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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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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風塵世上) – 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17

[자료소개]

박광종 선임연구원

이번 호에 소개하는 글은 <신천지>권2호(1947년2월) ‘거리의정보실’ 코너에 실린 고원섭(高元燮)의「이풍진세상(風塵世上)-강장제를 상복(常服)하는 인간들-」(발췌)이다. 이 글은 해방된 지 2년 후인 1947년초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발호하고 모리배들이 서민들을 등치는 현실세태를 풍자한 글이다. 현행 한글맞춤법에 따라 일부 철자를 수정했고, 검게 칠해진 인명은 각주를 달아 이름을 밝혔다.
필자인 고원섭은 일제 말기 친일잡지 <조광> 에국제정세를 비롯한 정치·사회분야의 글을 실어 일제의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을 강조하여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해방 후 <신천지>, <개벽>등의 잡지에 글을발표했으며,1949년에는 <반민자죄상기(反民者罪狀記)>를 저술했다.

 

요즘 해방이란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생각할수록 머리만 어지럽다. 그래 “동해물과 백두산”을 부르고 태극기를 간혹 내걸고 하니 이것이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가 서글프기만 하다. 데시근(시들하거나 미적지근한) 해방 바람에 세상은 서글프고 달밤 술 취한 행인이 오줌을 누다가도 덧없이 울음이 터지게끔 이렇게까지 모든 것이 딱한 일이요 기막힌 일이요 서글픈 일뿐이다.
“일제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적마다 가슴이 멘다고 탄식하는 우국지사, 그래도 세상을 올바로 내다보는 우국지사가, 묻노니 이 땅에 얼마나 있는가! 일제시대의 연장인 듯 모든 친일파들이 활갯짓을 하며 호령하고 이 반면에 해방 후 오늘날도 여전히 애국투사는 거리에서 지하에서 기한(飢寒)에 떨며 방황하고 설익는 해방으로 뼈가 저리도록 고마운 덕을 보는 자들이 있으니 은행 창고를 제 집 창고 쓰듯 하며 외국인을 끼고 법망을 코웃음 치는 모리배들이요, 하나는 천하가 다 아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의 자유해방이다! 8·15 직후에는 그래도 아직은 이르다고 방 속에 들어앉았던 친구들이 가만히 세상 되어가는 꼴을 보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라 우리도 한몫 보아야 한다. 이렇다면 진작 나올 것을 괜히 주춤거리고 있었다. 늦게 나온 것만 후회가 되고 가슴이 아프다고 여보라는 듯 큰 거리로 정당(政黨)으로 온갖 참예(참여)를 다해가며 소리치고 다니는 것이다.
해방되었다는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 보잘 것 없고 우습다면 우리가 애국자라고 큰소리치고 다니어도 어느 하나 다시 볼 사람이 없다고 점점 기가 높아가고 있으니 과연 이 풍진 세상이 또다시 이 땅에 찾아왔다. 일찍이 “이 풍진 세상이 왔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인가” 그 당시 사회풍조에 들떠 노래 부르던 시절 젊은 청년은 분에 넘치는 개화 바람에 금이빨을 해박고 삼팔바지 혹은 와이사쓰로 술집에 드나들며 전답은 다 올려버리더니 오늘날 코앞에 닥친 이 풍진 세상은 8·15 전 일본으로 수백만 석을 보내고도 쌀밥을 먹었는데, 해방되었다는 이곳에서 쌀 대신 강냉이와 밀가루로 배를 채우고 싫다고 해도 자양분이 있다고 갖다 안기는 ‘알사탕’ 바람에 너나 할 것 없이 이빨이 삭아가고 그런가 하면 조선사람은 쌀만 왜 먹느냐 자양분 있는 채소와 과실을 이제부터 먹으라는 간곡한 훈시에 가슴만 답답하고 징병을 나가라! 징용을 나가라! 학병을 나가라! 창씨와 국어를 상용하라! 황도문화(皇道文化)를 하라고 나팔을 불고 다니던 자들이 오늘날 와선 그 당시에는 사세(事勢) 부득으로 뜻은 그렇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 한 행동이나 해방 후 자기비판 하였으니 아무 거리낌 없는 애국자로서 일할 수 있다고 온갖 책동을 다해가며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토치카’(비위 좋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동족의 메마른 등을 처먹기에 정신없는 모리배와 탐관오리들이 하루하루 늘어가고 있으니 이러한 강장제를 복용하는 ‘토치카’ 즉 정신의 중성환자(中性患者)들이란 새로운 이완용(李完用)의 후예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오늘의 이 풍진 세상은 참으로 서글프고 얼떨떨하여라! 양조금지령(釀造禁止令)에 정체 모를 밀주와 조선판 브랜디와 위스키만 늘어 눈동자의 개가 풀리도록 독한 술에 노상에서 선량한 친구들이 코를 골고 형무소는 터질 지경으로 초만원이요 일찍이 왜놈 뺨 한 번 못 때리던 주제에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 테러가 판을 치고 온갖 소득은 모조리 모리배 수중에 들어갔으나 그 숫자를 알지 못하여 세금 한 푼 물지 않고 빤히 들여다보이는 딱한 백성들에게만 세금이 나날이 올라 목을 누르고 고등수학을 가지고도 계산 못할 만큼 하늘을 찌르는 물가고에 세간짐을 붙들고 갈팡질팡하는 오늘날 세상은 과연 이 풍진 세상이로다. 이 먼지와 바람 속에서 단연 용감하게도 새로운 활동으로써 그 진가를 날로 발휘하고 있는 위대한 ‘토치카’ 여러분을 독자에게 제1차로 소개하는 바이다.


1 화신백화점 사장 朴興植을 말한다.
2 박흥식이 중추원참의를 지낸 적이 없다. 필자의 착오.

 

P씨1와 2천만 원

황민화를 위하여 비행기 제작을 위하여 총독정치에 사재(私財)를 바쳐가며 찬연한 충성을 다한 중추원참의2,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P씨는 지난 12월 4일 종로세무소에서 일찍이 일본이 패전한 직후 사장으로 있던 비행기회사가 해산케 됨에 당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上月良夫) 중장으로부터 미안하다고 위로금 겸 갱생자금으로 2천만 원을 받은데 대하여 제3종 소득세로 1천만 원을 P씨에게 과세한 것인데 이에 대하여 P씨는 고쓰키 중장한테 받은 2천만 원은 위로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받은 돈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세무당국에 이의를 신립(신청)하였다. 작년 2월 사기횡령 등 여러 가지 죄명으로 기소되어 공판정에서 심리를 받을 때 그는 2천만 원은 해산되는 비행기회사 종업원의 노자(勞資) 문제 해결기금으로 받은 게 아니라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조선군사령관 고쓰키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 말은 공판기록과 판결문에도 역력히 올라 있으며 그날 방청객은 다 기억하고 있으리라! P씨는 무슨 심정으로 위로금으로 2천만 원을 받았다는 이 엄연한 자기진술의 사실을 모른 체 덮어두고 사회문화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것이니 소득세를 낼 수 없다고 딴소리를 하는가! 아무리 조선이 가난하기로서니 총칼로 조선민족을 위협하여 피를 흘리게 한 군사령관 고쓰키가 주는 나미다낑(淚金. 위로금)을 받을 수는 없다. 이 돈을 받을 권한과 의무가 있는 자는 오로지 군부의 주구노릇을 하던 비행기회사 사장인 P씨 한 사람뿐이다.
조선땅을 쫓기어 나가는 군사령관 고쓰키가 제 놈이 감히 무엇이기에 2천만 원을 던져가며 사회사업에 쓰라고 자선을 아니꼽게 베푸는 것인가! (P씨의 말대로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었다고 가정하면) 그렇다면 학병, 강제동원을 위하여 남전(南電) 사장 오구라(小倉)3라는 자와 함께 막대한 운동비용을 전부 독담하겠다고 총독 고이소(小磯國昭) 앞에 나서던 열정적인 애국자 박흥식이 오늘날 건국기에 있는 조선을 위하여 세금 1천만 원을 낸다는 것은 물론 당치도 않은 일이요, 추호도 생각이 없기에 엉터리없는 소리를 꺼내 세금을 못 물겠다고 정면으로 대담하게 나서는 것이다.
고쓰키에서 받은 ‘위로금’으로 세금 1천만 원에 발악하는 P씨가 무슨 사회사업인지 알 수 없으나 만약 한다면 이 얼마나 우리 민족의 치욕이며 모독인가! 요즘 독립과 정부수립은 아득한 것 같고 친일파와 반역자들이 여보라는 듯 큰소리치고 다니게끔 세상이 어지럽자 이것을 기화로 옛날과 다름없이 자동차에 몸을 얹고 거리로 요정으로 서슬이 푸르게 돌아다니는 P씨여! 어느 지각없고 순진한 양반이 그대를 가리켜 조선에 필요하고 또 유력한 실업가라고 두둔해주는데 미련도 있겠지만 1천만 원 세금도 성가시다고 하니 절친한 황국(皇國)의 친구들이 그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으로 가서 황국의 사회사업을 위하여 마음껏 돈을 씀이 어떠한가!
2천만 원은 위로금과 갱생자금으로 군사령관 고쓰키가 준 것이라고 공판정에서 진술하고 이에 대한 1천만 원 과세가 나오자 위로금이 아니고 사회사업에 쓰라고 주어서 받은 돈이니 소득세는 물 수 없다고 항의하는 한편, 모 단체에 50만 원을 기부하였다는 것이 신문에 보도되는 등 과연 P씨는 8·15의 서글픈 해방에서 우러난 강장제를 복용하는 위대한 심장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의 광신자들

귀족원의원 □□□4은 대궐 같은 그의 집을 팔고 시골로 내려가 있고, □□□5는 어느 시골로 중학교 교원으로 갔다는 말이 들리더니 사랑을 바치던 (日帝) 정든 님이 자기 홀로 떠나버린데서 받은 번민에서인지 불경을 외고 있다 한다. 그러나 요즘 그는 황국 일본에 대한 자기의 일편단심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때때로 왜말로 떠들고 있다 하니 참으로 일본을 위하여 기특한 일이다. 초라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간혹 거리에 나타나는 총독부 기관지 사장 나리 가네가와 씨6 그리고 경향 각지에 뿌리를 박고 일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악질관리들과 친일파 반역자의 거물과 잔재들이 8·15 직후엔 처분만 바라고 떨더니 이제는 다시 정면에 나서서 모든 모리(謀利) 기관을 독점하고 온갖 보복행위와 책동을 일삼아 민주독립을 좀먹고 있다.


3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이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를 말한다.
4 漢象龍이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제계의 대표적인 친일파 韓相龍이다.
5 伊狂□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춘원 李光洙를 말한다.

 

<조선인의 나아갈길(朝鮮人の進むべき道)>이라는 책을 만들어 황도정신을 선전하던 현영섭(玄永燮)은 그의 조국인 일본으로 떠나갔고, 황도문화를 위하여 조선말을 없애기에 왜놈보다도 한층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치던 자들 가운데 녹기연맹(綠旗聯盟) 쓰다(津田剛)의 참모장이고 <어동정(御東征)> 이라는시집을내어총독상을받은김용제(金龍濟)는쓰다를따라일본으로간 줄 알았더니 말에 의하면 콩나물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이시다催再書7는부산에 있는 남조선대학에 총장으로 들어앉았다 하며 세상이야 어찌 되던 철두철미 돈 모으기에 바쁜 만주국 명예총영사 □□□8는 돈 버는 여가에 추탕집에 그 얼굴을 나타내고, 학병과 노무자 동원에 총독 고이소가 경탄할 만큼 제1선에서 활약하여 위대한 공로를 세운 애국자 □□□9는 8·15 이후 재빨리 새로운 애국자로 등장하여 내가 무슨 이유로 입법의원 입후보로 당선운동에 나서는 등 아직도 그 거구와 더불어 자못 건강하다. 대동아문학이니 국민문학이니 하고 동경, 남경으로 갈팡질팡하던 키다리 K씨10는 명동거리에서 맹활약하여 있고, 일찍이 미국에 건너가서 일본정신을 떠들다가 그곳 우리 동포에게 쫓겨나온 우에다 다쓰오(上田龍男)(李英根)11. 조선말이라면 말만 들어도 이가 갈린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떠들던 황도정신에 환장이 된 정신병자가 대화숙(大和塾) 참모로 있을 무렵 “나는 우리 늙은 부모 앞에서도 조선말을 쓰지 않는다”고 나가사키(長崎祐三) 검사에게 말하다가 기다렸던 칭찬 대신 “일본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부모 앞에서 조선말 대신 일본말로 떠들어 불효하는 것이 일본정신인가!” 꾸지람을 듣고 쫓겨난 우에다 다쓰오! 지금쯤은 이세신궁(伊勢神宮) 앞에서 미소기(禊)를 하는가 하였더니 이 어인 놀라운 출세인고! 그의 고향인 예산에서 통역관으로 서슬이 푸르게 온갖 재미를 다 보고 있다 하니 해방의 혜택은 ‘우에다 다쓰오’에게까지도 이래저래 신세를 고치게 하는 것인가!
“아무리 총독부 기관지라고 하더라도 매일신보를 그대로 두면 조선인이 조선말에 애착을 갖게 되고 도리어 엉뚱한 민족정신을 일으킬 우려가 있으니 오늘 당장 없애버리자”고 모리(森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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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매일신보 사장 李聖根으로 그의 창씨명이 가네가와(金川聖)이다.
7 조선문인보국회 간부를 지낸 崔載瑞다. 그의 창씨명이 이시다(石田耕造)이다.
8 任顯秀란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경성방직 사장 金秊洙다.
9 먹칠이 되어 있어 판독할 수 없다.
10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지낸 팔봉 金基鎭으로 추정된다.
11 녹기연맹 간부를 지낸 李泳根이다.

 

도서과장에게 덤벼들던 당시 이전(梨專) 교수 □□□12. 징병 징용 등 시국을 인식시키자면 신문을 계속 시켜야 한다고 또한 떠들던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 □□□13과 부여신궁을 짓는데 땀을 흘려야겠다고 혹은 지원병에 관한 영화와 연극을 한다고 광신자처럼 날뛰던 일부 문인들과 영화배우와 연극배우들과 연출가들!
이 모든 광신자들이란 만약 일본이 그대로 나간다면 아주 일본사람으로 동화되어 조선놈 천대하기를 일본놈 이상으로 할 것이고, 유카타(浴衣)에 게다짝을 끌고 능히 다닐 만한 ‘토치카’지. 조금도 자기반성이 있어 중간에라도 태도를 고치는 일은 꿈엔들 상상 못할 일이다. 이렇게까지 세도에 아첨하여 동족을 파는 딱한 불치(不治)의 광신자들이 자기반성이니 자기비판이니 함부로 유행가 부르듯 하여 가장 조선을 사랑하는 체 큰소리를 하는 오늘날 세상이 어찌 이 풍진 세상이 아닐 수 있는가! 8·15 전 이들 광신자와는 다른 각도로 우리 민족의 완전한 해방이 있은 후에 이루어지는 민주독립! 일제 아래서 영화를 누리던 특권계급과 모리배를 위함이 아니요, 40년간 헐벗고 굶주려 오면서도 민족을 팔지 않은 진정한 조선민족 전체의 해방과 독립을 방해하는, 봉건의 굴레를 쓰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굴리는 자들이 싹트고 있으니, 이 새로운 광신자들을 이러한 바람과 먼지 속에서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12 <祥廈>라는 이름 위에 먹칠이 되어 있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이자 녹기일본문화연구소 간사를 지낸 裵相河이다.
13 먹칠 때문에 둘 다 판독 안됨.

시민들의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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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기 선생 12주기 추모식 거행

 

대전지부(지부장 박해룡)는 2월 5일 독립운동가 조문기(연구소 2대 이사장) 선생의 12주기 추모식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서 진행했다. 이날 박해룡 대전지부장, 이순옥 부위원장과 대전지부 후원회원 그리고 방학실 기획실장을 비롯한 본부 상근자 등 30여 명이 참석했다.
조문기 선생은 유만수, 강윤국과 더불어 1945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의거’의 주역이다. 이 의거는 경성부 부민관에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 박춘금이 주최한 아세아민족분격대회장에 사제 시한폭탄 두 개를 설치해 폭발시켜 대회를 무산시킨 사건이다. 조문기 선생은 2001년 이돈명 변호사에 이어 연구소 2대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했으나 사전 발간 1년 전인 2008년 타계하고 말았다. 정부는 2008년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2014년에는 모교인 화성매송초등학교 교정에 회원과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동상(제작 : 김서경 김운성)을 세우기도 했다. 동상과 묘비에는 평소 선생의 어록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 편집부

목, 2020/02/20-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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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역사박물관 소식]

 

오다 치요코 평화자료관 쿠사노이에 이사, 박물관 후원금과 감상문 보내와

 

작년 3월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방문했던 평화자료관·쿠사노이에(草の家) 이사 오다 치요코(織田千代子) 님이 최근 사고로 동생을 잃었다. 동생에게 받은 유산 중 일부인 100만 원을 작년 12월 식민지역사박물관 후원금으로 보내주셨다. 그리고 올해, 식민지역사박물관 관람 소감을 바다 건너 편지로 보내오셨다. 그 전문을 아래 소개하고자 한다. • 김슬기 학예실 연구원 정리


저는 2019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쿠사노이에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
로 회원 12명과 함께 ‘한국 평화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쿠사노이에에서 활동했던 김영환 씨가 있는 식민
지역사박물관을 김영환 씨의 안내로 둘러보았습니다.
이 박물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로 세워졌는데, 훌륭한 5층 건물의 모습에 놀랐습니다. 식민지역사박
물관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 지배했을 때의 자료를 수집, 전시, 소개하여,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실
현하기 위한 연구와 실천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전시되어있는 유물을 보고 놀라기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이 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뿐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한국병합’의
이름으로 침략하여 한국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친일파’라고 불린 사람들의 존재였습니다.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말은 들어본 적
은 있었지만, 특별히 관심도 없었고 자세히는 몰랐습니다. 비로소 ‘친일파’에 대해 그들이 독립 후 한
국의 입법, 사법, 산업, 교육, 문화,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물관을 견학한 감상은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여러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인으로서 한국과 일
본의 올바른 과거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자신
이 부끄러웠고, 가슴이 아파 우울해졌습니다.
작년에 처음으로 식민지역사박물관을 찾아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 정
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일본인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분노가 치밀었고 슬펐습니다. 앞으로 조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부해서 알고 싶습니다.


 

금, 2020/02/21-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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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일본 정부에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봉환을 촉구하는 요청서 전달 및 협의 열려

 

1월 21일 일본국회의원회관에서는 연구소가 사무국을 맡고 있는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보추협)가 일본 시민단체와 함께 일제의 침략전쟁에 군인, 군속으로 동원되어 희생된 한국인 전사자의 유골봉환을 하루 속히 실현하도록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일본 정부 당국자와 유골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졌다. 이날 협의에는 보추협의 이희자 대표와 유족 박남순 씨, 김영환 대외협력실장이 참가했다.
연구소와 보추협은 일본의 연대단체 ‘전몰자 유골을 가족의 품에 연락회’와 오키나와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는 ‘가마후야’와 함께 2014년부터 매년 일본 정부에게 한국인 전사자의 조속한 유골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하고 협의를 벌여왔다.
30여 사가 넘는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가 취재경쟁을 벌였으며,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아카미네 세켄(赤嶺政賢) 등 7명의 국회의원도 이날 협의에 함께 참가하여 이 문제에 대한 뜨 거운 관심을 보여줬다.
요청서 전달 뒤에 이루어진 일본 정부(후생성, 외무성) 당국자와의 협의에서는 후생성 당국자로부터 오키나와에서 발굴된 전사자 700위의 유골에 대해 3월말까지 DNA 검사를 위한 검체의 채취가 이루어지고 4월부터 DNA 감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후생성 실무자가 DNA 검체를 채취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시민단체와 국회의원들은 DNA 감정의 성패가 달려있는 검체의 채취가 비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며 전문가의 참여를 요구했다. 오키나와에서 희생된 한국인 유족 163명은 한국 정부를 통해 DNA 검사를 요청했다.
또한 참가자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유골조사에 대해 DNA 감정의 대상이 되는 유골이 너무 적은 상황을 지적하며, 현지에서 실시되고 있는 유골의 화장을 중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후생성의 회의 자료에 ‘유족들이 화장을 원한다’는 내용이 현지에서의 화장을 하는 명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밝혀져 한국과 일본의 유족들로부터 거짓으로 유족감정을 들먹인다는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목, 2020/02/2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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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민족문학연구회, <겨레의 큰 별들> 출간

민족문학연구회(회장 맹문재)는 지난해 광복절에 펴낸 독립운동가 기림시선 1집 〈독립운동의 접두사〉에 이어 올 3월에 기림시선 2집 〈겨레의 큰 별들〉을 민연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민족문학연구회 소속 작가 45인이 쓴 가네코 후미코와 그 남편 박열, 김구, 민영환, 유관 순, 유일한, 이동녕, 장준하, 차리석, 한용운 등 45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 45편이 실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삶을 바친 그 분들의 삶과 정신을 올곧게 되찾아 바로 세우고 그 정신의 바탕 위에서 우리를 성찰하는 것은 단순히 그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만이 아니라 우리가 처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라며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기
림시선의 편찬작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책에는 45편의 기림시뿐 아니라 45인의 독립운동가 약력을 수록했고 김성동 작가의 발문 「‘친일파’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다」를 실었다. 민족문학연구회는 기림시선을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101년 전 3·1운동의 함성 소리가 귀에 맴도는 요즘,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목, 2020/03/26-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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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항일운동 유적지 취재기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
해간도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를 가다

이은지 YTN 라디오 PD

 

과거 역사를 더듬어보고 미래로 이어주는 중간지점이 한·러수교 30주년이라고 생각해요. 과거와 미래를 잇는 데에 연해주 독립운동 유적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러시아가 소련의 많은 레거시(전통)를 부정했는데 현대까지 계속 유지되는 것 중 하나가 ‘꺼지지 않는 불꽃’ 이라는 겁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무명용사들을 우리 후손들이 기억하겠다, 그들의 불빛이 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죠. 우리에게도 이런 정신이 필요합니다. 독립운동에는 좌우가 없습니다. 이념 때문에 잊힌 러시아의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새롭게 발굴하고 체계화하여 지켜나가고,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오성환 총영사 인터뷰에서

 

역사는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다

지난해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서간도를 답사한 후 제작한 라디오 다큐멘터리 〈서간도 독립운동가 무명씨의 꿈〉(연출 : 이은지, 구성 : 홍기희)에 담았던 문장입니다.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이런 ‘투쟁’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필수적인 과정은 시간을 다툽니다.
기억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 양과 선명도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가의 대부라고 불렸던 ‘페치카 최’ 최재형의 손자인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이 지난 2월 14일 별세했습니다.
“이제라도 찾고, 우선 기억하는 것부터 기록해놓아야 한다”던 그의 한마디가 마음에 사무칩니다. 이에 저는 지난해 11월 해간도 항일독립운동 본거지라고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대를 답사하고 온 기억들을 이곳에 기록합니다.
연해주(沿海州)는 해간도(海間島)로 불리며 만주의 북간도, 서간도와 더불어 항일운동의 3대 거점이라고 하죠. 최재형·이범윤·안중근·이위종의 동의회, 안중근의 단지동맹, 헤이그 특사 출발지, 의병부대 ‘13도 의군’과 독립군 양성을 위한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와 1919년 최초의 임시정부 ‘대한국민회의’ 등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먼저 일제강점기 한인들과 해간도 독립운동가들의 요람이 되었던 신한촌으로 향했습니다.

 

① 한글 주소가 있는 곳,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요람 신한촌

당시 춘원 이광수는 신한촌을 두고 “바윗등에 굴 붙듯이 등성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나타났다”고 기록했다고 합니다.

서울거리 집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7번지 일대― 한민학교와 이동휘 선생 집 추정 터

 

구글맵을 켜고 신한촌이 있었다던 산등성이를 올라가봤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춘원이 묘사했던 당시 모습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스탈린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아파트가 빼곡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독립문이 있었다던 곳은 듬성듬성한 겨울나무로 채워져 있어, 추정만 가능할 뿐 자취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하바로브스크 울리짜 7번지에 살고 있는 김치보와 서울스카야 9번지에 살고 있는 채성하”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신한촌 일대에 서울 거리가 존재했다는 기록인데, 실제 ‘서울거리 A2’ 주소판이 부착된 집 한 채가 현재 남아있는 유일한 가옥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구글맵을 켜고 영하 10도의 거리를 찾아 헤맸습니다.
오! 폐가들로 둘러싸인 곳, 앞으로는 철로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급경사 언덕에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은 없었습니다. 대신 한 러시아인과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이 집을 알고 있나요?”
“네. 한인들이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았었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옵니까?”
“한국에서 방문객이 많이들 찾아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죠.”

 

택시를 잡으려고 큰 길로 나와 ‘얀덱스’를 켜보니, 이런!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하바로보스크 22번지라고 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역임한 이동휘 선생이 살던 집이 있었다는 바로 그 주소였습니다. 역시나 이곳도 상점이 세워져있었습니다.

 

② 한인들의 터전 신한촌과 개척리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카야 26A 신한촌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했습니다.
묵념을 하고 참배객을 기다리는 사이 30여 분간 한국인 관광객 2팀과 러시아인 부부 한 쌍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를 시도했습니다.

“저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제 어머니는 어릴 적 한인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한때 이곳에 거주하다가 탄압당한 한인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저희는 한인들이 강제이주 당한 것이 매우 유감입니다. 이 기념비가 세워져서 선조들을 기릴 수 있어 기쁩니다”.
– 신한촌 기념비에서 만난 러시아인 부부

“이분들 때문에 우리가 잘 사는 나라가 됐고 이렇게 행복하게 됐는데, 부디 이 얼이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가슴에 남아서 역사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짐을 해봅니다. 굳이 여기를 한번와서 찾아 뵙고 싶더라구요”
– 신한촌 기념비에 참배하러 온 한국인 관광객 모녀

 

허술한 철조망을 열고 들어가니, 아무런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3개의 탑과 주변의 8개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비를 세운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설명으로는 일제강점기 3개의 임시정부와 강제이주 당한 8개 지역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념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을까? 같이 갔던 가이드는 당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숫자가 너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 라고 말했습니다. 기념비는 고려인 자원봉사자 부부가 관리하고 있다는데, 남편 되는 분이 얼마 전에 돌아가시고 현장에서는 만날 수 없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기념비 아래쪽과 위쪽의 색깔이 다릅니다. 러시아인들이 낙서를 하거나 오물을 버린 흔적이라고 합니다.

 

킹크랩을 먹겠다고 블라디보스토크 젊음의 거리, 포그라니치나야 거리로 향했습니다. 맛집과 카페들이 밀집해있는 핫플레이스랍니다. 거리의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인 관광객이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킹크랩과 독도새우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곳이 과거에는 ‘개척기’로 불렸던 까리에스키 거리였다고 합니다. 이 거리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모의를 했다는 대동공보사도 있었다고 합니다. 두 명 중 한 명이었던 우리 관광객들 중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고 걸었던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요.

 

③ 블라디보스토크 역

블라디보스토크 역과 시베리아횡단열차

출발점을 가리키고 있는 필자 이은지 PD

 

“어떤 역인지 알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가 무슨 역이야?”
“블라디보스토크 역이요. 이곳에서 누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탔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어요.”

“전혀 못 들어봤는데.”

“몰라요.”

“가이드가 설명 안해주던데요.”

2019년 11월 25일 아침.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르는 시베리아횡단열차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만난 한국인 관광객들과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실었습니다.
이 철길에도 우리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해 이곳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고 하죠. 헤이그 밀사였던 이준 열사가 출발한 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생각보다 조용히 역사를 들어오던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역사 안은 아담했습니다. 다만 입출구가 여러 개인데다 각각 거리가 상당하고 드나들 때마다 짐 검사를 받아야 해서, 탑승할 열차와 개찰구를 잘 확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저도 한번 잘못 들어갔다가 전속력 달리기를 해야 했으니까요.
우수리스크로 향하기 전, 오성환 총영사는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와 우리 영사관이 협력해 블라디보스토크 역사탐방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에 역사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음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적지를 찾아서 안내판 같은 것을 설치했으면 좋겠다고 러시아 시정부한테 제안해왔습니다. 신한촌, 구한촌… 여러 역사 유적지를 엮어서 하나의 관광지도로 만들면 블라디보스토크가 단순히 킹크랩 먹고 바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장소가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갈 수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는 거죠. 한러수교 3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영사관이 지도를 제작할 용의가 있다’고 하니까 블라디보스토크 시정부 측에서도 사적지 지도 앱을 만들겠다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일유적지 지도앱을 보면서 답사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④ 고려인 이주의 피눈물이 서린 철길, 라즈돌노예 역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 우수리스크. 차로 2시간이면 도착하는 거리라는데, 전날 내린 눈이 얼어붙어 3시간 30분 가량 걸려 도착했습니다. 처음 정차한 곳은 라즈돌노예 역이었습니다.

 

기차가 아주 가끔 멈췄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그냥 천으로 덮어 기차역 플래폼에 남겼습니다. 역 객차에서 아이가 숨져 창문 밖으로 시신을 창밖으로 내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식량부족과 병에 시달렸고 차량마다 있던 원형난로는 달리는 중에 사용하지 못했고, 옷도 이불도 받지 못해 너무도 추웠어. 변소도 없어 기차가 멈추면 기차 밑에서 급히 볼 일을 보다 깔려죽기도 했어. 특히 위생상태가 불량해 많은 사람들이 앓았는데 병자가 생기면 그 즉시 실어 내갔고 모두 실종자가 되었지. 식량도 물도 받지 못했기에 오는 동안 풀과 뿌리를 모야 으깨어 먹었어. 아이들이 특히 많이 죽었지 – 김 블라지미르 회고록에서 기차역이 이토록 슬프게 보일 수 있을까. 눈 쌓인 철도가 이토록 서럽게 차가울 수 있을까.
눈발이 매섭게 날리던 날 라즈돌노예 역의 전경은 비통하다 못해 아팠습니다.

 

⑤ 강물소리에 묻힌 이상설 유허비

우수리스크 초입 수이푼강 근처에는 보재 이상설 선생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고종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했던 분입니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등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우리나라 최초 임시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유허비는 왜 강가에 있을까요?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그의 유언입니다. 이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 화장해 재를 강물에 뿌렸다고 합니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른다고 하니, 그 위치 선정에도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유허비를 둘러싸고 물길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2017년 김정숙 여사 방문 시에 자갈길을 깔았으나 그해에 비가 많이 와서 다 쓸려갔고 올해 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 도로까지 물이 찼었다고 합니다. 그 물이 빠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겨울이 와 얼어붙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러시아에서 9년을 살았다는 현지 가이드는 “관리가 정말 안 된다. 한국인들이 관리 안하면 러시아 사람들은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라며 우수리스크 지역 내 독립운동 유적지 관리 문제를 지적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유허비에 쌓인 눈을 손으로 쓸고 묵념을 했습니다.

⑥ 작은 간판 하나, 전로한족중앙총회 개최지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전로국내조선인회의가 개최됩니다. 그 전신으로 1918년 6월 열렸던 제2회 전로한족중앙총회 자리가 현재 학교 운동장으로 변해 남아있습니다. 주소는 우수리스크시 막심고리끼거리 20번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해 안내문 하나를 설치해 건물 입구에 달아두었다고 하니, 타 유적지에 비해 다행인 일입니다. 문이 잠겨있어 안쪽까지 들어가 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였던 학교 건물과 안내문

 

⑦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남아있는 페치카 최재형의 집

조국은 최재형 선생을 잊은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미 태어날 당시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어머니는 당시 탄압 대상자였습니다. 탄압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묻는다면 ‘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최재형 선생의 DNA 덕분이 아닌가…….
우리의 가장 큰 역할은 기억하는 일과 역사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록해놓는다면, 어쩌면 우리의 후손들이 그 뒷일을 감당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재형 후손 최 발렌틴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

 

모스크바 어느 한식당에서 최재형의 후손 최 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그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 14일 별세했습니다. ‘조국은 최재형 선생은 잊은 적이 없다’ 라는데, 그는 사고 후 병원비 5만 유로가 없어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고택은 당시의 집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에 붉은 색과 흰색으로 칠한 벽돌집. 한쪽 창문이 깨진 상태 그대롭니다.

 

최재형의 집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라고 적혀있는 이곳이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했던 집입니다.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나 러시아 선원생활을 하며 재력을 쌓았고, 그 돈으로 한인들의 교육사업과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의회, 대동공보, 권업회의 중추 역할을 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을 역임하기도 했구요. 안중근 의사의 배후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고택 안에는 최재형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미디어 교육실에서는 관광객들에게 최재형과 관련된 영상을 상영해주고 있었고, 러시아 현지인으로 보이는 관리인이 2명이나 있었습니다!(다른 유적지의 황량함, 황무지에 내버려둔 듯한 모습과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최재형 동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자료마다 QR코드가 부착돼있었는데, 현지 인터넷 사정이 좋지 않아 QR코드 연결은 힘들었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잡혀갔던 4월참변을 추도하는 기념비는 코마로바거리 1번지에 세워져있습니다. 러시아정부에서 세웠다고 합니다.
올해는 한러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잃어버린 해간도 항일운동 역사를 재조명하기에 딱 좋은 시기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꿈꾸며 두만강을 건너간 선조들의 해간도 투쟁 이야기.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과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 연해주 최초의 항일의병부대 주축이된 이범윤 부대, 그리고 성명회와 최재형과 홍범도의 권업회·권업신문, 통합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했던 이동휘,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 정통령.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과 강제이주의 역사까지, 수많은 불꽃들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던 곳.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한 땅”(성명회)의 역사를 이제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지 않을까요. 100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우리가 기록해놓는다면, 100년 후의 후손들에게는 이 기록이 ‘역사’로 기억될 것이니까요.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를 전하며 긴 이야기를 마칩니다.

 

(경천아일록을 보며) 김경천 장군이 일기를 썼을 당시는 하나의 민족으로 살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남북으로 나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해보면 결국 조국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평화를 사랑하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라는 그런 메시지를 주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실 빨치산 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영하 20도, 30도 그런 추운 기후에서 활동하셨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먹을 것도 없었던 그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위해서 활동했습니다. 어쩌면 그 모두가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기를 쓰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혔거든요. 잊혔지만,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오랫동안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바로 이 일기장에서 후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 김경천 장군 손녀 일레나와 갈리나

목, 2020/03/26-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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