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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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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익명 (미확인) | 금, 2019/01/11- 15:12

< 20기 자원활동가 인터뷰 >

민변의 당찬 신인, 이주희 변호사 인터뷰

 

이주희 변호사는 우리 사회가 자유롭고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과거 학생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현재는 변호사로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온몸으로 실현하는 이주희 변호사가 2019년 첫 회원 인터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제 막 변호사 경력을 시작하게 된 이주희 변호사를 많이 응원해주세요.

 

자원활동가(이하 자활):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주희: 안녕하세요, 저는 1978년생이고, 변호사시험 7회에 합격했습니다. 민변은 2018년에 가입했습니다. 현재는 법무법인 다산에서 소속변호사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신입이 이런 귀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괜찮을지 저어되었지만 미래의 민변회원님들과 즐겁게 담소 나눈다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왔어요.

 

자활: 민변 가입 시 관심 분야를 체크하는 란에 전 영역을 표시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모든 분야에 걸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이주희: 16개 다 가입이 되어있는 것은 맞습니다. 4월에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민변 가입서에 있는 위원회들을 쭉 보는데 정말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사안이 없더라고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많고, 개선되어야 할 영역들이 아주 많다는 방증이겠죠? 이러한 문제점이나 개선점들에 대해서 분야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신입으로서 각 위원회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데 섣불리 선택하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배우자는 생각으로 다 체크를 하고 간사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메일을 드렸습니다. 일주일 동안 답이 없으셨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민변 내부에서 회의하셨다고 그러시더라고요. (웃음)

지금은 전부 다 가입하기를 아주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월례회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안에 맞는 이슈들이 제기될 때 또는 관심 있는 주제로 세미나나 강연들이 열릴 때 참석하고 있는데요, 각 위원회가 정말 다 특색이 있고 회원 분들이 다들 열심히 활동하고 계셔서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민변 위원회들의 활동과 살림살이를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외 특정사안에 대한 TF들에도 참여중입니다. 신입이라 아직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려고 합니다.

 

자활: 어떤 위원회가 제일 기억에 남나요?

이주희: 모든 위원회가 다 기억에 남아요. <노동위원회>가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분들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활동하면 할수록, 손오공의 분신술로 모든 위원회와 계속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2019년에는 아마 조금 더 주력할 위원회를 선택해서 활동하게 될 것 같습니다.

2018년 7월 3일 대한문 앞 분향소에 대한 범죄행위 관련 고소ㆍ고발 및 경찰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이주희 변호사

 

자활: 학생운동을 언급해주셨는데요, 변호사님의 과거가 궁금합니다!

이주희: 저의 20대 이후의 삶을 나눈다면, 학생 신분으로 사회 참여 운동을 했던 시기, 정당 활동을 했던 시기,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졸업 등 준비를 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기까지의 시기로 크게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로스쿨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회 참여 운동과 정당 활동을 하면서 정부나 타정당 관계자들, 국회의원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과 자주 만나면서 제 시각도 약간 균형점을 찾았던 것 같아요. 대립하는 쌍방 모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인식과 나름의 선의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 방식과 방향이 다를 수 있지만요. 이전까지 저는 일방의 편에 있었던 사람이었잖아요? 중요한 것은 해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지 우리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갈등하는 당사자들이 있을 때 과연 이 갈등을 어떻게 타협하고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인지, 이때의 중재는 과연 누가 어떻게 담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좀 새롭게 들었고요. 법과 제도를 통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갈등들을 조정하고 이왕이면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복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하는 데 법을 다루는 법률가가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로스쿨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각 시기마다 계기가 있었고, 부족함은 있었을지언정 제 선택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처음 사회에 뛰어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 순간에 가졌던 마음이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어요.

 

자활: 사회 참여 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이주희: 제가 어떤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청소년기의 치기였을 수도 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인생의 허무함이랄까, 인간은 이 거대한 우주에 사는 찰나 같은 존재라는 자각이 오랜 시간 저를 지배했어요. 세속적인 부나 명예 이런 것은 일찌감치 저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가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에 진학해서 역사, 철학 등 공부를 많이 해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반을 만든 후에 히말라야에 수행하러 가야겠다고 결심했었죠.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니, 제가 몰랐던 사회 현실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되었어요. 산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속에 내가 가야 할 진리와 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기본적인 가치를 온전히 실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삶을 다 걸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 외에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참여적 삶이 제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길이었습니다.

 

2018년 9월 4일 사법농단 영장기각 규탄 릴레이 1인시위 4일차에 참가중인 이주희 변호사

 

자활: 사회 참여 운동을 하실 때, 가장 기억에 남는 투쟁 현장은 어디였나요?

이주희: 제가 진짜 데모 열심히 했거든요.(웃음) 모든 경험이 하나같이 소중했는데, 그중에서 정말 인상 깊었던 건 99년도 대우 자동차 총파업이었습니다. 96,97년에 노동악법들이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 이후에 노동계에서 노동자 총파업을 선언하면서 정말 전국적으로 엄청나게 투쟁을 벌였던 시기가 있었고요.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즈음이 그 투쟁이 한창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저도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 적극적으로 결합을 했던 것 같아요. 특히 99년 대우차 총파업 당시에 부평에서 한 일주일 이상 살다시피 했었어요. 그때 투쟁하시는 조합원들의 가족 분들과 간담회 자리가 있었는데 어떤 조합원의 부인분이 “우리는 그냥 성실하게 나라의 의무를 다하면서 산 것밖에 없는데, 왜 우리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 똑똑한 대학생들이 그 답 좀 알려 달라.”라고 하면서, 제 손을 잡고 펑펑 우시더라고요. 그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거든요. 내가, 우리가, 이 사회가, 도대체 그분들에게 어떤 답을 드릴 수 있을지… 참 많이 고민이 됐고. 그 답을 찾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자활: 그러면, 이번엔 정당 활동에 대해 여쭈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웃음)

이주희: 네 그럼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자활: 저희가 리서치를 해보니, 2004년 총선에서 한국 사회 최초로 대학생 청년 비례대표 후보로 출마하셨었습니다. 혹시 그때의 경험이 어떤 의미를 변호사님께 남겼을까요?

이주희: 우선 청년 비례대표가 제가 출마한 이후에 한국정치에 활성화되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보수정당에서도 형식적이나마 청년을 정치의 주체로 상정하고 청년후보들을 내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었죠. 우리가 처음으로 청년 이슈를 새롭게 제기하면서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측면에서는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요.
그리고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와 당 정책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처음으로 “등록금 상한제”를 정책적으로 주장을 했었거든요. 당시 전국 대학을 많이 다녔는데 다른 학교 동료들을 만나게 되면서 고액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들이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었어요. 특히 사립대는 등록금이 굉장히 높잖아요. 또 예술대학 학생들은 살인적인 등록금으로 인해 계속 아르바이트로, 휴학으로 내몰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고요. 그런 대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어느 정치인도 누구도 해결해 주지 않았고,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고 해서 한국 사회 최초로 “반값 등록금, 등록금 상한제” 이슈를 던졌고요. 처음 등록금 이슈를 제기했을 때는 정말 택도 없는 소리,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어요. 지금은 심지어는 보수정당에서도 선거 때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이제는 그런 대중적 의제로 자리매김한 거죠.

 

자활: 그렇군요,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그 당시 당선이 유력시되는 상황에서 안타깝게 낙선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이주희: 맞아요. 다음날 조간 스포츠 신문 헤드라인이 “아깝다, 이주희!”였어요.(웃음) 제가 비례대표 9번이었는데 0.7% 정도 부족해 8번이었던 故 노회찬 의원까지 당선되었어요. 그런데 당시에 대학생후보의 선거운동은 우리가 꿈꾸는 정치를,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인 진보정치를 알리기 위한 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에, 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았기 때문에 일말의 아쉬움도 없었어요.

개표 날, 이라크파병 반대집회에 갔다가 당사에 돌아와서 결과를 쭉 지켜보고 있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해요. 민주노동당이 무려 13퍼센트 이상을 획득해서 비례 8석, 지역구 2석 총10석으로 진보정당이 대거 의회에 진출하게 된, 굉장히 한국 사회에 역사적인 순간이었고 그 기쁨이 제 낙선보다 훨씬 컸어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돌아봤을 때 그때 당선이 안 되었던 것이 그 이후에 더 많은 배움의 시간이 있었으니까 더 나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자활: 그렇군요, 이주희 변호사님은 정말 많은 에피소드를 가지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혹시 변호사가 되시고 나셔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이 있으신가요?

이주희: 일단 제가 다른 선배 변호사님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너무나도 경험이 일천하여 변호사가 무엇이라고 가치평가를 내리기에는 정말 부족하다는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다만 얼마 전 제가 맡았던 사건 하나를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시장정비사업추진계획승인처분무효확인소송이었는데, 전통시장을 현대화한다는 명목으로 기존의 시장상인을 내쫓고 최대한의 개발이익을 뽑아낼 수 있는 주상복합건물을 세우려는 조합과 구청에 맞서 싸우시는 시장상인 분들을 대리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정말 이기고 싶었고,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합과 지자체, 법원, 심지어는 상대편 대리인들에게도 이 사안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본과 개발의 논리에 의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낡고 허름한 재래시장이지만, 그분들에게 그 시장은 떡과 야채, 순댓국을 팔아 자식들 교육하고 대학까지 보내게 해준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동안 도시의 많은 재개발사업이 실제로는 원주민의 삶과 지역적 관계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천편일률적으로 개발이익만을 획득하는 형태로 진행되었고 우리가 지켜내야 하는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들을 훼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왔죠. 서울시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도시재생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문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형태로 가야 한다는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따라서 시장재개발도 시장 분들과 지역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형태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이 사건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현재 서울시가 수립하고 있는 도시발전 방향에 명백히 역행하는 사업이었던 것이죠. 많이 울고 분노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생생한 목소리를 법정 안에서 법리로써 전달할 수 있을지, 법률가로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참고로 승소했습니다. (웃음)

 

자활: 소중한 경험이었겠네요. 다음 질문으로 이어 가볼까 합니다. 위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싶어 민변에 가입하셨다고 했는데요, 혹시 꼭 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이 있으신가요? 

이주희: 아시다시피 개정되어야 할 법들은 정말 많습니다. 가령 미비한 노동관계법으로 인해 고 김용균님 사건처럼 안타까운 상황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고, 고공철탑농성 같은 목숨을 건 행동을 통해서만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는 그 목소리들을 반영하는 법안개정에 무심하거나 통과도 더딘 상황입니다. 노동관련 법령들이 시급히 개정되어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네요.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 1일에 제정되었으니 올해(인터뷰당시) 제정 70년이 된 의미 있는 해입니다. 제가 대중적으로 처음 삭발을 한 것이 국가보안법 투쟁이었는데, 70년이 지난 올해를 맞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올해는 남북정상이 세 번이나 만나면서 평화통일의 분기점이 된 역사적인 해이기도 한데, 여전히 이적표현물 소지, 찬양 고무 등의 이유로 사상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탄압받고 있고, 고 노무현 대통령도 이미 박물관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법이다고 말씀했으나 실행하지 못했고 노무현 정부의 정신을 일정 계승하고 한반도의 평화협력을 통해 통일의 새 시대를 열고자 하는 문재인 정부조차 이러한 평화적 시대 흐름 속에서도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겁니다. 여전히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되거나 기소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상징적인 차원에서 오늘 인터뷰에서는 국가보안법, 그리고 그것을 무기삼아 지배 권력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해온 국정원, 국정원법이 개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활: 빨리 개정되어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변호사님께서는 현재 법무법인 ‘다산’에 소속해 계시는데, 다산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다산에 들어가게 된 계기를 알 수 있을까요?

이주희: 일단 다산은 전 변호사님들이 민변 회원이시고, 창립된 지 30년이 된 법무법인입니다. 다산인권센터라고 우리 사회 인권 신장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는 센터를 만든 곳이 다산입니다. 원래는 두 조직이 분화되지 않고 다산 안에 함께 존재하였는데, 이제는 독립되었습니다. 다산은 뿌리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진보, 인권의 신장을 위해 탄생한 곳이었습니다.

 

자활: 다산콜센터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요? (웃음)

이주희: (웃음) 그것은 아닙니다. 다산콜센터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산의 김칠준 대표님은 올해부터 민변 공익변론센터의 대표를 맡고 계시고 경찰청인권위원회 위원장이시기도 합니다. 민변 디지털정보위원회 위원장이신 조지훈 변호사님께서도 다산에 계십니다. 민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인 인권운동과 뗄 수 없는 곳이 다산입니다. 그런 다산의 일원이 된 것이 무척 영광스럽습니다. 민변 회의 때에도 다산 변호사님과 함께 참여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럽고요, 회사에서 민변 활동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십니다. 직원 분들도 더없이 뛰어나시구요. 개별 변호사님들도 인격적으로도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세요. 선하고 열정이 가득하시고,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시는 그런 분들이셔서 제가 우리 사무실에 있는 유일한 어쏘(고용변호사)이지만 평등하게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활: 좋은 분위기 속에서 좋은 일들을 수행하고 계신 것 같아 정말 부럽습니다. 지금까지는 ‘변호사’ 이주희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이번엔 ‘인간’ 이주희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이주희: 그럼요. (웃음)

 

자활: 제가 간사님께 들은 바로는 요가 자격증이 있으시다고?

이주희: 부끄럽지만, 네 있어요. 그리고 얼마 전에 11월에 민변에서 강사 분을 초빙하여 명상 강좌도 열었습니다. 존경하는 선배변호사님들, 동료변호사님들, 그리고 외부 참가자분들까지 함께하셨고, 아주 뜻깊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제 삶의 가치관 자체가 명상과 요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요가는 아사나, 호흡, 명상을 통해 몸과 마음의 합일을 찾는 과정이거든요. 저는 사회변화는 결국 인간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변화와 인간의 성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나 할까요. 제도의 변화가 사람을 바꾸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도를 바꾸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 자체가 성장하지 않고서는 사회의 변화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20대 때부터 계속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의 내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 마음자리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 또 옆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 삶이 어떤지, 이런 것들이 관심 주제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회적인 실천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참 많이 일찍 아프십니다. 사회운동이 힘들고 어떻게 보면 메아리 없는 외침을 평생 계속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인데,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삶을 던져서 사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돌보지 못해서 쓰러지고 아프신 것을 참 많이 봤어요. 민변 회원 분들도 마찬가지죠. 더욱이 이런 활동하시는 분들께는 명상이든 요가든 그 무엇이라도 쉼과 휴식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자활: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회원분들의 건강도 책임지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습니다. (엄지 척) 평소에 드라마, 영화도 즐겨보신다고 들었는데, 회원 분들에게 추천해주시고 싶은 영화가 있으신가요?

이주희: 최근 영화 중에서는 ‘컨택트’요. 예전에 개봉한 것 말고 2017년에 새로 개봉한 영화인데, 어떤 이는 인터스텔라가 우주에 대한 이과적 해석이라면, 컨택트는 문과적 표현, 즉 인문학적 해석이라고 말하더라고요. 법률가는 늘 사실관계와 현실에만 천착하게 되는데요, 이 영화는 현실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상상력을 제공해줍니다. 제가 SF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우주인과의 조화가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새로운 영감을 얻었습니다. 조금은 현실에서 벗어나 풍부한 상상력을 느끼고 싶으신 분들께 적극 추천합니다. 더불어 이 영화의 원작인 테드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 도요.

그리고 ‘사일런스’, 일본에서 순교한 서양신부 이야기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에 대한 것이지만, 저는 양심의 자유의 숭고함을 읽었습니다. 혼자보기 좋은 영화입니다.

 

자활: 꼭 찾아봐야겠습니다 (웃음). 벌써 시간이 2시간이나 지나갔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긴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이주희: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아름답게, 정의롭게 사는 게 인생의 목표입니다. 2019년에도 그렇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여기 계신 자활 세 분도 그 길에서 곧 반가운 동료로 만나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자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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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식당이 없는 특1급 호텔(5개)

파크 하얏트 서울, 베스트웨스턴 프리미어서울가든호텔, 세종호텔서울,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노보텔엠버서더강남
샥스핀을 판매하고 있는 곳은 롯데그룹의 롯데호텔 서울 등 2개, 삼성그룹의 신라호텔, SK그룹의 쉐라톤그랜드 워커힐호텔, 신세계의 웨스틴조선호텔 등 대기업이 운영하는 호텔들과 조선일보의 코리아나 호텔, 인터컨티넨탈호텔 서울 코엑스, 메이필드호텔, 더 플라자호텔, 그랜드인터컨티넨탈서울파르나스, 그랜드앰버서더, 임페리얼팰리스 호텔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더플라자 호텔은 매년 명절마다 중국 3대 진미 중 하나라며 “샥스핀 찜” 선물세트를 대대적으로 판촉하는 등, 샥스핀 요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판매하고 있다. 샥스핀 요리를 판매하지 않는 14개 호텔 중 9곳은 중식당이 있으나, 상어보호 운동에 동참하는 취지에서 샥스핀 요리 판매를 금지했다고 밝혔다. 메리어트 체인 호텔은 샥스핀 요리를 판매하지 않음으로써 환경운동에 동참 중이라고 답했다. 힐튼 계열 호텔은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의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의한 5,600 여종 동물과 30,000 여종의 식물 제공 금지”라는 본사의 지침을 준수하고 있으며, 2014년 4월 1일부터 아시아태평양 전 지역에서 샥스핀 요리를 금지했다고 밝혔다. 그랜드하얏트호텔과 더케이호텔서울 역시 상어 보호 운동에 동참하는 뜻으로 샥스핀을 판매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파크 하얏트 서울, 베스트웨스턴 프리미어 서울가든호텔, 세종호텔서울, 쉐라톤 서울 디큐브시티, 노보텔엠버서더강남 등 5곳은 중식당 자체가 없는 호텔이었다. 전 세계에서 매년 7천만에서 1억 마리 이상의 상어가 남획되고 있다. 상어지느러미만 채취하고 몸통만 산채로 버리는 야만스러운 상어지느러미 어업이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상어지느러미 어업이나 샥스핀 요리 판매를 불법화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국제협약에 의거 수입과 유통이 규제를 받고 있다. 법을 떠나서도 우리나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비롯한 많은 국제 항공사들이 일체의 상어 지느러미 운송을 거부하는 등 많은 기업들이 상어보호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상어보호 운동은 먼 나라 일만은 아니다. 이번 조사에서도 확인 되었듯이 이미 국내의 호텔 중에서도 상당수는 상어보호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샥스핀 요리를 판매하고 있는 12개 호텔들에 대해 환경연합은 샥스핀 요리 판매 중단을 호소하는 공문을 2015년에 보냈으나 아직도 답변이 없다. 메이필드 호텔의 경우는 2015년 12월까지 단계적으로 판매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샥스핀을 판매하고 있다. 환경연합은 해당 호텔들이 빠른 시간 안에 샥스핀 판매를 중단함으로써 멸종위기종 보호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에서 벗어나기를 다시 한 번 촉구한다. 우리는 세계 시민, 소비자들과 함께 호텔들의 변화를 끝까지 지켜볼 것이며, 샥스핀 요리 퇴출을 위해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노력할 것임을 밝힌다.

2016년 8월 19일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권태선 박재묵 장재연 사무총장 염형철

※ 문의: 중앙사무처 정책국 최준호 국장(전화 010-4725-9177 / 메일 [email protected]) 첨부파일: 0818_롯데 신라 워커힐 더 플라자 등 호텔 12곳 샥스핀 요리 판매
목, 2016/08/18-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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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마을모임
연차계획 세우기, 식사

목, 2015/12/24-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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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미기_김창호(메인)

 

 

아버지가 열어 놓은 길, 아들이 걷는다.

– 일본 제1호 외국인변호사 故김경득 변호사의 장남 김창호 변호사를 만나다.

 

이름이란 뭐지? 장미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아름다운 향기는 그대로인걸…”(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中에서)

이야기 하나 : 재일한국인 청년의 애환을 유쾌하게 그린 영화 “GO”는 로미오와 줄리엣 속 대사 한 대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 스기하라는 자신이 일본인인지, 조선인인지, 한국인인지 헷갈린다. 이름이 스기하라인지 이정호인지도 헷갈린다. 그래서 ‘나는 누구지’라는 물음은 지겹게 그를 쫓아다닌다. 어느 날 일본인 여자 친구에게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내가 좋다던 그녀는 무섭다고 했다. 나는 어제와 같은 그대로의 나일뿐인데 말이다. 진짜 나는 누구일까.

이야기 둘 : 사기사와 메구무의 소설 “진짜 여름”의 주인공 청년은 길을 가거나 운전을 하다가도 경찰만 보일라치면 저 멀리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린다. 불심검문이라도 걸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한국인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청년은 일본인 애인이 자신이 한국인임을 알까봐 늘 전전긍긍한다.

두 개의 이야기는 배타적인 일본 사회에서 재일한국인들이 겪는 차별과 정체성에 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름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나만의 향기는 그대로일진데, 한국인임이 드러나는 순간 차별과 멸시를 감당해야 한다. 여기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한국인임이 드러날까 노심초사하다 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태어난 이가 있었으니, 그는 최초의 재일한국인 변호사 김경득. 안타깝게도 김경득 변호사님은 10여년전 돌아가셨지만 그의 아들 김창호 변호사가 민변의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의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김창호2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모르는 회원들을 위해 소개 먼저 부탁 드릴께요.

김창호 : 안녕하세요. 저는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 김창호입니다. 아버지로 하면 3세인데, 어머니는 한국분이시니까 정확히는 2.5세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에서 변호사 일을 몇 년 하다가 유학을 다녀왔고,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어 한국의 공익변호사는 어떤지, 예를 들면 ‘공감’에서 4년 전 인턴으로 1달 정도 있었는데, 그때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알게 돼 지금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장기간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1년 정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작년 2월에 한국에 왔어요.

이혜정 : 민변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김창호 : 민변 가입은 작년 4월인가 5월에 한 것 같아요. 민변은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제가 일본에서 사법시험을 봐서 합격을 2006년에 했거든요. 2007년 사법연수원에 가서 연수를 받고, 변호사 활동은 2008년부터 했으니 10년 정도 됐는데,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서 황필규 변호사님, 정미화 변호사님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변호사가 되었을 때 세계한인변호사대회에 초대해 주신 분이 바로 정미화 변호사님이셨어요. 그리고 정미화 변호사님 부인이 저희 어머니와 대학 동창이었어요. 그런 관계로 민변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민변이 어떤 일을 하는지 잘은 몰라서 작년 2월에 왔을 때 황필규 변호사님이 국제연대위원회에 초대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민변에 여러 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혜정 : 민변 어느 위원회를 가봤나요. 민변 활동이 궁금하네요.

김창호 : 주로 나갔던 위원회는 국제연대위에요. 저는 일본 변호사라 그래도 국제적인 일은 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싶어 참여했어요. 국제통상위도 그렇고요. 그런데 민변이 좋은 것은 민변에 있으면 한국의 모든 이슈를 조금씩 다 알게 되잖아요(웃음). 교육위나 언론위는 한번 정도 참여했어요. 민변에서 진행하는 기획이 재밌는게 많아서 여행도 여러 번 갔다 왔어요. 여러 외국 변호사 모시고 진행하는 것도 재밌고, 한국의 공익변호사를 알게 된 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가장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공감’이나 ‘동천’ 같은 공익전담 변호사가 일본에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지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 분들과 대화해 보면, ‘사실 나도 민변회원이다. 그래서 민변활동 같이 하고 있다’ 하시는 분들 되게 많지 않나요? 민변 변호사들이 옛날부터 자기 일을 하면서 공익활동 하시는 분과 전담으로 하는 변호사들이 연결이 잘 되어 있구나 하는 점을 느낄 수 있었어요. 민변 노동위가 오사카와, 미군위는 오키나와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계속적으로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혜정 : 숱하게 많이 받은 질문이겠지만 아버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요. 아버님인 김경득 변호사님은 1949년 일본 와카야마에서 태어나 일본 초·중·고교를 다니면서 일본 이름을 썼고, 한국 핏줄이란 게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 한글 공부를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했다면서, 어린 시절에는 일본으로부터 냉대받고 경멸받는 한국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당시를 ‘민족에서 도망쳤던 때’였다고 고백하시면서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기자를 꿈꾸셨다가 좌절돼 사법시험에 도전하셨다고요.

김창호 : 맞아요. 아버지는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하려고 했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신문사에 들어갈 수 없었어요. 일반 상장기업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웠어요. 기자에 관심이 많았는데 일자리를 구하려고 대학교 취업 상담실을 찾아갔더니 직원이 노트를 가져와서 이름을 적으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것은 취업이 어려운 장애인 학생들을 위한 특별관리 장부였어요. 대학생 때까지 일본 이름을 썼었는데…그런 차별을 경험하고 나서..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체성을 숨기지 말고 밝히고 살아야 한다. 그럼 어떤 길을 갈 수 있을까’.. 고민했을 때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 옆에 있었던 것 같아요. 1970년대 초에 대만 사람이 대만 국적으로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일본은 사법시험에 합격해도 국적을 바꿔야 해서 그 사람은 일본 이름으로 해서 변호사가 됐어요. 지금도 저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요. 지금도 인종 차별 관련한 변호 활동을 하고 계세요. 70살이 넘었어요. 아버지가 그때 그분의 기사를 보고 사법시험을 시작하셨어요.

이혜정 :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일본은 사법시험에 붙어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었다면서요. 아르바이트로 와세다 대학 청소를 하면서 어렵게 사법시험에 붙었는데, 사법연수원 입소가 거부되자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청원서를 수차례 보내고 아사히신문에 기고문도 보냈다고 들었어요. 아버님이 일본 최고재판소에 보낸 청원서를 소개할께요.

 

“저는 변호사를 지망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사법연수생에 채용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변호사는 재판관·검찰관과는 달리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인(私人)의 입장에서 기본적 인권의 옹호와 사회정의의 실현에 진력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직업적 성격을 일본국 헌법의 정신에 비추어 본다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현 변호사법이 외국인이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배제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를 고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변호사가 될 수 있어야 된다고 한다면, 변호사가 되기 위한 길도 일본인과 동등하게 열려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일률적으로 사법연수생이 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길을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법연수생 채용선발 결격 사유 제1호는 적어도 변호사가 되려는 외국인에게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사안이 저 개인이 사법연수생이 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제가 일본국에 귀화하면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일이 저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사는 65만 동포의 권리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였으며, 개인적으로 해결(귀화)할 문제가 아니며, 이는 일본의 민주화에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란 개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개인의 존엄이 최대한도로 존중받는 사회체제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가치관은 다양하며, 개개인은 이질적이므로 소수자의 권리존중이 민주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본 사회에서는 재일한인의 민족적 특성, 소수자로의 권리가 반드시 존중받고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였으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체의 한국적인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하여 왔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해를 거듭하며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것이 습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인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처럼 가장하는 것은 매우 고통이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대학 졸업이 가까워짐에 따라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봐 주위에 신경을 쓰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것의 비참함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인처럼 보이기 위하여 낭비한 노력의 바보스러움을 통감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노력을 기울여야 할 부분은 차별을 없애는 것이지, 일본인으로 가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차별에 대처할 재일한인의 살아갈 방도는 한편으로는 조국의 통일을 빨리 실현해 조국과 일본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개개인의 생활의 현장에서 한국인으로서의 구체적인 존재를 통하여 일본인의 의식 속에 있는 한국인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지금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최고재판소로부터 국적변경을 강요받고 있는 시점에서 경솔하게 귀화신청을 하는 것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제가 변호사로서 설 자리 그 자체를 잃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화한 제가 어떠한 형태로 한국인 차별해소에 관련할 수 있고, 귀화를 한 제가 어떻게 재일동포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요. 또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원망스러워 하며 가슴 아파하는 동포 자녀에 대하여, “한국인인 것을 수치스러워 하지 말고 강인하게 살아라”고 말해 봐도 이 말이 귀화한 인간의 말이라면 도대체 어떠한 효과가 있을까요.

일본 사회의 한국인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의 귀화는 어떠한 이유를 붙여도 결국은 어두운 그림자가 되어 따라 다닐 것입니다. 저처럼 자기 민족에게 등을 돌려온 인간이라도 지금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제가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잃어버리게 하는 일본국으로의 귀화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사법연수생 임용청원서”, 재일변호사 김경득 추모집 중에서)

 

– 김경득 변호사는 일본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일본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은 사법연수원에 입소할 수 없다’는 조항에 맞서 긴 싸움을 한 끝에 마침내 일본 내 한국 국적 변호사 1호가 되었다. 1976. 12. 14.자 아사히 신문에 ‘변호사로 인정해 달라’고 투고한 글을 보자.

나 김경득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연수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귀화할 수 없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안의 한국을 거부했다. 조선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내가 한국 핏줄임을 알까 두려웠다. 대학 졸업 무렵, 나는 희망하던 언론계 취직이 99.9%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렸다. 한국인임을 써 붙이고 살기로 결심했다.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생애의 목표로 삼았다.”

 

김창호 : 당시 주위에서 아버지를 말리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고 했어요. 쉽지 않은 문제이고, 오랜 시간이 걸리니까요. 그리고 변호사까지 됐는데 부모님 생활을 도와 주는게 맞지 않냐는 이야기도 많이 나왔다고 해요. 그런데 차별을 없애기 위해 변호사가 되신 것이고, 아버지뿐 아니라 대학 교수, 변호사 후배들이 외국국적자 차별을 해방해야 한다는 성명도 내주었어요. 언론에서도 도와주는 분위기가 있었고요. 아버지가 사법시험에 1976년 합격해서 적어도 10년 정도 투쟁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의견서를 계속 내셨는데 다음 해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 방침을 바뀌게 하셨던 거죠.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 정말 대단하세요. 아버님이 그렇게 힘들게 새로운 길을 만들었고, 그 후에 김창호 변호사님처럼 그 길을 따르는 분들도 많이 계셨겠네요.

김창호 : 지금은 재일교포 변호사가 120명 정도 있어요. 재일코리안변호사협회가 그것이고요. 70-90년대만 해도 외국 국적자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면 따로 면접이 있어서 최고재판소 담당자와 따로 이야기해서 뭔가 하사하는 식이 되어서… 면접을 하긴 하지만 못 들어 간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이후에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이라 할 수 있어요. 2000년도부터 일본도 로스쿨을 시작하면서 국적조항 자체를 삭제했어요. 지금은 주로 외국 국적 갖고 일본변호사 되신 분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나오고 대학교 일본으로 유학 와서 일본변호사가 됐다는 분 몇몇 계시고요. 중국이나 미국 국적을 갖고 변호사 되신 분들도 꽤 있으시고요. 좋은 쪽으로 진행된 사례입니다.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어머님을 한국에서 만나셨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궁금해요. 김창호 변호사님도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김창호 : 저는 와카야마에서 태어났어요. 제 여동생이 한국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가 오사카 근처 와카야마에서 태어나셨고, 저도 거기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좋아한 것 같아요(웃음). 어머니가 아버지를 강한 의사가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80년대 초만 해도 한국이 일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안 좋았을 때였어요. 주변에서 반대하는 의견이 있다고도 했는데.. 어머니쪽 부모님이 아버지를 많이 좋아하셨대요. 인터뷰 내용과 좀 맞지 않는 것 같은데(웃음)..,저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중매결혼이 많았는데 외할머니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좋아해서 연애결혼 하는 것에 대해 굉장히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연애결혼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이라고 하셨어요.

이혜정 : 김창호 변호사님이 장남이고, 형제가 2남 2녀라고 들었는데, 모두 법조인인가요.

김창호 : 여동생 한명은 변호사 자격은 있는데 등록은 안하고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과정을 마친 상태구요. 여동생 한명은 건강이 많이 안 좋아서..아버지 추모집 낼 때만 해도 살아있었는데, 병으로 일찍 사망했어요. 그 때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법대, 로스쿨까지 갔는데 건강 때문에 그렇게 됐어요. 남동생은 그냥 일반 회사원으로 있습니다.

이혜정 : 몰랐어요..가족분들이 많이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3명이나 아버지의 길을 선택했어요.

김창호 : 저희들이 문과 쪽이라서..어머니도 법대 출신이에요. 사실 이공계 갈 수 있는 머리가 있으면 아마 그쪽으로 갔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버지 시대와 달리 취직이 어느 정도 가능해요. 그 안에서 일본 사람과 경쟁해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겠지만..문과로서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는 일 중 변호사가 하나의 좋은 직업인 것 같아 사법시험을 봤어요. 대학교 때는 학자 같은 것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2005년 제가 대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시험에 합격해서 제가 뭔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2006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혜정 :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불을 꺼도 또 키고 공부하고, 쟤가 저러다가 머리가 이상해 지는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할 정도였다고요. 한국도 사법시험이 어렵지만 일본도 무지 어렵지 않나요.

김창호 : 저는 되게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느 정도 열심히 하긴 했는데…당시에는 매우 젊어서 가능했다는 생각이 듭니다(웃음). 취직 활동하는 대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변호사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한국도 그렇지만 옛날 사시라고 하는게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도 합격률이 2% 정도니까 운이 안 좋으면 안되는 거잖아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집에서는 한국어만 써야 하고, 어머님이 일본말 쓰면 엄청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김창호 변호사님이 6살 때까지 일본어를 못했다고 들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볼 책을 직접 빌려 오셨다고 하던데, 가정에서 아버님의 모습은 어땠나요.

김창호 : 아버지는 한국어를 많이 강요하셨어요. 어머니는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일본어도 필요한데, 당시에 유치원이나 학교 다닐 때 집이 도심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살아서 조선학교가 주변에 없었어요. 그래서 일본 학교나 일본 유치원에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집에 돌아올 때도 일본어로 이야기하고요. 그런데 계속 집에서 한국어를 쓰라고 하셔서 어릴 때는 그게 좀 싫기도 했어요. 집에서 아버지가 이야기 할 때는 한국어로 하는데, 저희가 대답할 때는 거의 일본어로 했어요. 그리고 빌려오신 책은 다 일본 책이었어요(웃음). 아마 한국어 책이 주변에 별로 없었고, 읽는 것도 더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 앞선 두개의 이야기를 통해 보듯이 재일한국인은 한국과 일본의 경계에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진짜 여름’의 작가 사기사와 메구무는 재일교포를 이렇게 정의한다.

 한국인으로 한국 국적을 지니고 있으면서 일본에서 자라나 일본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에서는 아직 한국의 풍습이나 습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고방식이나 감정적인 면에서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에 가깝다.”

성인이 되고 나서 우연히 할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기사와 메구무는 한국을 찾았고, 짧은 한국생활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아쉬움을 그녀만의 소설가적 감성으로 표현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하룻밤을 자고 나니 시들해지고 마는 사내가 있다. 반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슬슬 피하기까지 하다가 엉겁결에 몸을 허락하고 나니 별안간 마음마저 빼앗기고 마는 사내도 있다. 나에게는 한국이 두 번째 사나이와 비슷하다.”

김창호 변호사에게 한국은 어떤 곳일까. 어떤 고민과 어떤 정체성을 느끼고 살아왔을까.

 

김창호 : 저의 아버지 경우에는 재일교포 2세로 전형적으로 일본 이름을 쓰다가 정체성을 의식하셨어요. 저는 태어나서부터 한국식 이름을 써왔고 어머니도 한국인이에요. 보통 재일교포 3세 정도가 되면 일본식 이름을 쓰고 ‘나는 한국인이다’라고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그런 경우와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 때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진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김’씨라는 성을 부를 때 아직도 약간 긴장하는 것은 있어요. 은행에서 순서를 기다릴 때도 ‘김상’이라고 부를 때, 사람들이 많이 쳐다봐요. 일본에 많이 없는 성이라서 꼭 차별적인 시선만은 아닌 것 같아요. 그냥 그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재일교포 3세라는 의식을 갖고 살고 있는데, 일본 사회에서 일본사람과 같은 노력과 능력이 있어도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많이 노력했어요. ‘창호’라는 이름이 일본에서 발음하기 어려워요. 차무호. 김치양호. 이런 발음이 되니까.. 이것 때문에 괴롭힘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는데, 초등학교 졸업식 때 일본에서 ‘기미가요’를 불러야 해요. ‘기미가요’라는 노래 자체가 일본군의 천황을 칭송하는 노래라서 절대로 부르면 안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어요. 그래서 전부 기립해서 노래 부를 때 저만 혼자 앉아있었어요. 그 때 제가 일본의 소수파라는 것을 처음 느낄 수 있었어요. 졸업장에도 일본에서 천황이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날짜를 쓰는데, ‘쇼와’나 지금은 ‘평성’을 쓰고 있어요. 아버지가 이것은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교육위원장이랑 협상을 해서 제 졸업장만 매직으로 찍찍 그어서 양력으로 표기했어요. 그 당시 저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고 별로 안 좋아 했었어요. 그런 경험을 통해서 일본 사회에서 좀 특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갖게 되었어요.

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일하시느라 무지 바쁘셨을텐데.. 교장이랑 협상도 다니셨네요.

김창호 : 바쁘셔서 운동회나 졸업식에도 거의 못 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졸업장은 다 바꾸셨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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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정 : 김경득 변호사님이 정말 의미 있는 소송을 많이 하셨잖아요. 국민연금 청구소송, 사할린 잔류 한국인 귀환 청구소송, 지문날인 거부소송, 일본 군속 장애연금지급 청구소송, 공무원관리직 수험자격 소송 등 2005년 암으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재일한국인 인권옹호활동에 앞장섰잖아요. 일본은 외국인에 한해서만 지문날인을 받고 있나 봐요.

김창호 : 맞아요. 일본은 주민등록증도 없어요. 사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놀라웠던게 그 동안 한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주민등록증을 만든 적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장기간 있게 돼서 만들게 되었어요. 그때 저는 지문찍기가 너무 싫어서 사진도 찍어 놓았어요. 일본에서 지문 날인은 재일교포가 싸웠던 하나의 이유로, 90년대 이후 없어졌어요. 아버지가 이상호씨 재판에서 졌는데, 이후 없어졌어요. 재일교포들에게 적용할 때 문제가 생기니 재일교포들만 제외하고 다른 외국인들은 지문날인을 시행하고 있어요. 어머니의 경우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 영주권인데, 어머니가 일본 들어올 때는 한번씩 지문날인을 하고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재일교포는 문제되지 않았지만 다른 외국인들을 위해 싸워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아버지가 여러 소송을 하시긴 했어요. 사실 사회적 변화를 이끌긴 했지만 소송 결과로 보면 많이 졌던 것 같아요. 지문날인 하나만 잘 된 것 같고, 국민연금은 졌어요. 1970년 말에 외국인도 연금에 가입하게 되어 있어서 지금 태어난 사람들은 문제가 없는데, 그 당시에는 연금을 받으려면 25년 정도가 필요했어요. 25년을 납부해야 받을 수 있다면 45살 넘은 분들은 자동적으로 못 받게 되잖아요. 그런 경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준을 만들어야 됐어요. 헌법 위반으로 제소했는데, 최고재판소에서 그것은 국가의 재량이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위안부 소송도 하셨고, 옛날 재일교포 일본군의 군인이었던 분의 재판도 했어요. 결과적으로 졌어요. 주위에서 계속 이야기는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계속 지는 소송만 하셨어요.

이혜정 : 한국에 1년 정도 머무셨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김창호 : 여러 가지 있어요. 작년에 계속 있었는데, 2016년 말부터 촛불집회가 있었어요. 저는 2017년 2월에 와서 거의 막바지였어요. 탄핵 직전까지 매우 재밌었어요. 역사의 순간에 한국에 있었던거에요. 탄핵의 순간도 TV로 볼 수 있었고요. 시민단체 운동의 힘, 변화의 시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컸어요. 처음 대선투표는 4-5년전 미국 유학가 있을 때, 현지에서 재외국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하라는 판결이 났고, 이번에는 한국에 있을 때 투표할 수 있었어요. 미국에서 찍은 후보가 그 당시에는 떨어졌지만, 이번에 똑같이 찍어서 결국 당선됐어요. 그리고 한국에서 공익활동하고 계신 변호사들 만난 것도 그렇고, 좋은 기억이 많아서 하나 고르기가 어려워요.

이혜정 : 곧 일본에 돌아가신다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향후 활동 계획은 어떤가요.

김창호 : 이번 2월에 활동을 마치면 1년 정도 대만에서 NGO활동을 하려고 해요. 아버지도 그랬지만 한중일 또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목표에요. 인권 일이든 변호사 일이든 그런 방향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요. 한국은 어느 정도 아는 분이 계시고 중국은 다른 관계를 갖거나 중국어를 배워보고 싶어요. 그게 끝나면 ‘공감’과 같은 공익법인을 만들고 싶어요. 일본에 아는 변호사들과 이야기 할 때 어떻게 하면 공익 법인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아무래도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공익로펌 모델을 생각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 해온 일을 돌아보면, 아버지는 국내소송을 주로 해왔고, 많이 졌어요. 저는 국내소송 뿐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요. 휴먼라이트와 함께 하는 것도 그렇고, 인권 NGO로서 민변 국제연대위도 그렇지만 제네바와 같은 곳에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고, 외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거죠. 제가 그런 활동을 유학기간 합쳐서 3-4년 정도 계속 해왔고, 민변에서 UPR을 진행하고 있듯이 일본도 UPR이 있어서 운동해왔어요. 국제적인 일을 하나의 업무로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다른 문제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 같은 차별이나 혐오 관련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어제도 마쓰이 의원이 한국·조선 국적, 일본 귀화자 등 의원 이름 열거하면서 “몇 번이고 죽일 가치 있다”고 독설한바 있어요. 요즘에는 일반인뿐만 아니라 지방의원 같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혐한’ 분위기가 되는 것 같아요. 일본 사회 내에서 혐한 분위기가 지난 몇 년 간 계속 강해지고 있어요. 언론을 통해 보수 세력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유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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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민변 변호사들과 계속 교류를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민변 상근변호사나 간사님들과 공익 분야에 대한 교류도 재밌을 것 같아요. 재일교포 분야와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기업이 해외에서 일으키는 인권 또는 노동문제도 다루고 싶어요. 예를 들면 유니클로라는 기업이 인기가 많은데, 중국이나 미얀마 공장에서 문제가 많았어요. 전통적인 변호사 일보다는 국제 쪽 문제를 누군가가 해야 하는데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도 특히 인권활동하시는 분들이 국제적인 활동에 좀 약하고 시간 배분이 어려워요. 일본사회에서 재일교포만으로 활동하게 되면 불필요한 비판을 받게 돼요. 특히 역사문제로 가게 되면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일본사람과 같이 해야 사회적으로 진동하는 운동을 같이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기가 간단치 않아요. 오늘 민변에서 인터뷰에 초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수, 2018/01/31-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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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몰이, 손쉬운 반대파 억압의 도구

 

- 이희영 회원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는 정부 여당의 종북몰이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제 ‘종북’은 ‘북한 정권을 맹목적으로 추종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넘어 집권세력에 대한 반대목소리를 제압하는 만능무기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종북프레임으로 정책에 대한 모든 반대여론을 무력화하려고 조직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으로까지 보입니다.

 

민변 언론위원회는 이러한 현실을 되짚어 보고 타개할 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지난 11월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임수경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민주주의법학연구회와 함께 ‘종북프레임의 정치적 의미와 법률적 문제점’을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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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변호사님이 좌장으로 나선 이날 토론회에서는 류신환 변호사님이 발제를 맡아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신은미 종북콘서트 논란·리퍼트 주한 미국 대사 습격사건·전교조에 대한 종북 논란·지자체장과 문화예술인 종북 몰기 등을 예시하며 ‘종북’이라는 말이 이제는 합리적 토론과 논의를 배제하고 정부여당에 대하여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악의적 낙인을 찍는 도구가 되었음을 지적했습니다.

 

류 변호사님은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이 종편 채널A의 프로그램에서 방송된 ‘민언련 내부에 종북 성향을 가진 핵심인사들이 있다’는 발언에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을 이와 관련한 법원 판결의 사례로 들었습니다. 법원마저도 “(민언련처럼) 국가보안법 폐지와 주한미군 철수 주장을 하면 종북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고 판시하는 등 ‘종북’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확대하는 듯한 판결을 내놓으며 이러한 적대적 프레임의 유포가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끼치는지 성찰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었습니다. 류 변호사님은 “종북이란 표현은 횡행하는데 소송절차는 더디기만 하고 특정인 사상을 검증하는 증거조사만 반복된다”며 “법원이 종북 개념에 대해 엄격하고 명백한 기준을 세우고 신속하고 실질적인 피해구제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이어 주제발제에 나선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님은 더 나아가 종북몰이는 의도적 기획에 의해 만들어진 적나라한 형태의 국가폭력이자 저급한 통치술이므로 이러한 혐오발언은 별도의 범죄로 규정해 처벌할 필요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치혐오 발언은 단순한 명예훼손 수준을 넘어 집단적 배제와 배척, 정치적 폭력성을 보이는 만큼 명예훼손 법리가 아닌 더 강한 규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교수님은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은 무수한 댓글 작업에서 정권 반대세력을 ‘종북’ 혹은 ‘종북좌파’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혐오발언은 정치집단의 이해관계를 마치 대한민국의 안보문제로 오인하게 만든다”고 설명했습니다.

 

토론에 나선 이광철 변호사님은 “종북은 진보진영으로부터도 외면 받는 세력으로 인식되면서 종북세력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인증해주는 모순적인 역할을 하고 있어 국가보안법이 더욱 강화돼 가는 악순환적인 양상”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가보안 폐지 투쟁이 종북프레임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저항이 될 수 있다는 이 변호사님의 주장에 일면 공감이 갔습니다. 한편으로는 통합진보당 해산을 비판하면서도 ’북한 체제를 결코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자기검열적인 단서를 붙이게 되는 답답한 현실을 생각하면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지적 지형상 아직 요원하지만) 원래의 ‘종북’을 의미하는, 북한 체제를 긍정하고 찬양하는 이념 스펙트럼까지도 용인하는 표현의 자유 및 정치적 시민권을 확대하겠다는 전망은 불가능한 것인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목, 2015/11/26-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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