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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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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17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 그래도 아직은 이르다고 방 속에 들어앉았던 친구들이 가만히 세상 되어가는 꼴을 보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도 한몫 보아야 한다. 이렇다면 진작 나올 것을 괜히 주춤거리고 있었다. 늦게 나온 것만 후회가 되고 가슴이 아프다고 여보라는 듯 큰 거리로 정당(政黨)으로 온갖 참예(참여)를 다해가며 소리치고 다니는 것이다.
해방되었다는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우습다면 우리가 애국자라고 큰소리치고 다니어도 어느 하나 다시 볼 사람이 없다고 점점 기가 높아가고 있으니 과연 이 풍진 세상이 또다시 이 땅에 찾아왔다. 일찍이 “이 풍진 세상이 왔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그 당시 사회풍조에 들떠 노래 부르던 시절 젊은 청년은 분에 넘치는 개화 바람에 금이빨을 해박고 삼팔바지 혹은 와이사쓰로 술집에 드나들며 전답은 다 올려버리더니 오늘날 코앞에 닥친 이 풍진 세상은 8·15 전 일본으로 수백만 석을 보내고도 쌀밥을 먹었는데, 해방되었다는 이곳에서 쌀 대신 강냉이와 밀가루로 배를 채우고 싫다고 해도 자양분이 있다고 갖다 안기는 ‘알사탕’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빨이 삭아가고 그런가 하면 조선사람은 쌀만 왜 먹느냐 자양분 있는 채소와 과실을 이제부터 먹으라는 간곡한 훈시에 가슴만 답답하고 징병을 나가라! 징용을 나가라! 학병을 나가라! 창씨와 국어를 상용하라! 황도문화(皇道文化)를 하라고 나팔을 불고 다니던 자들이 오늘날 와선 그 당시에는 사세(事勢) 부득으로 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 한 행동이나 해방 후 자기비판 하였으니 아무 거리낌 없는 애국자로서 일할 수 있다고 온갖 책동을 다해가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토치카’(비위 좋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족의 메마른 등을 처먹기에 정신없는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이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으니 이러한 강장제를 복용하는 ‘토치카’ 즉 정신의 중성환자(中性患者)들이란 새로운 이완용(李完用)의 후예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의 이 풍진 세상은 참으로 서글프고 얼떨떨하여라! 양조금지령(釀造禁止令)에 정체 모를 밀주와 조선판 브랜디와 위스키만 늘어 눈동자의 개가 풀리도록 독한 술에 노상에서 선량한 친구들이 코를 골고 형무소는 터질 지경으로 초만원이요 일찍이 왜놈 뺨 한 번 못 때리던 주제에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테러가 판을 치고 온갖 소득은 모조리 모리배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 숫자를 알지 못하여 세금 한 푼 물지 않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딱한 백성들에게만 세금이 나날이 올라 목을 누르고 고등수학을 가지고도 계산 못할 만큼 하늘을 찌르는 물가고에 세간짐을 붙들고 갈팡질팡하는 오늘날 세상은 과연 이 풍진 세상이로다. 이 먼지와 바람 속에서 단연 용감하게도 새로운 활동으로써 그 진가를 날로 발휘하고 있는 위대한 ‘토치카’ 여러분을 독자에게 제1차로 소개하는 바이다.


1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을 말한다.
2 박흥식이 중추원참의를 지낸 적이 없다. 필자의 착오.

 

P씨1와 2천만 원

황민화를 위하여 비행기 제작을 위하여 총독정치에 사재(私財)를 바쳐가며 찬연한 충성을 다한 중추원참의2,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P씨는 지난 12월 4일 종로세무소에서 일찍이 일본이 패전한 직후 사장으로 있던 비행기회사가 해산케 됨에 당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上月良夫) 중장으로부터 미안하다고 위로금 겸 갱생자금으로 2천만 원을 받은데 대하여 제3종 소득세로 1천만 원을 P씨에게 과세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P씨는 고쓰키 중장한테 받은 2천만 원은 위로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받은 돈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세무당국에 이의를 신립(신청)하였다. 작년 2월 사기횡령 등 여러 가지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정에서 심리를 받을 때 그는 2천만 원은 해산되는 비행기회사 종업원의 노자(勞資) 문제 해결기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 말은 공판기록과 판결문에도 역력히 올라 있으며 그날 방청객은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P씨는 무슨 심정으로 위로금으로 2천만 원을 받았다는 이 엄연한 자기진술의 사실을 모른 체 덮어두고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것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딴소리를 하는가! 아무리 조선이 가난하기로서니 총칼로 조선민족을 위협하여 피를 흘리게 한 군사령관 고쓰키가 주는 나미다낑(淚金. 위로금)을 받을 수는 없다. 이 돈을 받을 권한과 의무가 있는 자는 오로지 군부의 주구노릇을 하던 비행기회사 사장인 P씨 한 사람뿐이다.
조선땅을 쫓기어 나가는 군사령관 고쓰키가 제 놈이 감히 무엇이기에 2천만 원을 던져가며 사회사업에 쓰라고 자선을 아니꼽게 베푸는 것인가! (P씨의 말대로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었다고 가정하면) 그렇다면 학병, 강제동원을 위하여 남전(南電) 사장 오구라(小倉)3라는 자와 함께 막대한 운동비용을 전부 독담하겠다고 총독 고이소(小磯國昭) 앞에 나서던 열정적인 애국자 박흥식이 오늘날 건국기에 있는 조선을 위하여 세금 1천만 원을 낸다는 것은 물론 당치도 않은 일이요, 추호도 생각이 없기에 엉터리없는 소리를 꺼내 세금을 못 물겠다고 정면으로 대담하게 나서는 것이다.
고쓰키에서 받은 ‘위로금’으로 세금 1천만 원에 발악하는 P씨가 무슨 사회사업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한다면 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치욕이며 모독인가! 요즘 독립과 정부수립은 아득한 것 같고 친일파와 반역자들이 여보라는 듯 큰소리치고 다니게끔 세상이 어지럽자 이것을 기화로 옛날과 다름없이 자동차에 몸을 얹고 거리로 요정으로 서슬이 푸르게 돌아다니는 P씨여! 어느 지각없고 순진한 양반이 그대를 가리켜 조선에 필요하고 또 유력한 실업가라고 두둔해주는데 미련도 있겠지만 1천만 원 세금도 성가시다고 하니 절친한 황국(皇國)의 친구들이 그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으로 가서 황국의 사회사업을 위하여 마음껏 돈을 씀이 어떠한가!
2천만 원은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군사령관 고쓰키가 준 것이라고 공판정에서 진술하고 이에 대한 1천만 원 과세가 나오자 위로금이 아니고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돈이니 소득세는 물 수 없다고 항의하는 한편, 모 단체에 50만 원을 기부하였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과연 P씨는 8·15의 서글픈 해방에서 우러난 강장제를 복용하는 위대한 심장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의 광신자들

귀족원의원 □□□4은 대궐 같은 그의 집을 팔고 시골로 내려가 있고, □□□5는 어느 시골로 중학교 교원으로 갔다는 말이 들리더니 사랑을 바치던 (日帝) 정든 님이 자기 홀로 떠나버린데서 받은 번민에서인지 불경을 외고 있다 한다. 그러나 요즘 그는 황국 일본에 대한 자기의 일편단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때때로 왜말로 떠들고 있다 하니 참으로 일본을 위하여 기특한 일이다. 초라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간혹 거리에 나타나는 총독부 기관지 사장 나리 가네가와 씨6 그리고 경향 각지에 뿌리를 박고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악질관리들과 친일파 반역자의 거물과 잔재들이 8·15 직후엔 처분만 바라고 떨더니 이제는 다시 정면에 나서서 모든 모리(謀利) 기관을 독점하고 온갖 보복행위와 책동을 일삼아 민주독립을 좀먹고 있다.


3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를 말한다.
4 漢象龍이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 韓相龍이다.
5 伊狂□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춘원 李光洙를 말한다.

 

<조선인의 나아갈길(朝鮮人の進むべき道)>이라는 책을 만들어 황도정신을 선전하던 현영섭(玄永燮)은 그의 조국인 일본으로 떠나갔고, 황도문화를 위하여 조선말을 없애기에 왜놈보다도 한층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치던 자들 가운데 녹기연맹(綠旗聯盟) 쓰다(津田剛)의 참모장이고 <어동정(御東征)> 이라는시집을내어총독상을받은김용제(金龍濟)는쓰다를따라일본으로간 줄 알았더니 말에 의하면 콩나물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시다催再書7는부산에 있는 남조선대학에 총장으로 들어앉았다 하며 세상이야 어찌 되던 철두철미 돈 모으기에 바쁜 만주국 명예총영사 □□□8는 돈 버는 여가에 추탕집에 그 얼굴을 나타내고, 학병과 노무자 동원에 총독 고이소가 경탄할 만큼 제1선에서 활약하여 위대한 공로를 세운 애국자 □□□9는 8·15 이후 재빨리 새로운 애국자로 등장하여 내가 무슨 이유로 입법의원 입후보로 당선운동에 나서는 등 아직도 그 거구와 더불어 자못 건강하다. 대동아문학이니 국민문학이니 하고 동경, 남경으로 갈팡질팡하던 키다리 K씨10는 명동거리에서 맹활약하여 있고,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정신을 떠들다가 그곳 우리 동포에게 쫓겨나온 우에다 다쓰오(上田龍男)(李英根)11. 조선말이라면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떠들던 황도정신에 환장이 된 정신병자가 대화숙(大和塾) 참모로 있을 무렵 “나는 우리 늙은 부모 앞에서도 조선말을 쓰지 않는다”고 나가사키(長崎祐三) 검사에게 말하다가 기다렸던 칭찬 대신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 앞에서 조선말 대신 일본말로 떠들어 불효하는 것이 일본정신인가!” 꾸지람을 듣고 쫓겨난 우에다 다쓰오! 지금쯤은 이세신궁(伊勢神宮) 앞에서 미소기(禊)를 하는가 하였더니 이 어인 놀라운 출세인고! 그의 고향인 예산에서 통역관으로 서슬이 푸르게 온갖 재미를 다 보고 있다 하니 해방의 혜택은 ‘우에다 다쓰오’에게까지도 이래저래 신세를 고치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총독부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매일신보를 그대로 두면 조선인이 조선말에 애착을 갖게 되고 도리어 엉뚱한 민족정신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오늘 당장 없애버리자”고 모리(森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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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일신보 사장 李聖根으로 그의 창씨명이 가네가와(金川聖)이다.
7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낸 崔載瑞다. 그의 창씨명이 이시다(石田耕造)이다.
8 任顯秀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성방직 사장 金秊洙다.
9 먹칠이 되어 있어 판독할 수 없다.
10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지낸 팔봉 金基鎭으로 추정된다.
11 녹기연맹 간부를 지낸 李泳根이다.

 

도서과장에게 덤벼들던 당시 이전(梨專) 교수 □□□12. 징병 징용 등 시국을 인식시키자면 신문을 계속 시켜야 한다고 또한 떠들던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 □□□13과 부여신궁을 짓는데 땀을 흘려야겠다고 혹은 지원병에 관한 영화와 연극을 한다고 광신자처럼 날뛰던 일부 문인들과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들과 연출가들!
이 모든 광신자들이란 만약 일본이 그대로 나간다면 아주 일본사람으로 동화되어 조선놈 천대하기를 일본놈 이상으로 할 것이고, 유카타(浴衣)에 게다짝을 끌고 능히 다닐 만한 ‘토치카’지. 조금도 자기반성이 있어 중간에라도 태도를 고치는 일은 꿈엔들 상상 못할 일이다. 이렇게까지 세도에 아첨하여 동족을 파는 딱한 불치(不治)의 광신자들이 자기반성이니 자기비판이니 함부로 유행가 부르듯 하여 가장 조선을 사랑하는 체 큰소리를 하는 오늘날 세상이 어찌 이 풍진 세상이 아닐 수 있는가! 8·15 전 이들 광신자와는 다른 각도로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 있은 후에 이루어지는 민주독립! 일제 아래서 영화를 누리던 특권계급과 모리배를 위함이 아니요, 40년간 헐벗고 굶주려 오면서도 민족을 팔지 않은 진정한 조선민족 전체의 해방과 독립을 방해하는, 봉건의 굴레를 쓰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굴리는 자들이 싹트고 있으니, 이 새로운 광신자들을 이러한 바람과 먼지 속에서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2 <祥廈>라는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이자 녹기일본문화연구소 간사를 지낸 裵相河이다.
13 먹칠 때문에 둘 다 판독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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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인사]

삼가 인사드립니다

이이화 선생 마지막 가시는 길에 찾아와 명복을 빌어 주신 모든 분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수선한 시국에 멀리서 마음을 전해 주신 분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는 화창한 봄날 파주집 근처 공원묘지의 양지바른 곳에 편히 잠드셨습니다.

당신의 생전 사진과 때 묻은 수첩의 연락처를 정리하면서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시고, 또 당신께서 사랑하신 분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생전에 당신께서 남기신 족적과 더불어 전국 각지의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교류하신 폭과 깊이의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성심을 다해 그간의 과정을 준비해주신 장의위원회의 윤경로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어르신들

훈장 수여를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힘써주신 분들
장례식장의 데스크를 지키고 밤늦도록 정리해주신 분들
멋지고 감동적인 추모 영상을 만들고 장시간 촬영과 기록을 해주신 분들
멀리 전주에서 오셔서 사흘 밤낮 상가를 지키며 함께 해주신 선생님
당신의 저서와 부고 기사를 가져와 영전에 올리신 분
평토를 마친 묘 위에 막걸리를 부어 주신 분
그밖에도 고인을 위해 울어 주신 모든 분들께 숙연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감사 올립니다. 당신께서 남기신 일들을 받들어 이어가는 한편, 그간의 위로에 보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새로운 봄을 맞아 모쪼록 건강하시고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4.1.
고 이이화 선생 유족을 대표하여
상주 이응일 올림

※ 고 이이화 선생님 아드님인 상주 응일 씨가 유족을 대표해서 감사의 글을 보내왔다. 한편 장례가 끝난 후 유족들이 연구소의 노고에 감사의 말을 전했고, 연구소 후원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수, 2020/04/22-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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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회원마당]

31년 역사교사를 마치며

김해규 후원회원(전 평택한광여중 교사・현 평택인문연구소장)

 

31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올해 2월 퇴직한 김해규 후원회원은 2004년 4월부터 연구소를 후원하기 시작한 이후 평택지역 후원회원 모임 조직, 평택지역 내 일제잔재 조사 자문, 신흥무관학교 국외 답사 등 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 하지만 코로나 19로 제자는 물론 동료선생님들과도 석별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채 교단을 떠나게 되는 아쉬움을 달래며 퇴임의 글을 보내왔다. 퇴임에 즈음하여 김해규 후원회원은 2월 6일 평택지역 인문학과 관련한 다양한 연구활동을 하게 될 평택인문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에 취임했다. 저서로는 <평택역사산책> <근현대 평택을 걷다> <평택사람들의 길> 등이 있다.- 엮은이

 

역사학이 너무 좋아 역사책이라면 무엇이든 읽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역사박사’라는 기분 좋은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역사과목 잘해봤자 선생밖에 더 돼’ 친구들은 비아냥거렸지만 소년은 ‘역사교사’의 꿈을 꿨습니다. 역사교사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고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알았습니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걸 말이죠.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도 겨우 입학한 처지에 인문계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사범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친구들은 고등학교 진학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눈치만 살폈습니다. 큰 맘 먹고 ‘아부지 저 고등학교 가요?’라고 물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더니 ‘한 번 가봐라’라고 짧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허락이 떨어진 뒤에도 눈치만 살폈습니다. 소년은 인문계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원했던 것은 실업계고등학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고집을 피우자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저 윗동네 종삼이 봐라, 인문계 졸업하고 놀잖니. 우리 형편에 기술이라도 배워서 돈을 벌어야지’라며 실업계 진학을 종용했습니다.
소년은 공업고등학교, 그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기계과에 진학했습니다. 소년은 기계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도 몰랐습니다. 징그럽게 싫어하던 공학과목이 널려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몰랐습니다. 소년에게 고등학교 3년은 지옥이었습니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는 큰 병까지 얻어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졸업반 때는 아쉬움을 곱씹으며 대학진학 예비고사
를 치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겨울방학 무렵 다른 친구들처럼 서울의 작은 공장에 취업했습니다. 설날 고향을 다녀간 뒤로는 평택의 선진기업이라는 책걸상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일당으로 2,500원, 한 달 월급이라야 5만 원도 안 되는 박봉이어서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말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큰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한 것에 무척 만족해 하셨습니다. 먹는 입 하나 덜었고 학비걱정도 덜었다는 생각에 기뻤을 것입니다.
1981년 5월 제가 사고를 쳤습니다. 고등학교 때 하숙을 같이 했던 절친이 제 소식을 듣고는 평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친구는 치의대 진학을 목표로 서울에서 재수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되었던 ‘국풍81’에 갔습니다. 무대 앞에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저와 상관없는 풍경에 특별한 감정 없이 무대를 응시하고 있
는데 친구가 그랬습니다.
‘부럽지. 너도 대학생이 되면 저들과 함께 놀 수 있어.’
머릿속에서 경주박물관 마당의 에밀레종이 떵~하고 울렸습니다. 내 상황이 객관적으로 보였습니다. 평택으로 내려와 보따리를 쌌습니다.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동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부모님께 허락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고향집은 난리가 났습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습니다.
‘야 이놈아, 너만 생각하냐. 네 동생들은 어떻게 하라고. 대학은 무슨 대학이여’ 아버지 말씀이 백번 지당했지만 퇴직한 마당에 돌아갈 회사도 없었습니다. 건넌방을 걸어 잠그고 무조건 굶었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았지만 우
는 척도 했습니다. 그렇게 3일을 버티자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해보자. 어떻게 해줄까?’ 재수기간 6개월 동안 한 달에 10만 원씩 지원하고 대학은 스스로 벌어서 다니기로 계약이 성사된 것입니다.
재수 5개월 20일 동안은 정말 혹독했습니다.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독서실 구석에서 잠을 자며 쓰레기보다도 못한 밥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실업계 출신이 6개월도 안 되는 기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고 해도 좋은 성적을 받기란 무리였습니다. 학력고사를 치르고 대학입학 원서를 작성할 때 주저 없이 ‘역사교육과’를 기입했습니다. 다행히 그때까지만 해도 사범대학은 인
기가 없어서 내심 합격을 기대했지만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내 손을 잡고 기도해주시던 교회 전도사님이 신학을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권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어 헌신하라는 간곡한 권유에도 저는 역사공부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의중을 파악한 전도사님은 총신대학에 역사교육과가 신설되었으니 학부는 역사교육을 하고 신학대학원에 진학하면 목회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서울 사당동의 총신대학은 3, 4만 평의 작은 캠퍼스에 두세 개 건물밖에 없는 미니대학이었습니다. 학생들은 거의 모두 독실한 기독교인이어서 경건함이 넘쳤습니다. 저도 모태신앙이고 시골에서는 남다른 신앙으로 칭찬도 많이 받았지만 그곳에 모인 학생들은 차원이 다른 신앙을 갖고 있는 듯했습니다. 교양과목인 구약개요, 신약개요를 가르치
던 교수님과는 이치에도 맞지 않는 신학이론 때문에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아웃사이더로 빙빙 돌다가 학교 내 아웃사이더 선배들과 어울렸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파격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선배들의 영향으로 제 눈은 제법 삐딱해졌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뒤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지워버렸습니다. 목회자는 내가스스로 정한 진로가 아니라 교회 열심히 다니는 내게 주위에서 지워준 멍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87년 6월항쟁 때 거리를 헤매고, 수많은 선배, 후배들이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한다며 공장으로 농촌으로 내려갈 때도 나는 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그러했지만 제가 갈 학교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교직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4학년 2학기 때 제법 규모가 큰 출판사에 취직했습니다.
주변에서는 일찍 취직한 것을 축하했지만 앞으로 계속 출판 일만 할 생각에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졸업식을 마친 어느 날 지도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안성에 고등학교 강사자리가 있는데 가려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재수를 결심할 때처럼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목회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안성이라고 했던 학교는 평택에 있었습니다. 다름 아닌 제가 재직했던 한광중・고등학교입니다. 1989년 3월, 꿈에 그리던 한광고등학교 강단에 섰습니다. 얼마 뒤에는 정규직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시골에서는 ‘교사’라는 직업을 매우 귀하게 생각합니다. 친구들도 이름보다 ‘김선생’이라고 높여 부릅니다.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장 기뻐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동네 분들도 ‘김선생 댁’이라고 불러야겠다며 부러워했습니다.
한광고등학교에서 2, 3년 근무한 뒤 1991년부터 한광여고로 옮겼습니다. 14년을 근무한 뒤에는 한광중학교로 전근했고, 지난해 한광여중에서 1년을 근무하고 퇴직했습니다. 지난 31년 동안의 교직생활은 꿈만 같습니다.
역사교사로 보낸 31년은 실현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제 꿈이 실현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설릣고 교단에서 바라본 맑은 아이들 눈동자가 늘 새로웠습니다. 아내는 저를 보고 ‘당신은 좋겠어, 취미생활하며 월급 받아서’라며 놀렸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때 당신 같은 선생님만 만났다면 내 인생 달라졌을 거야’라는 엄청난 칭찬도 해줬습니다. 대학 때 제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아이들을 자식처럼 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참교육’이라는 단어에 매료되어 좌충우돌도 많이 했고 그만큼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전교조 비합법화 시절 후원
금을 냈던 것이 탄로 나서 오랫동안 감시도 받았습니다.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전교조 조합원으로 가입해서 학교민주화투쟁에 동참했다가 20여 년 동안 각종 차별과 감시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라 생각합니다. 퇴직할 때도 조금은 당당하게 교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1991년 한광여고로 전근하서부터 ‘고적답사반’이라는 역사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의문화유산 답사기’ 열풍에 힘입어 전국 곳곳을 휘저으며 지역답사도 하고 역사기행도 했습니다.
역사교사가 되면 ‘지역연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평택’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사료는 무엇이든 구해서 읽고, 아이들과 시골마을에 들어가서 구술조사도 했습니다. 참교육 열풍으로 ‘학급운영’ 관련, ‘수업관련’, ‘상담관련’ 책이 나올 때마다 구해서 읽었습니다. 대학 때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채우려 대학원에도 진학했고, 지역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겠다는 욕심에 박사과정에서도 공부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책도 여러 권 냈습니다. 각종 강연과 글쓰기로
배우고 익힌 것들을 나눴습니다. 새로운 것에 목말랐던 시기, ‘참’이라는 가치에 경도되었던 참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문득문득 얼굴 화끈해지는 일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미숙해서 잘못한 것, 알면서도 비겁했던 것, 미처 해결하지 못한 것들. 미숙함을 무기로 무모하게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도 떠오릅니다. 그런 것들을 접어두고 이제 퇴직합니다. 교직 30년 계획에 교감, 교장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습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사실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만도 아니고 아이들의 잘못은 더더욱 아닙니다.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근대교육이 이제 시효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학교에서 가르쳤던 전통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계, 미래 세계의 가치를 구현할수 없습니다. 변화된 세상에 대응하려면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에 대한 인식도 바뀌어야 하지만, 교사도 변화발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변화’와 ‘자기혁신’이라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남다르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할 산입니다.
산적한 과제들을 동료교사, 후배교사들에게 맡기고 저는 떠납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잘해주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역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 텃밭을 일구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여러분과 인생의 어느 길에서 만났을 때 잠시라도 쉬어갈수 있는 넉넉한 가슴 준비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2020년 2월 29일)

수, 2020/04/22-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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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1)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1. 유폐된 황제의 사상

영하 20도라고 한다. 감방은 영락없이 냉동고다. 천장만 덩실하게 높은 이 비좁은 감방에 세 사람이 웅크리고 앉았는데, 입김이 유리창에 서려 하늘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는 하얗게 두툼하게 얼어붙었다. 조금 받아놓은 물도 돌덩이처럼 얼어붙었다. 방 한구석에 놓인 변기통도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콧구멍이 따끔따끔하다. 콧속의 털이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것이다. 자연은 그 모든 위세를 총동원해서 만상을 얼어 붙이려고 기를 쓰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기적처럼 얼지 않고 있다.(<소설, 알렉산드리아>, 한길사 판)

 

이병주(왼쪽)가 1963년 12월16일 2년7개월의 수감생활 후 특사를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출소할 때 모습. 이권기 경성대 일문과 명예교수 제공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 : 1921.3.16.~1992.4.3.)의 인문학기행은 영하 20도 이하의 겨울날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에서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종로 3가나 청량리 588처럼 지번으로만 서울의 우울을 상정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0),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화류계 여성 이름 바꾸듯이 변성명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건만 이를 허물어버린 군부독재나,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냥 울화통이 치민다. 지금도 그 일대 독립공원엘 갈때마다 입구 보도에다 이 시설을 훼손한 자들의 동팡을 깔아두고 짓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면하는 울적한 심정이다. 어째서 이런 세계적인 명물을 서울시도 아닌 일개 구청에다 소속시켜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있을까. 그렇다고 행여 관할 서대문구청이 잘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산에 비해서는 너무나 잘 관리 운영하고 있지만, 깜냥도 안 되는 온갖 박물관들에 국민의 혈세가 투자되는 데 비해 너무나 푸대접을 받는다는 민족사에 대한 불공평한 처사가 안타깝다는 뜻이다.
이병주가 이곳에 투옥당했던 1961~1962년(그는 10년형을 언도받고 1962년 부산교도소로 이감, 2년 7개월 만인 1963.12.16. 출감)은 서울교도소 시절이었다.
이런 감옥에서는 “원통형으로 굳어진 사등밥(통상 가다밥 혹은 콩밥으로 호칭)이란 관명(官名)이 붙은 밥”에, “소금 속에 미이라”가 된 새우, “된장의 향기를 살큼” 풍길 뿐 “들여다보면 거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멀건 국물이 한끼 식사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오만하게 버티고 앉아 황제다운 품위를 지키며 젓가락질”을 하는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중년 사나이.
그는 이 감방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카파레 안드로메다에서 악사로 있는 동생에게 “유폐된 황제의 사상을 아는가. 그건 이카로스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하는 사상이다”라고 쓴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가장 야만적인 시설을 갖춘 서울교도소의 감방에 갇힌 나, 이 “고독한 황제는 환각 없인 살아갈 수 없다”, 그는 “유폐된 황제의 사상”으로 무장한 채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는 만해 선사의 불교적 변증법에 도취해서 그 징역살이의 고통을 감내한다.
세상에 억울한 건 그 혼자만이 아니다. 사관 사마천도 그랬지만 천하의 명 제왕학 교재를 썼던 마키아벨리도 그랬다. 피렌체 공화정 시절에 정청 제2사무국장부터 대통령 비서까지 두루 거쳤던 그는, 추방당했던 메디치 가문이 외세(교황과 스페인)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조종, 귀국하여 재집권하자 중뿔난 죄도 없으면서 죄인으로 내몰렸다. 혹독한 날개꺾기 고문을 6회나 당한 뒤 바르젤로 감옥(현 국립미술관)에 투옥, 운좋게 간신히 풀려났으나 벌금에 파직까지 당했다.
도리없이 그는 피렌체 근교 산탄드레아의 농장으로 은둔, 거기서 <군주론>을 비롯한 명저들을 쏟아냈다. 이미 5살 아래 벗 프란체스코 베토리(서신교환 때는 로마주재 피렌체 대사, 나중 프랑스 대사, 피렌체 공화국 대통령)와 2년여에 걸쳐 43통의 왕복서한을 주고받았는데, 그 사연은 실로 사마천이 사형수 임안(任安)에게 보낸 안족서(雁足書)만큼이나 절절하다.
“운명은 나를 견직물업에 밝게 해주지도, 면직물업으로 돈을 벌게 해주지도, 금융업으로 입신할 수 있게 해주지도 않았으므로, 정치를 생각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단 말일세”라고 노골적으로 호구지책을 애원하면서도 마키아벨리는 유형이나 진배없는 농막에서의 삶을 시적으로 그려준다.
“나는 시골집에 있네……여기서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네. 그곳에서 나무를 벌채시키고 있기 때문이지.
” 두어 시간 감독 겸 작업지시를 하고는 산림 속 옹달샘물로 가서야 “비로소 나는 내 자신의 시간”을 갖는다고 했는데, 필시 목을 축이고는 나르시스처럼 그 샘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았으리라.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샘물이라도 그걸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어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 그러다가 “식사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 것 없는 재산이 허용해주는 식사를 들지.
”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식단인가를 암시하는 묘사다. 그래서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허전한 지라 이내 선술집으로 가서 “푸줏간 주인과 밀가루 장수와 두 사람의 벽돌공”과 어울려 “불한당이 되어 보낸다네. 카드와 주사위가 난무하는 동안 무수한 다툼이 벌어지고, 욕설과 폭언이 터져 나오고 생각할 수 있는 별의별 짓궂은 짓이 자행”된다.
이 대목을 읽노라면 그에게 맞춤한 밥벌이 자리라도 마련할 만한 지위에 있었던 베토리가 왜 그런 건 전혀 고려조차 않았는지 궁금해지지만, 이내 그 해답은 자동응답기처럼 튀어나온다.
어느 시대나 출세지향적인 몸보신주의자들은 험지에 빠진 동지나 벗들을 경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 덕택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지난 2016년 가을 이태리 여행 때 험지인데도 하루를 투자하여 나는 산탄드레아의 그 농장을 찾아가봤다. 한촌이라 관광객조차 별로 찾지 않았는데, 5백여 년 전의 그 마을풍경을 상상, 유추해보니 추방자의 처량함을 느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 정황을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기록한다.

 

밤이 되면 집에 돌아가서 서재에 들어가는데, 들어가기 전에 흙 같은 것으로 더러워진 평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네.
예절을 갖춘 복장으로 정제한 다음, 옛 사람들이 있는 옛 궁전에 입궐하지.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친절한 영접을 받고, 그 음식물, 나만을 위한 그것을 위해서 나의 삶을 점지받은 음식물을 먹는다네. 그곳에서 나는 부끄럼없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들어보곤 하지. 그들도 인간다움을 그대로 드러내고 대답해 준다네.
그렇게 보내는 네 시간 동안 나는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않네. 모든 고뇌를 잊고 가난도 두렵지 않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말일세. 그들의 세계에 전신전령(全身全靈)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이겠지.(시오노 나나미,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한길사 334~335쪽. 위의 인용문도 다 이 책에서 발췌)

 

이병주는 감방에서 고독한 유폐된 황제의 꿈으로 작가가 되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일개 정신(廷臣)으로 자족하며 인문학자가 되었다.
둘 다 유폐된 상황에서 궁중을 가상무대로 삼은 것은 고난을 돌파하려는 투지의 역설적인 수사법에 불과하다. 전락한 운명을 사사로운 영욕에 억매여 고통을 감내하기보다는 우매와 범죄로 억룩진 역사에 도전하겠다는 결연함을 응고시킨 의지이기도 하다. 누구의 명령에도 굴하지 않은 채 자신의 사상적인 금자탑을 쌓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그들로 하여금 누추한 거처를 왕궁으로 날조할 수 있도록 역사의 여신 클리오의 인허를 받은 격이다.
이 두 수인의 꿈은 그 형식이 소설이든 인문학이든 자신들처럼 핍박당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입각하는 게 자연변증적인 전개일 터인데, 이병주도 마키아벨리도 그렇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병주

마키아벨리 시대의 이태리는 르네상스적 휴머니즘의 이상으로 공공적인 선과 자유로운 공민의 공동체를 추구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추방당한 그에게 이런 사조는 공허했을 터였고, 공동체(도시국가)의 위기와 해체가 빈번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점점 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표변해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엿다.
그래서 <군주론>은 “군주는 자기 백성을 결속시키고 이들이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잔인하다는 악평 따위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든가, “신의도 저버릴 줄 알아야 하며, 자비심을 버리고 인간미를 잃고 반종교적인 행동도 때때로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해 두어야 하겠다”는 등등으로 마키아벨리즘은 석화되었다.

그래서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사람이란 정겹게 품어주거나 그렇지 않으면 짓밟아 깔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치명적인 피해에는 그럴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가 타인에게 손상을 입히려면 복수의 두려움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George Bull trans, The Prince, Penguin Classics, 1966, pp 37~38)

 

물론 이 대목은 극한 상황이나 점령지를 통치하는 경우에 빗대어 거론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독재체제를 두둔하는 한편 그는 외침을 당했을 때의 방어능력에서는 군주국보다는 민주체제가 더 우수하다는 모순된 논리를 편다. 로마에 잔혹하게 점령당한 군주국 카르타고는 식민지화되었으나, 스파르타에 패배한 아테네는 시민들이 경험한 공화정의 자유주의 정신 때문에 결국 참주정치가 좌절되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이 모순된 마키아벨리즘은 이병주의 초기 문학에 강력하게 반영된다.
이병주 문학의 핵심은 정치 이데올로기와 국가권력에 대한 집중적인 분석에 있다. 여기서 그는 인본주의자로서의 휴머니즘에 입각하면서 교양주의적인 양비론자의 태도를 취한다. 민족사의 비극을 소재로 삼든, 독재권력을 주제로 올리든 작가는 시종 냉소적인 양비론자의 시각으로 초월적 입장을 유지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좌익은 순진하고 우익은 이악스럽다는 식이다.
반쪽 정부를 세운 이승만은 적당주의자, 김일성은 사람을 많이 죽인 민족반역자, 박헌영은 미군정을 연구하지 못한 무식자, 여운형은 이름 팔기를 좋아한 매명주의자, 조봉암은 대인이지만 변절자, 제주 4·3사태 등으로 동포를 많이 살해한 장택상이나 이범석은 아주 나쁜 사람, 이런 식으로 그의 인문학적인 가치관은 판관 포청천처럼 날선 도끼가 역사의 도마 위에서 번득인다. 이런 가운데서도 중반기까지 실록 대하소설로 분류되는 한국현대사를 다룬 일련의 작품들(<지리산> <산하> 등)은 시종 마키아벨리즘적인 가치관으로 역사를 재단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승만에 대하여 가장 호의적이며 이념적인 밀착도를 지닌 작가는 이병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단죄하면서 이렇게 역사의 법정으로 몰아세운다.
“들먹여볼까요? 보도연맹학살사건, 거창 양민학살사건, 방위군사건, 중석불사건, 부산에서의 개헌파동, 그리고 (중략) 통일할 능력도 없거니와 민주주의를 제대로 할 성의도 없고 국민을 사랑할 줄도 위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낙인” 찍힌 것으로 한 등장인물은 말한다.(<산하>) 박헌영으로부터 “수백 년 묵은 여우”(이병주, <남로당>)라는 별명이 붙은 이승만은 왕이 될
태몽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하도 들어서 대통령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것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미군정 안에서도 “파시즘보다도 한 2세기 쯤 먼저 태어났어야 할 인물”이란 평가와 함께 왕조를 지향하는 성향 때문에 “부르봉”이란 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활한 이승만/융통성 없는 김구/포용력 없는 박헌영”이라는 형용구처럼 8·15 직후 정치인 중 이승만만이 마키아벨리즘의 정치술수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고 이병주는 평가한다.
“2차대전 이후 소련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조만간 공산국가로 될 것이고, 미국 블록으로 들어간 나라는 자본제 국가가 되고 말 것”이라는 현실정치론(<지리산>)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지만 8·15 당시에는 좌우익 최고 이론가들도 꼭 집어서 이처럼 단정 짓지 못했던 게 대미 인식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대목은 이병주가 한국전쟁 이후에 역사를 재점검하면서 낸 결과물이지만 8·15 직후에는 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본다.
“아, 동편 바다 왼-끝의 대륙에서 오는 벗이여!”라며, “이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연합군이야!/ 정의는, 아 정의는 아직도 우리들의 동지로구나”라고 감격하던 「연합군 입성 환영의 노래」(1945.8.20.)를 외쳤던 오장환 시인은 불과 넉 달 뒤인 12월에는 「가거라 벗이여- 흑인 병사 엘 에스 뿌라운에게」에서 “그대 내어친 발길/ 이 길을 똑바른 싸흠의 길로 듸듸라”라며 내친다. GHQ(도쿄 연합군최고사령부의 통칭인 General Headquarters의 약자)는 일본 점령 통치에서 폈던 정치적인 관용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점령 초기부터 반소 친미정권의 수립이란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분명히 강압하며 민족독립사상을 탈색시키고 친일친미세력에게 유리하도록 정치기반을 조성했지만 그 마수의 정체를 몰랐거나 알고도 일말의 기대와 화해를 위해 유연했음을 숨길 수 없다.
가장 비판적이어야 할 조선공산당은 ‘8월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했기에 당 기관지 <해방일보>에서 미군정 비판기사가 처음 등장한 게 1946년 4월 2일이었다. 미군과 일본군 헌병의 차이는 키가 더 크다는 것뿐이라는 농담과 미군정이 일제 때보다 못하다는 여론이 팽배할 때였는데도 말이다.
조선정판사사건(1946.5) 이후에야 공산당은 신전술(7월)로 전환했지만 여전히 미군정과 미소공동위원회(한반도 분할을 위한 국제정치쇼!)에 기대를 걸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했다. 당대의 최고 이론가의 하나였던 이강국은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조선인민보사 후생부. 1946년판을 범우사에서 2013. 재출간)에서 “군정은 모름지기 우리의 완전독립을 후원할 것”이고, 하지 준장은 “실로 조선민족의 은인이며 민주주의의 사도”라고 했다. 백남운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조선민족의 진로>는 신건사, 1946,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은 민족문화연구소, 1947 출간된 것인데, 범우사에서 합쳐서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으로 2007 재출간)에서 미국의 경제원조를 ‘남조선 단독 조치설’과 결부시켜 경계하는 수준이었다. 박헌영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선회한 건 자신에 대한 체포령(1946.9.7.) 이후였고, 그는 여기에 정치적인 대안보다는 감정적인 조처로 많은 희생을 초래했다.
외신 기자들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러 왔다거나 러시아의 한반도 우위권을 막는게 미국의 목적이라는 설까지 흉흉한 가운데, 미 육군성의 해외기지 설치 예산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보도(1946.6)했는데도 여운형조차도 “풍설일 게고 불가능하도다”라고 논평할 정도로 태연한 척했다.
그러니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없었을 터였다. 오늘이라고 뭐가 다를까?
미국(과 소련)을 정확하게 비판하며 민족적인 비극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한 논객은 오기영을 비롯한 민족적 양심세력과 젊은 소수 문학인들이었다.
하기야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인정식의 번역으로 출간된 것이 1946년 3월이었는데, 이 명저는 레닌이 1916년 봄 취리히에서 집필한 것으로 원제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평이한 개설’이다. 미국이 스페인의 식민지인 쿠바와 태평양 일대 및 필리핀을 탈취하려는 노골적인 야욕으로 미서전쟁(1898)과, 영국이 남아프리카 점령을 위해 야기한 남아전쟁(1899~1902)이 제국주의에 대한 연구의 절실성을 제고한데다가, 제1차대전 전후의 제2인터네셔널 내부에서 자국의 이익을 위한 전쟁 지지냐, 국제평화냐는 치열한 논쟁 등이 집필 배경이었다. 조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독일이 남의 나라 침략전쟁을 지지해도 좋다는 주장과, 어떤 침략전쟁도 반대라는 논쟁을 종식시키고자 레닌은 제국주의의 정체를 밝혀내려고 부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국내의 검열 때문에 주로 독점자본에 의한 경제적 침략에 치중하여 독점은 식민지에서 형성된다는 입장에서 썼기에 이후 지구에서 횡행하고 있는 기상천외의 제국주의의 잔혹성과 교묘한 직간접적인 침략 양상은 피했다.
21세기의 레닌이 등장한다면 오늘의 신출귀몰하는 미 제국주의의 진상을 까발려 줄 수 있으려나? 진보적인 정치학자들이 적지도 않건만 아직까지 미국의 정체를 알기 쉽게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줄 만한 책 한 권 없다는 게 부끄럽다.
지금도 이런 판이니 당시야 어땠겠는가. 이런 갑갑한 정세였던 지라 작가 이병주는 아예 터놓고 “미국은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끈덕진 나라다. 미국은 지길 싫어하는 나라다. 미국은 언제든 전쟁을 필요로 하는 나라다”(<지리산>)라는 논리의 연장선에서 남한에서의 민족운동 전체를 비관적으로 썼다. 이 작가는 그런 미국에다 줄을 댄 이승만의 선견성을 적극 지지하는데, 그의 집권 이유로는 무엇보다 마키아벨리즘적인 원숙성에서 찾고 있다.
“정세를 이용하는 영리함”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용기”(<남로당>)를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는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의 참모습을 드러낸 표현이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이병주는 8·15 직후의 많은 암살사건조차도 “이승만 씨가 직접 조종한 것은 아닌” 다만 “과잉충성하는 놈들이 이승만의 의중을 대강 짐작하고 저지른 노릇”으로 관대하게 풀이(<산하>)해주며 그의 피 묻은 추악한 손을 씻어주고자 진력한다. 바로 이병주 소설의 한계다.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이 집권 중 단연 돋보이게 빛을 낸 장면으로 이병주는 농지개혁을 들었는데, <산하>는 이를 극명하게 묘사해준다. 농지개혁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조병옥 등과는 달리 이승만은 “농지개혁은 이떤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겠다는 결심”을 했는데, 이유인즉 “공산당에게 농민을 선동하는 미끼를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한민당의 세력 기반(지주층)을 없애버리는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대업을 위해 초대 농림부장관에 조봉암을 앉혔는데, 그야말로 이 과업에는 적격이었을 터라 “조봉암이 빨갱이의 본색을 드러낼 요량”으로 임무를 멋지게 수행했다. 그것까지도 염두에 둔 이 늙은 여우는 농지개혁으로 인기를 얻을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치워버려야겠다는 결심도 동시”에 하는 것으로 이병주는 그려준다.
비판하며 지지한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이 무렵 이병주 자신의 역사의식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서당, 1991)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세 전직 대통령을 다루면서, 「이승만 편-카리스마와 마키아벨리즘의 화신」에서는 역사적인 거의 모든 과오를 되도록 비호, 변명해주는 입장이고, 「박정희 편-탓할 것이 있다면 그건 운명이다」에서는 안면몰수하고 사사건건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자세며, 「전두환 편-왜 그를 시궁창에서 끌어내야 하나」에서는 이병주의 모든 글 중에서 최하급의 졸문으로 전두환을 추켜대는데, 너무나 사리도 논리도 안 맞는 억지춘향이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리어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1979년 10·26 이후의 과도기 때 이병주는 손세일의 주선으로 가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났고,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났다. 그러나 이 둘에게는 인색했던 찬양을 전두환에게 풍성하게 나열하게 된 계기를 잡아준 건 이동화 송지영 윤길중 고정훈 신상초 선우휘 남계희 등 민주사회주의자들이었다고 이병주는 밝힌다. 그러나 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이병주의 명성은 전두환 예찬으로 곤두박질 쳤다. 왜 이 작가가 이랬을까? 이병주의 아들 이권기 교수는 박정희를 비판하기 위해서 전두환을 빗댄 것이라고 했지만 그 점만으로는 뭔가 모자란다.
더구나 <전두환 회고록>(전3권, 자작나무숲, 2017)에는 이병주에 대한 언급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그 흑막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미궁이지만 설상가상이다. 그럼에도 저자가 이병주를 높이 평가하고 널리 읽히기를 바라는 까닭은 박정희 신화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한 정보와 재미있는 기록들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는 대조적으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김구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가장 인색할 지경인데, 이건 필시 학병으로 중국 체험자로서의 감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학병으로 중국 대륙 체험을 한 이병주로서는 상하이 임정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들었을 터지만, 이승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김구와 비교하면 불리하기 때문에 박헌영과 대비시키기를 즐겼다.
박헌영에 대한 이병주의 입장은 너무나 단호하고 신랄하다. 영웅이기엔 “미학이 방해를 하는 것이다”라는 부정적인 수준을 넘어 냉대의 시각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그의 항일경력에 대해서는 이승만 노선의 지지자인 이병주조차도 “공산당이 일제와 싸운 그 공적은 박당수, 아니 박헌영 선생이 몸소 증명하고 있지 않소”라는 이승만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냉대는 여전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여 이승만의 정치적인 노회함과 박헌영의 얕은 술수를 대비시키면서 모스크바 삼상회담 문제를 둘러싸고 만났던 두 사람을 “늙은 교사 앞에 앉은 젊은 학생”으로 비유한다.(<남로당>) 그러면서 “한국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가장 겁내고” 있던 이승만이 박헌영과 당분간 밀월관계를 가질까도 고려했다가 실망, “불쌍한 인간! 감옥에서 자기 똥을 먹기까지 하며 양광(佯狂:거짓으로 미친 체함)을 부렸다더니 기껏 지능이 그 꼴밖에 되지 못하는군”이라는 쪽으로 판단이 내려졌다고 묘사한다. 이병주가 박헌영을 유일하게 옹호한 대목은 그가 미제의 간첩은 아니라고 한 반북적인 주장뿐이었다.
이병주가 그나마도 호의적으로 그린 인물은 암살당한 이후의 여운형이다. 그는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남북을 털어놓고 투표로써 하나의 지도자를 선출하게 될 기회가 있기만 하면 여운형이 결정적인 다수표로써 선출될 것이란 믿음 같은 것”이 있었다고 쓰고 있다.(<남로당>)(다음호에 계속)

수, 2020/04/22-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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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 0시 5분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
종했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고인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고인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동일방직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반대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충남 공주군 유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별세한 조문기 이사장을 이어 2008년 7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이후 친일수구세력의 준동과 공격을 막아내는 등 역사정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역정(歷程)을 담았다.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인천 서구 당하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5/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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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연구소,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 종료

연구소는 경기도의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 사업을 2019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진행하여 올 4월 17일에 종료하였다. 객원연구자로 참가한 조재곤 교수, 김도훈 교수와 소내 조세열 상임이사와 이순우 책임연구원 등 9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였다.
작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경기도에서 현재까지 향유되고 있는 무·유형의 문화 속 친일잔재를 체계적으로 수집, 기록, 관리하여 지속적인 연구 교육의 콘텐츠로 개발하려는 의도하에 과업을 수행하였다. 그간 조사연구용역 사업은 착수보고 후 중간보고회, 자문회의 등을 거쳐 2020년 4월 최종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문헌조사와 현장조사를 병행하며 일제잔재를 조사, 수집하였으며 기존의 잔재를 찾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원, 안성의 일제식 지명 존속이나 각급 학교 교표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는 등 새로운 성과도 일궈냈다.
1905년 러·일전쟁기부터 1945년 해방 전후기를 시간적 범위로 설정하고, 공간적 범위는 일제강점기 당시의 경기도 한정하여 유·무형의 친일문화잔재를 조사 연구하였다.
연구 보고서는 친일문화잔재 이상의 카테고리로 “일제잔재”의 개념 정리, 친일 인물과 문화계에 남겨진 그들의 행적으로 시작된다. 다음으로는 기념비, 송덕비, 기념탑, 동상 등의 기념물 및 건축물을 다루고 있다. 그 뒤로 친일인물이 작사·작곡한 교가와 교표에 남겨진 일제 잔재 등을 알리고 있다. 또한 일본식으로 변경된 지명과 특히 “영동(榮洞: 일제지명 榮町)”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도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는 수원과 안성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해외의 친일청산 사례를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일제잔재의 청산 전망과 과제를 언급한다.
경기도 친일문화잔재 조사 연구용역은 일상생활에까지 깊숙하게 뿌리박혀 있는 일제잔재를 찾아내어 청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제시하였고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의 기초를 다졌으며, 더 나아가 시민의 역사의식을 제고할 수있는 의미있는 작업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 임무성 상임교육위원

화, 2020/05/26-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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