을 살 형편이 안되니 도시사람들에게 팔렸습니다. 경자유전의 원칙은 허물어지고 비농민과 투기자본이 땅을 살 수 있는 규제완화가 이어졌습니다. 지금은 전체 농지의 50% 이상이 비농민 소유입니다. 지역에 사는 농민들의 이름을 빌려사는 명의 신탁 농지까지 합치면 70% 이상이 비농민에게 넘어갔다고 합니다. 개발이익을 기대한 투기자본들이 농지를 잠식하고 헌법의 원칙은 무너졌습니다. 앞으로 개헌을 하면 사문화된 경자유전의 원칙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오는 후계농들은 농지를 구하기가 어려워 안정적인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농지의 문제입니다.

 

‘농의 재구성’은 이런 농의 문제를 수면위로 올리고 대안을 제시해 나갈 것입니다. 각각의 주제를 분리하여 다루기도 하고 연결하여 드러내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또 마을과 지역의 이야기들을 사례로 들어가며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로 인해 빚어지는 농의 위기와 국민 먹을거리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농업을 다시 살려야 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사는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리면 8천 만이 함께 먹는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그런 중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부의 농업 정책은 이런 위기감과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려는 국가적 고민이 없어 보입니다.

농의 문제를 고민하는 농업 전문가들은 지금 우리 농업을 살릴 마지막 기회라고 합니다.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골든 타임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참 안타까운 시간들이 흘러갑니다.

농업예산을 획기적으로 재편성하고 대통령 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및 농림부와 농촌진흥청, 농어촌공사, 농식품유통공사, 농촌경제연구원 등 산하기관들이 협력하고 융합하여 농업정책을 새로 짜고 강력하게 추진하여야 합니다.

 

이재욱

월, 2020/09/2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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