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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외면·韓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는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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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외면·韓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는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익명 (미확인) | 금, 2018/06/0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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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일제 강제동원 희생자 유골 얼마나 되나

日사찰 보관 유골 2천770위…오키나와 등 미발굴 유골 2만2천구
2004년 유골봉환 합의에도 일부만 반환…日정부 외면에 韓정부는 소극 대응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해방 후 70여년이나 흘렀지만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다 숨진 징용·징병자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1일 행안부 과거사업무지원단에 따르면 일본에서 발굴된 뒤 보관 중인 한반도 출신 징용·징병자의 유골은 2천770위에 달한다. 사찰이나 납골당 등 340여곳에 흩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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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섬마을 사찰서 열린 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추도식 (이키<일본 나가사키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31일 일본 나가사키(長崎)현 이키(壹岐)섬의 사찰 덴토쿠지(天德寺)가 한일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종교인 등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추도식을 열고 징용 희생자와 가족 등을 포함한 한국인 유골 131위를 안치했다. 새 보금자리를 찾은 유골들은 지난달 중순까지 사이타마(埼玉)현의 사찰 곤조인(金乘院)에 있다가 일본 후생노동성의 창고와 다름 없는 보관 시설로 옮겨지며 안타까움을 샀던 것들이다. 2018.5.31 [email protected]

행안부가 일본 정부의 정보 제공 등을 통해 파악하고 있는 일본 사찰의 유골들은 홋카이도(北海道)·도호쿠(東北) 480위, 간토(關東) 560위, 긴키(近畿) 200위,주부(中部) 570위, 주고쿠(中國)·시코쿠(四國) 220위, 규슈(九州)·오키나와(沖繩) 740위 등이다.

유골 봉환 문제는 지난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당시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 출신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반환에 합의한 뒤 한때 급물살을 타기도 했다.

합의 후 도쿄도 메구로(目黑)구의 사찰 유텐지(祐天寺)의 유골 423위가 2008~2010년 4차례에 걸쳐 봉환되는 성과가 나오기도 했지만,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 이와 관련한 양국 정부간 교섭이 중단되면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나마 봉환된 유텐지의 유골은 모두 군인과 군속(군무원)의 것으로 강제징용 노동자의 유골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정부 간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는 사이 유골 봉환은 양국의 시민단체들의 노력으로 성사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은 지난 2015년 일본 북부 홋카이도(北海道)에서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숨진 115명의 유골을 도쿄(東京)-교토(京都)-오사카(大阪)-히로시마(廣島)-시모노세키(下關) 등 강제로 끌려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경로로 한국으로 봉환했다.

한편으로는 아직 발굴이 안된 유골들을 찾아내서 한국에 봉환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한국과 일본의 관련 시민단체 등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말 격전이 치러졌던 일본 남부 오키나와(沖繩)를 비롯해 남태평양과 동남아시아 등에는 조선인 군인·군속의 유골이 최소 2만2천구가 발견되지 않은 채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2차대전 당시 전몰자의 유골을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유족의 DNA를 수집한 뒤 발굴한 유골과 대조 작업을 진행해 유골을 유족에게 찾아주고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해 한국인 전사자들의 유골을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찾아서 보관하고 있든, 아니면 앞으로 발굴해야 할 것이든 이들 두 부류의 유골 문제가 모두 풀리지 않고 있는 것은 일본 정부의 외면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사찰에서 보관 중인 유골을 한국으로 봉환하는 일, 전사자 유골의 발굴·대조 작업에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하는 문제 모두 한국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밝히며 책임을 한국 정부에 미루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 정부는 실무선에서 일본 정부와 접촉을 하면서도 아직 유골 봉환이나 발굴에 대해 공식적인 요청을 하지 않고 있어 일본측의 핑곗거리를 만들어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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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몰자 유골반환 촉구 요청서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게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2018.2.8 [email protected]

한국과 일본은 작년 12월 일본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유골봉환 문제를 협의하기로 했지만, 협의에 속도가 붙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8-06-01>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외면·韓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는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관련기사

☞SBS: 일제 징용·징병자 유골, 일본의 외면과 한국의 무관심에 죽어도 고향 못가

☞연합뉴스: 갈곳 잃은 韓강제징용자 유골 131위, 日섬에서 새 안식처 찾다

☞한겨레: 바다가 삼킨 해방의 환희…일본 섬에 잠든 조선인 131명 유골

☞한겨레: [특파원 칼럼] 그들은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까 / 조기원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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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은 3.1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의미 있는 해를 맞아 많은 시민들이 임시정부가 걸었던 ‘임정로드’를 따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1주년, 102주년에도 그 발걸음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역시 지난 1월 9일부터 5박 6일 동안 청년백범 14기 답사단의 일원으로 중국 광저우~충칭에 이르는 임정로드를 탐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길 위에서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들께 공유하고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를 연재합니다. – 기자 말

[이전 기사] 중국 광저우에서 발견한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의 흔적

중국 광저우는 무림고수 황비홍(황페이훙·黃飛鴻: 1856~1925)과 엽문(예원·葉問: 1893~1972)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광저우에서 조금 떨어진 포산(佛山)이라는 도시에는 두 사람의 기념관도 있다.

중국의 액션배우 이연걸(리롄제)과 견자단(전쯔단)의 영화 덕분에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들이다. 그래서인지 광저우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여행기를 보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나 역시도 광저우하면 황비홍과 엽문을 먼저 떠올렸던 게 사실이다. 중국무술 애호가로서 두 무림고수의 발자취를 좇아 떠나는 광저우·포산기행은 오랜 버킷리스트이기도 했다.

▲ 포산에 위치한 “황비홍기념관”. 바로 근처에 엽문을 기념하는 “엽문당”이 있다. ⓒ 위키피디아

이곳에서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조국 독립의 꿈을 키워나갔다는 사실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고난의 대장정을 이어가던 발자취가 이곳에 남아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래서 광저우 탐방은 우리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했다는 부끄러운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혁명의 도시, 광저우

“광저우는 혁명의 도시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광둥지부의 박호균 사무국장은 광저우를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은 국제 무역 도시로 유명하지만, 근대 시기 광저우는 늘 혁명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있었던 공간이었다. 1911년 손문(쑨원·孫文: 1866~1925)의 광저우봉기는 신해혁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제 정부 ‘중화민국’이 수립됐다. 1917년에는 군벌에 반대한 손문이 광저우에 내려와 ‘호법정부’를 수립했다. 1927년에는 국민당 장개석(장제스·蔣介石: 1887~1975)에 맞선 중국 공산당의 ‘광둥코뮌’도 일어났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고 있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광저우라는 공간에서 일어난 것이다. 청년백범 답사단은 바로 그 혁명의 현장들을 차례 차례 방문하면서, 숨겨져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 기의열사능원 기념탑 앞에서 청년백범 14기 답사단 단체사진 ⓒ 김경준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부른 ‘아리랑’

‘광주기의열사능원(廣州起義烈士陵園)’은 1927년 12월, 중국 공산당의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공산당원 5000여 명의 합동 묘역이 조성된 곳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라, 1955년에 정부가 나서서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매우 크고 웅장하게 조성해놨다.

▲ 광저우 기의열사능원 전경 ⓒ 김경준

공산당 숙청 작업에 나선 장개석 세력에 맞서 일어난 광저우봉기에는 한국 청년들도 150~200명가량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 합동 묘역에 우리 한인 청년들도 함께 잠들어 있다. 답사단은 어제에 이어 남의 나라 혁명에 참여하다 스러져간 한인 청년들의 넋 앞에 술을 올렸다. 이번엔 특별히 한국에서 공수해 온 막걸리를 제주(祭酒)로 올렸다.

▲ 광저우봉기 당시 희생된 5000명의 유해를 매장한 합동묘역 ⓒ 김경준
▲ 기의열사능원 합동묘역 앞에서 한국에서 준비해 온 막걸리를 올리는 청년백범 답사단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안쪽으로 들어가면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이라는 정자가 나타난다. 광저우봉기에 참여했던 최용건(북한의 국가 부주석 역임)이 1964년 광저우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 정부에서 세운 비석이다.

▲ 중조인민혈의정 ⓒ 김경준
▲ 중조인민혈의정 안에 세워진 비석. 앞에 있는 꽃은 답사단이 방문하기 전날, 독립운동가 김학철 선생의 아들이 놓고 간 꽃이다. ⓒ 김경준

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중조양국인민적전투우의만고장청)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정이여! 오래도록 푸를지어다!

혹자는 ‘결국 이 비석은 중국과 북한의 우정을 기념하는 비석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북한의 최용건이 방문한 것을 계기로 세워진 비석이지만, 광저우봉기 당시 전사한 조선 청년들에게 과연 남과 북이 따로 있었을까? 오로지 중국의 혁명을 돕는 것이 조국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신념으로 싸우다 스러져간 하나의 한국, 하나의 조선 청년들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비석조차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답사단 역시 한민족의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광저우봉기 당시 숨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조국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을 기원했다.

▲ 중조인민혈의정을 둘러보며 다함께 아리랑을 부르는 답사단원들 ⓒ 변량근

그런데 비석 앞에 웬 조화 하나가 놓여있었다. 답사단 모두 누가 그 조화를 올려놓고 갔을까 궁금해했는데, 알고 봤더니 우리 답사단이 방문한 바로 전날,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 김학철 선생의 아들 김해양 선생이 놓고 간 꽃이라고 한다.

우리 답사단이 광저우를 떠나는 날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아리랑로드’ 팀이 다시 우리가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온다고 했다. 한국인들의 방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 찾는 후손들이 있으니 이곳에 잠든 넋들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적잖이 감격스러웠다.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亭)

기의열사능원에서 특별히 깊은 인상을 받았던 장소가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답사팀들이 기의열사능원을 방문했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인연이 없어서 그런지 주목하지 않았던 장소다. 바로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현판이 달린 정자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슬픈 로맨스가 깃든 “혈제헌원” 정자 ⓒ 김경준

혈제는 피를 제물로 올리는 제사를 말하고, 헌원은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제왕을 뜻한다. 즉 중국을 위해 피의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다. 이는 중국의 대문호 노신(루쉰·魯迅: 1881~1936)의 시에서 따온 구절이다.

언뜻 보면 섬뜩하지만, 이 정자가 세워진 사연을 들어보면 숙연해진다. 여기에는 주문옹(저우웬용·周文雍: 1905~1928)과 진철군(첸티에쥔·陳鐵軍: 1904~1928)의 슬픈 로맨스가 있다.

중국 공산당원이었던 두 사람은 광저우에서 비밀 연락책으로 활동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행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1차로 투옥되었을 때도 함께 탈출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로 1928년 1월 27일, 체포되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원하는 게 있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주문옹은 “아내와 결혼기념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고, 두 사람은 감옥 철창에서 나란히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옥중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이들은 2월 6일, 홍화강(紅花崗) 사형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형장으로 가기 전, 주문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반동들의 총성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축포 소리다!”

▲ 주문옹과 진철군의 마지막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 김경준

기의열사능원 한쪽에는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있다. 수갑을 차고 형장에 끌려온 비참한 모습이지만, 표정만큼은 혁명에 대한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또 한 커플이 있었다.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인 박열(1902~1974)과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1903~1926) 부부다.

▲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부부 ⓒ 위키피디아

그들 역시 옥중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법정에서도 당당하게 일본의 죄를 성토하면서 혁명의 동반자이자 연인으로 끝까지 함께 했다. 주문옹과 진철군 부부는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도 이들 부부가 끌려가며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국적을 초월한 연인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어쨌든 여러모로 닮은 두 커플의 이야기는 가히 ‘세기의 로맨스’라 할 만하지 않을까? (*3부에서 이어집니다)

<2020-01-2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위장 부부’ 행세하다 싹 튼 사랑… 감옥에서 결혼까지

수, 2020/01/29-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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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의 발자국] 54. 서울 명동 : 이승만에 의해 좌절된 친일 청산의 꿈

‘저승사자’. 김근태 의원을 고문을 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별명이다. 하지만 이근안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한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즉 ‘원조 저승사자’가 있다. 그것도 일제를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독한 친일 고문경찰이 있으니, 그 이름은 노덕술이다.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쪽 죽여 버리지요.” 1930년대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고문당한 김재학의 조카의 증언이다. 김재학뿐만이 아니라 박일형, 김규직, 유진흥, 문재순, 추학, 차일명. 노덕술이 고문한 독립운동가들의 일부다.

그는 동래경찰서 재직 중인 1928년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일형을 고문했고, 부산 제2상업학교 동맹휴교 배후를 캔다고 김규직, 유진흥을 고문해 김규직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동래고등보통학교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석방을 위한 동맹휴학을 벌이자 문재순, 추학, 차일명 등을 잡아다가 고문했다. 고문 덕으로 그는 조선인 경찰로는 최고위직에 올랐고 두 번이나 상을 받았다.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1948년 9월 7일 제헌국회는 역사적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국회가 제정한 3번째 법이다. 친일경찰에 의존하고 있는 이승만은 이 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안에 서명했다.

주목할 것은 제헌국회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적인 여운형, 우파인 김구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영속화한다는 이유로 선거에 참가하지 않아 ‘친일지주(친일경찰 정도의 친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들이 다수였던 한민당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차도 친일 청산은 거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라고 생각해 반민법을 제정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명동에 사무실을 얻고 활동에 들어갔다. 임정 문화부장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은 특위는 조사위원회 이외에도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특위는 일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반민족행위를 정의하고 이에 해당되는 7000명을 파악하여 검거에 들어갔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만든 식민지박물관에는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 관련된 자료, 반민특위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민특위 위원들 사진 ⓒ손호철

1949년 1월 8일, 제1호로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해외로 도피하려다가 체포됐다. 이어 일본밀정이었던 이종형 대동신문 사장, 유명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이 잡혀왔다. 이들은 자신이 민족지도자들이라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모두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다.” 이광수의 변명이다. 말이라도 못하면 덜 미울 텐데,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광수, 최남선 등 변절한 주요 친일 인사 사진 ⓒ손호철

반민특위는 여자 60명을 포함한 682명을 조사해 모두 305명을 체포했고,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 193명은 도주 등으로 체포하지 못했다. 특히 문제는 악독한 친일경찰을 심판하는 일이었다. 친일경찰의 핵심인 노덕술 등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반민특위 핵심부와 정부 요인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를 위해 고용한 백인태가 자수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도주하던 노덕술은 결국 체포되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됐다. 자신의 손발이 잡히자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 투사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을 통해 조작이라는 비판을 듣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터트리고 반민특위를 직접 공격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김약수 등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소장파 ‘진보적’ 의원들이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했다고 구속한 사건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끌려가는 친일파들(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1949년 6월 6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 중 하나다.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경찰 80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조사 서류를 강탈해간 것이다. 이어 9000명의 경찰들이 사실상의 반민특위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원상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반민특위 습격이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국회는 이같이 국회를 무시하는 대통령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반민특위 문제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이다(‘손호철의 발자국’ 10. 부산정치파동 <프레시안>, 2021년 3월 29일자 참조).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이를 담당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인 오제도 검사가 후에 “사실은 무죄였다”고 밝히는 등 논쟁이 많은 사건이다. 설사 국회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국민 다수가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바랐던 친일파 처벌이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나? 북한보다 더 강하게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이, 남한은 친일정부라는 오명을 벗고 북한과 정통성에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이승만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교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편안하게’ ‘호화생활’을 하며 외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만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친일파라고는 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사람이다(나중에 탄핵을 당했지만).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노덕술 같은 사람을 구해 중책에 맡겼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해방정국의 구조적 상황에 있다. 해방정국은 일제 강점기에 좌파가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77%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바라는 등 기본적으로 좌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분위기여서, 그 같은 친일경찰이 아니면 그의 수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모두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이승만의 반민특위 공격 후 친일파는 해방 후 현대사의 승자로 승승장구해 왔다. 임종국의 선구적인 친일문학연구와 이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60년이 지난 2009년 뒤늦게 5207명(중복자 포함)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실은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부 차원에서도 노무현 정부 들어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벌여 제1차 106명, 제2차 195명, 제3차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이 명단에는 일왕에서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육사로 입학해 일본군으로 근무한 박정희가 빠져 논란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너무 늦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이들 중 노덕술 등 225명은 정부에서 훈장 등 서훈을 받았는데, 2019년 현재 25명에 대한 서훈이 취소됐고 노덕술 등 200명에 대한 서훈은 친일 판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

친일 청산의 실패는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 정치의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정치의 기본 프레임은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파는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리버럴)’ 세력을 ‘친북좌파’라고 공격하고, 자유주의 세력은 우파를 ‘친일’이라고 공격하는, ‘친북 대 친일’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부 민주당지지 세력이 보수 우파에 대해 행하는 가장 쉬운 공격수단이 ‘토착왜구’라고 이름 붙이고 ‘죽창가’ 운운 하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프레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반민특위의 실패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자처벌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명동에 가면 롯데백화점 건너편 쪽에 옛 KB국민은행 명동본점 건물이 있다. 반민특위가 있던 곳으로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이 같은 표시석을 만들어 1층 화단에 설치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표시석은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잘 보이지 않도록 주차장 옆으로 옮긴 것이다. 표시석은 반민특위처럼 이렇게 찬밥 대접을 받았다.

표시석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건물이 팔려 호텔 건설이 시작되자 일본 관광객을 우려한 호텔 측은 표시석의 철거를 요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결국 이 표시판을 철거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연구소가 새로 만든 식민지역사박물관(청파로 소재) 문 앞에 세워 놓았다.

▲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 반민특위 터에 설치했던 표시석. 최근 그 터에 호텔이 건설되면서 철거해 식민지박물관 입구에 설치했다. ⓒ손호철

이제는 일본 관광객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을 위한 고급 호텔 공사가 한창인 반민특위의 역사적 현장에 서자, 50년 전에 이승만의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 비극적으로 끝난 반민특위의 슬픈 운명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나아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식민지역사박물관 문 앞에 세워진 표시판의 처량한 신세가 잘 보여주듯이, 이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 사업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만큼 고난에 가득차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명동에 있었던 반민특위 터는 몇 년 전 매각되어 고급 호텔을 짓고 있다. ⓒ손호철

<2021-07-12> 프레시안

☞ 기사원문: 수난의 반민특위, 표시석도 찬밥 신세

월, 2021/07/1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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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 신랄하게 꾸짖은 근현대 소설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정치를 ‘크게 꾸짖는(통매· 痛罵)’ 문학을 평론하는 책이 나왔다. 원로 문학평론가인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79)의 평론집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다.

임 소장은 <친일인명사전>을 세상에 내놓는 데 기여한 주역 중 한 사람이자 54년 간 비평 활동을 해 온 평론가다. 그가 정치를 꾸짖는 근현대 소설을 한 데 모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문학이 거대담론이 사라지고 미세담론에 안주하는 상황에서 전후 문학부터 오늘날까지 가장 정치적이고 역사의식을 가진 작가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문학에서 역사와 정치, 사회를 다룬 거대담론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평론집을 냈다.” (2월 24일 기자간담회 중)

▲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 책표지 ⓒ 소명출판사

책은 최인훈, 박완서, 이병주, 남정현, 조정래, 장용학 등 정치를 통렬하게 꼬집는 문학을 쓴 11명의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다뤘다.

책은 총 4부로 이뤄졌다. 최인훈 작가의 <광장>, <화두>에 이어 이병주 작가의 <‘그’를 버린 여인>, <그해 5월>, 남정현 작가의 <엄마, 아 우리 엄마>, 황석영 작가의 <손님>, 손석춘 작가의 <아름다운 집>, <유령의 사랑>,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박화성 작가의 <북국의 여명> 등이 실려 있다.

1부에 등장하는 최인훈 작가의 <광장>은 올해로 발표된 지 60주년을 맞았다. 최 작가의 작품은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에 초점을 맞춰왔다. 임 소장은 “1부는 민족사에 대해 지식인으로서의 부채가 느껴지는 작가들을 다뤘다”라고 밝혔다.

2부는 이병주 작가의 작품만을 다뤘다. 임 소장은 “박정희에 관한 한 어떤 역사학자나 정치평론가도 이룩하지 못했던 실체를 이병주는 흥미진진하게 풀어주고 있다”고 책에 적고 있다. 그는 “한국 민족소설의 최고봉은 조정래지만, 현대 정치사의 실황중계자로는 이병주”라고 평가했다.

3부는 분단 문제 그리고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미국의 정체를 탐색하는 소설들에 초점을 맞췄다. 4부는 조정래의 <아리랑>을 비롯해 민족해방운동의 양상을 다룬 작품들을 담았다. <아리랑>은 구한말부터 8·15광복까지의 항일투쟁을 다룬 소설이다. 저자는 <아리랑>이 “식민지근대화론의 허구성을 생생하게 입증해 준 글”이라고 소개했다.

앞선 기자간담회에서 임 소장은 “신춘문예 소설을 봐도 재미가 없다, 거대담론을 포기한다는 건 문학 독자를 문학 하는 사람에만 한정시킨다고 생각한다”라며 “요즘은 영화 <기생충>처럼 소설가들 대신 영화들이 비판의식이 더 많은 것 같다, 반감도 있겠지만 편견을 깨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임 소장은 “역사에 남는 것은 결국 거대담론 소설”이라며 “당대의 베스트셀러는 휘발되기 마련이다, 문학성은 거대담론을 공격적으로 잘 다루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0-03-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기생충’ 같은 소설, 왜 없을까? 평론가의 답은

금, 2020/03/13-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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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그밖에 의혹 짙은 도지사 1명, 친일 논란 2명

▲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6대 김학응 충남도지사와 제 7대 김홍식 충남도지사 ⓒ 충남도 누리집 갈무리

일부 광역지방자치단체가 역대 시장, 도지사의 친일행적을 찾아 나선 가운데 충남도지사 중에도 친일행위가 뚜렷하거나 의혹 또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사람이 5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행위 ‘뚜렷’ 제6대 김학용-제7대 김홍식

먼저 친일행위가 분명한 역대 충남도지사는 제6대 김학용과 제7대 김홍식이다.

김학응(金鶴應, 일본식 이름 金子薰, 1899.1.25~ ?,충북 괴산 생)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 정부 관료를 역임했다. 1955년 충북도지사를 거쳐 1958년 충남도지사(7.29-1960.4.30)를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관리로 충북 보은군수, 제천군수, 옥천군수를 역임했다. 해방 후에는 충북도 지방과장, 충북도 내무국장(서기관), 충남도와 경기도 내무국장을 거쳤다. 이후 충북지사와 충남지사를 맡았다.

또 충남지사 재임 중 4·19 혁명이 일어나 3·15 부정선거의 충남 지역 책임자로 기소됐다. 1961년 3월 언론 보도를 보면 김학용 지사는 부정선거에 관여한 혐의가 인정돼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친일행위에 반헌법 행위자라는 2관왕을 기록한 것이다.

뒤를 이은 김홍식(金弘植,1909~1974, 충남 아산 생) 또한 일제강점기 때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1934)와 행정과(1935)에 합격해 평남 양덕군수에 임명됐다. 이때 황민화 운동을 주도하며 친일잡지 를 발간했다. 또 내선일체실천사 평남도지사의 고문을 지냈다. 이후 평안남도 개천 군수, 경기도 부천 군수를 역임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경기도 광공부 광공부장, 충남도지사도지사(1960.5.2~1960.10.7)까지 지냈다. 이후에도 법제처차장,체신부장관, 변호사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의 군수로 일하며 내선융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점에서 친일반민족행위가 인정된다.

김학응, 김홍식 도지사는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에 부역하고 민족에 반역한 친일행각을 기록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렸다.

친일행위 의혹 ‘짙은’ 제2대 진헌식 도지사

▲ 1949.8.27 동아일보 보도. 국회내에는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이 없더는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의 발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반민특위는 진헌식 당시 국회의원(제 2대 충남도지사)에 대해서도 “민족을 해친 현저한 사실이 없고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해 다수 민중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유로 혐의없음 처분했다. ⓒ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

제2대 충남지사를 지낸 진헌식(陳憲植,1951.12.17~52.8.29, 충남 연기 출생)은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위원회에 회부됐던 사람이다. 진헌식(1902~1980)은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 학사와 보전 교수,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과 충남지사, 내무부장관(제10대)을 역임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인 1935년 조선금광(주) 이사를 맡았다. 조선금광은 일본인들이 설립됐는데 금광을 개발, 지하자원을 수탈해 이익을 취했다.

특히 그는 왜경 경무국장을 중심으로 결성한 내선인의 융화 친목을 목적으로 한 청교회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또 동양지광에 일제에 협력을 요구하는 글을 실었다. 이 일로 해방 직후 국회의원 신분으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반민특위는 “민족을 해친 현저한 사실이 없고 고향에서 (국회의원에) 입후보해 다수 민중의 용서를 받았다”는 이유로 혐의없음 처분했다.

동아일보(1949.8.27)는 “진헌식 의원은 왜경 경무국장 지전청을 중심으로 한 내선인의 융화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청교회의 회원으로 친교한 사실은 있으나 민족에 해친 현저한 사실이 없고, 동양지광에 기고한 것은 타인의 대작인 것이 입증되었으며 선거 당시에 고향에서 입후보해 다수 민중의 용서와 지지를 받았다”는 반민특위의 발표내용을 전하고 있다. ‘입후보해 다수 민중의 용서와 지지를 받았다’는 게 무혐의 이유 중 하나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런 논리라면 당시 국회의원 누구도 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반민특위는 당시 반민족행위 혐의로 소환한 국회의원 모두에게 무혐의 판정을 내렸다.

이에 대해 경향신문(1977.9.19)은 “용두사미의 대표 격인 국회 내 반민족행위자 처리 문제만 해도 그렇다”며 “처음부터 100명 선 설에서 5, 6명설이 나돌면서도 그 이름이 극비에 부쳐져 왔으나 새로운 특위가 조직된 후 소환장을 발부, 그 이름이 외부에 알려졌을 뿐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썼다.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박중양 초대 충남도지사 ‘후일담’

▲ 제 2대 진헌식 충남도지사 ⓒ 충남도 누리집 갈무리

해방이전인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임명된 충남지사의 경우 친일행위자로 ‘역대 충남지사 명단’에서 제외돼 있다. 본 기사의 취재범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어진 박중양 초대 충남도지사(朴重陽,1910.10.1~1915.3.31)에 대한 후일담은 지나치기 어렵다.

“박중양은 일본인 부인이 형무소 앞에서 간수들을 붙잡고 며칠을 울며 호소하는 읍소작전 끝에 비단이불을 차입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경향신문(1977.9.19)>

박중양이 반민특위에 의해 형무소에 수감됐지만 형무소 간수들의 협력으로 비단이불을 덮으며 생활했다는 얘기다. 실제 박중양은 병보석으로 석방돼 천수를 누렸다.

1910년 조선총독부 체제하에서 초대 충청남도지사를 지낸 박중양은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아들이다. 그는 충남도지사 시절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 방식에 이의를 제기한 임천군수(부여)를 파직시키고 후임에 친일파 김갑순을 발령했다. 그는 또 충남도지사 재직시절 직원의 부인은 물론 여승을 겁탈하는 등 무소불위로 권력을 남용했다. 1905년 농상공부 주사, 1907년 대구 군수, 평안남도관찰사 겸 세무감, 1908년 경상북도관찰사를 지냈다.

충남도지사를 시작으로 황해도지사, 충청북도지사, 중추원 칙임참의, 중추원 고문, 중추원 부의장,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등을 지냈다. 그는 1935년 판 〈조선공로자명감>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조선통치 25년간 최고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반민특위 또한 그를 “여타 친일파들과는 달리, 신념 자체가 친일이었던 사람”으로 평가했다.

‘논란’ 있는 박종만 충남지사-서덕순 충남지사

미군정기 도지사를 지낸 2명은 친일행위 여부를 놓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박종만 충남지사(朴鍾萬,1946.7.1~47.7.15)는 일제강점기인 1932년 현 논산시 광석면 면협의원에 선출(1932.6.2 동아일보)됐다. 면협의원은 지금의 기초자치단체 의원 격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역 말단인 면.읍회를 지냈다고 해서 친일행위를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면협의회는 일제가 조선인 통제와 식민통치를 원활하기 위해 만든 지역 하부 조직으로 주로 지역유지들로 구성됐다.

면장이나 면협의 의원들은 조선총독부의 가장 최하위 단위에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고 협력하도록 동원하는 역할을 했다. 또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해 수탈을 돕는 역할을 했다. 친일행위자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

▲ 박종만과 서덕순은 미군정기 충남도지사를 역임했다. ⓒ 충남도 누리집 갈무리

미군정기 박종만 지사에 이은 서덕순 충남지사(徐悳淳,1947.11.22~1948.10.18)도 친일행위 여부를 놓고, 논란이다. 그는 공주지역의 지주로 공주시가지금융조합 감사, 농지령이 개정으로 구성된 공주군소작위원회 위원(매일신보 1934.10.27), 공주시민회 임원 등을 지냈다. 1930년을 전후해서는 식산은행·조선기독교창문사·남선제사 등에 투자하기도 했다.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는 ‘식산은행 등의 중앙 및 지방조직 간부로서 재산을 수탈하기 위한 의사결정을 중심적으로 수행하거나 그 집행을 주도한 행위’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고 있다.

반면 그는 1917년부터 영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1919년 독립 만세 운동을 지원하고, 1927년 9월 결성된 신간회 공주지회 부회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1947년 11월 2일 자 조선중앙일보는 당시 제헌의회에서 서덕순에 대해 ‘일제 협력, 인망 부족으로 도지사 자격을 부결했다고 썼다.

일찍부터 공주지역 역사와 인물을 연구해온 지수걸 공주대 교수는 “객관적으로 일제강점기 때 그가 한 역할을 종합해보면 친일반역행위자로 평가하는 데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종합해 보면 김학용, 김홍식 도지사의 경우 친일반민족행위가 뚜렷하고, 진헌식 지사는 혐의가 짙고, 박종만-,서덕순 지사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경기도는 지난 1월, 친일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해 역대 도지사의 친일 행적을 홈페이지와 대회의실에 걸린 역대 도지사 액자에 친일 행적을 기록했다. 전북도는 친일 행적이 확인된 제11대 임춘성(1960년 6∼10월), 제12대 이용택(1960년 10∼12월) 도지사의 사진을 청사에서 철거했다.

<2020-02-1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역대 충남도지사 중 친일반민족행위자 ‘2명’

화, 2020/02/18-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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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조선일보의 성장 비결

▲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에서 교육·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문에 나서 조선일보사와 사주 일가의 부동산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 김 의원은 “<조선일보>와 그 사주 일가가 보유한 부동산은 총 40만여 평으로 시가 2조5000억 원 규모”라며 언론사·사주의 재산을 공개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 남소연

열린민주당 김의겸 의원이 <조선일보> 사주 일가의 부동산 규모를 16일 공개했다. 서울 여의도 면적 45%에 해당하는 40만여 평으로, 공시지가로는 4800억 정도, 시가로는 2조 5천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속초·양양·의정부·인천·서울·화성·대전·부산 등에 부동산이 산재해 있다는 것이 김 의원의 설명이다. 앞으로 언론사 및 사주의 재산을 공개하는 법안을 발의하겠다고 그는 예고했다.

<조선일보>는 초창기에도 재산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상훈 현 대표이사의 증조부인 방응모가 1933년 인수한 뒤에 이 신문사는 금(金) 문제로 주목을 받았다. 방응모가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금광 사업으로 큰돈을 번 뒤였을 뿐 아니라 그의 경영 방식이 언론기관보다는 일반 기업에 훨씬 가까웠기 때문이다.

방응모의 경영방식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난 1884년에 평안북도 서부인 정주군에서 태어나 10대 중반까지 한학을 공부한 방응모는 국권 침탈(경술국치) 1년 뒤인 1911년(만 27세)에 잠시 교편을 잡았다가 변호사 사무소에서 대서업을 경영했다. 3년 뒤 그만둔 그는 31세 때인 1915년부터는 자택을 이용해 여관사업을 경영했다.

그가 신문 사업에 손댄 것은 38세 때인 1922년이다. 이때는 <조선일보>가 아니라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했던 것이다. 뒤이어 정주지국장이 됐고, 1924년부터는 삭주군의 교동광업소를 겸영하면서 굴지의 광산업자로 떠올랐다.

그는 식민지배에 참여할 의향도 있었다. 1927년 정주지국장에서 정주지국 고문으로 물러난 그는 46세 때인 1930년에 광역의원 선거인 도평의회(도회) 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조선일보>와의 인연은 그로부터 얼마 뒤 맺어졌다. 48세 때인 1932년에 <조선일보> 영업국장이 됐다가 1933년에 아예 인수했다.

1932년에 135만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에 교동광산을 넘긴 뒤였으므로 <조선일보> 인수 당시의 방응모는 자금 사정이 넉넉했다. 이런 상황은 그가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기관총 구입비를 헌납하는 데 기여했다. 그 돈은 항공기 저격에 쓰이는 고사기관총 구입에 사용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제2권은 ‘방응모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1933년 3월 <조선일보>의 경영권을 인수하여 부사장에 취임했다. 같은 달 조선군사령부 애국부에 고사기관총 구입비로 1600원을 헌납했다. 같은 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1933년 10월에는 조선신궁 설립 10주년 기념사업을 담당하는 조선신궁봉찬회의 발기인 겸 고문이 되고, 1934년 3월에는 총독부와 군부의 지원 하에 일본 사상 전파를 담당하는 조선대아세아협회의 상담역이 됐다.

1937년 5월에는 총독부가 설립에 관여한 조선문예회의 문학위원이 되고 두 달 뒤에는 ‘경성 군사후원연맹’ 위원이 됐다. 1938년 2월에는 총독부의 언론 통제를 돕는 조선춘추회의 발기인 겸 간사가 됨과 함께 ‘조선 지원병제도 제정축하회’ 발기인이 됐다. 이듬해 7월에는 영국 타도 운동을 벌이는 배영동지회 상담역이 되고, 1940년 10월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가 되고, 1941년 8월에는 임전대책협의회의 설립에 간여했다.

▲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그가 상당한 열의를 갖고 이런 활동들을 벌였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1937년 2월 원산에서 시국 강연을 하던 도중에 ‘비국민적 행위를 배격하자’는 발언을 했다가 청중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자신과 청중들을 일본국민으로 전제해놓고 연설을 했던 것이다.

그해 7월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영업국장의 반대를 물리치고 ‘일본군을 아군으로 표기하는 방안’을 관철시켰다. “이후 <조선일보>의 지면은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는 조선총독부의 평가를 받았”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의 나라’가 어디인지 쉽게 느끼도록 만드는 대목들이다.

하지만 그가 일본을 위해서만 열심히 일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자신과 가족의 치부를 위해서도 열심히 뛰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가히 혁신적이었다. 신문 구독자 숫자를 늘리기 위해 경품 제공 방식을 도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헬리콥터까지 띄워 대중의 주목을 끌었다.

2015년에 <지역사회연구> 제23권 제1호에 실린 강영걸 대구대 교수의 논문 ‘식민지 시기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경영전략에 관한 연구’는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혁신호를 발행한 것은 1933년 4월 26일”이라며 그의 경영 방식을 이렇게 소개한다.

“방응모는 전 12면으로 구성된 혁신 기념호를 식민지 신문 발행 사상 최고 부수인 백만 부를 발행, 전국에 무료 배포한다. 연이어 어린이날을 기념하여 본사 헬리콥터를 띄워 에어쇼를 하는가 하면, 태평로에 당시로서는 최고층의 신사옥을 짓는 등 일반 대중에게 위용을 공격적으로 과시해나간다.”

노골적 친일로 성장

이 외에, 비행기를 이용해 취재한다든가 스타기자를 영입한다든가 하는 등의 아이디어도 그는 선보였다. 그 같은 공격 경영에 힘입어 인수 3년 뒤인 1936년부터 <조선일보>는 <동아일보>를 추월하게 된다. 인수 당시 <동아일보> 부수의 절반밖에 발행하지 못했던 <조선일보>가 역전을 이뤄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비정한 면모도 연출했다. 일장기 말소 사건 때 특히 그랬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의 운동복에 새겨진 일장기를 삭제한 채 손기정 사진을 내보낸 일로 인해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제재를 받자, 그는 이를 <조선일보> 도약의 계기로 자축하는 행사를 열기까지 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36년 8월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가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정간과 강제휴간을 당하자, 경쟁관계에 있던 <조선일보>는 전국적으로 발전 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이를 사세 확장의 기회로 이용했다”고 설명한다.

▲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5일 오전 서울 광화문네거리 조선일보사 부근 원표공원에서 ‘조선동아 거짓과 배신의 100년청산 시민행동’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과 함께 오종선 작가의 ‘조선일보 백년전’이 열렸다. 오종선 작가는 일제강점기 때 1월 1일이 되면 1면에 일왕 부처의 사진을 싣고, 제호위에 일장기를 올려 놓은 조선일보를 ‘두루마리 휴지’로 만들어 전시했다. 2020.3.5 ⓒ 권우성

공격적인 경영과 과감한 친일을 통해 방응모가 이룩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방응모 왕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잡지 출판에도 손을 댄다. 성인용 종합 대중지인 <조광>과 더불어 <소년>과 <여성>도 창간하게 된다. <조선일보> 창간 3년 뒤인 1936년에 그는 언론재벌이라 할 수 있는 이 같은 상태를 이루게 된다. 강영걸 논문은 이렇게 평가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산의 절반 정도를 투자하여 <조선일보>를 인수한 이후 방응모는 <조광>, <여성>, <소년> 등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언론 왕국을 꿈꾸었다.”

방응모의 사업적 성과는 노골적 친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혁신 경영은 빛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공격적이고 참신한 경영 기법에 토대를 뒀다 해도, 일본과의 노골적인 제휴 속에서 이뤄진 수익 창출이 정당성을 갖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반민족성과 반역사성을 태생적 운명처럼 타고난 <조선일보>는 오늘날에도 반시대적이고 부조리한 기사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 토대 위에서 <조선일보> 사주 일가는 여의도 면적의 45% 정도 되는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김종성 기자

<2021-09-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조선’은 어떻게 ‘2조 5천억’ 부동산 부자가 되었나

※관련기사

☞오마인뉴스 김종성의 ‘히, 스토리’

수, 2021/09/22-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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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쿄 동시 회견, 피해자쪽 원칙 제안

“일본 정부·기업 사죄가 해결 출발점
한국 정부·수혜기업도 역할 해야”

양국 정부에 공동협의체 지원 촉구
‘일 기업 자산매각’ 파장도 고려
한-일 협상 진행에도 영향 줄 듯

강제징용 사건 소송에 관여해 온 한·일 양국 변호사들과 이를 지원해 온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6일 오후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대회의실에서 연 ‘강제동원 문제 피해자 원고측 해결구상 발표’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김혜윤 기자[email protected]

한-일 관계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일본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공동 협의체’를 만들자는 제안이 피해자 쪽에서 나왔다.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 뒤 피해자 쪽에서 해결 방안을 내놓은 것은 처음이다. 우리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어간다는 방침인 만큼, 한-일 협상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에서 승소했거나 추가 소송을 하고 있는 강제동원 피해자 소송대리인단(변호사), 지원단체, 일본 변호사들이 6일 서울과 도쿄에서 각각 기자회견을 열고 “강제동원 문제 전체의 해결 방안을 검토하기 위한 협의체를 제안한다”며 “한일 양국 정부가 협의체 활동을 지원하고, 협의안을 존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협의체에서 어느 정도 해결 방안이 마련되면 “일본 기업을 상대로 진행되고 있는 현금화(매각) 조처를 중단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절차를 검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신일철주금(현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등에 강제동원을 당한 피해자 소송대리인단과 지원단체들은 서울 서초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법원 확정판결 이후 1년2개월이 지났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못했다”면서 “지난해부터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해법 마련을 위해 논의했고, 이번에 한일에서 동시 발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은 일본 정부와 기업이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는 원칙을 명확히 했다. 또 “한국 정부도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하고,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한국 쪽 수혜 기업도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이유로 협의체에는 피해자들의 대리인, 지원단체, 한일 양국의 변호사·학자·경제계·정치계 등이 포함돼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 소송대리인인 임재성 변호사(법무법인 해마루)는 “우리 외교부, 문희상안 등 지금까지 안이 모두 한국에서 제안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한일 양국의 법률대리인과 시민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낸 안이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도쿄에서 동시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와카미 시로 변호사도 “문희상 국회의장 안을 포함해 여러 안이 제시됐지만, 모두 돈을 누가 내느냐에 집중돼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피해자 개인의 인권 문제”라며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 협의체 창설이 필요하다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기자회견에는 1992년 일본에서 진행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소송대리인인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의 데라오 데루미 공동대표 등이 참여했다.

이처럼 강제동원 피해자 쪽이 적극적으로 협의체 마련을 요구하고 나선 데는 현금화 조처가 불러올 파장도 영향을 줬다. 대법원 손해배상 판결에 따라 압류한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은 한일 모두에게 부담이다. 대구지법 포항지원은 지난해 5월부터 일본제철에 대해 현금화 명령 절차를 밟고 있다. 현금화 조처가 이뤄지면 일본 정부가 대놓고 보복을 공언하고 있어, ‘역사 문제→경제 보복’ 등 한-일 관계가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 쪽 대리인인 이상갑 변호사(법무법인 공감)는 “현금화가 되면 한·일 정부, 국민 모두 어려운 상황이 된다. 이 문제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임재성 변호사도 “현금화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절차를 밟고 있는 피해자들의 개별 동의가 필요하다”며 “협의체를 통해 강제동원 해결 방향이 잡혀야 피해자들에게 의사를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강조했다.

김소연 기자, 도쿄/조기원 특파원 [email protected]

<2020-01-07> 한겨레

☞기사원문: 강제동원 피해지원 한-일 변호사 “공동협의체서 문제 풀자”

※관련기사

☞ 미디어오늘: 한일 언론 관심 높았던 ‘강제동원 해결방안’ 회견

☞ SBS: 강제징용 피해자 측 “문제해결 위한 한·일 공동 협의체 제안”

☞ 연합뉴스: 강제징용 피해자 측 “문제해결 위한 한·일 공동 협의체 제안”(종합)

☞ 노컷뉴스: 강제동원 피해자 측 “문제해결 함께 구상하는 한·일 협의체 만들자”

※뉴스영상

수, 2020/01/08-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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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동암 차리석 선생의 후손이 윤봉길 의사 후손에게

[오마이뉴스 차영조 기자]

▲ 미래한국당 공천장 받은 윤주경 후보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미래한국당 당사에서 열린 비례대표 후보 공천장 수여식에서 윤주경 후보가 공천장을 수여한 후 원유철 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남소연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이 비례대표 1번으로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 윤주경씨를 공천했다. 이를 두고 독립운동계의 원로를 중심으로 개탄을 넘어 격분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친일’의 굴레에서 벗어나고픈 보수정당의 속보이는 행태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독립운동가, 그것도 항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분의 후손이 ‘그 당’의 간판으로 나설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당’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와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장기독재를 자행한 원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럴 의지도 없는 정당이다. 촛불혁명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던 한일 ‘위안부’ 합의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다가 국민적 심판을 받은 바로 ‘그 당’ 아니냐는 당연한 비판이다.

그렇게 의아해하고 노여워하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송구한 말씀이지만, 나는 전혀 놀랍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상대로’라고 받아들였다. 원래는 작년 10월 공관 갑질 박찬주 전 대장과 함께 미래통합당(당시 자유한국당)에 입당할 예정이었으나 박찬주 전 대장이 여론의 몰매를 맞으니 눈치를 살피다 올해 2월 입당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윤주경씨는 2012년 10월부터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를 돕겠다면서 100% 대한민국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했고, 박근혜의 당선 직후에는 인수위원회 격인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는 윤봉길 의사의 말씀을 되새겼다”고 참여의 변을 밝혀 뜻있는 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부위원장 임명 직후에는 종편에 출연해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로 나라가 능력이 생기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국가유공자 자녀들에게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보내줬다, 그 결과 사회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고 나름대로 살 수 있었다”고 낯 뜨거운 용비어천가까지 늘어놓았다. 윤주경씨는 자신의 능력보다는 조상을 팔아 박근혜의 당선에 앞장섰고,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공세에 맞서 방패막이를 자임하며 면죄부를 주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그 대가로 윤주경씨는 2014년 9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독립기념관장을 지냈다.

그의 ‘친박’ 행보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독립운동계와 역사학계 전체를 분노하게 했던 건국절 논쟁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파동 때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애써 이를 외면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5년에 이어 2016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거듭 8.15가 건국절임을 강변하면서 대놓고 독립운동가들을 능욕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다 못해 박근혜의 반 역사적 망언에 일침을 가한 분은 90대의 광복군 출신 김영관 지사셨다. 김영관 지사는 2016년 8월 12일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면전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이 있는데,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고 꾸짖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그 당시 김영관 지사님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의 정체성 마음껏 드러내도록… 이젠 정치인으로 대우하자

윤주경씨에게 그러한 용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최소한의 염치를 바랄 뿐이다. 본인이 앞장서서 지지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그 대가로 기관장을 차지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박근혜가 국민적 심판을 통해 감옥에 가 있으면 적어도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고 자중자애하는 정도의 모습은 보여야 도리가 아닐까.

“윤봉길 의사의 뜻을 받든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큰 결단을 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윤주경씨를 영입하며 감히 윤봉길 의사의 뜻을 입에 담았다. 미래통합당 입당이 윤봉길 의사의 뜻을 받든 결단이라니 가소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앞으로 윤주경씨를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나 후손이 아닌 친박, 친황 정치인으로 대우하자. 윤주경씨 자신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외부의 기대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하였을 것이기에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마음껏 드러내도록 놓아주자는 의미이다.

윤주경씨의 행보를 보면서 호부견자(虎父犬子)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난다. 역사상 유명한 호부견자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유비와 그 아들 유선이다. 유비는 ‘창업’을 했지만 아들 유선은 ‘수성’은커녕 망국의 군주가 되어서도 반성과 회한을 몰랐다고 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고 고양이는 고양이를 낳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하지만 인간만큼은 예외다. 조상이 훌륭하다고 반드시 후손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이 없고, 조상이 비루하다고 해서 그 후손도 비루하리라는 법도 없다. 오직 평가는 각 개인의 몫이다. 그러니 윤주경씨의 정치 행보를 보면서 윤봉길 의사를 떠올리지는 말자.

나는 비록 윤봉길 의사의 ‘혈손’은 아니지만 감히 ‘정신의 자손’임을 자부하며 여생을 보내려 다짐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효창원에 모셔진 나의 아버지 동암 차리석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에 윤봉길 의사의 묘역도 참배하고 오리라.

<2020-04-0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윤주경씨의 빗나간 선택,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1번

금, 2020/04/03-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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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청 [안양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안양=연합뉴스) 김광호 기자 = 경기 안양시는 작곡가의 친일 행각으로 논란이 된 ‘안양시민의 노래’를 새로 만들기로 하고 다음 달 16일부터 5월 15일까지 곡을 공모한다.

공모에는 전국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응모 희망자는 공모 기간 내 악보와 작곡 파일을 시 문화관광과(☎031-8045-5593)에 제출하면 된다.

시는 전문가 심사를 거쳐 새로운 시민의 노래를 확정한 뒤 오는 9월 시민의 날 기념식에서 공식 발표할 예정이다.

수상작에는 1등 500만원, 2등 300만원, 3등 200만원의 상금을 지급한다.

기존 안양시민의 노래는 안양 출신 김대규 시인이 작사하고, 작곡가 김동진이 곡을 붙여 시로 승격되던 해인 1974년 5월 7일 제작됐으나, 작곡가 김동진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 인명사전 음악 부문에 친일작가로 이름이 오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다.

[email protected]

<2020-02-18> 연합뉴스 

☞기사원문: 친일 논란 ‘안양시민의 노래’ 공모로 새로 제정

수, 2020/02/19- 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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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도 일본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사과나 배상 없이 “한국이 양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할 것이란 부정적인 전망이 나왔습니다.

오늘(3일)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한 서태교 코리안폴리틱스, 야후 재팬 기자는 “아베 정권이 한국에서 생각하는 보수보다 더 우측, 극우에 가까운 정체성을 갖고 있다”며 “한국과의 과거사 문제는 끝났고 심지어 자신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사죄하지 않겠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영환 대외협력실장도 “일본 언론 역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과거 끝났다고 되풀이하고 있다”며 “문재인 정권을 반일이라고 낙인찍고,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 위안부 합의가 뒤집히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이야기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또 서 기자는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로 촉발된 일본의 수출 보복 조치에 대응해 일어난 일본 불매 운동의 효과와 관련해 “일본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고는 있지만 정부 탓을 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특성상 정책 변화의 동인이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지난해 말 문희상 국회의장은 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새로운 해법’이라며 이른바 ‘1+1+α’안을 내놓았습니다.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은 묻지 않고, 일본과 한국의 기업, 시민이 자발적인 기부금을 내서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한다는 내용이라 논란이 됐는데, 일부 국내 언론들은 일본 쪽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 기자는 “일본 반응은 아주 원칙적인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면서 “내용이 아니라 한국 사법부의 문제를 입법부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평가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일본의 양보 없이 한국의 양보로 문제가 해결되려고 하는 기미가 보인다고 평가한다”고 밝혔습니다.

<2020-01-03> tbs

☞기사원문: “일본, 새해에도 ‘강제동원 문제’ 사죄 없을 것” 전망

토, 2020/01/04-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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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다운로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부인하고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을 외면한
재판부를 강력히 규탄한다!

 

  2021년 6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하는 판결을 내렸다.

  해방 이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과 한국의 법정에서 자신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기나긴 좌절과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과 식민지배 책임을 묻는 투쟁이 피해자들의 존엄을 지키고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피해자들은 패소를 거듭하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시민들은 피해자들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한일 시민사회의 지난한 투쟁은 지난 2018년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로 소중한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대법원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국제인권법과 국제인도법의 성과를 반영하여 식민지주의의 극복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가로막아 온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성격을 분명히 하여 ‘65년 체제’의 극복을 선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을 실현한 역사적인 판결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서 원고들의 청구를 각하하면서 ‘식민지배가 불법이라는 주장은 국제법상 인정받은 적이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은 일괄처리 되었으며 피해자들의 권리 행사는 제한된다.’면서 ‘서세동점의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의 약소국 병합이 국제법상 불법이라는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실정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2018년 대법원 판결은 국내법적인 해석일 뿐’이라고 밝혔다.
  이는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선언한 대법원 판결을 의도적으로 폄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주의 극복이라는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왜곡된 역사인식에서 비롯한 판단으로 헌법정신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에 다름 아니다.

  또한 판결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해 한일 시민사회가 수십 년 동안 쌓아올린 강제동원 소송투쟁의 법적, 사회적, 역사적 성과와 의미도 부정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줄기차게 식민지 지배, 전쟁피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부정해 왔다. 재판부가 판결에서 사례로 든 ‘니시마쓰(西松)건설’ 강제동원 사건의 일본 최고재판소 판결(2007년 4월 27일)은 일본 사법부가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여 만들어낸 대표적인 논리이다. 즉, 한국과 중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소송이 잇따르자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지만 재판으로 청구권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논리를 만들어 법적 책임을 회피해 온 것이다.
  결국 니시마쓰 판결로 피해자들은 강제동원의 피해사실을 인정받았지만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청구할 길이 영원히 막혀버리고 말았다. 이에 피해자들은 부득이하게 한국으로 무대를 옮겨 지난한 법정투쟁을 전개하였으며 마침내 2018년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부정하고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을 그대로 인용하여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재판받을 권리마저 가로막았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청구가 받아들여져 향후 제기될지도 모르는 국제재판에서 패소하게 될 경우에 “대한민국 사법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이제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하며, 여전히 분단국의 현실과 세계 4강의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상황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의 대표국가들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가 훼손되고 이는 결국 한미동맹으로 우리의 안보와 직결되어 있는 미합중국과의 관계 훼손으로까지 이어져 헌법상의 ‘안전보장’을 훼손하고 사법신뢰의 추락으로 헌법상의 ‘질서유지’를 침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리는 왜 재판부가 법적 판단을 넘어 정치 외교 안보 등의 문제를 과잉해석해가며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강변하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사대적이고 기상천외한 발상을 서슴지 않고 판결문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2013년 강제동원 사건의 파기환송심 판결에 대해 일본 경단련 등 경제 4단체는 ‘한반도 출신 징용공 등의 청구권 문제는 앞으로 한국에 대한 투자나 비즈니스에 장애가 될 우려가 있고, 한일 경제관계를 훼손시킬 가능성이 있어 깊이 우려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아베 정부는 ‘국제법을 위반한 있을 수 없는 판결이다. 일본 정부는 의연하게 대처하겠다.’며 수출규제를 시작했다.
  박근혜의 청와대와 외교부, 양승태의 사법부, 피고기업을 대리한 김앤장은 피해자들의 목숨을 대가로 한 사법농단을 통해 의도적으로 판결을 지연시켰고, 그 사이에 수많은 피해자들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근혜는 “강제징용 피해 배상이 확정되면 나라 망신”이라며 사법농단을 직접 지시했다. 양승태를 비롯하여 사법농단을 주도한 법관들은 아직도 반성은커녕 의도적으로 재판을 지연시키며 처벌을 피하고 있다.

  이번 판결은 사법농단의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처벌, 그리고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한편 피해자들의 당연한 권리행사가 국가의 안전보장을 해친다며 ‘인권’보다 ‘국익’과 ‘국격’을 앞세우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사법부 본연의 임무는 피해자의 인권을 외면하고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피해자의 인권회복을 위해 오로지 헌법정신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2015년 일본군‘위안부’ 한일합의는 박정희 군사독재와 박근혜 정권이 ‘국익’과 ‘국격’, ‘국가안보’와 ‘한일관계’라는 미명 아래에 피해자들의 ‘인권’을 무참히 내팽개친 외교적 참사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이번 판결도 이와 결을 같이하는 것으로 역사의 엄중한 평가를 면치 못할 것이다.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고 이를 다시 역행시키려는 도발은 항상 있어왔다. 대법원의 승소판결에도 일본 정부와 피고기업은 사죄와 배상은커녕 2년 7개월이 지나도록 한일관계의 파탄을 위협하며 어떠한 책임도 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을 것이며, 지난 수십 년간의 연대투쟁을 멈추지도 않을 것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인권회복과 역사정의 실현이 불가역적으로 관철될 그 날까지 우리는 항상 그들과 함께 할 것임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밝혀둔다.

2021년 6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수, 2021/06/09-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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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수요집회 “피해자 중심주의 근거해 문제 해결하길”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434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온라인 생중계로 진행되고 있다. 2020.4.8/뉴스1 © News1 김진환 기자

정의기억연대가 1435차 온라인 수요집회를 열고 새로 뽑히는 국회의원들이 여성인권평화재단을 설립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법안을 속히 통과시켜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위해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국회의원 총선거날인 15일에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온라인으로 열린 수요 집회에서 정의기억연대는 “우리가 30년 동안 거리에서 외치고 많은 국민이 함께했던 간절함을 담아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한 법안이 통과되고 시행되는 국회가 되길 바란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새로운 국회의원은 할머니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진정한 피해자 중심주의에 근거한 해결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들이 되길 바란다”며 “여기 모인 우리는 그들이 진정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활동하도록 똑똑히 지켜볼 것이며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더욱 큰 목소리로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성인권평화재단은 일본군 ‘위안부’ 관련 사업과 연구를 지속하고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기관으로 20대 국회에서는 관련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한경희 사무총장은 “여성인권평화재단의 설립 근거 기반을 갖출 수 있는 뜻 있는 국회의원들을 20대 국회에서 (기대했는데) 논의조차 못했다”며 “우리가 30년동안 외치고 많은 국민들이 함께했던 간절함을 담아 법안이 통과되고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에 한발짝 나갈 수 있는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 총장은 이날 인도네시아 위안부 피해자인 자헤랑 할머니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혜랑 할머니는 12살에 직물공장 공장장한테 끌려가 일본 군대 위안소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자헤랑 할머니는 이후 곳곳에서 증언하고 위안부 피해문제를 알리다가 지난 11일 오전 9시에 소천했다.

수요집회에는 만 18세로 처음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청소년들의 발언문을 정의기억연대 관계자가 대신 읽으며 투표를 독려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올바른 지도자를 뽑을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올바른 지도자를 뽑아야 하며 할머니들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편 지난 지방선거까지도 투표권을 행사한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는 투표 의지는 있으나 이번 총선에서는 투표장에 가지 못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4일 건강상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하고 13일에 퇴원했으나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서울=뉴스1) 최현만 기자 [email protected]

<2020-04-15> 뉴스1 

☞기사원문: “위안부 피해자 위한 평화재단 설립 21대 국회 나서달라”

목, 2020/04/1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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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 FM 94.5 (18:10~20:00)
■ 방송일 : 2019년 12월 27일 (금요일)
■ 대담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아래 텍스트는 실제 방송 내용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보다 정확한 내용은 방송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동형의뉴스정면승부] 위안부합의 각하 결정문 분석해보니 “거의 이겼다”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오늘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정부 당시 이루어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에 대해 심판 대상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는 양국의 조약이 아닌 정치, 외교적 합의라면서 헌법소원 청구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건데요. 오랫동안 위안부 문제 연구해 오신 국제법 연구자, 민족문제연구소 조시현 연구위원 연결해서 이야기 나눠봅니다. 위원님?

◆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하 조시현)> 네, 안녕하세요.

◇ 이동형> 헌법재판소가 각하 결정을 내렸네요? 예상하셨습니까?

◆ 조시현> 저는 예상은 못 했지만 각하라고 하면 재판에 진 것처럼 인식하기 쉬운데, 그 내용을 실질적으로 들여다보면 그동안 위안부 피해자들, 그리고 지원단체들이 주장해왔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 거의 이긴 판결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 이동형> 조금 자세히 설명을 해주시죠?

◆ 조시현> 네, 일단 아까 모두에 나왔듯이 위안부 합의가 2015년에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해서 일본 정부가 10억 엔, 즉 한국 돈 100억 원 정도를 내고 위안부 문제는 이제 끝났다.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는 합의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피해자들은 그런 합의가 권리를,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헌법소원을 낸 것인데요. 사실 합의에 대해서 헌법재판소는 합의가 정식 조약이 아니다, 따라서 정치적 합의고, 비구속적 합의다, 이렇게 어려운 말을 했는데요. 결국, 권리의무관계, 피해자들의 권리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명언을 한 겁니다. 그래서 헌법소원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그동안 합의의 성격이 무엇이냐를 놓고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그 논란을 종식시킨 것이죠.

◇ 이동형> 그러니까 헌재가 이것은 조약이 아니고 정치적 합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이야기했고, 그 증거로 서면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구두였다. 또 국무회의 심의나 국회의 동의도 받지 않았다. 또한 일본의 사죄와 반성의 법적 의미를 확인할 수 없다. 10억 엔이라는 돈도 시기, 방법이 언급되지 않아서 구속력이 없다. 어쨌든 할머니들의 주장을 대폭 수용했다는 것이 결정문에 나와 있다고 보면 되겠네요?

◆ 조시현> 대폭이 아니라 100% 수용했다고 보는데요.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015년 합의는 일본의 법적 책임 인정과 진정한 사과, 온전한 배상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뭐냐면, 법적 책임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얘기고, 진정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고요. 또 온전한 배상을 또한 받아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명확하게 밝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이동형> 그리고 어제 고등법원에서 피고 대한민국은 위안부 합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라, 이렇게 이야기했단 말이죠? 이것도 의미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되는데요.

◆ 조시현> 네, 그런 면에서 위안부 합의가 법적 합의는 아니지만, 따라서 권리 의무에 직접 영향은 없지만 법적으로는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이 합의가 있음으로 해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제기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 걱정하시고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죠. 그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 어제 고등법원에서는 국가가 그러한 고통에 대해서 인정하고, 앞으로 제대로 해결하라, 이런 식으로 주문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이동형> 알겠습니다. 또 한 가지가요. 문희상 국회의장이 낸 안인데요. 일본 정부는 이 안에 대해서 상당히 진전 있는 내용이다, 좋은 평가를 하던데요. 일단 피해자 분들은 상당히 반발하고 계시거든요?

◆ 조시현>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라고 하는 것이 한일 과거사 문제 해결에 있어서 어떤 헌법적인 원칙, 또 중요하게는 피해자의 권리, 피해자 중심의 접근을 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보면 문희상 안 자체도 오늘 나온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입각해서 한국 정부가 어떠한 방향으로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지 이정표, 좌표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동형> 그런데 어쨌든 우리의 사과 요구라든가, 배상안이라든가, 일본 정부에서 받아들여야 하는데요. 일본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단 말이죠. 그리고 한일관계가 계속해서 경색 국면에 빠져 있는 상태고요. 묘수는 없을까요?

◆ 조시현> 글쎄요. 일단은 헌법재판소로서는 법적 한일 간의 분쟁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요. 그에 따라서 청구권 협정 제3조에 보면 이런 해석상 분쟁이 있을 때 일본과 협의하고, 중재하라, 이런 내용을 다시 헌법재판소가 확인했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법적 해결의 길은 있고요. 그다음에 그것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의 영역이라고 강조했어요. 결국, 일본이 설득에 응하느냐, 안 하느냐. 이것은 법적인 문제이면서도 정치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를 모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이동형> 헌재 결정에서도 봤듯이 합의가 조약이 아니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구두로 합의한 것을 파기하고 재협상도 가능하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 조시현> 정치적 합의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면 합의내용을 달리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주장하듯이 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 문제를 완전히 끝나게 하기 위해서는 모종의 법적인 합의,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 이동형> 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 조시현> 네, 감사합니다.

◇ 이동형> 지금까지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었습니다.

<2019-12-27> YTN 

☞기사원문: 위안부합의 각하 결정문 분석해보니 “거의 이겼다”

토, 2019/12/2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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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민족으로서 우리의 건국설화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매우 특별하다. 대부분 나라의 경우. 건국설화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경으로 설정하거나 초인적인 영웅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지배권력을 미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하여, 우리 설화의 경우에는 태백을 거점으로 삼아 상제의 아들인 환웅이 보기에 아름다운 땅을 선택하여 나라를 세우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이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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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는,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초상화

단군신화로 알려진 위의 이야기가 후대에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것인지, 오랜 역사 속에 체화되고 전승되어온 이야기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토대를 형성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언어로서 가장 감동적이며 성스러운 내용을 담아낸 성경의 주기도문과 같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나라를 세우며(이화세계)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규범(홍익인간)을 삼는다는 것은 종교사적 견지에서는 황금률적인 표현이며 정치학적 의미에서도 제1의 공의적 원칙이다. 이번 글을 통하여 상기의 원칙들이 한국 역사에 투영된 기록을 찾아가며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가름해 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무속적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적 모습으로 수렵사회를 반영한 제천행사가 부여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 형태로 행하여졌다고 전해지며, 농업이 번성하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단오와 추석과 같이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음식과 가무를 즐기는 명절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이후 신라의 기록을 보면 불교가 전해지면서 지배계층인 화랑이 중심이 되여 향도(香徒)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지배질서로서 종교적 규범을 강조하고 생활의 실천적 지침을 삼아 내려오다, 이후 일반백성에게까지 조직이 확산되면서 새로이 절을 짓거나 탑을 쌓거나 불공의 행사에 다중들이 함께 모여 공력을 제공하고 신앙적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고려 왕조로 들어서면서 종교적 배경과 행사를 위해서 조직되고 활동하였던 향도는 이제 향촌의생활 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香徒가 아닌 鄕徒가 되여 생활의 공간과 내용을 공유하면서 함께 노동하고 함께 즐기고 서로를 도와가는 양속으로 이동했다. 마을의 공동노역, 혼례, 장례, 마을 수호신 제사를 함께 치르면서 자연스레 상부상조적 조직으로 변모해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한민족 역사를 줄곧 관통해온 두레라는 협동적 노동방식과 상부적 자조금융인 다양한 형식의 계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향촌의 통치 방식에서도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을 내세워 왕권을 대신하여 중앙에서 향촌으로 파견된 관리 간에 협의 내지는 역할 분담을 이루면서, 읍사(邑司)가 중심이 되어 일종의 지역자치를 이루면서 내려온 셈이었다. 그러나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되어 확산되면서 자치적 성격이 강했던 향도와 읍사는 양반 중심의 지배계층에 의해 유교의 가르침과 규범을 가르치는 향약(鄕約)으로 흡수되어 재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향약은 사원과 함께 향촌에 뿌리를 내린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중앙정치의 훈구 세력에 맞서는 일종의 정치적 거점으로 변모한다.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적 관료체제인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경제의 축을 이루는 농업 기반인 토지의 사용 및 소유의 형태와 조세정책의 변화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지배권력간의 이권과 세력다툼, 그리고 권력의 틈새에서 민중들 스스로 자조하고 순응하며 때로는 협약하고 저항해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경제의 기반과 운용의 결과물을 놓고 지배계급과 기층민중간에 전개되는 ‘정치동력학’적 궤적이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확고히 정립한 조선조 초기에는 주요 경제기반인 농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산업정책의 기본으로 정하고 소농의 농민을 중심으로 백성을 위한 민본(民本)의 왕도사상을 정치적 지향으로 삼아 왔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 조준 등이 비록 의도했던 균전제를 온전히 도입하지 못했으나 과전 및 직전법을 시행하여 고려 말 혼란하고 무질서했던 토지 소유관계와 조세체계를 바로 잡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왕족과 세도가들의 토지겸병 현상이 심화된다. 수조권을 기반한 토지지배구조가 약화되거나 붕괴되고 매득(買得), 장리(長利,) 개간(開墾) 등 통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대되면서 농지를 떠나는 유민(流民)들이 대거 발생하고, 일부 양반들이 사노(私奴)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된다.

이에 지방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가 만든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제도적 모범으로 삼고 사원과 유향소의 부활을 구실로 삼아, 탐욕스런 중앙의 왕족들과 세도가들을 견제하며 나라의 기반인 농촌사회가 무너져 가는 것을 방지하고 성리학을 정치사회적 규범으로 삼아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목숨을 건 정치투쟁을 전개한다.

중종에서 시작하여 명종을 거쳐 임진왜란 전의 선조 대에 이르기 까지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 향약을 한글로 보급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들인 조광조, 이퇴계 그리고 이율곡 등으로 이어지면서 사림파와 훈구파 간에 성리학의 해석을 겸한 권력투쟁과 향약논쟁의 역사가 펼쳐진다.

향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섬서성의 한 향촌에 국한되어 행하였던 여씨향약을 주자가 국가단위의 시행을 위하여 새로이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다음과 같이 주요 4개의 덕목으로 요약하였다.

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 바른 일은 서로 권한다.

예속상교(禮俗相交) : 미풍양속으로 서로 교제하여 이를 널리 확산시킨다.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한 일은 지적하고 비판하여 바로 잡는다.

환난상휼(患難相恤) : 개인 또는 향촌이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함께 극복해 나간다.

향촌에 거점을 두고 있던 조선조 사림의 양반들은 상기 향약의 내용과 제도를 무기로 삼아, 한편에서는 중앙정치의 세도가들의 탐욕과 패악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성리학적 윤리도덕을 기반으로 현존의 상하 신분관계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향촌의 공동체에 자발적 참여를 통한 자치기능을 부여하여 스스로 규계(規戒)하고 향촌을 유지 발전시키는 규칙을 세우며 고조선 이래 배달민족의 양속인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전통을 지켜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들의 향약 실천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움직임에 대하여 중앙의 왕족과 세도가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예건데 인물이 부족하다거나, 인심과 풍속이 투박하여 오히려 역작용의 폐해가 예상되며, 신분제의 붕괴가 염려되고, 왕권의 향촌을 다스리는 힘이 약화된다는 등 이유를 핑계로 삼아 몇 번의 사화를 통하여 사림파들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

권력의 다툼과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향약은 오래된 것으로 이를 실시된 곳마다 사람들이 서로 보살피고 돌아보며, 서로 돕고 질병에 함께 대응하며 구제하며, 자제로 하여금 유학의 가르침을 따라 효제의 뜻을 두텁게 하는 것을 가르치니, 삼대지치(三代之治)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 – 化民成俗”라는 상소에 따라 중종 시절부터 적극적인 시행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매우 주목할 만한 인물이 조선중기 최고의 지성이자 실천적 행정가였던 이율곡 선생이다. 본인이 관직에 있을 당시 향약을 권하면서 파주향약의 서문을 직접 작성하였고 청주목사로 재직 시에는 서원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조가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려 하자 오히려 시기가 너무 이르다(時期太旱)고 주장하며 시행을 보류하도록 간곡히 주청하여 계획을 중단시켰다. 더욱 기이한 것은 본인이 훗날 향촌에 머물면서 다시 완성도가 매우 높은 해주향약을 제정하여 보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일견 서로 모순되고 상반된 이런 대목은 선조라는 못난 왕의 됨됨이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능할 듯하다. 사림들의 줄기찬 요구에 따라 신하들의 논의를 거쳐 향약의 전국적 실시를 결심할 단계에서 이율곡은, 선조가 민본의 왕도정치에는 별로 뜻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왕권 강화에만 마음이 머물러 있어, 이런 상태에서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향촌의 자치적 기능과 양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훼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왕권과 중앙정치의 강화를 위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할 것을 심히 염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필자가 제3 섹타경제론의 서론에서 제기한 지적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겨우 유아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재단계의 사회적 경제영역은 당연히 지자체를 포함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법제적 도움과 재정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揚水論), 제3 섹타가 추구하는 자발적 참여와 스스로 역동적이어야 할 네트워크 형성을 정치와 행정 권력이 저해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되풀이 언급하지만, 제2 섹타와 더불어 세 분야 영역 모두 병렬적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 선생이 보여준 천재적이면서도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다시 한번 반추해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패자적 왕권과 세도가들의 영향을 차단한 것만이 아니라,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여씨향약을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실천적인 내용을 담아내었다. 자발적 참여와 회원들간 원만한 합의를 유도하기 위하여 향약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세칙을 정치하게 기술하였고, 실천적이고 구속력 있는 모임이 되기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선악부(善惡賦)의 작성 요령과 규칙을 세밀히 규정하여 향촌내 세력가들이 행할 자의적인 패악을 엄하게 금하였으며, 향약의 기능을 사창(社倉)과 통합하는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을 제창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향촌단위의 사회안전망적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율곡 선생이 지향했던 향약 실천의 뜻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단순히 기존의 지배 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넘어서서, 위로부터의 통치가 아닌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에 따른 자치를 이루고, 성리학적 규범 가치를 공유하면서 예(禮)를 통한 윤리적 절제로 향촌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며, 향촌 단위로 상호부조를 통해 사회경제적 안전망 기능을 부여하고, 전체적인 강제보다는 개인과 공동체간의 관계성 회복에 초점을 두었다 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앞선 칼럼 ‘인본적인 사회주의자’에서 소개한 19세기 초 프랑스 사상가 사를 푸리에의 기획과 일맥 상통하며 1990년대 노벨경제학을 수상한 인디애나 대학의 오스트롬 교수의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라는 저작에 담긴 구상과 비견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다시 한번 대학자의 경륜과 가르침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안타까운 것은 필자가 역사 공부에 어둡고 한문이 서툴러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분야의 전문학자님들께서 좀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밝혀주시길 희망할 뿐이다.

아쉽게도 향촌 단위의 자치적 분권을 의도하였던 향약의 보급과 시행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 신분제의 급격한 붕괴, 다양한 원인으로 촉발된 농민층의 분화, 향시(鄕市)를 넘어선 격지 간 상업의 발달, 세도정치의 패악, 삼정의 문란 등으로 멈추어 서게 된다.

반면에 사림의 양반이 주도하였던 향약 운동을 대신하여, 모내기를 도입한 이양법으로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왔던 일반 백성 중심의 집단협동적 노동방식인 두레와 상호부조적 금융시스템인 다양한 계의 모임이 활발히 되살아 나고, 외척과 부패한 관리 등 지배층의 탐욕과 패악에 대항한 산발적인 민란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자각과 실천 운동들이 벌어지게 된다.

청제국을 파탄내는 서세동점 흐름과 한국땅에 상륙한 가톨릭과 개신교 등 기독교의 충격 속에 북학파를 시작으로 전개된 다양한 실사구시적 운동, 위로부터 자강을 시도한 개혁파의 시도, 일반 백성들의 근대적 각성을 촉발한 동학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운동 등이 전개되었고, 불행하게도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등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반쪽뿐인 현대 한국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칼럼_181004(4)통일뉴스
사진: 통일뉴스

2018년 현재, 남한사회는 양가(兩價)적이며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견 일인당 GDP가 3만 불을 넘어서면서 수치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고, 국력에 있어서도 세계 11위권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미들파워 국가로 부상하였다. 반면에 외부적 조건이 불리한 가운데 양극화가 극심하고 사회적 불안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득의 불평등 상황이 미국과 함께 OECD국가 중 가장 열악하여 1%의 국민이 20% 정도의 소득을 점하고 있고, 자산소득은 더욱 극심하여 이의 정도를 알려주는 피케티지수(국민순자산/국민총생산)가 10에 근접하고 있으며 (역사적 경험으로 지수가 6을 넘어서면 전쟁을 부추긴다고 피케티는 설명하고 있다), 1%의 부자와 재벌기업들이 민간소유 토지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자본 시장의 경우는 심한 정도를 넘어서서 1%의 자본가가 90%의 배당소득을 차지하는 등 극한적인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은, 마치 왕족 및 세도가와 이들의 하수인격인 권노(權奴)들이 불법적인 토지겸병의 탐욕으로 국가질서를 뒤흔들고 온갖 수단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던 조선중기 이후의 패악스런 모습이 다시 부활한 듯, 더욱 뿌리를 깊이 내린 채 난공불락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타결책으로 어리석게도 국민소득 4 만불의 수치적 성장론을 제시한다거나 소중한 그린벨트를 풀어서 주택 건설량을 늘려 투기를 막고 주거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상황을 더욱 나쁜 방향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핵심은 소수를 위하는 양적 성장에서 전환하여 일반시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민본중심의 사회경제적 운영의 철학과 방향 위에서, 저마다 생업에 전념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투기적 부동산 소유에 대해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고통을 가하고 불로적 지대소득에 대한 확실한 누진과세를 적용하며, 경제적 성과를 국민 모두가 골고루 향유하는 배분과 순환의 원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역사적 변혁기에 서있는 한국사회는 당면한 문제를 본질적으로 직시하고 접근해야 한다. 부패하고 탐욕스런 무리와 이를 부추기는 관행 및 제도에 대항하여, 향촌의 사림들이 시도하였던 향약의 시행과 더불어 백성들의 자조적인 운동이었던 두레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건국 신화로 전해지는 이화세계와 홍익인간의 역사문화적 DNA를 다시 발견하고, 이를 사회생물학적으로 우리 생활 속에 살아있는 유전적 밈(meme)으로 진화되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꾸어 가야 한다.

목, 2018/10/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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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한국 역사교육은 ‘수동 운전 중’– 국정 역사교과서 계획안에 대한 분노 일파만파로 확산– 40년전 박 정희 전 독재자가 강행한 국정교과서, 이번엔 딸인 박 근혜 대통령이 강행– 교육부, 학생들은 “지적으로 미성숙”해 국정 교과서 필요이코노미스트는 24일 “한국의 역사교육은 ‘수동 운전 중’, 학교의 역사 교육을 통제하려는 정부의 시도가 분노를 자아내다”라는 제목의 옵 에드 기사에서 정부의 국정 역사교과서 계획안에 ...
토, 2015/10/24-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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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노동자 건강의 법과 현실> 이라는 강좌의 내용이다.  산재와 직업병에 대해서 법적인 인정기준을 알고보상받는 방법론에 대해서 아는 것도 필요하겠지만이 번 강좌는 그 이면의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1강 에서 의학적 의료적 건강담론이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2강에서는 노동운동과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관계

이 지면에서 소개하는 것은 3강 법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4강 현재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알바,하청노동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학문적 운동적 연구와 노동현장에 대한 관리감독 영역을 두루 경험 하고다시 학교로 돌아가 안전과 환경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이어서 지금 이 시간 노동현장의 최전선에서 부조 리와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있는 두 노동자와의 대화를 들려드리고자 한다법을 공부하든 그렇지 않든 노동과 건강의 현실 너머 정치사회적 맥락을 이 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법이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굴뚝청소부와 미친 모자장수

 

제가 재야연구소에서도 일하고, 정부에서도 일해 보고 이제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게 되었다. 법에 대해서는 법학개론만 들은 사람인데 법조인들 앞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웃음). 근래의 동향부터 얘기해보겠다. 세월호 사건 이후 세 개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안전을 다시 보려고는 하는데 좌충우돌 하는 상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안 내놓고 있다, 사실 실정법 속에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 대표적으로 좋은 법이다. 법의 철학과 원칙을 외국 에서 베낀 거라 내용이 좋다(웃음). 세월호 사건이 그냥 일어난 게 아니다. 일련의 큰 사고들이 있어 왔다. 그리고 뻥 터진 거다. 저는 그 시작을 20128LG화학 공장 폭발사고로 본다. 주목받지 않은 사고인데, 다이옥산 이라는 인화성 물질, 이것을 OLED 만들 때 추출 회수하는 것인데, 다이옥산 증기가 인화성 물질이라 폭발할 수 있다. 대기업인 LG 마저도 제대로 못해서 폭발이 일어나고 11명이 돌아가셨다. 후속보도는 그 기업에 지역도서관에 책을 기부했다는 이야기가 후일담으로 나오더라. 20129월 구미 휴브글로벌 불산누출 사고가 일어났다. 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2013127 삼성불산 누출사고가 일어났다. 여론도 악화되었다. 우리 사회는 더 큰 사고가 일어나서 앞의 사고를 잊게 한다, 앞의 기업들은 얼마나 좋아할까. 사람들은 이걸 노동안전의 문제로 받아들이나? LG 사건은 망각했고, 구미는 환경문제로 받아들였다. 삼성도 환경안전의 문제로 봤다. 삼성과 대중 모두 노동안전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환경안전의 문제가 없진 않지만 기업, 노동안전의 문제다. 우리 사회의 안전논의, 정상인가. 최근 많이 나오는 이름, 하인리히 법칙은 사고의 법칙이다. 사고가 발생하는 매커니즘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이야기이다, MAJOR INJURY 1이 있을 때 MINOR INJURY 29, NO INJURY ACCIDENT300 이라고 정리했다. 이건 75,000건의 산재를 분석한 거다. 1931년에 출판했는데, 미국 산재보험이 민영보험인데 책 쓴 사람이 보험사직원이었다. 이 사람은 (학자가 아리라) 돈을 벌려고 쓴거다. 사고를 바라보는 과학적 법칙이 최초로 산업재해로부터 나왔다. 안전은 어느 부처에서 해야 할까. 국민안전처? 거기서 뭘 하겠나, 국민이 들어갔으니 국가보단 나은 것 같지만, 구조를 중심으로 하겠다는 거다. 비전문가들은 안전으로 퉁치지만 예방은 전혀 다른 거다. 잘못된 조직이다.

 

이렇게 모을 것 같으면 여기에 예방하는 조직들도 가져다 붙여야 한다. 실제 예방 업무는 20개 부처에서 다 한다. 안전을 나눠보자. 해상안전 교통안전 환경안전 식품안전 노동안전 제품안전 시설안전 이것들이 다 독립적으로 있나. 겹쳐 있다. 법은 적용범위가 서로 있는데 상충 안 되게 하려고 하지만 모든 곳에 들어가는 감초 안전이 있다. 노동안전이다. 생산의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들, 그 겹치는 지점, 자본주의는 생산을 하기 때문에 모든 위험은 생산에서 나온다. 노동안전은 하인리히가 드러내주기도 했지만 제1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비율도 높고, 모든 불안전 상태를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최근 동향은 이 노동안전을 쏙 빼놓고 한다. 일부러 빼는데 한 몫 하는 곳이 정부, 그 중에서도 바로 노동부다. 심지어 판교 환풍구사태도 노동부는 관계당국이 된다. 피해자들이 야근을 했기 때문에. 산재 여부도 논란이 된다. 노동부가 거기 갔다. 감독관이 갔다. 노동부가 관계당국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경제부처인양 행동한다. 문제가 터지면 책임져야 하니까 하지 않는다. 영국이나 미국처럼 노동자안전 관련 정부기구가 독립해야 움직일 수 있는데, 그렇게 할 생각조차 안하고 있다. 그게 핵심적 문제다. 노동안전은 역사가 가장 오래된 안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작부터, 사회법의 시작이다. 노동법 중에서도 실은 노동안전이다. 노동법 역사를 말하면 안전의 원칙이 도출된다. 유럽의 안전법들이 그렇게 입안이 되었고 철저한 원칙이 있다. 놀라울 정도로. 노동법의 역사는 다들 아실텐데, 최초의 노동법은 공장법이다. 1833년 공장법을 말하는데, 이 때 근로감독관을 최초로 임명했다. 앞서서 최초의 노동법은 1799년 단결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건 단결금지법이었다. 사실 노동법이 아니다. 1824년에 단결금지법을 금지하는 법안이 나온다. 1802년의 법이 하나 있다. 구빈원이 거리에 있는 부랑아들을 강제 수용해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교도소였다. 어린 아이들은 일을 더 시켰다. 아이들을 대공장에서 가혹하게, 16-17시간 일을 시켰다. 헬스(환기-주로 면공장이라) 모럴(교회 갈 시간이라도 주고 일을 시켜라)는 법이다. 사실 노동안전보건법이다. 아이들이 죽거나 병든 것이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1776년 국부론이 나오는데 국부론이 나오기 1년 전에 최초의 직업성 암이 밝혀진다. 굴뚝청소부. 왜 굴뚝 청소가 갑자기 필요해졌을까. 산업혁명 영향으로 이 때부터 가정에서 석탄을 때야만 했다. 석탄 질이 나빴다. 부산물도 유독하고. 당시 기차가 달리고 철강, 엄청난 고열을 필요로 하는데, 나무가 좋은 연료였지만 다 써버렸다. 석탄도 많고 하니, 코크스 오븐 방법을 개발해서 석탄을 쓰기 시작한다. 당시 영국 굴뚝의 지름 평균 46센치. 굴뚝 청소부가 드나들었고, 어린 아이 여야만 했다. 이 아이들에게 질병이 생겼는데, 무슨 암이었을까. 고환암. 피부암에 속하고, 숯검댕의 피부노출이 극심하게 되면서 고환 밑이 변색되고 사마귀가 나면서 암이 되고, 전이가 일어나서 매우 고통스럽게 죽는 병이다. 1775년 퍼시벌 포트 라는 외과의사가 밝혀내는데, 당시 굴뚝 청소부에게는 폐암이 더 많았을 건데, 그 때 고환함을 진단했고, 국회의원으로써 국정감사를 했다. 1788년에 가서 굴뚝청소부 법이 만들어진다. 몇 살 이하 어린이는 굴뚝에 올리지 말자고 했다, 8살이다. 고환암은 양반이었다. 청소하는데 불을 때서 불에 타죽거나 질식으로 죽는 게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독일은 같은 시스템에서 안 걸렸다는데, 갑옷을 입혀서 피부노출이 안 되었다고 한다. 이게 최초의 노동안전보건법이다. 1788-1802년 이 때 만들어진 노동법이 다 노동안전보건법이다.

 

13-4 굴뚝청소부.jpg 

<사진. 좌측 그림, 영국의 굴뚝청소부 (http://fyeah-history.tumblr.com) / 

우측 그림, 굴뚝청소부의 작업 모식도 (wikipedia)>

 

산재보상법을 보자. 그 사이 노동시간에 대한 법이 만들어지고, 1884년에 보상법이 최초로 나온다, 독일 비스마르크가 어떤 사람인가. 빨갱이 사냥꾼이다. 극렬 우파가 보상법을 왜 만들었을까. 유럽의 공산주의 유령에 노동자들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산재법을 만든 거다, 공산주의에 감염되지 않도록, 산재는 체제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아무런 보상도 없이 팔 잘리고 목숨을 잃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다. 노동자들은 공제회를 만들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걸 자기 걸로 한 거다. 산재는 체제를 위협했다. 여담을 하자면 <레미제라블>도 산업재해 때문에 일어났다. 왜 빵을 훔쳤나. 누나를 도와야했다, 누나는 엄마 같은 존재였는데 부모가 일찍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의 직업은 가지치기 노동자였는데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보상을 못 받았다. 배경은 1800년대 초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이 성립이 된다

 

여기 보면 산재 얘기 많이 나온다.1847년 안데르센, <성냥팔이 소녀>.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나. 섣달 그믐날 성냥 팔던 소녀가 얼어 죽는 얘기. 안데르센 평전을 보면, 성냥팔이 소녀가 그려진 판화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당시 풍속화에 굴뚝 청소부도, 성냥팔이 소녀도 등장한다. 그림을 보면 턱이 무너져 있다. 성냥 공장에서 쫓겨난 아이들이다. 쫓겨날 때 먹고 살라고 성냥을 준거다. 당시 성냥이 엄청난 유해물질, 인이다. 노란 인을 썼는데, 이걸 먼지처럼 마셨다. 뼈가 제일 약한 곳부터 녹아내린다. 그게 바로 인턱. 대표적 직업병이다. 이 소녀들은 이 병으로 죽었다는 얘기다. 과도한가? 안데르센이 받은 판화에 인턱 인 아이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 일본의 어른들을 위한 안데르센 해석 책에도 이 말이 나온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 를 보면 다 상상 속의 인물, 그 중 실존인물이 하나 있다. 실제로 당대 영국에 많았던 사람, 직업병의 당사자, 매드 해터, 미친 모자장수라고 번역이 되는데, 모자 장수는 모자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쫓겨난다. 왜 미쳤을까. 모자를 만들 때 양가죽에서 털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어떤 물질에다가 담그고 양털을 끓여야 한다. 무두질이라고 하고, 태닝이라고 한다. 그 물질은 신경독성이 있는 중금속, 수은이다. 수은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미백효과도 있다. 앨리스에 나오는 매드 해터는 실존인물이다. 그 동네에 모자공장이 많았다. 사고는 얘기꺼리도 안 된다.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고전을 읽어라. 찰스 디킨스의 이야기는 보고이다. 그런 예가 허다하다. 원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성냥팔이 소녀들이 죽어가고 1908년 황인이 금지되고, 빨간 인이 대체물질로 개발됐다.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 37조에 금지물질, 맨 위에 있다. 역사가 묻어있다. 1919ILO가 탄생한 해인데, 이 때 8시간 노동이 기준이 되는데, 저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이 중요하다고 본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안전보건과 관련된다. 노동은 인격과 분리할 수 없다. 인격의 기초는 생명이다. 자유권도 건강 생명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원칙을 천명한 사건이다.

1974년 영국 안전보건 관련 법들이 통합되면서 만들어진 안전보건법의 원칙이 있다. 첫째, 권한과 책임의 일치를 분명하게 한다, 특히 생명을 좌우하는 안전보건에선 더 그렇다. 둘째, 사전예방의 원칙이다. 보호구를 먼저 지급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지 않도록 개선하거나 위험을 없애는 것이 우선이다. 셋째, 사고는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98%의 사고가 막을 수 있는 재해라고 한다, 2%만이 천재지변에 가까운 사고라는 것이다. 공식문서에도 inccident라고 쓴다. 넷째, 양립불가의 원칙이다. 안전규제가 여기저기 다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원칙이 법에 담겨있다. 이 법은 1989EU가 산업안전의 원칙으로 선언하면서 유럽전역에 퍼지고 여기서 위험성평가가 나온다. 일본이 유럽의 스탠다드를 따르면서 한국 법에도 들어온다. 이런 점에서 산업안전보건법을 보겠다. 산업안전보건법은 1981년에 제정되고, 90년 전면 개정되었는데 그사이엔 법실효성이 없었다. 1953년 안전보건이 근로기준법에 들어가고, 1961년에 대통령령으로 안전보건규칙이 만들어졌다. 90년 개정에는 문송면, 원진 사건이 있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1장은 총칙, 2장에 안전보건관리체제가 나오는데 이게 조직이다. 아까 말했듯이 권한 책임이 일치되어야 한다, 2장에 13조 안전보건관리책임자 14조 관리감독자 순서로 책임이 큰 순서로 나오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국민의식 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조직이라는 것이다. 의식은 개인의 문제로 보는 거 아니냐. 법은 조직으로 되어 있다. 총칙에도 책임소재라는 말이 명확히 들어가 있다. 책임소재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가 두 개의 법, 산업안전보건법과 식품법이 있다. 책임의 소재는 누구에게 있냐, 법률 주어가 85% 이상 사업주다, 왜 사업주인가, 사용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더 넓은 개념인데, 사업주는 법인이 되는 거다. 조직이 움직여야 하는 법이라고 저는 해석한다. 사업주가 처벌 대상이 된다.

사법처리와 행정처분, 행정처분은 과태료이고 사법처리가 많은데 이걸 사업주가 받는 거다. 피의자가 법인이 되는 거다, 그럼 행위한 사업주 사람은 어떻게 되나 양벌규정이 들어간다. 이번에 검찰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 기업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법인이다. 대부분 형법이 개인으로 되어있는데 자본주의 시대에는 조직이 일을 저지른다. 책임을 분산시키고, 법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법인은 감옥을 갈수가 없다, 벌금을 낼 수 있는데 지금 산업안전보건법에 1억 이하로 되어 있다. 662가 최고 형량인데 삼성도 1, 5인사업장도 1억이다. 그래서 삼성은 사내하도급을 쓰고 거기서 사람이 죽으면 최고형량이 1천만원이 된다. 영국, 미국은 고의성이 농후하고 반복적이면 1000만 달러 이상으로 되어 있다. 삼성이 1998년 괌공항 리모델링 공사 하다가 한국노동자 1명이 사망했을 때 860만 달러 벌금을 받았다(현재 환율 기준 93억 정도). 그렇게 혼이 나고 나서 삼성건설은 좀 달라지긴 했다. 하여튼 법인이 책임자다. 이런 위계를 산업안전보건법은 명확히 하고 있다. 그 아래조항들은 기술법이다. 법령집이 두껍다, 행정규칙이 72개인 법이 있나. 지침까지 합치면 캐비넷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다.

 

대단히 복잡하면서도 영양가가 없다. 노무사도 포기하고 시험 본다. 변호사는 이 법 이름을 듣지도 못했을 거다. 법조인이 없으니 법이 개발되겠나. 개악이 이루어진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기술법이라고 알고 있는데 실제로 1,2장이 제일 중요하다. 책임소재가 다 나와 있다. 시시콜콜한 3,4장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큰일을 그르친다. 감독관을 보자면 산업안전근로감독관이 따로 300명 정도 되고 일반 근로감독관이 1200명 정도 있다. 300명의 산업안전근로감독관은 113개 조항을 다 활용하고 있고, 근로감독 15년을 한 감독관도 늘 새롭다고 말한다.(웃음) 내용이 많아서 어렵다. 감독관은 늘 300명이다. 이중 행정직이 50%. 이분들은 대부분 5년 미만이다. 암담하다. 제가 17년째 이 일을 하고 있어도 사업장에 가면 암담한데 여긴 늘 새로운 업종을 봐야 하고 내가 못 보던 라인을 봐야 하는데, 서류만 보고 하는 실정이다. 조직과 인력 문제가 있다.

 

감독관이 하는 일은 예방업무와 조사업무인데 예방업무는 감독, 조사업무는 재해조사. 감독은 정기 수시 특별감독이 있다. 행정대상은 계획을 짜서 감독한다. 사법조치, 행정조치 있는데 2012년부터 즉시 과태료 행정을 시작하니 구글에 산업안전보건법 검색도 폭주하더라. 산업안전보건법은 상당부분 과태료다. 90년 이전에는 사법조치였는데 사법조치가 너무 어렵다, 일도 10배 더 많다, 증거채증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작업이다. 실효성이 없다. 과태료는 죄도 아니고 일도 적다, 과태료가 많아졌다.

 

감독을 하려면 모니터링 시스템이 있는데 산재보험 가입하면 시스템에 올라간다, 영국은 사업자등록 내고 동시에 안전보건청에 등록을 한다. 우리는 산재보험 가입을 안 하면 통계추계가 안 된다. 원칙이 없다, 생각이 없다. 법은 잘 되어 있는데 행정을 잘못하는 대표적 사례다. 한국 행정의 문제가 또 뭐냐면 감독대상을 선정할 때 전년도 재해율을 갖고 한다. 얼핏 생각할 때는 재해가 높으면 감독을 받아야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보험을 타먹은 죄로 너 때문에 감독이 왔잖아이렇게 된다. 산재보험이 무과실이고 사회보험인데 이게 두려운 대상이 되어 버린다. 미국은 산재가 민영보험이라 개별사업장이 산재 얼마나 타 먹는지 알수 없다. 통계는 표본사업장을 통해 수집한다. 사고가 있는데 누락하면 패널티를 세게 간다. 개별 사업장을 타겟팅 안 하고 위험업종을 추려서 무작위 감독을 나간다. 산재보험 타 먹었다는 낙인이 없고 보고를 소홀히 하는 문제는 덜 발생한다. 안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보고하지 않는 문제는 한국이 가장 심각하다. 한국 사고율이 만인율 1.23명 정도 된다. OECD 1~2위다. 재해율은 0.57%. 독일이 3%. 우리가 재해율이 12%가 되어야 한다. 더 심한 곳이 건설이 다. 왜 더 심화되냐 하면 산재보험과 산업안전보건법이 밀착되고 자료도 공유되면서 감독 문제가 일어난다. 건설산업에 환산재해율이 있고, 국토부 법에는 재해율 갖고 시공감액기준이 있다. 이게 분명이 대규모 업체의 재해, 중대사고를 줄이기는 했으나 언더리포트를 많이 발생시켰다. 국가를 상대로 하는 계약이기 때문에 기업들이 어마어마하게 관심을 갖는다. 사망사고가 나면 곱하기 10으로 환산되는데 대법원 가서 무죄가 되면 없는 일이 된다. 대기업이 변호사 사서 끝까지 가는 이유다. 대기업이 이걸 따라하는데 하도급사 신임도 평가를 이걸로 한다. 하도급사

가 절대로 보고를 안 한다. 이게 더 큰 문제를 야기하는 거다, 나쁜 관행을 국가가 그만두지 못하니까, 원칙적으로 잘못되었다.

 

, 산업안전보건법이 산재보험이랑 너무 밀착되어 있다, 보상은 자유롭게 돼야 하는데 이게 막히고, 안전을 한다는 명목 아래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산재를 산재로 얘기해야, 실제 우리 규모를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지금 1년 산재가 10만명 수준으로 나오는데 이건 현실이 아니다, 근로환경조사 해 보면 연간 250만명이 산재라고 나온다, 문제의 규모조차 우리는 모르고 있다.

 

산재보험법 이름도 업무상재해보상법으로 바뀌어야 한다, 산재는 훨씬 폭이 넓다, 그 중 인정 받는 게 적을 수도 있고, 산업재해는 격의 없이 리포팅 될 수 있어야 한다. 감독도 그렇게 맞추어 가야 한다. 이렇게 안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산재가 많은 건 알지만 Not In My Desk, 나 나가고 나서 하라는 거다. 언제 해야 할까. 청와대에서 결심해야 한다, 문제를 드러내고 출발하자 해야 한다.


* 참고 

 [유럽방문기]베를린 런던 헬싱키, 노동자를 존중하는 사회를 가다

http://laborhealth.or.kr/38115

수, 2016/03/1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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