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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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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문당과 융무당은 왜 아직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나? – 일본인 사찰 용광사의 덫에 갇힌 문화재 수난사 90년의 내력

익명 (미확인) | 목, 2018/09/27- 15:48

식민지 비망록 39

이순우 책임연구원

 

4·19민주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당시의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景武臺)’가 청와대(靑瓦臺, 1960년 12월 30일 변경)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6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워낙 독재정권의 아성(牙城)이라는 오명이 점철된 탓인지 아직도 경무대라고 하면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경무대는 일찍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신무문(神武門) 너머에 있는 후원(後苑) 지역을 일컫는 표현으로 정착된 ‘유서 깊은’ 명칭이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도 이 이름이 그대로 통용된 탓에 운동회와 주일학교 집회와 기념연회와 같은 갖가지 행사나 모임 장소로 이곳이 거론된 자료를 흔히 접할 수 있고, 특히 1939년 8월 남산에 있던 총독관저가 이 지역에 새집을 지어 옮겨왔을 때도 이곳은 ‘경무대 총독관저’로 호칭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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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순종 국장 당시 순화방 사재감계(順化坊 司宰監契) 계원들이 대여(大輿) 운반 예행연습을 위해 경무대 마당에 모여든 광경이다. 왼쪽 뒤로 월대 위에 보이는 건물이 융문당이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

 

근대시기에 포착된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연병장 같은 너른 마당이 있고 그곳의 북쪽과 동쪽 가장자리에 각각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이라는 이름의 누각이 월대(月臺) 위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종실록>과 같은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는 것), 연조(演操, 군사를 조련하는 일), 호궤(犒饋,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는 것) 등의 일이 벌어졌고, 특히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정시(庭試), 알성시(謁聖試)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과거시험이 치러진 것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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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고적도보>제10책(1930)에 수록되어있는 경복궁후원 융문당과 융무당의 원래 모습이다. 융문당은 남향(南向)이고, 융무당은 서향(西向)으로 배치된 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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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시민위안 단오운동대회’ 안내광고에는 행사장소가 ‘경복궁 후원광장 경무대’라는 표시가 또렷이 적혀 있다.(<매일신보>1925년 6월 20일자)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이후 경복궁이 사실상 빈 궁궐로 변하게 되는 한편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하면서 이곳 역시 그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해체되어 사라지는 운명에서 크게 비껴나지는 못하였다.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궁궐문화재 수난사에 대해서는 경기도 편찬 자료인 <경기지방의 명승사적>(1937)에 수록된 「경복궁의 정리」 항목에 잘 정리되어있다.

 

덧붙여 이 서두에 기술하여 둘 일은 경복궁 터 약 13만 평의 땅이 현재와 같은 상태에 이르게 된 대체적인 경위이다. 명치 43년(1910년)에 이르러 경회루, 근정전 등 거대한 건물과 기타 여러 개의 누전(樓殿)을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 약 4천 칸을 철거하여 그 중에 다수가 민간에 불하되면서 구태(舊態)는 크게 변하였다. …… 또한 한강통(漢江通, 한강로) 11번지 고야산 용광사(高野山 龍光寺)는 소화 4년(1929년) 5월 신무문 밖의 융무당(隆武堂, 용광사 본당)과 융문당(隆文堂, 이 절 동북쪽의 객전)을 이축(移築)했던 것이며, 동사헌정(東四軒町, 장충동 1가) 박문사(博文寺)의 고리(庫裡, 거실)는 소화 7년(1932년) 10월 건춘문의 서북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옮긴 것이다. (하략)

 

여길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이 용광사로 옮겨진 때는 1929년 5월이라고 적고 있으나,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해체 당시의 사진자료와 더불어 관련기사가 수록된 사실이 있으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록은 아닌 듯하다. 그리고 용광사 본당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건물은 ‘융무당’이 아니라 ‘융문당’이라야 맞는 서술이 될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광사라는 절은 원래 진언종 고야파(眞言宗 高野派)에 속하는 일본인 사찰이며, 1907년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에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이름은 ‘용산사(龍山寺)’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진언종 고야파 용광사(영정 8번지)’로 이름을 바꿔 조선총독부에 창립 신청을 제출하여 1917년 6월 8일에 허가를 받았으며, 그 후 1932년 5월 17일에 ‘한강통 11-131, 132, 133번지’로 주소지 이전 허가를 받은 내역이 <조선총독부관보>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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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융문당과 융무당 해체 이전 당시의 모습이다.이 기사에는“이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일본인 사찰에 무상대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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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경복궁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 관련 기념엽서에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사라진 구역을 ‘경성협찬회의 여흥공간(식당, 매점, 흥행물)’이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절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주둔 일본군대가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 숨진 이른바 ‘전몰장병(戰歿將兵)’의 유골을 봉안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던 사실이 눈에 띈다. <매일신보> 1942년 7월 3일자에 수록된 「전몰장병추도제, 6일부민회장에서」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억 국민이 감개 깊게 맞이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 중일전쟁) 제5주년에 당하여 군사원호회 경성부 분회에서는 일찍이 대동아건설의 초석으로 산화된 전몰황군장병의 위령과 추모를 겸하는 두 가지 행사를 하기로 되었다.
첫째는 사변기념일에 앞서 6일 아침 장병의 유골이 안치된 부내 약초정(若草町) 서본원사(西本願寺), 용산정(龍山町) 대념사(大念寺), 용광사(龍光寺) 이 세 절을 방문하고 생화(生花)를 공진하여 영령을 위로하고 이날 또한 부민회장(府民會場)에서 전몰장병추도회를 행하기로 되었다. (하략)

 

말하자면 경복궁에서 옮겨진 융문당과 융무당은 난데없는 일본인 사찰로 둔갑하여, 그것도 하필이면 죽은 일본군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그들이 남긴 유골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것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오는 ‘대념사’라는 절은 1927년 7월 14일에 사원창립허가를 받았으며,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가 대표 출원자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 사람은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하였으며, 특히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창립신청(1943년 10월 20일 허가) 때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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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고야산(龍山 高野山, 용광사)으로 옮겨진 이후에 일본인 사찰의 법당으로 변한 융문당의 모습이다. (<경성과 인천>,1929)

 

일제가 패망한 뒤 1946년에 이 절은 귀속재산으로 처리되어 원불교 측에 넘겨져 서울교당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각각 대각전(大覺殿, 법당)과 대각사(大覺舍, 생활관)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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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지와 한강통 주변 약도에 표시된 ‘용광사’(오른쪽 중간)의 위치이다. 이곳은 중간 위쪽에 보이는 대념사(大念寺)와 더불어 침략전쟁 과정에서 생긴 이른바 ‘전몰장병의 유골안치사원’으로 활용된 공간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 京城龍山公立小學校同窓會, <龍山小學校史 龍會史>,1999)

 

이 와중에 지난 2006년 6월 10일자 <관보>를 통해 등록문화재 등록예고의 대상이되면서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다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문화재청 공고 제2006-163호에 수록된 ‘등록사유’를 보면, “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강점기에 훼철된 경복궁의 전각 중 그 존재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건축물로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양식을 확인할 수 있어, 그 역사성과 함께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상 이러한 등록예고가 의례적인 통과절차 정도로 여겨지던 여느 등록문화재의 사례들과는 달리 이곳의 융문당과 융무당은 최종적으로 문화재 지정고시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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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6월 원불교 재단의 소관으로 바뀐 융문당과 융무당에 대한 등록문화재 등록예고가 있었으나 소유자 측의 반대로 최종 등록 고시는 무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관보> 2006년 6월19일자)

 

이 당시에는 이미 원불교 측에서 이 건물들을 이전하고 그 자리를 재개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 자리는 신축된 원불교 서울교당과 하이원빌리지가 서 있는 상태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옛 융문당과 융무당은 2006년에 해체되었다가 이듬해 9월에 전라남도 영광의 영산성지에 복원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지금은 이 건물들이 ‘원불교 창립관’과 ‘옥당박물관 문화체험관’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테면 경복궁에 그대로 남아 있었어야 할융문당과 융무당은 일제에 의해 한 번 해체 이전된 것도 모자라 또 다시 수백 킬로 떨어진 낯선 땅으로 옮겨지는 이중의 수난을 겪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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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 원불교 서울교당에 있던 융문당과 융무당 건물이 해체되어 전라남도 영광으로 이전되기 직전의 모습(왼쪽)과 그 자리에 새로 건립된 하이원빌리지(서울교당)의 전경(오른쪽)이다. 왼쪽에 보이는 전봇대와 건물 전면에 있던 보호수 은행나무 3그루만 그대로인 채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 대목에서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거의 ‘기적적으로’ 남아 있는 융문당과 융무당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질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그러한 일의 당위성이야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그렇더라도 다음의 한 가지 사항만큼은 꼭 상기시켜둘 필요가 있어 보인다. 원래 이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무상 대여한 것”이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굳이 소유권 관계를 따진다면 총독부 소유의 국유물인 상태에서 일본인 사찰인 용광사에 빌려준 것일 뿐이었으므로, 해방 이후 일반적인 귀속재산처리과정에 따라 원불교 측으로 소유권이 넘겨진 자체가 원천무효에 해당하는 일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고자 <동아일보> 1928년 8월 13일자에 수록된 「유서(由緖)깊은 옛 과거(科擧)터, 융무 융문 양당(隆武 隆文 兩堂) 철훼(撤毁), 문무의 과거를 보던 융무당 융문당을 일본 절에 빌려주어 곡괭이에 헐려가, 진언종(眞言宗)에 무상대여(無償貸與)」 제하의 기사 내용을 여기에 덧붙여 두기로 한다.

 

…… 지난 11일부터 시내 입정정(笠井町)에 있는 일본 사람의 절 진언종 융흥사(隆興寺, ‘용광사’와 일본음 발음이 동일한 관계로 빚어진 착오)에서 다수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헐기에 착수하였다 한다. 내용은 전기 융흥사에서 총독부에 출원하여 동 건물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조건으로 심지어 주춧돌까지 전부 가져다가 용산 경성부출장소 옆에 있는 빈터에다가 새로 건축하고 불상을 안치하여 소위 선남선녀들이 출입하며 명복을 빌게 되리라는바 문무(文武) 과거를 보이던 곳이 갑자기 부처님 두는 곳으로 변하여 가는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적지 아니한 감개를 일으키게 하였다. (하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여기저기로 흩어진 궁궐문화재 가운데 그 원형이 아직도 남아 있는 사례는 지극히 드문 형편임을 감안하면, 이들 건물의 가치는 새삼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겠다. 그런 만큼 설령 그것이 전혀 별개의 공간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등록문화재로 등재하는 문제는 서둘러 재추진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그러한 시도가 더 이상의 원형 훼손이나 건물 자체의 멸실을 막아주는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장치가 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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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비망록•62]

도로원표는 왜 칭경기념비전 앞에 놓여 있을까?
일제강점기에 모든 길은 ‘황토현광장’으로 통했다

이순우 책임연구원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사라진 옛 문화유적지를 알리기 위해 서울시가 처음 10개의 표석(標石)을 설치한 것이 지난 1985년 10월 30일의 일이었다. 이 숫자는 세월이 흐르면서 꾸준히 증가하여 지금은 시내 곳곳에 대략 300여 개가 넘는 표석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근대시기 신문사 터와 관련한 것도 다섯 개가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독립신문사 터’ 표석은 최초에 설치된 10개의 표석군에 포함되어 정동 배재학당 구내에 자리하였고, 그 후에 황성신문(2005년), 조선일보(2005년), 동아일보(2006년), 대한 매일신보(2007년)의 표석도 차례대로 추가되었다. 다만, 독립신문사의 경우 2014년에 이르러 원위치 재고증 문제가 불거지면서 옛 독일영사관 자리에 해당하는 서울시립미술관 앞뜰에 새로운 표석으로 교체되어 설치된 상태이다.

 

근대 시기 신문사 창간사옥 터 관련 표지석 설치 현황

그런데 이들 신문사는 사옥의 위치를 여러 군데 옮겨 다닌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 가운데 어느 장소에 표석을 설치하는지가 간혹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논란을 피하고자 대개는 창간사옥(創刊社屋)을 기준으로 하는 방식을 따르는 것이 보통이며, 실제로 표석 표면에는 ‘무슨무슨 신문 창간사옥 터’라는 표제가 즐겨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황성신문의 경우는 예외였다.
현재 ‘황성신문(皇城新聞) 터’ 표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5번 출구의 계단 바로 옆 도로를 등진 자리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이 신문사의 사옥이 있었다고 하는 ‘종로 백목전 후곡전 면주전도가(鍾路 白木廛 後谷 前 綿紬廛都家)’ 터와 인접한 지점이다. 서울시에서 이 표석을 세운 때가 2005년 12월이라 하였으니, 필시 ‘을사조약 100년’을 되새기는 뜻에서 만들어진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창간사옥도 아닌 장소에 구태여 표석이 설치된 까닭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런데 신문사 사옥 자체의 이동 연혁을 살펴보면, 황성신문사는 창간 이후 무려 4차례나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고 더구나 현재 표석이 설치된 자리는 4번째이자 마지막 사옥에 해당하는 지점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황성신문> 1898년 9월 5일자 ‘창간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이 신문사가 처음 자리한 곳은 ‘중서 징청방 황토현 제27통 7호 전 우순청(中署 澄淸坊 黃土峴 第二十七統 七戶 前 右巡廳)’이었다.
‘황토현(황토마루)’은 지금의 광화문네거리 일대를 일컫는 지명이며, ‘우순청’은 한성부 서쪽 절반에 해당하는 구역의 순라(巡邏)를 맡아보던 관청이었다.
여기에서 보듯이 황성신문사는 옛 우순청 건물을 빌려 사용하였으나 그 이후 3년이 지나 이곳을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데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 게재된 ‘사고(社告)’에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왼쪽) <황성신문< 1902년 9월 10일자에는 조야송축소에서 추진하는 칭경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성신문사 자리(옛 우순청터)가 선정되어 다른 곳으로 신문사 사무소를 옮긴다는 내용의 사고가 수록되어 있다. (오른쪽) 황성신문사가 창간사옥으로 빌려 사용하고 있던 옛 우순청 건물을 헐어내고 1903년 9월 2일에 완성된 칭경기념비와 기념비전의 모습이다. 앞쪽에 보이는 돌문이 ‘만세문’이다.

 

본사(本社)를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서 기념비(紀念碑)를 수립차(竪立次) 훼철(毁撤)하기로 본사 임시사무소(臨時事務所)를 송교 동대로 남일가(松橋 東大路 南一家)로 이정(移定)하고 본 신문은 내(來) 11일부터 부득이 정간(停刊)하였다가 본사를 하처(何處)든지 확정한 후에 계속 발간하겠사오니 제군자(諸君子)는 조량(照亮).

 

여기에 나오는 ‘기념비’는 1902년에 해당하는 고종황제의 등극 40년과 보령(寶齡) 망육순(望六旬, 51세)을 기리는 칭경예식(稱慶禮式)과 관련하여 중흥송덕(中興頌德)의 내용을 담아 1903년 9월 2일에 완공된 비석이다. 이때 현직 고위관리가 중심이 된 관주도 성격의 조야송축소(朝野頌祝所)에 의해 기념비의 건립장소로 황토현에 있는 기로소(耆老所, 세종로 149번지)의 남쪽 옛 우순청(右巡廳, 세종로 142번지) 자리가 선택되었으므로 당시 이 건물을 빌려 사용하던 황성신문사는 이곳에서 퇴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비석의 전자(篆字)는 황태자(순종)의 글씨이며, 비문은 의정부 의정 윤용선(尹容善)이 짓고 원수부 회계국총장 민병석(閔丙奭)이 썼다. 비각의 전면에는 ‘기념비전(紀念碑殿)’이라는 편액이 걸렸는데, 이 글씨 역시 예필(睿筆)이라고 하여 황태자가 1902년 9월에 쓴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도로쪽 전면에 조성된 돌문에는 영왕(英王, 영친왕)이 6세에 썼다는 ‘만세문(萬歲門)’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고, 이곳과 이어진 벽돌담장에는 ‘성수만세(聖壽萬歲)’라는 글자문양이 만들어져 있었다.

(왼쪽)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실린 시가지원표 위치 및 1, 2등 도로표 가운데 ‘경성부’ 관련 내용이다. 여길 보면 최초 시가지원표의 위치가 ‘광화문통 황토현광장’으로 설정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자리는 종로와 광화문통이 교차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오른쪽)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이정원표’를 제작 설치할 것을 알리는 ‘관통첩’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때 원표는 3미터 정도의 소나무 사각기둥에 페인트를 칠하여 거리를 표시하는 것으로 제작양식이 규정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광화문네거리의 북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칭경기념비전(稱慶紀念碑殿)의 건립내력이다. 그런데 이 자리는 이 비석 말고도 일제강점기에 추가된 또 다른 공간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이곳이 바로 ‘시가지원표(市街地元標)’ 또는 ‘도로원표(道路元標)’의 설치장소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4월 11일자에 수록된 ‘조선총독부 고시 제135호’를 통해 전국 각지 10개 도시에 대해 시가지원표의 위치와 일등 및 이등도로의 구간이 처음으로 지정되었는데, 이때 경성지역에는 “광화문통 황토현광장(光化門通 黃土峴廣場)”이 원표 위치로 선정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 목포, 인천, 의주, 원산, 양양 등 사방팔방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는 이곳 시발점인 ‘황토현광장’으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총독부 고시 제135호(1914.4.11)에 의한 주요 도시 시가지원표 위치지정내역

 

이와 아울러 해를 바꿔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관통첩(官通牒) 제18호’에는 정무총감이 각도장관에게 시가지 원표로 지정된 자리에다 ‘이정원표(里程元標)’를 세울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1. 원표에는 경성, 관할도청 소재지 및 부근의 주요한 시읍(市邑) 또는 항진(港津)에 이르는 이정(里程)을 기재할 것.
2. 이정(里程)은 원표간의 거리에 따를 것. 단, 원표의 건설이 없는 시읍과의 거리는 그 시읍의 중앙부분에 있어서 적당한 지점을 선정하여 그 지점과의 거리에 따를 것.
3. 표주(標柱)는 지방청(地方廳), 잡급급잡비(雜給及雜費) 중에 ‘잡비’로써 건설할 것.
4. 표주(標柱)의 촌법(寸法)은 1척각(尺角, 사방 1자), 지상(地上) 약 10척(尺, 3.03미터)으로 십분 건조(十分 乾燥)한 송재(松材)를 사용하고 뼁키칠(ペンキ塗)을 할 것. 단, 현재 원표 위치에 건설된 표주로서 이에 맞지 않는 것은 건체(建替)할 때에 개정(改正)할 것.
5. 원표서식(元標書式)은 좌(左)의 예(例)에 따를 것.

 

이 내용에 따르면 최초로 설치된 ‘이정원표’는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소나무 기둥으로 만들어 여기에 페인트칠을 하여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설치된 ‘이정원표’의 실물이 궁금하여 여러 사진자료를 뒤져보았으나 당최 그 흔적이 눈에 띄질 않더니, 어찌어찌 간신히 하나 찾아낸 것이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일대의 거리 풍경을 담은 사진엽서이다.

 

광화문 칭경기념비전 주변의 거리풍경이 담긴 사진엽서이며, 이것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확인된 ‘이정원표’의 모습이 담긴 사진자료로 평가된다. 이 엽서의 오른쪽 모서리 부분을 확대해 보면 경계부분에 간신히 ‘이정원표’의 실물이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왼쪽)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수록된 겨울 풍경 스케치 사진에 우연하게도 그때 막 제작 설치한 ‘도로원표’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 당시에 도로원표의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자료이다. (오른쪽) 현재 칭경기념비전 앞쪽에 남아 있는 석재 도로원표의 모습이다. 제작시기를 알려주는 후면의 글씨는 깎여 나갔으나, 다행히도 이것과 똑같은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하나 더 남아 있어서, 이를 통해 “소화 10년(1935년) 5월 건설”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1920년대 중반 무렵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엽서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표주’의 모습이 아슬아슬하게 경계지점 바로 안쪽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퍼뜩 눈에 띈다. 하얀색 나무기둥에 ‘이정원표(里程元標)’라는 글씨를 또렷이 새겨놓은 형태가 <조선총독부관보> 1915년 1월 21일자에 그려놓은 서식과 그대로 닮아 있다. 어쨌거나 이 엽서에 담긴 광경은 이정원표의 설치지점이 처음부터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토현광장의 중앙이 아니라 기념비전의 옆쪽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기념비전 앞쪽에 남아있는 돌로 만든 시가지원표는 언제 처음 등장한 것일까?
우선 현존하는 실물을 살펴보면 2단 높이로 쌓아 올린 표석의 전면에 ‘도로원표(道路元標)’라고 새긴 글자가 또렷하고, 양 측면에는 각각 북부지역 9개 도시 및 남부지역 9개 도시와의 거리가 천(粁, 킬로미터) 단위로 적혀 있는 것이 확인된다. 뒷면에는 원래 설치시기를 새겨놓은 부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해당 구절이 완전히 깎여나간 상태이므로 아쉽게도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전면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진 것도 눈에 띈다.
元標眞位置 自本標中心 距離五五米 方向南六九 度一三分西 (원표의 진짜 위치는 이 표석의 중심으로부터 55미터의 거리이며, 방향은 남서쪽 69도 13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위치는 종로와 세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이며, 황토현광장의 중심부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관보에 고시된 원표의 지정위치는 교차로의 한 가운데이지만 교통의 편의상 도로원표는 옆으로 비껴난 기념비전의 앞에 따로 설치해둔 것이라는 얘기인 셈이다. 
그런데 비록 도로원표의 뒷면이 깎여나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내용을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희한하게도 이것과 똑같은 또 하나의 도로원표가 경희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연유로 똑같은 모양과 내용의 도로원표가 둘씩이나 존재하는 것인지, 또 어떤 경위로 어디에서 수습되어 이곳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어쨌건 이곳에 남아 있는 쌍둥이 도로원표를 통해 이 원표 자체는 “소화10년(1935년) 5월 건설(建設)”된 사실은 명확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때인가 옛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 1935년 12월 5일자에 겨울 풍경을 스케치한 보도 사진에서 기념비전 앞에 만들어놓은 도로원표의 모습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채록된 유일한 도로원표의 사진자료가 아닌가 하는데, 이를 통해 나무기둥 이정원표를 대체하여 돌로 만든 도로원표가 새로 등장한 때가 최소한 1935년 이전이었다는 사실은 진즉에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 일제가 창안한 새로운 개념의 하나는 바로 국도(國道)였다. 1938년 4월 4일에 제정된 ‘제령(制令) 제15호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에 따르면, 도로는 국도, 지방도, 부도(府道), 읍면도(邑面道) 등의 4종류로 나뉘고 이 가운데 국도는 다음 각호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선총독이 이를 인정하는 노선으로 정해졌다.

1. 경성부에서 도청소재지, 사단사령부 소재지, 여단사령부 소재지, 요새사령부 소재지, 요항부(要港部) 소재지 또는 개항(開港)에 이르는 노선.
2. 도청소재지, 개항 또는 추요지(樞要地), 비행장 혹은 철도정거장 상호를 연락하는 노선.
3. 군사상 중요한 노선.
4. 경제상 중요한 노선.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국도라는 개념의 설정은 다분히 긴급한 군사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38년 5월 7일자에 수록된 「일등도로(一等道路)는 국도(國道)로, 등외선(等外線)도 개수 승격, 비상시하(非常時下) 경기(京畿)의 각등도로망(各等道路網) 대경성중심(大京城中心)으로 확충」 제하의 기사에도 이와 비슷한 맥락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얼마 전 총독부로부터 공포된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은 그 실시를 5월 1일부터 하기로 하였던 것을 연기하여 전조선적(全朝鮮的)으로 도로망의 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는데 경기도에서도 이 도로령 실시를 앞두고 도내 전반에 긍(亘)한 도로조사를 급속히 하고 있다. …… 더욱이 국제도시 대경성을 중심으로 각군부(各郡府)에 방사선식(放射線式)으로 관통되어 있는 도로망을 차제에 더욱 한번 확충 강화하여 비상시하의 통운(通運)을 원활(圓滑)케 할 터이며 특히 비상시하의 자원개발(資源開發)에 도로가 가진 바 사명을 다하게 하도록 도로정책에 대한 적극책을 취하리라고 한다. (하략)

이러한 조치에 따라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게재된 ‘총독부 고시 제956호’를 통해 전국 각지에 거미줄처럼 얽힌 95개에 달하는 국도노선이 처음으로 인정 공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경성(京城, 도로원표)을 기점으로 하는 노선만을 간추려보면, 부산선(1호), 신의주선(2호), 목포선(3호), 웅기선(4호), 청주선(5호), 춘천선(6호), 해주선(7호), 진해선(8호), 인천선(9호), 군산선(10호), 여수선(11호), 송정리선(36호), 경성비행장선(37호), 강릉선(62호) 등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그런데 여길 보면 우리가 익히 아는 국도 1호선이라든가 국도 4호선이라든가 하는 것과는 노선이 완전히 다른 것이 눈에 띈다. 알고 보니 해방 이후 1963년 2월 5일에 이르러 ‘각령 제1191호 1급국도와 2급국도의 노선지정의 건’이란 것이 있었고, 다시 1971년 8월 31일에 이르러 ‘대통령령 제5771호 일반국도노선지정령’이 공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총독부관보> 1938년 12월 1일자에 실린 최초의 국도 노선 지정 내역이다. 이러한 국도노선 지정은 표면상으로 조선도로령의 제정에 따른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전시체제기라는 비상시국을 맞이하여 이에 대응하기 위한 도로망 구축이 진짜 목적이었다.

 

예를 들어, 목포에서 신의주를 종주하여 연결하는 ‘국도 제1호선’은 바로 이때 처음 나타난 개념이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의 국도 노선은 ‘경성’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것이 기본이라면, 1971년 이후에 설정된 국도 노선은 국토의 끝과 끝을 가로세로 방향으로 길게 연결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이 달랐다. 따라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가 지녀왔던 국도의 기점(起點)이라는 위상은 바로 이 시점부터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1997년 12월에는 광화문네거리의 남서쪽 방향에 새로운 도로원표와 상징물이 만들어지면서 칭경기념비전 앞의 도로원표는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사적 제171호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1969년 7월 18일 지정)인 국가문화재 구역 안에 버젓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저 도로원표가 한낱 ‘일제잔재’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조차도 품어야할 근대시기의 역사유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인지는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목, 2020/09/2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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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사진과 수필로 바라보는 민병래의 시선

인터뷰 방학진 기획실장

아들과 함께 찍은 민병래 회원

 

우리가 흔하게 쓰는 말 중에는 ‘틈새시장’, ‘틈새라면’, ‘틈새를 엿보다’ 등이 있다.
‘틈새’라는 말은 물체와 물체 사이의 물리적으로 좁은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감정이나 생각의 거리를 뜻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확장하고 있는 우주의 너무나도 작은 일부인 지구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인 인간에게는 틈새라는 말도
과분해 보인다. 하지만 동학 교주 최시형의 이천식천(以天食天) 즉, 인간이나 인간이 먹는 음식조차도 모두 한울 즉 본질적 존재라고 하였으니 틈새는 그저 고래 싸움에 낀 새우나 겨우 들어갈 좁은 공간이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새로운 공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까지 나는 틈새시장, 틈새라면이 아닌 ‘틈새 역사’도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주장을 하고 싶어서 이와 같이 말머리를 꺼내 보았다.
‘틈새 역사’. 이번 달에는 우리 시대의 틈과 틈 사이에 무수히 존재하는 사건 그리고 사람의 이야기를 담
고 싶어하는 민병래 회원을 만나 보았다.

<오마이뉴스> 2020년 9월 12일자에 게재된 ‘사수만보’ 제37화 캡쳐 사진

 

현재 민병래 회원은 오마이뉴스에 ‘민병래의 사수만보’를 연재하고 있다. 사수만보 1화 ‘결혼과 육아로 경력단절… 배우 주인영, 다시 무대에 서다’로 시작해 사수만보에 등장하는 이는 소수 정당대표, 대장장이, 초짜 무당, 독거노인, 여자 격투기 선수, 자수성가한 호텔리어, 병역 거부자, 장돌뱅이, 노동운동가, 민주화운동 유가족, 교회 개혁운동가, 미투 고발인, 친환경 먹거리 운동가, 노숙인 지원가 등 그야말로 다양한 우리들의 틈새들이다.

“오마이뉴스에 2019년 봄부터 격주로 ‘사수만보’ 연재를 시작해 현재 37회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수만보(寫隨萬譜)’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우리 시대 풍경화를 그리듯이 써나가고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 빛나는 사람보다는 우리 주변에서 성실하게 자기 인생 이야기를 그려가는 사람들이 저의 주인공들입니다.
제가 이 집필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2016년 촛불광장에서였습니다. 촛불혁명은 이름없는 민초들이 이룬 것 아닐까요? 그 거대한 물결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역사의 힘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생업에도 충실해야 하지만 저도 우리 사회에 뭔가 조금이라고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만인보 즉 만 명의 이야기를 써가야 하니 제가 몇 살까지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민병래 회원 자신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민초요 틈새인데 특히 이번 코로나 19로 직격탄을 맞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저는 현수막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99년에 창업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약 20년이 넘었네요. (https://blog.naver.com/hwangso3775) 회사 이름은 ‘황소와 나비’입니다. 처음 상호를 들으면 고깃집이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작명한 까닭은 ‘황소’처럼 우직하게 ‘나비’처럼 자유롭게 가자는 뜻이었습니다. 코로나가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도 예외는 아닙니다. 행사들이 취소되거나 축소되어 여러 가지로 매출에 영향이 많은 상태입니다. 작년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상황입니다. 다들 힘든 상황이니 꿋꿋하게 버텨갈 뿐입니다.”
‘황소와 나비’. 조선시대 민화의 주요 소재인 호랑이와 까치 그림인 호작도(虎鵲圖)가 연상되는 동시에 어딘가 도가적 여유가 느껴진다. 걷는 곳마다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황소와 날아다닌 궤적조차 남기지 않는 나비. 어쩌면 인간의 삶과 죽음도 황소의 나비의 그것과 닮았다.
여하튼 민병래 회원은 황소처럼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도 나비의 이상을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러한 이상은 언제부터 꿈꾸었을까.
“저는 성균관대 80학번입니다. 1980년에 대학에 들어가 그 시대 많은 청춘들처럼 혁명적 세례를 듬뿍 받으며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당시 성대 학생운동은 고양기였고 저도 그 흐름에 미력이나마 보태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성대 민주동문회 회원인데 현재 민주동문회는 장학사업을 충실히 하고 있습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고초를 겪은 동문들에 대한 지원, 그리고 현재 성대 재학생들 중에서 선배들의 뜻을 이어받고 있는 후배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대민주동문회의 자랑스런 사업입니다.”
“민족성대 자랑찬 심산의 아들딸이여…” 독립투사 심산 김창숙 선생이 등장하는 〈민족성대 진군가〉는 많은 대학생들이 부러워했다. 게다가 도포 자락 휘날리는 형상의 김창숙 선생 동상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현재 성균관대에는 심산관이라는 건물 이름이 호암관으로 바뀐 지 오래다. 독립투사의 자리를 재벌 총수에게 내준 격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대민주동문회의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는 바가 크다.
민병래 회원의 우직함은 현재의 직업에 20년 넘게 종사해오고 있는 모습에서뿐만 아니라 (사)푸른사람들 활동에서도 드러난다. 1994년 창립된 (사)푸른사람들은 ‘푸른시민연대’로 널리 알려진 동대문 지역의 대표적인 풀뿌리 시민단체이다.
“시민단체인 푸른사람들은 서울 동대문구에서 활동하는 시민단체입니다. 한글을 모르시는 어르신들에게 글을 깨우쳐주는 사업을 25년 넘게 하고 있습니다. 결혼 이주민이나 외국인 연수생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이들을 대상으로 역시 한글교실과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이사로서 창립 무렵부터 함께 해오고 있습니다.”
나(인터뷰어)의 어머니도 6.25 전쟁통에 미처 못다 배운 한글을 푸른시민연대를 다니시며 완전히 익히셨으니 민병래 회원에게 따로 감사할 일이 생겼다.

 

2018년 6월 문화공간 갤러리에서 열린 ‘사진, 마포를 품다’에서 작품 해설중인 민병래 회원

 

민병래 회원은 푸른사람들 외에도 사진모임 ‘포피엔스’의 회원이다. 이 모임은 이재갑 사진작가와 함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을 추구하는 단체로 2017년 ‘마포, 한강을 품다’ 전시회에 민병래 회원도 참여했다. 본래 계획은 서울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서울의 25개 모든 구를 돌면서 각 구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작업할 계획이었지만 마포구 다음 작업에서 멈춘 상태라고 한다. 이재갑 작가는 군함도 등 일제강제동원 문제뿐 아니라 베트남전쟁,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묵직한 주제에 천착하는 훌륭한 작가이다.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난 셈이다.
2010년 연구소 후원회원이 되면서 인연을 맺은 민병래 회원은 2012년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에도 참가했다.

 

2012년 연구소 주최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 때 아들과 함께 기념촬영

 

“신흥무관학교 옛터 답사는 당시 중1이었던 아들과 함께 했던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좋았고 행복했습니다. 답사하면서 끝도 없는 옥수수밭에서 표지석 하나 제대로 없는 터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조국을 떠나 머나먼 천리만리 길, 말도 통하지 않고 지도도 없던 길을 용감히 나서 독립군 기지를 찾아갔던 그 기개와 열정에 머리 숙여지는 답사였습니다.

끝으로 연구소 후원회원님들에게 드리는 당부 말씀을 부탁했다.
“올해 가슴 아픈 일이 많았습니다. 지소미아에 대한 정부 태도나 정의기억연대에 대한 검찰의 수사, 백선엽이 현충원에 묻힌 일 등. 가야 할 길,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여전히 떠맡아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만 쳐다보고 있을 수만 없기에 우리 회원들이 해야 할 일을 의연하게 해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코로나19 위기를 잘 극복해 나가야겠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반드시 ‘사수만보’를 읽어보시라. 어쩌면 그 안에 우리들 아니 나를 바라보는 어떤 사람의 따뜻한 시선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따뜻한 시선을 통한 만 명의 이야기가 꼭 완성되어 우리들의 가슴 한켠을 뜨겁게 달구길 기대해 본다.

목, 2020/09/24-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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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3대 이사장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 선종

 

연구소 3대 이사장을 지낸 김병상 필립보 몬시뇰이 4월 25일 오전 0시 5분 향년 88세를 일기로 선
종했다. 몬시뇰은 주교품을 받지 않은 가톨릭 고위성직자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고인은 200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몬시뇰 칭호를 받았다. 고인은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으며,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위원장,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동일방직사건대책위원회 위원장, 인천 굴업도 핵폐기물처리장반대대책위원회 상임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인권 증진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2년 충남 공주군 유구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9년 사제로 서품했다. 1948년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과 폐결핵 투병으로 학업을 중단했고, 1963년 뒤늦게 가톨릭신학대에 들어갔다. 2008년 2월 별세한 조문기 이사장을 이어 2008년 7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연구소 이사장을 지내며 2009년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이후 친일수구세력의 준동과 공격을 막아내는 등 역사정의 실천운동에 앞장섰다. 김 몬시뇰은 2018년 12월 회고록 ‘따뜻한 동행’을 펴냈다. 사제가 되기까지 과정을 비롯해 한국현대사 한복판에서 겪은 역정(歷程)을 담았다.
정부는 ‘대한민국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 보호에 대한 공적’을 기려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으며 문재인 대통령도 SNS를 통해 “유신시기부터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준 민주화운동의 대부였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은 인천 서구 당하동 ‘하늘의 문 묘원’ 성직자 묘역에 잠들었다.

• 방학진 기획실장

화, 2020/05/2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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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3. 사마천으로서의 이병주

이병주를 작가가 되도록 만든 건 투옥인데, 감방에서 사마천을 만난 계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사기의 세계????라고 밝힌다. 필시 일본평론사(1943)나 문예춘추사(1959)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연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두 번째로 이병주가 역사와 만난 건 2차대전 중 일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이 발표되던 시기인 1966년 7월, 마르크 블로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 인물에 감동받아 「변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에 참가,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마술사>, 한길사, 81)
이 작품도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정작 이병주에게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은 역시 사마천이지만, 누가 봐도 사마천이 되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현실적인 데다 두뇌회전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역사 대하소설을 쓰면서 정치사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쥔 세력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치사적인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면서 이를 논증해 나가는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으며, 그 일련의 작품들은 마키아벨리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계열의 작품은 냉전체제의 반공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집권층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즐겨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일생을 마키아벨리즘으로 허송하기에는 그래도 진실을 보며 희생도 수용하라는 마르크 블로크의 충고는 물론 사마천의 영혼의 외침을 그는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마천의 사관으로서의 글쓰기로 돌아선 뒤부터의 작품은 권력의 피해자거나 수난자에 초점을 맞추며, 권력자일 경우에는 비판적 관점이 주류를 형성하게 배치한다.
어림 잡아보면 사마천의 관점으로 이병주가 선회한 것은 1982년 <그해 5월>부터가 아닐까싶다. 바로 박정희 피살(1979.10.26.) 이후부터 이병주는 참아왔던 비판의 해부도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게 옳은 것이다.
국가관이나 민족국가의 정통성보다는 현실정치적인 접근과 통치력의 실세를 중시했던 마키아벨리즘적인 단계의 시각과는 달리 사마천의 단계에서는 통치권력의 집행이 얼마나 역사적인 당위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시각으로 분석해낸다. 물론 이런 분석의 가치기준은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그해 5월>과 <‘그’를 버린 여인> 등을 들 수 있다. 현대사에 등장했던 역대 집권세력과 그 비판세력과 진보세력을 민족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싸잡아 야유에 가까운 비판을 가한 게 전반기의 마키아벨리즘 계열의 소설이었다면, 후반기 작품은 균형감각을 갖추고서 진지하게 논구해 들어가는 보고문학적 요소가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전기의 작품이 문학적인 형상화와 구성이 치밀한 데 비하여 후기 작품은 실록적 요소가 더 강화되는 한편 허구적인 사건은 거의 사라지며, 정론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작가의 연륜문제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정치적인 이해뿐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과거사 청산의 기초자료는 물론이고 처세술적인 읽을거리로도 손색이 없다고 평할 만하다.
<그해 5월>은 이병주의 현대사 5부 연작의 마지막 편에 속한다. ①일제 식민 말기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회색적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을 다룬 ????관부연락선????, ②같은 기간을 다루되 좌우의 이념적 변별성을 뚜렷하게 경계선으로 삼아 좌익 투사들의 입을 빌려 좌익을 비판하도록 만드는 빨치산 이야기인 <지리산>, ③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집권과정을 합리화한 <산하>, ④분파와 좌절로 얼룩진 것으로 평가절하한 좌익운동사의 르포 격인 <실록 남로당>까지가 마키아벨리즘적인 이병주의 현대사 연작들이다.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처음
으로 발효시킨 소설이 현대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⑤<그해 5월>이다. 이 소설은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개막된 드라마가 장장 18년을 끌다가 1979년 10월 26일 밤, 이윽고 그 막을 내렸다.
”라는 주인공 이사마가 1979년 10월 27일 일기장에 적은 기록처럼 박정희 통치 만 18년을 탐구대상으로 삼는다.
<사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각종 사료와 논평을 곁들여 엮는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은 차라리 ‘5·16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한 우수한 관찰자의 기초자료 모음집’ 같다.
여기서 연작 5부의 보너스나 부록 같은 작품 <‘그’를 버린 여인>이다. 이 소설은 박정희에게 두 번째 여인에 해당하는 특이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 박정희의 역사적인 삽화를 다루고 있다. 이병주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는 이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김재규가 “박정희의 가슴팍과 머리에다 대고 탄환을 쏘아넣은 사실”이란 점이라고 밝힌다.
“‘그’를 버린 그 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결단에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라는 게 작가의 인과응보식 역사의 변증법이다.

4. 이병주와 박정희의 첫 만남

부산의 명 일간지였던 <국제신보>의 상임논설위원으로 이병주가 영입(1958.11.5.)된 것은 전임자인 명 주필 황용주(黃龍珠)가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떠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영입과정에 대해서는 ① 이병주 자신은 ????국제신보????의 김형두 사장이 황용주에 대항할 만한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했고, ② 김형두의 회고로는 인물을 찾다가 “감탄을 불금케 했던 인물로 진주농고의 후배이면서 전 주필 H(황용주) 씨와는 동창 간으로 마산대학에 재직중인 사람”에다 “천하호걸이며 재사이자 소설가인 나림 이병주”(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 시대> 까치글방, 2013, 301쪽)였다고 했는데, 두 주장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병주는 희대의 명문으로 <국제신보> 주필(1959.7.1.)에 이어 편집국장 겸 주필(1959.9.25.)로
부산지역뿐이 아니라 전국적인 명 논설가로 명망을 누렸다. 이승만 독재시절이라 시국은 답답했으나 사설은 끗발 나가던 이 시기에 부산군수기자사령부 사령관(1960.1.21.~7.30 전라도 제1관구 사령관으로 전보)이었던 박정희를 이병주는 처음 만났다. 신도성 도지사가 경남도청 의회 회의실에서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던 자리였는데, 이병주는 <국제신보> 사장대리로 참석했던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얼마 전 여윈 몸집으로 작달막한 군인이 육군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색안경을 쓰고 가죽으로 된 말채찍을 든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 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도지사가 지정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회의장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획 하고 나가버렸다.
회의가 시작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호기심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도지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군인이 누구며 무슨 까닭으로 이곳까지 왔다가 불참하고 돌아간 이유가 뭐냐고.
신도성이 쓴 웃음을 띠고 한 대답을 요약하면, 그는 2관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인데 자리가 도지사석과는 먼 말석인 것이 불만이어서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 書堂, 1991, 90쪽. 이하 모든 인용문은 이 책) 그 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고조되자 4월 10일 전국비상계엄령이 내렸고,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맡은 박정희가 지역 기관장들을 소집해서 이병주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부산일보> 주필(황용주)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장군 곁으로 다가
가서 “아, 너 복세이키 아니야?”라고 하니 박 장군은 “음, 너 코류슈구나” 하며 서로 손을 붙들고 얘기를 주고받다가 황용주가 이병주를 불러 “이 사람이 박정희 장군이다. 나완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지. 그동안 소식을 몰랐더니만 20수 년 만에 만났구먼”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황용주는 역시 대구사범 동창으로 의사인 조증출과 함께 이병주도 동석시켜 어울렸는데,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박은 “이 주필, 이래 갖고 나라가 되겠소”라며, “이놈저놈 모두 썩어 빠졌어” “학생이면 데모를 해야지. 이왕 할 바엔 열심히 해야지”, “도대체 오열(간첩)이란 게 뭣고. 오열이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유당이 필요로 하겠다 싶으면 출동하는 모양이지? 국민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사람 죽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원!” 등등 “욕설과 비난을 섞은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이승만의 이름은 물론이고 어느 사람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4월혁명이 나자 박정희는 학생들이 쿠데타를 망쳤다고 투덜거렸다.
1960년 4월 27일자 <국제신보> 사설에 「이대통령의 비극! 그러나 조국의 운명과는 바꿀 수 없었다」라 하고는 그가 물러난 지금은 이승만의 공죄를 논할 시기 아니다, 학생들에 배척받는 이승만은 결코 적이 아니라며 동정론을 폈다. 물론 이병주가 쓴 글로 그의 한계가 엿보이는 내용이었다. 이걸 보면 나중 <지리산>과 <산하>, <남로당>에서 이승만을 추켜세운 이병주의 역사의식을 예단할 수 있다.
그 며칠 뒤 이병주가 황용주, 박정희와 만나자 박정희는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용주의 논단은 명쾌한데 이 주필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하던데요. 아마 이 주필은 정이 너무 많은것 아닙니까?”라고 이승만에 동정적인 걸 따지고 들었다. 이에 이병주는 “밉기도 한 영감이었지만 막상 떠나겠다고 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대요. 그 기분이 논리를 흐리멍덩하게 했을 겁니다.”라고 변명하니, 박은 “그거 안 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4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게 필주(筆誅)를 가해야 해요”라고 단호했다. 이에 이병주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거론하며 변명했으나 박정희는 “독립운동 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응대했다.
이어 박정희가 일본 청년장교들의 반역사건(5·15, 2·26 두 사건)을 거론하자 황용주는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라고 단칼에 비판했다. 이에 박은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항의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황이 “고루한 생각”이라고 하자 박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등등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이어졌다.

황 :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박 :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황 : 배워야 할 것은 기백이 아니고 도의감이다. 도의심의 뒷받침이 없는 기백은 야만이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3, 조선일보, 2001, 186~187쪽)

이 대화로 박정희의 역사의식이나 정치관과 민족관의 피상성과 밑천의 마각이 드러나고도 남는다. 그리고는 이내 5·16쿠데타가 닥쳤다. 쿠데타 직후 <국제신보>는 사설 「민주발전에의 획기적 대사업이 되도록 혁명군사위원회의 성의 있는 노력을 바란다」(1961.5.17.)로 군부의 행동을 환영했다. 마치 쿠데타 세력과 교감이라도 있었던 투라 해도 지나칠 건 없다. 그만큼 박정희-황용주-이병주 사이에는 주석에서 온갖 정치론을 다 펼쳤던 게 입증된 셈이다.
그 나흘 뒤 오후 5시, 경찰은 편집국에서 이병주를 연행했다. 경남도경 유치장에서 만난 이병주와 황용주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자? 우리는 도의혁명을 하자고 했는데 반공혁명이 뭐꼬?”(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 2013, 359쪽)라며 어리둥절했다.

5. 쿠데타 직후에 구속당한 이병주

여수순천 병란(1948) 때 군부 내의 남로계 관련자 명단을 넘겨줌으로써 극형을 모면한 트라우마가 박정희에게는 강하게 작용했다. 이 전력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자 쿠데타 세력은 좌익, 혁신정당, 교원노조, 각종 노조 지도자, 보도연맹원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
그래서 4천여 명 구금, 608명 혁명검찰부 회부, 216명 기소, 190명 유죄판결을 내렸다. 자유당 때 사형언도자 중 미집행 백여 명은 일거에 처형시켰다.
“박정희는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의혹을 받자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자신의 면죄부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김삼웅, <한국 현대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황용주는 한달 만에 풀려났으나 이병주는 ‘특수범죄처벌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기소됐다.
정당 사회단체 간부로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에게 10년 이상 사형이었던 이 법. 그런데 이병주가 뒤집어쓴 ‘교원노조 고문’ 직함이 기록도 증언도 없자 논설위원 3명을 더 연행했다.
한편 경찰 공작반에서는 앞잡이를 시켜 남로당 재건운동을 탐색 중 한 청년이 걸려들었다. 이런 것도 모른 채 이병주는 경찰이 내사 중인 바로 그 청년의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식은 1961년 5월 22일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일망타진해 남로당 재건 공범으로 엮을 계획이었는데 공작반의 내막을 모르던 다른 부서에서 하루 전인 21일 이병주를 신문사에서 덜컥 체포해버렸다.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병주는 필화로 내몰렸다. 연행된 동료 논설위원 중 변노섭(1930~2005)은 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원회 무임소 상임위원으로 날카로운 논설 필자였기에 이병주와 공범으로 엮였다.(<그해 5월>, 한길사) “그런데 술친구였던 박 대통령이 자기를 2년 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잡혔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원한이 사무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에는 예를 들어 <‘그’를 버린 여인>에서처럼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
다. ”(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하우스. 2014, 54쪽)
바로 이병주가 마키아벨리에서 사마천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관으로 쓴 두 편의 소설은 우리 시대 정치소설로서는 최고봉을 형성하고 있다.
(2015년 이병주 심포지엄 발제 및 여러 강연을 간추려 재정리한 글로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에 수록)

화, 2020/05/26-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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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들, 조선통신사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다

조영숙 도쿄지회 총무

2019년 11월 10일 오오타(大田)민단 주최의 역사탐방 여행으로 시즈오카의 淸見寺를 찾았다. 날씨가 너무 화창해 후지산도 멋지게 보였고, 마침 이날이 일본의 새 천황 즉위 퍼레이드가 있는 날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여행했다.
올해는 무오독립선, 2·8독립선언, 3·1혁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뜻깊은 해이다. 그야말로 선열님들의 해이다. 선열님들의 뜻을 이어받아 동북아 평화를 만들어 나가야 할 뜻깊은 올해에 불행하게도 한일관계는 최악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그 옛날, 양국은 원한과 불신의 상처를 딛고 조선통신사를 통해 평화와 교류의 역사를 200여 년간 이어왔다. 한일관계의 틈새에 끼어 살고있는 우리 재일동포들이 어찌 그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그리워하고 다시 새겨보고 싶지 않겠는가?(조선통신사와 관련한 여러 유물들이 한일 두 나라의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 2018년 유네스코의‘세계기억유산’에 등록되었다.)
淸見寺에 도착하여 안내 설명을 듣다가 우리 일행 모두가 깜짝 놀랐다. 2019년 7월 7일자 동경신문 기사의 복사본을 배부받았는데, 그 기사 내용에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가을에 일본을 방문하여 淸見寺에서 아베 수상을 만날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다.(2018년은 양국의 문화교류를 강조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수상이 함께 발표한 ‘한일관계 파트너십 선언’ 20주년이 되던 해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고, 이후 강제징용문제, 수출규제 강화문제, 지소미아문제 등으로 한일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동경신문은 이 어려운 한일관계에 국민들의 대립감정을 진정시키고 대화를 통해 길을 찾기 바란다며 꿈으로 끝난 淸見寺에서의 한일 정상의 만남을 다시 꿈꾼다며 글을 맺고 있다.
두 정상의 만남을 가장 간절히 바라는 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한일 두 나라가 갈등하면 몇 배가 더 아프고 두 나라가 잘 지내면 평안하게 꽃피는 존재가 바로 재일동포들이다.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은 일제시대 살길을 찾아 건너온 동포들의 후손으로부터 뉴카마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조선통신사가 머문 淸見寺를 찾아가는 날도 이런 다양한 재일동포들과 일본인도 함께 했다.
조선통신사는 처음엔 두 나라의 정치적인 목적이 우선이었다고 한다. 조선측에선 조선포로 귀환, 일본정세 파악 등이었고 일본측에선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새로운 외교방침, 국내정치적 목적이 중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엔 문화교류로 확대 발전되어 조선의 선진문물이 일본에 많이 전해졌고 일본 문화도 조선에 전해지는 무지개 가교였다. 마침 그날 여행에서 출출할 때 먹으려고 고구마를 삶아 가져갔다. 고구마는 일본에서 조선으로 전해진 작물로 많은 백성들을 굶주림에서 구해낸 구황작물이 되었다.
한편 조선의 선진문물 중에서 일본에 전해진 것 중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다. 허준의 <동의보감> 속의 의술이 일본에 전해져 많은 일본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귀한 역할을 했다. 그 귀한 역할을 이 시대 재일동포에게 해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사회를 일본인들과 함께 만들며 공생하는 재일동포들, 그러나 재일동포 문제가 한일협정 때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채 동포들은 일본사회에서 차별받고 한편 조국의 버림 속에서 살아왔다.
몇 겹의 고통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 동포들이 이제 노령을 맞아 몸의 여기저기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조선통신사의 ‘동의보감’이 이 시대 재일동포들에게 빛과 힘이 되어주기를 희망해본다.(<동의보감>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꿈으로 끝난 한일정상회담이 다시 열려야 한다. 그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는 작년 오오타민단에서 역사탐방을 간 ‘고마진자(高麗神社)’ 쯤이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곳은 고대 양국간의 풍요로운 교류가 있었음을 증거하는 곳이다.
꽁꽁 묶인 한일관계가 부디 잘 풀리기를 기원하면서 내년의 역사탐방은 좀더 재일의 뿌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오오타민단 지부에 전한다.
• 이 감상문은 오오타민단 소식지 제85호(2020.3.27.)에 간략히 실렸다.

화, 2020/05/26-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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