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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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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익명 (미확인) | 목, 2019/01/24- 17:52

식민지 비망록 43

행려병인 수용소였던 경성불교자제원의 공간 내력

– 러일전쟁 때 일본군 숙영지로 징발된 초자제조소가 있던 자리

 

이순우 책임연구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듬해에 나온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광고란에는 다음과 같은 행려사망(行旅死亡)에 관한 내용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1. 본적: 미상 2. 주소: 미상 3. 성별: 여, 성명 나혜석, 연령 53세 4. 인상(人相): 신장 4척 5촌, 두발 장(長), 수족 정상, 입 코 눈 귀 정상, 체격 보통, 기타특징 무(無) 5. 착의(着衣): 고의(古衣) 6. 소지품: 무 7. 사인(死因): 병사 8. 사망장소: 시립자제원(市立慈濟院) 9. 사망년월일: 단기 4281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 취급자 서울시 용산구청장 명완식(明玩植) 단기 4282년 1월 3일

나혜석의 행려사망 사실이 기록된 『관보』 1949년 3월 14일자의 해당 지면

 

관보의 말미에 겨우 수록된 행려 사망자의 내역까지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지는 참으로 의문이지만, 여기에 언급된 나혜석은 시대를 앞서 살아간 천재예술가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바로 그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러니까 결국 그
는 철저하게 여느 사람들의 망각 속에 최후를 맞이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나마 여기에 기재된 이름 석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의 죽음에 관한 이토록 희미한 기록마저 영영 잊힐 뻔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숨진 곳은 ‘시립자제원’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곳은 일제시기 의료구호기관이던 경성불교자제원(京城佛敎慈濟院, 원효로 1가 12번지)이었고, 해방 이후에 ‘서울시립 자혜병원’ 시절을 거쳐 1960년 1월 1일에는 시립남부병원(市立南部病院)으로 전환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 병원이 서울중부병원과 합쳐 1977년 7월 2일에 시립강남병원으로 통합 이전된 뒤에는 도로확장공사 탓에 부지 일부를 상실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원효로 1가 25번지)가 이곳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자리의 내력이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그 흔적이 저 멀리 1904년 러일전쟁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용산시가도> (1929)에 나타난 ‘불교자제원’의 위치이다. 바로 인접한 곳에 선립상업학교와 일본인 사찰 서룡사 및 흥국사가 포진한 것이 눈에 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각사등록(各司謄錄)> ‘외부일기(外部日記)’ 1904년 2월 17일자에는 일본공사관의 조회(照會)를 통해 “우리 북진군(北進軍, 일본군)이 내일 18일에 약 2만 명 내외의 병력이 일시 경성에 도착하여 2, 3일 머문 후 발정할 예정이므로 이들이 머물 곳으로 경복궁 안의 사용 무방한 청사를 일시 빌려서 이들 병력의 숙소로 충당”하겠다는 내용이 전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아울러 “일본공사의 알현시 용산에 있는 별영창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및 정미소(精米所) 3곳도 신속히 차용하기로 윤허를 받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서울 인근에 일본군 병력이 대거 밀려들게 되자 당연히 이들이 묵을 공간 확보 문제가 긴급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이에 따라 한국군 주둔지와 다수의 관공서 또는 학교 터가 징발되어 그들의 숙소로 제공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경성부사(京城府史)> 제1권(1934), 731쪽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 18일 이후의 입성병(入城兵)에 대해서는 일본인측 가옥으로는 가장 먼저 수용의 여지가 없어졌으므로 한국 측으로부터 용산 별영창(龍山別營倉, 현 원정 3정목 조선서적인쇄회사 내의 옛 건물), 초자제조소(硝子製造所, 경성 원정 1정목 경성불교자제원의 부지 내), 서대문밖 평양병병영(平壤兵兵營, 현 죽첨정 1정목 서대문경찰서 적십자병원 부지 내 일대의 지점), 서소문안 시위제일대대(侍衛第一大隊, 현 서소문정 120번지 총독부 관사 부지의 일부), 통내(統內) 친위제일대대(親衛第一大隊, 현 연지동 전매지국의 부지 내), 동궐 앞 친위 제이대대(親衛第二大隊, 현 운니동 99번지 이왕직분실), 저동 공병대(苧洞 工兵隊, 영락정 1정목 전매국 부지 내)의 각 병영 및 명동 장악원(明洞 掌樂院, 현 황금정 2정목 동척회사 부지의 서남 모서리), 필동 잠업과(筆洞 蠶業課, 현 앵정정 2정목 186번지의 지점) 등의 여
러 장소를 빌려 받아 숙영(宿營)했다.

여기에서 용산 별영창의 위치를 ‘조선서적인쇄회사’라고 적어 놓은 부분은 잘못된 설명이다. 별영창은 원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속한 군병들의 급료 지급을 맡았던 한강변 창고이며, 한강 조망이 빼어난 것으로 유명했던 읍청루(挹淸樓, 청암동 168번지)라는 누각도 이곳의 구역 내에 함께 있었다. 위의 글에서 ‘원정 3정목’에 있다고 잘못 적어 놓은 것의 정체는 군자감 강감(軍資監江監, 원효로 3가 1번지 일대) 터를 말하며, 이곳에는 용산 전원국(龍山 典圜局)과 총독부 인쇄국에 이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朝鮮書籍印刷株式會社)를 거쳐 1936년 12월 이후에는 체신이원양성소(遞信吏員養成所)가 들어서게 된다.
앞의 내용에 등장하는 ‘초자제조소’는 대한제국황실에서 필요한 유리창을 조달하기 위해 만든 ‘ 유리제조공장’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조선신문> 1925년 5월 19일자에 게재된 경성불교자제회 실비진료부의 광고 문안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포함된 「한정(韓廷) 고용 외국인 해용(解傭) 처분에 관한 건(1904.5.30)」에 따르면, 유리제조기사로 초빙된 러시아인 화학교사 메이로(Meiro)와 내장원경 이용익(內藏院卿 李容翊)사이에 고용계약이 성립한 것은 1902년 1월 31일의 일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이 당시 “대한정부
의 한성(漢城) 및 부근지에 건립될 황실유리창 공역에 투입된 기계검사와 제조 등의 사무”가 그에게 맡겨진 임무였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오래지 않아 러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러시아인 기사가 퇴각함에 따라 버려진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인 거류민단의 이시이 신(石井信)과 소가 츠도무(曾我勉)가 주축이 되어 한국정부로부터 이곳을 무상 양수하여 전염병자를 위한 한성병원 부속 청파피병원(靑坡避病院)을 설립하였다고 알려진다. 그리고 나중에 이곳에 들어선 것이 바로 ‘경성불교자제원’이었다.

 

옛 초자제조소 자리에 들어선 ‘경성불교자제회 부설 실비진료소’의 입구 모습이다. (<조선사회사업요람>, 1924)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자에 수록된 행려병인구호기관 ‘불교자제원’에 대한 탐방기사이다.

 

이 단체는 원래 1908, 9년 무렵 ‘대곡파 본원사 경성별원’, 즉 동본원사(東本願寺, 남산동 3가 33번지)의 경내에 행려병인의 구호를 위해 설립한 것이 시초였으며, 차츰 수용자가 증가하자 1917년 4월 20일에는 경성각파불교사원연합회(京城各派佛敎寺院聯合會)의 성격을 지닌 경성불교자제회(京城佛敎慈濟會)가 성립되어 이곳의 새로운 경영 주체가 되었다. 또한 1921년 7월 1일 이후에는 행려병인의 수용 이외에 일반구료(一般救療)를 목적으로 하는 실비진료소(實費診療所)를 두는 한편 양로구조(養老救助)의 업무도 개설하기에 이른다.
옛 청파피병원 터에 경성불교자제회가 옮겨온 시기에 관한 자료는 <매일신보> 1918년 2월 1일자에 실린 「수용소 준공기(收容所 竣工期)」 제하의 기사를 참고할 수 있다.

 

경성부(京城府)에서 행로병인수용소(行路病人收容所)에 관하여는 본지(本紙)에 누차 보도함과 여(如)하거니와 용산 청파(龍山 靑坡) 원 피병원적(元 避病院跡)을 개축하여 차(此)에 당(當)할 계획인데 기(旣)히 부(府)에서 경성불교자제회 기타(其他)에 인계하여 총독부(總督府)에서 보조금(補助金) 5천 원(圓)도 하부(下附)가 될 터인즉 지(遲)하여도 4월까지에는 차(此)의 준공을 견(見)함에 지(至)하겠더라.

 

이 조직은 1936년 12월에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그 이름도 ‘경성불교자제원’으로 변경하는데, <조선총독부 관보> 1937년 4월 28일자에 게재된 ‘법인조합등기’ 항목에는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법인설립
▪ 명칭: 재단법인 경성불교자제원 ▪ 사무소: 경성부 원정 1정목 12번지 ▪ 목적: 불교의 정신에 기초한 자선구제의 사업을 행함 ▪ 설립허가 연월일: 소화 11년(1936년) 12월 18일 ▪ 자산총액: 금 59,792원(圓) 55전(錢) ▪ 출자의 방법: 일반 기부 및 기타의 수입 ▪ 이사의 씨명 주소: 경성부 서사헌정 166번지 이사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경성부 서사헌정 산4번지의 5 이사 우에노 쐌에이(上野舜頴), 경성부 대화정 3정목 26번지 이사 타케오 라이쇼(嶽尾來尙), 경성부 장사동 182번지 이사 카잔 타이기(華山大義), 경성부 약초정 107번지 이사 고토 쵸신(後藤澄心), 경성부 본정 3정목 50번지 이사 쿠가 지코(久家慈光), 경성부 남산정 3정목 33번지 이사 우에노 코진(上野興仁), 경성부 원정 1정목 18번지 이사 후지 토넨(富士洞然), 경성부 한강통 11번지 이사 카토 칸센(加藤觀穿) ▪ 대표이사: 이사장 카메야마 코오(龜山弘應) 여기에 수록된 이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광운사(光雲寺, 고야산 경성별원), 박문사(博文寺), 조계사(曹谿寺), 묘심사(妙心寺), 약초관음당(若草觀音堂, 진종본파 본원사별원), 정토종 개교원(淨土宗 開敎院), 동본원사(東本願寺), 서룡사(瑞龍寺), 용광사(龍光寺) 등 경성 지역에 두루 포진한 일본인 불교사찰들의 주지 또는 포교관리자가 망라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일신보> 1941년 11월 13일자에 수록된 「총후사회사업시설(銃後社會事業施設)의 이모저모 (5) 행려병인 구호, 불교자제원 편」 제하의 탐방기사에는 설립 이래 이곳에서 수용구제를 받은 연인원(延人員)이 21만 740여 명이고, 사망자도 3,540여 명에 달한다고 적고 있다. 또한 이들은 대개 농촌을 떠나 직업을 찾아서 도회지로 나왔으나 변변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거리를 전전하다가 병마로 쓰러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잘 걸리는 병으로는 폐결핵이 40퍼센트, 위장병이 30퍼센트의 순서이고 사망률도 15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나혜석의 경우에도 일제패망기 이후 경성양로원(京城養老院, 청운동 산4-3번지; 청운양로원)과 경성보육원(京城保育院, 옥천동 126번지)의 안양농장, 그리고 공주 마곡사 등지를 떠돌아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끝내 1948년 11월 무렵에 경성불교자제원의 후신(後身)인 ‘시립자제원’에 간신히 정착을 시도하였으나 불과 한 달여 만에 질병으로 인한 최후를 맞이 하였던 것이다.

<동아일보> 1956년 1월 31일자에 수록된 ‘김창룡 저격사건의 현장약도’. 여기에 묘사된 ‘자혜병원’ 바로 앞 사건현장은 도로구조가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이 지금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경성불교자제원에 관한 흔적을 찾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치게 되는 별스러운 기록 하나가 있다. 일본군 헌병오장 출신으로 자유당 시기 육군특무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창룡(金昌龍, 1916~1956)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저격되어 죽은 곳이 바로 자혜병원(慈惠病院, 시립자제원) 앞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날 아침 ‘원효로 1가 17-5번지’ 자택에서 짚차를 타고 ‘원효로 1가 51번지’ 지점을 지나는 도중에 다른 짚차로 길을 막아선 저격자(옛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가 쏜 여러 발의 권총탄에 맞아 피살된 바 있다.
겉으로만 보면 행려병자의 구호기관이 오랜 세월 터를 잡았던 곳으로만 인식되기 십상이지만, 그 내면을 파고들면 이곳 역시 근현대사의 굴곡이 제법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공간임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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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섬마을 사찰, 징용자 유골 거둬들이며 추도식
해방직후 귀국선 난파로 숨진 희생자 유골, 고향 못가고 日 곳곳 전전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한때 일본 정부의 창고까지 가며 갈 곳을 잃었던 한국인 유골들이 일본 섬마을의 사찰에서 새로운 안식처를 찾았다.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는 31일 낮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종교인 등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열고 징용 희생자와 가족 등을 포함한 한국인 유골 131위를 이 절에 안치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유골들은 지난달 중순까지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있다가 일본 후생노동성의 창고와 다름 없는 보관시설로 옮겨지며 안타까움을 샀던 것들이다.

곤조인측이 내부 사정상 유골을 더 보관하기 어렵다고 밝히자 갈 곳을 잃었던 유골들은 덴코쿠지의 수용 의사 덕분에 이 절로 옮겨지게 됐다.

당초 일본 정부는 덴코쿠지 이전에 반대했지만,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압박을 가하자 결국 이날 덴코쿠지에 유골을 전달했다.

이들 유골은 해방 직후 귀국선을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다가 태풍으로 조난해 숨져 덴코쿠지가 있는 이키섬 등에 떠내려온 것들이다.

1976년 일본 시민들이, 1983년 일본 정부가 각각 이키섬과 인근 쓰시마(대마도·對馬島)에서 수습한 유골들로, 일본 각지의 여러 사찰을 돌며 보관됐다가 다시 이키섬으로 돌아와 덴코쿠지로 옮겨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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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징용자 등 한국인 유골 인계받는 한일시민들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31일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에서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와 종교인들이 1945년 광복 직후 인근에서 숨진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한국인 유골 131위를 일본 정부 후생노동성으로부터 인계받고 있다. 이들 유골은 지난달 중순까지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있다가 일본 후생노동성의 창고와 다름없는 보관 시설로 옮겨지며 안타까움을 샀던 것들로, 덴토쿠지에 안치돼 귀국 길을 기다리게 됐다. 2018.5.31 [email protected]

이날 추도식은 불경을 외우고 합장하는 불교식 법회와 유골 앞에서 술잔을 돌리고 두 번 절하는 한국식 제사 두가지 방식으로 열렸다.

니시타니 도쿠도(西谷德道) 덴코쿠지 주지는 추도식에서 “(1976년 수습 후) 42년간 떠돌아다닌 유골들이 귀국을 향한 큰 걸음을 걷게 됐다”며 “하루라도 빨리 유골들이 고향에 돌아가도록 한국과 일본 정부에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골을 덴코쿠지에 모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일본 시민단체 ‘유골봉환 종교자 시민연락회’는 이날 추도식 후 일본과 한국 정부에 유골의 한국 봉환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연락회는 “유골이 한국과 가까운 쪽인 이키섬에 모셔졌지만 귀향의 길로는 아직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며 “일본 정부는 그간 역사를 거울로 보고 스스로 경의를 갖고 유골봉환에 적극 나서야 하며 한국 정부도 그동안 방치했던 유골봉환 문제에 대한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단체들과 함께 유골을 덴토쿠지에 옮기는 일을 주도한 한국 시민단체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팀장은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기쁨과 함께 나선 길에 태풍을 맞아 돌아가신 분들이 해방 72년이 지나도 아직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하루빨리 이분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일본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도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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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나가사키 사찰서 강제징용 한국인 유골 131위 추도식 열려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31일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가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종교인 등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 법회를 열고 징용 희생자와 가족 등을 포함한 한국인 유골 131위를 안치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유골들은 지난달 중순까지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있다가 일본 후생노동성의 창고와 다름 없는 보관시설로 옮겨지며 안타까움을 샀던 것들이다. 2018.5.31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2018-05-31> 연합뉴스

☞기사원문: 갈곳 잃은 韓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日섬에서 새 안식처 찾다

목, 2018/05/31-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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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 사진 등 주요 자료가 화면에 표시됩니다.

‘미식가(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시기, 민초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주 작은이야기를 골라 다소 깊게 파보겠습니다. 100년 전과 오늘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추적하는 시간, 미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가다.

미식가 5회 “골프, 친일귀족의 신선놀음”

출연 : 이순우, 김영환, 강동민

연출 : 임선화

금, 2018/06/01-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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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얼마나 되나

日사찰 보관 유골 2천770위…오키나와 등 미발굴 유골 2만2천구
2004년 유골봉환 합의에도 일부만 반환…日정부 외면에 韓정부는 소극 대응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해방 후 70여년이나 흘렀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숨진 징용·징병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1일 행안부 과거사업무지원단에 따르면 일본에서 발굴된 뒤 보관 중인 한반도 출신 징용·징병자의 유골은 2천770위에 달한다. 사찰이나 납골당 등 340여곳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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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섬마을 사찰서 열린 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추도식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31일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가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종교인 등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열고 징용 희생자와 가족 등을 포함한 한국인 유골 131위를 안치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유골들은 지난달 중순까지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있다가 일본 후생노동성의 창고와 다름 없는 보관 시설로 옮겨지며 안타까움을 샀던 것들이다. 2018.5.31 [email protected]

행안부가 일본 정부의 정보 제공 등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일본 사찰의 유골들은 홋카이도(北海道)·도호쿠(東北) 480위, 간토(關東) 560위, 긴키(近畿) 200위,주부(中部) 570위, 주고쿠(中國)·시코쿠(四國) 220위, 규슈(九州)·오키나와(沖繩) 740위 등이다.

유골 봉환 문제는 지난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출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반환에 합의한 뒤 한때 급물살을 타기도 했다.

합의 후 도쿄도 메구로(目黑)구의 사찰 유텐지(祐天寺)의 유골 423위가 2008~2010년 4차례에 걸쳐 봉환되는 성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이와 관련한 양국 정부간 교섭이 중단되면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봉환된 유텐지의 유골은 모두 군인과 군속(군무원)의 것으로 강제징용 노동자의 유골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 간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는 사이 유골 봉환은 양국의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성사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은 지난 2015년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숨진 115명의 유골을 도쿄(東京)-교토(京都)-오사카(大阪)-히로시마(廣島)-시모노세키(下關) 등 강제로 끌려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경로로 한국으로 봉환했다.

한편으로는 아직 발굴이 안된 유골들을 찾아내서 한국에 봉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련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말 격전이 치러졌던 일본 남부 오키나와(沖繩)를 비롯해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에는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이 최소 2만2천구가 발견되지 않은 채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2차대전 당시 전몰자의 유골을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유족의 DNA를 수집한 뒤 발굴한 유골과 대조 작업을 진행해 유골을 유족에게 찾아주고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해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골을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찾아서 보관하고 있든, 아니면 앞으로 발굴해야 할 것이든 이들 두 부류의 유골 문제가 모두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외면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사찰에서 보관 중인 유골을 한국으로 봉환하는 일, 전사자 유골의 발굴·대조 작업에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하는 문제 모두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밝히며 책임을 한국 정부에 미루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실무선에서 일본 정부와 접촉을 하면서도 아직 유골 봉환이나 발굴에 대해 공식적인 요청을 하지 않고 있어 일본측의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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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몰자 유골반환 촉구 요청서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게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2018.2.8 [email protected]

한국과 일본은 작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유골봉환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지만, 협의에 속도가 붙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06-01>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외면·韓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는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관련기사

☞SBS: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일본의 외면과 한국의 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

☞연합뉴스: 갈곳 잃은 韓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日섬에서 새 안식처 찾다

☞한겨레: 바다가 삼킨 해방의 환희…일본 섬에 잠든 조선인 131명 유골

☞한겨레: [특파원 칼럼] 그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까 / 조기원

금, 2018/06/0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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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2018/06/01-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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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도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
 
친일문제를 연구하던 임종국 선생의 아버지가 선생에게 한 말이다.
선생은 아버지의 친일행적을 친일문학론에 실었고,
선생의 유지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임문호”를 실었다.
 
“….1937년 4월 이후에는 청년당 당두로서 천도교중앙종리원 관정(觀正)에 선출되어…….일제 침략전쟁과 황민화 정책을 적극 후원하고 지원할 것을 독려했다…..”-친일인명사전에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낸 아들

진실을 밝힘에 있어 그 어떤 이해관계(비록 아버지일지라도..)도 철저히 배척하는 원칙주의자가 임종국 선생이다.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써 내려갔던 그 날
임종국 선생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토, 2018/06/02-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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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엔 100주년 기념식 개최 거절…현 정부 들어 재평가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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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피 300kg으로 만든 독립영웅 흉상
(서울=연합뉴스) 신준희 기자 = 1일 서울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전쟁 영웅 5인 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육사는 독립전쟁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 김좌진, 지청천, 이범석 장군, 그리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탄피 300kg을 녹여 제작했다. 2018.3.1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성서호 기자 =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의 산실이던 ‘신흥무관학교’ 설립 기념식이 처음으로 육군사관학교에서 열린다.

3일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와 육군사관학교에 따르면 이들 기관은 오는 8일 오후 2시 육사 화랑연병장과 을지강당에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7주년 기념식을 연다.

기념사업회는 설립 100주년이던 2011년 처음으로 기념식을 열기로 하면서 육사에 개최를 요청했지만, 당시에는 제안을 거부당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100주년 기념식을 연 기념사업회는 올해 2월 다시 육사의 문을 두드렸고, 올해 처음으로 육사 교내에서 기념식을 열게 됐다.

신흥무관학교는 1910년 3월 신민회의 국외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 결의를 계기로 이듬해 6월 10일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발했다. 항일비밀조직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당시에는 ‘강습소’라는 간판을 달았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통화현으로 이전한 뒤 이듬해 건물을 신축해 신흥중학교로 개칭했다. 각지에서 지원자가 몰려오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국권을 되찾기 위한 군 조직이라는 점에서 군의 효시라는 주장이 있지만, 여태껏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되지 못했다.

하지만 지난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변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 대통령은 작년 8월 국방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광복군과 신흥무관학교 등 독립군의 전통도 우리 육군사관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하고 광복군을 우리 군의 역사에 편입시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12월 육군사관학교에서 ‘독립군·광복군의 독립전쟁과 육군의 역사’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는 육군의 초기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열린 것으로, 당시 육사가 독립군과 광복군 활동을 주제로 학술 행사를 연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올해 3월에는 독립전쟁에 나섰던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의 흉상을 교내 충무관에 설치했다. 흉상은 우리 군 장병이 훈련으로 사용한 실탄의 탄피 300㎏을 녹여 제작했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겸하는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최근 들어 육사는 학술회의 등 여러 사업을 통해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한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를 자신의 뿌리로 재정립하려고 하고 있다”며 “앞으로 해군·공군사관학교, 더 나아가 전군 차원에서 이러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육군 관계자는 “을사늑약 이후 국권 회복과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투쟁한 항일의병, 독립군·광복군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mail protected]

<2018-06-03> 연합뉴스

☞기사원문: 신흥무관학교 기념식 육사서 첫 개최…’軍 효시’ 자리 잡나

월, 2018/06/0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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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칠승 의원, 친일반민족행위자 국립묘지 안장금지 및 이장 규정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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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충일을 이틀 앞둔 4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묘역에서 바라본 도심에 빌딩들이 보이고 있다.ⓒ뉴시스

오는 6일 제63회 현충일을 앞두고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국립묘지 밖 이장을 강제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추진된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경기 화성병)은 5일 이 같은 내용의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더불어민주당 권칠승 의원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제출받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 국립묘지 안장 현황’ 자료에 따르면, 서울과 대전의 국립현충원에 ‘친일파’로 분류되는 인물이 무려 63명이나 안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한 사람 가운데 국립서울현충원에 7명(김백일, 김홍준, 백낙준,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이, 국립대전현충원에 4명(김석범, 백홍석, 송석하, 신현준)이 각각 안장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친일인사 중 서울·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경우까지 합하면 63명이 된다. 서울에 37명, 대전에 26명이 안장돼 있다.

그동안 과거사 청산 작업의 일환으로 이들의 묘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곤 했지만, 이장을 강제할 법률상 근거가 마련돼 있지 않아 논의만 공전을 거듭해 왔다.

이에 대해 권 의원은 “현행법이 유지될 시 향후에도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있다”며 “지금이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국립묘지 이장을 명할 수 있도록 하여 국립묘지의 영예성과 국민들의 자부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가운데 김홍준은 2015년9월3일 63명 중 가장 최근에 안장됐다. 그는 만주군 상위, 간도 특설대에서 복무했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순직해 안장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위패만 안장돼 있다.

백낙준은 연희전문학교 교수이자 기독교 신문 이사 및 편집위원의 친일행위를 했다. 제2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며 국가사회공헌을 이유로 안장자격을 취득했다.

심응균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소좌로 활동했다. 광복 이후 육군 중장을 지내며 안장자격을 취득했다.

신태영 역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중좌로 활동한 친일인사다. 한국전쟁에서 전북편선관 구사령관으로 참전하고 이후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이응준은 일본군 대좌 출신으로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전쟁 당시 수원지구 방위사령관으로 참전했으며, 이후 체신부 장관을 역임, 현충원에 안장됐다.

이종찬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금치훈장까지 수여받았지만, 한국전쟁 당시 육군 수도경비 사령관으로 참전,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유로 현충원에 안장됐다.

김석범은 만주군 상위 출신으로 만주국 훈6위 주국장을 수여받았고, 백홍석은 경성 육군병사부 과장 출신으로 재향군인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송석하는 간도특설대 중대장 출신으로 만주국 훈5등 경운장을 수여받았으며, 신현준은 간도특설대 창설기간 장교를 지내고 만주국 훈6위 경운장을 수여받았다.

특히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항일 독립투사들을 잡아들이고 김구 선생의 암살을 사주하는 등 온갖 반민족행위를 저질렀지만 육군 특무대장을 역임, 현충원에 안장됐다.

권 의원은 “독립유공자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국립묘지에 나란히 안장하는 것은 독립유공자에 대한 모욕이자 무원칙의 표본”이라며 “이번 개정안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흐트러진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2018-06-0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아직도 국립묘지에 안장된 친일반민족행위자 63명, 강제 이장 추진된다

※관련기사

파이낸셜뉴스: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무려 ’63명’

노컷뉴스: 권칠승 “현충원 안장 친일 63인 이장시켜야”..국립묘지법 개정안

화, 2018/06/0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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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8/06/0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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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8/06/0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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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1 – ‘4.27 판문점 선언’, 그날의 소회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
대담 :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화, 2018/06/0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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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길,정세현 특별대담] “4.27선언과 한반도의 미래”

Q.6 –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 이후 동북아시아의 질서 변화?

주최 : 내일을 여는 역사재단

때 : 2018년 5월 18일 오후 2시

주관 : 민족문제연구소 곳 민족문제연구소 5층 교육장(식민지역사박물관)

대담 강만길 (고려대 명예교수)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사회 신용옥 (내일을여는역사재단 편집장)

※ 팟빵에서 오디오로 들으실 수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4024

목, 2018/06/0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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