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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속 향촌의 자치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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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속 향촌의 자치운동

익명 (미확인) | 목, 2018/10/04- 11:06

배달민족으로서 우리의 건국설화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여 매우 특별하다. 대부분 나라의 경우. 건국설화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배경으로 설정하거나 초인적인 영웅의 이야기로 출발하여 지배권력을 미화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반하여, 우리 설화의 경우에는 태백을 거점으로 삼아 상제의 아들인 환웅이 보기에 아름다운 땅을 선택하여 나라를 세우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이화세계(理化世界)를 이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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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 모셔져 있는, ‘환인, 환웅, 단군왕검’의 초상화

단군신화로 알려진 위의 이야기가 후대에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지어낸 것인지, 오랜 역사 속에 체화되고 전승되어온 이야기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화적이며 정치적인 토대를 형성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언어로서 가장 감동적이며 성스러운 내용을 담아낸 성경의 주기도문과 같이,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 나라를 세우며(이화세계) 널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으로 규범(홍익인간)을 삼는다는 것은 종교사적 견지에서는 황금률적인 표현이며 정치학적 의미에서도 제1의 공의적 원칙이다. 이번 글을 통하여 상기의 원칙들이 한국 역사에 투영된 기록을 찾아가며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가름해 보고자 한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무속적 신앙에 기초한 공동체적 모습으로 수렵사회를 반영한 제천행사가 부여 영고, 동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 형태로 행하여졌다고 전해지며, 농업이 번성하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단오와 추석과 같이 마을 사람 모두가 함께 음식과 가무를 즐기는 명절로 발전해 왔다고 한다.

이후 신라의 기록을 보면 불교가 전해지면서 지배계층인 화랑이 중심이 되여 향도(香徒)라는 조직이 만들어져 지배질서로서 종교적 규범을 강조하고 생활의 실천적 지침을 삼아 내려오다, 이후 일반백성에게까지 조직이 확산되면서 새로이 절을 짓거나 탑을 쌓거나 불공의 행사에 다중들이 함께 모여 공력을 제공하고 신앙적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

고려 왕조로 들어서면서 종교적 배경과 행사를 위해서 조직되고 활동하였던 향도는 이제 향촌의생활 속에 자리를 잡으면서 香徒가 아닌 鄕徒가 되여 생활의 공간과 내용을 공유하면서 함께 노동하고 함께 즐기고 서로를 도와가는 양속으로 이동했다. 마을의 공동노역, 혼례, 장례, 마을 수호신 제사를 함께 치르면서 자연스레 상부상조적 조직으로 변모해 갔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한민족 역사를 줄곧 관통해온 두레라는 협동적 노동방식과 상부적 자조금융인 다양한 형식의 계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향촌의 통치 방식에서도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을 내세워 왕권을 대신하여 중앙에서 향촌으로 파견된 관리 간에 협의 내지는 역할 분담을 이루면서, 읍사(邑司)가 중심이 되어 일종의 지역자치를 이루면서 내려온 셈이었다. 그러나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되어 확산되면서 자치적 성격이 강했던 향도와 읍사는 양반 중심의 지배계층에 의해 유교의 가르침과 규범을 가르치는 향약(鄕約)으로 흡수되어 재구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향약은 사원과 함께 향촌에 뿌리를 내린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중앙정치의 훈구 세력에 맞서는 일종의 정치적 거점으로 변모한다.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적 관료체제인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경제의 축을 이루는 농업 기반인 토지의 사용 및 소유의 형태와 조세정책의 변화에 따라 이해를 달리하는 지배권력간의 이권과 세력다툼, 그리고 권력의 틈새에서 민중들 스스로 자조하고 순응하며 때로는 협약하고 저항해온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경제의 기반과 운용의 결과물을 놓고 지배계급과 기층민중간에 전개되는 ‘정치동력학’적 궤적이다.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확고히 정립한 조선조 초기에는 주요 경제기반인 농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산업정책의 기본으로 정하고 소농의 농민을 중심으로 백성을 위한 민본(民本)의 왕도사상을 정치적 지향으로 삼아 왔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정도전, 조준 등이 비록 의도했던 균전제를 온전히 도입하지 못했으나 과전 및 직전법을 시행하여 고려 말 혼란하고 무질서했던 토지 소유관계와 조세체계를 바로 잡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왕족과 세도가들의 토지겸병 현상이 심화된다. 수조권을 기반한 토지지배구조가 약화되거나 붕괴되고 매득(買得), 장리(長利,) 개간(開墾) 등 통하여 토지의 사적 소유가 확대되면서 농지를 떠나는 유민(流民)들이 대거 발생하고, 일부 양반들이 사노(私奴) 또는 소작농으로 전락된다.

이에 지방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은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희가 만든 주자증손여씨향약을 제도적 모범으로 삼고 사원과 유향소의 부활을 구실로 삼아, 탐욕스런 중앙의 왕족들과 세도가들을 견제하며 나라의 기반인 농촌사회가 무너져 가는 것을 방지하고 성리학을 정치사회적 규범으로 삼아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고자 목숨을 건 정치투쟁을 전개한다.

중종에서 시작하여 명종을 거쳐 임진왜란 전의 선조 대에 이르기 까지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 시절에 향약을 한글로 보급한 것을 시작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들인 조광조, 이퇴계 그리고 이율곡 등으로 이어지면서 사림파와 훈구파 간에 성리학의 해석을 겸한 권력투쟁과 향약논쟁의 역사가 펼쳐진다.

향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중국 섬서성의 한 향촌에 국한되어 행하였던 여씨향약을 주자가 국가단위의 시행을 위하여 새로이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주나라의 제도를 따라 다음과 같이 주요 4개의 덕목으로 요약하였다.

덕업상권(德業相勸) : 좋은 일, 바른 일은 서로 권한다.

예속상교(禮俗相交) : 미풍양속으로 서로 교제하여 이를 널리 확산시킨다.

과실상규(過失相規) : 잘못한 일은 지적하고 비판하여 바로 잡는다.

환난상휼(患難相恤) : 개인 또는 향촌이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돕고 함께 극복해 나간다.

향촌에 거점을 두고 있던 조선조 사림의 양반들은 상기 향약의 내용과 제도를 무기로 삼아, 한편에서는 중앙정치의 세도가들의 탐욕과 패악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성리학적 윤리도덕을 기반으로 현존의 상하 신분관계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 향촌의 공동체에 자발적 참여를 통한 자치기능을 부여하여 스스로 규계(規戒)하고 향촌을 유지 발전시키는 규칙을 세우며 고조선 이래 배달민족의 양속인 향음주례(鄕飮酒禮)의 전통을 지켜 나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림파들의 향약 실천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움직임에 대하여 중앙의 왕족과 세도가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어 거부한다. 예건데 인물이 부족하다거나, 인심과 풍속이 투박하여 오히려 역작용의 폐해가 예상되며, 신분제의 붕괴가 염려되고, 왕권의 향촌을 다스리는 힘이 약화된다는 등 이유를 핑계로 삼아 몇 번의 사화를 통하여 사림파들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거친다.

권력의 다툼과 논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향약은 오래된 것으로 이를 실시된 곳마다 사람들이 서로 보살피고 돌아보며, 서로 돕고 질병에 함께 대응하며 구제하며, 자제로 하여금 유학의 가르침을 따라 효제의 뜻을 두텁게 하는 것을 가르치니, 삼대지치(三代之治)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 – 化民成俗”라는 상소에 따라 중종 시절부터 적극적인 시행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매우 주목할 만한 인물이 조선중기 최고의 지성이자 실천적 행정가였던 이율곡 선생이다. 본인이 관직에 있을 당시 향약을 권하면서 파주향약의 서문을 직접 작성하였고 청주목사로 재직 시에는 서원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조가 향약을 전국적으로 시행하려 하자 오히려 시기가 너무 이르다(時期太旱)고 주장하며 시행을 보류하도록 간곡히 주청하여 계획을 중단시켰다. 더욱 기이한 것은 본인이 훗날 향촌에 머물면서 다시 완성도가 매우 높은 해주향약을 제정하여 보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일견 서로 모순되고 상반된 이런 대목은 선조라는 못난 왕의 됨됨이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능할 듯하다. 사림들의 줄기찬 요구에 따라 신하들의 논의를 거쳐 향약의 전국적 실시를 결심할 단계에서 이율곡은, 선조가 민본의 왕도정치에는 별로 뜻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왕권 강화에만 마음이 머물러 있어, 이런 상태에서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향촌의 자치적 기능과 양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훼방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왕권과 중앙정치의 강화를 위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할 것을 심히 염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은 필자가 제3 섹타경제론의 서론에서 제기한 지적과도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겨우 유아기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재단계의 사회적 경제영역은 당연히 지자체를 포함한 정부와 공공기관의 법제적 도움과 재정적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揚水論), 제3 섹타가 추구하는 자발적 참여와 스스로 역동적이어야 할 네트워크 형성을 정치와 행정 권력이 저해하거나 왜곡시켜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되풀이 언급하지만, 제2 섹타와 더불어 세 분야 영역 모두 병렬적 하이브리드 방식으로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율곡 선생이 보여준 천재적이면서도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다시 한번 반추해 볼 수 있다. 그는 단지 패자적 왕권과 세도가들의 영향을 차단한 것만이 아니라,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여씨향약을 당시 조선의 현실에 맞게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실천적인 내용을 담아내었다. 자발적 참여와 회원들간 원만한 합의를 유도하기 위하여 향약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세칙을 정치하게 기술하였고, 실천적이고 구속력 있는 모임이 되기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선악부(善惡賦)의 작성 요령과 규칙을 세밀히 규정하여 향촌내 세력가들이 행할 자의적인 패악을 엄하게 금하였으며, 향약의 기능을 사창(社倉)과 통합하는 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을 제창하여 현대적 의미에서 향촌단위의 사회안전망적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율곡 선생이 지향했던 향약 실천의 뜻을 다시 정리해보자면 단순히 기존의 지배 질서를 온전히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넘어서서, 위로부터의 통치가 아닌 백성들의 자발적 참여에 따른 자치를 이루고, 성리학적 규범 가치를 공유하면서 예(禮)를 통한 윤리적 절제로 향촌의 도덕적 질서를 유지하며, 향촌 단위로 상호부조를 통해 사회경제적 안전망 기능을 부여하고, 전체적인 강제보다는 개인과 공동체간의 관계성 회복에 초점을 두었다 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앞선 칼럼 ‘인본적인 사회주의자’에서 소개한 19세기 초 프랑스 사상가 사를 푸리에의 기획과 일맥 상통하며 1990년대 노벨경제학을 수상한 인디애나 대학의 오스트롬 교수의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라는 저작에 담긴 구상과 비견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에 다시 한번 대학자의 경륜과 가르침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안타까운 것은 필자가 역사 공부에 어둡고 한문이 서툴러 한걸음 더 깊이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분야의 전문학자님들께서 좀더 구체적이고 풍부한 내용을 밝혀주시길 희망할 뿐이다.

아쉽게도 향촌 단위의 자치적 분권을 의도하였던 향약의 보급과 시행은 임진왜란 이후 기존 신분제의 급격한 붕괴, 다양한 원인으로 촉발된 농민층의 분화, 향시(鄕市)를 넘어선 격지 간 상업의 발달, 세도정치의 패악, 삼정의 문란 등으로 멈추어 서게 된다.

반면에 사림의 양반이 주도하였던 향약 운동을 대신하여, 모내기를 도입한 이양법으로 농업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오랜 전통으로 이어져 왔던 일반 백성 중심의 집단협동적 노동방식인 두레와 상호부조적 금융시스템인 다양한 계의 모임이 활발히 되살아 나고, 외척과 부패한 관리 등 지배층의 탐욕과 패악에 대항한 산발적인 민란이 지속되면서 새로운 자각과 실천 운동들이 벌어지게 된다.

청제국을 파탄내는 서세동점 흐름과 한국땅에 상륙한 가톨릭과 개신교 등 기독교의 충격 속에 북학파를 시작으로 전개된 다양한 실사구시적 운동, 위로부터 자강을 시도한 개혁파의 시도, 일반 백성들의 근대적 각성을 촉발한 동학을 중심으로 사회변혁운동 등이 전개되었고, 불행하게도 이후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등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반쪽뿐인 현대 한국의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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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통일뉴스

2018년 현재, 남한사회는 양가(兩價)적이며 분열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견 일인당 GDP가 3만 불을 넘어서면서 수치상으로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고, 국력에 있어서도 세계 11위권을 유지하면서 강력한 미들파워 국가로 부상하였다. 반면에 외부적 조건이 불리한 가운데 양극화가 극심하고 사회적 불안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소득의 불평등 상황이 미국과 함께 OECD국가 중 가장 열악하여 1%의 국민이 20% 정도의 소득을 점하고 있고, 자산소득은 더욱 극심하여 이의 정도를 알려주는 피케티지수(국민순자산/국민총생산)가 10에 근접하고 있으며 (역사적 경험으로 지수가 6을 넘어서면 전쟁을 부추긴다고 피케티는 설명하고 있다), 1%의 부자와 재벌기업들이 민간소유 토지의 5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자본 시장의 경우는 심한 정도를 넘어서서 1%의 자본가가 90%의 배당소득을 차지하는 등 극한적인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적 현실은, 마치 왕족 및 세도가와 이들의 하수인격인 권노(權奴)들이 불법적인 토지겸병의 탐욕으로 국가질서를 뒤흔들고 온갖 수단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던 조선중기 이후의 패악스런 모습이 다시 부활한 듯, 더욱 뿌리를 깊이 내린 채 난공불락의 기득권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타결책으로 어리석게도 국민소득 4 만불의 수치적 성장론을 제시한다거나 소중한 그린벨트를 풀어서 주택 건설량을 늘려 투기를 막고 주거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게 하고 상황을 더욱 나쁜 방향으로 악화시킬 뿐이다.

핵심은 소수를 위하는 양적 성장에서 전환하여 일반시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민본중심의 사회경제적 운영의 철학과 방향 위에서, 저마다 생업에 전념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투기적 부동산 소유에 대해 실질적이며 현실적인 고통을 가하고 불로적 지대소득에 대한 확실한 누진과세를 적용하며, 경제적 성과를 국민 모두가 골고루 향유하는 배분과 순환의 원칙을 정립하는 것이다.

역사적 변혁기에 서있는 한국사회는 당면한 문제를 본질적으로 직시하고 접근해야 한다. 부패하고 탐욕스런 무리와 이를 부추기는 관행 및 제도에 대항하여, 향촌의 사림들이 시도하였던 향약의 시행과 더불어 백성들의 자조적인 운동이었던 두레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것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건국 신화로 전해지는 이화세계와 홍익인간의 역사문화적 DNA를 다시 발견하고, 이를 사회생물학적으로 우리 생활 속에 살아있는 유전적 밈(meme)으로 진화되도록 제도와 관행을 바꾸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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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방경제포럼

1) 극동개발

지금까지 러시아는 유럽 국가들과 협력해왔고, 국내적으로는 중부 지역에 관심을 뒀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개발이 완료되고 인구도 충분한 데 반해 극동 지역은 사정이 여의치 않다. 극동지역의 인구는 660만 명, 러시아 전체 인구의 5% 정도로 가장 낮은 인구밀도를 보이고 있다. 면적은 617만 ㎢로 국토의 36%인데 프랑스 영토의 10배이며 남북 거리 4500 ㎢, 동서 거리 3000 ㎢이다. 그런데 다이아몬드의 98% (야쿠츠크), 백랍 80%, 황금 50%, 어류.수산물 40%, 러시아 삼림 30%가 이 지역에 있어 원자재의 보고이다.

푸틴이 집권한 2000년부터 러시아는 극동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했다. 극동지역은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보는 물론 아태지역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극동.시베리아 지역 개발과 아태 경제권으로의 편입이라는 과제에 직면하면서 러시아 중앙과 지방이 윈윈할 수 있는 개발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 러시아 중앙정부는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을 계기로 블라디보스토크시를 아태지역 국제협력센터의 중심지로 육성하려 했다. 국제정치와 경제의 중심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낙후된 러시아 극동지역을 개발해 이러한 국제질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고 했다.

푸틴 대통령은 극동지역을 선도적으로 개발하되 단기간이 아니라 21세기 내내 관심을 갖는 프로젝트가 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빅토르 고르차코프 연해주 입법의회 의장은 2016년 7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연방 차원에서 100년간 보장되는 개발사업으로 보면 된다. 연방 정부에 극동개발부가 신설된 것도 그 일환이다. 또 푸틴 대통령이 극동에서 추진 중인 사업 가운데 변경된 건 전무하다. 불황으로 지원 예산이 삭감된 지역이 많지만 극동러시아만은 한 푼도 줄지 않았다. 또 우크라이나 사태로 대외환경이 어려워졌지만 러시아는 2015년에 이어 올해도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방경제포럼을 열기로 결정했다. 푸틴 대통령의 뜻이 강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극동지역을 개발하면서 다양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 지역개발에 필요한 자원 조달 문제는 동북아 주요 국가의 참여 유도로 해결하려 하고, 노동력 부족 문제는 중국, 북한 등 옛 사회주의 형제국들의 노동력을 유입하면서 해결하려 한다. 특히 극동은 지역개발에 필요한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극동지방의 인구는 지난 1992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동안 100만 명 정도가 줄었다. 인구 감소의 주 원인은 출산율 저하와 외부로의 인구 유출이 꼽힌다. 육체노동을 꺼리는 현지 주민들의 노동의식도 한몫 작용하고 있어 지역 개발을 위해서는 외국 노동력을 수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실제 상당수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되고 있다. 이 가운데 중국인 노동자의 진출이 절대적으로 많다. 2005년을 전후한 시기에 극동에 체류중인 중국인 노동자가 80만 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됐다. 그런데 상당수 러시아인들은 중국인 이주가 국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 것이며 최악의 경우 중국인들에게 러시아 영토의 일부가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한다.(신황화론)

여기에 극동으로 파견되는 북한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고민을 다소 덜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근면한 북한 노동자들은 중국 노동자들의 노동 현장 및 지역 시장 잠식을 어느 정도 제어하면서, 러시아가 우려하는 ‘극동지역의 중국화’ 문제를 해결하는데 긍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입장에서 본다면, 북한 노동자들은 중국인 노동력 진출에 따르는 잠재적인 안보 위협의 해소와 극동지역 개발에 필요한 노동력 부족분을 충족해주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래서 러시아의 고민은 자연스럽게 한반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북한과의 관계를 통해 문제 해결에 접근하려 한다. 북한과의 관계는 지역안보와 북한 노동력 유입, 그리고 북한을 통한 한국의 투자유치 문제로 구체화되고 있다.

 

2) 첫 동방경제포럼

푸틴 대통령은 2012년 연방정부 내에 ‘극동개발부’라는 부처를 신설하고 극동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5년 9월에 처음 열린 동방경제포럼(Eastern Economic Forum)은 그 연장선상에 있다. 나는 9월 3일부터 5일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을 취재했다.

극동연방대학; 동방경제포럼 개최 장소

국내에선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는지 모르겠지만, 러시아 내에서는 대단히 큰 규모의 행사였다. 푸틴 대통령이 참석해서가 아니라, 이 포럼을 기획. 추진한 당사자가 푸틴이기 때문에 그렇다. 최고 지도자가 의지를 갖고 밀어 붙이니 밑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트루트네프 러시아 부총리 겸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대표가 총감독이 되고, 극동개발부가 발로 뛰어 만든 작품이다.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이렇게 초대형 경제포럼이 열린 것은 2015년 당시가 처음이다. 동방경제포럼은 한마디로 외국투자 유치 설명회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는 투자하기 힘든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파격적인 조치들이 대거 발표됐다. 그 중 핵심은 ‘선도 개발구역 조성’과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선포’이다.

▷ 선도 개발구 : 극동에 분야별로 특화되고 경제자유구역(EEZ)과 비슷한 여러 개의 산업기지를 조성해, 정부가 인프라를 구축해 주고 각종 행정.세제상의 특혜를 부여 함으로써 국내외 입주 업체들을 끌어들이려는 사업이다.

9개 선도 개발구는 다음과 같다.

1)하바로프스크 선도개발구역(공업 위주): 하바로프스크 지방

2)콤소몰스크 선도개발구역(공업 위주): 하바로프스크 지방

3)나데즈딘스키 선도개발구역(경공업.식품공업.운송-물류): 연해주 지방

4)미하일로프스키 선도개발구역(축산업.농식품 공업): 연해주 지방

5)프리아무르스키 선도개발구역(공업.운송-물류): 아무르 지방

6)벨로고르스크 선도개발구역(농업 위주): 아무르 지방

7)캄차트카 선도개발구역(관광-휴양.항만-공업.농업): 캄차트카 지방

8)베링고프스키 선도개발구역(광업): 추코츠키 자치구

9)칸갈라스 선도개발구역(공업 단지): 사하(야쿠티아) 공화국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개념도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 블라디보스토크 뿐만 아니라 남쪽 포시에트항, 자루비노항, 동쪽으로 나홋트카항, 북쪽으로 우수리스크, 한카이스키 군 등 15개 지자체가 포함돼 면적은 2만 8,400 평방미터에 이른다. 이 지역을 홍콩.싱가포르 등과 유사한 세계적 자유항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이다. 앞으로 70년 동안 자유항의 지위를 누리게 되는데, 자유항 방문객들에게는 입국시 8일 동안 비자가 발급된다. 거주자들을 위해 관세 및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는 자유관세지역이 설치된다.

이같은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외국기업들에게는 최초 5년간 법인세.재산세.토지세 등을 면제해 주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달콤한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비자 절차 간소화, *행정 규제 완화, *각종 세제상의 혜택.

이는 푸틴 대통령이 연설에서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그는 무엇이든 요구하라고 했다. 트루트네프 부총리에게 전권을 위임했으니 그에게 무엇이든 요청하라고 했다.

아무튼 이 달콤한 제안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마디로 기대 반 관망 반이었다. 우선 파격적인 제안은 환영하는 분위기다. 우리측 관계자는, “러시아의 입장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당신들이 투자를 안할꺼요?” 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러시아를 오래동안 지켜본 김승동 LS 네트워트 대표이사는 무엇보다 극동개발부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 기대가 된다고 했다. 김 대표이사는 “극동개발부 사람들은 장관.차관부터 젋고 일하는 것도 아주 적극적이다. 어떤 때는 한국 사람들보다 더 빨리 빨리 일한다. 이 사람들을 보면 무언가 가능성이 보인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우리 기업들이 극동지역에 진출해야 하는 절호의 타이밍이 아닌가 생각한다” 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신중론도 있다. 연해주에서 오래동안 사업을 하고 있는 장민석 유니베라 러시아 법인장은,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지정 법안만 해도 세부적인 규정은 현재 계속 검토중이고, 10월 초에나 발효된다. 그때 가봐야 우리 기업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혜택이 돌아오는지 알 수 있다. 그때가서 각자의 입장을 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러시아가 워낙 복잡한 행정 절차 등으로 악명이 높아서, 그런 타성이 쉽게 고쳐질지 회의하는 목소리도 있다. 9월 5일 포럼 마지막 날, 한-러 비즈니스 대화가 열린 자리에서 한국측 위원장인 송용덕 호텔롯데 대표이사는 그동안의 애로사항을 털어놓았다. 송 대표이사는 “2010년 모스크바에 호텔을 지을 당시 각종 인.허가 과정이 100여 개나 되는데, 그걸 승인받는데 1년이 넘게 걸렸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러시아 극동개발부의 오시포프 제1차관은, “극동지역에선 행정 절차를 대폭 줄이겠다. 다시는 롯데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동방경제포럼

극동지역 최초로 열리는 경제포럼에 러시아가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면서 가슴이 설렜다. 모처럼 남북한 회동이나 남북러 3자 회동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북러 3자가 한자리에 앉는 것은 2002년 이후 13년 만의 일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8월 말에 남북한 포격전이 발생하면서 정국이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주최측에 몇번이고 물어봐도 북한측에서 누가 올지 답변이 없다고 밝혔다. 다행히 ‘8.25 합의’가 극적으로 체결되자 비로소 북측 대표단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포럼 개막 직전에, 북한이 남북러 3자 회동에는 참석하지 않기로 통보해 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기대가 낙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윤상직 산업통상부 장관(왼쪽), 리용남 북한 대외무역상(오른쪽)

물론, 남북한 대표가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진 적은 있었다. 9월 3일 저녁, 투르트네프 부총리가 예고 없이 각국 대표단을 초청해 상견례를 겸한 행사장 견학 일정을 마련한 자리였다.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이용남 북한 대외무역상은 이 자리에서 30분간 회동했다. 두 사람은 ‘안녕하십니까’ 라는 간단한 인사말을 건넨 뒤 별다른 의견 교환 없이, 주최측이 마련한 행사장 견학을 마쳤다고, 윤 장관측은 전했다. 그나마 이같은 만남 때문인지 그 이튿날 전체회의에서 윤 장관이 이용남 대외무역상을 다시 만난 자리에서는, 북한 나선지구 홍수 피해를 잘 마무리 하시라고 덕담을 전했다고 한다. 폐쇄적이고 경직된 북한 체제를 감안해 볼때, 이미 남북러 3자 회동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내려진 이상, 현장에 나와있는 장관급 대표가 남한 대표를 만난다 하더라도 특별히 할 말이 없을 것이란 관측은 할 수 있다. 이번에 남북한 회동이나 남북러 3자 회동이 이뤄졌더라면, 나진~하산 물류.네트워크 사업이나 한반도 가스관 연결 사업 등 이미 벌여 놓은 각종 사업들을 전반적으로 재점검해보는 기회가 됐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결국 남북러 3각 경제협력이 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북간에 순풍이 불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경제포럼이 끝난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러시아 극동개발부에서는 내년에도 경제포럼을 다시 열 계획이라며, 조만간 그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내년에는 제발 남북러 3자 회동이나 남북간 회동이 반드시 이뤄져 극동에서 남북경협의 물꼬가 확 터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3) 갈수록 판이 커지다

이듬해인 2016년 제2회 동방경제포럼이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서 9월 2일과 3일 이틀 동안 열렸다. 2015년에는 3일 동안 열렸는데, 2016년엔기간을 이틀로 단축하고 대신 내실을 기했다. 한국과 일본의 정상들을 초청해 주가를 한층 올렸다. 오히려 한·러, 일·러 정상회담 때문에 본질인 경제포럼이 뒷전으로 밀린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무튼, 이틀간 포럼에서 214건, 1조 8,500억 루블(약 31조 원) 상당의 계약이 체결됐다고, 러시아 극동개발부 공보처가 밝혔다.

앞서 지적했듯이 시베리아. 극동지방의 석유·가스·전력 생산은 세계 톱 상위권을 차지하지만, 인구가 현저히 적고, 자본·기술이 부족한 게 문제이다. 중·러 국경 너머로 중국 동북 3성에는 1억 3천만 명이 바글대는데, 극동 연해주 인구는 고작 600만 명 정도이다. 이번 포럼 전체 회의 사회를 봤던 마이클 케빈 전 호주 총리는, “극동의 영토 크기는 호주 정도인데, 인구는 싱가포르 정도이다.”라고 비유했다.

극동지역의 산업구조 변화도 요구된다. 현재 1차 산업 중심의 구조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다변화할 필요가 절실하다. 여기에 한국과 중국·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동방경제포럼은 아태 국가들에 극동지역 진출을 위한 멍석을 깔아주는 자리다. 이번엔 각국 정상들까지 초청해 제법 성대한 행사를 치른 이유다. 한국과 일본 역시 각각 안보, 영토 문제가 걸려 있으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박근혜 대통령

9월 3일 오후 열린 전체회의에서 한러일 정상들이 기조연설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기조연설에서 “극동은 한국과 러시아를 이어주는 중요한 통로이며, 블라디보스토크는 물류의 대동맥이 시작되는 중요한 도시”라며 지역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극동개발의 구체적 방안으로 “주택, 보건, 의료 분야 등에서 투자 증대와 협력 강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러 기업 간 협력을 통한 교통·항만 등 극동지역 인프라 확충, 북극 항로 개발, 극동지역 고속도로 건설사업 및 폐기물 처리를 위한 친환경 사업 협력, 냉동창고 및 가공공장 건설 참여 등 극동지역 수산클러스터 조성 등을 제안했다.

박 대통령은 하지만 무엇보다도 북핵 문제에 연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가 시급성을 갖고 북한의 핵 개발을 막지 못한다면 머지않아 북한의 핵 위협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북한 핵 개발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북한이 동해 상으로 발사하는 탄도미사일은 극동지역의 선박마저 위협한다”며 북핵 문제가 단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에 대해 “평양의 자칭 ‘핵보유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또 러시아는 한반도 긴장 상황을 협상 국면으로 돌리기 위해 북한을 최대한 설득할 것이라고 답했다.러시아가 그동안 사드 배치 문제를 놓고 우리에게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것에 비 하면 푸틴의 이번 답변은 상당히 긍정적이라는 분석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대통령의 이번 동방경제포럼 참석이 나름의 성과를 얻은 셈이다. 물론 민감한 사드 배치 문제에 대한 러시아의 반발을 여전하다.

아베 총리

아베 일본 총리의 연설에서는 러시아의 환심을 얻고자 하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났다. 어떻게 들으면 아첨에 가깝게도 들릴 정도다. 아베 총리는 “저는 이번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저는 전용기를 타고 왔지만, 이곳은 항구가 아름다운 도시이기 때문에 배를 타고 와야 할 것입니다. 100년 전 노르웨이 출신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보며 이렇게 말했죠. 여기보다 아름다운 곳이 어디에 있을까?”라며 한껏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치를 칭찬했다.

아베 총리는 또 동방경제포럼장이 있는 루스키 섬으로 들어오는 세계 최장의 사장교(길이 3km)를 일본 기업이 건설한 점을 상기시키면서, 아름다운 도시 건설에 일본 기업을 동참시켜 달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와 함께 러-일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지 않았다면서 이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 종지부를 찍자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 년에 한 번 이곳에서 정례 회담을 하자”라는 새로운 제안도 내놓았다.

아베 총리는 발언에는 그가 남은 2년 임기 동안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경제협력을 당근 삼아 쿠릴열도, 북방영토 문제를 매듭짓기로 작정한 것 같은 의도가 드러난다. 아베는 앞서 지난 5월에도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러시아 남부 소치에서 푸틴을 만나 ‘8개 항목의 협력방안(이른바 포괄적 접근)’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이 당장 아베 총리의 구애에 화답할 것 같지는 않다. 푸틴 대통령은 전체회의에서 러시아 관점에서 러-일 관계의 전략적 중요도는 어떤지 묻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영토 문제는 러시아의 국익에 관계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의 시각이 다르다. 현재의 러시아가 이 문제를 만든 것이 아니다. 1956년에 이 문제가 해결되었어야 하는데 아쉬움이 있다.”

(소련-일본 간 공동선언에서 당시 소련은 시코탄과 하보마이 등 쿠릴열도 4개 섬 중 2개 섬을 일본에 돌려주겠다고 제안한 바 있음)

푸틴 대통령

푸틴은 또 “당시에는 일본이 거절했다. 당시의 제안에 대해서 일본이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러시아와 일본에게 서로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영토문제는 해결되리라고 생각한다. 나와 아베 총리가 소치에서 합의한 8개의 협력방안, 이것이 중요하다. 영토문제와 평화협정문제는 해결책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양국 서로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할 것이다.” 고 답했다.

이틀간의 잔치는 끝났다. 정상회담 덕분에 굵직한 계약체결. 각종 MOU 체결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기자 개인의 관심사는, 한국과 일본의 정상들이 언급한 안보, 영토 문제를 러시아는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베가 제안한 ‘매년 정례 정상회담’에 대해 러시아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도 관심사다. 문제는 러시아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기다려 볼 일이다.

 

4) 극동개발의 노림수

한러일 정상들

푸틴 대통령은 왜 극동개발에 열을 올리는걸까? 푸틴은 2000년 7월 집권 1기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북한을 방문했다. 옛 소련시기를 통틀어 러시아 국가정상이 평양을 방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극동개발에 박차를 가한 뒤 15년 만의 결실이 이번 동방경제포럼이라고 할 수 있다. 극동개발의 목적은 결국 아시아.태평양으로의 진출로 요약된다. 푸틴 대통령은 포럼 개막식 연설에서, “아시아.태평양 연안국가들은 지금 세계 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아태국가들과 긴밀히 유대관계를 맺는 것은 러시아의 전략적 이해관계”라고 설파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미 자루비노 항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30km 위치. 중국 국경과 가까움)의 항만 현대화에 합의했다. 우리측 관계자는,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동해안을 따라 부산항에 이르러 아시아.태평양으로 진출하는 것이 러시아의 목표일 것이라고 귀뜸했다.

 

5) 연해주 한국 공단

개성공단이 가동된지 꼭 10년째 되던 2013년 4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3차 핵실험 등 잇달은 북한의 강경 조치로 결국 남북한 종업원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개성공단 중단 사태가 벌어졌다. 필자는 당시 북중 접경지역인 지린성 도문의 북한 전용공단에서 북한 노동자들의 실태를 취재하고 있었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으면 개성지구 노동자들이 북중 접경의 도문 공단으로 옮겨올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 남한 정부에서는 개성공단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남북한 협력 모델을 북한 땅이 아닌 제3국에서 시행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제3국 중 유력한 후보지가 러시아 극동 연해주라는 첩보도 입수했다.

중국 전용 공단

그해 12월 필자는 <북방의 문을 열다> 라는 제목으로 철도 연결 등 남북러 3각협력 가능성을 타진하는 내용의 신년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 극동 연해주를 방문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작은 도시 우수리스크. 필자는 우수리스크에서 아주 흥미로운 장소를 취재했다. 시 외곽에 중국 전용 공단이 있었다. 2012년에 가동을 시작한 이 공단에 20개 업체 1500여 명이 일하고 있었다. 원자재를 중국에서 들여와 신발.운동복.박스 등을 만드는 봉제가공업체들이었다. 상품은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수출한다고 했다. 북한 노동자들 고용하는 조선족 공장도 있었다. 그동안 수지가 맞지 않아 일부 중국업자들이 철수한 탓인지 최근에는 300여 명 정도로 규모가 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공단을 보면서 필자는 연해주에 한국 업체들을 위한 전용 공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러시아측 입장에서는 중국인들 보다는 북한 노동자들을 더 선호한다는 말을 너무나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전용 공단2

2019년 1월 산업연구원은 한반도 평화 정착과 경제성장을 위해 남북러 3국이 산업단지를 함께 조성하는 등 협력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산업연구원은 장기적으로 북한 내 산업단지와 더불어 한러 협력산업 집중지역에 점진적으로 ‘남북러 협력 산업단지’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특히 러시아가 극동지역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점에 주목해, 남북러 협력의 최우선 대상 지역으로 극동지역을 제시했다. 연구원은 유엔의 대북제재 해제 추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고려해 러시아의 협력을 최대한 유도하고, 남북러 수송망 구축과 유라시아 시장 확대에 필요한 수출형 제조업 분야 프로젝트를 발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남북러 협력사업이 러시아 정책과 부합하도록 러시아가 극동지역에서 추진하는 루스키섬 과학·기술센터 조성, 가공산업 육성,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사회·수송 인프라 건설 정책 등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검토 대상으로 제시했다. 북한과 러시아가 전력, 광물자원, 철강, 수송망, 무역·투자, 농업 등 분야에서 진행해온 기존 협력사업을 활용할 것도 제안했다.

블라디보스토크

그런데 실제로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LH는 2019년 9월 4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5차 동방경제포럼에서, 연해주 나데진스카야 선도개발구역(ASEZ) 내에 ‘한-러 경제협력 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15km 거리에 위치해있다. 단지 조성은 총 150만㎡(45만 평) 가운데 50만㎡(50 ha=15만 평)를 시범사업으로 우선 추진할 예정인데, LH가 러시아 정부로부터 개발권을 획득해 산업단지를 조성한 뒤 한국기업에게 입주권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만약 미분양 시에는 외국기업에게 입주권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LH는 설명했다.

사업비는 100억원 이내로 2020년부터 3년간 추진할 계획이며 현재 사업타당성 조사용역을 진행중이다. LH는 지난 2월에 FEIEA(러시아 극동투자 수출지원청)와 이번 사업의 포괄적 내용을 담은 MOU를 체결하고 7월에는 국내 기업들의 입주 수요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LOI, 즉 입주의향서를 낸 기업은 28개로 17.1만평을 요구했는데, 이는 분양면적인 13.4만평을 128% 초과한 것이다. LH는 우리 기업의 연해주 진출 장점으로 다음과 같은 3가지를 들었다.

①생산 거점: 저렴한 전기.가스 비용, 노동력 등을 활용해 생산 단가 절감과 향후 CIS 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활용 가능

②물류 거점: 북.중.러 접경지역에 국제물류 요충지로 성장이 예상되며 국내 시장과도 근거리에 있어 물류비용 절감 가능

③After Market: 극동아시아 지역은 중고차 점유율이 높아 A/S 부품 및 차량관리 용품 등에 대한 적지 않은 시장 규모 형성

LH는 9월에 사업타당성 분석을 마치고 12월 13일 러시아 정부와 ‘예비 사업시행 협약’을 맺었다. 이번 사업은 우리 정부가 2017년 9월 러시아에 제안한 9개 분야의 한‧러 간 경제협력사업(산업단지, 가스, 철도, 항만, 전력, 북극항로, 조선, 농업, 수산업) 즉 ‘9-Bridge 전략’의 하나로, 중소기업의 러시아 진출을 지원하기위한 방안이라고 LH는 소개했다. 또 이번 시범사업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창출해 제2, 제3의 한국형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필자는 진심으로 이 사업이 성공해 크게 번창하기를 바란다. 돌이켜보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이후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 진출을 시도한 국내 기업들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지금 살아남은 기업은 손에 꼽을 정도다. 우수리스크에 있는 롯데 농장 (예전에 현대중공업 소유였다가 매각됨), 롯데 호텔(예전의 현대 호텔), 크라스키노에 있는 유니베라 농장, 대순진리교 농장 등이다. 필자는 앞으로 이 산업단지에 북한 노동력까지 가세해서 진정한 남북러 3각 협력사업으로 꽃피우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목, 2019/12/1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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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뒤돌아본 한러 관계

1) 한러 수교 25주년 기념식

2015년 9월 30일은 우리나라와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맺은 지 2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25년이라면 4반세기가 흘렀으니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양국관계는 그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우선, 양국 간 교역규모가 130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러 간 교역규모는 1992년 1억 9천만 달러에서 2014년에는 258억 달러로 약 134배 증가했다. 한국의 대러 수출은 1992년 1억 2천만 달러에서 2014년 101억 3천만 달러로 연평균 22.4%씩 증가했다.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은 같은 기간 7천만 달러에서 156억 7천만 달러로 연평균 27.5%씩 증가했다. 양국 간 인적교류는 1990년 3만 명에 불과했지만, 2014년에는 32만 8천 명으로 약 11배 증가했다.

‘유라시아 친선특급’ 열차 행사

한-러 수교 25주년을 맞이해 다양한 행사가 펼쳐졌다. 7월에는 “유라시아 친선 특급”이라는 이름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를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13일 동안 달리는 대장정이 있었다. 수교 25주년을 즈음해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공식방문했고, 기념공연도 열렸다. 그러나 왠지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진지하고 차분하게 양국관계를 되돌아보며, 미래를 설계하는 자리가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양국 국민들이 서로를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보는 설문조사라도 실시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봤다. 4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한국인들이 러시아를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크렘린궁

“거기는 위험하지 않니?” (40대)

“먹을 것은 걱정 없는가?” (50대)

“소련말은 할 줄 아니?” (60대)

기자가 2015년 7월 1일 자로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전 가족·친지 등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들이다. 질문의 단어들이 함축적으로 암시하듯이 옛소련 시절, 소련 붕괴 후 상점 앞에 장사진을 치던 장면, 스킨헤드족이 극성을 부리던 2005년.. 이런 단편적 기억들에 한국인들은 갇혀 있는듯하다. 물론 다 옛날 얘기들인데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여전히 러시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잘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정보가 부족하다는 뜻인데, 정보 전달자라는 직업을 가진 기자로서 참 부끄럽다는 자괴감이 들었다.(그러고 보면 한국인들은 러시아에 한국 특파원이 몇 명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베이징이나 도쿄, 워싱턴에 비춰볼 때 10여 명이 있는 줄 안다. 한때 7~8명 되던 모스크바 주재 한국 특파원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줄줄이 철수해, 현재 KBS와 연합뉴스 기자 단 두 명뿐이다. 물론, 특파원을 보내고 안 보내고는 순전히 언론사의 자율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한러 양국 국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양국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신 교수는 “한국인들에게는, 러시아가 옛 소련의 잔재가 남아 있고, 비합리적인 나라라는 생각이 그동안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러시아로서는, 한국은 여전히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어 자율적인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해 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 사람들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는 것 같다. 길거리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 중에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북쪽이냐 남쪽이냐를 묻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북한이 우리보다 먼저 수교를 맺었고, 더 오랜 시간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이 한-러 수교 25주년이라면, 북-러 간에도 “친선우호의 해”였다. 마침 10월 21일부터 25일까지 최초로 모스크바에서 ‘북한 영화제’가 열렸다.

 

2) 문화 코드로 읽는 한러 관계

땅덩어리로 치자면 한국은 러시아에 비교도 안된다. 러시아의 면적은 1708만 ㎢로 한반도의 78배나 된다. 여기에 톨스토이, 푸시킨 같은 대문호와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등 기라성 같은 음악가,예술가들이 즐비하다. 또 발레와 기초과학, 우주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서구 지향적이고 콧대 높은 모스크비치(모스크바 사람)들한테 한국 노래, 한국 문화가 먹히기 시작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K-pop에 열광하고 한국어 학당을 찾는 러시아 젊은이들이 넘치니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문화와 예술, 의료.관광 등을 모두 아우르는 ‘문화 코드’로 한러 관계를 들여다 봤다.

 

K-POP

필자가 처음 K-pop을 접한 것은 2015년 9월 2일이었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펼쳐진 댄스 경연 대회를 취재하는 자리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 아이돌 가수들의 복장과 스타일, 노래와 춤동작을 그대로 흉내내 구현해 내는 이른바 ‘커버 댄스(cover dance)’ 페스티벌이었다. 400개 팀이 예선전을 치러 그 중 28개 팀이 결선에 올라왔는데 참가자들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다. 대회가 열린지 처음으로 멀리 벨라루스에서 온 팀도 있었다. 벨라루스에서 온 21살 마샤는 평생에 한번 있는 기회인데 놓치면 안된다고 판단해 출전했다고 말했다. K-pop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해가 갈수록 러시아 젊은이들의 창법, 안무, 스타일 등이 한국 K-pop 그룹과 대등할 정도로 수준 높아졌다는 평가도 나왔다. 대회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SM 안무가 백구영씨는 “참가자들이 K-pop 그룹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 실력을 갖고 있어 깜짝 놀랐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대회 참가자 18살 엘리자베타는 “음악인들이 타인을 위해 그들의 영혼을 k-pop에 녹여내는 거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라고 자신이 K-pop에 매료된 이유를 설명했다.

K-pop 커버댄스 경연대회

K-pop은 2010년대 초반에 러시아에 적극 전파된 것으로 전해진다. 2010년만 해도 러시아 젊은이들이 유튜브를 통해 동방신기를 처음 알게되고 좋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슈퍼주니어, 비스트, 빅뱅, 원더걸스, 소녀시대, 샤이니, 2NE1 등 유명 가수들이 차례로 알려지면서 삼삼오오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K-pop 매니아인 다리아가 설명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2011년 K-POP 커버 댄스 경연대회가 모스크바에 처음 개최되면서부터라고 한다. 특히 커버 댄스 페스티벌의 심사위원으로 그룹 샤이니가 러시아를 첫 방문하면서 한국 아이돌에 대한 강력한 붐업이 시작됐다고 한다. 러시아에 K-POP 커버 댄스 페스티벌을 처음 소개한 문창호 서울신문 차장은 “K-pop 커버 댄스는 러시아 청소년들의 꿈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참여형 K-POP 프로젝트였다고 평가한다. 그들이 K-POP을 적극적으로 사랑하게 만들어준 계기라고 본다. 실제로 러시아 젊은이들이 직접 표현하길 k-pop atmosphere(분위기)를 만들어준 너무 감사한 기회라고 답이 왔을 정도다”라고 설명했다. 문창호 차장은 “당시 태국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춤을 따라추며 놀고, 필리핀 교도소에서 재소자들 교화프로그램으로 원더걸스 춤을 추도록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올림픽 종목처럼 전세계에 걸쳐 퍼져있는 k-pop댄스 동아리들을 키워보자는 생각을 했다. 한류가 없는 나라 중에 철학과 음악을 사랑하는 나라에서도 사랑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러시아를 찾아갔다“라고 말했다.

K-pop 행사

현재 러시아에서 K-pop에 매료된 광팬들은 50만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이돌 별로 그룹이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K-pop 열풍은 비단 러시아 뿐만 아니라 전 CIS(독립국가연합)를 강타했다. 멀리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외에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넘어 카프카스 산맥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에서도 한국 노래 떼창이 울려 퍼진다. 그들은 한국 아이돌의 노래를 이해하기 위해 한국말을 배운다. 어떻게 한국말을 배우냐고 물었더니 한국 드라마를 듣고 배웠다는 답이 돌아온다. 우리가 미드(미국 드라마)를 보며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한 경로를 밟는 것이다. K-pop이 러시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관계자들의 대답이 다음과 같다.

1. 친근하면서도 감성적 터치와 동양 특유의 이국적 매력으로 현실 속의 판타지 제공. 아이돌의 호소력 있는 가창력과 특유의 율동을 가미해 관중들의 마음 속에 파고드는 공연

2. 한국 아이돌만이 지닌 독특한 군무가 특히 러시아 젊은이들의 호흡과 기질에 잘 조화되고, 따라하기 쉬운 군무 및 중독성 있는 반복적 후렴구,

3.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돌의 팬 관리, k-pop 콘테스트 행사 등으로 팬덤 형성으로 이어지고 있음.

빅토르 초이

혹자는 이같은 인기의 뿌리를 러시아의 ‘원조 한인 스타’ 빅토르 초이(崔)로 보는 사람도 있다. 1962년 소련에서 고려인 3세로 태어나 19살때 록밴드 ‘키노(Kino)’를 결성해 보컬과 기타리스트로 활약하며 러시아 젊은이의 우상이 됐던 빅토르 초이. 1990년 6월 모스크바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키노의 공연에는 10만 여 명의 관객이 모여 러시아 최대의 행사로 기록되면서 러시아 대중음악의 신화를 썼다. 그런데 이 공연 후 2달 만에 의문의 교통사고로 28살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모스크바 중심가 아르바트 거리에는 그를 기리는 ‘빅토르 초이 벽’이 설치돼 있다. 빅토르 초이는 1990년 8월 15일 라트비아 리가에서 숨졌는데, 러시아 젊은이들이 해마다 8월 15일을 기해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추모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헐

모스크바에 살면서도 빅토르 초이가 그 정도로 마력이 있는지는 몰랐다.

아무튼 우리 노래, 우리 가락에 열광하는 러시아 젊은이들이 나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내 지인이 조만간 방탄소년단의 러시아 무대를 준비 중인데, 성황리에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의료 한류

K-pop의 뜨거운 열기를 이어받은 것이 이른바 ‘의료관광’이다. 치료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김에 관광까지 하도록 한다는 개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러시아의 의료 시설이나 서비스 수준은 전반적으로 낙후돼 있어 돈푼 깨나 있는 사람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게 마련이다. 그동안에는 치료나 휴양 목적으로 유럽을 자주 찾았었는데,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해 그마저도 시원찮게 됐다. 그 와중에 수술 실력이 뛰어나고 높은 수준의 의료시설과 서비스를 갖추고 있는 한국이 러시아 부자들의 환심을 사게 된 것이다. 물론 국내 유수한 의료기관들이 끊임없이 러시아에서 열리는 박람회 등을 찾아 ‘의료 한류’ 바람을 불어넣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라고 본다.

의료관광 박람회

나는 201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최대 규모의 의료관광 박람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내로라 하는 12개 의료기관들과 의료기기 업체들이 참가해 오는 손님 맞이하기 보다 손님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현장에서 만난 러시아 의료 관계자들은 한국 의료 서비스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는 반응을 보였다. 러시아 의료관광협회장인 옥사나는 “한국은 정확한 진단과 고객 중심의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칭찬했다. 한방 의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었다. 모스크바시 보건부의 마고메도프는 “한방은 양방에 대한 대체재로 훌륭한 선택이고, 효과도 좋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잠재력이 큰 러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선 한국에서 개선해야 할 점도 많다는 지적도 나왔다. 자생한방병원의 김하늘 국제진료센터장은 “환자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라든가 숙박 문제 등 모든 체계가 아직은 많이 미비한 상태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극동 러시아에서 시작된 한국 의료관광 열풍은 이제 시베리아를 넘어 유럽권역인 모스크바에서 더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2015년 11월 한국은 러시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최고 의료관광 목적지로 선정됐다. 러시아 온라인 독자 24만 명이 참여해 한국을 1위로 인정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2015년 3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CIS권 최대 규모 국제관광박람회 MITT에서 의료관광을 테마로 내건 한국홍보관이 세계 1852개 참가부스 중 최우수상을 받으며 관람객들의 관심을 모았다.

의료 박람회

한국에서 외국인 환자 유치가 허용된 것은 2009년부터 인데, 10년 만에 누적 외국인 환자수가 200만 명을 넘어섰다. 2018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환자수는 37만 8967명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일년 동안 190개 국에서 환자들이 한국을 찾았는데, 중국(31.2%), 미국(11.9%), 일본(11.2%), 러시아(7.2%), 몽골(3.7%) 등의 순으로 많았다. 러시아 환자들은 2009년에 1758명, 2015년에 2만 856명, 2018년에 2만 7185명 등으로 점차 늘어나 지난 10년 동안 연평균 35.6%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환자들이 가장 많이 찾은 진료과목은 신장내과, 혈액종양내과,순환기내과 등 내과통합과 검진센터였다. 러시아는 이제 한국 내 외국인환자 수는 3~4위, 의료비 지출은 2~3위를 차지하는 의료관광의 ‘큰 손’이다. 그런데 아직 국내적으로는 체계적인 준비가 덜 돼 있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예가 ‘원격 의료’ 분야이다. 2016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원격의료 등 ICT 기반 의료기술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이어 2018년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원격의료 관련 협의를 진행한 뒤, 분당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 KT 등이 원격의료 사업을 위해 러시아에 진출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국내에서는 의사들의 반대와 비협조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려는 원격의료 사업에 잇따라 제동이 걸리고 있다. 의사들은 가벼운 문진 정도만 가능해 효용성이 높지 않다는 것과 환자의 안전성 문제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원격의료가 활성화되면 아무래도 대형병원으로 쏠림현상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의료관광객 200만명 시대를 열었지만 우리나라의 관련 산업 규모는 세계시장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한 해 1억명에 달하는 전 세계 의료관광시장 규모에 비하면 0.38% 수준에 불과하다. 의료관광 선진국인 싱가포르와 태국의 경우 연 200만 명의 외국인 환자들이 찾고 있다. 앞서가는 나라들의 범정부적 지원 체계도 배워야 할 것이고 통역 등 해외환자 관리 인력을 지원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할 것이다.

 

한국 화장품의 인기

콧대 높은 러시아 여성들이 한국 화장품에 꽂혔다고? 글쎄 실감이 잘 가지 않아서 현장을 들여다 보았다. 러시아의 손꼽히는 화장품 체인점인 ‘일 데 보떼(Il de Beaute)’가 2016년 10월 24일부터 11월 17일까지 모스크바 전 매장에서 한국 화장품 특별 판촉 행사를 벌였다. “From Korea with Love”라는 슬로건을 걸고 한달 가까이 펼쳐졌는데 한국 화장품에 대한 러시아 여성들의 뜨거운 관심을 여실히 보여줬다.’일 데 보떼’는 자체 웹사이트에서 “한국 화장품은 미네랄과 천연 원료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보습(moisturizing)과 피부 영양공급 효과가 뛰어나다”고 소개했다. 매장에서 만난 매니저는 “손님들이 와서 한국 화장품들을 둘러보는데, 러시아 여성들은 특히 보습효과가 뛰어난 BB크림에 많이 끌리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용 박람회

앞서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최대 미용 박람회 ‘InterCHAM’에는 50여 개의 한국 기업들이 참여해, 러시아 내 한국 화장품의 성장 잠재력을 한국 화장품업계가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박람회에 참가한 한국 기업들은, 한국 화장품에 대한 인지도가 상승하고 있고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면서, 상담이 줄을 끊이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러시아의 미용시장은 약 14억 달러 규모로 유럽에서 4번째로 큰 규모이다. 해마다 6~12% 성장세를 보이는데, 국제 미용시장에 비해 2배 이상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특히 미용시장 성장의 73.6%가 최근 5년 사이 급성장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러시아 전체 시장에서 56%가 수입품인데,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제품에 대한 인지도와 신뢰도가 높은 편이며 특히 프랑스는 러시아 화장품 수입시장의 30%를 차지한다. 그런데 최근 젊은 계층 사이에서 한국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화장품은 2010년 이후 인터넷을 통해 러시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2013년을 기점으로 대러 수출이 급증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 화장품은 아직은 유럽 화장품에 밀려 수입시장의 2%대를 차지하고 있지만, 2016년에는 수입 규모 상위 10위 권에 안착할만큼 선전하고 있다.

러시아 여성들이 한국 화장품을 찾게 된 이유는 무얼까?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KOTRA) 모스크바 무역관이 러시아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조사해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그동안 러시아 여성들은 프랑스 화장품만이 최고라고 생각했지만, 경기침체가 3년째 지속되자 현실적으로 적당한(?) 가격의 제품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물론 화장품의 특성상 신뢰도가 매우 중요한데, 한국 화장품은 품질이 매우 우수하면서 가격이 합리적이라는 인지도가 확산돼고 있는 상황이다.

둘째, 러시아 중산층은 요즘 웰빙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한국 화장품은 원료가 대부분 천연성분으로 저자극성이어서 성분의 우수성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것이다.

셋째, 또 한국 화장품의 포장이 단조롭지 않고 디자인이 우수하며, 화장품을 담은 용기가 매우 매력적이어서 인기를 끄는 다른 요인이 된다고 한다.

넷째, 러시아의 젊은 여성들은 유명 뷰티 아티스트들이 개인 SNS를 통해 쓰는 화장품 후기 등 평가에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인데, 최근 러시아의 유명 뷰티 아티스트들이 한국 화장품에 대한 극찬을 연이어 게재하면서 젊은 소비층의 한국 화장품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화장품 판매대

러시아 여성들은 안티 에이징(Anti-aging)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고 피부 케어에 대한 지출이 가장 높다고 한다. 러시아 수도물에는 석회질이 많아서 머릿결이 많이 상하게 되는데 염색을 즐겨 하는 러시아 여성들은 손상된 머리카락 케어 제품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에따라 러시아 소비자들은 주름 개선, 보습 등 기능성 제품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의 마스크팩과 샴푸 같은 제품들이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인증기관이 발급하는 EAC 적합성 신고서를 의무적으로 발급받아야 하는 등 제법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지금처럼 한국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다면 러시아에 진출하는 한국 화장품 기업들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 내 대표적 한류(韓流)로 거론되는 K-POP과 드라마 외에도 이제는 한국 화장품이 한국 문화의 대표 아이콘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3) 앞으로 25년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던 한-러 관계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은 2009년부터 주춤한 상태다. 양국 간 교역도 220~260억 달러에서 정체돼 있다. 2013년 기준으로,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4위, 해외직접투자 규모는 세계 12위이고, 러시아는 경제규모 세계 9위, 세계 3대 외국인 직접투자 유치국이다. 그런데, 이 같은 잠재력에 비해 최근 양국 간 경제협력 규모는 뒤떨어진 편이다. 한국의 대외무역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최근 들어서야 2%를 넘는 수준이고 해외직접투자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1~2%에 불과한 실정이다. 2014년 한국기업의 대러 직접투자 규모는 1억 7천만 달러로 한국의 해외직접투자 총액의 0.46%였다. 한국의 브릭스(BRICs) 국가들에 대한 직접투자 가운데 러시아의 비중은 2.9%로, 77%를 차지하는 중국은 물론, 인도(8.3%)와 브라질(11.4%)에 비해 현저히 적은 규모이다(한국의 대러 투자실적이 부진한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최근 러시아에서 영업 중인 49개 한국기업을 설문 조사한 결과, 금융 조달 여건과 노동생산성이 대체로 나쁘다에 가까웠다. 생산비용 증가 속도, 조세 제도 등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러시아의 금융여건을 개선하는 동시에 러시아도 대한국 직접투자를 확대하는 등 상호 수평적인 투자협력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지난 70년간 해양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발전해오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한국 경제가 나아갈 지향점으로, 러시아 극동지역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때마침 러시아 정부도, ‘블라디보스토크 자유항’ 법안을 발표하는 등 파격적이고 친기업적인 법과 제도를 만들어 투자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러시아 극동지역은 남-북-러 3각 협력이 가능한 지역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남북러 가스관 연결사업, 한반도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결 사업, 러시아에서 북한을 통한 전력망 연계 사업 등 이른바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논의돼 왔다. 특히, 나진~하산 철도 개보수 사업을 통해 나진항과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연계하는 해상-육상 복합물류 사업에 한국기업이 참여하는 프로젝트는 현재 진행형이다. 나진~하산 복합물류 사업의 성패가 중요한 이유는, 이 사업이 향후 남북러 3각 경제협력의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국 정부와 기업의 의지가 있다면, 한-러 간 앞으로 25년간 관계 발전의 시금석은 러시아 극동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바야흐로 2020년, 내년이면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는다. 미-중 무역분쟁을 시작으로 동북아 지역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전략적 의미는 더욱 커지고 있다. 북미 간에 북핵 해법이 도출되기 시작하면 대북 제재가 완화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 러시아를 통한 한국의 경제적 확장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있다. 또 독일 통일에서 옛 소련이 결정적 역할을 했듯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도 러시아의 중재적 역할이 작용할 수 있고 북핵 해결 과정에서도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의 입장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에서 러시아의 위상은 어떠한가?

주러 한국 대사관

2018년 10월 모스크바 주러 한국 대사관에서 열린 재외공관 국정감사를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주러 한국 대사관에서 국정감사가 열린 것은 3년 만의 일이다. 내가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3년 동안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국정감사가 예정됐다가 무산되는 등 열리지 못했었다.

3년 만에 열린 국정감사에서 무소속 이정현 의원은 “우리 외교부 유럽국이 57개 나라를 관장하면서 거기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중앙아 국가 등 옛 소련 국가들도 포함시키고 있다”면서 “러시아를 다른 많은 유럽국가 가운데 한 나라로 다룰 수 있다고 보는가”라고 물었다.

자유한국당 소속 정진석 의원은 “한-러 수교 후 30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 주러 한국대사관의 대사 관저 매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관저 임대를 위해 매월 3만 달러(약 3천400만 원)에 달하는 임대료를 지불하고 있다”면서 오랜 기간 관저 국유화(매입)가 안 되는 이유를 따져 물었다.

이에대해 우윤근 주러 대사는 “한국의 러시아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하며 부정적인 인식들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심지어 우리 외교부가 러시아를 대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우윤근 대사는 “우리 외교부에서 미국을 상대하는 직원은 40명이 넘고, 중국을 상대하는 직원이 20명 이상이며, 일본을 상대하는 직원도 16명이나 되지만 미국의 1.8배, 한반도의 78배 크기인 대국 러시아를 상대하는 직원은 단 4명”이라면서 “이는 한국의 미래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외교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작심한 듯 우 대사는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 우리가 북방, 대륙으로 가는 길이 곧 열리는 데 4명 갖고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라면서 유럽국과 분리된 별도의 유라시아국(러시아·중앙아시아 담당국) 신설 필요성을 제기했다. 우 대사는 그러면서 외교부에도 유라시아국 신설 필요성을 보고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화, 2019/12/3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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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양국체제적 발상을 가로막아왔던 심리적 억압 기제는 크게 외부에서 비롯된 것과 내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나눠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억압기제는 일단 겉보기에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외적 억압은 상대를(즉 남은 북을, 북은 남을) 부정하는 쪽으로 작용한 반면, 내적 억압은 반대로 상대를 부정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분석해보면 이 두 개의 계기가 역설적인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렬한 ‘분단(부정)의식=내적 억압’이 결과적으로 남북 두 국가 간의 적대를 심화시켜 국가기구의 외적 억압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이 곧잘 그러하다고 하듯, 당위는 그 당위가 강할수록 의도와는 반대되는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분단의식에 내포된 당위, 즉 분단부정의 당위 역시 그러했다. 남북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는 당위는 과연 어느 정도나 실제로 남북이 하나로 되는 데 기여했을까. 분단사에서 결정적 사건인 6·25 전쟁부터 생각해보자. 통일의 당위는 당시 남북 모두 하늘을 찌를 듯 강렬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분단의 고착이었다. 분단부정, 즉 통일에 대한 열정의 강도(强度)는 전쟁의 참혹도와, 그리고 그 결과로 생긴 분단의 고착도와 정확히 비례했다. 그때 심어진 적대와 원한을 아직까지도 다 지우지 못하고 있다. 통일을 외칠수록 통일에서 멀어지고, 분단극복을 외칠수록 분단현실이 강화되는 역설이 바로 2016년 겨울의 촛불 직전까지도 강력하게 작동했다.

당위의 정언성이 강하고 이념적일수록 그 당위의 실현을 저해하는 반대물, 장애물에 대한 부정과 억압은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한반도에서 분단부정의 당위는 고도로 이데올로기적인 미소 냉전의 대립구조 안에서 작동했다. 따라서 그 당위의 정언성이 강해질수록 이데올로기적 순수와 오염의 이항 대립구도 역시 극도로 첨예해진다. 남과 북은 서로 전쟁을 한 군사적 적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적이다. 적은 휴전선 저 밖에도 있지만, 더욱 위험한 적은 내부의 적이다. 따라서 남의 체제는 내부의 적인 ‘빨갱이’를 탐색하고 제거하는 고도의 정화 기계이고, 북의 체제는 또한 내부의 적인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끄나풀, 간첩’을 색출하여 말살하는 고도의 검열 장치이기도 했다. 이 정화와 검열의 장치는 그 속에 사는 인간의 마음과 뇌까지를 점유하여(‘내 귀의 도청장치’) 그 지배를 완성한다. 이로써 분단의 골은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까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듯 전면화된 분단체제는 커다란 고통과 함께 분단 현실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비판의식 역시 또 하나의 분단부정의 정언성에 기초한 당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비판운동이 두드러지게 전개된 곳은 재야, 야당,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한국이었다.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은 이러한 비판을 ‘이적’ ‘용공’ ‘친북’으로 몰아 탄압해왔다. 이들이 통치체제를 비판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분단극복, 통일이란 결국 대치하고 있는 적의 편에 동조하는 통일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체제의 차이만 있을 뿐 남과 북에서 동형적으로 진행되어왔다. 분단체제란 이러한 분단체제 비판 세력을 식량으로 먹어치우면서, 즉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탄압하면서 자신의 몸체를 괴물처럼 더욱 키워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면 독재정권이 비판 세력을 ‘적’으로 상정하고 탄압하는 한, 극악한 탄압을 당하는 비판 세력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독재정권을 ‘적’으로 상정하고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독재정권은 비판 세력이 자신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이적단체’에 불과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강변해왔다. 이로써 상호를 적으로 간주하여 투쟁하는 상승적 순환 구조가 남과 북의 정권 사이에서, 그리고 남 내부와 북 내부 각각에서 형성되고 교차하면서 가속도를 얻어 작동한다.(이 책, 153쪽)

결국 분단체제란 분단의 부정, 즉 자기부정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기묘한 체제였다. 이 기묘한 작동논리는 2중의 차원에서 전개된다. 먼저 남북의 분단체제가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체제의 목적이 분단의 극복이다. ‘조국통일’, ‘북진통일’, ‘흡수통일’, ‘붕괴통일’, ‘통일대박’, 매한가지다. 모두 분단을 부정하고 자기 중심의 통일, 즉 ‘분단의 극복’을 표방한다. 이렇듯 분단체제가 분단을 부정하면 할수록 남북 양측에서 서로에 대한 의심과 대립과 적대의 힘, 즉 분단의 장력(張力)은 더욱 팽팽하게 당겨지는 물리학이 성립한다. 그러나 분단체제의 자기생산력이란 이것만이 아니다. 이렇듯 자기생산성을 갖는 분단체제의 기득 권력을 비판하고 맞서는 힘 역시 ‘분단극복’을 표방한다. 분단을 극복해야 분단체제가 종식될 것이니 당연한 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체제는 바로 이렇듯 ‘분단체제극복’을 부르짖는 세력을 기다렸다는 듯이 체제비판 세력, 내부의 적, 간첩으로 낙인찍어 잡아들인다. 수많았던 기획된 간첩사건, 체제전복사건, 내란선동사건들이 그러했다.

분단체제의 적대적 장력은 이렇듯 서로를 외부·예외로 간주하는 남북 간에 형성될 뿐 아니라, 바로 남북의 내부에 외부·예외를 설정하는 방식으로, ‘겹2중’으로 형성된다. 이 ‘겹2중’이 맞물려 돌아가는 동력 구조가 분단체제다. 내부에 외부를 설정하는 이 ‘내부 적대’의 장치 마련을 통해 ‘외부 적대’의 동력을 증폭시키는 매커니즘이다. 분단체제란 이렇듯 강고할 뿐 아니라 교묘한 자기생산 – 재생산체제다. 70여 년이나 생명을 이어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애초에 문제는 분단을 부정하는 당위의 주체가 하나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단부정의 당위는 무엇보다 우선 분단부정의 또 다른 당위와 생사존망의 대결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다. 분단부정의 당위가 또 다른 분단부정의 당위를 부르는 구조였다. 이제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은 반복적 순환 사이클로 요약할 수 있다.

분단부정의 당위 → 남북 적대의 심화 → 분단독재체제의 강화 → 분단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의 강화 → 분단부정의 당위의 강화

이 순환은 자꾸만 반복된다. 피하고 싶은 불쾌한 증상을 자꾸만 되풀이하는 반복강박과 닮아 있다. 이처럼 철저하게 외부와 내부를 완전히 포괄한 분단구조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위가 강할수록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는 정언명령의 역설은 분단체제 70년의 현실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

분단을 부정할수록 분단이 고착된다는 ‘분단(부정)의 딜레마’는 애초에 둘임을 부정했던 데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딜레마를 끊으려면 둘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가 되자고 하면 오히려 하나가 되자는 둘이 우선 분명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 않고 애당초 둘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의 발단이 되어왔다. 둘임을 인정하고, 하나가 되는 노력을 하자는 것이 양국체제다. 이것을 하지 못하고 ‘분단(부정)의 딜레마’에 빠져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미 너무나 컸고 길었다. 북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통일대박’과 ‘종북몰이’를 양 손에 들고 휘둘렀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하에서의 경험이 마지막이 되어야 한다. 촛불혁명은 유신체제로 되돌아가려 했던 총체적 종북몰이, 블랙리스트 소동을 종식시켰다. 촛불혁명 이후 이 나라의 민심은 마치 긴 악몽에서 깨어난 듯 새로운 눈으로 현실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힘에 기초하여 2018년 판문점 선언, 싱가포르 선언, 평양 선언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어 대한민국 대통령이 평양에서 평양 시민들 앞에서 대중연설을 하였고, 머지않아 서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이 시민들을 만나는 날도 올 것이다. 한 민족의 두 나라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며 통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코리아 양국체제’, 다시 말해 ‘한 민족 두 국가의 평화체제, 공존체제’가 이미 현실로 시작된 것이다.

 

양국체제의 첫 번째 역사적 계기: 반쪽국가의식에서 양국의식으로

그렇지만 양국체제적 인식이 오직 촛불혁명과 판문점·싱가포르 선언을 통해서만 처음 생겨났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큰 변화에는 반드시 그에 선행하는 역사적·예비적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반에 연속적으로 벌어진 대형 사건들이 그러했다. 1987년의 민주항쟁과 1989~1991년 사이의 소련·동구권과 미소 냉전체제의 붕괴, 한소·한중 수교, 그리고 1991년의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교환으로 이어진 초대형 변화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분단체제의 지반을 처음으로 크게 흔들었다. 세계 판도 전체가 크게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변화 속에서 분단의식도 크게 흔들렸다. 분단의식은 ‘반쪽의식’이기도 하다. ‘반쪽만으론 온전하지 못하다’, ‘나뉜 반쪽은 합쳐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된다’는 생각이다. 반쪽의식에서 양국체제 발상은 나올 수 없다. 양국체제는 두 코리아를 각각 온전한 하나의 국가로 보기 때문이다. 온전한 국가란 ‘내부의 정당성’과 ‘외부의 인정’이라는 양 측면을 모두 갖추어야 성립한다. 남북이 이 두 근거를 어느 정도 갖추기 시작한 최초의 계기는 1991년의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교환이었다. 이 두 사건은 1987년부터 시작된 세계적 대변동의 연쇄가 낳은 종합적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세계사 차원에서는 미소 냉전구조의 붕괴가 주원인이었고, 국내적으로는 87년 시민항쟁이 열어놓은 민주화 지향의 강력한 여론이 있었다.

분단의식, ‘반쪽의식’으로 보면 남북의 국가는 ‘반쪽(만의) 국가’일 뿐이다. 우선 이러한 ‘반쪽국가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면 양국체제 발상은 생겨나기 어렵다. 그러나 반쪽국가의식에도 그만한 현실의 근거가 있었다. 냉전시대 남북 국가의 내적·외적 정당성 구조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고 반쪽짜리로 보이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외적 측면부터 살펴보자. 어떤 국가에 대한 외부의 인정이란 국제사회의 인정, 외국과의 수교관계로 표현되는데, 냉전시대 남북의 국제적 인정, 수교관계는 실제로 ‘반쪽짜리’였다 할 수 있다. 한국(ROK)은 미국 영향권의 국가들과만, 반대로 조선(DPRK)은 소련 영향권의 국가들과만 수교하고 있었다.8 나머지 반쪽의 인정이 없었던 것이다. 남북 모두 외부 세계의 절반으로부터만 인정받고 있다는 ‘반쪽국가의식’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내적으로도 남북은 ‘반쪽국가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1948년 두 정부의 수립 이래 남북은 자신이 통일을 목적으로 세워진 일종의 ‘경과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자신만이 적통자(嫡統子)고, 자신이 주도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두 국가 모두 자신이 이미 완결되었거나 완성되어 있는 국가라고 내세울 수는 없었다. 스스로 ‘반쪽국가’이고 따라서 ‘반쪽만의 정당성을 가진 국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반쪽국가의식’이 강할수록 통일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반쪽국가’의 정당성이 충족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측이 모두 통일을 내세우고 자신만이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통일은 말은 늘 좋지만 실제 의도는 상대를 소멸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냉전시대 남북의 통일정책들은 언어로 하는 전투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총탄을 교환하듯 오갔던 통일정책, 통일방안들이 오히려 통일을 멀게 했다는 것은 역설이라기보다 당연한 결과였다.

1991년 남북 유엔 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은 이러한 관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유엔 동시가입과 기본합의서 채택을 주도했던 것은 한국의 노태우 정부였다.9 소련·동구권 붕괴 이후의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를 인정해주더라도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북은 곤란한 상황이었다. 동구권 붕괴 이전까지 북은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해왔다. 통일 주도권이 자신의 편에 있다고, 자신만이 ‘조선반도’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정통성 없는 ‘남조선’ 정부를 굳이 유엔 동시가입을 통해 국제적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냉전의 한 축이었던 소련 중심의 ‘진영’이 무너져 국제무대에서 남과 북의 지지 균형은 한국 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여기에 더해서 87년 개헌에 따라 대통령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한국 새 정부의 정통성을 (야권분열에 따라 군부 출신 후보가 당선되었다고 하더라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려웠다. 이제 북은 예전처럼 한국 정부를 무작정 반대하거나 무시할 수 없었다. 체제 유지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단국의 유엔 동시가입은 1973년 동서독의 선례가 있다. 그러나 동서독 상황이 1990년 급속한 흡수통일로 마감되었다는 사실이 북으로서는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이 한국과 수교하고(1990년) 중국이 남북 유엔 동시가입을 지지하자(1991년 5월) 북도 입장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동서독의 경우 1973년 유엔 동시가입과 1990년 흡수통일은 별개의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과 흡수통일을 혼동할 이유가 없다. 북은 북대로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 판단의 중심에 물론 김일성 주석이 있었다. 불가피한 일이라면 오히려 이를 자신의 체제 보장을 강화하는 기회로 살려보려 했다.

실제 유엔 동시가입이 북에 대한 국제적 공인을 담보하여 일방적 흡수통일의 가능성을 차단한다고 생각할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핵무기 철수 등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적 양보도 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남북 대화가 최고조에 올랐던 1991년 하반기에는 다음 해 한미 팀스피리트 훈련 취소가 결정되었고, 미국은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를 철수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로 인해 연말에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이뤄질 수 있었다. 북은 결단을 했고, 이로써 유엔 동시가입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남북은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유엔 회원국은 회원국 상호의 주권을 인정하고 서로 침해하지 않는다는 유엔헌장을 준수해야 한다. 따라서 일단 형식 차원에서라도 ‘두 개의 코리아’가 온전한 국가로 공인된 것이다. ‘반쪽국가’가 아닌 ‘온쪽국가’로 인정되었고, ‘반쪽의식’ 자리에 ‘양국의식’이 생겨났다.

이는 <남북기본합의서>로 다시금 분명히 표현되었다. 3장 25조에 이르는 기본합의서의 핵심은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에 있다. 과거 냉전시대에도 주도권 경쟁 차원에서 그와 유사하거나 또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구절들을 사용한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격과 방어 차원의 언어 공세에 불과했다. 이번에는 분명한 합의였다. 크게 달라진 상황에 대한 인식과 이해(利害)의 공통기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불확실성이 많았지만 당시 양측은 이 합의를 통한 공존 기조의 지속에 상당한 기대와 믿음을 공유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이 모두 크게 흡족해했다. 애초부터 각자의 적대적 체제를 오히려 강화하려는 목적을 숨기고 서로가 일시적으로 이용하였을 뿐이던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이 합의로 양국의 자체적·내적 정당성 근거 역시 분명 ‘반쪽국가’에서 각자가 충족된 정당성을 갖는 ‘양국체제’ 쪽으로 이동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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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1/2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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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어느 의회든 법안 검토는 의원의 본업이다

그렇다면 세계 다른 나라 의회에서는 법안 검토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미국 의회의 경우, 의원에 의하여 법안이 제출되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다. 위원회에 회부된 법안은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의하여 소위원회에 넘겨지는데, 소위원회는 청문회 개최(미국 청문회의 경우, 입법을 위한 청문회가 높은 비율을 점한다)와 꼼꼼히 조문 하나하나를 심사하는 축조(逐條)심사를 수행한다. 물론 상임위원회에서의 이 모든 활동은 의원들 자신들이 직접 수행한다.

프랑스 의회 역시 본회의든 상임위원회든 발언을 포함한 모든 진행이 의원들에 의하여 직접 수행된다. 의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법안의 각 조문에 대한 조문 투표를 실시한 뒤 법안 전체에 대한 전체 투표를 실시한다.

독일 의회는 각 정당 내 상임위원회마다 소그룹이 운영되고 여기에 각 정당에 소속된 정책연구위원들이 결합해 매주 화요일마다 만나서 짧게는 6주에서 길게는 6개월에 걸쳐 상임위 의제를 사전에 토론하고 조율하기 때문에 의원 개개인의 전문성도 향상되고 각 정당의 전문성도 당연히 증대되며 이는 의회의 전문성 제고로 이어진다. 소그룹에서 채택된 사항은 대부분 그대로 정당 전체의 견해로 채택된다.

정치 후진국이라 불리는 일본 국회의 경우에서도 법안에 대한 검토는 당연히 의원의 몫이다. 일본 국회에서 법안 제출은 의원법제국의 입법보좌를 받아(다만 이는 법률상 요건이 아니고 단지 참고 요건이다) 준비되고 정당 내의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법률안이 확정된다. 정당 내 절차는 정당 내 정무조사회(政務調査會)나 정책심의회 부회(部會, 전문 분야별로 모이는 회합을 가리킨다)를 거쳐 정책심의회나 혹은 정책심의회 전체회의 등에서 결정한다. 나아가 총무회나 중앙집행위원회 등 상부기관의 의결을 거친다.

 

법안 검토는 입법 과정의 핵심이자 본령(本領)이며 기본

그러나 우리 국회의 경우, ‘의회’의 이러한 국제적인 보편적 기준과 너무나 상이하다.

우리 국회에서 상임위원회에서의 검토보고는 법률안의 심사 과정 중 전체 위원회에서 법률안의 제안 설명이 끝난 뒤 ‘반드시’ 전문위원이 낭독하도록 되어 있다.

그 결과 채택되는 소위원회의 수정안 내용도 전문위원의 검토 내용과 대개 일치하는 경우가 많고, 전문위원의 검토보고에서 지적되지 않은 문제점은 위원회 심사과정에서 대체로 거론되지도 않는 성향을 보인다. 예산안에 대한 예비심사 검토보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예ㆍ결산 검토보고는 사실 이 분야에 대한 의원들의 전문성 및 시간 부족으로 법안 검토보고 경우보다 입법관료의 주도권이 훨씬 강하다.

결국 이렇게 하여 전문위원의 검토보고는 위원회 심사의 대강의 범위와 차원을 ‘제시’해 주며, 논의의 초점과 방향을 ‘정립’해 주는 결과를 가져온다. 뿐만 아니라 실제 심의 결과 채택되는 소위원회의 수정내용 구성에서도 매우 큰 영향력이 발휘된다.

더구나 의사 진행에 대한 세부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가운데 국회의 입법관료들이 제시하는 선례에 대한 해석에 의하여 의사 진행상의 문제점들을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는 한국 국회의 현실에서 결국 위원회 입법관료들이 위원회의 심사과정에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히 커지게 되어 있다. 실제로 위원회 운영상의 시나리오가 위원회 입법관료들에 의하여 작성되고 있으며, 위원장은 이들이 준비한 각본에 따라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검토보고서를 토대로 회의를 진행하게 되므로 검토보고서는 입법 논의의 출발점이자 결정적 변수일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 ‘법안 검토’란 입법 과정의 핵심이자 본령(本領)이며 기본이다. 사실상 입법과정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이 ‘검토’ 과정을 의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대리’하는 것은 의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 부정이다.

국회에서는 매일같이 입법토론회와 공청회가 분주히 열리고 본회의장이나 상임위에서 법안 통과 문제로 ‘식물국회’니 ‘동물국회’니 볼썽사나운 살풍경이 벌어지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본질 왜곡을 가리는 변죽일 뿐이다.

 

공무원의 법안 검토보고’, 국민이 명령한 입법권에 대한 명백한 직무유기

상임위원회란 본래 정당 간 정책대결의 장이다. 미국 의회의 경우, 상임위원회 입법지원 인력인 스태프(Staff)는 18명의 전문위원을 포함하여 위원회당 평균 75명으로서 다수당과 소수당이 소속 의원 수에 비례하여 인원을 배정받고 소수당은 최소 1/3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독일 의회의 상임위원회 입법지원 조직은 주로 교섭단체 정책위원에 의하여 운영되고 있어 그 총수는 2004년 현재 837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우리 국회처럼 입법관료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사실 우리 국회에도 위원회 공무원과 별도로 이른바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이라는 제도가 존재하고는 있다. 각 교섭단체별로 의석수에 따라 배분되는데, 급여는 국회 예산에서 지급되고 국회 사무처 소속으로 별정직 공무원의 신분이다. 2019년 현재 총 인원은 67인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은 당파성과 당에 대한 충성심에 비하여 전문성이 검증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정당의 정책과 관련한 전문성보다는 상당수가 기본적인 자격에 있어서 부족한 상황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실질적인 능력과 역할의 측면에서도 대단히 취약성을 노출시켜 단지 개별 정당의 운영을 지원하는 데 치우치고 있다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실제로 교섭단체 정책연구위원을 정당 관료가 형식적으로 맡으면서 당료의 임금보전책으로 활용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은 실정이다. 2003년의 경우, 32명의 교섭단체 정책위원 중 25명이 당료 출신이었고, 6명이 국회 공무원 출신이었다. 더구나 최근 들어 집권 여당의 당정책위원은 기재부, 행안부 등 행정부 현직 관료들을 ‘편법’으로 임용하는 방식으로 충원하고 있어 국회 입법과정에 행정부 관료들의 개입을 적극적이고 합법적으로 보장하는 상황을 초래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 국회의 입법권은 지금 심각한 왜곡 상태에 놓여 있다. 국회가 지금 안고 있는 문제는 수 없이 많지만, 의원 입법권에 대한 침해라는 이 문제야말로 국회의 본원적 문제라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국민들은 자기들을 대신하여 국가 입법을 수행할 대표를 선출해 국회를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인 의원들이 입법을 방기한다? 자신들에게 부여된 본업을 수행하고 있지 않는 이 문제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또 어디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변질된 국회이고, 왜곡된 국회이다. ‘의회로서의 기본’이 상실되어버린, 그리하여 이미 의회라 할 수 없는 국회이다. 기본이 왜곡되어서는 모든 일이 뒤틀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회 스스로 이 문제를 개선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실제 필자가 만난 한 중진의원은 의원들이 이 문제의 개혁에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현재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법률안을 논의할 경우 국회 공무원인 전문위원이 법률안을 읽고 요지와 주요 쟁점 등을 설명하는데, 그런 ‘귀찮은’ 일을 의원들이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의 심리에 형성되어 굳어진 이러한 자세 자체가 이미 왜곡된 우리 국회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국민이 명령한 ‘직무’에 대한 명백한 ‘유기’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인식하고 제기할 때 국회 문제도 해결될 수 있어

지식인들과 시민운동은 이 문제의 중요성과 긴급성에 대하여 인식해야 하며, 그리하여 국회 개혁운동에서 가장 선결적인 문제로 제기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입법 수행을 최고 임무로 부여받은 국회의 본질적 허구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문제이기 때문에 지식인들과 시민운동이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다면, 이 문제는 의외로 크게 여론화될 수 있고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국회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다.

현재 우리 언론은 대개 클릭수를 노리는 자극적인 기사나 가십성 뉴스에만 주목할 뿐 언제나 기본과 근본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는 더욱 혼탁해지고 더욱 분열되며, 말초와 지엽으로만 흐르게 된다. 이제 언론도 기본과 근본에 충실해 진정한 ‘사회의 목탁’으로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아나운서를 비롯하여 연예인, 스포츠스타 등등 좀 유명세가 있다 싶으면 모두가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 그리하여 이 땅에서 국회의원이란 그저 ‘출세’와 ‘성공’의 가장 큰 상징으로 전락해버린 오늘의 비극적인 현실도 타파할 수 있다.

화, 2020/02/25-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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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의 세 단계

2016년 10월 29일 시작된 대한민국의 ‘촛불집회’는 3차째인 11월 12일의 100만 집회에서부터 ‘촛불혁명’으로 전환되었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자진퇴진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에 따라 이때부터 촛불광장의 요구가 국민에 의한 ‘하야’와 ‘퇴진’으로 분명해졌고 이 요구를 여러 미디어에서 받아 ‘촛불혁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듯 혁명적 요구를 장착한 거대한 대중행동은 이어 4차(11월 19일, 95만), 5차(11월 26일, 190만), 6차(12월 3일, 230만) 집회를 통해 국회의 대통령 탄핵 가결을 압박했고, 결국 국회는 12월 9일 찬성 234명, 반대 56명으로 대통령 탄핵을 가결했다. 이 ‘합헌적 혁명’의 경로는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국회의 탄핵 결정을 승인하고 대통령에게 파면 선고를 내림으로써 그 1단계가 완료되었다.

대통령 탄핵 – 파면 이후 촛불혁명은 다음 단계인 ‘대선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5월 9일 치러진 19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41.08퍼센트의 득표로 당선되었다. 국회 내 탄핵을 주도했던 야3당 후보의 득표율을 합하면 68.66퍼센트(국민의당 21.41퍼센트, 정의당 6.17퍼센트), 촛불의 압박 아래 탄핵 지지로 돌아선 새누리당 이탈 세력의 지지율(6.76퍼센트)을 더하면 75.42퍼센트에 이른다. 유권자 4분의 3 이상이 탄핵지지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는 가운데 제1야당의 후보가 여유 있게 당선되어 정권을 안정적으로 교체한 이 대선 과정이 ‘합헌적 혁명’의 제2단계라 할 수 있다. 대선 이후 ‘촛불정부’가 들어선 이제 합헌적 혁명으로서 ‘촛불혁명’의 제3단계가 진행 중이다. 이 제3단계를 온전히 마무리하였을 때 촛불혁명은 비로소 완성·완수되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은 이렇듯 세 개의 단계를 경과하여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지향과 목표를 가늠해보고자 한다. 목표와 지향은 무엇보다 우선 이 사건의 역사적 위치, 위상을 객관적으로 점검할 때 비로소 분명해질 수 있다. 그러한 위상이란 한국 현대사 속에서의 위상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사, 더 나아가 세계사 속에서의 위상을 포괄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다. 이 혁명이 어디쯤 있는 줄 알 때,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가 분명해진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역사적 위상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한국 현대사 차원에서 볼 때 두드러진 점은 이번 촛불혁명이 1960년의 4·19 혁명과 1987년의 민주항쟁에 이은, 대략 30년 간격으로 터져 나온 거대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의 세 번째 분출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4·19도, 87년 민주화도 각각 이후 30년에 걸쳐 점차 그리고 결국은 강고한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뼈아픈 사실이다. 거대한 민주적 열망을 냉혹한 독재체제가 회수하고야 마는 ‘마(魔)의 순환고리’ 또는 ‘독재의 반복고리’가 작동했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번 촛불혁명도 꼭 같은 순환고리에 포획되고 말 운명인가? 촛불혁명의 완성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이 점을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반복강박 증상과 매우 유사한 이 불쾌한 역사적 순환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질 때,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제1과제는 바로 그 ‘마의 순환고리’를 분명히 끊어내는 것에 맞추어지게 된다. 반면 이러한 반복성과 그 뿌리 깊은 구조에 대한 인식이 명확하지 못하면 촛불혁명은 다시 한번 자기혼란 속에 퇴행 소멸할 수 있다. 이것이 지난 60년간 한국 현대사에서 두 차례 반복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작동’ 속에서 배울 점이다.

한국의 이번 촛불혁명의 두 번째 역사적 차원은 기존 민주주의 시스템이 세계 곳곳에서 한계와 오작동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에서 유독 이를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돌파하는 새롭고 거대한 힘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한국의 촛불혁명에 세계가 놀랐던 이유다. 외국의 여러 주요 언론이 썼던 바와 같이 이번 한국에서의 촛불혁명의 에너지는 더 이상 ‘민주주의 선진국’의 발자국을 뒤따라가는 후발자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체와 퇴행에 빠진 세계 민주주의 상태에 새로운 활력을 일으키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보다 고양된 수준으로 이끌어가는 선도자의 힘이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러한 선도적 에너지가 세계사의 단계가 ‘서구 주도 근대’ 단계를 넘어 ‘후기근대’로 들어서는 상황에서 표출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후기근대의 주요 특징의 하나는 일극중심 문명체제에서 다극균형 문명체제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변동은 커다란 기회와 위기를 함께 수반한다. 한국의 경우 한편으로 정상사회, 정상국가로의 전환의 계기가 형성되고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전환을 오히려 신냉전 기류의 고조를 통해 모면하려는 흐름이 생겨난다. 현재 북미 간의 비상한 군사적 긴장 고조는 여기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풀어가느냐에 따라 동아시아만이 아니라 세계 전반의 안녕이 큰 영향을 받게 된다. 20세기적 또는 냉전적 행동패턴, 분단체제적 사고패턴과 과감하게 작별하는 새로운 발상, 담대하고 창의적인 접근이 긴요한 시점이다.

이렇게 보면 이번 촛불혁명은 한국 현대사에서 30년 간격으로 되풀이 되었던 ‘마의 순환고리’를 확실히 끊어야 하는 목표이자 과제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목표는 세계사 차원의 거대한 지각변동에서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이 수행해야 하는 중요한 역할과 깊이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표, 과제, 역할은 단기적 시야에서는 포착되기 어렵다. 눈앞에서 쉴 새 없이 진행되는 현상에 매몰될 때 촛불혁명의 제3단계는 방향을 잃고, 이 속에서 앞서 언급한 ‘마의 순환고리’는 다시 한번 거대한 작동을 시작하게 될 수 있다.

이 장은 이렇듯 촛불혁명이 놓인 역사적 위상과 여기서 도출되는 목표에 대해 가능한 구체적으로 적시해보려 한다. 그것은 ‘독재의 순환고리 끊기’와 ‘코리아 양국체제의 정립’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 두 목표·과제가 긴밀히 연관된 것임도 이 글은 밝혀 보일 것이다. 이 두 과제의 달성은 진정 ‘체제전환’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만이 이번 촛불혁명은 진정 그 이름에 부합하는 혁명으로 완성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마(魔)의 순환고리’

4·19와 87년은 대한민국 정치사, 민주주의 역사의 기념비적 봉우리였다. 이제 2016~2017년의 촛불혁명은 이를 잇는 세 번째 봉우리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두 번의 봉우리가 세계의 주목과 경탄을 받았던 만큼, 그 역사적 대분출 이후의 역사는 독재의 깊은 골짜기로 거듭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리하여 ‘민주의 대분출과 독재로의 회수’라고 하는 매우 불쾌한 사이클이 한국 정치사에 30년 주기로 반복되어왔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이 분명하게 그리고 널리 인식되게 된 데는 박근혜 정부의 등장과 귀결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이전 이명박 정부 출범은 참여정부 실패의 결과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에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에 대한 인식이 아직 대중적으로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은 박정희 체제로의 회귀라는 상징성이 강했고, 실제 재임 동안 그러한 회귀가 정부의 공공연한 이념공세의 형태로 추진되었다. 물론 이 사실의 확인은 87년 민주항쟁 이후 30년 사이클의 대미를 박근혜 정부의 유신 귀환 행태가 장식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이다. 우선 박근혜 정부의 독재화 가속 현상은 최근 밝혀지고 있는 바와 같이 이명박 정부 시기의 전방위적 블랙리스트 정책(감시·배체 체제)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 이전 김대중 – 노무현 민주화 정부 10년도 독재 회귀의 큰 사이클을 결코 끊지 못했다. 그 연원은 멀리 87년 하반기 민주화 진영의 분열과 대선 패배로부터 기인하는바, 이 30년의 전체 흐름에 대한 조망은 이 글 4절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박근혜 정부가 대미를 장식했던 독재 회귀의 피날레 현상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부터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의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선거 개입(이명박 버전의 ‘비상국가체제’의 작동)에 의해 출범할 수 있었다. 이렇듯 국가기관의 대규모 선거 개입에 대한 검찰 수사를 박근혜 정부는 유신체제를 연상시키는 매우 강압적인 방식(박근혜 버전의 ‘비상국가체제’ 작동)으로 종결했다. 그렇게 시작된 박근혜 대통령의 재임 기간은 세월호와 메르스 사태에서 보여준 무능과 불통·불감, 통진당 해체에서 보여준 냉전 극성기의 배제와 억압, 국정교과서 추진에서 보여준 시대착오적인 이념적 강압으로 시종 일관했다. 이러한 오만과 강압은 2016년 4·13 총선 공천 과정에서 전통적 지지층마저 고개를 돌릴 만큼 무제약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불통·불감, 억압·배제의 일방 통치와 오만에도 불구하고 당시 거의 모든 언론은 다가오는 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압승하고, 더 나아가 개헌선 이상의 여당 승리에 따른 제2의 유신 개헌 프로젝트가 가동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신 유신체제로의 회귀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인 것처럼 보였다. 때는 마침 87년 항쟁의 30주년에 임박해 있었기 때문에 87년의 민주주의의 희망찼던 큰 진전과 그 30년 이후 민주주의의 암담한 추락의 대비가 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4·13 총선의 결과는 사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렇듯 전혀 예상 밖에 조성된 여소야대의 상황이 박근혜 체제의 유신 회귀 질주를 멈추게 한 것도 아니었다. 총선 이후로도 전방위 블랙리스트 압박과 국정교과서 개정, 사드 배치, 일제 위안부 문제의 종결(소위 대못박기)을 위한 강박적 정책이 집요하고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10월 말 최순실 국정 개입·농단의 구체적 증거가 언론에 폭로되기 시작하면서 급전직하로 진행된 박근혜 정권의 극적인 몰락 역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리 독선·독주를 해도 철옹성처럼 견고해 보였던 박근혜 지지층을 단번에 해체해버린 11월, 12월의 거대한 대중행동은 자연스럽게 30년 전, 1987년의 거대했던 민주대항쟁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되살렸고, 많은 미디어가 이 대비를 부각시켰다. 1987년 역시 철옹성 같았던 군부독재체제가 그처럼 물러설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경험과 기억의 중복 속에서 한국 정치사의 반복성은 평범한 국민대중의 인식 차원에서도 분명해져갔다.

그러한 반복의 시간에서 희열은 짧고 고통은 길기 마련이다. 희망의 짧은 시간은, 길고 둔중한 망각과 냉소와 자학과 고통의 시간에 묻히고 만다. 실제가 그러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그렇듯 짧고 날카로운 희망과 압도적으로 길고 둔중한 절망의 시간의 반복 메커니즘을 말한다. 혹시나 이렇듯 확인된 반복성이 ‘아무리 어두워도 새벽은 또 오고야 만다’는 식의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도치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중증 반복강박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어두운 회귀 구조의 압도적인 불행과 불쾌와 고통에 주목해야 마땅하다. 역사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묘하게도 1960년 4·19, 87년 6월, 2016~17년의 세 개의 봉우리는 30년을 주기로 솟아올랐다. 또한 그 사이에 낀 두 개의 시기(1960~ 1987년과 1987~2016년)의 전개 양상, 즉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장기(長期) 메커니즘’의 작동은 구조적으로 매우 흡사했다. 이 패턴은 극과 극이 대체되는 것으로서,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제도를 변화시키고 점차 보수화되는 제도를 다시금 제도 밖의 대중행동이 변화시킨다’라고 하는 기존 사회변동의 교과서적 일반론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4·19나 87년 6월 대투쟁은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다) 반전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철옹성 같아 보이는 독재 상황, 즉 독재가 외적 구조만이 아니라 멘탈의 내면까지 깊게 장악하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규모와 방식으로 매우 극적으로 분출하였다.

이 글이 주목하는 ‘마의 순환고리’란 이렇듯 정상적인 수준이나 패턴을 넘어서는 지극히 극단적인 독재 수렴 구조의 작동을 말하고, 이러한 극단적 패턴이 반복되는 배후에는 매우 특수한 한반도(코리아)의 상황이 존재한다. 이 강고한 순환고리의 ‘마성(魔性)’은 거대한 대중행동·민주열망이 제도 안으로 수렴되어 제도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진다고 하는 사회변동의 일반론이 작동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행동의 봉우리가 아무리 높고 거대해도 ‘마의 순환고리’ 자체는 끊기지 않고 결국 시간이 지나면 같은 패턴의 ‘독재수렴’이 반복된다.

그러한 ‘마성’의 효력을 마치 영구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반도적 상황’이란 무엇일까. 2차 대전과 6·25 전쟁 후의 동서(동방/서방) 그리고 남북(코리아) 간의 극단적인 적대적 대립이 지정학적 꼭지점에 2중으로 중첩되어 있는 상황을 말한다. 그로 인해 ‘2중의 독재권’이 중첩하여 증폭하게 된다. 이는 극히 예외적 – 극단적인 상황이지만, 그렇듯 특이해 보이는 국가 독재권의 작동 원리가 근대 국가주권론의 일반론에서 반드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대 국가주권론의 이론적·이념적 순수형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장 선명한 이론적 표현은, 필자가 아는 한,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에 의해 주어졌다. 그는 근대 국가주권의 핵심 권능과 표징이 국가 내외에 적(=예외)을 설정하는 권한(비상대권)의 독점, 즉 독재권에 있다 하였다.

냉전 시기 이 원칙은 국가 간이 아닌 동서 ‘진영’ 간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한 상황에서 슈미트적 의미의 국가주권의 배타적 권능(=독재권)이 가장 강력하게, 이론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로 표출되었던 곳이 한반도의 남북이었다. 남북의 두 국가가 하나의 주권을 두고 다투는 상황은 남북 상호를 절대적 적(=예외)으로 설정하게 함으로써 남북 각각의 주권이 절대성(=독재권)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진영 간 대립과 분단국가 간 대립이 가장 극단적 형태로 중첩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극단의 상황은 남북 내부에 정상적 정치 경쟁의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카를 슈미트가 근대 국가주권 행사의 정화(精華)라고 보았던 최고통치자의 비상대권이 항시적·일상적으로 작동하는 ‘비상(非常)국가체제(permanent emergency state system)’, 그것이 남북한의 국가 상태였다.

한국의 경우 그러한 항시적 비상국가 상태에 파열구를 내고는 했던 것이 4·19였고 87년 6월 항쟁이었으며, 이번 촛불혁명이었다. 비정상 상태에서는 비정상이 정상이고, 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오직 그러한 비상 상태를 정지시킴으로써만 정상은 정상이 되고 비정상은 비정상이 된다. 즉 비로소 ‘정상 상태(normal state)’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에서 세 차례의 민주 분출은 비상국가를 정상 상태로 되돌리려는 거대한 계기들이었고, ‘마의 순환고리’란 그러한 거대한 계기를 다시금 비상 상태로 되돌리려는 ‘마적(魔的) 시스템의 회복력’ 또는 ‘비상국가의 자기회복 시스템’이라 하겠다.

정상 상태란 우선 거대한 민주열망의 분출이 정상적으로 제도화되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민주화의 일차적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4·19와 87년 이후 각 30년은 거대했던 민주열망을 정상적으로 제도화시키는 데 실패했던 시간이었다. 초기 얼마간은 과거 독재기에 비해 유사 민주화가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이는 표피의 변화에 그치고 점차 비상국가체제의 독재·독점의 힘이 민주의 열망을 분산·둔화·왜곡시켜 결국은 몽땅 삼키고 만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한 ‘마의 순환고리’가 지극히 강고하다는 것을 제대로 입증한 것은 4·19 이후 30년이라기보다 오히려 87년 이후 30년의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4·19 이후 30년은 세계적 동서 냉전이 맹렬하게 진행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비상국가 상태를 근본에서 종식시킨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87년 이후 30년은 동구권 붕괴와 소련 해체를 통해 동서 냉전이 종식됨으로써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를 강제하는 국제적 구속력이 크게 약화된 역사적 국면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그 거대했던 87년의 민주 동력을 다시 한번 차근차근 회수하여 다시금 또 다른 독재체제로 회수하고야 말았다. 동서 냉전이 종식되었고 ‘북방정책’을 통한 대소·대중 해빙이 있었음에도 한국의 비상국가체제는 강고하게 지속되었던 것이다.

 

비상국가체제의 작동과 균열

‘독재가 민주를 회수하는 마의 순환고리’의 핵심에 ‘비상국가체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선 그 체제의 작동 방식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비상국가체제는 최고권력자의 독재권과 상당히 광범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기득권층과 동맹관계를 통해 작동한다. 최고권력자의 정치적 독재권은 사회 각 부면의 권력과 자원의 독점권·기회획득권을 기득권 상층에게 배타적으로 보장해줌으로써 비상국가의 지배동맹은 성립한다. 이 체제의 위기는 지배동맹의 균열·약화와 국민적 저항이 맞물렸을 때 발생한다.

이번 촛불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임기 2~3년 차에 들어 (특히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실망, 회의, 반발이 누적되었음에도 대통령에 대한 30~40퍼센트에 이르는 ‘콘크리트 지지층’은 2016년 10월 말에 이르기까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40퍼센트에 이르던 지지율이 30퍼센트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4·13 총선 이후였다. ‘친박 독선·독주에 대한 응징’으로 풀이된 총선 결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자신에 대한 지지율은 놀랍게도 콘크리트 밑바닥인 30퍼센트대를 굳건하게 유지했다.(아래 <그림 2>)

그러나 이 40퍼센트대에서 30퍼센트대로의 변화 과정에는 지배동맹의 균열과 약화라는 중대한 변수가 끼어 있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일단을 흥미롭게 정리해주는 기사가 JTBC의 최순실의 태블릿 공개 직전인 2016년 10월 23일 자 《미디어오늘》에 “조중동에게 노무현보다 박근혜가 최악인 다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떴다. 당시 조중동 기자들의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예사롭지 않다고 하면서 그 원인을 풀이한 기사다. 주요 내용은 2014년부터 시작된 ‘비선실세’ 의혹의 각종 보도에 대해 정부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소송”을 벌이고 있다는 것(그 소송의 주역은 김기춘·우병우다), 언론사 수익원을 (역시 ‘진보, 보수 가리지 않고’) 막고 있다는 것, (조중동과 같은) ‘언론사’ 출신을 배제하고 (MBC, KBS와 같은) ‘방송사’ 출신만을 청와대가 애호하고 있다(=감투를 주고 있다)는 것 등이다.

이번 촛불혁명 과정에서 상세히 밝혀진 ‘비선실세’ 건은 이미 2014년부터 ‘문고리 3인방’ ‘정윤회’ 보도로 시작되었고, 2015년 초부터는(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이후) 조중동이 한목소리로 대통령이 이 문제를 덮으려 한다고 비판해왔다. 권력과 자원을 조중동, 그리고 그들이 대변하는 사회 기득권층과 공유하고 대통령 개인의 사적 비선실세와만 나누려 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의 표출이었다. 권력 공유에 대한 묵언의 지배동맹, 계약을 위반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항의였던 셈이다. 이러한 불만 표출에 대해 청와대는 “부패한 기득권 세력과 좌파 세력이 우병우 죽이기에 나섰다”고 예의 그(=박근혜 전대통령의) 매서운 표현 방식으로 응수했다(2015년 8월 21일).

중요한 점은 박근혜 정부와 조중동은 국내의 여러 이권에 대한 입장만이 아니라 국사교과서 국정화, 대중·대러시아 관계, 유라시아 외교, 일제 위안부 문제 합의 건 등 이념과 국제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도 미묘한 불일치와 마찰을 심심치 않게 보여왔다는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2015년경부터 서서히 눈에 띄기 시작하여 2016년 들어, 특히 4·13 총선 이후 빈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 시절과 다름없는 구시대의 이념과 외교관, 정치행태를 점점 더 강하게 표출함에 따라 지배동맹의 이념 전선에도 균열과 괴리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방증하는 사례의 하나로 대통령이 ‘주류 언론’에 대해서조차 이념적으로 지극히 적대적인 언어를 사용했던 사실을 들어본다. 최근(2017. 8. 2) 삼성 이재용 특검 재판에서 나온 이재용 부회장의 증언이 그것인데, 박근혜 대통령은 2016년 2월 15일 그를 청와대에서 독대하는 자리에서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을 언급하면서 “(《중앙일보》 계열 언론사인) JTBC가 왜 정부를 비판하나”라 항의하고 홍 회장에 대해서는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가 있나’라며 ‘이적단체’라는 표현까지 썼다”고 하였다. ‘이적단체’란 ‘좌빨·종북’과 동급의, 한국의 비상국가체제가 비판 세력을 말살하고 정치적 독재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왔던 지극히 폭력적인 언어다. 이제 그러한 정치적 비상(砒礵, 극독)을 삼성 – 《중앙일보》라고 하는 한국 보수의 대표적 주류 기관의 수장들을 대상으로 들이밀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상황은 국내 자본 그리고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과거 유신 시절과 같은 강고한 구냉전적 자폐(自閉)와 대결 일변도의 정책이 결코 반갑지 않은 것이었다. 한미 동맹은 유지하되 동시에 중국·러시아를 거쳐 유럽·중앙아시아·중동이슬람권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통로에 자유롭게 진입하고 싶은 것이 해외 상대의 사업을 하는 층과 온건 보수층의 일반적인 심정이었다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라도 (이명박 정부 이후) 꽉 막힌 대북관계를 어떻게든 풀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중·대러시아 정책은 이명박 정부 때보다 더욱 경직되어 있어 그런 방향의 유연한 타개를 도저히 기대하기 어려웠다. 자본과 온건 보수의 입장에서도 불만과 우려가 쌓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듯 겉으로는 강고해 보였던 박근혜 체제의 보수동맹은 임기 중반(대략 2015년경)부터 내부로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2016년 4·13 총선을 계기로 그 균열이 가시화되었고, 결국 2016년 10월 말 이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이 백일하에 폭로되면서 정권이 급속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기적처럼 되돌아온 거대한 대중행동이었다. 2008년 광우병 반대 촛불집회의 열기가 별다른 성과 없이 소진된 이후 심화되는 양극화와 ‘헬조선’의 현실 속에서도 무기력한 패배감과 냉소·자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민심이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다시 크게 경각하기 시작하여 결국 촛불혁명의 거대한 힘으로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2017년 5월 촛불혁명의 힘에 의해 새 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이제부터가 더욱 중요하다. 이렇듯 크게 이완·약화된 비상국가체제를 완전히 역사의 뒷장으로 넘기고 이윽고 정상 상태의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4·19, 87년 항쟁, 이번 촛불혁명의 공통점은 권력 교체기에 권력 최고층의 도를 넘어선 독주와 권력 남용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데 있다. 기득권층의 일정 부분이 권력에서 소외·이반·이탈하면서 민주화의 요구가 압도적 민심이 되었다는 점도 같다. 그러나 앞서 두 차례의 거대한 대중행동(4·19와 87항쟁)은 비상국가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결국 실패했다. 구 권력의 최고 담당층만을 밀어냈을 뿐, 비상국가체제를 작동시키는 구조와 논리, 이념을 종식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비상국가체제가 더 이상 대한민국의 미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마의 순환고리’가 몇 차례의 커다란 타격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부활하고는 했던 것은 우선 한국이 처한 역사적·지정학적 내외 조건의 구조적 강제 때문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강제의 힘을 별 수 없이 수긍하게 된 또 다른 수동적 민심의 (동의가 아닌) 수용이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문제적이라 하더라도 상당 기간 존속해온 체제에는 나름의 현실 근거가 있게 마련이고, 그렇듯 오래 존속해온 것은 비판이나 반대만으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선 현실이 변해야 하고, 그렇듯 변화한 현실을 정확히 읽어야 하며, 새로운 현실에 걸맞은 분명한 방향 제시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동안 운명처럼 받아들여왔던 ‘역사적·지정학적 내외 조건’이 크게 변하여 더는 옛 모습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의거했던 ‘비상국가체제’는 변화한 현실과 오히려 크게 부조화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랬을 때 새로운 현실에 맞는 새로운 사회의 방향도 선명해질 것이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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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2020/04/08-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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