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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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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의 계명성(鷄鳴聲) – 왜정시대 혁명가의 옥중생활

익명 (미확인) | 수, 2019/01/02- 14:09

유청렬

편집자 주 ―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신천지』 1947년 8월호에 실린, 유청렬(柳淸烈)의 「옥중의 계명성」이다. 필자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만났거나 전해들은 권태산, 엄순봉, 정태식, 이재유, 안창호, 허응철, 여운형 등 7인 혁명가의 옥중 일화를 다루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혁명가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기개와 실천활동에서 느껴지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필자 유청렬에 대해서는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신천지』 1946년 10월호에 그가 쓴 「倭政 淸津 刑務所 滅亡記」라는 글이 있다.

“8월 15일 감옥문이 열려 민중과 격리되었던 우리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자유로운 천지로 나올 때 다시는 이 땅에서 일제시대 모양으로 정치범을 위하여서는 감옥이 불필요하다고 믿었던” 인민들이 그러한 당연한 희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전에 배(倍)한 다수 정치범이 투옥되고 있는 오늘날의 기구한 현실에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은 ????신천지????(1946년 11월)에 게재된 오기영(吳基永) 선생의 「민족의 비원(悲願)」에 솔직히 대변한 바 있다. 민족적 양심이 있는 동포들이 동 선생과 더불어 그윽히 간탄(艱歎)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여기에 일제시대에 옥중에서 고투(苦鬪)하던 수많은 혁명가들 중에서 특히 인연이 있는 면면들과 그 밖에 자연적으로 알게 된 몇몇 지사들의 죄없는 죄인으로서의 옥중생활을 소개함으로써 독자 제현(諸賢)과 같이 동정을 나누려 한다.
여기에 적으려는 것은 나의 과거의 환경이 지배하던 한도 내에서만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보편적이 아닌 것이며 또 그 중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미 고인(故人)이 된 사람도 있고 또 오늘날의 혼란한 정치무대에서 역투하는 분들도 있는 고로 혹 결례되는 점이 있지나 않을까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좀 더 광범위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권태산(權泰山) 씨1

왜정의 폭압에 구박과 굶주림을 참다못하여 하는 수 없이 그리운 고향산천을 등지고 정(情) 설은 간도 벽지에 가서 유랑 고초(苦楚)하던 동포들이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에 일제히 봉기하여 왜놈들의 등덜미를 서늘케 한 소위 간도공산당사건의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1 1902~1936. 1930년 5월 간도지역 중국공산당 소속 조선인들이 주축으로 ‘간도봉기’를 전개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타격하였다. 권태산은 간도봉기의 주동자로 활약하여 일경에 피체된 후 1936년 7월 2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씨를 뵈인 것은, 1935년 6월 초순 서대문형무소 구치감 2동 13방이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은 동지 17명과 같이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허리에 졸라매어 있었다. 햇볕을 쪼이지 못한 창백한 얼굴에 마점산(馬占山)을 방불하는 8자형 수염이 채 깎지 않았던 탓이었던지 보기에 흉했다.
씨는 첫눈에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정답게 인사를 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이 기연(機緣)이 되어 그 후 자주 ‘간도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고 사람이란 수전노처럼 금전을 많이 가질 필요는 없지만은 일가를 유지해 나갈 만한 것은 항상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월급만 받아가지고는 장래에 꼭 시켜야 할 자녀교육도 변변히 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질병으로 고생할 때는 의례히 빚을 지게 된다는 것과 돈이란 단번에 뭉치로 생기는 일은 없으니 양계 양돈 양잠 과수원 같은 것을 다각적으로 부업삼아 경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도라는 것과 그러한 일은 손쉽게 될 수 있는 고로 재미도 있고 저축도 된다는 것 등을 수차 권고 받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로운 말을 많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씨의 이지적인 한마디 한마디의 논지에 귀가 솔깃해졌던 것은 내가 감수성이 풍부한 22세 청년이었던 탓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씨의 성격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이 날 때는 호랑이 같고 평소에는 좋은 형님 같았다. 손목에 수갑을 채워져 있는 고로 일거일동이 서투르고 부자유함을 동정하는 동방자(同房者)들이 모든 일을 보살펴주려고 했으나 그것은 도리어 건강을 해롭게 한다 해서 쇠사슬을 달그락거리며 식기를 씻고 유리창을 닦고 빗질 걸레질을 하며 내의를 빨곤 했다. 1935년 7월 경성복심법원 제2호 법정에서 재차의 사형이 언도되었을 때 신었던 짚신을 오기(荻) 판사에 던졌으나 그대가는 징벌밖에 없었다.
씨는 이듬해 8월달에 동지 15명과 같이 원통하게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순간에 있어서도 형장에 임했던 나의 동료를 통하여 최후의 안부를 전해왔던 것이다. 씨는 정의(情誼)가 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떨리는 입술을 악물고 형장을 향하여 눈물의 묵례(黙禮)를 드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사형집행은 하루에 못 다하고 양일에 걸쳐서 시행되었다. 첫날에는 주현갑(周現甲)씨, 이동선(李東鮮) 씨, 권태산 씨 등 8명이었고 익일에는 나머지 8명이 집행되었다.
첫날에 집행당한 유해는 사형장 지하실에서 무더운 여름밤을 새웠다. 과거의 동지 여덟 분은 좁은 지하실에서 나란히 끼어 누워 있었건만 이제는 말 한마디 없이 참혹한 하루 밤을 보냈던 것이다. 취기(臭氣)가 난다 해서 다량의 얼음을 쟁이고 왜인 도이(土居淸造) 외 완력 있는 자들이 철야 엄중 경계하고 조선사람 직원의 접근을 불허했었다.
언제나 과언 묵묵한 이동선 주현갑 양씨도 마지막으로 남기는 유서만은 자필로 썼다. 죽음을 초간(秒間)에 두고 지필(紙筆)을 요구하여 태연자약한 태도로 묵흔(墨痕)도 검게 유언을 쓰는 씩씩한 표정을 연상이나 해보자. 안중근 열사가 여순감옥 교수대에서 사라질 때의 장엄한 광경이 재연되어 민족적 의분을 북돋았던 것이다. 나는 유서의 내용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임석했던 자의 말에 의하면 한문시(漢文詩)로 되었는데 그 뜻은 “이 몸은 비록 교수대에 가치 없는 죽음을 감수하되 우리 조선공산당만은 영원히 일관 불변하여 살아 있으리라. 조선공산당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였다는 것이다.

 

엄무봉(嚴舞奉) 씨2

1935년 가을에 국제도시 상해에서 일본인거류민단장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아깝게도 현지 일본관헌에 체포되어 인천을 거쳐 서울로 압송해온 투사이다.
씨는 보기 좋을 만큼 비대한 체구에 딱 들어맞은 중국복을 늘상 입고 있었다. 화기 만면하여 만날 때마다 웃음으로 응수했었다. 사형언도를 받은 자가 취할 태도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극히 명랑했다. 더러는 우리들에게 농담도 하고 번잡스런 상해의 뒷골목 이야기도 해줄 만큼 기분이 유쾌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유화한 표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의지만은 철석같이 굳었다. 1심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쇄수(鎖手)갑을 채울 때 이것을 거절하여 당장에 사형을 집행할 것을 고집했다. 드디어 수갑을 어거지로 채우고 복심법원에 항소하기를 권했으나 역시 이를 거절했다. 일본놈을 살해한 한국인에게 일본의 법률로 일본인이 심리하는 재판은 백번 되풀이했댔자 매 마찬가지인 것이 명약관화한 것을 형식적인 재판으로 말미암아 헛된 시간을 소비하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는 수 없이 대서하여 타인의 무인(拇印)을 찍어서 수속을 마치고 말았으나 제2심의 판결에 대해서도 역시 상고를 불응했다. 1심과 마찬가지로 대서 상고하고 말았지만 결국은 기각을 당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교회사(敎誨師) 기무라(木村融)가 간혹 불러서 딴에는 위안을 시킨다고 여러 말을 했던 것이지만 씨는 마이동풍격으로 들은체 만체 하였다. 하루는 황국신민도(皇國臣民道)에 대한 설교를 하자 “공연한 잔말 말라”고 고함을 치며 노리고 있으니 기무라는 “괘씸한 사람이라”고 노했다. 이때에 엄씨는 책상 위에 놓였던 화분을 들어 기무라의 낯짝을 갈기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이 황소눈처럼 동그래지며 있는 것을 이번에 책상을 넘어뜨렸다.
그리고 나서도 씨의 안색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흥분했던 뒷자욱조차 없이 웃으면서 서서히 환방(還房)하는 씨의 걸음걸이는 매우 믿음직했었다.
나는 이 순간에 조선남아의 놀라운 기우(氣宇)를 직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혁명투사가 불원간 교수대에서 그 생애를 마치게 된다는 것이 단순한 꿈만 같았던 것이다.


2 엄순봉(嚴舜奉)의 오기. 1906~1938. 1934년 백정기 등과 함께 아리요시 공사를 처단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육삼정의거) 1935년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이용로를 처단한 후 피체되어 1936년 3월 사형언도를 받았다.

 

정태식(鄭泰植) 씨3

정태식 1934. 6. 17.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교수 등과의 소위 성대(城大: 경성제국대학) 사건으로 1934년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권영태(權寧台) 씨 등과 같이 피검된 분이다.
짤막한 체구는 일견 포류지질(浦柳之質)을 면치 못할 것 같았으나 실은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 조석으로 행하는 인원점검 식사 입욕 운동 청소 사방(舍房)검사 같은 것으로 인하여 차단되는 시간 이외는 하루종일 독서가 계속된다. 부피가 두툼한 영문서적을 첫줄 첫자부터 끝줄 마지막 자에 사선을 쳐놓고 줄거리만 읽는 것이 특수한 독서법이었다. 온 몸뚱이가 그저 총명의 두 자로 쌓여 있다고 아는 사람들의 화제가 되어 있었다. 언제나 빙글빙글 웃기를 좋아하는 씨에게 “어쩌면 그처럼 뱃속이 편하오” 하고 의
아하듯이 물으면 “감옥 터에 웃음은 양약이 된다오. 웃는 것 외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소?” 과연 수많은 혁명가들이 공통적으로 언제나 초조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고 화기 있는 얼굴로 명랑한 생활을 하는 것은 서둘러야 하는 수 없다는 자존적 수양의 결과인 것 같았다.
장구한 투쟁을 각오하고 있는 씨로서는 하루하루가 무사태평인 듯 했으나 씨의 그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자당(慈堂)께서는 몸이 달아 형무소 문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면회 차입 차하(差下) 같은 것을 한 번에 몰아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여러 차례로 나누어 원서에 찍히는 아들의 무인(拇印)이라도 보고는 만족한 듯. 또한 제한 있는 면회인지라 번번이 만나보지는 못할망정 무사히 있다는 말만 듣고도 그저 좋아서 안심하고 돌아가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요 반일운동과 무산대중 해방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는 자랑할 만한 아들이건만은 어머니로서는 하나의 어린아이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벗어 내보낸 헌옷 보퉁이를 연해 어루만지며 재삼재차 한 말을 되풀이하여 부탁을 하는 열렬한 모성애에 사람들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씨는 3년의 형이 확정되어 징역감(懲役監)으로 넘어간 후 얼마 아니 되어 자당의 면회도 드물어지고 말았는데 그때로부터 근 10년이나 경과된 수월 전에 “아직도 생존해 계시고 근력이 퍽 좋으시다”는 것을 이〇〇 씨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10년 전의 따뜻한 정경이 새삼스럽게 인상에 떠올라 왔던 것이다. 혁명가의 어머니 부디 만수장생하소서!


3 1910~1953. 1929년 경성제대 법학과 입학. 1934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박헌영의 최측근으로 남조선노동당의 이론가로 활약. 1953년 박헌영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됨.

 

이재유(李載裕) 씨

이재유 1936. 12. 26.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씨는 1937년 서울 교외 공덕리 노상에서 검거되던 날, 씨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검거는 드디어 씨의 옥사(獄死)를 결과 지었기 때문이다.
서대문경찰서에 두 번이나 검거되었으나 두번 다 감쪽같이 탈출하여 서울대학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의 관사 지하실에 숨어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미야케 교수와 함께 정원을 산보하며 환담하고 외부와 부절히 연락했다는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미야케 교수의 피검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다시 탈출하여 지하운동을 계속중 불행히도 다시는 탈출하지 못할 최후의 검거망에 걸렸던 것이다.
씨가 굳센 실천력과 사람을 능히 움직이는 감화력을 가졌다는 것은 옥중에서도 다름이 없었다. 우리 같은 자들에게도 흔히 조선민족의 진로라든가 소련의 실정이라든가 조선공산주의 청년의 의기라든가 조선에 있어서의 반일투쟁을 전제로 하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라는 것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해주었던 것이다. 미결감(未決監)에 있을 때의 일상생활은 매우 깨끗했다. 언제나 독방이니만큼 혼잡하지 않은 관계도 있었지만 감방은 먼지 하나 없이 청결히 되어 있고 서적 일용품 의류 등은 말짱하게 정돈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거슬리지 않게 하였다.
소량의 음료수나 세면수 같은 것도 따로따로 받아두었다가 먹고 남은 물로는 식기를 씻어서 햇살이 담뿍 쪼이는 창턱에 말리고 세수를 마친 물은 버리지 않고 걸레를 빨아 몇 번이나 방안을 닦았다. 씨는 결핍과 옹색함을 능히 극복하는 위인이었다. 얼마 되지 않는 물마저 이중 삼중으로 이용하는 면밀한 성품은 살림꾼의 편모를 엿보게 하였던 것이다. 관급(官給)하는 세끼는 자양분이 적은 것이지만은 좁쌀 한 알 남기는 일없이 오랜 시간에 충분히 씹어서 먹는 습관을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서에 있을 때에 비교하여 신중(身重)이 훨씬 늘었다고 자랑도 했었다.
씨는 그다지 비대한 체구는 아니었다. 그러나 걸음걸이는 육중한 몸뚱이의 소유자처럼 매우 느릿느릿했고 힘이 있었다.
“걸음을 좀 더 가볍게 걷는 것이 청년답지 않소? 지금은 양반걸음이 유행될 때가 아니지 않소?” 하고 빈정거리면 “내가 양반같이 보이오? 감옥살이는 우보격(牛步格)으로 내 집 마당을 산보하는 셈치고 살아야지 성급히 굴면은 말라죽는 법이오. 초조하면 3년 징역도 10년을 사는 것 같으니까…
” 역시 일생을 두고 싸우려는 씨에게는 감옥이 자기 집만 같았던 것이다. 이것이 혁명객들의 감옥에 대한 철학인 것이다. 씨가 애인 박진홍(朴鎭洪) 씨에게 보내는 서신을 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란 한 개에 천자를 쓰는 사람이 있다더니 씨는 언제나 봉함엽서의 풀칠한 선계(線界)까지 꽉 차게 쓴다. 그처럼 가는 글자건만 보기에 어지럽지 않게 명확하게 씌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 씨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당시의 총독부 안창호 1937. 11. 10.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민심의 동정에 대한 사찰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던바 드디어 민족진영의 거물들을 격리함으로써 전쟁으로 하여금 배태하는 독립사상의 확대 강화를 억압하려는 정책으로 나왔다. 즉 흥사단을 모체로 하는 동우회의 주간급을 전국적으로 대량 검거하여 투옥한 것이 이 사건의 전모이다. 안창호 씨를 비롯 하여 정인과(鄭仁果) 씨, 백남운(白南雲) 씨, 조병옥(趙炳玉) 씨, 이윤재(李允宰) 씨, 이광수(李光洙) 씨 등 우리나라 사상계 경제계 문화계를 망라하여 당초에는 구류장이 집행된 분이 물경 100여 명에 달하였다.
사건은 이어 경성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고바야시(小林長藏) 판사의 취조를 받게 되었는데 시국이 일본에 유리하게 되는 정세에 감(鑑)하여 취조의 진전에 따라서 제1심 공판이 개시될 때까지에는 거의 다 보석 출감되었었다.
도산(島山) 선생은 머리에 백발을 얹은 노객(老客)으로 항상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쇠약한 수구(瘦軀)에는 오랜 혁명투쟁으로 오는 피로가 역력히 나타났으나 그러나 강직한 성격과 사람을 쏘는 듯한 영롱한 안광(眼光)은 젊은이의 정열을 능가할 만한 것이 보이어 옥내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었던 것이다.
씨는 고령하신 데다가 병약한 탓이었는지 약간 신경질인 편이었다. 독방생활의 고적함을 풀려는 심정인지 더러는 우리들을 붙들고 보통 이상의 이야기를 했었다. 하루 걸러서 의무실로 진단하러 갈 때마다 바싹 마른 팔뚝을 힘껏 추켜 붙들고 반행(伴行)하는 나에게 씨는 비틀거리면서도 “번번이 이처럼 친절히 간호해주니 진실로 고맙소. 감옥살이도 수차 했지만 이제는 외부에서 보살펴 주려는 사람도 경찰의 이목이 무서워 점차 꺼리게 되고 보니 그저 당신네들의 친절만이 여간 고맙지 않소. 당신은 일본말을 썩 잘하오. 가장 발음이 좋은 것 같소. 아직 젊으니 부디 공부 많이 하기를 힘쓰오” 하며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투사의 어조에는 어쩐지 적적함이 묻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일본말을 잘한다는 바람에 나는 이처럼 유명하고 훌륭한 선생께 칭찬받는 것이 퍽 기뻤다. 나는 이만큼 어리석은 자였다.
그 후 씨의 병환은 좀처럼 회복되질 않고 오히려 구금생활의 신고(辛苦)가 박차를 가하여 감옥의(監獄醫)로서는 완치할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친지가 차입하는 사식도 드는둥 마는둥 할지경에 이르렀다. 1937년이 저물어가는 12월말에 보석이 허가되어 대학병원에 입원 가료하였으나 4개월 만에 애처롭게 서거하고 말았다.
오늘날처럼 해방된 천지에서 씨의 혁명생활이 종말을 지었던들 그 장의(葬儀)는 성대했을 것이며 국민의 애도는 깊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한마디의 말인들 조심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시절이었고 똑똑한 책까지도 안심하고 읽을 수 없을 만큼 왜정의 폭압은 극도에 달하고 있었는지라 씨의 장례에 참예하는 자는 곧 사상을 의심받아야 하고 과거의 민족운동자로서는 피검(被檢)의 기회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인사들이 여기에 나타나지를 못했던 것이다.
오호라! 일생을 조국광복운동에 바친 도산 선생은 세인이 모르는 새에 쓸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허응철(許應徹) 씨4

수많은 혁명지사 중에도 허씨만은 특수한 품격을 가졌었다. 아무리 열렬한 투쟁력을 지니고 있어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하더라도 때로는 풀리고 너그러워지는 일도 없지 않을 것인데 씨만은 철두철미 변함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옥중생활의 부자유함과 고적함과 우울함을 견디어 백이려고 동방(同房) 사람끼리 또는 만나는 사람들과 때로는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며 될 수 있는 대로 명랑한 태도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건만은 씨는 한번도 웃는 낯을 뵈이는 일이 없었다. 독서할 때나 방외(房外) 출입할 때나 용무로 대담할 때나 가족과 면회할 때나 여하한 처지에 있어서든지 얼굴이 변색되는 일이 없고 종시일관 긴장하고 있었다.


4 1910년생. 본적은 함북 성진. 주소는 청진부 북성정. 1934년 5월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출신 현춘달(玄春達)과 함께 함북지역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을 조직하고 청진 나남 지역 책임자를 맡음.
그해 메이데이 격문을 살포하였고 11월에는 공산혁명을 선동하는 격문 1만 2천장을 청진 나남 등지에 살포. 이후 일경에 체포되어 1941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이 언도됨. 출처: 『경성일보』 1935.2.17. 2면, 허응철 관련 집행원부·형사사건부(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사이트)

 

씨는 일본사람을 지목해서 말할 때는 반드시 ‘데키(敵)’라는 두명(頭名)을 부치고 말했다. 데키 아무개 간수장, 데키 아무개 간수, 데키 아무개 과장이라는 식으로— 하루는 나카시마(中島)라는 교회사와 구론(口論)이 벌어졌는데 그 사유를 기무라(木村) 간수장에게 전달하였던바 기무라는 씨를 데려다가 취조한 일이 있었다. 씨는 “‘데키’ 나카시마가 나에게 대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기를 권하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며 말끝마다 ‘데키’라고 하니 곁에서 이것을 듣고 있던 왜놈들이 저마다 노하여 “철저한 녀석이라”고 중얼대니 “너희들은 모두 우리의 원수 데키가 아니냐?” 하고 당당하게 반박했었다.
다음날 나카시마가 다시 불러서 따뜻한 말씨로 이야기를 걸었으나 역시 “너로 하여금 ‘데키’ 기무라에게 봉변을 당했노라” 하며 응답을 거절했었다.
이론으로는 어떠한 왜놈이 따져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그들은 핑계 좋은 징벌을 가하려고 했다. 연(然)이나 징벌에 해당할 만한 범칙(犯則)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므로 가족과의 면회를 고의로 중지시키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재적 사정을 모르는 그 부인은 때가 되면 꼬박꼬박 면회를 청해 왔지만은 언제나 형편에 의하여 시킬 수 없다는 구실로 허가되지 않았었다.
그 부인은 남편이 구속된 이래 수 3년이 넘었으나 남편의 옥중고(獄中苦)를 조금이라도 위로 코저 멀리 함경도로부터 서울에 와서 침모(針母: 바느질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표모(漂母:빨래해주고 품삯을 받는 여자) 같은 품팔이를 하여가며 차입도 하고 면회도 오고 편지 연락도 하는 등 정성이 지극한 어진 부인이었다. 어느 날은 면회할 때에 허씨가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너무나 고생을 끼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일이며 당신 자신도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장차 유지해나가기 어려울 것이니 재가(再嫁)하는 것이 좋다”는 권고를 하자 부인은 문턱을 붙들고 소리 높여 흐느껴 울었다. 남편이 출옥할 때까지 죽음이 다다르지 않는 이상 나라를 위해서 고생하는 남편과 똑같은 고생을 나누려고 결심한 그 부인에게는 너무나 원망스럽고 무자비한 포악이었던 것이다. 그 부인은 그 후 품삯 생활마저 유지하기 어려운 세태가 되자 대화숙(大和塾)의 식모로 공규(空閨)를 지키며 남편의 출옥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운형(呂運亨) 씨

1943년 초두, 씨는 육해군법 위반이라는 어마어마한 피고사건으로 재차 투옥을 당하였다. 동경에 있을 때에 친히 목격한 B29의 동경 공습의 실정과 B29의 성능이 일본기(日本機)에 비하여 극히 우수하다는 것을 모씨에게 이야기한 것이 ‘조언비어(造言飛語)’가 되었던 것이다.

여운형 1929. 7. 29.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 ⓒ국사편찬위원회

 

피고사건은 곧 기소되어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돌렸는데 이 공판은 비공개리에 개정되었었다.
공판의 내용에 언급하기를 원치 않으나 재판장의 “대동아전쟁은 일본이 승리할 것이냐 미국이 승리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남방의 자원지대의 확보 여하에 승패는 달렸다. 일본이 이 지대를 제압하고 있지 못하는 한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언명하였다. 씨의 놀라운 선견지명은 이 공판이 끝난후 2년 만에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씨가 미결감에 있는 동안 조카 되는 분이 자주 면회를 왔었는데 그는 동경에 주재하며 씨의 민족운동의 반려자가 되어 음양으로 활약하는 모양이었다. 면회를 할 때마다 용건이 끝나면 “ 아무개 공작은 무사하고” “아무개 남작은 평안하냐”고 연해 물어보기도 하고 “아무개 자작에게 안부나 전해두라”는 등 예절을 차리기에 조심했었다. 그들은 민족의 원수들이요 정적의 으뜸가는 자들이건만 역시 개인적으로는 그들 정객과의 친분이 있어야 상의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씨를 처음 뵈인 것은 씨가 대전형무소에서 2년의 징역을 마치고 출옥한 지 얼마 아니 되어 대전 경심관(警心館)에서 강연을 하던 날이었다. 열광하는 청중이 관내에서 삐져나와 관외에까지 꽉 차서 실로 성황이었다. 연단 좌우에는 속기사가 수명, 말 한마디 헛듣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앉아 있고 왜경의 금테 둘이가 즐비하게 늘어앉은 가운데 씨의 웅변은 토해졌던 것이다.
민족정신을 북돋으려 청년들의 각성을 채찍질하는 구절에 이르자 입회 경관의 난데없는 “중지!” 명령이 내렸다. 씨는 잠자코 흥분한 청중을 흘겨볼 뿐 계원에게 이끌리어 대기실로 들어간다. 잠시 있다가 다시 나타난 씨는 “전언(前言) 몇 구절은 당국의 명령에 의하여 취소하겠다”고 선언한 후 뒤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아니 되어 또 중지가 된다. 약 3시간가량의 강연에 ‘중지’ ‘전언 취소’가 일곱 번이나 되풀이되었다.
나는 씨의 강연 중에 단 한마디만은 아직까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인리(隣里)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경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의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리게 될 때에 용기백배하여졌던 것이다. ” 힘있게 외치는 바람에 청중은 벽력같은 박수를 보내었건만 입회 경관은 이제 또 씨를 대기실로 인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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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음악회] 특별출연 오희옥 지사 – ‘안중근 옥중가’

▲ [항일음악회] 오단해 – ‘광복군 아리랑’

▲ [항일음악회] 오단해 – ‘대한혼가’

▲ [항일음악회] 오단해 – ‘새야새야 파랑새야’

▲ [항일음악회] 가무악패 풍 – ‘기쁨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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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음악회] 강북구립여성합창단 – ‘압록강행진곡’


▲ [항일음악회] 두레소리 합창단 – ‘목동가’

금, 2018/02/0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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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듣기]


[팟캐스트 ‘역적’시즌2. 5회 2부 “박순찬 시사만화가와 함께”]


[팟캐스트 ‘역적’시즌2. 5회 1부 “역전다방_의열단 1편”]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4회 2부 – 김활란동상 옆 친일 알림팻말_이화 친일청산프로젝트 기획단과 함께 ]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4회 1부 “불평등으로 시작된 강화도 조약 1편”]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3회 2부 “임청각 이야기”_이항증선생과 함께(석주 이상룡선생 증손자)]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3회 1부 “내우외환 위기속 흥선대원군(2편)”]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2회 2부 반민특위 김상덕위원장 아들 김정륙선생과 함께]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2회 1부 “내우외환 위기속의 흥선대원군(1)”]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1회 2부 “효창원 역사적폐청산 과제_차영조 선생님”]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1회 1부 “백년의 역사여행을 시작하며”]

[팟캐스트 ‘역적’ 시즌 2.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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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 2] 팟캐스트 ‘역적'(역사적폐 청산)

제작 등: PD 김세호, MC노, 김광진(前)국회의원,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방학진 기획실장, 방은희 교육팀장

※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시즌2 ‘역적’
“우리 역사의 뿌리가 친일독재 세력에 의해 흔들리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겨울 촛불을 들고 싸운 상대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역사적폐의 주범들의 실체와 이들이 저지른 역사범죄의 동기를 파헤쳐보고자 합니다.”

금, 2018/02/0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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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1일 <주간경향> 취재팀을 만난 원용범 할아버지가 우이동 계곡에서 자신의 국민학교 선생님이었던 주 선생 가족의 학살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서울 우이동서…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최소 8구 이상 매립 확인돼

서울지역에서 한국전쟁 중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가 최초로 확인됐다. 그동안 한강 이남 지역에서 보도연맹 등 민간인 학살이 확인되고 집단매장지 발굴이 이뤄졌지만 서울지역 존재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희생자로 유력한 일가족의 신상에 관련한 증언도 나왔다. 행정안전부 등은 조사가 마무리되고 유해 안치작업이 끝나는 대로 기자회견을 통해 관련 사실을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에 확인된 민간인 학살 매장지는 서울 우이동 우이동신설선 북한산우이역 인근 등산로 입구다. 이 지역의 집단매장 소문은 간간이 있었다.(박스 참조) 확인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지난해 11월 16일, 하천 노후옹벽 정비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것이다. “옹벽 패널을 빼니 옆 흙에 묻혀 있던 사람 뼈가 우연히 발견됐다. 공사인부들이 놀라 경찰에 신고했다.” 이창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조직발전특별위원장의 말이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이 시신상태 등을 검토해보니 ‘최근 사건이 아니라 한국전쟁 때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조사 나왔다.”

국방부 감식단의 육안감식 결과 수습된 유해는 최소 6명이고, 아직 현장에서 발굴·수습되지 않은 유해도 최소 2구 이상으로 판단됐다. 총 8구 이상의 존재가 최초 확인된 것이다. 유해의 주인공은 군인이 아니었다. 6세에서 60세까지 연령도 다양했고,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도 나왔다. 유류품에서도 은비녀, 틀니 등 군인과 무관한 물건들이 나왔다.

■ 비녀, 틀니… 학살 민간인 유해로 결론

<주간경향>이 단독으로 입수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의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시신들 중 일부는 철사로 손목부위를 결박한 상태로 누워 있었고, 매장 방향과 자세가 비정형적이며, 허리부분에 고무줄을 착용한 유해가 다수 확인됐다. 고무신 착용 유해가 다수였다는 점도 특징이었다. 현장에서는 틀니나 은비녀 같은 ‘특이 유품’ 이외에 탄피와 탄두도 발견됐는데, M1·칼빈·45구경 권총 등이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아군 탄약류만 출토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적혀 있다. 즉 이번에 발견된 유해들은 종전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사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더 특이한 부분은 이 유해들의 신원을 추정할 수 있는 유력한 증언도 나왔다는 점이다.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에 금무하던 음악교사 가족이라는 증언이다. 이 증언을 내놓은 이는 우이동 토박이로, 현재도 별장관리인으로 우이동에 거주하는 원용범씨(83)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원씨는 학살사건이 벌어질 당시의 ‘목격담’을 증언했다. “9·28 서울 수복이 된 뒤 10월 어느 날이었다. 한옥에 숨어서 먼발치에서 봤다. 지금은 경전철을 지으면서 축대를 쌓아 개울이 깊어졌는데, 당시는 얕은 개울이었고 개울 옆에 고운 모래가 쌓인 곳이었다. 군인 복장의 사람들이 트럭에서 일가족을 끌고 내려와 총으로 쐈다. 어른이 죽어 푹 꺼꾸러지니 아이들이 방방 뛰었는데 그 아이들까지 죽여버렸다.”

원씨는 학살된 가족이 한국전쟁 전 자신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교사 가족이라고 했다. 당초 국방부 등의 증언 청취과정에서는 교사의 성씨를 기억하지 못했지만 1월 말 <주간경향>의 탐문과정에서는 “붉은 주(朱)인지 두루 주(周)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주씨 성을 가진 교사였으며,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해방 후 월남해 우이분교 교사로 있던 분”이라며 “바이올린을 잘 켰으며 학교 다닐 때 ‘나의 살던 고향은’ ‘반달’ 등의 노래를 가르쳐주던 것이 기억난다”며 더 구체적인 기억을 내놨다. 주 교사는 골짜기 위쪽 일본 적산가옥에 장모와 처, 그리고 6∼7살가량의 남자아이들 둘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처형당하는 걸 먼발치에서 봐서 처음에는 주씨 가족인 줄 몰랐다. 트럭 뒤칸에 실려 가족들이 끌려왔으니 다른 데 있다가 잡혀온 것은 틀림없었다. 처형 뒤 시신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당시는 몰랐다.” 2월 1일 <주간경향>을 만난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인민군 점령 기간 동안 그 교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나, 일단 북이 싫어서 내려온 사람인데 자의적으로 좌익활동을 했겠는가. 설령 아버지가 좌익활동을 했더라도 어린아이들, 그리고 장모는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죽였던 건지….” 0203-6

■ “월남 음악교사 가족이다” 증언

이번에 발굴된 유해들은 주 교사 가족일까. 실제 <주간경향> 취재팀과 동행한 원씨가 지목한 장소는 하천과 작은 개울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이번에 시신이 발굴된 장소에서 약 25m 떨어진 장소다. “원씨가 증언한 주 교사 가족과 별도로 또 다른 학살자 가족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창수 위원장의 말이다. 학살자 매몰의 일반적인 패턴은 보통 10여명의 ‘부역자’들을 한 구덩이에 묻고, 바로 인근에 또 구덩이를 파서 그렇게 매몰하는 식인데, 실제 이번 매몰지가 공사 중 우연히 발굴됐으므로 바로 인근에 또 다른 매장지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날 원씨와 동네 노인들은 또 다른 학살 매몰 장소도 증언했다. 발굴 현장에서 약 100m 떨어진 장소다. “당시 계곡을 중심으로 웃골과 아랫골로 나뉘었는데, 아랫골 쪽에 구덩이를 파고 사람들을 죽여 묻었다. 한참 지나고 번동에 살던 유가족들이 수소문해서 유해를 찾으러 왔었는데, 총 여섯 구의 시신을 파낼 때까지 가족 시신이 안 나오다가 맨밑의 일곱 번째에서 가족을 찾아 수습해 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처형당한 것이다. 끄집어낸 여섯 구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구덩이에 다시 묻었을 것이다.” 원씨는 시신 매장 장소를 정확히 지적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1950∼70년대에 공사용 차량이 다닐 수 있도록 축대를 쌓고 성토한 구간이었다. 앞의 유해발굴지와 다르게 이곳은 현재는 작고한 두 사람 소유의 땅이었고, 원씨네 가족은 그 자리 인근에서 소작해 감자를 키웠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발굴된 시신들을 학살한 이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원씨는 주씨 가족을 죽인 사람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탄피와 탄두를 보면 통상적으로 M1은 군인이, 칼빈은 경찰이, 45구경 권총은 장교가 사용하던 것이다.

“6·25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당시 대통령령으로 만들어진 ‘비상사태하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것이 소위 부역자 처벌의 근거였다. 1952년 위헌 판결을 받을 때까지 대통령령에 근거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검거와 체포·학살이 벌어졌다.” 진실화해조사위원회 조사관을 역임한 김상숙 단국대 강사의 말이다. 김 전 조사관에 따르면 ‘부역자’나 ‘보도연맹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는 우익청년단체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치안대가 주도했다. 그는 “당시 치안대 사무실이 보통 경찰서나 국민학교 교실, 양곡창고에 있었는데 여기에 연행해 구금·조사하다가 경찰이 인솔해 국군이 사살하는 것이 통상적인 패턴”이라며 “이번 우이동 사건의 경우 유해에 골절이 다수 발굴되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국방부 감식보고서를 보면 유골들은 대퇴골(다리뼈), 두개골, 상완골(어깨뼈)이 골절되어 있었다. 감식보고서에는 “사망 무렵 골절이 관찰”이라고 적혀 있다. 척추부위에 탄두가 박힌 유해도 식별되었다. 김 전 조사관은 “다른 부역혐의자 학살지의 경우를 보면 총알을 아끼기 위해 때려 죽이거나, 부역자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해놓고 굴비처럼 묶어 앞의 사람에게 총을 쏴 줄줄이 꼬꾸라지면 생매장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유해감식을 맡고 있는 박선주 전 충북대 명예교수는 “골절이 살아있을 때 맞아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사후에 위에 흙 등이 쌓이면서 압력 때문에 생긴 것인지 약품처리가 끝나면 법의학적으로 엄밀히 검증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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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이동 민간인 학살자 집단매장지에서 지난 1월 5일 희생자 원혼을 기리는 복토 추모제가 약식으로 열렸다. 발견 현장에는 아직도 미수습 유골(사진)이 남아있다. / 법인권사회연구소 남인우 연구위원 제공

■ 누가 이들을 학살했나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동안 서울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자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한국전 개전 직후 벌어진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경우 대부분 한강 남쪽에서 보고·발굴된다.(표 참조) 서울시의 경우 북의 기습남침으로 점령돼 그대로 북한 치하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9·28 수복 후에 벌어진 부역자 처벌 및 처형은 다르다. 상당수가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넘어갔지만 점령기간 중 피난을 못가고 남아 어쩔 수 없이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얼마나 연행조사를 받았고, 그들 중 얼마나 처형되었는지에 대한 공식기록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도시화 개발로 원형보존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위원장은 “민간사유지에서 건물을 올리려고 땅을 파면 유골이 발굴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그냥 묻어버리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말한다. 시신을 발굴하고 수습하려면 땅주인과 협상해야 하는데 그게 굉장히 복잡하고 지난한 과정인 점도 일조한다. 발굴지 대부분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도 외부에 잘 노출되지 않은 오지이거나, 개발이 안된 계곡들이었다. 여기에 농촌의 경우 보통 집성촌으로 그 지역 토박이 노인들이 생존해 증언할 사람이 있는 데 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익명의 공간인 것도 일조한다. 김 전 조사관은 “과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제보접수를 받을 때도 신고된 건수도 많지 않았고 서울지역 확인은 엄두도 못냈다”며 “서대문형무소 뒤쪽 일대, 한강변이나 서울 바깥으로 나가는 길목, 강나루터 등이 학살매장지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된 것은 이번 우이동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우이동 매장지의 경우, 감식보고서에 따르면 유골들과 유해는 ‘황갈색 가는 모래층’에서 출토되었고, 그 위에는 1차와 2차에 걸쳐 생활쓰레기로 성토돼 있었다. 사살된 시신을 따로 묻은 것이 아니라 위로 흙을 덮어둔 채로 방치돼, 이후 유입된 계곡산장 등 주민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안부 관계자는 “현재까지 발굴된 6구와 유해개체 수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 유해감식단이 청취한 구술증언과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는 주 교사 가족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전부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 보존조치를 취한 것은 관련해 법적 권한이나 발굴예산 같은 것이 따로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차제에 지난 2005년 한시적 기구로 만들어 2010년 활동이 종료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법을 개정해 다소 시일이 걸리더라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을 국가가 책임을 지고 계속 맡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 행안위에 여러 진실화해위원회법 개정안이 상정되어 있지만, 법이 통과될지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이창수 특별위원장은 “이념을 놓고 말하게 되면 학살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국가가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며 “이제는 이념이 아닌 인권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는 국가가 과거의 불행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해결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 학살당한 주 교사 가족, 신원 확인할 수 있을까

‘우이동 그린파크 계곡 학살’에 대한 증언이 없지 않다. 지난 2012년, KBS는 6·25전쟁을 다룬 특별기획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이 다큐 7부 ‘전쟁의 그늘(상)’편에 출연한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차승현씨는 이렇게 말한다. “국군이 진주해가지고 그 다음엔 경찰들이… 부역자라고 그랬지. 빨갱이 하던 사람들을 불러다가 때리고… 지금의 우이동 그린파크 옆에 가면 골짜기가 있어요. 거기다가 트럭으로 실어다가 죽이고… 그런 비극이 있었죠.” 차씨는 이번에 <주간경향>이 접촉한 우이동 거주자들과 함께 유력한 증언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당시 서울 거주’ 이외에 다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차씨는 우이동 학살을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의문은 의외의 방향에서 풀렸다.

‘혹시 6년 전 증언한 차승현씨를 아느냐’는 <주간경향>의 질문에 원용범씨는 “우이동 계곡에 올라가면 ‘○○집’이라는 음식점이 나오는데 거기 주인이었다”고 말했다. 방송에 출연해 증언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원씨에 따르면 차씨는 암으로 오래 투병하다가 작년인가 재작년에 사망했다.

주 교사 가족 학살사건을 증언해줄 다른 사람은 없을까.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원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일단 원씨와 같이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창들을 문의했다. 살아있는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 현재의 153번 종점 자리에 직사각형 기와집이 있었는데 당시 숭인국민학교 우이분교였다. 거기서 4학년 과정까지 운영되고 5학년부터는 좀 더 떨어져 있는 숭인국민학교를 다녔다. 주 교사는 분교 교사였다. 원씨는 말한다. “장인 어른은 안 계시고, 장모를 모시고 살던 것이 기억난다. 부인은 키가 자그마한데 참 예뻤던 것이 기억난다. 아이들도 귀여웠고…. 세상에, 그 아들들까지 죽일 수 있느냐. 그 어린 아이들이 뭐를 안다고.”

주 교사의 인적사항을 학교 근무 교사명단을 통해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주간경향>의 확인 요청에 서울시교육청 대변인실은 “일단 우이초등학교 교사 근무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1954년부터인데, 그 이전 기록은 멸실된 것으로 판단된다”며 “남아있는 기록에도 주씨 성을 가진 교사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고 밝혔다. 결국 밝혀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원씨를 만나 주 교사에 대한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원씨는 주 교사 가족이 살던 일본 적산가옥 위치를 알고 있었다. 현재 이 가옥은 헐려 터만 남아있다. 원씨의 기억에 따르면 1950년대에 집은 헐렸고, 그 뒤 절이 자리하다가 1962년께에 역시 헐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폐쇄등기부등본이나 호적 등에서 확인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앞으로 추가취재가 필요한 부분이다.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2018-02-03> 경향신문

☞기사원문: [단독]서울지역 민간인 학살 집단매장지 최초로 확인됐다

토, 2018/02/0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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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zwwxY…

팟빵 : http://www.podbbang.com/ch/14024?e=22522241

월, 2018/02/05-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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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청산·역사 바로세우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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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 원주·횡성지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원주와 횡성에 지회를 창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한일과거사 청산운동의 구심 역할을 해온 민족문제연구소는 최근 발기인 대회를 열고 원주·횡성지회(지회장 유창구) 창립총회를 가졌다.

원주·횡성지회는 친일청산 및 역사바로세우기를 위해 학생과 시민을 대상으로 교육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시민단체와의 교류를 추진한다.유창구 지회장은 “일제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왜곡된 한국근현대사를 규명하는 일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2018-02-02>강원도민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원주· 횡성지회 창립

월, 2018/02/0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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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이트의 미즈넷, 미즈토크, 50대들의 쉼터 방에 올라온 글입니다.

너무 민망해서

안중근 의사 숭모회 사이트에 비밀글로 올리고 처벌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숭모회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안의사님 본인은 물론이고,

그분의 어머님까지 모욕하고 있습니다.

……………………….

 

우리 응칠이는 호로자슥이다. [1]

  • 579921| 처음과끝 (sogep****)
  • 공감 4 | 조회 199 | 2017.11.02 | 신고 주소복사 miznet.clipboard.init(“copyUrlButton”, 41, 15 );

ILO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직업의 수는 약 20,000개요,

세계적으로 볼 짝에는 약 400,000개의 직업이 있답미돠.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아주 다양하고

나아가 생각하는 방식은 더욱더 다양한 것이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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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데…

민주공화국 최고의 가치는 바로 自由 자유람미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남에게 구속 받거나 그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생각과 의사를 표현 할 수 있는 것,

자신의 종교와 철학과 이상과 이념을 주장 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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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자유는 절대적으로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 되어야 할 가치인 거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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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수정헌법 1조를 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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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ess shall make no law respecting an establishment of religion,

or prohibiting the free exercise thereof;

or abridging the freedom of speech, or of the press;

or the right of the people peaceably to assemble,

and to petition the Government for a redress of griev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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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는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행위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의회는 언론, 출판의 자유 또는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수 있는 권리와

고충 처리를 위해 정부에 청원할 수 있는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여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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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표현의 자유’를 수호하는 조항인 것이져.

 

이와 관련된 ‘래리 플랜트’라는 영화가 있었져.

 

악명 높은 포르노 잡지 허슬러의 래리 플랜트.

속물이자 선동가이기도 한 래리 플랜트의 인생역정과

미 수정헌법 제1표현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법정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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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에서

래리 플랜트가 이런 말을 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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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은 불법이지만 그것을 촬영, 뉴스위크에 실으면 퓰리쳐상을 받고

섹스는 합법이지만 그것을 촬영하면 감옥에 가야한다.

어떤 게 더 유쾌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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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미국의 삼등시민이다. 나같은 쓰레기가 보호받는다면

여러분 모두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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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변호사 아이삭 맨은

포르노는 싫어하지만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며 소송을 맡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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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우리의 머리속에 존재하는 고정관념과 일반상식에 테러를 가한 영화,

이른바 표현의 자유‘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대한 통렬한 해석이 백미져.

 

우리는

우리 응칠이를 의사요 열사라고 하는 것을 탓하진 않슴미돠.

기건 바로 니들의 생각이고 표현이고 자유니깐 말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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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응칠이가 테러리스트라 하는 것을 탓해도 안 됨미돠.

기건 그들의 생각이요, 양심이요, 자유니깐 말이져.

<!–[if !supportEmptyParas]–> 

기실 우리 응칠이가 의사요 열사라덩가

테러리스트요 호로아해라는 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저마다 다 생각과 주장이 다 다를 수 있고

그 생각과 주장이 다 옳거나 틀린 것도 아니니 말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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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종교와 사상이 다르다 해서

남들의 주장과 생각을 배척하고 방해하는 작태임미돠.

<!–[if !supportEmptyParas]–> <!–[endif]–>

네 종교와 사상과 자유를 인정 받으려고 한다면

당근 남의 것도 인정해야만 하는 건데 말이져.

<!–[if !supportEmptyParas]–> <!–[endif]–>

첨님은

이런 민주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자질도 없는 것들이

나오는 대로 아가리질 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는 곰미돠.

니들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과 표현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곰미돠.

 

<!–[endif]–>우리 응칠이는 아주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사요 열사의 얼굴이 있는가 하면

테러리스트요 호로아해의 얼굴도 가지고 있담미돠.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제 신념이라며 사람에게 총질을 하였으니 테러리스트요,

나이 30에 사형을 당해 오마니 가심에 못을 박았으니 호로아해인 거지요.


<!–[endif]–>

그리고

응칠이의 오마니의 편지

구차하게 목숨 구걸 말고 기꺼이 디지라는 그런 편지

(실은 조마리아는 그런 편지를 쓰지 않았다지만)

그런 편지질을 한 에미라면 기건 바로 미틴뇬이 맞구요.

 

세상사 옳고 그름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결정하는가?

첨님은 바로 이 소리를 하고픈 거지요. 어험!

화, 2018/02/06-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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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가담자 지원하며 독립운동 앞장선 오현주
독립 전망 불투명해지자 친일 전향 해방 후 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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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살 오현주, 1938년. 임경석 제공

오현주(吳玄洲)는 신여성이었다.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 그가 태어난 1892년 무렵은 여자가 교육받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오현주가 교육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오인묵이 기독교를 믿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호서·호남 지방의 기독교 선교 기지라는 평판이 있는 전북 군산 구암교회의 첫 조선인 장로였다.

오현주는 13살 때 처음 구암교회의 미국인 목사 부위렴(윌리엄 F. 불l)의 부인에게서 신식 교육을 받았다. 교회에 열성으로 다니는 조선인 신도들의 여느 딸들과 함께였다. 친언니 오현관(吳玄觀)도 같이 있었다. 소녀들은 주로 성경과 산수를 배웠다. 기독교 소양과 함께 가감승제의 기본 셈법을 익힌 것이다.

3·1운동이 뒤흔들어놓은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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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교회 임원들과 찍은 사진, 1942년. 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오현주다. 임경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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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현주의 오빠, 오긍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임경석 제공

오현주 자매가 신교육을 한 계기 가운데는 오빠 덕도 있었을 것이다. 오빠 오긍선(吳兢善)은 오현주보다 14살이나 위였다. 미국인 선교사와의 인연으로 서울 배재학당을 마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왔다. 유학 중에 켄터키주 루이빌 의과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 사람이 의학박사 학위를 받기로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였다. 오긍선은 1908년 귀국해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그는 나중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감·교장직을 21년간이나 했다.

소녀 오현주의 학업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1906년 집안에 초빙된 한문 교사에게서 약 1년간 한문을 배웠다. 근대적 교육기관에 정식으로 발을 디딘 것은 17살 되던 1908년이었다. 서울 연지동에 있는 정신여학교 제2학년에 들어갔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이 학교는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기반으로 중등 교육과정 수준의 학교였다. 오현주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1910년 6월 졸업했다. 그때 학교 문을 나선 제4회 졸업생은 22명인데 그중에는 오현주 자매를 포함해 김마리아, 유각경, 유영준, 우봉운 등 뒷날 여성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즐비했다.①

교육 기간이 1904년부터 1910년까지 약 6년이었다. 덕분에 오현주는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졸업한 그해 가을부터 군산 멜본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곳에서 4년, 경남 진주 광림여학교에서 1년6개월, 서울 경신소학교에서 1년간 교사로 있었다.②

오현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각지에서 교사로 일하는 동안에도 교회 출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삶과 기독교는 뗄 수 없이 연결돼 있었다. 결혼도 교회의 인연에 따랐다. YMCA 지도자이자 신간회 회장을 한 이상재가 중매를 섰다.

상대방은 2살 아래의 강낙원(姜樂遠)이었다. 두 사람은 1915년 1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오현주가 24살 되던 해였다. 남편은 체육인이었다. 유도와 검도가 전공 분야였다. 결혼 이듬해에 유도 수련을 위해 일본 유도의 총본산인 고도칸에 유학하러 도쿄에 건너갈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강낙원은 이후 서울에 무도관(武道館)이라는 유도 수련장을 세웠다. 1930년에는 동아일보사 창간 10주년 기념 각 방면 공로자 표창식에서 ‘체육계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③

3·1운동이 오현주의 삶의 궤적을 뒤흔들어놓았다. 1919년 3월1일 시작된 만세시위운동이 전 조선을 풍미했다. 3월과 4월 두 달 동안은 혁명적 시기였다. 수백만 군중이 일본 식민통치에 맞서 집단행동을 했다. 희생자가 나왔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진압으로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속출했다. 무차별 검거로 유치장과 감옥이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맡아

수감된 투사들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경제 사정이 곤란한 수감자는 사식도 차입받지 못하는 것을 본 여성들이 나섰다. 오현주 자매도 그랬다. 은밀히 돈을 모으고 수감자를 돕는 활동에 나섰다. 정신여학교 졸업생들이 활동의 구심체가 됐다. 4회 졸업생 오현주·오현관·이정숙이 참가했고, 6회 졸업생 장선희·이순길, 3~4회 후배인 이성완·김정숙 등이 가세했다. 전·현직 교사, 간호부 등 전문직 직업의 신여성들이었다. 활동 범위도 확대됐다. 격문과 지하신문를 은밀히 배포하고, 자금을 모아서 외국으로 망명한 혁명가들에게 전달했다. 관련자와 활동 범위가 늘자 책임과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할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혈성단애국부인회’라는 여성 비밀결사가 탄생했다. 나이가 많은 오현관이 회장을 맡고 재무, 통신원, 지방 파견원 등의 직책을 두었다.

1919년 6월 조직이 확장됐다. 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가진 두 비밀결사가 통합됐기 때문이다. 다른 단체는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라는, 중국 상하이 망명자들과 긴밀히 연계한 것이었다. 새 통합 단체에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라는 이름을 붙였다. 회장은 오현주, 언니 오현관은 고문 직책을 맡았다. 단체의 덩치가 커졌고, 지부 조직까지 결성됐다.

그해 6월은 3·1운동의 한 전환점이었다.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 재편을 논의하던 파리강화회의가 타결됐다.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조선의 국제적 지위 변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누구 눈에도 조선의 독립 가능성이 옅어졌음이 명백해졌다. 그뿐인가. 4월 중순 이후 만세시위운동이 잦아들었다. 일본 군경의 가혹한 탄압에 눌린 탓이기도 했지만, 독립의 희망이 스러졌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혜성이 긴 꼬리를 남기듯이 간헐적 시위가 이어졌지만, 다시 혁명적 정세가 되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애국부인회 활동도 점차 위축됐다. 특히 오현주 회장의 활동력이 두드러지게 줄었다. 조직에 위기가 찾아왔다.

새 원동력이 나타났다. 오현주의 정신여학교 졸업 동기인 김마리아가 형무소에서 나온 것이다. 김마리아는 쉼없이 활동을 재개했다. 만세시위운동의 퇴조에 실망한 구성원들을 독려해 조직을 강화했다. 10월19일이었다. 16명의 여성이 은밀히 모여 애국부인회를 재결성했다. 김마리아를 회장으로 하는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전임 회장인 오현주는 망명자들과 대외 연락을 맡는 교제부장 직위에 이름을 남겨두었다.

남편 강낙원이 돌아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국외로 나갔다가 9개월 만에 귀국한 것이다. 상하이, 만주, 연해주를 둘러보고서 되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국외로 나갔다 왔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비밀 활동 정보 넘기는 조건

강낙원은 비관적인 미래를 토로했다. 독립이 될 가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즉각 비밀결사에서 발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언젠가 경찰에게 발각되면 중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비밀결사의 회장직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형을 면제받을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남편은 한 남성을 집에 들여 며칠 묵게 했다. 유근수(劉根洙)였다. 그는 남편의 유도 사범이자 체육계 선배라고 했다. 또 진퇴양난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줄 권한을 가진 자라고 했다.

앞얘기는 사실이었다. 유근수는 1902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한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이었다.④ 1907년 군대가 해산된 뒤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했다. 대한학회 회원록에 그의 이름이 실렸고, 학교 설립 의연금 모금에도 동참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체육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논설도 신문에 기고했다. 체육은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행복을 실현하는 근원이므로, 이를 급무로 생각하고 확장시키자는 주장이었다.⑤ 실제 1909~12년 서울 YMCA회관 내부에 유도·검도부를 운영했다. 유근수와 강낙원은 유도·검도계의 가까운 선후배였다. 강낙원은 유도와 검도를 그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유근수가 경영하다 포기한 YMCA 유도·검도부도 인계해 1921~23년 경영했다.

뒷얘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유근수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하나도 상치 않고 다 살릴 도리가 있으니 아무 염려 마시고 안심”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럴 권한이 그에게 있을 리 없었다. 오현주의 배신을 유도하려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길로 나아갔다. 일본 경찰 조직에 들어간 것이다. 1919년 현재 그는 대구경찰서 소속 형사였다.

오현주는 결국 남편과 형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는 자기 부부와 언니 오현관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애국부인회의 비밀 문건을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최고위급 수준의 보장이 필요했다. 유근수는 수완이 좋았다. 어떻게 공작했는지, 아카이케 아쓰시(당시 41) 경무국장 면담을 성사시켰다.

유근수는 자동차를 대기시켰다. 자동차는 서울 남산 밑 왜성대 깊은 곳에 있는 경무국장 관사로 미끌어져 들어갔다. 경무국장은 일본 도쿄제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 일본의 전형적인 고위 관료였다. 그는 세 사람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오현주에게 물었다. “당신이 이후부터 애국부인회의 정신을 버리고 방침을 달리하여 명칭도 개칭하여 사회에 다른 사업을 하겠는가?” 오현주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짧은 회견이었지만 동료들의 비밀 활동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자신의 안전을 확실히 보장받을 수 있었다.⑥

일제 검거시 유일하게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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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기소 처분을 결정한 검찰관 이의식의 도장, 1949년. 임경석 제공

1919년 11월28일이었다. 애국부인회 구성원의 일제 검거가 개시됐다. 회장 김마리아를 필두로 전국에서 애국부인회 회원 70명이 체포됐다. 정신여학교 교사를 비롯해 관련 여성이 11명이었다. 16%를 차지했다. 피검된 사람의 53%는 세브란스병원이나 동대문부인병원 등의 관계자였다. 그들은 대개 간호부였다.⑦ 그뿐만이 아니었다. 애국부인회와 깊은 관련이 있던 비밀결사 청년외교단 구성원도 10여 명 체포됐다.

수사를 담당한 경찰관서는 유근수가 소속된 경상북도 경찰부였다. 체포된 사람들은 모두 대구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들은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피의자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중병에 시달렸다. 특히 김마리아 회장이 위중했다. 그는 코와 귀의 화농 증상이 심했고, 고문으로 머리를 심하게 맞아 제정신이 아니었다. 심지어 불에 달군 인두로 여성 생식기에 ‘화침질’을 놓는 야만적인 고문을 겪어야 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결사부장이자 부산지부장인 백신영은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심각한 위장 손상을 입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뼈에 가죽만 남은 것처럼 삐쩍 말랐다. 거의 빈사 상태였다. 서울지부장 이정숙은 발에 동상을 입었다. 진물이 흐르고 통증이 심해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애국부인회 사건의 피고인들은 조선총독부 재판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김마리아 회장과 황애시덕 총무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의경 서기, 이정숙 적십자부장, 장선희 재무부장, 김영순 서기는 징역 2년형, 유인경 대구지부장, 이혜경 원산지부장, 신의경 경기도지부장, 백신영 부산지부장은 각각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오현주 부부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대구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었다. 오현주는 단 하룻밤을 유치장에서 보낸 뒤 석방됐다. 남편 강낙원도 조사를 받았지만, 일주일 뒤 풀려났다.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기로는 언니 오현관도 마찬가지였다. 아카이케 경무국장의 약속은 차질 없이 이행됐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에 혹여 진술이 필요할지 몰랐다. 대구에 5개월간 체류해야만 했다. 하지만 숙식에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의 가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숙박비는 전혀 지급하지 않았다.

돈도 받았다. 3천원의 기밀비를 받았다는 소문이 쫘악 돌았다. 신문기자 월급이 40~50원, 일용노동자의 일당이 1원쯤 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3억원에 해당했다. 오현주 부부는 1922년 가을 이사를 갔다. 연지동 43번지 작은 가옥을 처분하고, 원서동 196번지 크고 넓은 집을 사서 옮겼다. 옛집의 판매대금은 1200원이었고, 새집의 구매대금은 4200원이었다. 새집이 만족스러웠는지 부부는 수십 년간 그 집에서 눌러살았다.

반민특위에 체포됐으나 불기소

오현주 부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남편은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있으면서 ‘중류’의 생활수준을 뒷받침했고, 아내는 아들딸 낳고서 집안을 잘 건사했다. 기독교 신앙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에 적을 두고서 성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그 교회 집사, 권사에 차례로 선임됐다. 중등부 여학생반을 지도하고, 교회 창립 50주년 기념위원회 재정부원으로서 소임을 다했다. 대리석 현판도 자비로 제작해 기증했다.⑧

해방 뒤에도 순탄했다. 남편은 한민당 창당 발기인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하는 정치 진영에 깊숙이 가담했다. 1948년에는 전국 규모의 극우 단일 청년단체인 대한청년단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그들에게도 딱 한 번 위기가 있었다. 해방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을 때다. 1949년 3월16일 오현주 부부는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오현주는 그해 5월4일 “남편의 요구에 따랐을 뿐이며, 고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1개월20일간의 짧은 구금과 조사를 거친 뒤 석방됐다. 남편은 약간 더 고생했을 뿐이다. 강낙원은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기소됐지만, 머잖아 보석 조치로 석방됐다. 마침내 그해 8월11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모든 반민족행위자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히 잠들 수 있게 됐다. 오현주는 1989년 병사했다. 향년 98살의 천수를 누렸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참고 문헌
① 여교졸업, <황성신문> 1910년 6월19일
②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관 申亨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5∼17쪽, 1949년 3월28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③ <동아일보> 1930년 4월2일치
④ ‘劉根洙’, <大韓帝國官員履歷書> 25책, 641쪽, 1972년
⑤ 劉根洙, ‘論體育說’,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5일치
⑥ 특별검찰관 李義植, ‘피의자신문조서(오현주)’, 18∼23쪽, 1949년 4월14일
⑦ 박용옥, <김마리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하였다>, 홍성사, 203쪽, 2003년
⑧ <안동교회 90년사>, 안동교회 역사편찬위원회, 159쪽, 217쪽, 2001년

<2018-02-05> 한겨레21

☞기사원문: 친일파 되어 여생 누리다

※관련기사

☞한겨레21: 임경석의 역사극장

수, 2018/02/07-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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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홍씨에 관련된 내용은 2006년 이후로 아무런 기사가 없더라구요

어떻게 된건가요? 해결됬나요?

수, 2018/02/0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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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한겨렌

비판해따…………..이육사의

아니 ?…..먹칠의  어느  사헌부의  2심

존 스타인백  분노의(재판)  이었다라고,

목탁아!

ㅈㅣ팡이야!

검산지판산지비노산지    분간이  안대는  또다시  재걔되는  한반도의  남녁이와북녀기!

기대반우려반과  눈츅제속의   정경유착경정유착팡결

그재벌영감의 손지와 그대통령의 장녀들의 축잰가?

(올린마난 정지영  상이  엄사옴. 형동친  이어니언스  보그덜랑  에스케텔레콤 하지마라)

 

목, 2018/02/08-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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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시민단체들 도쿄서 기자회견…”日정부, 유골반환 성의보여라”
고향 못간 조선인 전몰자 최소 2만2천명…日차별·韓무관심에 유골반환 ‘난항’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남쪽 오키나와(沖繩)현에는 일제 강점기 말 수천명의 조선인들이 징병 혹은 징용을 당해 끌려왔다가 미군과 제국주의 일본군 사이의 격전이 펼쳐지던 전장에서 숨졌다.

이렇게 억울하게 타향에서 숨을 거둔 조선인들은 넋이라도 위로를 받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을 만나지 못한 채 여전히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오키나와 뿐 아니다. 남태평양에서, 동남아시아의 어느 섬에서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은 최소 2만2천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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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동원을 위한 ‘징병적령자기념촬영’
(서울=연합뉴스)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강제동원 피해자 김갑배씨로부터 기증받은 군인동원 증빙사진. 사진 아랫부분에 ‘징병적령자기념촬영’이라는 설명과 1944년(쇼와<昭和> 19년) 5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사진 아래 적혀 있다. 2015.9.13 <<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제공 >>” [email protected]

타국에 묻힌 채 이름없는 유골로 남아있는 이들을 조국과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기 위한 노력이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지만, 일본 정부의 차별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와 민족문제연구소,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는 8일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2차대전 당시 전몰자의 유골을 국가 차원에서 발굴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해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 작업을 해 유골을 유족에게 인도하고 있지만, 전쟁 중 자국민으로 간주했던 조선인은 그 대상에서 뺀 것이다.

이들 단체가 일본 정부에 한국인 전사자 유골을 찾도록 나서라고 계속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지만, 이후 사태는 진전을 보지 못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 정부가 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 않았고, 일본 정부는 이를 핑계로 계속 한국인 유골을 수집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가 이처럼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유골이라도 가까이 모시려던 유족들 중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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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3년 조선징병독본


또다른 문제는 일본 정부가 일본인 유족들의 요청사항이라며 주인을 찾지 못한 유골들을 소각 처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유골이 소각되면 DNA 대조가 불가능해져 뒤늦게라도 조선인 전몰자들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사라지게 된다.

보추협은 이날 ▲ 유골 소각을 중단할 것 ▲ 유골 반환에 재일 한국인과 조선인의 신청을 인정할 것 ▲ 유골에 대해 DNA 감정과 함께 ‘안정동위체’ 감정을 실시할 것 등 내용으로 하는 요청서를 일본 정부의 담당 부처인 후생노동성에 전달할 계획이다.

요청서의 내용 중 ‘안정동위체’ 감정은 한국 정부가 한국전쟁 전사자 유골의 신원 확인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다.

유골에는 각 나라와 지방마다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지질학적 특성, 즉 ‘화학적 지문’이 남아있는데, ‘방사기원동위원소’를 활용해 유골이 어디서 온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활용하면 유족의 DNA 정보 수집 없이 유골만 가지고도 한반도 출신인지 확인하는 게 가능하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씌여진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보추협은 요청서에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을 확인해 가족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고 명시하기도 했지만, 향후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에 ‘구체적인 제안’을 하는 등 유골 반환을 위해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방관하던 한국 정부는 새정부가 들어선 뒤 작년 연말 방일한 강경화 외교장관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유골 봉환 문제에 대한 실무 논의를 가속화하겠다”고 말했을 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담당 부처인 행정안전부는 매년 유골과의 대조를 위해 한국 유족들의 DNA를 검사하기 위한 비용을 부처 차원의 예산에 넣었지만, 예산 관련 부처와의 협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이는 새 정부가 들어선 뒤 확정된 올해 예산에서도 마찬가지다.

▲ 44년 4월 일제에 강제 징집돼 멀리 동남아시아 옛 버마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 사진 아랫부분에 `최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란 글귀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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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8>연합뉴스

☞기사원문: 억울하게 죽었는데 묻힌곳 몰라…죽어도 눈못감는 조선인 전몰자

목, 2018/02/0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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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시민활동가 우에다 게이시…”日정부 협조 답변 끌어냈는데 韓정부는 ‘침묵'”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같은 일본인이 나서서 기껏 일본 정부에 협조하겠다는 답변을 이끌어냈는데, 왜 한국 정부는 침묵만 하는 건가요?”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0) 씨는 8일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안간다”는 말을 반복했다.

일본 오사카(大阪)부 사카이(堺)시 지방 공무원이기도 한 그는 태평양전쟁에 끌려가 숨진 조선인들의 유골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는 일본인이다.

조선인 유골반환 운동 펼치는 日 시민 우에다 게이시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 반환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곁으로 연락회’의 활동가 우에다 게이시(上田慶司·60) 씨. 2018.2.8 [email protected]

휴가를 쪼개 도쿄를 오가며 관할 부처인 후생노동성 관료나 정치인들과 만나 ‘로비’를 펼치던 그는 2016년 10월 조선인 전몰자 유골 반환을 향한 중요한 성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3월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유골을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작업을 벌이기로 하면서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를 비롯한 일본 시민사회 활동가들과 한국 시민단체가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정부가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끌어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에다 씨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후 한국 정부의 ‘침묵’에 대해서다.

박근혜 정부는 한국 정부에 참가를 제안한 일본 정부의 답변을 모른척했고, 작년 출범한 문재인 정부도 구체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전몰자의 유족들은 고령으로 한명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우에다 씨는 “한국 정부가 일단 제안을 해야 한다”며 “한국 정부의 침묵은 ‘제안을 하라’고 말했으니 할 일을 했다고 핑계대는 일본 정부를 도와주는 꼴”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 부산 동래구청에 접수된 일제때 만주지역 일본군으로 강제징병된 것으로 추정되는 225명의 명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그는 한국 정부가 6.25 전쟁 당시 숨진 미국인 유해 발굴에 나서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유골을 수습하면서 자기 나라의 사람들의 유골에 대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정부가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다시 사흘간의 휴가를 얻어 도쿄에 상경해 이날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 민족문제연구소 등 한국 시민단체들과 함께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집회를 열고 일본 후생노동성에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한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씌여진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우에다 씨가 조선인 전몰자 유골의 반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모 혹은 형제의 유골을 한국에 모시지 않으면 마음 편히 죽을 수 없다”는 한국인 유족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면 일본이 계속 미움을 사게 된다”는 생각에 일본에 소송을 제기한 징용 피해자들을 돕던 그는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지 못한 유족들의 한(恨)을 알게 된 뒤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을 가족들의 곁으로 보내주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그는 “한국 정부가 유골반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는 것 같다”며 “제발 일단 유골을 반환해달라고 제안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만약 일본 정부가 말을 바꾸더라도 내가 ‘약속을 지켜라’고 따질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2018-02-08> 연합뉴스

☞기사원문: “日정부에 조선인 유골반환 요청않는 韓정부, 도저히 이해 안가”

목, 2018/02/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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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연구회, 역사문제 연구소 등 14개 학술단체 회원들이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적극 가담한 정부기관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열고 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에 가담한 정부기관과 정부출연기관에 대한 감사를 청구했다.

8일 한국사연구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고대사학회·역사문제연구소 등 14개 역사 관련 학회와 연구소 회원들은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청구서를 제출했다. 학술단체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촛불 민심이 선정한 적폐 가운데 하나”라며 “국정화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세력의 불법과 비리를 밝히고 책임자를 단호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단체들은 또 “감사 청구 대상인 교육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연구재단,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정권의 충견(忠犬)이 되어 주권자인 국민이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고 사회정의를 유린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아울러 “박근혜 정부의 교육부는 특정 인물과 기관에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거액의 연구비를 지원하거나 우수한 평가를 받던 연구사업을 좌초시켰다”며 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요구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에는 학자와 일반 시민 494명이 참여했다.

김유진 기자 [email protected]

<2018-02-08> 경향신문

☞기사원문: 14개 학술단체,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

※관련기사

스1: 역사단체 “국정교과서 가담 정부기관 비리의혹 감사해야”

연합뉴스: 5개 역사학회 “역사교과서 국정화 감사 청구”

목, 2018/02/0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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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내일을 여는 역사 ‘역적’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시즌2부터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민TV가 함께합니다.

국민TV 채널에서는 팟캐스트 역적을 영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국민TV : https://www.youtube.com/watch?v=JC-s0…

 

금, 2018/02/0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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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일제강점기 때 전쟁에 강제로 동원됐던 조선인들의 유골이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유골 발굴 사업 대상에서 조선인은 빼놓았기 때문인데 우리 정부도 사실상 손 놓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윤설영 특파원입니다.



[기자]

태평양전쟁 말기, 남태평양 마셜군도에는 조선인 1000여명이 강제동원됐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전장에서, 혹은 보급이 끊겨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 전몰자의 유골은 최소 22,000구로 추정됩니다.

일본 정부는 2016년 관련법을 만들며 유골발굴 사업에서 조선인을 대상자에서 제외했습니다.

심지어 신원이 확인 안되면 유골을 소각하고 있습니다.

조선인일 가능성이 있는 유골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일시민단체로 구성된 전몰자유골귀환 추진 모임이 오늘(8일) 일본 정부에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습니다.

[김영환/민족문제연구소 팀장 : 이 문제는 정치적인 협의대상이 아니라 인도적 입장에서 일본 정부 스스로 해결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일본의 조선인 차별에도 한국정부는 일본에 적절한 조치를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면제공 : 국사편찬위·미국기록관리청)

<2018-02-09> JTBC

☞기사원문: 일, 전몰자 유골 발굴서 ‘조선인 차별’…시민단체 “반환해야”

※관련기사

☞한겨레: “한국인 유골 반환 한국 정부가 나서달라”

연합뉴스: 억울하게 죽었는데 묻힌곳 몰라…죽어도 눈못감는 조선인 전몰자

연합뉴스: “日정부에 조선인 유골반환 요청않는 韓정부, 도저히 이해 안가”

금, 2018/02/0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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