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콘텐츠로 건너뛰기

중미 무역전쟁의 원인

지역

중미 무역전쟁의 원인

익명 (미확인) | 금, 2018/10/05- 11:00

현재 중미 간 무역전쟁이 한창이다. 미국은 1차로 지난 7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총 50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산 수입품에 추징관세를 부과한데 이어, 최근 다시 2,000여억 달러에 대한 추가적인 관세를 부과하였다. 중국도 이에 맞서 미국산 제품에 대해 상응한 보복관세를 매김으로써 맞대응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제 누구의 눈에도 양국이 전면적인 무역전쟁에 돌입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현재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는 G2 두 나라 간의 무역전쟁은 분명 국제질서 전반과 한반도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핵무기의 존재 때문에 강대국 간의 갈등이 ‘전쟁’으로 전면화할 수 없는 오늘날 조건에서, 이렇듯 거의 전 산업에 걸친 대규모의 ‘전면적 무역전은 전쟁을 제외한 강대국 간 갈등의 최고 표현 형식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열강들은 먼저 자신의 세력권을 배타적으로 ‘블럭화’ 하였는데, 이 같은 보호무역을 실시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면 전쟁이 시작되었다.

칼럼_181005 바이두
사진: 바이두

그렇다면 이렇듯 양국 간에 무역전이 전면화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 금번 무역전쟁은 오바마정권 때 본격화한 ‘아시아 회귀전략’으로 대표되는 대중국 억제전략의 연장이자, 그 새로운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바마정부의 ‘아시아회귀전략’ 은 처음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한 ‘대리전적 갈등’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당시 미국은 필리핀을 앞세우고,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역내 관련국들의 권리주장을 적극 부추기면서 그 배후에서 이들을 지원하는 형국을 취하였다. 이 단계는 필리핀정부의 국제중재법원에의 제소가 승소판결을 받은 2016년7월에 정점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기세가 누그러지면서, 특히 당해 말 실시된 필리핀 대선에서 아키노정부를 잇는 친미파가 정권을 상실하고 현재의 비교적 자주적이며 친중국 성향의 두테르테 신정부가 탄생함으로써 ,이 단계에 있어 미국의 전략은 거의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남중국해 카드가 실패로 끝나면서 미국은 할 수 없이 새로운 전장을 물색하게 된다. 이 경우 미국에게 남겨진 것은 ‘대만’ 과 ‘무역전쟁’ 두 개의 카드라 할 수 있다. 그중 대만 카드는 자칫 중미관계의 근저를 뒤 흔들면서 진짜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카드이기에 함부로 사용할 수 없다. 예컨대, 대만독립파인 현 민진당 정부가 미국의 지원을 믿고 진짜로 독립을 선언할 경우, 중국은 ‘반국가분열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대만을 무력통일하게 된다. 그럴 경우 미국의 입장은 매우 난처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트럼프정부로서도 대만카드에 대해선 아직까진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무역전쟁’이 중미 대결의 제2단계 주요형식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둘째로, 미국 내부의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대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로부터 지금의 중미대결이 ‘무역전쟁’이라는 형식을 빌려 표출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문제들, 예컨대 미국이 자신의 동맹국으로까지 무역전을 확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도 이해할 수 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는 미국의 경우 내적 연관을 갖고 있다. 이들은 ‘쌍둥이 적자’로 일컬어지는 대단히 미국적인 현상인데, 1980년대 중반 레이건정부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쌍둥이 적자’ 가운데 발단은 ‘재정적자’라 할 수 있다. 즉,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미국정부가 달러 발행을 남발하게 되고, 그 다음 증가된 달러를 가지고 국내의 공급부족에 따른 물품 결핍을 해외수입을 통해 메우다 보니 무역적자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세계 기축화폐인 달러를 보유한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참고로 미국의 재정적자는 아래 표에서 보듯 현재 이미 GDP의 130%에 육박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나라 같으면 파산선고를 해야 할 수준이다.

칼럼_181005(1)
출처: 한국 국가통계포털 (KOSIS)

어떻든 이 같은 재정적자로 인해 야기된 ‘무역적자’는 최종적으로 국내의 산업공동화고용문제를 야기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통치세력으로서는 언제까지나 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재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 기층 대중들의 불만이 이미 위험수위에 이르러 미국사회 불안의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정작 이 같은 대중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등장하였기 때문에,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고 차기 재선을 노리고 있는 그로선 어떻게든 일자리문제에 있어 내세울 만한 업적을 만들어야 만하는 처지이다. 그를 위한 좋은 소재가 바로 타국과의 무역 분쟁을 이슈화 하는 것이다. 트럼프정부는 미국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거대한 무역적자가 바로 중국을 비롯한 대미 흑자국가들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들로부터의 수입을 규제함을 통해 국내 산업과 일자리를 보호하겠다는 낡은 공약을 내걸고 있다.

마지막으로, 트럼프라는 ‘우연적 요소’ 역시 간과될 수 없다. 사실 앞서 열거한 두 가지 요인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트럼프이기 때문이다. 그간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세계 각국의 개방화와 지구화시대의 경제일체화를 선도하여 왔다. 이처럼 시대적 흐름을 이끌어 왔기에 미국은 탈냉전 이후의 지구화시대에 있어 패권국가로서의 지위와 리더십을 지금까지 어느 정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앞서 쌍둥이 적자와 관련된 부분은 사실상 미국에게 ‘보호무역주의’로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비록 유일패권을 노리는 미국에 있어 대중국 억제전략이 시급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그간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면서까지 지구화시대에 역행하는 보호무역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앞뒤가 맞지 않다.

이 같은 상황에서 워싱턴 정가의 정통노선과 이질적인 트럼프의 등장은 얼마간 이 같은 모순을 완화시켜 줄 수 있다. 트럼프는 이 경우 하나의 ‘우연적’ 사건으로 간주될 것이며, 미국 전략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일종의 절충적 해결방안으로 치부되게 될 것이다. 사실 트럼프 자신이 매우 모순적인 존재이다. 그가 이끄는 행정부는 얼핏 보아도 상호 충돌하는 정책들로 가득 차 있다. 예컨대, 한편에선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국내 일자리 창출을 위해 동맹국들과 얼굴을 붉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같은 포퓰리즘적 국수주의 정책을 미국 내에선 ‘신고립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최근 오바마정부가 어렵사리 성사시킨 이란과의 협정을 파기하면서까지 중동에 대한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강력한 미국’ 노선의 관철을 위해 군비를 대폭 증강하는 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트럼프정부가 여전히 세계 패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트럼프의 돌출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개성’은 워싱턴의 정통엘리트들을 한편에선 골치 아프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의 ‘파격’과 ‘돌발성’은 미국의 서로 다른 전략 목표들 간의 모순을 은폐시켜 준다.

우리는 이상에서 금번 중미 간 무역전쟁이 기존의 대중국 억제전략의 한 단계 발전이자 ‘쌍둥이 적자’의 누적과 관련되어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와 동시에 새로 등장한 트럼프정부의 독자적인 경제·정치 정책이라는 우연적 요소 역시 작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민들의 의견

댓글 달기

Plain text

  • 웹 페이지 주소 및 이메일 주소는 자동으로 링크로 전환됩니다.
  • 줄과 단락은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 사용할 수 있는 HTML 태그: <a href hreflang> <em> <strong> <cite> <blockquote cite> <code> <ul type> <ol start type> <li> <dl> <dt> <dd>
이미지
무제한 수의 파일을 이 필드에 업로드할 수 있습니다.
50 MB 한계입니다.
허용된 유형: png gif jpg jpeg.
Enter the YouTube URL. Valid URL formats include: http://www.youtube.com/watch?v=1SqBdS0XkV4 and http://youtu.be/1SqBdS0XkV4.
CAPTCHA
스펨 사용자 차단 질문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것은 엄동설한 추위에도 굴하지 않고 굳굳히 광장을 지켜냈던 촛불시민들이었다. 하지만 그 항쟁의 과실은 고스란히 야당 정치세력에게 돌아갔다. 이후 시민들에게는 단지 선거 당일의 투표와 자신들에 대한 지지 그리고 상대당에 대한 반대만이 요구되었을 뿐, 더 이상의 어떠한 정치적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대의민주주의는 요술방망이였고, 이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정당’만 쥐고 있으면 누가 싸웠든 누구의 희생으로 획득되었든 권력은 언제나 그리고 철저하게 그들의 소유물이었다.

동지는 간 곳 없고, 탄식만 남았다.

 

‘대의 원리’에 근거하여 대표자만이 정책결정 권한을 독점한다

흔히 대의제는 민주주의와 등치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말하면 대의제는 하나의 통치기구의 구성 원리, 또는 국가의 의사 결정 원리로서 단지 민주주의의 하위 체계일 뿐이다. 그것은 권력분립, 선거제도, 정부 형태, 지방자치제도 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여러 형식 원리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용어법상 직접 민주주의는 직접 결정방식, 대의제의 간접 민주주의는 간접 결정방식이라고 불러야 정확하다.

한편 의회민주주의란 의회 중심의 통치 질서에서 파악되는 것으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정부 형태와 관련된 개념이며, 이는 단지 대의제의 한 형식에 속할 뿐이다.

특히 선거로 선출된 의원은 특정 선거구민이 아니라 전체 국민을 대표하고 전체적인 공공복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대의제의 이론은 명령 위임을 부정하고 자유 위임을 주창하고 있는 바, 이는 시민 세력을 배제시키면서 그와 유리되어 결국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해왔다.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프랑스와 영국 대의제의 역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대의제라는 간접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고착되었다. 부르주아 세력은 국민세력을 동원하여 군주를 타도한 뒤 자신들의 정파 간의 무력적 권력 투쟁을 선거를 통한 정당 간의 권력 교대 혹은 경쟁이라는 ‘대의제’의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기제를 창출해낸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의원)는 특정 선거민이 아니라 ‘추상적으로’ 전체 국민을 위한 전체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국민에 책임을 지는 명령 위임을 배제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명령 위임을 배제시킨 바로 그 순간 선출된 대표자는 국민에 봉사하는 위치로부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위치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대표자의 결정은 언제나 ‘전체 국민’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전체 국민’이라는 실체가 없는 관념적 존재일 뿐이다.

대의 관계에서 대표되는 실체는 없으며 대표하는 행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의 관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국민이 대표자를 선출하는 행위와 대표자가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행위뿐이다. 그리고 대표자의 이러한 행위는 ‘전체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그리하여 국민을 구속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의제에서의 대표자란 더 이상 선거민의 단순한 대변자가 아니며 대리인(Agent)이나 수임자(Kommissar)도 아니다. 그는 ‘전체 국민’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언제나 ‘공명정대’하게 행동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그의 결정과 판단에 영향을 주는 어떠한 힘으로부터도 독립되어야 한다고 주장된다. 물론 이러한 논리의 배경에는 탁월한 인물이 무지몽매한 국민의 의사나 명령에 따른다는 것은 당치도 않다는 우월적 의식이 깔려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국민들은 오직 자신들을 선출할 ‘권리’ 혹은 ‘자유’가 있을 뿐 통치는 자신들처럼 탁월하고 고귀한 사람들만이 담당할 고유 영역이다.

역사적으로 시민혁명은 부르주아혁명으로 마무리되었고 시민 세력은 탄압을 받아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의제는 굳건한 통치원리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국민이 직접적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대표자를 통하여 간접적으로만 정치적 결정에 참여하며, 따라서 당연히 통치자와 피치자가 별개의 존재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통치자와 피치자가 구별된다는 사실은 결국 대의제가 국민의 자기 통치를 통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제는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대의 기관을 통한 통치를 의미한다.

이러한 대의제에서 무엇보다도 대표자의 독립성 보장이 강조된다. 왜냐하면 대표자는 국가의사 결정에 있어서 항상 피치자(被治者)보다 탁월한 능력이 있으므로 대표자가 피치자로부터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대표자의 올바른 결정에 장애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민의 특수 이익보다는 일반 이익 즉, 전체 이익이 존중되며, 무엇이 전체 이익인가에 대해서는 오직 대표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대표자에 대한 시민의 통제는 철저하게 관심 밖의 문제로 전락된다. 대중이란 기껏 무지몽매한 존재이므로 애초부터 일체의 정치적 권한을 줄 필요가 없거나 혹은 체제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 어떠한 정치참여의 기회도 제공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하여 대의제는 이른바 ‘대의 원리’에 근거하여 시민을 정치적 권한으로부터 배제시킨 채 대표자만이 정책 결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게 됨으로써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은 명망가인 대표자에게 독점되었다. 결국 이러한 명망가 중심의 이른바 ‘명망가(혹은 명사, 名士) 민주주의’의 통치가 대의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명망가에 독점된 이러한 배타적 결정권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이익에 기초하여 행사되기보다는 대표자 개인의 시각에서 그리고 자신들과 관련된 이익에 의하여 행사된다. 나아가 이들 대표자는 반드시 뛰어난 자질에 의하여 대표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재산과 사회적 영향력 혹은 이른바 ‘이너서클’의 인간관계 그리고 그를 앞세운 배후 세력의 사회경제적인 힘에 의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 대의제가 지니는 이러한 성격은 과연 대의제가 사회 구성원 전체 이익의 공공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가, 즉 대의제 하에서 특수 기득권의 부분 이익(특수 이익)의 지배로부터 공적(公的) 업무의 공공성 보장이 가능한가라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결국 대의제란 대표자의 활동에 따르는 위험성에 대한 담보가 오직 대표자의 양심과 인격에만 맡겨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경우 그 대표자의 양심과 인격은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이익 추구로 변질된다(여기에는 선거와 당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갖가지 정치공학도 당연히 포함된다). 대의제가 지니는 근본적인 제도적 허약성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소는 대의제 하의 국민은 대표자를 선출할 때만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노예상태로 전락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었다.

 

직접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다

그러므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공공선(公共善)이나 일반 의사의 지배가 아니라 정당 또는 정치인의 ‘부분 의사’가 지배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다. 다시 말하면, 현대 자유민주주의는 특정 집단의 이익과 가치가 특정 정당에 의하여 대표되는, 즉 ‘부분 의사’가 대표되는 정치 제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최소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 개념은 민주주의 가치를 축소시켰으며,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결코 보장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시민의 정치 참여에 의하여 자유, 평등, 정의라는 기본 가치를 실현시키고 시민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시민의 통치 형태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정신을 정확하게 실현하는 방식은 바로 직접 민주주의이다.

화, 2021/01/19- 19:14
3
0

국가의 흥망성쇠와 국민통합

새해 벽두에 민주당의 이낙연 대표는 뜬금없이 사면론을 주장해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면론이 자신의 신념이라면서 국민통합을 위해 사면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국민통합이란 정략적 이익,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얄팍한 책략이거나 기득권 세력끼리의 야합일 뿐 진정한 국민통합과는 인연이 없다.

심리연구소 ‘함께’ 김태형 소장

정치권이나 언론 등에 의해서 국민통합이라는 말이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오남용되고 있지만, 국민통합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주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바로 국민통합이다. 국민이 통합되어 있는 나라는 발전하고 흥하지만 국민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는 쇠퇴하고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장구한 인류역사를 통해 확증된 진리이다.

국민이 통합되어 있지 않으면 국가적 목표를 세울 수도 없고 그런 목표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의 협조를 구할 수 없다. 작년부터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사태는 국민통합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고 있다. 전쟁과 같은 사회적 위기 극복, 국가적 방역전쟁의 성공 등은 국민들이 얼마나 일치단결해 국가적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한 마디로 국민통합의 정도가 국가의 위기 극복능력이나 발전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이전 시기로 돌아간 미국

오늘날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민통합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자본주의 진영의 대장 노릇을 해온 미국은 오늘날 국민들이 단순히 분열되는 것을 넘어서서 국민들 사이에 적대감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2020년의 대통령 선거는 미국이 심리적인 차원에서는 이미 남북전쟁 이전의 시기로 회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전형적인 1대 99의 사회, 즉 불평등 수준이 대단히 높은 나라이다. 심각한 불평등, 양극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와 저항은 2010년대에 계급투쟁의 성격을 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운동으로 폭발했다. 만일 이 운동이 성공했다면 미국이 지금처럼 분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 저항운동은 실패했고 미국 사회는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중의 하나가 바로 트럼프 현상이다.

삶의 벼랑 끝에 몰리고 사분오열된 미국인들, 특히 하층 백인들은 힘을 합쳐 1%의 부자들에게 저항하는 대신 이주민, 유색인종 등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미워하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과거에 사회 모순과 패전으로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분노를 유대인에게 퍼부었던 것처럼 미국인들은 패거리를 나누어 자신들의 분노를 상대 패거리에게 퍼붓게 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단순히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분열되는 수준을 넘어서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적대시하며 나아가 타도하려고 하는, 국민통합과는 아득히 거리가 먼 나라로 전락했다. 제아무리 GDP가 높고 군사무기가 우수하더라도 국민통합에 성공하지 못한 국가는 내부모순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설사 외부적 위협이 없더라도 국민들 사이의 분열과 적대로 인해 급격히 쇠퇴몰락하게 될 것이다.

 

국민통합의 조건 : 공동의 목표

국민통합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국민통합을 목청껏 외친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통합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국민통합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국민들이 공동의 이해관계에 기초해 목표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구한말 의병전쟁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는 천민 출신의 두 주인공이 나온다. 노비 출신의 한 주인공은 양반의 폭정과 착취로 인해 미국으로 도피하여 미군 장교가 되고 백정 출신의 한 주인공은 일본으로 도피하여 칼잡이가 된다. 미군 장교가 된 주인공은 열정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양반가 출신의 애인이 자신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당신들이 되찾으려는 나라에는 나 같은 노비가 있을 곳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다르다. 평민들과 일부 양반들에게 독립은 당연히 이익이었지만 천민에게는 그렇지 않았기에 천민들은 독립운동이라는 목표를 공유하지 못한다. 만일 독립운동의 목표를 단순한 구체제의 복귀가 아니라 신분제도가 폐지된 새로운 사회 건설로 명시했다면 천민들도 기꺼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이 드라마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으면 공동의 목표를 내세울 수 없고 단결이나 통합이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려면 서로가 평등해야 한다. 불평등한 관계에 있는 양반과 노비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부분은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데 소수는 큰돈을 벌고 있다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어떤 이들은 절망하지만 어떤 이들은 만세를 부른다면, 그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는 상충될 수밖에 없고 국민통합은 요원해진다. 따라서 국민통합을 이룩하려면 일단 절대다수의 국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공동의 목표가 제시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원천적으로 일치하도록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

 

국민통합의 조건 : 심리적 동질감

국민통합이 가능하려면 또한 국민들이 서로에 대해 심리적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와 비슷한 동질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친밀감과 연대감 같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만 자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사람에 대해서는 경계심과 열등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전통적으로 노동자들이 다른 사회집단보다 단결력이 뛰어난 이유 중의 하나는 동질성이 강해서다. 물론 『풍요중독사회』에서 자세히 다뤘듯이, 요즘에는 노동자들도 다층적 위계에 편입되면서 동질성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단결력이 떨어졌다. 어쨌든 과거의 산업노동자들은 동일한 사회계급적 처지에 놓여 있었고 집단적인 노동생활 등으로 인해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리나 품성까지도 유사했다. 이렇게 노동자계급은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심리적 동질감이 특별히 강했기에 단결력이나 통합력이 우수했던 것이다.

국민들이 심리적 동질감을 느끼려면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수준이 유사해야 한다. 예를 들면 누구는 월 6~7백만 원을 버는데 누구는 월 2백만 원도 못 버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득수준이 엇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다층적 위계화에 기초하는 불평등으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동질감이 아니라 이질감이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국민통합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경제적 차이를 비롯한 국민들 사이의 각종 격차와 차이부터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

 

진정한 국민통합이란

국민통합을 이룩하기 위한 궁극적인 해법은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원천적으로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한국 사회를 평등하고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로 개혁해야 한다. 즉 근본적인 사회대개혁이 필요하다. 국민통합을 이룩하기 위한 선차적인 해법은 절대다수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공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공동의 목표는 적어도 공동의 목표를 실현할 때까지는 국민통합을 가능하게 해준다. 따라서 공동의 목표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국민통합을 이루고 그것을 계속 강화발전시켜나가면서 그다음 단계의 공동의 목표를 제시하는 식으로 사회개혁을 추진해나가야 할 것이다.

절대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공동의 목표가 없거나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외면하면서 국민통합을 외치는 것은 단순한 선거용 책략을 넘어서서 파쇼체제로 가는 지름길이다. 양반과 노비 간의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지 않은 채 양반과 노비를 통합하겠다는 것은 양반과 노비 사이의 갈등을 부인하면서 노비의 저항을 원천봉쇄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인류 앞에 연속적으로 위기가 닥쳐올 것으로 예견되고 있는 미래에는 국가의 흥망성쇠에 미치는 국민통합의 영향력이 더욱 커질 것이다. 자본주의가 한계상황에 봉착해 있는 현 시점에서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국민통합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나라들은 미국의 전철을 밟아 몰락하게 될 것이고 국민통합에 성공한 나라들이 미래를 주도하게 될 것이다.

 

김태형

목, 2021/01/28- 19:17
7
0

트럼프의 집권 4년은 세계적으로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트럼프는 미국식 대의 민주주의의 ‘완벽한’ 절차를 통하여 합법적으로 선출된, 그것도 전통에 빛나는 미국 공화당의 후보로서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권 이후 백인우월주의의 인종차별 정책과 극단적 미국 이기주의에 토대한 국제질서 부정으로 일관하면서 전 세계를 경악시켜왔다. 마침내 극우파 시위대의 의회 난입이라는 폭거는 ‘미국 자유민주주의’의 조종을 울리는 신호탄이다.

 

미국, 직접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세계적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처음 미국에 건너간 이주민들은 같이 배를 타고 와 정착한 동료들과 생활의 근거지를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곧 town이었다. 인구가 약 2천 내지 3천 명에 이르렀던 town에서 주민과 밀접한 업무는 자신들의 손에 의하여 마을집회(town-meeting)에서 직접결정 방식으로 처리되었다.

주민들이 직접 처리할 수 없는 업무는 마을에서 선출된 사람들에 의하여 처리되었는데, 그들은 주민들이 위임한 실무적인 일만 처리하였을 뿐, 공적인 일에 대한 판단은 주민들의 직접 투표로 결정하였다. town에는 주요 행정기능을 수행하는 다수의 관리들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마을집회에서 직접 선출되었고 그 공적 업무에 충실하지 못하면 책임이 뒤따랐다.

이러한 주민 자치제도는 특히 뉴잉글랜드에서 1650년에 확고하게 정착되었고, town의 독립성 역시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았다.

미국이 세계적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그 직접민주주의의 힘에 기초하고 있었다.

 

차별성 없는 미국의 두 정당, 양당제의 역설

세계적인 석학 노엄 촘스키(Noam Chomsky)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명예교수는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나눠진 미국의 정당 체제에 대하여 “기업의 이익을 대표한다는 측면에서 사실 1당 체제다”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그는 미국을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체제로 규정하면서 이러한 체제 하에서 일반 대중들은 통제당하고 주변화 한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상은 특히 미국과 같이 기업들의 주도력이 강한 사회에서 더욱 뚜렷하다면서 선거에서 홍보 대행 산업이 활개를 치는 것은 대중을 통제하고 주변화 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경제는 1970년대에 극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바로 금융화와 상품 수출이 강화되는 방향이었다. 여기에 부의 집중, 인구의 1%에 부가 몰리는 과격한 악순환을 조장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력 집중도 초래되었으며, 경제 집중을 유도하는 국가 정책들이 쏟아졌고, 그러면서 정당들은 자연스럽게 자본의 휘하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촘스키 교수는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도 별로 다르지 않다면서 미국의 차별성 없는 양당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사회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도 일찍이 “정치란 대기업들이 사회에 던진 그림자”라고 규정하고 이러한 상황은 “언론 등 정치 선동의 수단을 지휘하면서 은행과 부동산, 산업을 사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사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에 권력이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석학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Eugene Stiglitz)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미국 사회가 겉으로는 민주주의가 가장 잘 발전된 국가로서 공정한 사회의 모델로서 자부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국가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미국 의회 의원 대부분은 선출되는 순간 상위 1%의 돈으로 유지되는 상위 1%의 멤버들이 되며, 무역과 경제정책의 핵심 고위관료들은 대체로 상위 1% 출신들이다. 또한 미국의 대법원은 선거비용 지출 제한을 철폐함으로써 기업이 정부를 돈으로 움직일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고 지적하고 있다.

 

驕兵必敗, 교만한 병사는 필패한다

이제까지 미국의 양당 제도는 장기적으로 오랫동안 미국 정치의 장점으로 역할 해왔다.

하지만 그 장점은 이제 다원화되는 사회계층의 이해와 다양화되는 사회문제를 포괄해내는 데 경직성을 노정시키면서 오히려 미국 쇠퇴의 중요한 단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반면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광범한 대중에 토대한 사회(민주)당의 존재에 의하여 대중들의 이해가 보다 강력하게 정당정치에 반영됨으로써 그만큼 정치적 사회적 안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다수결의 원칙 못지않게 소수 의견에 대한 존중 역시 중요하다. 이 점에서 독일의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는 소수 정당의 존립 근거를 마련해줌으로써 사회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회의 소수 그룹을 존중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제도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는 “레이건 정부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덜 내게 하고, 군사비 등을 제외한 공공 서비스와 공공 투자를 줄였다”라며 미국 사회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레이거노믹스 시대 이래 상위 1%의 소득은 지속적으로 증가한 반면 나머지의 소득은 계속 정체되고 끔찍한 실업에 시달렸다고 비판한다. 그는 “다가올 시대의 중요한 도전은 99%의 번영을 이룩하고 그들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정치에 대한 금권의 지배는 이미 구조화되었다. 개방형 경선과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므로 특혜 정책을 위하여 돈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 대기업의 정치자금 기부가 기부 액수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 정치제도는 기업들의 로비 자금에 의하여 운용되고 있고, 이로 인하여 정작 교육, 의료, 에너지 등 대중들의 삶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경제 분야는 점점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미국이 현재 세계에서 코로나 19 환자와 사망자가 많은 나라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병필패(驕兵必敗), 건강한 신대륙의 건국 정신은 사라지고 패권국가로 너무 오래 교만하게 군림해왔다. 미국은 더 이상 아름다운 나라, 美國이 아니다. 쇠락의 추세는 비단 정치만이 아니라 그간 미국이 자랑하던 외교, 인권, 경제 그리고 팬데믹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현시되고 있다.

더 큰 비극은 바이든 정부에서도 그다지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소준섭

화, 2021/02/02- 19:44
6
0

한 나라 두 대통령 스캔들로 2019년을 뜨겁게 달군 베네수엘라 사태가 일어난 지도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국회도 아닌 광장에서 스스로 대통령으로 ‘셀프선언’한 야당 과이도 의원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일이다. 그는 2019년 1월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선에 성공한 마두로 대통령 취임식 직후 자신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물론 이는 라틴아메리카 전대미문의 정치권 ‘희극’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어설픈 시나리오와 기획,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발연기’가 그야말로 압권인 ‘작품’이었다. 국제사회를 상대로 베네수엘라 민주주의 ‘위기’라는 설정으로 일정부분 ‘흥행’을 일으키는 데는 성공을 했다. 미국이 주도하고 이에 보조를 맞춘 외신들의 호들갑스러운 ‘공모’ 덕이다.

과이도 의원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셀프임명’하자,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 열강들은 앞다퉈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발표를 쏟아냈고, 아쉽게도 한국도 그중의 하나였다. 애초부터 적법한 절차나 정당성을 상실한 이 같은 ‘선언을 위한 선언’은 그저 베네수엘라에 대한 국제사회의 ‘명분’있는 개입, 더 나아가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위한 시작이었을 뿐이다. 야당조차 국내의 제도적 장치를 통해 민주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다. 베네수엘라 야권이 지난 2년간 보여준 행보는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다.

게다가 민주적 해결이라면 대화 혹은 선거라는 장치를 통하는 것인데, 야당은 여당 지지층의 결집에 대항할 세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가 더는 해법이 되지 못했다. 야권과의 정치적 합의를 끌어내려는 마두로 정권의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야당은 합의된 대화에 불참하거나 불이행하는 방식으로 한 걸음의 진전도 허용하지 않는 전략으로 일관해왔다.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 부르주아 지배계층을 대변하는 G4의 야당 연합은 줄곧 국내적으로는 폭력적인 가두시위를 선동하고, 대외적으로는 특히 미국의 군사개입을 노골적으로 지속해서 요청해왔다. 이는 같은 해 9월 미주연합기구(OEA)의 미주상호방위조약(TIAR)을 발효, 즉 베네수엘라에 대한 군사개입을 공식화하는 수순으로까지 이어진 바 있다.

그리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난 2년간 베네수엘라 사태의 정점에 있던 자칭 베네수엘라 ‘대통령’으로 홀로 ‘군림’했던 과이도 의원의 퇴장은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우선,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277석 중 256석을 얻어 의회 권력을 다시 회복했고, 의회 권력을 통해 현 정권을 사보타지 했던 야당은 이제 국회라는 ‘합법적’인 정치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베네수엘라 야당 내에서는 물론 일반 야당 지지층 국민 사이에서도 처음부터 지지가 높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가장 큰 기반은 미국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라는 것 뿐이다. 국내 지지기반이 취약한 상태로, 명분은 고사하고 적법한 정치적 절차나 정당성 상실, 게다가 국경을 맞대고 군사적 긴장 관계에 있는 콜롬비아 마약 범죄조직과의 연루설과 불법 자금 유용 등 그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여전히 산적하다.

아래 사진[사진1]은 얼마 전 트럼프의 지지자들이 미국 의회를 ‘점령’한 일을 풍자하며 “미국의 트럼프 지지자들과 베네수엘라의 트럼프 지지자들”이라는 태그를 달고 SNS로 공유되는 사진의 일부다.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의 담을 넘는 모습과 과이도 의원이 2020년 베네수엘라 의회로 들어가기 위해 의회의 ‘담’을 넘는 모습을 포착한 사진이다.

베네수엘라에서 과이도 의원은 이미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그를 빗댄 풍자와 해악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사진1] 베네수엘라에서 공유되는 과이도와 미국을 풍자하는 SNS 캡쳐화면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2019년 국회의원 의장 임기가 끝나는 과이도 의원을 이어 새로운 의장을 선출해야 했던 2020년 초 베네수엘라 의회에서 일어난 진풍경이다. 새로운 국회의장 선출을 ‘보이컷’한 과이도 의원이 뒤늦게 의회로 진입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2019년 과이도 의원이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16년 거대 야당 연합으로 차베스 진영에서 국회 권력을 가져온 야당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즉 국회의장 자리를 주요 거대 4개 야당(G4)에서 번갈아 맏기로 하였고, 그 결과 과이도 의원 소속 정당인 민중의지(Voluntad Popular)당 차례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임기가 끝나는 2020년 1월 그는 국회의장 자리를 내놓을 생각이 없었고, 의석수 불충분이라는 핑계로 선거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소수의 과이도 지지자를 제외한 야당 연합 G4은 정의제일당(Primero Justicia)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하며, 지난 1년간 ‘명실상부’하게 두 명의 국회의장을 두는 초법적 선택을 하며, 야당의 끊임없는 자중지란이 이어졌다.

스스로 국회의장이라는 자격을 내세워 대통령으로 셀프선언하고 1년이 지났음에도 이렇다 할 정치적 ‘성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야당 내 자중지란으로 귀결되었으나, 과이도 의원의 ‘위상’에 이만저만한 생채기가 적지 않았음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과이도 의원은 베네수엘라 야권과 그 지지층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에게 쏟아진 지나친 해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는 기실 베네수엘라 사회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정치적 위상이나 헤게모니와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져 왔다. 어쩌면 베네수엘라 야당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줄곧 ‘무대’에 올랐던 그는 국제사회가 유일한 그의 관중이었을 지도 모른다.

미국의 그림자가 강력히 드리워진 베네수엘라의 주요 4대 야당 연합은 속칭 G4라 부른다. 과이도가 속한 소수정당인 민중의지당을 포함, 민주행동당, 새 시대, 정의제일당 등을 포함한 이 연합은 가장 극우적 성향의 집단이다.

한편, 과이도 의원의 소속 정당인 민중의지당의 실세는 레오폴도(Leopoldo)라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과이도 의원의 정치적 ‘멘토’이기도 하다. 차베스 사망 이후 끊이지 않았던 폭력사태(병원건물방화, 길거리 폭력시위 등)를 주도한 혐의로 기소되었고, 대법원판결에 따라 가택연금을 선고받았다. 얼마 전 일어난 군부 쿠데타에 가담한 정황이 드러나자 주베네수엘라 스페인 대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 지금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생활하고 있다.

참고로 그의 아버지 레오폴도 길(Leopoldo Gil)은 지난 2015년 스페인 국적을 취득, 현재스페인 보수정당이자 집권당인 인민당(Partido Popular)소속으로 2019년부터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과이도 의원의 대통령 ‘셀프선언’ 이후 스페인이 과이도 ‘체제’를 옹호하고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레오폴도는 법의 심판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였으나, 외신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잠시 해외로 몸을 피한 ‘애국자’인 듯 다루고 있다. 그러나, 정작 베네수엘라 국민이 궁금한 것은 그의 ‘애국행위’가 아니라, 그가 마드리드 고급 아파트에 매달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약 만유로(한화 1300만원)의 출처다.

최근 치러진 총선의 결과는 베네수엘라의 핑크빛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 막대한 자본을 가진 부르주아 자본가 계급의 야당 연합 G4의 계속되는 정치권 사보타지, 베네수엘라에 대한 미국의 병적인 집착은 바이든의 민주당이라고 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을 테니까. 상기해보면, 베네수엘라를 미국 안보의 ‘위험’으로 간주한 것은 2015년 오바마 시절의 일이다.

과이도의 등장으로 국제사회가 떠들썩할 때, 카라마스 도심의 한 공원에서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모습

지금까지 베네수엘라를 다루는 거대 자본의 미디어들은 대부분 진실보다 자극적인 소재와 왜곡된 기사를 쏟아냈다. 일부 국내 언론에서는 사실관계 파악이 아닌 외신을 번역해서 나르는 일이 전부였다.

2019년 과이도 의원의 등장으로 야단법석을 떤 것은 오히려 국제사회였을 뿐 정작 베네수엘라는 평온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베네수엘라의 변화가 이를 희망하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한, 그들의 시간은 묵묵히 그들의 편에서 흐를 것이다. 비록 국제사회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베네수엘라 민중들의 선택을 끊임없이 막아설지라도.

이제는 그만 베네수엘라 민중들에게 그들의 미래를 맡겨야 하지 않을까.

 

정이나

목, 2021/02/04- 19:12
5
0

팬데믹, 즉 세계적 유행병인 코로나19는 의심의 여지 없이 의학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처에 있어서 ‘이동량’이나 ‘사회적 거리두기’, ‘사적 모임 제한’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이 또한 사회학적 문제임을 알게 된다. ‘사회학적’이라 함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어떤 무엇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발병 및 확산 초기에 그 ‘어떤 무엇’은 사회적 심성 또는 지배적 규범의 문제로 해석되었다. 그리하여 한국, 대만, 싱가포르 등 유교 문화권 국가의 ‘순종적’ 국민 덕에 방역이 잘 된다고 해석되었다. 물론 신천지 등 일부 개신교 집단에서 전체 사회보다 자기 집단에 ‘순종적’인 문화가 방역에 가장 큰 장애가 됨이 곧 밝혀졌지만 말이다. 이처럼 사회적 관계의 질서에서 ‘집단도덕’이 핵심이라고 보는 견해는 근현대 주류 사회학의 고전적인 주장이다.

다음으로, 그 사회적인 ‘어떤 무엇’은 공공의료제도라는 ‘제도’의 문제로 이해되었다. 특히 한 국제기관에서 독일의 공공의료제도를 높이 평가하여 한국보다 방역에 앞서 있다고 평가하면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내 공공의료제도의 문제가 드러나면서 그와 같은 의견이 대두했다. 그러나 스페인 등 여타 유럽 국가의 환자까지 실어와 병상을 제공했던 독일에서 코로나19 방역이 실패하여 사회폐쇄가 연장되면서, 이런 관점은 설득력을 잃었다. 또 공공제도가 잘 갖춰진 대표적 북유럽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 난데없는 ‘집단면역 실험’을 했다가 실패하면서, 단순히 ‘제도’만의 문제가 아님이 명백해졌다. 이렇게 의료제도를 문제의 핵심으로 보는 경우는 의료사회학적인 입장이다.

최근 들어 코로나19의 감염 동선을 추적하기 어려운 경우가 잦아지면서, 사회적인 ‘어떤 무엇’의 핵심은 역학조사 및 그와 관련된 개인정보 수집의 문제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회폐쇄 여부, 즉 개인들의 이동량 통제 문제로 넘어갔다. 결국 3차 유행에 와서는, 역학조사 중심의 초기 감염병 대응에서 실패하여 익명적, 집단적 자유제한 정책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던 유럽과 유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서구와의 차이가 나타났다. 서구에서는 사회폐쇄에도 불구하고 이동량이 크게 줄지 않아서, 젊은이들의 파티와 사적 모임에서의 감염이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리하여 학교나 직장과 관련된 이동량까지 줄여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이 이동량 감소로 상당히 잘 연결되는 결과를 보여왔다.

지금까지 경과를 보면, 결국 사회적인 ‘어떤 무엇’에서의 핵심은 ‘사회적 거리’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단순히 정부 방침에 잘 따라주는 ‘순종적’ 심성의 문제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볼 것인지가 핵심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코로나19를 통해 드러난 또 다른 ‘사회적 거리’의 표현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택배 노동자의 과로, 아파트 경비원 폭행 주민, 정인이 사건 등의 아동학대 부모에 대한 분노를 통해 나타났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에 대한 공감은 인간적 공감의 형태로만 표출될 뿐, 과로를 강요하는 산업의 이익분배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독일에서 간호 및 돌봄 노동자의 처우개선에 대한 문제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집단적 목소리로 표현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아파트 경비원 폭행에 대한 분노 역시 노동권의 문제보다는 개인 인권의 측면에서 공감대가 확대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살인과 구별되기 힘든 양상의 아동학대에 대한 분노는 단순히 인격적 분노가 아니라 제도의 작동불능에 대한 분노이기도 했다. 아동학대 신고 절차를 제대로 따른 행위자가 시민들 개인에 한정되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경찰이나 입양기관과 같은 조직적 행위자는 모두 책임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학대 부모에 대한 인간적 분노 못지않게 컸다. 그러나 정인이에 대한 젊은 부모들의 진정성 있는 추모의 물결은, 그 이전의 세대들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전경이기도 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정인이에 대한 추모가 ‘남에 대한 추모’라는 거리감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거리감의 변화

택배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학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2차 집단’ 관계 속에서 개인들이 느끼는 ‘사회적 거리감’이 매우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인들은 ‘남’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다. 과거 ‘정’은 인연 맺기와 유관한 친밀감이다. 일회적이거나 익명적인 성격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공감이 아니라, 인연 지속의 기대감 속에서 호혜적인 감정을 교류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사회학에서 말하는 ‘1차 집단’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택배 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아동학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은 ‘연고가 배제된’ 공감으로서, 사회학에서 말하는 ‘2차 집단’적인 관계에 가깝다. 주류 사회학에서는 ‘2차 집단’ 관계의 핵심은 이익이라고 보았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결합한 ‘차갑고’ ‘계산적인’ 관계라고 규정했다. 물론 거기에도 호혜성이 성립하나, 그것은 ‘인격적 친밀감’이 아니라 ‘공적 의무’에 기초한다. 즉 만일 공감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한층 추상적인 시민적 공감이다.

서구에서는 그런 시민적 공감이 공적 제도화를 낳았고,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다양한 절차들이 확립되었다. 즉 서구에서 제도화는 곧 규범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실현 역시 의미한다. 그런데 택배 노동자나 아파트 경비원의 경우를 통해 보이듯이, 한국에서 공적 공감은 제도화로 쉽게 연결되지 못한다. 공감되는 개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 자체가 기대되기 어려운 현실이다. 제도화가 어려운 이유는 규범이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고용자의 산업 논리가 더 우선인지, 아니면 피고용자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가 사회적으로 논의된 적조차 없어서 규범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규범의 상태이다. 또는 정인이 사건에서처럼, 제도화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그 제도는 작동하지 않는다. ‘남’에게 공감하는 개인들은 제도를 따름으로써 그 규범에 동조하지만, 제도를 지켜야 할 권력기관은 제도를 무시할 만큼 규범에 무지한 것이다.

시민 개인의 시민적 공감과 제도 규범 간의 이러한 괴리는, 아마도 민주주의 절차를 권위적으로 제도화한 한국 정치사와 관련이 깊을 것이다. 즉 제도화를 위해서는 대표된 권력이 필요하고, 권력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대표자에게 이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서는 이런 중간 과정이 아예 생략되거나 아니면 단순 절차적으로만 적용되어왔다. 권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소유대상이 되어 그 자체가 이익으로서 분배된다. 권력을 대표자에게 이양하는 시민들의 마음이 권력 대표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으므로, 개인들은 추상적인 시민적 공감의 수준을 넘어 사무치게 인격적인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제도화가 개인들의 마음과 괴리되어 있는 만큼, 그리하여 제도화가 규범의 표현이 아니라 권력의 표현이 되고, 그리하여 사회적 규범이 무엇인지 확인이 안 되는데 개인들의 감정만 확인되는 상태에서, ‘남’에 대한 격한 인격적 공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내 집단’과 ‘남의 집단’을 엄격하게 나누어 이질적으로 집단 관계를 규정하던 고전적인 사회적 관계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오히려 ‘나’, ‘공감되는 다른 개인’, ‘권력기관’으로 상호작용의 대상을 삼분하여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나’를 포함한 ‘개인’과 ‘권력기관’ 간의 권력 비대칭성을 뼈저리게 인식하는 마음의 상태가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한다. 말하자면 시민 개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권력에서 소외된’ 남들에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공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한국에서의 방역 성공은 권력기관에 대한 이러한 불신과 쌍을 이루는 듯이 보인다.

주권자로서 미약한 개인의 처지에서 신뢰할 수 없는 권력기관을 마주하여, 스스로 솔선수범해서 방역의 최전선에 있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한국에서 지금까지 방역이 성공했던 이유가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렇게 성공한 방역 역시 서구의 방역 못지않게 위태로울 수 있다. 서구의 경우 개인 주권자 의식이 강한 개인들이 정부의 방역 정책을 불신하여 방역이 어렵다면, 한국에서는 제도적 권리가 약한 개인들이 최악의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방역 정책을 따르기 때문이다. 시민 개인들의 이런 자발적 동원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헌신적인 솔선수범이 코로나19 이후의 한국 사회에서 ‘제도화한 권리’의 형태로 보상받아야 한다. 현재의 방역 성공은 한국의 의료제도, 경제 제도, 이익분배 방식 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스스로 솔선수범하고 타인에게 마음 깊이 공감하여 ‘시민적 동원’의 최고치를 만들어낸, ‘좋은 시민’들 덕이기 때문이다.

 

홍찬숙

화, 2021/02/09- 20:31
2
0

호주와 인도 일본 그리고 미합중국은 완벽하게 중국에 대항하는 나름대로 근거를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굴기하는 중국과 공존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위 Quad라고 알려진 방식의 동맹에 4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참여하여 지역안보에 협력하는 위험회피hedge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적으로 합법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2가지 이유로 Ouad가 아시아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는데, 첫째는 4자가 서로 다른 지정학적 이해를 갖고 있는 취약성이며, 둘째는 보다 근본적인 것으로 이들은 잘못된 게임을 벌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시아에서 파워게임의 핵심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에 달려 있다.

우선 호주가 가장 취약하며 경제에 대한 중국의존도가 매우 높다. 호주는 지난 수십 년간 불황을 모르는 안정적 번영을 자랑하여 왔는데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호주경제가 중국과 기능적으로 같은 지역에 속하여 있다는 지정학적 조건이 있다. 2018-2019년의 통계만 보아도, 호주의 수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33% 이상을 차지하는데 반하여 미합중국은 겨우 5%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작년COVID-19에 대한 중국의 관련성 여부를 국제사회에 공개적으로 요구함으로써 면전에서 중국의 따귀를 때린 호주의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설사 혐의가 있더라도 이를 신중하게 비공개적이며 개별적으로 접근했어야 한다. 이제 호주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처지가 되었다. 현재 모든 아시아 국가들이 중국과 호주의 대결상황에서 과연 누가 궁지에 몰릴 것인지 주의깊게 지켜보는 국면이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보면, 결론은 이미 나와 있다. 중국이 궁지에 몰리면, 아시아의 국가들이 호주의 행적을 따라 중국을 경멸할 것이고,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호주 자신도 함께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중국은 차분히 기다릴 여유가 있다. 호주의 賢者인 Hugh White가 지적하였듯이, Canberrra(호주의 행정수도)가 처한 어려움은 현실적으로 중국이 게임의 모든 패를 한 손에 쥐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관계에서의 파워는 자신의 최소희생으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국가가 갖게 된다.

중국이 호주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파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호주의 현직 수상인 Scott Morrison과 동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2019년 11월, 전직 수상이었던 Paul Keating은 Quad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호주 국민들을 향해 심각하게 경고한 바 있다. “광의적으로 표현하자면, Quad는 출범조차 못하고 있다”고 그는 호주의 한 전략포럼에서 지적했다. “인도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접근에 대해 이중적인 입장을 갖고 있으며, 중국에게 실제로 위협을 가하는 행동을 회피할hedging 것이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 일본 간의 화해분위기 역시 또 다른 증거이다…. 일본은 중국에 대한 봉쇄의 실행프로그램에 여전히 서명하지 않고 있다.”

비록 최근의 국경분쟁으로 인도가 중국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으로 미국의 동맹국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은 다른 측면에서 역시 취약점을 지니고 있다. 호주는 다행스럽게 주변에 매우 우호적인 동남 아시아 국가들로 둘러 쌓여 있지만, 일본의 주변에는 비우호적인 이웃들인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역사적 앙금을 남아있는 한국이 있다. 일본은 이들과 어려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 때로는 긴장을 형성한다. 상대적으로 경제의 규모가 작은 러시아와 한국과 관계는 어려움에 빠지더라도 일본은 이를 관리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신형강대국으로 등장한 중국과는 관계를 상호 조정해 가야만 한다는 것을 일본자신이 너무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군국주의 시절인 20세기 전반기를 예외로 하다면, 일본은 줄곧 강대한 중국과 항상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4개 국가들은 서로 다른 경제적 이해와 역사적 배경으로 Quad라는 동맹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 질 것 이다.

동아시아의 역사를 전공한 Eaza Vogel은 2019년 저술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중국과 일본 간의 1,5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기록은 이에 비교할 만한 사례가 없을 만큼 독특하다” 중국과 일본의 관계사를 기술하면서 그는 양국이 오랜 역사를 통하여 깊은 관계를 유지하여 왔지만, 문명의 규모와 발생에 있어서 중국이 항상 우위를 지켜왔다고 주장한다. 양국의 관계가 지난 1,500년간 대체로 평화롭게 유지되어 왔다면, 향후 1000년의 역사도 같은 패턴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한 가극인 ‘가부끼’처럼 관계의 변화는 매우 세밀하고 조금씩 변화를 보이면서 점차적으로 긴 시간을 두고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들 양국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우호적으로 변해가지는 않을 테지만, 일본은 은밀한 방식으로 중국의 핵심적인 이익을 이해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물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앞으로 많은 현안과 사건들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양국은 이를 시간을 두고 점차적으로 조정해 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와 중국 간에는 전혀 다른 문제들이 개입되어 있다. 오랜 문명을 지닌 대국으로 이들 양국은 수천 년을 지리적으로 이웃하여 지내왔지만,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지형적 조건으로 사실상 분리되어 직접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기술로 인하여 히말라야가 더 이상 차단의 장벽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접경지역에서 양국의 군인들이 서로 직접 대면하는 기회가 빈번해졌다.

이러한 대면의 접촉은 대부분 충돌이라는 사건으로 발전하였는데, 2020년 6월에도 예처럼 충돌하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후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인도 전역에 휘몰아 쳤다. 향후 수년간 양국의 관계는 악화의 길을 걸을 것이며, 사태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해결해줄 때가지 중국은 차분히 기다릴 것이다. 1980년에는 양국 간의 경제규모가 대등하였지만, 2020년 현재에는 중국경제가 인도의 5배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들 대국의 장기적인 관계는 결국은 경제의 규모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1980년대에 미국의 경제가 압도하면서 냉전시대의 소비에트는 사라졌다. 참으로 우연하게, 미합중국이 2017년에 이루어진 CPTPP에 불참하면서 중국에게 의외의 선물을 안겨주었듯이, 인도는 동아시아 지역의 포괄적 경제협력기구인 RCEP의 참여를 포기하면서 중국에게 지정학적 利點을 제공하였다. 경제는 거대한 게임이 진행되는 곳이다. 미국이 CPTPP에서 발을 빼고 인도가 RCEP을 포기하면서 해당 역내의 거대한 경제의 생태시스템이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다.

여기서 심각하게 참조할 통계자료가 있다. 2009년 당시 내국의 소비 사장 규모가 중국은 1.8조 달러이었던 반면에 미국은 4조 달러이상 이었다. 10년이 지난 2019년에는 상황이 역전되어 중국의 규모가 6조 달러, 미국은 5,5조 달러가 되었다. 더구나 향후 10년간 중국의 수입물량은 22조 달러를 상회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1970-1980년대의 미국의 대량소비 경제가 소비에트를 몰락시켰듯이, 향후에는 중국의 엄청난 내수시장의 규모가 국제지정학의 지형을 결정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배경이 Quad동맹의 해군함대가 인도양에서 훈련을 실시한다 해도 아시아 역사의 방향을 되돌리지 못하는 이유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Quad 4개 국가들이 경제적 이해와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정상적인 동맹관계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여기 하나의 뚜렷한 징후가 있다: 미합중국의 가장 강고한 동맹국인 한국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Quad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 아시아의 미래는 Quad라는 4개의 영문자가 아닌 RCEP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출처 : 포린폴리시(ForeignPolicy) on 2021-01-27.

KISHORE MAHBUBANI

동남아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외교관으로 싱가포르 외무장관을 역임하고 유엔주재 대사를 지내면서 안보리이사회의 의장직을 2년간 맡았으며, 이후 14년간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의 학장을 지냈다. 최근 “Has China Won”을 출간하여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수, 2021/02/10- 17:57
1
0

국회 전문위원 검토보고서를 직접 봤더니

얼마 전 경기연구원의 한 연구원은 국회 전문위원이 작성한 검토보고서를 직접 읽고서 개탄하는 기고문을 발표하였다.

보건복지위원회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를 읽어보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상임위원회의 검토보고서라면 해당 정책을 논의하는 중요한 기초자료인데, 그 가운데 기본소득에 관한 사실관계(fact)가 틀린 곳이 다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나라의 정책이 이런 허술한 자료에 근거하여 논의되고 결정된다니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이 검토보고서는 기본소득의 기초적 개념조차 모르는 전문위원이 작성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동안 몇몇 기고에서 수석전문위원이 초선 의원 5~6명을 합한 것보다 힘이 세다는 것, 그것은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 때문에 국회의원이 입법에서 소외되기 때문이라는 것, 이러한 폐단은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하여 드디어 참여연대가 이처럼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는 것 등을 간간이 보아 왔다. 그렇지만 그저 문제가 많은 제도구나 라고 어렴풋이 느꼈을 뿐, 그 깊은 내막까지는 잘 몰랐었다. 그런데 이번에 검토보고서라는 것을 직접 보고 나니 그 폐해가 피부로 느껴진다. 이렇게 부실한 검토보고서로 저렇게 막강한 권한을 누리다니 얼마나 우려스럽고 위험한 일인지…(정원호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원, “국회의 기본소득 검토보고서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2020, 12,30)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서’는 단지 ‘검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지엄한 ‘선언’이요 ‘결정문’과도 같은 위상으로 된지 이미 오래다. 세계 의회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회공무원, 즉 입법관료에 의한 법안 검토 시스템이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가운데 입법관료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하지만 이른바 ‘국회 전문위원’은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국회에서 순환 근무하는 국회 공무원들일 뿐이다. ‘전문’이란 그 명칭과 부합되지 않는다.

 

국회는 입법관료의 하부 구조인가?

필자는 오래 전부터 국회 전문위원이 피감기관이나 행정부 소속기관 공무원에게 “갑중의 갑”이라는 ‘증언’을 많이 들었다. 그들이 법안과 예산에 대한 국회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권한을 비롯해 국정감사 제도를 통하여 커다란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연전에 국회의 한 전문위원이 자신의 직무가 “국회의원과 비슷한 영향력이 있다”며 해당 상임위 소속기관에 국회의원급의 식사와 골프 접대를 요구했다는 논란이 각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국회 전문위원 스스로도 자신들이 국회의원에 준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실이다. 국회의원 스스로 부여받은 권한을 행사하지 아니하고 그 직무를 유기하면서 생긴 권한의 공백이 국회 입법관료들의 수중에 쥐어진 셈이다. 그러니 국회가 “입법관료의 하위 구조”라는 비아냥까지 나오고 있다.

참여연대는 최근 “국회법상 전문위원은 국정감사를 지원하고, 법안에 대한 조사 등을 통해 검토보고서를 제출한다. 국회는 법안 심사 시, 첫 단계로 해당 법안에 대한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가 국회의원들의 법안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며 “국회의원의 입법권을 훼손하는 전문위원 검토보고제도 폐지가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국회란 숟가락만 얹어놓기선수들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국회가 법률 해석과 관련하여 법제처의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목격한 바 있었다. 그러나 법제처는 행정부 각 기관에 법률 문제와 관련된 자문을 수행하는 행정부의 일개 부처로서 국회가 그러한 법제처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는 것은 전혀 위상에도 맞지 않고 자존심도 버려버린 상황이다. 또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국회는 늘 자신들의 정쟁 문제를 검찰에 고소 고발하고 법원 판단에 맡겨놓고서 ‘하염없이’ 그 결정을 기다린다. 그런가 하면 국회 내에서 여야끼리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이제는 국회 사무처에게 ‘유권해석’을 의뢰한다.

매사에 숟가락만 올려놓는 자세로 일관한다. 이런 자세로 일관하니 마땅히 자신들이 수행해야 할 법률 검토도 (세계 의회사상 유례가 없이) 국회 공무원에게 맡겨놓고 이제 거꾸로 그 ‘검토’를 신주 모시듯 모시면서 ‘분부’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물론 국회의원 본인들은 자신들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며 자부할 게 분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법안을 ‘발의’하고, 본회의에도 열심히 출석하여 법안을 통과시키며, 매일 같이 상대당을 향해 질타한다. SNS 활동 또한 대단히 열심이다. 또 줄줄이 찾아오는 민원인과 이해당사자들 만나느라 분 단위로 약속이 잡혀있고, 게다가 지역주민들의 경조사를 비롯해 각종 모임 등등… 너무 바쁘고 너무 열심히 일하는 선량의 삶이라고 스스로 자부할 것이다. 하지만 외화내빈, 속빈 강정이다.

 

근본을 잃게 되면 모든 일이 본말전도된다

오늘 우리 국회의 모든 왜곡과 혼돈은 근본적으로 국민이 부여해준 입법권 수행이라는 직무를 사실상 유기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우리 국회의원들이 다른 나라 의원들처럼 법안 검토를 국회 공무원에 넘겨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불철주야 진지하고 성실하게 수행한다면, 지금처럼 주야장천 아수라장의 정쟁에만 몰두하는 시간 자체가 없게 될 것이다. 또 마치 연예인처럼 SNS 활동과 ‘재담(才談)’에만 몰두하는 국회의원의 모습도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기본과 근본을 잃게 되면 모든 일이 본말전도된다. 국민들이 부여해준 입법권을 스스로 수행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되면, 결국 내가 아니라 그 다른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 국회의원 중 세계 의회사상 유례가 없는 이 왜곡된 전문위원 검토보고 제도를 개혁하여 자신들이 직접 수행해야 한다고 나서는 의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아니 이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의원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과연 언제 제대로 된 국회의원을 볼 수 있을까?

 

소준섭

화, 2021/02/16- 19:31
4
0

지난 1년 이상 돌림병이 여전히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이 전쟁판 같은 엄청난 불안과 공포,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미군사훈련을 꼭 해야 하나? 한국과 미국 군부는 신종 코로나 바리어스 감염증(COVII)-19)의 세계적 만연이라는 대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3월 둘째 주부터 9일간 한미연합훈련을 실시키로 했다. 참으로 어이없고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번 한미연합훈련은 실제병력이 투입되는 야외 실기동훈련(FTX, Field Training Exercise)이 아니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연합지휘소연습(CPX, Command Post Exercise)으로 시행될 예정이다(다음 <그림 1> 참조). 그 훈련 규모와 훈련 계획 등 세부사항은 양국 군부간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림 1> 2021년 3월 실시 예정 한미훈련 개요 및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추진 현황 <출처: 동아일보 2021. 2. 15. A8면>

이 한미연합훈련은 사전연습인 연합지휘소훈련(CCPT, computer-simulated Combined Command Post Training)에 이어 위기관리참모훈련(Crisis Management Staff Training, CMST)이 진행되어 1부는 5일간, 2부는 4일간 실시된다.

그동안 한미양국은 이런 군사훈련을 매년 연례행사로 실시해왔다. 특히 주목할 점은 키리졸브 연습, 독수리 훈련, 을지프리덤가디언 연습, 비질런트 에이스 연합공중훈련 등이 연중 계속 이어져왔다는 점이다(다음 <그림 2> 참조). 말하자면 한미 양국은 연중 한 차례 한미연합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게 아니라 이런저런 이름으로 수시로 군사훈련을 해왔다는 데 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 실시와 연기, 미실시를 반복해 온 한미군사훈련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키리졸브 훈련은 2018년 3월에 실시되었으나 2019년엔 연합지휘소 훈련으로 축소되어 실시되었다가 2020년에 COVID-19 악화로 무기 연기되었다. 그리고 이번 2021년 3월에 컴퓨터 시뮬레이션방식으로 실시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독수리훈련은 2018년 4월에 실시되었으나 2019년 폐지되었고, 2020년 8월에 규모를 축소하여 실시되었다.

츨지프리덤가디언연습은 2018년 중단되었다가 2019년 8월에 연합지휘소훈련으로 대체되었고, 2020년 8월에 10일간 규모를 대폭 축소하여 실시했다.

비질런트 에이스 연합공증훈련은 2018년 12월에 다른 훈련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2019년에 아예 연기되었고, 2020년 4월에 4일간 실시되었다. 이런 군사훈련은 1년에 전반기화 후반기에 실시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북갈등이 고조되던 때나 남북대화가 진행되던 때나 가리지 않고 한미동맹을 내세워 한미연합 군사작전을 연습해 왔다. 이게 대한민국이 불완전한 주권국가임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림 2>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주요 한미연합훈련 진행현황 <출처: 문화일보 2021. 2. 15.>

이 군사훈련 실시와 연기, 폐지, 대체 현황에 관해 나타난 특징을 살펴보자. 첫째 이번 2021년 한미연합 군사훈련에 대해 통일부뿐만 아니라 외교부에서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견을 보여 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와 같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보자고 생각했다면 그 어떤 이유를 들더라도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했어야 마땅할 것이다.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는 지난 1월 노동당 제8차대회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과 첨단무기 반입 중단을 요구했다. 이런 그의 요구는 2018년 6월 11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성사와 4·27판문점선언과 9·19 평양공동선언에 비추어보아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특히 919 군사합의에 의해 군사분계선에 존재했던 양쪽 전방초소들을 파괴한 이후 아무런 군사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비춰보아도 한미군사훈련을 이 시점에서 강행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이번 2021 한미연합훈련은 전시작전통제권의 한국으로의 전환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과 미국 두 나라는 이번 한미연합훈련에서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완전운용능력(FOC, Full Operational Capability)을 검증해야 한다고 전해진다. 2020년 후반기에 실시되었던 한미연합훈련에서 완전운용능력을 검증해야 했으나 사실상 무산되어 예행연습만 실시되었다. 따라서 한국은 이번 상반기 연합훈련을 통해 완전운용능력을 검증하길 원하고 있다. 한국정부가 2021년 완전임무수행능력(FMC, full mission-capable) 검증까지 완료하여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완료하려면 이번 상반기 훈련과정에 완전운용능력 검증을 완료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즉 한국군은 북한의 반발 등을 감안하여 훈련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완전운용능력 검증을 이번 훈련에서 병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미국 주장대로 별도의 시기에 별도 방식으로 얼마든지 검증할 수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전시작전통제권을 전환한다면서 굳이 한국군과 미군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연합군사령부를 구성, 운영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셋째, 한미 양국 군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이후 구성, 운영될 한미 미래연합사령부의 전시 지휘통제소 위치를 둘러싸고 견해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군은 수도방위사령부가 관할하는 남태령의 B-1 문서고를 전시지휘소로 선호하고 있고, 이미 몇 년 전부터 이를 위한 리모델링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미군측은 이 전시지휘소를 성남시 미군 전용 핵 ‘CP 탱고, CP TANGO, Command Post Theater Air Naval Ground Operations; TANGO탱고’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핵벙커는 구글 지도에 위치가 노출된 이 미군전용 지휘통제소이다. 한국군이 전시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말하려면 한국군이 원하는 장소나 위치에 전시지휘소를 설치, 운영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넷째, 이런 한미군사훈련 실시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에 대해 한미간 견해차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미군측은 COVID-19 등 이유로 미래연합군사령부의 완전운용능력 검증을 뒤로 미루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측은 아예 그런 이류로 한미연합훈련 자체를 연기하자는 주장을 왜 펴지 못하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네 가지 의문조차 풀지 못하고 있으면서 안보공백 타령이나 하면서 자주국방을 말하는 게 우습지 않은가 묻고 싶다.

끝으로 묻는다. 이제 대한민국은 한미군사동맹이 우선인가 민족간 교류와 협력이 우선인가 여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된다. 언제까지 미국이 원하면 국토 어디에서라도 미군을 위해 군사기지를 제공해야 하는지 라는 물음에 응답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군사동맹만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에 필수조건인가? 그렇다면 남북대화나 남북교류와 협력은 접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제 한미군사동맹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남북관계 개선과 도약을 통해 한반도 평화 대전환을 추구하는 게 민족문제 해결의 급선무라는 가치전환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한반도 평화 대전환은 모든 국정목표의 우선목표요 대상이어야 한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임을 증명해 보여야 할 때이다.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주권국가임을 증명하려면 군사주권,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으로부터 어서 빨리 회수해야 할 것이다. 70년이나 철 지난 한미군사동맹의 낡은 신화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허상수

목, 2021/02/18- 20:39
3
0

글제에서 대충 파악이 되듯이 이번에는 우리나라 축산과 육식의 과다 섭취의 문제이다.

통계상 우리나라는 1인당 육식섭취량이 일본보다 2배 정도 많다고 한다. 1년에 먹어치우는 닭의 양이 2억 마리가 넘는다. 이것도 2019년 통계이니 코로나로 인해 집콕생활을 강요받았던 지난해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 가능할까?

그건 미국을 비롯해 외국에서 값싸게 들여오는 GMO(유전자조작농산물) 사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사료용으로 천 만톤 정도의 GMO 사료를 수입한다. 우리나라 쌀 생산량(2020년도 약 350만톤)의 약 세배 가까이나 된다. 수입량에서 짐작되듯이 우리나라는 많은 식용 가축을 키우고 있다.

불과 20~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의 농가는 대부분 소 한 두 마리를 키웠고 그 소들은 일소로 쓰이기도 하고 농가소득에서 짭짤한 부수입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료를 공급하는 곡물 수출국의 기상이 악화되어 사료값이 오르면 소를 한 두마리 키우는 농가는 버티기 힘들다. 또 부업으로 한 두 마리를 키우던 농가의 농민들이 나이가 들면서 사료 급여와 분뇨 처리가 힘들어지면서 사육을 포기하게 되었고 축산은 점점 규모화 되어갔다.

이제 시골 농가에서 부업으로 소 한 두마리를 키우는 농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축산은 농가에서 생산하는 여러 작물이나 품목 중 하나가 아니라 축산업이라는 영역으로 독립되었고 전문 경영자들에 의해 좁은 공간에서 대량으로 사육되고 있다.

조류독감(AI)이라든가 구제역, 아프리카 돼지열병(ASF) 같은 가축전염병에 감염되어 농장에 있는 가축을 전부 살처분했다는 얘기는 20~30년 전만 해도 들을 수 없었던 얘기이다.

좁은 땅에서 많은 가축을 키워야 하니 조밀하게 키우는 밀식 축산을 할 수 밖에 없다. 동물 학대니 동물 복지니 하는 얘기는 문제가 되는 그 때 뿐이고 축산 환경은 개선되지 않는다. 가축전염병은 한번 돌면 밀식, 밀접된 축산농장 안에 사육되는 동물에게 급속히 전염이 된다. 특히 요즘 지어지는 양계장은 냄새를 줄이고 외부의 전염병을 차단하기 위해 창없이 밀폐된 축사를 짓는다. 무창계사라고 한다. 전염병이 침입하면 집단감염이 일어나기 딱 좋은 시설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조류독감이 이번 겨울에 다시 나타났다. 조류독감에 감염된 농장의 닭이나 오리들은 모두 살처분된다. 살처분이라는 말에는 섬찟, 끔찍, 폭력, 잔인이라는 느낌이 잘 안드러나지만 감염이 되면 이 농장의 닭들은 농장 주변에 땅을 파고 안락사 과정도 없이 생매장으로 살육된다. 조류독감이 발생한 농장의 닭이나 오리들은 물론 살처분되고 반경 3km 이내의 농장에 있는 닭이나 오리들도 모두 예방 행위로 똑 같이 살처분된다. 한 농장에서 키우는 닭이나 오리들은 수 십, 수 백 마리가 아니라 수 만, 수십 만 마리가 된다. 이 생명들이 영문도 모르고 한꺼번에 구덩이로 내몰려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경기도 화성에 가면 ‘산안마을’이라는 농사공동체가 있다. 이 공동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사육방식을 이용해서 유정란을 생산한 곳이며 친환경 축산과 동물복지농장을 실현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 농장 가까운 가금류 농장에서 조류 독감이 발생했다. 반경 3km 안에 포함된 산안마을 양계장의 닭들도 살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농장 앞에는 공무원들이 초소를 세워 달걀 반출과 사료반입을 막고 있다. 공동체 식구들은 살처분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하고 이 공동체 대표를 지낸 윤 모 대표는 가축들의 생명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더라도 막겠다고 농성을 하고 있다.

산안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은 양계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공동체를 통해 개인과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성찰하는 삶을 택했고 강요나 유혹이 아닌 공명과 스스로의 결단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인간이 가져야 할 존엄을 지키는 만큼 자기들이 키우는 닭과 가축도 존중하고 건강과 행복권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정부는 동물학대와 가축전염병으로부터 동물들을 지키고 동물권, 행복권, 동물복지를 실현하는 동물복지농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산안마을은 그 가장 앞자리에 있다.

산안마을 양계장은 2014년 조류독감 대유행 때도 매몰 명령이 떨어졌으나 끝까지 버텨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은 곳이다.

전염병에 감염된 가축은 멀리 이동할 수 없다. 그래서 농장 가까운 곳에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살아있는 가축을 집어넣고 묻는다. 지금은 살처분 광경이 끔찍하다고 TV에 잘 안나오지만 우리는 그 전에 얼마나 잔인하게 처리했는지 기억한다. 거대한 구덩이에 대형덤프트럭으로 가축들을 쏟아부으면 멀쩡한 소나 돼지가 살겠다고 가파른 구덩이를 기어오르고 굴삭기 대형 삽날로 밀어넣고 찍어누르던 장면을.

가축 살처분은 그 지역 주민과 공무원들에게 생명을 죽여서 받는 정신적 고통 – 트라우마를 남긴다. 가축 주인들에게는 경제적 타격과 실의를 남긴다. 지역은 토양과 지하수 오염의 위험에 빠진다.

대량 밀집 공장형 축산의 필연적 결과이다.

육식의 제한없는 섭취. 신 선진국 대한민국의 반성 지점이다.

지금과 같이 육식을 과잉섭취하면 동물복지농장을 확대하기 어렵다. 대량 밀식 축산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사료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식량자급율을 올릴 수도 없다.

육식의 대량 섭취는 건강에도 좋지 않지만 지구환경에도 악영향을 준다. 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환경위기의 1/4이 축산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경기도 가축방역심의회에서 ‘산안마을’의 상황을 확인하고 조류독감에 감염되지 않고 앞으로도 안전이 유지된다고 파악하여 농식품부에 건의하면 살처분 대상에서 빠질 수 있다.

다행히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산안마을 상황을 보고받고 ‘예방적 살처분은 공장식 밀집사육을 전제로 만들어진 규정’이라며 친환경적으로 동물권을 존중해서 운영하는 동물복지농장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면 이점이 없으니 경기도 차원의 기준안을 마련해 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경기도가 산안마을의 닭들에게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적용한다면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일방적 처리 방식에서 농장의 유형에 따라 다르게 적용하는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새로운 길이 열리더라도 과다한 육식의 섭취를 줄이지 않으면 전염병이 돌 때마다 예방적 살처분으로 수많은 가축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를 위해, 우리의 건강을 위해, 동물 복지를 위해, 식량자급을 위해, 축산농장의 이웃주민들을 위해 고기를 조금만 먹기, 일주일에 한번 이하로 줄이기를 함께하기를 간절히 요청드린다.

인간과 동물, 자연과의 관계를 착취와 수탈이 아닌 협력과 상생의 관계로 회복하지 않으면 가축들은 늘 살처분의 위험에 놓일 수밖에 없다.

산안마을이, 산안마을 닭들이 살아남기를 기원한다.

간절히…

 

이재욱

화, 2021/02/23- 19:43
2
0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저술한 『진보의 미래』에서 “(자신이) 그냥 앉아서 관료에 포획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했다.

한편,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패하고 있는 관료 문제에 대해 어느 교수는 최근 한 기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사람들)’들은 ‘늘공(늘 공무원인 사람들)’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사실 현재의 5년 단임제는 ‘영원한 관료지배의 충분조건’일지도 모른다. 각 분야 관료개혁의 세부적인 각론 없이 허허벌판에서 총론만 들고 적폐청산을 외치다 보니, 청산의 대상이 되어야 할 관료들에게 각론을 의지하게 된다. 개혁적인 정권이 들어서서 장·차관, 기관장 몇 명 바꾸고 새로운 정책을 편다 해도 관료사회는 꿈쩍하지 않는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문재인 정부, 아직 임기 500여일이 남았다”, <오마이뉴스> 2021. 1. 10.)

우리 사회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말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대통령 한 사람이 홀로 우뚝 서서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채 온 나라를 좌지우지 통치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청와대 권력이란 단지 전체 공무원 조직에서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점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권력은 5년마다 바뀌지만, 관료들은 바뀌지 않은 채 언제나 강고하게 온존하면서 그 핵심적인 자리를 장악한다. 국민들이 이름을 아는 장관은 거의 없을 만큼 너무도 수시로 바뀐다. 그러니 행정부 부처의 실질적 주인은 필연적으로 관료일 수밖에 없다. 환경정책이나 노동정책도 대통령과 장관이 지휘하는 듯 보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불과 몇 가지 정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정책들을 관료들이 행사하고 있다.

국회 역시 겉으론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온갖 비난을 모두 들으면서 정치와 입법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국회 입법관료들이 보이지 않은 실권을 행사한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사실상 관료들이 지배하는 관치(官治), 관헌(官憲) 국가이다. 이 나라는 대표적인 행정 비대 국가다. 정책 하나하나마다 수백 수천 명의 이해가 걸려 있다. 공무원이 가진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법제가 입헌군주 국가인 일본의 식민지 강점기에 만들어졌고, 그 뒤에도 그것을 벤치마킹했기 때문에 우리 법제에는 관헌국가적 잔흔이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을 하고자 하는 자는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식으로 행정청의 권한을 간접적으로 규율하는 방식이 그 예이다. 이는 국민을 행정권 발동의 단순한 수동적 존재로 설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관(官)주주의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법’과 ‘규정’이 사회를 일상적으로 지배하게 된 이른바 ’87체제 이후 ‘법치주의’의 이름하에 결국 이들 관료집단의 지배력이 갈수록 확고해져왔다. ‘시험 권력’이 ‘선출 권력’을 사실상 조종하고 지배하는 이러한 사회는 민주주의가 실종된 사회다.

 

행정사무그리고 규정만이 군림하다

원래 행정사무 업무란 보조적 업무여야 한다. 그리하여 사무 및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에 충실함으로써 그 명(名; 이름)과 실(實; 내용)이 부합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는 전반적으로 행정사무 업무가 오히려 상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법원의 법원행정처는 그 대표적 사례다. 법원행정처는 법관의 재판을 보조한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인사관리와 기획조정 업무를 장악하면서 스스로 법관에 대한 감독기관으로 군림하였다. 국회사무처 역시 전형적 사례이다. 독재 권력이 국회를 하수인 혹은 거수기로 전락시키기 위하여 도모한 국회사무처 소속 전문위원의 검토보고 기제는 국회 입법관료에게 과도하고 ‘위헌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관료 조직은 대부분 행정사무 부서가 인사와 예산 그리고 각종 사무분담 업무에 의거해 원래 보조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질적인 주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주객전도요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공공성과 가치와 철학은 사라지고, 대신 오직 사무와 규정이 군림하면서 상명하복과 형식주의만이 만연되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국회를 비롯하여 감사원, 대법원, 정당 등등 국가의 공공 시스템과 기관 중 자기의 명칭에 부합하는 위상을 지니고 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국회 전문위원’이라고 하면 누구든지 ‘전문가’들이 임명되어 업무를 수행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모두가 국회에서 순환 근무한 국회 공무원들이다. 이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검토보고’라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한 국회 공무원이다. 미국 의회의 위원회에 근무하는 전문가 스태프 조직은 모두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 독일 의회에서 이들 정책 ‘전문위원’은 독일 사회의 각계 전문가 출신으로서 자부심이 높은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시 정당 소속이다.

미국 의회 소속기구인 법제실의 법제관은 변호사나 법학박사 등 모두 법제 전문가로 구성된다. 반면에 우리 국회의 경우, 모두 순환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또 미국 의회예산처의 처장은 주로 경제학을 전공한 인사가 임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국회는 주로 국회사무처 공무원인 수석 전문위원 출신이 임명된다. 부실하고 왜곡된 우리 입법지원 기구의 모습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엉망이 된 우리의 정치과 경제, 사회, 노동 그리고 환경문제의 저변에는 언제나 관료집단이 도사리고 있다. 관료집단은 본질적으로 현상 유지와 친(親)재벌 사고방식의 보수적이고 기득권 편향으로서 대부분의 경우 변화와 개혁에 저항한다. 더구나 외부로부터의 진입이 철저히 차단된 독점구조에서 감시견제 기제가 부재한 채 책임감과 의식 부재가 더해져 스스로도 갈수록 무능해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관료집단은 일반 시민과의 접촉은 별로 없고(혹 만나더라도 부정적이거나 거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반면 기업 측 인사들은 빈번하게 만나게 된다. 그래서 관료집단은 ‘시장 친화적’이며 시장경제 옹호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등등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이 고착화되고 보수화가 강화되며 한 치의 변화와 개선조차도 어려워지기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회가 근본적으로 관료지배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심각하기 짝이 없는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의 문제에서도 관료집단은 아무 의식 없이 그저 규정과 관행만을 내세우고 모르쇠, 시간끌기로 일관할 뿐이다.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다.

명백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관료개혁 없이는 우리 사회의 어느 것 하나도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우리의 미래 역시 없다. 우리의 미래를 이들 낡은 관료조직에 맡길 수 없다.

우리의 생존을 위하여 관료집단을 새롭게 바꿔내야 한다.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과연 공정한 것인가?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시험에 의하여 공무원을 선발하는 방식이 최고의 미덕으로 치부된다. 그렇지 않은 그 어떤 공무원 채용도 불공정성으로 매도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공무원 선발제도를 일률적으로 중앙인사기관이 독점하여 고스란히 관리하는 시험제도만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라는 없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각 부처별로 인력을 충원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에는 1993년 정부혁신처(NPR; National Performance Review)가 설치되면서 인사관리의 분권화와 권한 위임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각 부처에 채용권한을 위임하고 각 부처는 자체 실정에 맞게 채용제도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 형태가 각기 상이하다.

일본의 공무원제도는 우리나라와 많은 측면에서 유사하지만 우리의 경우 중앙인사위원회에서 일괄적으로 선발하여 각 기관에 배분하는 형식을 취하는 반면, 일본은 시험을 중앙 인사원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지만 각 기관별로 채용후보자 명부를 작성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바로 임용되지 않고, 우선 ‘채용후보자 명부’에 등록되어 명부 순으로 각 행정기관에 추천된다. 따라서 성적이 좋을수록 희망하는 기관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각 기관은 엄격한 면접과 심사로 임용을 다시 결정하기 때문에 어려운 관문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미국에서 시행하는 ‘대통령 공공관리 인턴(PMI: Presidential Management Intern)’ 프로그램이라는 고급공무원 임명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공공정책 분야에 우수한 석․박사 인력을 충원하기 위하여 1977년 카터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의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매년 공공정책 프로그램의 분석 또는 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약 200명 이상의 젊은 인재들이 미국 국민에게 연방정부 공무원이 되는 지름길로 인식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2년 동안 연방정부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된다. 이들은 ‘순환 인턴십 기회’를 통하여 거의 모든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게 되며, 이 프로그램에 의하여 우수한 석․박사 인력들이 연방정부에 채용되고 있다.

프랑스는 유명한 국립행정학교, 즉 에나(ENA)를 통하여 고위공무원을 채용한다. 2003년의 경우 총 선발인원은 100명으로서 이 중 50명은 외부 경쟁시험, 41명은 내부 경쟁시험, 9명은 ‘제3의 시험’을 통하여 선발된다. 외부경쟁 시험은 28세 이하이고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 내부경쟁 시험은 현직 공무원에게만 지원 자격이 주어지고, 학력 제한 없이 5년 이상의 공공 부문 근무경력을 충족시킨 자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실시한다.

‘제3의 시험’은 40세 미만이고 전문직 또는 지방자치단체 의원으로 8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자에게 응시자격을 준다. ‘제3의 시험’은 고위 공무원의 사회적, 지리적 배경을 다양화시켜 공무원 충원의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도입된 제도이다. 프랑스는 이렇게 하여 고급 공무원의 사회적 배경의 균형을 추구하고 전문가의 공직 진출 가능성을 제고시키기 노력하는 한편, 그밖에도 계급제의 단점인 충원 형태의 경직성을 완화하기 위하여 공개채용시험 외에 다양한 충원 형태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채용과 전체 공무원의 20%에 이르는 계약직 공무원 제도의 활성화로써 계급제 하에서 인력운영의 탄력성을 높이고 있는 것도 그 일환이다.

한편 영국의 경우에는 속진(速進) 임용제를 적용하여 공무원 중 고위직 공무원 직위에 도달할 수 있을 우수 인재를 선발하여 별도의 훈련 및 능력개발기회와 조기승진 기회를 제공한다. 실제 영국 고위공무원단의 1/3에 가까운 인원이 속진 임용제를 통하여 선발된다.

 

고시 출신의 군림과 육두품 출신의 슬픔

공무원이 기피대상으로 되던 시기가 있었다. 공무원 임금이 너무 낮고 대우도 좋지 않아 일반 대졸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시기에 5급 고시는 우수한 인력을 공무원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유인책’의 제도였다.

그러나 이제 공무원은 이 나라 모든 젊은이들의 꿈으로 되었다. 9급 공무원 시험도 수백 대 일의 경쟁률이다. 가장 우수한 인력들이 공무원 시험에 몰려들고 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이 밀집해있는 노량진역 부근은 공시족으로 언제나 인산인해다. 몇 년 전부터 이제 5급 공채(고시)나 7급 시험이나 차이가 없다는 주변의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우수한 인력들을 공무원으로 선발해 잘 운용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문제는 고시 출신, 고시족들이 전두환 시절의 군대 내 사조직이었던 ‘하나회’처럼 공무원 사회를 장악하고 독점하는 데 있다. 모두 고시 몇 기 몇 기로 통하고, 이들끼리 모든 요직과 지휘계통을 장악한다. 고시 출신이 아닌 다른 공무원은 마치 신라 시대의 ‘육두품’처럼 들러리로 전락한다. 진골과 성골 그리고 육두품의 출신 성분은 너무도 명확하다. 서슬이 퍼런 이런 계급 사회에서 기상천외하게 아부하는 재주가 있지 않는 한, 육두품 출신이 요직에 오르기 어렵다. 비(非)고시 출신으로서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요직에 오르게 될지라도 이미 비고시로서의 정체성은 상실된다. 아니 오히려 비고시 집단에 적대적으로 스스로 변해버리는 경우가 태반이다. 고시족 집단에 대한 높은 충성심이 이미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 국가와 사회 그리고 국민을 위한 역동성이나 미래지향성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국회사무처의 경우를 살펴봐도 수석 전문위원과 전문위원을 비롯한 요직과 국장급에서 5급 공채, 즉 ‘입법고시 출신’의 비율은 매우 높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강화된다. 최근에는 과장급까지 고시 출신의 독점 현상이 나타난다. 실제 국회사무처의 주요 보직 중 고시 대 비고시 출신 비율은 2006년 48: 52였는데, 2011년에는 58: 42였고 2016년에는 80: 20으로 그 독점 현상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5급 공채로 관료사회에 진입하면 30대에 이미 3급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지나치게 빠른 승진이고, 국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심지어 사회 경험이 적은 본인에게도 불행이다. 최근 판사 임용도 최소 3년 내지 5년의 법조 경력이 요구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와 같이 5급 공채라는 ‘특급 대우’를 제도적으로 제공하는 나라는 없다.

다양한 나무 품종으로 이뤄진 숲이 가장 번성한 숲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시험이라는 한 가지 단일한 형태로만 공무원을 선발하는 현재의 방식은 “우리가 남이가”의 가족주의와 온정주의를 낳고 이는 결국 부패와 무능을 심화시키게 된다. 그것은 오직 특권과 독점의 상징으로 되었고, 상명하복으로 권력에 무조건 아부하고 줄서기와 승진에만 몰두해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국회 고위 공직자로 있던 어떤 후배는 필자에게 4급 이상의 고위공무원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는 대부분의 4급 이상 공직자들에게 ‘승진’에만 필요한 비상한 능력을 보유하고 발휘한다는 점 이외에 그들에게 특별히 대단한 능력을 가졌거나 실행하는 모습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 공무원 조직도 과거와 같은 일반 행정가로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 앞으로의 공무원은 ‘일반 행정가(generalist)’ 보다는 공직사회 내에서 특화된 전문 능력을 보유하면서 유능한 행정가로서 종합적인 관리 능력을 보유한 ‘전문성을 지닌 행정가(specialized generalist)’가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은 1940년대 이후 지역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가능한 ‘대표관료제(representative bureaucracy)’를 채택하고 있다. 대표관료제란 한 나라 전체의 인구 구성에서 여성이나 장애인 등 사회집단별 인구비례에 따라 정부 공직이 배분되어야 한다는 인사 원칙이다. 미국에서는 이 대표관료제를 적용하여 고용평등조치, 차별철폐조치 그리고 적극적인 고용할당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인재의 지역할당제 역시 이러한 적극적인 인재할당 대표관료제의 일종으로서 인력충원에 지역이라는 변수를 적극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일종의 ‘지역주권’의 신장을 추구한다. 대의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지역별 비례에 의하여 국가 인재를 선발하는 것은 선발된 인력이 국가 공직사회에서 업무를 담당하는 과정에서 출신 지역과 관련된 이익을 직간접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적 대표성(political representativeness)’, 혹은 ‘정치적 대의성’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시험만에 의한 공무원 선발, 현대 국가에 적합하지 않다

고시제도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각급 공무원 시험제도는 사실 과거제도를 계승한 것이다.

흔히 과거제가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제공한다는 공평성의 측면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서 과거제도는 본래 치국의 인재를 배양하고 선발할 수 없고 도리어 황제 전제정치의 필요에 충실하게 부응한 제도이기도 하였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 고염무는 팔고문(八股文: 과거 시험이 엄격하게 요구했던 여덟 가지 형식)의 폐해가 진시황의 분서(焚書)와 같으며 인재에 대한 파괴는 오히려 진시황의 갱유(坑儒)보다 더 심하다고 갈파하였다. 그리고 결국 중국은 크게 낙후되었다.

오늘날 세계의 선진국들은 공무원을 직무별로 수시 채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직 암기식의 단일시험 제도를 통해 일시에 공무원을 선발한다.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결정되는 승진과 급여 체계 대신 이제 성과와 실적에 의하여 결정되는 방향을 지향해야 한다.

시험만으로 우수하고 도덕적이며 유능한 공무원이 선출될 수는 없다. 시험으로만 선발되는 현 공무원 제도 그리고 연공서열에 의하여 모든 시스템이 운영되어서는 전문성과 창의성 그리고 역동성을 요구하는 현대 사회의 수요에 결코 효과적으로 부합할 수 없다.

 

소준섭

화, 2021/03/02- 19:41
7
0

우리나라 농산물 자급율이 43% 정도 된다고 하면 우리 땅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43%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론 맞는 말이지만 따져 보면 우리 농산물이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종자의 대부분은 수입하고 있다. 이를 심기위해 밭을 만들어야 하는데 농기계는 수입 석유로 가동한다. 결정적인 건 심고 가꾸고 수확하는 일손인데 국내 농업노동 자원이 점점 고령화되고 부족해지면서 외국인 노동자 의존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조수익(농산물 총 매출액)에서 생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올라가 60%를 상회하는 수준이 되었다. 만원어치 팔면 6천원은 농지 임차료, 농기계값 상환, 농기계 임차료, 농업노임, 종자대, 비료값, 시설비, 기타 경영비 등으로 들어가고 농민들 손에 들어오는 농업소득은 4천원이 채 안되는 수준. 1년에 1억 매출을 올리는 농민들은 말이 ‘억대 농부’이지 실상 농업 소득은 4천만원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농민들은 비닐 하우스 등 시설을 늘리거나 소득이 높은 인삼이나 과일 농사 혹은 축산으로 전환하며 규모를 늘린다. 시설이든 농지 면적이든 규모를 늘리면 혼자 감당할 수 없고 마을에서도 품을 구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노동력을 사와야 한다. 한동안은 농촌에 살다가 인근의 도시지역으로 이사가 살고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 들이 외부 농업노동을 감당했었는데 이들이 고령화되어 더 이상 노동을 제공하지 못하게 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지난 해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던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일꾼을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부족한 노동력으로 인해 임노동비용도 크게 올라 이중고를 겪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국내에 남아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한 농장들은 그나마 농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농사를 지어서 올리는 수입이 줄어드니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규모를 늘려도 실제 소득은 크게 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생활여건이나 노동조건을 보장해 주기가 쉽지 않다.

소득을 늘리기 위해 규모를 키워야 하고 늘어난 농사규모를 감당하자니 농업노동자를 고용해야하고 늘어난 일꾼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려고 다시 규모를 늘리는 이중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캄보디아 출신 여성노동자인 ‘누온 속헹’(31세)씨가 지난 해 12월 20일에 비닐하우스로 만든 숙소에서 자다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고 올해 2월 1일에는 여주에서 또 다른 캄보디아 출신 남성 노동자가 숙소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람 다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속헹씨는 가장 추운 겨울날 전기가 끊겨 전기장판도 못켜고 자다가 숨졌다고 한다.

‘속헹’씨 사고가 일어난 후 고용노동부는 올해부터 외국인 노동자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비닐 하우스 내 컨테이너나 조립식 패널로 만든 숙소를 제공하는 농가에게는 외국인 노동자 고용허가를 내주지 않는 ‘외국인 근로자 숙소 기준강화 방안’ 을 적용하겠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에게도 차별없이 노동법을 적용하고 노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행복추구권과 사람답게 살 권리 역시 똑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들에게 최소한의 주거환경을 갖춘 숙소가 제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농가들은 대부분 외국인 들을 위한 주택을 준비하고 있지 않다. 이유를 들자면 숙소를 짓는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두 사람이 거주할 정도의 공간인 열평짜리 집을 평당 5백만원의 최소비용으로 지어도 농지전용비, 설계비, 대지 조성비 등을 포함하면 7~8천 만원의 목돈이 들어간다. 집을 짓는 비용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지만 농민들 대부분은 남의 땅을 임차하여 농사를 짓기 때문에 땅 주인들이 집을 짓게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 또 집을 지으면 1가구 2주택이 된다.

고용노동부의 조치가 나오자 농민단체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고용노동부의 방침대로 하자면 대부분의 농업 경영주들은 외국인 노동자 고용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어 인력수급에 차질을 빚게 되고 사실상 농사를 중단하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의 조치도 이해가 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열악한 환경을 강요하는 것도 중단해야 하고 가중되는 생산비에 코로나 위기로 인해 인력을 구하기도 힘든데 제대로 된 숙소까지 마련하기 힘든 농가의 처지도 이해가 된다.

우리나라 농축수산물 생산과정의 상당 부분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의존하는 현실을 금방 바꿀 수도 없다. 현재 우리 농업 현실은 외국인 노동자들 없이는 그나마 절반도 안되는 식량자급율을 유지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이런 현실은 농가에 압박을 가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이를 개선하려면 단기적 과제와 중장기적 해결책을 세워야 한다.

나름 급한대로 장·단기적 대안을 생각해 봤다.

단기적 해결책으로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주거환경을 최소한이라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우리나라보다 따뜻한 지역 사람들이다.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난방시설을 설치하고 취사와 화장실, 욕실 등 생활시설은 개선되어야 한다. 고무통을 묻고 널판지 두 어개 걸치고 거적대기로 가리는 곳에서 용변을 보게 해서는 안된다.

중장기 대책으로는 냉난방 설비를 갖추고 조리와 현대식 화장실과 욕실을 갖춘 표준화된 거주시설을 농식품부와 지방정부가 설계하고 이런 시설을 갖춘 농가에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할 수 있도록 고용허가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 시설은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한 농가에 신고만으로 설치할 수 있게 하고 비용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일부 보조하고 농가가 부담하되 시설 자금은 저리로 융자할 수 있는 보조금을 만들어 농가가 큰 부담없이 외국인 주거시설을 갖추도록 한다.

이 글을 처음 구상할 때는 어떤 대안이라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농민들이나 농민들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는 생활협동조합의 임원들 그리고 농업전문가들과 대화를 해봤다. 그런데 여러 가지 규제가 얽혀있어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농식품부와 법무부, 고용노동부, 외무부 등 부처 간에 풀어야할 문제 그리고 세제와 보험 가입, 교통법 등 많은 부분에서 얽혀 있다.

그렇지만 이대로 규제와 압박 그리고 불법과 관행으로 유지할 수도 없다. 시간이 지나 잊혀지길 기다린다면 제2, 제3의 속헹씨는 계속해서 나올 것이다.

농업에 대한 정부와 국민들의 시선과 태도가 바뀌고 식량안보 차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범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어쨌든 그들이 현재 우리 국민들의 먹을 거리를 해결하는 가장 큰 일꾼이고 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농업 노동력을 단기간에 쉽게 확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재욱

목, 2021/03/04- 19:02
4
0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 한국의 여론조사 등에서 사회갈등의 축으로 확인된 것은 주로 이념, 세대, 성, 연령, 계층 등이었다. 분단 상황 속에서 이념 갈등은 오랫동안 정치적 갈등의 핵심이었고, 소위 ‘광화문 집회’ 등으로 코로나19 상황에서 한층 더 두드러졌다. 세대 간 문화적 및 사회경제적 격차는 정치 민주화와 신자유주의 심화 속에서 ‘세대론’의 프레임을 통해 계속 지적되었다. 특히 노인 빈곤의 확대와 청년층의 전망 부재가 새로운 불평등의 의제로 주목받았다. 또 청년층 내부의 기회 격차가 ‘부모 찬스’나 ‘흙수저-금수저’ 등 이념 차이보다도 우선 작용하는 광범위한 계층 대물림의 현상으로 인식되면서, ‘공정성’이라는 말이 청년층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그와 함께 남성성 변화를 압박하는 사회경제적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특히 젊은 남성을 중심으로 ‘루저’ 자의식 또는 ‘성공한 사람’과 단순 동일시하려는 주관적 현실 인식이 크게 확산했다. ‘디지털 성폭력’ 문제를 중심으로 청년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떠오르면서, 이처럼 복잡한 사회불평등은 ‘젠더 정치’의 프레임으로 단순화하는 중이었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발전하면서, 한편으로는 위에서 거론한 이념, 세대, 소득, 재산 불평등과 빈곤 위험이 한층 악화하며 소위 ‘K형 양극화’가 우려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다른 불평등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특히 사회로부터 격리되거나 그 의미가 주변화되었던 ‘돌봄’ 관련 불평등, 그리고 되풀이되어 발생해도 해결되지 않는 ‘폭력’의 문제가 새로운 불평등으로 떠올랐다. 이처럼 사회불평등이 한층 더 악화할 뿐만 아니라 더 복잡한 양상으로 드러나면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세계는 그 이전의 ‘정상성’으로 단순히 회귀할 수 없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또는 그 와중에서, 지금까지 비교적 서서히 진행되던 사회변화, 예컨대 디지털 경제의 확대 등 산업구조 변화와 기후변화나 쓰레기 문제와 같은 생태변화의 속도가 획기적으로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새로운 사회를 향한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돌봄 관련 불평등

돌봄과 관련하여, 한편으로 코로나19는 정신병원 등 특수 돌봄 수용시설, 노인 요양원, 병원 등 돌봄 취약자 수용기관들에서 집단발병하였다. 그리하여 ‘돌봄 취약자’ 및 ‘돌봄 종사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대했다. 집단 수준에서 다소 다른 양상으로 돌봄과 관련되며 감염에 취약함이 드러난 집단은 교회이다. 1, 2차 유행을 가져온 신천지 교회와 사랑제일교회뿐만 아니라 여러 교회가 주요 감염발생지로 주목받았는데, 이 종교기관들 역시 영혼을 돌보는 기관들이다. 즉 사람의 몸과 마음을 돌보는 기관들이 코로나19 집단발병의 최전선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돌봄이라는 의존관계에 있는 사람들, 특히 타인의 돌봄에 의존하거나 돌봄노동을 직접 수행하는 피고용자들이 감염에 가장 취약한 집단임을 의미한다. 이들의 이러한 불평등은 그동안 사회불평등에 대한 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른 한편 개인 수준의 돌봄과 관련해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아동학대 사례들이 기사화하면서, 아동이라는 돌봄 의존적 존재가 ‘개별화한 사회적 취약자’ 집단으로 등장했다. 여기서는 돌봄을 직접 수행하는 지위의 어머니들이 가해자로 지목되어, 순리를 위반한 ‘악독한 모성’의 문제로 보도되고 있다. 물론 한때 ‘잔혹 동시’ 형태로 모성의 지배에 대한 자녀의 문제 제기가 보도된 바 있고 또 현재 청소년들 사이에서 ‘어머니’ 관련된 욕들이 난무한다고 하니, 모성 관계나 모성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코로나19로 가정폭력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한 데 비해 한국에서는 아동학대가 두드러짐을 고려할 때, 한국 가정의 돌봄 부담이 갖는 특수성이나 부부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의 특수성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코로나19 감염병은 집단돌봄이나 가정 돌봄 모두가 사회에서 얼마나 취약한 관계를 만들어왔는지를 훤히 드러내는 사회학적 임무를 수행했다. 산업사회의 근대적 주체는 ‘노동하는 사람’이고 노동은 곧 직업 활동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그간 돌봄 영역은 사회에서 의미론적으로나 실제로 주변화되어왔다. 그런데 그런 실상이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이런 새로운 사회학적 관찰은 코로나19 감염병의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이라고 할 것이다. 즉 인간은 산업사회의 프레임으로 사회를 보는 인식론의 지배를 벗어나기 어려우므로 돌봄 관계의 취약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의미론에 구애받지 않는 감염병은 오히려 자유롭게 사회적 취약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주도한 이러한 인식론적 변화가 앞으로 사회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에 포괄되어, 다시 돌봄 관계의 취약성이 무시되거나 주변화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인식론적 정상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폭력의 문제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집중적으로 폭로된 또 다른 사회불평등의 양상은 ‘폭력’의 문제이다. 한편으로 이것은 아동학대와 같은 개인 간 폭력의 문제로, 다른 한편으로는 기관과 조직 등 제도적 폭력의 문제로서 드러났다. 아동학대와 같은 개별적 폭력에 대해서는 시민들의 ‘공감’이 놀라운 수준으로 표현되었다. 많은 부모가 스스로 학대당한 아동의 부모로서 동일시하며, 생면부지 아동의 인권을 호소하며 앞장섰다. 과거 세월호 재난과 여러 청년 노동자의 사고사 등에 부모들이 나서서 자신의 죽은 자녀뿐만 아니라 누군지도 모르는 미래의 잠재적 피해자를 위해 싸웠던 것처럼, 그렇게 부모로서의 동일시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다양한 재난과 사고를 통해 국가기관과 기업이라는 거대 권력체의 폭력 앞에서 개인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통감해온 우리 사회의 역사와 유관하다. 아동학대는 개인에 의한 폭력이지만, 성인 부모와 어린 아동의 지극히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는 기관과 개인 간의 권력 비대칭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비대칭적 취약자 지위에 있는 개인에 대한 인권 감수성은 그야말로 ‘개인에 대한 공감’의 형태로만 나타나고 있다. 세월호 재난과 무수한 재난들을 겪으면서 한국 시민은 익명적 관계 속에서의 시민적 동일시를 통해서 ‘촛불혁명’과 같은 변화를 이끌어온 바 있다. 그러나 국민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와 달리, 사유재산에 기초한 기업이나 사용자의 고용관계에서 나오는 폭력과 권력에 대해서는 ‘시민’ 지위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 코로나19는 기존의 무수한 ‘갑질’ 고용 관행으로 피고용자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들 역시 증가시켰다. 배달 노동자들이 죽어갔고, 경비 노동자가 폭행을 당해도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으며, 과거에 문제가 되었던 사고사가 똑같은 형태로 되풀이되었다. 여성들이 일하는 콜센터와 외국인 노동자들의 작업장이 감염 취약지로 되풀이되며 등장했다.

이처럼 ‘기관 대 개인’의, 특히 고용관계에서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개인적인 안타까움과 공감으로 대응하고 있다. 배달 노동자에게 위로를 건네거나 택배가 늦어도 참고 기다리며 이해하는 식이다. ‘피고용자’로서, 직장에서 갑질을 당하는 ‘비정규직’으로서, 취약성이 배가되는 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으로서 공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많은 학자는 ‘신자유주의 시대 연대가 사라진 개인화한 사회’의 현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연대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개인화’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은 ‘개인화한 공감’으로서 연대를 표현한다. 따라서 연대가 없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연대가 왜 개인화하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코로나19 직전에 가장 두드러졌던 사회정치적 연대의 형태는 청년층의 페미니즘이었다. 다양한 사회불평등이 서로 작용하여 갈등에 대해서 복잡한 인식이 나타나는 와중에도, 공론장을 형성하며 정치적 주체화한 세력은 청년 여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디지털 성폭력 이슈를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새롭게 조직화하는 성폭력에 저항했다. 성매매 사이트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텔레그램 n번방 등을 직접 나서서 조사하고 폭로하며, 정치적 의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 새로운 사업체로 떠오르던 온-오프라인 네트워크에 정면 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같은 네트워크 기반의 신생 사업체라고 해도 배달이나 택배 플랫폼 기업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연대가 작용하지 않았다. 그들을 연대로 이끌 ‘공통성’이 부각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 상황으로 들어서면서, 고용관계와 관련된 집합행동은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일어났다. 사회적 연대가 아닌, 자기 집단 연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정부의 정규직화 방침에 반대하는 인천국제공항 사태와 의사 파업이 대표적이다. 기득권자에 속하는 정규직 피고용자들 또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공공성’ 확대에 대한 정부 방침에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여기서도 ‘연대’가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연대는 청년층 페미니즘처럼 ‘네트워크화’하거나, 인천국제공항 정규직이나 의사들처럼 성공한 상위 고학력자 층에서 ‘폐쇄화’하고 있다. 뒤의 연대 형태를 과거 막스 베버는 ‘사회적 폐쇄’라고 불렀다. 베버는 ‘계급’ 개념을 ‘사회계급’ 개념으로 바꾼 것으로 유명한데, 거기서 핵심은 계급이 더 이상 단순히 소유관계에서의 차이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급 위계가 다시 신분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계급별로 상이한 문화와 의례를 보이고, 상이한 소비와 생활양식을 보인다. 즉 계급은 이익으로만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결속한다.

‘사회적 폐쇄’는 그러한 ‘계급의 신분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편에서는 태도와 정서, 문화로 은밀하게, 다른 한편에서는 집단적 위력을 통해 공공연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대물림하는 것이다. 베버가 살았던 독일 사회는 계급 갈등이 치열하던 사회였다. 그 속에서 사무직이나 전문직을 중심으로 ‘신분화’나 ‘사회적 폐쇄’가 진행됨을 그는 관찰했다. 현재 한국 사회는 계급 갈등이 치열하다고 할 수 없다. 몇몇 소수정당과 가입률이 미미한 노조들을 제외하면,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베버 시절 독일에는 사회민주당이 노동자 계급 정당이었고, 노조는 공산주의부터 가톨릭 계열까지 다양하게 포진해 있었다. 그런 독일도 현재는 디지털화로 인해서 노동자 조직이 약화하고 있다.

한국에서 ‘공공성’ 옹호와 관련되는 사회적 연대는 인권 감수성 강화 방식으로 ‘개인화’하거나, 청년 페미니즘 방식으로 ‘네트워크화’하고 있다. 과거 서구의 계급정당이나 계급조직 또는 과거 한국의 민주화 운동 단체처럼 조직화한 형태의 연대는 점점 약화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고용관계에서 조직화한 힘의 대치가 나타나지 않고 ‘다윗과 골리앗’의 형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갑질’이라는 형태의 폭력 수반이 가능하다고도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아동학대와 비교될 수 있듯이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가 경제적 ‘계약관계’가 아닌, 비대칭적 권력 속의 돌봄 관계인 양 인지된다. 그리하여 권력이 쉽게 폭력으로 표현되고, 신분적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정상’으로 인지된다. 성공한 고학력자 층의 신분적 위세 과시 역시 그런 맥락에서 공공연하게 가능해진 것이다.

 

계약관계와 돌봄 관계의 구분 및 그에 따른 이중적 정의 개념의 필요성

이처럼 코로나19 아래 한국 사회의 제반 문제들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 상황에서, 사회불평등의 의제는 1) 돌봄 취약성과, 2) 고용관계에서의 유사 신분적 권력관계를 포괄해야 한다. 또 3) 이 두 문제가 한국의 사회불평등 연구 및 인식에서 명확히 가시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구와 구별되는 양상이 나타남에도 유의해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문제들을 가시화했으나, 감염병의 사회학적 기여분은 거기까지이다. 그 이후의 작업은 인간과 사회가 이어가야 한다.

이런 복잡하고 새로운 사회불평등의 인식을 위해서 필자는 두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하나는 돌봄 관계를 사회불평등의 의제로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약관계의 정의(justice)와 돌봄 관계의 정의(justice)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 산업사회의 정의론은 계약관계의 정의만을 다루어왔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의 인식론적 기여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돌봄 관계의 취약성 역시 정의론의 의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음을 목격한다. 그러나 돌봄 관계는 개인 능력의 불가피한 격차에 기초한 비대칭적인 관계이고, 거기서 권력관계의 속성은 자율적 개인들 간의 계약관계에서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정의론은 이중적 형태로 설명되어야 한다. 계약관계에서의 정의와 돌봄 관계에서의 정의를 동시에, 그러나 각각 구분하여 다루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돌봄 관계가 더 원초적이라는 주장이 크다. 물론 돌봄 관계 없이는 개인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그런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서 계약관계를 돌봄 관계로 대치하는 방식으로 사고 전환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앞서 보았듯이, 고용관계의 ‘갑질’과 ‘폭력’은 한국에서 계약관계가 ‘노동력 상품화’의 계약이 아니라 ‘인신 판매’의 계약으로 인지됨을 폭로한다. 돌봄과 같은 의존관계는 비대칭 권력관계를 정당화하기 쉽다. 따라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돌봄 관계 자체에서의 장치가 필요함과 동시에, 돌봄 관계에 해당하지 않는 관계와의 구별 또한 필요하다. 돌봄 관계는 의존이 ‘불가피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적 자유노동자의 고용자에 대한 의존성은 사회적 힘의 결과이다. 거기에는 어떤 자연적, 물리적 우연성도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홍찬숙

화, 2021/03/09- 19:39
4
0

역자 주:

중국 정부는 최근 향촌진흥 정책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와 실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책 실천과정에서 ‘향촌건설행동’이라는 강령을 제시함으로써, 정부의 정책이 과거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향촌건설운동의 맥을 잇고 있음을 천명했다. 2월말에 발표된 중앙1호문건에도 언급되었다. 2021년 2월25일, 중국의 농촌빈곤 구제 정책의 성공을 시진핑이 공식적으로 선언함과 동시에 베이징에 위치한 국무원부빈개발영도소조國務院扶貧開發領導小組 사무실의 명패를 국가향촌진흥국國家鄉村振興局으로 바꿔 달았다. 2020년 후반기 팬데믹 상황하에서 발표된 쌍순환 경제구조로의 재편 전략에서 국내대순환의 주요한 산업적 역할이 향촌진흥 정책의 실천에 부여됐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책 성공의 관건은, 농촌 기층행정단위의 지역경제 재구성에 놓인다. 20분 정도의 짧은 강연이지만, 그 역사적 맥락과, 현재의 실천을 위한 주요한 관점을 살펴 볼 수 있다.


2021년 1월16일 원톄쥔 교수가 “칭화清華대학 현역縣域노동력조사” 보고회에서 온라인으로 행한 강연의 녹취내용이다. 

본 강연에서 두가지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근대중국 공업화 초기에 있었던 현縣, 진鎮, 촌村의 기층 농촌 행정단위 종합발전사례. 둘째, 현재의 새로운 발전을 위한 현급지역 경제의 재구성에 대한 것이다.

첫번째 관점을 소개하기에 앞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겠다. 중국이 공업화 위주의 소위 근대화과정에 진입하면서, 초기에 양무운동의 부국강병을 위한 공업화를 발전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중국 정부는 민간 상인과의 협업하에 새로운 공업화단계로 진입했다. 당시 산업을 진흥시켜 나라를 구하겠다는 실업구국實業救國이라는 구호가 있었다. 이때부터, 민간자본과 정부의 자본이 함께 공업화를 진행하면서, 소위 지역경제, 특히 현급 이하의 지역 경제문제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연구와 실천영역으로 여겨졌다. 2020년 시진핑 총서기가 대표적 사례인, 쟝쑤江蘇성 南通난퉁의 장지엔張謇 기념관을 둘러보기도 했다.

장지엔은 중국근대사에 있어, 현급 지역 경제발전을 실천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동시에, 중국 공업화 초기, 양무운동 당시, 민관협력에 참여한 소위 민간자본가로서도 중요하다. 청나라 말기 과거제도 최후의 장원급제자로도 유명한, 그는, 청일전쟁의 패배에 충격을 받고, 1896년 당시 난퉁현에 대생大生그룹을 창업하게 된다. 이것은 놀랍게도, 오늘날 강조되는 ‘로컬라이제이션Localization’, ‘현급지역의 종합발전’ 등으로 익숙하게 불리는 것들을 그런 개념도 채 존재하지 않던, 19세기에 선구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그 반대 개념인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서방자본주의의 역사발전과정에서, 금융자본의 유동성을 강조하는, 금융자본주의 단계에 진입하면서, 출현한 것이다. 산업자본은 초기에는 국가단위로 형성되어, 국적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로컬라이제이션으로 부를 수도 있다. 금융자본과 같이 마음대로 국경을 넘나들며, 이윤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단위의 산업자본이 양무운동하에 부국강병을 목표로 군사공업위주로 발전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의 민관이 협업하는 산업자본은 민간수요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지역에 기반한 진정한 로컬라이제이션 개념에 부합한다. 장지엔이 난퉁현에서 만든 대생그룹이 지역에서 1,2,3차 산업을 종합적으로 발전시킨 것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 다시 지역경제를 재건함에 있어, 이를 잘 참고해야 한다. 또, 난퉁의 실험이 단순히 산업과 자본의 발전이 아니라, 문화, 교육 등 각종 사회사업과 함께 연동해서 진행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장지엔은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농회農會를 만들어 농지를 간척하고 면화를 재배했는데, 이는 일차산업 생산물로 이차산업을 지원한 것에 해당한다. 80년대 출현한 향진鄉鎮기업들의 원형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농민이 생산한 면화로 방사공장에서 실을 잣고, 다시 개별 농가가 이를 이용해 직물을 짜게 했다. 당시, 강남지역 농민의 방직 역량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전체 사회사업의 발전이 대생그룹의 밑바탕이 됐다. 자본과 민간사회가 대립이 아니라, 상생을 추구했다.

이번 중앙오중전회中央五中全会에서 ‘향촌건설행동’을 특별히 강조했다. 역사속에서 사용된 ‘운동’이라는 표현을 행동으로 대체한 것은, 정치이념적 오해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중에 현급지역 및 그 이하 행정단위의 통합적인 발전 계획 수립에 대한 요청이 있다. 당연히 난퉁의 사례를 참고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하부의 행정단위인 향진鄉鎮급 지역 경제를 예로 들자면, 루쭈어푸盧作孚의 실천사례를 찾을 수 있다. 현재, 충칭重慶의 베이베이구北碚區이고, 당시에는 베이베이진鎮으로 불리던 곳이다. 지역의 각종 자원을 통합해서 발전을 꾀했다. 가장 하부단위인 촌村에서는 푸졘성福建 창러현長樂縣 잉쳰촌營前村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촌장인 황쟌윈黃展雲은 쑨원의 비서로 일하다, 국민당 푸졘성 당서기, 국민당 정부의 푸졘성 교육청 청장을 역임한 거물이었지만, 고위 관직을 사퇴한후 마을발전의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모두 지역 자원을 통합해서 발전을 추구한 사례이다.

근대사를 공부하면, 이처럼, 각 행정단위로 좋은 지역경제 발전모델의 사례를 발굴할 수 있다. 일방적인 산업화, 자본화, 공업화가 아니라, 지역에서 도농이 상생하면서, 통합적, 종합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 사례들이다.

두번째는 현대의 새로운 산업발전에 대한 관점이다. 지금 연근해의 지역경제에는 지역별로 구조적인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갈수록 국면의 차이가 명확해진다. 남방지역에서는 원래, 가공무역 수출형산업이 발전했었다. 외국자본이 들어와 값싼 노동력과 자원환경의 지대 이점을 활용해서 이윤을 얻던 산업들이다. 이제 이런 생산요소들의 비용이 중가하면서, 자본이 외부로 이동하고 있다. 초기의 외국 자본은 이미 일찌감치 철수해서, 중국내 자본이 접수한 상태였다. 이런 경제구조는 다양한 산업과 자원을 통합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므로 로컬라이제이션형으로 볼 수 없다. 성별, 연령 등의 노동력 제한이 있고, 취업난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이미, 과거의 중국과 유사한 조건을 가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혹은 그보다는 조건이 떨어지는 태국, 미얀마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노동력 조사에 있어서,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같은 무역형 산업이라고 해도, 져쟝성浙江, 푸졘성, 광둥성廣東의 경우가 다르다. 져쟝성의 일반무역형의 수출산업은 산업내 가치사슬이 모두 지역에 위치하기 때문에, 훨씬 안정적이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면, 일반무역형 수출산업이 가공무역형 수출산업에 비해서 로컬라이제이션 성격을 많이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말하려는 두번째 관점은 이러한 국면이 심층적으로 의미하는 바이다. 팬데믹 위기이후, 특히 미국이 그 이전부터 중국을 상대로 벌여온, 무역전쟁, 과학기술전쟁, 그리고 금융전쟁, 아마도 다음 타자가 될, 환경전쟁 등, 다양한 ‘중국때리기’국면의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국 중앙 정부는 베이스라인 底線전술을 강조하고 있다. 외부의 공격과 봉쇄속에서 생존을 위한 베이스라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국내대순환이 주가 되는 쌍순환 전략으로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수출지향의 국제대순환 위주의 경제를 과거 약 20년간 운영해왔다. 반대로 국내대순환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녹수청산 금산은산綠水青山金山銀山”의 양산兩山이론을 현급지역 경제에서 실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생태적 발전이다. 소위 123차산업 융합이 중요하다. 과거와 같이 단일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업태의 경계를 뛰어 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모든 생태공간자원을 신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자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현급지역경제가 중요하다. 그 하부 행정 단위인 향진과 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생태자원의 재산권은 촌단위경계의 연고에 기반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촌단위 집체경제를 새롭게 구축해서, 공간생태자원의 관리와 개발에 대한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마을집체가 123차산업 융합과 국내대순환 발전방향의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다.

촌단위의 정치, 행정과 재산권이 중첩되는 것이 이러한 개혁에 유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촌 단위에서는 개발을 위한 자본 동원 능력이 부족하고, 융자를 해줘야 할 금융기관은 리스크 관리에 치중하여,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 공간생태자원에 대한 표준화된 가치측정기준이 없고, 생태자원은 추상적인 인문자원까지 포함된 통합적 자산인 고로 개별요소로 쉽게 분할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금융기관이 평가와 관리를 할 수 없다.

그래서 현급행정단위가 역할을 해야 한다. 대부분의 상업은행 지점은 현급단위에 개설돼 있다. 이 단위에서만 농업생산자와 금융공급자를 연결시킬 수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만, 현급지역 경제의 종합적 발전을 꾀할 수 있다.

현재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유가증권발행시장의 메커니즘을 도입해서, 농촌의 생태자원을 자산화하고, 현급 플랫폼회사의 자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형성된 플랫폼회사의 자산을 토대로, 금융기관들이 평가와 융투자를 할 수 있다. 동시에 금융기관외에도, 국가재정부문, 보험, 농업담보회사 등이 함께 손잡고, 이 투자에 대한 리스크 관리를 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상의 혁신이 현급지역경제의 종합적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장지엔의 100년전 실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대생그룹은 이미 1,2차산업뿐 아니라, 물류, 저장, 금융, 보험 등을 함께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30년간 지속된 난퉁의 실험은 포용성과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주목할만하다.

 

김유익

목, 2021/03/11- 19:28
3
0

지지지지’? 잘못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이 땅 고위 관료의 희화화된 자화상

관료의 대표자 격인 홍남기 기획재정부장관은 지난달 ‘지지지지’ 발언을 해 ‘지지지지’란 말이 한동안 회자된 바 있다.

“‘최선을 다한 사람은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담백하게 나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연하고 담백하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저부터 늘 가슴에 지지지지(知止止止)의 심정을 담고 하루 하루 뚜벅뚜벅 걸어왔고 또 걸어갈 것입니다. 저는 우리 기재부 직원들의 뛰어난 역량과 고귀한 열정, 그리고 책임감있는 사명감과 사투의지를 믿고 응원합니다.” – 2월 2일 홍남기 기획재정부장관 페이스북 글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 말은 그야말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잘못된 말’이다.

이 ‘지지지지’란 말은 유명한 국문학자 정민 교수가 조선일보에 쓴 기고문이 그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앞의 ‘지지(知止)’는 알려진 대로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뒤의 ‘지지(止止)’에 대해 정민 교수는 그 기고문에서 “고려 때 이규보는 자신의 당호를 지지헌(止止軒)으로 지었다. 지지(止止)는 ‘주역’ 간괘(艮卦) 초일(初一)에서 “그칠 곳에 그치니 안이 밝아 허물이 없다(止于止, 內明無咎)”고 한 데서 나왔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는 오류다. <주역>이 아니고 <주역>을 모방한 <태현경>이라는 일종의 궤변서로서 쉽게 말하면 ‘짝퉁 주역’이며, 그 책에 나오는 止于止라는 어귀에서 止止를 끌어내 앞의 지지(知止)에 자의적으로 붙여 만들어낸 말이다. 언어유희에 불과한 ‘억지 말’이요 ‘엉터리 말’이다.

이러한 ‘잘못된 문자’를 그것이 잘못된 줄도 모르고서 오히려 그로써 ‘헛된’ 우월감을 과시하고자 한다.

‘지지지지’, 이 땅 고위 관료들의 희화화된 자화상이다.

 

고위 공직을 모두 개방직으로 전환시켜야

말단 직급에서 차관이나 장관까지 올라가는 ‘입지전적 인물’이 미담으로 소개되는 일이 많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 공직 사회의 후진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미국이나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공직에서 국장급 이상의 직위는 우리처럼 기본적으로 관료 출신이 자동 승진하여 당연히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두 정무직(政務職)으로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 우리나라와 달리 공무원들은 대부분 국장급 아래의 직위에서 멈춘다.

미국에서는 대통령과 정부가 바뀌면 정부 국장급까지 정무직(political appointees)으로서 모두 대통령이 임명하게 된다.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최고위층 공무원은 EL-Ⅰ에서 EL-Ⅴ까지 5등급으로 분류된다(EL= Executive Level).

EL-Ⅰ: Secretary(장관)

EL-Ⅱ: Deputy Secretary(부장관)

EL-Ⅲ: Under Secretary(차관)

EL-Ⅳ: Assistant Secretary(차관보)

EL-Ⅴ: Deputy Assistant Secretary(국장급)

프랑스 역시 중앙부처의 국장, 임명직 도지사, 교육감, 대사 등 500여 개의 직위가 정치적 임명직(자유재량 임명직)으로서 국무회의 심의 심사를 거쳐 특별 채용하는 등 대통령은 총 7만 여 개의 직위를 임명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은 “대통령의 정무직 공무원 임명권을 제한하는 것은 통상 변화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인 기존 경력직 공무원의 강력하고 뿌리 깊은 관료주의를 강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차제에 우리나라도 (탁월한 역량을 보유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미국이나 프랑스처럼 국장급 이상의 고위직군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정무직으로 구성하는 방안이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차원에서도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직업 공무원들이 독점하는 고위공무원직을 모두 개방직으로 전환하여 3급 이상 고위 관료군의 문호를 모든 국민에게 개방해야 한다. 이는 유능한 인재 채용의 길이며, 동시에 ‘영혼 없는 관료 현상’의 방지를 위한 실질적 방안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영토, 그들만의 금자탑

관료 조직은 외부에서의 진입이 철저히 봉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도 지금은 5급 공채로 그 이름만 바꾼 고시 출신의 성골을 비롯하여 진골 그리고 육두품 등등의 차별과 장벽의 철옹성으로 둘러쳐진 이너서클의 조직이다. 온전히 그들만의 영토이고 그 영토 안에서 승진을 매개로 하는 상명하복의 수직적 (vertical) 문화와 관행으로만 ‘잘 훈육된’ 구성원이 존재하며, 그들이 쌓아올린 그들만의 금자탑이다. 그들이 곧 규칙과 룰(rule)의 제정자다.

무엇보다도 민간전문가를 포함하는 일반 국민들의 공무원으로의 진입이 전면적으로 개방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국민에게 실질적이고 보편적인 공무담임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비단 국가시스템 운용의 합리성 제고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국민주권 강화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 제도의 폐쇄적이며 경직된 구조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외부 개방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정신에도 부합된다. 이는 격변하는 현대의 지식 정보 사회에서 각 분야에 있는 우수 인력에게 국가 관리의 기회를 제공하며, 특히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박탈’된 많은 우수 인력들에게 일종의 ‘패자 부활전’의 장(場)을 열어 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무원이란 영어로 ‘public servant’로서 문자 그대로 국민을 위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며, 한자어로는 ‘국민의 종’이라는 뜻의 ‘공복(公僕)’이다. 우리 헌법 제7조에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라고 규정하고 있다.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공무원의 신분보장과 정년 보장은 권력의 압력에 굴복하지 말고 정파를 초월하여 국민에 대한 봉사를 하라는 의미에서 제공되는 것이다.

과연 공무원에 대한 이러한 신분 보장과 정년 보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공무원의 신분 보장과 정년 보장이 헌법이 규정한 바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를 게을리 하게 만드는 제도적 온상이 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LH 사태, 빙산의 일각일 뿐

최근 우연히 드러난 LH 투기꾼 공사직원들 사태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 땅의 관료집단은 국가자본주의 시스템과 발 맞춰 성장해왔다. 그들은 겉으로만 봐서는 정치 권력의 하수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 세력들이 정쟁으로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관료들이 챙겨주는 ‘떡고물’과 낙하산 자리 손에 넣을 때, 그 나머지 대부분의 실속은 관료들의 차지다. 그들은 그렇게 정치 권력에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는 한편 아래로는 시민 세력을 완강하게 억압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높다란 장벽을 치고 감시와 견제의 철저한 부재, 혹은 그 유명무실 속에서 전현직 모두 어울려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다.

정치 권력은 원래부터 관료개혁에 의지도 없지만, 더구나 관료들의 도움 없이는 권력 유지가 불가능하므로 언제나 관료를 우군으로 여긴다. 그렇게 관료공화국의 철옹성은 더욱 강고해진다.

정치 권력은 여전히 관료개혁에 대해 아무런 의지도 없고 시민 세력 역시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변화되지 않는 한, 이 땅의 관료공화국은 반근착절(盤根錯節), 계속 번성할 것이다.

 

소준섭

화, 2021/03/16- 19:58
6
0

역자해설:

쳰리췬錢理群선생은 루쉰과 마오쩌뚱연구자로서 국내외에 잘 알려진 중국의 저명한 학자이다. 베이징 대학 중문과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중국내 신향촌건설운동과 자원활동가문화 확산의 든든한 조력자로 남아 있다. 인문학자인 그에게, 꾸이저우의 안슌지역에서 보낸 젊은 시절의 18년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농촌)지역으로의 하방上山下鄉’ 경험이 많은 경우에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아있긴 하지만,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지역, 농촌, 평민들과의 진실한 대면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쳰선생과 같은 대도시의 명문 지식인 가정書香世家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는 특히 그러하다.

 역자가 느끼는 중국은 최소한 세개의 분리된 사회이다. 베이샹광션北(京)上(海)廣(州)深(圳)을 정점으로 하는1, 2선 대도시들의 tier 1, 3~5선 지방 도시들의 tier 2, 그리고 현청县城, 샹쪈乡镇을 포함한 농촌지역의 tier 3이다. 중국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큰 지역과 인구를 포함하는 성省급 지역만 30여개가 넘는, 매우 크고 다양한 사회이긴 하지만, 사회적 담론과 여론의 형성은 압도적으로 tier1 사회에서 이루어진다. 중앙과 지방이라는 더 거친 2분법적 구도를 사용하자면, tier1이 바로 중앙을 의미한다. 중앙으로 모든 자원이 집중되는 상황속에서, 사회적 영웅주의, 엘리트주의가 만연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서울과 수도권이라는 블랙홀이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는 한국 사회에서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중국 정부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양한 지역기반의 개발정책이 그러하고, 향촌진흥 정책도 좋은 사례이다. 규모가 한국과 다른 중국의 ‘격차’는, 발생시키는 문제의 강도도 그만큼 세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앙위주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지역과 민간의 자발성과 그 잠재적 역량을 훼손하는 것이다. 민간의 자치와 결집은, 근대100년의 역사를 통해, 중국 사회가 온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큰 난제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정치적 권한을 분산하기 힘든, 동아시아 가부장 국가의 가장 오랜 전범典範으로서, 중국이, 지방의 문화와 경제만을 떼어서 진흥하려는 시도는 자기모순을 피하기 힘들다.

학술 영역에서도 역사의 해석권을 독점하는 것은 정부와 중앙의 가장 큰 권리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중앙과 지방의 불평등은 역사기술의 영역에서도 첨예하게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의 서남변방이자 최빈곤지역중 한곳이며, 소수민족의 집거지인, 꾸이저우성의 4선도시인 안슌의 역사는, “매우 빈약하게”, “기술되기만 하는” 타자의 타자의 이야기로서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중앙의 최고엘리트이면서도, 민간과 지역의 중요성을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속에서 몸으로 깨친 첸리췬선생은 은퇴후에도 안슌시와 자신의 특별한 인연을 바탕으로 이 문제의 해결에 나섰다. 그는 동시에, 중국과 서구 인문학의 학술적 방법이 대립되는 상황에도 주목한다. 중국 고전의 대표격인 ‘사기’의 형식을 빌린 것은, 중국적 학문 전통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되살려 보려는 흥미있는 시도로 눈여겨 볼만하다.   

2천년이 넘는 중국의 안정된 사회 발전은, 중앙과 지방, 국가와 민간이 균형을 이루고, 암묵간의 상호존중을 유지할 때만 지속가능했다. 안슌성기安順城記의 사례가 미약한 시작이나마 정부의 협조하에 지역과 민간의 역량을 민주적으로 회복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원문에서 안슌 지역과 관련한 지나치게 구체적인 부분은 한국 독자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생략하고 번역하였다.      

편집자 주:

쳰리췬 선생은 1960년 대학 졸업후 꾸이저우성貴州 안슌安順으로 보내져 18년간 지역 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다. 2020년 12월18일 쳰리췬 선생이 편집장 역할을 맡고, 꾸이저우성 문사文史연구관이 참여하여 발간한 ‘安順城記’의 발표 행사가 꾸이저우사범학원에서 거행됐다. 쳰리췬 선생은 이러한 지역역사서를 발간함에 있어서, 당대 중국 역사연구의 세가지 문제점을 제기했다. 그것은 “역사는 있지만 인물이 없고, 큰 인물은 있어도 작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물의 겉으로 드러나는 공과는 기록해도 내적 심리 세계는 소홀히 하는” 점이다. 더욱 근본적으로는 “역사속에서 인문정신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즉, 역사기술속에 사람이 없고, 사람의 영혼이 없고, 사람의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 이런 방식으로는, “지식을 더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에게 사상의 계몽, 영혼의 동요, 생명의 깨달음”과 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쳰리췬 교수와 꾸이저우 현지의 지식인들이 협의하여, 사기’史記’의 형식을 따라, 안슌의 지방역사를 편찬하였다. 자신이 딛고 선 땅에 관심을 돌리고, 민간 주도와 자각적인 방법론 사고를 통해, 이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국역사의 변화와 함께 전통과 현대, 국가와 지역의 변증을 드러내었다.  

 

 

꾸이저우의 내륙으로 들어가 “서남대도회 西南大都會”의 지역문화, 풍모와 품격을 이해하다

안슌安順은 꾸이저우의 내륙지역에 위치한다. 윈난雲南의 목구멍, 꾸이저우貴州의 배꼽, 쓰촨四川의 입술과 이빨에 해당한다. 지역에 큰 강 두개가 흐르는데, 각각 장강長江과 주강珠江으로 흘러들어 간다. 안슌은 두 강의 분기점에 위치한다. 이르는 길이 매우 험지여서, 교통이 불편하다.

원나라 시기에 역참을 설치하면서, 꾸이저우를 동서로 가르는 길을 냈다. 이때부터 안슌은 꾸이저우를 통해, 윈난으로 이르는 통로가 된다. 청나라 시기까지 상업이 매우 흥해서, 꾸이저우 성내에서 가장 번성했다. 서남지역의 대도회라고 불렸다.

안슌은 춘추전국시기까지 예랑국夜郎國에 속했고, 한나라 시기부터 중앙 정권에 편입됐는데,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남방을 정벌하면서, 성곽을 축조해서 안슌성이 됐다. 명나라 이전에 안슌에는 주로 이족彝族, 걸로족吃老族, 푸이족布依族, 묘족苗族 등 소수민족이 잡거했다. 한족이 안슌을 비롯한 꾸이저우 각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주원장의 남방정벌시기 이후이다. 특히, 윈난이 평정되고, 꾸이저우와 윈난으로 쟝쑤성江蘇省으로부터 대량의 이민이 발생했다. 한족 개척민과 주둔군인들의 후예들이 주류를 이루며, 그들만의 문화를 형성했다. 1394년에 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나라 시기의 관학체계가 들어와, 유교중심의 중화 주류세계에 편입됐다. 동시에, 한족과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다원적 문화체계가 만들어졌다.

 

사기의 형식을 빌어 安順城記를 집필하다 

안슌은 이미 춘추전국시대부터 국가가 존재했지만, 중화민족의 중앙정권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기에, 명나라 이전에는 거의 역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명나라 시기 꾸이저우성의 지역사 기록이 존재하지만, 안슌의 역사에 대해서는, 청나라 말기에야 발견할 수 있다. 민국시기 안슌의 지식인들이 청말부터 민국시절까지 안슌의 기록이 부재함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지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나 제대로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민국시기 중국 전 지역에서 지역사 기록을 남기려는 계몽주의적 흐름과 맥을 갖이한다. 1990년대에 지방사를 편찬하는 흐름속에 보다 체계적인 역사기록이 시도됐으나, 한편으로는 천편일률적인 형식에 갇혀 다양성과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발견된다. 그리하여 민국시기 이후, 지역의 특색이 잘 반영된 지역사 기록을 완성하는 것이, 지역지식인들의 과제로 남게 된다. 새로운 지역사를 집필하려는 생각은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14년에 걸쳐 안슌의 지역사를 새롭게 기록하다

2004년부터 이와 같은 논의가 시작되어, 2018년에야 완성을 보게 된다. 이 14년간의 역사는 두개의 시대, 역사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첫번째, 꾸이저우문화의 발전을 고찰해보면, 당대 중국문화의 전체 구조안에서, 꾸이저우는 늘 문화적 볼모지대로서, 낙후된 지역으로 홀대를 받았으며 그러한 입장조차도 외부인의 시각으로 타자화하여 “기술되어버린”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꾸이저우 현지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의 역사를 기술하자는 사명감을 갖게 됐다. 동시에 안슌의 문화를 재발견하여, 지역이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찾을 때, 통합적인 지역문화 생태계를 재건함과 동시에, 감춰진 이 지역의 진짜 역사를 만들게 된다. 이것이 오랫동안 무시돼왔기에, 낯설기만한 문화안슌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땅을 다시 인식하고, 잃어버린 안슌의 문화를 되찾는 임무가 주어졌다.

둘째, 새로운 시대에 지역의 문화를 고찰하고 인식하는 것은, 그냥 안슌이라는 이 지역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고향과 땅에 대한 인식, 파악, 묘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역에 뿌리가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중국 전체, 그리고 전세계에서의 좌표를 찾아야 한다. 이것이 소위 ‘대문화’의 개념이다. 그래서,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각자의 차이가 빠르게 사라지고, 개성을 잃어버리고, 문화가 동질화되는 상황속에서, 다원적이고 다양성있는 지역문화가 특수한 가치를 제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단일화 추세에 재갈을 물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방식으로 안슌의 문화안에서 일종의 세계적 의의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지역문화의 지식계보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탐구한다. 중국과 전세계안에서 지역문화를 연구하는 방법을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역사서술 방법을 어떻게 취할 것인가? 우리는 중국의 전통, 즉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생각해냈다. 사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문사철文史哲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사기는 역사의 고전인 동시에 문학고전이기도 하다. 사기의 형식은 세가지 이점을 갖고 있는데, 첫째, 큰인물뿐 아니라, 작은 인물들도 기술된다. 사람들의 공과뿐 아니라, 개인의 성격, 형상과 심리를 알 수 있다.

둘째, 체계에 있어서, 통사와 나라별 역사, 특정 분과별 역사와 지역사가 함께 결합되어 있다. 그렇게 역사적 사실과 인물이 서로 교직되어 있다. 그래서 역사관과 역사인식의 기술에 유리하다. 본기本紀와 열전列傳, 표表 구조가 영감을 준다. 세번째로, 역사서술에 문학적 표현을 잘 사용하고 있다. 사기의 관점과 방법적 기초를 활용하면서 전통적 지방 역사 기술 체계의 이점을 더하면 장단점을 상호보완하여 새로운 시야, 서술, 배후의 관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史記‘의 방법론과 이념을 적용하는 것은, 중국 역사학계가 그동안 지나치게 서구 일변도의 영향을 받은 것을 반성하기 때문이다. 서구 역사학계는 분과학문으로 철저하게 나뉘는데, 합리적이라는 장점 못지 않은 단점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가지 역사 기술의 문제점이다. 역사는 있지만 인물이 없고, 큰 인물은 있어도 작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물의 겉으로 드러나는 공과는 기록해도 내적 심리 세계는 소홀히 하는 점이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역사학계를 비롯한 중국의 학계가 지나치게 지식, 기술, 시스템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람, 사람의 영혼과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문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죽은 지식은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안슌지방의 역사 기록은 현대적 관점을 유지하면서, 사기라는 고전적인 틀을 사용해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전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여기 저기 흩어져있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지역의 역사를 통합하여 새로운 맥락에서 서술했다.

또, 전체적 편찬 구성에 있어서, 단순히 사기의 형식을 기계적으로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특징과 내용적 표현의 요구에 맞게 변형시켰다. 이를테면 본기本紀는 기紀로, 연표年表를 대사大事年表연표와 직관職官표로 분류했다. 지志는 서書로 바꾸고, 왕후귀족의 세가世家는 일반평민의 세대지가世代之家로 바꾸었다. 등등.

 

새로운 지역사기술의 열가지 원칙

우리는 이 작업에 있어서 열가지의 구체적 원칙을 세웠다.

첫째, 안슌이라는 이 지역에서, 지역의 문화, 지역의 사람 (엘리트와 일반 지역민)이 중심이 되는 지역사를 기술한다. 땅, 문화와 사람이 키워드가 되게 한다. 

둘째, 안슌이라는 다민족 잡거지의 특징을 살린다. 각 소수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그들 각민족의 신화를 기록한다. 많은 항목에 소수민족의 내용이 포함되도록 설계한다. 씨족氏族誌, 예속禮俗誌, 종교宗教誌, 과거科舉誌, 약재藥材誌, 예술과 문화藝文誌 등. 그중 과거지에는 명청시대의 과거제도에서 실시한 소수민족에 대한 교육정책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약재지에는 외부에도 많이 알려진 묘족苗族의학과 묘족의 약재에 대해서 소개한다. 예문지에 각 소수민족의 민요를 포함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 역사는 다민족이 공동으로 창조하는 것이라는 새로운 역사관을 정립할 수 있다.

셋째,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안슌의 문화를 드러낸다. 대내적으로 존재했던 다민족의 공존과 민족간의 상호영향이라는 특징을 드러낼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존재했던 외부세계와의 교류와 외부문화의 수용을 드러낸다.

넷째, 지역 엘리트와 민중의 관계를 정확하게 기술한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는 엘리트와 평민이 함께 창조하는 것이라는 우리의 역사관을 주장한다. 즉, 지역 엘리트의 역사에 대한 공헌뿐 아니라, 평범한 지역의 인물들과 민중의 풍속습관, 그리고 일상생활에도 주의를 기울인다.

다섯번째, 안슌의 지역특색을 잘 드러낸다. 그래서 예전의 부족한 기록들을 보충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새로운 항목들을 집어 넣었다.

여섯번째, 생명사학의 개념을 관철시킨다. 즉, 개개인의 생명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모든 구체적 민족, 가족과 개인의 생애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이 땅의 생명을 드러내고, 역사의 변화와 노멀normal을 기술하고, 지역 문화의 성격을 기록하고, 안슌 사람들의 영원히 변치 않을 평범한 일상생활과 그 영고성쇠속의 평안한 모습을 기록한다.

일곱번째, 단순한 역사기술이 아니라, 문학, 사회학, 민속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철학을 융합시킨다. 즉 ‘대산문大散文’적 역사서술법을 유지한다. 이러한 역사서술은 문학성을 중시하고, 언어에 주의를 기울인다. 안슌의 지역방언을 잘 활용하여, 스테레오타입을 뛰어넘는 비유형화된 기록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최대한, 형이상학적 의미를 갖는 민간신화와 전설 등을 수집하여 기록한다. 즉, 지역민들의 세계와 우주관, 피안과 차안에 대한 이해와 상상을 발굴하여 소개한다. 

여덟번째, 직관적인 자료를 많이 이용하여, 역사의 원형을 추구한다. 성省과, 지역 사료내의 지도 등, 안슌의 도상학자료를 최대한 포함시키고, 추상이 아닌 실제적 의의를 갖는 회화작품, 인물도, 그리고 각 시대의 오래된 사진을 넣는다.

아홉번째, 새로운 사료와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추가한다. 새로운 사진 자료, 최신의 고고학적 발견 등이 포함되도록 한다. 문헌자료의 수집뿐 아니라, 사회조사와 필드연구도 대규모로 실행한다. 이렇게 수집한 민간사회의 살아 있는 사료를 잘 활용한다.

열번째, 우리의 목표는 창조성, 실험성과 개척성이 충만하면서도 역사저작물의 본령을 잃지 않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대 역사 저작이 품어야 하는 도전정신이다. 현재의 역사저작 모델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자신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동시에, 스스로 다원적인 세계안의 한 요소로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인정해야할 사실이 있다: 선명한 특수성의 추구가 또다른 한계와 결함을 초래하게 됐다. 이것을 역으로 ‘결함’의 가치로도 볼 수 있다. 세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 본원적으로, 민간에서 역사를 기술하면서, 역사지식전달이라는 임무를 소홀히 하고, 특수한 것만을 추구하게 되면서, 누락되는 부분들이 생겨났다. 둘째, 사료의 한계의 영향도 받는다. 이용할 수 있는 문헌과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불가피하게 의미가 있고, 특색이 있는 조목을 제외하거나, 조목을 남기더라도, 충분히 다루지 못하게 됐다. 끝으로 전문 역사연구자가 참여하지 못했고, 참여자들 모두, 전업으로 한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의 주관적인 설계와 노력은 실제의 객관적인 결과와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과를 내었다. 이를 더 개선시켜 나갈 후학들의 미래의 작업에도 기대를 잃지 않는다.

끝으로, 안슌성기安順城記 프로젝트는 민관협력하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민간에서 역사를 기술했다는 실험적 시도의 의미가 있다. 전 과정에 걸쳐서, 꾸이저우성과 안슌시정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슌시 사회과학연합회와 협력하였기에 이 프로젝트가 가능했다.

그밖에도 세가지의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하나는 현지인과 지역에 관심이 있는 외부인이 함께 협력한 것이다. 지역의 학자들이 주체가 됐지만, 지역에 일정한 연고가 있는, 외부의 학자들이 참여해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두번째, 편집장, 편집위원회, 총집필인, 집필자의 체계적 조직구조를 취해서, 각각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하게 했다.

세번째, 이 작업에 각 세대가 고루 참여했다. 30호우後(1930년대 출생자), 40호우가 편집장을 맡고, 50호우, 60호우, 70호우가 총집필인과 집필자로 참여했다. 80호우도 집필에 힘을 보탰다.  이 과정을 통해, 안슌지역의 지방문화를 연구하는 학술팀을 만들어 냈다. 책을 출간하면서, 인재를 육성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역사연구를 통해서, 문화연구 성과를 거뒀고, 이를 문학자원과 교육자원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광대한 저변의 청년과 시민들 사이에서 지역문화, 향토문화를 발전시키고, 보급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래를 내다보고, 후대의 자손들이 꾸이저우와 안슌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이 발딛고 있는 지역을 인식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역사지식을 제공했다. 조상과 후손들 모두에게 공덕을 쌓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정신적인 위안과 성장을 얻었다. 이게 가장 중요한 결과일수도 있다.

 

원문링크

https://mp.weixin.qq.com/s/vUdeFHW-UXz6evHTHDVFGw

목, 2021/03/18- 19:57
3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