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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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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의 역습을 막아내다 ‘친일’ 소송의 종결자 김경현 회원 ②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09

[인터뷰]

인터뷰 조세열 상임이사 / 정리 박광종 선임연구원

 

김경현 선생은 연구소 초창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열성회원이자 친일문제 연구자이다. <친일인명사전>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역저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관공리・유력자>로 2005년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위원회가 종료된 뒤에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전문위원으로 위원회 관련 소송업무를 전담했다. 최근 후작 이해승 후손이 제기한 위헌소송이 합헌으로 결정남에 따라 29건의 친일 관련 소송에서 전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인터뷰는 7월 25일 연구소 법인 사무실에서 진행했다.

문 : 부부 회원이고 가족이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에 참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답 : 아내와 함께 회원에 가입한 것은 2001년 8월입니다. 저와 아내, 작은딸(대학교 3년)은 식민지역사박물관 발기인 모금에도 참여했는데 남에게 강요받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큰딸(대학교 4년)은 아직 결심이 서지 않은 모양입니다. 일단 “지켜보겠다”고 했으니, 아마 큰딸도 민족문제연구소의 가치와 역사박물관 설립취지에 동감한다면 조만간 참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 : 연구소를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답 : 1992년부터 자료 조사 때문에 연구소에 가끔 연락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1993년 경희대 부근 세탁소 2층에 위치한 연구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당시 김봉우 소장을 비롯해 상근자 서너 명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임종국 선생이 기록한 1만3천여 장의 친일파 행적을 손수 기록한 인명카드를 비롯해 총독부 관보와 일제시기 신문 영인본 등 소장 자료를 그때 처음 보고 매우 감격스러웠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상근자들이 직접 식사 준비를 했습니다.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만들어 함께 식사했습니다. 비록 차린 것이 많지 않았지만 고등어찌개는 정말 맛있었고 서로 간의 정이 느껴지는 정겨웠던 순간이었습니다. 당시 연구소 사람들은 풍찬노숙하며 역사전쟁을 주도하는 전사들이었고 한솥밥을 먹는 한식구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어렵긴 했지만 일심동체라는 동지적 분위기가 역력했습니다.

문 : 2000년 『명석면사』 출간 보도를 보고 지역사 연구의 획기적인 성과란 걸 직감했습니다. 당시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하기 시작한 때여서 지역 친일파 연구에 천착하던 김경현 회원을 꼭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명석면사』는 어떻게 해서 집필하게 되었습니까?

답 : 19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민주화 이행기가 도래하면서 국민주주모금으로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자 진주시민사회에서도 지역권력과 토호세력에 대항하는 지역신문 창간을 서둘렀습니다. 1991년 진주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시민주주로 <진주신문>을 창간했는데(이 신문은 2009년 등록이 말소될 때까지 18년간 진주지역의 참언론으로 역할했음), 이때 <진주신문> 발행인이던 시인 박노정 선생의 배려로 대학 졸업반인 4학년 때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나름 민완 기자로서 취재 업무에 재미를 느껴갈 무렵 1997년 IMF사태(국제구제금융신청)가 터져 신문사가 폐업 위기에 놓였습니다. 저는 남아있는 신문사 후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퇴직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때마침 그때 저는 1998년 진주문화원에서 <진주이야기 100선>이란 책을 냈는데 그 책을본 당시 진주시의회 손태기 의원이 자신의 선거구였던 명석면의 역사책 집필을 의뢰해 왔습니다. 저는 단순한 지리지나 ‘내고장 전통’류 같은 ‘면지’가 아닌 면단위 역사책인 ‘면사’를 집필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는데, 손의원이 이에 동의하자 저도 흔쾌히 집필에 찬성했습니다.
<명석면사>를 집필하기 위해 문헌조사와 병행하여 많은 면민들을 탐방하고 취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과 강제징용, 해방직후 좌우대립, 6.25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팩트’와 저널리즘 시각에서 면사를 집필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후 편찬위원회에 보이니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좌우대립시 누가 누굴 죽인 것까지 공동체 촌락에서 매우 민감한 이야기가 그대로 담겨져 있었고 일제 면협의원과 면직원, 경방단, 순사, 각종 친일부역자와 우익청년단, 남로당원 및 빨치산까지 다 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편찬위원회에서는 문제 인사들의 이름을 복표(□□)로 처리하고 민감한 내용을 줄이자는 의견을 냈습니다.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저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습니다. 진주에는 3대 토착성씨가 있었는데 진양 하씨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과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하순봉 의원이 바로 진양 하씨로 진주 출신입니다. 하씨 문중에서 문제를 삼은 것은 명석면 출신의 하판락입니다. 하판락은 경남에서 유명한 악질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고문하여 반민특위에 기소된 인물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실렸고나중에국가기구에서도 하판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런 친일파 중의 친일파를 하씨 문중에서는 완전히 빼지 않으면 <명석면사>를 출간할수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하판락이 고등계 형사를 지냈지만 해방 후 면민들에게 취직 알선 등 좋은 일도 했다면서, 면사가 면민의 화합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오히려 면민의 분열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며 반대 이유를 분명히 밝힌 것입니다. 저로서는 면사에서 하판락을 제외한다면 집필을 포기하겠다고 강조하며 편찬위원회에 사표까지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명석면사>에는 미관말직이라도 일제의 관공리라면 학교소사까지 조사해 실었는데 정작 고등계 형사를 뺀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주위 인사들이 <명석면사> 출간의 역사적의미를 생각해 하판락의 이력을 빼더라도 면사를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력히 조언했습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하판락의 이력과 관련된 내용을 모두 지웠는데 인쇄 직전에 하판락의 친일 경력이 하씨 문중의 요구에 의해 빠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을 넣으므로써 저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즉 삭제된 부분에 괄호를 치고 “(반민특위에 체포된 명석면 관련인물에 대해서는 면사편찬추진위의 결정에 따라 전체내용을 모두 삭제함)”이라고 적은 것입니다.

문 : 친일파의 변명•변호 논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군요. 김경현 회원은 위암 장지연 명예훼손사건 등 몇 차례 필화사건으로 소송을 겪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첫 번째 소송은 <진주신문> 기자로 있을 때 토호세력과 벌어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사건입니다. 1993년 남강댐 보강공사와 관련한 수몰지역 측량비리에 대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이 비리에 경남 사천군의원(이 자는 후에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통합되자 사천시의회 의장까지 지냄)이 연루되었음을 폭로한 것입니다.
이때 박노정 시인이 <진주신문> 발행인이라는 이유로 사천군의원으로부터 저와 함께 고소를 당했습니다. 두 사람은 진주지검에 불구속 기소되었는데, 검찰은 죄질이 불량하다고 하며 취재기자와 발행인에게 각각 징역 3년을 구형했고, 1심(진주지원) 재판부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했는데 창원지방법원에서 진행된 2심에서는 취재의 정당성과 보도의 공익성을 어느정도 인정하여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벌금형도 용납할 수 없어 단돈 10원도 낼 수 없다고 하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기 위해 혼자 서울에 올라왔는데 덕수궁 뒤쪽 일제 때의 고등법원 건물(현 서울시립미술관)이 당시 대법원 청사여서 그곳에다 접수했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소송의 결과가 앞으로 제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 생각하니 까닭모를 서글품이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대법원에서 원심이 파기되었고, 창원지법에 되돌아온 환송재판에서 저와 발행인은 무죄를 최종적으로 판결받았습니다.
두 번째 소송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을때 일어났지요. 장지연사건의 발단은 <경향신문>이 2005년 3월 연구소에서 발간한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의 출간소식을 전하면서, 저자인 제가 그 인명록에서 장지연의 명백한 친일 행적을 밝혀냈다고 보도한 것입니다. 이 기사를 보고 장지연 후손이 저한테 ‘허위사실유포’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청량리경찰서(지금의 서울 동대문경찰서)의 출두일인 2005년 6월 10일자에 맞춰 <경남도민일보>에 ‘신(新)시일야방성대곡’이란 칼럼을 발표하고, 장지연의 친일행적을 비꼬면서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는 속았다. 우리 4천만 겨레여, 친일의 망령으로 노예된 겨레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왕검 이래 5천년 가까운 민족정신이 위암 선생의 친일의혹으로 어느날 갑자기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진상규명으로 민족정기를 다시 회복할 것인가. 정말 원통하지만 상징 조작된 위암 선생을 단상에서 끌어내리고 진정한 항일언론인 상을 다시 세우자. 겨레여! 겨레여!”라고 울분을 토해냈습니다.
청량리경찰서에는 당시 방학진 사무국장(현 기획실장)과 함께 출두했습니다. 방 사무국장은 조사담당경찰관에게 실실 웃으면서 저를 가리키며 조사할 때 때리지 말라고 거듭 말했는데 조서를 작성하던 그 경사가 황당해 하며 방국장을 황급히 밖으로 내보냈던 해프닝이 기억납니다. 담당경찰은 친일 행위가 사실이라더라도 이를 언론매체를 통해 공포하는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그렇다면 장지연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국민이 받게 된 명예훼손은 누가 보상하는가”라고 주장하며, 입증자료로 <경남일보> 주필 당시 메이지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신문사의 천장절 기념행사 관련 기사를 비롯해 하세가와 총독 부임 때 장지연이 이를 축하하며 <매일신보>에 발표한 한시 등 1차 사료와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관련 연구 성과물을 제출했습니다. 그해 11월 서울 북부지검으로부터 장지연 명예훼손에 대한 혐의가 없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제게 제기되었던 필화사건으로 첫 번째 소송은 무죄로 끝났고 두 번째 소송은 무혐의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정말 사람 일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앞으로 제 생애에 소송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보니 제가 직업적으로 소송을 수행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문 : 소송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듣기로 하고, 김경현 회원은 『일제강점기 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를 저술하여 제1회 임종국상 학술부문 수상자가 되셨습니다. 출간과정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임종국상 수상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진주인명록>은 <명석면사>를 집필할 때 조사된 지역의 인물들을확인하기위한용도로 처음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일제시기를 중심으로 진주지역에서 활동한 관공리와 유력자 3,400여 명의 인적사항을 모아놓았습니다. 처음에는 ‘진주지역 친일파인명록’으로 이름을 붙였으나 출간하는 과정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언을 좇아 <일제강점기인명록Ⅰ-진주지역 관공리・유력자>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사실일제의관공리나식민지배의 유력자로 행세했다고 모두 친일파라고 규정할 수 없는 현실도 작용했습니다. 이 책에는 학교 소사까지 다 들어가 있었거든요.
또 제목에 ‘인명록Ⅰ’이라고 로마자를 붙인 것은 <진주인명록>과 같은 지역 인명록이 계속 발간되기를 지역연구자들에게 촉구하는 의미에서 붙였지만 이후 유사한 작업성과가 나왔다는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지막지하게 작업을 한기억만 남아있는데, 마지막 교열작업 때는 아예 서울로 와서 2004년 12월에서 이듬해 2월까지 청량리에 있던 연구소 인근의 떡전사거리 근처에서 2개월 가량 여관에 묵으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지금 저와 인터뷰하는 조세열 상임이사님과 이를 녹취하는 박광종 선생님 등 연구소 식구들과 함께 밤이 깊도록 친일청산을 토론했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처럼 생생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연구소 초창기에 임종국 선생의 인명카드를 보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감동이 <명석면사>와 <진주인명록>을쓰 는데 큰힘이되었습니다.사실 제가 임종국상 초대 수상자가 되리라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는데 너무나 과분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노무현정부 때인 2005년 5월 대통령 소속 국가기구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가 발족되자 그해 7월에 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11월 임종국상을 수상함으로써 반민규명위에서 대단한 긍지와 사명감을 가지고 친일인물에 대한 조사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다. 임종국상을 받은지도 벌써 13년이나 흘렀는데도 여전히 이 상의 취지에 맞게 살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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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부터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전기호(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장), 이기형(시인), 임정택(임종국선생 자제), 정병화(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장),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장), 김시업(심산사상연구회장), 박중기(4·9통일평화재단 이사), 이건(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
앞줄 왼쪽부터 김영만(열린사회희망연대 의장, 사회운동부문 수상자), 정길화(MBC방송 PD, 언론부문 수상자), 김경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 학술부문 수상자), 조문기(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이화(임종국상 심사위원), 이만열(임종국상 심사위원장), 주섭일(임종국상 심사위원), 함세웅(임종국상 심사위원)

 

문 : 연구소에서도 제1회 임종국상 시상이라 수상자 선정에 꽤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심사위원장을 맡았는데 심사위원 전원 일치로 김경현 회원을 수상자로 선정했습니다. 『진주인명록』이 지역 연구의 모범이 되고 신진 연구자의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반민규명위에서 친일진상규명조사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곳에서의 활동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 당시 반민규명위는 60년 만에 부활한 ‘반민특위’라고 하여 사회 각계에서 반민규명위의 활동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연구자들이 강만길 초대 위원장을 중심으로 민족사적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성심성의껏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해 진상조사활동을 벌였습니다. 위원회가 활동을 마칠 때까지 총 1,006명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했습니다.
제가 맡은 분야는 경찰, 밀정이었습니다. 사법기관이 작성하는 조서처럼 증거주의와 문서주의에 입각하여 일제 문헌자료와 당시 발행된 신문・잡지 등을 뒤져 친일행적을 입증했으며. 계급이 낮더라도 항일독립운동가를 체포・살상한 고등계 형사 및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이 큰 사건에 관여했다면 가장 낮은 계급의 순사보나 헌병보조원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했습니다. 이를테면 3.1운동 당시 수원 제암리 학살에 적극 관여한 조희창이란 순사보의 경우 일본에 출장가 공문서관에서 찾은 것이 이력서 한 장밖에 없어서 구체적인 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결국 제암리 학살 당시 생존자의 증언을 유력한 증거로 채택함으로써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반민규명위 활동 당시 관련 자료의 데이터베이스화가 미비했고 한정된 조사 기간 등으로 인해 미진한 부분이 많아 친일 진상 조사가 완전히 이뤄지지는 못했습니다. 친일 경찰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제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문 : 그 각오가 엄중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반민규명위가 해산되고 행정안전부에 남아 위원회의 송무업무를 맡아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번에 보고서 보유편 발간으로 위원회 업무는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그간 수십 차례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취소소송에서 2차례의 부분 패소 외에는 전승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특히 홍난파, 이해승, 김성수, 방응모 등 지난한 상대와 치열한 법정 투쟁을 벌였는데 그 당시의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위원회가 2005년부터 2009년까지 4년 6개월 만에 끝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사람의 유족들이 결정취소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송은 주로 위원회 말기인 2009년부터 쏟아졌지만 이미 중추원 참의 조진태를 비롯해 흥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 이재면과 그 아들 이준용, 철종의 친아버지 전계대원군의 고손 이해승 등에 대한 소송이 진행되고 있었고, 나아가 김성수의 동생 김연수, 음악가 홍난파, 총독부 판사 김세완 등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취소 소송도 잇따라 밀려 들어왔습니다. 당시 위원회는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몰려오는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2대 위원장이던 성대경 위원장이 각 부서 팀장을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법무팀을 따로 구성할 시간도 인력도 어려워 소송수행은 각 조사팀장이 담당한 분야에서 맡기로 결정했습니다. 따라서 위원회 말기에 조사3팀장을 맡고 있던 제가 조사3팀에서 결정한 기타단체의 이재면・이준용과 경제의 조진태・김연수 등에 대해 소송을 직접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위원회가 종료된 후 청산절차가 진행되는 3개월 동안에도 소송수행자가 계속 필요했습니다. 특히 홍난파사건을 심리하던 법원이 유족의 효력정지신청을 받아들임으로써 홍난파가 반민규명위 보고서 인쇄중에 빠지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상황이었고, 또한 윤보선 대통령의 아버지 윤치소 중추원 참의에 대한 친일결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들어오는 등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결국 위원회 사무처의 요청으로 저는 위원회 청산기간에 다른 조사팀의 소송과 헌법소송까지 모두 맡게 되었고, 청산기간이 끝난 후 소송이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자 저도 역시 행안부로 넘어가 지금까지 전문위원으로 근무하며 계속 소송업무를 전담해 왔던 것입니다.
위원회가 해산되고 소송이 행안부로 넘어갈 무렵, 그때까지 제기된 친일 관련 소송은 20여 건이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용직으로 있으면서 준비서면만 써주고 공무원이 아니어서 변론석에 앉지 못하고 방청석에 앉아 메모만 받아적다가 나중에는 법정에서 직접 변론하기 위해 계약직 전문위원으로 발령받았습니다. 한마디로 어쩌다가 공무원이 되었다는 ‘어공’이 된 셈이죠. 그런데 한때 제가 일용직으로 있다는 말을 들은 위원회의 한 지인이 ‘연구자 망신 그만시키고 당장 그만 두라’고 하는 등 핀잔도 들었으나 4년여 동안 위원회가 거둔 성과를 무산시켜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으로 그 일을 다시 맡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행정소송 23건과 헌법소송 6건(이중 1건은 위헌법률심판제청) 등 총 29건의 소송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소송 당사자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한국근현대사의 대표적인 인물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조선귀족회장 이해승,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경성방직 사장 김연수, 금융계 현준호, 음악계 홍난파, 문학계 김동인 등입니다.
이중에 이해승 사건은 2009년 취소소송이 제기된 이래 2010년 1심에서 쌍방간에 일부 패소해 각기 항소했고 2014년 2심에서 우리쪽이 승소하자 상대방의 상고로 2016년 3심이 선고되었는데 대법원의 상고기각으로 우리가 최종 승소했습니다. 이해승 사건은 확정종결될 때까지 7년여 동안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해승의 친일재산과 관련된 송사가 법무부와 국가보훈처에서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고 친일행위결정과 관련한 소송이 행안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등 복잡한 양상을 띠었습니다. 심지어 행정소송을 넘어 소유권이전이나 부당이득 반환청구 등 민사소송까지 진행되면서 국가와 후손간에 법리다툼과 입증공방이 한층 더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특히 이해승 후손이 법원(당시 재판장 박병대)의 법률해석에 따라 친일의 대가가 없다는 이유로 시가 3백억원대의 친일재산을 되찾아가는 일이 일어나자 사회적 공분에 휩싸이면서 국회가 관련 특별법을 개정하는 사태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친일재산조사법과 반민규명법에 대한 헌법소원으로 인해 관련 사건진행이 장기간 표류했는데, 이해승 사건을 진행하는 각 심급 법원은 ‘한일합병의 공’을 삭제한 개정된 법률조항에 대한 위헌시비를 가리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이해승 관련 소송은 모두 국가승소로 귀결되었고 개정법률 이후 진행된 친일재산 관련 소송도 모두 승소해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와 방응모 사건의 경우도 이해승 못지않게 장시간 끌었던 지난했던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거대 메이저언론사의 설립자나 사주였던 관계로 이들의 변론은 막강한 변호인단으로부터 조력을 받았는데 저는 변호사 선임없이 오직 혼자 법정에서 항변해야만 했습니다. 무엇보다 김성수와 방응모측의 변호인들은 김성수와 방응모의 친일행위를 입증하는 <매일신보>와 <경성일보> 등에 대해 총독부기관지 또는 일본측 신문이란 점을 들어 조작・날조・왜곡・도용되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제기했는데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제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은 학계뿐이 없었습니다. 특히 친일문제에 있어 독보적인 자료와 연구성과를 갖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그 때문에 바쁜 연구소의 연구원들을 집요하게 괴롭힌 것 같아 지금도 송구합니다. 이때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원에 낼 준비서면이나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의견서에 대한 법률적 자문은 위원회의 율사출신 위원이던 박연철 변호사를 비롯해 연구소의 고문변호사였던 이민석 변호사와 제 사건을 지휘하는 서울고검의 공익법무관 및 정부법무공단으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밖에 개별사건과 관련해 위원회에서 조서를 썼던 조사관들과 위원회 안팎의 여러 선생님들의 지원도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분들의 도움은 김성수와 방응모 뿐만 아니라 다른 사건들에 대해서도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을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문 : 김성수와 방응모 관련 소송에서 부분 패소했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유효한 것이죠

답 : 네. 그렇습니다. 김성수의 경우 학병・지원병・징병・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했고, 일본제국주의 통치기구의 주요 외곽단체(국민정동연맹 및 국민총력연맹 등)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는 것은 인정되었으나 사회・문화 기관 및 단체를 통해 일제의 내선융화나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했다는 것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방응모의 경우는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글을 게재하여 전쟁을 선전・선동한 점만 인정되고 일제에 군수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감사를 지내고 조선총독부 외곽단체 간부로 활동한 것에 대해서는 인정받지 못해 그 부분에 대해서는 패소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패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친일행적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판결이 아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들의 행위는 위원회의 결정대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유지된 것입니다.

문 : 방응모의 경우는 1심, 2심, 3심 판결이 다 달랐는데 특히 한 가지 법호만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가장 미약했습니다. 최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 뒷거래가 연일 폭로되고 있는데 〈조선일보〉와의 유착관계도 혐의가 짙어 보입니다. 대법원의 부분 패소 결정도 ‘상고법원 설치’와 관련하여 은밀한 거래가 있었지 않나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민규명위 소송의 마무리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답 : 대법원의 ‘상고법원 설치’가 요즘 불거지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조선일보〉가 사주 방응모에게 적용된 친일행위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대법원과 뒷거래한 사실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응모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파기환송으로 귀결되고 환송된 고법에서 일부 행위에 대한 판결이 달라졌지만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은 방응모가 저지른 행위를 모두 친일반민족행위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엄연히 역사와 증거가 살아있는한 어떠한 사법농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방응모와 김성수는 가장 논란이 많았고 그 때문에 재판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달라진 점도 있었으나 이들의 행위는 친일반민족행위가 분명하다고 인정되었으며, 다른 사건들도 모두 위원회의 결정이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리고 6건의 헌법소송은 모두 반민규명법이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났는데, 올해 마지막으로 있었던 이해승과 관련한 헌법소송은 개정된 반민규명법의 법률조항도 헌재의 합헌 결정으로 끝나면서 반민규명위 소송은 행정소송이든 헌법소송이든 모두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이로써 친일반민족행위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한편 이번에 그 결과를 정리했는데 방응모와 김성수에 대한 각 심급 판결문을 비롯해 법원의 효력정지결정으로 보고서에 등재되지 못한 홍난파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를 다시 실은 보고서 보유편을 발간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사법적 판단으로 일부 변경된 부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끝으로 위원회가 남긴 마지막 업무와 후속조치를 마무리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문 : 김경현 회원은 29건의 반민규명위 관련 소송에서 전승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대해 진심으로 치하 드립니다. 끝으로 연구소와 108주년 국치일인 8월 29일 개관하는 식민지역사박물관과 관련해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답 : 저는 연구소 초창기부터 관계했기 때문에 연구소 안팎의 어려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현재의 연구소가 정말 괄목상대할 만큼 발전했고 조직이 확대되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연구소 초창기에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일하는 사람들 간에 억척스러움과 아울러 정겨움도 있었는데 그것은 그 만큼 일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성과를 거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식민지역사박물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구소가 초창기의 열정과 현재의 시스템을 잘 엮어 운영하고자 한다면 ‘임종국정신’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임종국선생이 없는 연구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지요. 모든 일에 있어서 진실은 빛을 드러낸다는 운명의 힘을 믿고 그 운명을 엮는 사람을 중하게 여기고 사람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어 나간다면 시스템도 조직도 사람도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시민들의 의견

0213-2

▲ 부천시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설치돼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詩)비. 부천시가 친일문학을 청산하기 위해 서정주의 시비 ‘국화 옆에서’와 ‘동천’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부천/장철순기자 [email protected]

3·1운동 100주년 맞아 논란됐던
상동 ‘시와 꽃이 있는 거리’ 시비
‘국화 옆에서’·’동천’ 철거키로 결정
나태주 ‘풀꽃’·정지용 ‘향수’로 교체

부천시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친일파 시인 서정주의 흔적을 지우기로 했다.

12일 부천시에 따르면 지역에서 오랫동안 논란이 돼 왔던 상동 상도중학교 뒤 보행자도로 ‘시와 꽃이 있는 거리’에 세워져 있는 미당 서정주의 시(詩)비 ‘국화 옆에서’와 ‘동천’을 없애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 시비는 지난 2008년 상동 주민자치위원회가 부천문화사업과 연계해 ‘시와 꽃이 있는 거리’를 조성할 때 세워진 것이다.

이 곳에는 미당 서정주를 비롯해 노천명, 주요한 등 친일시인은 물론이고 수주 변영로, 정지용, 도종환, 김영랑 등의 시비가 설치돼 있다.

상동 주민센터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한 결과 다른 시인의 작품으로 교체하기로 의견을 모은 바 있다”며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문학 창의도시 부천에서 친일잔재인 친일문학을 청산하기 위해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나태주의 ‘풀꽃’으로, ‘동천’은 정지용의 ‘향수’로 각각 교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시는 친일시인으로 알려진 노천명의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와 주요한의 ‘샘물이 혼자서’는 이미 철거를 한 상태다.

미당 서정주는 1942년 ‘다츠시로 시즈오’로 창씨 개명한 이후 일본군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식민지정책에 동조해야 한다는 글을 통해 일제에 협력한 전력이 있다.

부천시가 최종 시비 교체를 결정하자 정치권, 시민사회 등에서는 환영하고 있으나 문화계에서는 예술성과 인간성에 대한 논란이 여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재현 시의회 행정복지위원장은 자신의 SNS(페이스북)을 통해 “그동안 논란이 일었던 친일문학 시비를 부천시가 철거한다고 하니 크게 환영한다”며 “친일 잔재를 없애는 것은 민중에게 서러운 삶을 안긴 엉터리 지도자를 바로잡는 것,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밝혔다.

박종선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장은 “지난해 9월부터 철거 또는 이전을 요구해 왔다”며 “뒤늦게나마 시가 결단을 내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부천/장철순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2> 경인일보 

☞기사원문: 부천시 ‘친일파 시인 서정주 흔적’ 지우기 

※관련기사 

☞뉴스1: 3·1운동 100주년 앞두고 친일시인 서정주 시비 철거한다 

☞Queen: 친일시인 ‘서정주 ·노천명 ·주요한’시비철거 …나태주 ·정지용설치

※뉴스 영상

수, 2019/02/1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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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 제51차 이사회의 회원(여인철) 제명 의결 무효
내 용 증 명 (2차)

수신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 (청파동2가)
발신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

제목 : 2018. 5. 11 제51차 이사회의 회원(여인철) 제명 의결 무효

2018년 5월 11일,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 제51차 이사회는 본인(여인철)에 대한 회원 제명의 건을 심의하고, 제명 처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당시 통용되던 정관에 의거, 제51차 이사회의 구성, 개최 및 결의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아울러 본인의 회원의 지위를 박탈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밝힌 내용증명을 작년 7월 초경에 송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 가운데, 우리 민족문제연구소에 본인이 운영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2015년 3월부터 2017년 3월까지 2년간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사용해왔던 위에서 언급한 정관 (집행부에서 말하는 소위 “운영 정관”) 외에 또 다른 정관(교육청에서 승인한 정관, 이하 “승인 정관”)이 본인을 비롯한 전국의 회원 몰래 “운영”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별첨 1: 2018년 6월 23일, 충남아산에서 워크샵을 겸하여 열린 2분기 운영위원회 배포자료),

그 배포자료에서 집행부는 “…서울시 교육청의 인가를 받아 등기된 법적 효력을 지니는 것과 실제 시행하고 있는 운영 정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라고 인정하며, “우리 연구소는 두 가지 정관을 모두 준수하고 있으나 혹 양자가 충돌할 경우에는 등기된 정관의 효력이 우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정관이 두 개였고 연구소는 이 두 개의 정관 “모두를 준수”하고 있다?

본인은 연구소가 사단법인 등록할 때 신고한 정관(위 교육청에 등기된 “승인 정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은 있으나 그 정관은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필요한 요식행위에 의한 정관이었을 뿐 그 정관이 집행부에 의해 따로 회원 몰래 “준수”되고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영위원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본인은 집행부로부터 받은 소위 “운영 정관”이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집행부에게 그 정관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행부가 지난 십수년 동안 “운영 정관” 외에 “승인 정관”을 이용해 “회원을 10명”으로 임의로 정하고, 전국의 1만 3천여 “회원”을 무시하며 이들 10명만으로 정기총회와 임시 총회를 열어 연구소의 주요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을 해온 사실을 이사진과 집행부 상근자들은 운영위원장인 저를 비롯한 운영위원(회원)들에게 알리지 않아왔다는 사실이 작년 9월경에야 드러난 것입니다.

운영위원장으로서 소위 “운영 정관”을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연구소 업무에 임했던 본인은 이사진과 상근자들의 배신과 기만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회원제명 의결 무효의 건과는 별개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지난 1991년부터 오늘날까지 회비를 납부하며 지탱해 온 전국의 회원들에 대한 이사진과 집행부 상근자들의 오랜 배신과 기만 행태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작년 7월에 보낸 내용증명(1차라 칭함)은 “운영 정관”을 근거로 작성된 것인데, 그렇다면 작년 5월 11일의 이사회 결정은 어떤 정관에 따라 결정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소위 법적 효력이 우선한다는 “등기된 정관” (“승인  정관”)에 따라 다시 작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에 본인에 대한 이사회의 제명 의결 무효를 주장한 1차 내용증명(“운영 정관”을 근거로 작성)과 같은 취지의 2차 내용증명(“승인 정관”을 근거로 작성)을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송부합니다.

1. 제51차 이사회 결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월 11일 민족문제연구소 제51차 이사회는 귀하의 참석 하에 소명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사회는 운영위원회의 제명건의안과 관련 자료, 귀하의 소명과 관련 자료를 심의한 결과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결정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참석 이사 전원의 찬성으로 회원 여인철을 제명 처분한다. (51차 이사회에는 이사 8인 중 이사 강만길을 제외한 7인이 참석하였으며, 여인철 씨의 제척사유 주장에 따라 이사 임헌영과 조세열은 의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정서에 따르면 이사회는 어떤 정관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단지 ‘정관에 의거’ 한다며 회원 제명 건에 대하여 의결했습니다.

지난 1차 내용증명에서는 회원들에게 기 공개된 “운영 정관”에 의거하여 이사회의 결정이 무효임을 밝혔으니, 본 2차 내용증명에서는 “운영 정관”과는 다른, 법적 효력이 우선한다는 “승인 정관”(2017. 12. 28, 4차 개정)에 의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승인 정관”의 내용

제3장 임원

제10조(임원의 종류와 정수)
① 이 법인에는 다음의 임원을 둔다.
1. 이사 5인
2. 감사 2인
② 제1항 제1호의 이사에는 이사장을 포함한다.

제51차 이사회 의결의 준거가 되는 교육청 인가 “승인 정관”의 제10조에서는 이사를 이사장 포함 5인으로 정하고 있으며, 등기부등본 상에 함세웅, 임준열(등기부상 임헌영), 윤경로, 조세열, 신용옥의 5인이 등기되어 있습니다.
3. 제51차 이사회 결의 무효 이유

이사가 아닌 자가 이사회 의결에 참여 (“승인 정관” 위반)

위 이사회 결정서에 따르면 제51차 이사회에는 함세웅, 임준열, 윤경로, 조세열, 신용옥, 이이화, 지수걸의 7인이 참석하고 강만길은 불참했는데, 이중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승인 정관”에 따르면 강만길, 이이화, 지수걸은 이사가 아닙니다.

이사회는 “승인 정관”에서 정한 5인 즉, 등기부등본에 등기된 5인만으로 구성하고 의결했어야 하며, 따라서 이를 위반하여 이사가 아닌 자가 표결에 참여한 제51차 이사회의 결의는 무효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위 3항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51차 이사회에서 의결한 ‘여인철 회원 제명의 건’은 무효이고 따라서 본인은 당연히 정관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회원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회, 운영위원회, 집행부는 본인이 회원에서 제명되었다는 주장을 하며 본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재차 요구합니다.

이사장은
① 본인을 회원에서 제명한 제51차 이사회의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지체없이 본인에게 정식으로 통보하는 것은 물론,
② 전국의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통보하고,
⓷ 회보 민족사랑과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공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원 여인철을 제명한 2018. 5. 11의 제51차 이사회는 이사가 아닌 자가 의결에 참여하여 제명을 결의한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따라서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은 회원의 지위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위법적 회원 제명으로 인해 심대한 심적 피해를 입었을 여인철 회원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을 전하며, 이에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공지합니다.

2019년 O월 O일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위의 본인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적당한 방법을 통해 저의 권리를 되찾을 것입니다.

 

2019. 2. 8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전 9대 운영위원장 (끝)

 

추신: 우체국으로부터 위 내용증명이 민문연으로부터 수령되었다는  연락이 온바, 집행부는 소장님과 이사장님께 지난 51차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제명 결의는 무효임을 입증하는 2차 내용증명을 수령했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바랍니다.

수, 2019/02/1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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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문님이 속담을 인용하시길래 저도 그 속담에 빗대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받으시는군요. 그 글 안에 내용은 보지도 않고그렇다면 더 이상 대화는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다만, 아래 님의 말씀에는 답을 하고 싶네요  

-“여인철 씨는 이제는 민족연구소와 아무런 관게가 없습니다 회원도 아니고 과거에는 회원이고 운영위원이였지만 지금은 탈퇴하시고 새로 단체를 만드셨으니 단체 정관 주체로 일을 하세요”   

제가 왜 아무 관계가 없습니까? 회원 제명자 신분입니다. 그것도 불법 부당 제명자그래서 이사회 의결 무효 내용증명을 두 번이나 보냈습니다. 한번은 소위 운영 정관에 의거, 또 하나는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신고”(등기, 승인) 정관을 근거로 해서  

두 개의 정관 모두에 의거해서도 제명처분은 무효입니다  

민문연을 탈퇴하고 새 단체를 만든게 아니라, 제명당하고 비리와 부정을 바로 잡기위해 어쩔 수 없이 새 조직을 만든 겁니다. 민문연이 바로 세워지면 없어질 단체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 “그러나 지금 사회와 정치가 시시각각 변하니 부도덕 불의를 타도하시면서 언론에 기재하시고 올타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협조를 구하신다면 협조합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지금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도덕과 불의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것 아닌가요? 우리 사회의 부도덕과 불의에 대한 타도에는 협조하신다면서, 왜 민족문제연구소의 부도덕과 불의에 대한 타도에는 같은 구성원으로서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가로막고 계신 건가요?  

– “이제는 부정 불법은 회원들이 알아서 할것입니다”   

회원들이 알아서 안 하니 이렇게 나서는 것 아닙니까? 지금 회원의 대표라고 하는 이민우 운영위원장 뭐 하고 있습니까? 집행부와 한통속이 되서 한마디도 못하고 있잖아요? 지부장들 조직인 운영위원회는 뭐하고 있습니까? 역시 조용하잖아요? 근데, 누가 어느 회원이 알아서 한다는 건가요? 부정 불법 바로 잡겠다고 나서는 회원 누가 있나요? 이덕문 회원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만 하십시다.   

그리고 이사회의 저에 대한 제명처분 무효 관련 2차 내용증명을 위에 올릴 것이니 왜 그 제명처분이 무효인지 차분히 한번 읽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이건 상식이구만…”이라고 하던데 이 회원님은 그런 상식이 있으신지도 한번 보시구요  

2019. 2. 13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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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은 스님것이 아니고 종교불교 재산입니다   

저보고 대표내어 놓으라고 하면 저보다 잘할 사람이 있으니 내어놓으라고 하면 내어 놓습니다   

민바행 정권이 잘 되어있다면 실천하시면서 보여주세요 저는 민바행 단체에 가입 안합니다   

그러나 지금 사회와 정치가 시시각각 변하니 부도덕 불의를 타도하시면서 언론에 기재하시고 올타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협조를 구하신다면 협조합니다 당연히 해야지요   

박정희 기념관반대는 저와 이곳 주 대표님들께서 지방언론에 광고를 내면서 반대 했지만 고김대중대통령의 정책이고 200억 국민의 혈세를 기념관 세우는데 도와 주셔서 우리는 실패하였습니다   

여인철 씨는 이제는 민족연구소와 아무런 관게가 없습니다 회원도 아니고 과거에는 회원이고 운영위원이였지만 지금은 탈퇴하시고 새로 단체를 만드셨으니 단체 정관 주체로 일을 하세요   

지금 해야할 일들이 너무많지요 5.18 광주 유가족 모욕 박정희 스위스에 감쳐진 비자금 ,강남땅 몇만평은 박정희 땅 혹은 박회장 땅 이기사는 이미 언론에서 밝히 기사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는 언론이니 이런것들을 밝혀 주시고 더이상 민족 문제연구소 임원사퇴는 맗하지 마세요   

이제는 부정 불법은 회원들이 알아서 할것입니다   

– 2019. 2. 13 이덕문

수, 2019/02/1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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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 [보도자료]

1. 신일철주금, 미쓰비시,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강제동원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했지만, 일본정부의 압력과 기업의 판결이행 거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1월25일에는 미쓰비시소송의 원고 김중곤 할아버지(96세)께서 끝내 배상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2. 따라서 대법원 판결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고 피해자들의 뜻을 전하기 위해, ▲2월 15일(금), 피해자 대리인과 지원단이 직접 일본 기업을 방문합니다. 신일철주금의 경우에는 3차 방문이며, 미쓰비시와 후지코시도 방문할 예정입니다.

3. 국내에서는 ▲2월 15일~2월 28일까지 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공동행동 참가단체들이 대법원의 판결이행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진행합니다.

4. 이와 관련하여, 일본기업 방문의 의미와 피해자들의 뜻을 전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아래와 같이 진행합니다. 한 분이라도 많은 강제동원 피해자분들이 생전에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귀사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를 부탁드립니다. (끝)


(아래)

[일본정부와 기업에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아베는 강제동원 인정하고 사죄하라!
일본기업은 판결에 따라 즉각 배상하라!

○ 일시 : 2019. 02. 14(목) 오전 11:00
○ 장소 : 일본대사관 앞(트윈트리 타워 A동)
○ 주최 :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 사회 : 김영환 강제동원 공동행동 정책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 진행내용

▲ 경과보고 

▲ 피해자대리인 발언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일본기업에 경고한다!
– 피해자가 바라는 해결방안과 일본기업 방문의 의미
(김세은 변호사/강제동원 소송대리인단 간사)

▲ 피해자단체 발언 일본정부는 강제동원 사실 인정하고 기업배상 막지마라
 – 1월25일 돌아가신 김중곤 할아버지 관련
(안영숙 공동대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연대발언1 노동자가 앞장서 일제 사죄배상 요구하고 받아내겠다
 (엄미경 통일위원장/ 민주노총)

▲ 연대발언2 65년 한일협정 운운하는 일본정부 규탄한다!
– 새로운 한일관계는 강제동원 문제해결부터 시작해야 한다.
(강혜진/서울 겨레하나 간사, 강제징용 노동자상 지킴이)

▲ 이후 행동 계획 발표
– 15일 피해자대리인 일본 방문
– 15일~28일 일본대사관 앞 일인시위

수, 2019/02/1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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請成道僧離山

 

寺刹誰何物(사찰수하물)

衆生此請僧(중생차청승)

休留成道後(휴류성도후)

湖上履春氷(호상리춘빙)

 

道를 이룬 중에게 절간 떠나길 청하다

 

절간은 그 누구의 것이런가

중생은 이에 스님께 청하오

成道한 후엔 머무르지 말길

湖上에서 봄 얼음 밟는구려.

 

<時調로 改譯>

 

절간은 누구 것인가 이에 스님께 청하오

道를 이룬 연후에는 거기 머무르지 말길

어쩌면 호수 위에서 봄철 얼음 밟는구려.

 

*成道: 道를 닦아 이룸. 또는 학문의 참뜻을 깊이 체득(體得)함 *離山: 고산(孤山).

승려가 떠남 *誰何: 누구 *湖上: 호수의 위. 호반(湖畔) *春氷: 봄철의 얼음.

 

<2019.2.14, 이우식 지음>

목, 2019/02/14-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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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비시·후지코시도 방문 예정

0214-6

▲ 시민단체, 일본의 강제동원 배상 촉구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강제동원 공동행동 회원들이 14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일본정부와 기업의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2.14 [email protected]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아베는 강제동원 인정하고 즉각 사죄하라! 일본기업은 판결에 따라 즉각 배상하라!”

14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 정부와 기업에 대법원 판결 이행을 촉구하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강제동원 문제 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이하 공동행동)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신일철주금, 미쓰비시,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강제동원 소송에서 피해자들이 승소했지만 일본 정부의 압력과 기업의 판결이행 거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며 “대법원 판결의 조속한 이행을 촉구하고 피해자의 뜻을 전하기 위해 15일 피해자 대리인과 지원단이 직접 일본을 방문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들은 신일철주금을 두 차례 방문한 바 있으며 미쓰비시와 후지코시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소송의 법률대리인을 맡은 김세은 변호사는 “지난해 10월 대법원 판결에도 일본 정부와 기업은 계속해서 판결이행을 거부하고 일본은 판결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이라며 “신일철주금에 판결이행을 요청하기 위해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책임 있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고 입구에서 돌아섰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압류로 나아갔고 압류 결정이 난지도 1개월이 지났지만 그런데도 신일철주금은 협의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며 “신일철주금이 협의에 응하지 않으면 매각 명령 신청에 나갈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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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단체, 일본의 강제동원 배상 촉구
(서울=연합뉴스) 한상균 기자 = 강제동원 공동행동 회원들이 14일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강제동원 판결에 대한 일본정부와 기업의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2.14 [email protected]

김 변호사는 “일본 정부는 매각 명령 신청이 일본기업의 피해를 발생시키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는 정당한 판결에 대한 이행이고 국제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는 또 후지코시와 관련, “1심과 항소심에서 동일한 판결이 났음에도 상고하고 있다”며 “후지코시가 협의에 응하지 않을 경우 기존 판결에 근거해서 가집행 절차로 나아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들과 관련한 역사적 진실은 오직 하나”라며 “일본기업이 이들을 강제동원해서 강제노동시켰다는 명백한 진실이 있는 한 일본기업은 진실에 근거해서 배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안영숙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공동대표는 “지난 1월 25일 미쓰비시 소송의 원고 김중곤 할아버지가 끝내 배상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며 “피해자들의 평균 연령이 90세가 돼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는 피해자들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이행을 촉구했다.

그는 이어 “이달 말까지 미쓰비시 측에 답변을 요구했는데 답변이 없을 경우 강제집행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공동행동은 15일 오후 2시 15분 일본의 신일철주금, 오후 3시 미쓰비시, 오후 4시 30분 후지코시를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다. 또 15일부터 이달 말까지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갈 계획이다.

[email protected]

<2019-02-14> 연합뉴스 

☞기사원문: “강제동원 배상 이행” 한국 변호인단 내일 신일철주금 3차 방문 

※관련기사 

SBS뉴스: “대법원판결 이행 촉구” 한국 변호인단 내일 신일철주금 3차 방문 

신안일보: ‘강제징용 소송’ 변호인단, 내일 신일철주금 3차 방문

목, 2019/02/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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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누가, 왜 여성과 소수자를 두려워하며 배제하는가?
어떻게 근대 공론장의 한계를 넘어 부대끼는 몸들의 공통장을 구성해 나갈 것인가?

지은이  권명아  |  정가  24,000원  |  쪽수  464쪽  |  출판일  2019년 2월 11일
판형  사륙판 (130*188)  |  도서 상태  초판  |  출판사  도서출판 갈무리
총서명  아프꼼총서 5  |  ISBN  978-89-6195-198-2 03300   |  CIP제어번호  CIP2019000620
도서분류  1. 페미니즘 2. 여성학 3. 문학 4. 문학비평 5. 사회학 6. 철학 7. 정치학

근대 공론장의 주체에게 젠더화된 타자들은 ‘벌레, 홍수, 떼거리’로, 위협적이며 제압하고 다스려야만 하는 존재로 인지되었다. ‘벌레, 홍수, 떼거리’라는 표상은 문화와 지역을 막론하고 근대 체제에서 정동의 힘이 ‘이성적 주체’와 ‘다스림의 주체’에게 인지되고 포획되는 방식이었다. 이광수나 염상섭 같은 근대 공론장 주체에게 근대 도시를 무너뜨리며 범람하는 ‘홍수’는 식민지 토목 권력의 힘을 통해서 혹은 문명개화를 통해서 반드시 다스려져야 하는 ‘미개’와 ‘야만’의 상징이었다.

미투 운동의 도래는 이러한 의식주체의 정신혁명과 대결해온 페미니즘 정치사상과 발본적 유물론의 궤적 속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정신혁명의 상속과 계승이 ‘혁명’의 자리를 독식하는 바로 이 시점에서 봉기한 미투 운동이야말로 지금까지 한 번도 도래하지 않은 신체의 유물론 정치, 그 발본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간략한 소개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는 정동과 페미니즘, 페미니즘과 젠더 정치의 정동 효과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이자, 온 힘을 다해 무언가 ‘다른 삶’을 만들어보기 위해 부대낀 날들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어펙트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실천적 개입은 하나의 몸과 다른 하나의 몸이 부대껴 만들어내는 힘·마찰·갈등에서부터, 개별 존재의 몸과 사회, 정치의 몸들이 만나 부대끼는 여러 지점들까지, 그리고 이런 현존하는 갈등 너머를 지향하는 ‘대안 공동체’에서도 발생하는 ‘꼬뮌의 질병’을 관통하면서 진행된다.

여성, 소수자로서의 신체적 경험은 페미니즘 사상이 출발하고 나아간 가장 큰 기반이었다. 정동 이론이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정동 이론은 신체에 대한 새로운 유물론이자, 신체들과 신체들의 연결과 부대낌 즉 사회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이론이다. 그리고 신체에 대한 유물론적 사유와 실천에 거의 유일한 지적 원천은 바로 페미니즘과 젠더 이론이다. 또한 젠더 연구는 경험을 신체의 유물론의 차원에서 고찰하는 연구 방법을 축적해왔고, 정동 이론은 젠더 연구의 이러한 경험 연구 역시 이어받고 있다. 정동 연구는 공통적인 것을 둘러싼 긴 투쟁의 산물이다.

이 책은 정동에 대한 논의의 역사를 따라 18세기까지도 올라가지만, 주요 연구 대상은 박근혜 정권이 성립되던 시점에서 시작해서 세월호 사건, 백남기 님 살해 사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최종적 불가역적인’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페미니즘 운동의 부상, 문화계와 문단 등 <○○계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부상, 시사인 절독 운동, 메갈리아 파동, 촛불집회, 탄핵, 대통령 선거, 정권 교체, ‘촛불 혁명’ 이후, 그리고 미투 운동을 경유하는 시기의 한국 사회의 여러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상세한 소개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페미니즘 운동을 통해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와 같은 속담이 여성차별적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 그런데 이런 여성차별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면 단순한 표현 이면에는 ‘여성의 불가해한 힘’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있다. 남자 셋이 모이면 시국과 정치를 논하기는 하지만, 접시를 깰 수는 없다. 시국과 정치에 비해 ‘접시’는 사소한 가정사를 비유하는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여자들은 단지 모이는 것만으로도 접시를 깰 수 있고, 울기만 해도 집안을 망하게 한다.

여성은 모이면 힘이 세지고, 그 힘은 ‘파괴적’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 여성은 모이면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단히 모여서 힘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그 힘은 항상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되고, 이런 매도와 가치의 전도를 통해 여성의 힘은 평가절하되거나 뿌리 뽑혔다. 이 책은 이렇게 여성의 힘이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되어온 역사가 현재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공격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분석한다.

여자떼의 무한한 힘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가치 정립하기

이 책의 목적은 역사적 분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역사적 분석은 바로 여성의 연결과 연결을 통해 발생하는 힘을 재해석하고 새롭게 가치 정립하기 위한 실천적 시도이기도 하다. 여성이 모이면 힘이 세지고, 그 힘이 무언가를 파괴한다고 인류 역사를 통해 반복해서 인식했다는 말은, 달리 말하면 그만큼 여성에게 잠재된 힘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무리 무한한 힘을 지니고 있어도, 그 가치가 매도되고 평가절하되는 일이 ‘일상’이 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면, 그 누구도 스스로의 힘을 긍정할 수 없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바로 여성의 힘을 파괴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평가하는 그 가치부여의 체계 그 자체를 전복해야만 한다. 이 책은 여성의 힘을 파괴적으로 매도해온 과정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통해 여성의 힘을 평가하고 가치부여하는 이론적인 전복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소수자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타진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페미니즘이 다시 부상한 시대라고 하지만, ‘미투운동’은 음모론, ‘꽃뱀론’으로 여전히 매도된다. 기존 권력 구조의 지배적 카리스마를 비판하는 성폭력 고발운동은 ‘진보 진영’을 파괴하려는 음험한 힘으로 모욕당한다. 여성차별적인 담론 구조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군중 검열’이나 무지몽매한 ‘메뚜기 떼’가 자행하는 ‘지식 테러’라고까지 공격받는다. 평생 ‘위안부’ 문제를 고발하고 전시성폭력을 비판해온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도 유사한 공격이 반복된다. 이 책은 현재 진행 중인 페미니즘 운동, 차별 반대 운동과 이에 대한 공격과 매도를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가 축적된 역사의 지평에서 해석한다.

여성의 잠재적 힘에 대한 공포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는 인류 역사상 반복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마르크스까지 인간이 함께 모여서(사회적) 힘을 만드는(정치적) 존재라는 것은 인간의 존재 이유라고 논의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모이면 ‘파괴적’이 된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사상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재구성했지만,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사상 그 자체를 통해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를 합리화했다. 여성이 참정권에 제한을 받고, 여성들의 집합적 행동이 파괴적인 것으로 가치 절하되는 것은 이런 맥락과 관련이 깊다.

근대 체제에 이르러 이런 여성의 잠재적 힘에 대한 공포는 ‘민주주의’의 근원적 딜레마로도 자리 잡는다. 여성이 근대 시민적 이성과 합리성에 미달하는 ‘감정적’ 존재라는 점에서 참정권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는 단지 이성과 감성의 대립의 산물만은 아니다. 중세의 ‘마녀사냥’이 여성이 지닌 불가해한 힘과 지식, 열정에 대한 공포의 전형적 산물이고 이를 정당화한 것은 종교와 봉건제였다. 반면 근대 민주주의에서 이 공포는 여성의 힘을 ‘광기’(정신의학), ‘범죄’(법학, 사회학, 범죄학, 행동심리학 등)로 규정하는 근대 지식과 ‘문란’을 외치는 근대적 윤리에 의해 합리화되었다.

성찰적인 공론장 주체 vs. 파괴적인 군중

여성의 힘에 대한 공포는 역사적으로 소수집단의 힘을 억압하는 패러다임으로 확산되었다. 부르주아 남성은 모여서 ‘민주주의’를 만들지만, 하층 남성은 모이면 ‘사회질서를 파괴한다’고 매도되었고, 서구의 백인 주류 집단이 모인 광경은 민주주의의 ‘장관’으로 보이지만, 비서구 비백인 집단이 모인 장면은 ‘난장판’이나 잠재적 테러집단의 떼거리로 공포를 자아내는 우려스러운 문제적 현장이 된다.

근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공론장은 모여서 힘을 만드는 것이 정당화된 집단에 의해서만 구성 가능한 것이었다. 이성과 성찰의 주체는 모여서 민주주의를 만들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떼거리들은 모여서 파괴적인 ‘군중심리’를 형성할 뿐이다. 성찰적인 공론장 주체와 파괴적인 군중이라는 범주의 차별적 구성은 여성, 하층 남성, 비백인 인종 집단 등 소수 집단의 집합적 힘을 가치 절하하고 근절하는 ‘합리적 근거’가 되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공론장’을 파괴하는 폭도나 ‘극단주의’, 잠재적 범죄자라고 공격하는 논리는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롭지 않은 역사의 반복이다.

지은이 소개

권명아 (Kwon Myoung A)

“삶-연구-글쓰기의 인터페이스” 아프꼼의 래인커머(來人comer)이다.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에 재직 중이며 젠더 어펙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와 문화, 문학을 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90년대 페미니즘 정치를 다룬 『맞장뜨는 여자들』(2001)은 단독자로서의 여성 주체가 부상하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책이다. 단독자로서 여성 주체가 부상했던 짧은 정치적 순간은 외환위기로 인해 급격하게 진부한 삶의 양태로 회귀했다. 『가족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2000)는 이 퇴행과 반복의 한국사를 다룬 책이다. 이후 젠더 정치로 본 한국 근현대사 3부작인 『역사적 파시즘 : 제국의 판타지와 젠더정치』(2005), 『식민지 이후를 사유하다』(2009),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2013)을 냈다. 파시즘과 젠더 정치 연구는 매혹, 열광 등 파시즘과 정념의 특별한 관계를 해명하는 일이기도 했다. 『음란과 혁명 : 풍기문란의 계보와 정념의 정치학』이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 한국 사회의 정동을 묻다』(2012)와 짝을 이루는 연구서인 이유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는 이런 필자의 연구 여정의 결과이자, 다른 삶을 향한 발명과 실패의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실험의 결과이다.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는 헤이트 스피치(혐오발화)와 젠더 정치에 대한 후속작과 나란히 읽혀지면 더 좋겠다.

책 속에서 : 부대낌과 상호작용의 정치

불법촬영은 ‘재미, 장난 또는 정신 차려야 할 일’ 정도로 합리화되고, 성적인 노예화가 사랑 혹은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정당화되기를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무죄 판결은 성폭력을 ‘다시 태어나야 할 일’ 정도로 정당화하고, 권력관계의 위력을 통해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을 넘어 애정, 헌신, 보살핌, 전심전력의 수발을 노예적으로 강요한 것을 ‘존경’에 의한 행동으로 합리화했다.

― 1부 1장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의 신체 유물론, 27쪽

페미니즘에 대한 분할 통치와 적폐에서 스스로를 면죄하면서, 국가와 자본의 힘에 편승하여 자신을 확대하는 문단 문학 주체는 종말의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문단 문학이 종말을 고하는 시점마다, 문학의 정치성을 새롭게 구축하고 발명한 것은 페미니즘 운동이었다.

― 1부 3장 해시태그의 정동이 재구축한 페미니즘 문학, 85쪽

오늘날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여자떼 공포와 공론장 부재에 대한 위기감은 단지 ‘메갈’이라는 새로운 인종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도, 그 집단의 실태 조사로 판단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최근 페미니즘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야말로,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의 역능을 문란, 퇴폐, 부적절함, 근본주의적 불순분자로 배제하면서 구축된 근대적 주체성과 공론장의 한계를 되돌아보는 ‘근본적’이고도 발본적인 이론의 재구성을 요청하는 사태이다.

― 2부 1장 여자떼 공포와 다스려질 수 없는 자들의 힘, 157쪽

이른바 혁명의 시대가 종지부를 고하고 ‘욕망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어떤 선언들은 우리가 마치 갈등과 계급투쟁을 넘어서 욕망이라는 새로운 유토피아라도 발견한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러나 욕망의 시대와 함께 도래한 것은 자유도, 유토피아도 아닌, 새로운 빈곤 사회였다.

― 2부 4장 정치경제학 너머의 빈곤, 209쪽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난 성폭력 생존자들의 해시태그 운동도 온라인 담론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면서, 이를 통해 기존의 물질적인 제도(문학 제도, 문화 제도 등)에 저항하는 오큐파이 운동의 한 사례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또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1992년부터 계속 진행하고 있는 수요 집회 역시 점령당한 신체를 애도하는 저항적 오큐파이 운동의 세계적인 사례이다.

― 3부 2장 증강 현실적 신체를 기반으로 한 반기념 정치 구상, 294쪽

이렇게 홀로 여럿인 주체 양태는 응답을 듣지 못한, 아니 응답에 대한 간절함에 하나이자 유일한 자신조차 상실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도 응답하지 않으니, 스스로 자신의 삶과 폭력의 경험과 그 모든 의미를 찾아내야 하는 상황이 평생 지속된 결과 김복동이라는 한 존재는 묻는 자, 응답을 찾는 자, 자신의 죄를 묻는 자, 살피는 자, 자신을 보살피는 자, 전생의 복동, 이곳저곳의 전장으로 끌려 떠도는 복동, 아이를 꿈꾸던 복동, 전생에 아이를 잃은 복동 … 등으로 여럿으로 나뉘고 자리를 바꾼다.

― 3부 3장 홀로-여럿의 몸을 서로-여럿의 몸이 되도록 하는, 시적인 것의 자리, 301쪽

마음을 놓을 수 있는 마주침에서 촉발되는 안심의 정동이란 비참에서, 불안에서 놓여남을 의미한다. 마음을 놓는다는 것은 이러한 놓여남의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마음을 놓는 과정, 불안에서 안심으로 이행되는 과정은 수동에서 능동으로 변형되는 과정이며, 낭시의 표현을 빌자면 영혼이 펼쳐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 4부 1장 마음을 놓다, 352쪽

문제는 임박한 파국, 혹은 정동적 현실이 전송하는 신호들(불안과 위기, 혹은 특정의 정념들/수동들)을 통해 또다시 소유자로서의 주체라는 위치를 다시 공고히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공통적인 것을 발명할 수 있는, 다른 신체들을 사유해 나가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구축된 신체에 더 이상 ‘인문학’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다고 해도 그리 슬퍼할 만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 4부 5장 정동적 전환과 인문의 미래, 421쪽

저자 강연회 : “여자가 모이면, 뭐라도 바꾼다!!
― 여자떼, 여성 집단행동의 역사”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출간을 기념하는 저자 강연회를 아래와 같이 개최합니다.

◆ 강연 주제 : 여자가 모이면, 뭐라도 바꾼다!! ― 여자떼, 여성 집단행동의 역사
◆ 강연 : 권명아 (『여자떼 공포, 젠더 어펙트』 지은이,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일시 : 2019.2.25.(월) 저녁 7시30분
◆ 장소 : 다중지성의 정원 (문의 02-325-2102)
◆ 신청하기 : http://bit.ly/2BzfDYV

함께 보면 좋은 갈무리 도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권명아 지음, 갈무리, 2012)

이 책은 1980년대에서 2000년대까지 지난 20여 년간의 변화와 낙차(落差)를 살펴보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슬픔, 외로움, 사랑, 위기감, 불안 등 정념의 키워드들을 통해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문화들을 넘나들며 조망한다. 더불어서 시대를 초월한 여성 문인들의 삶과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며 지난 20여 년간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인 것’을 둘러싼 변화를 통합적이며 힘 있게 그려내고 있다.

『정동 이론』(멜리사 그레그, 그레고리 J. 시그워스 엮음, 최성희, 김지영, 박혜정 옮김, 갈무리, 2015)

아프 꼼 총서 2권. 정동 연구라는 이제 막 발아하는 분야를 정의하는 시도이자, 이 분야를 집대성하고 그 힘을 다지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정동 이론의 주요 이론가들을 망라하고 있다. 정동이란 의식적인 앎의 아래와 곁에 있거나 그것과는 전반적으로 다른 내장[몸]의 힘으로서, 우리를 운동과 사유, 그리고 언제나 변하는 관계의 형태들로 인도한다.

『캘리번과 마녀』(실비아 페데리치 지음, 황성원, 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자본주의의 역사에 있어서, 남성이 임금 노동자로 탈바꿈된 것 만큼 여성이 가사노동자이자 노동력 재생산기계로 되었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페미니즘 역사서이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닦았던 이 폭력적인 시초축적 과정에서 마녀사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이었음을 밝힌다. 이 책에서는 공식적인 역사서나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역사책에서도 다뤄지지 않는 산파 여성들·점쟁이 여성들·식민지의 원주민 여성 노예들·여성 마술사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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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2019/02/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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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반민족행위자 만든 교가 상당수”…역사교육위원회 구성도 요구

(예산=연합뉴스) 정찬욱 기자= 전교조 충남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는 14일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 도내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는 것으로 파악된다”며 “도교육청은 친일 잔재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하루빨리 실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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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교조 충남지부 보도자료 캡처=연합뉴스]

두 단체는 이날 공동성명에서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변경하는 작업이나 교실 속에 남아있는 일본말을 우리말로 바로잡는 일은 일제 잔존 역사를 청산하는 첫걸음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지름길”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이들 단체는 “최근 광주시는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을 바탕으로 광주 지역 중·고교와 대학의 교가를 전수 조사했고, 광주제일고를 비롯한 상당수 학교가 현제명·이흥렬·김동진·김성태 등 친일 음악인 4명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 국민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라며 “충남교육청은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작곡한 교가를 바꾸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시민, 교육 단체가 참여하는 가칭 역사교육위원회를 구성해 올바른 역사 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계 대표적 친일 잔재였던 ‘국민학교’란 명칭은 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하지만 ‘유치원’이라는 일본식 이름은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사업회와 문화관광부가 시민공모전을 통해 ‘유아 학교’로 명칭 변경안을 선정했고, 정치권에서도 유아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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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4> 연합뉴스 

☞기사원문: 충남전교조·민족문제연구소 “학교 친일 잔재 청산해야” 

※관련기사 

☞굿모닝충청: 전교조 충남지부 “학교 친일 잔재 청산” 

☞뉴스파고: 전교조·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충남교육청은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하라!”

목, 2019/02/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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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학교 내 친일파 동상 버젓이…
친일음악가 작사·작곡 교가 바꿔야”
24일까지 전수조사해 공개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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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에 개교 100주년을 맞는 광주일고는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음악인 이흥렬(1909~1980)씨가 작곡한 교가를 올해 안에 바꾸겠다”고 밝혔다. 광주시교육청 제공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각계각층에서 다양한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서울지부가 15일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운동’을 제안했다.

전교조는 이날 성명서를 통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 학교에서는 친일파의 동상과 그들의 이름을 딴 기념관이 아직도 버젓이 남아있거나, 친일 음악가가 작곡·작사한 교가를 학생들이 합창하고 있다”며 “국권을 회복한 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주장했다. 전교조 서울지부는 이에 따라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 운동’을 제안하며 구체적으로 △친일파 동상 철거 △친일파 이름을 딴 기념관의 이름 변경 △친일 음악가가 작사·작곡한 교가 폐기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이들은 또 오는 24일까지 서울 지역의 모든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친일파 동상과 기념관의 존치 여부, 친일 음악가가 작사·작곡한 교가의 현황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학교 명단과 함께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학교 내 친일파 동상과 기념관, 친일 음악가가 작사·작곡한 교가의 존치 여부에 대해 서울시교육청도 전수 조사에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친일파 작사·작곡 교가를 바꾸는 작업은 이미 광주시교육청이 주도해 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은 이를 위해 전담 태스크포스팀까지 구성하기도 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비롯한 상당수 학교에서는 광주시교육청의 제안에 호응해 현제명·이흥렬·김동진·김성태 등 친일 음악가들이 작사·작곡한 교가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또 전교조 충남지부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도 공동으로 성명서를 발표해 친일파가 작사·작곡한 교가를 바꾸거나 학교에 남아있는 일본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양선아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5> 한겨레 

☞기사원문: 전교조 서울지부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하자” 제안 

※관련기사 

☞서울신문: 전교조 서울지부 “학교 내 친일잔재 청산하자”

금, 2019/02/1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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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시위 나선 보통 사람들 얘기
경찰·검찰·법원 자료로 생생히 복원
“대규모 민족운동 원동력은 자발성”
“평범한 사람들 싸움이 오늘을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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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열전 -3·1운동의 기획자들·전달자들·실행자들 조한성 지음/생각정원·1만6000원

1919년 3월5일 9시30분, 경성 덕수궁파출소에서 근무하는 순사보 정호석(당시 34살)은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얻었다. 경찰관 옷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은 그는 서대문네거리에 있는 잡화상에서 광목을 사 집으로 돌아왔다. 넷째손가락 둘째 마디를 물어뜯어 흘린 피로 광목에 태극기를 그렸다. 다른 광목에는 ‘대한국 독립만세’라고 썼다.

담배설대에 광목들을 묶어 들고 집 근처의 흥영여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들어가 그는 만세 삼창을 한 뒤 ‘함께 만세를 부르지 않겠냐’고 물었다. 어린 여학생 한명이 나와 만세를 불렀다. 열 살 된 그의 딸이었다. 딸의 친구들 수십 명이 뒤를 이었다. 교사 두 명도 만세를 부르며 아이들의 뒤를 따랐다. 이들이 3·1운동의 ‘최연소 시위대’였다.

“그대는 왜 독립운동을 하였는가?”(검사)

“삶에 쪼들리고 있는 2천만 동포를 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정호석)

“이와 같은 일을 하면 무거운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각오하고 한 일이니 목숨이 아깝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호석은 딸이 다니는 학교로 가 만세시위에 동참하게 했다. 왜 그랬을까? 그건 2016년 하반기 서울 도심을 비롯해 전국에서 벌어졌던 촛불시위 때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나선 부모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만세’와 ‘촛불’은 나라의 미래를 바꾸는 일이었다. 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아이에게 그 길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오래도록 그 길을 기억하고, 후일 그 길이 막히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면 제대로 된 길을 찾아 용감히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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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조 연구원이 최근 펴낸 <만세열전>은 3·1운동의 진짜 주인공들 이야기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싸워온 사람들은 대개 무명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소중한 삶을 희생했지만, 역사책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그들의 삶을 역사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들을 생생하게 담아 내기 위해 경찰신문조서와 검찰신문조서, 예심심문조서, 공판시말서 등을 활용했다. 신문·심문조서는 ‘한 것도 안 했다’고 숨기는 피의자·피고인과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꾸미려는 공안당국 사이의 진실게임이 벌어진 기록이다. 거짓도 들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자료들을 적극 활용했다. 조 연구원은 그 까닭에 대해 <한겨레>와 통화에서 “조서 등은 보조 자료로 여겨져 왔지만, 거기에 사람들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런 자료를 토대로 3·1운동을 기획하고,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의 소식을 알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만세시위에 나선 사람들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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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시위는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 나갔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출처 국가기록원

책은 여운형(1886~1947)에서 시작한다. 그는 1918년 11월 중국 상하이에서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을 만났다. 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파리강화회의에 조선 대표를 보내기로 하고, 이 회의와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독립청원서 두 통을 작성했다. 조직의 명의로 청원서 서명을 하려는 목적에서 ‘신한청년당’이 만들어졌다. ‘벼락정당’이었다. 신한청년당은 이후 조선과 일본,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져 조선인들을 만나며 독립의 희망을 얘기했다.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책은 이어 천도교와 기독교의 독립운동 결정과 힘을 모은 과정을 다룬다. 독자적 운동을 모색하던 학생들도 종교계 쪽의 운동에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한차례로 끝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의 생각은 향후 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독자적인 운동을 펼치겠다는 생각도 소중했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민족대표들이 독립운동의 지도를 포기했을 때 학생들이 나서 대신할 수 있었다.”
학생들만으로 3월5일 남대문역 시위를 준비했다. 일제는 이날 모인 군중이 약 1만명이라고 했는데, 3월1일은 2천~3천명이라고 했다. 학생들의 조직력, 3월1일 만세시위에서 얻은 용기가 가져온 결과였다. 남대문 일대는 ‘붉은 수건’으로 물들었다. 경성에서는 이날 시위 때 태극기가 처음 나왔다고 한다.

‘독립선언서’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인쇄됐다. 보성사 사무원 인종익(49살)은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전달하는 일을 하다 청주에서 체포됐다. 고문과 구타에도 처음엔 입을 열지 않았다. 전주에서 선언서를 배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만인이 죽어 백만인을 살리는 방법이 있다면 죽음도 불사할 것이오. 만인을 죽이면 만인의 피가 백만을 물들이고, 백만을 죽이면 백만의 피가 천만을 물들일 것이오. 그럼 결국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소?”(인종익·경찰신문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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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익의 신상카드에는 사진이 없다.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주길 바라서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사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인종익은 1년5개월여 수형생활을 한 뒤 1920년 8월 출소했는데 이후의 흔적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일제가 만든 신상카드에도 ‘사진 없음’이라고 돼 있다. “그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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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선언서 등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된 당시 19살 청년 김동혁. 그는 예심판사의 심문에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답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배재고등보통학교 2학년이던 김동혁(19살)은 3월1일 독립선언서 6매를 배포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2일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 2호, 5일 <조선독립신문> 3호를 배포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는 학생이면서 어째서 이번 계획에 가담했는가?”(예심판사)

“난 조선 사람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일일 뿐이었습니다.”(김동혁)

조선 사람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3·1운동은 제대로 된 지도부가 없었는데도 순식간에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다. “자발성이야말로 대규모 민족운동이 가능한 원동력이었다.”

어릴 적 서당에 같이 다녔던 노끈장수 김호준(21살)과 경성공업전문학교 2학년 양재순(22살)은 <각성호회보>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 그들은 이렇게 썼다. “2천만 동포의 영혼과 삼천리강산을 가진 우리 민족은 맨손임을 걱정하지 말라. 철함 대포는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

지은이는 민주주의를 위한 모든 투쟁의 앞에 3·1운동이 있다고 말한다. “100년 전 포기할 줄 몰랐던 평범한 사람들의 싸움이 오늘을 열었다. 민주주의가 파괴될 때, 국가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일어나 당당히 싸우는 역사를 만들었다. 그 시작에 3·1운동이 있다.”

황상철 기자 [email protected]

<2019-02-15> 한겨레 

☞기사원문: 역사책에 안 나오는 3·1운동의 주인공들 

※관련기사 

☞서울경제: [책꽂이-만세열전]3·1운동을 완성한 무명의 보통사람들 

☞헤럴드경제: 소년·노끈장수·인쇄공…보통사람들의 3·1운동 ‘만세 이야기’

금, 2019/02/1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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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님께 드리는 부탁 말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제명 의결 무효 내용증명(2) 관련하여

(아래 첨부의 내용증명(2)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함세웅 이사장님  

명망 높으시고 평소에 외경해 마지않던 함세웅 이사장님을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장으로서 만나 뵙고 가까운 자리에서 연구소의 여러 사안들부터 때로는 정치현안까지 말씀을 들은 것을 저는 축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로서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엄혹한 시절에 고초를 겪으셨으며 그 후에도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행동으로 빛을 비추신 함신부님께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오신 것을 크게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운영위원장직을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인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함이사장님으로부터 작년 5월에 회원 제명 처분을 받게 됐습니다.

그 이유를 이 자리에서 따지고자 하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저에 대한 회원 제명을 결의한 지난해 511일의 이사회는 서울시교육청에 등기된,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소위 신고 정관또는 승인 정관을 위배했기 때문에 무효라는 취지의 내용증명(2)을 지난주 금요일에 보냈고 연구소에서 수령했다는 통지를 받았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작년 7월초 경에도 내용증명을 보낸바 있습니다.  

그때는 제가 20153월 운영위원장 취임할 때부터 알고 적용해왔으며 작년 5월 제명 당시 유통되던 정관(집행부에서 작년 6월 말경에야 밝힌 소위 운영 정관“)이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정관에 의거해서 무효를 주장하고 내용증명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후 2018822일 저희 민바행 측의 민원처리에 늑장을 부리던 서울시교육청에 세 번째로 항의방문을 가서 관계 공무원으로부터 우리 연구소에 회원이 10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와 연구소에 따로 운영되는 정관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어렴풋이 알고 있던, 그러나 용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던 등록된 정관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그 등기된 정관으로 연구소(집행부)에서 뭘 해왔는지, 그 용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서울시교육청에 정보공개청구를 하게 됐고, 10월경에야 간신히 얻어낸 총회 의사록을 보는 순간 교육청에 등기된 그 승인 정관의 몰랐던 용도를 확실하게 파악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822일 서울시교육청 항의 방문 때 교육청 공무원이 얘기한 회원 10과 관련된 것으로, 우리가 알던 (운영) 정관과는 다른 (승인) 정관으로 회원들 몰래 정기 및 임시 총회를 해 오며 연구소의 주요 의사결정을 해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위 운영 정관만을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회원은 전국에 13천여명으로만 알아온 우리 회원들을 집행부에서 지난 15년 동안 속여왔다는 것으로 이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처럼 소름 돋는 순간이 또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육청/민족문제연구소 연합팀과의 줄다리기 끝에 입수한 총회 의사록에서 2013129일 임시총회 때 함신부님께서 이사장으로 선임되시고 그때부터 이사회와 정기총회 그리고 임시총회를 주재하신 것을 알고는 저는 사태의 내막을 상당부분 파악하게 됐습니다.  

그전까지는 저는 (그리고 저의 동료 부위원장들은) 함이사장님께서 연구소 돌아가는 상황을 잘 모르시고 집행부 실무자들 말에 현혹되셔서 그러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번 이사장님께 면담신청을 해가면서 연구소의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말씀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004년부터 시작된 그 회원 10총회 의사록을 보는 순간 저는 함이사장님께서 모든 걸 파악하고 계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함이사장님께서는 2004년부터 회원 10으로 정기 및 임시 총회가 열려온 것을 알고 계셨고, 그것을 이어받으셔서 계속 주재하셨으며, 따라서 연구소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계셨음에도 저희 운영위원장단에서 두어번 면담 신청해서 연구소 집행부의 핵심 상근자들의 비민주적 행태 문제 그리고 운영상 문제들에 대해 말씀을 드릴 때 모른체 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지난 15년 동안 그들 상근자들이 5명이나 포함된 회원 10으로 정기총회, 임시총회를 해오면서 전국의 13천 진짜(?) “회원들을 속여 온 행태가 드러나니, 집행부에서 말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 슬슬 후원 회원이라는 말을 퍼뜨리며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기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주인인 회원이라고 생각했던 회원들도 스스로에게 나는 그저 후원 회원이었어!”라는 자기암시를 하게끔 만들고 있는 중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집행부가 십수년을 회원들을 속여 오다가 이제 발각이 돼서 위기가 닥치니 설마 하며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회원들에게 또 속임수를 쓰는 것이지요. 함이사장님은 이런 상황을 혹시 알고 계신지요?  

그런데 제가 함이사장님께 섭섭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왜 운영위원장이던 20153~ 20173, 2년 동안, 저에게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여위원장이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생각하며 사용하고 있고, 집행부에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그 “(운영) 정관은 사실은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 아니고, 법적으로 유효한 “(승인) 정관은 따로 있네. 그리고 회원13천명이 아니고, 10명뿐이네라고.  

여위원장이나 다른 회원들은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의 법적 주인인 사원(법인 회원)이 아니고, 단순 기부자 내지는 후원 회원에 불과하고, 운영위원장이라는 자네의 직책은 소위 지부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아무런 권리도 없는 후원 회원조직의 대표에 불과한거네라고.  

그런 충격적 사실들을 험한 시간 험로를 거쳐 간신히 알아내고 나니 허탈하고 함이사장님께 섭섭한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함세웅 이사장님, 작년 7월 경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없어 답답했는데, 얼마전 생각해보니 정관이 두 개인데 어느 정관에 의거해서 이사회 결정이 내려졌는지가 궁금해졌고, 결론은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승인 정관에 의거해 새로 작성해서 보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번 내용 증명(2)은 교육청 승인 정관에 의거, 이사회 의결이 무효라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핵심 요지는 간단합니다. 법적으로 유효한, 등기된 승인 정관에 의하면 이사가 5인인데, 저에 대한 이사회 제명 의결에 참석한 이사는 7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8명 이사중 한명은 불참). , 이사 자격이 없는 두 명이 의결에 참여했기 때문에 저의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절차상 하자로 그 결의가 무효라는 것입니다.  

변호사 자문도 얻었는데, 민족문제연구소의 고문 변호사는 어떤 답을 내놓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지난 1차 내용증명은 아무런 소용없는 것이고, 이번 2차 내용증명이 진짜 같고 보내드렸으니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회원 제명을 철회하고 저의 요구에 응답해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 드립니다. 한 단체의 수장 이전에 신부이신데 잘못된 일이 있다면 바로 잡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디 법적 절차를 밟지 않아도 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속한 시일 내에 통보를 부탁드립니다.  

 

2019. 2. 15.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제명자

(9) 운영위원장 여인철

 

 

별첨:

     2018. 5. 11 51차 이사회의 회원(여인철) 제명 의결 무효  

내 용 증 명 (2)  

수신 :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서울시 용산구 청파로47다길 27 (청파동2)

발신 :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

대전시 서구

제목 : 2018. 5. 11 51차 이사회의 회원(여인철) 제명 의결 무효  

2018511,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하 연구소) 51차 이사회는 본인(여인철)에 대한 회원 제명의 건을 심의하고, 제명 처분하였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당시 통용되던 정관에 의거, 51차 이사회의 구성, 개최 및 결의가 무효임을 주장하며, 아울러 본인의 회원의 지위를 박탈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는 사실을 밝힌 내용증명을 작년 7월 초경에 송부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어떤 대답도 듣지 못한 가운데, 우리 민족문제연구소에 본인이 운영위원장으로 재임하던 지난 20153월부터 20173월까지 2년간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사용해왔던 위에서 언급한 정관 (집행부에서 말하는 소위 운영 정관”) 외에 또 다른 정관(교육청에서 승인한 정관, 이하 승인 정관”)이 본인을 비롯한 전국의 회원 몰래 운영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별첨 1: 2018623, 충남아산에서 워크샵을 겸하여 열린 2분기 운영위원회 배포자료),

그 배포자료에서 집행부는 “…서울시 교육청의 인가를 받아 등기된 법적 효력을 지니는 것과 실제 시행하고 있는 운영 정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라고 인정하며, “우리 연구소는 두 가지 정관을 모두 준수하고 있으나 혹 양자가 충돌할 경우에는 등기된 정관의 효력이 우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에 정관이 두 개였고 연구소는 이 두 개의 정관 모두를 준수하고 있다?  

본인은 연구소가 사단법인 등록할 때 신고한 정관(위 교육청에 등기된 승인 정관”)이 있다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은 있으나 그 정관은 사단법인 등록을 위해 필요한 요식행위에 의한 정관이었을 뿐 그 정관이 집행부에 의해 따로 회원 몰래 준수되고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운영위원장으로 재임하던 당시 본인은 집행부로부터 받은 소위 운영 정관이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으로 알고 집행부에게 그 정관을 준수하도록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집행부가 지난 십수년 동안 운영 정관외에 승인 정관을 이용해 회원을 10으로 임의로 정하고, 전국의 13천여 회원을 무시하며 이들 10명만으로 정기총회와 임시 총회를 열어 연구소의 주요 사안에 대해 의사결정을 해온 사실을 이사진과 집행부 상근자들은 운영위원장인 저를 비롯한 운영위원(회원)들에게 알리지 않아왔다는 사실이 작년 9월경에야 드러난 것입니다  

운영위원장으로서 소위 운영 정관을 법적으로 유효한 정관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연구소 업무에 임했던 본인은 이사진과 상근자들의 배신과 기만행위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사회의 본인에 대한 회원제명 의결 무효의 건과는 별개로, 민족문제연구소를 지난 1991년부터 오늘날까지 회비를 납부하며 지탱해 온 전국의 회원들에 대한 이사진과 집행부 상근자들의 오랜 배신과 기만 행태에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작년 7월에 보낸 내용증명(1차라 칭함)운영 정관을 근거로 작성된 것인데, 그렇다면 작년 511일의 이사회 결정은 어떤 정관에 따라 결정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소위 법적 효력이 우선한다는 등기된 정관” (“승인 정관”)에 따라 다시 작성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에 본인에 대한 이사회의 제명 의결 무효를 주장한 1차 내용증명(“운영 정관을 근거로 작성)과 같은 취지의 2차 내용증명(“승인 정관을 근거로 작성)을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송부합니다.     

1. 51차 이사회 결정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511일 민족문제연구소 제51차 이사회는 귀하의 참석 하에 소명절차를 진행하였습니다. 이사회는 운영위원회의 제명건의안과 관련 자료, 귀하의 소명과 관련 자료를 심의한 결과 아래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결정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관에 의거 이사회에 주어진 권한에 따라 참석 이사 전원의 찬성으로 회원 여인철을 제명 처분한다. (51차 이사회에는 이사 8 중 이사 강만길을 제외한 7인이 참석하였으며, 여인철 씨의 제척사유 주장에 따라 이사 임헌영과 조세열은 의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정서에 따르면 이사회는 어떤 정관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단지 정관에 의거 한다며 회원 제명 건에 대하여 의결했습니다  

지난 1차 내용증명에서는 회원들에게 기 공개된 운영 정관에 의거하여 이사회의 결정이 무효임을 밝혔으니, 2차 내용증명에서는 운영 정관과는 다른, 법적 효력이 우선한다는 승인 정관”(2017. 12. 28, 4차 개정)에 의거하여 살펴보겠습니다.    

2. “승인 정관의 내용  

3장 임원  

10(임원의 종류와 정수)

이 법인에는 다음의 임원을 둔다.

1. 이사 5인 

2. 감사 2

1항 제1호의 이사에는 이사장을 포함한다.  

51차 이사회 의결의 준거가 되는 교육청 인가 승인 정관의 제10조에서는 이사를 이사장 포함 5인으로 정하고 있으며, 등기부등본 상에 함세웅, 임준열(등기부상 임헌영), 윤경로, 조세열, 신용옥의 5인이 등기되어 있습니다.  

3. 51차 이사회 결의 무효 이유  

이사가 아닌 자가 이사회 의결에 참여 (“승인 정관위반)  

위 이사회 결정서에 따르면 제51차 이사회에는 함세웅, 임준열, 윤경로, 조세열, 신용옥, 이이화, 지수걸의 7인이 참석하고 강만길은 불참했는데, 이중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승인 정관에 따르면 강만길, 이이화, 지수걸은 이사가 아닙니다.  

이사회는 승인 정관에서 정한 5인 즉, 등기부등본에 등기된 5인만으로 구성하고 의결했어야 하며, 따라서 이를 위반하여 이사가 아닌 자가 표결에 참여한 제51차 이사회의 결의는 무효입니다  

4. 결론  

결론적으로 위 3항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제51차 이사회에서 의결한 여인철 회원 제명의 건은 무효이고 따라서 본인은 당연히 정관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회원의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사회, 운영위원회, 집행부는 본인이 회원에서 제명되었다는 주장을 하며 본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재차 요구합니다.  

이사장은

본인을 회원에서 제명한 제51차 이사회의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지체없이 본인에게 정식으로 통보하는 것은 물론,

전국의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통보하고,

회보 민족사랑과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다음과 같이 공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회원 여인철을 제명한 2018. 5. 11의 제51차 이사회는 이사가 아닌 자가 의결에 참여하여 제명을 결의한 것이므로 무효입니다. 따라서 여인철 전 운영위원장은 회원의 지위에 있음을 확인합니다. 위법적 회원 제명으로 인해 심대한 심적 피해를 입었을 여인철 회원에게 사과와 위로의 말을 전하며, 이에 사실을 명확히 하기 위해 공지합니다.  

2019OO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함세웅

 

위의 본인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적당한 방법을 통해 저의 권리를 되찾을 것입니다.  

2019. 2. 8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여인철

9대 운영위원장 ()

 

금, 2019/02/15-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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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自由韓國黨國會議員三者

 

良民誰虐殺(양민수학살)

三者辱光州(삼자욕광주)

汝等來何國(여등래하국)

嗚呼起萬愁(오호기만수)

 

자유한국당의 국회 의원 세 사람에게 묻는다

 

선량한 백성 누가 마구 죽였나

세 사람이 光州를 욕되게 하네

너희는 그 어느 나라에서 왔나

오호! 온갖 시름 일으키는도다.

 

<時調로 改譯>

 

양민 누가 학살했나 셋이 光州 모욕하네

너희에게 내 묻노니 어느 나라에서 왔나

오호라! 온갖 시름일랑 일으키고 있도다.

 

*良民: 선량한 백성 *虐殺: 가혹하게 마구 죽임 *汝等: 汝輩. 너희 *萬愁: 온갖 시름.

 

<2019.2.15, 이우식 지음>

금, 2019/02/1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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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단 “곧 주식 매각명령 신청할 것”
미쓰비시중공업과 후지코시 본사도 방문
우익단체 “한국인은 빨리 돌아가라”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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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뉴시스】 조윤영 특파원 =강제징용 피해자 변호인단은 15일 오후 일본 도쿄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해 사측에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사진은 변호인단이 본사 방문 직전 취재에 응하는 모습[email protected]

【도쿄=뉴시스】 조윤영 특파원 =우리 대법원이 배상판결을 낸 강제징용 피해자 측 변호인단이 15일 일본 도쿄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해 면담을 요청했지만 이번에도 이뤄지지 않았다.

작년 10월 30일 대법원의 배상판결 이후 변호인단이 도쿄 본사를 방문해 사측에 면담을 요청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 변호인인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 김세은 변호사는 이날 오후 한국 대법원의 배상판결을 수용하라는 내용의 요청서를 들고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마루노우치(丸ノ內)의 신일철주금 본사를 방문했다. 하지만이번에도 지난 방문과 마찬가지로 사측 담당자와의 직접 면담은 이뤄지지 못한 채 안내 직원을 통해 요청서만 전달하고 왔다.

임 변호사는 본사 방문 후 기자들에게 “(이번에도 면담 요청이 거절돼) 신일철주금이 더이상 협의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진 이상 한국으로 돌아가면 압류된 신일철주금 소유의 PNR 주식에 대한 매각 명령을 신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주식에 대한 매각 명령 신청은 통상 3개월 정도 걸려왔다”면서 “매각 명령 신청 후 현금화 될 때까지 걸리는 3개월이 신일철주금이 피해자 측과 협의하고 사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한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0206-4

▲【도쿄=뉴시스】 조윤영 특파원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피해자 변호인단이 15일 오후 일본 도쿄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본사를 방문했다. 작년 10월 30일 대법원 배상판결 이후 세 번째 방문이다. 이날은 일본 우익단체에서도 와서 “한국인은 빨리 돌아가라”며 시위했으며 이로인해 일본 경찰들과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email protected]

요청서는 “피해자 대리인은 2019년 1월 3일 원고 2명의 확정채권을 집행권원으로 해 귀사가 소유한 PNR의 주식 81,074주를 압류했지만 우리들은 귀사와 포괄적인 협의를 여전히 최우선으로 희망하고 있어 통상 자산압류와 동시에 이뤄지는 매각 명령은 신청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3차 면담 요청도 거절할 경우 확정판결 후 100여일동안 협상을 요청하면서 늦춰온 집행절차를 더이상 연기할 수 없다”면서 “서울 고등법원에서 집행판결을 선고받은 다른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채권을 권원으로 한 추가 자산압류 및 매각명령신청도 진행할 예정이다”라고 했다.

변호인단은 요청서에서 ‘각국·지역의 법률을 준수하고 각종 국제규범, 문화, 관습 등을 존중하여 사업을 실시한다’는 내용의 신일철주금의 기업행동규범 제 8조도 언급하면서 한국 대법원 배상판결을 더이상 부정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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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뉴시스】 조윤영 특파원 =15일 오후 신일철주금(옛 신일본제철) 도쿄 본사를 방문한 강제징용 피해자 측 변호인단은 이어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본사도 방문해 한일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일본기업에 한국 법원 판결에 따라 배상하라고 촉구했다. [email protected]

변호인단은 이날 신일철주금에 이어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본사도 방문해 한일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일본기업에 판결에 따라 배상하라고 촉구했다.

현장에는 약 50여 명의 한일 양국 취재진들이 몰렸다. 일본 우익단체도 “한국인은 빨리 돌아가라”며 확성기를 들고 시위를 벌여 일본 경찰과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email protected]

<2019-02-15> 뉴시스 

☞기사원문: 신일철주금, 강제징용 변호인단 면담 세번째 거부…우익단체 시위도

※관련기사
☞한국일보: 일본 강제징용 변호인단 “신일철주금 자산매각 신청” 

☞YTN: 강제징용 변호인 “신일철주금 국내재산 매각명령 신청할 것”

금, 2019/02/1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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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理空論(공리공론)

 

朝鮮何滅沒(조선하멸몰)

空理益空論(공리익공론)

但事儒家道(단사유가도)

終成日本呑(종성일본탄)

 

空理空論에 대하여

 

朝鮮은 어찌 망하여 없어졌는가

空理에다 또 空論을 더하였다네

오로지 儒家의 道만 섬기었으니

마침내 일본이 꿀꺽 집어삼켰네.

 

<時調로 改譯>

 

朝鮮은 왜 망했는가 空理에 空論 더했네

孔子 가르친 그 道만 섬길 따름이었으니

마침내 일본이 꿀꺽 삼켜 버리고 말았네.

 

*空理空論: 실천이 따르지 않는 헛된 이론이나 논의 *滅沒: 망해 없어짐. 멸해

없앰 *儒家: 孔子 학설, 학풍을 신봉하는 학자나 학파 *終成: 마침내 이뤄짐.

 

<2019.2.18, 이우식 지음>

월, 2019/02/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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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개교 이흥렬·김성태 등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음악인이 만든 교가 사용
충남교육청 “일선학교에 공문 보내 파악 중…조만간 발표”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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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A고등학교와 B고등학교의 교가는 각각 친일인명사전(사전)에 수록돼 있는 이흥렬과 김성태가 작곡했다.

[굿모닝충청 이종현 기자] “반만년 역사위에 지나간 자취…” 충남 공주시에 위치한 A고등학교의 교가 중 일부다. 이 학교는 1922년 개교해 국무총리와 내무부장관, 시장, 야구 선수 등 졸업생 2만8403명을 배출했다.

“하늘과 마주선 계룡의 싱싱한 숨결…” 1955년 개교한 같은 지역 B고등학교는 현재까지 졸업생 1만4989명을 배출했다.

두 학교의 공통점은 바로 친일 음악인들이 작곡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A고등학교와 B고등학교의 교가는 각각 친일인명사전(사전)에 수록돼 있는 이흥렬과 김성태가 작곡했다.

A와 B고등학교 학생들은 친일 행적이 드러난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불러왔던 셈이다.

이처럼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지만 교육 현장에서는 일제 잔재가 여전하다.

앞서 지난 14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충남지부(전교조)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연구소)는 보도자료를 통해 “광주 지역 상당수 학교가 현제명, 이홍렬, 김동진, 김성태 등 친일 음악인 4명이 만든 교가를 사용하고 있다”며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이 만든 교가를 충남지역 학교도 상당수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교육청이 친일 잔대를 없애기 위한 노력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굿모닝충청>이 교육청과 전교조, 연구소를 통해 취재한 결과, 도내에서 20여개 학교에서 친일 음악인이 작사‧작곡한 교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일 음악인은 강연이나 방송활동, 국민개창운동 등 분야에서 창작과 단체 활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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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 음악인은 강연이나 방송활동, 국민개창운동 등 분야에서 창작과 단체 활동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를 말한다. (자료사진, 왼쪽부터 김성태, 이흥렬)

김성태는 1941년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와 농업보국을 실천하기 위해 만든 영화 ‘농업보국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담당했다.

이때 그가 지휘한 경성방송혼성합창단은 ‘태평양행진곡’, ‘미영 격멸가’ 등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하는 곡들을 불렀다.

이후 1943년 경성음악연구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군국의 어머니’ 등을 작곡했고, ‘우리들은 제국군인’ 등을 지휘하며 조선청년의 참전을 선동했다.

또 이흥렬은 ‘봄이 오면’, ‘자장가’ 등 노래 400여 곡을 만든 작곡가다.

그는 1940년대 국민개창운동과 경성후생악단, 평양대화악단 등에 참여했다. 또한 반국가적 음악을 구축하고 일본 음악을 수립하는 활동에 앞장선 행적이 드러나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전교조 관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민족정기를 새롭게 세우기 위해 문제를 제기했다”며 “교육청이 친일 음악인들이 만든 교가를 하루 빨리 파악해 조치에 나서야한다”고 말했다.

교육청 관계자는 “일선학교에 공문을 보내 교가의 작사‧작곡가 명단을 받고 있다”며 “조만간 그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말헀다.

<2019-02-18> 굿모닝충청 

☞기사원문: 친일 음악인이 만든 교가 충남에 ‘수두룩’

※관련기사 

☞대전MBC: [리포트]학교에 남은 ‘일제 잔재’

월, 2019/02/1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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