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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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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익명 (미확인) | 수, 2018/08/2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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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한 어린이가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국내에서 처음으로 일제강점기 역사에만 초점을 맞춘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에서 문을 열었다. 2011년 2월 박물관 건립위원회가 출범한 지 약 8년 만의 개관으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기부와 시민들의 모금으로 건립된 민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등 시민단체와 학계 등이 중심이 돼 민간 차원에서 추진돼 왔다.

송기인 초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이 재직 2년간 받은 급여 2억원을 전액 기탁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인 건립이 추진됐다. 이후 초등학생들부터 학계, 시민사회 인사들까지 1만여명의 시민이 건립운동에 참여해 16억5000만원의 건립 기금을 조성했다. 독립운동가 후손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자료와 기금을 보내는 등 건립운동에 동참했다. 일본의 과거사 관련 시민단체들과 학계 인사들 역시 1억원이 넘는 기금을 보냈다.

박물관에 전시된 상당수 자료들은 독립운동가 후손 등 시민들이 기증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조경한 선생의 외손 심정섭 선생이 68차례에 걸쳐 6000점이 넘는 자료를 보내 왔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도 희생자들의 한이 서려있는 유품을 박물관에 보냈다.

박물관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과정에서 축적한 자료 등을 포함해 총 7만여점의 자료와 5만여권의 도서가 수집됐다. 이 중 엄선한 일부가 박물관에 전시되고 나머지는 보관해 관리한다.

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은 일제의 한반도 침략부터 식민 통치와 수탈, 친일파와 항일 운동,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 역사를 담은 총 4부의 전시로 구성됐다. 강제병합 당시 순종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3·1독립선언서 초판본,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훈장과 유품 등 희귀한 자료가 전시됐다. 박물관은 향후 소장자료를 활용해 전시는 물론 교육교재와 역사문화 강좌, 답사 프로그램도 마련할 계획이다.

박물관은 서울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세워졌다. 박물관 관계자는 “남산과 용산 일대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식민통치의 본산이 자리 잡고 있었고, 해방 이후에는 독립운동 선열의 묘역이 효창원에 들어섰다”면서 “식민지역사박물관이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고 가꿔나가는 역사문화벨트의 중심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이화 박물관 건립위원회 집행위원장은 이날 개관식에서 “1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건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역사문화운동을 통해 박물관이 개관했다”며 “단순한 자료 전시에만 집착하지 않고 시민과 청소년들이 대화하고 소통하는 열린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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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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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108주년인 29일 서울 용산구에 개관한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시민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 권도현 기자 [email protected]

선명수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경향신문

☞기사원문: 시민과 독립운동가 후손이 만든 ‘아픈 역사를 배우는 박물관’ 식민지역사박물관 용산에 개관

※관련기사

☞연합뉴스: ‘아픈 역사 한눈에’ 식민지역사박물관, 경술국치일 맞춰 개관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 열어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경술국치 108주년인 8월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을 열었다. 박물관에는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정확히 기록한 사료와 전시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효창원 인근에 자리잡은 박물관의 규모는 지하 1층부터 지상 5층까지 연면적 1500여㎡에 이른다. 박물관에는 기획전시실과 상설전시실, 서고와 수장고, 연구실 등을 갖췄다.

전시실에 보관된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을 증언하는 사료들 중 일부를 모아본다.

1. 순종황제의 칙유와 데라우치 통감의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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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이 국권을 넘긴다고 밝힌 칙유로 석판 인쇄된 원본이다. “국권을 내가 믿고 의지하는 이웃 나라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긴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조선 1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하면서 시정방침을 밝힌 포고문에는 “전 한국원수의 희망에 응하여 그 통치권 양여를 수락한다”고 쓰여 있어 조약 체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김정효 기자

2. 을사오적 권중현이 받은 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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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사오적 중 1인인 권중현이 한국 병합을 기념해 받은 메달과 증서이다. 권중현은 1907년 1월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밝힌 고종황제의 친서가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직후 ‘을사오적’의 암살을 기도한 나인영 오기호 등에게 저격당했으나 목숨은 잃지 않았다. 강제병합 뒤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920년까지 10년간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김정효 기자

3 조선총독부 폐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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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부 문관들이 착용하는 칼. 직급과 상관없이 모두 제복에 칼을 착용하도록 하여 조선인들에게 총독부 관리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했다. 칼자루와 칼집에 ‘오동 문양’이 한 개씩 새겨진 것으로 보아 ‘주임관’이 사용한 폐검이다. 손잡이는 상어 가죽을 입혔다. 김정효 기자

4. 천인침과 군 위문품 속조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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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인침은 참전한 사람이 무사하기를 빌며 1미터 정도 길이의 흰 천에 붉은 실로 여성 천 명이 한 땀씩 꿰매어 만든 일종의 부적이다. 천인침은 부적과 같이 배에 두르거나 모자에 꿰메어 다녔다. 아래 속조끼는 부산공립고등여학교 2학년생 야마구치 사치코가 ‘무운장구’라고 쓴 미나미 조선총덕의 글씨와 일종의 호신부로 조선신궁의 도장을 찍은 천을 덧대어 만든 속조끼이다. 조선군사후원연맹이 학생들이 만든 것을 모아 군인에게 위문품으로 보냈다. 김정효 기자

5. 궁성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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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마다 ‘천황’ 있는 동쪽을 향해 의무적으로 절(궁성요배)을 해야 했던 당시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다. 김정효 기자

6.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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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바 부대보병 제6사단 등이 1937년 7월에서 1938년 11월까지의 중일전쟁 전투일지를 기록한 일장기이다. 히노마루 안에 난징과 한커우를 점령한 날짜가 정확히 적혀 있다. 남경대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정이 눈에 띈다. 김정효 기자

7. 특별지원병 이은휘의 장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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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행기는 청년들이 죽으러 나갈 때 앞세운 깃발이라고 해서 ‘청춘만장’이라고 불렸다. 이 깃발에는 “축 육군병지원자훈련소입소 궁분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초면 제남부락 연맹”이라고 쓰여있다. 이은휘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사실상 강제로 지원병으로 끌려갔다. 당시 임신 8개월이었던 아내를 두고 그는 결국 1944년 7월 11일 남태평양 파푸아뉴기니 라바울에서 전사했다. 아래는 당시 일본군 육군 병사가 사용한 군복과 철모 수통 등 군장이다. 김정효 기자

김정효 기자 [email protected]

<2018-08-29> 한겨레

☞기사원문: [포토] 경술국치일에 돌아보는 일제 만행의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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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회부는 지난 3월 1일 3.1운동 102주년을 맞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명단과, 그들의 적나라한 반민족 행위를 담은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해 보도했다.

간도참변은 1920~21년 일제가 봉오동·청산리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지역 한국인과 독립운동가를 다수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공적’이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학계를 포함해서도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입장에서 이들 48명은 충실한 하수인이지만, 우리에게는 동족 학살에 가담한 반역자다.

48명의 한국인 경찰관들의 역할은 다양했다. 첩보 수집,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 회유 등만이 아니라 직접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했다.


[연관기사]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 100년 전 민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KBS는 외부 전문가들과 함께 사료 발굴을 기초로 한 탐사보도를 꾸준히 해왔고, 삼일절이나 광복절 등 시의성이 있을 때마다 단독 보도를 계속해 왔다. 이번 자료 역시 이런 꾸준한 추적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다.

KBS는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 일본 외무성(우리나라 외교부에 해당) 산하 자료실 ‘외교사료관’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과 관련된 고문서 다수를 복사해왔다.

이후 전문가들과 함께 해당 문서들에 대한 번역과 검토 작업이 꾸준히 이뤄졌고, 지난해 가을,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자료를 추려낼 수 있었다. 정확히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일제가 이들의 공적을 결재한 문서였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외부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추가 취재에 돌입했고, 본격적인 분석 작업을 통해 3.1절에 맞춰 보도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수록된 조선인 경찰관 9명. 순사 우경태, 구봉서, 김종섭, 백창돈, 김배인, 장국환, 김영후, 성빈, 서상순은 종군기장(일제가 전쟁에 참여한 군인, 경찰 등에 수여하는 상훈 중 하나)을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 KBS 발굴 자료에 보훈처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

보도 이후 남은 과제는 크게 2가지다. ▲문서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인정할 것인가의 여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고위 경찰관들의 친일 이력을 병기할 것인가다.

먼저 한국인 경찰관들로부터 체포를 당한 독립운동가들의 유공을 심사하는 문제다. 이번에 발굴한 문서에는 간도참변 과정에서 체포된 한국인이 17명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유공을 인정받고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KBS 보도 이후 국가보훈처는 해당 자료를 제공해달라고 KBS에 요청했고 취재진은 이에 협조했다. 보훈처는 “자료를 분석해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독립유공자 강우범 선생(이명: 강구우)의 추가 독립운동 행적을 추정할 만한 내용이 자료에 등장한 것과 관련해서도, 보훈처는 “인적사항 및 활동내용 등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진행해 동일인이 확인될 경우 공훈록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 경찰, 역대 기관장 친일 이력 전수조사…”왜 이리 소극적인지”

또 다른 과제는 친일 이력이 있는 고위 경찰관들의 이력 처리 문제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린 역대 청장과 서장 70여 명(중복 포함)을 확인해 보도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친일 이력에 대한 병기 또는 언급 없이 재직 사실만 기재돼 있었다.

KBS의 보도 이후 경찰은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역대 경찰 기관장 명단 간 대조 작업에 착수했다.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와 관련해 경찰은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 기준에 따라 공통 적용할 사안”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기도는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이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그 사실을 병기하고 있다.

경찰은 또 1949년 6월 6일 경찰이 친일파 조사를 위한 헌법기구였던 반민특위를 습격한 사건과 관련해서도 “지난해 말 출범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라 경찰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경찰의 입장에 대해 역사단체들은 대체로 아쉽다는 반응이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일제강점기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고, 그 당시 조선인 친인 경찰은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다”며 “해방 후 대한민국 경찰이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 데 왜 이렇게 소극적인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청사 안에 세우며 과거사 청산 의지를 다졌다.

이후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 다시 말해 자신들의 ‘그늘’에 대해선 뚜렷한 입장 표명을 미루고 있고 청산 작업의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0> KBS 

☞기사원문: [취재후] 동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일, 2021/03/21-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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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00년 전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이른바 ‘간도참변’ 당시, 일제에 협력해 동족을 학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 그리고 이때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KBS가 최초 발굴해 보도해 드렸는데요.

보훈처가 이 자료를 제공받아 독립유공자 발굴에 활용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경찰도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이력을 전수 조사하기로 했는데,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문제에 대해선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송락규 기잡니다.

[리포트]

100년 전 일본이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민간인들을 학살한 간도 참변.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차출돼 학살 현장에 가담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이름과 공적을 기록했습니다.

간도에 파견된 한국인 경찰들은 무봉촌과 의봉촌 등 간도지역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하는가 하면, 장암촌 부근을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을 조사하고 가택 수사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간도참변 당시 한국인 경찰관에 의해 체포된 독립운동가는 17명.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인정된 사람은 4명뿐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KBS 보도 이후 자료를 제공받은 국가보훈처는 자료 분석 결과를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해 독립유공자 발굴과 공적 검증에 활용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조사를 해서 발굴하는 사업들을 반드시 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경찰도 조치에 들어갔습니다.

70여 명의 역대 청장, 서장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는 KBS의 보도와 관련해 역대 기관장들의 친일 이력을 전수 조사하고 있습니다.

다만 친일 이력을 병기하는 것에 대해선 정부 부처 전체가 동일한 기준으로 적용해야 할 사안이라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습니다.

해방 뒤 친일파 처벌을 위해 구성된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에 대해서도 나중에 공식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일제강점기의 경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기구였거든요. 해방 후에 대한민국 경찰이 조선인 친일 경찰을 청산하자는데 무슨 이유에서 이렇게 소극적인지…”]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지만, 친일 역사에 대한 성찰 노력은 여전히 더디기만 합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영상편집:이재연/그래픽:최창준

송락규 기자 ([email protected])

<2021-02-23> KBS 

☞기사원문: 보훈처 “간도참변 유공자 발굴”…경찰 과거사 반성 또 미루나?

※관련기사

☞KBS: [취재후] 동족학살 가담한 한국인 경찰, 어떻게 발굴했나?

☞KBS: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화, 2021/03/2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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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뭐하니] Ep.2 어서와 식민지역사박물관은 처음이지? ① 미션찾기

※관련영상 

유투브: [박물관은 뭐하니] 인턴편 Ep.1 인턴은 뭐하니 VLOG 

목, 2021/03/25- 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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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마지막 비시급 전범’ 이학래 회장 별세

‘한국인 BC급 전범’ 피해자 고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2013년 11월 모습. 뒷쪽 사진 맨뒷줄 오른쪽에서 둘째가 ‘전범’ 수감 시절의 이 회장이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17살 때 ‘콰이강의 다리’ 포로감시원
일제 패망뒤 연합군 재판 ‘사형선고’
전후 일본 국적 박탈해 보훈도 제외

55년 70여명 동진회 결성 ‘보상’ 요구
65년 ‘한·일협정’ 구실로 ‘창구’ 닫아
91년부터 법정 투쟁 99년 최종 패소
지난해까지 의회 상대로 ‘입법’ 촉구

“슬픈 소식을 전해야겠습니다.” ‘마지막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이학래 동진회 회장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는 짤막한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샛바람 문고’를 운영하는 후지이 고노스케는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이 회장이 이날 오후 숨졌다고 밝혔다. 향년 96.

“이학래상이 지난 26일 자택에서 넘어져 머리를 부딪히고 다리가 부러져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치료의 보람도 없이 28일 오후 2시10분 숨졌습니다. 학래상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먼저 숨진 동료들을 생각하고 (비시급 전범들을 구제하기 위한) 입법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베 신조 정권이 힘으로 입법화를 가로막았습니다.”

후지이의 설명대로, 조선인 비시급 전범 이학래의 일생은 부당한 일본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1925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3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봄 면장에게서 갑작스런 호출을 받았다.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데, 자네가 가소!” 근무 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고 했다. 17살 소년은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머잖아 시행될 징집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1942년 8월19일 부산에서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일제가 패망하면서 연합국 포로를 학대한 죄로 오스트레일리아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고통스런 삶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동남아시아 전선에서 파죽지세의 승리를 거듭했다. 일본 정부는 이 과정에서 발생한 수십만명에 이르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조선인 청년들(3012명)을 동원했다. 이학래가 배치된 타이에서 일본군은 충분한 식량·의약품·의복도 지급하지 않은 채 포로들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했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1957)로 유명해진 태면철도(타이~미안마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는 작업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철로를 내는 난공사가 이어진 탓에 수많은 포로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과정에서 포로감시원 이학래는 일본군 공병대가 요구하는 노역 인원을 맞추려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관 어네스트 던롭 중령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전쟁이 끝난 뒤 ‘전범’이란 무시무시한 낙인이 찍히게 된 이유다.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최말단에서 그처럼 ‘도구’로 사용됐던 조선인 포로감시원 129명은 연합군의 전범재판에서 포로학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가운데 14명은 사형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가까스로 감형된 탓에 죽음을 면했지만, 곧바로 사회의 냉혹한 시선과 마주해야 했다. 조국은 이들을 ‘친일파’라 매도했고, 일본은 ‘전범’이라 멸시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의 발효로 일본 국적이 박탈되자, 일본 정부는 이들을 원호법·은급법 등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 과정에서 허영(1955년)·양월성(1956년) 등 두 명이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조선인 비시급 전범 70여명은 1955년 4월 자치 모임인 동진회를 결성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5년 6월 한-일 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한-일 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됐다며 대화 창구를 닫아버리고 만다. 이 회장은 “전범일 땐 일본인이고, 보상할 땐 조선인이라 하느냐”며 가슴을 쳤다.

이 회장과 동료들은 법정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91년 11월12일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기한 소송은 무려 5년을 끌었다. 1996년 9월9일 판결에서 재판부는 보상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는 국가의 입법 정책에 속하는 문제”라며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이 기조는 고등재판소 판결(1998년 7월13일)과 최고재판소 판결(1999년 12월20일)까지 이어졌다. 좌절이 이어질 때마다 이 회장은 “같은 어려움을 당했던 동무들은 모두 죽었다. 가장 젊은 나만 살아 남았다”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짧게나마 문제 해결의 빛이 보인 것은 야당이던 일본 민주당이 2008년 5월 피해자 한 사람당 300만엔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만든 뒤였다. 사실 택시업으로 성공한 이 회장에게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예상대로 법안은 대다수 의원들의 무관심 탓에 폐기됐고, 여당이 된 민주당은 이들의 고통에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고 이학래 회장이 2013년 11월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1951년 촬영 아우트램 형무소 구금 전범 사진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다. 박종식 기자 [email protected]

한-일 국교정상화 50돌을 맞은 2015년 4월 일본 국회에서 만난 기자에게 구순의 이 회장은 “올해엔 꼭 이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울먹이듯 말했다. 2017년에는 <전범이 된 조선청년>(민족문제연구소 펴냄) 회고록를 통해 “일본 정부는 자신의 부조리를 시정하고, 입법을 촉구하는 사법부의 견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입법 조치를 조속히 강구”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2월 도쿄도 니시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석해 다시금 입법을 촉구했지만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정기국회에 관련 법안이 제출되지도 못했다.

그렇게 한-일 관계가 최악의 수준으로 악화되며 허무하게 세월은 흘렀고, 그는 끝내 한을 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길윤형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29> 한겨레

☞기사원문: ‘전범이 된 조선청년’ 한맺힌 65년 투쟁 빈손으로 떠나다

화, 2021/03/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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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충남천안 ‘독립운동’ 주도하다 죽은 김구응 열사, 그의 모 최정철 열사 ‘추모비 제막식’

▲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안에 있는 만세운동 동상 속의 최정철·김구응 모자(母子) 상, 아우내장터 만세 시위 중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진 아들을 끓어 안고 일본 순사를 호통치다 어머니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 이윤옥

지난 1일 찾은 충남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의 모자(母子) 무덤에서는 102년 전, 아우내장터의 만세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천안 아우내장터 독립만세운동 주동자인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이었다. 뜻깊은 날을 기려, 무덤 주변에서는 과거 천안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최정철(1995, 애국장), 김구응(1991, 애국장) 열사 모자의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흔히 아우내 만세운동이라고 하면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지만, 102년 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순사의 총검에 의해 현장에서 순국의 길을 걸은 모자(母子)가 있다. 바로 어머니(최정철, 당시 66세)와 아들(김구응, 당시 32세)이 그분들이다. 한날한시에 목숨을 잃은 모자는 가전리 산 8-6번지에 묻힌 채, 지난 100여 년간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과거 어떤 일 벌어졌나 보니… ‘독립선언’ 하려 모인 6400명, 일본군과 맞서다

“천안군 병천시장에서 의사(義士) 김구응이 남녀 6400명을 소집하여 독립선언을 할 때 일본헌병(일경)이 조선인의 기수(旗手, 행사 때 대열의 앞에 서서 기를 드는 일을 맡은 사람, 곧 조선인들)를 해치고자 했다. 조선인들은 맨손으로 이를 막느라 피가 낭자했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이들의 복부를 칼로 찔러 죽음에 이르게 하는지라, 김구응이 일본 헌병의 잔인무도함을 꾸짖자 돌연 총구를 김구응에게 돌려 그 자리에서 즉사케 했다. 김구응은 머리를 맞아 순국했으나 일본 헌병은 사지(四肢)를 칼로 난도질했다. 이때 김구응의 노모(최정철 지사)가 일본 헌병을 향해 크게 질책하자 노모마저 찔러 죽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김병조 지음, 1920.6, 국한문혼용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번역함, 76쪽.)

이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난 바로 이듬해에 김병조 선생이 상해에서 펴낸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병조 선생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으로, 상해에서 임시정부에 관여하면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0년 6월 <한국독립운동사략(韓國獨立運動史略)>을 지었다.

▲ 추모비 제막식에 앞선 고유제 천안, 가전리 최정철 열사 무덤에서 유족들이 추모비 제막식에 앞서 고유제를 지내는 모습 ⓒ 이윤옥

한편, 이 책과 같은 해에 나온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상해)에서도 천안 아우내장터의 주모자(主謀者)를 김구응(金九應) 의사로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따끈따끈한 기록이 이 두 역사책이다.

천안역사문화연구회에서는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조명하고자 지난해에 이어 올해 제2회째로 아우내 문화제를 열었다. 지난 1일 열린 ‘최정철·김구응 추모비 제막식’은, 이런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의 한 고리로 추진된 것이다.

‘제2회 아우내 41문화제’는 천안역사문화연구회, 민족문제연구소 천안지회, 성공회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유족회 주최로 열린 행사로 오전 10시에 시작된 아우내 4.1혁명의길 걷기를 시작으로 오후 2시에는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최정철·김구응 열사 별세 성찬 추모 미사가 열렸다

▲ 성공회 병천교회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천안 아우내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열린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 미사 모습 ⓒ 이윤옥

성공회 병천교회는 당시 진명여학교를 만들어 민족교육을 실시하던 곳으로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깊이 관여한 교회다. 이 학교 교사였던 김구응(32세) 열사는 4월 1일, 교인들과 지역유지, 젊은 청년, 학생들을 이끌고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어머니 최정철(66세) 열사 역시 성공회 병천교회 신자로서 여성들이 대거 만세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끈 인물이다.

“사실 성공회 병천교회에 부임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천안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와서 보니 이 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여학교가 아우내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구응 열사께서 활약하신 무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최정철·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 별세 성찬례를 통해 일제 만행을 기억하며 선조들의 독립정신이 큰나무 가지가 되어 뻗어 나가길 빕니다.”

이는 대한성공회 대전교구 병천교회 관할 사제 장동윤(미카엘) 신부의 설교의 한 대목이다. 추모 미사를 마치고 오후 4시부터는 병천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최정철·김구응 무덤에서 추모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오후 4시, 가전리 산 8-6번지, 최정철·김구응 열사 무덤에는 추모비 개막식을 알리는 주홍빛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최정철 열사의 무덤은 윗자리에, 아드님 김구응 열사의 무덤은 아랫자리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번에 조성한 추모비는 김구응 열사 무덤 옆에 세웠다.

“오늘 이렇게 증조할머님(최정철 열사), 할아버님(김구응 열사) 순국 102주년을 맞아 시비 제막식에 찾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 말씀 올립니다. 두 분께서 목숨 바쳐 순국으로 지켜오신 나라를 위해 앞으로도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김운식(73세, 최정철·김운식 열사의 유족대표) 선생은 목이 멘 듯 말했다.

“부끄럽게도 아우내에 오래 살고 있었지만 이 두 분의 존재를 잘 몰랐기에 더욱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앞으로 자랑스러운 아우내의 독립운동가 최정철·김구응 열사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해 손자들에게 들려주겠습니다. 아우내 시내에 내걸린 펼침막을 보고 추모 미사에 참석하였고, 무덤까지 와 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아우내 시내에 산다는 지역주민 이수민(47)씨는 기자와 만나 연신 부끄럽다고 했다.

▲ 최정철·김구응 열사 추모비 제막식 최정철·김구응 열사 추모비 제막식 모습 ⓒ 이윤옥
▲ 최정철·김구응 추모비 최정철·김구응 열사 추모비 ⓒ 이윤옥

일제에 목숨 잃었지만… 이름 석자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 추모비에 새겨진 시는 기자가 쓴 것이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추적하여 헌시(獻詩)를 쓰고 그 일생을 기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몇 해 전, 여성독립운동가 최정철 열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취재 과정에서 이들이 아우내장터의 주동자였다는 사실과 이 지역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바친 수많은 선열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면서 안타깝게 느낀 것은 바로 최정철·김구응 열사 같은 분들처럼 역사의 조명에서 비껴간 인물들이다. 일제 침략기에 목숨까지 던지면서 순국의 길을 걸었지만 그 이름 석 자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것은 슬프고 쓸쓸하고 비극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제(4월 1일), 무덤가에서 기자는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 이곳에 모였던 사람들 역시 그랬으리라. 참석자들은 추모비 제막을 마치고, 최정철·김구응 열사의 이름을 부르며 만세를 불렀다. 102년 만에 가전리 무덤가에서 울려 퍼진 만세 함성에 아마 최정철·김구응 열사께서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한 만세 추모비 제막식을 마치고 참석자들이 아우내만세운동 주동자 최정철·김구응 열사를 위해 만세를 불렀다 ⓒ 이윤옥

유난히 붉어 보였던, 활짝 핀 진달래 꽃잎 속에 어머님(최정철)과 아드님(김구응) 열사의 화사한 미소가 겹쳐 보였다. 기쁜 날이었다.

<2021-04-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총칼에 죽은 모자, 102년 뒤 세워진 추모비

토, 2021/04/03-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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